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잠 못 드는 밤의 노래
“어, 엄마! 엄마!”
어린아이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칼리오페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하반신이 토막 난 시체 앞에서 대여섯 살 난 아이가 울부짖고 있었다. 아이의 몸도 성치 않았다. 저대로 두면 죽을 것이다. 탈수나 아사. 그리고 살해. 가능성은 다양했다.
애처로운 비명에도 사람들은 누구 하나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칼리오페는 겉옷을 챙겨 들었다.
“안됩니다, 아가씨!”
기사가 문 앞을 막아섰다. 칼리오페는 묵묵히 기사를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에 기사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비켜서진 않았다.
“안되는 건 제가 위험하기 때문인가요?”
“아시는 분께서 왜 이러십니까.”
기사의 음성엔 피로가 가득했다. 그라고 해서 어린아이를 외면하는 게 편할 리 없다. 다만 그보다는 돌아가신 주군의 딸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앞설 뿐.
그는 훌륭한 기사였다. 남은 거라곤 몸뚱이 하나가 전부인 칼리오페의 곁을 떠나지 않고 모시는 것만 봐도 그렇다.
칼리오페는 그에게 감사했다. 이 전쟁통에 그런 사람은 흔치 않다. 아니, 사실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그가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열다섯 살을 기점으로 칼리오페의 인생은 불행했다. 가족들이 차례로 죽고, 가족처럼 여겼던 사람들은 죽거나 그녀를 배신했다. 여기가 끝인가 싶으면, 삶은 딱 살아남을 구멍만 만들어 줬다. 그게 더 잔인했다.
칼리오페는 차분히 기사를 바라봤다. 기사 덕에 그래도 숨 쉴 구멍이라도 트였다.
삶이 그녀에게 잔인할지라도, 기사는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줬다. 그러기에 칼리오페는 말할 수 있었다.
“다치는 것보다, 죽는 것보다 더 안 되는 게 있어요.”
그가 있었기에, 이 참극 속에서도 신의를 지키고 신념을 관철하는 자가 있었기에 그녀 역시 그럴 수 있었다.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되는 것.”
기사는 아연한 눈으로 칼리오페를 쳐다봤다. 이 상황에서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묻지 못했다.
칼리오페의 허리는 여전히 꼿꼿했고 눈빛은 맑고 침착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아니, 아버지 루스티첼 백작이 죽기 전과 다를 바 없다.
소녀적 망상이나 낙천적인 회피에 빠져서 이러는 게 아니다. 기사가 자신의 기사도를 지키는 것만큼이나 숭고한 무엇이다.
기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이미 깨닫고 있었다. 자신은 결국 비켜설 것이다.
“저는 평생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라 가르침 받고 살아왔어요. 그러니 지금 죽더라도 저 아이를 돕겠어요.”
아이 하나 살리는 거로 이 비극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무게가 그토록 가벼워진 시기였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문을 열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콰과과광!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날렸다. 기사가 억센 팔로 칼리오페를 다 허물어진 외벽으로 밀쳤다.
칼리오페는 기사가 제 몸을 덮을 때도 눈을 감지 않았다. 잿더미와 회벽 가루가 한 데 뒤섞여 날렸다. 눈이 따가웠다.
응축된 마나가 지나가고 남은 곳은 움푹 파인 흔적만 남았다. 울부짖던 아이의 모습도, 엄마의 시체도, 흥건하던 핏자국도 모두 다 사라졌다.
칼리오페는 멍한 눈으로 움푹 파인 땅을 바라보았다. 곧 그녀는 눈을 감았고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얼굴은 지극히 침착했다.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감정은 겉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바람결에 타다만 천 조각이 발치까지 날려왔다. 칼리오페는 그 천 조각을 들어 올렸다.
“제 고집을 따라 주셔서 감사해요.”
그 말에 기사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어떤 심정으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을 돕는 게 아가씨의 고집이라면, 아가씨를 지키는 건 제 고집입니다.”
서툰 위로에 칼리오페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울음을 대신한 웃음이었다.
차라리 쓸데없는 짓 하느라 죽을 뻔하지 않았냐고 다그치면 좋으련만.
칼리오페는 버슬버슬한 천을 꽉 움켜쥐었다.
“가시죠.”
기사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놀란 그녀의 표정을 보고 기사는 입매를 끌어 올렸다.
“묻어주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칼리오페는 앞장서는 기사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곧 따라서 발걸음을 옮겼다.
콰과과광! 어디선가 또 굉음이 들렸다. 무차별적인 공격은 좀체 끊이질 않았다.
마나의 흐름을 느낀 기사가 폭발을 피해 방향을 틀었다.
* * *
칼리오페는 무덤에 마지막 돌을 올렸다. 손끝이 까지고 갈라졌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기사가 제가 하겠다며 나섰으나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시작한 일이니 자신이 끝내는 게 맞다. 궂은일이라고 떠넘길 순 없다.
어차피 굳은살 하나 없던 고운 손은 예전에 다 터버렸다. 전쟁으로 불타는 나라에서 손이 고운 건 부끄러운 일이다. 칼리오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잠시 완성된 무덤 앞에 서 있었다. 큰 무덤과 작은 무덤이 나란한 게 애처로웠다. 칼리오페는 울지 않았다.
그녀 대신인지 한두 방울 비치던 비가 시야를 가릴 정도로 굵어졌다.
차가운 빗방울이 가녀린 몸을 날카롭게 유린했다. 입술이 새파랗게 질리고 숨결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비틀거리지 않았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무덤을 바라봤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맹렬한 빗소리가 마치 울음 같았다. 하늘의 눈물에 세상이 침묵했다. 잔인하기까지 한 빗소리만이 전부였다.
문득 울음소리를 들은 지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죽음과 상실을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다. 일상이 되어버렸기에.
불현듯 깨달은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끝끝내 울지 않았다.
대신 노래를 불렀다. 노래라기엔 흥얼거림에 가까웠다.
하늘이 사납게 우짖었다. 비가 시야와 청각을 차단했다.
온 세상을 무덤처럼 만든 비 사이로 그 작고 가냘픈 목소리가 들릴 리 없다.
하지만 들렸다.
기사의 묵묵한 얼굴에 놀람이 스쳤다. 칼리오페의 노래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포탄처럼 떨어지는 빗줄기 사이로 아스라한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하지만 분명하게 울려 퍼졌다. 그 미몽과도 같은 노랫소리에 기사는 홀린 듯 칼리오페를 바라보았다.
일순 얼굴을 때리는 차가운 빗방울도, 귀를 막는 난폭한 빗소리도 사라진 것 같았다.
처음 들어보는 음률이었다. 기사는 노래를 잘 알지 못했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도 낯설었다.
저도 모르게 집중하던 기사는 곧 왜 그런지 깨달았다.
칼리오페의 노래는 성가가 아니었다. 영혼을 달래고 내세의 평안을 기원하는 내용이 아니다.
어린 나이에 허무하게 꺼진 생명에 대한 슬픔.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는 분노. 작고 조용한 목소리에 담긴 것은 격렬하게 날뛰는 감정이었다.
진흙탕처럼 여러 감정이 엉켜 원래의 색을 잃는다.
누군가 이 노래를 들으면 당장 이단으로 몰릴 것이다. 말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사는 말리지 못했다. 그는 칼리오페에게서 이렇게나 선명한 감정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아가씨는 깊은 우물처럼 항상 차갑고 고요했다.
말리는 대신 그는 귀를 기울였다. 주변의 기척을 살피기 위해서인지, 그녀의 노래를 듣기 위해서인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분노가 가득한 노래는 기사가 이전에 들었던 그 어떤 곡보다 위로의 울림을 담고 있었다.
기사는 그간 수많은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들은 신성력이 가득 찬, 성대한 진혼곡보다 칼리오페의 날뛰는 감정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 노래를 비롯해 예술 전반을 즐겨본 적 없으나 이상하게도 마음을 잡아끌었다. 분명 떠나간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노래야말로 진정한 진혼곡이라고, 분명 그들의 영혼을 달래주었을 거라고. 길을 잃지 않게끔 좋은 곳으로 인도해줄 거라고.
어느새 비가 잦아들었다. 비는 진동하던 타는 냄새도, 이어지던 폭발도 멈추게 했지만 칼리오페의 노래를 멈추지는 못했다.
깨끗하게 씻긴 세상에 묘연한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린다. 날뛰던 감정이 가라앉고 노래에 기원과 소망이 담긴다.
조용한 음색이 공간을 메우자, 이곳은 더 이상 전쟁터가 아니었다.
어딘가 따뜻하고 평화로운 곳. 칼리오페의 노래는 그곳으로 영혼을 이끌었다.
“멋진 노래네.”
기사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곧장 자세를 낮추고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됐을 법한 여자가 미소 지은 채 칼리오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노래에 심취해있었다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기사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여자는 혼자였고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았다. 몸에는 마나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칼리오페가 부른 노래는 성가가 아니니까.
이대로 밀고라도 당한다면……. 검자루를 잡은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가족이야?”
여자가 돌무덤을 손짓하며 물었다.
“아니요.”
칼리오페는 놀람을 감추고 침착하게 답했다. 산호빛 눈동자에 경계심이 서린다. 전쟁은 너무 많은 것을 바꿔놨다.
“그럼?”
여자는 두 사람의 경계에도 태연하게 물었다.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뭐?”
여자는 황당한 얼굴로 칼리오페와 무덤을 살폈다.
“모르는 사람들인데 만들었다고? 왜?”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칼리오페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뭐라 하진 않았다. 여자의 행색이 지나치게 멀쩡해서 위화감이 들 정도여도, 어쨌든 전란의 시대다. 무덤을 파헤쳐 고인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 것만 해도 좋은 사람인 축이었다. 물론 이 무덤은 타다남은 천 조각 외엔 텅 비었지만 여자가 알 리 없다.
“무덤을 만드는 이유는 뻔하죠.”
칼리오페는 먼 하늘을 바라봤다. 어쩌면 이 모녀를 떠나보내면서 자기 자신도 위안받는 건지 모른다.
“가는 길만은 평안했으면 하니까.”
삶이 그렇지 않았으니까.
칼리오페의 시선 끝에는 가족이 있었다. 삶은 고통스러웠다. 부디 그곳에서는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여자는 그런 칼리오페를 조용히 살폈다. 짙은 군청색이던 여자의 눈동자에 일순 푸른빛이 일렁였다가 사라졌다.
“후회가 많이 남는가 보네.”
후회? 여자의 말에 칼리오페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걸 후회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좋은 노래를 들었으니 나도 보답을 해야지.”
여자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기사가 검을 빼 들었다. 그녀는 위협적인 날붙이 소리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까운 목소리야.”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칼리오페는 왜인지 물러서지 않았다.
여자의 목에 칼이 겨눠졌다. 그녀는 여전히 개의치 않고 칼리오페의 손을 잡았다.
“듣기 좋아.”
여자가 환하게 웃었다. 도저히 목덜미에 칼날이 들이 밀어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위화감 때문에 기사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이번에는 좋은 곳으로 가기를 빌지 말고 여길 좋은 곳으로 만들어 보렴.”
여자의 눈이 반짝였다. 눈동자 속에 언뜻 기묘한 문양이 비친다.
칼리오페는 눈을 깜빡였다. 내가 헛것을 보나?
“나는 네 목소리만으로도 이곳이 썩 괜찮게 느껴졌으니.”
갑자기 느껴지는 강력한 마나에 기사가 눈을 부릅떴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럴 수가 있나?
기사가 검을 움켜쥔 손에 힘을 준 순간, 광풍이 휘몰아쳤다. 기사는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여자의 머리칼이 공중에서 휘날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분명한 문양이 떠올랐다. 더는 착각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여자와 칼리오페를 중심으로 바닥에 빛이 맺혔다. 빛은 꺾이고 이어지며 거대한 문양을 이뤘다.
커다란 원을 가로지르는 선과 직선으로 형상화된 별. 열두 방향의 황도 12궁.
빛이 공간을 살라 먹으며 시야를 가렸다. 모든 것이 백지처럼 지워진 때.
팍, 하고 한순간에 빛과 광풍이 꺼졌다.
“선물을 줄 테니 조금 더 그 목소리를 들려주렴.”
빛도, 소리도 사라진 공백의 순간에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네가 바꿔봐.”
세상이 눈을 감았다.
* * *
칼리오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기억의 안개가 완전히 걷힐 때까지 하얀 얼굴은 비에 젖은 것처럼 흐릿했다.
한참 후에야 산호빛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현실을 확인하듯 어두운 방 안 구석구석을 살핀다. 조그만 얼굴에 안도가 스친다.
과거, 혹은 다가올 미래를 잊지 않기 위해 칼리오페는 잠이 오지 않는 새벽마다 이렇게 기억을 되새겼다.
‘대체 그 여자는 뭐였을까.’
목소리가 듣기 좋다면서 세상을 좋은 곳으로 바꿔보라던 여자.
몇 번을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미 일어났다.
[선물을 줄 테니 조금 더 그 목소리를 들려주렴.]
‘목소리를 더 들려달라니. 혹시 듣고 있을까?’
하지만 다시 태어난 이후로 여자의 흔적을 찾을 순 없었다. 곁에 있었다면 누군가는 여자를 봤을 텐데. 아무도 보지 못했다.
‘어쩌면…….’
노래를 부르면 올지도 모른다. 듣고 싶다고 했으니 올 것 같았다. 추측은 꽤 그럴듯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으니까.
지체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칼리오페는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다시 돌아온 이후로 처음으로 부르는 노래였다. 이전 삶에서도 어렸을 땐 노래를 거의 부르지 않았기에 어색했다.
기억 속에서 멜로디 하나를 끄집어내 흥얼거렸다. 노래를 부른다기보단 낮은 허밍에 가까웠다. 두려움인지 기대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를 감정으로 가슴이 떨렸다.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창가의 커튼을 응시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제대로 된 노래가 아니라서인가?’
칼리오페는 조금 더 분명하게 노래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흩어질 듯 숨죽였던 목소리가 또렷해지고 음정이 정확해진다. 낯설고 어색한 느낌이 조금씩 사라져 간다.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칼리오페는 금세 노래에 익숙해졌다.
지난 삶, 커다란 비극에 빠져있던 그녀를 지탱한 것이 노래였다.
처음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던 건 물을 길으며 노래하던 어느 아낙의 목소리였다.
그때 칼리오페는 외투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채 집을 뛰쳐나온 상태였다. 도저히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넓은 집을 좀 먹는 죽음의 기운을 견딜 수 없어서.
그전까지는 신전의 성가만 들었던 그녀에게 아낙의 노래는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투덜거리는 것처럼 툴툴거리는 목소리. 푸념에 가까운 노래. 도르래를 끌어당길 때마다 꺾이는 음정.
칼리오페는 멍하니 서서 아낙의 노래를 들었다. 물을 다 길은 아낙이 자리를 뜨고서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거칠고 투박한 노랫자락의 무엇이 그녀의 마음을 그렇게 강렬히 사로잡은 것인지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노래에 묻어나온 아낙의 삶과 애환. 날 것 그대로의 감정.
신이 아닌, 인간의 노래.
칼리오페는 그렇게 정제되지 않은 노래는 처음 들었다.
그 후로 칼리오페는 수많은 노래를 접했다. 그 노래들은 그녀가 알던 노래—성가와는 너무나 다른 선율이었다. 그들은 노래로 고단한 노동을 견뎌내고 노래로 흥분과 기쁨을 표현했다.
타닥거리는 모닥불 앞. 술에 취해 불콰한 얼굴로 노래 부르며 춤추는 사람들 틈에서 칼리오페는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그녀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그게 좋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우러졌다. 가끔씩 불협화음이 귀를 긁었다. 하지만 그조차 섞여들어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낸다.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녀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감정이 뱃속에 꽉 들어찼다.
입을 열면 그 감정과 칼리오페 자신의 감정이 섞여 나왔다. 그리고 타닥 튀는 불티를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
칼리오페는 노래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노래하며 가족들의 행복을 기원했다. 단 한 번도 성가를 부르지 않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녀에게 노래는 기도였다.
그건 시간을 되돌아온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고요한 새벽을 뚫고 맑고 청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기가 진동하며 만든 파장에 세상이 맥동했다. 푸르게 물든 새벽에 오직 그녀의 목소리만이 선명한 색으로 흘렀다.
그때였다.
문 쪽에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칼리오페는 노래를 멈추고 문 앞을 살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윽고 인영이 움직이며 그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유모?”
익숙한 얼굴에 실망과 당혹스러움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 후 느낀 것은 걱정과 불안이었다.
‘나 성가가 아니라 속가를 불렀는데…….’
가슴이 쿵쿵 뛰었다. 식은땀이 손을 적신다.
‘설마 유모가 나를 이단으로 밀고할 리는 없지만, 뭐라고 할지…….’
거기까지 생각하던 칼리오페는 정신을 차렸다. 과거를 회상하느라 잠시 헷갈렸다.
‘아직 종교 재판이 열리지 않던 시기야.’
속가를 부른다고 해서 이단자 취급당할 리 없다. 아직은.
그래도 속가를, 신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을 노래하는 건 좋지 않다.
종교 예술이 아닌 모든 예술은 천대받았다. 아니, 감히 예술이라고조차 불리지 못했다. 하층민이나 즐기는 유흥거리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저 백안시하는 정도지만 앞으로 갈수록 더 심해질 것이다. 그리고 종래에는…….
[감히 신을 부정하다니. 모두 불에 태워라!]
검열당했다.
또다시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에 칼리오페가 하얗게 질린 입술을 깨물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살이 타던 악취가 칼리오페를 잠식했다.
“아가씨.”
그녀를 그 끔찍한 악몽에서 건져 올린 건 유모의 따스한 손이었다. 어깨에 닿은 온기에 칼리오페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유모가 다사로운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점의 그늘도, 한 점의 혐오감도, 한 점의 걱정도 없이.
“이렇게 아름다운 노랫소리는 처음 들어요!”
유모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아…….”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몸이 스르르 풀렸다.
왜 그렇게 두려워했을까, 왜 걱정했을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모인데.
“우리 아가씨 목소리가 요정의 목소리처럼 아름다운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노래로 들으니 또 다르네요. 목소리가 꽃봉오리처럼 피어나는 것 같아요.”
요정이니, 꽃이니 하는 낯간지러운 칭찬에 칼리오페의 뺨에 열이 올랐다. 그녀는 슬쩍 유모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노래가 아가씨랑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귀족 레이디가 부르기에 속가는 너무 경박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성가를 부르라고 할 수도 있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아니, 사회 통념상 당연한 말이다. 동시에 칼리오페를 생각한 말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이 내 속가를 들으면 경박하다고 생각할 테니까.’
칼리오페도 그렇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속가가 유모에게 부정당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데 유모는 칼리오페의 생각과 전혀 다른 말을 했다.
“너무 구슬픈 가락인 걸요.”
칼리오페의 입술이 자그맣게 벌어졌다. 몇 번 오물거리더니 도로 닫힌다.
“아가씨께는 밝고 행복한 노래가 어울려요.”
비극은, 슬픔은 아가씨께 어울리지 않아요. 진지한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응, 유모.”
칼리오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칼리오페의 삶은 온갖 비극으로 점철되었다. 그녀야말로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시간을 되돌아왔다. 매일매일 행복한 시간이 쌓이고 있다. 절대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전의 삶이 비극적인 엘레지(elegy)였다면 앞으로의 삶은 평화로운 파스토랄레(pastorale)로 연주될 것이다.
“아유, 우리 아가씨는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우실까.”
까닥까닥 움직이는 모습이 인형 같았다. 유모는 참지 못하고 칼리오페를 끌어안았다.
“아가씨,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노래하셨어요? 너무 잘 부르셔서 깜짝 놀랐어요!”
“……처음 불러보는 고야. 게다가 별루 제대로 된 노래도 아니었는걸.”
격한 반응이 민망했다. 칼리오페는 웅얼웅얼 변명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노래를 들었다는 게 부끄러웠다.
“아니긴요! 저는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유모가 칼리오페를 끌어안았다. 아가씨가 하나둘 새로운 것을 깨쳐나갈 때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포근한 품에서 칼리오페는 눈을 깜빡였다. 과거, 혹은 미래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유모의 모습이 망막을 채웠다.
칼리오페는 팔을 뻗어 유모를 마주 끌어안았다.
“유모…….”
“네?”
칼리오페가 유모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푸근하고 달콤한 향기가 난다. 유모의 품에서 나는 향기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칼리오페는 한참 숨을 들이마셨다.
유모는 칼리오페를 안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아우, 사랑스러워!’
가슴이 간지러울 정도였다. 아직 어린 아가씨가 어리광이 없어서 내심 서운했는데 오늘은 무슨 바람인지.
“그런데 아가씨, 그런 노래는 어디서 들었어요?”
루스티첼 저에 초대된 손님들이 가끔 노래하기도 했지만 당연히 모두 성가를 불렀다.
아가씨께서 속가를 들을 기회가 있었나? 유모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물음에 멈칫 굳어있던 칼리오페의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였다.
“응? 으응, 언젠가 들어서 따라 해봤어.”
“언제요?”
“저번에.”
저어번에.
산호빛 눈동자가 도록도록 굴러갔다.
* * *
아침 식사 시간, 시중을 드는 유모의 얼굴이 환했다. 어찌나 환한지 구름이 가득 낀 날인데도 여름 햇살이 방안에 내리쬐는 것 같았다.
입꼬리가 늘어날 대로 늘어나 있는 모습에 루스티첼 부인이 물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봐.”
“네? 아…….”
쟁반을 끌어안은 유모가 후후 웃음을 흘렸다.
“오늘 아침에 우리 막내 아가씨의 노래를 들었거든요.”
칼리오페가 움찔했다. 표정은 언제나처럼 침착했으나 포크로 접시 바닥을 긁을 뻔한 것을 단련된 예법으로 겨우 막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의 태도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리페가 노래를?”
루스티첼 백작 부인뿐만이 아니라 백작과 루시우스, 로베르트까지 관심을 보였다.
“노래? 리페, 노래했어?”
로베르트의 말에 유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노랫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동할 정도였어요. 사람이 아니라 천사가 부르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렇게 고운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로베르트가 칼리오페를 쳐다보았다. 눈빛이 초롱초롱한 데다 엉덩이가 의자에서 반쯤 떨어졌다. 왠지 보이지 않는 꼬리가 붕붕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나도 리페 노래 듣고 싶어!”
그 말에 다른 가족들도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우리 리페가 부르는 노래라니. 기대되는구나.”
“나도 듣고 싶은데.”
백작과 루시우스가 차례로 칼리오페를 채근했다. 두 사람에게도 꼬리가 붕붕거린다.
루시우스는 무심한 표정인데 꼬리는 제일 많이 흔들리고 있다.
‘개가 세 마리…….’
칼리오페는 넋 놓고 생각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사람을 보고 멍멍이를 생각하다니. 실례였다.
세 멍멍…… 아니, 남자는 여전히 헥헥 거리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난감함에 칼리오페의 시선이 루스티첼 부인에게로 향했다. 세 남자보다 훨씬 눈을 빛내고 있던 부인은 딸의 시선에 아닌 척 시침을 뚝 뗐다.
“그렇게 채근하면 리페가 곤란해 할 수도 있잖아요. 저도 정말 듣고 싶긴 하지만.”
어쩐지 ‘채근하면 리페가 곤란해 한다’보다 ‘나도 정말 듣고 싶다’라는 말에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아닌 척 억눌렀던 루스티첼 부인의 꼬리도 살랑살랑 흔들린다.
이쯤 되니 거절하는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칼리오페가 입을 오물거렸다. 루스티첼 부인은 딸을 다루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건 부끄럽지만, 가족들이 이렇게나 원하는데 못 부를 정도는 아니다.
다만 부를 노래가 성가가 아니라서 망설여졌다.
칼리오페가 유모를 바라봤다. 유모는 아까부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신의 노래에 감탄하던 때처럼 한 점의 그늘도 없다.
칼리오페의 시선이 유모를 지나 어머니, 아버지, 오라버니들에게로 향했다. 다들 기쁨과 기대로 상기된 얼굴이었다. 칼리오페는 이 얼굴이 실망이나 냉기로 물드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유모가 그랬듯이 가족들 역시 환히 웃을 것이다. 노래를 잘 부르든 못 부르든, 성가를 부르든 속가를 부르든.
“구럼 조금만…….”
결심을 마치자 부끄러움에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칼리오페가 슬쩍 고용인의 눈치를 보았다. 고용인들을 좋아했지만 속가를 들려주는 건 꺼려졌다.
그 수줍음 가득한 모습에 루스티첼 부인이 유모를 제외한 고용인들을 물렸다. 고용인들은 아쉬움에 질질 끌리는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마자 방이 조용해졌다. 루스티첼 일가는 식사조차 멈춘 채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또 꼬리가 붕붕 흔들리고 있다.
칼리오페의 볼이 더 붉게 달아올랐다. 차라리 보지 말자 싶어 눈을 감았다.
곧 벚꽃 같은 입술이 열리고 큰 숨을 들이켰다.
* * *
1. 루스티첼 백작의 경우
루스티첼 백작은 자신이 팔불출이라는 자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평범하게 자식들을 사랑한다고 여겼고, 자상하고 엄격한 아버지상을 추구했다.
그렇기에 그는 엄격한 아버지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칼리오페의 노래를 들었다.
따라서 누구라도 칼리오페의 노래를 듣는다면 그처럼 생각하리라 확신했다.
루스티첼 백작의 엄격하고 객관적인 감상:
‘우리 막둥이는 인간이 아니야. 천사다!’
2. 루스티첼 부인의 경우
루스티첼 부인은 남편과 달리 자신이 다소 팔불출이라는 걸 인정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막내딸에 대해서는 조금, 아니, 꽤 유별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순간만은 확신했다. 자신은 그 어느 때보다—심지어 영지 관리를 감사(勘査)할 때보다도— 냉철하고 공정하게 칼리오페의 노래를 듣고 있다고.
루스티첼 부인의 냉철하고 공정한 감상:
‘내 딸은 인간이 아니야. 요정이야!’
3. 루시우스 루스티첼의 경우
루시우스는 자신이 약간 시스터 콤플렉스 기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옆에 동생을 여럿 둔 친구가 있다 보니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었다.
그는 평범한 오빠인 호르세안보다 조금, 아주 약간, 정말 살짝만 과하게 동생을 보호하는 경향이 있다.
자각하고 있기에 그는 항상 자기검열을 통해 동생을 사실적이고 정대하게 보려 했다. 칼리오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루시우스의 사실적이고 정대한 감상:
‘내 동생은 인간이 아니다. ……정령일지도.’
4. 로베르트 루스티첼의 경우
로베르트는 단순했다. 그는 단순하게 칼리오페가 세계 최고라고 생각했다.
숨을 쉬든, 말을 하든, 눈을 깜빡이든 뭘 하든 그의 동생은 세계 최고였다.
세계 최고로 귀엽게 숨 쉬고, 세계 최고로 똑똑하게 말하고, 세계 최고로 예쁘게 눈을 깜빡인다고 생각했다.
동생이 세계 최고인 로베르트의 감상:
‘우리 세계 최고 리페의 노래는 세계 최고로 최고야!’
칼리오페가 노래를 다 끝마쳤을 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지나치게 조용한 분위기에 칼리오페가 감았던 눈을 떴다.
“…….”
칼리오페가 조금만 덜 침착했다면 그녀는 히익, 하며 숨을 들이 삼켰을 것이다.
‘뭐지. 저 천사나 요정, 정령을 바라보는 것 같은 눈빛은…….’
떨리는 동공으로 가족들을 훑어보던 시선이 로베르트에게서 멈췄다.
‘멍멍이…….’
아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꼬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꼬리로 날 수 있을 것 같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이 어쩐지 ‘우리 주인님 세계 최고!’를 외치는 것처럼 보여서 눈을 깜빡였다.
무심코 든 생각이 실례라 재빨리 흩어 보내는데 로베르트가 망망 울었다.
“역시 우리 리페는 세계 최고야! 나는 노래가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어!”
그 말에 둑이라도 터진 듯 가족들이 다다다 찬사를 내보냈다.
“우리 딸 노래에 엄마는 눈물마저 나던 거 있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어. 천상의 노래가 이럴까 싶었다.”
“천상의 노래도 이보단 못할 거란다.”
‘아니, 그건 아닌데요.’
칼리오페는 초점 없는 눈으로 가족들을 바라봤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은 천상의 노래보다 낫다는 것에 만장일치로 동의하며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정말로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틀렸어. 우리 가족은.’
왠지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가를 불러도 가족들이 개의치 않고 웃어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 반응일 줄은 몰랐다.
진지하게 칭찬을 마친 가족들이 감격에 찬 눈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막내의 성장이 경이롭고 기껍다는 듯이.
그 진심 어린 눈에 칼리오페는 가슴이 콱 막혔다. 갑자기 호흡이 힘들었다. 내뱉는 숨이 아릿했다. 아릿하면서도 따스하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칼리오페는 가족들이 그리웠다. 그녀가 무슨 일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색안경을 끼지 않고 믿고 지지해줄 가족이. 그저 존재만으로도 격려가 되는 사람들이.
‘정말로 돌아왔어.’
결국 칼리오페는 웃었다. 코끝이 시큰했지만 울음보다 웃음이 맺혔다.
정체도 모르는 자에게 가족이 살해당하고 하루하루 죽어가는 어머니를 지켜봤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당한 배신은 여전히 화상처럼 남아있다.
전쟁을 겪고 수많은 사람이 가축처럼 도륙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 수많은 사건의 후유증이 칼리오페의 정신을 여전히 침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칼리오페가 트라우마를 온전히 극복할 수 있다면, 그건 분명 가족 덕일 것이다.
되돌아와서 처음으로 칼리오페는 과거의 그늘 한 점 없이 웃는 자기 자신을 상상할 수 있었다.
* * *
며칠 뒤, 호르세안이 루스티첼 저에 왔다. 그는 루시우스의 눈을 피해 책을 읽고 있는 칼리오페에게 다가갔다.
“리페, 그렇게 노래를 잘한다면서.”
대체 언제 호르세안에게까지 퍼졌단 말인가. 칼리오페는 당황을 숨기고 살풋 미소 지었다.
“누군가 호세 오라버니께 농담을 했나 보네요.”
“농담은. 완전 진심이 가득하던데. 심각할 정도로.”
호르세안이 혀를 내둘렀다.
루시우스의 기분이 좋아 보여 무슨 일인가 했는데 로베르트가 칼리오페의 노래를 들었다며 자랑했다.
그 후로는 뭐…… 말해 봐야 입 아프다.
루시우스는 왜인지 몇 번 노래에 관해 이야기하는 로베르트를 말렸지만, 처음뿐이었다.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간지러웠을 텐데 그간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로 칼리오페를 칭찬, 아니, 찬양했다.
“호세 오라버니두 알잖아요. 우리 가족.”
루스티첼 일가는 막둥이가 숨만 쉬어도 칭찬했다.
‘어쩜 우리 리페가 숨을 쉬었어!’
‘대단해! 숨을 이렇게 귀엽게 내쉬다니!’
‘내 딸이 숨 쉬는 게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
‘숨 쉬는 게 귀여울 수도 있다니……. 이건 기적이다.’
칼리오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을 초월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호르세안은 그 모습에 픽 웃었다. 이 애어르신 같은 꼬마 아가씨는 이럴 때가 제일 귀여웠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다섯 동생을 주렁주렁 매달고 사는 호르세안에겐 그랬다.
‘너 귀여운 거 맞는데 왜 그러냐고 하면 저 세상사 초탈한 눈빛이 날 향하겠지.’
그것도 나름 재밌겠지만 오늘 루시우스의 눈을 피해 칼리오페를 만나러 온 건 다른 목적이 있어서였다.
“그 노래 나도 듣고 싶은데.”
“제 노래눈 비싸서요.”
그 새침한 대답에 호르세안의 입꼬리가 씰룩했다. 겨우겨우 웃음을 참고 짐짓 섭섭한 목소리를 냈다.
“서운한걸.”
“살다 보묜 그런 때두 있는 거예요.”
아이답지 않은 말에 호르세안은 결국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칼리오페는 뾰로통한 눈으로 호르세안을 쳐다봤다. 아주 데굴데굴 굴러갈 기세였다.
“그래, 살다 보면 그런 때도 있지.”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호르세안이 눈물을 글썽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아니었으면 하지만.”
아쉽다는 듯 덧붙인 말에도 칼리오페는 눈썹 한 번 까딱하지 않았다.
호르세안은 죽음의 문턱에서도 끝까지 신의를 지켰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속가를 듣는다고 해서 내게 선입견을 품을 리 없어.’
루시우스가 속가를 불렀다고 이야기했을 리 없으니 다소 놀라겠지만 그뿐일 테다. 유모와 가족들 덕에 칼리오페는 속가에 대한 반응에 어느 정도 두려움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러니 그것 때문에 부르지 않겠다는 건 아니다.
‘……너무 창피한걸.’
칼리오페의 포동포동한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가족들의 과한 반응이 원인이었다. 원래도 누군가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게 수줍었지만 그날 이후로 더 심해졌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막내 노래 자랑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루스티첼 일가는 무슨 대회라도 나간 것처럼 온 집안에 칼리오페의 노래를 자랑하고 다녔다. 혹시 노래를 불러달라고 할까 봐 사교계에서 자랑하지 못하니 그 반대급부로 집안에서 심해진 듯했다.
물론 속가를 불렀다는 말은 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당연히 성가를 불렀을 거라 생각했다.
요즘 고용인들만 마주치면 ‘노래 한 번만 불러주세요.’라는 무언의 압박에 빈속에도 체할 것 같았다. 가족들과 유모를 제외하곤 칼리오페의 노래를 듣지 못했기에 기대감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원래 보지 못한 게 더 빛나고 듣지 못한 게 더 아름다운 법이다.
‘그나마 집안에서만 자랑한 줄 알고 안심했는데 호세 오라버니에게까지 했을 줄이야.’
막상 들으면 별것 아닌 노래일 뿐인데 이렇게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으니 더 민망했다.
단호한 칼리오페의 표정에도 호르세안은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이 정도는 예상했다. 보통 아이들은 칭찬으로 살살 구슬리면 넘어올 테지만, 새침한 칼리오페가 냉큼 불러줄 리 없다.
그럴 줄 알고 준비해 온 게 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노래를 부르면 내가 초콜릿을 줄게.”
호르세안의 동생들은 초콜릿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그가 비장의 무기인 초콜릿을 꺼내 보여줬다.
‘어때. 이거면 아무리 어른스러워도 넘어올 수밖에 없을걸.’
우는 아이도 단번에 그치는 초콜릿이다. 호르세안은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칼리오페는 ‘내가 애냐?’ 하는 표정으로 호르세안을 쳐다보았다.
“호세 오라버니.”
차분히 부르는 목소리가 엄했다.
“어?”
“대가성 청탁은 옳지 않아요.”
* * *
‘대, 대가성 청탁?!’
호르세안은 그 말을 입안에서 몇 번이나 굴리고 나서야 뜻을 이해했다. 책상머리에 앉아 있을 때나 본 단어다. 수업 시간 외에 직접 들은 건 처음이다.
“대가성 청탁이라니…….”
호르세안은 신음하듯 말했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 다섯 살밖에 안 된 애가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는지.
억울했다.
아니,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대가성 청탁이 옳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호르세안은 입술을 몇 번 우물거리다가 반박을 포기했다. 뭘 말해도 이 아이에겐 질 것 같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포기하면 편하다는 말이 왜 생각나는 걸까. 영혼을 털린 느낌이지만 어쩐지 마음만은 편했다.
“다음부터 안 그러시묜 되죠. 잘못을 인정하구 나아가 반복하지 않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어요. ”
칼리오페가 위로하듯 말했다. 살며시 미소 짓는 모습이 일견 자애롭게까지 보였다.
호르세안은 다섯 살 꼬마의 가르침에 해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다 옳지. 아무렴.
“내게 가르침을 준 보답이야.”
호르세안은 조그마한 칼리오페의 손을 잡고 초콜릿을 쥐여주었다.
칼리오페는 아무 말 없이 금박지에 둘러싸인 초콜릿을 바라보았다. 혹시 또 무슨 말을 늘어놓으며 거절할까 두려웠던 호르세안이 도로 가져가 아예 초콜릿을 까줬다.
이 이상으로 더 말을 들으면 정말 정신적인 타격이 올지도 모른다.
저번에 루시우스 녀석이 칼리오페가 두 살에 세월의 무상함을 논했다고 했을 땐 믿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칼리오페로 인해 인생무상을 느낄 것 같았다.
“자, 아~ 해봐.”
“네? 제가…….”
뭐라 말하는 것을 못 들은 척, 앙증맞은 입술에 초콜릿을 쏙 넣었다.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통통한 두 볼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차마 입안에 음식이 있는 상태에서 말할 순 없어 입을 오물오물 움직였다.
초콜릿이 찐득하게 녹아내리면서 쌉쌀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그 사이로 고소한 풍미가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칼리오페의 표정이 점점 풀어지기 시작했다.
호르세안은 시시각각 변하는 조그만 얼굴을 즐거운 눈으로 바라봤다.
“맛있지?”
칼리오페는 살짝 멈칫했다가 곧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뺨에 옅은 홍조가 올라왔다.
“우리 영지에서만 나는 골든 헤이즐넛으로 만든 초콜릿이야.”
골든 헤이즐넛은 이름 그대로 황금빛의 헤이즐넛이다. 보통 갈색 헤이즐넛보다 훨씬 색이 밝은 데다가 영양과 풍미도 월등히 깊다.
엘피너스령 동부의 특별한 토지 에서만 난다고 들었다.
칼리오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전생에서도 먹어봤는데 이게 이렇게나 맛있는 줄은 몰랐다. 입맛이 변한 건지, 한참 안 먹다 먹어봐서 그런 건지.
“더 줄까?”
호르세안이 씩 웃으며 초콜릿을 내밀었다. 얼굴이 짓궂었다.
“난 리페 노래가 듣고 싶은데……. 아, 그런데 리페는 대가성 청탁은 싫다고 했지.”
초콜릿을 도로 물리며 호르세안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칼리오페를 쳐다봤다. 그의 동생들과 전혀 다른 아이가 대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칼리오페의 어린애 같은 모습을 한번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으—음, 왠지 얘는 그런 모습조차 귀여울 것 같단 말이야.’
동생들 덕에 어린애들이 빽빽 우는 건 귀엽다기보단 시끄럽고 귀찮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호세 오라버니,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구 말씀드렸을 텐데요.”
칼리오페는 눈썹을 미미하게 찡그렸다.
역시 넘어오지 않는구나 싶어서 호르세안은 입맛을 다셨다. 좀 아쉽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
칼리오페가 그의 손에서 초콜릿을 꺼내 갔다. 호르세안은 멍한 얼굴로 초콜릿을 앙당그레 움켜쥔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대가성 청탁은 옳지 않다며?”
“이건 압수입니다.”
칼리오페는 당당했다.
이건 또다시 대가성 청탁을 하려 한 그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원래 이런 뇌물은 압류해야 한다.
절대 초콜릿이 한 개 더 먹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
푸하하하, 호르세안이 성대한 웃음을 터트렸다. 당당한데 왜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까. 칼리오페는 입술을 비죽였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웃던 호르세안이 끅끅거리더니 말했다.
“역시 우리 집에 안 올래?”
호박색 눈동자가 유독 반짝반짝 빛났다. 가늘어진 눈매 탓인지 정말 보석 같았다.
호르세안이 칼리오페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보드라운 피부에 거칠고 딱딱한 손가락이 스친다.
“이런 초콜릿 얼마든지 많이 먹을 수 있는—”
“동작 그만.”
얼음으로 만든 칼날보다 더 시린 목소리가 호르세안의 말을 잘랐다.
루시우스가 문가에서 호르세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빛만으로 상대를 찔러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
뛰어오느라 들썩이는 가슴을 깊은 호흡 한 번으로 진정시킨 루시우스가 성큼성큼 방안으로 들어왔다.
호르세안은 바짝 굳어서는 칼리오페의 뺨에서 손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저 팔불출 녀석이 눈 돌아간 걸 보니 혼자서 얼음가시나무 산맥에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호르세안 엘피너스.”
뼛골까지 시려 오는 시퍼런 목소리였다. 루시우스의 눈동자에 짙푸른 예기가 흘렀다.
호르세안은 변명도 못 하고 땀만 뻘뻘 흘렸다. 친구 동생 좀 귀여워해 준 게 이렇게나 추궁받을 일인가 싶어서 억울했지만, 왜 가슴이 따끔거리며 찔리는 걸까.
칼리오페를 보러 온 이유에 루시우스를 골려주려는 의도도 있기 때문일 거다. 암, 그렇고말고. 그거 외엔 찔릴 이유가 없으니까.
“일단 떨어져라.”
“넵.”
짓씹듯이 뱉어낸 말에 호르세안이 당장 손을 번쩍 뗐다.
루시우스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호르세안이 집에 찾아온 순간부터 짜증 났다. 매번 밖에서 만나던 녀석이 갑자기 루스티첼 저까지 찾아온 의도가 뻔했다. 누가 보기 전에 재빨리 내쫓으려고 했지만 이미 루스티첼 부인의 귀에 들어간 후였다.
찾아온 손님을 문전박대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엄한 꾸짖음과 함께, 루스티첼 부인은 아기 때부터 봐온 아들의 친구를 반갑게 맞았다.
어쩔 수 없이 집에 들였지만 계속 옆에서 감시하고 있었는데, 루스티첼 백작의 부름이 변수였다.
“문밖에서 쫓아냈어야 했는데.”
루시우스의 중얼거림에 칼리오페는 당황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전생을 겪은 칼리오페가 잘 알았다. 사람은 힘든 상황에 맨 얼굴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리고 호르세안의 맨 얼굴은 의리와 신의로 가득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심하게 다퉜나?’
혹시 이전의 삶과 다른 요소가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았나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루스 오라버니.”
“응?”
칼리오페의 부름에 루시우스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풀렸다.
“혹시 호세 오라버니와 싸운 거예요?”
커다란 산호빛 눈동자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루시우스는 침묵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싸웠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고, 그럼 왜 그러냐 하면 대답할 말이 궁색했다.
아주 약간, 살짝, 조금일 뿐이지만 자신에게 시스터 콤플렉스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변명하자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뒀다면 그가 아닌 누구라도 팔불출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루시우스는 당당했다.
다만 동생 본인한테 대놓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는 동생에게만큼은 멋지고 쿨한 오빠가 되고 싶었다.
루시우스는 칼리오페가 이미 그의 팔불출 끼를 눈치챘다는 걸 꿈에도 몰랐다. 그에게 다행인 점은 ‘날 엄청나게 귀여워한다.’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칼리오페는 설마, 아직 다섯 살인 자신에게 접근하는 남자를 막아내지 못해 안달 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그건 병이었다.
덕분에 루시우스는 동생에게 명예를 지킬 수 있었다.
루시우스가 대답이 없자 칼리오페의 얼굴은 더 심각해졌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지만…….”
조심스럽게 운을 뗀 칼리오페가 두 사람의 안색을 살폈다. 이유도 모르는 채 섣불리 말할 순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넘어가자니 두 사람의 우정이 깨질까 안타까웠다.
“두 오라버니 사이에 제가 끼어드는 것 같아서 죄송한데, 저는……. 오라버니들께서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절친한 친우셨잖아요.”
심지어 죽음마저 함께 했다. 거의 삶의 시작과 끝을 함께했다고 봐도 좋은 관계였다.
칼리오페의 얼굴이 울적해졌다. 두 남자는 당황했다.
“아, 아니야, 리페. 우리가 얼마나 친한데.”
호르세안이 하하, 웃으며 루시우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린 루시우스에게 ‘웃어, 웃으라고’ 하며 속삭였다.
칼리오페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어깨동무한 채 미소 짓는 모습이 누가 봐도 어색했다.
그녀는 모르는 척 물었다.
“싸우신 고 아니에요?”
“그럼! 우리가 왜 싸워! 그치?”
호르세안이 루시우스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루시우스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리페,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
“구럼 왜 그러셨어요?”
나무라기보다는 서글픈 기색이 강한 질문이었다. 사랑스러운 막냇동생의 슬픈 얼굴에 루시우스는 숨이 턱 막혔다.
“지금두 그렇구, 저번 티파티에서 두 분이 마주쳤을 때두 호세 오라버니께 뭐라구 하셨죠. 호세 오라버니는 루스 오라버니를 피하려구 했구…….”
제게도 호세 오라버니를 무시하라고 말했고.
그 말은 속으로 꾹 삼켰다. 호르세안이 듣고 상처받을까 걱정됐다.
루시우스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차마 이 녀석이랑 노는 게 질투 나서 그랬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칼리오페가 호르세안에게 반할까 봐 걱정한 것도 있다.
자신의 사랑스럽고 고아한 동생이 이런 경박한 놈에게 마음 한 자락도 내줄 리 없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다. 호르세안이 매일매일 받는 연서의 수를 생각하면 가능성은 싹부터 없애는 게 좋다.
루시우스는 차마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는 사이 칼리오페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아, 그게! 사실은 싸웠는데 말이야.”
돌아갈 줄 모르는 직선적인 친구를 대신해서 호르세안이 입을 열었다. 싸웠다는 말에 칼리오페가 눈썹을 늘어트렸다. 호르세안이 서둘러 변명했다.
“큰일로 싸운 게 아니라……. 그, 안 싸웠다고 한 건 너무 사소한 일이라서거든.”
“사소한 일이요?”
“응, 말하기 민망할 정도랄까.”
칼리오페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하지만 의심은 걷히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격하게 반응하셨어요? 사소한 일이라면서.”
호르세안을 향한 루시우스의 살벌한 기운을 생각하면, 도저히 사소한 일로 다툰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유를 말하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원래 사소한 걸로 싸우면 더 꽁해지는 법이야. 정식으로 사과하기도 애매하니까.
게다가 이 녀석이 워낙 차갑게 굳은 얼굴이다 보니 그냥 쳐다봐도 노려보는 거라고 오해를 사곤 하잖아. 특별히 엄청 격하게 반응했던 것도 아니야.”
호르세안의 변명을 듣다 보니 수긍되는 면이 있었다. 루시우스의 무표정에 얽힌 오해는 동생인 칼리오페도 잘 알았다.
칼리오페가 설득당하는 것 같자 호르세안이 쐐기를 박았다.
“큰일이었으면 내가 지금 이렇게 루스티첼 저에 놀러 왔겠어?”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했다. 아직 의심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그럼 왜 싸우셨는데요?”
“어, 그게…….”
눈을 굴리는 호르세안의 모습에 칼리오페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로 의심이 가득해진 얼굴에 호르세안은 일단 던지고 보자는 심정으로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내가 루시우스한테 초콜릿을 안 줬거든!”
그런데 막상 나온 말이 아무 말이어도 너무 아무 말이었다.
호르세안은 등에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하필이면 칼리오페에게 초콜릿을 주던 상황이었던 게 패인이었다.
“……네?”
3초의 정적 후, 칼리오페가 기가 막힌 얼굴로 되물었다. 자신이 들은 게 맞는 말인지 의심스러웠다.
루시우스의 찌를 듯한 시선을 느끼며 호르세안은 더듬더듬 변명했다.
“저, 정확히는 줬다 뺏었달까. 장난 좀 친다는 게 엄청 심하게 놀려버렸다고나 할까.”
칼리오페는 호르세안과 루시우스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도저히 믿기진 않았지만, 확실히 엄청나게 민망해서 말도 못 할 일이긴 했다. 호르세안이 어색하게 더듬으면서 말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됐다.
‘루스 오라버니가 그랬다는 게 의외지만…… 음, 열두 살이면 사춘기니까 그럴 수 있지.’
사춘기는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칼리오페는 마지막으로 루시우스에게 확인하기로 했다.
“진짜예요?”
루시우스는 고민했다. 동생에게 팔불출이라는 걸 들키는 것과 초콜릿 때문에 친구와 싸운다는 것 중 뭐가 더 불명예스러울까.
세상에 다시 없을 난제였다. 어느 쪽을 고르든 멋지고 쿨한 오빠와는 영원히 안녕이다.
호르세안이 루시우스의 발을 콱 밟았다. 그래도 말이 없자 아예 굽으로 발등을 문지른다.
루시우스는 마지못해 답했다.
“……진짜다.”
진짜로 ‘초콜릿 때문에 친구와 싸운 오빠’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
루시우스는 인생 최초로 자괴감에 휩싸였다.
그걸 모르는 칼리오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조그마한 얼굴에 퍼지기 시작하는 미소를 보며, 루시우스는 우울함을 이겨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두, 아니, 사소한 일일수록 사과하구 화해하는 게 좋겠어요.”
칼리오페가 두 사람을 빤히 쳐다봤다. 시선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두 사람이 서로를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그때 초콜…… 푸흡! 큼큼, 초콜릿 주지 않아서 미안하다. 날 용서해줬으면 좋겠다, 루스.”
“……용서하도록 하지.”
루시우스가 이를 득득 갈면서 말했다. 전혀 용서할 것 같지 않은 목소리였다. 용서는커녕 이 일로 후환이 생길 것 같았다.
호르세안은 웃음을 참으며 친구의 얼굴을 바라봤다. 뒷감당이 걱정되긴 했지만 그건 미래의 자신이 알아서 할 터.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 된다.
“초콜릿을 주지 않은 날 용서해주다니……! 이렇게 마음이 넓을 수가! 정말 고마워, 친구.”
루시우스는 호르세안을 노려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환해진 칼리오페의 얼굴이 입을 막았다.
‘나중에 보자, 호르세안.’
주먹을 꽉 움켜쥐며 훗날만 기약할 뿐.
“루스 오라버니두 심하게 말한 것 사과하시구요.”
칼리오페가 채근했다. 루시우스는 칼리오페의 말간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눈동자가 순진무구했다. 초롱초롱한 눈빛에 절대 떨어지려 하지 않았던 입술이 열렸다.
“……미안하다.”
낮은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호르세안은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막냇동생 사랑이 지극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 루시우스가 순한 양처럼 따르는 게 신기했다.
‘뭐, 양도 사실 성질이 엄청 더럽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건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어렸을 때부터 루시우스를 봐왔던 지라 더더욱.
“호세 오라버니?”
조심스러운 칼리오페의 부름에 호르세안이 루시우스에게 답했다.
“아, 괜찮아. 별로 기분 나쁘지도 않았고…….”
기분 나쁘긴커녕 재밌었다.
사이좋게 화해한 두 사람의 모습에 칼리오페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서로 사과하구 용서했으니 잘됐네요.”
“으응…….”
호르세안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끝났나 싶어서 두 사람은 살짝 안도했다.
“자, 그럼 화해의 뜻으로—”
설마 칼리오페가 마지막 한 방을 남겨두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방심한 것이다.
칼리오페는 순연한 얼굴로 웃으며 두 사람의 정신에 폭탄을 던졌다.
“포옹하세요.”
명중이었다.
루시우스와 호르세안의 얼굴이 동시에 이상해졌다.
포옹? 진짜 포옹이라고 한 거야? 내가 아는 그 포옹 맞아?
콰과각! 정신이 갈려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하얗게 불타고 남은 잿더미가 파스스 바람에 흩어졌다. 두 사람은 감히 미동도 하지 못했다. 모든 의지를 박살 내는 완벽한 마무리였다.
먼저 움직인 것은 루시우스였다. 그를 움직인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반짝이는 동생의 얼굴을 외면할 수 없는, 거의 본능과도 같은 반사신경이 그를 움직였다.
삐그덕삐그덕 소리가 날 정도로 뻣뻣하게 움직인 팔이 호르세안을 끌어당겼다.
화해의 뜻으로 친구를 꽉 껴안는 얼굴은 무시무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칼리오페에게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호르세안은 자신을 껴안는 건지 쥐어짜는 건지 모를 친구의 포옹에 화답하며 팔에 힘을 꾸욱 줬다.
질 순 없다!
두 사람의 우정이 어찌나 깊은지 서로를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얼싸안은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넘쳐나는 우정 때문에 두 사람은 질식사할 위기에 처했다. 죽음까지 함께하겠다는 결의가 엿보였다.
‘힘 풀어라.’
‘너부터 힘 풀지 그래.’
아기 때부터 봐왔지만, 서로를 껴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일 것이다. 제발, 마지막이어야 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오랜 친구는 황금보다 값지다고도 하지요. 두 분 우정에 아무리 자그마한 실금이라두 가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칼리오페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놓질 않는 두 사람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말했다.
저렇게 서로를 아끼면서 왜 다툰 것인지.
겨우겨우 포옹을 끝낸 루시우스에게 칼리오페가 자애롭게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루시우스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반짝이는 무언가가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초콜릿이었다.
“친구랑 화해한 거 정말 잘했어요. 상이에요.”
“…….”
루시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번엔 호르세안도 참지 못했다.
푸하하하, 백작저를 무너트릴 것 같은 웃음소리가 방안을 꽉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