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전혀 취향이 아닌 반투명한 레이스 커튼은 실내로 들이닥치는 햇빛을 막는 데 무용지물이었다. 평소 고상한 것을 좋아하는 정 여사의 간섭에 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틀 밤을 꼬박 새운 지금으로서는 사소한 것마저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
널브러져 누워 있던 유세민은 서서히 밝아지는 하늘을 노려보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수면 부족으로 인해 몸을 일으킨 것만으로도 머리가 핑글 돌았다. 하지만 더 누워 있는다고 소득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긴 그는 짜증 섞인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침대에서 벗어났다. 찬물로 샤워라도 하면 좀 나을까 싶었다.
얼음장 같은 물을 흠씬 맞고 나온 유세민은 희게 질린 얼굴을 해서는 대수롭잖게 행동했다. 젖은 머리를 말리고, 행거를 뒤져 옷을 골라 걸쳐 입었다. 백화점에 들어선 것처럼 빼곡하게 걸려 있는 옷가지들 역시 모두가 정 여사의 작품이었다.
날카로워진 신경을 애써 누른 채 복도로 나왔다. 닭장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현관문을 볼 때면 문득 혐오감이 치밀었다. 하필 이따위 집을 구해 주다니.
“이딴 것도 집이라고.”
거처는 김 비서가 알아봐 줄 거라고 했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분명 김 비서가 제게 엿을 먹이려고 벌인 일이 틀림없었다. 무능한 주제에 빈대처럼 붙어 있는 꼴이란. 이걸 저만 알고 있다는 게 한탄스러웠다.
곧 출근 시간이었지만 유세민은 건물 1층이 아닌 옥상으로 향했다.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와중에 딱 하나, 옥상에 있는 하늘 정원만큼은 유세민의 마음에 쏙 드는 공간이었다. 입주한 이래,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출근 도장을 찍고 있는 곳이었다.
하늘 정원으로 이어지는 육중한 철제문을 열고 나가자, 마침 돌아 나오던 알파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멈칫한 알파가 호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해 왔다. 언제 봤다고 슬그머니 페로몬을 푸는 꼴이 같잖았다.
저러다 조만간 말도 걸겠네. 속으로 중얼거린 유세민은 겉으로는 꾸며낸 미소를 빙긋 지어 보였다.
알파가 떠난 하늘 정원에는 유세민뿐이었다. 알파가 사라진 방향을 뒤돌아 힐긋 쳐다본 그는 언제 웃었냐는 듯 표정을 굳히고 성큼성큼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잠을 못 자 예민해진 탓인지 주말 동안 금연을 한 것도 아닌데 담배가 절실히 당겼다.
유세민은 익숙하게 불을 당겼다. 볼이 홀쭉해질 만큼 힘을 주어 빨았다가 한숨을 쉬듯 연기를 내뿜었다. 금방 짧아진 담배는 재떨이에 던져 넣고, 기계적으로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세 개비를 연달아 피웠다. 텅 비어 있는 속에 니코틴이 녹아들면서 조금 진정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야 살겠다는 숨이 나른하게 터져 나왔다. 축 늘어진 꼴이 마치 유학생 시절 숱하게 봤던 약쟁이들 같아서 피식거리는 웃음이 나왔다.
이대로 출근하면 퇴근하기 전까지는 담배는 쳐다도 못 볼 테니, 피울 수 있는 시간이 있을 때 최대한 많이 피워 놔야만 했다.
유세민은 네 개비째 되는 담배를 입술 사이에 끼웠다. 새빨갛게 붙은 불을 빨면서, 다른 손으로는 휴대폰을 꺼냈다. 몇 번 손가락을 놀리자 선생님들이 모여 있는 단체 채팅 창이 떠올랐다. 유세민은 무심히 내리깐 눈으로 메시지들을 천천히 훑었다.
/messsage*you/
6반권희주쌤
혹시 제 가방 가지고 계신 분 계신가요?
ㅠㅠ
1반이정희쌤
가게에 두고 온 거 아니에요?
근데 희주쌤 중간에 어디로 사라졌던 거예요?
바람쐬러 간다더니 전화도 안 받고
6반권희주쌤
아…… 죄송해요.
많이 취했었나 봐요. 눈 뜨니까 집이더라고요.;
“지랄하고 있네…….”
거친 욕설이 뿌연 담배 연기에 뒤섞여 나왔다. 이미 몇 번씩 복기한 메시지지만,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권희주의 거짓말에 볼 때마다 헛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유세민은 분노의 대상이 명백히 정해져 있는 욕설을 거듭 짓씹으며 그다음 이어지는 메시지를 읽었다.
/messsage*i/
희주 쌤 가방 제가 챙겨 놨어요.
월욜에 출근하면서 챙겨 갈게요!
/messsage*you/
6반권희주쌤
아. 네, 감사합니다.
권희주의 답장 이후로 교사 단체 채팅 방은 토요일 정오 즈음 이후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메시지 없이 그대로였다. 귀찮아질 걸 뻔히 알면서도 너른 마음으로 수고로운 짓을 해 줬더니 이따위 성의 없는 답장을 보낼 줄이야. 제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태도는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유세민은 조소하며 꼬고 앉은 다리를 덜덜 떨었다.
권희주의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박박 긁히는 것 같아, 유세민은 보고 있던 휴대폰을 벤치 위에 뒤집어 두었다. 매캐한 연기를 훅 뿜는데 문득 시선이 다시 벤치로 옮겨졌다. 권희주가 출퇴근할 때마다 들고 다니는 가방이었다. 회식이 있었던 날 밤,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면서 두고 간 바로 그 가방 말이다.
“…….”
마치 그 가방이 권희주라도 되는 양, 유세민은 담배를 뻑뻑 피우면서 곁눈으로 흘겨보았다. 그러고는 이틀간 제 불면증의 이유가 되었던, 주차장에서의 권희주를 떠올렸다.
그날은 금단 현상 때문에 유독 힘이 들었던 날이었다. 출근 전 충전해 둔 니코틴이 고갈되기 전에 한 대 빨아 줘야 했는데, 하필 학년 부장이 제 환영 회식을 당일에 정해 통보하는 바람에 담배고 뭐고 할 것도 없이 회식 장소로 끌려갔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부담을 넘어 짜증이 날 정도로 제게 잘해 주는 학년 부장을 겨우 떼어 놓고, 화장실에 다녀오겠답시고 나와 담배를 태우던 참이었다. 혹시라도 눈에 띄기라도 할까, 정해져 있는 흡연 구역이 아닌 주차되어 있는 차량 사이에 숨어 급하게 불을 붙이는데 그런 제 앞으로 권희주가 지나갔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듯했다. 어지간히 많이 마시긴 했는지, 사방이 조용한데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솔직히 누구와 통화를 하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기에, 금세 짧아진 꽁초를 버리고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 냄새를 달고 들어가도 다들 제정신이 아니니 대충 수습하고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그런 제 관심을 끈 건, 멀찍이 서 있는 저까지 인상을 찡그리게 만드는 헤드라이트였다. 가뜩이나 어두운데 빛을 쏘아 대는 바람에 짜증이 확 치밀었다. 가만히 있다가 봉변을 당했으니 어떤 놈인지 얼굴이나 보려고 했다.
“……분명 우성이었어.”
유세민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손톱을 입술 앞으로 가져왔다. 어두워서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우성 알파였다. 그리고 그 우성 알파와 희희낙락거리고 있던 건 권희주였고.
딱, 딱. 잘근잘근 씹히던 손톱이 결국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뜯겼다. 표면이 울퉁불퉁하게 날카로워졌지만 유세민은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는 것에 속도를 더했다.
권희주가 가방까지 버려 가면서 우성 알파와 함께 사라진 뒤, 바람을 타고 날아와 공기 중에 희미하게 부유하는 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감지한 유세민은 홀로 남아 이를 까득까득 갈았다. 제가 가지지 못한 우성 알파를, 열성 오메가인 권희주가 가졌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어디 감히 열성 주제에. 권희주 주제에…….
늘 화제의 중심에 있는 것이 익숙했고, 그걸 당연시하게 여겨 오며 살아온 유세민으로서는 시기와 질투를 넘어 화가 치미는 일이었다.
그래. 권희주가 이 학교에서 선생질을 하고 있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됐다. 사람마다 어울리는 자리가 있는 법이었다. 그래서 권희주를 대신해 제가 입양을 갔던 거였다. 유세민은 자신이 권희주의 자리를 빼앗은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권희주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다.
대기업 이사와 대학교수로서 남부럽지 않게 부유했던 양부모는 입양아인 저를 마치 친자식처럼 길러 주었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유세민은 그들이 원하는 인생을 걸어왔다. 아닌 척하지만 남들에게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는 양부 유 이사의 바람대로 유학을 다녀오고, 양모 정 여사의 바람으로 전공을 선택하고, 또 양부의 지시로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덜떨어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따위에 보람을 느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교생 실습 때 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제 말이 곧 법인 줄 아는 학생들 덕에 희열을 느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양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자신도 아직 임용 고시를 합격하지 못해 기간제로 시작하는 마당에,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을 권희주는 진작 시험을 합격해 이미 정교사란다. 게다가 동료 교사들은 물론이고 학생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았다.
유세민은 엎어 뒀던 휴대폰을 낚아채어 권희주로부터 온 답장을 다시금 읽어 보았다. 기간제인 데다 굴러온 돌인 저 보란 듯이 일부러 이러는 게 분명했다. 가만히 보고 있기가 꼴사나웠다.
이러한 시기와 질투는 곧 망상으로 이어졌다. 우성을 꼬셔서 뭘 할 속셈인 거지? 설마 연인 사이는 아니겠지. 열성 주제에 우성과 연인일 리가 없었다.
이건 분명 다들 속고 있는 거다. 이렇게 교사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애가 선생질을 하고 있으니 저 같은 인재가 갈 길을 못 잡고 아등바등하고 있는 거다.
“내가 봐줘야 하나?”
열성 오메가가 제대로 된 가족도 없이 자립하려니 힘들기야 했을 거다. 유세민은 제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아량으로 권희주의 난잡한 사생활을 모르는 척 넘어가 줘야 할지, 아니면 정의롭게 짚고 넘어가야 할지 생각의 갈림길에 섰다. 그날 끝까지 담배를 참고 있었더라면 모르고 넘어갔을 진실이었다. 저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자 히죽 입꼬리가 올라갔다.
짧은 고민 끝에 유세민은 권희주와 관련된 처신 정도는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얘는 가방을 이딴 걸 들고 다녀……. 시설 출신 아니랄까 봐 구질구질하게.”
한결 마음이 편해진 유세민은 선심 써서 챙겨 놓은 권희주의 가방에 시선을 던졌다. 아무리 봐도 명품은 아니고. 어디 길거리에서 지폐 몇 장 주고 싸게 산 게 분명해 보이는 가방을 혐오스럽다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더러운 것을 보듯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기를 한참, 결심한 듯 유세민은 아무렇게나 올려놓은 가방을 휙 잡아챘다. 제 것도 아닌 물건을 마구 열어 파헤치는 손길에는 그 어떠한 도덕심이나 염치도 없었다.
가방 안은 단출했다. 수업 자료와 연구 자료가 들어 있는 파일과 노트, 필기도구가 전부였다. 자그맣게 달려 있는 주머니에는 아직 뜯지 않은 간식과 영수증이 처박혀 있었다. 왜인지 실망한 기색이던 유세민은 가방 밑바닥을 헤집다가 순간 우뚝, 손을 멈추었다.
“뭐야, 이게.”
유세민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하얀색의 스프레이였다. 원래 이런 건지, 아니면 일부러 이렇게 만든 건지 손안에 착 감기는 사이즈의 스프레이는 상표 스티커 없이 매끈했다.
유세민은 감흥 없다는 듯이 손에 들린 것을 들여다보다가, 아무 생각 없이 캡을 열어 공기 중에 뿌렸다. 치이익. 무색무취의 액체가 안개처럼 분사되었다.
앞에 놓인 재떨이에도 뿌려 보았다. 아직 타오르고 있는 불씨가 분사된 액체에 푹 젖어 희미한 연기를 뿜어 냈다. 별거 없네. 쯧, 가볍게 혀를 찬 유세민은 스프레이를 그대로 가방에 넣으려 했다.
“……잠깐만.”
멈칫. 유세민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가는 눈썹이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이거…….”
표정을 차게 굳힌 유세민이 스윽 고개를 기울였다. 도로 밖으로 꺼낸 스프레이를 보는 눈이 가늘어졌다.
입주민 공용 공간이지만 야외로 뻥 뚫려 있는 데다 지금은 저 하나뿐이니 페로몬을 쭉쭉 뿜고 있었다. 그런데 권희주의 가방에서 주운 스프레이를 뿌리자 주변의 제 페로몬 농도가 급격히 바닥을 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건.
“…….”
소취제였다.
무표정했던 얼굴에 섬뜩하게 미소가 번졌다. 유세민은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다리를 덜덜 떨기 시작했다. 몇 개비 남지 않은 담뱃갑을 더듬는 손이 기묘하리만큼 떨렸다.
유세민은 이제 막 불을 붙인 담배를 입에 물고 생각에 골몰했다. 전보다 느긋하게 담배를 피운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재떨이에 담배를 마저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이 닫히기 직전, 유세민은 손에 들고 있던 흰색 통을 쓰레기통 안으로 가볍게 던져 넣었다.
텅!
비어 있던 쓰레기통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흔들렸다.
* * *
동이 터 오는 것을 보며 까무룩 잠이 들었던 희주가 잠에서 깬 건 반나절이 훌쩍 지난 토요일의 늦은 오후였다. 그마저도 강현우가 깨워 줘서 망정이지,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쭉 자고도 남았을 테였다.
딱히 계획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숙취와 섹스의 여파로 내내 잠만 자다가 주말의 절반을 날렸다는 사실이 퍽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려고 치면 말 못 할 부위를 중심으로 퍼지는 무지근한 통증 때문에, 그나마 남아 있는 절반도 있으나마나 한 것이 될 게 뻔했다.
헌신적으로 수발을 드는 강현우를 희주가 밉지 않게 흘겼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강현우는 대놓고 눈 흘김을 당하고도 그저 웃기만 했다. 그 흠 없는 미소를 마주한 희주의 마음이 눈 녹듯 사그라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희주는 강현우가 입가에 대주는 음식을 고분고분 받아먹고, 식사 후에는 따끈한 머그 컵을 손에 꼭 쥐고 윤슬로 반짝이는 한강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야말로 완벽한 주말이었다.
어쩐지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끽하던 찰나, 희주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다름 아닌 가방이었다. 아무리 애인을 봐서 좋았다고 해도 가방을 그 자리에 고스란히 두고 나와 버리다니. 술에 취해 느슨해진 머리가 아무렇게나 결론을 내려 버린 것이 분명했다.
희주는 금세 울상이 되어 휴대폰을 찾았다. 강현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가져다준 휴대폰을 받자마자 쌓여 있는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 알림을 뒤로 하고 교사 단체 채팅 창을 뒤적거렸다. 일단 말도 없이 탈출해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술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라고 좋게 웃어넘기는 분위기였다.
초조하게 휴대폰만 들여다보기를 한참, 곧 가방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희주는 크게 안도했다. 하필 가방을 챙겨 뒀다는 사람이 유세민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당장 사람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예의상 감사하다는 답장을 보낸 뒤 희주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강현우의 품을 찾았다. 하지만 왜인지 모를 찝찝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 * *
돌아온 월요일 아침. 희주는 2학년부 교무실의 문을 가장 먼저 열고 출근했다. 주말 동안 하지 못한 수업 준비를 위해 부러 일찍 출근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크게 한번 지각할 뻔한 이후로 강박 비슷한 것이 생겨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진 탓도 컸다.
실내등을 밝히고, 앞뒤로 닫혀 있는 창문을 활짝 연 뒤 자리로 돌아온 희주는 가방을 내려놓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렸다가 머쓱하게 아래로 끌어 내렸다. 매일 들고 다니던 가방이 없어서 그런지 출근을 해도 한 것 같지 않게 허전했다. 희주는 멋쩍게 주먹을 쥐었다 펴고, 입술을 감쳐물고는 슬그머니 의자를 빼서 앉았다.
“아이고…….”
자리에 앉자마자 의자에 등을 기대고 팔과 다리를 축 늘어뜨렸다. 천근만근 무거운 몸에 기댈 곳이 생기니 죽겠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나마 어제는 잠자리에 일찍 든 덕분에 정신은 멀쩡했지만, 하체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은 꼬박 하루가 지났음에도 여전했다.
자연스럽게 격정적이었던 지난 주말을 떠올려 버린 희주는 금방 열이 오른 볼을 꾹꾹 누르며 아무도 없는 주변 눈치를 살폈다. 손부채질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희주는 커피라도 마셔야겠다면서 괜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
커피를 타 들고 돌아왔을 때에는 책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에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달달한 믹스커피를 한 모금 삼킨 희주는 얼른 휴대폰을 들어 확인했다. 발신자는 어김없이 강현우였다. 잘 잤느냐는 메시지에 저도 모르게 환히 웃음 지은 희주는 의자를 당겨 앉고 곧장 손가락을 움직였다.
틀에 박힌 말이지만 다정한 진심이 담긴 아침 인사를 적어 보내자, 금방 메시지를 확인했다는 표시가 뜨고 곧이어 휴대폰이 진동했다. 희주는 밖으로 나가서 받기 위해 움찔 엉덩이를 들썩거렸다가, 잠깐 통화하는 것쯤은 괜찮겠다 싶어 도로 앉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현우 씨.”
―출근 준비 중인데 내가 방해한 거 아니죠?
“아니에요. 저 벌써 출근했어요.”
이미 출근해 교무실이라고 말하자, 놀랐는지 다시 한번 되묻는 강현우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일찍 출근할 거라고 어젯밤 자기 전에 통화하며 미리 말을 해 두기야 했지만, 이렇게까지 이른 시간일 줄은 미처 몰랐던 모양이었다.
―잠은 푹 자고 간 거예요?
“네. 어제 잔다고 하고 나서 바로 잠들었어요.”
―그러면 다행인데……. 몸은 어때요? 그저께는 자면서도 끙끙거리던데.
강현우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던 희주는 하마터면 입 안에 든 것을 그대로 뿜을 뻔했다. 감기에 걸렸다거나 몸살이 나서 아팠던 것도 아니고, 조금 격했던 섹스 때문에 아팠던 걸로 강현우의 걱정을 받다니, 민망하면서도 얄미워서 말문이 턱 막혔다. 가까스로 커피를 삼킨 희주는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고는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너무 양심 없는 질문 아니에요?”
―음? 양심이 왜요. 애인 걱정하는데 양심도 있어야 하나?
“아니……. 내가 누구 때문에 그렇게 끙끙거렸는데요.”
―그래서 싫었어요?
“……그건 아니지만.”
희주는 기어들어 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강현우의 말마따나 저도 좋아서 한 일이었기 때문에 딱히 누구를 탓할 것도 없었다. 부끄러움에 눈을 굴린 희주는 고개를 기울인 채 책상 유리를 손가락 끝으로 슬슬 문질렀다.
그때였다.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란 희주는 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황급히 떼어 내고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
“…….”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유세민이었다. 어쩐지 피곤해 보이는 유세민과 허공에서 눈이 마주친 희주는 늘 하기야 해 오던 아침 인사를 하려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유세민이 먼저 휙 시선을 피했기 때문이었다.
눈이 마주쳤던 게 마치 착각이라도 되었던 것 같은 무시에, 희주는 방금 전까지 통화를 하던 것도 잊고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유세민은 책상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교무실 입구 쪽에 있는 정수기 앞으로 가 컵에 물을 채웠다. 그러고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사위가 조용한 탓에 급히 물을 넘기는 소리가 선명히 들릴 정도였다.
―희주 씨?
그런 유세민의 뒷모습을 조금 얼떨떨한 눈으로 보던 희주는, 저를 부르는 강현우의 목소리에 당황하여 얼른 휴대폰을 귀로 가져갔다. 물 한 컵을 단숨에 비우고도 다시 물을 따르고 있는 유세민을 주시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네. 저… 제가 다음에 연락드려도 될까요?”
갑자기 쑥 가라앉은 목소리에 대강 어떤 상황인지 빠르게 눈치챈 강현우가 작게 웃었다.
―이제 다른 선생님들도 출근할 시간인가 봐요.
“네…….”
―괜찮아요. 어차피 저도 이제 나가 봐야 해서요.
희주는 먼저 끊으라는 강현우의 말에 조금 주저하다가 종료 버튼을 눌렀다. 짧은 알림음과 함께 통화가 마무리되고, 희주는 화면에 찍혀 있는 통화 시간을 가만히 보다가 인기척에 시선을 들어 올렸다. 한 컵 가득 물을 채운 유세민이 이제야 비로소 제 자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
눈이 마주치기라도 할까 얼른 시선을 내린 희주는 화면을 끈 휴대폰을 책상 구석에 밀어 두고, 덮어 둔 노트북을 당겨 열었다. 노트북이 미세한 기계음을 내면서 부팅되는 사이, 옆자리에 앉은 유세민이 한숨과도 같은 숨을 내쉬고는 컵에 입술을 묻었다.
목이 많이 말랐나. 아직 더운 시간은 아닌데. 속으로 중얼거린 희주는 마우스 커서를 딸깍거렸다. 자꾸만 옆이 신경 쓰여 애써 노트북 화면만 뚫어져라 노려보는데, 의외로 유세민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일찍 오셨네요.”
충분히 해갈을 했을 텐데, 나름대로 다정한 축에 속하던 목소리가 듣기 싫게 쩍쩍 갈라졌다. 감기라도 걸린 건가. 요즘 일교차가 큰 편이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상태가 안 좋다니. 내심 놀랐지만 희주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아, 네……. 수업 준비 좀 미리 해 두려고요.”
군더더기 없는 대답에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은 유세민이 곁눈으로 희주를 살폈다. 저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희주는 끝까지 모르는 척하며 수업용으로 만들어 둔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띄웠다.
“대단하시네요…….”
“…….”
“월요일부터.”
비꼬는 건지 감탄하는 건지 모를 어투에 희주는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쩌억 하품을 하고는 연신 냉수를 들이켜는 모습에, 더 생각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물을 쉼 없이 마셨음에도 금방 바짝 마르는 입술을 혀로 훑은 유세민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나기라도 한 것처럼 “아” 했다. 그러고 동시에 앉아 있던 의자를 빙글 희주 쪽으로 돌렸다. 그런 그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유세민이 다른 한 손으로 대강 들고 있던 가방을 불쑥 내밀어왔다.
“선생님 거 가방이요.”
“……아.”
희주는 눈앞으로 불쑥 내밀어지는 가방을 조금 떨떠름하게 받아 들었다. 솔직히 껄끄러운 상대에게 받은 도움이라 곧바로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 손에 무사히 되돌아온 가방을 이리저리 돌려 보던 희주는, 아무리 상대가 유세민일지언정 그래도 제 짐을 챙겨 준 사람을 바로 앞에 두고 상태를 확인한 것이 민망해져 슬그머니 가방을 내려 두었다. 이를 보지 못했을 리가 없는 유세민은 기가 찬다는 듯 남몰래 입술을 말아 물었다.
“회식날에요. 어쩌다 보니까 제가 마지막까지 멀쩡했던 거 있죠? 선생님들 다 가시고 보는데, 우리 먹었던 자리에 이게 덜렁 있는 거예요. 혹시나 해서 챙겨 뒀던 건데 희주 쌤 거였네요, 이게.”
“아, 감사합니다…….”
덕분에 적절히 타이밍이 생겨 희주는 냉큼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가방을 열어 안에 든 것들을 꺼내어 확인하고 싶었지만, 상태를 살핀 것도 모자라 안까지 뒤적거리면 괜한 오해를 사게 될까 봐 참기로 했다. 설령 무언가가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안에 넣어 둔 자료들은 다 복사본이어서, 번거롭기는 해도 다시 뽑으면 그만인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2학년부 교사들이 다 보는 단체 채팅 방에서 제가 챙겨가겠다는 둥 했던 유세민이 제 가방에 장난질을 쳤을 리가 없었다. 영어 과목 담당이니 국어 과목 자료들로 무슨 짓을 꾸밀 수도 없고 말이다.
“혹시 뭐 없어진 거 있나 봐요. 선생님들 다 가시고 나서 좀 뒤에 본 거라 누가 만졌는지까지는 못 봤거든요.”
“……괜찮아요. 뭐 없어진다고 문제 될 것도 없어서…….”
“……그래요?”
그래요, 그럼. 어깨를 으쓱인 유세민은 희주를 빤히 보고 있던 시선을 거두고 이내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슬슬 복도 끄트머리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학생들 중에서도 일찍 등교하는 아이들이 내는 소리임이 틀림없었다. 흐릿한 아이들의 목소리들과 딸깍이는 마우스 커서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그새 또 물을 떠 온 유세민이 그나마 조금 풀린 목소리로 질문했다.
“근데 혹시 술버릇이 집 가는 거예요? 가방은 있는데 사람이 없어서 뭔가 했어요. 화장실에도 가 봤는데 없고, 전화도 안 받으셔서.”
몇 통씩 쌓여 있던 부재중 전화 중에 유세민의 이름은 없었지만, 함께 있던 다른 교사가 건 것들을 통틀어 말한 거겠거니 했다.
“아, 네, 뭐. 그날 많이 마시긴 했나 봐요.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뭐… 걱정까지야.”
부산스럽게 책상 서랍을 연 유세민이 그 안에서 사탕을 꺼내어 입에 물었다. 끄트머리에 작게 읊조린 말은 덜커덩거리는 서랍 소리에 가려졌다.
사탕 껍질을 책상 위 조그만 쓰레기통에 거칠게 쑤셔 넣은 유세민은 또 다른 사탕을 하나 꺼내어 희주에게 슬쩍 내밀었다. 말없이 눈짓으로만 건네는 권유에 희주는 괜찮다며 고개를 까딱 숙여 사양했다.
“별일 없으셨다니까 다행이에요.”
유세민은 두 번 권하지 않았다. 입에 사탕을 문 터라 뭉그러지는 발음으로 중얼거리고는, 이내 입 안에 든 알맹이를 까득까득 씹고 새것을 입에 넣은 뒤 더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얼마쯤 시간이 흘러 하나둘씩 출근하는 교사들의 아침 인사로 시끌벅적해지기 전까지, 2학년부 교무실에는 왜인지 모르게 살얼음판 같은 침묵이 흘렀다.
* * *
짜인 시간표대로, 특별히 튀는 것 없이 무난하고도 지루한 일주일이 절반이 지나갔다.
5교시 수업은 어떤 과목이 되었든 모든 교사들이 어려움을 겪는 교시였다. 식곤증을 이기지 못한 아이들이 잘 익은 벼처럼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는 것은 당연지사, 더구나 여름을 앞둔 지금은 살짝 후덥지근해진 날씨까지 숙면하기 좋은 최적의 조건이었다.
한창 판서를 이어 가던 희주 역시 수업 시간답지 않게 어수선한 분위기를 느낀 터였다. 그럼에도 희주는 꿋꿋하게 마지막 온점까지 써 내려간 뒤에야 뒤를 돌았다. 그런 희주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삼삼오오 머리를 맞대고 숙덕거리는 무리들과 무언가를 은밀하게 주고받느라 분단과 분단 사이에 쭉 뻗어진 한 아이의 팔이었다.
“이것들 봐라. 너희 집중 안 할래?”
후다닥 거두어지는 팔에 시선을 고정한 채, 희주는 들고 있던 교과서를 교탁 위에 내려 두고 상체를 기울였다.
“차라리 조용히 엎드려서 자라. 응? 열심히 수업 듣는 애들한테 방해 안 되게.”
물론 말이야 이렇지, 진짜 잠을 자라는 뜻은 아니었다. 삐딱하게 교탁에 기대고 선 희주는 눈치껏 싸해진 반 분위기를 주욱 살피다가 쯧, 하고 혀를 차고는 인심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집중 안 되면 딱 5분만 떠들자. 대신 5분 지나고 나면 떠들지도 말고 졸지도 말고 수업에만 딱 집중하기. 어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의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어차피 지금 들어온 반은 기말고사 진도에 쫓기고 있는 반이 아니라서 진도에 급급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외곬으로 수업만 하기보다는 적절한 잡담을 섞어 가는 편이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나 공부 분위기를 잡는 데 편하기도 했다.
“뭐 그렇게 재밌는 이야기를 하길래 선생님이 열심히 수업하는데 몰래 웃고 떠들어?”
너네만 알지 말고 나도 알려 주라. 희주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보통 이러면 나서기 좋아하는 아이들 한두 명이 중심이 되어 재잘대기 바빠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나서기는커녕 다 같이 미리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서로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판을 깔아 준 것이 무색해지는 반응에 희주는 당황했다.
“뭔데, 이 분위기? 너희 설마 선생님 뒷담화라도 했어?”
“쌔앰, 그게 아니구요.”
마침 목소리를 높이는 아이에게 시선이 갔다. 분단의 맨 뒷자리에 앉은 아이가 심드렁한 얼굴로 손을 번쩍 들고 있고, 그 옆에 앉은 아이는 이를 말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짝꿍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연신 쿡쿡 찔러 대고 있었다. 결국 손을 든 아이가 짧게 짜증을 부렸다.
“쌤, 남자 친구 있어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 있던 희주는 아이가 던진 질문에 곧 벙찐 얼굴이 되었다. “뭐라고?” 전혀 예상에 없던 흐름에 희주가 되물으며 눈살을 설핏 찡그렸다.
“내가 학교 초에 너희 반에서는 첫사랑 이야기 같은 건 말 안 했나?”
매년 학기 초마다 연례 행사처럼 풀어야 하는 게 첫사랑과 연애 관련된 경험담이건만, 한 학기가 다 끝나가는 마당에 들으니 조금 당혹스러웠다. 가끔 공부 분위기가 잘 잡혀 있는 반들 중에는 묻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긴 한데, 제가 알기로 이 반 아이들은 공부보다 수다에 더 관심이 많은 축이었다.
“아, 옛날얘기 말고 지금이요, 지금. 쌤 지금 남자 친구 있는 거 아니에요?”
“수업 안 듣고 그런 이야기나 하고 있었어?”
“완전 중요한 이야기니까 그렇죠.”
“지금 너희한테 중요한 건 당장 내일 있을 모의고사랑 한 달도 안 남은 기말고사일 텐데?”
아, 말 돌리지 마세요! 시험 이야기로 5분을 채우고 싶지 않다면서 야유하는 소리가 쏟아졌다. 겉으로는 웃고는 있지만, 희주는 무슨 말로 아이들의 관심을 잠재워야 할지 고민 중에 있었다.
여기서 괜히 들떠 남자 친구가 있다고 인정해 버리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었다. 지금 딱 이 나이대 아이들은 공부 빼고 다 재미있어할 나이이기 때문에, 한번 말을 잘못 꺼냈다가는 영혼까지 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럴 때에는 그냥 없다고 거짓말을 하는 편이 훨씬 속이 편했다.
“선생님한테 남자 친구가 있는지 없는지, 너희가 그게 왜 궁금한데?”
다만 갑자기 호기심이 인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테였다. 희주는 아이들 질문에 대한 답은 모호하게 피하면서, 역으로 질문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저마다 제 할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스무 명이 훌쩍 넘는 아이들이 한두 마디씩 늘어놓자 네모난 교실은 순식간에 시장통처럼 시끄러워졌다. 희주는 토론의 장을 지켜보다가 대충 수업을 이어 갈 생각으로 이리저리 시선을 굴렸다. 그러던 도중, 한 아이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귓가에 와 박혔다.
“쌤한테서 알파 냄새 난다는데요?”
여유롭게 웃고 있던 희주의 얼굴이 순간 희미하게 굳었지만, 아주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다. 희주는 제대로 듣지 못한 척 눈썹을 쓱 밀어 올렸다.
“얘들아. 너희는 각자 한 마디씩 하는 거겠지만 합치면 서른 마디나 되거든? 한 명씩 말하자, 한 명씩.”
“남자 친구 있는 거 맞죠?”
“쌤, 그럼 결혼하는 거예요?”
“남친 잘생겼어요?”
공부에 상관없는 일일수록 쓸데없이 단합이 잘 되는 편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 공세에 희주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경청하다가 퍽 성의 없이 대꾸했다.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듣고 와서 퍼트리고 있어?”
‘이상한 소문’이라고 일축해 버리자 잡음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분명 페로몬 언급이 있기야 했지만 형질자가 한 명도 없는 반이라 그런지 어디서 귀띔으로 듣고 온 말로 답을 얻어 내려는 시도는 없었다.
슬쩍 벽시계를 바라보자 약속했던 5분이 얼추 다 지나가고 있었다. 교탁에 싣고 있던 체중을 거둔 희주는 박수를 크게 짝짝 쳐 어수선한 공기를 가라앉혔다.
“선생님이랑 약속했지? 5분 다 지났으니까 이제 딴소리 말고 수업만 듣는 거다.”
아쉬워하는 소리가 난무했지만, 채찍이 아닌 당근이 방법이었는지 전보다 훨씬 나아진 분위기 속에서 순조롭게 수업이 이어졌다. 사각사각 필기를 받아 적는 소리, 다 같이 동시에 교과서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 지문을 읽고 설명하는 희주의 목소리가 어우러졌다. 몇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졸거나 몰래 딴짓을 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오히려 수업에 집중이 안 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희주 저 자신이었다. 자꾸만 수업 내용이 아닌 아이들이 한 말들이 머릿속에 아른거려서 몇 번씩이나 말을 더듬거렸다. 그럴 때마다 텀블러에 담긴 물을 마시며 나름대로 당황한 티를 감추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수업을 끝낼 수 있었다.
“내일 모의고사도 잘 보고. 기말고사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힘내자.”
웃으며 돌아 나온 희주는 자꾸만 내려가려는 입꼬리에 힘을 주고 뛰다시피 교무실로 향했다. 평소처럼 제게 인사를 해 오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일일이 한 명씩 대꾸해 주기에는 마음이 너무나도 급했다. 무엇보다 방금 수업 도중 겪었던 것처럼 곤란한 질문을 받을까 봐서도 있었다.
쉬는 시간이 됐지만 교무실은 전국 학력 평가를 하루 앞둬서인지 학생의 출입이 드물어졌다. 학생들 앞에서보다 확연히 표정이 굳은 희주는 제자리로 돌아오자마자 급히 가방을 책상 위로 끌어 올리고는 허겁지겁 안을 뒤졌다. 사흘 동안 출퇴근하면서 넣고 빼기를 반복했던 교재와 참고서 등의 수업 자료들 사이까지 세세히 살폈지만.
“…….”
없었다.
분명 가방 바닥에서 굴러다니고 있어야 할 소취제가 보이지 않자 희주는 망연해져 의자에 털썩 앉았다. 바로 맞은편에 앉은 2반 담임교사가 파티션 위로 왜 그러냐는 눈짓을 보냈지만, 희주는 아무것도 말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 고개만 가로저었다.
희주는 책상 위에 턱을 괴면서 손바닥으로 하관을 가렸다. 일단 소취제의 행방이 궁금하다기보다, 페로몬의 흔적을 미처 처신하지 못한 아니, 하지 않은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이 스멀스멀 파도처럼 밀려왔다.
문득 제게서 알파 냄새가 난다던 아이의 말이 떠올랐다. 희주는 어지러운 속을 차분히 가라앉히려 애쓰며, 들쑥날쑥하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차근차근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아이가 말한 알파 냄새는 분명 강현우의 페로몬을 지칭하는 것일 테였다. 또 강현우와는 일요일 이후 아직까지 만난 적이 없으니 직전 이틀 동안, 월요일을 시작으로 공공연하게 퍼졌을 테고.
청소년 형질자 의료 지원 건 문제로 매달 확인한 것을 토대로 보면, 아까 5교시 때 들어간 반은 형질자 없이 오로지 베타로만 이루어진 반이 확실했다. 그럼 다른 반의 누군가가 먼저 맡았다는 건데…….
하지만 그동안 제가 가르치는 반들에는 빠짐없이 수업을 들어갔던 데다 하필 반마다 형질자들이 있어 어디가 근원인지 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교실과 교무실을 제외하고 학교 곳곳을 오며 가며 만났을 형질자들도 한둘이 아닐 터였다.
샤워를 자기 전에 한 번, 또 출근하기 전에도 한 번, 총 두 번씩이나 했는데 페로몬이 남아 있을 수가 있나. 그만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미치겠네.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가 입술을 가린 손바닥에 가로막혔다. 아이들의 반응을 떠올리면 얼굴을 붉힐 만한 소문까지 난 건 아닌 듯한데, 그건 직접 파헤쳐 봐야 알 수 있는 문제였다. 딱 남자 친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작은 소동에서 끝나기만을 바라야 했다.
“권 선생. 다음 교시 수업 없지?”
바람은 단 5초도 가지 않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학년 부장이 대놓고 탐탁잖은 표정을 지으며 희주를 호출했다. 다음 수업이 없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거면서 떠보는 형식의 어투로 묻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번 호출이 제 소문과 연관되어 있음을 직감한 희주는 순순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깐 나 좀 봅시다.”
두 사람은 교무실 한편에 있는 상담실에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학생과 학부모들과의 상담을 위해 가벽을 세워 만들어 둔 간이 상담실이었는데, 희주는 이곳에서 학년 부장과 이런 구도로 앉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희주는 시선을 내리깔고 앞에 놓인 컵을 내려다보았다. 그냥 빨리 할 말만 하고 끝냈으면 좋겠는데, 학년 부장이 나름 면담 구색을 맞추겠답시고 나서는 바람에 두 사람 앞에는 각자의 취향대로 탄 커피가 한 잔씩 놓여 있었다. 학년 부장의 것은 다갈색의 믹스커피였고, 희주의 컵에 든 것은 새카만 아메리카노였다.
“권 선생 요즘 만나는 사람 있지?”
후루룩 소리를 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학년 부장이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꺼내 놓았다. 희주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대답해 줄 의무도, 가치도 없는 질문이라 재촉이 이어질지라도 입을 벙긋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애초에 대답을 들으려고 한 말이 아니었는지 학년 부장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선생님들도 다 사생활이 있는 거니까, 권 선생이 뭐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신경 쓸 일이 아니기는 한데.”
쩝. 입 안이 텁텁한지 학년 부장이 말을 하다 말고 입맛을 다셨다.
“그, 그, 페로몬인지 뭔지 하는 건 좀. 그거 좀 잘 좀 간수합시다. 예?”
어느새 학년 부장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어떤 경위로 입수한 정보인지는 모르겠지만, 학년 부장이 알고 있을 정도라면 진작 학교 전체에 퍼지고도 남았다는 소리였다.
별다른 대꾸도 없이 가만히 앉아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자, 학년 부장이 점차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나는 베타라서 그쪽들 사정이 어떤지는 잘은 모르겠지만, 이 학교에 형질자가 몇 없기는 해도 권 선생 혼자 형질자인 것도 아닌데 눈치는 좀 봐야 하지 않겠어? 듣자 하니 열성이라 어쩔 수 없다고는 하는데, 그거야 권 선생 사정이고. 아무리 그래도 학생들 입 통해서 내 귀에까지 들어올 정도로 처신 못 하고 다니는 건 좀 아니다 싶어.”
“……죄송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죄송하다는 말로 흐름을 끊어 놓아야 했다. 따지고 보면 제 잘못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솔직히 제가 한 일이라고는 남들 다 하는 연애를 한 것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희주가 순순히 죄송하다고 잘못을 인정하자 더 무어라 말을 하려던 학년 부장이 큼, 하고 크게 헛기침을 했다.
“그나마 여고라서 다행이지. 남고거나 어? 공학이기만 했어도 권 선생 사표 내야 됐을지도 몰라.”
맞는 말이었다. 학년 부장의 말대로 남학교거나 공학이었더라면 소문이 와전되는 방향은 걷잡을 수도 없이 엇나갔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걸 위로나 격려랍시고 들어야 하는지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 학교가 백영 그룹 산하 재단 학교인 건 권 선생도 잘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권 선생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에 따라서 백영 그룹이 욕도 먹고, 칭찬도 듣고 하는 거란 말이야. 또 괜히 불미스러운 소문이라도 퍼졌다가는 봐, 학부모들이 가만히 있겠어?”
학년 부장은 스스로가 교사인 만큼, 교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학부모들의 민원만큼이나 살 떨리는 것은 없었다.
한참 동안 설득인지 협박인지 모를 잡다한 말들을 늘어놓던 학년 부장은, 종이컵 바닥이 갈색 커피로 바짝 마를 때가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쯧쯧, 하고 혀를 차는 것을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나가서 바람이나 좀 쐬고 와요. 그, 몸에 묻은 페로몬은 바람으로도 좀 날아간다며.”
학년 부장은 희주를 위로해 주는 척하며 인심이라도 쓰는 듯이 잠깐의 외출을 권해 왔다. 그러면서 내심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으로 희주를 훑어보는 거였다.
“……네.”
굳이 말이 아니더라도 표정이나 시선 같은 비언어적 표현으로 화자의 심리를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듯하고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알겠다는 말밖에 없었다.
탁탁. 두꺼운 손이 어깨를 두드려 주고 떠났다. 희주는 양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손마디가 새하얘지도록 꽉 주먹 쥐었다. 기댈 데라고는 강현우밖에 없었다. 강현우가 보고 싶었다.
<러브 매칭> 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