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교무 회의 시간이 바뀌었단다. 택시에서 강현우와 통화를 할 적만 해도 그런 연락은 전혀 받지 못했는데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늦잠을 자 버린 터라 아침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난데없이 1교시로 당겨진 교무 회의를 앞둔 지금 희주는 완전히 어리둥절해져 넋이 나가기 직전이었다.
물론 회의 시간이야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바뀌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언질도 없이 갑작스럽게 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 커피 마시고 싶었는데. 커피는커녕 물 한 모금 마실 여유도 없이 부랴부랴 착석해야 했던 희주는 뒤늦게 자각한 갈증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 권 선생님 얼굴이 말이 아니네. 눈 밑에 까매요.”
한숨과 동시에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은편 자리에 앉은 중년의 여성이 목소리와 걸맞은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아, 어제 좀 늦게 자서요.”
“그래서 오늘 늦었구나.”
1반 담임을 맡고 있는 최미라 선생은 온화하고 친절한 성품 덕에 아이들은 물론이고 교사들 사이에서도 큰 신임을 얻고 있는 인물이었다.
“밥은 먹고 왔어요?”
“아……. 제가 원래 아침밥은 안 먹어서요.”
“으이구, 그럼 아침마다 빈속에 커피 마셨던 거예요? 그러다가 속 다 망가져.”
도라지차 싸 왔는데 한잔 마실래요? 최미라는 저가 더 안타깝다는 듯 연민 가득한 눈으로 희주를 바라보았다. 시간만 따지고 보면 지각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느지막이 교무실로 들어서는 희주를 보자마자 언짢은 듯 인상을 구겼던 누구와는 다르게 최미라의 언행에는 인정이 차고 넘쳤다.
이런 사람이 부장을 달아야 하는 건데. 희주는 남몰래 아쉬움을 삼켰다. 학교에서의 부장은 말이 부장이지 일반 회사에서처럼 승진 개념이 아니었기 때문에, 최미라 본인이 끝까지 원하지 않으면 희주의 바람이 이루어질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짧은 감사 인사와 함께 희주는 최미라가 나눠 준 도라지차로 감사히 목을 축였다. 직접 담은 청으로 탔다더니 시중의 것보다 단맛이 덜했다. 입 안에 텁텁함이 남을 정도로 쓴맛이었지만, 워낙 목을 많이 쓰는 직업이다 보니 목에 좋다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근데 오늘 뭐 일 있어요?”
쩝, 입맛을 다신 희주가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물었다. 원래대로라면 회의를 시작하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아직까지 학년 부장이 나타나지 않고 있어 소소하게 잡담할 여유가 허락되었다.
“왜 갑자기 회의를 지금 하자고 한 거래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큰일 날 뻔했어요, 저.”
투정에 가까운 말에 최미라를 포함한 다른 동료 교사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희주를 쳐다보았다.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 움찔거리자, 최미라가 별 희한한 말을 다 듣는다는 듯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어머. 권 선생님 잠 덜 깼어요? 우리 금요일에 다 같이 들었잖아요.”
“예? 뭐를…….”
“왜애, 밥 먹으면서. 기억 안 나요? 오늘부터 김하나 선생님 휴가잖아. 또 다음 학기 끝날 때까지는 육아 휴직 쓰고. 새로 오시는 선생님이 오늘부터 첫 출근이셔서, 인사도 할 겸 해서 회의 시간 당긴 거예요.”
“아…….”
희주는 작게 탄식하며 최미라가 말한 금요일을 떠올렸다. 밥 먹으면서 전달했다고 하니 점심시간을 말하는 듯한데, 이상하게 들은 기억이 없었다. 워낙 학년 부장이 헛소리만 해 대는 탓에 당연하게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려듣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아유, 근데 권 선생님이 깜빡할 만도 하지. 괜찮아요. 나도 평소대로 수업 들어갈 뻔한 거 저기 누구야, 김 선생님이 말해 줘서 알았어요. 다들 까먹고 있었을걸요?”
최미라는 마치 동의를 구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끄덕끄덕. 여럿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만약 학년 부장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노발대발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하루 유일의 자유 시간인 점심시간에 일 이야기를 꺼내는 것부터가 잘못되었다. 또 그런 걸 구두로 전달하는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적어도 전체 메시지로 한 번 더 전달해 줬어야지.
불평불만이 마음속에서부터 퐁퐁 샘솟았지만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봤자 좋을 게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의실 문이 드르륵, 하고 열렸다. 학년 부장 강덕수였다. 그는 모든 인원이 자리를 채우고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회의실로 나타났다.
“다 모였지요? 아이고, 내가 제일 마지막이네.”
면담이 있어서, 하며 변명을 늘어놓는 그에게서 짙은 담배 전 내가 느껴졌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들어오는 학년 부장의 뻔뻔함에 희주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물론 학년 부장의 시선이 닿기 전에 금방 표정을 감추었다.
“에, 금요일에 미리 말했다시피 이번 주는 조금 빨리 회의를 하게 됐는데……. 다들 아시다시피 김하나 선생님이 오늘부터 자리를 비우게 되셔서, 그 자리를 대신해 주실 선생님을 모시게 됐습니다.”
나이가 많고 연차가 높다는 이유만으로 늘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가며 애매하게 말을 하던 학년 부장이 오늘은 웬일로 존댓말로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그동안 회의하면서도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말투에, 희주는 저도 모르게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유세민 선생님, 들어오세요.”
누가 보면 이사장이라도 오는 줄 알겠네. 누가 선생님 아니랄까 봐, 같은 선생님을 소개하는 것마저도 전학생을 소개하는 듯한 흐름에 비식 웃음이 터졌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학년 부장이 일순 눈을 홉떴다.
이미 회의실로 넘어오기 전에 지각 때문에 밉보여서인지, 딱히 위협적이지 않은 눈초리였음에도 얼굴이 다 따가웠다. 희주는 모르는 척, 무표정하게 정돈한 얼굴로 어색하게 그 시선을 피했다.
아니, 피하려고 했다. 익숙한 그 페로몬만 아니었다면.
“큼, 늦게 합류한 만큼 다들 배려해 주셨으면 좋겠고……. 일단 자기소개 하시죠.”
“안녕하세요, 유세민입니다. 영어과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빠르게 지나간 자기소개 이후 짝짝,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가 환히 웃으며 박수를 쳤지만 희주는 홀로 뻣뻣하게 굳어 박수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 살면서 햇빛 한 줄기 쬐어 본 적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새하얀 피부. 그리고 섬세하기 짝이 없는 이목구비. 그리고 그림자처럼 뒤따르는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
“에……. 그래요. 유세민 선생님이시고, 김하나 선생님을 대신해서 5반 담임과 영어 교과목을 가르치실 예정입니다.”
김세민. 분명히 그 애였다.
“안녕하세요.”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을 때 남자는 순간 멈칫한 것도 같았지만, 이내 그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커다란 눈이 반으로 접히며 예쁜 눈웃음을 만들어 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겼다.
수줍은 미소임에도 얇은 입꼬리 옆으로 볼우물이 움푹 들어갔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그 위치였다.
“우리 유세민 선생님께서, 담임 업무는 또 처음이라고 하시니까…….”
무어라 거듭 설명을 이어 가는 학년 부장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희주는 부릅뜬 눈을 미처 깜빡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다소곳하게 서 있는 남자를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순서도 없이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기억들 때문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권 선생?”
무언가를 깊게 골몰하며 침음하던 학년 부장이 마침 잘됐다는 듯 표정을 달리했다. 앞을 향해 쏟아져 있던 시선들이 이번에는 희주에게로 향했다. 2학년부에 권씨 성을 가진 교사는 희주뿐이었으므로. 여러 쌍의 눈동자가 부담스럽게 저를 향하자 그제야 희주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 권 선생이 도와주면 되겠다. 마침 옆 반이기도 하고, 또 권 선생도 형질자니까.”
부름에 재깍 대답하지 않으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던 학년 부장이 오늘은 왜인지 아무런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모로 잘됐다며 마음대로 결론을 내리고는 “맞지?” 하고 희주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얼른 그러겠노라 대답하라고 종용하는 것 같았다.
학년 부장을 포함해 회의실에 자리한 모두가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희주는 어느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접착제라도 바른 양 입술이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깊게 눈을 감았다가 뜬 희주가 겨우 눈동자를 굴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직 대답도 하지 않았건만, 남자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인사하러 왔어, 희주야.”
며칠 전, 꿈의 끝자락에 서 있던 어린 김세민의 모습과 눈앞의 남자가 하나로 겹쳐졌다. 그리고 금방 들은 것과 비슷한, 그러나 훨씬 더 가느다란 어린애의 목소리가 귓가에 감겼다. 기억 속에 깊이 묻어 놨던 목소리였다.
* * *
교무 회의는 20분 만에 끝이 났다. 이따가 점심이나 같이 먹자며, 반기는 이 하나 없는 말로 회의를 끝낸 학년 부장이 도망치듯 회의실을 나선 이후 희주를 포함한 교사들은 2학년 교무실로 되돌아왔다.
학년 부장이 모두의 앞에서 공표해 준 덕에, 유세민 선생의 사수 역할은 고스란히 희주의 몫이 되었다. 왜 하필 자신인 건지 학년 부장의 결정이 영 탐탁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모르는 척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희주는 쌓여 있는 일들을 뒤로 한 채, 새끼 오리처럼 제게 바짝 붙어 따라오는 유세민 선생을 데리고 자리 안내를 해 주어야만 했다.
“이 자리 쓰시면 돼요.”
기존 5반 담임이었던 김하나 선생님의 자리는 지난주부터 공석이었다. 평소 아기자기한 소품을 좋아하기도 했고, 학생들의 선물 하나하나에 쉽게 감동하는 성격이었던 터라 김하나 선생의 자리는 늘 무언가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는데, 노트북도 없이 텅 빈 자리를 보니 그녀의 공백이 크게 느껴졌다.
“노트북은 학교에서 나눠 주는 건데, 그건 정보부에서 받으시면 돼요. 정보부는 본관 1층에 있고…….”
낮은 파티션을 하나 사이에 두고 가까이 붙어 있는 자리를 흘끔 쳐다본 희주는 정작 그 공백을 채워 줄 이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수업 관련된 건 같은 교과목 선생님께 여쭤보시면 되는데…….”
사실 저보다는 교과 지도 파트너 선생님의 도움을 받는 것이 더 빠를 터였다. 두루두루 친분이 있기는 해도, 아무래도 같은 교과목 선생님들끼리는 교류가 더 많은 편이니까.
희주는 앉아 있던 의자를 빙글 돌려 뒤를 살펴보았다. 매끈했던 미간에 얕은 골이 생겼다. 찾는 이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자리에 안 계시네요. 오시면 말씀드릴게요. 혹시 뭐 따로 더 궁금하신 거 있으세요?”
“선생님은 국어과세요?”
교과목이 다르다는 것을 핑계 삼아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건만 상황이 따라 주지 않았다. 하여 희주는 이쯤 해서 적당히 선을 그으려고 했지만, 여태 질문이나 대답도 없이 듣고만 있던 유세민이 입을 열었다.
그제야 희주는 고개를 들어 유세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서 노트북이나 가져오라는 뜻으로 정보부 위치를 가르쳐 줬음에도, 유세민은 의자를 빼고 앉아 있었다. 금방 선생님들 앞에서 기간제는 처음이라고 온갖 근심을 다 품은 얼굴을 하더니, 근심은커녕 어쩐지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한 태도였다.
“네. 그런데요.”
빼곡하게 꽂혀 있는 국어 과목 관련 참고서에 유세민의 시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국어 권희주’. 파티션 가장 위에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 명패에도 마치 흥미롭다는 듯한 시선이 가벼이 스쳤다.
“수학을 더 잘하는 줄 알았는데.”
“네?”
“어릴 때 툭하면 수학 문제 풀고 있었잖아요.”
커지는 눈을 본 유세민이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파티션 안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이 단숨에 훅 가까워졌다. 코끝이 맵게 아릴 만큼 달게 풍기는 페로몬에 희주가 저도 모르게 거리를 벌렸다.
“안 어울리게 왜 국어 선생을 하고 있어?”
“……기억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 기억을 못 하는 것보다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딱히 아는 척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말을 꺼내자, 유세민이 웃긴 소리를 듣는다는 듯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왜?”
“그냥. 눈도 마주쳤는데 별말 없길래.”
“아까는 좀 놀라서 그랬던 거지. 여기서 너 만날 줄은 정말 몰랐다니까? 그리고 다 보는 앞에서 어떻게 아는 척을 해?”
희주를 포함한 보육원 출신들은 선뜻 자신의 출신을 밝히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만약 그 자리에서 서로 아는 척을 했다면, 그 자리에 있는 이들로부터 어떻게 아는 사이냐는 질문을 피할 수 없을 테였다. 그런 상황을 피하고 싶었으리라고 생각한 희주가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아까 너 보니까 진짜 많이 안심되더라.”
입꼬리를 당겨 웃은 유세민이 털썩 등을 기대었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의자 등받이가 끼익, 하고 기울어졌다. 어쩐지 주객이 전도된 모습이었다. 희주는 제가 똑바로 닿는 시선을 피하는 척 텀블러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학기 초였으면 좀 달랐을 거야. 1학기 다 끝나 가는 마당에 담임을 하라고 하지 않나, 수업도 하라고 하지 않나……. 어제 자려고 누웠는데 잠도 안 오더라니까?”
유세민이 걱정한 바를 짐작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규 발령을 받아 연수를 받은 교사여도 걱정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닌데, 학기 중 갑작스럽게 합류되었으니 굴러온 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 사수랍시고 불린 사람이 저였으니, 큰 짐을 조금 덜어 낸 기분이었을 테다.
“시간표 받아 보니까 내가 앞반 가르치는 것 같던데. 그럼 1반부터 5반까지인 건가? 희주 넌 6반 담임이지?”
“아……. 응.”
“그럼 넌 뒷반 가르치는 거야?”
“응……. 10반까지.”
“아쉽다. 이왕 온 김에 네 제자들도 내가 가르치면 좋을 텐데.”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듯한 태도에 희주가 어색하게 웃었다. 정말 유세민이 아쉬워할지 사실 여부를 떠나서 희주는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러게.”
겨우 할 말을 골라 중얼거리자 유세민이 방긋 웃던 얼굴을 서서히 굳혔다. 유세민의 시선이 얼굴을 뱀처럼 훑었다. 어릴 적 그대로인 얼굴에는 반가움보다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히 묻어 있었다.
유세민의 눈썹이 꿈틀했다. 위아래로 큰 눈을 가늘게 뜨며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사이 저를 대하는 태도가 대단히 달라져 있었다. 유세민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더니, 투정을 부리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왜 더 말이 없어? 오랜만에 보는데 나 어떻게 지냈는지 안 궁금해?”
“아…….”
“오랜만에 봐서 어색한가? 어릴 땐 나 없으면 안 됐잖아, 너. 왜 이제 와서 낯가리는 거야?”
“내가… 내가 언제 너 없으면 안 될 것처럼 굴었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유세민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앉아 있던 의자 바퀴를 굴려 희주가 앉은 책상 영역 안으로 불쑥 침범해 들어갔다. 상체를 가까이 들이밀자 희주의 새까만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물론 나도 너 없으면 안 되기는 했지. 우리 둘끼리만 붙어 다녔던 거 기억 안 나?”
“그랬나…….”
“너무 옛날이라 기억 안 나나 보다. 하긴 우리도 벌써 서른이니까.”
기억이 안 날 리가.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전의 일도 아니었다.
처음 만났던 때만 해도 두 사람 모두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었으니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유세민과 친하게 지냈던 것은 사실이었다. 자원봉사자들 사이에서 두 아이가 친형제인 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보이게 된 데에는 유세민이 집착에 가깝게 희주를 따라다니는 이유가 컸다.
또래에 비해 체구가 작았던 유세민은 친구라기보다는 동생과도 같은 존재였다. 유세민이 슬그머니 제 곁으로 와 “나랑 같이 놀면 안 돼?” 하고 물을 때면, 함께 어울리던 친구를 뒤로하고 유세민과 어울려 놀고는 했다.
또 제가 하는 말을 유순하게 따르는 유세민이 좋기도 했다. 슬슬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제 것을 둘러싼 소유욕이 강해지던 시기였음에도 유세민은 늘 희주가 우선이었다.
워낙 붙어 다니는 일이 잦다 보니 제가 한 잘못이 아님에도 대신 혼나는 일들이 있기는 했지만, 딱히 크게 혼난 적도 없거니와 유세민과 함께 놀면 칭찬을 받는다거나 간식을 더 많이 받기도 하는 좋은 점이 더 많았기에 대수롭잖게 넘어가고는 했다.
“저 아줌마랑 아저씨, 김세민 데리러 온 거라는데?”
희주가 열성 오메가로의 발현 판정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열세 살 무렵, 희주보다 1년 정도 늦게 우성 오메가로 발현했던 유세민, 아니……. 김세민은 발현과 동시에 부유한 가정으로의 입양이 결정되었다.
김세민을 입양하기로 한 부부는 평소 시간이 날 때마다 봉사 활동을 하러 사랑의 집에 방문할 만큼 인정이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들이 울고 보챌 때마다 어떨 때는 웃는 얼굴로, 또 어떨 때는 안타깝다는 얼굴로 어르고 달래던 부부는 어느 순간부터 원장 수녀님을 향해 입양 이야기를 넌지시 꺼내기 시작했다.
처음 그들이 가슴으로 품은 아이는 김세민이 아니라 희주였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경계심이 강했던 아이였지만 부부는 꾸준히 사랑의 집을 찾아와 아이에게 애정을 보였고, 시간이 갈수록 희주도 그들을 향해 차차 마음을 열어 갔다.
걸음마도 채 떼지 못한 갓난아기들이 새로운 가정으로 한 가족의 일원이 되어 떠나는 모습을 보며, 어린 마음에 알게 모르게 부러워했던 모양이었다. 희주는 제 엄마 아빠가 되어 주겠다는 낯선 이들의 호의에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고, 그런 희주를 붙잡은 것이 김세민이었다.
“희주야. 입양 가기 싫다고 하면 안 돼? 너 가면 난 누구랑 놀아…….”
김세민은 그 커다란 눈으로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면서 몇 날 며칠을 내리 울었다. 조금만 울어도 눈가가 빨갛게 트곤 했던 김세민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눈물을 뽑았다. 너 없으면 안 된다고, 나랑 같이 있자고.
결국 그해 희주는 사랑의 집에 남기를 택했다. 끝까지 희주를 설득하려던 부부는 희주의 고집을 끝내 꺾지 못했다. 그 어려운 선택에 누구보다도 기뻐하던 김세민이었지만, 정작 사랑의 집을 먼저 떠난 사람은 김세민이었다.
김세민은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러 왔다면서, 상황 파악이 덜 되어 멍해진 희주를 구석으로 데려가 미안하다고 눈물을 흘렸다. 사실은 저와 형제가 되고 싶었다고, 아줌마와 아저씨에게 졸랐지만 그건 안 된다고 했다고.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저보다는 희주 네게 양보할 걸 그랬다며 눈물을 글썽이는 김세민을, 희주는 괜찮다며 꼭 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
“아, 너무 내 이야기만 했나? 너는?”
“……어?”
“너는 어떻게 지냈어?”
유세민이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흔들림 없이 두 눈을 빤히 응시하던 눈동자가 슬그머니 옆으로 비껴 흘렀다. 뭘 보는 거지? 어리둥절해진 희주가 유세민의 눈이 향한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김세민이 아니라 유세민이 될 거래. 아저씨가 유씨라서. 형이랑 누나들처럼 나도 유씨가 되는 거래.”
희주는 유세민이 제 명패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직도 권씨네?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없었지만, 비대칭으로 비뚤어진 입매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부터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댕댕 울려 퍼졌다. 매일같이 들어 익숙한 멜로디임에도 희주의 몸이 크게 흠칫 튀었다. 동시에 조잘조잘 말을 이어 가던 유세민 역시 입이 꾹 다물었다.
길지 않은 종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복도에서부터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려왔다. 한순간에 탁 터져 나온 소음의 일부가 교무실 가까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꽉 닫힌 교무실 문이 열리면서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그 틈을 타 희주는 재빠르게 책상을 밀고 일어났다. 문 쪽을 향했던 시선이 따라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렇지 않게 정돈한 얼굴 근육이 달달 떨렸다. 별개로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말을 차근히 입 밖으로 내뱉었다.
“저기, 유세민 선생님.”
“…….”
“개인적인 친분을 떠나서 여기는 직장이니까… 서로 불필요한 사적인 대화는 자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가벼운 탄식과 함께 유세민의 표정이 멍하니 퍼졌다. 무언가 골몰하듯 커다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뜬 유세민은 잘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원하신다면야.”
“…….”
“알겠습니다. 권희주 선생님.”
이내 벌떡 일어난 유세민은 노트북을 받으러 가야겠다면서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처음 보는 아이들에게도 능청스레 인사를 건네며 사라지자, 두 눈이 동그래진 몇 아이들이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제야 희주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희주와의 통화를 마치고 안 실장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른 강현우는 아무 알림도 뜨지 않은 휴대폰을 습관적으로 켜서 내려다보았다. 거의 메인 화면이나 다름없어진 메신저 대화 창에는 어제 잠들기 직전에 주고받았던 메시지가 쭉 쌓여 있었다. 온기 가득한 눈으로 화면을 훑던 강현우는 저 때문에 늦잠을 잤다고 투덜거리던 목소리가 생각나 숨처럼 가볍게 웃었다.
그 소리에 한창 스케줄을 포함해 여타 업무 보고를 올리던 안 실장이 하던 말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강현우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린 듯 휘어진 호선을 똑똑히 목도한 안 실장은 바짝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를 축 아래로 늘어뜨렸다. 지금까지 거의 숨도 쉬지 않고 떠들고 있던 것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휴대폰 뚫리겠습니다.”
조금 서운하다는 투로 안 실장이 중얼거렸다. 눈알이 빠질 것 같으면 인공 눈물을 넣고, 목이 아프면 목 캔디를 먹어 가며 열심히 일을 해 왔건만. 이런 제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 상사의 태도에 월요일 아침부터 제대로 전의를 잃었다.
일할 맛 안 나게 하네. 언제는 일할 맛이 났던 것은 아니지만, 대놓고 저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태도에 안 실장의 눈동자가 금세 공허해졌다.
강현우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안 실장을 힐끔 바라보았다. 휴대폰에서 시선을 뗌과 동시에 다정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무표정해진 얼굴에 안 실장은 더욱 서운함을 느꼈다.
“계속 말하세요. 왜 잘 말하다 멈춥니까?”
“상무님. 제가 한 말 다 듣고는 계셨습니까?”
“저 멀쩡히 귀 뚫려 있습니다.”
영 미덥지 않은 대답이었지만 상사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 했다. 그제야 휴대폰을 재킷 안주머니에 잘 갈무리해 넣는 강현우를 보며 안 실장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도로 탭을 들여다보는 척 몰래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지금 삐지기라도 한 겁니까?”
“아닙니다.”
“만약 그런 거라면 좀 징그러운데.”
“그런 거 정말 아닙니다.”
“그렇다고 치고.”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의미 없는 대화가 뚝 끊겼다. 먼저 내리는 강현우의 뒤를 따라 안 실장이 조금 풀어진 얼굴로 움직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따라 쭉 들어가자, 진작 출근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비서실 직원들이 하나둘 일어나 꾸벅꾸벅 인사를 건네 왔다. 늘 하던 것처럼 가벼운 묵례로 인사를 받아 준 강현우는 상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입고 있던 재킷부터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저, 상무님.”
왜인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서 있던 안 실장이 주저하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막 의자를 빼고 앉은 강현우가 왜 그러냐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할 말 있으면 하세요.”
그러고는 짧게 던졌던 시선을 금방 거두었다.
“올해도 백영 여고 방문은 생각 없으신 겁니까?”
안 실장은 들고 있던 태블릿의 맨 하단과 강현우의 얼굴을 조금 난감한 듯 번갈아 보았다. 테트리스라도 하듯 안 실장에 의해 기가 막히게 빈 자리를 찾아 들어간 예정표 밖으로 딱 하나, 자리를 잡지 못한 스케줄이 골치 아프게 남아 있었다.
평소 회의라거나 미팅 같은 웬만한 일정은 안 실장 선에서 적당히 정리되고는 했지만, 안 실장의 능력으로도 안 되는 것들이 간혹 한두 개씩 있기 마련이었다. 그중 하나가 학교 재단과 관련한 문제들이었다.
제조업을 시작으로 다양한 사업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백영 그룹은 학교와 장학 재단을 설립해 교육에도 큰 힘을 쏟고 있었다. 백영 여고가 속해 있는 백영 학원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3년 전 초대 이사장이었던 강 회장이 물러남에 따라 현재는 강현우가 이사장의 직임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강현우는 학교 재단에 큰 관심이 없었다. 처음 실무에 투입되기도 전부터 관심을 보여 오던 백화점과 면세점, 호텔, 리조트 사업 관련한 스케줄은 하나도 빠짐없이 응하면서, 학교 재단은 이사장 취임식에도 불참할 만큼 그 관심도가 0에 수렴했다.
“제 생각에는 이제 한 번 정도 가셔서 얼굴 비추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사장님이시니까요.”
“그거 어차피 다 아무런 쓸모도 없는 짓 아닙니까. 어차피 가 봤자 공부하느라 시간적 여유 없는 학생들 동원해서 때 빼고 광낼 게 뻔한데. 요즘 그렇게 학생들 부려 먹으면 욕먹습니다.”
“취임식도 생략하셨잖습니까…….”
“그게 뭐. 내가 교육에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취임식 해 봤자 뭐합니까. 학교 설립자는 따로 있고, 저는 운 좋게 이 집 사람으로 태어나서 물려받은 것밖에 없어요.”
강현우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안 실장님. 전에 분명히 말해 뒀었던 것 같은데요. 학교 법인에는 운영 관련한 최소한의 개입 그 이상으로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어떤 분야든 해 본 사람이 더 잘하는 법입니다. 내가 교육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냉정하기는. 안 실장은 문득 백영 학원 홈페이지에 올라가 있는 이사장 인사말을 떠올렸다. 인재 양성을 위해 낮은 곳에서 뒷바라지하겠다는 번지르르한 말은 전부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한 거짓말에 불과했다.
“지금 삐지기라도 한 겁니까?”
“아닙니다.”
“만약 그런 거라면 좀 징그러운데.”
“그런 거 정말 아닙니다.”
“그렇다고 치고.”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의미 없는 대화가 뚝 끊겼다. 먼저 내리는 강현우의 뒤를 따라 안 실장이 조금 풀어진 얼굴로 움직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따라 쭉 들어가자, 진작 출근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비서실 직원들이 하나둘 일어나 꾸벅꾸벅 인사를 건네 왔다. 늘 하던 것처럼 가벼운 묵례로 인사를 받아 준 강현우는 상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입고 있던 재킷부터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저, 상무님.”
왜인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서 있던 안 실장이 주저하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막 의자를 빼고 앉은 강현우가 왜 그러냐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할 말 있으면 하세요.”
그러고는 짧게 던졌던 시선을 금방 거두었다.
“올해도 백영 여고 방문은 생각 없으신 겁니까?”
안 실장은 들고 있던 태블릿의 맨 하단과 강현우의 얼굴을 조금 난감한 듯 번갈아 보았다. 테트리스라도 하듯 안 실장에 의해 기가 막히게 빈 자리를 찾아 들어간 예정표 밖으로 딱 하나, 자리를 잡지 못한 스케줄이 골치 아프게 남아 있었다.
평소 회의라거나 미팅 같은 웬만한 일정은 안 실장 선에서 적당히 정리되고는 했지만, 안 실장의 능력으로도 안 되는 것들이 간혹 한두 개씩 있기 마련이었다. 그중 하나가 학교 재단과 관련한 문제들이었다.
제조업을 시작으로 다양한 사업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백영 그룹은 학교와 장학 재단을 설립해 교육에도 큰 힘을 쏟고 있었다. 백영 여고가 속해 있는 백영 학원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3년 전 초대 이사장이었던 강 회장이 물러남에 따라 현재는 강현우가 이사장의 직임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강현우는 학교 재단에 큰 관심이 없었다. 처음 실무에 투입되기도 전부터 관심을 보여 오던 백화점과 면세점, 호텔, 리조트 사업 관련한 스케줄은 하나도 빠짐없이 응하면서, 학교 재단은 이사장 취임식에도 불참할 만큼 그 관심도가 0에 수렴했다.
“제 생각에는 이제 한 번 정도 가셔서 얼굴 비추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사장님이시니까요.”
“그거 어차피 다 아무런 쓸모도 없는 짓 아닙니까. 어차피 가 봤자 공부하느라 시간적 여유 없는 학생들 동원해서 때 빼고 광낼 게 뻔한데. 요즘 그렇게 학생들 부려 먹으면 욕먹습니다.”
“취임식도 생략하셨잖습니까…….”
“그게 뭐. 내가 교육에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취임식 해 봤자 뭐합니까. 학교 설립자는 따로 있고, 저는 운 좋게 이 집 사람으로 태어나서 물려받은 것밖에 없어요.”
강현우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안 실장님. 전에 분명히 말해 뒀었던 것 같은데요. 학교 법인에는 운영 관련한 최소한의 개입 그 이상으로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어떤 분야든 해 본 사람이 더 잘하는 법입니다. 내가 교육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냉정하기는. 안 실장은 문득 백영 학원 홈페이지에 올라가 있는 이사장 인사말을 떠올렸다. 인재 양성을 위해 낮은 곳에서 뒷바라지하겠다는 번지르르한 말은 전부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한 거짓말에 불과했다.
이번에도 거절하면 실망할 사람이 또 여럿 나오겠다 싶었다. 안 실장은 태블릿 화면을 켜, ‘백영 여고 방문’이라고 적어 둔 글자 위에 빨간펜을 주욱 그었다.
안 실장이 하는 걸 가만히 보던 강현우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나열하기는 했지만, 학교 이야기를 하다 보니 머릿속에 희주가 떠올랐다. 제가 아무리 교육에 큰 관심이 없다고는 하나, 애인이 선생님이다 보니 금방 제가 한 말들이 마음에 걸렸다.
묵직한 한숨을 뱉은 강현우가 막 뒤돌아 나가려는 안 실장을 붙잡았다. 강현우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안 실장의 손으로 눈짓했다.
“빈 날짜에 방문 일정 적당히 넣으세요. 대신 쓸데없이 학생들 부려서 청소하는 그런 쓸데없는 짓을 벌이지 말라고 하세요. 요란한 거 딱 질색입니다.”
“……정말 가실 겁니까?”
“언제는 제발 갔으면 좋겠다면서요.”
그렇게까지는 말 안 했는데……. 몇 초 사이에 웬 심경의 변화인가 싶었지만 안 실장은 깊게 캐묻지 않고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전에 부탁한 배랑 도라지는…….”
생각난 김에 물으려던 강현우가 일순 말을 멈추었다. 밖에서 들리는 소음에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던 두 사람이 닫혀 있는 문을 쳐다보았다. 왜인지 익숙한 목소리라고 생각이 될 즈음, 벌컥 문이 열리고 그 틈으로 익숙한 얼굴들이 밀려 들어왔다.
“내가 내 아들 얼굴 보러 왔다는데 왜 길을 막는 거야!”
들어가시면 안 된다면서 당혹감에 젖어 있는 비서실 직원들의 얼굴 사이로, 비교적 편한 복장을 한 채 분노로 새빨개진 중년 남성의 얼굴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상무님. 절차상 상무님께 먼저 말씀 드린 다음 안내해 드려야 한다고 했는데 관장님께서…….”
“절차? 내가 누군지 뻔히 알면서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릴!”
남자는 비서실 직원의 말에 더 화가 난 듯 연신 씨근거렸다. 호통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쪼그라든 비서실 직원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강현우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아버지?”
“어, 그래. 오랜만에 본다, 아들.”
강현우가 의아해하는 투로 입을 엶과 동시에 불쾌한 듯 일그러져 있던 윤 관장의 얼굴이 웃음으로 밝게 물들었다. 휘어지는 눈매가 강현우의 것과 제법 닮아 있었다.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 이렇게 기별도 없이.”
강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휙 손짓했다. 조금 당황해 서 있던 안 실장이 이내 직원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방금 전만 해도 소음이 쩌렁쩌렁 울리던 실내에 차분함이 감겼다.
“아들 얼굴 보기가 어렵다 보니까 직접 오는 수밖에.”
“전화하시지 않고요.”
“정 없게. 멀리 사는 것도 아닌데 얼굴을 봐야지.”
단숨에 가까이 다가온 윤 관장은 못 본 사이 얼굴이 많이 상한 것 같다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아, 이런 분이셨지. 비서실 직원들을 상대로 언성을 높이던 모습에서도 왜인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진다 했더니, 윤 관장은 뉴욕의 아파트먼트에서도 똑같은 일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본가의 제 방에서 혼자 우신다고 했었다. 오죽하면 강 회장이 직접 저를 찾아와 아버지 좀 챙기라며 당부까지 하고 갔겠나. 강현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불쑥불쑥 찾아오시면 난감합니다. 차라리 저를 집으로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너 바쁜 거 아는데 이리저리 오라 가라고 할 수도 없잖아.”
“그게 지금 이러고 있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뭐 좀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됐다, 됐어. 금방 갈 거야.”
커피나 차라도 한 잔 내오라고 호출하려던 강현우는 윤 관장의 만류에 손을 거두고 소파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이사 간 집은 괜찮고? 뭐,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네가 알아서 잘 살고 있겠거니 싶은데…….”
“네. 뭐, 사람 사는 곳이 다 거기서 거기죠.”
“그렇지……. 혼자 사니까 어떤가 싶네. 뭐, 외국에서도 몇 년씩 혼자 살기도 했지만 그때랑 지금이랑은 상황이 다르니까. 혼자 있으면 심심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음료를 마다하며 금방 갈 거라던 윤 관장은 상체를 앞으로 길게 빼고 앉아서는 강현우에게 이것저것 물어 댔다. 원래부터 저나 강지우에게 귀찮을 만큼 지대한 관심을 쏟아 오던 윤 관장이었지만, 오늘따라 하는 말마다 횡설수설 늘어짐이 느껴졌다.
강현우는 윤 관장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윤 관장은 그런 강현우의 눈을 당최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눈에 띄게 어색한 웃음만 샐샐 흘려 댔다. 묻고 싶은 건 따로 있다는 걸 단번에 파악한 강현우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려는 말씀이 뭔데요.”
“어엉? 그냐앙, 아들이 잘 살고 있나 궁금해서.”
“아닌 거 알고 있어요. 거짓말하실 때마다 딱 티가 나서.”
윤 관장의 눈 깜빡임이 배는 더 빨라졌다. 오랜 기간 사업을 한 탓에 표정을 감추는 데 능한 강 회장과는 다르게, 윤 관장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에서부터 늘 티가 나고는 했다.
선뜻 말해 보라며 판을 깔아 주자, 아들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던 윤 관장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입꼬리가 마구 씰룩거리고, 볼의 둔덕이 쉴 새 없이 위아래로 솟았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순식간에 붉어진 얼굴을 한 윤 관장이 엉덩이를 앞으로 더 빼고 앉았다. 단둘밖에 없는 공간인데도 누가 듣기라도 할까, 손으로 입가를 반쯤 가린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큼, 저… 요즘 만나는 사람이 있다던데.”
“……아.”
“혹시, 아비 몰래 살림이라도 차렸냐?”
윤 관장의 입에서 나온 살림이라는 단어에 강현우는 조금 멍해졌다. 도리어 저가 다 민망하고 쑥스럽다는 듯 얼굴까지 발그레해져서는, 눈 대신 입술만 흘긋거리는 시선도 당혹스러웠다. 윤 관장이 마다했더라도 제가 마실 음료는 들여오라고 할 걸 그랬다. 저도 모르게 마실 걸 찾던 강현우는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거둬들였다.
“누굽니까?”
“어엉?”
“누구 입에서 들었는지 묻는 겁니다. 어머니인지 강지우인지. 강지우일 것 같긴 한데 아버지 입 통해서 직접 듣고 싶어서요.”
“그 나이 먹도록 동생이랑 싸우고 싶어? 듣자 하니 도로 한복판에 애를 내동댕이쳤다고 하던데. 서울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데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그렇게 대하니?”
강지우군. 대놓고 알려 주는 것과 다름없는 윤 관장의 말에 소문의 근원을 알아챈 강현우는 어쩐지 두통이 이는 듯해 관자놀이를 꾹 눌러 문질렀다. 강지우와 그날 우연히 마주쳤을 때, 조만간 윤 관장의 귀에도 들어가리라 짐작 못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회사까지 찾아와서 물어볼 줄은 몰랐다.
“그냥 평범하게 만나고 있는 것뿐입니다.”
“갑자기 집 구해서 나간 거랑은 상관없이?”
“만나는 사람 있다는 말이 어떻게 그런 말로까지 번집니까…….”
“부모한테 말도 없이 동생한테만 슬쩍 말했길래 뭐, 말 못 할 사고라도 쳤나 했지…….”
“아버지 어디 가서 그런 말 꺼냈다가는 몰매 맞습니다.”
“아버지를 아주 몰상식한 사람으로 만드네.”
윤 관장은 어림짐작했던 ‘부모에게는 말 못 할 사고’는 없었다는 데 조금 실망한 듯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강지우를 통해 들었던 강현우의 연애에 대한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받은 것에는 부푼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사랑은 예술이고, 예술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윤 관장은 낭만을 좋아했다.
“집에는 언제 데려올 거냐?”
윤 관장은 흥분해 콧김을 내뿜었다. 강지우에게서 강현우의 상대 오메가의 대략적인 것들을 듣기는 했지만, 직접 듣고 싶어 안달이었다. 함께 차나 기울이며 어떻게 둘이 만나 연애를 하게 되었는지, 제 아들의 어떤 부분이 좋아서 만나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다.
이대로 두면 칼럼이라도 쓸 기세에, 강현우는 단호히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부터 부담 주고 싶지 않습니다.”
잠깐 윤 관장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지나 있는 것을 확인한 강현우는 책상 앞으로 가 수화기를 들었다.
“관장님 나가신다니까 배웅 좀 해 드리세요.”
“아니, 잠깐. 못 마신 커피나 한잔 마시고 가고 싶은데!”
“다실 예약해 드릴 테니까 어머니랑 데이트나 하세요.”
강현우는 문이 열리는 것을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끝까지 엉덩이를 붙이고 버틸 심산으로 굴던 윤 관장이 마지못해 상무실을 떠난 후, 강현우는 안 실장을 호출해 오후 일정을 조정하라 지시했다.
“……또요?”
“딱히 일 없으면 6시에 바로 퇴근하세요.”
아니, 그건 당연한 거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앵무새처럼 반복 재생되는 말에 안 실장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고개를 앞으로 쭉 뺐다. 거의 하루 걸러 하루마다 스케줄 조정을 요구하다니. 한 번이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이쯤 되면 거의 만행이지 않나 싶다.
털레털레 제자리로 돌아온 안 실장은 모니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일정 중 무엇을 빼고 미룰지 고민해야 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득했다.
* * *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월요일은 다른 날에 비해 수업도 많고, 주말 동안 밀린 소속 부서 업무로 바쁘게 흘러가는 날이었다. 종례를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와 아직 처리하지 못한 서류 작업을 붙잡고 있던 희주는 창밖으로 땅거미가 지기 시작할 무렵이 되어서야 뻑뻑한 눈을 비비며 자리를 정돈했다.
진작 퇴근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라 그런지 교무실에 남아 있는 교사들은 몇 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 찰나, 희주의 시선이 바로 옆자리로 가 멈추었다. 유세민의 자리였다.
아침 교무 회의 전만 해도 텅 비어 있던 책상은 새 주인이 생겼다는 것을 보여 주듯 온갖 참고서와 메모들로 가득했다. 희주가 일러 준 대로 정보부에서 받아 온 노트북은 전원이 꺼진 채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파티션 위에는 새로 인쇄해 코팅한 종이 명패가 빳빳하게 걸려 있었다.
영어 유세민.
익숙하다고 해야 할지 낯설다 해야 할지 모를 이름 석 자를 가만히 응시하던 희주는 이내 만들어 낸 미소를 입에 걸고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탁탁탁.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기이할 정도로 크게 복도를 울렸다. 학생들 대부분이 하교를 한 데다, 남아 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방과 후 수업은 기존 교실이 아닌 따로 마련된 전용 교실에서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학교는 평소보다 배는 더 조용한 편이었다.
마주치는 이 하나 없이 교문을 빠져나온 희주는 늘 그랬듯 가방을 열어 이어폰을 찾았다. 그런데 가방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어야 할 이어폰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뒤져도 보이지 않아 희주는 가던 길을 멈춰서 한 번 더 가방 안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침대 옆 충전기에 꽂아 뒀던 사실이 생각났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챙겨 나온다는 것을 깜빡 잊은 모양이었다.
“하아…….”
진짜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거지. 한숨을 푹 내쉰 희주는 손을 거두고 가방을 고쳐맸다. 늦잠 한번 잤다고 하루가 이렇게 내내 꼬일 줄이야. 다시 집으로 향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이 피로로 인해 묵직했다.
집중할 거리가 없으니 텅 빈 머릿속에 상념들이 들이닥쳤다. 상념이라고 해 봤자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 보는 것이 전부이기는 했다. 퇴근한 직장인들이 으레 할 법한 즐거운 상상과 당장 내일 처리해야 할 일들까지, 평소라면 딱히 하지도 않을 생각들을 마무리 짓고 나서야 머릿속 가장 밑바닥에서 부유하던 유세민의 모습이 두둥실 떠올랐다.
십여 년이 지난 후 만난 유세민은, 제가 기억하고 있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성장기를 거치며 골격이 조금 커진 것을 제외하면 자원봉사자들이 인형 같다 칭찬하던 외모는 그대로였다.
우성 오메가임을 알 수 있게 하는 페로몬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외모는 그대로인데 페로몬은 조금 달라진 것 같기도 했다. 몇 번의 히트 사이클을 거치면서 보다 더 매력적으로 변모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희주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2학년부 교무실에 형질자라고는 유세민을 제외하고 저뿐이었으니, 유세민이 본능적으로 뿌렸을 우성 오메가 페로몬을 느낀 사람 역시 저밖에 없었을 터였다.
“죄송합니다, 수녀님. 아무래도 입양은 어려울 것 같아요. 몰랐는데 아이가 열성이라고…….”
제 양부모가 될 뻔한 사람들이 유세민을 택했던 이유도, 제가 열성이기 때문이었음을 또 한 번 뼈저리게 느낀 셈이었다.
잠깐 멈추어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면서 희주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뻐근한 목을 좌우로 돌렸다. 지그시 감은 눈도 오랫동안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던 탓인지 평소와는 다르게 뻑뻑하게 느껴졌다. 일 때문에 피곤한 거야 당연한 거고, 하루 종일 유세민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더니 여간 스트레스를 받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긴장이라도 한 걸까. 혹시 유세민과 비교가 될까 봐.
문득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희주의 표정이 급속도로 안 좋아졌다.
사적인 대화를 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제 부탁은, 기실 유세민과 함께 있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저는 열성인데 반해 유세민은 우성이니까. 차라리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면 비교를 덜 당할까 싶었다.
다행히 유세민은 제 요청을 순순히 받아들였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역시 저와 아는 척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 듯해 보였다. 그러나 여태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
유세민이 잘 알아들었을까. 오늘은 아무 일 없이 넘어갔지만 실상 두 사람 모두 사적인 대화를 나눌 틈도 없이 바쁜 날이어서 판단하기 어려운 감이 있었다. 희주는 희주대로 할 일이 많아 바빴고, 유세민 유세민대로 급하게 학기 중에 투입된 신규 교사답게 낯선 업무에 적응하느라 바빴다.
대학생 때도 몇 번 안 해 본 것이 연강이건만, 월요일 시간표를 말도 안 되게 짜 놓은 수업계 선생님들을 또 한 번 원망하며 여러 교실과 교무실을 오가던 희주의 눈에 띈 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고 있는 유세민이었다.
듣자 하니 진짜 첫 출근은 오늘이 아니라 금요일이었다던데. 주말 동안 수업 준비할 여유가 있었을 텐데도 정신 없어 보이는 모습은 희주가 봐도 조금 안쓰럽기는 했다. 하지만 유세민은 희주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사적인 대화만 자제하라고 했지, 업무 관련한 질문은 해도 상관없었는데 말이다. 뭐, 본인이 원치 않다는데 굳이 나서서 오지랖을 부릴 이유는 없었다.
그러던 유세민이 아는 체를 해 온 건 점심시간이었다.
“희주 쌤, 저 여기 앉아도 돼요?”
먼저 점심을 같이하자고 제안했던 학년 부장이 뜬금없이 교장실 호출을 받아 빠진 사이, 평소대로 같은 2학년부 교사들과 식사를 하던 희주에게 다가온 유세민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눈과 귀가 널린 마당에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지못해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이자 유세민은 선물 받은 아이처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런 유세민을 둘러싼 교사들은 끝없는 질문들을 쏟아 냈다. 유세민은 불편한 기색 없이 방긋방긋 웃으며 질문에 잘만 답을 했다. 그러면서도 먼저 다른 이에게 무언가를 묻는다거나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흘려 말하는 일은 없었다. 그 자리에서 불편한 사람은 희주 저뿐인 듯했다.
“권 선생님은 뭐 궁금한 거 없어? 둘이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이번 기회에 좀 친해져 봐 봐.”
“에이. 내가 보기엔 두 분 이미 친해진 것 같은데요, 뭘.”
“아, 세민 쌤도 형질자라면서요. 어우, 근데 부장 쌤은 그런 걸 뭘 자기 입으로 말하고 그러는지 몰라. 나였으면 기분 나빴을 것 같아요. 안 그래요, 권 쌤?”
“아뇨, 저는… 아, 저 행정실에 일이 있어서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분명 악의는 없었겠지만, 결국 끝까지 견디지 못한 희주는 없는 볼일을 만들어 황급히 자리를 떠야만 했다.
“김세민……. 유세민……. 김세민.”
희주는 시선을 신발 앞코에 고정한 채, 익숙한 이름과 낯선 이름을 한 번씩 중얼거렸다.
세상 참 좁네. 오며 가며 마주치는 일도 흔치 않은데. 다른 곳도 아니고 직장에서, 그것도 동료로 만나게 될 줄이야.
이만하면 반가울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텅 비어 있었다. 그동안 살아온 세월에 비하면 짧디짧은 세월이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성장한 사이임에도 반갑다는 생각은 일절 들지 않았다. 그냥 되도록 아는 척하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뿐이었다.
지이잉, 지이잉. 금방 초록 불로 바뀌는 신호를 보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있는지도 모르고 있던 휴대폰이 주머니 안에서 진동했다. 휴대폰을 꺼내어 액정에 뜨는 이름을 확인한 희주는 두 눈을 동그랗게 키운 채로 얼른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신호음 세 번 갈 동안에 안 받으면 바로 끊으려고 했는데. 두 번 만에 받아서 다행이네요.
다소 황급하게 전화를 받자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넘어왔다. 강현우였다. 이제는 목소리만 들어도 상대의 표정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현우 씨!”
입가에 번지는 희미한 웃음을 참지 못하고 희주가 웃음을 터트리자, 수화기 너머의 남자도 가볍게 따라 웃었다.
“세 번은 너무 정 없지 않아요? 안 받으면 받을 때까지 걸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5시면 퇴근한다는 사람이 6시가 넘어가는데도 연락이 없길래요. 혹시 내 존재를 까먹었나 했죠.
“아, 시간이 벌써…….”
―몇 시인 줄도 몰랐나 보네.
아. 희주가 입술 새로 침음에 가까운 탄성을 흘렸다. 퇴근이 늦어질 것 같다는 연락을 남겨 놓아야지 생각했던 것이 지금에야 막 떠오른 까닭이었다.
그새 몇 초 남지 않은 신호를 흘깃 바라보며 급히 길을 건너자, 뜀박질을 하는 숨소리를 들은 강현우가 물었다.
―전화 받는 거 보니까 학교는 아닌 것 같은데. 퇴근했어요?
“아, 네에. 학교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어요.”
―퇴근했는데 목소리가 왜 그러지? 안 신나요?
“힘들어서요. 얼른 집 가서 씻고 눕고 싶어서…….”
―어디쯤인데요?
“아……. 다 왔어요. 앞이에요.”
단순히 월요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강현우는 힘들고 피곤하다는 희주의 말에도 깊게 캐묻지 않았다. 지척에 보이는 오피스텔을 힐끗 올려다본 희주가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밥은요.
“집 가서 먹으려고요. 현우 씨는요? 퇴근했어요?”
―했죠, 아까. 저녁은 아직이고.
휴대폰을 다른 손으로 바꿔 드느라 희주의 시선이 잠시 아래로 미끄러졌다. 조금 과장해서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거리였다.
등에 멘 가방을 다시 한번 추스르며 오피스텔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데, 아래를 보고 있는 희주의 시야에 웬 기다란 그림자 하나가 들어왔다.
“지금 집 아니에요?”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거슬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작게 소음이 들려왔다. 확실한 건 실내는 아니라는 점 정도. 미심쩍게 물으며 계속해서 걷는데,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시야에서 비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제 갈 길을 가로막을 것 같아 피할 생각으로 걸음을 비틀었다.
―아직 집은 아니고.
어쩐지 친숙한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옴과 동시에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오는 길에 어디 좀 들렀다가 오느라.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린 희주는 제 앞에 있는 상대를 알아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저와 똑같이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대고 통화하고 있던 남자가 금방 제가 던진 물음에 답을 했다. 희주가 보고 있지 않았던 때부터 계속 그를 응시하고 있었는지, 강현우는 희주와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희주 씨랑 먹으려고 초밥 사 왔는데. 먹고 바로 쫓아낼 건 아니죠?”
강현우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들고 있지 않은 다른 손에는 그의 말마따나 흰색 쇼핑백 하나가 들려 있었다. 쇼핑백을 한 번, 강현우의 얼굴을 한 번씩 번갈아 본 희주는 내릴 생각도 못 하고 있던 휴대폰을 뒤늦게 내렸다.
“희주 씨도 나 집에 보내기 싫어했으면 좋겠네.”
뻔뻔한 요구에 희주가 헛웃음만 픽픽 흘렸다. 못 살겠다, 정말. 하루 종일 저를 짓누르던 무게가 한순간에 싹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희주는 강현우의 곁을 지나쳐 먼저 건물 안쪽으로 성큼 들어갔다.
“잔말 말고 따라와요.”
* * *
다음 날, 강현우가 학교 근처까지 차로 데려다준 덕분에 지각은커녕 평소보다 훨씬 여유롭게 출근할 수 있었다.
교장실 호출로 인해 점심 회동을 가지는 데 실패한 강덕수 학년 부장은 이날 바로 급식실에서의 점심 회식을 주도했다. 그것도 매일 가는 급식실에서 말이다. 점심 ‘회식’이면 밖에 나가서 사 먹지, 급식실이 웬 말인가 싶다. 메뉴가 무엇이 되었든 외부 음식점에서의 회식이라면 소중한 외출을 상신할 생각도 있었는데 말이다.
신규 교사도 있겠다, 학년 부장이 어떤 참견을 조언이랍시고 나불거릴지 안 봐도 뻔했지만 안타깝게도 빠질 핑계가 없었다. 싫은 티를 팍팍 내며, 울며 겨자 먹기로 교사들 틈에 섞여 급식실로 향한 희주는 그나마 학년 부장과 최대한 먼 곳에 자리를 잡는 데 성공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제 미래를 알 리가 없는 유세민은 뭣도 모르고 학년 부장과 마주 보는 자리에 식판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학년 부장의 주둥이에 불을 지핀 주제는 다름 아닌 희주, 저 자신이었다.
“음, 맞아.”
식사 맛있게 하시라는 말들이 오가고, 적당한 말소리와 함께 쇠숟가락이 식판에 부딪히는 소리로 주변이 시끄러워질 무렵이었다. 밥 한 술을 크게 떠먹은 학년 부장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수저로 허공을 휘저었다.
입에 들어갔던 걸로 저러고 싶나. 옆을 힐끔 쳐다본 희주는 질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설렁설렁 흔들었다. 제대로 보면 입맛이 뚝 떨어질 게 분명했다.
평소 여기저기 참견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상, 보나 마나 참지 못하고 그 망할 주둥이를 열어 유세민을 괴롭힐 것이 뻔했다. 신규에다가 아직 미혼이기까지 한 유세민은, 학년 부장의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불쌍하긴 해도 괜히 나서서 좋을 건 없었다. 희주는 이를 방패 삼아 최대한 조용히 밥만 먹다가 일어날 생각이었다.
“나 권 선생한테 뭐 하나 물어볼 게 있었는데.”
신경 쓰지 않고 밥이나 계속 먹으려는데, 학년 부장이 입 안에 들어 있는 음식물을 다 삼키지도 않은 채 웅얼거리는 발음으로 희주를 찾았다. 교사들의 시선이 전부 희주에게로 향했다. 유세민 역시 밥을 먹다 말고 순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았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희주가 얼떨떨한 얼굴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속내가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을 지었지만 학년 부장은 이를 보지 못한 듯했다.
“네?”
“그, 이번에 체험 학습 가는 거 말이야.”
“체험 학습이요?”
뜬금없는 말에 어리둥절해진 희주가 되물었다. 인생 선배라는 역할에 취해 내키지 않는 참견으로 입맛과 정을 한꺼번에 떨어뜨리고는 했던 학년 부장이 이렇게 일에 관련된 건설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또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물론 밥 먹을 때 일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잠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희주를 보던 학년 부장이 “아, 왜. 학평 끝나고 가기로 한 거” 하고 건성건성 입을 열었다. 되묻는 태도만 보고 제 말을 못 알아들었거나 정신을 딴 데 둔 것이라 여긴 듯한데, 사실 그것보다는 상황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가 컸다.
일단 학년 부장이 말하는 체험 학습은 6월 모의고사라고들 하는 학력 평가가 끝나는 주에 잡혀 있는 행사였다. 말이 체험 학습이지, 학교 근처 대공원을 돌아다니며 환경 미화 봉사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여 체험 학습은 교무 회의에서도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는 안건도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굳이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것도 희주만 지목해서 말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학년 부장은 상체를 조금 더 앞으로 숙이면서까지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을 쉼 없이 늘어놓았다.
“매번 공원 가서 쓰레기만 줍고 오는 것도 좀 그렇잖아. 그래서 이번에는 좀 다르게 가 보는 게 어떤가 싶어서. 내가 먼저 알아보기는 했는데, 이것도 무턱대고 갈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 뭐 따로 날짜랑 시간 잡아서 예약하고 가야 된다고 한다더라?”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다른 교사들도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학년 부장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비단 저뿐만은 아닌 듯했다.
“선생님. 따로 알아보신 데라도 있으신 거예요?”
잠자코 있던 최미라가 나긋한 투로 물었다. 자연스럽게 최미라를 향했던 시선들이 미리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학년 부장에게로 쏟아졌다. 익숙한 것을 좋아하고 현실에 안주하기를 좋아하면서 변화와 혁신과는 거리가 먼 학년 부장이 저리 나서니, 궁금하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헛소리가 나올까 봐 다들 불안해하는 눈빛이었다.
시선이 집중되자 학년 부장은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퉁퉁한 몸을 있는 대로 펴고 으스대는 꼴이 볼썽사나웠다.
도대체 어디를 알아 왔길래. 딱히 기대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희주가 고개를 앞으로 기울였다.
“권 선생 아는 고아원 하나 있다면서?”
얼른 말하고 싶어 죽겠다는 듯 연신 달싹이던 입술이 벌어지며 여상한 목소리를 냈다. 동시에 희주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제가요?”
희주는 애써 차분하게 물었다.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여겼는데 테이블 밑으로 내린 두 손이 미세하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차게 식은 손가락 끝을 필사적으로 부여잡은 희주가 입술을 꾹 감쳐물었다. 마른침이 꾸역꾸역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어떻게 알았지?’
텅 빈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만 떠올랐다.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겠다는 둥 가족들이 좋아하겠다는 둥, 그동안 숱하게 들어 온 말들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웃음으로 무마할 뿐 그렇다 한 답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시설 출신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서라기보다는,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돌아오는 동정의 눈빛이 싫어서였다. 저 스스로 치부라고 여기지 않아도, 사회는 이미 그것을 치부로 여기고 있었으므로.
답지 않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학년 부장이 마냥 좋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다른 교사들이 어떤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을지는 감히 확인할 수조차 없었다. 거의 노려보다시피 학년 부장을 응시하던 희주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흐른 건, 몇 초 되지 않는 침묵을 깬 타인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희주 쌤이 말하기 부끄러우신가 봐요.”
다른 교사들과 함께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유세민이 사르르 웃으며 말했다. 반대로 희주는 잔뜩 굳은 채 시선만 옆으로 굴려 그런 유세민을 마주 볼 뿐이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유세민은 그 커다란 눈을 더 깊게 휘며 웃었다. 그 미소가 무슨 뜻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딱 한 가지 사실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죄송해요, 쌤. 제가 괜히 말했나 봐요.”
죄송하다는 말과는 달리 유세민은 샐샐 웃는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여러 생각들이 교차되던 머릿속이 순간 얼어붙었다. 도통 저의라고는 알 수 없는 유세민의 행동에 희주가 표정을 가다듬을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있자, 평소 눈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학년 부장이 와악 하는 웃음을 터트리며 불쑥 끼어들었다.
“괜히 말했기는? 덕분에 좋은 기회 잡았지, 뭘. 권 선생은 진작 말 좀 하지 그랬어. 유 선생이 말 안 했으면 또 공원 가서 꽁초 줍게 만들 뻔했네.”
“요즘엔 연예인들도 봉사하고 기부하는 거 다 몰래몰래 하는데요, 뭘.”
“그러는 유 선생은? 몰래 하던 걸 나한테는 왜 말했대?”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거 아닌데…….”
농담이에요, 농담. 학년 부장이 연달아 소리 내어 웃었다. 멀리서 봐도 기특해 죽겠다는 눈이었다.
이게 도통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마치 웃으라고 강요하기라도 하듯, 학년 부장이 먼 거리도 아랑곳없이 희주를 바라보며 길게 웃었다. 창백해진 안색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슬슬 눈치를 살피며 희주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권 선생. 유 선생이랑 거기서 봉사하다가 친해졌다면서? 일하느라 바쁠 텐데 봉사는 또 언제 다닌 거야? 두 사람 참 대단하다, 대단해.”
봉사? 봉사라는 단어에 희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야? 두 분 원래 아는 사이였어요?”
교사들의 시선이 희주와 유세민을 번갈아 오갔다.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는 희주 대신 유세민이 입을 열었다.
“서울에 성당 연계된 보육원이 하나 있는데요. 희주 쌤이랑은 거기서 종종 봉사하면서 뵀거든요. 이렇게 만날 줄은 저도 정말 몰랐는데…….”
“근데 왜 서로 아는 척을 안 했대? 뭐야, 두 분이서만 비밀 만들기 있어요?”
“에이, 비밀이라니요. 원래 아는 사이기는 했어도 엄연한 직장 선밴데…….”
“어머. 선배가 어디 있어. 똑같이 애들 가르치는 사이끼리. 설마 희주 쌤이 그렇게 하라고 시킨 건 아니죠?”
“설마 그러셨겠어요?”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테이블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다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맞장구를 치기 바빠 보였다.
희주는 여전히 어색한 웃음을 건 채, 테이블 밑에 숨겨 둔 두 손을 꾹 움켜쥐었다. 짧은 손톱이 말랑하고 여린 손바닥에 쿡쿡 박혀 들어갔다.
“말 나온 김에 우리 애들도 그런 곳에서 봉사 좀 해 봤으면 좋겠어. 그런 게 진짜 봉사지. 안 그래요?”
학년 부장은 드물게 기분 좋은 티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아무래도 유세민이 없는 말을 지어내서 그의 환심을 제대로 산 듯했다. 사랑의 집 출신이라는 것을 숨기고, 봉사 활동을 해 왔다는 말로 포장하다니.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으나 여러모로 남들, 특히 학부모들에게 무언가 보여 주기를 좋아하는 학년 부장의 성정에는 제대로 들어맞는 소리였다. 왜 하필 저까지 이 문제에 끌어들였는지는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학년 부장은 유세민은 학교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힘들 테니, 사정을 잘 아는 희주가 이 일을 담당하도록 꽤 구체적인 요구들을 떠넘겼다. 백번 양보해 취지는 좋다 할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 말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진짜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거지. 당장이라도 묻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킨 희주가 천천히 말문을 뗐다.
“저 근데요, 선생님. 체험 학습이 지금 2주도 안 남았는데……. 지금 신청한다고 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또, 하루에 받는 봉사자 수도 정해져 있고…….”
“권 선생.”
대놓고 한숨을 푹 내쉰 학년 부장이 희주의 말을 끊었다. 입이 저절로 다물렸다.
“해 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하지 말고, 일단 해 보고 안 되면 말해요. 응?”
어르고 달래는 말투에 짜증이 깊이 배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희주는 알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미적지근한 대답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풀렸는지, 학년 부장은 만족스럽다는 웃음을 비치며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자, 다 드셨으면 이제 천천히 일어날까요?”
그 제안에 하나둘 주위를 둘러본 교사들이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보다 반 이상 남은 잔반을 불편한 마음으로 털어 버린 희주는, 뭐 그리 좋다고 웃어 대는 이들을 뒤에서 지그시 바라보았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딱 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웠지만, 딱히 좋은 기분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느릿한 걸음을 옮기던 희주가 속도를 붙여 거리를 좁혔다. 어느새 무리에 스며든 유세민의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멈칫한 유세민이 홱 뒤를 돌아보았다. 무해한 눈망울이 순수한 의문을 품은 채 희주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나랑 얘기 좀 해.”
사무적인 말투에 존칭과 존댓말은 생략된 채였다.
“지금?”
“어. 지금.”
유세민은 멀어지는 교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희주와 시선을 마주했다. 여전히 붙잡혀 있는 제 손목을 힐끗 내려다보는 시선이 무척이나 무감했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식의 접촉이 불편한 듯했다. 하지만 희주는 그걸 알고도 일부러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모르는 척, 마른 손목을 감싸 쥔 손에 빠듯하게 힘을 주었다.
“여기서?”
“……아니.”
생각 없이 입술을 달싹이던 희주가 아차 하고 말을 멈추었다. 식사를 마친, 또는 이제야 급식실로 향하는 아이들이 도란도란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당혹스럽다는 듯 입을 꾹 다문 희주가 복도 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미 먼 발치에서부터 희주를 알아보고 꾸벅 인사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희주는 당황한 숨을 크게 마시며 복도 가장자리로 주춤 물러났다. 당황해서인지 입꼬리가 부자연스럽게 위로 솟구쳤다.
반면 얼떨결에 희주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게 된 유세민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줄지어 지나가는 아이들을 향해 웃는 낯으로 손을 살랑살랑 흔들기도 했다. 몇몇 장난기 가득한 아이들이 요란스러운 인사를 건네도 끝끝내 미소를 거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희주가 묘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어도 그를 이상하게 보는 아이들은 없었다.
“따라와. 가서 얘기해.”
복도를 쌩하니 뛰어가는 아이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가다 말고 껌딱지처럼 들러붙어 영양가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아이들을 억지로 떼어 내기를 한참이었다. 복도를 오가는 인파가 조금 잦아질 때쯤이 되어서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중얼거린 희주가 먼저 등을 돌렸다. 아무래도 장소를 살펴 골라야 할 듯싶었다.
“…….”
유세민은 내팽개쳐진 제 손목을 가슴께로 들어 올렸다. 입술을 불퉁하게 내민 채 방금 전까지 붙잡혀 있던 손목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가소로운 악력이었기에 붙잡혔던 흔적이야 찾아볼 수도 없었지만, 차게 가라앉은 눈빛에는 기분 나쁜 티가 뚜렷이 드러났다.
소중한 것을 다루듯 반대 손으로 제 손목을 조심히 감싸 쥔 유세민은 이내 저를 두고 멀어지는 희주의 뒤를 빠른 걸음으로 따라나섰다.
희주가 향한 곳은 별관에 있는 소회의실이었다. 별관은 본관보다 교사와 학생들의 왕래가 적기도 하고, 무엇보다 점심시간인 지금은 평소보다도 찾는 사람이 없어 조용한 곳이었다.
또 미술실과 음악실, 과학실같이 특정 과목 시간에만 학생들이 붐비는 1층과는 달리 소회의실이 있는 2층은 놀고 있는 교실들이 많은 탓에 더더욱 인적이 드물었다. 몇 년 사이 학생 수가 크게 줄면서 그렇게 된 건데, 소회의실 역시 덩달아 사용 빈도가 낮아지면서 요즘에는 시험 기간이 아니면 딱히 쓸 일이 없었다. 여러모로 사적인 대화를 나누기에 적격인 곳이었다.
소회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전등 스위치부터 올린 희주는 뒤따라 들어오는 유세민을 향해 몸을 돌렸다.
“뭐 이런 데까지…….”
유세민은 대수롭잖은 얼굴로 중얼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탐색하는 시선이 먼지가 자욱이 쌓인 책상에 가 닿았다. 아이, 먼지. 유세민이 옅게 짜증을 내비쳤다.
“할 말이 뭐야?”
먼저 입을 연 건 유세민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긴 희주가 지루한 듯, 대놓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 구석진 데까지 저를 데리고 왔냐고 묻는 것 같은 태도였다.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눈치가 없다고 해야 할지. 제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기다리는 유세민의 얼굴에는 여전히 순수한 의문뿐이라, 어쩐지 허탈해진 희주가 설핏 인상을 구겼다.
“왜 말했어?”
“뭐가?”
“사랑의 집.”
과거는 과거로 묻어 두고 싶었던 건 피차 마찬가지 아니었나. 희주는 내키지 않은 손짓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불친절한 설명에 유세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 말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사랑의 집이 왜?”
왜냐니. 멍청한 되물음에 희주가 눈썹 사이를 좁혔다. 답답함에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이자, 유세민이 겁이라도 먹은 양 슬쩍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혹시 기분 나빴어……?”
하아. 희주는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듯한 한숨을 겨우 속으로 삼켰다. 어른에게 혼나는 어린아이처럼 유세민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아니……. 부장 쌤이랑 이것저것 얘기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야……. 공원 가서 쓰레기 줍다가 해산한다고 하니까 그게 뭐 의미가 있나 싶어 가지고……. 나도 막 생각 없이 말한 건 아니야.”
희주가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유세민의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졌다. 들릴 듯 말 듯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우물쭈물 변명 아닌 변명들을 늘어놓더니, 그 커다란 눈을 삼박삼박 감았다 뜨며 연신 제 눈치를 보기 바빴다.
“부장 쌤은 듣고 되게 좋아하시던데…….”
“…….”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러니까, 학년 부장도 좋아하는데 왜 너는 안 좋아하고 이렇게 저를 몰아붙이냐고 돌려 묻는 거였다.
“저기… 희주야. 혹시 부장 쌤이 너한테 알아보라고 한 거, 하기 싫어서 그래?”
“누가 그거 하기 싫어서 이래?”
“그럼 뭐 때문에 화를 내는 거야?”
“아니. 내가 지금 화내는 게 아니라…….”
희주는 입을 다물었다. 꼭 벽에 대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 기분은 실로 오래간만에 느껴 보는 것이었다.
“어쨌든 결과만 좋으면 된 거 아니야? 부장 쌤도 좋아하셨구, 우리 둘 다 칭찬도 받았는데.”
유세민은 몹시 억울해했다. 얼핏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왜 제 속을 몰라주냐는 듯 저를 쏘아보는 눈빛에 원망이 가득했다. 고맙다는 말이라도 듣고 싶은 건가. 바라지도 않은 일을 호의, 배려랍시고 저질러 놓은 다음 억지로 품에 안겨 주려 하는 것이 참 뭐 같았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조차 잊게 만드는 화법에 슬슬 머리가 지끈거렸다. 관자놀이가 뻐근하게 조여 왔다. 눈을 꾹 감았다 뜬 희주가 말을 툭 내뱉었다.
“거짓말한 거잖아.”
“그런 적 없어.”
“봉사 활동. 이거 거짓말이잖아.”
“……우리 둘만 가만히 있으면 거짓말 아니야. 아무도 모를걸?”
유세민은 늘 이런 식이었다. 관심과 칭찬에 목말라, 거짓말로 자신을 치장하고 꾸미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거짓말임을 들키게 되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언성을 높이고는 했다.
“그래서. 내가 뭘 잘못했는데?”
“…….”
“거기 출신인 걸 말한 것도 아닌데 왜 화를 내? 칭찬 들었으니까 된 거 아니야?”
거짓말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죄책감도, 또 악의도 없었다.
어쩜 이렇게 달라진 게 없을까.
“……김세민.”
“유세민.”
익숙한 이름을 입에 올리자 유세민이 두 눈을 희번덕이며 말을 끊었다. 악에 받친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져 있었다.
“유세민이야, 나. 김세민이 아니라.”
유세민은 저를 대신해 쟁취한 성씨를 또박또박 내뱉었다. 똑바로 정정된 이름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제 입술만을 뚫어질 듯 쳐다보는 눈빛이 소름 끼칠 만큼 부담스러웠다. 씨근거리는 숨소리가 소회의실을 채워 가면서, 동시에 번뜩 뜨인 유세민의 눈에도 굵은 눈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 정말 피 마르게 하는 데 뭐 있다. 질린다는 듯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인 희주가 고개를 뒤로 빼다가 이내 옆으로 돌려 버렸다.
“그래. 유세민.”
한숨 섞인 목소리로 토로하듯 이름을 불렀다. 슬쩍 보이는 시야에서 유세민이 뻣뻣하게 굳은 몸에 힘을 푸는 것이 보였다. 비로소 만족한 듯했다. 그마저도 질린다는 것을 알까 싶었다.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썹 끝을 문지르던 희주가 유세민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지그시 물었다.
“섭섭해?”
대번 그렇다는 말이 나올 것이 뻔했다. 섭섭해, 서운해. 매번 뭐가 그렇게 서운한지, 유세민이 투정을 부리는 족족 넘어가 양보하고 위해 준 기억들은 야속하게도 뚜렷히 남아 있었다.
“섭섭해하지 마.”
희주는 무던한 투로 재빨리 말을 이었다. 유세민은 제게 섭섭해할 자격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런 투정 뒤에 이어질 겉만 다정한 비난 따위를 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칭찬 듣고 싶으면 너 혼자 들어. 괜히 나까지 끼어들게 만들지 말고. 사적인 대화 안 하고 싶다는 거 진심이야. 쇼할 거면 혼자 해.”
“…….”
“여기 회사야. 넌 어른이고. 알겠어? 학생들한테 하지 말라고 하는 거, 너도 하지 마. 거짓말 같은 거 말하는 거야.”
방금까지 피를 말리게 하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말을 잇던 희주가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붉은 입술이 희게 질릴 만큼 고집스레 다물려 있었다. 아이들의 잘잘못을 따져 지적하고 가르쳐야 하는 선생이라는 작자가 정작 제 잘못은 인정하지 못하고 저리 버티고 있는 것이 조금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
“네가 뭘 안다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아……. 유세민 선생님.”
윗니에 짓이겨져 붉어진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일단 뱉고 보는 말일뿐 머릿속은 텅 비어 있을 게 분명했다. 궤변 따위 역시 들어 줄 의향이 없었기에 희주는 호칭을 바꿔 단호히 그를 가로막았다.
“서로 불필요한 사적인 대화는 오늘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딱히 좋았던 기억도 아니잖아요.”
옆을 스쳐 지나간 희주는 먼저 소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곧바로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유세민은 희주가 교무실로 돌아온 후로도 모습을 비치지 않았다.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칠 무렵, 그쯤이 되어서야 유세민은 비척비척 자리로 돌아왔다. 여태 고집스레 다물려 있는 입을 힐끗 바라본 희주는 곧 시선을 거두고 턱을 괴었다. 현재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현장 체험 학습 장소가 사랑의 집으로 바뀐다거나 하는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이미 결정된 사안을 학년 부장의 변덕 어린 지시 한 마디로 휙휙 바꿀 수 있을 만큼 학교는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는 곳이 아니었으며, 아무리 취지가 좋을지언정 배정받은 예산을 크게 웃도는 결정을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사랑의 집만의 절차와 순서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학년 부장의 말대로 사랑의 집에서의 단체 봉사는 사전 상담과 예약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예약은 물론이거니와 봉사 내역과 기부 물품도 사랑의 집의 사전 검토와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으레 알고 있었던 부분이었으니 제가 밀어붙인다고 해서 진행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학년 부장은 조금 아쉬워하는 눈치이기는 했으나, 단호히 힘들 것 같다고 말하자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래놓고 왜 일찍 말하지 않았느냐며 희주 탓을 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못했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이 참 별로였다.
애초에 체험 학습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장소를 바꾸고 싶다고 한 것도 문제였지만, 안 될 것을 알았음에도 쓸데없는 업무 지시를 내린 것도 문제였다.
그것도 모자라 학년 부장은 ‘해 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하지 말고, 일단 해 보고 안 되면 말해요’ 따위의 말로 희주를 무능한 사람 취급했다. 또 괜한 체면을 차리려 마지막까지 희주 탓으로 잘못을 우회하기까지.
“…….”
희주는 멋쩍어 불퉁하게 저를 대하던 학년 부장을 떠올렸다가, 처음 불씨를 던진 유세민을 떠올리고는 인상을 팍 구겼다.
나서서 추천할 때는 언제고, 유세민은 희주가 원장 수녀님과 통화하는 것을 유심히 듣다가 대놓고 안도하는 미소를 지었더란다. 아마 이변이 일어나지 않기를 그 누구보다 바랐을 터.
바로 옆자리라 원치 않게 그 미소를 보게 된 희주는 원장 수녀님께 그의 안부를 전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겼다. 과거를 숨기고 싶어 하는 유세민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상처받고도 미소 지을 원장 수녀님께 대한 배려였다.
때로는 착한 거짓말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
“와……. 차 봐. 차 댈 데가 있나 모르겠네.”
혼잣말과도 같은 이한수 선생의 중얼거림에, 창밖을 보며 상념에 잠겨 있던 희주가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사이 학교를 떠나 온 차가 회식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이 와중에 학년 부장은 회식이랍시고 점심을 같이 먹은 걸 잊기라도 한 듯, 다들 꺼려 하는 금요일에 또 회식을 공표했다. 그것도 당일에. 목적은 새로 부임한 유세민 선생을 환영하기 위함이었다.
목적이야 이해가 간다만, 그게 왜 하필 금요일이여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필 ‘시간 되는 분들은’이라는 전제는 쏙 빼두고 ‘환영 회식’이라고 단단히 못을 박아 둘 건 뭔지, 덕분에 선약이 있음에도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한 교사들까지 모두가 억지 춘향으로 회식 장소에 모이고 있었다.
희주도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한 교사들 중 한 명이었다. 만나자는 메시지를 다 주고받아 놓고 회식이 잡혔다는 말을 하자니 얼마나 난감했는지 모른다. 강현우는 괜찮다고 했지만, 저는 괜찮지 않았다. 강현우와 만나 어딜 가서 밥을 먹든 차를 마시든 하고 있을 시간에, 사람 많고 냄새 나는 고깃집에서 회사 사람들과 회식이라니. 괜히 울적해져 어깨가 느슨히 흘러내렸다.
고깃집 앞 광경은 가관이었다. 들어오는 차와 나가려는 차가 한데 뒤섞인데다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는 차도 더러 있었다. 행인들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싸움이 난대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금요일에 회식하는 데가 우리만 있는 게 아닌가 봐요.”
“다들 정신 나간 인간들이에요. 가정이 없나 봐.”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전형적인 샐러리맨의 차림을 한 이들을 곁눈으로 본 희주가 중얼거리자 이한수가 질린다는 투로 대꾸했다. 그 말이 마치 학년 부장을 향한 비난인 것 같아, 희주는 못 들은 척 웃음을 꾹 참고 다시 밖을 바라보았다. 속으로는 백번 공감했다.
“선생님 먼저 내리실래요? 저 주차하고 따라갈게요.”
복잡한 가게 주차장에서 오도 가도 못하자, 핸들을 쥐고 손가락을 까딱이던 이한수가 잠금장치를 풀었다. 그러겠노라 답한 희주는 품에 꼭 안고 있던 백팩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멀리서 봐도 입구 쪽은 고깃집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예약을 했다니 기다릴 일은 없겠지만, 차라리 저 인원들을 다 기다려서 시간이라도 지체시키고 싶었다. 그러면 집에는 늦게 갈지라도 불편한 자리에는 덜 앉아 있을 수 있을 테니.
최대한 느릿한 걸음으로 걸어가는데,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희주는 마침 잘 됐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어 액정에 뜨는 이름을 확인했다. 희미하게 밝아졌던 얼굴이 강현우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더 환하게 웃었다. 이미 해는 어둑어둑 져 가고 있었지만, 정오의 햇살보다 더욱 밝은 미소였다.
“여보세요?”
―잠깐 통화 돼요?
희주는 강현우의 다정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입구 쪽을 향하던 걸음을 옆으로 틀어 주차되어 있는 차량 사이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혹시라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기인한 행동이었다.
“네. 아직 다 안 오셔서 통화할 수 있어요. 현우 씨는 이제 퇴근한 거예요?”
강현우의 목소리가 마치 차에서 통화하는 것처럼 울려서 들렸다. 희주는 이한수의 차에서 내리기 전, 디지털 시계에 찍혀 있던 숫자를 떠올리며 물었다. 곧장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늘도 안 실장을 쪼아 스케줄 하나를 빼려다 실패해 정시 퇴근을 한 거라는 사실을 모른 채, 희주는 저 때문에 만남이 불발된 것에 미안함을 느꼈다.
“갑자기 회식이 잡힐 줄은…….”
―어쩔 수 없죠. 통보했다면서요.
“네에…….”
―고기라도 많이 먹어야지. 술은 많이 마시지 말고.
“차라리 빨리 취하면 집은 일찍 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무모하고도 대범한 발언에, 수화기 너머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빨리 취하려고요?
“음…….”
―큰일 날 사람이네.
슬쩍 웃음으로 무마하듯 답을 미뤘더니 강현우가 장난스럽게 혀를 찼다. 어쩐지 철없는 어린아이가 된 것만 같은 기분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희주는 술도 마시기 전부터 따끈해진 뺨을 멋쩍게 손바닥으로 덮듯 쓸어내렸다.
―취하면 집은 어떻게 가려고요? 집에서 많이 멀어요?
“많이 먼 건 아니고 조금요. 원래 회식할 때마다 가는 집이 있거든요. 일부러 동네에서는 회식 잘 안 해서 조금 먼 곳으로 다니는데……. 집이랑 반대 방향이긴 한데 택시 타면 금방이에요.”
―금방이면 몇 분?
“한… 20분 정도?”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생각하는 찰나, 이제 막 주차했는지 동료 두어 명이 희주가 서 있는 곳을 지나갔다. 마침 시야가 대강 가려지는 대형 SUV 차량 두 대 사이에 서 있던 덕에 들키지는 않았지만, 괜히 들키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에 희주는 얼른 뒤를 돌았다.
―그게 가까워요?
“이 정도면 가까운 건데…….”
강현우의 못 미더운 물음에 희주는 어물어물 말끝을 흐렸다. 경기도민에게 20분이면 정말 최단 거리가 맞았다. 솔직히 한 시간까지는 불평불만 없이 이동할 자신도 있었다. 한 시간 반은… 그제야 ‘아, 좀 멀다’ 싶을 정도?
희주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주차장에 깔려 있는 파쇄석을 운동화로 짓이기듯 문질렀다. 신고 있는 운동화 앞코로 모양을 다듬는 것처럼 설설 문지르며 괜한 딴짓을 했다. 귀로는 강현우의 음성을 들으면서 머리로는 이따가 집에 갈 때의 상황을 상상했다.
여기서 서울까지 가는 버스가 있으려나. 지금까지 몇 번 강현우가 몰래 저를 찾아왔던 것처럼, 저도 몰래 그를 찾아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강현우의 차를 타고 오가느라 정확한 주변 지리는 모르지만 대강의 주소 정도는 알고 있으니…….
통화가 끝나는 대로 교통편 검색부터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접어들었을 때, 마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듯이 강현우가 대뜸 물어 왔다.
―그럼 이따가 내가 데리러 갈까요?
“……네?”
희주의 입에서 새된 되물음이 툭 튀어 나갔다. 솔직히 너무 좋았지만, 애인을 택시 기사처럼 부려 먹는 것 같아 단번에 좋다는 대답은 할 수가 없었다.
―몇 시쯤 끝날 것 같아요? 연락 주면 데리러 갈게요.
희주가 머뭇거리고 있는 것을 알아챈 강현우는 그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하고는 대화를 이끌어갔다. 별거 아닌 소소한 부탁도 어려워하는 것 같아, 고개만 슬쩍 끄덕이기만 해도 될 정도로 대놓고 답을 정해 주는데도 희주는 그마저도 못해 이처럼 늘 미안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솔직히 강현우는 희주가 지금보다 더 속물적으로 굴기를 바라고 있었다. 지금껏 제 주변은 무언가를 바라기만 했던 이들뿐이었는데, 희주는 제게 뭘 바라지 않아 애가 타는 것이 제법 우습기는 했다. 모든 걸 다 차치하고서라도, 이제는 희주가 무엇을 바라든 기꺼이 다 내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게 이름이랑 위치 메시지로 찍어 놓을래요?
“아……. 지금요?”
―지금 말고. 나랑 더 통화하다가, 끊으면 그때 해요.
날씨가 많이 더워졌나? 희주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몇 시간 뒤면 강현우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자 벌써부터 설레서 가슴속이 홧홧해졌다.
“아, 근데…….”
알겠다고 대답하던 희주가 갑자기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어 한 걸음 한 걸음 느리게 옮기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주차를 하고 온다던 이한수 선생이 입구 쪽으로 향해 가는 것이 보였다. 딱 이한수까지만 보였으면 별생각 안 들었을 텐데, 학년 부장과 함께 있는 걸 보니 아차 싶었다.
―들어가야 돼요?
조급함과 아쉬움이 동시에 일어 발걸음이 갈팡질팡했다.
“네……. 다 도착한 것 같아서요.”
―음. 안 도와주네. 일단 들어가요. 가게 이름이랑 위치 찍어 주는 거 잊지 말고.
희주는 눈앞에 강현우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바보 같은 행동을 했다는 것을 빠르게 알아채고 “네. 그럴게요” 하고 대답을 덧붙였다. 먼저 끊어야 하는 타이밍인 건지 망설이는데 강현우에게서 단호한 말이 떨어졌다.
―술도 많이 마시지 말고. 그냥 입만 대고 취한 척하고 있어요.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애인이 그러라면 최대한 노력은 해 볼 수 있었다.
“그럴게요.”
―그럼 이따가 봐요.
강현우는 먼저 끊으라고 했다. 하지만 희주는 손가락을 꼼질거리다가 몇 초를 더 흘러가게 둔 뒤에야 겨우 전화를 끊었다. 바로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옆에 주차되어 있는 창문에 얼굴을 슬쩍 비쳐 보았다. 입가에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미소가 걸려 있었다. 볼이 조금 붉어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데리러 와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상상보다 좋은 일이었다.
* * *
회식 자리가 무르익어 갈수록 눈이 풀리고 혀가 꼬이는 사람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회식에 불평불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막상 고기를 앞에 두고는 못 배기는 듯, 술잔을 기울이는 속도에 속도를 더해 갔다.
희주는 잔을 채워 주려는 동료 교사를 향해 더는 못 마시겠다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고는 말을 안 듣는 몸을 이끌고 벽 쪽으로 가 머리를 기댔다. 마음 같아서는 자리를 깔고 눕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당장이라도 잠들어 버릴 것 같아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유 선생님, 안 그렇게 생겨서 술 엄청 잘 마시네!”
“어우, 쌤. 잘 마시면 잘 마시는 거지, 안 그렇게 생긴 건 또 뭐예요? 요새 그런 말 하고 다니면 큰일 나!”
“그럼 취소! 자, 자. 잔 채우자고.”
슬슬 자리를 파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분위기는 그렇지 않아 보였다. 환영 회식이라는 말에 걸맞게, 주인공인 유세민을 주축으로 뭉친 이들이 얼큰하게 취해 불콰한 얼굴을 해서는 연신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희미하게 눈을 뜬 희주는 왁자지껄 떠드는 무리들을 멀거니 쳐다보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요령 없이 주는 족족 마신 탓일까. 취기를 감내하기 위해 기댈 곳을 찾은 건데도 눈앞이 자꾸만 빙글빙글 돌았다. 불판의 열기와 자욱한 연기, 또 사람들의 소란한 말소리 탓에 골이 울리기도 했다.
“저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결국 희주는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워낙 시끄럽고 복잡한 탓에 자리를 벗어나는 희주에게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널브러진 신발을 찾아 신고 밖으로 나오자, 답답한 공기와는 사뭇 대비되는 상쾌한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불볕더위가 시작되기 전이라 그런지, 낮에는 한여름처럼 더워도 해가 떨어진 후에는 시원한 편이었다.
화끈거리는 볼을 손등으로 꾹 누른 희주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흡연 구역을 지나, 텅 비어 있는 주차장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가게 바로 앞에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가 마련되어 있기는 했지만, 흡연 구역 근처라 담배 냄새 때문에 오래 앉아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아…….”
가로등 아래에 자리 잡은 희주는 앞뒤로 흔들리는 몸을 지지하기 위해 무릎을 꼭 끌어안았다. 그 위에 겹친 두 팔 위로 얼굴을 묻고는 고단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쉬는 숨에 쌉싸름한 알코올 냄새가 가득 배어 있었다. 얼결에 내쉬었던 숨을 그대로 마신 희주는 제게서 나는 술 냄새에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팍 찡그렸다.
요령껏 마셨어야 했는데 하필 같은 테이블에 앉은 동료 교사 중 한 명이 술잔 부딪치기 좋아하는 박 선생이었다. 술만 따랐다 하면 박 선생이 건배, 짠을 외치면서 들이대는 통에 희주는 요령이라고 할 것도 없이 쓴 액체를 목구멍 뒤로 넘겨야 했다.
학년 부장의 지루했던 건배사와 가증스러우리만큼 수줍어하던 유세민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희주는 옷깃을 쭉 끌어다가 코를 묻었다. 술 냄새에, 고기 냄새가 뒤섞여 불쾌하기 짝이 없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분명 강현우가 저더러 많이 마시지 말라고 했고, 저는 알겠다고 대답도 해 놨는데 이리 거나하게 취해 버리다니 완전 낭패였다.
“몇 시지…….”
보나 마나 한참 시간이 흘러 있을 터였다. 주변 다른 테이블들이 계산을 마치고 나갈 동안 자리를 진득하게 지키고 앉아 있던 건 백영 여고 2학년부 선생님들뿐이었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저녁을 직장 동료들과 보내게 된 것에 대해 먹는 걸로라도 보상을 받으려는 듯, 죽상으로 회식 자리에 끌려왔던 교사들이 전부 내일이 없는 것처럼 먹고 마셔 댔다. 내일이 평일이면 출근 걱정이라도 하지, 하필 주말이라 걱정할 거리도 없는 탓에 술을 주문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더란다.
도대체 집에 갈 생각들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대로 두면 2차든 3차든 자리를 옮기자는 말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면 시간은 점점 더 지체될 거고, 저를 데리러 오겠다고 한 강현우를 그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게 하는 셈이었다.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차를 타고 오가면 얼마 걸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강현우에게 괜한 수고를 끼치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오지 말라고 해야 되나? 기우뚱거리는 몸에 힘을 주어 느릿하게 휴대폰을 꺼낸 희주는 흐릿한 눈을 부릅뜨고 화면을 켰다. 통화 기록 최상단에 남아 있는 강현우의 이름에 손끝을 대려는데, 마침 휴대폰 화면이 통화 수신 화면으로 바뀌었다.
방금 뭘 눌렀나? 술기운에 젖어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던 희주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 진동에 이내 생각을 관두고 전화를 받았다.
“현우 씨.”
―희주 씨.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들려오는 강현우의 목소리에 희주가 방긋 웃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오지 말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목소리를 듣자마자 퍼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회식은 아직이에요?
“음……. 네. 아직이에요.”
―어디예요? 밖인 것 같은데.
“네……. 저는 잠깐 나왔어요. 바람 좀 쐬고 싶어서…….”
―많이 마셨나 보네요.
“저요? 제가요? 아닌데……. 그냥 적당히 마셨어요. 아직 취하지도 않았는데…….”
조금 어지럽기는 해도 걷는 것도 똑바르고 말하는 것도 멀쩡했다. 물론 이건 희주 본인만의 생각이었다.
―원래 취한 사람들이 안 취했다고들 해요.
“근데 저는… 진짜 안 취했어요.”
―정말 안 취했어요?
“네에……. 그냥 조금… 어지러운 정도?”
―그걸 취했다고 하는 거예요.
“아……. 그런가…….”
―아, 그런가는 무슨.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가 섞인 웃음소리를 따라 희주가 입꼬리를 올렸다. 실없는 웃음이 절로 새 나왔다.
흥흥, 콧소리가 섞인 웃음으로 멋쩍음을 표시하던 희주는 앞뒤로 흔들거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묵직한 숨을 내쉬었다. 마침 할 말도 있었는데, 바로 전화 연결이 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근데… 제가 지금 많이 취해서요.”
―언제는 안 취했다면서요.
“아, 음…….”
그러네. 제가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었다. 희주는 휴대폰을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눈썹 끝을 문질렀다.
“안 취했다고 말하는 게 맞나……? 혼자 갈 수 있는데…….”
―혼자 어딜 가게요. 집? 나 데리러 오지 말라고요?
“어……. 어떻게 알았지.”
스스로 입 밖으로 말을 뱉어 놓고, 강현우에게 속을 읽혔다고 생각한 희주가 놀라움에 입을 떡 벌렸다. 커진 눈을 빠르게 삼박이며 손을 입 앞으로 가져왔다.
―혹시 지금 걷는 거 많이 힘들어요?
“걷는 거……. 아니요.”
―다행이네. 그럼 좀 걸어요. 일어나서 앞으로 쭉.
술기운을 조금이라도 날리려면 몸을 조금 움직이는 편이 낫긴 했다. 희주는 구부리고 있던 무릎을 펴 일어났다. 그러고는 앞으로 쭉 걸으라는 강현우의 말을 고분고분히 따랐다. 손님이 많이 빠져나가고 난 뒤라, 아까 전만 해도 주차 자리가 빠듯했던 주차장이 군데군데 텅 비어 있는 모습이었다.
분명 날이 추운 것도 아닌데, 술을 마셔서 그런지 온몸이 오들오들 떨려 왔다. 희주는 휴대폰을 볼에 바짝 붙인 채 몸을 잔뜩 움츠리고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판판한 신발 밑창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울퉁불퉁한 파쇄석이 잘그락,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저… 주차장 한 바퀴만 돌래요.”
쉬엄쉬엄 한 바퀴 돌다 보면 어느 정도 술이 깰 것만 같았다. 그쯤 되면 한 명 정도는 집 가자는 소리를 하지 않을까? 천천히 걷고 싶은 마음 반, 얼른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반 뒤섞여 걸음걸이가 엉망진창이 되었다. 희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번갈아 시야에 들어오는 양발을 제법 흥미로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고개 들어요. 그렇게 걸으면 넘어져요.
“네……. 네?”
마치 이런 저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말투에 희주는 우뚝 발을 멈추었다. 그때, 주차되어 있던 차들 중 한 대가 그런 희주를 향해 라이트를 번쩍거렸다.
“아……. 눈 부셔요.”
―이쪽으로 와요.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어 휙 뒤돌아 서 있던 희주는 강현우의 목소리에 홀린 듯이 다시 방향을 틀었다. 라이트는 꺼졌지만 강렬했던 빛의 잔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눈살을 찌푸린 채 주춤주춤 앞으로 다가가자 열려 있는지도 모르고 있던 창문 틈에서 커다란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놀란 희주가 반사적으로 주춤 뒤로 물러나며 눈을 크게 떴다.
“아…….”
“안 취했기는.”
훅 풍겨 오는 페로몬에 희주가 긴장을 풀고, 운전석에 앉아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희주처럼 휴대폰을 귀에 댄 강현우가 빈손으로 희주의 볼을 부드럽게 감싼 채 웃고 있었다.
“이렇게 얼굴이 터질 것 같은데 안 취했다고요? 완전 거짓말쟁이네.”
손바닥 밑으로 느껴지는 따끈함이 희주가 어느 정도 술에 취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강현우는 희주에게 핀잔이라도 주듯 말랑한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희주는 제 볼이 붙잡힌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강현우를 놀란 눈으로 탐색하기 바빴다.
“어…….”
“안녕.”
멀뚱히 서서 이렇다 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희주를 대신해, 강현우가 손수 휴대폰을 받아다가 통화를 종료했다. 휴대폰 불빛에도 눈이 부신지 희주가 눈가를 찡긋거렸다.
“언제…….”
“언제 왔냐고요?”
희주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강현우는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웃기만 했다. 희주가 바람을 쐬러 나오기 한참 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면, 또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할 반응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차체 가까이에 붙어 선 희주를 한 걸음 뒤로 물러나게 한 강현우는 운전석에서 내려 희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해서는 제가 이끄는 대로 끌려오는 희주가 귀여워, 강현우는 조수석 문을 열기도 전에 희주를 앞에 세워 둔 채 볼 위로 잘게 입술을 부딪쳤다.
“휴대폰은 있고. 안에 뭐 두고 나온 거 있어요?”
“가방……?”
“아, 가방. 혹시 오늘 안 가져가면 큰일 나는 거예요?”
강현우의 물음에 곰곰이 생각하던 희주가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지갑이나 휴대폰 같은 귀중품은 가방보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편이었고, 가방 안에 몇몇 수업 자료가 들어 있기는 했지만 잃어버려도 큰일 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럼 일단 타요.”
강현우는 희주를 앞세워 조수석에 앉혔다. 순순히 차에 오른 희주는 상체를 숙여 불편하게 선 채 안전벨트를 채워 주는 강현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 뼘 정도나 될까 싶을 만큼 가까이 다가온 얼굴을 보는 눈빛이 몽롱했다.
아무 생각 없이 희주와 시선을 마주한 강현우는 설핏 인상을 찡그렸다가 픽 입꼬리를 당겼다. 잔뜩 눈이 풀려서는, 저로서 엄한 생각을 하게 했다.
“술 냄새 나네요.”
“……많이 나요?”
“많이는 아니고… 조금?”
가볍게 웃음 지은 강현우는 마저 안전벨트를 채워 준 뒤, 몸을 물리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기울였다. 술 냄새 정도야 키스를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으응…….”
술 냄새가 난다는 말에 입을 꾹 다물었던 희주는 입술 위로 느껴지는 축축함에 노곤한 신음을 흘리며 입을 벌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미지근한 살덩이가 입술 틈을 가르고 들어왔다. 취한 탓인지 어쩐지 시원하게 느껴지는 살덩이를 좇아 적극적으로 혀를 내밀어 얽자, 강현우가 비죽 웃음을 흘리며 희주의 혀를 빨아당겨 주었다.
오래지 않아 희주 못지않게 뜨거워진 혀가 축축한 소리를 내며 입 안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강현우는 뜨끈한 볼 안쪽을 혀로 가볍게 훑어 주고는, 작고 통통한 혀를 쪽 소리가 나도록 빨아 준 뒤 입술을 떼어 냈다. 아쉬운지 따라 나오는 혀끝에 혀를 맞대고 문지르자 부끄러워하며 얼른 입 안으로 가져가는 것이 귀여웠다.
“희주 씨, 페로몬 나오네요.”
강현우는 금세 타액으로 젖은 입술을 제 입술로 느릿하게 문질렀다. 얇은 표피의 입술이 쉬이 뭉개졌다.
“혹시 오늘 회식 같이했던 사람들 중에 형질자 있었어요?”
“형질자……. 오메가만, 한 명…….”
“다행이네.”
입술을 꾹 눌렀다 뗀 강현우는 어느새 제 목을 꼭 끌어안고 있는 희주의 손을 잡고 얌전히 무릎 위에 내려 주었다. 페로몬이 흘러나오고 있는 걸 자각하고 있기는 한 건지, 희주는 페로몬을 갈무리할 생각도 하지 않고 새액새액 숨을 내쉬며 강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술은 못 마시게 해야겠네. 애인의 사회생활에까지 간섭하는 보수적인 알파가 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성이 흐릿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굳건해졌다.
“자고 있어요. 도착하면 깨워 줄게요.”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집이요.”
“아, 집…….”
집이라는 말에 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가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현우는 더 이상 말을 건네지 않고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손길이 간지러운지 눈썹을 찡긋거리던 희주는 이내 스르륵 눈을 감고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 * *
두 사람이 탄 차가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난 뒤, 주차된 차량 사이에서 인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권희주?”
두어 걸음 앞으로 나온 유세민은 멀어지는 차량 뒤꽁무니를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놓친 담배가 발치에서 타들어 가고 있었다.
가늘게 뜬 눈을 하고, 혀를 내어 바짝 마른 입술을 훑은 유세민은 시선을 고정한 채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어 입에 물었다.
“……하.”
허탈한 숨과 함께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 * *
몸이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구름 위를 걷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을 만큼 몽롱한 감각이 희주를 덮쳐 왔다.
희주는 살짝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쩐지 자세가 불편한 것도 같은데, 지금 당장 조금이라도 몸에 힘을 주면 어딘가로 곤두박질칠 것 같아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입술을 벌리자 짜증 섞인 한숨이 앞다투어 흘러나왔다. 가만히 푹 쉬고 싶은데 세상이 왜 이렇게 빙글빙글 도는지 모르겠다. 그만 멈추었으면 하는 마음에 팔에 감기는 것을 있는 대로 꼭 끌어안자 이번에는 품 안의 것이 말썽을 부렸다.
위아래로 크게 들썩이고 종국에는 잘게 진동하기까지 했다. 밀어낼까 싶었지만 살갗에 닿는 온기가 썩 마음에 들어 밀어내는 대신 꼭 품에 가두는 것을 택하기로 했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부유감은 사라지고 어딘가에 안정적으로 파묻힌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이번에는 세상이 빙글빙글 돌지도 않았으며 몸을 아무렇게나 움직여도 떨어질 것 같다거나 하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코끝을 스치는 알파 페로몬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동시에 아랫배와 다리 사이로 확 감각이 고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녹진한 숨을 느른히 내쉰 희주는 끝없는 아득함에 기꺼이 몸을 맡겼다.
그렇게 한참이나 이어지는 감각 속에서 열심히 허우적거리는데, 문득 어쩌면 이건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자각하는 순간, 희주는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어둠이었다. 눈을 떴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에 당황한 희주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우뚝 굳어 버렸다.
다행히 차차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주변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이 짙게 내리깔려 있는 방 안, 이곳은 희주에게 제법 익숙해진 공간인 듯했다. 익숙한 구도와 방에 미미하게 깔려 있는 페로몬은 이곳이 강현우의 집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크게 안도한 희주는 푹신한 이불을 손바닥으로 밀고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러자 누워 있는 동안에는 느끼지 못했던 어지러움과 두통이 머리를 강타하고 지나갔다. 잇새로 흘러나오려는 신음을 애써 삼킨 희주는 골을 울리는 어지러움에 관자놀이를 꾹 짚어 눌렀다. 그러고 가만히 앉아 고통을 감내하고 있으니, 잠들기 직전의 기억들이 스멀스멀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기 시작했다.
회식을 했다. 유세민을 환영하기 위한 목적으로. 딱히 내키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를 깨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술을 마셨고, 중간에 나와서 통화를 하는 중에 갑자기 나타난 강현우와 차에서 키스를 했다.
“…….”
머리를 헤집던 손을 멈칫한 희주는 누가 볼지도 모르는 곳에서 키스를 한 사실에 못 믿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밀어내기는커녕, 제가 강현우에게 매달리다시피 해 입술을 비비고 혀를 내밀기까지 한 키스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미쳤구나, 내가. 그러고 먼저 가 보겠다는 말도 안 하고 나온 거야? 희주는 난데없이 떠오른 저의 대범함에 놀라 입을 턱 틀어막았다.
일단 키스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이 집까지 들어온 일련의 과정들은 머릿속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강현우는 저를 데리러 와 준 것도 모자라 직접 집 안에까지 옮겨 준 듯했다.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희주는 다급하게 제 가슴팍을 거침없이 더듬어 보았다. 옷까지 갈아입혀져 있었다.
여기저기 옮겨지고, 옷까지 갈아입혀졌는데 세상 모르고 자고 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희주는 저도 모르게 달싹인 입술을 꾹 말아 물고는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그러고 보니 방 안에는 저뿐이었다.
어디 가셨나? 희주는 커튼 쳐진 창문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직 한밤중인 것은 분명했다. 짧은 궁금증이 일었으나 그것도 잠시, 멀리서 쏴아아 하고 작게 물소리가 들렸다. 비라도 오는 줄 알았는데 한 뼘만 하게 보이는 하늘에는 달무리도 져 있지 않은 달이 두둥실 떠 있었다. 다른 욕실에서 샤워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집에 강현우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 희주는 일으켰던 상체를 도로 눕혔다. 푹신하고도 버석한 이불이 풀썩 들썩이며, 내내 배어 있던 알파 페로몬이 훅 풍겼다.
“…….”
눈을 깜빡이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만 같은 적막함 속에, 희주는 물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사방에서 풍겨 오는 강현우의 페로몬을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다시 잠이 올 듯 말 듯 했다. 아직 술이 덜 깬 것 같기도 했고, 완전히 깬 것 같기도 했다.
가물가물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뜬 채 멍하니 넋이 나가 있던 희주가 비척비척 돌아누웠다. 그러고는 하체까지만 덮고 있던 이불을 턱 아래까지 끌어당겼다. 똘똘 뭉친 이불을 다리 사이에 꼭 끼고, 그 위로 얼굴을 푹 파묻자 강현우의 것일 게 분명한 페로몬이 맡아졌다.
“아……. 왜 이러지…….”
낭패라는 양미간 사이를 좁힌 희주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도톰한 이불을 사이에 두고 꽉 붙인 다리 사이가 빠듯하게 조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금방 잠에서 깼을 때부터 배꼽 아래가 간질간질하기는 했지만, 남자라면 살면서 몇 번씩 겪는 일이기에 대수롭잖게 넘겼던 터였다. 하지만 강현우의 페로몬을 자각한 이후로는 저도 모르게 허벅지 안쪽에 자꾸만 힘이 바짝 들어갔다. 반쯤 발기해 있던 성기가 어느새 바짝 서서는 영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히트 사이클이라도 온 건가 했다. 자꾸만 열이 홧홧하게 오르는 것도 그렇고, 자다 일어났는데도 왜인지 예민한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히트 사이클은 아니었다. 아무리 저가 열성 오메가라 할지라도 히트 사이클 하나 구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읏…….”
히트 사이클이 아니면 답은 딱 하나였다.
“으, 응…….”
속된 말로 꼴렸다. 아무래도 술 때문에 느슨해져 있는 상태에서 연인의 페로몬으로 뒤덮이는 바람에 버튼 하나가 제대로 눌린 듯했다.
차마 속옷 안으로 손을 넣어 성기를 만지는 것까지는 할 수 없었던 희주는 덜덜 떨면서 침대 위에 배를 대고 엎드렸다. 자연스럽게 체중이 실려, 성기에 압박감이 더해졌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흥분도 금방 가라앉을 거라는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베개며 이불이며 강현우의 페로몬이 묻어 있지 않은 것은 단 한 개도 없었다. 자꾸만 힘이 들어가려는 성기를 애써 무시하며, 희주는 진정하려는 듯 숨을 갈급하게 들이마셨다. 온통 페로몬뿐이라 별 소용없는 짓이기는 했다.
눈을 꾹 감은 희주의 머릿속으로 강현우의 손과 입술이 제 몸 어디에, 어떻게 닿았는지가 떠올랐다. 기껏해야 상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희주는 실제 강현우가 제 몸을 만져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늘게 경련했다. 손을 대지 않은 다리 사이가 마음대로 옴쭉거렸다.
멈춰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기에서부터 찌르르 올라오는 쾌감을 이제 와서 무시할 수가 없었다. 희주는 뒷일은 생각하지 않은 채 버석거리는 이불을 꽉 쥐고 곱은 발끝에 새하얗게 힘을 주어 허리를 들썩거렸다. 흥분으로 흘러나온 물기로 인해 입고 있는 속옷이 푹 젖어 들고 있는 게 선연히 느껴졌다.
“흣, 으, 흡…….”
아, 좋아……. 현우 씨……. 신음이 죄 이불에 파묻혀 불분명하게 뭉개졌다. 자위에 열중하느라 멀찍이서 들리던 물소리가 뚝 끊긴 것도 모르고, 희주는 여전히 강현우를 떠올리면서 밭은 숨을 헐떡거렸다.
“……희주 씨?”
“아, 흑…….”
처음 저를 부르는 목소리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머릿속으로 그리다 보니 평소 저를 부르던 목소리까지 그린 줄로만 알았다. 제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이 좋아 힉, 하고 새어 나가는 신음을 참지 못했던 희주는 곧이어 조심스럽게 공간을 파고드는 목소리에 놀라 허리 짓을 우뚝 멈추었다.
“깼어요?”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이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했다. 환한 빛줄기가 희주의 위로 쏟아졌다. 언제 열린 건지 모를 문 사이로, 가운을 입은 채 서 있는 강현우가 눈에 들어왔다. 잔뜩 놀라기도 하고 당황한 듯하나 흥분은 가시지 않은 눈동자가 강현우의 것과 허공에서 잠시 부딪혔다.
“안 자고 뭐 해요, 희주 씨.”
딱히 대답을 바라고 던진 물음은 아니었다. 제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가라앉은 강현우의 시선이 느릿하게 침대를 훑었다.
주차를 마친 뒤, 조수석에서 곤히 잠든 희주를 업어서 데려온 강현우는 혹여 그가 깰까 조심하며 옷까지 갈아입혀 주었다. 술기운 때문에 조절이 잘되지 않는 모양인지 희주는 잠결임에도 페로몬을 흘리면서 자꾸만 제게 매달리고, 얼굴이며 몸을 비비적거렸다.
그런 희주를 억지로 떼어 놓기가 힘이 들기는 했지만, 잠든 그의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는 정도로도 만족했었다. 아무리 제 연인이라고 할지라도 술에 취해 이지를 잃은 상태로는 건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건만. 잠시 제가 씻으러 간 사이 당연히 자고 있을 줄만 알았던 연인이 허리를 흔들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제가 매일같이 잠이 드는 그 침실에서 말이다.
아무래도 침구에 밴 제 페로몬이 자극제가 된 것 같았다. 술도 마셨겠다, 판단력이 흐려져서 원초적인 욕망을 쉬이 거부할 수는 없었을 테다.
흘러내리는 젖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린 강현우는 희주가 누워 있는 침대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놀라서 동그랗게 커진 눈이 겁을 먹기라도 한 것처럼 주저하며 강현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대로 몸을 숙여 침대에 앉은 강현우는 엎드려 있는 희주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었다.
“잘 자다가 왜 이럴까.”
“현우 씨……. 저, 그게…….”
“희주 씨 깰까 봐 일부러 다른 욕실에서 씻고 왔는데.”
“…….”
“꿈꿨어요?”
꿈을 꿨느냐는 물음에 희주는 울먹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꿈을 꾼 건 아니지만 만약 꿈을 꿨다고 하더라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내용은 아닐 테다. 부끄러웠다. 하필 머리카락을 슬슬 매만져 주는 강현우의 손길이 다정하기까지 해, 어쩐지 눈물이 핑 고이는 듯했다.
“그럼 갑자기 그런 거예요? 내 생각나서?”
강현우는 조금 긴 듯한 머리카락을 작고 귀여운 귀에 꽂듯 살살 쓸어 넘겨 주었다. 손가락이 귓불에 닿자, 희주가 몸서리를 치면서 도망치듯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예민하게 반응을 하기는 해도 싫지만은 않은지, 입술을 이로 꼭꼭 깨물기만 할 뿐 부정의 답을 한다거나 더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대답 안 해 줄 거예요?”
“흐으…….”
“왜요. 부끄러워서?”
일은 저질러 놓고 차마 입 밖으로 내기에는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반쯤 내보이던 얼굴을 이제는 아예 보여 주지도 않는 모습이 이제야 평소의 희주처럼 보여 귀여우면서도 아쉬웠다.
섹스할 때의 희주는 무감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마구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다만 늘 저를 보는 눈에 분명한 호감과 애정이 가득했기에, 부끄러움 담긴 모습이 사랑스럽기만 했다. 방금 전처럼 흥분해 허리를 들썩거리고 있던 모습은 상상해 본 적 없어 당혹스럽기는 했어도 제법 기꺼웠더란다.
강현우는 아까 전, 희주를 잠시 등에 업었을 때를 떠올렸다.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등 뒤로 문질러지는 발기된 성기에 덩달아 제 것도 세울 뻔했었다.
작게 칭얼거리는 말에 제 이름이 들어가 있던 걸 보면 분명히 저를 생각하면서 흥분한 게 맞는 것 같은데.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흥분한 건지. 오기가 생긴 강현우는 기필코 제 귀로 들어야겠다는 일념으로 몸을 숙여 희주의 귓불을 입술로 물었다.
“하으, 응…….”
말랑한 귓불을 입술로 물어 당기자 희주의 두 어깨가 위로 움칠 치솟았다. 간지러운 건지 아니면 성감대가 건드려져 쾌감을 느낀 건지, 작은 흐느낌과 함께 희주가 허리를 벌벌 떨었다.
“뭐가 그렇게 매일 부끄러워요. 말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강현우는 희주의 귓불을 문 채로 손만 움직여 목덜미서부터 등, 허리까지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손수 갈아입혀 둔 잠옷 밑으로 매끈한 몸의 굴곡이 만져졌다. 등 한가운데 일 자로 길게 움푹 팬 골에 손가락을 세워 가볍게 두드리듯 미끄러뜨리자, 긴장감에 바짝 힘이 들어가면서 잔근육이 잘게 떨렸다.
희주의 귓가에 머물러 있던 강현우의 입에서도 간지러운 숨이 우수수 쏟아졌다. 직접 살갗이 닿아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안타까움이 절로 일었다.
“나 없을 때 혼자 뭐 했어요?”
연인을 떠올리며 흥분하는 것을 우습게 볼 생각은 없었다. 강현우 역시 희주가 눈앞에 없으면 그와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 정도는 자주 하고는 했다.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열심히 입맞춤에 응하는 희주가 떠올라 난데없이 피식 웃기도 했고, 섹스 후 뒤처리를 위해 썼던 욕실을 저 홀로 이용할 때면 간혹 그때의 상황이 떠올라 마른침을 삼키기도 했다.
일요일 밤마다 희주를 집으로 데려다주고 나면, 머무르는 동안 집 안에 희미하게 남아 버린 희주의 페로몬을 쫓아 자위를 한 적도 있었다.
동그랗게 뭉친 유두를 입에 물고 희롱할 때마다 비틀어지던 허리와 또 축축한 구멍 안쪽으로 제 성기를 길게 밀어 넣을 때마다 귀가 녹아내릴 듯 터져 나오던 신음을 떠올리면서. 손바닥을 죄 덮은 점액질의 액체를 내려다보면서는 턱뼈가 불거질 만큼 잇새를 짓이기며 이성을 넘나들려는 소유욕을 억지로 내리눌러야만 했다.
현실적으로 매일같이 이어지기 어려운 만남이기에 이대로 보내지 말고 영영 가둬 둘까, 하는 알파다운 음습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오늘만 해도 회식에 동석한 형질자가 오메가 한 명뿐이라는 말에 크게 안도하지 않았는가. 이번은 이렇게 넘어갈 수 있다고 해도, 다음도 오늘과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강현우는 희주에게서 나는 희미한 알코올 냄새를 따라 코끝을 비볐다. 이 와중에 말랑하고 부드러운 피부에 열이 올라 따끈따끈한 것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분명 함부로 술 마시게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흣…….”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가끔은 마시게 둬야 하는 건가……. 몸에도 안 좋은 걸.”
말랑한 귓불을 입 안에 가둔 채 속삭인 강현우는 귀 아래 폭 들어간 윤곽을 따라 입술을 옮겼다. 매끈하게 각진 턱뼈의 모양을 다듬듯 입술을 미끄러뜨리고, 마른 탓에 톡 튀어나와 있는 목뒤 뼈는 혀를 내어 둥글게 문질렀다.
“아…….”
얇은 잠옷 자락을 들추고 손을 밀어 넣자 희주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제 위에 오른 강현우에게서 위압감이 짙은 알파 페로몬을 느낀 까닭이었다. 조금 서늘한 듯한 커다란 손바닥이 뱀처럼 기어올랐다. 희주는 궁지에 몰린 쥐처럼 바들바들 떨며, 베개를 조금 더 품 안으로 당겨 안았다.
“꿈도 안 꿨는데.”
“아, 흐… 응.”
“그냥 자다가 일어났는데 이렇게 됐다는 게 이상하잖아요.”
군살 없는 매끈한 허리를 가볍게 쥐었다 놓은 강현우가 당장이라도 성기를 휘어잡을 듯 희주의 몸과 시트의 틈을 파고들었다. 체중 따위야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놀란 희주가 기겁하며 몸을 비트는 틈을 타 손을 밀어 넣은 강현우는 어렵지 않게 희주의 성기를 쥘 수 있었다.
“으읏, 응, 현우 씨…….”
얇고 부드러워 흘러내리는 촉감의 잠옷은 잔뜩 힘이 들어간 성기의 굴곡을 고스란히 비쳐 보였다. 몸을 돌려 희주의 허리 위로 반쯤 올라타다시피 앉은 강현우는 밑으로 집어넣은 손을 슬금슬금 움직이며 그러쥔 성기를 주물렀다.
“괜찮아요. 말해도 돼.”
“그, 으응……. 그게, 음…….”
달콤한 속삭임에 희주가 고개를 저었다.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저를 이렇게 만져 주는 상상을 했다고 감히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대상이 되는 그 당사자에게는 더더욱. 그의 체향과 페로몬이 담뿍 배어 있는 침대에 누워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흥분해 버렸다고 말하기가 몹시도 부끄러웠다.
희주는 말하기를 주저하며 입술을 달싹이다 꾹 감쳐물었다. 발기한 성기를 거머쥐고 문지르는 손길에 희주는 무릎 뒤쪽에 바짝 힘을 주고, 점차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하는 이마를 베갯잇에 대고 문질렀다.
“내 생각 하면서 자위했어요?”
시선을 내려 희주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던 강현우가 직설적인 물음을 던졌다.
“내 냄새 맡으면서?”
“흑…….”
부끄러움 때문인지 쾌감 때문인지 옷깃 안쪽으로 보이는 살갗이 새빨갰다. 강현우는 고개를 숙여 입술을 나긋하게 붙이고는 손안에 든 성기를 살살 문질렀다. 잠옷 바지와 속옷을 들추고 직접 기둥을 주무르고 귀두 끝을 매만질 수도 있었지만, 강현우는 부러 그러지 않았다. 희주를 애타게 하여 기어코 대답을 끌어낼 생각이었다.
“말하기 싫거나 힘들면, 고개만 끄덕여도 돼요.”
“아, 아… 흣, 하아, 으…….”
“반찬 된 기분이 딱히 나쁘지는 않거든요.”
대답을 망설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강현우는 밑에 깔린 희주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집중했다. 잠깐의 기다림 이후, 동그란 뒤통수가 보일 듯 말 듯 하게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강현우는 성기를 쥐고 있던 손을 확 떼어 냈다.
“아……!”
그 순간 희주는 몸뚱이가 제 의지와 상관 없이 움직이는 것에 놀라 새된 탄성을 내질렀다.
순식간에 엎드려 있는 자세 그대로 엉덩이만 위로 쭉 끌어 올려지고, 최후의 보루처럼 허리에 걸려 있던 잠옷 바지가 허벅지 아래까지 벗겨졌다. 축축하게 젖어 있는 다리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속절없이 들이닥쳤다. 본능적으로 벌어진 다리를 오므리려고 했지만 어느새 그 사이에 떡 버티고 있는 강현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아니, 그저 넋이 나간 얼굴을 해서는 한쪽 뺨을 베개에 대고 눈을 깜빡이던 희주는 서서히 지금 이 자세가 무척 부끄러운 자세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헐벗은 성기를 내보이는 자세는 아니었지만, 성기 대신 구멍이 훤히 보이는 자세였다. 실내가 어둡기는 해도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는 그 모양이 그대로 보일 터였다.
의식을 해서인지 구멍이 마구 빠끔거렸다. 분명 이런 저를 보고 있을 텐데 강현우는 이상하리만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얼핏 공포감마저 서리는 듯했다. 희주는 아연해져 상체라도 조금 일으키려고 애를 써 댔다. 조금씩 바르작거릴 때마다 발기한 성기가 꺼떡거리면서 배꼽 아래를 툭툭 치며 말간 액을 묻혀 댔지만, 그런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혼자 해서 이 지경까지…….”
“현, 현우 씨…….”
“……씨발.”
강현우가 작은 목소리로 짓씹듯 뇌까린 욕에, 놀란 희주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더 까무러치게 놀란 것은 그다음 순간이었다.
자아라도 생긴 듯 빠끔거리는 구멍 위로 곧 습한 숨결이 닿았다.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일이지만 본능적으로 이어질 일을 직감한 희주는 온몸을 딱딱하게 굳혔다가 발작적으로 허리를 튕겼다. 하지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가온 두 손에 단단하게 붙잡히는 바람에 마음대로 뭘 할 수가 없었다.
“아, 잠까… 응! 현우, 현우 씨……. 읏, 힉! 저, 그거, 시, 싫어요. 아으, 흐…….”
갈라진 틈으로 내려앉은 살덩이가 구멍 위를 핥고 문질렀다.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두 눈을 부릅뜬 희주는 황급히 손을 뒤로 뻗어 보았다. 허벅지를 붙들고 있는 강현우의 손에 제 손을 얹고 억지로 떼어 내려 힘을 줘 봤지만, 제대로 힘을 쓰기도 전에 원래 놓여 있던 시트 위로 황급히 돌아갔다.
“아읏, 흣, 아아, 아……. 아흑, 놔, 놔 주… 으응!”
시트가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뼈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부여잡고, 이마를 베개에 마구 비벼 댔다. 희주를 더 이상 옴짝달싹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놓고는, 강현우는 움찔거리는 구멍 위로 천천히 혀를 움직였다.
이미 전부터 스며 나오고 있던 애액 때문인지, 좁게 다물린 입구 주변을 가만히 맴돌기만 해도 페로몬 향이 물씬 풍겼다. 강현우는 혀로 애액을 핥듯 문지르면서 구멍을 넓히려는 것처럼 혀끝을 세워 안쪽으로 쿡쿡 쑤셔 넣었다. 벌어진 구멍 안쪽을 거리낌 없이 날름 핥자 통통하게 살이 오른 엉덩이가 요란스럽게 들썩거렸다.
“으응, 하, 하아…….”
제 아래에서부터 적나라하게 들리는 빠는 소리에 희주는 할 수만 있다면 제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엎드린 채 아래를 빨리다니. 냅다 거부감부터 드는 행위임이 분명한데, 이 행위로 쾌감을 느끼고 있는 자신이 믿기지가 않았다. 발끝이 자꾸만 곱아들고, 눈앞에 안개가 낀 듯 흐릿해져 갔다.
희주는 힘이 쭉 빠져 버린 손을 움직여 더듬더듬 제 성기를 찾아 붙잡았다. 손만 잠시 가져다 댔을 뿐인데 흐느끼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젖었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구멍을 빨리는 동안 액을 더 뱉어 냈는지 둥근 귀두 끝이 미끌미끌했다. 제대로 건드렸다가는 그대로 사정할 것 같은 느낌에 희주는 귀두 대신 단단하게 모양이 잡힌 기둥만 서툴게 손바닥으로 감쌌다.
방금 전 강현우가 잠옷 바지 위로 만져 주었던 것보다는 못해도, 손으로 직접 잡아 흔들자 앞뒤로 전혀 다른 결의 쾌감이 찌르르 울렸다.
“앗, 응, 으응… 흣, 응…….”
희주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달뜬 숨을 헐떡거렸다. 안쪽을 자극하는 혀가 마치 성기라도 되는 것처럼 허리를 들썩거리면서, 발기한 성기를 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어 사정을 이끌어 내려 했다. 수치심이 쾌감으로 변모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부끄러워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대놓고 자위하는 거예요?”
엉덩이 골에 콧날이 뭉개지도록 물고 빨던 강현우가 구멍 위에 대고 속살거리더니 불쑥 고개를 들었다. 신음이야 듣기는 좋았다만, 마구잡이로 여기저기 튀는 것에 의아해 바라보니 구멍을 빨리면서 성기를 잡아 흔들고 있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더 쾌감에 솔직한 것 같기도 했다.
강현우는 희주의 손을 낚아채 제 쪽으로 쭉 끌어당겼다. 엉덩이만 들고 있느라 아래로 휘어진 등허리에 대고 눌러 살펴보자, 손바닥이 죄 성기에서 흐른 액으로 번들거렸다. 금방 사정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축축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강현우는 시선만 들어 올려 희주를 바라보았다.
“아까 내가 빨아 주는 상상도 했어요?”
강현우의 말을 듣고 구멍을 빨리던 감각이 상기라도 됐는지 희주가 우는 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비볐다. 그런 부끄러운 상상을 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
“……현우 씨가… 저, 만져 주는…….”
“이렇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현우는 희주의 말랑한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다른 곳은 다 말랐는데, 엉덩이만 통통하게 살이 올라서 희주가 허락만 한다면 이를 세워 잘근잘근 잇자국을 남기고 싶었다. 이런 생각이 미치자 강현우는 어이없다는 듯 자조했다. 더 은밀한 곳에 입술을 대고 정신없이 빨아 먹었으면서 맨살을 깨무는 것은 허락을 받겠다니.
“잘, 생각이…….”
“잘 생각이 안 나요?”
강현우가 제 다리 사이에 입술을 파묻었을 때부터 희주의 머릿속은 진작 하얗게 표백되었다. 방금 당한 애무에 비해 제가 한 상상은 어린애 장난에도 미치지 않는 수준이었다.
눈에 고인 눈물도 없으면서 서러운 듯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는 희주를 가만히 보다가 제가 입고 있던 가운에 손을 댔다. 샤워 후 허리춤에 단단히 매어 둔 끈이 잔뜩 헐거워진 채 풀어지기 직전이었다.
벌어진 가운 틈 사이로 나와 있는 발기한 성기를 희주 몰래 가볍게 훑은 강현우는 막 생각났다는 듯이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그러고는 협탁으로 손을 뻗어 손바닥만 한 박스 하나를 꺼내 들었다. 고작 희주를 물고 빤 것만으로도 강현우의 귀두에 맺혔던 액체가 이제는 시트 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런 거 말고. 넣어 주는 상상 하지 않았어요?”
바스락하고 비닐 뜯는 소리가 잠시 귓가를 스쳤다. 곧 구멍이 다시 벌어졌다.
“흐……!”
혀로 녹진하게 녹여 놓은 덕인지 손가락이 들어와도 불편하다거나 아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혀보다 더 단단한 것이, 혀가 닿지 않은 곳까지 제대로 문질러 주는 것 같아 성감이 빠르게 차올랐다.
희주는 늘어지게 앓으며 하나씩 안을 파고드는 손가락들을 버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을 가득 채운 손가락들이 각기 제멋대로 움직이면서 쑥 빠져나갔다. 묘한 아쉬움에 메마른 입술을 혀로 할짝거리고 있자니, 애액으로 흠뻑 젖은 손가락이 작은 둔덕을 이루고 있는 회음부를 가볍게 스치고 떨어졌다. 다리가 절로 오므려질 만큼 간지럽고, 또 좋았다.
“으, 흐윽… 흣!”
“오늘따라 안쪽이… 뜨겁고, 하……. 녹을 것 같아.”
강현우는 좁은 틈을 꾸역꾸역 벌리고 들어가는 제 성기를 욕심껏 내려다보았다. 조금씩 삽입할 때마다 팽팽하게 벌어진 구멍이 옴쭉거리며 성기를 물었다 놓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희주의 허리를 매만지던 강현우는 손을 움직여 맞물린 틈을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말캉한 구멍 안쪽이 말 그대로 제 성기를 녹여 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섬찟한 쾌감이 밀려왔다.
체위 때문인지 평소에는 다 들어가지 않던 성기가 몇 번의 허리 짓만으로도 뿌리까지 모습을 감추었다. 강현우는 끝까지 들어간 성기를 그대로 두고 허리만 뭉근히 돌려 보았다. 귀두 끝까지 빈틈없이 감싼 내벽이 느릿하게 휘저어지면서 엎드린 희주에게서 달큼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쓴 강현우는 혀를 세워 볼 안쪽을 주욱 훑었다. 술에 취한 건 오히려 제가 된 기분이었다. 쩌어억, 허리를 뒤로 물린 강현우는 금세 묻어 나온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제 성기를 내려다보다가 앞으로 퍽 강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아, 아! 하으, 흑, 흐으으……. 아흑, 응!”
파고드는 힘을 이기지 못한 몸이 허리 짓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술이 완전히 깨는 느낌과 함께 숙취가 올라오는지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희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신음하느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한참 희주의 허리를 붙잡고 있던 손이 느릿하게 앞으로 넘어왔다. 단순히 닿는 것만으로도 성감을 자극받은 희주가 허리를 비틀자, 이를 피하는 것으로 알았는지 강현우의 손이 아랫배를 단단히 받쳐 안았다. 희주는 아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강현우가 제 배를 감싸고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안을 파고드는 감각이 더욱 선연하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힉, 아아……!”
힘에 밀려 앞으로 쏠린 상체가 일순 뒤로 확 당겨졌다. 동시에 안을 깊숙이 파고든 성기가 정확히 정점을 짓눌렀다. 아릿한 통증에 숨을 헐떡인 희주가 땀으로 젖은 얼굴을 시트에 대고 문질렀다.
“아, 좋아요……. 현우 씨, 응, 좋아…….”
미미하게 스며 있는 페로몬에 홀린 듯 입술을 달싹이자, 그 실재가 파도처럼 희주를 덮쳤다.
“흐윽, 응, 아……!”
“읏, 하아…….”
머릿속까지 절여지는 듯한 쾌감에 참지 못한 희주가 발발 떨면서 사정액을 터트렸다. 팍 터져 나온 정액이 버석한 이불 위로 투둑 소리를 내면서 흩뿌려졌다. 일부는 아직 벗지 못하고 입고 있는 잠옷 상의에 묻기도 했다.
절정에 오른 구멍은 물고 있는 성기를 쥐어짜려는 것처럼 바짝 조여졌다가 흐물흐물 풀어졌다. 부러 짙게 푼 페로몬을 따라 흘러나온 희주의 페로몬을 맡은 강현우 역시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질퍽한 구멍 안으로 길게 박아 넣으며 사정했다.
강현우는 여전히 희주의 안에 제 것을 넣은 채 그 위로 무너졌다. 흥건하게 젖은 시트에 배를 대고 엎드린 희주는 더럽다거나 하는 생각도 제대로 못 하고 흐트러진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이어진 곳에서부터 누구의 것인지 모를 맥박이 쉼 없이 날뛰는 것이 느껴졌다. 희주는 등 뒤로 닿는 뜨거운 체온을 느끼면서 잔쾌감을 떨치기 위해 눈을 내리감았다.
“다시 씻어야겠네.”
땀과 정액으로 끈적거리는 아랫도리를 맞붙인 채, 강현우가 픽 웃음 지으며 중얼거렸다. 묵직하게 얹힌 몸이 잘게 흔들리자 희주는 문득 잠결에 느꼈던 진동이 떠올라 따라 웃었다. 재차 해야 할 샤워 때문에 웃은 거라 생각한 강현우는 제 밑에 깔린 희주를 소중히 매만지며 쪽쪽, 입술을 내렸다.
“괜찮아요? 혹시, 토할 것 같다거나.”
“아니요……. 괜찮아요. 저 술은 진작에 다 깼어요…….”
혼자 할 때는 몰라도, 남아 있던 술기운은 섹스하면서 진작 날아간 지 오래였다.
민망하다는 듯 입술을 감쳐물자 그런 그를 사랑스럽게 본 강현우가 귓가에 입술을 파묻었다.
“희주 씨.”
“네?”
“내가 좋아하는 거 알죠.”
어디 가지 말고… 계속 나랑 있으면 좋겠어요.
“희주 씨가 내 생각만 했으면 좋겠어요.”
벅차게 중얼거린 강현우는 희주의 대답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 온몸으로 희주를 꼭 끌어안았다. 숨조차 쉬지 못할 만큼 강하게 옭아매는 힘에 희주가 윽, 하고 신음을 흘렸다.
물론 힘은 금세 풀렸다. 강현우는 별생각 없어 보이는 듯했지만, 희주는 강현우가 말한 ‘내 생각’이 마치 자위의 근간이 되었던 ‘그 생각’으로 들려 남모르게 얼굴을 붉혀야 했다.
답을 해야 할까. 뭐가 됐건, 강현우의 바람은 이미 이루어진 듯해 제가 할 답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저… 현우 씨.”
희주는 침을 꼴깍 삼키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저는 이미… 현우 씨 생각만 하고 있어요.”
“……응?”
“저도 현우 씨가 제 생각만 했으면 좋겠어요.”
이번에야말로 더는 참을 수가 없게 된 강현우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려는 희주에게 키스 비를 내렸다. 달짝지근하게 입술을 맞물리자 각기 다른 두 개의 페로몬이 크게 술렁이다가 섞여 들었다.
“나도예요. 나도 희주 씨 생각만 해요.”
“……아.”
“앞으로도 그럴게요.”
강현우는 다시 진득하게 페로몬을 뿌리며 연인을 안았다. 아직까지 밤은 길고도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