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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아기가 된 레이디(Part I. Ádĭtus) (2/41)

Part I. Ádĭtus

Chapter 1. 아기가 된 레이디

“으애?”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외쳤다. 하지만 아무리 다시 말해도 웅앵웅 소리만 나올 뿐이다. 당황해 주변을 살피려 해도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눈을 뜬 건지, 안 뜬 건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는다.

“어머, 무척 건강하신가 봐요. 먼저 울음을 터트리시는 걸 보니까. 이런 경우는 거의 없는데.”

더운물을 옮기던 하녀가 기쁘게 말했다. 보통은 엉덩이를 한 번 철썩 쳐야 울음을 토해 내기 마련이다.

“예쁜 아가씨네요!”

“축하드립니다, 루스티첼 부인!”

칼리오페를 받아든 산파가 산모에게 말했다.

“아가는?”

산모는 잘 나오지도 않는 음성으로 아기부터 찾았다.

“건강하십니다.”

산파가 아기의 손가락, 발가락 개수와 몸 상태를 확인하며 답했다.

산모의 손짓에 산파가 아기를 안겨줬다. 지쳤던 얼굴이 햇살에 물드는 것처럼 한순간에 밝아졌다.

“아가…….”

산모의 얼굴엔 웃음과 울음이 가득했다. 떨리는 손으로 아기의 얼굴을 쓰다듬고 볼에 코를 비볐다.

“어머, 백작님 아직 들어오시면……!”

문이 벌컥 열리며 남자가 허둥지둥 들어왔다. 물소같이 커다란 몸집이 부산스레 움직이자 방이 꽉 차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아이를 안고 있는 아내를 보더니 눈가를 붉혔다. 이런 광경은 몇 번을 봐도 코가 시큰해졌다.

숙련된 아빠인 백작은 아기를 만져보고 싶은 걸 참고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들어오면서 소독은 했지만 불안했다.

“고생했소, 부인. 아이는?”

“건강해요. 우리 예쁜 딸이에요.”

“딸이라니……!”

아들만 둘 있는 아들 부자 집안에 드디어 딸이 태어났다. 백작은 첫째부터 딸을 원했다.

“고맙소, 고마워.”

감격한 백작이 아내의 뺨에 연거푸 키스했다.

“응애!”

아기가 빽빽 울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부부의 눈가가 촉촉했다. 몇 번을 봐도 자식의 탄생은 경이로웠다. 감동은 절대 줄어들지 않는다.

행복하고 다정한 백작 부부의 모습에 지켜보던 사람들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울음소리가 아주 맑고 청량하구나. 이렇게 좋은 목소리는 처음 들어본다.”

아기 울음소리가 좋아 봤자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아무도 백작을 한심하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백작가 사람들 모두 이 막둥이를 아끼며 기다려왔으니까.

목소리뿐만 아니라 작고 앙증맞은 얼굴이며 손가락은 물론 발가락, 아직 뜨지도 않은 눈동자까지 안 예쁜 구석이 없었다.

“그래, 네 이름을 칼리오페로 하자.”

“칼리오페. 좋은 이름이네요.”

방 안에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칼리오페가 다시 태어난 날이었다.

* * *

칼리오페는 다시 태어난 지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 겨우 자신의 상황을 깨달았다.

‘시간을 되돌아왔어.’

대체 어떻게? 맨 마지막 순간에 봤던 여자가 떠올랐다.

[선물을 줄 테니—]

이 삶이 그녀가 준 선물인가? 그게 가능한가?

아니, 가능하니까 지금 이렇게 요람에 누워있겠지.

‘도대체……. 사람은 아니겠지? 신? 악마?’

[—조금 더 그 목소리를 들려주렴.]

목소리를 더 듣고 싶다고 시간을 되돌리다니. 황당했다. 칼리오페는 여태껏 누군가에게 노래를 잘 부른다고 칭찬받아본 적이 없다.

‘애초에 다른 사람 앞에서 불러본 적도 없지만.’

교양으로 성가를 배운 것도 아니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칼리오페는 그다지 신실한 신도가 아니었고, 앞에 나서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다.

‘돌아오기 전, 미래를 생각하면 앞으로도 독신자가 될 리는 없겠지.’

칼리오페가 염세적으로 생각했다. 댕그란 두 눈이 가느스름해지고 입이 비쭉일 때마다 통통한 볼살이 흔들렸다.

“어머, 아가씨 졸리신가 보다.”

“…….”

감히 신전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중인데 졸리냐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자장, 자장.”

유모가 칼리오페의 배를 토닥였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데 주변이 도와주질 않는다.

‘에휴, 아기에겐 프라이버시가 없어.’

유모의 손길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마냥 신전을 무시하기엔 신 같은 권능을 발휘한 여자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는 칼리오페가 알고 있는 신들과 달랐다.

칼리오페는 눈을 굴려 천장을 바라봤다. 모빌이 흔들리며 색색이 새가 구름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아무리 고민해 봤자 나오는 답은 없었다. 삶은 다시 주어졌다.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해.’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나가니 급격히 졸렸다. 눈꺼풀이 절로 감기기 시작한다.

칼리오페는 73번째 잠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그녀는 73연패를 달성했다. 신기록이었다.

* * *

“와, 작아. 진짜 작다. 이 손 좀 봐.”

“……작네.”

“그치? 손톱까지 다 있는 게 신기해.”

속닥속닥. 자그마한 목소리에 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칭얼칭얼 잠투정을 했다.

소곤거리던 목소리가 합, 가라앉는다. 조용한 평화가 찾아왔다. 칼리오페의 미간에 잡혔던 주름이 살살 펴진다.

그리고 1초, 2초, 3초.

“다시 잠들었다. 너무 귀여워! 나 닮았나 봐.”

“거울 좀 보고 말해라.”

“내가 어때서! 나만 한 인물이 어딨다구! 아하, 질투하는 거야? 리페가 나랑 똑같은 눈동자 색을 가졌으니까.”

“상대할 가치가 없군.”

밤하늘 같은 남보랏빛 머리칼의 남자아이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작게 덧붙였다.

“……리페의 머리칼은 나와 같은 색이다.”

그 말에 상대의 산호빛 눈이 크게 떠졌다. 항상 얼음같이 차갑던 형님이 이런 유치한 말이라니?!

“응애!”

끊이지 않는 목소리에 결국 칼리오페가 깨어났다. 본능적으로 울음을 터트리자 요람을 둘러싼 아이들이 어쩔 줄 몰라 한다.

“루시우스 형 때문에 깼잖아!”

“네가 시끄러웠기 때문이지.”

루시우스는 난감한 얼굴로 칼리오페를 쳐다봤다. 본인이 아기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다들 무서워하면서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빼애애액 울음을 터트렸다.

그렇다고 동생 로베르트에게 맡기자니 더 불안했다. 저 장난기 많은 성격에 애를 울렸으면 울렸지, 그치게 할 것 같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나마 칼리오페에게 손을 뻗었다. 언제 울음이 거세질까 꽤 긴장한 상태였지만 무표정하니 냉막한 얼굴은 그대로였다.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어르고 달래는 말도 않고 배만 토닥이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웅…….”

칼리오페가 바로 울음을 그쳤다. 꼭 오빠의 손길에 안심한 것처럼.

루시우스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멈칫했던 손은 이내 다시 움직였다. 토닥토닥, 아까보다 훨씬 편안한 손길이 일정한 리듬을 만들었다.

칼리오페는 언제 울었냐는 듯 루시우스를 보고 방긋방긋 웃었다. 포동포동한 뺨이 찐빵처럼 부풀었다.

귀엽다.

항상 서늘했던 루시우스의 눈동자에 따스함이 깃들었다. 얼굴에 살짝 온기가 올라온 게 제법 제 나이처럼 보였다.

칼리오페는 그런 루시우스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얼음 기사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차가웠던 오라버니가 맞나 싶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울고 있다는 걸 깨닫고 울음을 멈췄는데 루시우스가 눈앞에 있어서 깜짝 놀랐다. 반갑고 애틋한 마음을 웃음으로 대신했다.

며칠 전까지 가족만 보면 눈물을 흘렸다. 그리움과 반가움, 과거에 가족을 잃었던 기억이 엉켜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평생 다시 볼 수 있을 줄 몰랐다. 가족이 없는 삶이란 뱃속이 뻥 뚫린 채 사는 것과 같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구멍은 도저히 메워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결코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칼리오페는 가족을 가슴에 묻어두지도 못한 채 살았다.

사람을 보기만 하면 우는 자신에 난감해하다 못해 걱정하는 가족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떻게 다시 만난 가족들인데, 안 좋은 기억은 쌓고 싶지 않았다. 좋은 시간만으로도 부족하다.

“리페! 여기 봐라!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잘생기고 우리 리페를 가장 사랑하는 오빠가 있네!”

로베르트가 조막만 한 손을 움직여 까꿍까꿍 얼굴을 가렸다. 칼리오페는 그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로베르트는 동생에게 귀여움받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뿌듯해했다.

“나 보고 웃었어!”

“착각이다.”

“아니야! 나 보고 웃은 거야!”

루시우스는 그 말을 무시하고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또 방긋 웃는다. 그 웃음에 옮아 그의 입매도 느슨해졌다.

“도련님들, 그렇게 소리 지르면 아가씨 놀라요.”

유모가 방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합, 하고 입을 막은 로베르트가 칼리오페를 살폈다. 그 모습에 유모가 몰래 웃었다. 말 안 듣는 사고뭉치 둘째 도련님이 저렇게 얌전해지다니.

“아가씨, 맘마 드실 시간이에요.”

유모가 칼리오페를 안아 들고 방을 나섰다. 백작 부인은 소중한 딸에게 직접 젖을 먹이길 원했다. 귀족 부인으로서는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졸졸졸 오빠들이 유모의 뒤를 쫓았다. 막둥이가 놀란다는 말에 살금살금 발걸음 소리도 죽인 채.

늘 조용한 첫째야 그렇다 치고, 둘째의 변화에 백작 가 사람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백작님께 아무리 혼나도 우당탕탕 복도를 질주하던 꼬마 도련님이 아니던가.

“우리 리페 왔구나. 오빠들도 같이 왔네?”

서류를 보던 루스티첼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칼리오페를 안아 들었다. 배고프다고 보채지도 않는 딸이 대견하면서도 걱정이었다. 그래도 잘 먹으니 다행이다.

젖을 다 먹인 후에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칼리오페는 최대한 참으려고 했다. 싫어, 싫어.

하지만 벌써 반응이 오기 시작한다. 눈동자가 울망울망해졌다.

“항상 오래 걸리네.”

“소화 기관이 약하신가 걱정이에요.”

‘아냐, 그게 아냐.’

칼리오페는 고개를 저었다. 젓는다고 해봤자 엄마의 어깨에 포실하고 통통한 뺨이 한번 꾹 눌릴 뿐이다. 칼리오페는 힘껏 저항했지만 엄마 품은 포근했고 등을 위로 쓰는 손길은 세 아이의 엄마답게 숙련됐다.

결국 칼리오페는 굴복했다.

“트림했어!”

로베르트의 외침에 칼리오페의 얼굴이 화르르 불타기 시작했다.

“우유 냄새 귀여워!”

종종거리며 옆에서 귀엽다, 귀엽다 연발할수록 칼리오페는 새빨개졌다. 품위 없이 트림한 것도 창피한데 하고서 칭찬까지 받다니. 일생의 수치였다.

그런 칼리오페의 속도 모르고 엄마는 좋아하는 로베르트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렇게 리페가 좋니?”

“하늘만큼 땅만큼!”

일곱 살 난 아들이 짧은 팔을 쫙 펼치며 가슴을 들썩이는 모습에 루스티첼 부인이 후후, 웃었다.

“엄마, 저도 리페 한 번만 안아보면 안 돼요?”

“안돼.”

“왜요! 나두 안을래! 나도 안을 거야!”

“리페 다칠 수도 있어.”

그 말에 로베르트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한 번 떼쓰기 시작하면 아버지에게 엉덩이를 두드려 맞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 둘째가 웬일인지.

로베르트는 더 이상 조르진 않았지만 입이 오리입처럼 툭 튀어나왔다. 루스티첼 부인이 그런 아들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로벨이 밥 잘 먹고 힘 세지면……. 그래, 요즘 상단 베기를 수련하고 있다지? 하단 베기를 마스터하면 안게 해줄게. 우리 둘째는 튼튼하니까 곧 할 수 있을 거야.”

“정말? 그럼 나 지인짜 열심히 할 거예요! 어서 리페 안아보게!”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첫째가 큼큼, 헛기침했다.

“저는 하단 베기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 이어 베기랑 전환 베기도.”

항상 냉정하고 과묵한 첫째답지 않은 말에 루스티첼 부인이 눈을 깜빡였다.

“어, 어어, 그렇지, 참. ……리페 안아볼래?”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묻자 루시우스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조심해서. 옳지.”

“형만!”

로베르트가 발을 굴렀다. 들어갔던 입이 다시 튀어나왔다.

그런 그를 보고 루시우스가 피식 웃었다. 의기양양하게 칼리오페를 안고서.

“우, 우우! 내가 한 달 안에 하단 베기 마스터한다!”

“지금처럼 농땡이 부리면 힘들걸.”

로베르트는 루스티첼 가의 적통답게 검술에 재능이 뛰어났다. 그런데도 다른 무가 아이들처럼 상단 베기를 연습하고 있는 건 순전히 그가 게을러서였다.

“내가 언제!”

“리페 놀란다. 소리 지르지 마.”

루시우스의 말에 분해서 바들바들 떨면서도 로베르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 둘째는 참 멋진 오빠네.”

루스티첼 부인이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생 생겼다고 그 장난기 많은 둘째가 이렇게 얌전해지다니. 백작가의 사고뭉치였는데. 보면서도 믿기질 않았다.

슬슬 루시우스의 팔이 저리겠다 싶어서 루스티첼 부인이 손을 내밀었다.

“무겁지 않니? 이만 엄마에게 주렴.”

“안 무겁습니다.”

칼같이 대답한 루시우스가 혹시라도 뺏길까 싶어 엄마에게 등까지 팩 돌렸다.

‘내 딸인데, 저놈이!’

루스티첼 부인은 잠시 아들을 상대로 불꽃을 튀겼다가 진정했다.

“여기 다 있었네.”

방문이 열리고 물소같이 커다란 사내가 들어왔다. 루스티첼 백작이었다.

“오셨어요.”

칼리오페를 본 백작이 우뚝 굳었다.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아버지를 보고 칼리오페가 입을 오물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아버지는 항상 멀찍이 서서 거리를 유지했다.

전생에서도 살갑거나 다감한 분은 아니었다. 아내에겐 정중했지만 자식들에겐 엄격하고 고지식했다. 원리원칙에 대한 부분은 아내에게도 꺾지 않았다.

‘어렸을 때도 한 번 안겨본 기억이 없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 아기니까.’

칼리오페가 용기 내어 아버지께 손을 뻗었다. 지난 생에선 안아달라 먼저 손 뻗어본 적 없어서 낯설고 어색했다.

‘그래도 정말 많이 보고 싶었으니까.’

돌아가신 후에 몇 번이나 후회했다. 조금 더 잘해드릴걸, 사랑한다고 말할걸, 함께 시간을 보내볼걸.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하면 늦는다는 말을 또다시 그렇게 뼈저리도록 느끼고 싶진 않았다.

“앙아이.”

칼리오페의 부름에 백작이 움찔 몸을 굳혔다. 단풍잎 같은 손이 자신을 향해 꼬물꼬물거린다.

백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위풍당당한 풍채 탓에 아기들은 그를 보기만 하면 항상 얼굴이 시뻘게질 때까지 울기만 했다. 그 차가운 첫째와 장난기 많고 스스럼없는 둘째가 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아기와 거리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앙아!”

칼리오페가 재차 아빠를 불렀다.

백작은 홀린 듯이 한 걸음 다가갔다가, 흠칫해서 멈춰 섰다. 커다란 덩치에도, 레드불이라는 별명에도 안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남편의 모습에 루스티첼 부인이 후후, 웃었다.

“리페가 아빠 보고 싶나 봐요. 여보, 어서 안아줘요.”

겨우겨우 백작이 삐걱거리며 딸아이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있어도 울지 않고 빵긋빵긋 웃기만 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자 검지를 꼬옥 붙잡으며 올려다본다. 커다란 산호빛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렀다. 무서워하는 기색도 없이.

“우리 리페 한 번 안아볼까.”

저도 모르게 어르는 목소리가 나왔다. 자신이 이런 목소리도 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칼리오페를 받아들려는데 루시우스가 뒷걸음질 치며 몸을 돌렸다.

“루시우스?”

말랑말랑하게 풀렸던 백작의 목소리가 다시 딱딱해졌다.

“피곤하실 테니 제가 안고 있겠습니다.”

“안 피곤하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몸 상태를 객관적으로 점검하는 것 역시 기사의 덕목이라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루시우스가 차분히 답했다. 두 부자 사이에 불꽃 튀는 신경전이 펼쳐졌다.

* * *

칼리오페는 평화로운(?) 가족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막 구운 빵처럼 가슴이 따뜻하게 부풀어 올랐다.

우리 가족이 이렇게 나를 사랑했구나. 아꼈구나. 칼리오페는 새삼스러운 기분이었다.

기억과는 다른 가족들의 모습도 신기했다.

작은 오라버니는 능글맞은 성격이었는데 이렇게 큰 오라버니께 당했을 줄이야. 큰 오라버니도 은근히 유치한 면이 있다. 두 오라버니의 아이다운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아버지는 항상 엄격하고 완고하셨는데 사실 어떻게 대할지 몰랐던 거구나. 어머니는 정말 그대로셨고.

내가 아기였을 땐 이랬구나.

기억하지도 못한 시절의 모습이었다. 칼리오페는 가슴 속에 현재를 꾹꾹 눌러 담았다. 커서도 가족과의 추억은 별로 많지 않아서 더 소중했다. 칼리오페는 살갑게 애교 많은 성격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전부 일찍 죽었으니까.’

사고나 질병 때문이 아니었다. 모두 살해당했다. 범인이 누구인지조차 모른다. 당연히 죗값을 치르는 자는 없었다. 죗값을 치렀다 해도 그 상실감이 줄어들진 않았겠지만.

‘이번엔 절대 그렇게 두지 않겠어.’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내가 반드시 지켜낼 거야.’

결심을 하자 급격히 졸려왔다. 칼리오페는 눈을 부릅뜨고 가족과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려고 했다.

하지만 846번째 패배를 맛볼 뿐이었다.

* * *

‘으윽……. 안돼. 너무 강력해.’

4개월 차. 칼리오페는 우주의 법칙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녀는 힘겹게 손을 내뻗었다. 아직 미성숙한 몸이 바들바들 떨며 버겁게 움직이다가, 툭 힘이 빠졌다.

칼리오페는 숨을 몰아쉬었다.

‘안 되겠어.’

팔다리가 제 뜻대로 움직이질 않으니 모든 것이 어렵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머리가 너무 무거워…….’

인간이라면, 아니, 이 땅 위의 존재라면 모두 얽매이는 대우주의 법칙.

그녀는 중력과 싸우고 있었다.

뒤집기를 하기 위해.

‘이렇게 무너질 순 없어.’

고작 육체의 시름에 굴복할 순 없다. 머리가 아무리 무거워 봤자 얼마나 무겁겠는가. 게다가 이미 한 번 극복해낸 적 있는 무게다.

칼리오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깊은숨이 색색거리며 작은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그 소리를 듣고 유모가 다가와 요람을 들여다봤다. 칼리오페는 힘차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무래도 혼자 애쓰는 것보다 지켜보며 응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더 힘 나는 법이다.

‘힘을 내자. 유모도 응원하잖아.’

“우리 아가씨 졸리신가 보네.”

숨이 깊은 걸 보니 확실했다. 유모가 칼리오페의 배를 토닥이기 시작했다.

칼리오페의 몸에서 힘이 쫙 빠졌다. 애써 다잡은 호흡이 어그러졌다. 모든 의욕을 꺾어놓는 강력한 한방이었다.

“우…….”

서러웠다. 이 힘겨운 싸움을 알아주는 이 하나 없다. 원래 인생은 외로운 법이라지만.

조막만 한 손이 유모의 손을 꾹 밀어냈다.

“어머?”

유모가 놀라서 손을 거뒀다. 얌전한 막내 아가씨가 이렇게 싫다는 표시를 한 건 처음이었다. 뭐가 안 좋나 살피니 만두같이 포실한 얼굴이 전에 없이 심각했다.

“왜 그러실까.”

칼리오페는 자신을 어르려는 손을 피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런 일로 좌절해선 안 돼. 노력 앞에 시련은 언제든 찾아오는 법.’

유모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겠지만 인생에서는 언제든 의도치 않은 방해를 받기 마련이다. 칼리오페는 다시 심기일전해서 손을 뻗었다.

“어머, 아가씨!”

칼리오페가 무얼 하려는지 눈치챈 유모가 소리를 높였다. 유모의 손에도 덩달아 힘이 들어갔다.

몸을 반쯤 뒤집은 칼리오페가 숨을 골랐다. 반까지는 그럭저럭 쉽다. 진정한 승부는 이제부터다.

칼리오페는 비장하게 고개를 돌렸다. 물론 고개는 잘 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서 굴복할 수 없어.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짧은 팔과 다리가 파닥파닥 움직였다. 호빵 같은 볼이 붉게 달아오르고 몸이 오뚝이처럼 왔다 갔다 했다.

“아가씨, 조금만 더! 거의 다 됐어요!”

“우아으!”

유모의 응원을 받은 칼리오페가 기합을 내지르며 마지막 남은 힘을 쏟아부었다.

“세상에! 아가씨!”

성공이다. 칼리오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수많은 도전과 사투 끝에 얻어낸 값진 승리이자, 외압—중력—에도 굴복하지 않는 인간 존엄성의 증거이며, 대자연에 도전하는 인간의 진취적 자아 발현이었다.

뿌듯하다. 칼리오페는 자신이 거머쥔 성공에 심취했다.

“뒤집기를 하시다니 정말 장하세요.”

유모가 칼리오페를 안아 들며 뺨에 입을 맞췄다. 함께 기쁨을 나누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칼리오페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꼬르륵.

기쁨의 순간을 와장창 깨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오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런, 아가씨 배고프셨구나. 힘을 많이 쓰셔서 그러나.”

평소 칼리오페의 식이 주기를 보면 다소 일렀다. 유모는 하녀를 부르고 칼리오페를 의자에 앉혔다.

“자, 오늘은 처음으로 이유식을 먹어볼 거예요. 입에 맞으셔야 할 텐데.”

이유식? 칼리오페의 눈이 반짝였다. 드디어 밥 같은 걸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잊혔다.

곧 하녀가 이유식을 가져왔다. 거의 물이나 다름없는 수프였다. 유모는 온도를 확인하고 이유식을 떴다.

“자, 아~ 해보세요.”

칼리오페는 기쁜 마음으로 입을 벌렸다.

“음냠냠냠냠.”

유모가 칼리오페를 보며 입을 오물거렸다. 따라 하라는 뜻이 역력해서 난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신은 엄연한 성인이다. 쩝쩝거리면서 먹는 건 사양이다. 게다가 미음이라 씹을 것도 없어서 그냥 삼키면 됐다. 애초에 치아도 나지 않았고.

“음냠냠냠.”

유모가 재차 입을 오물거렸다. 눈이 반짝거렸다. 기묘한 열망이 유모의 눈동자에 가득했다.

아니, 왜 저렇게 집착하는 거지. 칼리오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이유식을 삼켰다. 유모가 한 숟갈 더 내밀었다.

“음냠냠냠냠.”

“…….”

유모의 눈동자에 깃든 열기는 사그라들 기미가 안 보였다.

결국 칼리오페는 따라 했다.

음냠냠냠냠. 차마 소리까지 내진 못했다. 입을 오물거릴 때마다 볼살이 탱글탱글 흔들렸다.

“으…….”

유모가 신음했다. 이걸 보고 싶었다. 그녀는 못 참고 칼리오페의 볼을 매만졌다.

‘대체 왜 이러지.’

유모의 생각을 모르는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행히 유모는 더 이상 ‘음냠냠냠’을 요구하지 않았다.

“맛있어요?”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별로 맛있진 않다. 살짝 고소함이 느껴질 뿐, 간도 없어서 물이랑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밥을 먹는다는 느낌이 좋았다.

“옳지, 우리 아가씨는 삼키는 것도 잘하시네.”

납죽납죽 잘 받아먹는 모습에 유모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칼리오페 위의 두 도련님들에게 이유식을 먹일 땐 무척 애를 먹었다. 첫째 루시우스 도련님은 입맛이 까다로운 데다가 잘 먹질 않아서 따라다니며 먹여야 했다. 둘째 로베르트 도련님은 잘 먹는 편이었는데, 문제는 이유식보다 다른 걸 잘 먹는 게 탈이었다. 자기 손가락부터 시작해서 의자, 턱받이까지. 너무 산만해서 정작 먹어야 할 걸 먹지 않았다.

그때를 생각하니 그냥 얌전히 앉아 새끼 새처럼 짹짹 입만 벌리는 칼리오페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다.

“아이구, 우리 아가씨 턱받이를 턱받이로 쓰시고 장해요.”

뜬금없는 칭찬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했다. 턱받이를 턱받이로 쓰지 대체 뭐로 쓴단 말인가. 아이를 칭찬하는 게 아무리 교육에 좋다 해도 이런 거로까지 칭찬하면 교만해진다.

“턱받이 빨지도 않고, 세수하지도 않고. 어쩜 이렇게 똑똑하실까.”

기분이 묘했다. 아기의 모습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거로 칭찬받으면 내가 뭐가 돼……. 나에 대한 기대치가 얼마나 낮은 거지.’

그래도 사소한 것에도 칭찬받는 지금의 일상이 싫은 건 아니었다. 칼리오페는 민망한 기분으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 천재?”

“케켁!”

“앗, 아가씨!”

결국 사레까지 들렸다. 유모가 서둘러 등을 토닥였다.

“너무 많이 드셨나.”

그런 게 아니야……. 칼리오페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팔불출이 너무 심하면 당하는 사람이 괴롭다.

기침이 멎고 나서도 칼리오페는 유모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부끄러웠다.

두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것은 기침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 * *

“얘가 리페야?”

칼리오페가 어느 정도 트림에 익숙해졌을 때였다. 갑자기 요람 위로 낯선 머리통이 쏙 올라왔다.

“네 말대로 진짜 귀엽네.”

결 좋은 흑발, 호박색 눈동자, 살짝 처진 눈.

어린데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게 커서 한 인물 할 법했다. 거기다 루시우스에게 서슴없는 말투까지.

칼리오페는 어렵지 않게 기억 속에서 한 사람을 떠올렸다.

‘호세 오라버니.’

호르세안 엘피너스.

엘피너스 백작가의 장남이자 루시우스의 절친한 친우다.

‘그리고 루스 오라버니의 죽음을 파헤치려다가…….’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증거를 잡았다는 소식과 함께.

이번에는 호르세안도 죽지 않게 할 것이다. 그러려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아기의 몸이어서인지 생각이 힘들었다. 툭하면 졸리니까.

“안 울어서 좋다. 내 동생들은 정말…….”

호르세안이 진절머리를 쳤다. 자꾸 루스티첼 가에 놀러 오는 이유 중엔 동생들에게서 도망치는 것도 있다. 동생들과 놀아주는 게 검술 수련보다 더 힘드니 말 다 했지.

“네 오빠랑 다르게 밝고 명랑하게 자라라.”

호르세안이 장난스레 말했다. 칼리오페는 그 웃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린 소년의 얼굴은 파릇하니 싱그러웠다. 창창한 꿈으로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 어린 나이에 저물어서는 안 됐다.

‘고마워요, 정말로. 이번에는 내가 지켜줄게요.’

호르세안은 어린 아기 같지 않은 깊은 시선에 놀랐다. 다섯 명의 동생을 뒀지만, 이렇게 고요히 사람을 응시하는 아기는 처음 본다.

눈빛에 홀린 듯 시선을 맞추다가 그 밑의 불룩한 게 눈에 들어왔다.

‘이건……!’

환상적인 볼살이었다. 말랑말랑해 보이는 토실한 뺨이 만지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잡아당기고 싶다. 잡아당기고 싶다! 호르세안이 칼리오페에게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탁! 뻗기 무섭게 루시우스가 손을 쳐냈다.

“아야!”

호르세안이 인상을 찡그리며 루시우스를 쳐다봤다. 하지만 한겨울의 서릿발 같은 친구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만진다고 닳냐? 무슨 내가 병균처럼…….”

호르세안은 억울했다. 손이 얼얼한 게 분명 힘을 실어 친 거다.

“닳아.”

단호한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루시우스는 칼리오페를 조심히 들어 품에 안았다. 그리고 보란 듯이 토실한 뺨을 쿡쿡 찔렀다.

‘헐…….’

호르세안은 입을 떡 벌렸다. 루시우스가 이러는 건 처음 본다. 이건 집에 있는 다섯 살짜리 동생이나 할 짓이었다. 황당한 와중에 말캉거리며 찹쌀떡처럼 늘어나는 뺨을 보니 손이 허전했다.

‘나도 만지고 싶어!’

금세 뺨으로 관심을 돌린 호르세안과 달리 칼리오페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큰 오라버니가 생각보다 아이다운 면모가 있다는 거야 진작 깨달았지만, 이건…….’

기억 속의 루시우스는 항상 서늘했다. 감정표현도 적고 표정 변화도 거의 없었다.

“뭐야, 나도 안을래!”

“넌 아직 하단 베기를 마스터하지 못했잖아. 안는 건 무리다.”

“곧 할 수 있어! 요즘 진짜 열심히 하고 있다구! 두고 봐!”

어느새 들어온 로베르트까지 합세해서 투닥투닥거리는 걸 보니 결국 흐뭇한 웃음이 나왔다.

‘다들 아직 애구나. 내가 잘 보살펴 줘야겠어.’

“댜아! 빠!”

하지만 이도 안 난 상태에선 웅앵웅거릴 뿐이었다.

칼리오페는 입을 다물었다. 답답한 건 둘째치고 품위 없게 댜뺘댜뺘만 하는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아, 귀여워!”

속을 모르는 로베르트가 칼리오페의 뺨에 뽀뽀하며 외쳤다. 칼리오페는 흠칫하다가 결국 묵묵히 뽀뽀세례를 받아냈다. 정신이 성인인지라 이런 과한 스킨십은 다소 힘들었다. 로베르트 정도의 어린아이는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

과거 칼리오페는 도도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스킨십과 감정표현에 인색했다. 그러니 아무리 아기가 됐다고 해도 어색할 수밖에.

칼리오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여러 의미로 어서 커야 할 듯하다.

* * *

“역시 네가 생각해도 리페가 잘 안 우는 거 같지?”

방에서 나온 루시우스가 호르세안에게 물었다.

“엄청 조용한 성격인 것 같던데? 왜?”

“조용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울질 않아. 옹알이만 하지.”

처음에는 보채지 않는 얌전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정도가 너무 심한 게 문제였다.

“그래도 뭐 문제 있어 보이진 않던데?”

호르세안이 턱을 문질렀다. 확실히 칼리오페는 동생들 때와 다르긴 달랐다.

“부모님께선 뭐라셔?”

“요람에서 나가려 하지도 않고 장난감에도 별 반응 없고 모빌에도 손 한 번 뻗지 않아서 걱정된대.”

백작 부부가 아직 어린 아들들 앞에서 그런 말을 했을 리 없다. 루시우스와 로베르트가 지나가다 엿들은 이야기다. 그전까지는 아기에 대해 잘 몰랐으니 이상하단 생각도 안 했는데 듣고 나니 걱정됐다.

“의사는?”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진 않대. 하지만 아기는 제대로 진찰하기 힘드니까.”

“그럼 일단 지켜보는 수밖에 없네.”

“그렇지…….”

호르세안은 신기한 눈으로 루시우스를 바라봤다.

동생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워낙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놈이라 이렇게 신경 쓰는 게 놀라웠다.

“뭐, 걱정 마. 크면 괜찮아질 거야. 에피니도 아기 때 무슨 문제 있는 줄 알았어. 걘 너무 활발해서였지만……. 말이 활발하다는 거지, 그땐 전쟁이 따로 없었어.”

호르세안이 진저리쳤다. 이제 세 살 된 동생은 정말 여러 의미로 비범했다.

“그래, 그렇겠지.”

“맞아. 리페는 건강할 거야. 왜 걱정하는 거야.”

로베르트가 부우 볼을 부풀리곤 말을 이었다.

“엄마가 그랬어. 크게 반응이 없어도 눈동자는 잘 따라오고 손을 주면 잘 쥔다고. 눈이 마주치면 방긋방긋 웃고……. 얼마나 귀여운데. 천사가 따로 없어.”

“천사보다 더 귀엽다.”

“천사보다 더더 훨씬 많이 귀여워.”

“비교 불가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호르세안은 짜게 식은 눈으로 팔불출 형제를 바라봤다.

‘내가 보기엔 너네가 문제 있는 것 같은데…….’

그는 나오려는 말을 꾹 눌렀다.

“뭐, 반응을 유도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리페에게 계속 말 걸어 봐. 괜찮겠지.”

그래도 동생 다섯을 둔 맏이라고 호르세안이 조언했다.

“응. 그리고 리페가 어떻든 사랑스러운 우리 동생이니까.”

로베르트가 비장하게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루시우스는 한 살 어린 동생을 돌아봤다.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는데도 형제 관계는 친밀하지 않았다. 둘의 성향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루시우스는 엄격했고 로베르트는 자유분방했다. 매일매일 일정에 맞춰 규칙적으로 사는 형과 농땡이만 부리는 동생은 서로 어울릴 일이 없었다.

“그래.”

작게 수긍하며 루시우스는 동생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뭐, 뭐야?”

로베르트가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루시우스는 대답 없이 걸음을 옮겼다.

로베르트는 입술을 비죽이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형이 쓰다듬은 머리칼을 슬슬 문질렀다.

어쩐지 뺨이 뜨끈했다.

* * *

칼리오페는 울상을 지었다. 요즘 정신을 놓으면 계속 입안에 손가락을 가져가려 했다. 지금도 손가락을 오물대려 하다가 바로 직전에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쉽게 미혹되면 안 돼. 아기여도 정신은 엄연한 성인. 품위는 지켜야지.’

보통 아기가 주먹 무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자신은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처럼은 굴 수 없다. 습관적으로 허전한 잇몸을 혀로 쓸다가 살짝 걸리는 느낌에 멈칫했다.

‘어라?’

그 부분을 다시 혀로 쓸자 살짝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가운데 아랫니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어쩐지 요즘 잇몸이 가렵더라니.’

모든 게 이것 때문이었다. 절대 자신이 주먹을 빨고 싶어서 빨았던 게 아니다. 유치가 나는 시기이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렴.

“아가씨, 맘마 먹을 시간이에요.”

유모가 칼리오페를 들어 올렸다. 칼리오페는 고민했다. 이빨이 난 걸 보여 줘야 하나. 하지만 남 앞에 입을 크게 벌리고 들여다보도록 하는 건 꺼려졌다.

‘그런 걸 꺼리기엔 이미 못 볼 꼴을 다 보였지만…….’

잠시 주마등처럼 여태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몹시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나날이었다.

머뭇거리던 칼리오페가 유모를 톡톡 쳤다. 제대로 말하지 못하니 보디랭귀지를 선호하게 됐다.

“응? 왜 그러세요, 아가씨?”

칼리오페가 아, 하고 입을 벌리고 손가락질했다. 유모가 입안을 슬쩍 들여다보자 통통한 뺨이 살짝 빨개졌다.

“어머나! 이가 나셨네요!”

유모가 감탄하며 좋아했다. 기쁜 기색을 보니 뿌듯했지만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다. 칼리오페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우리 아가씨는 참 똑똑하시기도 하지. 이렇게 알려주시고. 아, 이럴 게 아니라 마님께도 알려드려야겠어요!”

‘이게 그렇게나 기쁜 일인가?’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기에게 이가 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인데. 이제 8개월째 됐으니 빠르거나 늦지도 않고 딱 평균이었다.

너무 과민한 반응이 아닌가 했지만 그런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유모는 흥흥 콧노래를 부르며 백작 부인의 서재로 향했다.

* * *

“어머, 리페. ……일단 개괄적인 건 그렇게 하고 자세한 부분은 나중에 논의하죠.”

칼리오페를 본 루스티첼 부인이 서둘러 가신들을 물렸다.

“우리 리페, 엄마 보러 왔어요?”

루스티첼 부인이 유모에게 다가와 칼리오페를 넘겨받았다. 보드라운 뺨에 쪽쪽 키스를 하는데 유모가 다급히 말했다.

“마님, 아가씨께……!”

“리페에게?”

루스티첼 부인의 얼굴에 설핏 걱정이 스몄다. 칼리오페가 일반적인 영아와 너무 달라서 은근한 걱정이 끊이지 않던 차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시간에 서재에 온 것도 불안했다.

“이가 나셨어요!”

“정말?”

수심에 어두워졌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우리 리페 벌써 이가 났어요? 어디 한번 보자. 아, 해보세요.”

칼리오페가 입을 오물거렸다. 보여주기 위해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응? 아, 해봐요. 아~.”

어머니의 채근에 결국 입을 열었다. 꼼꼼히 들여다보는 시선에 다시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머, 정말이네.”

아랫니 두 개가 앙증맞게 자리 잡고 있다. 새하얀 치아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를 꽉 끌어안았다. 아이가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는 건 언제나 가슴 벅찬 일이었다.

“엄마!”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로베르트가 튕기듯 들어왔다.

“로벨, 뛰지 말랬지. 게다가 노크도 없이 방에 들어가다니.”

그 뒤로 루스티첼 백작의 엄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주일간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씩 면벽 수련하도록 해라.”

“윽…….”

로베르트가 깨갱 해서 신음을 흘렸다. 가만히 벽만 보고 있는 면벽 수련은 로베르트가 가장 싫어하는 수련이었다. 다른 수련보다야 몸은 훨씬 편했지만 좀이 쑤셔서 견딜 수 없었다. 실상 수련이라는 이름의 벌이나 다름없다.

“리페한테 이가 났다면서요?”

어느 틈에 곁으로 다가온 루시우스가 조용히 물었다. 루스티첼 부인이 속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보니 한창 수련할 때였다. 수련이 끝날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밖으로 나오지 않는 애가 동생 첫 이가 났다는 말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거다. 웃음이 날 수밖에.

“한 번 볼래?”

부인의 물음에 세 부자의 시선이 칼리오페에게 집중됐다.

칼리오페는 식은땀을 흘렸다. 유모와 어머니로 족했다.

‘대체 어떻게 퍼진 거야…….’

절대 싫다. 입안을 보여주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전생의 칼리오페는 먹을 때조차 입을 작게 벌렸고 웃을 때면 입을 가리고 웃었다. 따지고 보면 입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도 실례 아닌가?

칼리오페는 엄격한 아버지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지만, 백작은 한층 더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다.

‘틀렸어. 항상 상대에게 예의를 차리라고 가르치셨던 분이 아니셔.’

고집스레 입을 꾹 다물고 있자 한 번만 아, 해보라며 난리였다. 그 무뚝뚝한 아버지마저 고개를 기웃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점점 약해졌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가족이 살아 돌아오면 뭔들 못 해줄까 싶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여전했다.

결국 칼리오페는 입을 벌렸다. 졸지에 입안이 유명 관광지가 되어버린 기분이 참 묘했다.

“진짜로 났어! 신기해!”

로베르트가 입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려 해서 기겁했다. 입을 딱 다물고 고개를 팩 돌리자 아쉬운 한숨 소리가 들렸다.

“왜 손을 넣으려고 해. 리페 놀랐잖아.”

“아니, 신기해서.”

루시우스의 타박에 로베르트가 머리를 긁적였다. 세 부자가 꾹 닫힌 입을 아쉬운 눈으로 쳐다봤다.

“아 참! 아가씨 배고프시겠어요. 밥 드실 시간이었는데.”

유모의 말에 칼리오페가 반색했다. 드디어 이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아이구, 우리 리페 배고프겠네? 근데도 울지도 않고 아이 착해. 엄마가 먹여줄까?”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를 어르며 말했다. 칼리오페를 이대로 방에 돌려보내기 아쉬웠다. 눈치 빠른 유모가 하녀에게 이유식을 다시 데워서 서재로 가져오라 시켰다.

칼리오페가 여기서 밥을 먹을 게 분명해지자 세 남자는 아예 서재에 터를 잡고 앉았다.

서재가 칼리오페를 위한 식당으로 탈바꿈하는 데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구석에 있던 아기용 의자를 끌어오고 아기용 테이블 매트를 깔고 그 위에 이유식을 차렸다.

“자, 우리 리페 맘마 먹자.”

루스티첼 부인이 환히 웃으며 숟가락을 내밀었다.

세 남자는 부러운 눈으로 그 모습을 쳐다봤다. 부인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이래서 선점은 중요하다.

칼리오페는 입을 벌리는 대신 숟가락 쪽으로 팔을 뻗었다.

“응? 리페가 직접 먹게?”

루스티첼 부인은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숟가락을 내밀었다. 칼리오페는 의기양양하게 숟가락을 쥐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잘 잡았다. 음식을 흘리지도 않았다. 이유식이 끈적거린 덕이지만.

조금씩 이유식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직접 먹고 싶었다. 아무래도 속은 다 컸는데 아기처럼 받아먹는 게 부담스러웠다. 이제 제법 물건도 잘 쥐니까 숟가락질 정도는 무리 없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칼리오페는 드물게 흥분했다. 신이 나서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먹방—먹는 방법—을 두근두근하며 지켜보던 관람객들 역시 침을 꼴깍 삼켰다.

과연 첫 숟가락질이 성공할 것인가!

철푸덕.

이유식이 뺨에 달라붙는 소리가 찰졌다. 숟가락이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가버렸다.

“풋……!”

빵빵한 볼에 이유식이 덕지덕지 묻은 모습을 보고 루스티첼 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뒤를 따르듯 낄낄거리는 로베르트의 웃음소리가 방안을 메웠다. 표정 없던 루시우스도, 근엄하던 루스티첼 백작도 웃음을 참느라 부들부들 떨었다.

“…….”

칼리오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숟가락을 꾹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아직 숟가락질은 일러요. 손목에 힘이 없는걸.”

이유식이 범벅된 뺨을 닦아주며 루스티첼 부인이 말했다.

칼리오페의 1차 숟가락질 시도는 장렬히 실패로 끝났다.

* * *

깊은 밤.

칼리오페는 눈을 떴다. 축축한 밤의 공기가 무르게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제는 자다가 일어나도 본능적으로 울지 않는다. 다행한 일이었다. 새벽에 유모가 선잠 자다 깨는 일이 없으니까.

칼리오페는 천천히, 전생에 있었던 일들을 되새겼다.

즐거운 기억보다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이 많았다. 칼리오페는 집요하게 그 고통의 순간을 파헤쳤다. 아버지의 죽음, 기울어진 가세, 큰 오라버니의 죽음과 작은 오라버니의 죽음, 어머니의 병환, 전쟁, 어머니의 죽음.

이제 다시 태어나 없던 일이 됐다. 잊어버리고 훌훌 털면 편할 테지만 칼리오페는 그러지 않았다.

‘이번엔 지킬 거야.’

그러기 위해서 작은 단서라도 잊어버릴까 노심초사했다. 모두가 잠든 새벽마다 이렇게 조용히 과거의 참극을 떠올리는 이유였다.

칼리오페는 시선을 내려 손을 바라봤다. 통통한 팔과 앙증맞은 손바닥.

‘너무 작아.’

뭐 하나 제대로 쥐기에도 벅찬 크기다. 마음은 급한데 지나치게 어리다. 지금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숟가락질조차 혼자 못하는데 뭘 하겠는가.

칼리오페는 입술을 깨물었다. 혼자 깨어 있는 밤이면 항상 힘들었다. 아직 험난한 삶을 겪어본 적 없어 마냥 반짝여야 할 눈동자에는 그늘과 시름이 가득했다.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칼리오페는 마음을 고쳤다.

그래도 기회는 다시 주어졌다. 가족들은 살아있다. 차근차근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 된다.

‘우선은 말부터.’

이가 나기 시작했으니 조금씩 발음이 괜찮아질 거다. 언어라는 개념부터 이해해야 하는 영아들과 달리 칼리오페는 발음만 제대로 하면 된다.

그래서 몇 달 전부터 계속해서 발음 연습을 하고 있었다.

“까까까까꼬꼬꼬꼬…….”

가갸거겨고교구규.

분명 가갸거겨라고 정확히 말했는데 왜 까까까까라고 들리는 걸까.

‘잘못 들었을지도 몰라. 이제 치아도 나기 시작했는걸.’

칼리오페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까까까까꼬꼬꼬꼬.”

하지만 현실은 잔인한 법. 한 살 인생에도 마찬가지다.

까까까까 하던 칼리오페가 쓰라린 교훈을 얻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 끄트머리만 조금 드러난 치아로는 발음이 손톱만큼도 나아지지 않았다.

“우…….”

빵빵한 볼살이 더 빵빵하게 부풀었다. 눈썹이 꼼질꼼질 춤을 춘다. 그 아래 동그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울망울망 빛났다. 둑이 툭 터지는 대신 칼리오페는 폭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계속 열심히 연습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날이 도대체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좋아지겠지.’

애도 아니고 이런 일로 울지 않는다. 진짜다. 세상에 까까까까 한다고 으앙 우는 어른이 어딨는가. 칼리오페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눈가가 촉촉한 건 기분 탓이다.

“후웅…….”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칼리오페는 다시 말하기 연습에 집중했다.

‘가족들을 다시 만나면 가장 하고 싶었던 말.’

할 수 있었을 땐 하지 않았고, 하지 못할 때 하고 싶었던 말들.

모두가 잠든 새벽, 칼리오페는 가슴 속에 묻어둔 말을 조용히 속삭였다.

* * *

칼리오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눌렀다. 다시 돌아온 후, 이렇게 설레고 긴장된 적은 처음이다.

“우리 아가씨,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유모가 칼리오페의 손에 장난감을 쥐여주며 말했다.

칼리오페는 새삼 신기한 기분으로 유모를 쳐다봤다. 겉보기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을 텐데 유모는 귀신같이 상태를 알아차린다. 그러고 보니 지난 몇 개월간도 마찬가지다. 칼리오페는 딱히 자신의 상태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유모는 알아서 척척 그녀가 원하는 걸 해줬다.

전생에서도 그랬다. 항상 곁에서 칼리오페를 보살폈다. 춥지 않도록, 덥지 않도록, 슬프거나 괴롭지 않도록 돌봤다.

‘그러다가 나 대신…….’

“우리 아가씨는 또 왜 그렇게 쳐다보실까.”

유모는 젖살 가득한 칼리오페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말랑말랑한 볼살이 손가락에 닿을 때마다 부르르 떨렸다.

유모는 이 깜찍한 아가씨가 가끔씩 보이는 눈빛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도저히 뭐라 형용할 수 없는데, 보는 자신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버리는 눈이다. 행복한 일이 가득하기만을 바라는 소중한 아가씨다. 그런데 왜 벌써부터 이런 눈을 하는지.

“유…….”

칼리오페가 말을 하다 멈췄다.

충동적으로 입을 열기는 했지만 역시 첫 말을 들려주는 건 가족들 앞에서 하고 싶었다. 물론 그 가족에는 유모도 포함된다.

말하는 대신 뺨을 매만지는 유모의 손가락을 꼬옥 붙잡았다. 유모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순식간에 수심이 걷혔다.

“우리 아가씨는 어쩜 이렇게 귀여우실까!”

칼리오페를 꼭 껴안고 어화둥둥 하는 사이 루스티첼 백작이 집에 돌아왔다. 이제 백작이 귀가하고 저녁에 온 가족이 아기방에 모이는 것은 당연해졌다.

“우리 리페, 잘 있었니?”

백작이 다가와서 칼리오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더 이상 딸아이의 곁에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댜…….”

칼리오페는 무심코 잘 있었다고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가장 먼저 가족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있다. 이렇게 모두가 모여있을 때.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난 몇 개월간 입안에서만 굴렸던 말이다. 그리고 수년간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 가슴으로만 외쳤던 말이다. 말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축복인지. 들어주는 사람이 살아있다는 게 얼마나 축복인지.

아려오는 콧잔등을 누르고 칼리오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하루라도, 일 분, 일 초라도 빨리 전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아바디, 아마미 뎌루 나아듀더떠 가땨하미댜. 쨔라해여.”

(아버지, 어머니 저를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루스티첼 백작 부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얘, 얘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오아바미두두 쨔라해여.”

(오라버니들도 사랑해요.)

가족들의 당황에도 칼리오페의 말은 막힘없이 이어졌다. 진짜 막힘이 없었다고 하기엔 발음이 심각하게 엉성했지만.

“유머두 쨔라해. 하사 고마어.”

(유모도 사랑해. 항상 고마워.)

아이가 첫말을 했는데 백작 부부와 유모는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했다. 다년간의 육아 경험으로 그들은 어렵지 않게 칼리오페의 발음을 알아들었다. 그래서 문제였다.

애 첫말이 ‘아버지, 어머니 저를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 * *

“리페, 지금 나한테 사랑한다구 한 거야?”

생각할 게 많은 어른들보다 단순한 어린아이가 가장 먼저 기뻐했다. 로베르트는 사랑스러운 동생의 말에 감격해서 눈물까지 글썽였다.

“나도 사랑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로베르트가 칼리오페를 끌어안으며 볼에 키스했다. 어느 정도 스킨십에 익숙해진 칼리오페는 흠칫하지 않고 키스를 받았다.

“크흠, 리페.”

그 모습을 쳐다보던 루시우스가 헛기침했다. 이목이 쏠리자 잠시 어색하게 눈을 굴리더니 들릴 듯 말 듯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도 사랑한다.”

칼리오페가 눈을 크게 떴다. 전생에서 루시우스가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여느 남매가 그렇듯 말하지 않아도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루시우스가 가족을 사랑하는 걸 의심해본 적은 없지만, 직접 들으니 가슴이 벅찼다. 행복하면서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모든 감정을 내리누르고 칼리오페는 환하게 웃었다. 웃음 말고는 필요 없는 순간이니까.

“엄마도 리페를 무척 사랑한단다. 엄마 딸로 와줘서 너무너무 고마워.”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를 안아 들며 말했다. 아이들의 말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궁금한 것투성이지만 모두 접어두었다. 그것보다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한 딸아이에게 마주 사랑한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눈을 마주치며 진심을 다해 되돌려 주는 답에 칼리오페의 입가가 떨렸다.

정말 보고 싶었다. 이렇게 마주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제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익숙해질 법한데 아직도, 여전히 가슴이 아렸다.

“사랑한다, 리페.”

루스티첼 백작이 칼리오페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손가락에 짧게 감기는 머리칼이 간지러웠다. 간질간질한 것은 손가락만이 아니다.

백작은 답지 않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루스, 로벨.”

“예, 아버지.”

루시우스와 로베르트가 예의 바르게 답했다. 언제 동생에게 풀어졌냐는 듯 각이 잡혔다.

루스티첼 백작은 그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봤다. 일부러 그렇게 키웠다.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귀족은, 특히 기사 가문은 짊어져야 하는 게 많다. 백작은 자식들이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랐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너희도 사랑한다.”

책임감 있는 사람보다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했다. 그런데 정작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려주지도 않았다. 당연한 말인데 하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라 할 생각을 못 했다.

칼리오페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 서로 사랑한다 말하는 가족들을 보고서야 겨우 깨달았다. 엄격한 아버지가 된다는 게 방향을 잘못 잡아 인색한 아버지가 되어버렸다.

루시우스와 로베르트는 아무런 반응도 못 하고 그 자리에서 굳었다.

처음이었다. 아버지한테 이런 말을 듣는 건.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특별히 바란 적도 없었다.

칼리오페가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와 달리 두 형제는 겸연쩍은 얼굴로 아버지의 시선을 피했다. 심지어 로베르트는 주춤주춤 뒷걸음질마저 쳤다.

백작은 뒷걸음질 치는 걸 꾸중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습관적인 훈계를 삼키니 이내 안타까운 마음과 스스로에 대한 원망이 들었다. 오죽했으면 아비가 사랑한다는 말에 저럴까.

로베르트는 슬쩍 엄마를 바라봤다. 가족 관계가 경직될 때 항상 부드럽게 푸는 건 그녀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루스티첼 부인은 뜻 모를 미소만 지은 채 아무 말 없이 상황을 지켜봤다.

한참 동안 눈치를 보며 눈을 굴리던 로베르트가 백작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시선을 돌린다. 로베르트는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아버지의 눈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사랑한다.]

당혹과 놀람이 가시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싱숭생숭한 게 자꾸만 뱃속에서 부풀어 올랐다. 불편한 게, 뱉어내고 싶으면서도 그대로 삼키고 싶었다.

“……저도 사랑해요, 아부지.”

결국 로베르트는 뱉어냈다. 아버지를 보지도 않고 방구석을 노려보며 한 말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뚱한 표정이었지만 귓가가 붉었다.

아들의 모습에 백작의 입매가 이상한 모양으로 울렁였다. 일곱 살은 아직 어린 나이였지, 하고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엄격함이 가혹했을 수 있다는 것도.

손이 움찔거렸다. 로베르트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려 했지만 어색하고 낯설었다. 사고뭉치에 게으르다며 항상 혼내기만 했지 제대로 칭찬한 적도 없던 탓이다.

백작이 어색함을 이겨내고 손을 내미는데, 루시우스가 그보다 먼저 말했다.

“항상 아버지, 어머니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과연이라고 해야 할지, 루시우스다운 말이었다.

항상 그렇듯 무표정했지만 부모의 눈에는 어색하고 민망해하는 아들의 모습이 보였다.

루스티첼 부인은 빙긋이 웃었다. 큰 아이는 무척 어른스러워서 이제는 아이 같은 면모가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대견하면서도 서운했는데 칼리오페가 태어나고 난 뒤로 이렇게 제 나이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엄마, 아빠도 항상 너희를 사랑한단다.”

봄은 이미 지났는데 봄바람이 살랑였다. 마음에 보드랍고 연한 잎이 돋아난다.

루스티첼 부인이야 언제나 자애롭게 아들들을 대했지만, 백작은 아니었다. 그는 엄격하고 근엄했다. 자식들에게 잘 표현하지 않았고, 자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태까지 가족끼리 모여 이렇게 사랑한다는 말을 나눠본 적은 없었다. 어색했지만 행복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을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을 알았다. 굳이 말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하지만 직접 마음을 전하고 듣는 건 생각보다 무척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아무 말 없이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나올 정도로.

가족들의 시선이 칼리오페에게로 모였다. 칼리오페가 아니었다면 이런 순간도 없었을 것이다.

늦게 태어난 막둥이는 세상에 나온 순간부터 기쁨이자 축복이었다.

* * *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빠르죠.”

루스티첼 부인의 말에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태어나 첫 말을 하고, 가족끼리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은 부모로서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때다.

“단어나 겨우 말할 법한 나이에 완벽한 문장을 말하다니.”

루스티첼 백작이 심각한 얼굴로 턱을 쓸었다.

아까는 칼리오페에게 사랑한단 말을 되돌려 주고 싶었고, 아이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절대 당황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얼마 전에는 너무 조용해서 걱정이었는데요.”

어디 문제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아픈 것은 아닐까 항상 노심초사했다. 루스티첼 백작 부부는 아이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도 행복하게 키우자며 매일 밤 다짐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말이 빨라도 너무 빠르니 걱정도 함께 드는 것일 뿐.

“유모가 보기엔 어떤가.”

루스티첼 백작의 물음에 가만히 물러나 있던 유모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리페 아가씨는 원래부터 다른 아기들과 달랐죠. 그래서 걱정이 많았는데……. 오히려 그 모든 게 너무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저는 안심했습니다.”

동물들도 그렇다. 새끼 때 움직임이 적고 반응이 작으면 오래 못 살겠구나, 하고 짐작한다. 그리고 그 짐작은 대체로 맞아떨어진다. 말이 씨가 될까 두려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어른들 모두 이 사랑스러운 막둥이가 일찍 죽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그게 병약해서가 아니라, 천재라서 남달랐던 것이라면……?

‘내 딸이 천재……?’

루스티첼 부부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당황과 걱정에 막혀 아주 당연한 사실을 잊었는데, 돌도 안되어서 완벽한 문장을 말하는 건 확실히 천재여야 했다.

“옛 위인들을 보면 세 살에 시를 지었다는 말도 있지 않소. 우리 리페가 그럴지도.”

말을 할수록 백작의 입매가 위로 올라갔다. 아무리 근엄하다고 해도 백작도 부모인지라 자식이 천재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한껏 들떴다.

칼리오페의 나이는 한 살. 태어난 지 11개월이다. 그런데 완벽한 문장을 구사했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깨치고 세 살에 시를 썼다는 킴시스브가 생각나는 건 설레발이 아닐 거다.

“우리 리페 너무 똑똑해서 어쩌죠? 세 살에 시라니…….”

루스티첼 부인의 머릿속에서 칼리오페는 이미 세 살에 시를 짓고 있었다.

“우리 아가씨라면 세 살이 아니라 두 살에 지으실 겁니다.”

부모의 콩깍지를 지적하고 객관적인 조언을 해야 할 유모는 한술 더 떴다.

이 방에 그들의 팔불출을 막을 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 * *

늦은 밤, 유모는 루스티첼 부부와의 대화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칼리오페의 곁을 지키고 있던 하녀가 그녀를 반겼다.

“유모님, 진짜예요?”

다짜고짜 묻는 질문의 뜻을 어렵잖게 알 수 있었다. 유모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누르며 모르는 척 물었다.

“뭐가 말이냐.”

“리페 아가씨께서 첫 말을 하셨다는 거요. 안나가 들었다던데 그게 낳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이었다면서요? 아니죠? 안나 그 기지배가 또 오버한 거죠?”

안나가 칼리오페의 첫 말을 들었다고 했을 때, 하녀들은 계 탔다면서 부러워했다. 다들 기대에 차 무슨 말을 했는지 물었는데 나온 답이 저거였다.

아무리 부러움을 받고 싶어도 그렇지, 오버를 넘어서 허무맹랑한 말을 지어내다니. 하녀가 입을 비죽였다.

“사실이다.”

“네?!”

“뿐만 아니라 내게도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지. 항상 고맙다고.”

유모가 은근슬쩍 자랑했다. 하지만 하녀는 너무 놀란 바람에 그 자랑을 알아주지 못했다. 그녀는 아직 사회초년생이었다. 한마디로 눈치가 부족했다.

“정말로 ‘어머니, 아버지 저를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셨다구요? 저 말 그대로? 아무런 덧붙임 없이?”

“그렇대도. 조용히 하거라. 아가씨 깨시겠다.”

유모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절대 서운해서 혼낸 게 아니다. 칼리오페가 걱정돼서 혼낸 거다. 진짜다.

아차, 하고 입을 다물었던 하녀가 곧 작게 속삭였다.

“우리 아가씨 천잰가 봐요. 그게 진짜라니.”

그 말에 유모의 서운함이 사르르 녹았다. 자신을 부러워하는 것보다 칼리오페를 칭찬하는 게 훨씬 기분 좋다.

“아무렴. 아가씨께서는 태어나신 순간부터 남다르셨지.”

유모는 발을 꼼지락대는 하녀를 보고 빙긋 웃었다. 어서 가서 안나의 말이 진짜라고 하고 싶겠지.

“내가 왔으니 이만 들어가 보거라.”

“네. 필요하시면 부르세요.”

하녀가 재빨리 나가고 유모는 요람 곁으로 다가갔다. 칼리오페가 색색거리며 눈을 감고 있었다.

유모는 미소 지으며 칼리오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가씨, 우리 리페 아가씨.”

[유머두 쨔라해. 하사 고마어.]

아직 발음도 제대로 못 하면서 전한 말.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가씨가 이 유모를 잊지 않고 말해 주셔서, 저는, 정말…….”

가족들끼리 오붓한 시간에 아무래도 자신은 동떨어진 존재다. 루스티첼 일가는 모두 다감했지만 그 부분은 어쩔 수 없다. 당연한 일이기에 서운해하지도 않았다.

“유머두 내 가됴기야.”

(유모도 내 가족이야.)

언제 깼는지, 칼리오페가 유모에게 속삭였다. 유모는 깜짝 놀라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가슴으로 낳은 세 아이를 키우느라 어느새 주름진 얼굴이 울렁울렁 일렁였다.

칼리오페는 그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가씨……!”

유모가 칼리오페를 와락 끌어안았다.

“주제넘은 생각이지만 저 역시 아가씨를 제 가족이라고, 제 딸과 같다고 여겼습니다.”

“웅, 가됴기야.”

(응, 가족이야.)

칼리오페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유모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아가씨! 어서 피하세요!]

전생에서 유모의 마지막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칼리오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이제 겨우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가족들을 지키기엔 아직도 너무 작았다.

‘어서 자라야 해. 말은 됐으니 이젠 몸을 단련하자.’

근육의 발달은 여느 평범한 아이와 비슷하게 이뤄지겠지만, 그래도 훈련하면 적게나마 시기를 앞당길 것이다.

칼리오페는 즉시 몸을 단련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가씨 주먹 잼잼도 잘하시네. 자아, 곤지곤지 도리도리도 해보세요.”

“…….”

“도리도리 잼잼, 곤지곤지 잼잼, 짝짜꿍짝짜꿍! 만세!”

유모는 아예 칼리오페를 요람에 내려놓고 손을 부산스레 움직였다.

칼리오페는 아연한 눈으로 그런 유모를 바라봤다.

‘그래도 근육 발달에 도움은 될 것 같으니.’

떨떠름한 기분으로 유모를 따라 했다. 도리도리 잼잼. 곤지곤…….

‘……곤지곤지가 이렇게나 어려운 거였나?’

“자자, 이렇게! 곤지곤지.”

“꼬지꼬지.”

조막만 한 손이 열심히 움직였다. 짤따란 손가락이 콩콩 손바닥을 두드린다. 첫 시도치고 괜찮은 곤지곤지였지만 칼리오페의 머릿속 그림과는 사뭇 다르다는 게 문제였다.

“꼬지……. 꼬지꼬지. 꼬지꼬지. 꼬지꼬지 잼재.”

유모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우리 아가씨는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열심히 곤지곤지하는 모습이 정말 사랑스럽다.

그리고 그 사랑스러운 아가씨는 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소근육 발달. 소근육 발달. 소근육 발달. ……좋아, 아침저녁으로 곤지곤지 100회씩. 목표는 깔끔한 숟가락질.’

때론 모르기에 더 사랑스러울 때가 있다.

* * *

칼리오페의 바람대로 그녀는 무럭무럭 자랐다. 무럭무럭 자라서 무려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칼리오페는 조심스레 오른발을 들었다. 몸이 왼쪽으로 갸우뚱 기운다.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며 그녀는 뒤뚱뒤뚱 어렵사리 한발 한발 내디뎠다.

걷는 게 이렇게나 힘든 일이었다니. 내 몸이 이렇게나 무거웠다니. 칼리오페는 좌절했다. 머리 위에 책을 쌓아 놓고서도 흔들림 없이 걸었던 과거가 아스라했다. 과거의 영광을 그리는 은퇴 기사처럼 괜히 울적해진다.

“옳지! 조금만 더!”

속도 모르고 루스티첼 백작이 칼리오페를 재촉했다. 말이 조금만 더지, 절대 ‘조금’이 아니었다. 어른 발걸음으로 서너 걸음 되는 거리가 칼리오페에겐 망망대해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포기할 순 없어.’

칼리오페가 마음을 다잡았다. 인생은 시련과 고난의 연속이노니.

‘이런 것조차 이겨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가족을 지켜.’

산호빛 눈동자가 비장해졌다. 갸우뚱 기울던 몸이 오뚝 섰다.

‘시련을 극복하고 더 강해져야 해. 내 손에 가족들의 목숨이 달렸어.’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지고 칼리오페는 웅장하게 한걸음 내디뎠다. 웅장하다고 해도 걸음마는 걸음마. 하는 생각에 비하면 하찮았지만 칼리오페는 심각했다.

‘좋아. 네 걸음만 더 걸으면 돼.’

하지만 그 네 걸음은 절대 좁혀지지 않았다. 영원히.

칼리오페의 눈이 뾰족해졌다. 아버지, 지금 은근슬쩍 슬슬 뒤로 물러나고 있는 거 모를 거 같아요?

칼리오페의 시선에도 백작은 시침 뚝 떼고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아바디, 모펴루 또기눈 거눈 자모탄 이림미댜. 으욕 저하시켜여. 떠치가물 주는 거두 중여함미댜.”

(아버지, 목표를 속이는 것은 잘못한 일입니다. 의욕 저하시켜요. 성취감을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어어, 그, 그렇구나. 미안하다, 리페.”

루스티첼 백작이 땀을 뻘뻘 흘리며 답했다. 자신이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목표를 속이는 건 잘못된 일이다, 의욕을 저하시킨다, 성취감을 주는 것도 중요하다.

모두 맞는 말이지만 이제 곧 돌인 아기가 할 말은 아니었다.

어떤 이는 칼리오페를 거북해하고 징그러워 할 것이다. 어떤 이는 마녀라며 두려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루스티첼 백작은 아니었다. 설령 칼리오페가 문제 있는 존재라 해도, 그는 아버지였으니까.

‘역시 내 딸은 천재……!’

아이답지 않다며 제 딸을 배척하고, 교정하고 싶지 않다. 있는 그대로 긍정해주고 싶다.

백작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깨도 으쓱으쓱 올라간다. 발음도 처음보다 꽤 좋아졌으니 앞으로가 더 기대됐다.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훈계하는 것은 항상 그의 역할이었는데 요즘 들어 왠지 모르게 훈계 당하는 일이 잦다.

“이젠 뒤로 안 가도록 하마.”

그 말에 칼리오페가 만족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정말로 네 걸음.’

칼리오페는 앙증맞은 두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찹쌀 같은 볼에 힘이 빵빵하게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백작이 미소 지었다. 항상 딱딱했던 얼굴은 어느새 부드럽게 변했다. 그건 가족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칼리오페가 마지막 한 발을 옮기는 것과 동시에 백작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우리 리페 아빠한테 잘 왔네. 아구 잘했어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말했다. 루스티첼 백작이 쪽쪽, 딸아이에게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우리 리페 정말 장해요. 대단해요.”

하지만 정작 예쁨 받는 칼리오페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엉덩이를 농락당하는 것은 익숙해졌다고 치고.

‘수염……. 따가워.’

싫어하면 아버지가 상처받을까 봐 참고 있는 거지, 정말 따가웠다.

‘이것도 시련이야. 이 정도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냐. 참아야 해.’

이겨내야 하느니. 칼리오페는 인내심 있게 아빠의 뽀뽀를 받았다.

찹쌀 같은 얼굴은 곧 열반에 들 것처럼 해탈했다.

* * *

“오늘은 우리 리페가 처음 홀로 걸음마를 성공한 기념비적인 날이구나.”

루스티첼 백작이 말했다. 부인은 이미 달력에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제가 황족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황제였다면 국가적 기념일로 선포할 기세였다.

‘리페 처음 뒤집기 성공한 날’, ‘리페 처음 앉은 날’, ‘리페 처음 선 날’ 등등.

이런 기념일들이 정식으로 달력을 빼곡히 채울 것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다.

“우리 리페 하늘 한 번 날아볼까?”

백작이 어화둥둥 둥기둥기 칼리오페를 높이 올렸다.

“어머, 여보. 위험해요.”

그리고 그때까지 기회를 엿보고 있던 루스티첼 부인에게 칼리오페를 뺏겼다.

백작은 부인이 칼리오페를 안아 들고 우르르 까꿍 하는 걸 부러운 눈으로 하염없이 지켜만 보았다.

* * *

“우…….”

칼리오페는 신음을 흘렸다.

끊임없는 유혹이 그녀를 번민에 빠지게 했다. 이성과 본능의 싸움이다.

칼리오페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보이지 않으면 유혹도 사라지리라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감아도 이미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심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감은 눈 속에서 존재감을 또렷이 드러냈다. 결국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사라지길 바랐건만 그녀의 마음을 애끓게 한 유혹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칼리오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뒤집고 싶다. 그릇……!’

조막만 한 손이 옴찔옴찔거렸다. 맑고 투명한 산호빛 눈동자가 본능으로 흐릿해졌다.

‘아, 안돼. 이유식이 한가득 담겨 있잖아. 쏟는다고. 뒤집으면 안 돼. 아는데, 아는데…….’

왜 자꾸만 손이 갈까?

이상하게 불안해서 견딜 수 없다. 넓은 면이 아래로 가고 좁은 면이 위로 가야 할 것 같다. 역삼각형 모양의 뿔이 식탁 위에 놓여 있는 것 같은 위태로움이랄까.

‘어서 삼각형이 되도록 뒤집어줘야 하는데……. 그래야 할 것 같은데……. 으아아.’

칼리오페는 강렬한 충동에 어쩔 줄 몰랐다. 항상 잔잔하던 얼굴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며 깜빡였다. 얼굴에 나타나듯 그녀의 이성은 그야말로 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 안 되겠어……!’

참다못한 칼리오페가 단풍잎 같은 손으로 이유식 그릇을 꽉 움켜쥐었다.

갸우뚱, 그릇이 기울었다. 반쯤 차 있던 이유식이 그릇에서 막 흘러 넘치기 바로 직전.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 집사님.”

턱받이를 꺼내던 유모가 고개를 들었다.

집사?

칼리오페의 행동이 우뚝 멈췄다.

“어쩐 일이에요?”

“잠시 상의할 일이 있어서요. 아가씨 식사 중이셨나요?”

이유식 그릇을 꽉 붙잡고 있는 칼리오페를 보고 집사가 난감한 얼굴을 했다.

“네, 막 식사하려던 차였어요. 급한 일인가요?”

유모가 칼리오페에게 턱받이를 매주면서 말했다. 칼리오페가 이유식에 시선을 고정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워낙 얌전한 아가씨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닙니다. 나중에 유모님 시간 되실 때 절 찾아주세요.”

“알겠어요. 아가씨 밥 다 드시고 난 후에 찾아갈게요.”

집사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대로 방을 나가려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집사님은 아가씨 처음 뵙는 거 아닌가요?”

유모의 말에 집사가 문고리를 잡은 손을 놓았다.

“태어나신 지 얼마 안 됐을 때 한 번 뵙긴 했죠.”

칼리오페가 자고 있을 때 백작 부부와 함께 봤다. 그 후로는 볼 기회가 딱히 없었다. 그 역시 굳이 찾아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함께 지낼 텐데 얼굴은 빨리 익혀두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렇죠.”

긍정하면서도 집사의 얼굴엔 난색이 가득했다. 유모가 빙긋이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우리 아가씨가 얼마나 의젓하신데. 봐봐요. 지금도 울지 않으시잖아요.”

유모의 격려에 집사는 어색하게 칼리오페를 향해 다가섰다. 그는 아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기들은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본능적으로 안다고 하던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기들 역시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기 루시우스는 집사를 향해 ‘지지’라고 말했고, 아기 로베르트는 빼애액 울며 물건을 집어 던졌다.

집사가 곁에 다가설 때까지 칼리오페는 계속 이유식 그릇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릇을 잡은 손에는 꽉 힘이 들어가 새하얗다.

[계속해서 함께 지낼 텐데.]

유모의 말이 계속 귓가에 메아리쳤다. 몇 번을 휘돌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아가씨?”

유모가 칼리오페를 불렀다. 얌전하다고 해도 이렇게 반응이 없진 않았다. 어디 아프거나 불편한가 싶어서 유모가 세심하게 칼리오페를 살폈다.

그 순간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었다. 산호빛 눈동자가 곧장 집사를 바라본다.

착 가라앉은 눈이었다.

칼리오페의 눈은 항상 아기답지 않게 고요했지만 이런 눈빛은 처음이었다. 비 오기 전 하늘처럼 흐리고 음울한 구석이 있었다. 고요하지만 속에 번뜩이는 뇌운을 숨기고 있다.

그 시선에 집사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칼리오페가 얌전하다고 듣긴 했지만 이게 과연 단순히 얌전하다는 말로 표현 가능한가? 저 붉은 눈동자에는 뭐라 말할 수 없이 꺼림칙한 구석이 있었다.

“딥쨔.”

(집사.)

“예, 아가씨.”

반사적으로 집사는 몸을 살짝 숙였다. 그 후에야 그는 아직 돌도 안 된 아기가 그를 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칼리오페가 첫 말을 문장으로 했고 그게 어떤 내용인지 저택 내에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알고 있지만 직접 겪으니 충격이었다. 가슴 속에 있던 꺼림칙함이 뒤룩뒤룩 몸피를 불린다.

칼리오페는 말끔한 표정의 집사를 빤히 바라봤다.

웃음기가 없어 딱딱해 보이지만 신중한 인상에 정중한 태도, 깔끔한 일솜씨.

누가 봐도 믿음직한 집사다. 칼리오페 역시 그를 믿음직하다고 생각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그와 한집에서 살았다. 피는 이어지지 않아도 한 가족이나 다름없다고, 그렇게 믿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아가씨, 저도 살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간을 되돌아오기 전에 들었던 집사의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 울렸다.

평소와 같은 목소리였다. 정중하고, 딱딱하고, 그러면서도 믿음을 주는 목소리. 익숙한 울림. 볕 좋은 오후, 정원에서 칼리오페에게 미소 지으며 차를 따라줄 때와 한치의 다름도 없었다.

그런 목소리로 배신을 알렸다.

“나가.”

“예?”

갑작스러운 축객령에 집사가 당황했다. 깜짝 놀라 둥그스름하게 뜬 눈이 가증스러웠다.

다시 태어난 후로 항상 충동과 싸워왔지만, 이번만은 기꺼이 충동을 따랐다.

칼리오페는 그대로 들고 있던 걸 집사에게 던졌다.

퍼억, 그릇은 곧장 집사의 머리를 강타했다. 머리카락을 타고 단호박죽이 줄줄 흘러내렸다.

“…….”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그 자리에 미동도 않고 서 있던 집사가 안경을 벗고 손수건을 꺼내 닦았다. 침착한 움직임이었다. 유모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모님 말씀대로 아가씨께서 울진 않으시군요. 의젓하신지는 모르겠지만.”

“아, 집사님…….”

집사는 그 말만 남기고 삐걱삐걱 움직여 방을 나섰다. 정신적 타격이 꽤 큰 것 같았다.

“아가씨, 갑자기 왜 그러셨어요. 생전 말썽 한 번 피운 적 없으신 분이.”

칼리오페는 고집스레 입을 꾹 다물 뿐이다. 유모가 처음 보는 얼굴이다.

‘도련님들 땐 그렇다 치고 아가씨까지. 집사님께 아이들한테 미움받는 기운이라도 흐르나.’

유모의 고민이 깊어졌다.

한숨 소리를 들은 칼리오페가 정신을 차렸다. 돌아오기 전의 일은 칼리오페 자신만 알고 있다. 갑작스러운 자신의 행동이 유모에게 어떻게 비췄을지. 원래 아기들은 이유 없이 별짓을 다 한다고 하지만.

‘차라리 아기니까 이유 없이 감정적으로만 굴어도 되겠지.’

“유머.”

(유모.)

먹먹한 목소리에 유모가 급히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왜 이런 목소리실까. 걱정되는 마음에 얼른 칼리오페를 안아 들었다.

“왜 그러세요?”

등을 토닥이자 작은 몸이 꼬물꼬물 품으로 파고든다.

그 어리광에 가슴이 간지럽다가도 무슨 일일까 덜컥 내려앉았다. 아까부터 정말 아가씨답지 않은 행동만 한다.

“나 딥쨔 띠로. 보기 띠로.”

(나 집사 싫어. 보기 싫어.)

유모가 멈칫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품을 파고드는 칼리오페를 번쩍 들고 눈을 맞췄다. 작은 얼굴에 울멍울멍 먹구름이 가득하다.

“집사님이 왜 싫으세요?”

“무쪄.”

(무서워.)

“무서워요?”

“웅. 무쪄.”

(응. 무서워.)

칼리오페를 다시 품에 꼬옥 안는 유모의 얼굴이 어두웠다. 의심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집사가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아가씨께 해코지라도 한 건 아니겠지. 도련님들 때도 그렇고.’

만의 하나인 가능성이라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한편, 유모는 집사를 주의 깊게 살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이 사랑스러운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혹은 일어난다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으리라.

* * *

아침부터 루스티첼 백작 저가 떠들썩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고용인들의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경쾌하고 얼굴엔 즐거운 미소가 가득했다.

바로 오늘이 막내 아가씨의 첫 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리페 생일 축하한다. 태어나줘서, 일 년 동안 건강하게 잘 자라줘서 너무너무 고마워.”

“저야말러 감땨함미댜. 아마니, 아바디, 오라바미두리 제 가죠기라서 무쵸 햄보캐여.”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오라버니들이 제 가족이라서 무척 행복해요.)

칼리오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가족들은 그 모습에 마주 웃으면서도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따로 손님을 부르지 않은 게 참 다행이었다. 만약 칼리오페의 말을 들었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이렇게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데다가 똑똑하기까지……. 우리 막둥이를 눈독 들이는 사람이 생길 거야. 그것도 무더기로 생길 거라고.’

‘내 딸은 절대 못 내줘!’

‘내 동생은 평생 나랑 살아야 해!’

‘우리 리페는 나랑 결혼할 거야!’

그것보다는 다른 문제가 먼저 생겼겠지만 루스티첼 일가는 그 문제부터 걱정했다. 가족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역시 가족답게 뜻이 하나로 모였다.

이로써 칼리오페의 결혼은 황태자비 간택보다도 더 까다롭고 험난한 일이 되었다.

“그런데 리페.”

루스티첼 부인이 통 기운 없는 딸을 보고 걱정스레 불렀다.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인데 왜 그러니?”

“아, 걱뎌울 끼쳐두렷네여. 아무 일두 아니에여. 갠탸나여.”

(아, 걱정을 끼쳐드렸네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괜찮아요.)

칼리오페가 해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눈앞에 있는 게 12개월짜리 아가가 맞나? 가족 모두가 어안이 벙벙했다. 말 잘하고 조숙한 거야 알고 있었지만 이건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로베르트였다.

“요 땅콩만 한 게!”

“아코!”

로베르트가 칼리오페에게 딱밤을 꿍 먹였다.

몸짓만 요란했지 정작 손엔 힘 하나 들어가지 않았지만, 지켜보던 루시우스의 눈이 슥 가늘어졌다.

‘나중에 보자, 로벨.’

로베르트는 갑자기 이상한 한기를 느꼈다. 그는 움츠러들려는 몸을 당당하게 펴고 말했다.

“우리 리페 고민 정도는 이 오빠가 다 해결해줄 수 있으니까! 믿고 말해 봐!”

가슴을 탕탕 치며 말하는 여덟 살짜리 오빠의 모습에 칼리오페가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오빠라고 해도 그녀의 눈엔 어린아이였다.

“구냥…….”

작은 목소리에 가족들이 귀를 기울였다.

‘뭐라고 할까. 좀 조숙한 편이니까 남다르겠지만……. 음, 슬슬 바깥 구경을 하고 싶을 땐가?’

‘흠, 공부 얘길 거 같은데. 얌전하면서도 은근히 호기심이 많은 아이니.’

‘어제 읽어준 동화책 이야기인가?’

‘나랑 결혼하고 싶다는 얘기겠지!’

잠시간의 침묵 끝에 드디어 칼리오페의 앵두알 같은 입술이 열렸다.

“한 해 동아 이룬 고 엄눈데 벌또 도리라니까……. 떼어리란 차무로 무댜하구나, 하구 땡가케쪄여.”

(한 해 동안 이룬 거 없는데 벌써 돌이라니까……. 세월이란 참으로 무상하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

루스티첼 일가는 침묵했다. 한 대 맞은 기분이다. 도저히 어떤 말도,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로베르트조차 정신 차리질 못했다.

* * *

“그, 그래. 그랬구나…….”

루스티첼 부인의 대답을 끝으로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화기애애하던 식사 자리가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다들 예법이 뛰어나 식기 부딪치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무겁고 빽빽한 침묵에 칼리오페가 주변을 둘러봤다.

가족들은 모두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으음…….’

칼리오페가 태어나 처음으로 맞는 생일이라면서 신나게 저택을 뛰어다녔던 로베르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백작은 그런 아들을 나무랐지만,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 묻어있었다. 루스티첼 부인도, 루시우스도 마찬가지였다.

칼리오페 본인보다 가족들이 훨씬 더 이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기대에 가득 차 들뜬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데 막상 당일, 이 어색한 침묵은 뭐란 말인가.

‘내가 너무 과거에만 얽매여 있었나.’

과거. 혹은 다가올 미래.

그 비극에만 사로잡혀 현재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지난 일 년 동안 대부분 시간을 요람 안에서 누워지냈다. 매일 밤 과거의 참극을 되새기면서. 어서 가족을 지켜야 하는데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는 게 답답했다. 때로는 답답함을 넘어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래를 바꾸는 것, 가족을 살리는 것만큼 중요한 게 있다.

‘가족과 지금 현재 일상을 행복하게 보내는 것.’

과거로 돌아와 가족들을 다시 만났을 때도 생각하지 않았나.

시간이 흐르며 가족들이 곁에 있는 게 당연해지자 점점 잊혔다. 가족들의 죽음이 너무나 큰 일이라 그것만 생각하느라 다른 것을 놓친 것이다.

‘지난 일 년간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게 아니야.’

이룬 게 없다니. 지금 곁에 빙 둘러앉아 있는 가족들이 있는데.

전보다 다정해진 아버지, 한결같이 자상한 어머니, 전보다 더 가까워진 오라버니들. 매일매일 자신의 방을 찾아오는 가족들의 모습은 이전에는 없던 것이다.

켜켜이 새로운 추억들이 쌓여간다. 그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한 것인데.

자꾸자꾸 가는 시간이 아깝고 야속한 게 아니었다. 그 시간 속에는 분명한 행복이 녹아있었다.

“데가 댜모 땡가케쪄여.”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칼리오페의 말에 가족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아직 칼리오페가 던진 세월 무상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한 해 도아 이루 고 이쪄여. 아마니, 아바디, 오라바미두리랑 함께 찌간 보낸 고. 저 무쵸 행보케쪄여. 뎌마 소주하고 갑찐 일 녀니어쪄여.”

(한 해 동안 이룬 것 있어요. 어머니, 아버지, 오라버니들이랑 함께 시간 보낸 것. 저 무척 행복했어요. 정말 소중하고 값진 일 년이었어요.)

“…….”

가족들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도 못한 채 다시 2차 폭격을 맞았다. 완벽한 크리티컬 히트였다.

‘로벨이는 십 년이 지나도 저런 말 안 할 것 같은데…….’

이쯤 되자 그냥 웃음만 나왔다. 아무래도 좋다. 애가 좀 많이 똑똑한 게 뭐가 어떠냐 싶다. 이상하다고,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평균이나 상식이란 선에 맞춰서 아이를 평가했던 것이 잘못된 거다.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인데.

칼리오페는 지금 있는 그대로 괜찮다.

세 살에 시를 썼다는 위인, 킴시스브는 유모가 밥하는 걸 보면서 세월이 저무는 걸 읊지 않았나.

칼리오페는 이제 두 살. 충분히(?) 저렇게 생각할 수 있다.

‘유모 말대로 정말 두 살에 시를 쓰게 될지도.’

‘역시 내 딸은 천재……!’

루스티첼 백작 부부의 어깨가 으쓱거렸다.

가족들과 함께라서 행복한 일 년이었다니. 우리 딸은 똑똑한 데다가 마음까지 따뜻하다.

“그래, 우리 리페가 태어나고 지난 일 년 동안 가족 모두 무척 행복했단다. 그렇죠?”

루스티첼 부인의 말에 온 가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오페는 자신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족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지켜야 하는 거야. 가족들의 행복. 그러기 위해서 미래를 바꾸려는 거고.’

그냥 목숨만 살리는 것은 부족하다. 칼리오페는 욕심이 많았다.

행복하고 싶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계속.

조급함에 현재를 망치고 싶지 않다. 모처럼 다시 찾은 가족들과의 시간이니까, 앞으로 더 많은 추억을 나누고 싶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내가 열다섯 살일 때.’

아직까진 시간이 있다. 마냥 마음을 놓을 순 없지만 거기에만 얽매일 필요는 없다.

‘길게 보며 때를 기다리자. 너무 빨리빨리 크려고만 하지 말고, 현재를 소중히 하자.’

“아마니, 아바디, 오라바미두 저라 가띠 장뜌하뎌야 해여.”

(어머니, 아버지, 오라버니들 저랑 같이 장수하셔야 해요.)

“으응, 물론이지.”

딸아이의 진지한 눈빛을 보며 루스티첼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아까와 다른 이유에서였다.

‘왜 벌써부터 칠순 노인이 들을 말을 하는 거지. 난 아직 창창한데 우리 막둥이 눈엔 내가 칠순으로 보이나?’

백작은 흘낏 자신의 팔뚝을 바라봤다. 근육이 팽팽하게 자리 잡고 있는 팔뚝은 십 년 전이나 다름없었다.

‘멀쩡한데……. 아냐, 요즘 조금만 덜 먹어도 근육이 빠졌던 것 같아. 아기의 눈은 하늘의 기운이 충만하다더니 그런 게 보이나?’

백작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훈련량을 늘려야겠다. 기사단 관리에 바빠 실무를 보지 않고 책상에만 앉아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물론 기사단장인 루스티첼 백작이 혼자 훈련할 리 없다. 이로써 백룡 기사단의 지옥 훈련일정이 정해졌다.

애석하게도 칼리오페의 가족 장수와 번영 및 일상 행복 기원이 불쌍한 청년들의 일상을 파괴하게 된 것이다.

* * *

“왜 갑자기 대련을 하자고 해?”

로베르트는 목검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루시우스가 먼저 대련을 청하는 건 처음이라 신기했다.

최근, 정확히는 칼리오페가 태어난 뒤로 형제 사이는 꽤 가까워졌다. 루시우스가 워낙 말수 없고 냉정하기에 다른 사람들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로베르트는 제 형이 전과 다르다고 느꼈다.

예전에는 투닥거리는 일조차 없을 정도로 말을 섞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는 칼리오페를 두고 아웅다웅하기도 하는 것이다.

‘게다가…….’

로베르트는 괜히 뒤통수를 매만졌다. 이상하게도 온기가 배인 것처럼 머리카락이 따뜻했다.

루시우스는 요즘 가끔씩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주로 로베르트가 새로운 기술을 처음 성공했을 때다.

칼리오페를 안기 위해 열심히 수련한 뒤로 로베르트는 검술에 꽤 재미를 붙였다. 하단 베기를 마스터하고 나서도 나름 성실하게 임하고 있다.

제법 검술에 대한 자부심이 붙은 상황에서 대외적으로도 천재 소리 듣는 형이 대련을 청하니 왠지 기대됐다. 그 잘난 형의 눈에도 자신이 대련 상대로 보이는구나, 싶어서.

“인과응보라고 하지.”

“잉과응가?”

“…….”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루시우스는 대답 대신 목검을 잡았다.

“먼저 와라.”

그 말에 로베르트가 자세를 가다듬었다. 발바닥을 무게 있게 내리누르고 상체를 숙인다.

루시우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맨날 농땡이 부리느라 균형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었는데 성장이 빠르다.

“흐아아압!”

로베르트가 기합을 내지르며 루시우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제법 매서운 공격이었다.

‘그래 봤자.’

루시우스는 스윽 걸음을 옮겼다. 발끝이 원을 그리고 몸이 흔들린다.

순식간에 목표를 잃은 로베르트의 몸이 휘청였다. 움직임이 큰 공격인 만큼 실패하자 허점이 여기저기 나타났다. 루시우스의 검이 훤히 드러난 가슴을 노렸다.

‘맞는다!’

로베르트는 눈을 감지 않았다. 검을 들고 싸우는 상황에서 눈을 감는 것은 기사의 수치라던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형제간의 목검 대련이라고 해도 검은 검, 대결은 대결.

아픔을 예상하고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한껏 부릅뜬 눈에 루시우스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제법이네.’

조금은 대견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루시우스의 검이 로베르트의 가슴 앞으로 파고들었다. 로베르트의 온 신경이 거기에 몰렸을 때.

따콩!

“아야!”

로베르트가 검을 떨어트리며 이마를 움켜쥐었다.

“아프잖아!”

“인과응보라고 했지.”

루시우스가 차갑게 답했다.

“그게 대체 뭔데!”

로베르트가 씩씩거렸다. 고작 딱밤인데도 엄청 아프다. 로베르트의 눈꼬리에 눈물방울마저 매달렸다.

‘왜 갑자기 딱밤을……. 설마……?’

어제 칼리오페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던 게 떠올랐다.

‘설마 이 인간이 리페한테 딱밤 먹였다고 이러는 건가?’

설마설마 싶었지만 꽤 그럴싸했다. 자신의 형이지만 칼리오페를 향한 팔불출이 정말 무서울 지경이니까.

누가 들었다면 너도 만만치 않다고 할 법한 생각이었지만 로베르트는 알지 못했다. 원래 나 자신을 아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아, 그러고 보니까 어제…….’

세월이 무상하다던 칼리오페의 말이 생각났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 동생이 하는 말이 뭔지 모른다는 충격에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로베르트는 금세 이마의 아픔을 잊었다. 맞은 것보다 사랑하는 여동생이 했던 말이 더 궁금했다.

“형, 근데 있잖아.”

“왜.”

“무상이 뭐야?”

루시우스는 로베르트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너 책 좀 읽어라.”

“에엑? 싫어! 재미없어! 지루해!”

“그러다 리페한테 무식한 오빠 된다.”

로베르트는 어제보다 더한 충격에 휩싸였다.

진 것보다, 딱밤을 맞은 것보다 리페에게 무식한 오빠가 된다는 말이 더 충격이었다.

루시우스는 충격에 빠진 동생을 뒤로하고 제 목검을 챙겼다.

* * *

루스티첼 백작은 자신의 팔이며 다리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앉으나 서나 칼리오페의 말이 떠올랐다.

[아마니, 아바디, 오라바미두 저라 가띠 장뜌하뎌야 해여.]

(어머니, 아버지, 오라버니들 저랑 같이 장수하셔야 해요.)

며칠째 기사단과 지옥 훈련을 하는데도 근육이 잘 붙지 않는 것 같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백작은 우울해졌다.

그가 맞은편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는 아내에게 물었다.

“부인, 요즘 내 몸이 왜소해진 것 같지 않소?”

“응? 왜 그래요?”

갑작스러운 말에 루스티첼 부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남편의 얼굴을 살피던 그녀가 슬슬 시선을 내렸다. 팽팽한 셔츠에 감싸인 팔뚝과 주름 하나 잡히지 않는 두꺼운 허벅지.

“아직도 힘이 넘치면서…….”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들리며 뺨이 붉어졌다. 요염하면서 사랑스러운 아내의 표정에 루스티첼 백작은 심장이 쿵 떨어졌다. 아내는 예나 지금이나 자신을 설레게 했다.

백작이 흠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우리 리페 같은 예쁜 딸 하나 더 낳을까?”

“아이, 당신도 참.”

루스티첼 부인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백작은 모르는 척 그녀의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루스티첼 부인은 다가오는 남편을 밀어내지 않았다. 대신 서류를 밀어냈다.

남편의 팔은 그의 걱정과 달리 여전히 단단했다.

* * *

칼리오페는 걷고 또 걸었다.

유모는 아장아장 걷는 칼리오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흐뭇하게 웃었다. 우리 아가씨는 참 귀엽기도 하시지.

환한 얼굴로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 꽃들을 구경하며 걷는 모습이 아기 천사 같았다.

‘꽃향기며 색깔이 한창 신기하실 나이지. 걷는 게 즐거우신가 봐. 하긴, 요람 안에서만 계셨으니 답답하셨겠지.’

유모의 짐작대로 칼리오페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걸을 수 있다는 건 참 멋진 일이었다. 전에는 그걸 몰랐다. 사람은 걸을 수 있기에 비로소 도구를 사용하게 되었다.

‘역시 직립보행은 위대해.’

유모의 생각과는 살짝 달랐지만.

어쨌든 보기에는 참 사랑스러웠다.

창문을 닦던 하녀가 칼리오페를 보고 미소 지었다. 뒤뚱뒤뚱 걷는 모습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어쩜. 인형이 걷고 있는 것 같네.’

슥슥 움직이던 손이 조금씩 느려지더니 아예 멈췄다.

일을 멈춘 건 하녀만이 아니었다. 화단을 가꾸던 정원사, 비질하던 하인까지 모두 손을 멈추고 고개를 쭉 뺐다. 칼리오페가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고개가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움직이면 왼쪽으로. 그러다가 칼리오페의 몸이 옆으로 갸우뚱하면 깜짝 놀라 안절부절못했다.

칼리오페는 소리 없이 시끌시끌한 주변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직립보행이란 위대한 만큼이나 어렵기 짝이 없어 걷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눈높이가 한참 낮아서 사람들이 잘 안 보이는 것도 한몫했다.

모르기에 그녀는 열심히 걸었다. 아장아장. 뒤뚱뒤뚱. 아장아장. 뒤뚱뒤뚱.

위태로운 걸음걸이는 결국 사고를 냈다. 칼리오페의 몸이 크게 휘청하더니 꽈당 넘어졌다.

칼리오페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팔이 짧아서인지 머리가 무거워서인지 얼굴로 넘어져서 코가 아릿했다. 그래도 폭신하게 깔린 잔디가 쿠션 역할을 해줬다.

칼리오페는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려다가 흠칫했다.

‘이건…….’

눈 앞에 펼쳐진 손바닥 다섯 개. 어느새 칼리오페는 고용인들에게 빙 둘러싸여 있었다. 칼리오페가 넘어진 것을 보고 모두 빛의 속도로 다가와 일으켜주려 한 것이다. 유모가 먼저 움직일 틈도 없었다.

당황한 칼리오페의 얼굴을 보고 고용인들이 아차 한 얼굴로 머쓱해 했다.

유모가 안고 나올 때마다 아가씨의 얼굴을 몰래몰래 훔쳐봤지만 아가씨에게 자신들은 낯선 이들이다. 낯선 어른을 볼 때 아기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웃거나 울거나. 그게 넘어진 상황이면 대체로 후자에 수렴했다. 사실 넘어지고도 바로 울지 않는 게 신기한 상황이다.

고용인들은 어색하게 삐걱삐걱 일어나 슬슬슬 뒷걸음질 쳤다. 몸짓이 ‘해치지 않아요~. 우리는 착한 어른들이에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우리 아가씨 인기 많네요.”

유모가 쿡쿡 웃으면서 칼리오페를 일으켜 줬다. 그 손에 몸을 맡기며 칼리오페는 새삼스럽게 백작 저를 둘러봤다.

눈이 마주친 고용인들이 활짝 웃는다.

‘사람이 정말 많구나.’

맨날 방 안에서만 지냈더니 이렇게 활기가 넘치는지 이제야 보게 됐다.

백작과 후계가 차례로 죽고 루스티첼 부인의 병환으로 가세가 기울면서 어쩔 수 없이 고용인들을 내보냈다. 그 후로도 병든 루스티첼 부인을 걱정해서 몇 번이나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칼리오페는 뒤로 물러난 고용인들에게 다가갔다.

“이루켜듀려 해더 고마어. 다두 아프러 잘 부타캐.”

(일으켜주려 해서 고마워. 다들 앞으로 잘 부탁해.)

칼리오페의 말에 고용인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제 두 살인 아가씨가 말이 너무 유창했다.

‘소문이 진짜였을 줄이야.’

‘역시 우리 아가씨는 천재……!’

‘저번에 딴 집에 자랑했다가 욕만 먹었는데……. 가서 한마디 해야지.’

고용인들은 놀란 마음을 감추고 빙긋이 웃었다. 이미 칼리오페의 천재 이야기는 백작 저에 파다하게 퍼져서 그나마 수습이 빨랐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아가씨.”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찾아주시구요.”

“아니, 얘는 바쁘니까 절 찾아주세요. 저는 한가해요.”

“아니, 한가한 게 자랑이야? ……저는 손이 빨라서 아무 문제 없어요.”

칼리오페는 황당한 눈으로 아웅다웅하는 하녀들을 바라봤다. 일에 대한 열의는 좋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모두 각땨 마툰 여카리 있눈데 내 펴니 때무네 마우대루 부루 뚜눈 엄찌. 구래두 이리 잘 맛눈 고 가타서 다해이야. 힘둔 일 이쓰며 어제둔지 마래.”

(모두 각자 맡은 역할이 있는데 내 편의 때문에 마음대로 부를 순 없지. 그래도 일이 잘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두 살짜리 아기가 사회 생활하는 성인들에게 힘든 일 있으면 자기에게 말하라는 폼이 제법 당당했다.

“아, 네에…….”

하녀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발음이 너무 안 좋아서 반 토막만 알아들었지만, 그 알아들은 말이 문제였다.

‘내가 제대로 알아들은 게 맞나?’

하인과 하녀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상대방 역시 같은 생각을 한다는 건 깨닫고 신음했다.

‘우리 아가씨가 천재라는 소문은 잘못되었어.’

‘천재가 아니라 초천재야! 천재를 초월했어!’

‘마리나 고 기지배한테 가서 골려줘야지.’

저택을 돌보며 손발이 쿵짝 맞게 된 하녀들은 시선만으로도 대화가 가능했다.

그들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칼퇴는 언제나 그들의 기쁨이었지만 오늘은 더더욱 그 순간이 기다려졌다.

요즘 고용인들 사이에서는 자신이 일하는 집 도련님이 더 뛰어나다, 아가씨가 더 뛰어나다 자랑하는 게 유행이었다.

모시는 집 아이가 대단할수록 콧대가 높아지는 것이다.

루스티첼 가 고용인들은 요즘 힘을 못 쓰고 있었다. 칼리오페에 대해 자랑하면 거짓말을 지어낸다고 몰렸기 때문이다.

[그 집 아가씨 자랑할 게 오죽 없으면 거짓말까지 하냐? 우리 도련님은 있는 사실 그대로 말해도 이렇게 대단하신데!]

마리나가 했던 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혈압이 수직 상승했다. 여태껏 제대로 부정하지 못했던 지라 더 그랬다.

칼리오페가 아무리 똑똑하게 말했다고 해도 직접 보지 못했고 전해 들었기 때문에 고용인들은 마리나에게 강하게 반박하지 못했다. 게다가 칼리오페의 언행은 상식적인 선을 넘었다. 완전히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부풀렸을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이제 아냐.’

퇴근만 하면 끝이다. 이제 거칠 게 없다. 고용인들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콧김을 내뿜었다.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기사 못지않았다.

* * *

“아가씨 말이야.”

헝겊으로 무구를 닦던 하인, 길버트가 운을 뗐다. 주변에 있던 모두가 귀를 쫑긋 세웠다.

칼리오페는 루스티첼 저 최고의 화제였다. 가족뿐만 아니라 고용인 전부 막내 아가씨의 일거수일투족을 궁금해했다.

“조금, 그렇지 않아?”

“뭐?”

하지만 길버트가 한 말은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 달랐다. 그것도 상당히.

“그게 무슨 뜻이야? 조금 그렇지 않냐니?”

“아니, 그렇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제 두 살인데 말본새 좀 봐. 그렇게 문장을 줄줄이 말하는 게 말이 돼?”

“그러니까 대단하신 거지.”

“맞아. 우리 아가씨께서는 처음부터 남다르셨어. 천재라서 그러셨던 거지.”

“불세출의 천재 킴시스브는 8개월째에 글을 깨치고 세 살에 시를 지었다잖아. 우리 아가씨도 그런 거지.”

“말본새라니? 너야말로 말본새 좀 어떻게 해봐라. 아가씨께 말본새가 뭐냐.”

자신의 말에 동조해주는 이가 없자 길버트가 들고 있던 투구를 땅바닥에 내던지며 소리쳤다.

“내 말본새가 어때서? 살다 살다 두 살짜리 계집애한테까지 입조심해야 하냐? 인생 겁나 피곤하게 산다. 비굴하게 시리.”

“비굴하다고?”

길버트가 투구를 내던질 때부터 눈살을 찌푸리던 고용인들이 격분했다.

루스티첼 저의 고용인들은 모두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귀족이 황족과 왕족에게 봉사하는 것이 영광이듯, 평민이 귀족에게 봉사하는 것 역시 영광이다. 금권이 강해지며 영광으로 얽힌 주종 관계는 사라져가고 있으나 적어도 루스티첼의 주인은 그들이 그런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대했다.

루스티첼 내외는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었고 고용인을 대할 때도 위엄과 예의를 동시에 갖췄다. 단순히 돈과 계약으로 엮인 관계가 아니라 그 이상의 신뢰가 있었다.

고용인들이 성심성의껏 루스티첼 일가를 모시는 건 그들의 비굴해서가 아니다. 이건 그들의 긍지를 짓밟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우리 막내 아가씨께 저런 불손한 말이라니……!’

“그래, 너네 다 비굴하다고. 맨날 아가씨, 아가씨하며 떠받드는 것도 웃겨. 너희의 그 대단하신 아가씨께서 천재라는 건 알겠는데, 그게 떠받들 일이냐? 이질감은 안 느껴져?”

“너야말로 열등감에 찌든 거 아냐? 넌 주인 내외 앞에서 비굴하게 굴면서 속으로는 열등감 폭발할지 몰라도 우린 아냐. 어떻게든 흠 잡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그쯤 해라.”

“아가씨께선 천재니까 당연히 우리랑은 다르지. 넌 뭐든 그렇게 비딱하게 봐야 직성이 풀리냐?”

정곡을 찔린 길버트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당장이라도 누군가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이를 갈았다.

“열등감? 하! 너네가 생각 없는 거겠지. 그래, 덕망 높으신 백작 내외께오선 아무 문제 없다고 쳐! 근데 그렇게 끼고도는 막둥이는 어떤데?”

“어떻긴 어때! 훌륭하시지!”

“이상할 정도로 침착한 것도 그렇고, 하는 말도 그렇고. 고작 두 살밖에 안 된 아기인데 징그럽지도 않냐? 애가 애다워야지, 괴물같이!”

“……지금 뭐라고 했냐.”

소란을 키우지 않게끔 길버트와 말씨름하던 사람들의 옷깃을 붙잡고 눈치 주던 사람들까지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애가 ‘애답지’ 않으면 괴물이다.

아가씨를 귀히 여기는 것도 있지만 상식적으로 아기한테 할 말이 아니었다.

모두가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길버트는 의기양양하게 입꼬리 한쪽을 비죽 들어 올렸다.

“왜, 내 말이 틀렸어? 백작님은 무섭지도 않은가? 나는 내 애가 그러면 징그럽고 저게 내 새끼 맞나 싶을 텐데……. 어후, 상상만으로 소름 끼쳐. 내 자식이었으면 갖다 버렸어. 난 그 붉은 눈알을 볼 때마다—”

길버트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크헉!”

우당탕탕! 방패 나뒹구는 소리가 요란했다.

“우리 아가씨를 뭐? 갖다버려?”

방패와 함께 구른 길버트가 허리를 부여잡았다. 넘어지면서 방패에 부딪히는 바람에 등허리가 쑤셨다.

“으, 지금 너 나 쳤냐?”

고개를 털며 일어난 길버트는 자신을 바라보는 하인들을 보고 흠칫했다.

살기등등한 다른 하인들의 모습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런 스스로를 자각하고 수치심에 얼굴로 피가 몰렸다.

‘내가 뭘……. 맞는 말만 했구만! 지들이 틀렸다는 생각은 못 하지!’

길버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목에 뻣뻣이 힘을 주고 목소리를 꽥꽥 쥐어 짜냈다.

“틀린 말도 아니잖아! 너도 니 자식이 그러면 내다 버렸을걸!”

“……일단 한 대만 맞고 시작하자.”

퍼억, 푹 익은 강냉이 수확하는 소리가 무기고를 울렸다.

* * *

“—그런 일이 있었다고요.”

루스티첼 부인이 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검지가 천천히 올라갔다 내려온다.

그녀 앞에 서 있는 집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이 자애롭고 온화한 백작 부인이 상벌 문제에선 얼마나 엄격한지 잘 알고 있었다.

이건 루스티첼 가의 위신이 걸린 문제다. 위아래도 구별 못 하고 감히 백작가의 핏줄을 험담하다니. 절대 좌시할 수 없다.

거기다 루스티첼 부인은 막내딸 칼리오페를 지극히 사랑했다. 그 하인은 그냥 내쫓기기만 해도 다행이다.

집사는 약간의 동정심을 느꼈다.

‘꼭 틀린 말이라고 볼 순 없는데……. 징그럽다거나 소름 끼친다거나 내 애인지 의심스러울 거라는 말은 좀 심하지만. 이질적인 건 사실이니까.’

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당연히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하인은 루스티첼의 권위에 흠집을 냈고 아기한테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하지만 집사 역시 칼리오페를 보며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다.

‘특히 그 눈…….’

일전에 자신에게 나가라면서 그릇을 집어 던진 것보다 그 빨간 눈이 더 거북했다. 같은 색이어도 루스티첼 부인이나 로베르트와는 달랐다.

‘차라리 아가씨가 빨리 크시면 좋을 텐데.’

요즘 저택 어딜 가나 칼리오페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고 있어서 소외감을 느꼈다.

“저택 내에서도 이 일이 퍼지지 않도록 하세요. 밖으로는 당연하고.”

“안 그래도 함구령을 내려놨습니다.”

고용인을 단속 못 하는 것도 가문의 위신과 직결된다. 이 일이 퍼지면 루스티첼 가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것이다.

집사는 자신의 발 빠른 처리에 만족했다.

“절대 리페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 애는 워낙 영특해서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챌 거예요.”

“예, 알겠습니다.”

차분히 대답하면서도 집사는 다소 놀랐다.

‘설마 입단속을 명하신 게 아가씨가 속상할까 봐 그러신 건가?’

물론 두 살밖에 안 된 아가씨가 상처받는 건 그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걸 생각하셔야지. 어차피 두 살 때 일은 기억 못 하잖아.’

루스티첼 부인의 객관적이고 공정한 처사를 흠모했기에 집사는 더욱 실망했다. 아무리 딸을 사랑한다고 해도 감정 때문에 우선순위를 헷갈리다니.

“그 하인은 어떻게 할까요?”

주제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대신 처우를 물었다. 어쨌든 결과는 같다.

남자를 처벌하고 루스티첼 가의 명예를 지키는 것.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이윽고 루스티첼 부인의 입술이 열렸다.

“그 남자는…….”

* * *

“마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벌써 몇 번째지. 루스티첼 부인은 숫자를 가늠했다.

하녀, 하인 가리지 않고 몇 명이나 할 말이 있다며 찾아왔다. 그들이 하는 말은 얼추 비슷하다.

“길버트 말입니다만…….”

모두 칼리오페를 험담한 하인을 발고한다.

루스티첼 부인이 워낙 내저 관리를 잘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별것 없었다.

“저번에 저와 휴일 바꾼 적이 있는데, 제 동의도 없이 진행된 겁니다. 그 자식이 이미 집사님한테 말한 뒤라 일 벌이기 싫어서 그냥 바꿔줬어요.”

이런 고용인끼리의 티 안 나는 분쟁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제가 쉬어야 하는 날에 약속을 잡아놨더라고요. 애초에 바꿔 일할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집사님이 먼저 길버트에게 근무일을 확인하지 않았으면 제가 두 날 모두 일할 뻔했어요.”

당일 길버트가 갑자기 못 나온다고 했으면 욕하면서도 두 사람 몫을 할 다른 사람들 때문에 일했을 거다.

고자질하는 느낌에 하인은 얼굴을 붉혔지만 꿋꿋이 말을 이었다.

“휴일 몇 번 억지로 바뀐 게 억울해서 읍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소한 일로 귀부인을 귀찮게 하는 실례를 범할 정도로 모자란 놈은 아닙니다.”

집사에게 할 말이란 것은 안다. 하지만 고용 계약과 처벌은 루스티첼 부인의 손에서 이뤄진다.

“길버트 같은 놈, 아니, 길버트는 이 저택에 있어 봤자 하등 도움이 안 됩니다. 분위기라는 것도 있고 또, 제가 당사자가 아니라서 말씀드리기 뭐하지만 하녀들을 성희롱하기도 했고…….”

하인이 힐끔 루스티첼 부인의 눈치를 봤다. 성희롱 같은 파렴치한 일을 귀부인의 앞에서 담아도 되는지 걱정됐다.

“이미 들었으니 걱정하지 마.”

조금 전 하녀가 들어와서 길버트가 얼굴과 몸매 품평을 하고 다닌다고 말했다. 불쾌한 추파는 덤으로 던진다고.

“그리고 휴일을 억지로 바꾸는 일이 사소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일하는 입장에서 휴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니까.”

흔히 월급날과 휴일만 바라보며 산다고 하는데 오죽할까. 상사가 멋대로 바꿔도 짜증 나는데 동료가 그러니 화날 만하다. 여태까지 묵묵했던 것도 워낙 성격이 좋기 때문일 터.

‘그리고 그런 사람들한테만 제멋대로 굴었겠지.’

날카로운 속내를 감추고 루스티첼 부인은 하인을 향해 빙긋이 미소 지었다.

“뭘 걱정하는지 알겠어. 문제 많은 사람을 계속 쓸 순 없지.”

하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 진심 어린 모습에 루스티첼 부인의 마음 역시 누그러졌다.

사실 길버트를 해고하는 것은 아까 집사와 얘기할 때 정해졌다.

다만 이 일을 모르는 고용인들이 갑작스러운 해고에 의문을 느낄까 봐 말 안 하고 있었던 거다. 해고된 이유를 주변에 물어볼 텐데 그러다 칼리오페 귀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칼리오페를 상처 입히는 것에 한해선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배제하고 싶었다.

그 탓에 길버트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몰려와 이런저런 제보를 하게 된 것이다. 차마 엄마인 루스티첼 부인에게 길버트가 한 말을 전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칼리오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엄마로서 가슴이 뿌듯해졌다.

‘게다가 그 덕에 일이 편해졌어.’

이제 해고 사실이 알려져도 아무도 의아해하지 않을 터. 또한 다른 가문에서도 문제 있었던 사람을 쓰지 않을 거다.

이제 소식을 알릴 일만 남았다.

* * *

“젠장!”

길버트는 맥주잔을 쾅 내려놓았다.

술집 주인이 흰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시키니 술을 내주긴 했는데 길버트가 빈털터리가 됐다는 소식이 파다했다. 루스티첼 가에서 내쫓기는 것으로 모자라 아예 루스티첼 령에 출입금지가 내렸다던데.

‘저놈 집이 루스티첼 령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돈을 벌기 위해 제도에 있는 루스티첼 저에서 입주 하인으로 일한다고 들었다.

‘제도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데다가 하인으로 일한 경험조차 없는 영지민을 딱하게 여겨 입주 하인으로 써주셨는데……. 그런 은혜를 입은 주제에 일하면서 고용인들 사이에 분란만 일으켰다지?’

주인이 혀를 끌끌 찼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들은 장사하며 수없이 봤다. 주로 외상으로 술 마시고 나른 놈들이 그렇다. 그래서 그런지 남 일 같지 않았다.

‘재산도 잃었고 집도 못 가고. 거지 신세가 따로 없네. 소문 도는 걸 보니 새로 직장 구하기도 글렀고. 술값은 받을 수 있나?’

이 은혜도 모르는 놈이 절대 외상을 갚을 리가 없는데, 싶어서 주인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그때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며 술집 안에 한 무리가 들어섰다.

“그 자식 잘린 기념으로 내가 쏜다!”

루스티첼 저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이었다. 길버트가 눈을 번뜩였다.

“너 이 새끼들!”

길버트가 벌떡 일어나 그들을 향해 삿대질하며 외쳤다.

“아, 술맛 떨어지게.”

“그러게 말이야.”

고용인 무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밖으로 나가려 했다. 주인은 얼굴을 파삭 구겼다. 돈도 없는 진상 하나 때문에 손님을 잃게 생겼다.

“어딜 가?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이 지경이 됐는데!”

취기를 못 이겨 비틀거리면서도 길버트는 우렁차게 소리 질렀다.

“한두 마디 했다고, 뭐? 성희롱? 어이쿠, 무서워라! 누가 관심이나 있대? 꼴에 치마 입었다고. 고마운 줄이나 알아야지!”

이어지는 폭언에 술집에 있던 사람들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나.”

직장도, 집도, 재산도 잃었으면 정신 차릴 줄 알았더니. 덩치 큰 하인이 혀를 찼다. 평소 길버트가 갖은 진상짓을 벌여도 그를 보면 꼬리를 말았다. 큰 덩치 때문이다.

남들 보고 비굴하다 했지만 정말 비굴한 사람은 길버트였다. 취기가 만용으로 변한 건지 지금은 평소의 비굴함이 쏙 들어갔지만.

“여기서 소란 피우지 말고 밖으로 나와. 니 억울한 사정 다 들어줄 테니까.”

하인은 억울한 사정을 들어준다고 말하면서 관절을 풀었다. 우두둑 우두둑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하! 누가 쫄 줄 알고?”

길버트는 술기운에 휩싸여 패기롭게 먼저 문을 열었다. 그러곤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따라와. 내가 네놈들에게 오늘 인생 공부시켜줄 테니까.”

무리가 우르르 사라지고 나자 딸랑딸랑 종소리만 남았다. 그 소리에 넋 놓고 구경하던 가게 주인이 정신을 차렸다.

“계산……. 내 손님……. 오늘 매출이…….”

맥주값 안 내고 나른 거로 부족해서 단체 손님까지 데려가다니.

“길버트 놈 보이기만 해봐.”

주인이 소금을 팍팍 뿌리기 시작했다.

* * *

술집 영업이 끝난 이른 새벽.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가게 뒷문으로 나온 주인이 흠칫했다.

‘저게 쓰레기야, 사람이야?’

쓰레기통 옆에 쓰레기처럼 너저분해진 거적때기가 웅크려있었다. 길버트였다.

주인은 서둘러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소금을 한 사발 가져와 길버트 위에 들이부었다. 새하얀 알갱이가 떨어지는 게 마치 폭포 같았다. 그 청량한 광경에 가게 주인은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시는 오지 마라!”

주인은 바닥에 침을 퉷 뱉었다. 그래도 입이 근질거렸다.

‘이미 소문이 날 대로 났겠지만 나도 합세해야지! 이 거리에 다시는 발도 못 붙도록!’

* * *

“오라바미.”

(오라버니.)

칼리오페의 부름에 심각한 얼굴로 책을 보던 로베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응? 우리 리페 오빠 찾아왔구나! 오빠가 놀아줄까?”

로베르트는 금세 신이 나서 책을 옆으로 밀었다.

“아니여, 구게 아이라……. 오라바미 책 께소 보때여.”

(아니요, 그게 아니라……. 오라버니 책 계속 보세요.)

“응? 책?”

로베르트의 웃음이 살짝 흔들렸다.

칼리오페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게 무척 반갑기도 했지만, 책을 그만 읽을 핑계가 생겼다는 것 역시 좋았기 때문이다.

칼리오페가 로베르트의 옆에 사뿐히 주저앉았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로베르트의 입매가 흐물흐물 풀어졌다.

‘귀엽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귀엽지? 역시 날 닮아서?’

칼리오페가 이렇게 다가와 곁에 있는 건 처음이었다. 로베르트는 신이 나서 칼리오페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생각했다.

‘아, 혹시 책을 읽는 내 모습이 멋있어서? 그거 뭐라고 했지……. 지진다? 아닌데. 뒤진다인가?’

지적이라는 단어를 몰라서 로베르트가 골몰했다.

어쨌든 칼리오페는 유난히 똑똑한 아이니 그런 면모를 좋아할 만했다.

사실 로베르트가 책을 보고 있던 것도 칼리오페 때문이었다.

[너 책 좀 읽어라. 그러다가 리페에게 무식한 오빠 된다.]

루시우스의 말이 책과 담쌓았던 아홉 살 인생을 바꿨다.

자의적으로 책을 읽는 아들을 보고 루스티첼 부인은 눈물마저 글썽였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모습을 떠올리자 칼리오페가 왜 다가왔는지 확실했다.

‘이 오빠의 멋있음에 눈을 뜬 거야!’

로베르트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리페, 오빠가 뒤지게 멋있었구나!”

“…….”

칼리오페의 얼굴이 갑자기 싸늘해졌다.

“오라바니, 어디더 구런 마루 배어뚬미까.”

(오라버니,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습니까.)

“으응?”

“올바루 언어 땨용이 인떠우 만둠니댜. 땨라문 말가 행도우로떠 자디누 인푸물 대변함니댜. 아푸로 구론 말 뚜지 마떼여.”

(올바른 언어 사용이 인성을 만듭니다. 사람은 말과 행동으로써 자신의 인품을 대변합니다. 앞으로 그런 말 쓰지 마세요.)

“어어, 으응…….”

칼리오페의 박력에 밀려 로베르트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발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대변이라니, 응가? 우리 리페가 그런 말을 한단 말이야? 그럴 리 없어!’

로베르트는 현실을 부정했다. 현실이 아니긴 했지만.

무식해서 생긴 비극적 오해였다.

“야또김미댜.”

(약속입니다.)

로베르트의 오해를 모르는 칼리오페는 새끼손가락을 쓱 내밀었다.

‘음, 오라버니는 아직 어린애니까 이렇게 해줘야지.’

애들한테는 말로만 약속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손짓도 같이해서 기억에 남겨주는 게 좋다.

로베르트는 갑자기 내밀어진 조그마한 주먹에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가 곧 칼리오페의 의도를 깨달았다.

‘귀여워.’

그는 웃으며 홀로 펴지지 못한 칼리오페의 새끼손가락을 들어 제 손가락을 감았다.

“자, 약속. 새끼손가락 고리 걸어 꼭꼭 약속! 도장! 복사! 싸인!”

로베르트가 신이 나서 손을 요리조리 움직였다. 그의 손의 반도 안 되는 작은 손이 그에 맞춰 옴찔거린다.

‘칼리오페 넘 귀엽다!’

‘역시 오라버니는 아직 애야. 뭐, 귀엽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장단에 맞춰주며 귀여워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가씨, 도련님 참 귀엽게 노시네.’

유모가 그런 둘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똑같은 산호빛 눈동자가 서로를 똘망똘망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인형 같아서 더 귀여웠다.

* * *

로베르트는 칼리오페와 나란히 앉은 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화를 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책 읽는 모습이 꽤 멋지게 비친 것 같다. 로베르트의 목에 힘이 뻣뻣하게 들어갔다. 그의 생각이 꼭 틀린 건 아니다. 칼리오페는 놀기 좋아하는 둘째 오라버니가 책 읽는 게 대견해서 말을 붙였던 것이니까.

로베르트가 보는 것은 산술책이었다. 큼직한 사과 여섯 알과 여덟 알이 왔다 갔다 했다.

그는 칼리오페 몰래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하나, 둘, 셋 넷…… 어?’

여섯을 세고 나머지 여덟을 다 세지 못했는데 손가락이 부족했다.

로베르트는 힐끔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몸을 움직이는 것에는 좀 자신 있지만 아무래도 이런 문제엔 약하다. 동생에게 무식한 오빠가 되기 싫었던 로베르트는 자신 있는 척 펜을 놀렸다.

‘어차피 리페는 잘 모를 테니까. 찍자! 답은 18!’

“오라바미.”

(오라버니.)

“어? 어, 왜?”

칼리오페가 답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지레 찔린 로베르트가 화들짝 놀라 답했다.

칼리오페는 그런 로베르트를 차분히 바라봤다.

‘틀렸다고 답을 알려주는 건 쉽지만 교육에는 별로 좋지 않겠지.’

정답을 말해 주는 것보다 스스로 생각해서 답을 도출해내게끔 도와주는 게 좋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게 하려면 틀렸다는 걸 알려줘야 한다.

‘그 나이에 셈에 서투른 건 당연하지만, 아무래도 한참 어린 동생에게 지적받는 건 속상하겠지. 한창 그럴 나이니까.’

좀 더 크면 모를까 지금은 세상의 중심이 본인인 때다. 칼리오페는 고민했다. 사실 그런 문제보단 다른 게 더 문제였지만 그녀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로베르트는 자존심이 상하는 것보다 동생에게 ‘뒤지게’ 멋진 오빠가 아닌 무식한 오빠가 되는 것에 충격 받았을 것이다. 지켜보던 유모는 무려 덧셈을 하는 아가씨의 지능에 기절했을 테고.

‘난 아직 아기니까 그 점을 이용해야겠어.’

두 사람의 정신 건강에 다행하게도 칼리오페는 로베르트의 기분을 생각해서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그녀는 로베르트의 옷깃을 꼬옥 붙잡았다.

“오라바미, 리페 뚜짜 가루터쥬데여.”

(오라버니, 리페 숫자 가르쳐주세요.)

일부러 애 같은 말투로 말했다. 그래 봤자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말한 것뿐이지만.

“어? 숫자?”

로베르트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역시 책 읽는 자신의 모습이 멋있던 것이다. 뒤지게!

“그래그래, 우리 리페 아주 선생님을 잘 찾아왔어. 오빠가 숫자 하나는 완벽하게 알고 있거든. 루스 형보다 더 잘 알아. 숫자 천재라고나 할까.”

6 더하기 8을 18이라고 한 숫자 천재가 턱을 척 치켜들었다.

“우리 리페 손가락을 펴 볼까. 그리고 이렇게 접으면……. 어, 안 접어지네.”

손가락 하나를 접으면 전체가 오므라들고 하나를 피면 전체가 펴졌다.

로베르트는 순간 숫자를 가르쳐준다는 것도 잊고 한참 동생의 손을 잡고 쪼물딱댔다.

“…….”

칼리오페는 찰흙 취급당하는 자신의 손을 슬픈 눈으로 바라봤다. 손가락이 마음대로 잘 움직이지 않는 것도 서글픈데 이젠 찰흙이 되다니.

‘아직 애인데 뭐라 할 수도 없고.’

애 보기 참 힘들다. 칼리오페는 옅은 한숨을 쉬며 손을 거뒀다.

“오라바니 쪼누로 해여.”

(오라버니 손으로 해요.)

“아, 그럴까?”

로베르트는 정신을 차리고 손을 펼쳐 들었다.

“자 봐봐. 하나, 둘, 셋…….”

천재는 범인(凡人)과 달라 오히려 가르치는 걸 못한다더니 딱 그랬다. 숫자 천재 로베르트는 혼자서 마구마구 진도를 나갔다.

‘보통 아기였으면 하나도 이해 못 했을 거야.’

하지만 칼리오페는 하나를 가르쳐주기도 전에 열을 알고 있는 초천재 아기였다. 그녀는 그냥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열이야! 손가락 열 개.”

“요리 꾸띠에여?”

(열이 끝이에요?)

칼리오페가 열심히 듣는 데다가 제가 알려줄 수 있는 질문까지 하자 로베르트는 더 신이 났다.

이런 공부엔 자신 없었는데 왜 그랬나 싶다. 이렇게 잘 아는데.

‘앞으로는 열심히 해서 리페한테 더 많이 알려줘야지.’

“물론 더 있지! 자, 오빠 손으로 부족하니까 리페 손까지 합쳐서 볼까?”

‘그냥 꼽았던 손을 다시 펴면서 하면 되지 않나.’

손가락을 뜻대로 못 움직이는데 자꾸 달라고 하니 불만이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말없이 손을 내줬다.

‘아직 어리니까 내가 이해해줘야지.’

칼리오페가 스스로 손가락을 꼽지 못하니 로베르트가 그녀의 손가락을 조물조물 움직였다.

“열하나, 열둘, 열셋. 이렇게 열 다음에 아까 하나, 둘, 셋 했던 게 붙는 거야.”

이번에는 제법 설명이라는 걸 한다. 칼리오페는 대견하단 눈으로 로베르트를 바라봤다.

‘리페가 날 존경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어!’

두 남매의 오해는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로베르트는 흥에 겨워 숫자를 마저 셌다.

“다디 떼쥬데여.”

(다시 세주세요.)

“그래! 오빠가 세줄게! 하나, 둘…….”

로베르트는 열심히 이십까지 다시 세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열 다음부터는 숫자가 그대로 붙는데, 왜 여덟에 여섯을 더하면 열여덟이지? 열에 여덟을 더해야 열여덟이잖아.’

로베르트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활짝 펼쳐져 있는 칼리오페의 손가락과 자신의 손가락을 몇 번 오간다.

‘열둘, 열셋, 열넷……. 열넷이었어!’

정답을 알아낸 로베르트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성취감이 가슴을 채웠다. 그러다가 아차 하고 칼리오페의 눈치를 봤다.

‘리페는 내가 틀린 거 모르겠지?’

로베르트는 은근슬쩍 책을 옆으로 스윽 밀었다. 물론 칼리오페는 그걸 다 보고 있었다.

‘정답을 알았나 보네.’

칼리오페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기 행세를 하는 것도 꽤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아기인 척해야지.’

실제로 진짜 아기라는 점이 아이러니했지만, 칼리오페는 만족했다.

“오라바미 더뿌네 잘 아게떠여. 고마어여.”

(오라버니 덕분에 잘 알겠어요. 고마워요.)

“아니야. 이런 거 가지고 뭘.”

로베르트가 뒷목을 긁적이며 헤헤 웃었다. 얼굴에 뿌듯함이 가득했다.

칼리오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작게 미소 지었다.

“구롬 저누 이마 방우러 가께여.”

(그럼 전 이만 방으로 갈게요.)

“응, 그래. 또 궁금한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루스 형 말고 이 오빠가 잘 가르쳐줄 테니까!”

“네, 감쨔해여.”

(네, 감사해요.)

로베르트는 칼리오페를 일으켜 세워주고 손을 흔들었다.

칼리오페가 모퉁이를 돌 때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 서 있다가,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재빨리 주저앉아 답을 고쳤다. 정답이라는 확신이 들자 그 재미없던 산술공부도 꽤 흥미로웠다.

‘더 잘 알게 되면 우리 리페한테 더 많이 가르쳐줄 수 있겠지?’

로베르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여섯 살 어린 동생에게 가르침 받았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 * *

“오늘 로베르트에게 숫자를 배웠다면서.”

루시우스가 방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칼리오페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쪼으 바미에여, 오라바미.”

(좋은 밤이에요, 오라버니)

“아, 좋은 밤이다.”

급한 마음에 무턱대고 질문부터 했다. 루시우스는 아차 해서 칼리오페에게 인사했다. 그의 여동생은 어린데도 예법에 깐깐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2살짜리가 예법을 따지는 건 좀 너무 이른가 싶지만.’

루시우스는 내색하지 않고 생각을 속으로만 삼켰다.

로베르트는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지만, 루시우스는 제 여동생이 남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루시우스는 칼리오페의 특이한 언행을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고 했다. 어린 동생에게 쓸데없는 위화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칼리오페는 남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 가족이 보금자리가 되었으면 했다. 집 밖에서도, 집안에서도 스스로를 이방인이라고 여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쮸녀의 방에 노쿠도 업찌 두러오누 거 찌레임미댜.”

(숙녀의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오는 건 실례입니다.)

“…….”

하지만 아무리 평범하게 대하자고 다짐해도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면 무척 힘들었다. 루시우스는 자신이 표정 없는 것에 감사했다.

“미안하다.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하지.”

루시우스는 2살짜리 꼬마, 아니, 아기 숙녀에게 성심을 다해 사과했다.

아기 숙녀가 새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의 반이 머리인지라 온몸이 흔들렸다.

어쩔 수 없이 루시우스의 입매가 풀어졌다. 자신도 모르게 칼리오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구래더, 무쯘 이리찌가여?”

(그래서, 무슨 일이신가요?)

칼리오페의 질문에 루시우스는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다급하게 칼리오페를 찾은 것은 이유가 있었다.

“로베르트가 네게 숫자를 가르쳐 줬다는 말을 들었다.”

“네, 두째 오라바미께조 도우무 주져쬬.”

(네, 둘째 오라버니께서 도움을 주셨죠.)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눈을 깜빡거리는 칼리오페를 보고 루시우스가 입매를 굳혔다.

아무 문제도 없다. 오히려 잘된 일이다. 남매간의 우애가 깊고 이로 인해서 로베르트가 공부에 흥미를 붙인 듯하니. 맏이로서 분명 뿌듯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쁠까.

[형, 형! 루스 형! 오늘 무슨 일 있었는지 알아? 응? 모르지? 궁금하지? 궁금해 죽겠지?]

조금 전 들었던 로베르트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울렸다.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

[글쎄, 우리 리페가 말이야.]

리페라는 말에 루시우스는 즉각 관심을 보였다. 여전히 무표정하지만 눈은 전과 달리 로베르트를 향했다.

로베르트는 악동처럼 씨익 웃었다. 승리자의 미소였다. 그때 눈치챘어야 했다.

[나한테 숫자를 알려달라고 하지 않겠어? 다른 누구한테도 아니고 나한테! 책을 읽는 내 모습이 뒤지게 멋있어 보였던 거지!]

[…….]

[알려주는 내내 내 손 붙잡고 어찌나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던지! 아주 깨물어 주고 싶었어. 다 알려주고 나서는 고맙다면서, 막 나밖에 없다는 듯이 그 커다란 눈으로 쳐다보는데……!]

결국 루시우스는 참지 못했다. 부러움을 참지 못한 게 아니다. 질투 난 게 아니다. 루스티첼 가의 차남이자, 자신의 동생인 로베르트가 상스러운 말을 하는 걸 참지 못한 것이다.

동생 훈육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주먹을 들었다. 때리는 자신의 마음이 더 아팠다.

진짜다.

[아악! 왜 때려!]

[‘뒤지게’라니, 그런 천박한 말 쓰면 앞으로 내게 뒤지게 맞을 줄 알아라.]

그 말만 남기고 루시우스는 쿨하게 동생을 등졌다. 평소처럼 침착하게 걷다가 점점 발걸음이 빨라졌다.

종래에는 뛰다시피 걸어 숙녀의 방문을 벌컥 연 것이다.

‘나도 잘 가르쳐 줄 수 있는데!’

“리페.”

“네, 오라바미.”

(네, 오라버니.)

“나도 산수 잘한다. 내가 로벨보다 더 잘해.”

“네……?”

칼리오페는 얼음 기사라고 불리는 자신의 첫째 오빠를 바라봤다.

‘설마……?’

루시우스의 얼굴은 평소처럼 묵묵했다. 날카로운 눈매와 일자로 다물린 입술. 질투하는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럼 그렇지. 루시우스 오라버니가 질투라니.’

그렇게 안 어울리는 게 세상에 또 어딨을까.

칼리오페가 아는 루시우스는 아기에게 관심이 없다. 딱히 말로 한 적은 없지만 어린애는 시끄럽고 귀찮다고 생각하는 게 역력히 보였다. 과거로 돌아왔다고 해도 그 성격이 어디 갈 리는 없다.

‘뭔가 변덕이 불었나 보네. 형제지간은 최초의 경쟁 관계라고도 하니까 그런 건가.’

밤중에 찾아와서 자기가 더 낫다고 말할 정도라니. 열 살 난 오라버니의 치기 어린 경쟁심에 웃음이 나왔다.

“뮤로 오라바미께죠누 자라디죠. 로베루 오라바미더 마탸가디구여. 두 오라바미우 땡가까 뚜디 다루데 비겨하 꼬 이께뚬미까.”

(물론 오라버니께서는 잘하시죠. 로벨 오라버니도 마찬가지고요. 두 오라버니의 생각과 뜻이 다른데 비교할 것 있겠습니까.)

칼리오페의 말에 루시우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일곱 살 어린 여동생의 말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고차원적이었다.

그는 깊은 고민에 잠겼다.

‘그래서 앞으로 계속 로벨한테 묻겠다는 거야, 아니면 나한테 묻겠다는 거야.’

칼리오페가 손을 꼬옥 잡으면서 알려달라고 하는 걸 보고 싶었다. 다 알려주고 나면 이 세상에 첫째 오빠밖에 없다는 듯 동그란 눈으로 쳐다보는 것도 보고 싶었다.

루시우스의 심각한 얼굴을 오해한 칼리오페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오라바미우 땅대누 애부가 아니아 내부에 이뚬미댜. 다기 댜딘가우 따우메소 뚜리하누 고디 지저한 뚜리라 하 뚜 이쪄여.”

(오라버니의 상대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 할 수 있어요.)

자기 자신과의 싸움.

루시우스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께서 자주 하시던 말을 어린 여동생이 똑같이 하고 있다.

[검을 겨누고 있는 눈앞의 상대가 아니라, 검을 들고 있는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기사의 싸움이다.]

검 끝을 내부로 향하고 자신 안의 적을 죽일 때, 비로소 검의 오의를 볼 수 있다.

항상 명심하라 가르침 받았던 말을 어찌 잊었을까. 이렇게 어린 동생도 당연하게 깨우치고 있는 사실을.

루시우스는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다. 기재라는 소리를 듣고 또래보다 앞서 나가면서 스스로도 모르는 새 오만해졌던 것 같다.

‘그래, 리페 말대로 로베르트와 경쟁할 문제가 아니지.’

깨우친 사실에 눈앞이 씻긴 것 같았다. 청명해진 시야로 칼리오페의 얼굴이 보였다.

루시우스는 깨달음에 따라 칼리오페에게 물었다.

“오빠가 동화책 읽어줄까?”

똑같이 숫자나 가르쳐 주겠다고 경쟁하는 건 무의미하다. 그가 칼리오페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넘쳐난다.

“…….”

칼리오페는 루시우스가 갑자기 밤중에 찾아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어졌다.

‘역시 어린애의 사고는 이해하기 힘들어.’

칼리오페는 한숨을 쉬었다.

그날부터 매일 밤, 루시우스는 칼리오페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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