소설리스트

Chapter 5. 딸기 타르트와 악마의 음료 (6/41)

Chapter 5. 딸기 타르트와 악마의 음료

“아가씨, 또 타르트가 왔어요.”

유모의 말에 칼리오페가 읽던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또? 어디서 보냈어?”

“로아힌 가에서 보내셨어요.”

예상하긴 했지만 서모나 가의 피크닉에 참석한 가문이다.

“이번에두 딸기 타르트야?”

“네. 아무래도 딸기가 제철이니까요.”

‘……그 이유가 아닐 텐데.’

유모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대신 칼리오페는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대체 몇 개째인지 모르겠다.

피크닉에 다녀온 다음날부터 줄줄이 딸기 타르트가 도착했다.

처음에는 웬 타르트지, 하고 고개를 갸웃했지만 두 개째가 되자 뭔지 짐작이 갔다.

[이로케! 커다란 딸기 타르트였는데, 달콤하구 촉촉하구 바삭했어요!]

피크닉에서 나눗셈을 설명하면서 지레 찔려서 로베르트 흉내를 냈던 게 원인이다.

다시 떠올려도 창피한 기억에 칼리오페는 얼굴을 붉혔다.

유모가 상자를 열어 타르트를 보여줬다. 그와 동시에 고소한 버터향과 신선한 우유향이 확 퍼졌다.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근사한 타르트였다. 어찌나 딸기를 잔뜩 올렸는지 그 밑의 커스터드 크림이 안 보일 정도다. 딸기 위에는 블랙 커런트와 블루베리, 라즈베리를 아낌없이 뿌렸고 왕관 모양 타르트지는 황금빛이었다.

유모는 칼리오페의 볼이 살짝 부풀어 오르는 걸 놓치지 않았다.

‘달콤한 걸 좋아하지 않는 척하지만 얼굴에 다 티 난다니까.’

유모가 흐뭇한 얼굴로 물었다.

“지금 바로 드실래요?”

칼리오페는 고개를 저으며 상자 뚜껑을 닫았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끝까지 타르트를 향해 있다.

“아니야. 먼저 받은 것들두 먹지 못했는걸.”

사실 처음 받은 타르트 빼고는 손도 못 댔다. 그제 피크닉을 다녀오고 어제, 오늘 도착한 타르트 수만 해도 벌써 두 손가락에 꼽는다.

“너무 많이 받아서 다 먹지 못할 텐데……. 얼려 놓을까요?”

칼리오페는 고개를 저었다.

맛을 보존한 채 얼리고 해동하는 것도 일이다. 주방에서는 새 파이를 만드는 걸 훨씬 기꺼워할 것이다.

“저택 사람들이랑 나눠 먹으면 되지.”

고급 버터를 잔뜩 쓰고 과육이 실한 딸기를 잔뜩 얹은 타르트는 고용인들이 쉽게 즐기기 어렵다.

“어머나, 다들 좋아하겠네요.”

상자 뚜껑이 완전히 닫혀서 안 보일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던 것이 바로 전인데 야무지게 다른 사람들과 나눠 먹겠다고 한다. 세상에 어느 다섯 살 아이가 이럴까 싶어서 유모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스몄다.

“그럼 로아힌 가에두 감사 편지를 써야겠다.”

보통 연락은 전보로, 급하고 비싼 연락은 통신석으로 하지만 감사나 축하 같은 경우는 옛날처럼 편지로 했다. 전통과 격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보수적인 상위 귀족일수록 편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편지지를 준비할게요. 흰색이죠?”

“응.”

루스티첼 가의 상징은 새하얀 날개를 단, 새하얀 검이다. 그래서 루스티첼 가는 하얀색을 상징처럼 여겼다.

문장에 흰색이 들어가는 가문은 꽤 되지만 제국의 어느 가문도 흰 날개를 달지 않았다. 흰 날개는 루스티첼 가의 시조와 관련되어 있다. 다른 가문들은 루스티첼의 신화를 존중해 상징에 흰 날개를 넣는 것을 피했다.

‘오래 전에 가문의 세가 강했을 때 눈치껏 피해갔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짤따란 손이 앙당그레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글씨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 아가씬 글씨도 잘 쓰시지!”

유모가 다 쓴 편지지를 들고 흐뭇하게 웃었다.

칼리오페의 얼굴이 발긋해졌다. 칭찬받은 게 수줍어서 열이 오른 건 절대 아니다.

‘아무리 봐도 절대적으로 못 썼는데……!’

어린 칼리오페는 악필이었다.

전생에서 칼리오페는 교양 있는 레이디답게 명필이었다. 그때와 비교해서 못 쓴 게 아니다.

그냥 못 썼다.

삐뚤빼뚤한 데다가 크기와 굵기마저 오락가락하는 글씨를 보고 유모가 달콤한 한숨을 내쉬었다.

‘저게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이라는 게 무서워.’

칼리오페는 편지지를 채가고 싶은 것을 참았다. 이미 첫 번째 감사 편지를 썼을 때부터 겪은 일이다.

‘역시 대필을 맡기는 게 좋은가……. 아니지.’

대필이 예의에 어긋나는 건 아니다. 특히 칼리오페는 아직 어린아이. 예법이 어떻고를 따질 것도 없다.

‘내게 호의를 가지고 선물한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고 싶으니까.’

한 번 삶을 겪어 달라지긴 했지만 칼리오페는 루스티첼 백작을 닮아 고지식한 면이 있었다. 진심에는 정성이 들어가는 법이고, 대필보다 친필에 더 정성이 담긴 건 당연한 이치다.

‘……의도는 좋은데 못 알아보면 어쩌지.’

칼리오페는 삐뚤빼뚤한 글씨를 보며 걱정했다. 손에 힘이 별로 없으니 어쩔 수 없다.

‘그놈의 소근육 발달.’

칼리오페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소근육 발달에 좋은 악력 운동을 시작했다.

‘곤지곤지 잼잼, 곤지곤지 잼잼, 곤지곤지 잼잼.’

유모가 등 뒤에서 흐뭇하게 잼잼하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 * *

“사르니오 가문 애들은 오늘도 안 오네.”

루스티첼 가의 하녀, 안나가 중얼거렸다.

오늘은 격주마다 있는 하녀 모임 날이다. 거창한 모임은 아니고 그저 비슷한 직장을 가진 사람들끼리 퇴근 후 맥주 한잔하며 어울리는 자리였다.

스트레스 풀이가 되기도 하지만 꽤 유용한 정보가 오고 가기도 했다.

어느 가문에 자리가 났더라, 어느 가문은 일하기 힘들다, 어느 가문의 대우가 좋다. 이런 알짜 정보는 모두 고용인들끼리의 모임에서 퍼져나갔다.

물론 말이 퍼지는 건 일자리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모시는 가문에 관련된 이야기도 퍼져나간다.

“안 온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들 알잖아.”

그 말에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다들 사르니오 가의 어린 도련님의 죽음을 기억했다.

“그래도 얼마 전에 사르니오 부인께서 사교 모임에 나오셨다고 하니까 오늘은 나올 줄 알았지.”

고용인 사이에 떠도는 소문은 사교계에서도 유용하게 쓰인다. 실례될 화제를 피해가고 축하할 일을 미리 아는 데 좋다곤 하지만, 가장 유용한 부분이 뭔지는 다들 알고 있다.

어쨌든 귀족들은 파티에 가기 전, 하녀나 풋맨으로부터 가십을 전해 듣고는 했다. 그러니 사르니오 가의 하녀들이 간만에 모임에 나올 거란 기대는 있을 법했다.

“하여간 괜히 들쑤시진 말고 사르니오 가 애들한테서 연락 오면 그때 반갑게 맞아주자.”

모시는 가문의 일원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고용인들까지 일 년이나 외출을 자제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어린 아들을 잃은 사르니오 부인의 충격이 어마어마했고, 고용인들이 스스로 노는 걸 자중한다고 들었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하라는 듯이 때마침 맥주가 나왔다.

하얀 거품 밑으로 기포를 톡톡 쏘아 올리는 황금빛 술을 보자 목이 탔다. 다들 서둘러 잔을 짠, 부딪치고 한 모금 마셨다.

“크으, 시원해!”

퇴근하고 마시는 이 한 잔이 그 어떤 한 잔보다 더 시원하다.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대며 몸을 이완시키자 곧 바삭바삭하게 튀겨 소금을 친 감자칩이 안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까 너희 집 힐데 도련님께선 아직도 잘해주셔?”

술과 안주로 분위기가 누그러지자 슬슬 모시는 집에 관한 말이 나왔다.

사실 이 하녀 모임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모두 어린 아가씨나 도련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나잇대가 비슷한 엄마들끼리 친해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아직도라니!”

서모나 가의 하녀, 올리브가 발끈했다.

“우리 도련님이 얼마나 달라지셨는데! 아직 쑥스러워서 잘 표현하지 못하시는데 그게 또 귀여우셔.”

“맞아. 신경질 부리시곤 좀 이따 와서 빼꼼히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호다닥 뛰어가시는 게 특히 귀여우시지.”

서모나 가 하녀들이 주고받는 말에 다른 사람들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저번 피크닉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요즘 기분이 안 좋으시지만……. 그래도 예전보단 훨씬 신경질이 줄어드셨어.”

“우리 도련님은 공부도 잘하시지, 잘생기셨지, 성격만 좋으면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성격까지 좋아지셨으니……. 아마 몇 년 후면 제도의 영애님들로부터 인기 폭발하지 않을까?”

계속되는 도련님 찬양에 듣던 사람들에게서 흐뭇한 미소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뭐, 대견하시긴 한데…….’

어린 주인님을 모시는 고용인들의 특성인 ‘우리 아가씨—도련님—이 더 잘 났어!’ 스킬이 발동된 것이다.

“아무리 인기 폭발해도 우리 도련님만 하겠어?”

결국 못 참은 카스틸로 가의 하녀, 마리나가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올리브가 눈을 치뜨자 마리나가 피식 웃었다.

“우리 도련님은 여덟 살에 벌써 완성형 얼굴이라고. 어른들조차 설레게 하는 얼굴이야. 영접할 때마다 ‘이대로만 자라주세요!’하고 빌게 된다구!”

“우리 도련님도 장래가 기대되는 얼굴이거든? 게다가 천재 소리도 들으신다고!”

“우리 도련님도 들으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모두 다 제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이뻐 보이는 법이고, 누구한테 지는 걸 볼 수 없는 법이다.

다른 가문 하녀들은 감자칩이나 와삭와삭 씹으며 그 모습을 구경했다.

이 모임에서 가장 기세등등한 두 가문이 바로 서모나 가와 카스틸로 가였다. 가문이 공·후작가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곳은 냉정한 육아의 세계. 전투력은 두 도련님의 능력에서 나온다.

엘피너스 가의 하녀, 라라는 안주는 손도 안 댄 채 맥주만 벌컥벌컥 마셨다.

한때 그녀는 저 영광의 자리에 있었다. 호세 도련님을 찬양하며 루스 도련님을 찬양하는 루스티첼 가와 맞서 싸웠다. 그녀는 명예로운 참전용사였으나 지금은 날이 무딘 은퇴기사나 다름없다.

‘귀여운 걸로 따지면 우리 에피니 아가씨도 어디 가서 안 지는데!’

다만 아가씨의 성격이 조금, 아주 조금 심하게 활발한 게 문제다. 그 활발함이 귀여운 건데 다른 가문 애들은 그것도 모르고 에피니 아가씨의 ‘에’자만 꺼내도 왈가닥 아가씨라고 부른다.

‘그래서 오늘의 승자는 올리브일까, 마리나일까. 아니면…….’

라라가 힐끗 옆자리에 앉은, 한때 그녀의 숙적이었던 안나를 쳐다보았다.

“두 도련님이 아무리 대단하셔도 우리 아가씨만 하겠어?”

안나가 쾅, 소리 나게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신만만한 미소가 만연했다. 기세등등한 두 가문을 뒤늦게 맹추격하고 있는 루스티첼 가다웠다.

서로의 도련님이 더 잘났네, 어쨌네 하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모두 칼리오페 아가씨의 위업을 알고 있었다. 처음엔 말도 안 된다, 거짓말하지 마라는 소리로 일축했는데 머지않아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후후, 우리 리페 아가씨께선 얼마 전에 무려 적룡 부기사단장이신 칸테나 부인의 감탄을 받으셨다구!”

“우리 도련님도 받았어.”

“우리 도련님께도 성취가 빠르다고 하셨는걸!”

마리나와 올리브가 지지 않겠다고 되받아쳤다. 하지만 안나는 여유롭게 감자칩을 와삭와삭 씹으며 중얼거렸다.

“그 도련님들이 나중에 우리 아가씨한테 열렬히 구애하는 건 아닌가 몰라.”

“우리 도련님 눈 높거든?”

바로 뾰족하게 반박하는 마리나와 달리 올리브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부, 부정할 수 없어! 나중이 아니라 벌써부터 구애할 거 같다구! 아무래도 우리 꼬마 도련님의 첫사랑이…….’

리페가 이랬어, 저랬어 하면서 달라지는데 그걸 모를 정도로 눈치 없진 않았다.

올리브가 탈락하자 남은 건 마리나와 안나뿐이었다.

“눈이 높으시니까 우리 아가씨께 구애할 거라는 거지.”

“뭐? 너네 아가씨가 얼마나 잘났……네.”

얼마나 잘났다고 우리 도련님이랑! 그렇게 외치려던 마리나가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아, 맞다. 너네 아가씨 잘났지, 참.

마리나까지 패배시킨 안나가 씨익 웃었다. 이제 확인사살이 남았다.

“너네들 도련님이나 아가씨한테서 선물 받아봤어?”

그 말에 강 건너 불구경하던 하녀들까지 움찔했다.

꼬마 아가씨나 도련님께 직접 받는 선물. 그건 그녀들 모두가 꿈 꾸는 것이었다.

남겨놓은 사탕, 인형 머리끈, 장난감 꽃 같은 것들. 물건의 쓰임새로만 따진다면 하녀들에겐 의미 없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사랑스런 아가씨, 도련님들의 호의가 담긴 순간 세상 어떤 것보다 값지게 된다.

세상이 변해 평민 고용인들도 사람 대우를 잘 해주지만 할머니의 어머니 시절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옛날 고용인들은 가구와 같았다. 테이블이나 의자, 침대처럼 생활의 편의를 더해주는 것. 그 이상은 아니었다.

침대가 안락하다고 해서 고마워하는가? 선물하는가? 그와 마찬가지였다. 포상을 내릴지언정 선물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 해묵은 관념은 옅어지긴 했지만 색이 바래진 않았다.

“서, 설마……?”

“리페 아가씨께서 선물을 주셨어?”

사람들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안나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탁 폈다.

“후후, 우리 리페 아가씨께서 말이야, 글쎄, 딸기 타르트를 내게 주시지 않았겠어?”

“딸기 타르트……!”

“리페 아가씨가 좋아하는 거라고 하던데!”

좋아하는 걸 선물로 받다니! 모두의 눈이 반짝였다.

“글쎄, 그 단풍잎 같은 손으로 타르트를 들고 ‘안나, 이고 마딧게 먹오’하면서 활짝 웃는데!”

뇌내 자동필터를 거친 회상 영상에 흥분한 안나가 테이블을 마구마구 두드렸다. 현실과 사뭇 다른 영상이었지만 이미 그녀에겐 왜곡된 기억이 진실이었다.

“어떻게 그런 총애를……!”

“비법이 뭐야!”

“우리 유모님도 못 겪어본 일인데……!”

부러워! 하녀들이 온몸으로 외치며 발을 굴렀다. 안나의 콧대가 하늘을 찔렀다.

물론 그 모습을 보고 눈꼴 시려워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야, 누가 보면 너만 받은 줄 알겠다.”

시린 안구를 보호하기 위해 서둘러 툭 어깃장을 놓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씰룩, 숨길 수 없는 자긍심에 입술이 절로 올라갔다. 안나의 말에 어깃장은 사실 단 한 가지 사실을 어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나도 우리 아가씨께 딸기 타르트 받았다!

“아가씨께서 고용인들한테 전부 다 주셨어. 직접 주신 건 맞아. 나도 받았지. 한명 한명 찾아와서 항상 고맙다면서……. 으, 엄청 귀여우셨어.”

사람들이 헉, 하고 입을 벌렸다. 전부 다 주셨다고?

“너네들 다 받았어?”

“응, 난 가보로 간직하려구.”

“타르트 썩는다.”

“어, 얼리면 안 썩어!”

“맛있게 먹는 게 아가씨의 마음에 가장 잘 보답하는 일이야.”

사람들은 조잘재잘 주고받는 루스티첼 가의 하녀들을 다른 하녀들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나도, 나도 도련님이 주신 딸기 타르트…….’

오늘은 승자는 명백히 루스티첼 가였다.

* * *

“너도 딸기 타르트 받았냐?”

장난기가 가득한 호르세안의 질문에 루시우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또 어디서 리페 얘기를 들어선…….’

“신경 꺼라.”

“저런, 못 받았구나.”

호르세안의 눈매가 안타깝게 내려앉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모습에 루시우스는 울컥했다.

‘말려들면 안 돼. 저 녀석과는 리페 이야기를 안 하는 게 최선이야.’

침착하게 신경 쓰이지 않는 척 사물함을 열었지만 호르세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다 사라졌다.

리페한테 타르트도 못 받은 불쌍한 오빠. 호르세안의 눈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받았다.”

으득, 이를 갈며 말하는 모습에 호르세안이 피식 웃었다. 다른 데엔 냉정한 녀석이 칼리오페에 대한 것에만 이러는 게 우스웠다.

“사랑받는 오빠네. 리페 단 거 엄청 좋아하던데.”

칼리오페는 아닌 척하지만 초콜릿을 먹었을 때 커지던 눈과 부풀어 오르던 뺨을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사랑받는다는 말에 루시우스의 서늘한 입매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은근하게 뽐내는 그를 재밌단 눈으로 바라보던 호르세안이 한 마디 덧붙였다.

“좋겠다. 리페한테 선물 받아서. 저번에 초콜릿도 받았지.”

“…….”

떠오르는 흑역사에 루시우스가 호르세안을 노려봤다.

저 녀석 때문에 칼리오페에게 ‘초콜릿 때문에 친구랑 싸운 오빠’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

“내 절친한 친구의 동생이 그렇게 단 걸 좋아하니까 말이야. 우리의 우정을 생각해서 가만히 있지 못하겠는 거 있지.”

“넌 제발 좀 가만히 있어라.”

“으응? 그치만 이미 루스티첼 부인께서 집에 놀러 오라고 하셨는걸?”

호르세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너……!”

호르세안을 향해 눈을 부릅떴던 루시우스가 곧 한숨을 내쉬었다. 흥분해서 닦달할수록 신나서 집에 올 녀석이다.

“언제?”

벗은 가죽 장갑을 사물함에 넣으며 조용히 물었다.

‘저 녀석이 올 때 리페랑 외출하면 돼.’

루시우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원래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는 법.

“지금.”

호르세안이 네 계획쯤이야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다면 나는 자 위에는 타는 자가 있다.

“그럼 오후 훈련 잘해! 화이팅!”

탕, 경쾌하게 사물함을 닫은 호르세안이 루시우스에게 인사했다.

루시우스가 뒤늦게 그를 붙잡으려 했을 땐 이미 쌩하고 나간 후였다.

* * *

“늦었잖아, 호세!”

높게 양 갈래 한 머리카락이 소리칠 때마다 총총 흔들렸다.

“미안, 미안. 나오는 데 중요한 일이 있어서.”

루시우스 녀석을 놀리는 일이면 중요한 일이지. 호르세안이 웃었다.

“우리 에피니 아가씨, 많이 기다렸어?”

마차에 올라탄 그가 막냇동생을 번쩍 안아 무릎 위에 앉혔다.

“아, 저리 좀 떨어져.”

에피니가 호르세안을 발로 밀어냈다.

치마가 다 뒤집히는 걸 보고 호르세안이 한숨을 내쉬며 옷매무새를 바로 해줬다.

“제발 루스티첼 가에 가서는 치마 뒤집지 말아라. 그 집 꼬맹이가 기절할지도 몰라.”

왈가닥인 에피니와 정반대인 꼬마 아가씨를 떠올리자 픽 웃음이 나왔다.

‘정말 안 어울리는 조합인데.’

루시우스를 놀리느라 말은 안 했지만 오늘 루스티첼 저에 가는 것은 에피니와 칼리오페를 서로에게 소개해주기 위함이다.

‘두 살 차이니 친구가 될 수 있겠지. 행동하는 건 우리 아가씨 쪽이 더 어리지만.’

호르세안이 사랑스러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칼리오페를 보고 배우면 좋겠는데 말이야.”

입술을 쑥 내민 채 오빠의 손길을 받고 있던 에피니가 움찔했다.

“아야!”

작지만 매서운 주먹이 호르세안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호르세안 바보!”

엄청난 충격에 허리를 꺾은 채 쿨럭쿨럭, 기침하던 호르세안이 고개를 들었다.

“에피니, 고운 말!”

“멍청이! 똥개!”

반항심을 두 볼에 가득 집어넣은 에피니가 소리를 질렀다.

“레이디가 똥개라니!”

“바보야, 바보!”

“아야얏, 그만 꼬집어! 진짜로 아파…….”

“아프라고 하는 거거든?!”

두 사람의 공방에 루스티첼 저에 도착할 때까지 마차가 덜컹덜컹거렸다.

* * *

“안녕하세요, 칼리오페 루스티첼입니다.”

칼리오페가 앙증맞은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잡았다. 사라락, 머리카락이 살짝 숙인 고개를 따라 흘러내렸다.

고개를 다시 들고 곧장 마주쳐 오는 눈동자에 멍하니 있던 에피니가 흠칫 했다.

“나, 난 에피니야.”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하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왜 흠칫한 거야, 난.’

마음을 다 잡고 칼리오페를 쳐다봤다. 호르세안과 똑같은 호박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만나 뵈어서 기뻐요. 오느라 힘들었지요?”

하지만 활짝 웃으며 진심으로 반기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눈동자에서 힘이 빠졌다.

“별로.”

불퉁하게 대답한 에피니는 저도 모르게 힐끗 칼리오페의 눈치를 보았다.

바로 딱 눈이 마주쳤다. 빙긋 웃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에피니는 들킨 사람처럼 휙 눈을 돌렸다.

“나는 봐주지도 않는 거야? 리페가 좋아할 만한 것도 가지고 왔는데.”

“어서 오세요, 호세 오라버니.”

다소곳이 인사한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은 루스 오라버니께서 집에 늦게 오시는데요.”

“알고 있어.”

그러면요? 하는 얼굴로 커다란 눈을 깜빡이는 모습에 호르세안이 한숨 같은 웃음을 지었다.

“널 만나러 온 거야.”

“그런……. 감사합니댜.”

놀랐다가 바로 예의를 차려 인사한다. 사교계의 의례적인 찬사 취급하고 있다. 왠지 억울해진 호르세안이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나 진심인데.”

“기뻐요.”

칼리오페가 차분히 미소 지었다. 호르세안은 그 담담한 볼을 주욱 잡아당기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얘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나 싶었는데. 어렵단 말이야.’

“더 기뻐할 게 있어.”

“무슨 일 있나요?”

“그건 나중의 기쁨으로.”

호르세안이 검지를 입술 위에 붙이며 눈매를 접었다. 칼리오페는 곧장 수긍했다.

“그래요, 그럼.”

‘너무 순순한 거 아냐? 궁금하지도 않아?’

역시 다른 다섯 살이랑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호르세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여기 모처럼 뵌 아름다우신 귀부인께서 허락하신다면 곁에 머물고 싶으니 에피니와 둘이 놀고 있어.”

“어머나, 그거 영광인걸.”

가만히 보고 있던 루스티첼 부인이 후후 웃었다.

‘역시 에피니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려는 거구나.’

칼리오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에피니에게 말했다.

“그럼 제 방으로 가실래요, 엘피너스 영애?”

에피니는 칫, 하고 고개를 돌렸지만 칼리오페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인형 좋아하세요?”

방에 도착한 칼리오페가 에피니에게 물었다.

어린 여자아이와 뭘 하고 놀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으니 일단 통상적인 관심사를 꺼낸 것이다.

‘마음에 들어 하는 인형이 있으면 선물해야지.’

높게 양쪽으로 묶은 붉은 머리칼. 옅은 심통이 묻은 뺨. 호르세안과 다르게 살짝 올라간 눈매.

‘토끼 인형이 어울릴 거 같아.’

칼리오페가 토끼 인형을 끌어안은 에피니를 상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아니.”

에피니의 볼에 붙어있는 심통이 볼록 솟아올랐다.

“유치하게. 난 인형이나 소꿉놀이 같은 거 딱 질색이야.”

척, 팔짱을 낀 에피니가 칼리오페를 내려다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군요. 그럼 엘피너스 영애는 뭘 좋아하세요?”

대수롭지 않은 칼리오페의 반응에 에피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너 바보야?”

“으음, 똑똑한 편이라구 생각합니다만…….”

칼리오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왜 바보냐고 묻는 거지? 내 행동에 바보 같은 면모는 없었는데.’

다섯 살에 나눗셈을 잘하는 아이는 없지 싶어서 똑똑한 편이라고 답했는데 상대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은 기가 찬 헛숨이다.

‘호세는 이런 애가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에피니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너, 이상해.”

“네?”

“아무도 너처럼 인사 안 해.”

“그런가요?”

“그렇게 말도 안 해.”

확실히 애들 눈엔 이상할지도. 칼리오페는 납득했다.

‘귀부인들 앞에서 배운 대로 예법에 맞춰 인사하는 거야 누구나 그렇지만, 애들끼리는 안 그러는 게 보통이겠지. 내가 어렸을 땐 어떻게 했더라? 에피니처럼은 안 했던 거 같은데.’

기억을 뒤져도 어렸을 때 또래와 단둘이 만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엄마 손 잡고 나간 모임에서도 구석에 앉아 책을 읽은 게 가장 큰 기억이다.

‘그래도 또래와 이야기는 했을 텐데……. 하긴, 읽은 책 내용도 잘 기억 안 나는데 관심 밖이었던 대화가 기억날 리가.’

유리안과 힐데르트가 딱히 뭐라 말하지 않아서 괜찮은 줄 알았다.

“이상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에피니가 힘을 줘서 말했다.

“이상한 건 너니까 말이야. 말해 두지만 난 절대! 절대절대! 너처럼 말하지 않을 거야!”

에피니는 척하고 검지를 펴 칼리오페를 가리켰다. 격한 숨이 씩씩 새어 나올 때마다 작은 어깨가 들썩였다.

눈앞의 자그마한 아이가 너무나 커다랗게 보였다. 직접 만나보니 호르세안이 왜 그렇게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아서 더욱더.

‘어차피, 어차피 나는 왈가닥 에피니니까……!’

“엘피너스 영애가 저처럼 말할 필요는 없지요.”

작지만 확고한 목소리에 에피니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삿대질하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열린 눈에 보인 칼리오페는 자신보다 한참 작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반듯하게 서서 정확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애는 지금 이대루가 가장 예쁜 걸요.”

“……뭐?”

표정을 보니 못 들어서 되묻는 게 아니었다. 믿기질 않아서, 잘못 들은 것 같아서 되묻는 거였다.

칼리오페는 기꺼이 입을 열었다.

“영애는 지금 이대루가 좋아요.”

아이는 아이다울 때 가장 사랑스럽다.

“난…….”

에피니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꾹 다물었다.

‘난 왈가닥에, 사고뭉치에, 심술도 엄청 부리고, 맨날 오빠들을 때리고, 드레스는 입으면 엉망으로 만들고, 거기다—’

고개를 들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칼리오페가 보였다.

‘너한테 바보라고, 이상하다고 했는데.’

“……에피니.”

“네?”

“처음 인사할 때 말했잖아. 에피니라고. 그것도 기억 못 해?”

그때까지 무슨 말을 들어도 유유한 웃음을 짓고 있던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으음, 아무래도 이름으로 부르라는 말이겠지?’

“……에피니 온니.”

“흥.”

에피니가 휙 고개를 돌렸다.

‘어서 언니 소리에 익숙해져야겠는걸.’

전생에서 친분이 없었던 또래를 만나면 아무래도 어린애들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두 오라버니를 둔 덕에 오라버니 소리는 그나마 익숙한 반면 언니는 어색했다.

‘전생에선 아예 언니라고 부를 만한 관계가 없었으니까.’

신기한 느낌이다. 조금씩 관계가 늘어나는 느낌.

칼리오페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봄바람처럼 연하고 미지근한 것이 부는 것 같다.

“잘 놀고 있었어?”

똑똑, 노크 소리와 동시에 방문이 열리고 호르세안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트레이가 들려 있었다.

“이게 리페가 기뻐할 만한 것.”

짜잔, 하며 호르세안이 테이블 위에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트레이에는 커다란 유리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기대하는 얼굴이 아닌데.”

“……제가 뭘 먹이구 싶게 생겼나요?”

칼리오페가 심각하게 물었다.

푸하하하, 웃음을 터트린 호르세안이 칼리오페의 눈초리에 겨우겨우 소리를 삼켰다.

“크흠, 딸기 타르트 많이 받았댔지.”

“네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기색이 가득이라 호르세안은 또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먹을 걸 받으면 좋지, 왜?”

갑자기 한꺼번에 너무 많으니까 문제지요. 그런 얼굴로 호르세안을 바라보던 칼리오페가 곧 고개를 돌렸다.

“아이스 초코예요?”

“그것보다 더 맛있는 거.”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자 호르세안이 재빨리 번쩍 들어 올려 의자에 앉혀 줬다.

“…….”

당황했던 칼리오페는 호르세안이 에피니를 똑같이 앉혀주는 걸 보고 진정했다.

칼리오페의 방은 당연히 유아용 가구로 꾸며져 있다. 호르세안이 번쩍 들어 올려 앉혀줄 이유는 전혀 없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동생이 넷이나 되니 습관이 된 거겠지.’

머리로는 납득하는데 심란한 건 어쩔 수 없다.

“자, 마셔 봐.”

호르세안이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칼리오페의 앞에 유리잔을 놓았다.

언뜻 보았을 때와 달리 확실히 아이스 초코와는 달랐다. 초콜릿 음료 같긴 한데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짙고 연한 초콜릿 액체가 서로 섞이지 않은 채 얼기설기 담겨있다.

‘아이스크림은 아닌데 말이야. 중간중간에 보이는 작은 점들은 초콜릿 칩 같은데……. 하지만 초콜릿 칩치곤 너무 작아. 거기다 가라앉지도 않고.’

그런 신기한 음료에는 휘핑크림이 꽃처럼 듬뿍 얹어져 있다. 그 위에는 또 초콜릿 시럽이 흘러내릴 정도로 뿌려져 있고 크림 사이사이에는 숨겨둔 보물처럼 초콜릿 칩이 보였다.

‘엄청 달아 보이는데…….’

그야말로 초콜릿 덩어리다. 힐끔 호르세안을 보니 아까보다 더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차가운 음료를 여기까지 가져오는 것도 큰일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도저히 안 먹을 수 없었다.

칼리오페는 일단 옆에 마련된 선디 스푼으로 크림을 폭 떴다.

‘어라?’

상상했던 것과 조금 다른 맛이었다. 휘핑크림에 초콜릿 시럽을 얹은 것이야 모르는 맛도 아니니 예상했던 게 있는데 그것과 조금 달랐다.

‘짭조름해.’

처음 느낀 맛은 짠맛이었다. 휘핑크림이 살짝 짭짤했다. 그와 동시에 초콜릿 시럽이 혀에 들척지근하게 감겨왔다.

‘초콜릿 시럽도 특이해.’

일반적인 시럽보다 훨씬 풍미가 깊었다. 달기만 하지 않고 훨씬 깊은 맛이다.

마지막으로 오도독 오도독 초콜릿 칩이 씹혔다.

‘쿠키에 들어가는 초콜릿 칩이랑 달라. 설탕이랑 우유가 거의 안 들어간 것 같은데?’

달지 않은 데다가 녹을 때 감촉이 꼭 벨벳 같았다.

각각 특색 있는 세 가지 재료가 입안에서 어우러지는 맛이 근사했다. 특히 짭조름한 휘핑크림과 달콤한 초콜릿 시럽의 조화가 굉장했다.

‘단맛이랑 짠맛이 이렇게 잘 어울렸나?’

과연 음료는 어떤 맛일까? 칼리오페는 서둘러 스트로우를 폭 꽂다가 멈칫했다. 조금이지만 저항감이 느껴진다. 완전한 액체가 아닌 것이다.

‘아이스크림은 아니고 대체 뭐지?’

궁금하면 마셔보면 된다. 칼리오페의 입술이 스트로우 끝에 닿았다.

“……!”

산호빛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칼리오페가 먹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호르세안의 입매가 씰룩였다.

그는 칼리오페가 휘핑크림을 떠먹을 때부터 웃음을 참고 있었다.

‘폭죽이 터진 얼굴인데.’

칼리오페의 표정이 딱 그랬다. 저 자그마한 머릿속에 뿅뿅 터지고 있을 폭죽의 색마저 보일 정도다.

큭큭, 턱을 괴고 있던 손바닥에 입술을 묻은 호르세안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칼리오페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무, 무슨 이런 맛이……!’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칼리오페의 머릿속엔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골든 헤이즐넛!’

저번에 맛봤던 그 환상적인 초콜릿이 그대로 음료 속에 녹아 다른 것들과 하모니를 이뤘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맛이었다.

달다.

하지만 달기만 한 게 아니라 고소하고 짭조름한 데다 진한 우유의 신선함이 느껴질 정도로 균형이 완벽했다.

맛뿐만 아니라 섞여 있는 작은 초콜릿 칩이 주는 식감도 재밌었다.

‘그냥 음료가 아니라 얼음을 갈았던 거구나. 그래서 안 섞였어.’

맛에 대한 충격이 가신 후에야 그 점이 떠올랐다. 입에 넣는 순간에 얼음을 갈아서 만든 음료라는 걸 알았지만 굉장한 맛에 생각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 정도로 맛있었다.

이런 건 전생에서도 먹어본 적이 없다. 상상도 못 해본 맛이었다.

‘호세 오라버니랑 그렇게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으니 먹을 기회가 없었던 거겠지. 하지만 비슷한 음료조차 없었는데.’

한참 감탄에 빠져있다가 맞은 편에 앉은 에피니가 눈에 들어왔다.

“에피니 온니는 안 먹어요?”

맛있는데. 환상적인데. 그런 눈빛이라서 호르세안이 다시 낮게 웃었다.

“우리 에피니는 이거.”

에피니 앞에는 층이 분명하게 갈린 음료수가 놓여 있었다. 칼리오페도 잘 아는 음료였다.

밑에는 알갱이가 살아있는, 갓 짜낸 오렌지 주스. 위에는 진하게 우린 아쌈.

평균보다 더 많은 잎을 넣어 떫은맛이 나오기 전에 빠른 속도로 진하게 우리는 게 포인트였다.

“루스티첼 부인의 오렌지 아이스티는 정말 끝내주거든. 에피니한테 맛보여주고 싶었어.”

“맛있지요.”

칼리오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전 사교계에서도 언제나 호평이었다.

“응, 에피니는 단 걸 싫어하니까 이게 입맛에 더 맞을 거야.”

“저도 단 거 별루 안…….”

에피니와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에 방긋 웃으며 말을 하던 칼리오페가 멈칫했다.

그녀의 앞엔 다 마신 초콜릿 음료가 놓여 있었다.

‘다, 다 마신 줄도 몰랐어!’

대체 얼마나 무아지경으로 마셨던 거지!

칼리오페는 당황했다. 이성을 잃게 만들다니. 이건 그냥 음료가 아니었다. 악마의 음료였다!

“단 거 별로?”

에피니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호박색 눈동자가 빈 유리잔을 빤히 바라봤다.

“……별루 안 좋아하는데 이건 맛있네요…….”

칼리오페가 작게 대답했다. 두 볼이 발긋했다. 큭큭거리는 호르세안의 웃음소리에 뺨의 홍조가 더 짙어졌다.

“당연하지. 내가 리페를 위해서 만든 거니까 입에 맞을 수밖에.”

의외의 말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어 호르세안을 봤다.

“저를 위해서요?”

“저번에 초콜릿 엄청 맛있게 먹었으니까. 슬슬 더워지기도 하고. 이런 것도 좋아하겠구나 싶었어.”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어물거리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작은 손가락이 차가운 유리잔을 만지작거렸다.

“……감사합니다.”

조그마한 목소리였다. 항상 예의에 맞춰 인사하던 것과 사뭇 달랐다.

‘어?’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호르세안의 눈이 커다래졌다. 동요시키려고 할 때는 항상 담담하더니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동요한다.

고개를 숙인 채라 호르세안에게는 내리깐 속눈썹과 그 밑의 빨간 뺨밖에 보이지 않았다.

‘큰일인데.’

괴고 있던 손바닥에 뺨까지 파묻은 그가 시선만 위로 올렸다.

‘너무 귀엽잖아.’

진짜로 내 동생 하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모처럼 동요한 얼굴이 한순간에 사라질 게 뻔해서 참았다.

‘정색하고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겠지.’

눈앞에 분명하게 그려져서 호르세안은 웃음을 삼켰다.

‘뭐, 그것도 귀엽지만.’

가만히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던 에피니가 흥,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소리에 부끄러움에서 벗어난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 에피니는 음료에 손도 대지 않았다.

“스트로우로 잘 저어 드셔야 맛있어요.”

에피니는 여전히 불퉁한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칼리오페의 말대로 했다.

조막만 한 손에 휘젓는 대로 쨍그랑 얼음이 유리잔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아이스티가 아슬아슬하더니 기어코 넘쳤다.

“에피니, 손.”

“싫어, 바보!”

에피니는 인상을 팍 찌푸렸지만 호르세안이 제 손을 가져가는 걸 막진 않았다. 호르세안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에피니의 손 사이사이를 꼼꼼히 닦아주곤 테이블도 닦았다.

‘익숙해 보이네.’

사이 좋은 남매의 모습에 칼리오페가 미소 지었다.

전생에서 두 오빠들과 자신의 관계가 생각나 새삼스러운 기분이었다. 가족이니까 사랑했지만 결코 에피니와 호르세안처럼 친밀하진 않았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

오빠들과 자신의 관계뿐만 아니라 가족 분위기도.

관심 없다는 얼굴로 오렌지 아이스티에 입을 댄 에피니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맛있지? 딱 우리 에피니 입맛이지?”

호세가 웃으며 에피니에게 물었다.

“먹을 만은 하네.”

볼이 붉어진 에피니가 휙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칼리오페를 눈치채고 흠칫했다.

“마, 맛있다는 뜻이야.”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이에요.”

칼리오페가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마실 때 얼굴을 보고 바로 알았다.

‘어머니께서 만드신 거라고 해서 신경 쓴 건가. 딱히 속상해서 쳐다본 건 아닌데.’

오히려 귀여워서 바라본 거였다. 틱틱거리긴 하지만 역시 나쁜 아이는 아니다.

어쩐지 에피니는 더 심통이 난 얼굴로 아이스티를 쪽쪽 빨아 마셨다.

“호세 형아 왔다며!”

벌컥 문이 열리며 로베르트가 들어왔다. 칼리오페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로벨 오라버니.”

“아.”

로베르트가 들어온 자세 그대로 뒷걸음질 쳐서 문을 똑똑, 하고 두드렸다. 그리곤 다시 살금살금 들어왔다. 헤헤 웃는 얼굴을 보고 칼리오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었다.

“다녀오셨어요?”

“응! 우리 리페 보고 싶어서 서둘러 왔지!”

허락이 떨어진 강아지처럼 로베르트가 칼리오페에게 달려가 와락 껴안고 부비부비했다.

이제는 꽤 익숙해서 칼리오페는 침착하게 로베르트의 애교를 받아주었지만 찌르는 듯한 시선에 점점 얼굴이 붉어졌다.

“어!”

시선을 느낀 로베르트가 고개를 들더니 에피니를 보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에피니는 흥,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는 사이인가?’

로베르트의 품속에서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누구였더라?”

하지만 이어진 말에 에피니의 도도한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칼리오페 역시 당황스러운 눈으로 로베르트를 바라봤다.

“너한테 알려줄 이름 따위 없어! 바보!”

“에엑!”

갑자기 왜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어서 로베르트는 억울했다. 그에게 악의는 없었다.

로베르트는 밝고 명랑해서 어디에도 잘 끼는 데 반해 주변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함께 어울렸던 상대가 누구였는지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 바보 아냐, 리페.”

‘……왜 그걸 저한테 변명하시는 거죠.’

칼리오페는 아까보다 더 당황했지만 진심이 가득한 로베르트의 얼굴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이들은 이해하기 힘들어.’

“바보 맞아.”

탕, 에피니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니야!”

“맞아!”

“아니래두!”

로베르트가 힐끔힐끔 칼리오페의 눈치를 보며 항변했다.

“맞다고! 바보바보바보!”

‘애가 둘로 늘어나자마자 시끄러워졌어…….’

칼리오페는 아연해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제일 어리다는 자각 따위는 없었다.

좀 말려보세요. 그런 눈으로 호르세안을 쳐다봤지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만 했다.

에피니를 다룰 수 있는 자는 없어. 포기하면 편해. 그런 얼굴로 호르세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바보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겠어! 따라 나와. 나의 엄청난 자이언트 스피릿을 보여주지.”

로베르트가 콧대를 세우면서 말했다.

‘그거 유아용 학습 만화 아닌가…….’

칼리오페는 방구석에 꽂혀 있는 책을 힐끔 바라봤다. 로베르트가 보기엔 나잇대가 안 맞는다.

“뭐? 자이언트 스피릿?!”

에피니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호박색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있다.

“니, 니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대체 뭐길래 저렇게 충격을 받나 싶었지만, 에피니의 얼굴은 한없이 심각했다.

“헤헹, 할 수 있지요!”

‘왜 그 말을 하면서 자랑스럽게 나를 보지?’

칼리오페는 진땀을 흘렸다.

로베르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꼬리가 흔들리는 것 같은 환상이 보였다. 머리 위에 귀까지 뿅 솟아서 쫑긋거린다.

“거짓말이야!”

“보여줄 테니 따라오라고!”

어깨를 으쓱으쓱한 로베르트가 걸음을 옮기자 에피니가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잠시 갈등하던 그녀는 곧 로베르트를 따라나섰다.

“이런, 이런.”

호르세안은 웃으면서 따라 나가려다가 자신을 붙드는 손길을 느꼈다. 내려다보자 칼리오페가 그의 옷자락을 꼬옥 붙든 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눈썹을 한 번 들어 올린 호르세안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우리 리페는 나랑 둘이 있고 싶었구나.”

싱글싱글 웃으며 하는 농담에도 칼리오페는 진지한 얼굴을 했다.

“여쪄보구 싶은 게 있어요.”

“응?”

“중요한 거에요.”

* * *

‘우리 가문은 약해.’

서모나 부인의 피크닉에서 돌아온 후, 칼리오페는 결론을 내렸다.

네 개의 용기사단 중 하나인 백룡 기사단의 단장인 아버지, 루스티첼 가처럼 중앙 백작 가 출신의 어머니. 무재로서 두 오라버니의 자질도 충분해 후계가 흔들릴 일도 없다.

영지는 풍족하고 영지민의 충성심도 높다. 거기에 영지 외의 수입원도 있다. 최고위 귀족이 아니더라도 중앙 귀족으로서 입지가 굳건하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 누구도 루스티첼 가가 약하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부족해.’

언젠가 다가올 미래에 가족들이 살해당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니 오히려 보상금을 노린다는 비난을 받았지.’

다시 생각해도 이가 갈렸다.

가족의 죽음 앞에서 보상금을 생각하는 이가 있을까? 적어도 칼리오페의 상식 속에선 없었다.

‘너무 빨랐어.’

사건 조사에 의문을 느낀 루스티첼 가가 항변하자마자 보상금을 노린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안개처럼 떠돈 소문은 곧 실체를 얻었다. 모든 신문에서 일시에 똑같은 논조로 루스티첼 가를 비난했다.

‘즉, 누군가가 여론을 조작했다는 뜻이지.’

범인은 귀족 살해를 덮어버리고 여론을 일시에 움직일 정도로 큰 권력과 재력을 갖고 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고 여러 번이나.’

차례차례, 한 사람씩 죽었다. 그 세 번 모두 칼리오페의 가슴을 찢었다. 몇 번을 겪는다고 해서 가족의 죽음에 무뎌지지 않는다.

세 번의 귀족 살해를 다 덮을 수 있는 권력자. 과연 그런 자가 몇이나 될까?

호르세안은 그 답을 주기에 적절한 사람이었다. 첫째로 믿을 수 있고, 둘째로 중앙 귀족 가문의 후계자로 어려서부터 교육받았다. 즉, 그는 이미 권력의 흐름을 어느 정도 꿰고 있다.

“귀족 살해를 덮구 여론을 조작할 수 있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요?”

느닷없이 들어온 심각한 질문에 호르세안의 미소가 잦아들었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눈앞의 아이가 다른 아이와는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또 다른 문제였다.

통통한 뺨과 작은 입술에서 나오는 ‘살해’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대체 뭐가 이 아이에게 그런 걸 궁금하게 만들었을까?’

호르세안은 머릿속으로 최근의 사건 몇 개를 뒤적였지만 귀족 살해라는 키워드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역사서를 읽다가 좀 궁금해져서요.”

칼리오페는 태연히 대답했다. 호르세안이 믿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내가 호세 오라버니를 믿으니까.’

“역사서?”

“네.”

그것만이 아닐 것 같았다.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라기엔 칼리오페의 눈동자는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글쎄, 시대별로 다르겠지만…….”

“지금으로 가정한다면 어때요?”

“최고위 귀족, 성직자 정도려나.”

그런 것 따윈 신경 끄라고 말해서 들을 애도 아니고 대답을 못 해줄 내용도 아니다. 호르세안은 이대로 문답을 이어가며 칼리오페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파악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뭐, 순순히 다 대답해줄 순 없지. 암흑가의 권력자에 대한 이야기는 자라나는 새싹에겐 일러요.’

그런 호르세안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칼리오페가 물었다.

“뒷세계의 권력자는요?”

“그, 그것도 있지.”

호르세안이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말했다. 아무 것도 숨기지 말라는 듯이 산호빛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만이라면 그냥 빠져나갈 텐데 말이지.’

칼리오페의 눈동자는 한없이 슬퍼 보였다. 표정은 평소처럼 침착한데 이상하게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저두 할 수 있어요. 제가 궁금한 건 더 자세한 후보에요.”

“잠깐, 잠깐.”

호르세안이 손을 들었다.

“그럴 능력이 되는 가문을 다 읊으라는 거야? 대체 역사서를 어떻게 읽으면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아니, 그보다 너 위험한 생각하는 거 아니지?”

칼리오페가 작게 웃었다.

“위험한 생각을 하면서 위험한 생각 중이라구 말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러게…….”

평소 호르세안이 하고 있던 생각을 칼리오페가 그대로 하는 바람에 멍청히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호세 오라버니 은근히 순진하네요.”

순진하다고? 호르세안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허어…….”

기가 찬 탄식이 나왔다. 그런 말은 칼리오페보다 더 어렸을 때조차 들은 적이 없다.

‘넌 날 때부터 능구렁이였어!’ 엘피너스 부인이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는 호르세안의 등에 대고 맨날 하는 말이다.

“순진한 나는 그런 거 잘 모르겠는걸.”

호르세안이 불퉁하게 말했다.

“순진한 것과 바보인 것은 다릅니다.”

칼리오페가 호르세안과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호세 오라버니는 바보가 아니지요.”

호르세안은 말을 잊고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커다란 산호빛 눈동자는 고요한 수면 같았다. 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는 순간 호르세안은 끄응, 하는 신음을 삼켰다.

‘뭘 저렇게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나는.’

다섯 살짜리 꼬꼬마한테 휘둘리다니. 호르세안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왜 그런 게 궁금한지 모르겠지만 대답하자면, 살해당한 귀족의 지위 정도에 달렸지.”

과연 어린애가 알아들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대가 ‘그’ 칼리오페였다.

‘우리 에피니는 절대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칼리오페라면 이 정도야.’

픽 웃음이 나왔다. 귀족 살해의 은폐에 대해 묻는 어린애와 그걸 또 진지하게 대답하고 있는 자신. 누가 보면 황당해할 것이다.

“영지조차 없고 황궁에도 못 오는 지방 소귀족이면 리페도 덮을 수 있어. 뭐, 정확히는 루스티첼 가가 덮을 수 있다는 거지.”

“제가 질문을 잘못 드렸군요.”

귀족이라는 하나의 범주에 속해있지만 그 안은 바다만큼이나 넓다.

‘이 말을 해도 될까?’

칼리오페는 잠시 고민했다. 호르세안은 눈치가 빠르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테지만 그건 각오했다.

그러나 퍼즐을 맞추듯 무언가를 유추해낼지도 모르고, 알지 못한 채 치명적인 정보를 흘릴 수도 있다. 반쪽짜리 정보는 모르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고민은 짧았다.

‘믿으니까.’

호르세안은 이미 한번 목숨을 걸었다. 그러니까 이번엔 자신이 목숨을 걸고 믿을 차례다.

“우리 가문 정도면 어떨까요?”

“뭐?”

아니나 다를까 호르세안은 깜짝 놀라 굳은 얼굴이 되었다.

“우리 가문 사람을 차례차례 살해하구 그걸 덮을 수 있다면 대체 어느 정도여야 할까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칼리오페를 바라보던 호르세안이 입술을 달싹였다.

“푸—”

푸? 그렇게 시작하는 가문이 있나?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푸하하하하!”

“…….”

성대한 웃음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호르세안은 아예 테이블까지 두드리며 웃었다.

“리페 혹시 악몽이라도 꿨어? 귀여워라. 그건 꿈이야.”

이쪽은 진지하게 말했는데 어린애 취급을 하고 있다.

칼리오페가 발끈하지 않은 것은 성격 덕도 있지만, 호르세안의 태도 때문이 더 컸다.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을 하면서도 그는 면밀하게 칼리오페를 살피고 있었다.

“제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데요. 그리고 그런 웃음은 무례합니다.”

기분 상한 기색도 없이 사실을 말한다는 태도에 호르세안은 웃음을 갈무리했다.

“미안, 미안. 으음, 두 공작가는 그럴 수 있겠지. 후작가 중에선 전부는 아니고. 지금 몽에르트 후작가보다 로아힌 백작가가 더 힘이 강하니까.”

“사하르네 백작가는요?”

“사하르네? 확실히 후작가의 위세를 넘보고 있으니까 가능은 하겠지만……. 로아힌만큼은 아니야.”

‘미래에는 로아힌 가보다 사하르네 가가 더 득세하는데.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무래도 사교계를 멀리했다 보니 정확한 사정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그럴 능력이 된다고 해도 진짜 할 수 있느냐는 또 별개지.”

“할 의지도, 이유도, 이득도 있다구 가정하구요.”

“아, 그런 문제도 있지만 내가 말하는 건 다른 거야. 대단한 공작가라고 해도 ‘건수 한 번 잡혀라!’ 하고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적이 있으면 힘들지 않겠어?”

“카스틸로 공작가 말씀이군요.”

“그래.”

그렇게 답하면서도 호르세안은 놀랐다. 칼리오페가 어른스럽고 똑똑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계의 사정을 꿰뚫고 있는 건 별개다.

‘서모나 부인의 피크닉에서 고위 귀족의 역학 관계를 파악한 걸까. 그러고 보니 카스틸로 공자도 참석했다고 했지. 그래도 대놓고 얘기하진 않았을 텐데.’

명석하다는 표현으로 부족한 아이였다. 하지만 그보다 호르세안을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굳이 카스틸로 가가 아니더라두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 있겠지요. 그럴 능력이 있어도 방해자가 있거나 능력이 부족해도 조력자가 있으면—”

“달라지지.”

칼리오페의 말을 호르세안이 마무리했다.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

‘즐겁다.’

호르세안을 가장 놀라게 한 것. 그건 바로 칼리오페와의 문답이 즐겁다는 것이었다.

저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 꼬마와의 문답이 즐겁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즐거운 건 사실이었다. 이쪽이 생각하는 걸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말이 통하는 데다가 꾸밈이 없어도 된다.

‘다른 사람과는 최고위 귀족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겠지. 그 순간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테니까. 그것도 귀족 살해 은폐를 운운하고 있으니.’

갑자기 불안해졌다. 칼리오페가 다른 사람에게 또 비슷한 질문을 한다면?

‘귀족 간의 관계도를 파악하는 걸 보니 그럴 것 같진 않지만…….’

“리페,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 하면 안 돼.”

“안 해요.”

바보같이 그런 걸 누가 묻겠냐는 투라서 호르세안은 과장스레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나한텐 잘만 해놓고.”

“호세 오라버니를 믿으니까요.”

예상치도 못한 말이었다. 놀라서 쳐다봤지만 정작 칼리오페는 빈 유리잔을 들어 올리기 위해 낑낑 노력 중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말이었구나…….’

그래서 더 진심이 느껴졌다.

믿으니까 배신하지 말라거나 호의를 알아달라는 뜻이 담겨 있지 않다.

‘당연해서 그냥 무심코 흘러나오는 말.’

호르세안은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평소처럼 느물한 미소를 짓지 않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사람을 쉽게 믿으면 안 돼.”

겨우 얼굴을 수습한 호르세안이 짐짓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정작 칼리오페의 표정이 흐려졌다.

“……쉽게 믿지 않아요.”

작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는 가냘팠다. 한때 칼리오페는 사람을 쉽게 믿었다.

잠시 유리잔을 응시하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호세 오라버니니까 믿는 거예요.”

이번에는 대수롭지 않은 말이 아니었다. 분명하게 호르세안을 응시하며 그이기에 믿는 걸 알아달라고 하고 있다.

호르세안은 가까스로 지었던 미소가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오라버니가 신의를 위해, 우리 가족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까요.’

결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칼리오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유리잔을 바라봤다. 손끝에 매끈하고 차가운 유리의 무기질적인 감촉이 닿았다.

“글쎄요……. 이렇게 맛있는 걸 만들어줘서일까. 저, 먹을 것에 약한가 봐요.”

호르세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칼리오페는 그 침묵을 느끼지 못했다.

“리페.”

“네?”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가 뺨이 콕 찔렸다. 칼리오페는 너무 황당하면 몸이 굳는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지금 나한테 장난친 건가? 장난칠 타이밍이었나? 근데 장난이 맞을까? 볼 찌르기에 내가 모르는 무슨 의미가 있었나?’

온갖 생각이 칼리오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호세 오라버니, 이게 무슨……?”

겨우겨우 묻자 다시 콕콕 뺨을 찌른다.

“말랑말랑하네.”

“…….”

“그러고 보니 리페 아기였을 때 뺨이 너무 찹쌀떡 같아서 만져보려고 했던 적이 있어. 근데 루스 녀석이 못 만지게 하는 거 있지?”

호르세안은 고자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죽여 속닥속닥 이야기했다.

“그래놓고 보란 듯이 자기가 만졌어. 그렇게 안 생겨서 엄청 유치하다니까. 그때 나 엄청 충격받았잖아. 리페는 모를 거야.”

물론 잘 알고 있다. 칼리오페는 그때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했다.

‘저야말로 엄청 충격이었는데요.’

평생 가지고 있던 루시우스에 대한 인상이 단번에 바뀐 순간이었다.

“이제야 좀 애답네.”

호르세안이 다시 한 번 볼을 콕 찌르며 말했다.

“네?”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하고 무슨 마티니 잔이라도 쓰다듬듯이 유리잔을 만졌어.”

이렇게, 하며 호르세안이 칼리오페 흉내를 냈다. 물론 과장되게.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칼리오페가 사색이 되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랬어.”

“그, 그랬을 리가…….”

저런 표정을 짓다니. 말도 안 된다. 항상 정갈한 몸가짐을 하는 칼리오페에겐 큰 충격이었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에 호르세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칼리오페의 눈초리가 뾰족해졌다.

“저 놀린 거에요?”

“아닌데. 진짜로 그런 표정이었어.”

“호세 오라버니 나빠요.”

새침한 말에 호르세안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칼리오페의 볼이 빵빵해졌다.

호르세안은 완전히 평소로 되돌아온 칼리오페를 보고 만족했다.

웃음이 잦아들고서도 실실거리는 그를 보고 칼리오페는 한숨과 함께 표정을 풀었다.

“다시 이야기로 되돌아와서요. 결국엔 능력에 상관없이 귀족 살해를 은폐할 가능성은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 그러니까 어렵다고.”

“물론 특정하는 것은 무리지만, 방해자나 조력자가 은폐할 능력을 가진 건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먼저 말했던 권력자를 조심해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렇지. 제대로 정신이 박혔다면 그런 위험한 다리를 건너는 걸 도와줄 리는 없지만.”

“협박할 수도 있지요.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게 다섯 살이 할 말이냐고.’

호르세안은 따지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그래도 한 마디 덧붙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너무 잘 아는 거 아니야?”

“똑똑한 편이라구 말씀드렸잖아요.”

그리고 괜히 덧붙였다는 생각을 했다.

호르세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칼리오페를 쳐다봤다. 똑똑해서 너무 잘 아는 아이가 당황하는 모습이 보고 싶다.

“최고위 귀족, 성직자, 암흑가의 권력자. 이게 귀족 살해를 은폐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해?”

“네?”

눈을 동그랗게 뜬 칼리오페를 보고 호르세안이 미소 지었다.

“또 있어.”

* * *

“루시우스, 집중해!”

검날이 정확하게 나무 인형의 이마 정중앙에 박혀 들었다.

쩌쩍, 하는 소리와 함께 날이 박힌 곳을 따라 나뭇결이 쪼개지더니 인형이 반으로 갈라졌다.

지켜보던 다른 종기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으면서도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일격이었다.

“검에 감정이 들어가 있다. 아까부터 계속 집중을 못 하고 있어.”

“죄송합니다.”

루시우스는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변명은 없었다. 루스티첼 백작은 아들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다음!”

백작의 호명에 다음 순번인 종기사가 앞으로 나왔다.

연무장 가장자리로 이동해 호흡을 가다듬는 루시우스를 보고 먼저 순번을 마친 종기사들이 혀를 내둘렀다.

“아니, 어떻게 저걸 집중 못 한다고 할 수가 있지?”

“미간 일격으로 완벽하게 두 동강 냈어. 여러 갈래로 쪼개지지도 않고.”

“그만큼 오러를 한 점에 집약적으로 모았다는 거지.”

“그런데도 한 소리 듣다니. 단장님은 엄격해.”

“그래도 단장님께서 이렇게 한 번씩 봐주시고 나면 확실히 벽이 뚫리는 실마리가 보이니까…….”

루시우스에겐 근처에서 떠드는 종기사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호세 녀석……!’

그가 이를 갈았다. 호르세안이 속을 긁어놓고 도망치듯 루스티첼 저로 향한 후로 검을 잡아도 정신이 흐트러졌다. 그래도 어느 정도 마음을 가다듬고 훈련에 임했는데…….

‘왜 갑자기 리페의 찹쌀볼이 생각난 거지.’

검을 내지르는 순간 이상하게 눈앞에 칼리오페의 포동포동 찐빵 같은 뺨이 떠올랐다.

보통 칼리오페 생각이 나면 기분이 좋은데 이상하게 초조하고 짜증이 났다.

‘어서 끝내고 집으로 가야겠어.’

“너희들.”

“어?”

갑자기 눈을 서늘하게 번뜩이면서 쳐다보는 루시우스 때문에 종기사들이 주춤 물러섰다.

“다음 훈련 잘해라.”

루시우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이 햇빛에 반사되어 예기를 내뿜었다.

“단장님 입에서 ‘다시’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어어, 그래……”

고개를 끄덕인 종기사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뭐가 저렇게 살벌하지.”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보통은 얼음 석상이잖아. 저러는 거 처음 봐.”

“호세가 건들 때 빼고.”

“걘 혼날 짓을 하잖아.”

“좀 걱정되는데…….”

“네가 말 걸어 봐.”

“싫어! 무서워! 니가 해!”

“……어쨌든 실수하지 말자. 단장님은 실수 나오면 계속 다시 시키니까.”

“왜 말 돌리냐?”

소리를 낮춘 종기사들이 티격태격했다. 그런 그들을 뒤로 하고 루시우스는 무거운 한숨을 흘렸다.

‘우리 리페의 몰캉몰캉한 뺨……. 어서 만지고 싶다.’

* * *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최고위 귀족, 성직자, 암흑가의 권력자 외의 귀족 살해를 은폐할 수 있는 사람.

“그게 누군데요?”

“글쎄, 누굴까.”

완전히 여유를 되찾은 호르세안이 질문을 되돌렸다. 더 궁금해하라고 그런 건데 칼리오페는 오히려 침착해졌다.

잠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던 그녀가 반짝 고개를 들었다.

“황족이요?”

휘익, 호르세안이 휘파람을 불었다. 대답보다 확실한 긍정이었다.

칼리오페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루스티첼 백작은 공명정대한 백룡 기사단장으로서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다. 직위에 적합하다는 신임일 뿐, 특별히 총애를 받는 것도 아니기에 황가에서 루스티첼 가에 관심이 있을 리 없다.

“가능성의 얘기야. 그럴 능력이 있는 자들을 꼽고 있는 거잖아?”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왜? 라고 생각하면 다른 후보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모르는 어떤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내가 아는 선에서는 모든 후보가 우리 집과 접점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아직도 안 말해줄 거야?”

호르세안의 질문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 말이야.”

진짜 이유. 여전히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지만, 호박색 눈동자가 전에 없이 진지했다.

“역사서를 읽다가 궁금했어요.”

한결같은 대답에 호르세안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 섭섭하네. 나는 우리 리페 질문에 이렇게 성심성의껏 답하고 있는데. 내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말해줄 수 없어요. 말해주기 싫어요.’ 라니.”

칼리오페의 안색이 미안함에 살짝 허물어지는 걸 호르세안은 놓치지 않았다. 호르세안은 번개같이 손을 뻗었다.

꼬집.

칼리오페의 뺨을 살짝 꼬집은 그가 그대로 주욱 늘렸다.

“와, 진짜 잘 늘어난다.”

“호에 오아바니!”

“왜?”

호르세안은 싱글싱글 웃으며 뺨을 잡아당기길 반복하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지만 저지하진 않았다.

‘확실히 미안한가 보네. 평소라면 레이디의 볼을 잡아당기는 건 무례한 일이라고 뭐라 했을 텐데.’

칼리오페의 엄격한 얼굴이 눈앞에 그려졌다. 킥킥 웃은 호르세안이 손을 뗐다.

“이걸로 봐줄게.”

“으…….”

칼리오페가 뺨을 문질문질하다가 말했다.

“호세 오라버니, 인기가 많다구 들었어요.”

“어라, 아부까지 하는 거야? 대가성 청탁은 옳지 않다더니 아첨은 괜찮아?”

완전히 신난 호르세안을 보고 칼리오페는 한숨을 삼켰다.

“기대하셨다면 죄송하지만 칭찬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확인이었어요.”

“……어?”

“호세 오라버니께서 인기가 많다구 들었는데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이요.”

“……그렇구나.”

아, 쪽팔려. 얼굴에 열이 오르는 느낌에 호르세안은 칼리오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물론 그게 사실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칼리오페는 작게 미소 지었다.

호르세안은 굉장히 사교적인 성격에 인기도 많아서 고위 가문의 귀한 레이디들도 그에게 연애편지를 보내곤 했다.

‘전생의 일이지만 오라버니도 이제 열두 살이니 슬슬 편지가 오고 가겠지?’

당연히 고위 가문의 생리에 관해 더 잘 알 터.

회귀 전, 칼리오페는 사교 활동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 더더욱 두문불출했다.

‘물론 내가 사교 활동을 열심히 했어도 최고위 귀족을 만나진 못했겠지만.’

초대장이 오는 가문은 정해져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루스티첼 가는 보상금과 관련해 대단히 불명예스러운 오해를 받고 있었다.

“후작가의 레이디께도 편지를 받으셨나요?”

“어?”

받았구나. 완전히 당황한 호르세안의 얼굴이 답이었다.

“오, 오해야! 나는 아직 그런 데 관심 없어!”

호르세안은 자신이 왜 변명하는지도 모르는 채 서둘러 말했다. 전생에서 호르세안을 둘러싼 오각 관계를 알고 있는 칼리오페로서는 전혀 납득가지 않는 말이었다.

‘네 명의 레이디에게 모두 뺨을 맞는 걸로 끝났다고 했지.’

“네에, 그렇군요…….”

“진짜야!”

대충 대답하자 호르세안이 안달을 냈다.

“네에, 믿어요.”

‘아까 오라버니를 믿는다고 했을 때랑은 전혀 다르잖아! 눈에 영혼이 없다고!’

호르세안은 더 따지는 걸 포기했다.

“그런데 그게 왜?”

“얼마 전에 제가 서모나 부인의 피크닉에 다녀왔는데요.”

‘설마…… 거기서 나 좋다고 했던 영애들이 싸우는 걸 봤나?’

호르세안은 마른 침을 삼켰다. 하지만 라라가 하녀 모임에서 듣기로는 별문제 없었다고 했다.

‘특이한 일이라면 가정교사 제이드 경…… 아니, 그 자식이 퇴출당한 건데.’

그 사건을 제외하면 시종일관 분위기도 좋았다고 들었다.

칼리오페는 칸테나 부인에게 똑똑하다고 칭찬받은 데다가 돌아와서 각 가문에게 딸기 타르트를 차고 넘치도록 받았다고 했다.

‘뒤에서 그 자식이 뭐라고 했나?’

“무슨 일 있었어?”

걱정스러운 질문에 칼리오페가 호르세안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었다. 사하르네 부인을 봤으니까. 속가를 부르는 모습도 누군가에게 들켰고 새삼스레 가문이 약하다고 생각했던 건 사하르네 부인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물론 최고위 사교계를 두 눈으로 보고 느낀 것도 있다.

“아니요. 모두 친절하셨어요.”

“응, 그런데 왜?”

뭐든 말해 봐, 하는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그냥, 최고위 귀족들의 사교계는 굉장히 폐쇄적이라구 들었는데 막상 겪어보니 그렇지 않은 게 신기해서요.”

그제야 호르세안의 얼굴에서 걱정이 사라졌다.

“당연히 폐쇄적이야. 아무래도 고위 귀족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은데, 그 중의 대다수가 친해져서 득 될 것 없는 사람들이니까. 뭐, 보수적인 문화도 있고.”

칼리오페의 표정을 본 호르세안이 푸흐, 웃음을 흘렸다.

“뭐가 문제야?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야. 안면 트는 게 어렵긴 하지만…….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가씨가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딱딱하게 굴 수 있겠어.”

호르세안이 칼리오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손가락으로 꼬며 장난쳤다.

“벽이 있는 건 사실이야. 그렇다고 너한테까지 벽을 세우는 건 웃기지 않겠어? 물론 어리다고 해서 다 오케이인 건 아니지만.”

“제겐 결격사유가 없으니까요. 게다가 서모나 부인이 무척 호의적이구.”

칼리오페가 작게 수긍했다.

강한 권력 가문은 아니나 유서 깊은 루스티첼 가. 백룡 기사단장인 아버지. 그리고 최고위 사교계에서도 중심축인 서모나 부인의 호의.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니, 폐쇄적인 만큼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결격사유 운운하는 대꾸에 호르세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아니, 그냥 네가 사랑스러워서라는 말이었는데.”

칼리오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시겠죠.”

“안 믿네.”

불퉁하게 중얼거린 호르세안이 팔짱을 꼈다.

“이유는 혼자서 찾았잖아. 결격사유도 없고 서모나 부인도 네게 호의적이고.”

“그것만으로 선 안으로 들이진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폐쇄적이라는 말도 없었겠지요.”

“그렇지. 그러니까 말했잖아. 넌 그 까다로운 귀부인들의 마음에 든 거라구.”

호르세안이 칼리오페의 콧등을 톡 쳤다.

“넌 너무 자각이 없어.”

자각? 칼리오페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 모습에 호르세안이 코끝을 살짝 꼬집었다.

“아야…….”

칼리오페는 코를 문지르며 울상을 지었다. 호르세안이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호의였구나. 아무런 사심도 없는, 순수한 마음.’

연달아 안 좋은 일만 생겼던 전생. 그 탓에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헤헤, 작게 웃는 칼리오페를 보고 호르세안이 픽 웃었다.

“겨우 깨달았네. 똑똑하다더니 이런 데선 둔하지.”

“아직두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선 잘 모르겠어요.”

“사람 속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똑똑한 거야. 안다고 생각하는 게 바보지.”

‘방금 둔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황당했지만 호르세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한순간에 돌변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으니까.

“아, 또 여쩌보구 싶은 게 있는데, 백룡 기사단이요.”

“그건 내가 말하기 좀 그렇지 않아?”

“아직 묻지도 않았는데요.”

“뭘 물을지 아니까.”

방금까지 루스티첼 가를 무너트릴 수 있는 강한 권력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백룡 기사단에 대해서 물을 건 단 하나, 황실의 사룡 기사단 중 하나인데 왜 권력이 없는가뿐이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대답하기 힘들어요?”

“왜긴…….”

백룡 기사단의 단장이 루스티첼 백작이다.

‘아무리 내가 백룡 기사단 소속이라고 해도……. 아빠가 수장으로 있는 직장에 대해 내가 왈가왈부하는 건 좀 그렇지.’

호르세안은 농담을 즐겼지만, 그 어느 순간에도 선을 넘은 적이 없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압니다. 하지만 호세 오라버니는 어떤 말을 해도 괜찮아요.”

‘또다.’

흔들림 없는, 올곧은 눈동자. 호르세안은 할 말을 잊었다.

“호세 오라버니는 무시하거나 얕잡아보거나 그러지 않잖아요.”

그거야 당연하다. 그런 사람들을 싫어하니까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게 누군가의 입에서 확신에 차 나올 줄은 몰랐다.

“있는 사실 그대로 말씀하실 거잖아요.”

호르세안은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이 나온다.

‘난 아직 용기가 부족한가 보다.’

자신을 믿을 용기. 남을 믿을 용기.

그리고 무엇보다, 칼리오페의 이 맹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믿음이 사라질까 봐…….

씁쓸함을 언제나와 같은 미소로 덮어버리고 말을 돌렸다.

“루시우스 녀석한테 물어보지 그래?”

“안 돼요.”

단호한 대답이었다. 고개까지 내저은 칼리오페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루스 오라버니는 안 돼요. 걱정할 거야 당연하구 저를 너무 많이 생각하니까…….”

루시우스는 며칠간 잠도 못 자고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답을 알아낼 때까지 날 지켜보겠지.’

칼리오페가 보기에 루시우스는 자신을 지나치게 보호하려는 경향이 있다.

“음, 날 의지해주는 건 고마운데 말이야.”

호르세안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나도 하는데.”

“네?”

칼리오페가 되물으며 고개를 들었다. 들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어?’

이런 호르세안의 얼굴은 처음이다. 호박색 눈동자가 전에 없이 진중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네 생각.”

* * *

“오늘 대체 왜 그랬느냐.”

말을 가까이 붙이며 묻는 루스티첼 백작의 물음에 루시우스가 고개를 숙였다.

오늘 훈련은 엉망이었다. 검로는 정확했고 예리하게 표적을 꿰뚫었지만, 그건 기술일 뿐이다.

“……죄송합니다.”

“그 말을 듣고 싶어서 물어본 게 아니다.”

루시우스는 고개를 돌려 백작을 바라보았다. 새삼 아버지가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이렇게 네 속마음에 대해 말해보아라, 무슨 문제가 있느냐, 라고 묻지 않았다. 세심하고 다정해지셨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겠지.’

원인도 같다.

‘리페…….’

칼리오페에 대해 생각하자 다시 얼굴에 초조함이 묻어나왔다.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조금씩 빨라진다.

“호세가 집에 방문한다고 해서 신경이 쓰였을 뿐입니다.”

루스티첼 백작은 험험, 하고 웃음을 참으며 턱을 쓸었다.

‘짐작은 했지만 진짜라니……. 너도 참 어지간하구나.’

그는 당연히 호르세안이 루스티첼 저에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에피니 역시 함께 오는 것도.

항상 냉정한 아들이 초조해하는 것은 참 드문 일이라 루스티첼 백작은 에피니에 대해서 입을 다물었다.

‘에피니를 보고 벙찐 모습도 기대되고 말이지.’

과연 그게 표정으로 드러날지는 모르겠지만 동요는 할 터.

칼리오페를 키우며 자식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부모의 기쁨도 알게 된 백작이었다.

‘호세 녀석 혼자 온다고 했으면 절대 허락 안 했을 거다, 요놈아.’

그는 아들보고 어지간하다고 할 위인이 아니었다.

루스티첼 저에 들어서던 루시우스는 연무장 쪽에서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로베르트?’

리페랑 같이 있나? 말을 마구간지기에게 맡기고 서둘러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루스티첼 백작 역시 아들의 새로운 얼굴을 구경하기 위해 함께 갔다. 물론 어여쁜 딸을 서둘러 보고 싶다는 마음도 컸다.

“어때?”

로베르트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모퉁이를 돌자 탁 트인 연무장이 나타났다.

으쓱으쓱하며 가슴을 당당히 내민 로베르트 앞엔 붉은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앙증맞게 묶은—

‘에피니?’

에피니의 모습에 루시우스가 눈매를 좁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었지만 루시우스는 빠르게 상황을 이해했다.

‘호세 녀석, 리페와 에피니를 친구 만들어줄 생각이었으면 진작 그렇게 얘기할 것이지.’

제 반응을 보고 즐기려고 말하지 않은 게 분명하다. 루시우스는 이를 갈았다.

‘그런데.’

나란히 선 두 부자는 똑같은 의문을 느꼈다.

‘리페와 호세는 어디 있지?’

연무장 어디에도 호르세안과 칼리오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까지 느긋하던 루스티첼 백작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루시우스야 말할 것도 없다.

‘대체 왜 따로 있는 거지? 따로 있더라도 리페와 에피니가 같이 있고 로벨과 호세가 같이 있어야지!’

당황한 두 부자가 얼어있는 사이 에피니가 로베르트에게 졸랐다.

“나도, 나도 해볼래!”

“안돼.”

“해볼 거야!”

“안 돼!”

로베르트는 에피니 못지않은 사고뭉치였지만 검에 관해선 엄격하게 교육받았다. 다룰 줄 모르는 사람에게 검을 건네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에피니를 피해 뒤로 물러서던 그가 아직도 얼어있는 두 부자를 발견했다.

“아부지! 형아!”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루시우스가 빠르게 물었다.

“리페는?”

“응? 방에 있어.”

“호세는? 설마 같이 있나?”

“아마 그럴걸?”

대답한 로베르트가 볼을 부풀렸다. 생각해보니 이건 리페한테 자랑하려고 했던 건데! 옆에서 ‘니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어!’하고 계속 외치는 바람에 정신이 팔렸다.

‘보여줘도 속임수라고 하고 말이야! 이젠 겨우겨우 믿는 거 같지만.’

“리페도 불러와야겠다!”

로베르트가 신이 나서 말했다.

‘어서 우리 리페한테도 자랑해야지!’

칼리오페가 반짝반짝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졌다.

‘로벨 오라버니 대단해요, 해줄까? 해주겠지? 해줄 거야.’

단숨에 저택으로 뛰어가려는데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로베르트는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검을 등 뒤로 빼며 훌쩍 물러섰다.

어느새 루스티첼 백작이 에피니의 허리를 달랑 안고 있었다.

에피니는 당황했다. 로베르트가 딴 데 신경 쓰는 틈을 타 검을 뺏으려 했다. 그런데 손을 뻗는 순간, 로베르트는 이미 저만치 물러나 있고 자신은 루스티첼 백작의 품에 안겨 있었다.

로베르트가 움직이는 거야 눈으로 봤지만 루스티첼 백작이 다가오는 건 전혀 몰랐다.

‘뭐지? 뭐가 어떻게 된 일이지?’

에피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장난치다 잡힌 새끼고양이처럼 등을 곧추세운 채 바짝 굳은 모습이었다.

“에피니.”

루스티첼 백작이 에피니를 땅에 내려놓으며 엄하게 불렀다.

자신의 계획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것을 깨달은 에피니가 심통 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루스티첼 백작은 자신의 커다란 몸집에도 주눅 들지 않은 아이의 모습에 놀랐다.

원래라면 따끔하게 한마디 해서 다시는 위험한 짓을 하지 않게 해야겠지만…….

자그마한 아이 위로 칼리오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 검은 무겁고 위험하다. 해보고 싶다면 저기 있는 목검으로 해보는 게 좋겠구나.”

루시우스가 냉큼 목검을 가지러 갔다. 엘피너스 저에 자주 갔던 그는 에피니의 고집을 잘 알고 있었다. 목검이 싫다고 난리를 치면 아무도 감당 못 한다. 울고불고하는 상태가 여섯 시간 지속된 걸 본 적도 있다.

‘그 일곱 시간도 내가 엘피너스 저를 나왔기 때문에 거기까지만 본 거지. 그날 몇 시간 동안 울었는지는 미스터리야.’

다음날 핼쑥한 호르세안에게 넌지시 물었지만, 그 순간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답을 듣지 못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공황에 빠질 정도로 에피니의 생떼는 엄청나다는 건 깨달았다.

강한 대련 상대를 두고도 단 한 번도 긴장해본 적 없는 루시우스가 에피니에게 목검을 내밀면서는 긴장했다.

다행히 에피니는 군말 없이 목검을 받아들었다. 루시우스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어깨가 살짝 늘어졌다.

목검을 한 손에 든 에피니가 빈손을 대각선으로 높게 뻗었다. 자그마한 손이 쫙 펼쳐진다. 그 다음은 박수가 나올 정도로 멋진 동작이 이어졌다. 착착착, 각이 다 살아있다.

“오오오!”

로베르트의 감탄에 에피니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바닥을 향해 강하게 검을 내리꽂았다.

“솟아라, 자이언트 스피릿!”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이얍! 이얍! 이얍!”

에피니는 몇 번 기합을 내지르며 다시 목검 끝으로 바닥을 찔렀다.

하지만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안 되잖아.”

“당연하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로베르트가 으쓱으쓱하며 턱을 높게 치켜들었다.

“흥.”

에피니는 목검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곤 로베르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역시 그 검으로—”

“에피니.”

루시우스가 서둘러 에피니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검을 안 내주면 여섯 시간 동안 울고불고 난리 칠지도 모른다.

‘에피니의 주의를 돌려야 해.’

그런데 어떻게 하지? 루시우스는 당황했다. 그는 나름대로 애 보기에 자신 있었다. 매일 밤 칼리오페에게 책을 읽어주었고, 잘 쓰다듬어 주었고, 잘 안아주었다. 칼리오페는 으아아앙 울며 떼쓴 적 한 번 없이 그를 잘 따랐다.

분명 육아 숙련자일 텐데, 동생 돌보며 한 번도 울린 적이 없는데. 에피니의 관심을 돌릴 방법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왜? 아! 그 검 주려구?”

에피니가 루시우스의 허리춤에 메인 장검을 가리키며 반색해서는 물었다. 그가 반사적으로 허리를 뒤로 빼자 에피니의 눈에 독기가 올랐다.

‘이런…….’

루시우스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붉은 눈썹이 한데 모이며 볼이 부풀어 올랐다.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곧 터진다.

그 순간이었다.

“아, 여기 다들 계셨네요.”

칼리오페가 연무장에 들어서며 생긋 미소 지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에피니는 놀랐지만, 그렇다고 떼쓰는 걸 멈추면 그건 에피니 엘피너스가 아니었다.

사뿐사뿐 걷는 칼리오페를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지만, 그 뒤에 따라오는 호세를 보니 어쩐지 더 열이 받았다.

‘바보 호세!’

에피니는 숨을 흡 크게 들이마시고 배에 힘을 줬다.

“어머나, 엘피너스 영애!”

“네, 넷?!”

반사적으로 대답한 에피니가 입을 꾸욱 다물었다. 왠지 존댓말로 대답해버렸다.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떨렸다.

드물게 큰 소리를 낸 칼리오페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얼굴이 살짝 희게 질려 있는 데다가 굳은 표정이 화가 나 보였다.

‘뭐, 뭐지? 왜?’

에피니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 상태 그대로 서 있었다. 누가 화를 내면 더 크게 화를 내는 게 평소 그녀였는데 이상하게 맞받아쳐야 한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칼리오페를 본 건 고작 한 시간 남짓이지만, 이게 특이한 일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칼리오페가 에피니 앞에 서서는 그녀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쫙 훑어보았다.

에피니는 주먹을 꽉 쥐었다.

“괜찮으세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 무슨…….”

칼리오페는 이제 에피니의 등 뒤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재차 물었다.

“다치진 않았어요? 손 줘봐요.”

“아, 안 다쳤는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에피니는 얼떨떨해서 손을 내밀었다.

“다행이다.”

안 다쳤다는 말에도 꼼꼼히 손을 살핀 칼리오페가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에 손을 착, 얹었다.

“엘…… 에피니 온니.”

“어?”

“검술 안 배웠지요.”

“으응…….”

“그럼 검 잡아두 돼요, 안 돼요.”

“안…… 아니, 내가 검 잡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왠지 모르게 압도당해서 멍하니 대답하던 에피니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아이를 내려다 보며 인상을 팍 찡그렸다.

“상관이 왜 없어요?”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하며 에피니를 올려다보았다.

에피니는 이유도 모른 채 주춤했다. 신경질이 가득했던 얼굴이 당황인지 뭔지 모를 감정으로 살짝 펴졌다.

“온니가 다치면 슬퍼요.”

마주친 눈동자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칼리오페의 얼굴은 다정하다기보단 엄격했다.

“그러니까 목검을 들구 싶으시면 우선 기초 체력부터 단련하세요. 다행히 이번엔 상처 안 났지만, 목검 휘두르다 놓치면 손에서 피나요.”

에피니는 입을 헤, 벌린 채 칼리오페를 쳐다봤다.

천천히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해하고 나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에피니뿐만 아니라 그녀가 목검을 한 손으로 들고 착착착 박자, 각도 맞춰가며 휘둘렀던 걸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침묵했다.

“크흠, 리페.”

루시우스가 조용히 다가와 칼리오페를 불렀다.

“에피니는 목검을 놓친 게 아니야. 던진 거다.”

“네……?”

칼리오페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에피니와 그녀 곁에 떨어져 있는 목검을 번갈아 쳐다봤다.

“던졌다구요?”

“응.”

“이거 무거운데……?”

로베르트가 어릴 때 쓰던 거라 작긴 하지만 일곱 살 여자아이가 들기엔 묵직했다. 그것도 귀족으로 태어나 유아용 식기보다 무거운 것을 들어본 적이 없는 아이라면 더더욱.

칼리오페만 해도 유리잔을 들지 못해서 호르세안이 바로 앞에 놓아주지 않았던가.

‘아무리 에피니가 나보다 두 살 많다고 해도…….’

칼리오페는 가느다란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근골이 아빠를 닮은 두 오빠들과 달리, 그녀는 엄마를 닮아 선이 가늘었다.

“하나도 안 무거운데? 가벼운 건 아니지만.”

에피니가 목검을 주워서 붕붕 휘두르며 말했다.

“정말이네요. 대단해요!”

“흥.”

감탄하자 에피니가 목검을 턱 어깨에 걸쳤다. 입꼬리가 비죽 올라가 있다.

“에피니, 검술을 배운 적 없다고 했지. 그럼 다른 훈련을 받은 적 있나?”

“아니요.”

루스티첼 백작의 물음에 에피니가 고개를 저었다.

백작은 에피니가 목검을 들 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 다섯 살의 로베르트가 가뿐하게 들던 것이라 루시우스는 별생각 없었겠지만 백작은 달랐다.

“에피니가 힘 하나는 장사거든요.”

호르세안이 설명했다. 오늘 루스티첼 저에 오면서 에피니에게 맞았던 부위가 아직도 욱신욱신했다.

‘거기다 체력도 장난 아니지.’

신생아가 아닌 이상에야 열 시간 동안 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호르세안.”

낮고 차가운 부름에 호르세안이 찔끔했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여어.”

어색하게 웃으며 아는 체를 하자 루시우스가 삐딱하게 웃었다. 호르세안은 서둘러 변명했다.

“아니, 나는 에피니랑 리페가 친구 되면 좋을 거 같아서…….”

“그런데 왜 니가 리페랑 같이 있고 에피니는 로벨이랑 같이 있던 거냐.”

호르세안이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슬금슬금 에피니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게? 리페가 나한테 같이 있자고 그랬어. 역시 내가 좋나 봐!”

그리고 태도가 돌변하는 것과 동시에 에피니를 달랑 들어 올렸다.

“이만 가봐야겠다! 가자, 에피니!”

“뭐? 난 좀 더…….”

에피니가 바동거렸다. 그러다 칼리오페와 눈이 딱 마주쳤다. 말문이 턱 막혔다. 에피니는 고개를 휙 돌리고 바동거리는 것을 멈췄다.

‘얘가 웬일이지?’

얌전해진 에피니를 보고 호르세안이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급한 게 있다.

“그럼 단장님, 기사단에서 뵙겠습니다. 로벨, 너도 어서 기사단에서 봐야지.”

“아직 나이가 안되는걸. 그래도 곧 보게 될 거야!”

주먹을 꼭 쥐고 하는 말에 호르세안이 피식 웃었다.

“오늘 즐거웠어, 리페.”

‘저게 어디서……!’

루시우스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호르세안의 품에 깐딱깐딱 들려있는 에피니를 보고 참았다.

‘아니, 에피니도 에피니지만—.’

그는 칼리오페를 곁눈질했다.

‘저번에 초콜릿 때문에 싸운 오빠가 됐는데 이번엔 또 뭐가 될지 모르니까.’

칼리오페는 등 뒤에서 오빠가 한기를 내뿜고 있다는 걸 전혀 몰랐다.

묘하게 평소보다 기쁨에 차 싱글싱글 웃는 호르세안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을 뿐이다.

“저두 즐거웠어요, 오라버니. 또 놀러 오세요.”

또 놀러 오라는 말에 루시우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진짜 호세가 좋은가?’

리페가 자기랑 같이 있어 달라 했다고, 날 좋아하나보다고 말하던 호르세안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그러고 보니 꼬마애들은 어른들을 좋아한다고 했던 것 같다. 아빠나 엄마, 혹은 선생님과 결혼하고 싶어 한다고…….

루시우스와 호르세안은 이제 열두 살. 어른들이 보기엔 똑같은 애들이었지만, 열두 살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어른이었다.

호르세안은 루시우스의 망연자실한 무표정에 웃음을 참느라 갈비뼈가 아릴 정도였다.

루시우스의 동요를 알지 못하는 칼리오페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저 또래 친구를 만들어주려고 일부러 배려해줬는데, 정작 호르세안과 이야기하느라 제대로 시간을 못 보낸 것이 미안했다.

‘그래도 에피니가 즐거운 시간을 보낸 거 같아서 다행이야.’

“그럼 내일 보자, 루스.”

쾌활하게 인사한 호르세안이 연무장을 나섰다.

그는 몰랐다. 그곳에 있는 막둥이 바보는 루시우스뿐만이 아니었다.

‘뭐지, 왜 기분이 나쁜 거지?’

뒷머리를 긁적이는 로베르트야 당연히 그에게 위협대상이 아니었다.

다만.

‘호르세안 엘피너스……!’

레드불, 철혈의 기사, 백룡의 빙벽.

다양한 이명으로 불리는 루스티첼 백작이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도 뜨거운 눈으로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물론 그 이명보다 더 호르세안에게 큰일인 것은 따로 있었다.

루스티첼 백작은 그의 직장 상사였다.

그리고 그날 밤.

“어머나, 호세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

남편의 말을 듣던 루스티첼 부인이 후후, 웃으며 되물었다.

“부, 부인 일단 그것부터 놓고…….”

“어머.”

루스티첼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안의 물건을 놓았다.

“아팠어요?”

“괜찮소.”

루스티첼 백작이 허리를 세우고 부인에게 가볍게 키스했다.

‘사실은 안 괜찮지만…….’

아무리 대단한 기사여도 단련할 수 없는 신체 부위라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팠지만, 사랑스러운 부인에겐 결코 티를 낼 수 없었다.

* * *

루스티첼 백작이 명성 높은 기사조차 피해갈 수 없는 고통을 겪기 두 시간 전.

칼리오페는 침대에 앉아 손수건을 꺼내보고 있었다. 서모나 가의 피크닉에서 동백나무에 묶여있던 바로 그 손수건이었다.

여전히 감촉은 녹을 듯이 매끄러웠고 희미한 사이드 램프의 불빛에도 아름다운 광택이 흘렀다.

‘대체 누굴까. 그리고 무슨 의미일까.’

상념에 잠기려는 찰나 똑똑,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방문할 사람은 정해져 있다.

칼리오페는 손수건을 곱게 접어서 협탁 서랍에 집어넣었다.

“들어오세요.”

아니나 다를까 열린 문틈 사이로 루시우스가 들어왔다. 손에는 책이 들려 있었다. 그런데 평소보다 책이 많았다.

‘다 못 읽을 텐데……?’

“고르지 못 하겠어서.”

의문에 찬 시선을 느낀 루시우스가 말했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루시우스는 협탁에 책을 내려놓고 이불을 다시 꼼꼼히 덮어주었다. 그러곤 칼리오페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리페가 골라 볼래?”

“좋아요.”

칼리오페는 루시우스가 보여주는 책 제목을 유심히 살폈다.

그런데.

‘……으응?’

<연말 파티는 가족과 함께>, <남자, 절대 믿지 마라>, <피는 물보다 진하다>.

책 제목 상태가 이상했다.

“이게 대체 무슨…… 책이에요?”

독서가인 칼리오페도 처음 보는 책이었다. 비슷한 종류의 책조차 본 적 없다.

<연말 파티는 가족과 함께>,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대강 가족의 중요성을 다룬 책이라는 건 알겠다.

‘그런데 대체 <남자, 절대 믿지 마라>는 무슨 내용이지?’

“요즘 평민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책이래. 전에 평민의 문화에도 관심 있다고 했잖아.”

“그랬지요…….”

고개를 끄덕였지만 전혀 납득할 수 없었다.

‘이런 책은 냄비 받침으로 쓸 거 같은데…….’

전생에서 잠깐이나마 평민들과 어울렸던 칼리오페는 그들의 정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평민에 관해서 잘 알 리가 없으니까……. 평민들이 보는 책 중에서 눈에 띄었나 보다.’

칼리오페는 평민의 진짜 유행에 대해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어쨌든 그녀를 생각해서 고른 책이니까.

“그럼, <남자, 절대 믿지 마라>로 부탁드려요.”

무슨 내용인지 예상 가능한 두 책과 달라서 궁금했다.

“탁월한 선택이다. 다른 책은 다음에 읽어주도록 하지.”

‘그럴 필요는 없는데요…….’

가족의 중요성은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칼리오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조용한 방안에 루시우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책을 집어 든 독자는 분명 남자에게 배신당했거나 곧 배신당할 것이다. 배신당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배신당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당신, 당신이야말로 가장 큰 배신을 겪을 것이다. 당신은 남자를 믿고 싶다. 하지만 의심이 생겼다. 이 의심을 부정했지만 결국 떨쳐내지 못했다. 그래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배신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미련을 못 버리는 것이다. 이게 바로 당신이 큰 배신을 당하게 될 이유다. 당신에게 말한다. 당신의 의심은 옳다. 그 남자를 믿지 말아라. 절대로.”

칼리오페의 동공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루, 루스 오라버니?! 남자에게 배신당하셨나?’

책을 읽는 루시우스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고저 없이 낮았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평소와 달랐다.

칼리오페를 쳐다보며 이 책이 옳다는 양 진중하게 눈을 마주치기도 했고, 고개를 끄덕이는가 하면,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처럼 이를 악물기도 했다.

‘기사단에서 문제가 있었나? 오라버니 교우관계는 잘 모르는데……. 전생에서 호세 오라버니 말고는 딱히 가까이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게 친구한테 크게 배신당해서였나?’

루시우스가 책을 읽는 동안 칼리오페의 고민은 점차 깊고 심각해졌다.

‘그래도 호세 오라버니가 있어서 다행이야.’

칼리오페는 결코 서로를 배신하지 않았던 두 사람을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호세 녀석……!’

그리고 루시우스 역시 호르세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책 속에 나온 예시에서 자꾸만 호르세안의 모습이 보였다. 이 책의 저자는 호르세안을 관찰하고 쓴 것이 분명하다.

‘모든 여자에게 친절한 것은 곧 모든 여자에 대한 배신이나 다름없다’는 대목에서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리페, 제목에서부터 느꼈지만 이 책은 아주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챕터 하나를 다 읽은 루시우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군요…….”

칼리오페는 뭐라 말할 수 없어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루시우스를 걱정하느라 책 내용의 반은 못 들었다.

그 후로 루시우스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게 칼리오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불 속에서 손을 꼼지락 꼼지락하던 칼리오페가 꼬물꼬물 침대 가장자리로 몸을 옮겼다. 루시우스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커다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아직 자신은 어리니 의지가 되지 않을지 몰라도, 고민을 털어놓았으면 좋겠다. 전생에서는 그런 걸 바라기 힘들었지만 달라진 관계만큼 더 바라도 되지 않을까.

‘어린아이니까 이해 못 할 테니 편하다는 생각으로 털어놓아도 좋아. 대화 상대로 여겨주지 않아도 루스 오라버니한테 힘이 되어줄 수만 있다면.’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루시우스가 입을 열었다.

“리페.”

“네.”

칼리오페는 마른침을 삼켰다.

“낮에 호세와 무슨 이야기를 했어?”

“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칼리오페가 입을 벌렸다. 그 당황한 모습에 루시우스는 더 초조해졌다.

사실 그는 아까부터 칼리오페에게 이 질문을 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비밀입니다.”

어쩐지 칼리오페의 목소리가 뾰족했다.

“비밀?”

“말 안 해드릴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이불 속으로 얼굴을 쏙 숨긴다.

“리페?”

칼리오페가 이런 적은 처음이다. 루시우스는 당황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불을 들치려고 했지만 칼리오페가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조금만 힘주면 손쉽게 딸려오겠지만 억지로 그러긴 싫었다.

“리페.”

“…….”

불러도 대답이 없다. 대신 이불의 볼록 솟은 부분이 꿈지럭대더니 점점 멀어진다.

‘삐진 건가.’

이런 칼리오페가 처음이라 당혹스러우면서도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리페, 내 동생.”

루시우스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원래도 칼리오페에게 말할 땐 온기가 스몄으나 지금은 그보다 더 따스했다. 그래 봐야 보통 사람에 비하면 한참 딱딱했다. 하지만 칼리오페에겐 그 차이가 극명하게 느껴졌다.

“얼굴 보여줘.”

루시우스가 이불 위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정확히 칼리오페의 코끝이 있는 부분이었다.

“보여주지 않을 거야?”

대답 대신 칼리오페가 휙 돌아누웠다. 루시우스는 픽 웃곤 이불째로 칼리오페를 안아 들었다.

“흐아?!”

칼리오페가 비명을 질렀다. 이불이 흘러내리고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항상 단정했던 머리칼은 정전기에 잔뜩 흐트러진 데다가 얼굴은 평소와 달리 흐물흐물 다 풀려 있었다.

“풋!”

결국 루시우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얼빠져 있던 칼리오페가 정신을 차렸다.

“왜, 왜 웃으세요.”

루시우스의 웃음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큭큭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안겨 있는 칼리오페의 몸도 들썩였다.

칼리오페의 두 뺨에 못마땅함이 가득 들어찰 무렵, 루시우스가 답했다.

“좋아서.”

에? 칼리오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페 얼굴 보니까, 좋아서.”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짓는 얼굴이 반짝였다. 사이드 램프의 주홍빛이 소년의 부푼 뺨을 잔잔하게 물들였다.

칼리오페는 몸에서 힘을 풀었다. 오빠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고 폭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뻔한 말 돌리기였지만 봐줄까.’

칼리오페는 루시우스가 말 돌리느라 호르세안에 관해 물었다고 오해했다.

전혀 의지하지 않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했다. 아니, 사실은 의지가 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이제 자야지.”

루시우스가 칼리오페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책 읽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벌써 시간이 늦었다.

“……오라버니.”

“응.”

“내려주셔야 잠을 자지요.”

자라고 하면서 한참 동안 안고 있는 루시우스였다.

그는 아쉬움이 남는 손길로 칼리오페를 침대에 눕혀주었다. 이불도 꼼꼼히 덮어주고 이마에 키스했다.

“잘자, 내 동생.”

“안녕히 주무세요, 오라버니.”

사이드 램프가 꺼지고 곧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오페는 감았던 눈을 반짝 떴다.

‘뭐지?! 루스 오라버니 저런 모습은 또 처음인데……!’

얼굴 보여달라든가, 얼굴 보니 좋다든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말 자체를 못하는 줄 알았어.’

전생보다 더 다정해지고 더 친밀해지긴 했지만, 루시우스는 루시우스다. 이제 열두 살인데 벌써부터 얼음 기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런데 그런 오라버니가—

[리페 얼굴 보니까, 좋아서.]

미소 짓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진짜로 상상도 못 했어. 아무리 변해도 그 루스 오라버니가 그런…….’

방을 나선 루시우스 역시 칼리오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칼리오페가 삐지다니…….’

그는 묘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입매가 부드럽게 풀리고 걸음이 의기양양했다. 삐진 동생이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워 호르세안에 관한 것은 까맣게 잊었다.

저택을 소등하던 하녀들이 그의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리페 아가씨 방에 다녀오셨구나……!’

칼리오페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녀 역시 분명히 변하고 있었다.

* * *

‘시간을 돌아오기 전과 지금은 달라.’

루시우스의 엄청난(?) 변화를 몸소 체험한 칼리오페는 새삼 실감했다.

가족들 간의 관계도 그렇지만,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낮에 호르세안과 했던 대화를 상기했다. 전생에서 최고위 귀족들의 호의는, 아니, 호의 이전에 그들과 인연 자체가 없었다.

‘전생보다 상황이 나아졌어.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첫 생일을 맞이했을 때 결심했다. 너무 과거에 매몰되지 말고 가족들이 살아있는 현재를 즐기자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행복한 일상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그 결과 참극의 실마리에 한 발짝 다가가게 되었다. 고위 귀족 중에 범인이 없더라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백룡 기사단…….’

호르세안은 칼리오페의 생각대로 치우침 없이 기사단에 대한 사실을 말해줬다.

‘우리 가문은 강해져야 해.’

그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돈과 권력.’

돈만 있으면 무시당하는 졸부가 된다. 권력가에 태어나도 돈이 없으면 허수아비가 된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공을 세우거나 황궁 보직에 진출하는 게 좋은데…….’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포석을 깔 순 있지.’

어둠 속에서 칼리오페의 눈이 반짝 빛났다.

‘나는 앞으로 성공하게 될 수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어.’

귀족 사회에서 인맥은 때로 상상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 힘들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힘들지언정 불가능하진 않다.

‘……정말로 순수한 호의였으니까.’

미심쩍어했지만, 반갑게 맞아주고 딸기 타르트를 선물해준 부인들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성공할 사람……. 그러고 보니 힐데르트도 크게 성공하지.’

힐데르트는 가문도 대명문 서모나 가이지만, 19살에 아프락스 궁에 들어갈 정도로 뛰어난 인재다.

전생에서는 그저 스쳐 지나간 사이였는데 어느새 소꿉놀이하는 사이가 되었다. 날카로운 첫사랑의 추억도 실시간으로 감상 중이고.

‘친구……인가.’

무의미하게 이불 귀퉁이를 쓰다듬던 칼리오페의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다.

다시 이불 귀퉁이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은 아까보다 훨씬 부산스러웠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책을 더 좋아하다 보니 칼리오페에게 친구라고 부를 존재는 없었다. 같이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는 또래는 있었고 그들을 친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려운 때에 도움을 청하거나 위로받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은 아니다. 다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도와주지도, 진심으로 걱정하지도 않을 거라는 걸.

‘그게 서운하진 않아.’

자신이 그들에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았던 것처럼 그들 역시 그랬던 것이니까.

각자의 상황과 이해가 일치해 어울렸다. 교류하니까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아니었다.

‘힐데르트랑 될 수 있을까? 진짜 친구.’

어린아이로밖에 안 보여서 교우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나도 어린아이잖아.’

작은 손이 이불을 꽉 붙잡았다.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칼리오페는 그 상태로 차오르는 감정들을 눌렀다.

‘일단 지금은 그런 거 생각할 때가 아니야.’

현재를 즐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어.’

좋은 방향이었다. 앞으로도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해야겠지만.

좋은 첫인상보다 그걸 유지하는 게 훨씬 더 어렵다.

칼리오페는 가문에 힘이 되어줄 만한 권력자들의 이름을 속으로 몇몇 꼽아보았다.

‘그럼 다음은 돈인가.’

미래에 권력을 쥘 인물들을 알고 있듯이 큰 성공을 거둘 사업체 몇 개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 가문이 투자하면 망할 거야.’

전생에서 루스티첼 가가 투자한 사업체는 총 다섯. 투자수익은 적었지만, 그만큼 안전하고 견실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중 세 곳이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망했다. 당시엔 잇따른 가족들의 죽음으로 그에 관해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이상하다고 의문을 느낀 사건이 있었다. 바로 루스티첼 가가 투자한 무역선이 돌아오지 못했던 일이다. 무역선의 두절은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같은 항로로 떠난 무역선은 모두 무사한데 그것만 돌아오지 못했다.

‘무슨 음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조사하기 전에 로베르트가 실종됐다.

자금줄이 마르기 시작했으니 쓸 수 있는 인력은 한정적이었다. 무역선을 조사하느니 로베르트의 행방을 조사하는 게 훨씬 중요했다.

그대로 무역선 건은 묻혔다.

‘한 걸음 물러서서 반추해보니 정말로 잘 짜인 판이잖아.’

오싹 소름이 돋았다.

상대에게선 어떻게든 루스티첼 가를 무너트리겠다는 집념이 보인다. 그리고 그럴 능력이 충분하다.

‘내가 투자하면 손을 써서 망하게 할 테니 성공할 사업체를 알아도 소용없네.’

“으음…….”

칼리오페가 신음하며 뒤척였다. 무언가 방도가 있을 것이다. 생각해 내야만 한다.

하지만 자꾸만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몇 번 잠을 이겨내려 눈을 깜빡였으나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구별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

칼리오페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 * *

“어머, 우리 리페 잠을 잘못 잤니?”

루스티첼 부인이 딸아이의 얼굴을 만지며 물었다.

“리페 잠 못 잤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온 로베르트가 쪽, 하고 뺨에 키스했다.

“자, 이제 힘이 날 거야!”

웃는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의 뺨에 쪽쪽쪽 키스했다.

“엄마 힘도 보태줘야지.”

왠지 불만스럽게 입술을 내민 로베르트가 쪽쪽쪽쪽쪽 키스했다.

“내가 더 많이 줄 거야!”

그 말을 하고 또 쪽쪽쪽쪽쪽 키스를 이어나갔다.

‘이건…… 좀 과한데요. 받은 힘이 다 빠져나가는 거 같은데…….’

칼리오페는 해탈한 얼굴로 묵묵히 뽀뽀세례를 받았다.

“로벨, 오늘 새벽 훈련에 지각했다고 들었다.”

루스티첼 백작이 식당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는 뽀뽀 중인 로베르트를 보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로베르트는 찔끔해서 몸을 움츠렸다.

“죄, 죄송해요. 대신 오후에 더 할게요. 헤헤.”

루스티첼 백작은 답이 없었다. 많이 부드러워지긴 했지만 검술에 있어서는 여전히 엄격한 아버지였다.

로베르트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빠의 눈치를 보았다. 루스티첼 백작은 그런 그를 보고서도 경직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쪽.

“아버지……?”

칼리오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칼리오페의 포실포실한 뺨에 입을 맞춘 루스티첼 백작이 숙였던 허리를 들었다.

“흠흠, 좋은 아침이구나.”

‘어머, 로베르트가 부러웠구나…….’

루스티첼 부인은 남편의 행동에 후후 웃었다. 그녀의 눈엔 남편이 마냥 귀여웠다.

“내, 내가 더 많이 할거야아아!”

의외의 사건에 잠시 굳어있던 로베르트가 칼리오페에게 달려들었다.

‘그만…… 살려줘…….’

아침부터 힘 좋은 뭉뭉이가 꼬리를 홰홰 흔들며 달려드는 통에 칼리오페는 기겁했다.

“이미 제일 많이 했다. 그만해.”

어느새 들어온 루시우스가 로베르트의 목덜미를 쥐며 말했다.

“어머, 루스. 너도 잠을 못 잤니?”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괜찮습니다.”

어젯밤 칼리오페의 귀여움 탓에 호르세안에 대해 잊어버렸는데 침대에 눕고 나니 다시 떠올랐다. 호르세안이 긁어놓은 속에 비밀이라고 하던 칼리오페의 모습까지 더해 아주 심란한 밤이었다.

도저히 잠이 안 오는 바람에 장서실에서 유아의 정서 발달에 관한 교육책까지 찾아보았다.

다섯 살.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고 사회성을 형성하는 시기. 또래와 결혼을 약속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어른에게 결혼하자고 조르기도 한다고 했다.

‘절대 안 돼!’

바질과 토마토를 잔뜩 넣은 오믈렛이 루시우스의 입안에서 무참히 뭉개졌다.

그리고 어른이 좋은 거라면 왜 호르세안이란 말인가.

‘나도 호세랑 동갑인데……!’

“루스 오라버니.”

칼리오페의 차분한 부름에 루스우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괜찮으세요?”

산호빛 눈동자가 조심스럽게 자신을 살피고 있었다.

“괜찮아.”

그 말에 칼리오페가 시선을 접시 위로 옮겼다. 오믈렛이 처참하게 해체되어 붉은 토마토 속이 다 퍼져 나왔고, 팬케이크와 소시지는 갈가리 찢겼다.

‘맙소사.’

그 누구보다 루시우스 자신이 놀랐다. 어렸을 때조차 이렇게 식사 예절을 못 지켰던 적이 없다.

“괜찮으시다니 다행이지만…….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말씀해주세요.”

칼리오페는 별말 하지 않고 물러났다. 가족들이 다 있는 아침식사자리에서 캐묻는 것도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고민은 더 깊어졌다.

어제 사람을 못 믿는 책을 골라온 것도 그렇고, 잠을 설친 것도 그렇고. 거기다 식사를 빙자한 난도질까지.

‘우리 오라버니 교우관계 이대로 괜찮은 걸까…….’

“리페.”

루시우스가 칼리오페를 불렀다. 원래 그는 직설적인 성격이었다. 칼리오페가 뭐든 말하라고 했으니 말하면 된다.

그는 진지하게 물었다.

“나중에 커서 누구랑 결혼할래?”

“…….”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식탁 위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평소답지 않은 루시우스의 모습에 유심히 살펴보고 있던 백작과 부인은 어깨를 내려놓았다.

‘하여간 우리 아드님은 막냇동생과 관련되면 예측할 수 없어진다니까.’

후, 하고 웃은 루스티첼 부인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게. 우리 리페는 누구랑 결혼할 거야?”

“당연히 나랑 할 거야!”

로베르트가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너랑 하느니 나랑 하겠지.”

“보통 딸은 아빠랑 결혼하고 싶어 한다더구나.”

루스티첼 백작이 차를 마시며 조용하게 한마디 했다.

“어머나?”

루스티첼 부인이 웃으며 입가를 가렸다.

“리페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지?”

내 딸 양보 못 해! 두 부부 사이에서 파지직 전기가 튀었다.

“으음…….”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칼리오페는 지친 얼굴로 가족들을 둘러봤다.

‘오라버니의 고민을 들어주고 싶었을 뿐인데…….’

대답을 종용하는 네 사람의 눈빛에 칼리오페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을 지켜야 하니까. 일단 나는 다섯 살이고 결혼으로 해결할 생각은 없지만…….’

“아무래두 사람 됨됨이가 된—”

“나? 나지? 사람 됨됨이가 됐다잖아!”

로베르트가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역시 너보단 나라니까.”

루스티첼 부인과 백작은 나란히 안심했다. 둘 다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우리 딸이 존경하는 사람이라……. 그건 역시 나랑 결혼하겠다는 뜻이겠지?’

둘은 같은 생각 중이었다.

네 사람 모두 기대를 품고 칼리오페가 답을 마무리하길 기다렸다.

곧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권력자요.”

두근두근하며 칼리오페의 답만 기다리던 가족들이 모두 경악했다.

‘사람 됨됨이가 된…… 권력자라고?!’

다섯 살짜리 꼬마가 이상형에 사람 됨됨이를 따지는 것도, 권력자 운운하는 것도 기가 막힌 일이지만, 그들이 경악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가 아니라?!’

다들 진심으로 충격받았다. 어찌나 충격이 큰지 아무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리, 리페, 왜 그런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어? 혹시 마음에 든 친구라도 있는 거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루스티첼 부인이 물었다. ‘사람 됨됨이가 된 권력자’가 그냥 조건인지, 아니면 누군가를 생각해서 나온 말인지가 중요했다.

루스티첼 부인은 여느 때처럼 상냥하게 웃고 있었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만약 엄마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거라면 가만두지 않겠어!’

루스티첼 부인의 질문에 나머지 가족들도 가장 중요한 게 뭔지 깨달았다.

‘누군가를 떠올리고 그 자식…… 아니, 그 아이를 설명한 거라면……!’

루스티첼 백작의 단단한 팔이 크게 울렁거렸다. 그와 동시에 힘줄이 불툭 솟았다. 루시우스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고, 항상 명랑했던 로베르트의 얼굴이 무표정해졌다.

“응? 아……. 아니요. 그럴 리가요.”

마음에 든 친구가 있냐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던 칼리오페는 곧 루스티첼 부인의 말뜻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도 참. 난 아직 다섯 살인걸.’

자식의 성장을 기대하는 게 부모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연애 이야기는 너무 빠르지 않은가.

‘아, 아닌가. 보통 다섯 살이면 누구 좋아한다는 소리가 나올 때인가.’

크고 나서는 정작 당사자들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풋사랑을 할 때던가 싶었다.

처음 참석했던 티파티에서 유리안 옆에 가만히 앉아 아이들을 구경했을 때가 떠올랐다. 여자아이한테 마카롱을 집어 주는 남자아이, 벌레를 잡아서 괜히 여자아이를 놀래키던 남자아이, 남자아이 손을 잡아끌며 소꿉놀이하자던 여자아이 등등.

‘그땐 그냥 아이들이 귀엽게 노는구나, 하고 말았는데.’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유심히 살펴보지도 않았다.

‘아, 그날 힐데르트도 유리안한테 반했었지.’

부모님은 어서 빨리 누가 좋다며 재잘재잘 떠드는 딸아이의 모습이 보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으음, 그건 힘들겠지만요. 죄송합니다.’

속은 다 큰 딸이라 부모님의 기쁨을 뺏는 것 같아서 죄송했지만, 칼리오페의 기억에 전생에서도 첫사랑이라고 할 남자애는 없었다.

“그렇구나. 마음에 든 친구가 없다니…….”

루스티첼 부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날 섰던 가족 분위기 역시 누그러졌다.

“그런데 우리 리페 이상형이 사람 됨됨이가 된…… 권력자라니, 누가 될까 궁금하네.”

루스티첼 부인이 손바닥에 뺨을 대며 말했다. 그녀의 미소가 좀 더 깊어졌다.

“정말 궁금해.”

강조하듯 중얼거리는 말에 칼리오페는 왠지 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그래, 아빠도 궁금하니 혹시 생기면 꼭 말하렴.”

‘꼭’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죄송해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괜히 기대만 더할까 봐 마음에 드는 친구가 생기면 말해주겠다는 빈말조차 할 수 없었다.

“하하, 저는 친구보다 가족들이 더 좋은걸요.”

겨우겨우 기대하지 말라고, 그럴 일 없다는 것만 돌려 말했다.

“어머, 그러니?”

루스티첼 부인이 반색했다.

“나도 리페가 제일 좋아! 나는 커서 리페랑 결혼할 거야!”

로베르트의 외침에 루시우스가 한숨을 쉬었다.

“로벨, 네가 좋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말하며 칼리오페를 쳐다보는 얼굴엔 ‘나랑 결혼해’가 쓰여있었다.

칼리오페의 관심을 끈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자 가족들은 안심하는 동시에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다.

바로 사랑스러운 막둥이에게 커서 자신과 결혼할 거란 소리를 듣겠다는 것.

‘돈 많은 권력자랑 결혼하고 싶댔지.’

칼리오페는 알지 못했다. 이날 그녀의 말 한마디가 불러올 파장을.

평생 권력을 탐하지 않고 정계와 동떨어져 살던 루스티첼 일가가 어떻게 변할지를.

아직까진 변화의 씨앗이었다.

땅속에 묻혀 보이지 않고, 어쩌면 싹도 채 틔우지 못하고 짓밟힐 수 있다.

하지만 자라면 단단히 뿌리내려 칼리오페를 지탱하고 그녀가 숨 쉴 그늘을 만들 씨앗이었다.

* * *

그날 오후, 칼리오페는 루스티첼 부인과 함께 정원을 산책했다.

“사르니오 가에 힐데르트를?”

루스티첼 부인의 물음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젤리나 온니가 괜찮다면 말이에요.”

사흘 뒤, 칼리오페는 유리안네 집에 놀러 가기로 했다.

유리안과 만났던 티파티에서 돌아온 후, 칼리오페는 어머니께 사르니오 가에 연락을 넣어달라고 했다. 아무래도 유리안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쌍둥이 누이가 작년에 죽은 상황에서 여장하고 있으니까……. 전생에서 연쇄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고.’

안 그래도 생각할 게 많은데 유리안 일까지 신경 쓰는 건 사치인가 싶지만, 그냥 넘길 순 없었다.

칼리오페는 가족이 다 죽고 혼자 남은 순간에도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고 했다. 미래에 유리안이 저지를 짓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칼리오페는 현재에 충실하기로 했다. 유리안을 돕는 것 역시 그 일환이다. 가족이 죽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여장하고 있는 아이다. 남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고로 사르니오 가에 놀러 가기로 했지만, 막상 일자가 다가오니 막막했다.

몇 번 또래와 만나면서 칼리오페는 자신이 아이들과 노는 데 재능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유리안, 힐데르트, 에피니. 그 모두와의 만남이 비슷하게 흘러갔다.

해서 힐데르트를 끌어들이기로 한 것이다.

‘힐데르트가 유리안을 좋아하니까 만나면 잘 놀 거 같기도 하고. 소꿉놀이 엄청 하고 싶어 했었지.’

유리안이 죽은 쌍둥이와 워낙 친밀했던 탓에 자아 분리를 못 해서 여장하는 것 같으니 새로운 관계를 많이 형성해줄수록 좋다.

‘그리고 유리안에겐 여자친구가 필요하다는 사르니오 부인의 말도 신경 쓰이고.’

칼리오페의 생각을 모르는 루스티첼 부인은 잠시 심각하게 고민했다.

‘왜 갑자기 힐데르트도 같이 놀면 좋겠다고 하는 거지? 설마 우리 리페가 힐데르트를…….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녀는 뻗어나는 생각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힐데르트는 권력자지만, 사람 됨됨이가 되지는 않았으니까.’

속으로 꽤나 심한 생각을 하는 루스티첼 부인이었다.

“일단 사르니오 부인에게 물어보도록 할게.”

“네, 꼭 안젤리나 온니의 의사를 확인해 달라구 해주세요.”

서로 화해하긴 했지만 안 좋은 일이 있었던 만큼 유리안의 생각이 중요했다.

“그래, 걱정하지 말렴.”

* * *

루스티첼 부인과 산책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칼리오페는 바로 책을 펼쳐 들었다.

책을 보려는 게 아니라 이러고 있으면 주변에서 말을 걸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젯밤 잠드느라 못한 고민을 오늘에야말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결혼이라…….’

생각도 못 했는데 오늘 아침 질문을 받자 그게 참 쉬운 해결방법이라는 걸 깨달았다.

‘확실히 결혼을 통하면 돈과 권력 모두 동시에 손에 넣을 수 있겠지.’

물론 그 돈과 권력을 다 가진 누군가가 자신과의 결혼을 승낙한다면 말이다.

‘그게 내 힘으로 돈 버는 것보다 더 어렵지 않을까?’

칼리오페는 후, 작게 웃었다.

만약 정말 기적처럼 그런 사람이 있어서 약혼한다고 해도, 자신이 결혼할 때쯤이면 이미 비극이 일어난 후일 것이다. 약혼도 깨질 것이고.

그러니 직접 돈을 벌고 권력을 키워야 한다.

‘애초에 우리 가족 일을 남에게 기댈 생각은 없었지만.’

어쩐다, 하는 한숨이 나왔다.

어젯밤에 생각나지 않았던 게 지금이라고 단숨에 생각날 리 없다.

톡톡, 칼리오페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반복적으로 두드렸다.

‘내가 투자하면 상대가 손을 써서 망하게 할 거야. 그렇다면, 차명을 사용할까?’

하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루스티첼 가 소속이다.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사람은 호르세안뿐.

‘하지만 호세 오라버니는 연루되어서…….’

칼리오페가 입술을 깨물었다. 호르세안은 한 번 루스티첼 가와 얽혀 죽은 적이 있다. 이런 식으로 사소한 부분까지 얽히면 아예 처음부터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

‘으음, 투자하고 일이 일어나기 전에 모두 유동자산으로 전환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언제부터 우리 가족을 노린 건지 모르는 게 문제구나.’

아버지의 죽음이 그 시작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예상보다 계획적인 음모가 있었다.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주시하고 있었다면?’

루스티첼 가가 투자한 사업이 너무 커지기 전에 싹을 잘라내듯 손을 쓸지도 모른다.

음모로부터 안전하고 수익도 높은 곳. 그런 곳이 있기나 할까?

‘아, 철광이 발견된 적이 있었어! 일부러 철의 가치를 하락시켜도 한계가 있으니까 이거면…….’

번뜩 떠오른 생각에 실마리가 보였다. 하지만 곧장 반론이 떠올랐다.

‘갑자기 철에 관한 규제를 걸 수 있어.’

그 정도의 권력자라면 철의 판매량을 제한하거나 판매 자체를 중단시킬 수 있다. 철은 무기의 재료이기 때문에 다른 광물보다 규제하기도 쉽다.

‘아니, 그전에 잠깐.’

과거를 되짚어가며 고민하다 보니 현실 나이를 깜빡했다.

‘내가 투자할 수도 없잖아.’

아직 다섯 살이다. 장난감을 사달라고는 할 수 있어도, 저 회사 채권을 사달라고 할 수는 없다.

“으으…….”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산 넘어 산이라고 해야 할지. 상대의 방해 때문에 투자처를 고르는 것도 힘든데 그마저도 부모님 눈치를 봐야 한다.

‘백 배 이상의 이익을 거두는 사업을 알고 있으면 뭐해. 투자할 수 없는걸.’

하아아아, 긴 한숨을 내쉰 칼리오페가 눈을 반짝 떴다.

이런 때일수록 희망을 잃지 말고 맹렬히 생각해야 한다.

‘내가 사달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이상하지 않은 것. 그리고 황제조차 외압으로 가치를 하락시키지 못하는 것.’

한번 생각을 정리했지만 떠오르는 게 없다.

찬찬히 전생에서 읽었던 신문 기사, 귀족들 사이의 소식, 하다못해 항간에 떠돌았던 소문까지 기억나는 건 샅샅이 되짚었다.

‘역시 그런 게 있을 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답답하고 초조해서 가슴이 꽉 막혔다.

그때였다.

“있어!”

저도 모르게 외치며 칼리오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스라한 기억의 끝자락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희망을 건져 올렸다.

‘그거라면 어떤 힘을 써도 그 가치를 깎아내리지 못해.’

황제도, 신전도, 귀족도, 하물며 수단을 가리지 않는 뒷세계의 사람도 훼손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

칼리오페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아가씨?”

“응?”

돌아보자 유모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유모 입장에서는 책을 읽던 아가씨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면서 ‘있어!’하고 소리 지른 꼴이다.

‘부, 부끄러워…….’

칼리오페의 양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니야…….”

칼리오페는 민망해하며 테이블 위로 시선을 돌렸다. 펼쳐진 책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고, 곰이 있어서……. 풀숲에 숨어 있어서 처음엔 몰랐어.”

말하면서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 동안 페이지를 넘기지 않아도 괜찮아 보이게끔 그림책을 골랐는데 그게 잘못이었다.

‘아니, 대강 핑계라도 댈 수 있으니 다행인가?’

“우리 아가씨는 곰이 제일 좋아요?”

“아니…….”

딱히 동물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강아지려나?’

로베르트가 생각나니까.

다른 가족들도 평상시에는 안 그런데 가끔씩 강아지 같을 때가 있다.

‘아참, 이런 생각은 실례지.’

칼리오페는 뭉뭉이 귀꼬리를 쫑긋거리는 가족들의 모습을 서둘러 머릿속에서 지웠다.

“곰을 안 좋아하는데도 그렇게 신나셨어요? 벌떡 일어나서 있다고 외칠 만큼?”

“어? 아, 아니……. 그게…… 누가 제일 좋다구 하면 다른 동물 친구들이 슬퍼할 테니까…….”

필사적인 변명이었다.

“어머.”

유모를 비롯한 다른 하녀들이 흐물흐물 웃었다. 평소 차분하던 아가씨가 모처럼 아이다운 말을 하니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자아.”

유모가 칼리오페에게 곰 인형을 안겨주었다.

“고마워…….”

칼리오페는 곰 인형을 꼬옥 끌어안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뭔가 아닌 거 같지만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심호흡으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아까의 생각을 이어나갔다. 왠지 팔 안에서 느껴지는 폭신폭신함이 정신적인 안정을 주고 있었다.

‘문제는 지금 어떤 상태인지 잘 모르겠다는 건데…….’

칼리오페는 무심코 곰돌이 인형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만지작만지작거렸다. 촉감이 좋아서 계속 이러고 있게 된다.

‘일단 직접 한 번 가봐야겠어.’

결론을 내리자 마음이 편해졌다.

신나서 곰돌이의 팔을 양쪽으로 잡아당겼다가 귓가를 쓰다듬고 보드라운 털에 뺨을 부볐다.

무의식 중에 한 행동이지만 지켜보고 있던 유모와 하녀들은 입을 틀어막았다.

‘아, 아가씨가……!’

‘인형을 갖고 놀고 계셔……!’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이 모습을 당장 그림으로 남길 수 없는 게 천추의 한이었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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