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페로몬에 잠식되어 정신을 잃은 희주를 데리고 온 곳은 강현우의 집이었다. 사실 학교에서는 희주의 집이 더 가까웠지만 제정신이 아닌 희주더러 문을 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인 데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일주일 가까이 지속될 사이클 기간을 고려했을 때 제집이 나으리라는 판단이 선 까닭이었다.
끼이익. 지하 주차장의 우레탄 바닥에 타이어가 쓸리면서 듣기 싫은 마찰음이 울렸다.
“상무님! 서 박사님이 곧 오신다고……!”
“도착하는 대로 곧장 올려 보내세요.”
제대로 멈춰 서기도 전에 잠금장치를 풀어 버린 강현우가 다급히 차에서 내렸다. 축 늘어진 희주를 단단히 안은 채였다. 뒤에서 안 실장이 더 무어라 하는 말이 들렸지만, 듣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그 짧은 몇 초 동안 강현우는 턱 근육이 불거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희주가 정신을 잃은 중에도 계속해서 페로몬을 풀어 대는 통에 몇 번씩이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만약 제가 우성이 아니었더라면 당장에라도 이성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강현우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문을 열어젖혔다. 우악스러운 걸음과는 달리 희주를 침대에 눕히는 손길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평소 스스로가 이성적이라 여겼는데, 머릿속이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미간을 좁힌 강현우는 땀에 흥건하게 젖은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차마 희주에게 손을 대지는 못하고,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하는 눈빛이 욕정으로 일렁거렸다.
성기는 진작 슈트 바지가 팽팽하게 당겨질 만큼 발기해 있었다. 쉴 새 없이 일렁이며 저를 유혹해 대는 페로몬 때문에, 이끌리듯 제 페로몬을 풀어내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힌 지도 오래였다.
하지만 강현우는 기절하기 직전까지 저를 거부하던 손길이 떠올라 희주에게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다. 혹시나 이대로 영영 저를 밀어낼까 봐. 강현우는 그토록 보고 싶고, 닿고 싶어 했던 연인을 바로 앞에 마주하고도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그때 여태 미동도 없이 늘어져 있던 희주가 움찔거렸다. 강현우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침구에 밴 페로몬을 쫓기라도 하는 것처럼 베개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희주를 가만히 내려다보면서 강현우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천천히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땀에 젖어 볼에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겨 주었다. 손끝에 닿는 피부가 델 듯이 뜨거웠다. 이대로 뒀다가는 쇼크가 올까 걱정이었다. 당장 억제제를 맞아야 할 텐데 안 실장이 불렀다는 주치의가 언제 도착할지가 미지수였다.
기실 형질자의 발정통에는 상대 형질자의 페로몬만큼 도움이 되는 것은 없었다. 전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아님에도 강현우는 필사적으로 페로몬을 억눌렀다. 반가움이든 그리움이든 저만의 감정에만 취해 있을 수는 없었다.
만나면 하려고 했던, 또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용서를 구하고, 또 사랑을 바라고 싶었다. 진심 어린 감정을 온전히 희주에게 안겨 주고 싶었다. 형질과 페로몬 따위에 휩쓸려, 아물지 않은 상처 위에 더 깊은 상처를 새기는 짓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돌겠네.”
저도 모르게 희주의 볼을 진득한 손길로 쓸어내리던 강현우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얼른 손을 거두었다. 잠시의 접촉 탓인지 감긴얇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강현우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내 감겨 있던 눈이 뜨이면서, 물기 어린 눈동자가 드러났다.
“희주 씨.”
황급하게 몸을 숙인 강현우가 희주의 이름을 부르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단순히 눈만 뜬 것만은 아닌지, 목소리에 반응하듯 초점이 흐려진 눈동자가 느릿하게 강현우를 향했다. 강현우는 희주가 저를 온전히 바라봐 주는 것에 크게 안도했다.
“희주 씨.”
재차 이름을 부르자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눈에 조금씩 초점이 잡혔다.
“아……. 현, 우 씨…….”
희주는 자꾸만 감기려는 눈에 억지로 힘을 주어, 저를 부르는 이를 바라보려 부단히 애를 썼다. 익히 아는 목소리였다. 환청이 아닌 걸까. 자신이 내내 찾던 그 사람이 맞는지, 혹시나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희주는 간절하게 손을 뻗었다.
“아, 흑…….”
강현우는 얼른 희주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러자 희주가 눈물을 뚝뚝 흘려보냈다. 이제야 보이는 그리운 얼굴에 울컥 저도 모르게 서러운 울음을 터트린 희주가 마주 잡은 손을 놓지 않겠다는 듯 힘을 주었다.
“보고, 싶었어요…….”
소리가 채 맺히지 않은 말이 입 안에서 웅웅 맴돌았다. 머리를 거치지 않고 마구잡이로 튀어 나가는 말들이 더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말을 하면 할수록 눈앞이 자꾸만 흐릿해져 가고 목소리 대신 헐떡이는 숨이 쏟아졌다. 왜 이렇게 숨이 차지. 그러고 보니 조금 더운 것도 같았다. 결국 희주는 무어라 말을 하다 말고 밭은 숨을 헉헉 내쉬었다.
희주는 강현우의 손을 쥐고 있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제 몸을 더듬거렸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몸이 뜨거워서 옷이라도 벗고 싶었다. 저 자신이 이성을 잃은 채 본능을 따르고 있는 줄도 모르고, 희주는 몸을 갑갑하게 옥죄고 있는 옷가지들을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겼다.
“아……!”
옷깃을 간신히 잡고 있던 손이 풀리면서 힘 있게 튕겨져 나갔다. 허공을 가른 손이 배와 성기, 허벅지를 가볍게 스치고 시트 위에 안착했다. 맨살에 직접적으로 닿은 것도 아니고, 그저 옷 위를 스친 것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잔뜩 느껴 버린 희주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신음했다.
벼락과도 같은 쾌감이었다. 희주는 눈을 부릅뜨고 덜덜 떨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잔뜩 어리둥절해져서는 천천히 고개를 바로 했다. 아래로 시선을 옮겨 보았지만, 똑바로 누워 있는 통에 제 몸이 보일 리가 없었다. 다만 느껴지는 것은 있었다. 아까는 아무리 애써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 당혹스러웠던 몸이, 이제는 성기며 엉덩이며 할 것 없이 옴쭉옴쭉 힘이 들어가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아까? 아까, 언제? 나 왜… 왜 이러지…….”
뚝뚝 끊어지는 혼잣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하, 읏……. 나 죽을, 것 같…….”
그래. 정말 딱 죽을 것만 같았다.
희주는 당장 강현우의 손을 끌어당겼다. 제 욕구를 해소해 주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페로몬이었지만, 가까이 당긴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금단 현상을 겪던 중독자처럼 급하게 페로몬을 흡입했다. 가슴이 크게 부풀고, 다리 사이가 좁아졌다. 억누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농도에 어쩐지 안달이 났다.
“……잠깐만. 잠깐만요, 희주 씨.”
보다 못한 강현우가 희주의 손을 억지로 떼어 냈다. 정신이 드는 듯하여 안심했는데, 말릴 새도 없이 갑작스럽게 폭주해 버리는 통에 당황한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로 짙게 퍼지는 페로몬에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렇게 계속 같은 공간에 있으면 더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아, 가지, 가지 마세요.”
희주가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머리가 망가져 버릴 것 같았다. 무섭고, 서럽고, 또 화가 나기도 했다.
“희주 씨. 희주 씨 지금 히트 사이클 때문에 제정신 아니에요.”
“으응, 흑, 제발…….”
“의사가, 금방 약 가지고 온댔어요. 조금만, 조금만 참아 봐요. 응?”
희주는 어리광부리듯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당장 성욕을 풀어도 모자랄 판에 왜 자꾸만 참으라고만 하는지, 희주는 원망으로 일그러진 눈으로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싫어……. 왜, 자꾸… 왜…….”
잔뜩 경직된 표정이지만 그 밑에는 분명 저와 비슷한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래서 희주는 강현우가 왜 자꾸만 저를 떼어 내려고만 하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여 있던 페로몬이 다시 한번 왈칵 쏟아지면서, 울음 섞인 물음이 흘러나갔다.
“이제는 나 안 좋아해요……?”
좋아한다면서. 제 생각만 했으면 좋겠다면서. 그의 말대로 이제는 정말 강현우 외의 다른 알파는 좋아할 수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는데…….
왜? 내가 생각할 시간을 가지자고 해서? 희주는 제가 했던 말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하지만 강현우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의 옆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져서, 당장 눈앞의 상황을 회피하고자 되는 대로 뱉은 말이 결국 그따위의 말밖에 되지 않은 것이었다.
강현우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피해 오면서 느낀 건, 초라함이 아니라 그리움이었다. 매일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서로의 일상을 나누던 것도, 주말마다 서로의 시간을 공유하며 여유를 만끽하던 것도, 그와 나눴던 모든 일상이 그리웠다.
이제는 그 어떤 조건도 더는 필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 보여도 괜찮았다. 다만, 너무 늦어 버린 것이 아닐까 하고 덜컥 겁이 났다.
희주는 물막으로 시야가 흐린 눈을 겨우 깜빡거렸다. 열기로 인해 가만히만 있어도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신음과 울음소리가 뒤섞인 숨을 할딱거리며 자꾸만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어떻게 되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잘못했어요…….”
상태는 점점 더 심각해져 갔다. 희주는 횡설수설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더니 급기야 강현우에게 잘못을 빌기 시작했다. 놓친 강현우의 손을 붙잡았다가, 다시 얼굴을 가져다 대고 뭉근하게 비볐다. 비교적 서늘한 체온이 달아오른 얼굴을 식혀 주자 만족스러운지 눈가를 휘었다.
희주는 울다가 웃기를 반복했다. 달아오른 몸이 괴로워 눈물을 뚝뚝 흘리다가도, 강현우가 너무 좋아서 실실 웃었다. 또 제 것을 빼앗기기라도 할까, 뭉툭한 손끝을 아예 입 안으로 욱여넣었다. 살갗이단단한 치아에 닿을 때마다 페로몬이 느껴져서 검지와 중지, 약지를 오가며 자근거리고 쪽쪽 빨아 댔다.
“으… 으우, 웃…….”
그런 희주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강현우의 눈이 점점 음습해졌다. 체온이 워낙 높아진 탓에 입 안도 그만큼 뜨겁게 느껴졌다. 강현우는 제 손을 고스란히 내어 준 채, 다른 한 손으로 턱을 감싸 쥐고 입맛을 다셨다.
본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상황이었다.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현우도 같은 형질자로서 잘 알고 있었다. 희주가 아무리 울고 애원해도 저만은 이성을 붙들리라 오는 동안 굳게 다짐했는데, 이렇게까지 애처롭게 호소하는 모습을 보니 더는 참을 수가 없어졌다.
“하아…….”
강현우는 깊은 한숨을 터트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제는 안 좋아하느냐고?
왜인지 화난 사람처럼 굳어 있던 시선이 희주에게 닿았다. 강현우는 제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희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우느라 새빨개진 얼굴이 안쓰럽기도 하고, 이 모든 것이 저의 불찰로 인해 일어난 일인 것만 같아 마음이 쓰라렸다.
희주의 입 안에 갇힌 손가락을 돌려 입천장과 볼 안쪽 점막을 느릿하게 쓸어 보았다. 손가락은 마치 혀라도 되는 것처럼 말랑한 혀를 문지르고 얽어 지그시 헤집었다. 계속된 자극에 고인 침이 손가락을 무느라 벌어진 틈으로 흘러내렸다. 그나마 이지가 남아 있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내가…….”
강현우가 낮게 가라앉아 갈라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미 반쯤 풀려 있는 눈이 강현우의 목소리를 따라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시선이 맞춰지는 순간 강현우는 억누르고 있던 페로몬을 쏟아 냈다.
“희주 씨를 안 좋아할 리가 없잖아요.”
“아……!”
알파 페로몬이 거대한 파도처럼 온몸을 덮쳤다. 어딘가로 불쑥 끌어 내려지는 것 같은 기이한 감각에 작은 몸이 크게 들썩거렸다. 희주는 저도 모르게 이를 콱 세웠다. 물린 선단에서부터 아릿함이 퍼져 나갔지만, 강현우는 대수롭지 않게 혀를 눌러 손가락을 빼내었다.
“으응…….”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와중에도 희주는 도리질을 쳤다. 입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이 빠져나간 것이 허전해, 입술을 달싹이며 혀를 내밀었다. 하도 바르작거리는 통에 제가 누워 있는 침대 한쪽이 묵직하게 기울어지는 것도 알지 못하다가, 어둑하게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나서야 희주는 강현우가 제 위에 올라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강현우의 고개가 숙어졌다. 본능적으로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챈 희주는 다급하게 입술을 벌리고 두 팔을 뻗었다. 입술이 맞물리고, 그 틈을 벌려 말랑하고 축축한 살덩이를 옭아매는 단계도 없이 처음부터 벌어진 채 붙은 두 입술이 육욕적으로 서로를 베어 물었다. 두툼한 혀와 함께 페로몬이 쏟아져 들어왔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것이 상대방의 타액인지 페로몬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당신을 초라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
옅게 땀이 배어 나와 축축해진 살갗 위로 입술이 기었다. 강현우는 희주에게서 입술이 떨어지면 안 되는 사람처럼, 볼과 턱에 입술을 붙이고 낮게 중얼거렸다.
귓불을 입에 넣자 희주에게서 앓는 소리가 길게 흘러나왔다. 간지러운지 입술을 피해 돌아가는 고개를 따라 유려한 목선이 드러났다. 매끈한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강현우가 페로몬이 흘러나오는 샘을 따라가듯 입술을 내리눌렀다.
“흣, 간지, 러워…….”
다리가 배배 꼬였다. 이미 한 번 사정이라도 한 것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로 젖은 속옷과 바지가 척척하게 살갗에 달라붙어 간지러웠다. 강현우가 페로몬을 쏟아붓기 시작할 때부터 속옷은 그 구색을 잃은 지 오래였다.
“내가 당신을 속이고, 기만한 거라고 생각해서 차라리 당신이 나한테 화라도 냈다면…….”
“흐읍……. 아…….”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날 두고 가 버리는 그 모습이 자꾸 생각이 나서…….”
얇은 윗옷이 배꼽 위까지 밀려 올라갔다. 강현우는 힘이 들어가 있는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잠시 쓸어 보다가 바로 윗옷을 벗겨 냈다. 옷가지를 침대 아래로 던지자마자 곧바로 낭창한 두 팔이 강현우의 목에 둘렸다.
축축하게 젖은 속옷 또한 바지와 함께 발목 밑으로 끌어 내려졌다. 휘감기는 두 팔이 기꺼워 입술을 깊게 머금은 강현우는 마치 용서를 구하듯 꿇은 무릎으로 희주의 다리 사이를 벌렸다.
“희주 씨야말로 이제 더는 날 안 좋아할까 봐.”
입 안을 헤집으면서 묻은 타액은 이제 더는 미끈거리지 않았다. 살짝 메말라 끈끈해진 손가락으로 톡 튀어나와 있는 유두를 문질렀다.
“흐읏…….”
희주의 허리가 빳빳하게 굳었다. 등허리가 꼿꼿하게 펴지면서 몸과 침대 사이에 생긴 틈으로 단단하게 팔을 밀어 넣은 강현우가 희주를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바짝 솟은 유두를 엄지로 문지르며, 숨을 할딱일 때마다 드러나는 가슴뼈 위로 손가락들을 미끄러뜨렸다. 만질수록 유두가 조금씩 더 단단해졌다. 강현우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조그만 유륜까지 통째로 집어삼켰다.
축축한 혀가 유두를 누르고 문질렀다. 유두 주변의 가슴살까지 있는 대로 베어 문 채 강하게 빨아당기자 희주는 몸부림을 치다가 이내 다시 끌어당기며 더 해 달라는 듯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으응……. 음, 응…….”
다정하게 저를 옭아매는 페로몬에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강현우의 손과 입술이 닿는 곳마다 쾌감이 지르르 울리고, 그럴 때마다 날 것의 신음이 참을 새도 없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어쩐지 모자라 안달이 났다.
희주는 풀린 눈에 힘을 주고 어느새 반대쪽 유두를 똑같이 문 채 쪽쪽 소리 내어 빨아 당기고 있는 강현우를 겨우 내려다보았다. 이미 헤집을 대로 헤집어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희주가 멍하니 허리를 들썩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은 희주에 비해 강현우는 아직까지 단정한 슈트 차림이었다. 바짝 부풀어 팽팽하게 당겨진 허벅지 위로 제 허벅지를 걸쳐 올린 희주는, 계속해서 곱아드는 발에 힘을 주어 허리를 띄웠다. 바짝 선 성기가 보드라운 천에 닿아 문질러졌다.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래를 마주 댄 채 허리 짓을 하자 달뜬 숨이 부서졌다.
“……빨리.”
얼른 제 알파를 가지고 싶었다. 발정기라는 어휘에 걸맞게 흥분에 절어 버린 뇌가 자꾸만 제 알파를 찾아 댔다. 늘 부끄러워서 떠올리려고 하지도 않아 왔던 요구들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툭툭 튀어나왔다. 이런 거 말고…….
“으……. 현우 씨… 해 주세요…….”
“하아…….”
강현우는 미치겠다는 듯 탄식을 흘렸다. 그렇지 않아도 저 역시도 페로몬에 절여질 것 같은데, 점차 노골적으로 저를 원하기 시작하는 희주를 그냥 보고 있자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희주의 허벅지를 잡아 양옆으로 벌린 강현우는 유두를 매만지던 손을 그 사이에 내렸다. 하얗게 쏟아 낸 정액이 엉겨 붙어 있는 회음부 아래로 더 깊숙하게 손가락을 미끄러뜨려, 입구까지 젖어 있는 틈새를 더듬었다. 따로 침을 묻힌다거나 윤활제를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애액으로 뒤덮인 입구로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아……. 응, 좋아…….”
간지러운 신음이 흘렀다. 희주는 망설임 없이 제 안을 채우는 손가락에 반사적으로 힘을 주었다가 서서히 몸을 늘어뜨리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길쭉한 손가락이 내벽 깊숙한 곳을 쿡쿡 찌를 때마다 허리가 찌르르 울렸다. 더 큰 자극이 필요했다.
“하으, 읏, 아… 아니야…….”
“……아니야?”
강현우가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손가락을 꽉 물고 있어 빈틈이 없을 줄만 알았는데, 손등과 손바닥에까지 미끈한 애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히트 사이클 때문에 평소보다 애액의 양이 많고 속이 말랑했지만, 그렇다고 곧장 삽입하는 건 무리였다. 강현우는 이를 악물고 손가락 하나를 더 안으로 밀어 넣었다.
“뭐가 아닌지……. 말을 해 줘야 알죠, 내가.”
굵직한 것이 하나 더 늘어나자 기민하게 알아챈 희주가 구멍을 더 바짝 조였다. 베갯잇에 붉게 달뜬 얼굴이 뭉개졌다.
“아, 아……. 이거, 이거 말고…….”
응, 이거 말고. 강현우는 구멍 안에 깊숙이 파묻힌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희주의 볼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따끈따끈하고 부드러운 살을 슬쩍 핥자, 페로몬 때문인지 그마저도 달게 느껴졌다. 자꾸만 흐무러지는 말을 연신 중얼거리던 희주가 가까이 다가온 강현우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겹쳤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 같았다. 혀를 질척하게 내어 섞는다거나 하는 깊은 입맞춤이 아닌 그저 입술만 가볍게 겹친 채 둘은 숨결을 나누었다.
“현우 씨…….”
“……응.”
희주는 강현우의 아랫입술을 감쳐물고 조심스럽게 할짝거렸다. 성기를 품은 것처럼 허리를 들썩이면서 강현우를 더듬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 눈이 강현우를 찾았다. 제 부름에 대꾸하는 목소리의 울림을 느끼면서, 희주는 속삭였다.
“현우 씨를…….”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마음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강현우는 희주가 원하는 것이 자신임을 알았다. 히트 사이클 때문에, 페로몬 때문에, 본능 때문에가 아니라 오롯이 저를 원하는 거라고 말하는 희주를 더는 참기가 어려웠다.
강현우는 제 입술을 지분거리는 작은 입술을 그대로 삼켰다. 각진 턱에 근육이 불거졌다가 가라앉았다. 신음과 타액을 모조리 빨아들이며 제 성기를 꺼낸 강현우는 여전히 입술을 떼지 않은 채 희주의 입구를 파고들었다. 분명 손가락으로 느꼈을 때 말랑했던 내벽이 빡빡하게 성기를 옥죄었다. 단숨에 안쪽까지 밀어 넣자 벌어진 허벅지가 충격으로 달달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 흐윽… 현우 씨, 응, 현우 씨…….”
“아……. 흣.”
강현우가 낮은 신음을 짓씹었다. 아직 넣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아랫배가 확 당겼다. 삽입과 동시에 가 버려 또 한 번 정액을 질질 흘리고 있는 희주의 성기를 슬쩍 내려다보았다가, 눈을 감고 흐느끼는 얼굴을 눈에 담았다. 눈물로 흠뻑 젖은 볼과 눈두덩이에 차례로 입술을 옮겼다. 말간 눈동자가 강현우를 삼켰다.
“좋아해요.”
“아, 아아……. 흡, 응…….”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어요…….”
품은 마음이 속절없이 튀어 나갔다. 강현우는 하나로 맞물린 몸을 조금 더 깊게 겹치면서 허리를 움직였다. 등 뒤로 늘어진 손이 허겁지겁 저를 찾았다.
“으읏, 흐, 아, 아……. 흐윽, 응!”
답답하리만큼 저를 온몸으로 짓누르는 무게가 기꺼웠다. 희주는 쾌감 어린 교성을 내질렀다. 아래가 꿰뚫릴 때마다 저에게도 느껴질 만큼 페로몬이 팡, 터져 나갔다. 손끝과 발끝이 저릿했다.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린 희주는 덜덜 떨면서 강현우에게 매달려 울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지는 페로몬에 지금까지보다 더한 성욕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숨을 다급하게 들이마신 희주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섬찟한 쾌감에 눈앞에 하얀 섬광이 보이는 착각이 일었다. 순간적으로 초점을 잃은 눈이 허공을 헤맸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휘몰아치는 감각에 희주는 무의식적으로 페로몬을 풀어 제 알파를 단단하게 옭아맸다.
“현우 씨, 아, 무서, 무서워, 아! 힉, 으흑, 읏!”
휘젓는 손에 강현우의 옷가지가 걸렸다. 땀이 스며들어 척척한 셔츠 위로 자꾸만 손이 미끄러졌다. 희주는 정신없이 강현우를 붙잡았다.
“좋아……. 힉, 읏, 으읍, 좋아요……. 응, 좋아해요…….”
“하아, 나도… 희주 씨, 좋아해요, 읏.”
찔꺽, 찔꺽, 음란한 소리를 내며 뚝뚝 흘러내린 애액이 시트를 엉망으로 물들였다. 한데 뒤섞인 두 개의 페로몬이 계속해서 서로를 자극했다. 강현우는 손을 내려 희주의 엉덩이를 붙잡고 더 깊은 곳을 저를 콱 밀어 넣었다. 퍽 소리가 날 만큼 성기가 처박히자 허공을 멍하니 쳐다보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흐읏……!”
숨 쉬는 방법을 까먹은 것처럼 가쁜 숨이 헐떡헐떡 넘어갔다. 온몸을 강타하는 지독한 쾌감에 발발 떨던 희주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앞이 개이고 나서야 뒤늦게 자신이 사정했음을 깨달았다. 사이클로 인한 열 때문에 절절하게 끓는 몸이었지만, 그보다 더 뜨거울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배 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희주는 막힌 숨을 가까스로 토해 냈다.
“하아, 하…….”
“후…….”
몇 번씩이나 몸에 잔뜩 힘을 주고, 또 몇 차례 정액을 쏟아 내고 나니 그제야 열이 조금씩 내리는 듯했다. 희주는 저를 덮고 있는 몸이 주는 무게와 온도를 느끼면서 풀린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멍한 머릿속에 일순 떠오르는 말이 하나 있었다. 단 한 번을 들어 본 적이 없어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진정으로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말. 희주는 이제야 그 말이 가지는 힘을 알 것만 같았다.
입 밖으로 꺼내는 데 망설임이란 없었다. 가물가물 흐려지기 시작하는 눈을 굴려 강현우를 바라본 희주는 입술을 열어 또박또박, 이미 언제부터인가 고여 있었을 제 마음을 그에게 전했다.
“사랑해요…….”
“……나도. 나도 사랑해요.”
멈칫하는가 싶던 강현우가 제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에 희주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함께 있음에 행복을 느끼는 것이 이런 건가 싶었다. 전에 느낀 초라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조금씩 눈이 감겼다. 강현우는 희주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다가 마지막에는 저를 사랑한다고 했던 입술을 머금었다.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들뜨고, 왜인지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지그시 눈을 감고 잘게 입을 맞추었다.
“일어나면 그때… 그때 다시 한번 말해 줄래요?”
힘겹게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을 본 강현우는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잠든 희주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사랑해요.”
비로소 사랑이 이어졌다.
* * *
하지만 아직 히트 사이클이 끝이 난 것은 아니었다. 희주는 잠든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페로몬을 흘려 댔다. 열에 들떠 발개진 얼굴은 가라앉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고, 새액새액 헐떡이는 불규칙한 호흡은 보는 사람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조급해진 강현우는 뒤늦게 달려온 서 박사를 붙잡고 닦달했다. 서 박사는 금방이라도 낫게 하지 않으면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궁중 어의가 된 기분으로 희주를 살펴야 했다.
처음 서 박사는 온몸이 울긋불긋한 희주를 보고 ‘혹시 상무님이 드디어 사람을 패신 걸까’ 하고 아연해질 뻔했으나, 냉큼 덧붙여지는 ‘서 박사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것 아니다’라는 강현우의 말에 나름 침착하게 진료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잠깐의 진찰 후 서 박사는 최근 며칠간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쇠약해져 있어, 열성 오메가답지 않게 요란한 사이클 양상을 보이는 것이라는 소견을 내어놓았다. 지금 당장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은 초기에 바로 대처하지 못해 힘이 워낙 많이 빠진 탓이라고 덧붙였다.
사실 알파와 관계를 가지는 것이 부작용 없이 히트 사이클을 끝낼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희주가 의식이 없는 상태이니, 서 박사는 주사를 비롯한 약물 처방을 내린 뒤 며칠간 절대 안정을 취할 것을 당부하며 돌아갔다.
“…….”
주사를 맞은 뒤 확실히 평소의 안색과 호흡으로 돌아온 희주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강현우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거듭 마른세수를 하는 강현우의 얼굴에 얼핏 자책감이 스쳤다. 완전히 이성을 잃고서 히트 사이클인 희주에게 콘돔도 쓰지 않고 정액을 쏟아 냈던 자신이 재차 떠오른 탓이었다.
서 박사는 제게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안심하라고 했지만, 임신 가능성을 떠나 이건 알파로서의 책임 문제였다. 히트 사이클로 제정신이 아닌 오메가 앞에서 저만은 이성적으로 굴었어야 했다.
내내 우느라 발갛게 부은 눈두덩이를 가만히 쓸어 보다가, 스치듯 입을 맞추었다. 미동도 없이 잠든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기를 한참, 그는 희주가 푹 쉴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아 주었다.
소파에 깊게 기대어 앉은 강현우는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는 창밖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갑작스러운 히트 사이클로 덩달아 정신이 없어졌던 터라 이제야 생각이라는 것을 할 여유가 생겼다.
이름이 유세민이라고 했던가. 강현우는 희주의 근무지에서 봤던 오메가를 떠올렸다.
희주가 자리에 없어 모두가 당혹스러워하며 어쩔 줄 몰라 할 때, 전혀 동요하지 않고 홀로 대수롭잖게 상황을 관망하던 우성 오메가. 그는 마치, 아무리 찾아도 소용없을 거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눈에 더 띄었다. 하여 눈길이 갔던 것뿐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저와 눈이 마주친 후로 우성 오메가다운 짙고 매력적인 페로몬을 질질 흘려 댔다. 저를 향해 매혹적인 페로몬을 뿌려 댔던 언젠가의 그 오메가들처럼.
이상하지 않은가. 동료가 어디를 갔건 신경도 쓰지 않는 태도 하며, 난리인 주변은 저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알파에게 페로몬으로 호감을 보이려 애쓰고 있는다는 게. 불쾌했지만, 덕분에 강현우는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제 오메가의 페로몬을 자신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며칠 떨어져 있는 동안 잊기는커녕, 하도 그리워하는 바람에 오히려 더 기민하게 알아챌 수 있었다. 강현우는 거북하기 짝이 없는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에서 아주 미미하지만 분명한 희주의 페로몬을 느꼈다.
우연이 아닐까 싶었지만, 그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 확실하게 느껴지는 희주의 페로몬에 정말 그 우성 오메가가 희주의 행방을 알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 우성 오메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이었다. 페로몬 컨트롤에 능한 우성답지 않게, 그는 한 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페로몬이 일렁이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조차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데서, 강현우는 그가 희주의 행방을 알고 있음을 짐작했다. 그래서 주변에서 경악을 하든 말든,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오래간만에 페로몬으로 위협한 것이었다.
성별이나 형질, 직업 등 같은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이들끼리는 대체로 상호간 이해와 협력이 잘 이루어지는 편이다. 해당 집단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숱하게 겪은 경험을 토대로, 혹 다른 이가 자신과 같은 일을 겪으면서 곤란해하면 선뜻 도움을 주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형질 집단으로 예를 들자면, 갑작스러운 사이클로 곤욕을 겪는 이를 위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억제제 따위를 구해 주는 것이 상식적인 행동이었다.
“…….”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그 우성 오메가의 행동은 너무나도 고의적이고 비상식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원한이 있지 않은 한 불가능할 정도로.
혹시 서 박사가 말했던 ‘며칠간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에 저뿐만 아니라 그 우성 오메가도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섣부른 판단이기는 하지만, 만에 하나를 위해 확인해 봐야 했다. 하여 급박한 와중에도 안 실장에게 유세민에 관해 알아보라 지시를 내려 놓은 터였다.
마침 진동하기 시작한 휴대폰에 안 실장의 번호가 반짝이고 있었다.
“네.”
―상무님. 저 안규원입니다.
여러모로 놀라고 당황스러웠을 법도 한데, 안 실장의 목소리는 무척 침착했다.
―아까 지시하셨던 거 알아봤습니다. 보고할까요?
“말씀하세요.”
―유세민 선생님은 음, 편의상 그냥 유세민 씨라고 칭하겠습니다. 일단, 유세민 씨는 지난달부터 2학년 영어 교과목을 가르치고 있는 기간제 교사라고 합니다. 올해 2학년 교사 중 한 분이 출산, 육아 휴직을 내셔서 그 자리를 대체하는 기간제 교사를 모집했는데, 그 자리에 채용된 거고요.
지난달부터라면 고작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기간인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 걸까. 속으로 생각하는데 안 실장이 이어 말했다.
―당시 기간제 교사 채용 공고에 따르면 1차는 서류, 2차는 면접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원자는 많았는데, 1차 서류 전형을 합격한 지원자는 한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유세민 씨요.
“1차? 2차가 아니라?”
언짢게 대꾸한 강현우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네. 1차 서류 전형 말씀드렸습니다.
“처음부터 내정되어 있었다는 거네.”
―예. 그리고 2차 면접은 학교가 아니라 일식당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교감, 교무 부장, 그리고 유세민 씨까지 총 네 명이 서울 모처 일식당에서 식사를 한 내역이 있습니다.
“교감, 교무부장, 유세민 씨까지 하면 셋이지, 왜 넷입니까.”
―동석한 인물이 있습니다. 유성권 이사요.
강현우는 휴대폰을 귓가에 댄 채 고개를 뒤로 젖혀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살벌한 뼈 소리로도 마뜩잖은지 인상을 구긴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강현우가 익숙한 이름에 슬그머니 눈을 떴다.
유성권 이사는 음주 운전 같은, 없으면 이상한 거라고들 하는 잡스러운 범죄는커녕 그 흔한 갑질과도 관련이 없는 인물이었다. 대외적으로 봉사 활동도 꾸준히 해 와 몇 번 언론에도 얼굴을 비춘 적 있었다. 사내외 이사 중 좋은 인상을 유지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인데 왜 여기서 뜬금없이 그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했는지 안 실장은 하던 말을 계속해서 이어 갔다.
―유세민 씨가 유성권 이사 아들입니다. 기간제 교사로 채용된 건 유성권 이사의 입김이 작용한 걸로 보입니다.
“하……. 면접이 아니라 접대를 한 거였네.”
예상에 없던 보고에 강현우는 느릿하게 볼 안쪽을 훑었다.
―유세민 씨 외에도 행정실 직원 중에 유성권 이사의 친인척들이 다수 있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또 유성권 이사가 내년 정교사 채용에 개입한 정황도 포착했고요. 무늬만 공채로 꾸며서 최종적으로는 유세민 씨가 채용되게끔 하려는 속셈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채용 비리 관련 내역은 상무님 메신저로도 따로 보내 놓겠습니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제가 학교에 관심이 없는 틈을 타 유성권 이사는 학교의 인사 팀장이 되어 있었다. 호랑이 없다고 여우가 왕 노릇 하는 꼴이었다.
예상외의 수확이기는 하지만 제가 궁금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게 답니까?”
―아니요, 상무님.
안 실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다음 보고를 올렸다.
―사실 유세민 씨는 유성권 이사의 친자가 아닌 양자입니다. 유성권 이사가 배우자와 함께 봉사 활동을 했던 시설에서 부자의 연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해당 시설에 유세민 씨뿐만 아니라 권희주 선생님도 있었던 걸로 확인됐습니다. 기간도 일치하고요. 유세민 씨와 권희주 선생님은 서로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는 못 알아봤을 테고.”
―예, 그것까지는…….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개인적인 사정은 당사자에게서 듣지 않는 한, 알 방법이 없었다. 강현우는 고심하듯 턱을 매만졌다.
―저 그런데…….
지금껏 대본을 읽는 것처럼 거침없이 말을 잇던 안 실장이 잠시 말하기를 주저했다.
―저, 이건 심증뿐이긴 합니다만… 며칠 전에 권희주 선생님 관련하여 학교에 좋지 않은 소문이 돈 적 있다고 합니다. 사생활 문제로 학생들과 교직원들 사이에서 말이 조금 돈 듯한데, 아무래도 상무님과 연관이 있어 보여서요.
“사생활 문제?”
―어느 날 알파 페로몬을 묻힌 채로 출근하셨는데, 그걸 느낀 학생 혹은 교직원 형질자 입을 통해 소문이 퍼진 것으로 보입니다. 사생활로 교사의 자질을 판단하려고 하는 학부모들도 일부 존재하고, 또 교육계 자체가 꽤 보수적이기도 해서요.
“조선 시대도 아니고 무슨. 근데 그거랑 유세민이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2학년부 교무실에 형질자는 유세민 씨와 권희주 선생님 단 두 분뿐이라, 유세민 씨가 사전에 충분히 알려 줄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래서 심증뿐이라고 말씀드린 거고요.
강현우의 미간이 한순간에 좁아졌다.
“이건 누구 통해서 알아낸 정보입니까?”
―배예은 씨라고, 권희주 선생님과 함께 근무한 적 있는 동료 교사입니다. 혹시 몰라 동의를 구하고 녹음해 뒀는데…….
“당장 보내세요.”
―예. 방금 전송 완료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이만 퇴근하세요.”
전화를 끊은 강현우는 당장 안 실장이 보내 준 자료를 살펴보면서 녹음 파일을 재생시켰다. 안 실장이 직접 만나 녹음한 것인지, 녹음 파일 속 여성의 목소리는 당차면서도 선명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강현우의 표정은 점점 험악해져만 갔다. 몇 분 되지 않는 녹음 파일을 모조리 듣고 난 후, 강현우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앞에 가 섰다. 이제 유세민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희주를 사지에 몰아넣은 것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뼛속까지 기업인인 강현우는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안 실장이었다. 강현우는 안 실장이 추가로 보내 온 보고 내용을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차분히 읽어 내렸다. 뭐, 이런……. 어이없다는 듯 조소가 터져 나왔다.
안 실장의 말대로 심증뿐인 데다, 저와는 상관없이 희주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백영 그룹의 상무로서, 또 이사장으로서 접근하면 충분히 제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채용 비리에, 성적 추문까지. 생각보다 수월하게 굴러갈 것 같은 예감에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린 강현우는 당장 안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상무님. 어떻게 처리할까요?
전혀 다른 세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요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는 강현우의 눈이 차게 번들거렸다.
* * *
온갖 악재가 겹친 탓인지 기절하듯 잠든 희주가 잠에서 깼을 때는 자정을 훌쩍 넘긴 깊은 새벽녘이었다.
내내 미동 없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꺼풀이 벌어지고 그 틈으로 흐릿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자근자근 밟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욱신거리는 통증에 절로 눈이 떠진 것이었다.
막 잠에서 깨어 아직 잠기운은 채 가시지 않았으나, 온몸에 저릿하게 밴 둔통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특히 엉덩이 사이의 이물감은 그나마 남아 있던 잠기운마저 달아나게 할 정도로 끔찍했다. 눈을 뜨자마자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통증에 와작 인상이 구겨졌지만, 누워서 그저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
뭐 어떻게 된 거지. 대충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통증에 무뎌졌을 때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던 멍한 머릿속에 작은 의문 하나가 피어올랐다.
희주는 메말라 뻑뻑한 눈을 이리저리 굴려, 본능적으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온통 어둠뿐인 방 안, 제대로 보이는 것 하나 없었지만 옅게 깔려 있는 페로몬으로 눈치챌 수 있었다.
강현우의 집. 올 때마다 늘 머무르곤 했던 그의 침실이었다.
“아…….”
겨우 상체를 일으켜 앉은 희주의 입에서 작게 앓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허리가 부서질 듯 아프고, 과하게 많이 잤을 때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띵한 관자놀이를 슬슬 문지르며 희주는 뜨문뜨문한 기억의 퍼즐들을 하나씩 맞춰 보았다.
몸살인 줄 알았는데 히트 사이클이었구나. 오메가로 발현한 이후 지금껏 단 한 번도 정석적인 히트 사이클을 겪어 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배 속에서 용암이 끓듯 자글거리던 그 감각을 떠올리니 짙은 한숨이 팍 터져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히트 사이클이 왜?
잠결에 얼핏 의사인 듯한 누군가의 설명을 들은 것도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손등 위에 주사 바늘이 꽂혔었는지 동그란 반창고 하나가 붙어 있었다.
까슬한 반창고를 말없이 쓸어내리던 희주는 문득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어느새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강현우를 찾았으나, 방 안에는 저 하나뿐이었다.
어디 가신 거지. 한참 동안 눈을 굴리던 희주는 덮고 있던 이불을 걷은 뒤 조심스럽게 발을 내렸다. 발바닥을 타고 오르는 저릿한 둔통에 저도 모르게 허리를 붙잡고 앓는 신음을 흘렸지만, 히트 사이클을 잘 넘긴 덕인지 통증과는 별개로 몸은 확실히 가볍고 개운했다.
희주는 비척비척 걸음을 옮겨 문고리를 잡았다. 소리 없이 스르륵 열리는 문틈으로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불이 켜져 있는 곳은 거실이었다. 갑작스럽게 빛을 마주한 눈이 시려 손바닥으로 차양을 만든 채 다가가자 불 켜진 거실에는 과연 강현우가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거실 소파에 앉은 강현우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듯 휴대폰을 귀에 끼고는 태블릿 화면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혹여 방해가 될까 봐 구석에 서서 망설이는데, 곧바로 희주의 인기척을 느낀 강현우가 놀란 눈을 하고 돌아보았다.
“……잠시만요. 실장님. 전부 다 날 밝는 대로 진행하는 걸로 하죠. 네. 수고했어요.”
강현우는 저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거리는 희주를 손짓으로 저지하고는, 한창 보고를 올리는 안 실장을 대충 말 몇 마디로 도중에 끊어 버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무어라 돌아오는 말이 있었지만, 듣는 둥 마는 둥 응수하고 전화를 끊은 강현우는 보고 있던 것들을 내팽개친 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
“…….”
희주가 서 있는 곳까지 한걸음에 다가간 강현우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희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보지 못한 며칠 사이, 어쩐지 수척해진 듯한 얼굴은 반쪽이 되어 있는 데 반해 눈두덩이는 울음의 흔적이 남아 퉁퉁 붓고 발간 상태였다.
강현우는 조심스레 희주의 볼을 감싸 쥐었다. 뜨겁게 치솟아 있던 체온이 미지근하게 식은 것을 확인하자 안도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들쑥날쑥 엉망진창으로 치솟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던 페로몬도 평소의 그 잔잔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현우 씨……?”
늘 저를 볼 때마다 다정한 웃음만 보여 주던 강현우가 위태로운 표정을 지었다. 당황한 입이 열리며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통해 나온 목소리는 저도 깜짝 놀랄 정도로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는 성대에 잠시 목을 가다듬는 희주에게 그가 바짝 다가왔다. 접촉은 갑작스러워 희주는 크고 뜨거운 품으로 와르르 쓰러지듯 안겼다.
겉으로 보기에는 희주가 안겨 있는 모양새였지만, 오히려 강현우가 희주의 어깨 위로 얼굴을 파묻고 안겨드는 형상이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강현우의 등에 얹었던 희주는 제게도 느껴질 만큼 푹 퍼지는 안도의 한숨에 움찔거리며 눈을 굴렸다.
“……더 자도 되는데 왜 벌써 깼어요.”
잠시간의 침묵 후, 몸을 단단히 얽매고 있던 두 팔에 힘이 풀리면서 두 사람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희주는 열없이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냥… 눈이… 떠져서요.”
말끝에 큼, 하고 다시 목을 가다듬자 강현우는 희주를 부엌으로 이끌고 갔다. 김이 폴폴 올라오는 컵이 눈 깜짝할 새 손에 들렸다. 희주는 살며시 강현우의 눈치를 살피다가 입술을 댔다. 딱 마시기 좋게 데워진 물이 마른 입을 타고 넘어가면서 비로소 살 것 같다는 숨이 탁 터져 나왔다.
“마시고 조금 더 자요. 의사 말로는 가능하면 푹 쉬는 게 좋다고 그랬어요.”
목을 축이는 희주를 가만히 눈에 담던 강현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니다. 오늘 아무것도 안 먹고 잠만 자서 배고플 것 같은데, 지금 뭐라도 먹을래요?”
“아니요……. 음, 나중에……. 현우 씨는 뭐 좀 드셨어요?”
“네. 저는 아까 먹었어요.”
강현우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뻔뻔하게 냉큼 거짓말을 했다. 거의 사경을 헤매다시피 기절해 있는 희주를 두고 음식이 넘어갈 리가 없었다. 주저하지 않고 말한 덕에 희주는 그 말을 믿는 눈치였다.
다 마신 물컵을 대신 받아 식탁 위에 내려놓은 강현우는 멀뚱히 선 희주를 다시 침실로 데려갔다. 방금 전까지 누워 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침대에 희주를 다시 눕히고, 이불을 끌어 올려 가슴 위까지 꼼꼼하게 덮어 주었다.
“……현우 씨는요?”
평소와 같이 섬세하고 다정한 행동이지만, 저만 눕히는 강현우의 행동에 희주는 어리둥절해져 눈을 깜빡거렸다.
“같이 자면 안 돼요?”
눕기는커녕, 이마로 쏟아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기까지는 하는 강현우를 말간 눈으로 올려다보던 희주가 얼른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어 옷자락을 붙잡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다른 곳만 바라보던 강현우의 시선이 제 옷자락을 붙잡은 손가락에 닿았다.
“혹시 많이 바쁘세요……?”
누군가와 심각하게 통화를 하던 것을 떠올린 희주가 뒤늦게 말끝을 흐렸다. 바쁜 사람을 제 욕심 때문에 붙잡아 두기라도 하는 걸까 봐 상당히 조심스러워졌다.
“……안 바빠요. 희주 씨 편히 쉬라고 자리 비켜 주려고 했던 거예요.”
“아니요……. 같이 있어 주셨으면 좋겠는데…….”
안 될까요? 패기롭게 붙잡고도 머뭇거리는 것이 꼼질거리는 손짓에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그런 희주의 손등을 제 손바닥으로 덮은 강현우는 손가락 하나하나씩 떼어 내어 이불 안으로 고스란히 넣어 주었다.
희주는 제 손을 붙잡고 억지로 떼어 내는 것에 시무룩하게 눈썹을 내렸다가, 비어 있는 제 옆자리로 들어오는 모습에 스르르 미소 지었다. 강현우가 눕기 쉽도록 희주는 얼른 덮고 있는 이불을 들어 올렸다.
두 인영이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기라도 하듯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희주는 상대의 팔을 베고 누워, 두툼한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강현우의 페로몬이 코끝에 훅 풍겨 왔다.
히트 사이클 때 페로몬을 갈구하며 매달리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귓가가 홧홧해진 희주는 혼자 잔뜩 부끄러워져 강현우에게 보이지 않게 입술을 꾹 감쳐물었다. 부끄러움에 발긋해진 발끝이 이불 속에서 까딱까딱 움직였다.
“일단…….”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잦아들고 두 사람의 숨소리만 고요히 울려 퍼질 때쯤이었다. 적막뿐인 방 안에 강현우의 목소리가 느릿하게 퍼졌다. 설핏 잠이 들 뻔한 희주는 가물가물한 눈을 떠 고개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현우가 만류하듯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깊게 몸이 맞물린 희주는 꼼짝없이 눈만 감았다가 뜨며 머리맡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학교는 특별 병가 처리되도록 조치 취해 뒀어요. 사이클 때문인 거면 최장 일주일까지는 문제없이 쉴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푹 쉬도록 해요. 필요하면 진단서도 따로 챙겨 둘게요.”
아, 학교. 강현우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던 희주는 그제야 자신이 근무하던 시간 도중 실려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괜찮으려나. 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평소 형질자의 사정 따위 안중에도 없어, 늘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던 학년 부장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애인이 이사장이라는 것을 알아 버려서인지 불안하지는 않았다. 새삼 속물적인 자신에게 웃음이 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아까 제 주치의가 왔다가 갔어요. 제 페로몬에 많이 노출된 까닭도 있고,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사이클 주기가 어긋나고 발정통도 심했던 거라고 했어요. 제 러트 주기에는 영향 끼칠 정도는 아니어서 임신 걱정은 안 해도 될 거라고도 했고요. 그리고…….”
방안을 뒤덮은 고요한 어둠처럼, 담담하게 경과를 설명하던 강현우가 처음으로 말을 흐렸다. 뚝 끊겨 버린 목소리에 희주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날 본 사람은 저와 안 실장님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
희주는 작게 탄식하며 시선을 뚝 떨어뜨렸다. 누가 볼 수도 있었겠구나…….
“그리고 희주 씨.”
“네…….”
“미안해요.”
순간 희주는 짧은 숨을 들이마셨다. 아직 저와 강현우 사이에 풀다가 만 매듭이 하나 남아 있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은데… 미안합니다. 이 말부터 해야 할 것 같아요. 변명으로 들릴 줄 알지만,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에요.”
결연하게 호흡을 가다듬은 강현우가 재차 이어 말했다.
“희주 씨도 아시다시피… 백영 그룹 회장님이 제 친어머니세요. 친아버지는 백영 미술관 관장님이시고요.”
강현우의 입에서 나오는 그의 이야기에 희주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막상 강현우를 통해 직접 전해 들으니 기분이 오묘했다. 조금만 더 들어 달라는 듯이 강현우의 손이 딱딱하게 굳은 희주의 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백영 그룹 직계인 데다, 저와 동생 둘 다 일찍이 우성 알파로 발현해서 주변에서 제법 큰 관심을 받으면서 컸어요. 아직 성인도 안 된 데다, 고작 학생밖에 되지 않는 어린애 둘한테 허구한 날 기자들이 따라붙을 정도였으니까요.”
“…….”
“전에 만나 봐서 알겠지만… 동생은 저랑 성격이 정반대예요. 걘 어릴 때나 조금 무서워했지, 나중에 조금 크고 나니까 그 관심들을 아예 즐기더라고요. 차라리 저도 강지우처럼 즐기기라도 하면 마음이야 편했겠지만, 그런 성격이 못 돼서 조금… 아니, 많이 힘들었어요.”
“…….”
“대학생 때, 어학연수 갔다가 일부러 더 눌러앉았다고 했잖아요. 기억나요?”
강현우의 물음에 희주가 기억난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나름 회피 시도였다고 보면 돼요. 인간관계에 회의감이 느껴졌다고나 할까요.”
친한 친구인 줄 알았던 녀석들이, 알고 보니 부모님한테서 무슨 말을 듣고 와서 접근한 걸 알았을 때. 저를 아무렇지 않게 무리에 끼워 넣어 줬던 녀석들이, 나중에 가서는 대놓고 금전적인 베풂을 기대할 때…….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선을 지켜야 할 자리에 자녀분들, 하다못해 조카까지 동석하는 경우가 허다했어요. 어떤 관계를 기대했는지는 몰라도, 어떻게든 제 눈에 들게 하려는 시도였겠죠.”
강현우는 담담하고 또 느릿하게 말을 전했다. 아무렇지 않게 제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의 목소리에서 왜인지 씁쓸함이 느껴졌다.
“그중에 오메가들도 제법 많았어요. 하나같이 페로몬으로 환심 사려고 어필해 대고, 아예 대놓고 잠자리를 원하기도 했어요. 형질자로서, 페로몬을 그런 수단으로 쓰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거죠. 근데, 그게 정말 진심일까… 싶더라고요.”
“백영… 때문에요?”
“네. 맞아요. ‘강현우’가 아니라, ‘백영 그룹 강 상무’에 대한 진심일까 봐.”
제 짐작이 맞아떨어지자 희주가 작게 탄식했다. 강현우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희주를 둘러 안은 팔을 추슬렀다.
“결혼 정보 회사는, 이사회에서 알게 모르게 압박을 시작한 김에 써 본 패예요. 제가 회사 미래 경영에 이득이 되는 상대와 손잡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거든요. 근데 저는 사람이지, 사업 아이템이 아니잖아요. 회사를 위해서 제 자신을 희생하고 싶지도 않고, 무엇보다 부모님이 연애 결혼을 하신 케이스셔서 그런 식의 결혼은 내키지도 않았어요.”
희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예상한 반응이었다는 듯 강현우가 “의외죠?” 하며 목을 울려 웃었다.
“그렇게 적당히 몇 번 자리 나가서 구색 좀 맞추다가 말 생각이었어요. 제가 나서서 오메가를 만나러 다닌다는 소문이 퍼지면 굳이 소개받을 필요가 없어질 테니까요. 근데…….”
강현우는 말을 하다 말고 슬쩍 고개를 뒤로 빼고 희주와 눈을 맞추었다. 희주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자, 귓불을 스치는 손가락이 간지러운지 희주가 눈가를 찡긋거렸다.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사랑스러움에 강현우가 따라 웃었다.
“전혀 예상 못 한 변수였어요.”
“어떤…….”
“희주 씨가 정말 저를 모르고 있던 것도, 그런 희주 씨에게 내가 반했던 것도.”
강현우는 그때를 떠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애틋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 와서 사실대로 말하자면, 희주 씨를 몇 번이나 의심했어요. 연기가 아닐까, 하고요. 근데 진심이더라고. 전부 다.”
“…….”
“어쩌면 희주 씨를 대하던 나야말로 연기를 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
“혹시, 희주 씨도 제 배경을 알고 나면 달라지기라도 할까 봐… 저는 그게 걱정이었던 거예요. 저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봐 주는 사람이 희주 씨가 처음이었어서요. 내 딴에는 내가 상처받기 싫어서 한 행동인데, 그게 희주 씨를 초라하게 만들 줄은 몰랐어요. 미안해요. 내가… 생각이 많이 짧았어요.”
따뜻한 강현우의 손이 희주의 볼에 조심스럽게 안착했다. 미안하다는 진심과 함께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발갛게 짓무른 눈가를 살살 쓰다듬는 손길에 어쩐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같이 가슴께가 찌르르 울렸다. 그래서 희주는 가까스로 두 눈을 꾹 감았다.
“솔직히… 겁났어요.”
속에 있는 것들을 솔직히 내놓기 시작하는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내가 알고 있는 현우 씨가 아닌 느낌이었어요. 분명히 눈앞에 있는 사람은 현우 씨가 맞는데, 말투며 표정까지 전부 다른 사람이었어요.”
떠오르는 모습을 지워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희주가 잘게 고개를 흔들었다.
“화도 났고, 얼떨떨하기도 했고, 또 황당하고…….”
“…….”
“누구나 다 인정하는 완벽한 사람이잖아요. 현우 씨는 모든 조건이 완벽한데, 저는 모든 게 다 부족해요. 그런 제가 현우 씨 옆에 있는 게 너무… 초라했어요.”
강현우는 조용히 시선을 내리깐 채, 눈을 꾹 감고 있는 희주를 바라보았다.
“사실 저는 속물적인 사람이에요.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만날 수도 있고, 또 소개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굳이 결혼 정보 회사를 찾아갔던 건 순전히 제 욕심 때문이었어요. 분명히 그랬는데, 현우 씨가 백영 그룹…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도 마냥 좋지만은 않더라고요.”
좋아해도 모자랄 판에 초라함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었다. 희주는 입술을 꾹 깨물어 뒤이을 말을 잠시 고민하다가 눈을 떠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매일 현우 씨가 보고 싶었어요. 자꾸 현우 씨가 생각났고요.”
“……희주 씨.”
“저를 사랑하세요?”
절박함이 담겨 있는 눈동자를 마주 본 강현우는 당연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눈을 깜빡였다.
“저는 현우 씨를 사랑해요.”
“……저는.”
“아마 이게 그 이유 아니었을까요? 현우 씨 옆에 있는 나를 상상할 때마다 초라해졌던 이유요. 제가 현우 씨를 사랑하니까요…….”
언제 고였는지 모를 눈물이 뚝뚝 방울져 흘러내렸다. 강현우는 제 마음이 더 미어지는 것만 같아, 일그러진 표정으로 희주의 볼을 감싸 쥐었다. 젖은 눈과 올곧게 시선이 마주쳤다.
“사랑해요, 현우 씨.”
“…….”
“다시 말해 주기로 했잖아요.”
“사랑해.”
“…….”
“다른 말보다 이 말을 제일 먼저 해 주고 싶었어요. 사랑해요, 희주 씨.”
어느새 맞닿은 입술로 떨리는 숨결이 느껴졌다. 약속이라도 한 듯 감지 않은 눈에 서로가 고스란히 담겼다.
희주는 제 뺨에 닿아 있는 강현우의 손을 지그시 덮었다. 각기 다른 체온의 두 손이, 서로의 손을 각자의 다정함으로 서서히 물들였다. 마치 마음도 하나로 융화되는 듯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은 채, 다정해서 녹아내릴 듯한 시선을 오래도록 나누었다. 굳이 말을 나누지 않아도 괜찮았다. 서로를 보듬는 마음만으로 충분한 새벽이었다.
* * *
보통의 오메가였더라면 사나흘은 꼬박 앓았을 테지만, 열성이라 그런지 희주의 히트 사이클은 하루 정도로만 짧게 끝이 났다. 하지만 희주는 이 단 하루뿐이었던 사이클의 여파인지 몸 상태가 영 좋지 못해 강현우가 알려 준 대로 일주일간 푹 쉬기로 했다.
하필 당장에 할 일이 많은 시기라 처음에는 병가를 내는 것 자체를 주저했다. 더 이상 페로몬이 제멋대로 날뛰지도 않았고, 열이 들끓지도 않았기에 돌아오는 월요일부터는 출근하겠노라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주말 동안 또 한 번 방문한 서 박사는 이런 희주의 계획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절대 안정’을 강조했다. 그에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침대 신세를 지게 되었다.
병가를 냈다는 소식이 반 아이들에게도 전해졌는지, 아프지 말라는 반 아이들의 따뜻한 메시지들이 휴대폰으로 쏟아졌다. 희주는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아 눈가를 꾹꾹 내리눌렀다. 마음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걱정되어 이렇게 쉬고 있어도 되는가 하는 죄책감도 살짝 실렸지만, 강현우의 지극한 간호 속에서 안온함에 녹아들었다.
“희주 씨. 나 왔어요.”
오후 6시 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칼 같은 시간에 정확히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희주는 느긋하게 화면을 끄고 일어나 현관 쪽으로 다가갔다.
“다녀오셨어요?”
희주가 현관까지 채 가기도 전에, 성큼성큼 다가온 강현우가 희주를 커다란 품 안에 가뒀다. 하루 종일 애타게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느껴지는 온기와 페로몬을 쫓아 달려온 강현우는 희주의 머리카락에 볼을 비비며 페로몬을 만끽했다. 으스러질 듯 감기는 팔이 버겁기도 하겠지만, 희주는 익숙하게 그의 허리를 마주 안아 주었다.
“오늘은 뭐 하고 있었어요?”
“음, 책 좀 읽다가… 서재에서 일 조금 했어요.”
“웬만하면 쉬는 동안에는 일은 하지 말라니까.”
“시험 기간이라서 어쩔 수 없었어요. 저 아니면 할 사람이 없는 일이라서…….”
“하……. 이 나이 먹고 시험이 싫다고 투정 부릴 줄은 몰랐네요.”
시험 진짜 싫다……. 진심에 가까운 중얼거림에 희주가 설핏 웃었다. 마주 안은 연인의 등을 달래듯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주말을 포함하여 열흘이나 되는 시간을 요양 명목으로 쉬게 된 희주는, 자신의 집이 아닌 강현우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저와 같이 쉬겠다는 강현우를 억지로 출근시킨 뒤, 주로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책을 읽었다. 홀로 잠깐 외출을 하기도 하고, 서재에서 틈틈이 일을 하기도 했다.
물론 휴식 정도야 제집 가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강현우가 불안해 죽겠다는 얼굴로 붙잡는 통에 이 집에서 한 발자국 나서지도 못하고 무산되었다.
자신과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건 분명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늘 아쉬워하면서도 결국 제 의견을 꺾지 못했는데, 희주가 한 발 물러서야 할 정도로 강현우는 전에 없던 불안 증세를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강현우가 출근한 사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우연히 본 칼럼에 의하면 분리 불안 증세를 앓는 알파가 있다고 했다. 심리적인 안정을 위해 오메가를 찾는 알파의 습성. 보통 각인한 사이에서나 보이는 습성이라고 했는데, 굳이 각인까지 하지 않더라도 감정적으로 깊게 엮여 있는 경우에도 흔히 나타나기도 한다고 쓰여 있었다.
―네. 보통은 각인 관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증상이긴 합니다만 상무님의 경우에는 심리적인 현상입니다. 임신한 배우자 대신 입덧을 하기도 하는 것처럼요. 쉽게 말해 상무님은 현재 깊게 사랑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서 박사는 혹 몸에 무슨 이상이라도 생기게 되면 바로 연락을 달라며 명함을 주고 갔었다. 제 몸 상태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혹시나 강현우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겼을까 하여 희주는 조심스럽게 전화번호를 눌렀다.
조금 지친 듯한 서 박사는 축 처지는 목소리와는 별개로 알아듣기 쉽게 꽤 친절한 설명을 해 주었다. 아마 그는 차라리 상무님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길지도 몰랐다.
깊게 사랑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서 박사를 통해서도 재차 확인한 강현우의 진심에 가슴이 떨렸다. 희주는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으며 새어 나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실실 웃었다. 희주가 무슨 이유 때문에 웃는지도 모르고, 그저 웃어 준 것만으로 좋은 강현우도 따라 미소 지었다.
“점심은 잘 챙겨 먹었어요?”
“네. 아까 안 실장님께서 사다 주신 거 먹었어요.”
“어땠어요? 입맛에 맞았나 모르겠네.”
“맛있었어요. 양이 조금 많긴 했는데, 맛있어서 다 먹었어요.”
“직접 가서 먹으면 더 맛있어요. 다음에는 같이 가서 먹어요.”
현관과 거실 중간쯤 되는 복도의 한가운데서 한참 동안 희주를 놓아주지 않던 강현우는 마지막으로 입술 도장을 찍고 난 뒤에야 슬슬 집 안쪽으로 들어갔다. 들어간 이유도 희주 때문이었다. 오래 서 있으면 다리라도 아플까, 강현우는 희주를 폭신한 침대 위에 앉혀 두고 드레스룸을 오가며 옷을 갈아입었다.
눈앞에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처럼 강현우는 샤워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희주의 위치를 확인했다. 하여 희주는 강현우가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그가 처음 지정해 준 그 자리에 얌전히 앉아서 기다렸다. 물론 제 의지였다.
콩깍지가 씐 탓일까. 귀찮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서 박사 말에 의하면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가면서 서서히 무뎌질 거라고도 했고, 저 역시 강현우와 붙어 있는 편이 더 좋았다.
희주는 씻고 나온 강현우와 함께 아일랜드 식탁에 나란히 앉아 저녁 식사를 했다. 뜨끈하게 김이 피어오르는 찌개와 갖가지 반찬들은 모두 강현우의 본가에서 공수해 온 음식들이었다.
희주가 직접 한 것은 하얀 쌀밥뿐, 나머지 것들은 강현우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그저 냉장고에서 꺼내어 차린 것밖에 없는데 강현우는 늘 희주에게 고마워했다. 정말 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것뿐이라, 희주는 매번 이 상황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식사 후 설거지는 늘 강현우의 몫이었다. 직접 요리를 한 건 아니지만 차리는 건 희주가 했으니 치우는 건 제 몫이라는 것이 강현우의 주장이었다. 이럴 때만큼은 자신이 강현우의 주변을 얼쩡거리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기에, 희주는 부엌에서 나름 멀찍이 떨어진 거실 창에 서서 아름다운 야경을 고요히 내려다보았다.
“희주 씨.”
“아, 고마워요.”
설거지를 마친 강현우가 머그 컵 하나씩을 양손에 들고 다가왔다. 건네받은 머그 컵에는 희주가 즐겨 마시는 커피가 아닌, 강현우 취향의 노란 캐모마일티가 담겨 있었다.
“너무 뜨겁진 않아요?”
“음……. 네. 딱 좋아요.”
강현우는 낮 시간에는 희주가 커피를 마셔도 아무 말 않다가, 해가 떨어지기만 하면 절대 손을 못 대게 했다. 잠을 못 자면 어쩌나,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강현우 때문에 설레서 심장이 두근거리면 두근거렸지, 카페인에는 하도 익숙해져 커피를 몇 잔을 때려 부어도 괜찮았지만 밤 동안만인데 어떠랴 하는 생각으로 희주는 쉽게 커피를 포기했다. 또 제법 혀가 길들었는지 처음 맛봤을 때는 밍밍하기만 했던 차도 이제는 나쁘지 않았다.
희주는 그리 크지 않은 머그 컵을 두 손으로 가득 감싼 채 차를 홀짝거렸다. 맞닿은 체온 덕에 어쩐지 노곤해지는 기분이었다.
“……희주 씨.”
그런 희주를 등 뒤에서 가볍게 끌어안고 차를 한 모금 넘긴 강현우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컵에 입술을 묻은 희주는 뒤돌아 강현우를 보는 대신, 거실 창에 비치는 모습에 눈을 맞추었다.
“유세민 씨 말인데요.”
강현우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희주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바짝 굳혔다. 강현우는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볼, 귓가에 차례로 가볍게 입술을 대고 문질렀다.
“……네.”
어떻게 강현우가 그를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해져 목이 멘 희주는 가까스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일단 유세민 씨 이야기부터 하자면, 유세민 씨의 기간제 교사건 계약은 다음주 월요일부로 해지될 예정이에요.”
“……네?”
아무런 고저도 없이 흘러나온 말에 눈이 동그래진 희주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금방은 나름 고상하게 말한 것이었다는 듯, 이어 “짤렸다고요” 하고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짤막한 한마디가 더 덧붙여졌다.
당황한 건지 놀란 건지,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숨만 내쉬는 희주 대신 강현우가 운을 띄웠다.
“다 알고 있어요. 유세민 씨가 유 씨가 아닌 김 씨였던 시절의 이야기부터 전부 다.”
“그걸……”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희주는 경악에 가까운 물음을 소리로 내뱉지는 못하고 달싹이던 입술을 꾹 다물었다. 강현우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 이상, 정보를 습득한 경로 정도는 굳이 묻지 않아도 짐작 가는 부분이었다.
“첫 번째로, 이번에 갑작스럽게 히트 사이클 터진 거,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 저 아니에요.”
“그럼…….”
“유세민 씨에요. 희주 씨가 혼자 남기 직전까지 같이 있었던 사람은 유세민 씨뿐이었으니까.”
그날의 기억들은 뜨문뜨문하게 흩어졌기에 유세민이 관련되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혼란스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희주는 그때 그 상황을 기억해 내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맞아요. 그날, 잠깐 쉬려고 휴게실 들어갔는데 유세민이 있었어요.”
“그날 저는 다른 일 핑계로 희주 씨를 보러 갔었어요. 그렇게라도 보고 싶어서요. 근데 희주 씨가 자리에 없더라고요. 이대로 못 보고 가나 싶었는데, 웬 선생님한테서 희주 씨 페로몬이 느껴지더라고요. 분명 본인 게 아닌 페로몬을 묻히고 있으면서 뻔뻔하게 모르는 척을 하는데……. 미처 생각을 못 한 건지, 아니면 우성이라서 가려질 줄 알았던 건지.”
“……그냥, 제가 약 기운 때문에 잠들었을 때 간 줄 알았어요.”
“아마 알고 있었을 거예요. 희주 씨를 곤란하게 만들려고요. 개인적으로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한, 같은 형질자로서 난처한 상황을 못 본 척 지나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들고 있는 컵을 떨어뜨리기라도 할까, 애써 컵을 쥔 손에 힘을 준 희주는 진정하려는 듯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사이클 때문에 흐트러진 모습을 들키기 싫어 불안에 떨던 그때를 떠올리니 같은 형질자로서의 배신감에 손이 떨렸다.
“그리고 이건, 희주 씨한테 직접 듣고 싶은 건데.”
잠시 말을 주저하던 강현우가 마뜩잖은 듯 인상을 찌푸렸다. 창문을 통해 보고 있던 희주가 의아스럽게 눈을 굴렸다.
“학교에 희주 씨 관련해서 안 좋은 소문이 퍼졌었다고 들었어요.”
지그시 눈을 내리깐 강현우가 희주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희주는 대번에 어떤 소문을 가리키는지 짐작했다.
“그건… 제 잘못도 어느 정도 있는 문제이기는 해요. 페로몬이 날아간 줄 알고 소취제를 안 뿌려서…….”
“그렇게 잘잘못을 따지면 애초에 희주 씨한테 마킹을 한 제 잘못도 일부 있어요.”
그럴싸한 주장이지만 논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말에 희주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강현우는 강경했다.
“희주 씨가 내 페로몬을 묻히고 출근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어요.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희주 씨 동료 중 한 분이 먼저 알아채고 소취제를 뿌려 줬다고 들었고요.”
순간 희주의 머릿속에 배예은이 떠올랐다.
“유세민 씨는 우성 오메가이기까지 해요. 또 같은 곳에서 일하면서 도덕성을 강조하고 보수적이기까지 한 학교 분위기야 진작 알고 있을 테였고. 분명 알면서 모르는 척한 거고, 그건 고의적이었다고밖에 해석이 안 돼요.”
“하지만 고작 그런 일 가지고 계약을 해지하는 건… 권력 남용… 이에요.”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말에 섞인 ‘고작’이라는 단어에, 강현우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혔지만 금세 표정을 달리했다.
그는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천천히 말해 주었다. 유세민의 양부인 유성권 이사가 백영 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는 이야기부터, 그 나름의 권력과 인맥을 이용한 부정한 방법으로 채용에 관여한 이야기까지. 유세민뿐만 아니라 여러 친인척들의 채용에도 큰 비리를 저질렀다는 이야기까지 차근차근 모조리 털어놓았다.
“또 유성권 이사는 사람 좋은 척 앞에서 이미지 쌓아 놓고 뒤에서는 성매매에 중독된 사람이었어요. 그것도 미성년자 성매매. 이렇게까지 해고해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데, 적시에 알맞은 대처를 했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휘몰아치는 엄청난 정보에 희주는 조금 멍해졌다.
“유세민 씨야 채용 비리 하나로 해고하는 게 끝일 테지만, 유성권 이사는 붙일 수 있는 죄목이란 죄목들은 다 붙여서 밑바닥으로 끌어 내릴 겁니다. 또 채용 비리에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도 차례로 징계를 줄 생각이에요. 그래야 본보기가 될 테니까.”
“…….”
“희주 씨 일이기도 하지만 내 일이기도 한다는 점 알아줘요. 이 문제로 앞으로 기사는 더 쏟아질 테고, 백영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말을 해도 욕을 먹을 거예요. 주가 영향도 물론 있을 거고요.”
“아…….”
“이래도 고작 그런 일로 보여요?”
단호한 물음에 희주는 입을 다물었다. 저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채 곤란해하는 모습에서 어렴풋이 죄책감을 읽은 강현우가 속으로 욕설을 짓씹었다. 잘못을 빌어야 할 놈들은 따로 있는데 왜 이 사람이 자책을 한단 말인가.
“분명히 말하지만 이건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제 일이에요.”
“현우 씨…….”
“……맞아요. 개인적인 감정이 아예 들어가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괘씸한데 더는 방법이 없어서 같은 편에 있는 다른 한 놈이라도 더 패 주고 싶었어요.”
왜인지 멋쩍어하며 덧붙이는 말에 희주는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강현우는 바짝 굳은 어깨에 힘을 풀었다. 어차피 전했어야 했던 말들이지만, 괜히 듣고 나서 희주가 심란해할까 걱정했던 터라 이렇게 웃는 얼굴을 보니 안도감이 밀려왔다. 고개를 기울이자 보들보들한 볼에 입술이 푹 파묻혔다.
“주가야 당장은 하락하겠지만, 희주 씨가 신경 쓸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정말요?”
“네. 이건 거짓말 아니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들은 밤낮없이 일해야 하겠지만요. 뒷말은 과감히 생략한 강현우는 희주의 입술을 머금으며 웃음 지었다.
“현우 씨.”
잠시 말없이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던 희주가 뒤를 돌아 강현우에게 똑바로 시선을 맞추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기라도 한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한숨처럼 내쉬었다.
“고마워요.”
“…….”
“위해 줘서.”
눈을 마주하고 웃은 희주가 슬그머니 발끝을 들어 강현우의 입술에 짧게 제 입술을 비볐다. 보들보들한 입술이 장난처럼 쪽쪽 소리를 내면서 닿았다가 떨어졌다. 솔직히 더 남은 뒷이야기도 있고, 말하라면 더 말할 수도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이미 지나간 일들로 지금 함께인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아, 그런데 혹시 배예은 선생님이랑 따로 만나셨어요?”
잠시간 한 몸처럼 붙어 있던 희주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몸을 떼었다. 배예은이 제게 소취제를 뿌려 주었던 날, 그때 학교 근처 골목길에는 분명 저와 배예은 둘 뿐이었는데 어떻게 강현우가 그때의 일을 알게 된 건지 궁금해졌다.
“저 말고 안 실장님이. 그분도 소문 듣고 나서 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게 있는 듯했어요. 유세민 씨의 고의성을 추측한 것도 배예은 씨예요.”
“아…….”
그랬구나. 그 소문으로 인해 배예은과도 관계가 멀어진 것만 같아 괜히 울적했는데, 조금 얼떨떨하면서도 마음이 들떴다. 발긋하게 화색이 도는 희주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강현우가 고개를 숙여 볼에 입을 맞추었다.
“희주 씨. 희주 씨 복직 전에 우리 오래간만에 데이트나 할까요? 평일도 좋고, 주말도 좋아요. 희주 씨가 원할 때… 희주 씨가 원하는 곳으로 같이 놀러 가요.”
“어……. 지금 생각나는 곳은 없는데…….”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고민해 봐요. 어디든 데려가 줄게요.”
당장 떠올리지 않아도 되건만, 정말 강현우의 말대로 오래간만의 데이트여서 그런지 희주는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푹 쉬기로 한 나날 중 이제 겨우 사나흘이 흘렀을 뿐인데도 실내에만 있는 것이 어지간히 답답하긴 했는지 들썩거리는 몸뚱이가 몹시도 귀여웠다. 강현우는 따끈한 몸을 꽉 끌어안고 살살 매만지며, 희주의 머리카락이 그의 입술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근자근 짓눌렀다.
“아.”
그때, 희주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장소가 하나 있었다.
“가고 싶은 곳… 있어요.”
* * *
“주말에 오는 게 더 좋지 않아요? 아니면 내가 하루 정도 회사 안 나가도 됐는데.”
못마땅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툭 뱉은 목소리가 신난 듯 앞서 나가는 뒤통수에 가 꽂혔다. 장소에 대한 불만은 없지만, 해가 지고도 한참 넘어가 버린 시간이라 하늘이 무척이나 어둡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다행히―이것도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게 맞나 싶지만, 아무튼―휘황찬란한 조명과 알록달록한 조형물들이 널리고 널려 있어 낮인지 밤인지 가늠이 되지 않지만 말이다.
“아무리 상무님이라고 해도 회사 너무 자주 빠지면 보기 안 좋아요.”
저도 모르게 앞서가던 희주는 뚱한 표정으로 덩그러니 서 있는 강현우를 보고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왔다. 퇴근하자마자 오자고 한 건 좀 그랬나? 마음 한편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울리지 않게 새카만 슈트 차림인 것이 웃겨서 희주가 웃음 지었다.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 없다고 해도요?”
“음, 전에 보니까 안 실장님이 너무 힘들어하시는 것 같던데.”
“그러라고 돈 많이 주는 거예요.”
강현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강현우를 밉지 않게 흘긴 희주가 먼저 손을 맞잡고 끌었다. 지금 시간에는 역시 들어가는 사람들보다 나오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곁을 스쳐 지나가는 여러 가족, 연인, 친구 관계의 낯선 이들을 무심히 보던 강현우가 물었다.
“그나저나 놀이공원은 왜 오자고 한 거예요?”
“그냥요. 같이 오고 싶었어요.”
“곧 폐장이라 금방 나가야 될지도 몰라요.”
“괜찮아요.”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래야 할 것이었다. 일부러 야간 개장 시간에 맞추어 방문하는 이들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목적인 퍼레이드와 불꽃놀이는 이미 한참 전에 끝난 지 오래였다. 재입장이 아닌, 지금 당장 입장하겠다고 하는 두 사람에게 폐장 시간을 안내하던 직원의 표정에 의아함이 깃들어 있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희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강현우만이 이를 어쩌나, 하는 표정으로 희주의 눈치를 보았다. 몇몇 놀이 기구는 운영 시간이 종료되어 직원 한 명 없이 방치되어 있기까지 했는데, 희주는 강현우를 이곳저곳 끌고 가며 급기야 하찮은 동물 대가리가 달린 머리띠를 강현우에게 손수 씌워 주기까지 했다.
강현우는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머리띠에 온 신경이 쏠려 속으로는 몇 번이나 한숨을 삼키고 있었다. 어쩌겠는가, 연인이 하고 싶다는 것을. 그런 표정이 무척이나 심란해 보였는지 오래지 않아 소리 내 웃은 희주가 빼 주었기에 망정이었다.
이왕 온 거 퍼레이드까지는 몰라도 불꽃놀이 정도는 봤으면 했는데. 하필 끝난 직후 도착한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조금씩 안쪽으로 걸음을 옮길수록 인파는 줄어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별말을 나누지 않고 오로지 걷기만 했다. 슬슬 폐장 분위기에 접어드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해치고, 그렇게 한참 걷고 또 걸었다.
“현우 씨는 언제 마지막으로 놀이공원 와 보셨어요?”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희주가 문득 이렇게 물었다. 강현우는 뜬금없는 물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잠시 언제쯤인지 떠올리다가 불확실하게 대답했다.
“……학생 때였던 것 같아요. 희주 씨는요?”
“저는…….”
희주는 지나가듯 흐릿하게 웃었다.
“전 다섯 살 때 이후로 와 본 적 없어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두 사람은 아주 느릿하게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화려하게 꾸며 놓은 커다란 나무와 그 아래 듬성듬성 놓여 있는 벤치. 무성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저 멀리 희미하게 무리 지어 지나가는 사람들.
옛날 일을 회상하기라도 하는 듯 희주가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너무 옛날이라 뚜렷하게 기억나는 건 없었지만,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밝은 듯했다. 착각일지는 모르지만.
“저…….”
앞으로 강현우에게 말하려고 하는 건,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는 이야기였다.
“저 알다시피 시설 출신이잖아요. 사랑의 집.”
꽤 무거운 이야기가 될 법한 서두에 강현우가 흘끗 희주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희주는 아무렇지 않은 듯 오히려 입가에 미소까지 잔잔히 걸친 채였다.
“퇴소하기 전까지 쭉 거기서 살았어요. 지금도 시간 될 때마다 종종 찾아가고는 해요. 고향 집처럼. 원장 수녀님한테는 가끔 엄마라고도 부르고요.”
“…….”
“사랑의 집에 들어갔던 게 다섯 살 때예요.”
이 어디쯤일 것이었다. 희주는 빈틈없이 꼭 잡고 있던 강현우의 손을 스르륵 놓고, 기억을 더듬어 마지막으로 엄마를 봤던 그 장소에 가서 섰다.
“저 여기서 버려졌거든요. 어린이날에요.”
딱 이 자리에서.
희주는 어렸던 제가 무력하게 서 있었던 그 자리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엄마는 분명, 금방 아이스크림을 사서 돌아온다고 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다가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당연히 실체는 없었지만, 희주는 어린 자신을 마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허공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3학년을 맡으면 현장 체험 학습을 놀이공원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공부하느라 힘들 텐데 하루 정도는 걱정 없이 놀라고요. 근데 저는 여기서 가족한테 버려진 기억밖에 없어서… 아무리 일 때문이라고 해도 엄두가 안 났어요. 그래서 3학년은 한 번도 맡아 본 적도 없고… 또, 어린이날이 있는 5월을 가장 싫어하기도 해요.”
“…….”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냥 현우 씨랑 같이 와 보고 싶었어요. 혼자서는 용기가 안 나니까 그랬나 봐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손을 놓았던 곳에 그대로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강현우가 보였다.
“근데 생각보다 괜찮네요. 지금까지 모르는 척 피하기만 했던 게 무색해질 만큼.”
희주는 개운하다는 것처럼 과장하여 크게 가슴을 부풀렸다. 한결 가벼워진 말투와 웃음이 울려 퍼졌다. 마음의 짐이랄 것도 없었지만, 저 홀로 지고 왔던 과거의 기억을 훌훌 털어 버린 느낌이었다.
거창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괜히 무게를 잡고 말한 것만 같아 어쩐지 멋쩍어진 희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분명 가뿐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울렁거렸다. 지금껏 감쳐왔던 치부라서 그런 것일까.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솨아아. 시원한 바람에 나뭇잎이 나부꼈다.
“희주 씨.”
사위가 워낙 조용한 탓에 저벅이는 발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내 시야로 까만 구둣발이 보였다. 강현우는 축 늘어진 희주의 손을 가만히 잡아 쓰다듬고는, 보이지 않는 얼굴을 보여 달라는 듯 말랑한 볼을 부드럽게 감쌌다. 말간 눈동자에 자신이 오롯이 담겼다.
“나한테 말해 줘서 고마워요.”
그 누구에게도 알려 주고 싶지 않았을 시간과 장소 속 희주와 맞닥뜨린 강현우는, 그가 제게도 그러했듯이 자신도 제 모든 것을 그에게 안겨 주고 싶었다. 하다못해 목숨 줄까지도.
털어놓기까지 분명 힘겨웠을 것이다. 하지만 희주가 이를 통해 마침표를 찍었을 거라는 예감에, 강현우는 눈앞의 연인에게 우러나는 진심을 전하고 싶어졌다. 이곳에 나쁜 기억뿐이라면, 앞으로 좋은 기억을 안겨 주면 그만이었다.
“희주 씨 잘못이 아니에요.”
“…….”
“잘 컸어요.”
“…….”
“아주 멋있고, 예쁘게.”
다정한 말에 희주는 강현우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 눈가가 온통 붉었다. 강현우는 희주가 저를 보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제 마음이 전해지기를, 끊임없이 진심을 쏟아 냈다.
“나는 희주 씨의 그 어떤 조건들을 보고 반한 게 아니에요.”
“…….”
“나는 그냥, 희주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
“현우 씨.”
“네.”
“그럼… 이런 저도 괜찮으면…….”
입술이 막무가내로 움직였다. 지금 그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저와 결혼해 주세요.”
떨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과는 달리 덜덜 떠는 목소리가 볼품없이 흘러나갔다. 입술을 감쳐문 희주는 민망한 웃음을 삼켰다.
“더 멋있게 말해야 하는데…….”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가 고개를 숙였다. 희주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밤인데도 꼭 낮과도 같은 환한 빛이 금세 어둠으로 물들었다. 바짝 당겨지는 몸, 맞닿은 체온, 체향, 페로몬. 어느 것 하나 낯설지 않은 이 감각.
“충분히 멋있어요.”
강현우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희주와 함께 일출을 맞고 싶었다. 희주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고, 내일 떠오를 해를 기약하며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제 마음이, 희주에게 전해지기를 바랐다.
“사랑해요, 희주 씨.”
희주는 연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슬그머니 페로몬을 풀어내자, 조금 놀란 듯한 연인의 눈이 이내 예쁜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간지러웠다. 희주는 입술을 간질이는 말을 오래 머금고 있다가 참지 못하고 쏟아 냈다. 기꺼이 그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저도… 사랑해요.”
다시금 입술이 부딪치면서 쉼 없이 밀려드는 다정함에 취해 갈 찰나, 희주는 어쩌면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물음에 진정한 답을 깨닫고 미소 지었다.
“사랑해요.”
사랑의 조건은, 그저 열렬히 사랑하기만 되는 것뿐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