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4권) (13/15)

12.

다음 날, 전국 학력 평가가 치러졌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전 학년이 동시에 치르는 시험인 만큼, 긴장감이 더해진 학교는 평소와 다르게 쥐 죽은 듯한 고요함과 삭막함이 감돌았다.

학생들이 별도의 이동 없이 각 반에서 시험에 응하는 동안, 교사들은 시험장 감독을 보았다. 현재 실력을 평가하기 위함도 있겠지만 실전 감각을 익히기 위한 시험이기도 했기에, 실제 수능과 같은 환경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교사들도 최선을 다해 각자의 역할에 임했다.

시간이 다 됐음을 확인한 희주는 6반 교실로 이동했다. 1교시에 이어 4교시는 각 반의 담임이 감독을 맡아 조종례까지 이어 끝내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마지막 4교시는 암기 과목이라 시험 시작 전에 마지막 점검을 하는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희주는 아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가며 교단에 섰다. 인기척에 시선을 드는 아이들이 몇 있었지만 아주 잠깐일 뿐 이내 각자가 준비해 온 시험 자료에 고개를 박았다.

몇몇 손을 드는 학생들의 요구 사항을 들어 주고, 혹시 더 필요하거나 불편한 점은 없는지 확인하던 희주는 문득 문제를 푸느라 바쁜 동그란 정수리들을 쭉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몇 분이나 남았는지 보기 위해 벽시계로 시선을 던졌다. 평소 창가에 걸려 있던 벽시계는 칠판 가장 위로 옮겨져 있었다.

고루 시간을 잘 보기 위함도 있겠지만 초침 소리 때문에 미리 옮겨 뒀을 가능성이 컸다. 작은 기침 소리 하나에도 예민할 때다. 간혹 예민한 아이들은 감독 교사가 뿌리고 온 향수 냄새나, 몸에 밴 페로몬에 기민하게 반응하기도 했다. 하여 시험 기간에는 형질자가 아니더라도 소취제를 들고 오는 학생도 더러 있기 마련이었다.

“…….”

반 전체를 조용히 훑는 희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반 유일한 형질자인 학생에게 가 닿았다. 아이는 희주가 앞에서 감독을 보건 말건 샤프를 손에 꼭 쥔 채 골몰 중이었다. 실상 그 아이뿐만 아니라 반의 모든 아이들이 문제를 풀거나 엎드려 잠을 자는 등 제게 이렇다 한 관심도 두고 있지 않았지만, 그래서인지 더 신경이 쓰였다. 희주는 슬그머니 손을 내려 주머니 속 휴대용 소취제를 만지작거렸다.

얼굴은 무표정으로 덮어 놨지만, 속에서는 오만가지 생각들이 어지러이 오갔다.

솔직히 그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 몸에 밴 강현우의 페로몬을 누가 먼저 맡았는지, 또 그 사실이 어떤 경위로 퍼지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학년 부장의 말대로 제가 소홀했던 것도 사실이고, 처음부터 제가 소취제만 깜빡하지 않았어도 구설수에 오를 일도 없었을 테였다.

자주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처박아 두는 것이 아니었다. 어제 생각지도 못한 일로 된통 넋이 나갔던 희주는 현관 앞에 둔 소취제 위치를 괜히 바꿔도 보고, 출퇴근 가방에도 잃어버린 것을 대체해 새로 넣어 두었다. 오늘은 시험이 있는 것을 감안하여 조그만 사이즈의 소취제를 추가로 챙겨 나오기도 했다. 뿌리지 않고는 못 배기게끔 말이다.

진짜 소취제만 깜빡하지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마음이 무거워질 일은 없었을 텐데. 어떻게 그걸 까먹을 수가 있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자책감에 희주는 입술을 꾹 깨물고 한숨을 삼켰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 제 안일함을 탓해야지, 후회해도 별수 없었다.

“…….”

그러면서 든 이상한 생각이 하나 있었다. 뒤늦게 떠오른 의문이기는 하고, 이 의문점을 해결한다고 지금 당장 상황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늦게라도 짚어 봐야 할 사안이기는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방에 넣어 둔 소취제의 행방이 의아스러웠다. 분명히 제 손으로 챙겨 넣어 놨었는데, 도대체 그게 어디로 사라졌는지 의문이었다. 희주는 이미 흐릿해진 기억을 또 한 번 더듬어 보았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있었던 것은 확실했다.

혹시 가방 안에서 다른 무언가를 꺼내다가 떨어뜨려서 잃어버렸나. 회식 자리에 두고 나왔을 때 없어졌나. 아니면 혹시 유세민이 한 짓은 아닐까.

의심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목받는 것을 즐기고, 또 주목을 받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는 유세민의 성격상, 제 소취제로 뭘 한다고 해서 그에게 득이 될 것이 없었다. 오히려 나서서 제 가방을 챙겨 준 것이 수지맞는 장사였다.

긴 숨을 들이마신 희주는 넌지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와 소용없는 짓이었다. 만약 소취제가 가방에 있었더라도 바뀌는 건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 더 신경 쓰는 수밖에…….

툭.

“…….”

무언가 떨어져 바닥을 구르는 소리에 희주는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났다. 똑같은 곳을 힐긋거리는 아이들의 눈빛을 이정표 삼아 바라보자, 머뭇거리며 손을 든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문제를 풀다가 샤프를 떨어뜨린 듯했다. 희주는 얼른 가 샤프를 주워 주었다. 소리 없이 꾸벅 숙어지는 고개를 보고 상투적으로 입꼬리를 올린 희주는 다시 원래 서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교시가 끝나기까지 10분 남짓 남아 있었다. 희주는 상념은 지워 버리고 눈앞의 상황에만 집중하려 애썼다. 그나마 이만하기를 다행이라던, 정작 저로서는 전혀 다행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학년 부장의 말을 속으로 곱씹으면서.

* * *

답안지를 수합한 후 종례까지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왔을 때에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교사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희주는 별생각 없이 들어왔다가 눈이 크게 떠진 채로 주춤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교무실을 가득 채운 어수선한 공기는 무슨 일인지 도통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낯설었다.

“무슨 일이에요? 뭐 부정행위라도 나왔나?”

저보다 먼저 교무실에 들어와 있던 교사들이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희주는 책상을 정리하는 척하며 슬그머니 귀를 기울였다.

“부정행위는 아니고. 쯧, 아무래도 윗분들 이야기 같은데.”

무언가를 아는 듯한 교사가 천장 쪽을 삿대질했다. 그러고는 옅은 턱짓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티 안 나게 시선만 굴려 따라 돌아본 곳에는 학년 부장이 있었다. 학년 부장은 어쩐지 화가 나 보이기도 하고 당혹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부여잡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랑 통화하시는 건데요?”

“교장 선생님.”

“교장, 아…….”

희주는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가 누가 볼 새라 얼른 입술을 감쳐물었다. 누구랑 저렇게 통화하는가 했더니 상대가 교장 선생님일 줄이야.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사로운 일은 아니리라 대강 짐작이 갔다.

혹시 제 일 때문은 아니겠지. 학년 부장은 학교 이미지만을 거론했지만, 은연중에 교무 부장 보직을 노리고 있는 그로서는 실적에 명백한 감점밖에 되지 않을 제 소문에 더욱 전전긍긍해 있을 게 뻔했다. 지레 찔린 까닭에 희주는 학년 부장을 연신 힐끔거렸다.

“아니, 왜……. 이걸 이렇게 갑자기 알려 주시는 게 어디 있답니까, 교장 선생님……. 예? 아니, 하……. 아닙니다. 네. 일단 알겠습니다.”

좀처럼 알아들을 수 있는 흐름은 아니었지만, 일단 저와 관련된 일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내심 크게 안도한 희주는 제멋대로 꿈틀거리려는 얼굴 근육에 힘을 주었다.

슬슬 통화가 마무리되려는 낌새를 보이자 삼삼오오 모여 있던 교사들이 큼, 하고 헛기침을 하면서 어색하게 자리로 되돌아갔다. 정수기 앞 공간이 빈 걸 본 희주는 은근슬쩍 일어나 커피를 탔다. 티스푼으로 휘휘 젓고 있는데 교무실 문이 열리고 유세민이 모습을 드러냈다. 종례가 늦어진 모양이었다.

유세민은 미소가 만연한 얼굴로 들어왔다가 공기의 흐름이 평소와 다름을 느꼈는지 바로 슬슬 눈치를 보았다.

유세민이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전화를 끊은 학년 부장이 작게 욕설을 짓씹었다. 다행히 통화가 끊어진 후라 수화기 너머의 교장 선생님에게는 전달되지 않았지만, 한 공간 안에 있던 교사들은 교무실에서는 웬만하면 듣기 어려운 된소리가 선명한 음질로 귀에 박히는 경험을 해야 했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예상했던 것보다 사태가 심각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직감한 교사들이 서로를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럼에도 학년 부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짜증 섞인 한숨을 푹푹 쉬어 댔다. 이래서는 퇴근하는 것도 쉽지 않을 터였다.

“……뭐예요? 왜 다 그러고들 서 있어? 정신 사납게.”

학년 부장은 한참 동안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욕설을 투덜거리다 따가운 시선들을 느꼈는지 험악하게 눈을 부라렸다. 짜증으로 일그러진 조그만 눈이 희번덕거렸다. 교사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학년 부장과 눈이 마주칠세라 시선을 내리깐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이만 퇴근하라는 소리도 않고 그저 땅이 꺼져라 한숨만 푹푹 내쉬는 학년 부장에게, 최미라 선생이 물었다. 절로 감탄이 나오는 대범함에 여러 쌍의 눈동자가 최미라와 학년 부장을 갈마보았다.

“하……. 학교에 이사장님 오신답니다.”

학년 부장이 신경질적인 투로 팩 쏘아붙였다. 그러고도 모자란지 답답해 죽겠다는 듯 가슴팍을 퍽퍽 내리치며 울분 아닌 울분을 토했다.

“이사장님이요?”

“지금 당장 오고 계신대요. 에휴, 미리 말씀이라도 하고 오시지. 하필 또 이런 날에 오신대. 이제 좀 있으면 해까지 떨어지겠구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교사들이 일순 황당하다는 표정을 했다. 잔뜩 어리둥절해져서는 바로 옆 사람을 마주 보며 ‘갑자기? 왜?’ 하는 입 모양을 보이는 이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사장은 취임 이후 지금껏 단 한 번도 학교를 방문한 이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들 한다는 취임식도 마다하고, 그동안 학교에서 열렸던 이런저런 행사들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이사장이 학교에 온다니. 이 소식만으로도 놀라운데, 하필 그날이 시험을 치른 오늘이라고 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학년 부장의 반응이 이해가 갔다. 기실 취임 이후 첫 방문이지 않은가. 대놓고 보여 주기식일 뿐이지만 미리 청소라도 해서 맞이할 준비를 해도 모자랄 판에, 시험이 막 끝나 어수선함 그 자체인 상황에 온다고 하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일 테였다. 학교에 남아 있는 이들이라고는 이제 교직원들뿐인데, 이 인원 가지고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싫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교장과 통화하는 내내 곤란해하던 학년 부장의 반응만 보더라도 쉽게 퇴근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한 건 비단 희주뿐만이 아니었는지, 눈치를 살피느라 급급해 있던 교사들 틈에서 희미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피곤한 눈을 끔뻑거리는 표정에 체념이 묻어 있었다.

실컷 투덜대며 짜증을 쏟아 내다 보니 조금 진정되기라도 했는지 표독스러웠던 학년 부장의 눈빛이 살짝 느슨해져 있었다. 묵직한 숨을 푹 내쉰 학년 부장은 조금 짜증이 서려 있지만 나름대로 평이한 투로 말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아무튼, 그렇게 됐다니까 다들 빨리 할 거 끝내고 퇴근하세요. 평교사들 제외하고 부장 선생님들만 모이기로 했으니까…….”

어휴, 귀찮아. 막상 이사장 앞에서는 허리가 반으로 접히도록 굽신댈 거면서, 학년 부장은 체면 때문인지 거드름을 피웠다.

모두가 바라고 있었을 말이 학년 부장의 입을 통해 나오자 교사들의 표정이 금방 일변했다. 너도나도 경쾌하게 ‘부장님 피곤하실 텐데’ 하면서 마음에도 없는 아부를 떨었다.

희주도 눈치 없이 자꾸만 위로 솟구치려는 입꼬리를 의식하며 적당히 표정 관리를 했다. 평교사들은 제외라니. 더 좋은 점은 이 시간이면 분명 이따가 회식하자는 말이 나올 텐데, 거기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회식 당일 통보는 한 번이면 족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뵐게요. 들어가세요.”

재빠르게 일을 마친 교사들이 종국에는 웃음기를 감추지 못해 함박웃음을 지은 채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희주도 얼른 짐을 챙기고, 노트북 전원도 끈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소보다 이르게 출근해 내내 서서 감독하느라 허리며 다리며 전부 찌뿌둥했다. 뜨끈하게 씻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내일은 또 체험 학습이라고 환경 미화 봉사를 가는 날이기 때문에, 오늘의 피로는 미루지 말고 풀어 줄 필요가 있었다.

집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강현우가 퇴근하면 통화도 하고. 그렇게 하루 마무리해야지. 시험 감독을 보느라 하루 종일 연락을 하는 둥 마는 둥 해서 그런지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아, 잠깐만.”

재빨리 튀어 나가기 전에 상투적인 인사말을 뱉으려는 찰나, 듣기만 해도 불길함이 감지되는 학년 부장의 목소리가 희주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거기, 그, 유세민 선생님이랑 권희주 선생님은 남아서 나 좀 도와줘요.”

* * *

“…….”

“…….”

콕 집어 도와 달라던 학년 부장은, 막상 남고 나니 딱히 시키는 것도 없이 유세민과 저, 둘만 교무실에 덜렁 남겨 두고 담배를 챙겨 나갔다. 둘만 남은 교무실에는 불편한 정적이 흘렀다.

노트북이라도 켤까 하고 커버를 만지작거리던 희주는 이내 관두고 손깍지를 꼈다. 꾸물꾸물 손을 꼼지락대는 의미 없는 행동을 하며, 학년 부장이 사라진 복도 쪽을 자꾸만 힐끔거렸다. 뭘 도와달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끝내고 보내 줬으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학년 부장은 백영 여고의 비공식적인 헤비 스모커였고, 그가 돌아오려면 한참은 있어야 될 것 같았다.

옆자리의 유세민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 휴대폰을 하고있었다. 그런 그를 티나지 않게 흘긋거린 희주는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차라리 자리라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이 숨 막힐 듯한 정적도 나름 버틸 만할 것 같은데, 하필 유세민과는 파티션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 분단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유세민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몰라도, 저는 이 상황이 불편해 죽을 지경이었다.

왜 하필 저희 둘이며, 부장 선생님들만 남기로 했다면서 뭣도 아닌 평교사더러 남으라고 한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이사장 방문과는 별개로 할 일이 또 있나 생각해 봤지만, 관련도 없는 일을 하필 오늘 같은 날에 시킬 것 같지는 않았다.

집은 언제쯤 갈 수 있을까. 기약이 없어진 퇴근에 지친 희주는 벌써 몇 시간째 초과 근무 중인지 헤아려 보았다.

그때 책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무관심하게 있던 유세민도 힐끔 짧게 시선을 두는 것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 떠진 희주는 낚아채듯 휴대폰을 챙겨 들었다. 손안에 들어와서도 지잉지잉 울리는 휴대폰은 기껏 진동 모드로 바꿔 놓은 게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만큼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얼른 버튼을 눌러 무음으로 바꾸면서 화면에 적혀 있는 이름을 확인했다. 강현우였다. 희주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저야 퇴근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지만,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는 강현우는 퇴근하기에 이른 시간이었다. 또 일찍 퇴근하기라도 했나? 내심 데이트를 기대하게 된 희주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보세요?”

조용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며 등 뒤로 교무실 문을 닫았다. 학생들이 모두 하교한 터라 조금만 크게 말해도 복도가 쩌렁쩌렁 울렸다. 희주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근처 교사용 화장실로 향했다. 지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지만, 학년 부장은 언젠가는 돌아올 거였기 때문에 교무실에서 멀리 벗어날 수는 없었다.

―저예요. 희주 씨. 시험 끝났어요?

“네에. 아까 끝났어요. 지금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은.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요. 근데 목소리가 울리네. 지금 어디예요?

희주는 딱히 기댈 데 없는 화장실을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강현우는 매번 저와 전화할 때마다 제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했는데, 그게 저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것같이 느껴져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학교예요. 목소리 울리는 건 잠깐 통화하느라고 화장실 들어와서 그렇고요.”

―학교? 시험 끝났다면서요. 남아서 채점하는 건 아닐 텐데.

“답안지는 이따 교육청에서 수거해 가요. 부장 선생님께서 뭐 좀 도와 달라고 하셔서 남은 건데……. 무슨 일인지 말씀 안 해 주시고 잠깐 담배 태우러 가셔서 일단 무작정 대기 중이에요.”

―다른 선생님들도 다 같이요?

“다른 분들은 다 퇴근하셨고 저랑 다른 한 분 더 계세요. 근데 현우 씨 지금 회사에 있을 시간 아니에요? 오늘도 조기 퇴근 한 거예요?”

―아……. 퇴근한 건 아니고요.

강현우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저는… 잠시 외근 나왔어요.

“이 시간에요?”

―시간이 지금밖에 안 날 것 같아서요. 그래도 큰 일정은 아니라서 갔다가 금방 복귀할 것 같아요.

“어, 그럼 지금 운전 중인 거예요?”

―차에 타고 있는 건 맞는데 운전하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동행하는 사람이 또 있어서요.

“혹시… 지금 저희 통화하는 거, 같이 타고 계신 분한테도 들리는 건 아니겠죠?”

커플 사이에서 오갈 법한 달짝지근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나니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겸연쩍어진 희주는 한쪽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어색한 미소가 지어지고 벌어진 잇새로 작게 헛웃음이 새었다.

―안 들릴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는지는 몰라도 어쩐지 결연한 말투에 픽 웃음이 나왔다. 희주는 왜인지 모를 부끄러움에 바닥을 디딘 신발 밑창을 타일 위로 슬슬 문질렀다. 몸을 구기듯 웅크리면서 귀에 댄 휴대폰을 더 바짝 붙이기도 했다.

“같이 일하시는 분들인 거죠?”

―네.

“그럼 일 끝나고 편할 때 통화해요, 우리.”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눈치챘는지 강현우가 낮게 웃었다. 따라서 미소 지은 희주가 콩콩 뛰는 심장을 대신하여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요. 그럼 내가 일 마무리되는 대로 연락할게요.

“네…….”

―저녁 거르지 말고요.

살짝 상기된 희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전화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학년 부장의 변덕에 살짝 심통이 나 있었는데, 애인과 잠깐 통화했다는 이유만으로 누그러져 한껏 말랑해져 있었다. 이런 제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줏대 없어 보이는 듯해, 민망해진 희주는 작게 코를 훌쩍거리면서 홀로 쑥스러워했다.

끊긴 전화를 주머니에 잘 갈무리한 뒤 희주는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치는 얼굴이 발갰다. 요즘 틈만 나면 얼굴이 화끈거렸다. 혈액 순환이 잘 안 되나. 거울 속 자신과도 길게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한 희주는 괜히 탓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수도꼭지를 틀었다.

수건이 없어 차마 세수는 못 하고, 온 김에 손이라도 씻고 나갈 셈이었다. 하루 종일 갱지를 만지작거렸더니 제 손도 같이 건조해진 느낌이었다. 희주는 비치되어 있는 핸드 워시로 손끝에 남은 버석거림을 흘려보냈다.

언제 묻었는지 모를 까만 펜 자국이 손날에 묻어 있었다. 비누 거품을 묻혀 슬슬 문지르고 있는데, 화장실 문을 열리고 누군가가 옆 세면대에 와 섰다.

“…….”

“…….”

대놓고 흠칫해 쳐다보는 희주와는 달리 유세민은 눈이 마주치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말없이 수도꼭지를 틀었다. 조금 민망해진 희주는 거울에 비치는 유세민을 힐끔 쳐다봤다가 이내 제 손을 닦는 데에만 집중했다. 쏴아아, 하고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우성 알파더라고요.”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놀란 희주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유세민은 여전히 손을 닦고 문지르는 데만 열중이었다.

누가 봐도 유세민이 제게 말을 건 상황이었다. 들은 걸 못 들었다고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희주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누구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제야 유세민은 시선을 들어 올려 희주를 바라보았다. 거울을 통해 눈이 마주치자 유세민의 입꼬리가 씨익 당겨졌다. 마저 손을 닦은 그는 허공에 물기를 탁탁 털고, 페이퍼 타올을 뽑아 젖은 손을 닦아 내는 동안 잠시 대답을 아끼다가 여상한 투로 말했다.

“이따가 오신다는 이사장님이요. 우성 알파라는 말을 들어서요.”

“……아.”

희주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면서 반사적인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유세민이 왜 제게 이런 것을 알려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오메가끼리 가벼운 스몰 토킹이라도 나누자는 건가. 느닷없는 정보 습득에 당황한 희주가 뻣뻣하게 눈동자를 굴리다가 아래로 떨구자, 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유세민이 의아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궁금해하실 줄 알고 말씀드린 건데.”

아무래도 오메가끼리의 스몰 토킹을 유도한 것이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희주는 이사장의 형질이 어떠하건 전혀 흥미도 없거니와, 만일 흥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유세민과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희주는 유세민에게 어떻게 대꾸해 줘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문 채 제 할 일을 했다. 손날에 묻은 게 유성 잉크인지 바람대로 지워지지 않았다. 대놓고 무시당한 거나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유세민은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부장 선생님들만 모이는데, 왜 우리 둘도 남아야 하는 건지 선생님은 안 궁금해요?”

“……따로 도와야 할 일이 있다고 하시니까요.”

“다른 선생님들도 계신데 꼭 우리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럼 본인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는 건가? 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게 퍽 수상해 미심쩍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가볍게 웃은 유세민이 알은체를 하기 시작했다.

“2학년부에 오메가가 우리 둘밖에 없잖아요.”

“…….”

“척하면 척 아니에요? 난 듣자마자 딱 알겠던데. 이사장님 오시는데 뭐 제대로 한 게 없잖아요. 날 잡고 청소도 못 해, 공부 중인 애들 모습이라도 보이면 좋은데 애들은 이미 다 집 가고 없고. 근데 보니까 이사장님이 알파라네. 나름 머리 써서 우리 이용해 먹으려는 것 같지 않아요?”

희주는 숨길 새도 없이 대번에 인상을 구겼다.

“아마 다른 학년에 있는 선생님들도 사정은 같을 거예요. 마중 나갈 때 머릿수라도 많아야 체면이 설 테니까 되는 대로 불렀겠죠. 그래도 인사만 하고 빠지라고 할 거예요. 이사장실 가서 뭐 이러쿵저러쿵 떠들 게 뻔한데 우리 같은 평교사들이 가서 뭐 해.”

뭐,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이지만. 제법 경쾌하게 말한 유세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유세민 말대로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한 말이었지만, 이미 들은 이상 끈적하게 달라붙은 찝찝함을 도무지 뗄 수는 없을 듯했다.

그래서 지시 사항도 없이 자리를 비운 건가. 학년 부장의 행동이 이제야 조금 납득이 갔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희주는 학년 부장이 은근하게 드러낸 차별에 어안이 벙벙해져, 하던 것도 잊고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아마 학년 부장은 이게 차별인 것도 모를 테다. 특별 대우라고만 생각하겠지.

“선생님 되게 순진하시다. 진짜 몰랐어요?”

파래졌다가 새하얘졌다가 곧 빨개지는 변화를 재미있다는 듯 구경하던 유세민이 비릿하게 웃었다.

“으음……. 그래서 애들도 순진한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희주가 유세민을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찌푸려진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그건 무슨 소리예요?”

“응? 뭐가요?”

“여기서 애들 얘기가 왜 나와요?”

“아, 들렸어요? 그냥 혼잣말이었는데.”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이런 말도 못 해요? 내가 애들 욕한 것도 아닌데.”

유세민은 이유를 묻는 말에 두루뭉술하게 답하며 신경을 살살 긁었다. 순진한 어린애처럼 동그랗게 뜬 눈이 마치 약을 올리는 듯했다.

뚝. 아직 지워지지 않은 펜 자국을 뒤로 한 채 희주는 흘려보내던 물을 끊었다. 비로소 정적이 일었다. 희주는 거울에 비친 유세민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제대로 말하라며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똑바로 주시했다.

“뭔데요? 똑바로 말해요.”

“진짜 혼잣말인데.”

“뭐냐니까요.”

흠. 무언가 고민하듯 침음하던 유세민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선생님도 아시죠? 요즘 애들 사이에서 선생님 연애한다는 말 도는 거.”

“……그런데요.”

“어느 반을 들어가든 다 권희주 선생님한테 애인 있냐고 물어보더라구요.”

유세민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묻지. 하여튼, 예나 지금이나 애들 관심사가 다 거기서 거기인 게 참 신기해요.”

그 당시를 회상하는지 눈을 굴리던 유세민이 피식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갑자기 이 이야기는 왜 꺼내는지 이해하지 못해, 희주는 할 말을 잃은 채 그를 빤히 보기만 했다.

“근데… 확실히 느꼈어요. 여기는 여고라서 더 그런 것 같아.”

“……뭐가요.”

“그렇잖아요. 정액 냄새가 풀풀 나는데 궁금한 게 고작 애인이 있는지 없는지라니. 애들 참 순진하죠? 애들 아니랄까 봐. 요즘 애들 알 거 다 알고 까질 대로 까졌다는데 또 그건 아닌가 봐요.”

희주가 굳게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문득, 지난 월요일이 떠올랐다. 아무도 없는 교무실에 일찍 출근해 앉아 있을 때의 기억이.

“일찍 오셨네요.”

아무도 없는 교무실에서 강현우와 통화를 하고 있을 때, 가장 먼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유세민이었다.

유세민은 그날 제가 마주친 아는 사람들 중 학생들을 제외하고 유일한 형질자였으며, 또 첫 번째로 마주친 형질자이기도 했다. 제게 묻은 페로몬에 대해 가장 먼저 알려 줄 수도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열성도 일반도 아닌, 우성 오메가인 유세민이 강현우의 페로몬을 눈치를 못 챘을 리가 없다. 유세민이 알면서도 미리 말해 주지 않은 거라는 결론에 다다르자 희주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다.

“일부러 알면서 말 안 해 준 거야?”

“네? 뭐를요?”

유세민의 반말지거리가 금세 존댓말로 바뀌었다. 모르쇠로 잡아떼는 태도에 손끝이 차게 식는 듯했다.

“너 알고 있었잖아.”

“그러니까 뭐를요.”

“나한테…….”

희주의 입이 다물렸다. 말하기를 주저하는 희주 대신 유세민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아는 체를 했다.

“알파랑 섹스한 거 티 난다고 말해 줬어야 했어요?”

“유세민.”

노골적인 언사에 희주가 이름을 불러 가로막았다. 제가 말을 끊은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유세민은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저를 흘겨보았다. 어릴 적의 모습을 빼닮은 얼굴이었다.

한참 동안 노려보다가 먼저 시선을 내린 유세민이 손안에 뭉뚱그린 페이퍼 타올을 장난감처럼 주물럭거렸다. 내리뜬 눈빛이 무감했다.

“희주 네가 사적인 대화는 불편하다며.”

그래서 말 걸려다가 만 건데. 유세민이 히죽 웃었다. 마치 ‘나 잘했지?’ 하고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처럼 해사한 미소였다.

“근데 말해 줬어도 뭐, 소취제도 없었잖아요.”

그냥 단순하게 가방만 전달해 준 거였다면 저리 확신해서 말할 리가 없었다.

“너… 내 가방에 손댔어?”

유세민이 기분 나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내가 뭐 도둑이라도 된 것 같잖아요. 내가 뭐 없어진 거 있나 가방 확인해 보라고 하지 않았어요? 확인해 보지도 않고 왜 나한테 뭐라 그래요? 그냥 선생님이 처음부터 소취제 뿌릴 생각 없었던 거 아니에요? 아, 나 기분 나빠지려 그래.”

교묘하게 대답을 회피하는 화법에 희주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경련했다. 기가 찬 한숨을 내쉬던 유세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나긋나긋 말을 이었다.

“그러게 조심 좀 하지 그랬어요. 선생님이 소취제만 제대로 뿌리고 왔으면 이런 일 없었을 거 아니에요. 애들이 선생님들한테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몰라서 그래요? 공학이나 남고였으면 사표 써야 했을지도 몰라요. 여기 학교 애들 좀 다 잘사는 집안 자식들이라 학부모들이 극성이고 소문에 예민하잖아. 학교 이미지 선생님이 다 망칠 뻔한 거예요.”

끝도 없이 쏟아지는 말에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유세민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제가 잘못한 부분도 확실히 있었다.

“열성은 어쩔 수 없나…….”

여차하면 세면대라도 붙잡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완연해질 찰나, 스치듯 흘러나온 말에서 기시감을 느낀 희주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유세민도 손장난을 관두고 희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듣자 하니 열성이라 어쩔 수 없다고는 하는데, 그거야 권 선생 사정이고.”

“부장 선생님한테 말한 거 너야?”

유세민의 눈이 동그래졌다. 억울하다는 듯 커다래진 눈에서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했다.

“그런 적 없는데.”

거짓말. 억울함이 뚝뚝 묻어나 있는 말투에서도 단번에 거짓임을 알아챈 희주가 긴 숨을 위태롭게 내쉬었다.

“희주야. 왜 자꾸 나한테 뭐라 그러는지 난 정말 모르겠다. 애들이 하도 너 가지고 이런저런 추측해 대는 거, 혹시 너 안 좋은 소문이라도 퍼질까 봐 그런 거 아니라고 해명하고 다닌 게 나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함부로 얘기해? 애초에 희주 네가 평소에 행실 좀 똑바로 하고 다녔으면, 이렇게 나까지 피곤해질 일은 없었을 거잖아.”

늘 그랬던 것처럼 제 행동을 좋게 포장하려는 유세민의 태도에 희주가 무어라 한마디 하려는 순간이었다. 조용했던 복도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면서 벌컥 문이 열리고 학년 부장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도대체 다들 어디로 간……. 아니, 둘 다 여기 있었어요? 잠깐 어디 좀 갈 거면 말이나 하고 가지!”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학년 부장은 심기 불편한 티를 내면서 버럭 큰소리를 냈다.

“이사장님 오셨다니까 얼른 갑시다. 아, 일단 먼저 나가 있어요. 나는 볼일 좀 보고.”

학년 부장은 어지간히 급한 듯 소변기 앞으로 다 가기도 전에 벨트부터 풀어 내렸다. 한 치의 부끄러움도 찾아볼 수 없는 행동에 서둘러 화장실을 나가는 희주는 물론이고 유세민의 표정도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금방 돌아온 학년 부장을 따라 희주는 유세민과 함께 어디론가로 이동했다. 유세민의 예상대로 이사장님 환영 어쩌고 하며 연신 떠들어 대는 학년 부장의 뒤를 따라가면서 희주는 균열이 간 얼굴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여러 가지로 꽉 찬 머리가 마구 지끈거렸다.

* * *

도착한 곳은 본관 1층의 중앙 현관이었다. 가 보니 이미 미리 와 있던 인파들로 그리 넓지 않은 복도가 북적였다. 꽤 많아 보이는 수에 어리둥절해져 둘러보는데, 문득 다른 학년들도 마찬가지로 형질자들을 데리고 나올 거라는 유세민의 말이 떠올랐다. 의식하고 다시 보니 몇몇 대강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왜인지 긴장한 듯해 보이는 3학년 부장의 옆으로 배예은 선생의 얼굴도 보였다. 멀찍이서 눈이 마주치자 조금 놀란 표정을 해 보인 그녀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는 슬그머니 제 옆으로 다가와 섰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은 무슨. 쌤은 지금 안녕할 기분이에요?”

속이 말이 아닌 터라 인사하는 희주의 목소리가 시무룩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배예은은 팩 쏘아붙일 뿐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의 눈동자는 주변 눈치를 보느라 쉴 새 없이 굴러가기 바빴다.

“내가 진짜 설마설마했거든요? 근데 이렇게 오메가들만 불러낸 거 보니까 진짜 내가 다 낯부끄럽다. 안 그래요, 쌤?”

아무것도 모른 채 퇴근이 늦어진다며 불평하던 저와는 달리, 배예은은 진작 저의를 눈치채고 있던 모양이었다.

“누구 대가리에서 나온 발상인지 진짜, 같은 시대 살고 있는 사람인 건지 의문이라니까. 오메가를 뭘로 아는 거야, 진짜.”

“그러다 다 듣겠어요…….”

“들으라 그래요. 여기 있는 선생님들 중에 나처럼 생각 안 하는 사람 한 명도 없을걸. 어흐, 진짜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술 따르고 뭐 그런 것만 접대인 거 아니에요. 나 이거 교육청에 신고할까 봐.”

신경질적으로 팔짱을 팍 낀 배예은이 구시렁거렸다. 들으라고 포부 있게 말해 놓고는 정작 신고하겠다고 하는 목소리는 쥐똥만 하게 작았다. 맞는 말을 하는 것임에도 눈치를 봐야만 하는 우리네들의 위치를 알고 있기에 희주는 딱히 지적하지 않고 공감한다는 듯 쓰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

시답잖은 이유로 차출된 몇 평교사들과 행정 실장, 각 부서의 부장 선생님들이 한자리에 모인 뒤에야 교감과 교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로 꾸벅꾸벅 인사를 하긴 하는데, 입꼬리가 다들 어색하게 비틀려 있었다. 언짢아 죽겠는데 티를 낼 수는 없고, 애써 웃음 짓는 모습들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근데 있잖아, 희주 쌤.”

누군가의 지휘하에 중앙 현관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나란히 서게 되었다. 꼭 옛날 뒷골목 이야기 다루는 영화들 보면 검은 정장 입은 깡패들이 이러고 있던데. 학생들이 그런 길로 빠지지 않게 선도하는 교사들이 이러고들 서 있으니 퍽 웃긴 장면이 그려졌다. 웃긴데 안 웃긴 그런 상황에, 여전히 복잡하게 얽힌 생각을 붙들고 있던 희주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배예은을 쳐다보았다.

“쌤, 혹시…….”

뭐 때문에 그러냐고 눈짓으로 묻자, 배예은이 이번에야말로 손으로 입을 제대로 가리고는 고개를 희주 쪽으로 기울였다. 덩달아 배예은을 향해 귀를 기울였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배예은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이기만 했다.

“아,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

무언가를 물어보려는 듯한데, 운만 띄워 두고 말끝을 흐리기만 할 뿐 도통 말을 제대로 잇지를 않았다.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희주가 뭐 하자는 거냐는 눈으로 바라보자, 그제야 배예은은 결연하게 입술을 뗐다.

“저기, 희주 쌤……. 오해하지 말고 들어. 저, 혹시… 사고… 쳤어?”

“……네?”

비장한 표정과 비교되는 소심한 물음에 웃을 새도 없이,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내용에 무슨 말인가 싶어 눈살을 찌푸렸다. 희주의 미간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배예은이 얼른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고는 저는 명백하다는 듯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들어 봐. 내가 애들 말하는 걸 우연히 조금 들었거든. 3학년 애들……. 그, 점심시간에… 나 있는 줄 모르고 그냥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던 거 들은 거야. 내가 애들한테 따끔하게 한마디 하기는 했어. 근데 이게 막 듣기 좋은 말이 아니기도 하고… 괜히 사실도 아닌데, 희주 쌤한테 악영향이라도 미치면 큰일이잖아.”

배예은의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희주의 얼굴이 점차 하얗게 질려 갔다. 분명 계절은 여름이건만 등줄기를 따라 한기가 올라왔다.

그저 말뿐인 소문은 와전되기가 쉬웠다. 반면 그릇된 소문에 대한 해명은 어려웠다.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퍼트릴 때에는 진위를 가리지도 않고 마구 입을 놀리면서, 후에 아니라고 하는 당사자에게 하지도 않은 일을 하지 않았음을 증명해 내라고 한다. 막상 입을 열면 귀를 기울이지 않을 거면서.

과연 배예은이 진심으로 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지, 소문의 진상이 궁금해하는 말인지 이성적으로 판단이 되지 않았다.

“아니에요……. 그런 거.”

희주는 바짝 마른 입술을 꾹꾹 깨물다가 고개를 저었다. 순순히 대답을 해 주면서도 눈은 마주치지 않자,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잠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배예은이 희주를 붙잡았다.

“저기, 희주 쌤―”

“아, 오셨나 보다.”

무색한 자기 변명은 이사장이 도착하면서 입 밖으로 나올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입술을 달싹이던 배예은은 이내 어쩔 수 없이 대답도 듣지 못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눈을 내리깐 채 바닥 타일을 노려보면서 희주는 탁한 숨을 작게 헐떡였다. 불안과 긴장으로 펄떡펄떡 뛰기 시작한 심장이 가만 내버려 두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저 스스로 정신을 다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희주는 눈을 부릅뜬 채 침을 꼴깍 삼켰다.

한숨과도 같은 짙은 숨을 차분히 내쉰 뒤, 모두가 바라보고 있는 한곳을 향해 반쯤 몸을 틀었다.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바람이 절실했다.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아까부터 머리가 너무 아파서 이사장이 오건 말건 그저 눕고만 싶었다.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건지 모를 병풍 노릇, 까짓거 눈 꽉 감고 대충 해 주고 말자는 생각을 하면서 희주는 중앙 현관 바깥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중앙 현관 바로 앞에 멈춘 세단 한 대가 눈길을 끌었다. 안쪽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진하게 선팅된 창문을 보면서 희주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지금 이렇게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이유가 다 저 이사장이라는 놈 때문이라는 삐딱한 생각이 들면서, 어디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이나 보자는 비틀린 심보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얼마 가지 못했다. 뒷좌석 문이 열림과 동시에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우성 알파?”

순간 주변에서 탄성이 터졌다. 모두 오메가 교사들이었다. 거리를 두고도 분명하게 느껴지는 존재감에 다들 놀란 것이 분명했다. 영문을 모르는 베타 교사들이 번잡스러운 소란에 미쳤냐고 묻는 듯한 눈초리로 쳐다보았지만, 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직접적으로 맞닥뜨린 이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대열이 흐트러지면서 웅성거림이 커져 갔다.

“큼, 조용히들 좀 하세요.”

2학년 부장의 일갈에 순간적으로 웅성거림이 조금 잦아지는가 싶었지만, 뒷좌석에서 내린 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너도나도 얼굴이 붉어져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페로몬만으로 누구인지 알아채고 만 희주는 빳빳하게 굳어서 옅은 숨만 할딱할딱 내쉬었다.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할 때, 희주만 홀로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틀거렸다.

여태 본 적 없는 서늘한 얼굴을 해서는, 얼핏 오만해 보일 만큼 마중 나온 이들을 내려다보는 남자. 그는 분명한 제 연인, 강현우였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이사장님.”

비굴해 보일 만큼 버선발로 달려 나간 교장이 강현우에게 악수를 청했다. 강현우는 무심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제 바로 앞에 내밀어진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백영 여고 교장입니다. 강현우의 뒤쪽에 선 안 실장이 조용한 목소리로 알려 주었다. 뒤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잠시 시선을 뗐던 강현우는 제 앞에서 진땀을 빼고 있는 교장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아, 네. 안녕하십니까.”

교장이 내민 손을 흘끗 내려다본 강현우는 형식적인 인사말만 감흥 없이 내뱉고는 눈길을 거두었다. 갈 곳을 잃은 손에 당황한 교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거두었다. 뒤이은 교감도 똑같이 대하자, 이를 그대로 목격한 안 실장이 낭패라는 듯 입술을 깍 깨물었다.

“…….”

악수를 무시한 강현우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학교, 정확히는 활짝 열려 있는 유리문 안쪽 광경이었다. 오메가들이 강현우를 보자마자 대번 알파임을 알아챈 것처럼 강현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 문이 열림과 동시에 느껴지는 수많은 오메가 페로몬 때문에 이미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언짢아진 상태였다.

하지만 안 실장을 비롯한 교장과 교감 모두 베타였기 때문에, 강현우의 심기가 무슨 이유로 불편해졌는지 알아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일단 드, 들어가시죠.”

무언가 탐탁잖은 듯 일그러진 강현우의 표정을 본 이들이 영문을 모르고 당황했다. 강현우가 대놓고 드러내 보이는 불쾌감에, 교장이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깍듯이 안쪽을 향해 손짓을 해 보였다.

치솟는 불쾌감을 억누르고 안쪽으로 걸음을 내디딘 강현우는 확실히 오메가 페로몬으로만 가득 찬 공기에서 학교 측의 노골적인 의도를 대번 파악했다.

향수도 종류가 다른 향수를 한꺼번에 뿌리면 좋은 향기는커녕 도리어 머리만 아픈 법이다. 물론 우성 알파에게는 어림도 없는 농도기는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상황임을 알아챈 순간부터 참을 수가 없어졌다. 결국 강현우는 몇 발짝 가다 말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아, 이사장님. 저희 학교 선생님들이십니다.”

이 행동을 제대로 오해한 교장이 얼른 앞으로 나섰다. 뭔지도 모를 잘못을 만회할 기회라고 여겼는지, 슬금슬금 강현우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열심히 입방아를 찧었다.

“안 실장님.”

강현우가 교장의 말을 끊었다. 반걸음 뒤에 서 있던 안 실장이 재빨리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 요즘 교사들은 형질자 중에서만 뽑습니까?”

한숨 섞인 물음에 안 실장이 소리 없이 경악했다. 무슨 이유로 저기압이 됐는가 했더니, 아무래도 지금 이 자리에는 형질자들만 모여 있는 듯했다. 일부러 요란한 것을 피하고자 시험이 있는 날, 시험이 끝난 시간을 노려 방문했더니만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일을 꾸며 놓고 기다릴 줄이야. 안 실장은 이 사건의 주동자일 가능성이 큰 교장을 원망하듯 쳐다보았다.

“저나 여기 모인 분들이나 피차 불쾌한 상황으로 느껴질 거, 모르셨나 봅니다.”

강현우는 양옆으로 서 있는 이들에게 싸늘하게 시선을 던졌다. 뒤늦게 이성을 되찾은 교사들이 여전히 벌건 얼굴을 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본능적으로 오메가 페로몬을 뿜은 것에 대한 수치스러움, 애초에 이런 상황을 만든 상부에 대한 원망이 뒤섞인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저기 사방에서 뻗쳐 오는 오메가들의 페로몬을 제 페로몬으로 찍어 누르고 싶었지만, 아무 잘못도 없이 불려와 있는 듯한 이들에게 괜한 화풀이를 할 수는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쉰 강현우는 새파래진 교장을 바라보며 똑바로 말했다.

“불쾌합니다. 이런 거.”

강현우는 불쾌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분위기에 압도된 이들이 눈알 굴리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순식간에 사위가 조용해졌다. 스무 명 남짓한 이들 가운데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

그 몇 없는 사람 중 한 명인 희주는 제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도통 믿기지 않는 현실에 멍하니 강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강현우에게 ‘이사장님’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었다. 교장은 말까지 더듬으며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렸고, 학년 부장은 강현우 앞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혼자 동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외근이라고 했는데. 희주의 눈동자가 잘게 경련했다. 눈을 깜빡이는 것마저 잊어, 크게 뜬 눈이 시렸다. 희주는 시린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뜨고는 싸늘하게 굳은 표정의 강현우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그러고 머지않아,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저 짜증뿐이었던 강현우의 눈이 일순 당황으로 커졌다. 애써 닮은 사람이겠거니, 말도 안 되는 가정을 하면서 버티던 희주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 * *

한동안 희주와의 눈 맞춤을 피하지 않던 강현우는 교장과 교감, 여러 부장 선생님들과 함께 이사장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 자리에 있던 오메가 교사들은 아무런 사과도 받지 못한 채 퇴근길에 올랐고, 희주 역시 파도에 휩쓸리듯 빠져나가며 멀어지는 강현우를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다. 저를 바라봐 주기를 바랐지만, 이날 희주가 본 건 뒷모습뿐이었다.

술도 마시지 않은 맨정신인데 집에 어떻게 들어온 건지 모르겠다. 희주는 멍한 정신으로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은 뒤 일찌감치 침대에 누웠다. 한참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무언가에 홀린 듯 휴대폰을 켰다.

평소 잘 들여다보지 않아 몇백 통씩 쌓여 있는 메일함을 열어 뒤적였다. 마침내 희주가 찾아 낸 건, 강현우와 선을 보기 전 매칭매니저가 보내 주었던 프로필 파일이었다.

[권희주 님, 프로필을 보내드립니다. 성혼을 기원합니다]

지금 봐도 결연한 제목의 메일을 누르자, 곧 낯익은 사진이 화면 가득 띄워졌다. 지금보다도 앳된 모습의 증명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문득 첫 만남에 있었던 작은 해프닝이 떠올랐다.

뒤늦게 프로필 좀 보겠답시고 테이블 밑에 휴대폰을 숨긴 채 아등바등했던 것 하며, 이름을 몰라서 당황했다가 결국 모든 것을 이실직고하게 된 것까지. 희주는 저도 모르게 픽 웃다가 이내 시무룩해져서는, 그날 미처 보지 못했던 상세 프로필을 꼼꼼히 눈에 담았다.

생각보다 프로필은 단출했다. 이름과 나이, 현 거주지 같은 기본 정보에 혈액형과 종교 등 희주도 처음 상담을 받았을 당시 기재했던 간단한 정보가 적혀 있는 것이 전부였다.

거창하게 쓰여 있을 줄 알았던 직업란에는 의외로 ‘사업가’라고만 쓰여 있고, 백영 여고의 이사장이라느니 하는 세세한 정보는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원래 이런가. 하긴, 상대방에게 근무지까지 공개하는 건 저 같아도 꺼림칙할 것 같았다. 사는 곳의 동, 호수까지 알려 주는 거랑 뭐가 다른가 싶다.

반대로 강현우가 받아 봤던 제 프로필에도 정확히 어느 학교의 교사인지는 안 적혀 있었을 테였다. 그러니 강현우도 저 못지않게 놀란 표정을 지었던 거겠지. 자신이 그 학교에서 일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니까.

취임하고 나서 한 번을 온 적이 없었다고 했지. 그러니 자신이 직접 학교 근처로 안내를 했을 때에도, 그 이후에 저를 데리러 왔을 때에도 그렇다 한 반응이 없었던 거였다. 찬찬히 생각해 보니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행동들이 태반이었다.

스크롤을 조금 더 내려 보니 매칭 매니저가 직접 적은 듯한 멘트가 눈에 들어왔다. 희주는 강현우의 화목한 가정 환경과 안정적인 직업, 리더십 넘치는 성격 등 모두가 제가 원하는 배우자 기준에 부합한다면서 만남을 고려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매칭 매니저의 긴 추천 글을 차분히 읽어 보았다.

그러고는 검색창을 열어 강현우의 이름 석 자를 검색해 보았다. 일반인이라면 뜰 일이 없는 프로필이 가장 위에 뜨는 것은 물론이고, 그와 관련된 기사도 여러 개 찾아볼 수 있었다.

“백영 그룹… 상무 이사.”

왜인지 현실성이 없는 단어들을 조용히 따라 읽었다. 복잡 미묘한 감정이 회오리쳤다.

제게 알려 주지 않았다고 해서 배신감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강현우가 속여 말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그저, 정말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 같은 시대에 살고 있지만,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을 보는 듯한 그런 느낌.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가장 멀어진 것만 같아 적적함이 일었다.

“…….”

희주는 낮에 봤던 강현우의 낯선 모습을 몇 번씩이고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렇게 한참이 흐른 뒤 강현우의 이름이 떠 빛나는 휴대폰 화면을 보면서 희주가 느낀 것은 기쁨이나 행복, 안도 따위의 감정이 아닌, 짙은 초라함이었다.

* * *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푹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야속하게도 다음 날은 금요일이었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공원에 집합한 백영 여고 2학년생들은 각자 손에 집게와 쓰레기봉투 하나씩을 들고 공원과 그 인근을 돌면서 쓰레기를 줍는 봉사 활동에 참여했다. 교사들의 인솔하에 정해진 시간 동안 활동이 진행되었고, 봉사 후에는 자유 시간이었다.

쓰레기를 버리고 손을 탁탁 턴 학생들은 제각각 떠들고, 교사들은 그늘진 정자 아래에 모여 나름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이사장님이 생각보다 엄청 젊으시던데요? 집 가면서 검색해 보니까 올해 서른둘밖에 안 됐대요.”

정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순간부터 대화 주제는 어제 있었던 이사장의 학교 방문 건이었다. 취임 후 처음으로 학교를 방문한 이사장에게 관심이 있어 그렇다기보다는, 가만히 있던 유세민이 “아, 혹시 그거 아세요?” 하면서 어제 그 현장에 자신이 있었음을 넌지시 알려 왔기 때문이었다.

대화의 중심에 서게 된 유세민이 이사장에 대해 아는 체를 하자, 학년 부장이 우습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그 소리에 교사들의 시선이 학년 부장에게 옮겨졌다.

“하여간, 새파랗게 젊은 놈이 싸가지 없이 인상만 구기고 말이야. 아무리 이사장이라고 해도 내 나이가 오십이 넘었는데 아랫사람 대하는 것처럼 막 대하는 건 좀 아니지. 사람 무안하게 악수도 안 받아주고, 무시하고. 그건 좀 아니잖아. 안 그래?”

기둥에 기대고 앉은 학년 부장이 꼿꼿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제는 그 누구보다 허리를 깊게 숙였으면서, 지나간 일이라고 마구 입을 터는 게 같잖았다. 딱 오메가 교사들만 남으라고 했다가 맞는 말로 두들겨 맞았던 일은 쏙 빼놓는 게 어쩐지 비열하기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듣고 있어도 딱히 화도 나지 않았다.

“어휴, 완전 안하무인인가 보네요.”

이제 교사들은 학년 부장의 말도 적당히 걸러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교사가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는 말을 하자, 옳다구나 신이 난 학년 부장은 강현우를 향해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 냈다.

“아무렴, 어제 끝나고 교장 선생님이 회식 권하니까 술 싫어한다고 쌩 가 버리더라니까? 기분 안 상하게 완곡하게 거절하는 줄을 모르더라고. 보는 내가 무안해서, 원.”

회식은 안 갔구나. 대화에 끼지 않고 그냥 듣고만 있던 희주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제주도에 갔을 때 강현우가 회식을 ‘싫은 자리’라고 표현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술을 억지로 마시고 나서 나지막이 보고 싶다고 하던 목소리와 끝내 만나고 나서의 조심스러운 고백, 그리고 진심을 다해 나누었던 첫 키스까지. 강현우로 시작해 강현우로 귀결되는 기억들을 멍하니 되새기는 동안, 주제는 여러 번 바뀌었고 금세 해산할 시간이 다가왔다.

집합은 공원에서 했지만, 해산은 학교 정문 앞에서 이루어졌다. 학교에서보다 공원에서 집이 가까운 몇몇 아이들이 그냥 바로 집에 가면 안 되냐며 우는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어르고 달래 가며 데리고 온 끝에 겨우 예정대로 학교에서 일정을 끝마칠 수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이들을 먼저 보내고 난 뒤, 교사들끼리는 학교에 남아서 체크할 것들을 확인했다.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서로 수고했다는 인사를 나누었고, 희주도 비로소 집에 갈 채비를 할 수 있었다.

동료 교사들과 집 가는 방향이 각기 달라 다행이었다. 기분 탓일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희주는 동료 교사들 틈에서 데면데면함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대놓고 기피하고 경멸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묘하게 제 앞에서는 대화를 꺼리는 느낌이 강했다. 아무래도 저에 관한 소문이 베타 교사들의 귀에까지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만약 학년 부장이나 유세민의 말대로, 학부모들도 알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건가 싶었다. 그러면 정말 사표를 써야 하는 걸까. 저를 받아 주는 곳이 있을까…….

그렇게 멍하게 골목을 걸어가는데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희주는 휴대폰을 꺼내어 화면을 확인했다. 진동이 울린 건 딱 한 번이었으나, 휴대폰 화면에는 수십 건에 달하는 부재중 전화와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굳이 메신저에 들어가지 않고도 상단 바에 뜨는 미리 보기로 메시지 내용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자고 있냐며 묻는 연락부터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거냐며 걱정하고, 급기야 ‘제발’이라고 애원하는 내용까지. 모두가 강현우로부터 온 연락들이었다.

방금 온 메시지에도 역시 같은 단어를 찾아볼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춰서서 메시지를 읽던 희주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는 휴대폰 화면을 껐다. 어젯밤 걸려 왔던 전화 이후 지금까지 희주는 강현우의 모든 연락을 피하고 있었다.

피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세단에서 내리던 강현우는 모두의 위에서 군림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자신이 알고 있던 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평소처럼 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비밀로 한 거냐며 추궁하고 싶지도 않았다. 정말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 것뿐이었다.

계속해서 저를 찾는 강현우의 연락을 말없이 지켜보면서, 희주가 거듭 생각한 것은 ‘이유’였다. 왜 제가 이렇게까지 주저하는지에 대한 이유.

그동안 자신이 생각해 온 이상적인 배우자의 조건과 강현우의 조건이 부합하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급 차이가 나는 사람들끼리 어떻게 매칭이 된 건지는 모르겠다만, 지금 당장 결혼하자고 해도 모자랄 판에 강현우의 연락을 피하고나 있다니 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이제 와서 그의 애정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라도 하는 걸까.

지잉지잉. 다시 휴대폰이 몸을 떨며 진동했다. 메시지를 무시했더니 이번에는 전화였다. 희주는 진동하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 가만히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동이 끊기고, 또 하나의 부재중 전화가 쌓였다.

반짝이던 화면이 어두워지는 것을 확인한 희주는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번에는 휴대폰 전원을 아예 꺼 버렸다. 주말 동안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겸, 연락을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때, 몸이 움찔 튈 정도로 갑작스러운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려던 희주는 애써 보지 않고 걸음을 빨리했다.

“거기 서요.”

화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희주는 그 목소리마저도 듣지 못한 척 꼿꼿하게 앞만 바라보고 걸었다. 차가 옆에 바짝 붙어 따라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지만 그쪽으로는 짧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희주 씨.”

희주의 걸음 속도에 맞추어 액셀을 밟던 강현우가 이번에는 정확히 이름을 불렀다. 그럼에도 희주가 돌아보지 않자, 강현우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애타게 희주를 눈으로 좇았다.

어제 예정에 없던 만남 이후로 희주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희주와 같은 교사인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의 없는 인간들과의 미팅을 예정보다 빨리 끝낸 뒤, 강현우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희주에게 연락하는 것이었다.

혹시 저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내심 기대도 했다. 하지만 강현우는 희주의 얼굴을 보기는커녕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신호음이 끊기고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음성이 나올 때까지 휴대폰을 붙들고 있던 강현우는, 전화도 받지 않고 메시지도 읽지 않는 것에 당황해 무작정 희주가 사는 오피스텔 앞까지 찾아갔다.

어딜 간다는 언질이 없었으니 분명 집에 있을 텐데, 밖에서 올려다본 희주의 집은 온통 불이 꺼져 있었다. 시험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고생했으니 피곤해서 일찍 잠들었나 보다, 애써 합리화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돌린 것이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연락이 닿지 않는 것은 이튿날도 마찬가지였다. 하루가 지나도록 메시지를 읽었다는 표시가 뜨지 않자, 결국 강현우는 하루 일정을 몽땅 취소하고 무작정 희주를 만나기 위해 핸들을 잡았다.

도로를 내달리는 동안 강현우는 희주의 입장에서 상황을 이해해 보려 부단히 애를 썼다. 분명 많이 놀랐을 테였다. 설마 저를 만날 줄은 몰랐겠지. 저 역시 일 때문에 방문한 학교에서 희주를 마주칠 줄은 몰랐다.

아니면 제게 화가 났나? 언젠가 제 입으로 말하겠노라 다짐만 하고 은연중에 숨기던 일을 우연히 알게 되었으니 어쩌면 화가 나서 저를 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서로 결혼을 이야기하면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제대로 털어놓지 않은, 신뢰하지 못할 알파였으니 말이다.

그래 봐야 희주가 직접 말해 주지 않는 한, 저는 끝까지 모를 테였다. 결국 그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도착한 학교 앞, 강현우는 퇴근하는 희주를 드디어 발견할 수 있었다. 희주는 조금 피곤해 보이기는 했지만 다행히 그게 전부였다. 아파 쓰러지거나 사고를 당한, 제가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음에 강현우는 안도했다.

하지만 안도하는 것도 잠시, 분명 제 연락을 확인했음에도 모르는 척하는 희주를 바로 앞에서 목도한 강현우는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왜인지 화가 났다. 자신은 하루가 다 가도록 내리 희주 걱정만 했는데, 정작 희주는 저에게 관심도 없었던 것 같아서.

강현우는 핸들을 꽉 붙든 채 당장이라도 제 오메가를 품에 안아야겠다는 비이성적인 욕망을 다스리려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희주 씨.”

“…….”

“제발요.”

나 좀 봐 줘요. 절절한 음성에 희주가 걸음을 멈추었다. 강현우는 희주가 그대로 가 버리기라도 할까, 얼른 차를 갓길에 세워 두고 단번에 희주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왜 연락이 안 돼요.”

“…….”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걱정 많이 했는데…….”

한 걸음 다가가기가 무섭게 한 걸음 뒤로 멀어졌다. 강현우는 속상하다는 듯 재차 희주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와의 거리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왜 나 피해요?”

“…….”

“어제 너무 놀라서 그래요?”

“…….”

“나도 어제 희주 씨랑 만날 줄은 정말 몰랐어요. 희주 씨한테 전화로 말한 외근이, 재단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방문하는 거였거든요.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제가, 몇 년 전부터 학교 이사장직을 맡게 됐는데…….”

횡설수설 말을 잇던 강현우가 어느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저를 볼 때마다 따스하게 미소 짓던 희주가 더는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강현우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슬쩍 이마를 짚고는, 세워 둔 차를 향해 몸을 틀었다.

“일단 희주 씨. 차에 타고……. 타요. 내가 다 얘기해 줄게요.”

“아니요.”

당연히 제 손을 잡을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희주는 제법 단호하게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주 짧게라도 희주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이 감격스러워 슬쩍 표정이 밝아졌던 강현우가 입꼬리를 뚝 끌어 내렸다.

“지금은 듣고 싶지 않아요.”

파리해진 얼굴의 희주가 강현우와 눈을 마주했다.

“말해 줄게요. 말하려고 했어요. 숨기려고 했던 거 정말 아니에요.”

“알아요. 그럴 의도는 없었을 거라는 거. 처음 만난 날에 저한테 명함도 주시려고 했잖아요.”

첫날, 텅 비어 있던 명함 지갑이 떠올라 강현우는 나지막이 탄식했다.

“혹시나, 프로필 파일 확인 안 한 것부터 문제였나 싶었어요. 그래서 어제 집 가서 꼼꼼하게 읽었고요. 근데 몇 번을 읽어 봐도 현우 씨가… 저희 학교 이사장님… 이라고 적혀 있는 부분은 없었어요. 제가 프로필 파일을 숙지했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지도 몰라요.”

금방 시선을 피한 희주는 내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무감하게 제 생각을 전달했다. 강현우는 다시 희주와 눈을 마주하기 위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기울였지만, 한번 떨어진 시선은 쉬이 붙지 않았다.

“솔직히, 저같이 평범한 사람들한테 회사 다닌다고 하면 ‘아, 그런가 보다’ 해요. 백영같이 큰 기업에… 임원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오너 일가는 더더욱이요.”

그렇다는 건……. 말끝을 흐린 희주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강현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현우 씨가 말해 줬어야 했다는 거예요. 말하려고 했다는 게 아니라, 진작 말을 해 줬어야 했어요. 어제 일 아니었으면…….”

“희주 씨.”

“난 언제까지 모르고 있었어야 했던 거예요?”

희주는 눈앞에 선 제 연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부족함 없는 알파였다. 그래서 더더욱…….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요.”

반쯤 체념한 듯 벌어진 입술 사이로, 방금 쉽게 찾아낸 버린 이유가 툭 흘러 나갔다. 홀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모르겠던 ‘이유’를, 강현우를 보니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잠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와의 연애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맞는 삭막한 주말이었다.

* * *

“잠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인상을 팍 찡그린 강현우가 책상 밑에 둔 다리를 무의식적으로 덜덜 떨며 손으로는 관자놀이께를 슬슬 문질렀다. 벌써 며칠째, 제게 등을 돌리고 가 버린 희주가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

속절없이 생각에 잠겨 버린 강현우는 지금 상념에 빠져 있을 틈이 없는 근무 시간이라는 것도, 만년필 펜촉에서 잉크가 새고 있다는 것도, 넋 나간 자신을 안 실장이 모두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더는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안 실장이 성큼 다가와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만년필을 스윽 빼내 주었다. 까만 잉크가 지저분하게 번져 버린 종이가 뭔가 싶어 가만히 살펴보니 오늘 아침에 올라간 영자 신문이었다. 정작 결재 사인을 받아야 할 서류는 저만치 치워져 있었다.

읽으라고 둔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두고, 사인을 하라고 둔 것은 거들떠보지 않고 있는지도 제법 며칠이 되었다. 안 실장은 엉망이 된 신문을 치우고 그 자리에 결재 서류를 끌어다 올렸다.

흘깃 쳐다보자, 강현우는 눈만 깜빡거릴 뿐 안 실장이 뭘 하든 모르는 눈치였다. 이대로 제가 대신 사인을 해도 모르겠다 싶을 만큼 얼이 나가 있는 강현우를 조금 한심하게 내려다본 안 실장이 시험 삼아 만년필을 제 손에 쥐어 보였다.

“그대로 내려 두세요.”

“……제가 뭘 하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아니까, 두세요.”

“예.”

아예 정신을 놓고 있던 건 아닌 모양이다. 안 실장은 만년필을 책상 위에 가지런히 내려두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강현우는 만년필을 쥘 생각도 없어 보였다. 두고 고사를 지내자는 것도 아니고, 멍하니 책상 한 곳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안 실장님.”

도통 이해 못 할 행동만 거듭하던 강현우가 입을 연 건 짙은 한숨을 내쉰 직후였다.

“네. 상무님.”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닐 것을 대번에 짐작한 안 실장이 강현우를 감흥 없이 쳐다보았다. 큰 결심 끝에 입을 여는 사람처럼 그는 어쩐지 심각한 표정이었다.

“평범한 직장인인 줄 알았던 애인이 알고 보니 대기업 임원에, 어쩌면 그 회사를 물려받을지도 모르는 오너 일가 중 한 명이라면 어떤 기분일 것 같습니까?”

안 실장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이는 마치,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아는 친구’의 일이라고 빗대는 것과 비슷한 흐름이었다. 문득 안 실장은 사내 홈페이지에 도련님의 페로몬이 어쩌고저쩌고, 추측성 글들이 난무하고 있다는 영혜 씨의 말을 떠올렸다. 요 며칠 상당히 저기압이었던 게 다 연애 문제 때문이었던 듯하다.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됩니까?”

“그래야 할 겁니다.”

“전 당장이라도 프러포즈할 겁니다. 제가 좀 속물이라서요.”

답을 들은 강현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바라던 대답이 아닌 듯했다.

“방금 대답은 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말한 겁니다.”

“그럼 안 실장님 일이라고 생각하면 답이 달라집니까?”

“당연히 달라지죠.”

“해 보세요.”

책상 위에 두 팔을 올린 강현우가 손깍지를 낀 채 안 실장을 바라보았다. 마치 제 앞에서 재롱이라도 부려 보라는 투였다. 얼핏 오만해 보이는 태도에 주눅이 들 법도 했지만, 안 실장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일단 처음 알게 된 시점에서는 놀라는 게 우선일 것 같습니다.”

“또.”

“아무래도 애인을 못 믿겠죠.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니까요.”

“그리고요.”

“음……. 혹시 미처 말 못 할 상황이었던 겁니까 아니면, 일부러 숨기신 겁니까?”

“둘 다 아닙니다.”

안 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 다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강현우가 이어 부연했다.

“일부러 숨길 생각은 없었습니다. 언젠가 다 밝히려고 했던 사실임은 틀림없어요.”

“한 마디로 미뤘다는 거네요.”

“굳이 따지자면 그렇습니다.”

“뭐가 됐건, 말해 주지 않았다는 건 변함 없는 사실 아닙니까? 혹시 상대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계기는 뭡니까?”

강현우는 깍지 낀 두 손 뒤에 입술을 대고 잠시 침음했다.

“지난번에 백영 여고 갔을 때 기억나실 겁니다.”

기억이 안 날 리가. 본인이 가자고 해서 갔더니만 도착하자마자 부모뻘 되는 교장에게 살벌한 멘트를 날리고―물론 구구절절 맞는 말들이기는 했다―미팅이 끝난 다음에는 이대로 퇴근하라면서 차를 가지고 혼자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김 기사와 예정에도 없는 뚜벅이 체험을 했었다. 그날을 어찌 잊으랴.

기억이야 뚜렷하지만 난데없이 그날 일을 상기시키는지 모를 일이다. 어리둥절해진 안 실장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강현우가 무심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예?”

“그때 모여 있던 교직원들 중에 말입니다.”

“……아.”

안 실장의 나지막한 탄식이 잦아든 다음 상무실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잊은 안 실장은, 곧 경악하며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상무님 애인분이 그 자리에……. 서서 팔짱을 낀 안 실장은 지금껏 나온 정보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상무님.”

짧은 사이에 안 실장의 평평한 미간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졌다.

“그 왜, 드라마 같은 거 보면 이걸 다른 사람 통해서 알아야겠냐고 따져 묻는 장면 나오지 않습니까?”

“드라마 안 봐서 모릅니다.”

“아무튼, 그런 장면들이 곧잘 나옵니다.”

“그래서 그게 어떻다는 건데요.”

“화가 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대충 그렇다는 겁니다.”

이제 안 실장은 마치 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콧김을 씨익씨익 뿜어 댔다.

“그래서 그런 반응이었던 건가.”

강현우가 얕은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럼…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진다는데, 그건 내가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말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저도 말씀 듣고 방금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저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질 것 같긴 합니다.”

아무래도 평범하시지는 않으니까요. 안 실장은 한층 누그러진 어투로 읊조리며 강현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껏 부하 직원으로서 곁에서 보고 겪어온 강현우의 모습은 차치하고, 대중적으로 알려진 정보만을 봤을 때 부담스럽게 느낄 만도 했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던데, 정확히 얼마나 줘야 맞는 겁니까?”

그거… 헤어지자는 말이랑 동의어 아닌가. 안 실장은 고민하는 척 길게 침음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일단 만나서 대화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나 편하자고 무작정 갈 수는 없습니다. 폭력적인 방법이에요.”

“그래도 대화만 한 것이 없습니다.”

몰라서 물었겠냐고 싸늘하게 일갈하려다가 말았다. 강현우는 뻐근하게 당기는 목을 양옆으로 꺾어 댔다. 우두둑, 하는 살벌한 뼈 소리가 고요한 상무실에 울려 퍼졌다. 상사가 거친 분위기를 풍겨 대도 안 실장은 익숙하게 태블릿 화면을 켰다. 상사의 연애 상담까지 제 일이라면 일이리라. 하지만 이제 잡담은 그만하고, 정말 일다운 일을 해야만 했다.

“…….”

톡, 톡. 책상을 연신 손톱으로 두드리던 강현우가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 듯 멈칫, 손짓을 멈추었다.

“안 실장님. 전에 알아보라고 했던 거 말입니다.”

“어떤…….”

“목 많이 쓰는 직업에 좋은 것들이요. 배, 도라지, 이런 거.”

안 실장은 바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업체 컨택 이후 이렇다 한 지시가 없어 잠시 잊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어디 따로 빼 뒀던 것 같은데…….

“업체 연락해서 교직원들 수에 맞게 아니, 넉넉하게 준비해 달라고 하세요. 그리고 안 실장은 나랑 같이 갑시다.”

탭 화면을 뒤적거리는데 난데없이 지시가 떨어졌다.

“상무님. 어디, 어디 가십니까?”

안 실장은 일어나 외출할 채비를 하는 강현우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따로 노는 지시에 갈피를 잡지 못한 손과 발이 엉망진창으로 움직였다.

“대화만 한 게 없다면서요. 명분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보러 가야지.”

강현우가 결연하게 중얼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연애 때문에 죽상이 되어 골머리를 앓더니,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를 셈인지 표정이 환해져서는 그 긴 다리로 성큼성큼 활기차게 상무실을 가로질렀다.

이제 죽상이 된 건 안 실장이었다. 아니, 오늘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아연해진 안 실장이 헐레벌떡 뛰다시피 해 그의 뒤를 따랐다. 벌써부터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 * *

학교는 기말고사 기간에 접어들었다.

시험 범위까지 남은 진도도 얼른 빼야 하고, 틈틈이 시험 문제도 출제해야 했으며, 시험 외적으로 처리할 행정 업무도 봐야 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이 이어졌다. 어느 학년, 어느 과목이든 바쁜 상황은 다를 게 없었기 때문에 희주의 소문에 대한 교사들의 관심도 조금씩 잦아들고 있던 차였다.

“권희주 선생님. 이거 2학년 영어 원안지요.”

부단히 제게 시비를 걸어 대던 유세민도 일이 우선인 듯했다. 교사용 화장실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면 당장이라도 유세민과 결판을 내고야 싶었지만, 이제 더는 화낼 기운도 없거니와 있더라도 아까워서 상종하고 싶지가 않았다.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하여 학교에 있는 시간 동안만큼은 저를 옭아매던 상념들에게서 오히려 해방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것저것 신경 쓸 일들이 많았던 탓인지, 오늘따라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았다.

아침부터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몸살이 난 듯했다. 통 기운도 없고, 이제는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점심시간이 다가올수록 더는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마침 4교시 수업이 없는 날이라 희주는 교무실을 나와 보건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두통약 하나만 받을 수 있을까요?”

창백해진 얼굴을 해서는 알약도 겨우 삼키는 모습을 지켜보던 보건 선생이 조금이라도 눈을 붙였다가 가는 게 어떻겠냐며 휴식을 권해 왔다. 순간 혹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희주는 잠시 고민한 끝에 고개를 내저었다. 쉬더라도 교사용 휴게실이 마음이 편할 듯했다.

평소 같았으면 먼저 식사부터 하고 왔을 테지만 입맛도 없었던지라 식사도 생략했다. 오주형, 배예은 선생과 함께 들어가 있는 단체 채팅 방에 사정을 이야기하니 곧 오주형에게서만 알겠다는 답장이 왔다. 배예은은 읽고도 답이 없었다. 이사장… 그러니까, 강현우가 학교에 왔던 날 제게 소문의 진상을 물은 이후로 배예은과는 서먹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골치 아픈 일투성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같은 깊은 생각은 피하고 싶었다. 희주는 묵직한 한숨과 함께 문고리를 잡았다.

“어?”

교사 휴게실로 들어서자마자 안에서 들려오는 달갑지 않은 목소리에 희주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니, 이불을 덮고 누워 있던 유세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워낙 시설이 좋다 보니 모두 자주 이용하는 줄은 알고 있었다만, 유세민을 마주칠 줄은 몰랐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몸이 너무나도 묵직했다. 아직 약효가 돌지 않아서 더 그런 듯했다. 선택지가 아예 없었기에, 희주는 유세민의 아는 체를 모르는 척하고 비어 있는 침대에 꾸물꾸물 드러누웠다.

“선생님도 4교시 수업 없으세요?”

침대와 침대 사이의 거리가 가까운 것도 아닌데, 한 공간에 있어서인지 유세민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골을 울렸다. 뻔뻔한 건지 당당한 건지, 아직도 제게 할 말이 있는 듯한 태도에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희주는 벽 쪽을 향해 몸을 돌려 대화할 생각이 없음을 완곡하게 표현했다.

“씹네요?”

돌아눕자마자 지적이 날아왔다.

“……왜요.”

“선생님. 대화할 땐 눈 보고 하는 거예요.”

유세민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돌아누워 눈을 감고 있던 희주는 가느다란 숨을 푹 내쉬고는 마지못해 도로 돌아누웠다. 눈을 마주하자 유세민이 만족스럽다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선생님은 왜 왔어요?”

희주가 무어라 대답도 하기 전에 유세민이 답을 가로챘다.

“난 일하기 싫어서 왔는데.”

철없기 짝이 없는 대답에 희주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유세민이 던진 물음은 제 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라기보다는 그저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기 위해 깐 포석에 불과했다.

“할 게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어요. 그냥 수업만 조금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내가 선생님으로 온 건지 사무직으로 온 건지……. 안 헷갈리는 날이 없어. 이럴 줄 알았으면 안 한다고 했을 텐데.”

유세민은 듣는 이에 대한 배려도 없이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나름 적응을 잘한 줄 알았더니 나름대로의 고충도 있는 모양이었다. 일에 관해 투덜거리는 것이 꼭 제 속마음을 그대로 읊는 듯해, 희주는 유세민과의 불화도 잠시 잊고 픽 웃음을 흘렸다.

흐릿하게 바람 새는 소리를 들은 유세민이 이불을 바투 끌어안더니 희주를 향해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래 봤자 겨우 한 뼘이나 다가왔을까 싶은 거리이기도 했고, 몸을 움직일 힘도 없었기에 희주는 그저 눈만 가까스로 깜빡이면서 유세민을 응시했다.

“나 갑자기 궁금한 거 생겼는데 물어봐도 돼요?”

보기 드물게 눈을 반짝인 유세민이 무해하게 물어 왔다. 솔직히 듣고 싶지도 않았지만 아파서 마음이 말랑해지기라도 했는지 유하게 그러라고 했다. 유세민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선생질하는 거 재밌어요?”

듣기 싫은 어감에 희주가 미간을 좁혔다.

“난 별로던데.”

“…….”

“뿌듯한 건 모르겠고, 재미는 있어요. 내 말이 곧 법인 느낌? 애들이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따르는 거 보면… 못 배워 먹은 애들 사람 만드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말투와 표정만 보면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교사였지만, 내용을 잘 곱씹어 보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할 말이 아니었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 들은 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나 싶어 속으로 몇 번씩이고 곱씹어 봤지만, 결국 의미는 처음 이해한 것과 같았다.

정작 희주의 대답은 듣지 않은 유세민은 이어서 정교사 임용에 대해 물었다. 딱히 선생님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으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 퍽 모순적이었다. 유세민은 부모님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솔직히 어떻게 되든 상관은 없어요. 정교사 시험은 매년 있을 테고, 그중에 내 자리 하나 없지는 않을 테니까. 난 내가 마음먹은 것들은 다 내 것으로 만들 자신 있거든요.”

“…….”

“그리고 선생님도 임용됐잖아요?”

그래서 나도 열심히 해 보려구요. 유세민의 당찬 포부에 기분이 묘해졌다. 정교사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동기가 왜 자신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 맞네. 나 깜짝 놀랐던 거.”

이해하려고 했다가 도리어 스트레스만 가중될 것이 뻔했다. 희주는 유세민이 무어라 떠들든 말든, 한 귀로 듣고 흘리면서 턱 밑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슬쩍 아래로 끌어 내렸다.

본격적인 무더위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교사 휴게실은 벌써부터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분명 들어와 누울 때만 해도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만큼 서늘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조금 덥다고 느껴졌다. 계속 이불을 덮고 있던 까닭인지 가슴에 돌을 올려놓은 것처럼 숨 쉬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대로 5교시 시작 전까지 푹 잠이나 잤으면 좋겠다. 왜 하필 유세민을 여기서 마주칠 건 뭔지. 쉬는 것도 편히 쉬지 못하는 상황에 슬슬 짜증이 나려고 했다. 보건실에서 받은 약이 저와 안 맞는 것이었던 듯, 약효가 돌 때가 한참 지난 것 같은데 여전히 머리는 깨질 것 같았다. 심한 두통에 안압까지 더해져, 희주가 더는 참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선생님 대단하시던데요? 어떻게 이사장님이랑 잘 생각을 했지?”

강현우를 언급하는 목소리가 희주의 귀를 파고들어, 꽉 닫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희주는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찰나에 희끄무레해진 형체를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노려보았다.

“빙빙 돌려서 말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제대로 말해요. 쓸데없는 말 늘어놓을 거면 더는 말 걸지 마시고.”

심한 목감기에 걸렸을 때처럼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입 안도, 입술도 바짝바짝 말라왔다. 어느샌가 숨소리도 거칠어진 듯했다. 입만 벌렸다 하면 뜨끈한 숨이 자꾸만 배어 나오는 통에 희주는 아랫입술을 꾹꾹 깨물어 가며 숨을 가다듬었다.

“음…….”

냉정한 일갈에 더는 말을 걸어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유세민은 더는 시치미를 떼지 않고 본색을 드러냈다.

“환영 회식했을 때 봤어요. 이사장님 차 타고 가는 거.”

“…….”

“정확히는 본 건 아니구요. 맡았어요, 페로몬. 우성이잖아요, 나.”

경쾌하게 말한 유세민이 제 코끝을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입가에 장난스럽게 매달려 있는 미소 때문인지 익살스럽게만 보였다.

“그러고 월요일에 똑같은 페로몬 달고 왔었죠? 교무실에 형질자라고는 선생님이랑 저밖에 없어서, 저 혼자 민망한 거 감당하느라 꽤 힘들었어요. 더 오래갈 줄 알았는데 이틀 정도 지나니까 빠지더라구.”

이윽고 유세민은 과장된 몸짓으로 입을 가렸다.

“근데 그 페로몬이 이사장님 페로몬이었을 줄이야?”

“…….”

“반응 보니까 서로 마주칠 줄은 몰랐었나 봐요. 둘 다 눈 마주치고 엄청 깜짝 놀라던데? 선생님도 몰랐던 거죠? 하긴, 나 같아도 그랬겠다.”

마지막 말은 꼭 혼잣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허공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쯧. 짧게 혀를 찬 유세민이 꼭 희주를 동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그러게요, 선생님. 선생님이랑 어울리는 사람을 만났어야죠. 사람마다 그… 뭐랄까. 급이라는 게 있잖아요.”

“……급이요.”

“이사장이 뭐예요, 백영 회장 아들에 상무 이사던데……. 동생도 우성 알파인 거 알죠?”

모를 리가. 희주는 나름 유쾌했던 그녀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설마 진심이었어요? 에이, 설마. 아, 이사장님이 선생님한테 진심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건 아닐 거예요. 그죠? 재벌들이 다 그러잖아요. 연애 따로, 결혼 따로.”

“음…….”

희주는 대답 대신 길게 침음했다. 덥고, 답답하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와중에도 지금 유세민이 하는 말들이 전부 제멋대로 저를 휘두르려고 하는 말이라는 것 정도는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애초에 유세민이 무슨 말을 하든 믿을 생각조차 없기도 했지만, 제가 밀어내 놓고 이렇게까지 강현우를 믿고 있는 자신이 우스워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웃고 싶은데 힘이 없어 웃음조차 지어지지 않았다. 희주가 속으로 웃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유세민은 계속해서 조언인 척하는 말들을 쏟아 냈다.

“원래 우성은 우성끼리 만나야 되는 법이에요. 열성이면서 우성 만나는 게 가당키나 해요?”

“……예를 들면, 선생님처럼요?”

유세민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이제야 알 것도 같았다. 그래서 희주는 장단을 맞춰 주는 척하면서 유세민을 떠보았다.

무어라 더 말을 이으려던 유세민이 잠시 멈칫하면서 희주를 바라보았다. 제법 주제에 맞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배시시 웃은 유세민이 이불을 꼭 껴안았다. 아이처럼 팔다리를 웅크리고는 커다란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이러고 있으니까 우리 어릴 때 생각나는 것 같지 않아요?”

베개와 이불에 어린아이처럼 뺨을 비비적거린 유세민이 희주를 향해 눈을 반짝였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것이 꽤 진심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희주의 눈으로는 비정상적인 욕구가 충족된 것으로만 보였다.

“세민아.”

몸만 컸지, 다른 것들은 전부 사랑의 집 원생 시절에 머물러 있는 유세민을 조용히 불러 보았다.

“응. 희주야.”

“너, 입양갈 때… 나랑 같은 집에서 형제로 살고 싶다고 했던 거 있잖아.”

유세민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무슨 말이 나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굵직한 눈물을 뚝뚝 흘리던 어린 유세민이 그의 얼굴 위에 겹쳐졌다. 어릴 땐 전혀 몰랐는데, 이제 와 보니까 전부…….

“그거, 거짓말이었지?”

유세민의 미간 사이에 깊게 금이 갔다. 마치 새하얀 도화지가 구겨지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너 입양해 가겠다고 한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말한 적 없지?”

“……이상한 말 지어내지 마.”

“잘 생각해 봐. 맞잖아, 내 말.”

희주는 발뺌하고 말을 돌리려는 유세민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칭찬받는 거 좋아하고, 또 인정받는 것도 좋아하고. 관심? 말할 것도 없고. 소유욕도 마찬가지고.”

“…….”

“원래 사랑의 집 애들은 뭘 가지고 항상 싸웠잖아. 물건이든 사랑이든 하도 뭐가 부족하니까. 그래서 너도 그런 줄만 알았거든.”

고저 없는 말들이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근데 아니야. 그냥 너는 항상 네가 제일 잘나야 돼. 그래야 칭찬을 받을 테니까. 남들이 가진 것보다 네가 가진 게 더 많아야 하고. 그래야 인정도 받을 수 있으니까.”

칭찬을 받기에 급급해 제멋대로 현장 체험 학습 장소를 바꾸려고 들었다가 자신을 난처하게 만들었던 일이나,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오히려 더 부추기기까지 한 일들을 차례로 떠올려 보았다.

툭 까놓고 말해 전자는 진작 마무리된 일이니 그렇다 쳐도, 후자는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이었다. 끝이 있을지도 솔직히 의문이었다. 이대로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이 빠를지, 제가 사표를 쓰고 학교를 관두는 것이 빠를지 두고 봐야 아는 일이었다.

왜 저를 이토록 곤란하게 만드는 걸까.

희주는 보다 더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 보았다. 왜 하필 나인 걸까.

그동안 유세민이 제게 했던 말들을 가만히 곱씹어 보면 답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늘 무리의 중심에 있고 싶어 하는 유세민에게, 무슨 이유에선지 저는 눈엣가시인 거였다.

“열성은 어쩔 수 없나…….”

제게 들으라는 식으로 읊조리던 목소리가 선명히 떠올랐다. 유세민이 형질을 언급한 것은 그때가 끝이 아니었다.

금방 저와 강현우의 관계를 왜곡하려 들 때도 유세민은 계속해서 형질을 언급했다. 은근슬쩍 떠본 말에는 금방 기분 좋아진 티를 내면서 으스대기까지 했다.

하여 제 짐작이 어느 정도 맞는 것 같다는 확신이 들기야 했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희주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려 다시금 유세민을 응시했다. 자꾸만 초점이 엇나가는 눈을 똑바로 뜬 채, 유세민을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너 나한테 열등감 있지.”

“……허.”

확신하듯 온점을 찍는 말투에 유세민이 어이없다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느새 웃음기가 싹 사라진 얼굴로 말없이 희주를 노려보더니, 덮고 있던 이불을 신경질적으로 걷어차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희주는 시선만 들어 올려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유세민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금방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처럼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지만, 눈가는 물기 하나 없이 메말라 있었다.

“말 같지도 않은 말 좀 하지 마…….”

겨우 입술을 뗀 유세민에게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열등감? 뭐라는 거야. 너 나보다 잘난 것도 없고, 가진 건 더 없잖아.”

반박은커녕 오히려 증명해 보이는 듯한 말에 희주가 숨같이 웃었다. 또 억울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하게 눈을 삼박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대놓고 적대감뿐인 반응은 의외였다. 정곡이라도 찔린 건가. 도대체 제 어느 점에서 비롯된 열등감인지 모르겠다.

“야, 권희주. 너 잘 생각해야 돼. 지금 내가 너 봐주는 거야.”

“봐줘?”

“…….”

“뭐를?”

“교사 품위 다 떨어뜨리고 있는 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본 유세민이 희번득 눈을 부라렸다.

“학교에서 사람 좋은 척 연기하고, 밖에서는 우성 알파한테 환장해서 다리나 벌리고 다닐지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그것도 학교 이사장. 왜? 꼬셔서 팔자라도 펴 볼 생각이야? 너 이거 아는 사람 나밖에 없잖아. 이거 다른 사람들이 알면 뭐라고 할 것 같아?”

너무 기가 막혀서 화낼 것도 없었다. 황당함에 말문이 턱 막혔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따위 말을 하는 건지도 의문이었지만, 교사로서의 사명감도 없는 주제에 품위를 운운한 부분에서 무어라 반박하는 말 대신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내가 봐주는 거라고.”

보일 듯 말 듯 하게 입술을 달싹인 유세민이 등을 돌렸다. 말도 안 되는 논리로 화를 내더니 급기야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희주는 이제야 좀 조용한 곳에서 쉴 수 있겠다는 속 편한 생각을 했다.

저도 속에서 열불이 나 따지고 들기야 했지만, 앞으로 유세민이 어떻게 할지는 모 아니면 도였다. 어쨌거나 지금 당장은 훼방꾼이 제 발로 사라져 주겠다고 하니, 일단은 조금 쉬고 난 다음 나중에 생각해 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전부터 속이 후끈후끈한 것이, 컨디션이 더 안 좋아진 것 같아 불안했다. 남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잠을 자기 위해, 희주가 막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려던 유세민이 멈칫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작은 기계음만 들리는 휴게실 곳곳에 매서운 시선이 가 닿았다.

“뭐야…….”

갑자기 느껴진 낯선 오메가 페로몬에 유세민은 커진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침구에 밴 누군가의 페로몬이 이제 와 느껴질 리는 없고. 수도꼭지를 튼 듯 왈칵 쏟아지고 있는 생생한 페로몬에 유세민은 저를 제외한 유일한 오메가가 누워 있는 침대 가까이로 다가갔다.

“……하. 웃기네, 진짜.”

유세민이 헛웃음을 쳤다. 수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같은 오메가로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대번에 알아챘다.

“얘 발정 났네.”

확실히 열성이라서 페로몬 농도가 진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우성인 제가 모르고 넘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어이없다는 듯 희주를 내려다보던 유세민은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볼을 씰룩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소문이 좋지 않은 교사가 학교에서 발정이 나기까지 하면 꽤 볼만하겠다는, 그런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유세민은 무표정하게 휴게실을 둘러보았다. 에어컨을 틀어 놓은 탓에 창문을 꼭꼭 닫아 놓기는 했지만, 복도로 난 문틈으로도 충분히 페로몬이 빠져나가고도 남을 것 같았다. 몇 평 되지도 않는 작은 공간이라, 금방 이곳을 가득 채운 페로몬이 외부 여기저기로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자꾸만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가려는 걸 애써 참은 유세민은 둥글게 솟아 있는 이불을 내려다보며 넌지시 불러 보았다.

“희주야.”

“……흐.”

제 말에 반응하듯 괴로운 숨을 헐떡이는 희주를 본 유세민은 결국 참지 못하고 히죽 입꼬리를 당겼다. 누가 열성 아니랄까 봐 헤프게 장소도 가릴 줄 모르네. 속으로 중얼거린 유세민은 가슴 아래까지 흘러내린 이불을 직접 목까지 끌어 올려 덮어 준 뒤, 다정하기 짝이 없는 손길로 가슴팍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기까지 했다.

“많이 아파?”

아프다기보다는 괴로움이 클 터였다. 곧 있으면 알파의 좆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나, 어떤 추한 꼴을 보일지 몰랐다.

“푹 쉬어?”

딸칵. 이왕 쉬는 거, 중간에 깨지 말고 푹 자다가 나오라고 천장 등 스위치까지 내려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 * *

하루 중 가장 느슨해야 할 점심시간에 난데없는 비상이 걸렸다. 학교 밖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교장과 교감은 다급하게 날아온 연락에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부리나케 학교로 복귀해야만 했다.

“저, 그… 이사장님께서, 선생님 독려하는 차원에서 준비하신 건강식품이라고 합니다.”

강현우를 힐긋 본 교장은 안쪽 주머니에서 체크 사각 손수건을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촌스럽기 짝이 없는 손수건이 벗겨진 교장의 머리에 고인 땀방울을 훔쳤다.

전에는 당일 통보라도 연락을 미리 주기는 했는데, 오늘은 학교 안까지 다 들어온 후에야 어디에 있는 거냐고 찾는 통에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심장을 덜컥이게 만들어 놓고 대수롭지 않게 커다란 박스 여러 개를 내밀던 모습을 떠올린 교장이 지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말고사도 얼마 안 남았고, 에……. 한 학기 수고 많았다는 뜻에서어, 예, 그렇다고 하니, 다들 감사히 받아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동할 때마다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데도 교장은 계속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곧장 이사장실로 갈 줄 알았던 강현우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닌 까닭이었다. 생색을 내고 싶어 이러시나. 그게 아니라면 아량을 베푸는 척, 그때 미처 둘러보지 못했던 시설들을 돌아다니며 감독하려고 이러시나.

짝짝, 2학년부 교무실에서 쏟아지는 박수갈채에도 심드렁하게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걸 보니 아무래도 후자가 맞는 듯했다.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영 기를 못 펴는 교장 대신 학년 부장이 빠릿빠릿하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나이를 운운하며 싸가지가 어떻고 연설을 하던 그를 아는 교사들이 짧게 경멸의 눈빛을 쏘았다.

그때, 누가 무슨 말을 하고 뭘 하든 관심도 없던 강현우가 무언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한 분이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만.”

“예? 어…….”

당황한 듯한 학년 부장이 그럴 리가 없다면서 손가락을 세워 하나둘 머릿수를 셌다. 1반부터 10반까지, 저를 제외한 담임 교사들이 총 열 명이 있어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한 명이 비었다. 도대체 누가 빠진 거냐고, 눈을 부릅뜬 학년 부장이 강현우에게 보이지 않게 휙휙 눈알을 굴렸다.

“권 선생님이 안 계시는데요.”

“누가 한번 전화해 봐요.”

“어……. 저, 아까부터 안 받으시는데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교사들을 마땅찮게 본 학년 부장이 두 팔을 걷고 나섰다. 희주의 책상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책상 위에 놓인 물건들을 제 마음대로 뒤지기 시작했다.

“거참……. 뭐 어디서 연락받고 간 거 아니야? 그럼 권 선생 메신저 좀 한 번 봐요.”

두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학년 부장의 머리는 앞에서 보는 것보다 뒤에서 보는 편이 머리숱이 더 빈약해 보였다. 문득 하루아침에 머리가 벗겨지길 기도 중이라는 희주가 말을 떠올린 강현우가 무표정했던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학교에 공적으로 방문하면 희주의 얼굴을 보는 데에도 명분이 생겼다. 안 실장이 차에서 내내 힘을 써 준 덕에, 학교에 도착함과 동시에 수령한 선물들이 교사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졌다. 국산 꿀로 재운 배도라지청이었는데, 교사들의 목 건강에 도움이 되건 말건 어차피 처음부터 희주에게 줄 선물이었기에 강현우는 교무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희주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선물 주인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설마 제가 온 것을 미리 알고 자리를 피해 있기라도 한 건가. 속이 타들어 가는 저를 대신해 난리 법석을 피우고 있는 교사들을 응시하던 강현우는 막연하게 시선을 돌렸다.

괜한 짓을 벌였나 싶다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한 교사에게 시선이 갔다. 한 사람의 부재가 마치 큰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발을 동동 굴리는 다른 교사들과는 달리, 홀로 태연하게 서 있는 이가 하나 있었다.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자, 머지않아 눈이 마주쳤다.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벌리면서 어깨를 움츠린 교사는 왜인지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면서 힘들게 시선을 피했다. 애써 다른 곳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슬쩍 붉어지는 것을 본 강현우가 일순 눈을 가늘게 떴다.

당황한 안 실장이 뒤에서 “어, 어……” 하고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을 듣고도 못 들은 척한 강현우는 거침없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성함이… 유세민, 선생님?”

목걸이형 명찰을 찾아 습관적으로 명치 부근을 쳐다봤다가, 아무것도 없음에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아마도 그의 자리일 것이 분명한 책상에는 허접한 종이 명패가 붙어 있었다. 강현우는 명패에 쓰여 있는 이름 석 자를 나지막하게 읊조리고는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디 있다가 오신 겁니까?”

갑자기 취조하는 분위기가 되자, 희주와 연락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던 이들이 하던 것을 멈추고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점심시간이라… 급식실에서 밥 먹고 왔는데요…….”

유세민이 잠시 머뭇대다가 조그맣게 물음에 답했다. 참을성 있게 끝까지 답을 들은 강현우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전 시간은.”

“저, 이사장님. 어쩐 일로 그러시는지…….”

바로 근처에 서 있던 학년 부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괜한 참견에 눈썹을 구긴 강현우가 묻는 말에 대답하라는 듯 유세민만 빤히 응시했다.

“수업 없는 시간이라… 고사계, 선생님께 다녀왔습니다. 시험… 때문에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현우가 깊은 한숨을 터트렸다.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쯧. 짧게 혀를 차는 소리에 이어 또 한 번 한숨을 내쉰 강현우가 한 걸음 성큼 바짝 다가가 섰다. 헉……. 누구의 것인지 모를 경악이 교무실에 울렸다.

위험하게 눈을 내리깐 강현우가 유세민에게 가까이 고개를 내렸다. 유세민이 본능적으로 상체를 뒤로 빼자 강현우는 싸늘한 눈으로 경고하듯 내려다보았다. 거의 비웃음에 가까운 숨을 터트린 강현우가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거짓말을 너무 쉽게 막 하시네요. 학생들 가르친다는 분이.”

스산한 음성에 한기를 느낀 이들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일단 움츠러들었다. 이중 유일하게 페로몬을 느낄 수 있는 유세민만이 잔뜩 겁을 먹다 못해 공포에 질려서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좋게 말할 때 들으면 좋았을 것을.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 오메가의 페로몬을 묻히고 와 놓고서 모른 체하고 저를 속이려 드는 이 오메가 때문에 심기가 잔뜩 불편해졌다. 강현우는 잠시간 위협하는 페로몬을 거두지 않고 있다가 슥, 바깥쪽을 향해 턱짓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핏기가 가셔 허옇게 질린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예요.”

* * *

번쩍, 눈을 떴다. 눈꺼풀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저를 뒤덮은 어둠이 목구멍을 꾹 조여 왔다. 희주는 숨을 쉴 수조차 없는 감각에 사로잡힌 채 발버둥 치다가,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아…….”

입을 벌리자 헐떡이는 숨과 함께 성대를 긁는 듯한 괴로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왜 이, 러지…….”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는 것도 없는데 눈앞이 핑글 돌았다. 희주는 자꾸만 드문드문 끊기려는 이성을 붙든 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떠올려 보았다. 아침부터 하도 머리가 아파서 약을 타 먹기 위해 보건실에 갔던 것이 생각났다. 분명, 약을 받아먹었고, 쉬는 게 좋겠다는 보건 선생님의 말에 따라 교사 휴게실로 걸음을 옮겼던 것까지도 조금씩 떠올랐다.

얼마나 잔 거지? 몇 시인지 확인하기 위해 손에 억지로 힘을 줘 주머니 위를 더듬거렸다. 옷 아래로 홧홧한 열기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열이 나고 있는 듯했다.

두통약이 아니라 해열제를 달라고 해야 했던 것 같다. 입 안이 바짝 말라 와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았다. 목이 몹시도 말랐다. 물 마시고 싶어……. 몽롱하게 중얼거린 희주는 지금 제가 느끼는 목마름이 단순한 갈증이 아님을 서서히 알아 갔다.

“……흐.”

물이 마시고 싶은 게 아니라, 몸이 알파를 찾고 있는 거였다.

깨달음과 동시에 페로몬이 왈칵 하고 쏟아졌다. 공간을 짙게 뒤덮을 만큼 페로몬을 쏟아 내는 것은 처음이라 갈무리하려고 해 보아도 전혀 제어가 되지 않았다. 발끝이 곱아들고, 열기가 서서히 몸뚱이를 좀먹었다. 헉, 괴로운 숨을 토해 낸 희주는 되는 대로 시트를 부여잡았다.

히트 사이클이었다.

“아, 안 돼…….”

번쩍 정신이 들기는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페로몬은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고, 다리는 자꾸만 벌어졌다. 달뜬 숨을 헐떡이느라 입이 열리고, 아랫도리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동안 이론으로만 접해 왔던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 전조 증상이 모조리 나타나고 있었다.

열성 오메가인 희주는 히트 사이클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히트 사이클 기간에도 발정이 난 적이 없다는 표현이 맞는 말이었다. 주기도 길고 불규칙한 데다 굳이 페로몬 억제제를 따로 챙겨 먹지 않아도 될 만큼 무난하게 지나간 것이 전부였기에, 이처럼 정석적이면서 요란한 히트 사이클은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몸의 변화에 의문이 앞서기도 전에, 희주는 본능적으로 페로몬을 억눌렀다. 몽롱한 와중에도 아직 자신이 학교에 있다는 사실이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까닭이었다.

몇 시간을 이러고 있었던 건지, 일단 도움부터 청해야 될 것 같았다. 희주는 숨을 헐떡이면서 덮고 있는 이불을 겨우 한쪽으로 밀어냈다. 이불 속에 갇혀 있느라 열기를 내뿜지 못한 몸이 뜨끈뜨끈했다.

“흣…….”

희주는 힘없이 침대 위로 고꾸라졌다. 드러난 살갗에 이불 따위가 스치는 것만으로도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사이클 때 오감이 폭발적으로 예민해진다고 얼핏 들은 것도 같았다. 새우처럼 바짝 몸을 웅크린 희주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덜덜 떨었다. 도움을 청하려면 휴대폰을 꺼내야 하는데, 금방 느꼈던 짧지만 강렬할 쾌감에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대로 이성을 잃어버릴까 봐 덜컥 겁이 났다. 누가 보기 전에 무슨 조치라도 취해야 할 텐데, 이미 하얗게 표백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희주는 흐느끼면서 옆으로 돌아누운 몸을 바르작거렸다. 눈을 깜빡이자 언제 고였는지 모를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으, 흑, 현우, 씨…….”

희주는 그의 이름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중얼거리면서 울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반응하는지 입고 있는 바지가 앞뒤로 마구 젖어 들어가는 것이 퍽 당황스러웠다.

다리 안쪽 근육이 움찔움찔 잘게 경련하고, 말단이란 말단에는 바짝 힘이 들어갔다. 희주는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면서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희주 씨.”

너무 정신이 없어 환청이라도 들은 줄 알았다. 엉망일 것이 분명한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 주는 것이 두려워진 희주는 머리를 마구잡이로 흔들면서 자신을 가리려고 애썼다. 가상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몸이 붙들렸다. 희주는 어렵지 않게 저를 제압하는 힘에 놀라 두 팔을 마구 휘둘렀다.

“희주 씨. 나예요.”

강현우는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희주를 품에 끌어안았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으면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작은 몸을 토닥이는 그의 잇새로 짧은 욕설이 비집고 나왔다.

복도에 희주의 페로몬이 진동하고 있을 때부터 불안하다 싶었는데, 휴게실에 가까워질수록 강하게 느껴지는 페로몬에 히트 사이클임을 대번에 알아챘다. 이렇게까지 되었다는 것은 적어도 한참 전부터 전조 증상이 있었다는 터, 제게 거짓말을 지껄인 오메가는 불 보듯 뻔한 결과를 방조했다. 강현우는 그 오메가의 이름 석 자를 속으로 되뇌었다.

“안 실장님.”

문 밖에서 넋이 나가 있던 안 실장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베타인 안 실장은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조금 당황했을 뿐, 페로몬에 휩싸이지는 않고 있었다.

“지금 차 대기시키겠습니다.”

휴대폰을 꺼낸 안 실장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황급히 뛰어나갔다. 말로 복잡하게 지시하지 않아도 어련히 알아서 준비해 둘 터였다. 어느새 까무룩 기절해 버린 희주를 입고 있던 재킷으로 감싼 강현우가 침착하게 그를 안아 들었다.

이윽고 검정 세단 한 대가 미끄러지듯 교문 밖을 빠져나갔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교정은 평화로웠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