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인생은 실전입니다
칼리오페는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 햇살이 창을 타고 들어와 카펫 위에 노랗게 고였다.
유난히 볕이 좋은 날이었다.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공기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렇게 세상을 가슴 속에 훅 들이마시면 뱃속이 간질간질하며 무언가 부풀어 올랐다.
점점 커다래지며 두둥실 떠오르는 것을 후, 뱉어내면 처음 들어보는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칼리오페가 들이마시고 품었던 세상과 꼭 닮은 멜로디였다.
고요한 장서실에 칼리오페의 노래가 자그맣게 울려 퍼졌다. 방안을 채색한 햇볕처럼 포근하고 오래된 종이 냄새만큼 편안한 음색이었다.
칼리오페는 눈을 감았다. 몸에서 긴장이 풀린다. 이렇게 노래 부를 때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안정되었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시름과 근심이 가라앉고 고단한 하루 끝에 맞이하는 단잠처럼 아득한 행복에 물든다. 노래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걱정과 염려가 잊혔다. 잊히는 건 그뿐만이 아니다.
마음에 굳은살처럼 박혀 있던 상실감과 슬픔, 죄책감이 노랫자락에 한올 한올 풀리며 날아간다. 종래에는 모든 생각이 노래에 섞여들고 꼭 세상과 하나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머리칼을 스치는 바람, 등에 내려앉은 햇볕의 온기 따위가 소리로 환원된다. 마치 자신이 통로인 것처럼.
칼리오페는 자신을 잊은 채 한참을 푹 빠져 노래했다.
노래가 멎을 무렵, 살짝 열린 창문을 타고 바람이 화답하듯 살랑거리며 날갯짓했다. 잘 느끼기도 힘든 은은한 미풍이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에 칼리오페가 눈을 떴다. 잠시 여운에 취해있다가 책을 덮고 기지개를 쭉 켰다.
슬슬 티타임 때였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유모가 들어왔다.
“아가씨, 오늘 티푸드는 커스터드 크림을 잔뜩 얹은 밀푀유에요. 딸기랑 라즈베리 중 뭐가 좋으세요?”
“딸기가 좋아.”
“그럴 줄 알았어요.”
유모가 후후 웃으며 칼리오페를 정원으로 안내했다. 오늘은 날이 좋아서 밖에 티테이블을 차렸다.
“어서 오렴, 리페.”
루스티첼 부인이 사뿐사뿐 걸어오는 딸의 모습에 미소 지었다.
“오늘은 무슨 책을 읽었니?”
“크리아르 경께서 집필한 <전쟁론>이요.”
루스티첼 부인이 눈을 크게 떴다. 칼리오페가 나이에 맞지 않는 책을 읽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하필이면 <전쟁론>이라니? 한 점 그늘도 없이 밝게 자라는 아이가 관심 가질 만한 책이 아니었다.
“왜 그런 책을……?”
“그냥 손에 닿았어요. 장서실에 사다리가 있으면 좋을 텐데…….”
사실 회귀 전에 일어났던 내전 때문에 찾아본 것이지만, 사실대로 말할 순 없다.
“하녀한테 말하지 그랬니. 바로 가져다줄 텐데. 일단 준비해놓으라고 말하마.”
“감사합니다, 어머니.”
대답한 칼리오페가 차 향을 맡고 한 모금 우아하게 마셨다.
루스티첼 부인은 그런 딸의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왠지 웃음이 나왔다.
보통 아이들은 차를 마셔도 설탕을 잔뜩 넣고 우유는 더 잔뜩 넣는데, 칼리오페는 처음부터 스트레이트로 달라고 했다. 조금 쓸 텐데, 하면서 건네주니 한 모금 마시고는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이마에 잡힌 주름이 아이의 충격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때 칼리오페의 얼굴을 생각하자 다시 쿡쿡, 웃음이 나왔다.
맛없는 게 분명한데도 꾸역꾸역 다 마시더니 다음부터도 계속 차를 달라고 했다. 지금은 차 맛을 아는 것처럼 아주 고상하게 마신다.
애가 어른스럽기도 하지만 애써 새침하게 어른스러운 척하려는 면도 있다고나 할까. 그런 딸이 귀여웠다.
루스티첼 부인은 차가 식는 것도 모르고 자신의 딸만 쳐다봤다.
“어머니?”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 그러고 보니 사르니오 가에서 답장이 왔단다.”
유리안이 신경 쓰였던 칼리오페는 얼마 전 어머니께 사르니오 가에 연락을 넣어달라고 했다.
어린 유리안을 만나보니 살인자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착하고 순진했다. 쌍둥이를 잃은 상실감과 외로움 때문에 엇나간 것이라면, 옆에서 작게나마 위로가 되어주고 싶었다. 또 미래의 살인마를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책임감이 들었다.
“뭐라구 하던가요?”
“반가워하시더구나. 여자아이들끼리 친구가 되면 좋겠다고. 안 그래도 안젤리나에겐 여자친구가 꼭 필요하다고 하셨어.”
왜 하필 여자친구? 어쩐지 강조하는 느낌이라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쨌든 잘됐네요.”
“그래, 우리 리페가 마음에 들어 하는 친구가 생겨서 엄마도 기쁘단다.”
흐뭇한 미소를 짓는 어머니를 보며 칼리오페도 어색하나마 입꼬리를 올렸다.
‘친구라기보단 애를 봐주는 느낌이지만. 힐데르트도 그렇고.’
힐데르트의 집에 초대받았다는 걸 떠올리며 칼리오페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어린애들은 귀여우니까.’
따지고 보면 그중 가장 어린애는 칼리오페 자신이었지만, 그런 자각은 안중에도 없었다.
칼리오페는 다시 우아하게 차를 홀짝였다.
루스티첼 부인은 다시 딸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언제나와 같은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 * *
‘내가 왜 이따위 가문의 애들을 가르쳐야 하는 거야.’
제이드는 투덜거렸다.
그는 칼리오페와 로베르트의 가정교사로 오늘 처음 루스티첼 저에 방문했다.
제이드는 다루안 아카데미를 수석 졸업한 인재라 항상 고명한 가문의 영애와 영식을 맡았다. 자식을 둔 가문에서는 너도나도 그를 초빙하려 했고 수업료는 부르는 게 값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서모나 후작 부인의 추천만 아니었어도……!’
서모나는 바쁘다거나 일정이 찼다는 말로 무시할 수 없는 가문이었다. 아니, 바쁘더라도 어떻게서든 시간을 내야 할 가문이었다.
그래서 오늘, 그는 팔짱을 낀 채로 앉아 로베르트와 칼리오페를 마뜩잖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말이 보는 거지 눈꺼풀이 동공의 반을 가리고 있었다. 할 마음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대충 시간만 때우자. 몇 번만 드나들면 서모나 부인의 면도 상하지 않고 관둘 수 있겠지.’
세도가와 좋은 연을 쌓기 위해 시작한 가정교사인데 이런 데서 시간을 허비할 순 없었다.
‘애들이 뭘 알겠어.’
제이드는 굽슬굽슬한 머리를 꼬며 성의 없이 말했다.
“덧셈, 뺄셈은 할 줄 알죠?”
노골적인 무시가 담긴 어조였다. 칼리오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한 번은 참았다. 그녀는 교사로 온 사람에게 예의를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이드는 로베르트가 대답도 하기 전에 종이에 곱셈, 나눗셈 문제를 휘갈겼다.
문제지를 받은 로베르트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켜다가 칼리오페를 힐끔 쳐다보았다.
2÷10=
3÷5=
6÷17=
로베르트에겐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나눗셈을 배우긴 했지만 이런 나누기는 처음 본다. 그가 아는 나눗셈은 모두 앞의 숫자가 더 컸다. 하지만 모른다고 하면 칼리오페가 자신에게 실망할 수도 있다.
로베르트는 억지로 문제를 풀려고 들었다. 그러나 너무 어려워서 첫 번째 문제도 제대로 풀지 못했다.
가정교사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비어나온 웃음은 곧 킥킥거리는 폭소로 바뀌었다.
“이래서 가문의 수준이 중요하다니까.”
가정교사는 가문의 모욕도 서슴지 않았다. 어차피 애들이니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곱셈, 나눗셈도 못하다니. 역시 무가의 아들. 검이나 휘두르는 게 딱 맞겠네.”
로베르트가 눈을 깜빡였다.
‘역시 무가의 아들? 나 칭찬하는 건가?’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호부 밑에 견자 없다는데 견자인 걸로 봐서는 호부가 아닌 모양이지.”
그가 피식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이런 것도 못해서야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때 칼리오페가 로베르트의 문제지를 가져왔다. 앙증맞은 손으로 펜을 잡더니 슥슥 움직인다.
‘다섯 살배기 계집애가 뭘 한다고.’
제이드가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꼴에 자존심이 있나 본데 그게 더 우스울 뿐이다.
칼리오페는 비웃음 속에서도 묵묵히 펜을 놀렸다. 그리고 5분도 지나지 않아서 펜을 내려놓았다.
‘그것 봐. 지가 뭘 안다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주제에 나대긴.’
역시나, 하고 비웃은 제이드가 칼리오페를 향해 야유를 던졌다.
“칼리오페 양, 얼굴은 봐줄 만하니 이런 땐 나서지 말고 방긋 웃고만 있어요. 그럼 예쁨 받으며 인생 편하게 살 거야. 내가 선생님으로서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가르침이에요.”
“…….”
제이드는 자신의 자랑을 주절거리며 문제지를 잡았다.
“나는 서모나 후작 가에서도 일하고, 칸테나 백작 가에서도 일했는데 내게 배운 영식, 영애들은 전부 천재 소리를 듣게 됐…… 어?”
문제 끝에 모두 답이 적혀 있었다.
제이드가 눈을 크게 떴다. 몇 번을 보아도 변하지 않는다. 심지어 모두 정답이었다. 소수점까지 완벽했다.
제이드는 입을 뻐끔거리며 문제지만 쳐다보았다.
“이, 이걸 어떻게…….”
칼리오페는 싸늘한 눈으로 제이드를 쳐다보았다.
작은 수에서 큰 수를 나누는 건 로베르트 나이엔 배우지 않는 과정이었다. 배우는 아이들이 있어도 그건 공부에 뜻이 있는 경우지, 로베르트처럼 검술에 뜻이 있는 경우는 아니었다.
“왜 놀라시는 거죠? 풀라구 낸 문제가 아니었나요?”
칼리오페의 물음에 정곡을 찔린 제이드가 더듬더듬 답했다.
“아, 아니……. 풀라고 낸 거 맞는데…….”
“그런데 왜 놀라세요?”
제이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건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문제를 푸는 것도, 이렇게 따박따박 따지고 드는 것도 그의 생각과 달랐다.
“네? 대답해주세요.”
“……로베르트 군의 나이에 맞춰 낸 문제인데 칼리오페 양이 풀 줄 몰라서 그랬던 겁니다.”
“로벨 오라버니 나이에 맞는 문제라구요?”
칼리오페가 피식 웃었다. 산호빛 눈동자가 말없이 제이드를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열 마디 말보다 더 기분 나쁜 시선에 제이드가 주먹을 꽉 쥐었다. 다섯 살짜리 꼬마한테 진심으로 화내는 게 유치하다는 생각도 안 들 정도로 열 받는 시선이었다.
상대의 반응에 칼리오페는 더 진하게 웃었다. 그녀는 언제나 상대에게 예의를 차렸다. 그건 상대를 존중하는 만큼 자신이 존중받는 거라는 아버지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절대 자신을 무시하는 자에게까지 바보처럼 착하게 굴라 하지 않았다.
루스티첼 가는 무가였고, 무가는 걸어오는 싸움을 절대 거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이 다시는 넘보지 못하도록 짓밟는다.
“라이언트 남작 영식.”
칼리오페는 제이드를 선생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명백한 경멸이 담긴 어조였다.
제이드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발음조차 샐 정도로 새파랗게 어린애가 자신을 대등하게 부른다는 게 기가 막혔다.
“칼리오페 양, 예법에 무척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소문이 와전됐나 봅니다. 지금 가르치러 온 선생님께—”
“오늘 영식께서 저를 가르치러 오신다구 들어서 기대가 많았습니다. 다루안 아카데미를 수석 졸업하신 분이라구요.”
칼리오페는 아무렇지 않게 제이드의 말을 끊었다.
갑작스러운 칭찬에 제이드는 감을 잡지 못했다. 아카데미 수석 졸업은 그가 이룩한 최고의 업적이자 활약이었다. 반사적으로 그의 가슴이 활짝 펴졌다.
‘예의 운운하니까 정신 차린 건가? 혼나는 게 무서운가 보지. 어린애는 어린애라니까.’
제이드가 흥, 하며 코웃음을 쳤다. 그래 봐야 늦었다. 후작 가와 백작 가에 갈 때 짜하게 소문낼 것이다.
그는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만큼 귀부인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루스티첼 가가 대체 어떻게 서모나 가와 연을 맺었는지 모르겠지만, 이걸로 끝이다.
코웃음 치는 제이드를 보고 칼리오페가 속으로 웃었다. 지방 귀족이다 보니 제도의 칼날 같은 언사는 잘 모르는 듯했다. 아카데미를 막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 물정을 잘 알 리 없었다.
‘하긴, 여태까지 비위 맞추기에 급급했으니 겪어본 적이 없었겠지. 아까 어머니께는 나름 최소한의 예의를 차렸고. 상대가 어린애라고 본색을 드러내질 말았어야지.’
칼리오페는 화사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라이언트 남작 가의 삼남으로 작위는 물론, 재산도 상속받지 못하는 처지라구 들었어요. 그런 ‘불우한’ 상황에도 불구하구 아카데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신 분이라니, 존경심이 샘솟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요.”
칼리오페가 가슴 앞에서 조막만 한 손을 다소곳이 맞잡았다.
“저는 여태까지 제도의 귀족분들만 봐서 설마 삼남에게 돌아갈 재산이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았답니댜. 그런데 사실이라고 하구…….
정말 영식께서는 자수성가의 표본 같은 분이세여. 마치 젠트리 분들처럼요!”
라이언트 남작 가의 재산 규모가 삼남을 못 먹여 살릴 정도로 엄청나게 적은 건 아니었다. 호화롭게 살진 않더라도 굶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지방 귀족들은 후계자 한 명에게 가문의 재산 대부분을 상속하고 지키게 하는 걸 선호했다.
현 라이언트 남작은 특히 그런 성향이 강했다. 제이드는 그런 부친에게 불만이 많았고 형에게도 열등감을 느꼈다.
상대의 신분 가지고 이러는 건 적성에 안 맞지만, 저쪽에서 먼저 이쪽의 신분 가지고 뭐라 하지 않았는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생에서 뼈저리게 깨달았다. 상대가 예의가 없을 때 이쪽은 수준 낮추지 않겠다고 예의를 지키면 안 된다. 그것밖에 못 되는 상대에겐 똑같이 해줘야 알아먹는다. 그 수준밖에 안 되니까.
또, 누군가를 업신여길 땐 자신의 잣대를 들이밀기 마련이다.
제이드는 처음부터 가문의 수준 운운하며 신분 얘기를 했다. 즉,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역린은 신분일 터.
칼리오페는 무가 루스티첼의 핏줄답게 상대의 약점을 파악해 찌르는 것에 탁월했다.
“아참, 작위를 못 받으시니 젠트리가 맞으시지요. 제가 이 부분은 아직 잘 몰라서……. 책에서 잠깐 봤을 뿐이거든요. 실례했습니다.”
칼리오페는 해맑고 사랑스러운 얼굴로 제이드의 가슴에 비수를 푹푹 꽂았다.
처음으로 당한 모욕이었다. 어린애 특유의 불명확한 발음이 더 수치심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제이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도저히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해서 오늘을 굉장히 기대했는데……. 실상은 이렇게 기본두 안 된 분이실 줄이야.”
칼리오페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혀를 끌끌 차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이게 로벨 오라버니 나이에 맞는 문제라니……. 분명 사전에 로벨 오라버니의 성향에 대해서두 들으셨을 텐데…….”
빤히 쳐다보는 산호빛 눈동자에 제이드의 입매가 부들부들 떨렸다. 살다 살다 다섯 살짜리 꼬마한테 이런 한심하다는 시선을 받을 줄은 몰랐다.
지방 귀족으로 태어나서 장자와 차별을 조금 받긴 했지만, 그는 탄탄대로를 살아왔다. 아카데미에서도 항상 상위권이었고 결국 수석으로 졸업했다. 서모나 후작가와 연결되었을 땐 앞으로 장밋빛 인생만이 남았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공·후작가도 아니고, 제도 백작가 중에서도 최상위도 아닌 가문의 꼬마가 날 무시해?
“소문이 와전된 건 제가 아니라 라이언트 영식 같습니다. 능력 있는 선생님이라구 들었는데……. 학생의 수준을 전혀 고려하지 않구 자기 지식 자랑이나 하는 선생은 선생이 아니지요.
지식을 쌓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전달하는 게 어려운 거지요. 아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기초적인 것부터 다시 공부하셔야겠습니다.”
타이르듯 가르치는 말에 제이드는 책상을 쾅, 내리치려다가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았다.
‘여기서 진심으로 화를 내면 지는 거다.’
제이드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뒷목이 뻐근할 정도로 혈압이 올랐지만 어쨌든 상대는 어린애다. 화를 내는 게 더 우스운 꼴이 된다.
아이를 상대로 진지하게 찍어누르려고 하는 것부터가 틀려먹었다는 건 안중에도 없었다.
“우수한 학생들만 가르치다 보니 이 정도 문제는 모두 풀 줄 알았습니다. 로베르트 군이 ‘다소 떨어진다는 걸’ 듣긴 했지만 이 정도 일 줄 몰랐군요. 제가 로베르트 군의 나이일 땐 이보다 더 어려운—”
“어머?”
칼리오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렸을 때 우리 로벨 오라버니같이 짚단을 두부처럼 가르셨나 봐여?”
칼리오페의 노골적인 시선이 옷에 감싸인 제이드의 팔뚝으로 향했다.
옷 태가 안 날 정도로 비쩍 마른 팔뚝과 두덕하게 살집이 붙은 아랫배를 향하더니 다시 제이드의 얼굴로 돌아왔다.
피식.
“뭐, 자라면서 사그라드는 재능도 있으니까요.”
파사삭. 제이드의 손에서 종이가 구겨졌다.
‘이 망할 꼬맹이가?!’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자꾸 나오는 아랫배와 근육은커녕 살도 붙지 않는 팔다리는 제이드의 콤플렉스였다.
“오, 선생님도 검술 배웠어? 그렇게 안 보였는데! 몇 살 때 짚단 갈랐어?”
그때까지 대화를 따라가지 못했던 로베르트가 반색을 하며 물었다. 드디어 자신이 잘 아는 주제가 나왔다!
악의 없는 아이의 해맑은 질문이 제이드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얼얼했다.
“오라버니, 실례에요.”
칼리오페가 로베르트의 소매를 잡아끌며 소곤거렸다.
“왜? 어릴 때 짚단 갈랐다며? 물으면 안 돼?”
“눈치를 보니 못하신 거 같아요. 그건 제가 물어본 거구, 라이언트 영식은 어렸을 적에 곱셈 나눗셈 잘했다며 자랑하신 것뿐이에요. 그리구…….”
칼리오페가 눈치를 살피더니 로베르트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갔다. 손으로 입을 감싼 채 속닥거렸지만 제이드에게 다 들릴 크기의 목소리였다.
“보통 어렸을 적 이야기를 하면서 자랑하는 경우는 현재 자신에게 자랑할 게 없어서 그러는 거예요. 불쌍한 사람이지요. 친절히 대해야 해요.”
“그런 거야?”
로베르트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칼리오페는 진지하게 안쓰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예요.”
로베르트도 덩달아 안쓰럽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자기가 왕년에 어땠다며 자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술주정뱅이였다.
“미안해, 선생님. 괜한 걸 물어봐서……. 그치만 힘을 내서 끊임없이 노력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아부지가 그랬어!”
“…….”
제이드는 할 말을 잊었다. 여태까지 다양한 아이들을 가르쳐 봤지만 이렇게 힘든 경우는 처음이었다. 최상위 귀족답게 코끝으로 사람을 부려먹는, 오만방자한 힐데르트도 이보다는 쉬웠다.
진심 어린 사과와 위로라는 게 더 타격이 컸다.
완벽하게 졌다. 제이드는 회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칼리오페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더 큰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검을 들진 않았지만, 그녀는 적을 말살시키는 루스티첼 가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루스티첼 가로서 넘겨 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는데.”
부드럽게 운을 띄우며 칼리오페가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로벨 오라버니께서 다소 떨어진다는 말을 들었다구 하셨잖아요.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한 거지요?”
“무, 뭐…….”
제이드는 식은땀을 흘렸다. 내가 그런 말을 했나?
열 받아서 나오는 대로 던진다는 게 실수했다. 설마 그런 걸 캐묻겠냐는 생각도 저변에 깔려있었다. 처음부터 어린애들이 뭘 알겠냐고 무시하고 막 대했다.
그런데 제이드 자신보다 새파랗게 어린 칼리오페가 훨씬 더 사교술에 능숙해 보였다.
“대답을 못 하시네요?”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깜빡이더니, 곧 제이드의 눈을 들여다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러구 보니 서모나 부인께서 영식을 소개시켜주신 거였지요.”
“서, 서모나 부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제이드가 다급하게 외쳤다.
칼리오페는 신기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이렇게 당황할 거면서 왜 그렇게 대했을까. 설마 서모나 부인한테 말이 들어갈 거라는 생각은 안 해본 걸까.
‘뭐, 가문에서 일어난 문제를 밖에 들고 가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긴 하지.’
서모나 부인한테 쪼르르 달려가 이르는 건 체면 상하는 일이다. 가문이 무시당했고, 그걸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거니까.
‘어린애들이라는 것도 한몫했을 거고. 어머니한텐 예의를 차렸으니까. 그것도 정말 최소한의 예의였지만.’
제이드가 착각한 게 있다. 어린아이기에 다른 가문에 쪼르르 달려가서 일러도 흠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머리를 쓰는 아이가 드물고, 또 생각하더라도 자존심이 상해서 안 그럴 뿐.
칼리오페는 진짜 아이가 아닌 데다가 어린아이인 점을 이용하기로 결심한 적도 있다.
“네, 저도 서모나 부인께서 그런 말을 하셨을 거라구 생각하지 않습니다.”
빙긋 웃으며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다 되었네요. 수고하셨어요, 영식.”
아랫사람을 부리듯 치하하는 모습에 참고 참았던 제이드가 폭발했다.
서모나 부인의 이름이 언급된 시점부터 그는 핀치에 몰려 있었다. 화약고에 불씨를 댕긴 거나 다름 없었다.
“너, 너! 내가 누군 줄 알고 지금 감히……!”
“감히?”
칼리오페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제이드에게 한 발짝 다가가 낮게 속삭였다.
“고위 귀족들과 어울리다 보니 정말 본인이 고위 귀족이라두 된 것 같나 봐요?”
수치심과 모욕감으로 제이드의 귀 끝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외면하던 사실이지만 라이언트 가는 루스티첼 가보다 한참 격이 떨어졌다. 그걸 콕 집은 것이다.
칼리오페는 모르는 척 긴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라이언트 남작께서 아주 올바른 선택을 하셨네요. 후계 문제에 고심이 많았다구 들었는데.”
말하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박수를 짝, 치더니 제이드를 빤히 올려다봤다.
“아, 그러고 보니 곧 있으면 남작 영식이나 라이언트 경(sir)이라고도 못 부르겠네여.”
마지막 말이 제이드의 열등감을 완전히 헤집었다. 깊게 묻어두고 숨겨왔던 밑바닥이 너무나 손쉽게 까발려졌다.
제이드가 무가를 유독 무시하고 업신여긴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무가에선 작위를 세습 받지 않아도 다들 기사가 되어 경으로 불린다. 최소 준귀족, 정말 ‘운이 좋은 경우’는 가문의 시조가 되기도 한다. 모든 자식에게 작위를 하사할 수 있는 최고위 귀족이 아니더라도 계속해서 귀족 사회의 일원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제이드는 어려운 기사 시험을 아예 없는 취급하고, 새로운 작위를 하사받을 정도로 용맹한 기사를 그저 ‘운이 좋은 경우’라고 폄하하면서도 자각이 없었다. 그는 기사가 아니었기에 기사의 노력을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자기와 별반 다를 것 없는데, 아니, 자신의 능력이 훨씬 더 뛰어난데 문무의 차이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건 억울했다.
‘나보다 하등한 것들이…….’
제이드는 고향의 얼간이 같던 견습 기사들을 떠올렸다. 고작 검 몇 번 휘두른다고 그런 멍청이들이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다니.
노력해서 지방 행정관료가 되어봤자 젠트리다. 중앙 관료는 준귀족 취급을 받지만 제도 귀족들이 꽉 잡고 있어 힘들다. 그래서 가정교사로 일해 인맥을 쌓아 중앙 관료가 되려 했던 것이다.
‘나는 능력도 충분하다고! 이런 도움도 안 되는 가문에서 건방진 꼬맹이들에게 무시당할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그럼 앞으로 뭐라구 불러드려야 하나. 미스터 라이언트?”
제이드의 눈에서 불이 번쩍였다. 미스터 라이언트. 그 말을 듣는 순간 분노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성이 날아갔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게 감히……!’
제이드는 벌떡 일어나 손을 치켜들었다. 머뭇거림도 없이 그대로 칼리오페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리고,
“아악!”
목이 졸린 듯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이드는 무릎을 꿇은 채 뒤로 꺾인 팔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자신보다 훨씬 어린애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났다. 제이드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로베르트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제이드를 내려다봤다.
제이드가 칼리오페에게 손찌검하려는 순간, 로베르트는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일단 몸부터 날렸다.
제압은 쉬웠다. 무릎 뒤쪽을 가볍게 툭 차고 휘청거리며 주저앉는 팔목을 뒤로 휙 꺾는 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쉽게 놔주진 않을 것이다.
“선생님, 지금 뭐하는 짓이야?”
로베르트가 물었다. 항상 활기가 느껴졌던 목소리는 감정이 배제되어 섬뜩했다. 분노조차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제이드는 삐걱거리는 고개를 억지로 돌렸다. 로베르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는 본능적인 공포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는 자신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애에게 겁먹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내 윽박질렀다.
“이, 이거 놔! 지금 이렇게 폭력을 행사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 이래서 무인 놈들은 무식하—”
“응? 선생님 지금 설마 내 동생 때리려고 한 거야?”
로베르트가 팔목 안쪽을 꾹 누르며 꺾인 팔을 위로 치켜들었다.
“아아아악!”
“아니지?”
제이드는 대답도 못 하고 시뻘게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고통과 수치심과 자존심이 뒤엉켜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좁혀진 머릿속으로 의문만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왜? 뭐가? 내가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지? 뭘 잘못 했다고? 건방진 쥐새끼들이 날 능멸해? 나는 누구보다 우수하다고!
생각 같아선 이 애새끼들을 휙 들어 던지고 머리가 깨지고 이빨이 나갈 때까지 예절 교육을 시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로베르트가 붙들고 있는 팔은 물론이고, 떨리는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제이드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로베르트와 눈도 맞추지 못하면서 속으로 이를 갈았다.
“놔주세요, 오라버니.”
“하지만…….”
“괜찮아요.”
끝날 것 같지 않은 대치 상황에 칼리오페가 로베르트를 말렸다.
시간이 거의 끝나간다. 누가 들어올지 모르는데 이대로 계속 둘 순 없다.
로베르트는 붙잡고 있던 팔을 놔주었지만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구속이 풀렸는데도 제이드는 주저앉은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예법 운운하시던 것 치구 아주 형편없으시네요. 어린애에게 손을 올린 것두 모자라, 끝까지 사과도 없구. 부끄러운 줄 아세요.”
칼리오페의 말에 제이드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반성은커녕 분노만이 가득했다.
서늘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칼리오페가 귓가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긴 비극 끝에 겨우 되찾은 오빠와 가문을 욕보인 자다. 이대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아카데미를 갓 졸업한 햇병아리 시골 도련님이라 세상 물정을 잘 모르나 본데. 앞으로 기대하라구.”
낮게 깔린 목소리가 음산했다. 제이드는 흠칫하며 칼리오페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한 발짝 물러난 아이의 얼굴은 순연하니 맑았다. 도저히 그런 말을 했다고 보이지 않았다.
“예법 하니 생각났는데, 저는 예의를 차릴 만한 상대에게만 차린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예법이 미스터 라이언트에게는 다소 부족하게 보였나 보네요.”
칼리오페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부러 신경 써서 또박또박 말했다.
“축하드려요, 미스터. 당신이 내가 예의를 갖추지 않는 최초의 상대에요.”
* * *
고운 햇볕 아래, 풀냄새가 파르라니 싱그러웠다.
칼리오페는 루시우스의 손을 잡은 채 종종 걸음을 옮겼다.
오늘 칼리오페는 몇몇 가닥은 땋고 양 갈래로 높게 올려 묶었다. 그리고 뒤가 뚫린 레이스 보닛을 썼다.
보닛 위의 커다란 리본과 긴 머리카락이 달랑찰랑 걸음에 맞춰 물결쳤다. 그에 화답하듯 풍성한 치맛자락 끝에 달린 레이스가 하늘하늘 춤을 췄다.
오빠 손을 꼭 붙잡은 채 따라 걸음을 옮기는 인형 같은 여자아이의 모습에 귀부인들이 볼을 감싸 쥐며 한숨을 쉬었다.
“저 아이가 서모나 부인께서 말씀하신 칼리오페인가요? 안 알려주셔도 누군지 알 정도로 눈에 확 띄네요.”
“어쩜. 정말 인형 같아요. 아직 다섯 살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사뿐사뿐 걷는지.”
“길도 고르지 않은데요. 아, 물론 서모나 가에서 관리하는 숲인 만큼 잘 닦여 있지만요. 아무래도 자연경관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관리하시니 연회장보다는 고르지 않다는 뜻이었어요.”
감탄하던 부인이 자칫 오해를 살까 덧붙였다.
서모나 부인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실수한 부인의 팔에 친근하게 손을 얹었다. 오해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연회장과 피크닉을 비교하시니 부끄러운데요.”
“어머나, 비교가 되는 게 당연하죠. 숲속의 연회장이라고 할 만큼 너무 멋진걸요.”
“맞아요. 이렇게 신선한 공기를 쐰 게 얼마 만인지. 서모나 부인 덕이에요.”
앞다툰 칭찬에 서모나 부인이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피크닉을 여시네요.”
피크닉뿐만이 아니다. 사교계의 중심 중 하나인 서모나 가가 사교 모임을 주최한 것 자체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모두 말은 하지 않지만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서모나 가의 유일한 후계, 힐데르트 때문이다.
힐데르트의 오만한 성격은 상위 가문만 모였다고 해서 바뀌지 않았다. 때문에 파티의 손님도 아니고 주최자가 나서서 갈등을 빚는 일이 생기곤 했다.
‘루스티첼 가의 막내 때문에 이번 모임을 여셨다고 하죠.’
부인들이 속닥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대체 칼리오페가 어떻길래……. 소문을 듣긴 했지만요.’
‘일단 지켜보죠. 어쨌든 덕분에 우리야 잘됐어요.’
‘그러게요. 서모나에서 이렇게 오랜만에 사교모임을 주최하는데 카스틸로 가가 빠지진 않을 테니까요.’
‘정말 간만에 비싸신 황자님의 얼굴을 보겠네요.’
‘쉿! 황자님이라니요!’
그 말을 끝으로 수다는 멈췄다. 부인들은 누가 들었을까 주변을 살폈다.
서모나 부인이 주최하는 자리인 만큼,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쟁쟁한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공·후작가 출신은 물론이고 후작가 만큼이나 위세를 떨치는 세 백작가까지. 어디를 가든 중심이 될 인사들이었다.
그런데도 서모나 부인의 심기를 살피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카스틸로 가의 공자와 연을 맺을 통로는 서모나 부인뿐이었기 때문이다.
* * *
“서모나 부인!”
“어머, 제이드 경.”
제이드는 서모나 부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서모나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부드럽게 끌어안고 양 뺨을 번갈아가며 맞댔다. 무척 친밀한 분위기였다.
“제이드 경도 오셨군요.”
다른 부인들도 반갑게 제이드를 맞았다.
몇몇 부인들은 자식들을 제이드에게 맡기고 있었고 다른 부인들은 이런 자리에서 꽤 친해졌다. 아이들의 교육 문제는 모든 부인의 관심사인 데다가 제이드는 유능한 가정교사로서 이름을 톡톡히 날리고 있었다. 귀부인들이 그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하, 서모나 부인께서 초대해주셨는데 안 올 수가 있나요.”
“제이드 경, 우리 아이가 다섯 살이 되면 꼭 가정교사로 와주세요.”
“불러주시지 않아도 갈 겁니다. 막내 따님께서 총명하시단 소리는 제가 익히 들었습니다. 가르치는 입장에서 욕심이 날 수밖에요. 그때가 돼서 절 잊으시면 안 됩니다.”
“어머나, 그런 소문은 또 언제……. 제이드 경이 욕심난다고 하니 기분이 좋네요.”
부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사교계에도 내보내지 않은 딸에게 언제 그런 소문이 붙었는지 모르겠지만, 듣기 좋았다.
부인들은 서둘러 그를 위해 자리를 만들었다. 제이드는 냉큼 앉으며 분위기를 살폈다.
“그런데, 무슨 재미난 이야기 중이셨습니까? 멀리서 보기에도 정말 즐거워 보이시던데요.”
“아, 루스티첼 가의 막내 아가씨에 관해 이야기 중이었어요.”
“칼리오페……양 말입니까?”
제이드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었다.
“어머, 아시나요? 하긴, 소문이 꽤 많은 아가씨지요.”
“아, 얼마 전 제 소개로 루스티첼 저에 교사로 방문하셨을 거예요.”
서모나 부인의 말에 부인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크닉을 주최하신 것부터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칼리오페를 좋아하시나 보네.’
점점 더 칼리오페에게 관심이 갔다.
서모나 부인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감했지만, 이렇게 나서서 호의를 표하진 않았다. 또 아프락스 궁에서 일했던 만큼 사람 보는 눈이 엄격했다.
‘서모나 부인의 호의를 단번에 사다니……. 어떤 아이인지 정말로 궁금한데?’
‘만약 괜찮으면 친분을 쌓아야겠어.’
부인들의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돌아갔다.
모두 카스틸로 가와의 연결을 위해서 서모나 부인의 호의를 사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서모나 부인은 누구에게나 친절하면서도, 일정 이상의 친분을 쌓지 않았다.
‘왕의 환심을 사려면 그 곁의 시종부터 꾀라는 말이 있지. 서모나 부인과 친분을 쌓으려면…….’
‘루스티첼 부인은 어딨는 거지?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는데…….’
부인들이 부채로 시선을 가리며 주변을 살폈다.
“가르치실 때 어땠는지 궁금해요. 리페 정말 똑똑하고 총명하죠?”
서모나 부인이 눈을 빛내며 제이드에게 물었다.
제이드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안 그래도 오늘 피크닉에 나온 목적이 칼리오페에 대한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생각보다 칼리오페에게 호의적인 부인들의 반응이 의외였지만 그 정도는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다.
괜히 그간 비굴하게 납작 엎드려서 관계를 쌓아온 게 아니다.
“글쎄요…….”
제이드는 눈썹을 늘어트리며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런가요? 무슨 문제라도……?”
생각지 못했던 반응에 서모나 부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문제가 있었다고 해야 할지……. 이것 참, 뭐라 말씀드리기엔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닌가 염려되네요.”
제이드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교육자 된 입장에서 나서서 학생에 대해 나쁜 말을 옮길 순 없다.
다른 문제가 아니라, 부인들이 보기에 좋지 않다. 이곳 부인들은 모두 다 쟁쟁한 가문들의 주인으로 잘 보여야 한다. 제이드가 가르치는 학생의 부모도 이 자리에 있는 만큼, 어디 가서 제 자식에 대해서도 저런 말을 하고 다닐까 걱정할 수도 있다.
밉보일 말은 안 하는 게 좋다. 제이드는 그런 부분에서는 굉장히 철저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나요?”
서모나 부인은 설마 제이드가 칼리오페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자작 영애에서 후작 부인으로 엄청난 신분 상승을 한 데다가 행정의 중심인 아프락스 궁에서 일한 만큼, 그녀는 많은 종류의 사람을 봐왔다.
하지만 칼리오페 같은 아이는 처음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할진대 교육자 입장인 제이드는 얼마나 벅찼을까. 그는 다소 권력욕이 과하긴 하지만 기본적인 능력은 괜찮은 사람이었다.
‘너무 총명해서 그런 건가?’
지금도 칼리오페는 소문의 중심에 있다.
어려서부터 유난스러운 취급을 받은 아이에게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중 하나가 자신의 아들인 힐데르트였다. 하지만 칼리오페 같은 아이는 숨긴다고 해서 숨겨지는 아이가 아니다.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아무리 감추고 숨겨도 뚫고 나와 두각을 드러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
“칼리오페가 너무 똑똑해서 그런가요?”
“예? 네, 뭐 똑똑하긴 했습니다만 그것보단 다른 문제가…….”
“역시 그렇죠?”
서모나 부인이 손뼉을 치며 기꺼워했다. 그녀에게 제이드가 하는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 아이가 또 뭘 했는지 궁금해요.”
“아, 그게……. 테스트 삼아 나눗셈 문제를 내줬습니다.”
서모나 부인의 말을 무시할 순 없었다. 제이드는 자신의 계획이 점점 엇나가는 걸 느끼며 마른 침을 삼켰다.
“나눗셈이요? 그래서, 리페가 나눗셈을 풀던가요? 리페에겐 아직 어떤 교육도 하지 않았다고 하던데…….”
“풀었습니다만……. 어떤 교육도 안 받았다는 건 놀랍군요.”
“그렇죠? 저도 저번에 보고 깜짝 놀랐답니다. 인사하고 부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예법 교사를 따로 붙이지 않았다고는 믿어지지 않았어요. 게다가 하는 행동도 어쩜 그렇게 똑 부러지던지.”
물론 그것만으로 서모나 부인이 이렇게 칼리오페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저번 티파티 이후로 힐데르트가 눈에 띄게 변했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고용인들을 무시하고 패악을 부리던 것까진 똑같았다. 중요한 건 그 후였다. 말을 듣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혼을 냈다. 그런데 힐데르트가 우물쭈물하더니 고용인들에게 사과하는 것이 아닌가.
힐데르트가 사과라니!
심지어 억지로 하지도 않고—억지로 할 아이도 아니지만— 진심으로 반성하는 기색을 보였다! 티파티에서 봤던 기적이 그대로 재현됐다. 서모나 부인은 체통도 잊고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날 밤, 아이를 품에 안고 재우며 넌지시 물어봤다. 자존심이 센 아이가 자존심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캐물은 결과는 놀라웠다.
[칼리오페가 그랬어. 정말 어린애가 아니라면, 무례와 실수를 인정할 수 있다고.]
칼리오페 때문에 사과한 거라고? 서모나 부인은 눈을 둥글게 떴다.
[나는 어린애가 아니니까.]
당당하게 말하는 어린애의 모습에 서모나 부인은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다행히 참고 참아서 아들이 팽, 하고 토라질 위기는 면했다.
[그리고 칼리오페는…….]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서모나 부인이 몇 번 더 캐물었지만 힐데르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칼리오페는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 좋댔어.’
힐데르트의 상앗빛 뺨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하지만 어둠 속이라 서모나 부인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 후로 힐데르트는 고용인들에게 꽤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하던 습관이 완전히 고쳐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것만으로 고용인들은 감격해서는 입을 틀어막았다.
‘우리 도련님이 달라졌어요!’
그들보다 더 감격한 사람은 당연히 서모나 후작 부부였다.
칼리오페와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을 누차에 걸쳐 했지만, 귓등으로 듣지도 않던 아이였다. 그런데 저렇게 변하다니.
‘역시 또래가 하는 말은 다르구나.’
같은 말을 해도 자신과 똑같은 나이가 하면 다르게 느껴지는 법이다.
‘루스티첼 부인을 조르길 잘했어.’
확실히 칼리오페는 하는 행동도, 말도 주변의 모범이 되는 아이였다. 서모나 부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칼리오페와 힐데르트를 친구로 만들어주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덩달아 떠오르는 걱정이 있었다. 칼리오페와 힐데르트는 안면만 튼 사이였다.
남매 세 명이 집에 오는데 과연 아들 녀석과 잘 어울려 놀지. 힐데르트는 오만한 만큼 비사교적인 성격이었다. 첫 만남이 어색하고 안 좋으면 지속적인 관계를 기대할 수 없다.
‘아무래도 애들끼리 한 데 어울려서 놀면 친해지기도 쉽겠지.’
그리하여 오늘 피크닉을 열게 된 것이다. 오로지 칼리오페를 위해서.
그녀가 칼리오페의 이야기에 눈을 빛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 말씀을 들으니 저는 더더욱 의아하군요. 뭐 하나 배운 적이 없는데 모든 일에 그렇게 능숙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네?”
“제가 낸 문제는 작은 수를 큰 수로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분수나 소수점의 개념도 안 배운 아이가 어떻게 그러는지…….”
제이드는 미심쩍다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며 말을 흐렸다.
그러나 분위기는 제이드의 의도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머, 정말 대단하네요!”
부인들은 칼리오페의 놀라운 성취에 정신이 팔려 제이드의 미묘한 말투 따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정말 놀랍네요. 나이가 아직 여섯 살인가, 그렇게 되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다섯 살이에요, 부인. 정말 신기하네요.”
“우리 아이도 셈이 꽤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칼리오페와 비교하기 부끄럽네요.”
“어머나, 무슨 말씀을. 부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 아이는 어떻게 하나요.”
부인들 사이에서 감탄이 퍼져 나갔다.
모두 서모나 부인의 입을 통해 칼리오페가 무척 영민하다고는 들었지만 와 닿지 않던 차였다.
그런데 이렇게 정확한 학습 능력을 들으니 피부로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리페가 총명하다는 거죠.”
서모나 부인이 뿌듯하게 말했다.
제이드는 자신의 뜻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당황했다.
‘왜 다들 그년을 좋아하는 거야!’
사실 다섯 살 어린아이에게 악의를 갖는 사람이 인격 파탄일 뿐이었지만 제이드는 인격 파탄자기에 알 수 없었다.
어떻게든 이 분위기에 제동을 걸어야 했다. 이래서야 칼리오페 좋은 꼴밖에 더 되는가.
그는 필사적으로 아이를 가진 부모가 물 만한 떡밥을 생각해냈다.
“총명……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쳐본 제 입장에서는……. 이런 말씀 드리기 외람되지만, 칼리오페가 정말로 어떤 교육도 받지 않은 것인지 의문입니다.”
“그런가요?”
몇몇 부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되물었다. 모두 부모인지라 모두 자기 자식들이 더 뛰어났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스스로 깨우치는 천재보다는 몰래 조기 교육을 받은 천재가 반갑다.
제이드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여태까지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갔지만 이걸로 다시 승기를 잡았다.
“수학 능력도 이상했는데 예법까지 그랬다고 하니 더 의심이 드는군요. 루스티첼 부인께서 욕심에……. 아, 자기 자식이 뛰어났으면 하는 게 아무래도 부모 마음이니까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정확한 말은 아꼈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할 사람은 없었다.
“어머, 설마 루스티첼 부인이 그러셨을까요. 듣기로는 성품이 뛰어나시다던데.”
“성품과 자식 욕심은 또 다른 문제니까요. 확실히 제이드 경의 말씀도 일리가 있네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거짓말을 하시다니……. 이렇게 쉽게 들통날걸요.”
오늘 피크닉에 참석한 부인들은 모두 루스티첼 부인을 잘 알지 못했다. 어울리는 무리가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드디어 뜻대로 되었다. 제이드는 속으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어디 살을 붙여볼까? 칼리오페 고 계집이 상류 사교계에 발도 못 붙이게 만들겠어. 건방진 년!’
갑자기 차 맛이 꿀맛이었다. 이제야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았다는 생각이 든다.
“제이드 경.”
그때 서모나 부인이 딱딱한 목소리로 제이드를 불렀다.
시중 일관 부드러웠던 분위기와 확연히 차이 나는 부름에 부인들이 수다를 멈추고 두 사람을 주목했다.
“나는 경의 인품과 능력을 믿고 루스티첼 부인께 소개한 겁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안 좋은 소문을 낼 줄은 몰랐습니다.”
“오, 오해이십니다, 부인! 저는 그저 제가 느낀 것을 솔직하게 말한 것일 뿐, 폄하하려는 의도는…….”
“칼리오페의 능력이 너무나 뛰어나 그런 의문이 들었다는 거로 이해하겠어요.”
더 듣기 싫다는 듯 서모나 부인이 딱 잘라 말했다.
제이드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서모나 부인은 더 이상 제이드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젠장!’
괜히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찾지 못했다. 아니, 본전은커녕 여태까지 쌓아 올린 것을 다 잃었다.
‘내가 어떻게 만든 친분인데……!’
서모나 후작 저에 가정교사로 드나들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데. 후작 가에서 가정교사를 구인한다는 말을 듣고 아카데미에서 나보다 성적이 높았던 자를…….
제이드는 뻗어 나가는 생각을 멈췄다.
‘수석은 원래 내 자리였어. 내가 가장 우수했다고! 그 평민 계집이 수석 졸업했다면 다루안 아카데미의 수치야. 내 욕심이 아니라 아카데미의 위신이 걸렸던 문제였어!’
테이블 밑에서 꾹 틀어쥔 제이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지금 결과가 어떤가.
제이드는 아직도 자신을 외면하는 서모나 부인을 노려봤다.
‘그간 뒤엎어버리고 싶은 걸 꾹 참고 그 잘나신 아드님의 비위를 맞추며 가르쳤는데, 지금 칼리오페 년의 편을 들어?’
분노는 권력자인 서모나 부인이 아니라 약한 어린아이인 칼리오페에게 향했다.
‘고작 한 번 만났다면서 대체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여우같이 요망한 년.’
그때 제이드에게 한 줄기 빛이 내렸다.
“그런데 조금 신기하긴 하네요. 큰 수를 작은 수로 나누는 것 정도면 이해하겠는데, 작은 수를 큰 수로 나누는 건 아예 개념 자체가 다르니까요.
다섯 살이 아무런 가르침도 없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인지……. 제이드 경이 품은 의문, 저도 이해가 되는데요.”
칸테나 백작 부인이었다. 제이드가 가르치는 학생의 부모이기도 했다. 제이드가 수세에 몰리자 보다 못해서 역성을 들어준 듯했다. 눈이 마주치자 칸테나 부인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확실히 빠르긴 하죠. 그것도 너무.”
“역시 따로 배운 걸까요?”
부인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솔직히 말해 아무런 친분도 없는 루스티첼 부인에 관한 이야기니 그다지 거리낄 것도 없었다.
서모나 부인이 미간을 찡그렸다. 오늘 이 피크닉의 목적 자체가 루스티첼 가와의 친분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욕보이게 되다니.
관심이 집중된 만큼 안 좋은 말도 나올 수 있지만, 그 정도는 호스트로서 자신이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일 거라 생각했다.
루스티첼 부인에게 제이드를 소개한 것은 오늘 칼리오페의 뛰어난 재능을 설득력 있게 사교계에 전하기 위해서였다. 상위 가문들이 루스티첼 가를 좋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제이드가 나서서 소문을 만들 줄이야.
‘이걸 어쩐다. 루스티첼 부인이 오면 뭐라고 하지.’
그때였다.
“지금 그 말씀은 루스티첼 부인께 실례 아닙니까.”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부인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
“히, 힐데르트?”
힐데르트가 꽤 오만한 성정이었지만 귀부인들에게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겸손하다는 인상은 없었지만 자신만만하다고 느껴질 선에서 예의를 유지했다.
그런데 저런 말을 하다니.
부인들은 당황하다가 힐데르트 옆에 서 있는 칼리오페와 루시우스를 발견하고 난색을 보였다.
당사자에게 부모 욕을 들려줄 마음은 결단코 없었다.
“짐작만으로 판단하시다니요, 명망 있으신 귀부인들께서.”
이 자리에 있는 부인들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렇게 직설적으로 잘못을 지적 받은 적이 없다.
루스티첼 부인에 대해 떠들던 부인들의 얼굴이 불긋해졌고 동조를 안 했던 부인들도 불편한 기색을 띠었다.
서모나 부인은 깜짝 놀란 얼굴로 아들을 바라봤다. 힐데르트가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역성을 드는 건 처음이다. 그럴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벅찼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할 줄 알게 되다니……. 게다가 다른 사람을 위해 나서기까지 하고.’
호스트면서 분위기를 굳히고 부인들을 불편하게 한 건 잘못이지만, 아이가 새롭게 배워나가는 건 기뻤다.
무엇보다 서모나 부인 역시 흘러가는 대화가 언짢던 차였다.
힐데르트가 아니었으면 그녀가 나서서 대화를 정리했을 터였다. 물론 훨씬 더 부드러운 방법이었겠지만.
‘또 칼리오페와 연관됐어.’
칼리오페를 보호하듯 한 발짝 앞에 선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네. 어쩌지?’
나란히 선 남매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의도치 않게 부모 흉을 듣게 한 것이다. 아무리 어른스럽고 똑 부러진 아이라도 커다란 상처가 될 것이다. 심지어 칼리오페는 이번이 두 번째였다.
사교 모임에 나온 게 두 번인데 그 두 번 다 부모 욕을 들었다. 사교 모임을 기피해도 할 말이 없다.
‘오늘 피크닉에서는 리페에게 좋은 기억만 심어줘서 친해질 계기를 마련하려 했는데…….’
알면 알수록 탐이 나는 아이였다.
걱정스럽게 칼리오페를 바라보는데 시선을 느낀 칼리오페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살포시 미소 짓는다.
서모나 부인은 깜짝 놀랐다. 사교계에서 오래도록 구른 귀부인들도 이런 상황에서는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저런 미소라니? 기품과 여유까지 느껴지는 미소였다.
“아니에요, 힐데르트 오라버니. 오라버니께서는 친구를 위하는 마음에 많이 속상하셔서 그러신 거지요? 부인들께서는 들리는 말을 듣구 합리적인 판단을 하신 것뿐인 걸요.”
서모나 부인은 다시 한번 칼리오페에게 놀랐다. 힐데르트의 잘못을 좋게 포장하며 감싸주는 것은 물론이고, 언짢은 부인들의 기분까지 살폈다.
‘정말 리페에게는 더 이상 놀랄 것이 없다고 생각해도 계속 놀라게 되네.’
부모 욕을 들은 칼리오페가 오히려 나서서 부인들을 변호하자 다들 눈을 둥그렇게 떴다. 루스티첼 부인을 의심한 사람들은 이번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저런 생각을 하는 다섯 살 아이가 있다니…….’
‘정말 어른스럽네……. 아니, 어른도 저렇게는 못할 것 같아. 타고난 천성이 참으로 곱구나.’
‘서모나 부인이 아끼는 이유를 알겠어.’
칼리오페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는 제이드를 바라보며 더 화사하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잘못이 있다면 한정적인 정보로 귀부인들의 혜안을 가린 자겠지요.”
모두의 시선이 제이드에게 몰렸다. 제이드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제이드 말에 동조하지 않았던 부인들은 물론이고 동조했던 부인들까지 그를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봤다.
칼리오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잘못을 한 만큼 그 잘못을 덮어씌우고 탓할 상대가 절실한 법이다. 게다가 이 경우 제이드의 농간에 말려든 게 맞았고.
이렇게 물꼬만 터주면 굳이 칼리오페가 애쓰지 않아도 부인들이 먼저 제이드를 비난할 것이다.
“보시다시피 리페가 워낙 영특한 아이니 그런 오해를 살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루시우스가 입을 열었다. 평소와 같이 냉막한 얼굴이었지만 그를 처음 본 부인들은 뜨끔했다.
“직접 리페를 보신 적 없는 귀부인들께서야 그렇지만 리페를 대면하고 가르치기까지 한 제이드 경께서 오해한 것은 의외입니다.”
‘의외.’
아까 제이드가 루스티첼 부인을 모함할 때 썼던 말이다. 충분히 의심하게 하면서도 빠져나갈 구석을 마련한다. 그대로 돌려주자 제이드의 표정이 볼만해졌다.
사실 루시우스는 이런 사교술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말로 상대를 찌르는 것보다 검으로 찌르는 것에 익숙했고, 곧게 뻗은 루스티첼의 검술만큼이나 직선적인 성정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막냇동생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서지 않을 순 없다. 아니, 나서야 한다. 사랑스러운 여동생에게 상처 주는 자가 있다면 그 누구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다행히 루시우스는 머리가 좋았다. 어쭙잖게 나서서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고 기회를 읽었다.
루시우스는 검투에서도 냉철한 분석력과 빠른 순발력으로 상대의 약점과 허점을 파악하고 정확히 그 부분만을 공략했다. 그렇기에 상대를 속이는 화려한 기술 없이, 검로가 다 드러나는 직선적인 검술만으로도 깔끔하게 승리했다.
그건 무투뿐만이 아니라 설전(舌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루시우스는 흐름을 읽고 상대의 허점을 정확히 찔렀다.
“제가 알기로 제이드 경은 유능한 가정교사라고 하던데 학생의 능력도 제대로 못 알아보는 분이 과연 유능하다고 할 수 있는지 의아합니다.”
제이드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루스티첼 가의 애새끼들이 아주 쌍으로 자신을 엿먹이고 있다.
부인들의 싸늘한 시선이 칼날처럼 제이드를 찔렀다.
‘내가 어떻게 쌓아온 것들인데……! 저딴 주제도 모르는 버러지들 때문에!’
제이드는 애써 침착한 미소를 지었다.
“루시우스 군은 그 자리에 없지 않았습니까.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싸고 들면 아이가 건방지고 방자해집니다.
진정으로 동생을 사랑한다면 잘못을 혼내야지요. 그때 칼리오페 양이 제게 어떤 말을 한 줄 아십니까.”
제이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극적으로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예의를 차릴 만한 상대에게만 차린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예법이 미스터 라이언트에게는 다소 부족하게 보였나 보네요.]
자다가도 싸늘하게 깔보는 눈동자로 내려다 보던 칼리오페가 생각 나 벌떡벌떡 일어났다.
[축하드려요, 미스터. 당신이 내가 예의를 갖추지 않는 최초의 상대에요.]
미스터 라이언트, 그렇게 부르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려서 술병을 몇 병이나 깨트렸는지 모르겠다.
제이드는 깊게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감정을 조절했다. 그는 가장 효과적인 말 한마디를 기억 속에서 건져 올렸다.
[아카데미를 갓 졸업한 햇병아리 시골 도련님이라 세상 물정을 잘 모르나 본데. 앞으로 기대하라고.]
‘이 말 한마디면 넌 끝이야. 멍청한 년.’
그는 칼리오페를 보며 승자의 미소 지었다. 그런데 칼리오페 역시 그를 보고 생긋 웃는 것이 아닌가.
그 웃음이 신랄하게 독설을 퍼부었을 때와 똑같아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제이드 선생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어요, 오라버니. 물론 오라버니는 저를 아끼는 마음에 말한 거지만……. 아, 저는 무척 감동했어요. 감사해요, 오라버니.”
칼리오페가 치마 끝을 들어 올리며 무릎을 살포시 굽혔다. 상황과 다르게 귀엽고 앙증맞은 모습이었다.
시각적 경험은 판단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다. 부인들은 은연중에 무심코 생각했다.
‘저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잘못했어도 얼마나 큰일이겠어.’
‘어린애가 뭘 모르고 저지른 실수 중 하나겠지.’
“하지만 전후 상황을 모르고 첨언하는 건 제이드 선생님 말씀대로 옳지 않지요. 오라버니가 걱정할까 봐 말을 아꼈지만…… 제이드 선생님 본인께서 저리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지요.”
제이드가 숨을 들이켰다. 칼리오페가 뭘 이야기하려는지 깨달은 것이다.
‘흥분해서 잊었나 본데, 그때 있었던 일을 숨겨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야.’
칼리오페는 조소를 숨기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것만으로 긴 속눈썹이 처연하게 나붓이 내려앉았다.
“사실은…… 저도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눈데……. 제가 잘못한 게 있는 거겠져. 그러니 제이드 선생님께소—”
“그만!”
제이드가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다 못해 이마에 핏대가 섰다. 흥분해서 씩씩거리는 모습은 항상 말쑥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처음 보는 그의 태도에 부인들은 깜짝 놀랐다.
슬며시 어떤 강력한 예감이 자리 잡기 시작한다. 기분 나쁜 술렁임이었다.
“리페, 괜찮으니 말해보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모나 부인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칼리오페에게 말했다.
소리치는 제이드에게 깜짝 놀랐는지 흠칫거리며 제 오빠에게 바짝 붙는 어린 몸이 안쓰러웠다.
“제이드 선생님께서…….”
칼리오페가 말을 멈추는 걸 보고 서모나 부인이 억지로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올렸다. 다정한 미소를 지어주고 싶은데 잘 됐는지 모르겠다.
“그래, 듣고 있단다. 걱정 말고 말하렴.”
다행히 용기를 낸 칼리오페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제이드 선생님께서 저를 때리려구……. 제가 많이 잘못했나 봐요. 그러니까 주제를 모른다면서 그러신 거겠지요.”
수십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제이드를 향했다. 싸늘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시선이었다.
경멸과 환멸을 넘어선 분노와 멸시가 공기를 짓눌렀다.
그간의 연으로 제이드의 역성을 들어줬던 칸테나 부인마저 다를 바 없었다.
제이드는 핏기가 완전히 사라진 얼굴로 부인들의 낯을 훑었다. 희망을 찾아 방황하던 시선이 결국 뒤쪽에 있는 칼리오페에게 닿았다.
숨겨야 하는 사람.
‘바로 너지.’
칼리오페가 웃었다.
* * *
“제이드 경, 지금 이 말이 사실입니까.”
서모나 부인이 물었다. 고저 없는 목소리 톤이 그녀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그, 그게…….”
제이드는 말을 더듬고 나서 아차 했다. 아니라고 잡아뗐어야 했는데! 웃고 있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타이밍을 놓쳤다.
서모나 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답을 들을 것도 없다. 당황한 표정이 사실임을 뜻하고 있었다.
“오해입니다!”
제이드가 뒤늦게 항변했다.
“오해라고요?”
칸테나 부인이 코웃음 쳤다.
대체 뭐가 오해냐는 얼굴에 제이드가 떠듬떠듬 변명하기 시작했다.
“저, 저는 항상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최선을 다하신 분이 지금 아이를 때렸다고요?!”
“아니, 때리진 않았고……. 보세요. 상처 하나 없지 않습니까.”
“때리려고 한 건 사실이군요.”
서모나 부인이 차분하게 말했다. 조용하지만 날카롭게 정곡을 찔렀다. 제이드는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저, 전 괜찮아요. 로벨 오라버니께서 막아주셨어요.”
자그마한 목소리에 부인들이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난처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게 안쓰러웠다.
‘저 조그만 애한테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부인들은 모두 속상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 제이드에게 자식 교육을 맡긴 부인들 가슴은 미어지는 것 같았다.
‘혹시라도 우리 애한테 손찌검했으면 어쩌지.’
부인들의 시선이 한층 더 흉흉해졌다.
“하! 때리려다가 정신 차리고 멈춘 것도 아니고 중간에 다른 사람이 막은 거였어요?”
“로벨…… 로베르트는 루스티첼 가 둘째 아닌가요?”
“그 아이도 아직 어린데, 세상에…….”
충격이 번져나갔다. 심약한 부인들은 가슴 앞에 손을 맞잡고 신을 찾기도 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어리고 순진한 아이들 앞에서는 본색을 드러내는 사람이었군요.”
“이런 사람한테 우리 애들을 맡겼다니…….”
“부, 부인 진정하세요. 이번 일은 정말 예외적인 일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제분들을 잘 가르쳐왔지 않습니까. 제가 훌륭하신 자제분들을 체벌할 리가 없지요. 여태껏 멍 자국 한 번 보신 적 있습니까?”
제이드가 필사적으로 호소하기 시작했다. 부인들은 반사적으로 아이들의 몸을 떠올렸다.
“없으시지요. 저도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제가 원래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는 건 여태까지 절 봐오신 귀부인들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이들도 절 잘 따랐고요.”
제이드가 여태까지 맺어왔던 관계와 정을 강조했다. 아이들도 제이드를 좋아했다는 말에 부인들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 정말 우리 애를 때렸다면 잘 따랐겠어?’
대다수의 부인들은 여전히 싸늘했지만, 칸테나 부인처럼 관계가 돈독했던 사람들은 얼굴을 누그러트렸다.
희망이 보인다. 제이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렇지, 그간 발밑에 납작 엎드려 비위 맞췄던 게 헛짓거리는 아니다. 자신에 비하면 칼리오페는 오늘 갑자기 굴러온 돌이다. 자신의 발길질 한 번에 뻥 차일 잔돌.
“오죽했으면 제가 그랬겠습니까. 제가 무슨 수모를 당했는지—.”
“어떤 상황이 되었든 어린아이를 때리려 하다니요.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서모나 부인이 냉정하게 말을 끊고 상황을 정리했다.
제이드의 호소에 귀를 기울였던 부인들이 아차 했다. 가장 중요한 걸 순간 잊었다.
“지금 내가 경이 힐데르트를 때렸을까 걱정돼서 이러는 겁니까. 경은 나를 속 좁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고 있군요.”
제이드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필사적인 몸짓이었다.
“아닙니다, 서모나 부인. 제 말뜻을 오해하신 것 같은데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오해? 제이드 경이 칼리오페를 때리려 했다. 여기 오해가 있나요?”
“그…….”
더듬거리던 제이드가 입을 꾹 다물었다.
“성년이 지난 여성을 때리려 했어도 기겁할 일입니다. 하물며 리페는 다섯 살. 부모가 없는 틈을 타서 때리려고 한 것도 모자라, 오죽했으면 그랬겠느냐고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질문이었다. 차분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에는 기품이 가득했다.
‘그러게 가만있으면 반이라도 가지. 꼭 매를 번다니까.’
칼리오페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였다.
“그래서 지금 제이드 경은 아이를 때린 게 본인 탓이 아니라 아이 탓이라는 건가요?”
다른 부인까지 합세해서 제이드를 몰아붙였다. 여태껏 나서지 않은 사람이었다.
칼리오페는 무심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크게 떴다.
‘사하르네 부인.’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밖으로 티가 나지 않는 칼리오페의 이변을 알아챈 사람은 단 둘뿐이었다. 루시우스와 힐데르트.
루시우스는 동생의 손을 꾹 잡았다.
‘대체 갑자기 왜 그러지?’
제이드가 때리려 했다는 말을 할 때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아이다. 그때 칼리오페보다 더 철렁한 사람은 루시우스 자신이었다. 그런데 지금 왜 이렇게 동요하는 걸까.
힐데르트는 차마 칼리오페의 손을 잡지 못하고 발만 동동거렸다. 칼리오페의 손 근처에서 그의 손이 위성처럼 맴돌았다.
걱정하는 와중에도 그 모습을 본 루시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루시우스는 칼리오페를 슬쩍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대답하지 못하는군요.”
그 가운데 부인들의 이야기는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당장 내 피크닉에서 나가주세요.”
서모나 부인이 이 일에 종지부를 찍었다.
축객령에 제이드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바싹 마른 입술이 몇 번 달싹였지만, 목소리가 나오진 않았다.
이 축객령은 비단 이 모임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제도 사교계에서의 축객이었다.
“부, 부인!”
겨우겨우 쥐어 짜낸 외침이 절박했다. 하지만 그 누구의 마음에도 닿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 서모나 가에 오실 필요 없어요.”
“칸테나 저에도요.”
“우리 집에도.”
부인들이 줄줄이 말했다.
제이드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여태까지 힘들게 쌓아온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것도 다섯 살짜리 꼬마 때문에.
서모나 부인과 연을 맺고 가장 큰 대어를 낚았다고 좋아했다. 그런데 잡은 줄 알았던 물고기가 그물을 찢고 나와 그를 향해 입을 쩍 벌리고 있다.
물고기가 자신의 그물로 잡기엔 너무 크고 강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뭐 하세요? 안 가고.”
서모나 부인이 칼리오페를 감싸며 말했다.
그의 손으로는 결코 잡을 수 없던 물고기가 조그마한 아이의 손에는 너무나도 쉽게 잡혔다.
* * *
제이드의 퇴장으로 분위기가 환기됐다. 부인들은 일부러 더 밝게 이야기를 나눴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루시우스의 말에 칼리오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안녕하십니까, 서모나 부인.”
“서모나 부인, 안녕하세요.”
루시우스와 칼리오페가 나란히 인사했다. 절도 있는 움직임과 나긋하고 앙증맞은 움직임이 뚜렷하게 대비되는데, 그토록 조화로울 수 없었다.
어린 기사님과 쁘띠 레이디의 인사에 부인들이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멀리서 볼 때도 그랬지만 가까이서 보니 더 인형 같았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와줘서 고마워요, 루시우스 경, 레이디 칼리오페.”
서모나 부인은 활짝 웃으며 두 사람을 맞았다. 제법 어른스러웠던 인사에 맞춘 환영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서모나 부인은 푹 한숨을 쉬며 칼리오페를 살폈다.
“정말 괜찮니? 다치진 않았어도 충격이 컸을 텐데……. 저런 사람인 줄 모르고 소개해서 정말 미안하구나.”
“귀부인께서는 호의로 소개해주신걸요. 미안해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잘못한 사람은 사람들을 기만한 제이드 선생님이지요. 저는 괜찮아요.”
의젓하게 말하는 모습에 서모나 부인이 미소 지었다.
어떻게 이런 아이를 때리려 한 것으로 모자라 탓하려고까지 했는지. 제이드의 인성이 알만했다.
“어머니께선 로베르트와 조금 늦게 도착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곧 있을 기사식 때문에요.”
루시우스의 말에 서모나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오빠 손을 꼭 잡고 아장아장 걸어왔구나. 안 그래도 등장할 때 두 아이와 그 뒤를 따르는 유모만 있어서 의아하던 차였다.
“그러고 보니 곧 백룡 기사식이네. 내가 괜히 바쁜 사람을 불러낸 건 아닌지. 못 오셔도 이해했을 텐데.”
“귀부인께서 초대해주신 건데 없는 시간을 만들어서라두 당연히 와야죠. 게다가 이렇게나 멋진 피크닉인걸요.”
“어머나! 정말 고맙구나, 리페.”
서모나 부인이 활짝 웃으며 칼리오페를 끌어안았다.
* * *
루시우스는 슬슬 자리를 뜨기 위해 분위기를 살폈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만 인사를 나누고 빨리 동생과 단둘이 되고 싶었다.
대체 아까 한 말은 뭔지. 맞을 뻔했다니. 금시초문이다. 칼리오페가 괜찮다고 해도 전혀 괜찮지 않다.
루시우스가 담소를 방해하지 않겠다며 떠나려 할 때였다. 그보다 더 빨리 입을 연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칼리오페.”
칸테나 부인이었다.
루시우스는 입을 도로 다물었다. 초조함에 옅은 한숨이 나오려 했지만 참았다.
칼리오페는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혔다.
“안녕하세여, 칸테나 부인.”
“나를 아니?”
칸테나 부인은 깜짝 놀랐다.
‘주변에 누가 누구인지 먼저 언질해 줄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루시우스나 힐데르트가 말해줬나?’
힐데르트가 두 사람을 인사시키려고 데려온 것 같으니 그럴 만했다. 그 또한 신기한 일이었다.
‘그 힐데르트가 제대로 호스트 역할을 하고 있잖아. 인사시키려고 데려오다니.’
또래 애들은 상대하기도 싫다며 오만하게 콧대를 세우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이렇게 변했으니 서모나 부인이 칼리오페를 아낄 만도 했다.
칼리오페는 진한 호기심과 옅은 호감으로 물든 칸테나 부인의 눈동자를 보며 차분히 생각했다.
‘내 편을 만들어야 해.’
아까 사하르네 부인을 보고 본능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하르네 부인과의 재회가 워낙 충격적이라 구체적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 순간에 칸테나 부인이 그녀를 부른 것이다.
칸테나 부인은 불같은 성정에 쉽게 정에 휩쓸리는 사람이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다혈질이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성격이 어딜 가는 건 아니다.
‘계산적이지 않고 의리가 강한 사람. 그리고 행동력과 결단력. 무엇보다—’
뛰어난 마법사로 적룡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
‘칸테나 부인이 내 편이 된다면 큰 힘이 될 거야.’
칼리오페의 시선이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사하르네 부인에게 향했다.
‘절대 예전처럼 두지 않겠어.’
회귀 전, 어머니가 편찮으실 때 사하르네 부인이 어떻게 했는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약도 먹지 못해서 침대에 누워서 기침하던 어머니도. 그러다가 시꺼먼 피로 점점히 물들던 이불도.
칼리오페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그런데도 혹시 잊을까 매일 밤 회고했다.
전과 같은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이번엔 소중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사하르네 부인은 칼리오페를 바라보며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마주 미소 지었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칸테나 부인의 도움이 필요했다. 칼리오페는 시선을 돌려 칸테나 부인에게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붉은 머리칼에 푸른 눈을 가진 귀부인은 칸테나 부인뿐이라구 들었는걸요. 그 소문을 듣고 어떤 아름다운 분일까 상상했는데……. 제 상상이 귀부인의 모습을 따라가지 못했네요.”
“어…… 그, 그러니?”
인형 같은 아이가 두 손을 꼭 맞잡고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하는 말에 칸테나 부인이 얼굴을 붉혔다.
미리 언질 받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그런 소문을 들은 거였다니. 이렇게 가감 없는 칭찬을 들은 게 너무 오랜만이라 쑥스럽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싫은 건 절대 아니었다.
“만나 뵙게 되어서 무척 기뻐요.”
“나도 반갑구나, 칼리오페. 서모나 부인께 이야기를 많이 듣고 만나보고 싶었단다.”
자기도 모르게 괜히 목소리가 친절하고 부드러워졌다. 아까 제이드의 역성을 들었던 게 생각나 미안한 것도 있었다.
서모나 부인에게 칼리오페에 대해 들었을 때 궁금하긴 했지만, 딱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까진 안 들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만나보고 싶었던 것 같다. 아니, 만나보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궁금해한 거지.
‘이렇게 사랑스럽고 의젓하고 다정한 아이를 만나기 싫은 사람은 없을걸.’
“정말요?”
“그러엄!”
다른 부인들은 처음 보는 칸테나 부인의 모습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칼리오페 같은 아이가 저렇게 따르면 없던 친절함도 생길 것 같다.
‘조금 부러운데…….’
뭐랄까, 고양이가 와서 애교 떠는 걸 지켜볼 때의 부러움이랄까.
“그런데 무슨 일이신가요, 칸테나 부인?”
“아, 나도 참.”
아이의 사랑스러움에 정신이 팔려서 불러놓고도 까먹었다.
“어떻게 나눗셈을 그렇게 잘하는지 궁금해서. 작은 수를 큰 수로 나누면 소수점이나 분수가 나온다는 걸 어떻게 알았니?”
칸테나 부인은 마법사였다. 그 말은 수리적 능력이 뛰어나단 뜻이었고, 학구적이란 말이었다.
칸테나 부인은 적룡 부기사단장인 지금도 가끔씩 대현자의 탑에 방문했다. 당연히 그곳에 머무는 아이들도 봤다. 대현자의 탑에 올 정도면 마법사의 자질을 타고 난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다.
개념을 알려주면 빨리 이해하고 응용하는 아이들을 꽤 봤다. 그걸 단번에 해내는 아이들을 보통 천재라고 부른다. 그 중에는 칼리오페보다 더 어린 나이에 나눗셈을 푸는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개념 자체를 스스로 깨우치는 아이는 처음이다.
‘그것도 이렇게 어린 나이에 그런 어려운 개념을 말이지.’
큰 수를 작은 수로 나누는 것과 작은 수를 큰 수로 나누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완전히 진일보된 개념이다. 소수점이나 분수. 1보다 작은 것이 있다는 개념 자체를 스스로 깨우치다니.
칸테나 부인은 수리에 깊은 조예가 있었고, 그런 만큼 다른 부인들이 감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충격을 받았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제이드의 말에도 동의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만나본 칼리오페는 그녀가 아는 어떤 아이와도 달랐다. 사실이라는 걸 바로 알 만큼.
궁금했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을 걸 어떻게 알았는지.
“아, 그거요…….”
칼리오페가 말을 끌며 작게 미소 지었다.
성인이 되도록 살았다가 과거로 돌아왔으니 나눗셈 정도야 잘 알 수밖에. 하지만 그걸 그대로 말할 순 없다. 말해봤자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유모가 타르트를 자르는 걸 보구 생각했어요.”
당연히 변명거리는 나눗셈 문제를 풀 때부터 생각해뒀다. 뭐든 솔직하게 말하고, 대답하기 곤란하면 차라리 입을 다물던 과거와는 다르다.
“타르트?”
칸테나 부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놀란 것뿐이지만 칼리오페의 심장은 철렁했다.
칼리오페는 조금 더 아이처럼 굴어야 하나 고민했다. 완전히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꼴이었다.
“이로케! 커다란 딸기 타르트였는데, 달콤하구 촉촉하구 바삭했어요!”
짧은 팔을 파닥파닥거리면서 파이를 설명했다. 로베르트 흉내였다.
효과는 대단했다.
‘어머나, 귀여워라!’
‘어쩜 저렇게 사랑스러울까?’
‘역시 애는 애야. 어른스러운 듯하다가도 단 거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
부인들이 심장을 부여잡았다. 차분하던 아이가 어리광을 부리면 그 효과가 극대화되는 법이다.
“리페는 타르트가 좋아?”
“네! 좋아요!”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여기 타르트 먹어볼래? 맛있단다. 딸기 타르트는 아니지만.”
“자, 아~ 해보렴.”
부인들이 너도 나도 나서서 칼리오페에게 타르트를 먹이려고 했다.
‘왠지 사육당하는 느낌인데…….’
칼리오페는 입을 벌려 짹짹 얌냠 받아먹으면서도 뭔지 모를 찝찝함을 느꼈다.
“그래서, 타르트를 자르는 걸 보고 생각했다고?”
“네, 타르트는 하나인데 자르면 여덟 조각이 되잖아요. 왜 하나를 나누면 여덟 개가 되는 걸까, 왜 여덟 개를 합쳤는데 하나가 될까 생각해봤어요.”
칸테나 부인은 탄복했다. 뭔가 대단한 계기가 있어서 깨달은 게 아니었다.
‘평범한 일상에서 새로운 개념을 깨우치다니……!’
욕조에서 빠져나가는 물을 보고 밀도를 발견한 마법사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 중력의 법칙을 깨달은 마법사가 떠오른다. 두 마법사 모두 대현자의 반열에 올랐다.
‘칼리오페도 어쩌면…….’
칸테나 부인의 눈이 빛났다. 마나의 자질을 타고 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가 로벨 오라버니가 봤던 책을 읽구 분수와 소수에 대한 설명을 읽었어요.”
“그래서 문제를 풀 수 있었구나.”
개념을 먼저 스스로 깨우친 후 표기법을 배운 것이니 어렵지도 않았을 거다.
“리페는 책을 많이 읽나 보구나.”
책 좀 읽으라, 읽으라 해도 절대 읽지 않는 아들을 둔 부인이 감탄했다.
“네, 루스 오라버니가 매일 밤 책을 읽어주기두 하구요.”
두 살 때 시작됐던 루시우스의 동화책 읽어주기는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동화책을 읽진 않지만.
“어머, 책을?”
“네, 독서 놀이에요.”
칼리오페는 꽤 그 시간을 좋아했다. 처음에는 회귀 전에는 다소 서먹하던 남매 관계가 가까워진 게 좋았다.
지금은 함께 책을 읽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재밌었다. 칼리오페의 수준을 파악한 루시우스가 점점 어려운 책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물론 루시우스가 생각하는 칼리오페의 수준과 실제 수준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서 칼리오페는 루시우스와 이야기를 나누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래서 매일 밤 침대맡의 독서 놀이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그랬구나. 리페는 좋은 오빠를 둬서 참 좋겠네.”
“네, 정말 좋아요.”
진심이 가득 담긴 칼리오페의 대답에 루시우스의 어깨가 당당하게 펴졌다. 부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쿡쿡 웃었다.
“어른들하고 이야기하는 거 재미없을 텐데 너무 오래 잡아뒀구나. 가서 재밌게 놀렴.”
“아니에요. 귀부인들을 뵈어서 즐거웠습니다.”
다소곳한 인사에 부인들이 꿈에 젖은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막내딸을 만들어 볼까. 리페도 막둥이인데. 리페 같은 딸을 낳을 수만 있다면……!’
아들만 있는 집안의 부인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리페, 괜찮아?”
조심스러운 물음에 칼리오페가 힐데르트를 쳐다봤다.
“아, 아니, 저…… 칼리오페.”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정정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리페라고 부르셔두 되요.”
칼리오페의 말에 힐데르트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다가 옆에서 안광을 번뜩이는 루시우스를 보고 흠칫했다.
‘그냥 칼리오페라고 불러라.’
웬만한 아이였으면 무서워서 으앙 울음을 터트렸을 기세였지만 힐데르트가 누구인가. 오만하고 자존심 높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서모나 가의 도련님이 아닌가.
힐데르트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을 무시했다. 예외가 칼리오페였다.
“응, 리페!”
되려 환히 웃으며 ‘리페’라고 부르는 모습에 루시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샌님처럼 생겨서 만만찮은 놈이군. 귀찮은 날벌레가 꼬였어.’
보통은 루시우스의 눈빛 한 번에 기가 팍 죽어서 슬슬슬 피하는데.
“저는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는 제이드 선생님 괜찮았어요? 혹시 저한테처럼 때리려구 한 건 아니지요?”
힐데르트는 걱정 가득한 칼리오페의 눈빛에 말문이 턱 막혔다. 평소라면 버럭 성부터 냈을 것이다. 감히 제이드 따위가 이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면서.
“흥, 내가 순순히 당할 사람으로 보여?”
결국 언제나와 비슷한 말이 나오긴 했지만 어조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인상을 살짝 찌푸리곤 있는데 뺨이 상기됐다. 입술도 뾰족 튀어나왔다.
잠시 주저하던 힐데르트가 시선을 피하며 작게 덧붙였다.
“나는 그런 일 없었어. 그런 놈은 선생님이라고도 부르지 마. ……내가 다음에 보면 혼내줄게.”
칼리오페는 아이의 허세에 웃음을 삼켰다. 뭐, 꽤 귀여웠다.
“힐데르트 오라버니만 믿구 있을게요.”
“흥, 특별히 허락하지.”
힐데르트가 고개를 휙 돌리면서 답했다. 그 와중에 믿음직스럽다는 걸 나타내려는지 가슴까지 쑥 내민다.
“글쎄, 목검이나 한번 잡아봤을지 모르겠는데.”
싸늘한 목소리가 찬물을 끼얹었다. 루시우스는 삐딱하게 힐데르트를 쳐다보다가 칼리오페를 향해 말했다.
“리페, 넌 나만 믿으면 된다.”
“아, 네…….”
칼리오페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애한테 대체 왜 승부욕을 불태우는 거지, 우리 오라버니는.
‘사춘기는 참 이해하기 힘들다니까.’
칼리오페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루시우스는 만족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자리를 비켜줬으면 좋겠군. 리페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내가 왜?”
힐데르트가 발끈해서는 외쳤다.
“나는 호스트로서 손님을 접대하고 피크닉을 즐기는지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어.”
“리페는 나와 있는 거로 충분히 즐기고 있으니 다른 손님들이나 살펴.”
“그건 당신 생각이고. 리페는 다르게 생각할걸? 맨날 같이 있는 사람이랑 있는 게 뭐가 그렇게 재밌겠어.”
“재밌어. 그러니까 이만 좀 비켜.”
루시우스가 칼리오페의 손을 휙 잡아당겼다. 물론 그 와중에도 칼리오페가 아프지 않도록 힘 조절을 했다.
“그러니까 리페 생각은 다르다니까?”
그에 질세라 힐데르트 역시 반대편 손을 잡아당겼다.
루시우스의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감히 누구 손을 잡아? 어서 놓지 못해?”
“리페는 가만히 있는데 왜 그래? 당신 손은 잡아 달라고 사정해도 잡지 않을 테니 신경 끄시지.”
칼리오페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어쩌다가 양손을 두 소년에게 잡힌 채 왔다 갔다 하는 신세가 되었지.
‘이게 무슨 줄다리기 시합도 아니고.’
“두 분 다 놓으세요.”
“리페.”
루시우스가 항변하듯 그녀를 불렀다. 힐데르트도 말만 안 했을 뿐이지 잡고 있는 손에 되레 힘을 준다.
“지금 당장.”
인상을 찌푸리자 둘 다 마지못해 손을 놓는다. 그 모습에 또 한숨이 나온다.
“힐데르트 오라버니, 루스 오라버니가 할 말이 있다구 하니 자리를 비켜주세요. 이야기 끝나구 오라버니 보러 갈게요.”
자길 보러오겠다는 말에 힐데르트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와 반대로 루시우스의 얼굴은 굳었다. 그의 동생은 너무나 예의 바르고 상냥하다. 저 날벌레가 동생의 예의를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데.
‘뭐, 이야기가 끝나면 찾아간댔으니까.’
대화가 끝날 일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이 피크닉이 끝나기 전엔.
루시우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 * *
힐데르트가 떠나고 나자 루시우스는 칼리오페를 한적한 나무 사이로 이끌었다.
키 큰 나무들에 주변이 가리고 근처의 소리도 멀어져 고요했다.
루시우스는 그간 꾹꾹 눌러 참았던 걸 쏟아냈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그 자식이 너를 때리려 했다니……! 왜 가만히 있었어!”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루시우스를 쳐다보았다. 회귀 전에도, 후에도 루시우스가 이렇게 소리치는 모습은 처음 본다.
“아니, 다그치는 게 아니라…….”
루시우스는 아차 해서는 말을 주워 담았다. 어쩔 줄 모르는 시선으로 칼리오페를 살폈다.
단 한 번도 폭력을 경험해 보지 못한 아이다. 사람이 사람을 때릴 수 있다는 생각이나 해본 적 있을까? 누군가가 큰소리치는 것도 못 겪어본 아이가 그때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생각만으로 가슴이 타들어 갔다.
그런데 그런 아이에게 소리치다니. 보듬어주고 안심시켜줘야 할 판에.
“……미안하다, 리페.”
조용하면서도 진중한 사과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 보는 모습에 놀랐을 뿐이다.
루시우스의 생각과 달리 칼리오페는 전쟁을 겪었다. 전쟁은 상상보다 더 끔찍하고 비인간적이다. 아이를 때리는 거나 큰소리치는 거로 충격받기엔 너무나 많은 일을 보고 들었다.
“아니에요, 오라버니.”
칼리오페는 아무렇지 않다는 뜻으로 미소 지었다. 그녀는 루시우스가 소리친 것을 미안해한다는 정도로만 생각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칼리오페의 태도에 루시우스는 가슴이 미어졌다.
그는 칼리오페의 머리칼에 묻은 나뭇잎을 떼어주고 작고 보드라운 손을 꼭 붙잡았다.
“누군가 너한테 소리 지르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지 마.”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너를 상처 주는 것은 넘어갈 수 없다. 루시우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사과한다고 바로 괜찮아지지도 말고.”
가만히 눈을 마주치며 하는 말에 칼리오페는 숨을 삼켰다.
“넌 그런 대접 받을 애가 아니야. 넌 누구보다도 소중한 아이야.”
“루스 오라버니…….”
가슴 속에서 무언가 뜨겁고 촉촉한 게 훅 치고 올라왔다.
칼리오페는 가까스로 그것을 다시 삼켰다. 아직 앳된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오라버니를 꽉 끌어 안아주고 싶었다.
“……오라버니두 정말 소중한 사람이에요.”
루시우스는 힘겹게 미소 짓는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산호빛 눈동자가 물기에 반짝이며 흔들린다.
“그러니까 절대, 절대로 죽으면 안 돼요.”
목소리까지 떨린다. 칼리오페는 차마 루시우스의 손을 마주 붙잡지 못하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루시우스는 그 모습을 보고 목이 꽉 메었다.
왜 이렇게 애달프게 말하는 걸까. 어떤 슬픔도, 어떤 상실도 경험해 보지 못했을 아이가.
그는 칼리오페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나 여기 있다고, 어디 안 간다고 알려주는 것처럼.
“칼리오페, 널 두고는 안 죽어.”
칼리오페는 그 말에 대답 없이 미소 지었다. 깨질 듯 아슬아슬한 미소였다. 보는 사람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거짓말. 예전에는 죽었으면서.’
루시우스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를 탓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살릴 거야.’
과거, 혹은 미래의 비극을 겪은 건 오히려 축복이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미리 알고 있으니까.
다만 그때의 아픔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다.
“리페…….”
루시우스는 안타까움에 칼리오페를 불렀다. 뭐가 이렇게 어린 동생을 애처롭게 만드는 걸까.
그의 동생은 뭔지 모르지만 혼자 짊어지려 하는 면이 있다. 이 작은 몸으로.
“죽기는 누가 죽는다는 거야.”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둘 사이를 갈랐다. 뒤이어 로베르트가 나무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 왜 이런 데 있는 거야? 찾는 데 한참 걸렸잖아.”
“로벨.”
가까이 다가온 로베르트는 입을 비죽이면서 불평을 쏟아냈다. 그러더니 칼리오페를 보고 눈이 커다래졌다.
“우리 리페 너무 예쁘다! 세계 최고로 예뻐!”
칼리오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연신 감탄한다. 부끄러운 건 역시 칼리오페의 몫이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일은 잘 마치구 오셨어요?”
작게 인사한 칼리오페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단순한 로베르트는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럼! 이 오라버니가 누군데!”
한껏 뽐내는 모습에 칼리오페가 미소 지었다.
별로 할 일도 없었을 텐데 싶었지만 귀여우니 상관없다. 로베르트로선 아무 것도 안 하고 얌전히 있는 것만으로도 큰일이었을 테고.
“로벨.”
“응?”
“왜 나한테 말 안 했냐.”
“뭐, 뭐를?”
낮게 깔린 목소리와 평소보다 배는 차가운 눈빛에 로베르트가 찔끔해서 말을 더듬었다.
“제가 부탁한 거예요. 말하지 말아 달라구. 로벨 오라버니는 아무 잘못 없어요.”
칼리오페가 재빨리 루시우스의 앞을 막았다. 혼내려면 날 혼내달라는 말에 루시우스는 한숨만 내쉬었다.
“리페.”
“네, 오라버니.”
“가족이 서로를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어른스럽고 의젓하다고 해도 다섯 살짜리 꼬마니까 주변을 의지하고 어리광을 부려도 좋을 텐데. 루시우스는 안타까웠다.
“걱정할까 봐 숨기지 마. 자꾸 숨기면 더 걱정하게 된다. 무슨 일 있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건가, 정말로 괜찮은 게 맞는가 하고.”
칼리오페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이내 생긋 웃었다. 루시우스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끼는지 넘칠 듯이 느껴진다.
“저두 사랑해요, 오라버니.”
난데없는 사랑 고백에 루시우스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칼리오페의 시선을 피해 눈을 슬쩍 돌렸다. 항상 차갑던 얼굴에 발그스름한 온기가 올라온다.
“나는? 나는? 나도 사랑해?”
로베르트가 종알종알 떠들었다. 귀여운 모습에 칼리오페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뭐?! 글쎄라니? 리페 나 안 사랑해? 나 싫어?”
로베르트는 나라 잃고 세상 무너진 표정이었다. 계속 ‘응? 응?’하며 대답을 보챈다.
“물론 우리 로벨 오라버니두 사랑하지요.”
화아악, 시무룩했던 얼굴이 한순간에 피어난다. 정말 극적인 변화였다.
“나도 리페 사랑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로베르트가 칼리오페를 끌어안고 방방 뛰는 걸 루시우스가 겨우겨우 떨어트려 놓았다.
“어쨌든 리페, 다음부터 이런 일이 있으면 꼭 말하도록 해.”
루시우스가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칼리오페는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가족이 걱정할까 봐 말 안 한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제이드에 관한 일을 아는 순간 가족들이 어떻게 할지 아니까.
루스티첼 가가 제이드를 벌주는 것은 간단하다. 하지만 제이드는 상위 가문과의 유대가 깊고 루스티첼 가는 그렇지 않다.
제이드 같은 놈은 자기가 잘못한 일이어도 뻔뻔하게 사람들을 찾아가 억울하다고 호소할 게 분명했다. 실제로 오늘도 그러지 않았는가.
상위 가문들이 루스티첼 가를 당장 어쩌진 않겠지만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아질 건 자명했다. 아직 가족의 죽음에 얽힌 실마리도 찾지 못했는데 사교계에서 루스티첼 가의 입지를 좁아지게 할 순 없었다.
칼리오페는 먹이를 사냥하는 맹수처럼 기척을 지우고 때를 살폈다.
그 결과, 첫 사냥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알았어요, 오라버니.”
그러나 칼리오페는 속마음을 숨기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스티첼 가 사람들은 모두 곧고 반듯한 성정을 지녔기 때문에 앞으로도 감춰야 할 일이 생길 것 같았다.
‘미안해요, 오라버니.’
* * *
“어서 오세요, 루스티첼 부인.”
“여기 앉으세요.”
루스티첼 부인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부인들의 환대를 받았다.
서모나 부인과는 이런 소규모 사교 모임에서 몇 번 봤지만, 다른 부인들은 황궁 연회에서나 인사를 나눈 사람들이다. 루스티첼 가는 황궁 연회와도 인연이 먼 가문이었다.
루스티첼 백작이 백룡 기사단의 단장이기에 신년연회나 탄신연회 같은 큰 연회에 참석하는 정도다. 루스티첼 백작이 조금 더 야심가였다면 기사단장이라는 지위를 통해 세력을 넓혔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루스티첼 부인 역시 현재의 상황에 만족했다. 사교계에 깊게 얽힐수록 얻는 게 많지만, 또 그만큼 잃을 게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친분도 없는 데다가 모두 루스티첼 가보다 높은 집안의 사람들이다. 이렇게 반가워하는 게 낯설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서모나 부인. 초대 감사드려요.”
“아니에요. 제가 루스티첼 부인의 일정을 고려하지 못하고 바쁘신 날 부른걸요. 늦게라도 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해요.”
루스티첼 부인의 말에 서모나 부인이 미소로 화답했다. 별말도 안 했는데 주변 부인들이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는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다. 지나치게.
부인들은 모두 초롱초롱한 눈으로 루스티첼 부인을 쳐다봤다.
‘살짝 부담스러운데……. 왜 이러시지?’
주변을 둘러보는데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칸테나 부인이 말을 걸었다.
“그런데 루스티첼 부인께선 참 좋으시겠어요?”
“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이쯤 되면 조금 불안해진다. 루스티첼 부인은 이 최상류 계층의 친목 모임에 자신이 썩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제분들이 하나같이 의젓하고 총명해서요.”
“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했다. 아니, 물론 우리 애들이 좀 똑똑하고 대견하지만……!
“아까 칼리오페와 루시우스를 봤는데 정말 깜짝 놀랐다니까요. 어쩜 그렇게 똘똘한가요?”
“그러고 보니 매일 밤 루시우스가 칼리오페에게 책을 읽어준다면서요?”
“독서 놀이라고 하던데……. 우리 애도 제발 좀 책 읽는 걸 놀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네요.”
유난히 진심이 팍팍 느껴지는 말이었다. 루스티첼 부인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칭찬이 어리둥절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아니, 좋다 뿐인가.
‘그래, 우리 애들이 확실히 감탄할 만하지. 내 배로 낳은 내 새끼들이지만 나도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말을 들어보니 부인들이 이렇게 호의를 갖고 자신을 대하는 것도 이해됐다.
“아이들 학습 환경이 정말 좋은 거 같아요. 남매가 매일 밤 함께 책을 읽는 걸 보면.”
“습관이 중요하다던데 대체 어떻게 그런 습관을 들이셨어요?”
“제가 가르친 게 아니라 애들이 스스로 그러더라구요.”
루스티첼 부인이 뿌듯하게 답했다.
‘우리 애도 루스티첼 가 애들과 친하게 지내면 좀 물들까.’
‘친구 따라 제도 간다’는 말도 있고 ‘맹모삼천지교’라는 말도 있다.
맹모삼천지교는 대학자 매이자르의 어머니가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했다는 고사성어다. 그만큼 아이의 성장에서 주변 환경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사 같은 거 갈 필요 없어. 루스티첼 가와 연을 맺으면.’
모두가 연을 맺고 싶어서 안달하는, 권력의 최정점에 선 부인들의 눈이 반짝였다.
“얘기를 들어보니 로베르트도 정말 용감한 것 같고요. 루스티첼 가가 원래 용맹함으로 이름이 드높지만요. 로베르트는 오늘 안 왔나요?”
동생을 지키기 위해 자신보다 여섯 살 많은 남자한테 달려들었다는 아이가 궁금했다.
부인들은 일부러 제이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좋은 이야기가 아닐뿐더러, 눈치를 보아하니 루스티첼 부인은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야기를 듣고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충격받을 게 뻔한데, 그러면서도 주변을 신경 써야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 자리의 부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제이드는 서모나 부인이 소개 시켜준 사람이다. 그 주제를 다시 입에 올리는 것은 아무래도 눈치가 보였다.
나중에 서모나 부인이 따로 이야기하고 사과하는 게 가장 깔끔한 일이다.
“로벨은 루스와 리페를 부르러 갔어요. 아직도 안 오는 걸 보니 못 찾았나…….”
제이드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루스티첼 부인은 평화롭게 주변을 둘러봤다.
“아, 저기 오네요.”
세 아이가 나란히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빠들 손을 양손에 꼭 잡고 부지런히 걷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부인들의 얼굴이 흐뭇하게 풀어졌다.
“어쩜 저렇게 사랑스러운지.”
“그러게나 말이에요.”
부인들이 속닥거리는 말에 루스티첼 부인의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오셨어요, 어머니?”
“그래, 오빠랑 잘 있었니?”
“네, 여기 계신 부인들께서 잘 챙겨주신 덕분에요.”
“어머나, 리페는 어쩜 이렇게 말을 곱게 하는지. 리페가 우리 덕을 봤다기보단 우리가 리페 덕을 보네요.”
부인들이 사르르 웃었다.
“안녕하세요! 귀부인들을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네가 로베르트구나.”
활기차게 인사하는 로베르트의 모습에 부인들이 반갑게 답했다.
부인들은 한참 즐겁게 떠들었다. 화제의 중심은 루스티첼 가의 세 아이였다.
칼리오페는 작은 미소를 지은 채 부인들의 말을 경청하다가 시선이 루시우스에게 쏠린 틈을 타 조용히 빠져나왔다.
계속해서 천재니, 의젓하니, 예쁘니, 사랑스럽니 그런 말을 듣다 보니 얼굴이 간지러웠다. 팔불출 가족들 덕에 면역이 생겨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힐데르트한테 가보자.’
아까 찾아가겠다고 한 것도 있고 서모나 부인이 자신을 초대한 이유에 대해 어머니께 듣기도 했다.
저번 티파티에서 서모나 부인이 힐데르트와 칼리오페가 꼭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오만하고 안하무인인 자기 아들을 갱생시켜 주는 데 칼리오페만큼 제격인 사람이 없다는 말이었다.
‘내가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때 힐데르트가 사과한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 같은데, 그건 유리안을 좋아해서 그랬던 거고 나와는 큰 상관이 없는데.’
그래도 시도해보는 건 나쁘지 않다. 이대로 크면 중요 요직을 맡을 아이인데 성격이 온화한 편이 아무래도 두루두루 좋다.
무엇보다 칼리오페는 의도치 않게 남자애가 첫사랑이 된, 그 오만한 도련님이 꽤 가엽고 귀여웠다.
힐데르트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걷는데 발에 돌이 턱 걸렸다.
‘으아!’
피크닉 장소로 관리하고 있어도 숲길이다 보니 땅이 고르지 않은 부분이 있다. 자연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일부러 돌부리를 남겨 놓기도 한다.
하필이면 거기 딱 걸린 것이다.
쿵! 칼리오페는 바닥에 철푸덕 넘어졌다.
‘으, 아파라.’
눈물이 불쑥 솟았다. 하지만 아픈 것보다 더 창피했다.
칼리오페는 쪽팔리지 않은 척, 아프지 않은 척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려 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빼애액 울며 시선을 끌 순 없다.
“어머, 괜찮니?”
일어나려고 앉은 자세 그대로 칼리오페의 몸이 우뚝 굳었다. 숨통이 콱 조여오는 느낌에 배가 쿵쿵 울렸다.
미동도 없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사하르네 부인이 그 앞에 주저앉았다.
자신의 머리 위로 지는 그림자와, 시선 끝에 부풀며 가라앉는 드레스 자락. 칼리오페는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움직였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사하르네 부인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똑같다. 그때랑.
시선이 마주친 찰나, 순식간에 과거의 기억이 범람한다.
소파에 앉아 우아하게 차를 마시던 사하르네 부인.
그리고 그 앞에 무릎 꿇고 애원하는 자신.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사하르네 부인.]
그때 자신은 울고 있었던가.
[다른 건 바라지 않아요. 어머니 약값만큼은……! 이대로 돌아가실지도 몰라요. 제발, 이렇게 빌게요.]
계속되는 간청에 사하르네 부인이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에 기대를 가졌었나.
무릎 꿇은 자신 앞에 주저앉은 상냥한 얼굴에 연민이 가득한 것을 보고 희망을 가졌었나.
미련하게.
[루스티첼 영애.]
나긋나긋 부드러운 목소리가 칼리오페를 불렀다.
[추해요, 지금.]
그 당시 칼리오페는 순진했다.
열일곱은 그럴 나이였다. 친구보다 책이 좋은 내성적인 소녀. 머리는 똑똑했지만 세상 물정을 몰랐다. 사람은 사람에게 예의를 지키며, 부정한 이득을 취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주변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할 명문 귀족이 그럴 줄은 몰랐다.
칼리오페의 세계에서 누군가를 음해하고 짓밟고 등 뒤에 칼을 꽂는 일은 없었으니까.
바르고 올곧은 만큼 칼리오페는 돌아갈 줄 몰랐다.
“저런, 많이 아프나 보네.”
보드라운 목소리에 칼리오페는 과거에서 깨어났다.
사하르네 부인이 칼리오페를 손수 일으켜 드레스 자락에 묻은 흙을 털어주었다. 작은 마찰에도 상하는 귀한 공단 장갑에 상처가 나는 것은 상관도 않고.
칼리오페는 그저 그 모습을 바라만 봤다. 남의 일인 것처럼 바라보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당장 자신의 몸을 건드는 손을 뿌리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이러면 예전하고 똑같아.’
칼리오페는 마음을 다잡았다. 사하르네 부인은 칼리오페가 울지 않기 위해 꾹 참고 있다고 생각했다.
‘웃어야 해. 웃어, 제발 웃어.’
“감사합니댜, 귀부인.”
“칼리오페는 정말 의젓하네.”
사하르네 부인이 묘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굽혔던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키가 큰 사하르네 부인의 그림자가 조그마한 칼리오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덮었다.
역광에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의젓해.”
장갑에 감싸인 손가락이 칼리오페의 볼을 매만졌다. 얇은 공단 아래로 느껴지는 손톱이 칼리오페의 눈가를 긁었다. 언뜻 보이는 다문 입매가 무표정했다.
본능적인 공포감과 혐오감이 칼리오페의 몸에 차올랐다. 그걸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칼리오페는 순진무구하게 웃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귀부인께서두 의젓하셔요.”
예상치 못한 말에 사하르네 부인의 손이 느슨해졌다.
칼리오페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 걸음 물러서며 그 손에서 빠져나왔다.
사하르네 부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자, 잘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얼굴이 깨끗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무표정했던 그녀의 입매에는 어느새 부드러운 웃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칭찬 고맙구나, 칼리오페.”
사하르네 부인이 몸을 돌리며 낮게 말했다.
“그럼 조심하렴. 더 이상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왜 돌부리가 그냥 돌부리로 들리지 않는 걸까. 단순히 넘어지는 걸 뜻하는 것 같지 않았다.
칼리오페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한참 응시했다.
뒤늦게 몸이 떨려왔다. 그간 대체 어떻게 참았던 건지, 아무리 두 손을 맞잡고 어깨를 감싸도 떨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칼리오페는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표정 관리도 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가족들이 걱정할 거다.
피크닉 장소에서 꽤 떨어지고 나서야 걸음을 멈췄다.
사라진 자신을 알면 걱정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저히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거진 나무가 소리와 시야를 차단했다.
쏴아아아,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가 노래했다. 청량하고 시원한 내음이 몸을 감싼다.
바람의 운율에 맞춰 지저귀는 새의 노래.
칼리오페는 눈을 감았다.
숲의 노래가 그녀 안에 고이기 시작했다. 떨리던 몸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움츠렸던 어깨가 반듯하게 펴졌다. 숨을 한 번 들이마실 때마다 칼리오페의 속에 숲이 쌓인다. 그리고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쌓였던 숲이 퍼져나갔다.
노래의 시작은 고요했다. 조용히 숲에 섞여든다. 나무가 귀를 기울이고 새가 화답했다.
노래는 점점 격해진다.
[추해요, 지금.]
나긋나긋한 사하르네 부인의 목소리가 가슴 속에서 메아리쳤다.
[귀족으로서의 자존심도 다 내다 버렸나요? 아무리 가세가 기울었어도, 천박하게.]
그깟 자존심 따위 어머니를 살릴 수 있다면 헌신짝처럼 내다 버려도 좋았다. 얼마든지 무릎 꿇고 바닥을 길 수 있었다.
[사람의 목숨은 자연의 섭리.]
어머니의 죽음은 자연의 섭리라며 아무런 노력도 하지 말라던 목소리.
[이렇게 구걸할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라도 하는 게 어때요?]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던 손가락이 목을 훑고 내려와 옷깃과 쇄골의 경계부를 훑었다.
그녀가 말하는 바는 명백했다.
생각지도 못한 모욕에 칼리오페의 얼굴이 굳어지자 사하르네 부인이 부드럽게 웃고는 손을 뗐다.
[루스티첼 영애가 돌아가신다고 하는군. 정문 앞까지 데려다 주도록.]
축객령에 정신을 차리고 사하르네 부인의 치맛자락을 붙잡으며 빌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경멸뿐이었다.
그런 모욕을 받았는데도 매달리냐는 시선에 그렇다고 답했다.
자존심이 어머니를 살려주진 않으니까.
절박했다.
과거의 기억이 엉키고 설켜 노랫가락으로 엮인다. 감정이 격렬해짐에 따라 노래도 격렬해졌다.
맑고 높은 소리가 쨍한 파장을 만들었다. 바람이 휘몰아쳤다.
숲이 울부짖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그녀를 대신하듯.
한참 동안 감정을 쏟아내자 가슴이 시원해졌다. 울음 같은 노래를 멈춘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었다.
바람이 그녀에게 애교를 떨듯 머리칼을 들썩였다. 간지러운 기분에 옅은 미소가 나왔다. 조금 더 혼자인 시간을 즐기고 싶었지만 슬슬 돌아가 봐야 할 때였다. 더 이상 자리를 비우면 정말로 가족들이 걱정할 것이다.
‘들은 사람은 없겠지……?’
사람들을 피해 걸어서 인기척 없는 곳으로 꽤 멀리 왔으니 괜찮을 거다.
‘나무나 바람에 막혀 노랫소리가 퍼져 나가진 않았을 테고…….’
생각지도 못하게 사하르네 부인과 마주쳐서 날뛰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도저히 속에 있는 것을 토해내지 않고서는 못 견딜 지경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내 노래를 듣는 건 좋지 않아. 아무리 지금이 종교 재판이 일어나지 않는 시기라고 해도.’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다. 재판까진 안 가지만 속가가 천시받는 건 마찬가지다.
‘다음부터는 조심해야겠어. 사하르네 부인 같은 사람은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과거의 적들과 마주칠 때마다 인적 드문 곳을 찾아 감정을 쏟아낼 수는 없다.
다행히 인기척은 없었다. 안심하며 다시 한번 주변을 살피던 때였다.
‘어?’
칼리오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동백나무 가지에 새하얀 손수건이 묶여 있었다.
기둥의 낮은 부분부터 가지가 나뉘어 있어 칼리오페도 충분히 손닿는 곳에 손수건이 살랑이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조심스레 동백나무에 다가갔다.
만개한 붉은 꽃이 눈에 띄는 나무기에 이곳에 왔을 때부터 눈에 들어왔다. 분명 처음엔 이런 손수건이 매달려 있지 않았다.
‘누군가 들었어.’
떨리는 손으로 손수건을 풀고 문양을 살폈다.
유려하게 셰브론 블랭킷 스티치(chevron blanket stitch)로 처리된 끝단에 재질은 실크다. 고급스러운 윤광과 닿는 감촉이 녹을 듯한 게 분명 라이난테 실크일 거다.
라이난테 실크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가난했던 라이난테 자작령을 한순간에 부유한 영지로 만들 정도로 귀한 실크다. 과연 명성에 걸맞게 손에 착 감겨 계속해서 만지고 싶었다. 하지만 칼리오페의 신경을 사로잡는 건 다른 것이었다.
‘없어.’
가문의 문양이나 이니셜이 없다. 보통 손수건에 수놓기 마련이다. 그것도 이렇게 귀한 손수건이라면 필히 수놓는다.
서둘러 주변을 살폈지만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대체 누구지?’
서모나 부인의 피크닉에 초대받을 귀족이라면 라이난테 실크로 만든 손수건을 구매할 재력은 된다.
하지만 그 손수건을 이렇게 놔두고 갈 사람은 없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라이난테 실크는 원재료 생산량의 한계 때문에 황실에도 일 년에 서너 개밖에 진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돈이 있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 귀한 손수건을 이렇게 묶어두고 가다니.’
바람에 손수건이 팔랑이며 시원하고 보송한 냄새가 났다. 숲과 햇볕 냄새다.
그 따스한 내음에 마음이 초조했던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성이 돌아왔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손수건을 걸어놓은 사람에게 나쁜 뜻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설사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고 해도 나는 지금 다섯 살이야.’
오며 가며 들었던 음을 흉내 내봤다고 하면 된다. 다섯 살 아이가 뭘 알겠냐면서 지나갈 수 있는 일이다.
‘애초에 다섯 살 된 애가 제대로 된 노래를 불렀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거고.’
아직 종교 탄압이 시작되기 전이다. 인간의 감정에 대한 노래가 천시될지언정 처벌받진 않는다. 멋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한 번 음을 따라 해본 것이라면 천시의 대상조차 되지 않을 터.
‘그런데 왜 손수건을 걸어두었을까.’
손수건에 담긴 뜻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풀 수 있게끔 일부러 낮은 곳에 매어둔 것을 보면 하고픈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칼리오페는 손수건을 움켜쥔 채 가지를 흔드는 동백나무를 올려다보았다.
* * *
“리페, 어디 갔었어?”
“아, 새가 보여서 새를 따라갔어요.”
“그러다가 숲에 깊이 들어갈 수 있어. 숲에는 호랑이가 어흥하고 나타나!”
로베르트가 어흥, 하며 호랑이 흉내를 냈다. 무섭게 겁을 줘서 숲에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은데 너무 귀여워서 문제였다.
“왜, 왜 그렇게 봐?”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자신을 보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로베르트가 움찔했다. 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찔리는 걸까.
‘귀여워서요.’
그렇게 대답할 수 없어서 칼리오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숲에 안 들어갈게요.”
피크닉용으로 관리하고 있는 작은 숲에 호랑이가 나타날 리 없지만 칼리오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오라버니 옆에 꼭 붙어있으라구! 호랑이가 나타나도 내가 무찔러줄 테니까!”
칼리오페는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며 으쓱이는 로베르트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리페가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잖아.”
루시우스가 끼어들었다.
“한심한 눈이라니!”
쿠과광! 충격받은 얼굴로 로베르트가 울상을 지었다. 정말이냐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칼리오페가 땀을 흘렸다.
귀엽게 본 거였는데 귀엽게 봤다고 해도 충격을 받을 것 같다.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는데 로베르트의 눈빛 공격이 그치질 않았다. 루시우스도 은근슬쩍 자기 편을 들어주길 기대하는 시선을 보내왔다.
‘으윽…….’
어느 한쪽 편만 들면 큰일 난다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로베르트는 대놓고 서운한 티를 팍팍 내고 루시우스는 은근히 압박을 준다.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리던 칼리오페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와아, 호랑이가 어흥! 하면 이러케 멋진 오라바니들께서 리페를 지켜주신다니 든든해요!”
이럴 땐 어린애 행세가 최고다. 로베르트를 따라 어흥, 하며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
“…….”
정적이 찾아왔다. 칼리오페는 얼굴이 서서히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녀가 뻘쭘하게 어흥 치켜든 손을 슬슬 내렸다.
‘다, 다시는 안 해!’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한지 눈가에 마저 열이 몰렸다. 커다란 눈동자가 순식간에 울망울망해졌다.
“리페……!”
갑자기 로베르트가 칼리오페를 와락 끌어안았다. 왜인지 모르지만 그는 잔뜩 감격한 얼굴이었다.
“……넌 내가 지킬 테니 걱정 말아라.”
옆에서 조용히 있던 루시우스가 속삭였다. 어린 소년의 얼굴엔 굳건한 결심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칼리오페는 로베르트에게 꼭 끌어안긴 채로 눈만 깜빡거렸다.
어쨌든 두 오라버니가 뭔가 감격 어린 얼굴로 조용해진 걸 보니 어떻게든 상황이 정리된 것 같았다.
‘아직도 창피해 죽을 것 같지만.’
칼리오페가 쥐구멍 대신 로베르트의 품에 얼굴을 숨겼다.
“……이제 좀 떨어져라, 로벨.”
루시우스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
“싫은데? 싫은데? 안 떨어질 건데? 부럽지? 메롱메롱!”
로베르트가 칼리오페를 꼬옥 끌어안으며 혀를 날름거렸다.
‘……저러다 한 대 맞지.’
칼리오페가 한숨과 함께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따콩!
아니나 다를까 로베르트의 머리 위로 꿀밤이 번개처럼 내려앉았다.
“우씨! 왜 때려!”
“맞을 짓을 했으니까.”
칼리오페는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틈을 타 로베르트의 품 안에서 빠져나왔다. 평소라면 루시우스에게 폭력을 동반한 훈육은 올바르지 않다며 한마디 했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갔다.
‘이번엔 로벨 오라버니가 잘못했으니까.’
“으…….”
로베르트가 신음하며 몸을 수그렸다.
“많이 아프냐?”
다정함이라곤 한 톨도 묻어나지 않는 차가운 어조였지만, 움찔거리는 루시우스의 손끝은 걱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파.”
그렇게 힘을 싣진 않았는데. 루시우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힘 대신 감정을 싣긴 했지만.’
“으으, 너무 아파…….”
로베르트가 잔디 위에 주저앉을 기세로 허리를 굽히며 헐떡였다. 그 격한 호소에 칼리오페와 루시우스 모두 깜짝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칼리오페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오빠를 부축하며 물었다.
염려 가득한 산호빛 눈동자를 보며 로베르트가 신음하듯 말했다.
“심장이…….”
“네……?”
“심장?”
머리를 맞았는데 왜 심장을 말하는 거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두 사람이 한창 걱정하는데 로베르트가 씨익 웃었다. 악동 같은 웃음이었다.
“심장이 너무 아파.”
대비되는 말과 웃음에 칼리오페와 루시우스가 움직임을 멈췄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보고 악동이 여유롭게 설명을 덧붙였다.
“아까 어흥하는 리페가 너무 귀여워서.”
“…….”
칼리오페는 혈압이 오른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몸소 체험했다.
항상 침착하고 차분했던 칼리오페에겐 새로운 경험이었다. 삶의 경험을 넓혀준 로베르트에게 고마운 마음 따윈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지만.
‘폭력을 동반한 훈육은 절대 올바르지 않지만, 해서는 안 되지만……!’
다시 한번 루시우스가 올바르지 않은 훈육을 행해주길 바랐다. 정말 간절히.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칼리오페를 보고 루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가족은 이심전심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고 칼리오페는 새삼 감동했다.
“그거라면 어쩔 수 없지.”
루시우스가 낮게 속삭이며 로베르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토닥이는 것이 아닌가. 다 이해한다는 듯이.
“나도 아까 순간 숨이 막혔다. 귀여워서.”
“…….”
루시우스 오라버니마저!
발그레한 칼리오페의 볼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아구, 우리 리페 귀여워! 귀여워!”
로베르트가 빵빵한 칼리오페의 볼을 잡고 조물락조물락거렸다.
“하아…….”
칼리오페는 로베르트의 손에 자신의 볼을 맡긴 채 그저 한숨만 쉬었다.
“그런데 오라버니.”
실컷 만진 로베르트가 손을 떼자 루시우스를 불렀다.
“제가 숲에 들어간 동안 또 자리를 비운 분이 계신가요?”
“글쎄…….”
루시우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만찬회같은 곳도 아니고 아이들 위주의 모임이라 귀부인들이 앉아있는 테이블을 제외하면 모두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다. 거기에 숲속이라는 환경도 더해서 누가 오고 가는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주의를 기울이면 알 수 있겠지만 루시우스는 칼리오페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깐 귀부인의 말에 답하느라 잠시 시선을 뗐는데 그새 사라질 줄은 몰랐다.
칼리오페가 사라진 걸 깨닫자마자 그가 살펴본 건 힐데르트였다. 힐데르트의 곁에 없는 걸 보고 둘이서 어딜 간 건 아니구나, 하고 안심했다.
“그건 왜?”
“……아무 것두 아니에요.”
칼리오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숲에서 나오면서 주변의 눈치를 살폈을 때 특별한 기색은 없었다.
아무래도 그 손수건의 주인은 자신이 노래를 불렀다는 걸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찾을 수 있다면 찾아야 해.’
칼리오페는 품속에 갈무리한 손수건을 매만졌다.
* * *
“형아!”
“횽아! 우리랑 놀쟈!”
힐데르트는 주변에서 폴짝거리는 아이들을 무시하려 했다. 사색에 잠기려 하는데 도통 허락하질 않는다.
“부르지 마. 너희들 돌봐줄 기분 아니니까.”
“우웅? 돌보는 거 아냐. 놀자!”
“횽아, 혼자 있눈 고 애로운 고래쪄.”
(형아, 혼자 있는 거 외로운 거랬어.)
“맞아. 친구 없는 거랬어!”
“우리가 노라쥬께! 칭구 해주께!”
(우리가 놀아줄게! 친구 해줄게!)
“고맙찌!”
눈을 감고 아이들을 무시하려 했으나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힐데르트에게 인내심이 있을 리 만무했다.
반듯한 이마에 점점 핏대가 올라왔다.
평소라면 왁! 하고 소리를 질러 이 망할 꼬맹이들을 쫓아냈겠지만, 그는 그러는 대신 깊고 심오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이들 중 한 명이 세 살짜리 꼬꼬마여서 그러는 건 아니다. 힐데르트는 나이에 따라 차별을 두는 소인배가 아니었다. 즉, 상대의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성질을 누그러트린 적이 없다.
그를 고뇌하게 하는 것, 그를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 속에 헤매게 하는 것, 도저히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정이 깊은 날숨에 새어 나오는 이유.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그렇다. 그는 이미 사랑이라는 달콤하고도 치명적인 과실의 맛을 알아버린 어른인 것이다.
힐데르트는 셔츠 깃을 슥 세우고 이마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사랑의 고통을 숨기듯 보랏빛 눈동자를 눈꺼풀 아래 감춘 채.
“왜 구래, 횽아?”
“어디 아파?”
힐데르트의 눈매가 바들바들 떨렸다. 망할 꼬맹이들이 산통 다 깨고 있다. 뭐라고 한바탕 쏟아낼 것처럼 입술이 씰룩거렸지만, 이 한 번 악무는 것으로 참아냈다.
‘이것 역시 사랑의 시련.’
그는 아이들의 엉덩이를 독설로 뻥뻥 걷어차는 대신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니들이 뭘 알겠냐. 애기들이 여덟 살의 복잡한 마음을…….”
사색에 잠긴 사랑꾼이 아직 사랑의 고통을 모르는 꼬꼬마들을 바라봤다.
꼬꼬마들은 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 커다란 눈을 끔뻑거렸다.
“후, 감히 헤아릴 수 없겠지. 세 살이 좋은 줄이나 알아라.”
힐데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맞아. 세 살이 편할 때라구.”
“맞아, 맞아.”
다섯 살짜리 남자애가 코 밑을 슥 훑으며 말하자 다른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졸지에 편하고 좋은 인생을 살게 된 세 살 꼬꼬마가 힝, 볼을 부풀렸다.
“세 쨔리 올마나 힘둔데.”
오늘도 형아들만 놀러가려는 걸 매달려서 왔다. 게다가 갖고 싶은 장난감이 있어도 그건 형아들이 갖고 노는 거라면서 안 사준다.
나도 번쩍번쩍 빛나고 변신하는 거 갖고 싶은데! 아이는 훙, 하며 짤따란 팔로 팔짱을 끼었다.
힐데르트는 옹알앵알하는 아이들의 말을 무시하기 위해 애를 썼다.
‘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지금 나는 혼자 있다!’
그렇게 현실의 소리를 차단하자 하프의 음색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페라고 불러도 돼요.]
수줍게 애칭을 허락하던 목소리. 흰 뺨이 복숭아처럼 발그레했다.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 좋아요.]
[사람이 좋아요.]
[좋아요.]
‘좋아…….’
힐데르트의 뺨이 설렘으로 달아올랐다. 콩콩 작은 가슴이 빠르게 뛴다.
‘나도.’
그의 머릿속에선 이미 칼리오페와 그는 서로를 애틋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좋아, 리페.’
두 사람은 손 잡고 여보얌댜기얌하며 소꿉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이 결혼 허락 못 해!’
그 순간 갑자기 괴한이 난입하며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을 파괴했다.
그 가정파괴범은 다름 아닌 칼리오페의 오빠, 루시우스 루스티첼이었다.
“끄응…….”
힐데르트는 신음을 흘렸다. 칼리오페와 자신 앞엔 꽃길이 놓여야 하는데 장애물이 너무 험난했다.
‘괜찮아. 리페, 너만 날 생각해준다면, 그 어떤 장애물이라도……!’
힐데르트가 두 손을 불끈 쥐었다.
“횽아, 똥 매려? 무슨 인상을 그렇게 쓰고 있어?”
“변비야? 아, 똥꼬 아파서 그랬구나!”
“뵤비가 모야아?”
(변비가 뭐야아?)
꽉 쥔 힐데르트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니들 안 꺼져?!”
힐데르트가 감았던 눈을 부릅 뜨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 상태로 굳었다.
“리, 리페…….”
꿈속 그의 연인, 댜기얌의 주인공,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칼리오페는 고민했다.
‘힐데르트에게 변비가 있는 건가. 무척 괴롭다고 하던데 어린 나이에…….’
그녀는 안쓰러운 눈으로 힐데르트를 바라봤다.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으나 병증을 부끄러워할 수 있으니 모르는 척하는 게 좋을 듯했다.
“아, 아니! 그게!”
힐데르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초조했다.
칼리오페는 그 모습을 보고 더욱 확신했다.
‘역시 부끄러워 하는구나. 변비가 확실해.’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힐데르트는 입술을 짓씹었다. 전에 안젤리나에게 못된 말을 했을 때 칼리오페가 굉장히 싫어하지 않았는가.
지금 어린애들에게 꺼지라고 했으니 또 싫어할 게 분명하다. 물론 이 경우는 아이들이 먼저 신경을 건드렸지만!
‘난 애가 아니니까 잘못한 사람에게 화내지 않는 여유! 그 여유를 보여줘야 해!’
칼리오페가 오해하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힐데르트는 입을 벌렸다.
“꺼, 꺼트려도 다시 보자! 꺼진 불!”
“네……?”
망했다.
힐데르트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시간을 되돌려서 자기 자신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대만 치고 싶었다. 꺼지라고 한 게 아니라는 걸 피력하기 위해 한 말이 ‘꺼트려도 다시 보자! 꺼진 불’이라니…….
“꺼진 불! 꺼진 불!”
“불! 물! 바람! 번개! 솟아라, 자이언트 스피릿!”
“댜이오뚜 뜨삐리!”
(자이언트 스피릿!)
아니, 시간을 되돌려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것은 자신이 아니라 이 빌어먹게 귀여운 애새끼들이다.
칼리오페랑 같은 나이인 녀석도 있는데 어쩜 이리 다른지.
모든 것을 포기한 때였다.
“아이들과 놀아주시구 계셨군요.”
칼리오페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절대 먹힐 리 없다고 생각한 변명이 어째서인지 먹혔다. 꺼진 불의 쪽팔림은 잠깐이고 지켜진 이미지는 영원하다.
사실 칼리오페는 변비 이야기를 신경 쓰느라 꺼지라는 힐데르트의 말을 듣지 못했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가만 있었다면 쪽팔릴 일도 없었다. 아니, 변비라는 오해 자체가 쪽팔릴 수도 있지만 어쨌든 힐데르트는 칼리오페의 오해를 몰랐다.
“힐데르트 오라버니는 다정하시네여.”
다행히 그는 쪽팔림을 대가로 칼리오페의 호감도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흐, 흥! 그냥 호스트로서 본분을 다한 것뿐이야.”
자이언트 스피릿을 소환해낸 아이들은 신이 나서 자기들끼리 뛰어놀기 시작했다.
서로 쫓고 쫓으며 보이지 않는 마법을 발사했다.
힐데르트는 자신의 사색을 방해한 아이들을 용서했다. 그간 눈치 없이 굴었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 사라지지 않았는가.
“뭐, 원하면 너랑 놀아줘도 되는데.”
“네?”
놀아 주겠다는 여덟 살 아이의 말에 칼리오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 호스트로서 말이야. 손님을 잘 대접해야 하니까.”
힐데르트는 내심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눌렀다. 자꾸만 상상 속의 소꿉놀이가 떠올랐다.
자신을 보고 ‘댜기얌’하던 칼리오페와 칼리오페를 보고 ‘여보얌’하던 자신.
갑자기 힐데르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무, 물론 소꿉놀이 따위 애들 장난이고 유치하지만……!’
자신이 소꿉놀이를 좋아하는 건 절대 아니다.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진짜로.
‘그래도……!’
“……난 소꿉놀이 같은 거 별로지만 네가 원하면 해줄 수도 있어.”
영광인 줄 알아, 라는 태도가 영락없는 서모나 가의 도련님다웠지만 묘하게 피하는 시선이나 발그스름한 뺨에 수줍음이 가득했다.
오만한 아이가 부끄럼을 감추며 소꿉놀이를 제안하는 걸 보고 칼리오페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소꿉놀이가 정말 하고 싶은가 보구나.’
그녀는 쉽게 납득했다. 저 나이 때는 그런 게 하고 싶을 나이지.
‘하긴, 그간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없어서 하고 싶어도 못 했을 거야.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
잠깐 놀아줄까 고민됐지만 해야 할 일이 있다.
소꿉놀이는 다음에도 할 수 있고, 힐데르트도 자신보단 유리안과 소꿉놀이하는 게 더 재밌을 거다.
“힐데르트 오라버니 말씀은 참 고맙지만 저 혼자 호스트의 시간울 독점할 순 없지요.”
칼리오페의 부드러운 거절에 힐데르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실망감이 차올랐다. 힐데르트는 거절에 익숙하지 않았다. 수치심, 그리고 그보다 더한 상처가 소년의 몸을 덮쳤다.
“나도, 나도 별로 너랑 소꿉놀이하고 싶지 않았어!”
타다닷 뛰어가는 작은 등이 멀어진다.
“아…….”
칼리오페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그 뒷모습만 쳐다봤다.
‘소꿉놀이 엄청 하고 싶었구나…….’
여태까지 못 하다가 기껏 용기를 낸 건데 조금쯤 어울려 줄 걸 그랬다.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뭐, 지금 실망했으니 나중에 유리안과 소꿉놀이할 때 더 기쁘겠지.’
칼리오페는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채 귀여운 아이들의 풋사랑을 지켜볼 생각에 흐뭇해했다.
‘그런데 물어볼 걸 깜빡했네.’
혹시라도 자리 비운 사람을 봤는지 물어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었던 걸 보니 못 봤을 거 같았다.
‘애 보기는 힘드니까.’
경험으로 아주 잘 알고 있다. 회귀 이후부터 쭉 하고 있으니까.
칼리오페가 한숨을 폭 내쉬며 작은 머리통을 절레절레 저었다.
‘변비에 좋은 차나 서모나 가에 보내줘야겠다.’
힐데르트가 알면 경을 칠 생각을 하며 그녀는 루스티첼 부인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어?’
총총총 걷던 그녀의 눈이 커졌다.
* * *
“루스 형, 왜 그렇게 웃어?”
로베르트는 루시우스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항상 서늘하니 무표정했던 형이 이상하게 웃고 있다.
뒷골이 오싹해지는 게 어디선가 본 웃음인데…….
“아! 대마왕!”
사람들을 괴롭히던 대마왕과 똑같은 웃음이다.
요즘 그림으로 읽는 기사 문학—만화책—에 심취해 있는 로베르트가 루시우스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루시우스가 로베르트를 슥 쳐다보자 찔끔해서 입을 합 막았다. 용사님이 되기엔 형의 꿀밤이 너무 아팠다.
마왕 루시우스가 자기 형 한정 소심해지는 용사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으아!’
로베르트가 눈을 꽉 감았다.
‘별이 한 개만 보이게 해주세요!’
아플수록 별이 더 많이 보였다. 별이 안 보인 적은 없기에 그 정도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별이 보이지 않았다.
루시우스의 딱딱한 손이 로베르트의 앞머리를 헤집었다. 칼리오페를 쓰다듬을 때에 비하면 한없이 거친 손길이지만, 온기가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로베르트는 질끈 감은 눈을 살며시 떴다.
먼 곳을 바라보며 마왕님 미소를 짓고 있는 루시우스가 보였다. 아무리 봐도 동생을 다정하게 쓰다듬는 얼굴로는 안 보였다.
‘대체 뭐지…….’
로베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지 모르겠지만 손길이 싫진 않았다. 발끝이 간지럽다. 그는 가만히 마왕님의 손에 머리를 맡겼다.
동생이 자신을 보며 대마왕입네 뭐네 하는 걸 관대하게 넘어갈 정도로 루시우스는 기분이 좋았다.
[오라버니, 약속은 지켜야 하는 겁니다.]
칼리오페가 단호하게 또박또박 말하는 바람에 힐데르트에게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잠깐의 대화 후 힐데르트가 울면서—힐데르트는 울지 않았다. 물론 마음은 울고 있었지만— 뛰어가는 걸 보니 그렇게 기꺼울 수가 없다.
스스로 날파리를 떨쳐낸 칼리오페가 대견했다.
루시우스는 볼우물이 파일 정도로 깊게 웃었다.
‘히익, 대마왕이 아니라 대대마왕이야!’
옆에서 동생이 무례한 생각을 하는 건 꿈에도 모르고.
* * *
‘카스틸로 소공작…….’
칼리오페는 신음처럼 속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얼음 칼날처럼 투명하게 부서지는 은빛 머리칼, 가장 깨끗한 수원을 얼린 것 같은 눈동자.
한눈에 알아봤다.
들릴 리가 없는데 마치 들린 것처럼 그가 칼리오페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결코 가깝다고 할 수 없는 거리에서 정확하게 시선이 부딪친다.
칼리오페가 눈을 깜빡이는 순간 그가 고개를 돌렸다.
‘우연인가.’
칼리오페는 굳은 얼굴을 애써 풀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발걸음을 옮겼다.
엮여봐야 좋을 게 없다. 그 생각만 강하게 들었다.
고개를 똑바로 들고 흔들림 없이 걸음을 옮기지만 칼리오페의 신경은 온통 카스틸로 소공작 쪽으로 쏠려 있었다.
힐데르트가 그를 발견하고 다가가는 것이 시야 끝으로 보였다. 오만한 힐데르트답지 않게 호의가 가득한 음성이었다.
‘그러고 보니 카스틸로 가와 서모나 가의 친분이 두터웠지.’
칼리오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서모나 부인이 보여준 호의와 부끄러움을 감춘 힐데르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당장 생각할 일은 아니야.’
서모나 부인이 자신에게 비추는 호감 이상의 친분이 카스틸로 가문과 쌓여 있을 것이다.
“리페 왔니?”
루스티첼 부인이 곁으로 다가온 딸아이를 반겼다. 칼리오페는 옅은 미소로 화답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회귀 전, 칼리오페는 카스틸로 소공작을 만난 적이 없었다.
사교계에선.
그를 만난 건 전쟁터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