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사교계의 쁘띠 레이디
“우리 리페는 역시 뭘 입어도 사랑스러워.”
루스티첼 부인이 다섯 살 난 딸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아이를 보니 가는 시간이 아깝다. 지금의 모습은 지금밖에 못 볼 테니까.
다행인 점은 칼리오페가 무척 얌전한 아이여서 초상화를 잔뜩 그려놓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 좋은데……. 지금 몇 시간 째지.’
칼리오페는 드레스를 번갈아 들며 연신 자신을 살피는 루스티첼 부인의 모습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 잘 어울려서 더 고민이네. 노란색이랑 핑크색 중 뭐로 할까. 우리 리페는 뭐가 좋니?”
루스티첼 부인의 환한 미소에 칼리오페가 눈을 깜빡였다. 흥분과 즐거움으로 상기된 얼굴에 말문이 턱 막혔다.
반짝반짝 빛나는 어머니의 얼굴이 무척 행복하고 아름다워 보여서 칼리오페의 한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머니께소 골라주시는 거면 뭐든 좋아여.”
여태까지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진심이었다.
칼리오페다운 대답에 루스티첼 부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고사리 같은 두 손을 얌전히 오므린 채 또박또박 답하는 모습이 정말 사랑스러웠다. 그래도 가끔은 억지로 떼 부렸으면 싶었다.
“그럼 핑크로 하자!”
루스티첼 부인의 말에 하녀들이 부산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어깨엔 평소보다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오늘은 칼리오페가 처음으로 사교 모임에 나가는 날이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가씨를 다른 사람들에게 선보인다는 생각에 하녀들은 그 어느 때보다 정성을 들였다.
커다란 꽃과 리본이 달린 보닛. 레이스와 프릴로 화려하게 장식한 비단 드레스. 미니 드레스 밑으로 보이는 작은 발에는 레이스 리본이 달린 구두.
하녀들의 기합 효과가 대단했는지, 드레스를 차려입은 칼리오페는 비스크 인형보다도 더 인형 같았다.
“누구 딸인지 정말……. 이대로 납치해가고 싶네.”
루스티첼 부인이 한숨처럼 말했다.
“어머니, 지금 출발하지 않으묜 늦습니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딸을 감상하는 루스티첼 부인에게 칼리오페가 재촉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어서 가야겠네.”
퍼뜩 정신을 차린 루스티첼 부인이 모자를 챙겨 들었다. 칼리오페와 세트인 모자였다.
마차는 이미 준비되어 있어서 몸만 실으면 되었다.
“우리 리페, 엄마 손 잡으렴.”
칼리오페는 내밀어진 손을 꼭 붙잡고 아장아장 걸었다.
‘티파티는 정말 오랜만인걸.’
여태까지 백작 저 밖으로 나가더라도 가족끼리의 피크닉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그간 발음은 꽤 좋아졌어.’
사실 전생에서는 보통 여아들보다 발음이 몹시 늦된 편이었다. 루스티첼 부인은 칼리오페의 손을 잡고 넌 일곱 살이 되고서야 똑바로 발음했다면서 웃곤 했다.
‘아무래도 턱이나 혀의 발달 문제인 듯한데…….’
이번에는 그래도 한 살 때부터 말을 해서인지 전생보다는 훨씬 발음이 좋았다. 완벽하진 않지만 이 정도로 만족이다. 못 알아들을 수준은 아니니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훨씬 편할 것이다.
회귀한 후 처음으로 가문 외의 사람들을 만난다. 칼리오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가족들의 죽음이 그렇게 쉽게 묻혔던 걸 생각하면 분명 다른 귀족들과 얽혀있다.
‘그것도 고위 귀족.’
귀족살해는 큰 이슈다. 그걸 덮을 만한 권력을 가진 자일 터.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어. 십 년 후의 일이니까.’
칼리오페는 고개를 들어 루스티첼 부인을 올려다봤다. 루스티첼 부인이 곧장 눈을 맞추며 빙긋 웃는다. 칼리오페는 어머니를 따라 미소 지었다.
‘지금은 딸의 첫 티파티에 들뜬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자.’
과거에도 지금과 똑같은 티파티에 참석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지?’
그다지 기억나는 게 없었다. 도착한 후 동화책만 읽었던 것 같다. 칼리오페는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 탓에 사교 모임을 즐기지 않았다. 그 성향은 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별문제는 없던 것 같은데…….’
아이들도 동석하는 티파티인지라 분위기는 밝고 자유로웠다. 어른들은 다양한 이해관계를 일단 뒤로 미뤄놓았다.
사실 이 티파티의 목적 자체가 아이들이다. 아이들의 사회성을 기르고 부모들끼리 육아 정보를 교류하기 위해서 여는 파티니까.
‘시끄러운 애들이 좀 있었긴 하지만…….’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애들이 있기 마련이다.
모두 귀족 가의 자식들이다. 집안은 하나의 왕국이나 다름없다. 각자의 세상에서 왕이었던 아이들을 한데 모아놨으니 시끄럽지 않으면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사르니오 부인이 티파티에 나오신다고 하네요.”
유모의 말에 루스티첼 부인이 입가를 가렸다.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오랜만에 사교계에 나오시네. 거의 일 년 만인가.”
“아무래도 자식 분이……. 그렇게 됐으니까요.”
“남은 아이를 생각해서 어서 기운을 차리셨으면 했는데, 오신다니 다행이야.”
사르니오 부인?
익숙한 이름에 칼리오페가 생각에 잠겼다.
일 년 만이라고 했으니, 작년이 사르니오 영애가 죽은 때인 듯했다.
‘나보다 두 살 많으니 여섯 살에 죽은 건가.’
가슴이 아팠다. 어린 나이에 져버린 아이도 그렇고 남겨진 가족도 안타까웠다. 가족의 죽음이라는 게 어떤 건지 잘 아니까.
‘그래서 사르니오 영식이 그렇게 된 걸지도.’
범죄자를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두 남매는 쌍둥이였다. 다른 형제자매들보다 훨씬 가까웠을 터. 자신의 반쪽 같은 누이를 어렸을 때 잃었으니 그 상실감이 엄청났을 거다. 충분히 트라우마가 될 만했다.
‘그렇다고 해도 살인을 저질렀다는 건 변함 없어.’
가족을 잃었다고 모든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칼리오페는 안쓰러운 마음을 접었다.
* * *
“루스티첼 백작 가의 칼리오페입니댜. 만나 뵈어서 영광입니댜.”
칼리오페가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무릎을 굽혔다.
지켜보던 부인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볍게 숙인 고개며, 드레스 자락을 잡고 있는 팔의 각도까지 완벽하지 않은 게 없다. 무릎을 굽혔다 일어날 때는 리듬감마저 느껴졌다.
사교계의 여느 레이디 못지않은 인사였다. 아니, 보통 레이디들보다 훨씬 안정감이 느껴졌다.
다만 짤따란 팔다리로 인해 기품보다는 귀여움이 느껴지는 게 차이랄까. 그래도 사뿐히 내리깐 눈에서는 꽤 도도한 기품이 느껴졌다.
“이제 다섯 살이라고 했지요?”
“너무 신기하고 귀엽네요.”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보는 것일 텐데 긴장한 기색도 없고 마주쳐 오는 시선도 세련됐다.
앞선 아이들이 두리번거리며 엄마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도 무척 귀여웠지만 남들과 다른 아이가 눈에 띄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부인들은 인사를 마치고 종종종 걸어가는 칼리오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흔들림 없는 가벼운 걸음걸이에 드레스 자락이 물결쳤다.
“어머, 어쩜 저렇게 걸을 수가 있을까요?”
“어린애가 저러니 더 귀엽고 앙증맞아 보이네요.”
“루스티첼 부인, 따님을 아주 잘 키우셨네요. 어떻게 키웠어요?”
마지막 질문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루스티첼 부인에게로 향했다. 자식 있는 부모치고 아이 교육에 관심 없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리페가 알아서 잘 큰 거지 제가 특별히 한 일은 없어요.”
루스티첼 부인이 미소 지었다. 딸아이가 첫 모임부터 칭찬받으니 이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다.
‘내 딸이 좀 예쁘고 사랑스러워야지.’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깨가 으쓱으쓱했다.
“그러지 말고 좀 알려줘요. 예법 선생이 누구인가요? 역시 카르멜라 부인? 하지만 카르멜라 부인께서는…….”
카르멜라 부인은 황후의 시녀장을 지냈던 사람으로 인기 많은 예법 선생이었다. 쟁쟁한 공·후작가에서도 카르멜라 부인을 섭외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는 말이 있다.
질문했던 브리젤 부인의 눈에는 당연한 의문이 떠올랐다.
‘루스티첼 가에서 카르멜라 부인을 섭외할 능력이 없을 텐데 대체 어떻게?’
무례한 생각이긴 했지만 고의적인 무시가 아니었다. 루스티첼 부인은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리페에게 예법은 따로 가르치고 있지 않아요. 워낙에 조숙한 아이여서요.”
때로는 좀 철부지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인데 왜 선생까지 붙이겠는가.
“에이, 따님이 인사하는 걸 봤는데……. 그런 핑계는 안 통해요. 아무래도 우리가 몰랐던 다른 선생님이 있나 보네요.”
“그러지 말고 좀 알려주세요. 우리 애도 예법 배울 때라서 그래요.”
루스티첼 부인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없는 선생을 지어낼 수도 없고 믿어주질 않는데 어찌 답해야 할지.
“정말이에요. 예법은 물론이고 리페에겐 어떤 선생님도 붙이지 않고 있어요.”
부인들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묻어나왔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캐물을 순 없다.
‘어차피 선생이 집에 드나들 테니 따로 알아봐야겠다.’
지켜질 수 있는 비밀도 아니고, 며칠 후면 모두가 알게 될 일을 저렇게 숨기나 싶어서 기분이 상하기도했다.
화제는 이대로 마무리되나 싶었다. 그런데 그 순간, 브리젤 부인이 입을 열었다.
“좋은 건 나누는 게 좋잖아요. 그렇게는 안 봤는데, 루스티첼 부인께선 욕심이 많으시네요.”
루스티첼 부인이 욕심 많아서 예법 선생을 숨기려고 거짓말한다는 말이었다.
직설적인 비난에 테이블 위가 일순 얼어붙었다.
브리젤 부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뭐, 물론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식 문제니까 이해는 하지만요. 저도 제 아이가 제일 뛰어났으면 좋겠는걸요. 모두 그러시죠?”
농담인 척, 자기도 그렇다며 후후 웃는 얼굴에 부인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웃었다.
루스티첼 부인의 답이 아니꼬웠던 사람들은 고소하다는 듯 웃고, 브리젤 부인이 무례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티파티를 망치지 않기 위해 억지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아이들과 함께 있는 공간에서 어른들끼리 갈등을 맺을 순 없는 법이다.
루스티첼 부인은 아무렇지 않게 차를 마셨지만 속이 타들어 갔다. 그녀 역시 사교계의 일원이었다. 모욕을 당하고서도 참고 넘어간 적은 셀 수 없다.
루스티첼 가는 쟁쟁한 중앙 귀족들 사이에서 중간 정도 하는 위치였다. 전체 귀족 계보를 보면 엄연히 상위 가문이지만 여기는 중앙 정계다. 숙여야 할 때도 많았다. 남편의 청렴한 성격도 한몫했다.
‘이 정도 일이야 가뿐하지만…….’
딸과 얽힌 일이었다.
이대로 참기 힘들었다. 뒤에서 칼리오페와 관련해 뭐라 수군댈지. 극성맞은 엄마라고 자신만 욕하면 다행이다. 하지만 여기서 정색하고 사과를 청할 수도 없었다. 그건 브리젤 부인의 위세 때문이 아니다.
아이들은 눈치가 빠르다. 금세 어색한 분위기를 읽을 것이다.
루스티첼 부인은 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리페는 어디 갔지?’
아이들 사이에 있어야 할 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루스티첼 부인이 정원 구석구석을 살피는데,
“물론 제게도 선생님이 있습니댜.”
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에서.
루스티첼 부인이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다른 부인들도 갑자기 나타난 칼리오페의 모습에 당황했다.
“절 가르치신 선생님은 제 어머니이신 루스티첼 부인이십니댜. 어머니께서 겸양으로 없다구 말씀하신 모양입니댜.”
부인들은 칼리오페의 말을 따라가지 못하고 허둥댔다. 그들도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자식 앞에서 부모를 창피 줬다는 생각에 얼굴을 붉혔다.
“방금 귀부인들께서두 어머니가 끝끝내 예의를 지키신 걸 보셨지여?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자랐으니 당연히 예법에 밝을 수밖에여.”
당신과 달리 말이야. 칼리오페가 입꼬리 끝만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
산호빛 눈동자가 정확히 브리젤 부인을 바라봤다.
* * *
“후, 훌륭한 어머니를 두어서 정말 좋겠구나.”
“그러게 말이야. 정말 어머니를 닮아 똑 부러지네.”
“이런 딸을 둬서 정말 기쁘시겠어요, 루스티첼 부인.”
부인들이 한 박자 늦게 호호 웃었다. 열심히 분위기를 수습하는 말에 칼리오페가 사뿐히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좋게 봐주시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댜. 칭찬 감사합니댜.”
인형 같은 아이의 성숙한 인사가 제법 깜찍했다. 당황도 가셨겠다, 부인들은 칼리오페의 모습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제 또래를 키우는 엄마들이라 그런지 기본적으로 아이들을 귀여워하고 관대하다.
칼리오페는 호의적인 부인들의 태도를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사교계의 귀감이신 분들께서 모여계신 만큼 모두 현명하게 자녀들을 훈육하시겠지만, 가꿈 아이의 문제는 아이의 눈높이에서 더 잘 보이는 때가 있기 마련이져. 만약 실례가 안 된다묜 부족하나마 한 말씀 드려두 될까여?”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언변에 부인들은 입을 벌렸다. 정말 입을 열면 열수록 놀라운 아이다.
“물론이죠, 레이디 칼리오페. 레이디의 생각이 어떤지 꼭 들어보고 싶네요.”
제법 칼리오페의 모습에 적응한 부인이 눈을 마주치면서 장난스러운 어투로 짐짓 정중하게 말했다.
“브리젤 부인, 둘째 따님이 저보다 두 살 어린 걸루 알고 있습니댜. 세 살이 아직 예법에 익숙치 않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댜.”
칼리오페는 차분한 낯으로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작은 몸에 작은 목소리지만 또렷한 힘이 느껴졌다.
“벌써부터 아이에게 과도한 기대를 하묘 억지루 가르치려 하묜, 아이의 정서 발달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댜.
지금은 있는 그대로 성장하는 따님을 사랑해주세여. 시간이 지나묜 자연스레 예법에 익숙해질 것입니댜.”
“…….”
몇 번 육아를 해 본 사람이나 할 법한 말에 부인들이 침묵했다. 정서 발달이라니, 그게 아이가 선택할 만한 단어인가?
칼리오페는 말을 끝낸 뒤 루스티첼 백작 부인을 쳐다보았다.
“어머니, 오늘 옷을 너무 얇게 입으신 것 같아여. 감기에 걸릴까 염료됩니댜.”
“고맙구나.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렴.”
“어머니가 아푸시묜 가족 모두 걱정할 거예여.”
살포시 루스티첼 부인의 소매자락을 붙드는 칼리오페의 모습이 몹시 걱정스러워 보였다. 루스티첼 부인이 귀여운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딸은 착하기도 하지!’
지켜보던 부인들은 부러워서 창자가 꼬일 것 같았다. 말을 너무 잘하는 것도 놀랍지만, 차분함이며 어머니를 배려하는 모습이 다섯 살 아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육아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유모와 하녀를 두니 다른 집보다는 낫다고 해도 전쟁은 전쟁이었다. 지원 병력이 있을 뿐. 자식인지 적인지 모르겠는 꼬물이들의 살상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사랑했던 자리마다 폐허다.
칼리오페가 치마를 넓게 펼치며 다소곳이 인사했다.
“제가 귀부인들의 시간을 너무 빼앗았네여. 그럼 실례하겠습니댜.”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드레스 자락이 핑그르르 돌았다.
부인들은 칼리오페가 사라진 방향을 한참 동안 멍하게 바라보았다.
“아, 아이가 참…… 대단하네요.”
“루스티첼 부인이 정말 교육 잘 시키셨나 봐요.”
“우리 애도 닮았으면 좋겠네…….”
다 큰 자식이 대화에 끼어들어서 핀잔을 주었다면 되바라졌다고 생각했겠지만, 칼리오페는 어렸다. 고작 다섯 살 된 아이가 제 어머니를 위해 나서게 한 건 어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었다.
부인들은 미안한 마음에 루스티첼 백작 부인을 더 띄워주었다.
“어쩌면 저렇게 영리할까요?”
“교육을 잘 받은 태가 나네요.”
“어떻게 가르쳤길래…….”
말하다 보니 궁금해졌다. 집에서 애를 어떻게 가르쳤길래 저렇게 예의 바르고 똑똑할까.
그러고 보니 루스티첼 가의 첫째인 루시우스도 영민했다.
“부인께서 직접 아이들을 가르치신 것 같은데, 어찌하셨는지 궁금하네요. 들어볼 수 있을까요?”
부인들의 시선이 루스티첼 부인에게 쏠렸다. 거짓말이 아니냐 몰아붙였던 브리젤 부인도 은근히 그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 * *
다시 아이들에게 합류한 칼리오페는 주변을 살폈다. 사르니오 부인은 왔는데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다. 두고 온 건가. 아무래도 신경 쓰였다.
그때 사르니오 부인 곁으로 웬 여자아이가 다가갔다. 함께 있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걸 봐서는 가족인 것 같았다. 아이의 얼굴에서 언뜻 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사르니오 영애? 아직 죽기 전인가?’
뭔가 이상했다. 오기 전 어머니와 유모의 대화를 생각하면 사르니오 영애는 이미 죽었을 터였다.
대화를 마친 아이가 엄마의 곁을 떠나 아이들 쪽으로 왔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과 멀리 떨어진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았다.
칼리오페는 아이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안녕하세여. 사르니오 영애, 맞져?”
“어?”
아이는 갑자기 다가온 칼리오페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누가 제게 말을 붙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본 것 같다.
“어, 안녕……하세요, 저…….”
“칼리오페 루스티첼이에여.”
“어, 바, 반가워. 난 사르니오의 유…… 아니, 안젤리나입니다.”
안젤리나는 고개를 돌리며 칼리오페를 외면했다. 살짝 깨문 입술이 무언가를 참아내는 것 같았다.
‘낯을 많이 가리나.’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일부러 구석에 자리 잡은 것도 그렇고, 인사하며 고개를 돌리는 것도 그렇고.
‘하지만 외면한 건 처음 인사할 때가 아니라 이름을 말하면서야. 분명 앞서 이름을 잘못 말했어. 유……라면, 쌍둥이 남동생인 유리안을 말하는 건가?’
칼리오페는 천천히 안젤리나를 살펴봤다.
안젤리나는 천사처럼 귀엽게 생긴 아이였다. 칼리오페가 아는 한 이렇게 사랑스럽게 생긴 아이는 없었다.
‘아무리 봐도 남자애는 아닌데. 쌍둥이들은 자아 분리가 힘들다더니 이름이 헷갈린 건가?’
그런데 앉아 있는 자세에서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어쩐지 오라버니들이 떠오른다.
왜일까. 칼리오페는 고민하며 시선을 내렸다. 아이의 손에 박혀 있는 굳은살이 보였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안젤리나가 불편한 듯 몸을 움츠렸다.
‘아차, 실수했네.’
저도 모르게 너무 뚫어지게 쳐다봤다. 칼리오페가 서둘러 사과했다.
“죄송해여. 드레스가 너무 예뻐서 그만. 빤히 쳐다봐서 불편했져. 사르니오 영애와 너무 잘 어울려서 그런 것이니 너무 당황하지 마셨으면 좋겠어여.”
“아, 아니에요.”
안젤리나는 자신과의 대화가 영 불편해 보였다. 너무 지그시 응시해서 당황한 게 아니라 대화 자체를 피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확실히 안젤리나는 평범한 아이들과 달랐다. 아이들은 대체로 예쁘다는 칭찬을 좋아했다. 단순해서 칭찬 한 번에 뽐을 내며 어깨를 으쓱이곤 하던데…….
‘혹시……?’
불현듯 떠오른 생각은 의심이 되었다. 사실인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칼리오페는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는 이렇게 어깨가 부푼 드레스가 좋더라구여. 영애는여?”
“아, 나는…….”
안젤리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커다란 연둣빛 눈동자가 도움을 구하듯 주변을 살핀다.
그러더니 칼리오페의 드레스에서 시선이 멈췄다.
“나, 나는 이거. 이런 게 달려 있는 옷이 좋아.”
안젤리나가 가슴팍에 달린 리본을 가리키며 말했다. 눈이 쉴 새 없이 깜빡거린다.
‘역시.’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아이는 안젤리나 사르니오가 아니라 그녀의 쌍둥이 남동생인 유리안 사르니오다.
이름을 잘못 말하는 것도 그렇고, 자세라든가 손의 굳은살, 그리고 드레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점. 모든 게 아이가 사르니오 영식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여장을 하고 있을까. 불편하고 어색한 모습을 보니 치마를 좋아해서 입은 건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유리안은 지나치게 위축되어 보였다.
‘이런 성격이었던가?’
미래의 ‘그 사건’을 생각하면 이런 소심한 이미지는 아닌데.
칼리오페는 원래 외출을 즐기지 않았거니와 가족들이 차례로 죽고 난 뒤엔 사교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리안을 본 것도 몇 번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의 모습도 뚜렷하지 않고……. 이젠 왜 그랬는지 알겠네.’
여장을 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기억에 없었던 것이다.
유리안은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해 보였다. 그는 미래의 살인마다.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역시 쌍둥이 누이의 죽음에 충격이 컸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여장하고 있는 이유도 납득이 간다.
여장을 하며 자신 안에 쌍둥이 누이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 상태에선 아무래도 자아성숙이 어렵다. 위태롭고 불안정하게 성장해 나중에 살인마가 된 것일 터.
칼리오페는 유리안의 옆에 앉았다. 유리안은 흠칫하며 어깨를 좁혔다.
칼리오페는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사실 그녀도 그다지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면 살인마가 될 게 분명한 아이를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권리를 누리는 만큼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한다, 칼리오페.]
전생에서 루스티첼 백작은 그녀에게 그렇게 가르쳤다.
칼리오페는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생각했으며, 그렇게 실천해왔다.
“저어…….”
몇 분이 지났을까. 유리안이 칼리오페에게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리자 아이가 손을 꼼지락 꼼지락 얽는 것이 보였다. 별로 할 말은 없는데 어색하고, 낯설기도 하고, 또래의 존재가 반갑기도 한 모양이었다.
유리안은 항상 둘이었다가 하나가 되었다. 게다가 지난 일 년 동안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니 그 마음이 이해가 된다.
칼리오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칼리오페라구 부르세여.”
그 말에 유리안의 얼굴이 화악 피어났다.
“응! 아니, 네…….”
“반말해두 괜차나여. 제가 더 어리니까여.”
“정말?”
어렸을 땐 한 살 차이도 크다 보니 유리안이 칼리오페보다 키도 크고 팔다리도 길었다.
그런데도 칼리오페를 보면 왠지 모르게 어리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앉은 자세도 그렇고 특히 설강화처럼 차분하게 내리깐 눈이.
“몇 살이야?”
“다섯 살입니댜. 영애는…….”
“안젤리나! 안젤리나라고 불러.”
“네?”
“내 이름이야. 안젤리나.”
“…….”
그걸 몰라서 되물은 게 아니다. 칼리오페의 표정이 일순 이상해졌다.
‘안젤리나 언니라고 해야 하나. 언니라고 하는 게 맞겠지?’
일곱 살짜리한테 언니라고 부르려니 기분이 참 이상했다. 루시우스와 로베르트와는 경우가 다르다.
“……안젤리나 온니.”
이번에는 불린 사람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라고 불린 적은 많아도 언니라고 불린 적은 처음이었다.
“으응…….”
호칭에 대한 충격이 두 아이 사이를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겨우 대화를 시작했건만 예상치 못한 심적 충격에 두 아이는 다시금 침묵했다.
유리안은 계속 손만 꼼지락거리며 칼리오페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칼리오페는 가만히 앉아 꽃을 바라보았다. 주위의 시선도, 유리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모습이 굉장히 익숙해 보였다.
묵묵히 앉아 있는 자태가 여태까지 보던 또래 아이들과는 달랐다. 곧게 편 등과 살짝 내리깐 눈이 고요한 느낌이었다. 왠지 편안해서 유리안은 저도 모르게 헤실 웃었다.
칼리오페는 유리안의 순수한 웃음이 보기 좋아 생긋 미소 지었다. 저렇게 웃을 줄 아는 아이인데.
뛰놀던 아이들이 유리안과 칼리오페 쪽을 쳐다보았다. 둘 다 눈에 띄는 미모의 소유자였다. 마주 보며 웃고 있으니 시선이 갈 수밖에 없다.
그중 한 아이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아이는 대뜸 소리쳤다.
“너 쌍둥이 동생 죽었다며?”
웃고 있던 유리안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 * *
“우리 어린이 잠깐만.”
칼리오페가 유리안과 아이 사이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예상치 못한 제지에 아이가 눈을 끔뻑였다.
“어, 어린이?”
어린이라니, 들어본 적 없는 호칭이다. 게다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야말로 어린애의 목소리가 아닌가. 그런데 나보고 어린애라고?
“나 어린애 아냐!”
아이가 발끈해서는 외쳤다. 자기 가슴팍에나 겨우 오는 쥐방울만 한 애가 애 취급하니까 더 화가 났다. 누가 누구더러 어린애라는 거야!
“어린애가 아니라구?”
칼리오페는 그저 차분하게 되물었다. 깊은 우물처럼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목소리였다.
이제야 겨우 모임에 참가한 다섯 살짜리 꼬꼬마한테 당한 모욕에 아이가 씩씩 숨을 몰아쉬었다. 비웃음이나 경멸을 당한 것보다 이상하게 더 수치스러웠다.
“당연하지! 애는 너야, 바보!”
“그런데 구런 말을 해?”
조용한 칼리오페의 물음에 아이가 당황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서 허둥지둥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른 아이들이 모두 이쪽을 쳐다보는 걸 깨닫고 얼굴이 붉어졌다.
“무, 물어보는 것뿐이잖아! 내가 뭘 어쨌다고!”
“어린애 맞네.”
“아니야!”
아이가 빽 소리를 질렀다. 난생처음 겪는 일이 당혹스러웠다.
항상 저택에서 왕처럼 자랐다. 고용인들을 상대로 신경질 내고 패악 부려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모두 다 하고 누리며 살아왔다. 부모님이 혼을 내긴 했지만, 결국 원하는 건 모두 제 뜻대로 이뤄졌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대체 뭐지? 왜 내 말이 맞다고 하지 않는 거야?
소리 지르는 자신과 달리 칼리오페는 계속 차분했다. 누가 애같이 굴고 있는지 스스로도 느껴졌다. 그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아이는 주먹에 힘을 주고 버텨 섰다.
난 잘못하지 않았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야! 근데 나한테 왜 이래?
“사실은 알고 있자나. 그런 말 하묜 안 되는 거.”
칼리오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꿰뚫어 보는 시선에 아이의 눈동자가 흠칫 떨렸다.
컸을 때는 몰랐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와 아직 어린애인 오라버니들과 지내보니까 알게 됐다.
아이들도 알고 있다.
이 말을 하면 상대가 기분 나쁠지, 이런 행동을 하면 상대가 곤란할지, 혹은 어떻게 해야 상대가 기뻐할지. 모두 다 알고 있다.
단지 타인의 기분이 자기 자신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뿐이다.
제 기분과 호기심을 위해 알면서도 나쁘게 행동한다. 잘못됐다는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사회성이 덜 길러져서 그런 거지만……. 그래서 이런 모임을 하는 거고.’
칼리오페는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아직 어린애다. 여러 일을 겪으며 시행착오를 겪는 게 정상이다. 다만…….
‘유리안이 마음에 걸리네.’
이 과정에서 유리안이 받은 상처는 별개의 문제니까.
칼리오페는 힐끗 유리안을 살폈다. 아까 웃었던 게 거짓말처럼 표정이 없다.
시선을 느낀 유리안은 반사적으로 칼리오페를 쳐다봤다. 산호빛 눈과 마주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살기가 걷히기 시작한다.
[너 쌍둥이 동생 죽었다며?]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당장 저렇게 지껄인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순식간에 살심이 어린 몸에 솟구쳤다.
유리안은 그 본능에 몸을 맡기려 했다. 그는 그런 식으로밖에 상황을 해결할 줄 몰랐다.
엄마가 그랬으니까.
칼리오페가 가로막지만 않았어도 올라타 주먹질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입을 닥칠 때까지.
그런데 상황이 이상했다.
유리안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상대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칼리오페는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왜 조용하지? 왜 가만히 있는 거야? 때리지도 않았는데.
유리안은 처음으로 폭력이 모든 해결점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그건 기묘한 느낌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리안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자신도 칼리오페처럼 할 수 있나 궁금했다.
당당하게 입을 벌렸지만,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똑같이 되돌려 주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래서 물었다.
“너네 엄마 죽었냐?”
“뭐?”
아이가 금방이라도 달려들듯이 씨근덕대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뱃속을 꽉 채우고 있던 게 조금씩 옅어졌다. 분노가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왜 화를 내?”
아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도 바보가 아니었다. 유리안이 왜 이러는지 금방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호기심이 유리안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도.
수치심이 아이를 짓눌렀다. 이 낯설고 당황스럽고 불편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화를 내야 하나? 아니면……?
아이가 익숙한 화를 선택하려는 순간, 칼리오페가 말했다.
“정말 어린애가 아니라묜, 자신의 무례와 실수를 인정할 수 있게찌.”
소리치려던 아이가 흠칫했다. 멍하니 칼리오페를 바라보자 그녀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안젤리나 온니도 무례를 저지른 사람보다는 자신의 무례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사람이 더 좋을 꼬야. 용서해줄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칼리오페는 힐끔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아이가 대뜸 와서 유리안에게 시비 건 이유는 뻔하다.
‘문제는 상대가 여자애가 아니라 남자애라는 거지만.’
어릴 적 풋사랑의 추억이 꽤 날카롭게 남을 것 같았다.
‘그 정도 벌은 받아야지.’
칼리오페가 속으로 웃었다.
“……너도?”
아이가 칼리오페를 향해 작게 물었다.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하자 재차 묻는다.
“너도 그래?”
“당연하지.”
뭐든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이 더 나은 법이다.
아이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쭈뼛거리며 유리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미,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어색하고 부족한 사과지만 붉어진 얼굴엔 진심이 가득했다. 유리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 숙인 아이를 쳐다봤다. 신기했다.
“진짜로 미안해. 내가 너무 무례했어.”
아이는 아무 반응 없는 게 불안했는지 재차 사과해 왔다.
그 모습을 보고 신기해하는 사람은 유리안만이 아니었다. 아이의 부모, 서모나 부인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단 한 번도 잘못했다는 말을 한 적 없는 아들이 지금 뭐라고……?
강제로 사과하라고 시켜도 절대 잘못했다고 말한 적 없는 아이다. 그런데 미안하다니?! 그것도 자발적으로!
우리 아이가 달라졌다.
* * *
조금 전, 갑자기 들린 큰소리에 부인들은 이야기를 멈추고 아이들 쪽을 돌아봤다.
서모나 부인은 소란의 중심에 있는 제 아들, 힐데르트의 모습에 머리를 붙잡았다. 가서 사고 좀 치지 말랬더니 역시나. 오늘 큰 불행을 겪은 아이가 오랜만에 나오니 제발 좀 시비 걸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이게 무슨 꼴인가.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걸.’
아예 몰랐으면 시비도 걸지 않았을 것이다. 아들이 이 정도까지 말을 안 들을 줄은 미처 몰랐다.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부끄럽고 창피한 것을 떠나 사르니오 부인과 그 딸의 얼굴을 어찌 볼지 모르겠다. 간만에 나왔는데 무참한 꼴을 겪게 한 것 같아 미안했다.
서모나 부인은 힐데르트를 데려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되게 혼을 내고, 안젤리나와 사르니오 부인에게 대신 사과하자. 생각할수록 한숨만 나왔다.
그런데 그때, 못난 아들놈이 먼저 사과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지금 힐데르트가 미안하다고 한 게 맞나? 잘못했다고? 내가 잘 못 들었나? 서모나 부인은 믿기지 않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로 미안해. 내가 너무 무례했어.”
다시금 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심을 가로막듯이.
서모나 부인은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 * *
유리안은 몇 번이고 미안하다 말하는 힐데르트를 바라봤다.
처음엔 때리지도 않았는데 용서를 구하는 모습이 신기했지만, 몇 번 반복되자 흥미가 식었다. 용서해주고 싶은 마음도, 사과를 받아주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냥 이제 귀찮으니 눈앞에서 꺼졌으면 했다.
유리안은 칼리오페를 쳐다봤다.
‘무례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사람이 좋다고 했지.’
그렇다면 사과를 받아주고 용서할 줄 아는 사람도 좋아할 것이다. 안젤리나가 그랬던 것처럼.
칼리오페가 들었다면 사과한다고 모든 것을 용서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겠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유리안은 힐데르트를 향해 빙긋 웃었다.
“괜찮아. 용서해줄게.”
“저, 정말?”
힐데르트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기뻐하는 얼굴을 보며 유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말이지.”
말을 하고 난 뒤, 칼리오페의 반응을 살폈다.
칼리오페는 자신을 바라보는 유리안에게 살짝 미소 지어줬다. 자신이었다면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상대가 어린애라는 것도 잊고 진심으로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런데 유리안은 어떤가.
‘저렇게 착한 아이가 어쩌다가 그런 살인마가 된 건지…….’
칼리오페는 씁쓸한 눈으로 유리안을 쳐다봤다. 저렇게 다정하고 상냥한 아이이니 쌍둥이 누이의 죽음이 더더욱 충격적이었을 거다.
“나는 힐데르트야. 힐데르트 서모나.”
힐데르트는 아이답게 금세 활달해져서 자신을 소개했다.
‘이 아이가 서모나 경이구나.’
칼리오페는 힐데르트를 차근히 살펴봤다. 듣고 난 뒤라 그런지, 컸을 때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칼리오페와도, 두 오라버니와도 그다지 교류가 없는 편이라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힐데르트 서모나는 열아홉에 아프락스 궁에 출입하기 시작한다. 아프락스 궁은 제국의 주요 정책 전략을 결정하는 곳으로, 제국의 실세라 할 수 있다.
서모나 후작의 후계이기에 언젠가는 아프락스 궁에 한 자리를 맡게 될 거라는 게 중론이었지만, 그 나이가 열아홉일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힐데르트의 기용을 두고 말이 많았지만, 그는 탁월한 업무 능력으로 논란을 잠재웠다.
‘과연 그 오만함은 어렸을 때부터 시작됐구나.’
힐데르트는 빠른 출세와 능력만큼이나 거만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래도 아까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을 보니 천성이 나쁜 것은 아닌 듯했다.
“……안젤리나 사르니오야.”
“칼리오페 루스티첼입니댜.”
힐데르트는 칼리오페의 존대에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갑자기 존대를 해?”
혹시 서모나 후작의 아들이라는 걸 알고 뒤늦게 잘 보이려 하는 건가?
그럴지도 몰랐다. 여태까지 그런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어쩐지 조금 실망이다. 칼리오페는 다를 것 같았는데.
“자신의 잘못을 깨닫구 진심으로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져. 굳이 반말을 쓸 이유는 없습니댜.”
사실은 원래 반말을 잘 안 쓰는 것뿐이지만. 게다가 힐데르트가 연상이고. 칼리오페는 대강 변명했다.
“어? 그렇지. —나는 어린애가 아니니까. 잘못도…….”
힐데르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중얼거렸다.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누렸지만, 사람들이 어떤 눈으로 보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시선이 싫어서 더 짜증을 내고 패악을 부렸다. 처음부터 자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접근한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칼리오페처럼 자신에게 화를 내다가 인정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저, 저기…….”
힐데르트는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왠지 부끄러웠다. 하얀 뺨이 살짝 붉어졌다.
“혹시 리페라고—”
“그럼 우리는 가서 차 마시자. 아까 먹어봤는데 다쿠아즈가 바삭하고 맛있더라.”
유리안이 힐데르트의 말을 끊으며 칼리오페의 손을 잡아끌었다.
칼리오페는 집힌 손을 보고 살짝 눈썹을 들어 올렸지만 아무 말 없이 유리안을 따라갔다.
‘뭐, 남자라고 해도 아직 어린애니까. 게다가 여자행세를 하고 있고. 여자친구처럼 어울려도 괜찮겠지.’
뒤늦게 힐데르트가 하려던 말이 신경 쓰여 뒤를 돌아봤지만, 재차 잡아끄는 유리안의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여기 딸기 다쿠아즈랑 마카롱이 맛있어.”
유리안이 접시 위에서 고운 파스텔빛 마카롱을 집어선 내밀었다.
부드러운 연분홍빛 머리칼과 새순 같은 연두색 눈동자, 크고 유순한 눈매.
웬만한 여자애보다 더 귀여운 아이가 마카롱을 앙당그레 쥐고 있는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이렇게 보면 영락없는 여자애인데.’
남자애라는 게 신기했다. 칼리오페는 무심결에 유리안을 쓰다듬어주려 하다가, 아직까지 꼬옥 잡혀있는 손을 깨달았다.
“온니, 우선 손부터 놔주시겠어여?”
“앗! 미, 미안.”
유리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화들짝 놀라서 손을 놓더니 한두 걸음 물러선다. 마카롱을 주는 것도 잊고 손을 꼼지락 꼼지락거리며 힐끔 얼굴을 훔쳐보는 게, 수줍음이 가득하다.
‘아까 전에는 화가 나서 그런지 꽤 당차게 말하더니.’
귀여운 모습에 칼리오페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잘 먹을게여.”
유리안에게 다가가 손에 들린 마카롱을 가져왔다.
유리안은 마카롱을 먹는 칼리오페의 모습을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지켜봤다. 싫어하는 기색 없이 하나를 다 먹는 걸 보고 안심해서는 활짝 웃으며 다쿠아즈를 내밀었다.
“맛있지! 다쿠아즈도 먹어봐. 단 거 좋아해?”
“아, 저는 단 건 별로…….”
그래도 거절하는 건 실례인 것 같아서 칼리오페는 다쿠아즈를 받아들었다.
“그, 그래? 그렇구나…….”
유리안은 실망해서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왠지 머리 위로 강아지 귀가 축 늘어진 환상이 보였다.
“온니는 좋아하시나 봐여?”
“아, 아니야. 나도 안 좋아해. 하나도 안 좋아해. 단 거 싫어!”
“그렇군여.”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모습이 영락없이 ‘나 거짓말 중이에요’였지만, 칼리오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먹지 않으면 유리안마저 안 먹을 것 같았다. 칼리오페는 다쿠아즈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유리안은 그런 칼리오페를 빤히 쳐다봤다.
마카롱과 다쿠아즈 모두 잘 부스러지는 디저트인데, 부스러기 하나 흘리지 않고 깔끔하게 먹는 칼리오페가 신기했다. 오물오물 입을 움직이는 것조차 어쩐지 우아해 보인다.
잘 먹는 모습을 보니 침이 꼴딱 넘어갔다. 유리안은 슬금슬금 접시 위로 손을 가져갔다.
칼리오페는 디저트를 냠냠 먹는 유리안을 보면서 속으로 미소 지었다.
단 걸 그다지 즐기진 않지만 그래도 꽤 맛있었다. 하나만 더 먹을까?
* * *
“……칼리오페, 단 거 안 좋아한다고 했지?”
유리안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칼리오페는 제 손에서 반쯤 사라진 마카롱을 바라봤다. 이게 몇 개째더라……?
정신을 차려보니 접시 위의 디저트를 쉴 틈 없이 비워내고 있었다.
칼리오페의 뺨에 열이 올랐다. 억울했다. 나 단 거 정말 안 좋아하는데. 진짠데.
단 건 어린애들이나 좋아하는 것 아닌가. 칼리오페는 쌉쌀하거나 담백한 디저트를 좋아했다. 절대 어린애 입맛이 아니었다.
‘근데 왜 자꾸 손이 가지.’
칼리오페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눈을 도록도록 굴렸다. 땀이 난다.
“아, 안젤리나 온니가 추천해주셔서 그런지 이건 맛있네여.”
“정말?”
유리안의 눈이 보름달처럼 커지며 환한 빛을 냈다. 칼리오페는 콕콕 찌르는 가슴의 통증을 무시했다.
두 아이는 나란히 앉아 왁팍팍팍 아구아구 달다구리를 축냈다.
* * *
“루스티첼 부인!”
루스티첼 부인은 당황스러운 눈으로 서모나 부인을 봤다. 항상 조용하고 온화했던 서모나 부인이 이렇게 흥분한 건 처음 본다.
“칼리오페를 직접 교육하셨다고 했죠?”
“네, 그래요.”
서모나 부인의 박력에 밀려 루스티첼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우리 아이도 가르쳐 주실 순……. 아, 아무래도 집에 아이들이 있으니 힘드시겠죠.”
“서모나 부인?”
루스티첼 부인의 당황스러운 부름에 서모나 부인은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아, 죄송해요. 칼리오페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어서요.”
흥분한 모습을 보인 게 부끄러웠다.
“저도 깜짝 놀랐어요. 아이들 사이에서 싸움 나면 주먹다짐으로 번지거나 울면서 끝나는데 이렇게 중재를 할 줄 알다니요.”
다른 부인이 난처해 하는 서모나 부인을 보고 대화에 참여했다.
“행동만 어른스러운 게 아니라 속도 깊은 것 같아요.”
“맞아요. 사교 모임에 처음 나왔는데도.”
“보통은 낯설고 어색해서 엄마만 찾는데요.”
“그러게 말이에요. 아직 다섯 살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요.”
다른 부인들도 동조하며 서둘러 끼어들었다.
이 티파티의 실질적인 중심은 서모나 부인이었다. 명문 서모나 후작 가의 안주인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고, 젊었을 적엔 아프락스 궁에서 일한 재원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녀의 인맥을 탐내지 않는 사람은 없다.
친정이 지방 자작 가로 뒤처지긴 하지만, 그 점이 서모나 부인을 더 돋보이게 했다.
그 오만하고 콧대 높은 서모나 후작이 일개 지방 자작 영애에게 첫눈에 반해 쫓아다녔다는 이야기는 당시 사교계에서 화제였다.
사실 서모나 후작 부인 정도 되는 대귀족이 이런 중앙 영세 귀족들의 티파티에 나오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티피티를 주최한 메일린 자작 부인과의 친분과 대 명문가의 안주인답지 않게 소탈한 성격이 아니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부인들은 서모나 부인과 친분을 맺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는 중이었다.
“그렇죠?”
서모나 부인의 질문에 부인들은 모두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스티첼 부인께서 아이에게 정말 좋은 선생님이 되어주셨나 봐요.”
“그러게 말이에요. 첫째인 루시우스도 어렸을 때 정말 어른스러웠죠. 혹시 부인의 천직이 선생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어머나, 곧 루스티첼 부인을 선생님으로 초대하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요?”
서모나 부인이 원하는 게 루스티첼 부인을 예법 선생으로 초대하는 것 같으니 부인들이 서둘러 분위기를 만들었다. 굳이 신경 써서 말을 지어낸 건 아니었다. 부인들 모두 칼리오페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다섯 살짜리 꼬마 레이디가 하는 짓이 여간 앙큼한 게 아니다.
부인들은 다 칼리오페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였다. 당연히 더 관심이 기울 수밖에 없다.
‘루스티첼 부인이 예법 선생이 되면 우리 애도 가르칠 기회가 올지도 몰라.’
칼리오페처럼 의젓해질 아이들을 생각하며 부인들이 루스티첼 부인에게 호의적인 미소를 보냈다.
루스티첼 부인은 그 미소에 웃는 얼굴로 화답했지만 마음이 복잡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 딸아이가 칭찬받는 것까진 기분 좋았다.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관리하는 게 힘들 정도로. 하지만 냇가의 물고기를 잡듯 자신을 그물 안으로 몰아가는 걸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무엇보다 이 그물은 호의로 짜인 그물이었다. 자기 애도 저렇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칼리오페가 마음에 든다는 뜻이니까. 그 호의가 그대로 자신에게까지 옮겨붙은 거다.
‘아무리 그래도 선생님이 되어 달라고 하면 곤란한데.’
아까 예법 선생을 알려달라는 말을 거절했던 것도 있어서 반응이 안 좋을 게 뻔하다.
그때 서모나 부인이 번져가는 분위기에 제동을 걸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하지만, 루스티첼 부인께선 세 아이의 어머니시니 바쁘시겠죠. 그리고 아이들을 먼저 돌보는 게 맞고요.”
서모나 부인도 아이의 엄마였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는 자식 곁에 항상 있고 싶은 부모의 마음을 이해했다. 자기 자식이 중요한 만큼 남의 자식도 중요한 법이다.
‘그래도 이대로는 안 돼.’
그 유명한 카르멜라 부인도 아들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서모나 부인은 반쯤 포기 상태였다. 아이가 건강하고 똑똑한 게 어디냐며 위안했다.
그런데 오늘, 힐데르트가 무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며 사과를 한 것이다!
서모나 부인은 처음으로 본 희망을 놓칠 순 없었다.
“아까 보니 아이들이 정말 재밌게 노는 것 같더라구요. 서로 잘 맞고.”
루스티첼 부인이 힐데르트를 가르쳐서 사과한 게 아니었다. 칼리오페가 아이들 사이를 중재한 거지. 그렇게나 말 안 듣던 아이가 무슨 요술인지 칼리오페의 말은 들었다.
‘둘을 꼭 붙여놔야겠어. 칼리오페가 힐데르트를 변화시킬 수만 있다면…….’
덤으로 루스티첼 부인이 함께 오면 일석이조다. 루스티첼 가에도 꼭 나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서모나 부인은 신분에 따라 친분을 만들진 않았지만, 남들이 자신의 신분을 어떻게 보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결심을 마친 서모나 부인이 루스티첼 부인에게 말했다.
“리페를 우리 집에 꼭 초대하고 싶네요. 오늘 모임이 처음이다 보니 리페도 아직 친구가 어색할 테고, 교류하면 좋을 것 같은데…….”
우리 딸을? 루스티첼 부인이 당황스러운 눈으로 서모나 부인을 바라봤다.
보통이라면 후작 부인의 마음에 든 것을 기뻐했을 거다. 서모나 가와 연을 맺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줄을 섰고, 아이의 미래를 생각해도 상위 가문과 친구가 되는 편이 좋다. 너무 앞서간 생각이지만, 어쩌면, 혹시 잘하면 후작 가의 다음 안주인이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할 수 있다.
거기까지 생각한 루스티첼 부인은 찻잔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우리 딸은 엄마랑 살아야 돼!’
혹시라도 신붓감으로 눈에 들까 봐 걱정이었다.
‘내 딸이어서가 아니라, 우리 리페는 너무 똑똑하고 사랑스럽고 완벽한걸. 누구라도 신붓감으로 탐낼 거야.’
“루시우스와 로베르트도 같이 와도 좋구요.”
루스티첼 부인이 선뜻 대답을 안 하자 서모나 부인이 덧붙였다. 아이들을 전부 초대하는 건 대놓고 가문끼리 친하게 지내자고 하는 거나 다름없다.
지켜보던 부인들이 눈을 굴렸다. 부러운 거야 당연하고, 앞으로 어떻게 관계도가 바뀔지 고민이었다. 아까 욕심이 많다며 루스티첼 부인을 모욕했던 브리젤 부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모두가 주판알을 굴리고 있을 때 루스티첼 부인은 오로지 딸이 신붓감으로 찍히는 것만 고민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청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안 좋고, 두 아들 녀석과 함께면 꽤 낫기야 하겠지만…….’
그러다 서모나 부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일견 간절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에 생각이 멈췄다.
루스티첼 부인도 힐데르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모나 부인의 온화한 성격 역시.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그래, 내 딸이 좀 본받을 만해야지.’
아들들도 같이 보내니 훨씬 안심이었다.
‘솔직히 두 오빠의 방어벽을 뚫을 남자는 세상에 없을 것 같고.’
자기 아들들이지만 어디 문제 있는 것처럼 여동생을 향한 사랑이 대단했다.
루스티첼 부인은 서모나 부인을 향해 미소 지었다.
“저희 아이들도 새 친구가 생기는 걸 기뻐할 거예요.”
서모나 부인의 얼굴이 비 온 뒤의 하늘처럼 맑게 개었다.
* * *
“리페?”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호르세안이 보였다. 칼리오페는 먹던 과자를 내려놓았다.
“안녕하세여, 호세 오라버니.”
칼리오페가 일어나 치마를 넓게 펴며 다소곳이 인사했다. 과자를 와구아구 먹던 아이인지 모를 정도로 완벽한 인사였다.
“어, 나 알아?”
아차.
호르세안을 만난 건 아주 어렸을 때였다. 혼자 뽈뽈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요람에서 눕거나 앉아 지낼 때. 칼리오페 한 번 만져보겠다는 호르세안을 루시우스가 못 하게 해서 투닥거렸다.
보통 아이라면 기억할 리 없었다. 칼리오페는 재빨리 변명을 생각했다.
“그냥……. 루스 오라버니께 말 많이 들었어여. 아까 엘피너스 부인과 함께 계신 것두 보았구여.”
“아, 그랬구나.”
처음 인사할 때 먼저 신상에 관해 언질 받는 게 보통이다. 칼리오페가 엘피너스 부인을 알고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쉽게 수긍하는 호르세안을 보고 칼리오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조심해야지.’
시간을 되돌아오기 전의 일은 곧 미래의 일이다. 칼리오페는 사람들이 모르는 수많은 일들을 알고 있었다. 그중에는 둘러댈 수 없는 일도, 내뱉는 순간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가질 일도 있다.
“리페가 아기일 때 루스티첼 저에 자주 갔었는데. 많이 컸네.”
정확히는 칼리오페를 한 번 본 후로 못 가게 되었다. 루시우스가 얼씬도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도 귀여웠지만, 조금 더 크고 보니 정말 인형처럼 예뻤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차분한 분위기에 기품이 느껴질 정도였다.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까여.”
“어, 그렇지…….”
물론 몇 년이나 지난 일이었지만 어린애가 할 말은 아니었다.
살짝 먼 곳을 응시하는 칼리오페의 눈동자는 많은 시간이 지난 만큼 많은 일이 있었다며 회상하는 것처럼 우수에 젖어 있었다.
‘왜 다섯 살짜리한테서 세상을 다 살아본 사람의 향기가 나는 거지…….’
호르세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친구들 만나보니까 어때?”
칼리오페는 대답 대신 입 끝만 들어 살짝 미소 지었다. 처음 ‘친구들’을 만났다기엔 나잇대가 맞지 않았다. 그냥 다들 귀여웠는데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글쎄여. 오라버니께소눈 친구들 많이 사귀셨나여?”
칼리오페는 별생각 없이 질문에 대한 답을 질문으로 회피한 것이었다. 문제는 이곳 아이들이 다 호르세안보다 한참 어리다는 데 있다. 암만 봐도 호르세안이 ‘친구’를 사귀는 건 무리였다.
칼리오페가 무의식 중에 성인이었던 호르세안을 떠올리며 지금 호르세안이 어리다고 생각했기에 나온 실수였다.
졸지에 발음 새는 친구를 사귀러 티파티에 온 사람이 된 호르세안은 눈을 깜빡였다.
‘얘 설마 지금 날 애 취급하는 건가?’
그 생각이 들자 저절로 입매가 풀어졌다. 시원하고 청량한 웃음이 공기를 울렸다. 애가 애 취급당했다고 은근히 성질을 부리고 있다. 그게 우습고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나는 강제노역 중이라. 알다시피 우리 집에는 애가 많아서 이런 모임에 어머니 혼자 오시기엔 좀 힘들거든.”
알만했다. 호르세안은 밑으로 동생이 다섯이나 있었다. 이런 파티에 나올 만한 나잇대는 셋. 부인 홀로 아이들 셋을 보기엔 힘이 부칠 터였다.
칼리오페가 싱긋 미소 지었다.
“엘피너스 부인께서는 사려 깊은 아들을 두어서 기쁘시겠군여.”
호르세안의 눈이 일순 보름달처럼 커졌다. 보름달은 다음 순간 초승달이 되었다. 얇게 휜 눈이 칼리오페에 대한 흥미로 달빛처럼 반짝였다.
고작 다섯 살 아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게다가 아이의 말은 굉장히 듣기 좋았다. 가족들도, 호르세안도 어느 순간 당연하게 여기던 희생을 이렇게 칭찬해주는 사람은 칼리오페가 처음이었다.
“아, 내 동생들도 널 닮았으면 좋을 텐데. 루시우스가 부럽다. 왜 그렇게 끼고 안 보여주는지 알겠네. 우리 집에 안 올래?”
놀러 오라는 건가. 갑작스러운 초대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여태껏 칼리오페가 받은 초대는 멋들어진 초대장으로 격식을 갖춘 경우뿐이었다.
당황한 칼리오페를 보고 호르세안이 씩 웃으며 덧붙였다.
“내 동생 다섯하고 바꾸자고 할까 봐.”
아예 자기 집에 들어와서 살라는 거였다. 호르세안이 농담한 것을 깨달은 칼리오페가 쿡쿡 웃었다.
“전 저희 오라버니들이 좋아여.”
“나도 좋은 사람이야. 내가 더 잘해줄 수 있는데?”
오빠한테 와라. 호르세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 * *
결 좋은 흑발이 사르락거렸다. 햇빛이 검은 머리칼 위를 뒹굴며 투명하게 빛났다. 미소가 소년의 뺨을 도톰하게 채우고 호박색 눈동자가 꿀처럼 녹아내렸다.
칼리오페는 눈을 깜빡였다.
‘과연 훗날 여자를 여럿 울릴 만하네.’
이전 삶에서 호르세안은 무려 오각관계의 주인공이었는데, 여자 네 명 모두에게 뺨을 맞는 걸로 끝이 났다. 루시우스는 드물게 고소하다는 듯 말을 전했고 그 옆에서 호르세안은 억울하다며 울상이었다.
[글쎄, 난 아무것도 안 했다고! 그냥 가만있었는데 차례로 와서 뺨 때리고 갔다고!]
그때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평화로웠던 때였다.
지금 이 모습을 보니 왜 ‘가만히’ 있다가 뺨을 맞았는지 알 듯했다.
‘아직 어린애가 벌써부터 이러니.’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호르세안과 이런 접점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호르세안이 루스티첼 저에 자주 와서 안면을 일찍 트긴 했다. 하지만 나중에 루시우스가 기사단에 들어가고 나서야 칼리오페와 개인적인 교류를 하게 되었다.
칼리오페로선 목숨을 걸고 루시우스를 도와준 호르세안이 반갑고 고마웠기에 앞당겨진 시기가 기꺼웠다.
“농담이라두 그런 말을 하묜 동생분들이 섭섭해할 거예여.”
“걔들은 좀 섭섭해해도 돼.”
호르세안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말했다. 동생들은 귀여운 만큼 징글징글했다.
찌르는 듯한 시선에 호르세안은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따끔따끔했다. 칼리오페의 옆에 꼭 붙어 있는 꼬맹이가 보였다.
‘사르니오 가의 안젤리나였나?’
쌍둥이 남동생의 죽음을 겪어서인지 천사같이 말갛고 유순한 얼굴에 그늘이 가득했다. 어딘지 음산하다.
‘왠지 모르게 날 노려보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의문을 갖고 다시 보니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빙긋이 웃기까지 한다. 접히는 눈매가 부드럽다.
“그 섭섭함을 어찌 감당하시려구여.”
“윽…….”
칼리오페의 말에 호르세안이 신음했다. 섭섭함을 온몸으로 표현할 동생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피곤했다. 동생들이 알면 이번에야말로 죽을지도 모른다.
호르세안은 생존을 위해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다행히 동생들은 저 멀리 있다.
“아, 정말 루스 녀석이 부럽다. 한 명이라도 좋으니 네 반만큼이라도 얌전했으면…….”
한숨을 삼키며 중얼거리는 호르세안을 향해 칼리오페가 미소 지었다. 말끝마다 루시우스의 이름이 나오는 걸 보니 흐뭇했다. 두 사람의 우정이 보기 좋았다.
“루스 오라버니두 나중에 오신다고 했어여.”
“뭐?!”
호르세안은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검술 시연이 끝나묜 오신다구 했으니 지금쯤 올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데……. 티파티도 이제 끝날 때고. 못 오시는 걸까여?”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검술 시연회는 호르세안도 자주 참석할 테니 사정을 잘 알 것이다.
“……못 오면 좋겠지만 못 올 리가 없지. 못 올 이유가 생기면 그 이유를 없앨 놈이니까.”
혼잣말하듯 작게 중얼거린 호르세안이 서둘러 인사했다.
“만나서 반가웠다, 리페. 조만간 또 보자.”
호르세안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곤 장난스레 씨익 웃으며 덧붙였다.
“우리 집에서.”
한결같은 농담에 칼리오페가 따라 웃었다.
“저두 반가웠어여, 호세 오라버니.”
루시우스가 온다는 말에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리를 피하려는 모습이 이상했지만, 둘만의 사정이 있겠거니 싶었다. 아이들 관계에 너무 끼어드는 것도 좋지 않다는 생각에 캐묻지 않았다.
칼리오페는 호르세안의 손에 손등을 얹기 위해 팔을 뻗었다.
손이 막 닿으려는 순간,
탁!
갑자기 뻗어 나온 손이 호르세안의 손을 쳐냈다.
“아야!”
호르세안이 얻어맞은 손을 부여잡고 신음했다. 보지 않아도 누가 때렸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기시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칼리오페가 한 살일 때 볼 한 번 찔러보려다가 이렇게 얻어맞았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선명했다. 너무 어이없어서 잊을 수 있어야지.
‘하여간 세상에 다시 없을 팔불출 자식.’
“내가, 손대지 말라고 했을 텐데?”
지옥의 무저갱에서 기어 올라오는 듯 살벌한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아니나 다를까, 세상에 다시 없을 팔불출이었다.
호르세안은 울컥했다. 얻어맞은 손이 욱신욱신 저렸다. 한동안 검을 잡을 때 고생할 거다. 오러를 싣진 않았지만 풀파워인 게 분명했다.
‘아니, 손 안 댔다고! 손끝이라도 닿았으면 억울하지도 않지! 손 닿기 전에 쳐냈으면서! 그리고 그건 단순한 인사였다고!’
그런데 왜 가슴 한구석이 콕콕 찔리는 걸까.
내 동생 하라던 기억이 떠오르는 바람에 호르세안은 소리 내어 항변하지 못했다.
“루스 오라버니?”
“리페.”
북풍한설이 멎었다. 언제 살벌했냐는 듯이 루시우스는 부드럽게 동생을 불렀다. 비록 얼굴은 무뚝뚝했지만 은은한 온기가 가득 배어있었다.
“오늘 처음 나와보니 어땠어? 재밌었어?”
“네, 재밌었어여.”
“친구들은 많이 사귀었어? 혹시…….”
‘남자가 있는 건 아니겠지.’
루시우스는 목 끝까지 올라오는 질문을 꿀꺽 삼켰다. 대신 날카로운 눈동자로 칼리오페의 주변을 살폈다.
일단 옆에 꼬옥 붙어 있는 꼬맹이는 치마를 입고 있었다. 루시우스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그 꼬맹이가 치마 두른 남자애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많이는 아니지만여. 그런데…….”
칼리오페가 말을 끌며 주변을 살폈다. 호르세안은 이미 저 멀리 사라졌다. 시선이 마주치자 손을 흔든다.
칼리오페를 따라 시선을 돌린 루시우스는 호르세안을 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사나운 시선에 호르세안이 재빨리 손을 내렸다. 그런 그의 팔에 주렁주렁 동생들이 매달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저 녀석은 무시하도록 해.”
“오라버니, 호세 오라버니는 좋은 친구분이에여. 너무 차갑게 대하지 마세여.”
되돌아오기 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호르세안만큼 진실하고 신의 있는 친구는 없다.
칼리오페의 마음을 모르는 루시우스는 그 말에 오히려 심기가 더 불편해졌다. 왜 저 녀석 편을 드는 거지?
“너 설마……. 아니다.”
루시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제 사랑스러운 동생이 저딴 놈에게 반했을 리 없지. 워낙 친절하고 상냥한 아이이니 그러는 것일 뿐이다. 그게 확실하다.
‘두고 보자, 호세.’
루시우스가 이를 득득 가는 사이, 칼리오페는 유리안을 소개했다.
“오라버니, 이쪽은 사르니오 영애예여. 안젤리나 온니, 제 큰 오라버니세여.”
루시우스는 유리안을 바라봤다.
솜사탕처럼 보드라운 연분홍색 머리칼을 앙증맞게 양옆으로 틀어 올리고, 그 아래로 신록 같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누가 봐도 사랑스럽다며 한숨을 내 쉴 정도로 천사 같은 아이였다.
‘여자애군.’
루시우스는 쉽게 결론을 내렸다. 그 이상의 감상은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딱 하나, 성별뿐이었다.
아까부터 칼리오페의 곁에 붙어 있는 걸 보니 오늘 꽤 친해진 듯했다.
“루시우스 루스티첼이다.”
“안젤리나 사르니오입니다.”
인사를 마친 유리안이 칼리오페에게 딱 달라붙었다. 루시우스의 날카로운 시선 때문인 것 같았다.
‘오라버니가 사실은 참 다정하신 분인데……. 겉으로 보기에 차갑긴 하지.’
미안했던 칼리오페는 유리안의 손을 잡아주었다.
꽉 맞잡은 손을 본 루시우스는 왜인지 모르게 기분이 더러워졌다.
‘……뭐, 여자애니까. 리페도 친구 정도는 필요하겠지.’
훗날 루시우스가 엄청나게 후회하게 되는 생각이었다.
“모처럼 친구를 사귀었는데 내가 계속 방해하는 것 같군. 재밌게 놀고 있어라.”
“오라버니는여?”
“호세도 있으니 괜찮다.”
정확히는 호르세안에게 볼일이 있어서 자리를 뜨려 하는 거지만. 루시우스는 속내를 감추고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왜 호세 오라버니가 있다는 말이 더 불안하게 들리지.’
사나운 미소에 칼리오페는 걱정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다섯 살, 일곱 살 난 여자애들과 있는 게 더 어색하고 불편할 것 같았다.
“그럼 조금 이따 봬여.”
칼리오페는 자신의 오빠가 누군가를 숙청하러 가는 줄도 모르고 미소로 배웅했다.
* * *
루시우스는 곧장 호르세안에게 다가갔다.
흉흉한 기세에 호르세안은 재빨리 도망칠 궁리를 했다. 하지만 자신을 놀이기구로 아는 동생들을 떼어놓는 사이, 이미 루시우스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호르세안 엘피너스.”
음산한 부름에 호르세안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렇게나 저리 가라고 해도 매달리던 동생들이 루시우스를 보고는 꺄아거리며 흩어졌다. 자신도 저렇게 흩어질 수 있으면 원이 없겠다.
“야, 야. 일단 진정하고…….”
“난 지금 진정한 상태야.”
칼날처럼 차갑고 섬뜩한 목소리에 호르세안은 억지로 미소를 만들어 냈다.
“넌 내가 다섯 살짜리 꼬꼬마한테 반할 거 같냐?”
“아니.”
루시우스의 즉답에 호르세안은 억울해졌다.
“그럼 대체 왜!”
“리페는 달라.”
루시우스가 단언했다. 호르세안은 지극히 상식적이라 루시우스의 말이 무슨 뜻인지 따라가지 못했다.
의아한 얼굴에 루시우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한 살이어도, 백 살이어도 반할 수 있어.”
이 미친놈이?!
정상이 아니다. 기겁했던 호르세안은 곧 침착해졌다.
‘이놈이 비정상이라는 건 리페가 한 살일 때부터 알고 있었지.’
새삼스레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비정상적인 잣대로 자신을 판단하는 건 화낼 만했다.
“니가 비정상이라는 건 알겠는데, 제발 나까지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아직 리페가 다섯 살이라는 건 둘째치고, 걘 나보다 일곱 살이나 어리다고.”
훗날 자신이 그 비정상의 범주에 들어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기에 호르세안은 당당했다.
“난 누님들이 좋아.”
“네 더러운 취향을 궁금해한 적은 없다. 그리고 우리 리페한테는 취향 따위 상관없어져.”
“더럽다니! 내 순수한 취향을!”
갑자기 취향을 부정당한 호르세안이 발끈했다. 이 자식은 취향 존중도 모르나! 그리고 애들 좋아하는 것보단 누님들 좋아하는 게 훨씬 깨끗하다고!
“순수하게 더러운 취향 말이지.”
“너무해!”
루시우스는 소리치는 호르세안을 한심하단 눈으로 쳐다봤다.
“진지하게 한 사람만 좋아해 보고 말해라.”
“여성분들은 모두 각자의 매력이 있어. 그걸 모르는 니가 불쌍해.”
“미친놈.”
친구의 상스러운 언행에 호르세안은 극심한 상처를 입었다.
‘미친놈에게 미친놈 소리를 듣다니…….’
호르세안은 심장을 부여잡았다.
뭐, 다 농담이고 루시우스는 그저 자기 동생에게 관심을 갖는 모든 사람이 싫은 것이겠지만. 특히, 혹시라도 훗날 리페와 결혼할 가능성이 있는 남성은 더더욱 경계하는 것이고.
‘내 동생은 나랑 놀아야 해―인가. 유치하긴. 그런 주제에 나보고 한 사람만 진지하게 좋아해 보라니.’
호르세안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루시우스는 그 옆에 앉아 유리안과 놀고 있는 칼리오페를 바라보았다.
“……아직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을 뿐이야.”
침묵 끝에 호르세안이 입을 열었다.
“여러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나는 누굴 좋아해 본 적조차 없다고. 근데 왜 다들 내가 여러 명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호르세안은 억울했다.
슬슬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니, 누가 사귄다니 그런 말들이 퍼졌다. 핑크빛 기류가 퍼지는 가운데, 호르세안은 단 한 번도 특정 여성에게 관심을 준 적도, 관심을 표한 적도 없었다. 그는 자신했다.
“네 문제다.”
루시우스는 친구의 호소에 찬물을 끼얹었다.
“내가 뭘!”
“모르는 게 가장 문제야.”
루시우스는 친구의 얼굴을 쳐다봤다.
사람 생긴 것에 별로 관심 없는 루시우스도 호르세안이 호감을 단번에 살 정도로 잘생겼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어쨌든 넌 리페한테 접근금지다.”
루시우스의 단언에 호르세안이 입을 비죽였다.
‘그렇게까지 감싸고 도니까 더 만나고 싶은걸.’
호르세안은 어린 시절부터 루스티첼 저에 자주 드나들었다. 집안끼리도 가까운 사이인 데다가 둘이 동갑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호르세안은 이 무뚝뚝하고 차가운 친구를 꽤 좋아했다.
하지만 칼리오페를 보고 귀여워한 이후로 루시우스가 집에 못 오게 막았다.
이 팔불출 자식, 하면서 욕을 하긴 했지만 싫다는데 딱히 루스티첼 저에 갈 생각은 없었다. 동생을 다섯이나 둔 덕에 아기라면 질릴 정도로 봤기 때문이다. 동생들과 달리 얌전한 아기가 신기하긴 했지만, 친구의 반대를 무릅쓸 정도는 아니었다.
‘뭐, 가끔 루스 녀석이 짜증 낼 땐 일부러라도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런데 오늘 칼리오페를 보니 그간 못 본 게 살짝 아쉽긴 했다. 그가 놓친 시간들이 궁금했다. 애들은 차고 넘치게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칼리오페에겐 그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어 보였다.
“리페는 조만간 또 보자고 하던걸?”
씨익 웃으면서 루시우스에게 말하자, 동생을 보느라 부드럽게 풀렸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호르세안.”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를 보며 호르세안은 더 진하게 웃었다. 뺨에 볼우물이 깊게 파인다.
“리페도 날 보고 싶다고 하니 조만간 루스티첼 저에 놀러 갈게.”
루시우스가 바로 손을 내질렀다.
“이크.”
예상하고 있던 호르세안은 가볍게 피하며 멀찍이 물러났다. 주변에서 뭉개고 있던 동생들을 달랑달랑 들어 올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곧 보자구, 친구.”
“호르세안!”
차갑게 얼어붙은 낮은 외침이 몰아쳤으나, 호르세안을 막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