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어? 저 사람들 또 왔네.
창밖을 내다보던 아이 하나가 어린애답지 않은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삼삼오오 모여 색칠 공부를 하던 아이들이 크레파스를 내던지고 우당탕탕 달려갔다. 누구, 누구? 형아, 나도 볼래! 안아 줘! 아직 덜 자란 조그만 몸들이 까치발을 들고 어떻게든 밖을 내다보려 애를 써 댔다.
작은 방 안이 금세 시끄러워졌다. 위험하니 매달려 있지 말라는 자원봉사자의 잔소리가 얼핏 들려왔지만, 아이들이 귀를 기울일 리가 없었다. 성당 관계자도, 자원봉사자도 아닌 외부인의 방문은 사랑의 집 원생들이 매주 손꼽아 기다리는 일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애새끼들 싸가지하고는.
왁자지껄한 소음을 뚫고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톡 부러진 샤프심이 문제집 위를 굴렀다.
한창 학교 숙제를 붙잡고 있던 어린 희주는 멈칫 손을 멈추었다. 시선만 들어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자, 방문 밖으로 비딱하게 선 남자가 보였다. 인근 명문 대학의 로고가 프린팅된 후드를 입은 그는, 봉사 시간을 채우러 왔다던 대학생 자원봉사자 중 한 명이었다.
어우, 씹. 담배 말려 뒈지겠네.
혼잣말을 들을 이가 없는 줄 알았는지 남자는 찡그린 표정을 풀지 않았다. 잠깐 후드 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온 손에는 하얀 담뱃갑이 들린 채였다. 차마 불을 붙이지는 못하고 연신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그는 신경질적인 한숨과 함께 담뱃갑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귀찮고 짜증이 난 티가 역력해 보였다.
대수롭잖은 표정을 한 희주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그대로 눈을 내리깔았다. 부러진 샤프심이 눈에 들어왔다. 희주는 조심스럽게 바닥을 쓸었다. 미리 치워 두지 않으면 누군가의 발에 밟혀 마룻바닥에 그 흔적을 남길 터였다.
손님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창문에 달라붙어 있던 아이들이 도도도 밖으로 달려 나가고, 그때까지 복도를 서성이던 남자도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방에 남은 사람은 이제 단 둘뿐이었다.
권희주. 넌 안 가?
가장 먼저 외부인의 방문을 목격한 아이가 슬그머니 희주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말은 그렇게 했으면서 정작 본인도 나가 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안 가. 너는?
똑같이 배를 깔고 엎드리는 아이를 힐끗 바라본 희주는 별 관심 없다는 듯 2번에 답을 체크 하면서 되물었다.
나도 별로.
누군데?
예전에 왔던 부자 아줌마랑 아저씨.
예전에 언제?
지난달에도 왔고, 지지난달에도 왔고……. 몰라. 엄청 많이 왔었어.
아이가 벌렁 드러누웠다. 낡은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엄청 부자인 것 같더라’ 하고 중얼거렸다.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희주는 다음 문제를 읽었다. 사각사각. 둘만 남은 방에 풀이 과정을 적어 내려가는 소리만 울렸다.
엄청 좋은 차 타고 왔더라. 오늘 데리고 가려나 봐.
유독 차에 관심이 많은 아이는 희주가 생전 들어 보지 못했던 차종을 말하며 시종일관 부럽다는 태도를 보였다.
부러운 마음을 가질 법도 했다. 희주와 함께 내년이면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 아이는 나이 때문에 입양 기회에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열셋은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지기에는 늦은 나이였다.
아, 나도 알파나 오메가로 발현했으면 진작 입양 갔을 텐데.
아이는 돌아오는 말이 없어도 홀로 쉼 없이 떠들었다. 급기야 희주가 풀고 있던 문제집을 들여다보며 ‘재밌냐?’ 하더니, 금방 흥미를 잃고는 신세 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베타였다.
알파면 몰라도 오메가는 안 돼.
희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이해 안 된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왜? 오메가들은 예쁘잖아. 어른들은 예쁜 애들 좋아해.
넌 남자잖아. 남자 오메가는 데리고 가면 등골만 휜대.
언젠가 들었던 말이었다. 희주에게 숱한 관심을 보이던 어른들은 오메가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가차 없이 등을 돌리곤 했다. 남자 오메가는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에서였다.
근데 남자 오메가여도 우성이면 되는 거 아니야?
다시 몸을 굴려 엎드린 아이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희주는 문제를 풀다 말고 아이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총기 없는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네가 입양 가지 못한 건, 네가 열성이라서 그런 거 아니야? 열등감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목소리였다.
말없이 빤히 보기만 하는 희주의 시선이 멋쩍었는지, 입술을 한번 감쳐물었던 아이가 툭 말을 이었다.
김세민은 우성이잖아.
김세민? 뜬금없는 언급에 희주가 눈썹을 까딱였다. 그러자 아이가 몰랐냐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몰랐어? 저 아줌마랑 아저씨, 김세민 데리러 온 거라는데?
아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직 설익었지만 코끝이 찡해질 만큼 달달한 향기가 스멀스멀 흘러들어 왔다.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이었다. 희주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라본 곳에는 어린 김세민이 서 있었다. 아마도 그 애의 부모가 될 어른들과 함께.
* * *
“…….”
힘껏 눈을 감았다가 뜨니 보이는 것은 새하얀 천장이었다. 바닥에 엎드려 열려 있는 방문을 보고 있었던 기억인데 난데없이 천장이 보이자 희주는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분명히 사랑의 집에 있었는데. 김세민과 눈이 마주치던 찰나가 아직도 생생했다. 잠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던 희주는 가지런히 놓인 손을 쥐었다 펴 보았다. 금방 손에 쥐고 있던 샤프는 온데간데없고, 보드라운 이불만 기분 좋게 휘감겼다.
아무래도 꿈을 꾼 모양이었다. 참 별 꿈을 다 꾼다고 생각하면서 희주는 발끝을 까딱거렸다. 잘 마른 이불은 부드럽고 또 푹신했다. 어쩐지 기분 좋은 냄새도 나는 듯했다.
이불 속에 푹 파묻힌 몸을 꿈틀거리며 옆으로 돌아누운 희주는 턱 밑까지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파묻어 보았다. 이불과 마찬가지로 뺨에 닿는 베개에서도 익숙한 알파 페로몬이 물씬 풍겼다. 희주는 지난 밤, 온갖 체액으로 난리를 쳐 둔 그 침대와 이 침대가 같은 침대라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좋은 냄새…….’
기분은 몽롱하고, 온몸은 나른했다. 허리와 다리 사이 민망한 부위가 묵직하고 뻐근하기는 했지만 불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역시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 것이 최고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푹신한 이불이 주는 감촉을 즐기고 있는데, 어디선가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깼어요?”
희주는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륵 떴다. 나른함에 취해 다시 반쯤 잠들었던 터라, 안개가 낀 듯 시야가 온통 흐릿했다. 인상을 깊게 쓰고 눈을 깜빡이는 모습을 보고 강현우가 흐릿하게 웃음 지었다.
“지금 막 깨우려고 했는데.”
문고리를 잡고 서 있던 강현우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희주는 서서히 밝아지는 시야에 눈이 부셔 연신 눈가를 찌푸리면서도, 점차 가까워지는 강현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강현우는 그동안 봐 온 모습들 중 가장 편안해 보이는 차림이었다. 방금 씻고 나오기라도 했는지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은 물에 반쯤 젖어 있었고, 걸친 옷가지라고는 하의가 전부였다. 아직 설레기만 한 연애 초반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제가 속물이라서 그런 건지, 아침부터 맞닥뜨린 끝내주는 근육 짜임에 저도 모르게 넋을 놓을 뻔했다.
희주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지금 몇 시예요? 물으려는데 질문 대신 쇳소리가 났다. 목이 따가워 콜록, 하고 기침을 터트리자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강현우가 희주의 등 뒤로 손을 넣어 일으키더니 입가에 무언가를 대 주었다. 무심코 들어 올린 손에 잡힌 것은 따뜻하게 데워진 머그 컵이었다.
“마셔요. 물이에요.”
적당히 따뜻한 물이 메마른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어지간히 목이 많이 말랐는지 희주는 숨 한 번 쉬지 않고 꼴깍꼴깍 삼켰다. 강현우는 그런 희주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칭찬이라도 하듯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포슬포슬한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겨 흐트러지는 느낌이 퍽 나른하고 좋았다.
“더 갖다줄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텅 빈 머그 컵을 자연스럽게 강현우에게 넘긴 희주는 해갈의 시원함에 얕은 숨을 폭 내쉬었다. 쩍쩍 갈라져 저조차 듣기 싫었던 목소리가 이제 제법 들어 줄 만했다. 동료 선생님들과 노래방을 가도 쉰 적이 없는 강철 성대가 왜 이렇게 망가졌나 기억을 되짚어 보니, 떠오르는 거라고는 온통 살색의 향연이었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확 밀려왔다. 희주는 티가 나게 시선을 피하며 손가락을 꿈지럭거렸다. 부끄러운 건 저뿐인지 강현우는 고개를 숙여 볼에 입맞춤을 해 댔다. 가볍게 입술을 비비적거리기만 하는 건조한 입맞춤이었지만 마치 혀라도 섞은 양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제 일어나야 해요.”
말과는 다르게 강현우는 희주를 놓아주지 않았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은 볼은 따끈따끈한 찐빵 같았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연신 입을 맞춘 강현우는 헐렁한 잠옷 안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꼴사납게 말라붙은 정액 자국이나 끈적거림은 전혀 없었다. 새벽에 정성껏 씻긴 보람이 있었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희주가 뒤로 발랑 넘어갈 때까지 강현우는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살결을 마음껏 지분거렸다. 새벽 내내 페로몬을 쏟아부은 덕에 희주에게서 온통 제 페로몬만이 느껴졌다. 본래의 오메가 페로몬을 맡을 수도 없을 만큼 알파 페로몬이 덕지덕지 묻은 것에 미소 지은 강현우는 희주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입술에 고인 물기를 쪽쪽 소리가 나게 빨아 먹고, 입 안에 혀를 넣어 여리고 촉촉한 혀끝을 간질간질 문지르기까지 한 강현우는 희주에게서 흐린 신음이 나오고 나서야 만족스럽다는 듯 입술을 뗐다.
“아직도 많이 졸려요?”
희주는 그런 강현우는 밉지 않게 흘렸다. 잠에서 깨자마자 여기저기 만져지고 녹진한 키스까지 나눈 마당에 졸릴 리가.
장난하냐고 묻는 듯한 흘김에도 강현우는 좋다고 웃었다. 희주의 몸을 덮은 이불을 가볍게 걷어 내고, 보송보송한 잠옷으로 휘감긴 마른 몸을 가뿐하게 안아 들었다. 서른이나 먹고 아기처럼 안기는 것이 낯부끄러웠지만, 전날 무리한 것을 생각해 고분고분하게 안기기로 했다.
“친구분 결혼식까지는 시간 좀 남았어요.”
희주의 이마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고 나서야 방을 나선 강현우는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불 켜진 집 안은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복도를 지나며 이곳저곳을 훑어본 희주의 눈이 동그랗게 벌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젯밤에도 설마 싶었는데, 대한민국 이 좁은 땅덩어리에 이토록 넓은 집이라니. 전세이기는 하지만 나름 방이 두 개나 되는 제 오피스텔은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의 근사한 집이었다. 방이 도대체 몇 개야? 부지런히 눈을 굴려 방문이 몇 갠지 세던 희주는 교실보다도 넓어 보이는 거실을 본 순간 세던 것을 온통 까먹어 버렸다.
“이따가 결혼식 가면 맛있는 거 많이 먹기야 할 텐데, 그래도 뭐라도 간단하게 먹여야 할 것 같아서요.”
“……아.”
강현우가 무어라 말하는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사는 오피스텔 거실 창 너머로 보이는 녹색의 주택가 옥상 뷰에도 만족했건만, 이 집 거실 창 너머로는 한강이 보였다. 아침인지 낮인지, 아무튼 쨍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받아서 반짝반짝 빛나는 한강이 멀찍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바로 코앞에 있었다.
이런 웅장한 집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거 아니었어? 실제로 사람이 살 수 있다는 말이야? 사람 사는 집에 웅장하다는 표현은 난생처음 써 보는 희주였다.
어느덧 주방에 다다른 강현우는 아일랜드 식탁 앞에 놓인 스툴 의자에 희주를 조심스럽게 앉혔다. 식탁이 과장을 좀 보태서 방금 전까지 누워 있던 침대만 한 크기였다.
“간단하게 빵이랑 수프 같은 거 준비했는데……. 왜요. 뭐 필요한 거 있어요?”
감탄과 경악을 오가는 눈빛을 눈치챈 강현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커피 마실래요?”
“아, 네…….”
“아이스?”
희주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꿈을 이어서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몽중몽, 꿈속의 꿈, 뭐 그런 거. 아까 꿨던 게 꿈인 건지 지금 이 상황이 꿈인 건지, 골이 띵 울릴 만큼 차가운 커피로 정신 좀 차려야겠다 싶었다.
노릇노릇하게 구운 빵과 고소해 보이는 수프가 눈앞에 한 대접으로 있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은 걸 보니 이건 꿈인 게 확실했다. 그럼 어디서부터 꿈인 걸까? 시발점을 찾아 기억을 더듬는 희주의 눈에 문득 커피를 내리는 강현우의 등짝이 들어왔다. 불그죽죽하게 그어진 손톱자국이 한가득인 걸 보고 희주가 헉, 하고 헛숨을 들이마셨다.
“현우 씨, 등이…….”
“응?”
아연한 희주의 중얼거림에 강현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희주의 시선이 제 등에 향해 있는 것을 알아채고 별거 아니라는 듯 나직이 웃었다.
“뭘 놀라고 그래요. 본인이 만든 거면서.”
짐작은 했지만 확인 사살은 희주를 울상 짓게 만들었다.
얼음을 가득 넣은 아이스아메리카노와 빨갛게 우려진 이름 모를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앉은 두 사람은 한가로이 식사를 마쳤다.
무려 두 잔의 냉수로 아니, 아이스아메리카노로 시원하게 속을 차린 희주는 곧 저가 처한 상황이 현실임을 받아들였다. 여전히 거실 창 너머로 보이는 한강에는 윤슬이 반짝였고, 밤새 혹사당한 하체는 뻐근했으며, 등짝에 손톱자국을 달고 있는 제 애인은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저러다 흉터 남으면 어떡하지. 멀찍이 떨어진 소파에 앉아 주방 쪽을 힐끗거리던 희주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기 위해 소매를 걷어붙였다가 금방 거실로 추방당한 상태였다.
가까이서 보나 멀리서 보나 똑같이 아파 보이는 빗금에서 시선을 거둔 희주가 슬쩍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열 손가락 모두 흰 부분이 거의 없다시피 짧고 둥글었다.
손톱을 여기서 더 짧게 깎아야 하나? 짧고 동글동글하기만 한 손톱이 저런 상처를 남겼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아, 희주는 곧 빨려 들어갈 듯이 손톱 모양에 신경을 집중했다.
“아. 희주 씨. 거기 테이블 위에 보면 쇼핑백 있죠?”
그렇게 한참 심각하게 들여다보고 있는데, 예고도 없이 날아온 물음이 단번에 그 집중을 깨 버렸다. 화들짝 놀라 휘둥그레진 눈을 한 희주가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부산스레 두 손을 감추었다.
“구두예요. 오늘 아침에 퀵으로 올 거라고 했던 거.”
강현우의 말 뒤로 달그락거리며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배경 음악처럼 섞여 들었다. 아직까지 등을 내보인 채 설거지 중인 그로서는 뒤에서 희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아……. 제 거요?”
“네. 희주 씨 거. 그리고 어제 산 옷은 아까 희주 씨 자고 있을 때 챙겨 왔어요. 차에서 가지고 올라오는 걸 깜빡했더라고.”
마지막 말에 희주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챙기기를 깜빡한 것은 강현우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제가 먼저 다녀오려고 했는데 선수를 뺏겼다. 어쩐지 민망해진 희주는 고개를 숙이듯 테이블 위로 시선을 내렸다. 과연 강현우가 말한 대로 노란 쇼핑백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지금 바로 신어 볼래요?”
“아……. 그럴까요?”
“그게 수제화기는 한데, 말이 수제화지 희주 씨 발 모양이랑 치수에 맞게 맞춤으로 제작한 건 아니라서 조금은 불편할 수도 있거든요. 원래 며칠 길들여 놔야 덜 아픈데 그럴 시간이 없어서…….”
조곤조곤 말을 잇던 강현우가 “아. 아니다” 하고 말을 끊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쇼핑백을 끌어다가 그 입구를 벌리기까지 했던 희주가 의아해하며 눈을 치켜떴다.
“지금 말고 이따가 나갈 때 신어 봐요.”
어느새 설거지를 마친 강현우가 젖은 손을 닦아 내며 다가왔다.
“처음 와 보는 곳인데 둘러보지도 못했잖아요. 집 구경시켜 줄게요.”
“집 구경이요?”
“네. 나도 내 집에 누가 온 건 처음이라, 집 구경시켜 주는 것도 처음이거든요.”
지금 아니면 볼 시간도 없을 것 같고. 싱긋 웃은 강현우가 허리를 숙였다. 소파에 앉은 채 강현우가 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희주는 제 몸이 단숨에 붕 뜨는 것에 놀라 두 팔을 허우적거렸다. 눈앞에 강현우의 얼굴이 보였다.
“저 혼자 걸을 수 있어요…….”
“알아요. 근데 지금 희주 씨 실내화 안 신었잖아요.”
“발 안 시려요.”
“안 돼. 지금은 안 시려도 조금만 있으면 시릴 거예요. 타일 바닥이잖아요.”
아무리 타일 바닥이라고 해도 마냥 차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강현우는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그럼 저도 실내화를 신겠다는 희주의 말에는 없다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누가 온 적도 없고, 앞으로 누가 올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은 터라 손님용으로라도 구비해 둔 것이 없다는 거짓말이 입에 침을 바르지 않고도 술술 나왔다.
“어차피 우리 둘밖에 없는데 뭐 어때요.”
강현우는 빨개진 볼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그는 오늘 희주가 눈을 뜬 순간부터 희주의 두 발이 바닥에 닿는 걸 용납 못 할 사람처럼 굴었다.
결국 체념한 희주는 강현우의 목에 팔을 두른 채, 자의가 아닌 타의로 집 안 곳곳을 구경했다. 강현우의 집은 얼핏 봤던 것보다 훨씬 웅장했다. 방이 어찌나 많고 또 넓은지 희주는 방문을 열어젖힐 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여기 이 방이랑 옆방은 안 쓰는 방이에요.”
침실과 서재, 드레스룸까지 차례차례 구경을 마친 희주를 데리고 강현우는 나란히 붙어 있는 문 중 왼쪽의 것을 열었다. 안 쓰는 방이라는 말답게 아무런 가구 없이 냉기만 덩그러니 놓인 방이었다. 집 안 곳곳에 묻어 있던 강현우의 페로몬마저 이곳에서는 느껴지지 않기도 했다.
“아무래도 혼자 살다 보니까 다 쓰지는 못하더라고요.”
대단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통에 희주는 할 말을 잃고 눈만 껌뻑였다.
“선생님들도 매년 공부해야 하죠?”
“네?”
빈방에서는 딱히 볼 것이 없는지라, 짧게 발만 들이는 정도로만 구경을 마친 뒤 거실로 돌아 나오는 길이었다. 강현우가 갑자기 뜬금없는 것을 물어 왔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대답이 어렵진 않았다.
“안 하기가 쉽지는… 않아요. 아무래도 교육 과정이 계속 바뀌기도 하고……. 요즘 학생 중에 사교육 안 받는 친구 찾기가 어렵다고는 해도, 그래도 공교육이 우선이니까요.”
흠. 야무진 대답에 강현우가 짧게 침음했다. 물어봤으니 대답한 것뿐, 왜 이런 걸 물어보는지 알 겨를이 없었던 희주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한 강현우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구조랑 사이즈가 서재랑 똑같아요. 옆방에는 작게 욕실이 딸려 있어서 드레스룸으로 활용하기 좋을 거고.”
“……?”
무슨 말이냐고 묻는 듯한 눈빛에 강현우가 어렵지 않게 대답해 주었다.
“하나는 서재, 하나는 드레스룸으로 쓰면 좋겠다 싶어서요.”
이미 도서관과 백화점을 통째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방이 있는 마당에 비어 있는 방들을 굳이 같은 용도로 쓸 이유는 없을 터.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희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위에 입술이 내려앉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쪽쪽거리는 소리만 쉼 없이 오가는 사이, 강현우의 걸음은 거실 창 앞에서 멈춰 있었다.
무심결에 앞을 바라본 희주의 눈이 서서히 크기를 키웠다. 무슨 질문을 듣고, 무슨 대답을 했었는지 따위는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휘발되어 사라졌다.
“다행히 날씨가 좋네요.”
“와…….”
강현우는 품에 안겨 있던 희주를 거실 창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 주었다. 홀린 듯 바닥에 발을 디디고 선 희주는 바로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진 광경에 쉬이 눈을 떼지 못하고 연신 탄성을 내질렀다.
창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는 보지 못한 풍경이 발아래 펼쳐져 있었다. 강 건너편으로 이어진 다리 위는 차들로 빼곡했고, 둔치에 조성되어 있는 공원에는 제각각 주말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시선을 옮기자 트랙을 따라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있었고, 공을 튕기고 노는 사람들도 있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마치 장난감 세상 같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인파가 만드는 온갖 소음이 들리는 듯했는데, 제가 서 있는 실내는 고요함이 전부였다.
“마음에 들어요?”
등 뒤에서 끌어안으며 희주의 어깨에 턱을 괴듯 올린 강현우가 조용히 물었다. 희주는 목덜미에 닿는 숨결이 간지러운지 어깨를 움칠 튀기면서도 굳이 밀어내지는 않았다.
“네……. 밤에 보면 더 멋있을 것 같아요.”
한강 다리가 몇 개까지 보이는지 세어 보던 도중, 문득 밤에 내려다보는 풍경도 궁금해졌다. 서울 야경이 그렇게 멋있다는데. 그 속을 대번에 꿰뚫어 보기라도 했는지 강현우가 고개를 틀어 희주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이따가 저녁에 여기 앉아서 와인이나 한잔할래요?”
“와인이요?”
“얼마 전에 선물 받은 게 있는데, 희주 씨도 알다시피 제가 술은 별로 즐기는 편은 아니라서요.”
상상만으로도 들뜨는지 냉큼 고개를 끄덕이는 희주의 볼에 강현우가 또 한 번 입을 맞추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술 선물이었지만 받아 놓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현우는 희주를 제 발등 위에 얹고 왈츠라도 추듯이 뒤뚱뒤뚱 창가를 오갔다. 앞으로는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연인의 체온에 등을 기댄 채 한껏 나른해진 희주는 강현우가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갔다.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또는 멈췄으면 하고 바라게 될 정도로 꿈만 같은 순간이었다.
“아…….”
그때 허리에 감겨 있던 손이 윗옷을 비집고 들어왔다. 잠들 듯 말 듯 가물거리던 눈이 번쩍 커졌다. 희주는 예고도 없이 안으로 불쑥 들어와 맨살을 지분거리는 손길에, 피하듯 허리를 앞으로 구부렸다.
“조금 부은 것 같은데.”
“아, 음……. 조금 아파요.”
피하려는 몸짓이 무색하게도, 희주가 몸을 앞으로 구부리는 것과 동시에 강현우의 손이 가슴께까지 단번에 올라왔다. 뒤로 당기는 힘에 할 수 없이 도로 등을 기댄 희주는 마른 가슴을 꼬집듯 잡았다 놓는 손길에 잇새로 앓는 신음을 흘렸다.
정점에서부터 찌르르 올라오는 감각을 통증인지 쾌감인지 단번에 단정 지을 수가 없었다. 꼬집힌 곳이 마구 찌릿하는 것을 보면 통증인 것도 같고, 아랫배가 당기는 것을 보면 쾌감인 것도 같았다.
희주는 제 배를 단단하게 끌어안은 팔뚝에 덜덜 떨리는 손을 얹었다. 강현우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잠옷이 울룩불룩 들썩거렸다. 움직임이 눈에 보이지 않는 데다 강현우의 얼굴마저 보이지 않으니 묘한 흥분감이 스멀스멀 발끝을 타고 올랐다.
“읏……!”
기어가듯 상체 여기저기를 문지르던 손가락이 어느 순간 퉁퉁 부어 있는 유두를 톡톡 건드리더니 이내 강한 힘으로 잡아 비틀었다. 내내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밀어내지는 않던 희주가 파드득 떨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래 봤자 강현우에게 가로막혀 오갈 데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무릎 뒤에 힘이 빠져 미끄러질 뻔한 희주를 강현우가 빠르게 끌어당겨 안았다. 뒷골이 오싹해질 만큼 명백한 쾌감에 희주는 겨우겨우 목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었다. 순간 멈칫, 움츠러드는 움직임을 느낀 강현우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커다란 거실 창 너머, 눈앞에 보이는 환한 대낮의 광경에 멈칫했던 희주는 초점이 다시 맞춰지며 보이는 제 모습에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거울처럼 뚜렷하지는 않지만 흐릿하게 비치는 인영은 분명 자신이었다. 얇은 잠옷은 명치 아래까지 들려 아랫배가 훤히 드러나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선정적이었다. 아주 조금만 자세히 보면 서서히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성기도 어렴풋이 보일 것만 같았다.
대낮에, 그것도 밖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문 앞에 서서 흥분하고 있음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희주는 다급하게 제 가슴을 덮고 있는 강현우의 손을 밀어내듯 움켜잡았다.
“현우, 현우 씨. 밖에서 보여요.”
“설마. 여기 밖에서는 안 보여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강현우는 그대로 귓불을 물고 빨아들였다. 타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귓불에 후우, 짧은 입김을 불어 넣자 목덜미 아래로 솜털이 바짝 서는 것이 보였다.
“뭘 해도 보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으……. 장난치지 마세요…….”
“장난 아닌데.”
축축하게 귀 안으로 엉겨드는 혀에 희주가 떨쳐내듯 고개를 흔들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그의 말이 거짓말일 리는 없지만, 이렇게 훤히 드러내놓고 일을 치른다고 생각하자 밀려오는 오싹하고 야릇한 감각을 견딜 수가 없었다. 여기서 정말 흥분하게 되면 그 수치심이 어마어마할 게 분명했다.
희게 질린 희주는 급기야 강현우의 팔을 찰싹찰싹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의 품을 벗어나기 위해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저, 저… 나갈 준비해야 되는데요…….”
“시간 많이 남았어요.”
“그… 저 머리도 다시 감아야 하고, 말리기도 해야 하고…….”
“어차피 내가 데려다주잖아요. 천천히 준비해도 돼요. 안 늦게 데려다줄게요.”
강현우는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했지만 희주가 곧 눈물을 쏟아 낼 듯 울먹거리자 어쩔 수 없다는 양 손을 뗐다. 능청스레 물러난 강현우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을 본 희주가 눈을 흘겼다. 저를 놀렸다는 괘씸함에 숨이 씨근거렸다.
“같이 씻을까요?”
“혼자 씻을 수 있어요!”
홱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발을 구르며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고 강현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 희주 씨.”
“왜요!”
“그쪽 아니에요.”
“…….”
“안방 욕실 써요. 복도 가장 끝에 왼쪽 방.”
어제 쓴 방 있잖아요. 기억나죠?
대답도 없이 방향을 틀어 강현우가 말한 대로의 방향으로 걸어가는 희주의 뒷덜미가 빨갰다. 강현우는 그의 뒤에 대고 “갈아입을 옷은 앞에 둘게요” 덧붙였다. 잠시 후, 쾅 하고 반항적으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또 한 번 웃음이 터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 *
쉴 새 없이 셔터를 누르던 사진기사가 로비를 돌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운 순간, 빳빳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던 여나연이 자세를 무너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 사진을 찍기 위해 들이닥쳤던 하객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간 터라, 그녀의 호기에 무어라 훈수를 두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아니, 해도 뜨지 않은 새벽부터 일어나 단장을 하고 손님들을 맞고 사진도 수백 장이나 찍었는데 아직 입장조차 하지 못한 것이 영 믿기지가 않았다. 디데이까지 세어 가면서 기다려 온 날이건만 정작 당일이 되니 한시라도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다니.
반나절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더니 배가 허하다 못해 쓰리기까지 했다. 홀쭉해진 배를 예복 위로 쓰다듬은 여나연이 잔뜩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언니.”
“왜. 화장실 가고 싶어?”
제집 소파인 양 반쯤 드러누워 있던 조한희가 겨우 목만 세워 여나연을 바라보았다.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건 여나연뿐만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나 고추기름 둥둥 떠 있는 해장국 먹고 싶어. 밥 팍팍 말아서.”
“말하지 마. 침 고여.”
“아니다. 빵이 제일 먹고 싶어. 탄수화물.”
말하지 말라니까……. 아는 맛이 가장 무섭다고, 여나연이 주문을 외듯 먹고 싶은 음식들을 나열하기 시작하자 조한희가 늘어지며 길게 탄식했다.
“언니. 다들 감정 복받쳐서 운다는데 나는 배고파서 눈물도 안 날 것 같아.”
“표정 관리 잘해. 먹을 거 생각하다가 감동적인 타이밍에서 웃지 말고.”
“이젠 웃음도 안 나……. 하도 웃었더니 얼굴 근육이 다 아프네.”
“얼굴 만지지 마. 화장 번져.”
무심결에 얼굴 위로 손을 올렸던 여나연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허공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진짜 식만 끝나 봐라. 누가 말려도 당장 세수부터 하고 밥부터 처먹을 거니까.
두세 시간 정도만 고생하자. 내일 지금 이 시간이면 우린 몰디브에서 모히토 마시고 있을 거야……. 시작도 전에 잔뜩 지친 두 사람은 결연하게 각오를 다졌다.
“저기, 나 들어가도 돼?”
밀려드는 하객들과 웃으며 사진을 찍고 축하를 겸한 안부를 주고받기를 한참, 이제 입장을 준비해 달라는 예식 도우미의 말에 두 사람은 이제야 슬슬 긴장되기 시작하는지 표정을 굳혔다. 혹시 뭐 잊은 것 없나 빠트린 것 없나 대기실을 나서기 전 머리를 맞대고 마지막 점검을 하는데, 어디에선가 조심스럽게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너나할 것 없이 홱 고개를 돌렸다.
대기실 앞에서 주저하며 망설이는 이를 발견한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벌렸다.
“권 선생.”
“권희주!”
힘들어 구겨져 있던 표정들이 순식간에 화악 밝아지고, 긴장으로 바짝 굳은 어깨들이 느슨히 풀어졌다.
눈치를 보며 서 있던 희주가 그제야 미소하며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들였다. 두 사람이 서 있는 소파 앞에까지 가까이 다가가자, 조한희가 먼저 악수를 청해 왔다. 이어지는 여나연의 악수와 와 줘서 고맙다는 진심 어린 말에, 희주는 다른 손으로 제 목덜미를 덮으며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미안. 늦었지.”
“권 선생이 왜 안 오나 했다.”
“야. 너랑 사진도 못 찍고 입장하는 줄 알았어.”
전처럼 또 약속 까먹은 건가 했다, 야. 여나연이 투정 부리듯 입술을 비죽 내밀자, 희주가 겸연쩍게 입꼬리를 당겼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 강현우 때문이었다. 씻고 나온 희주의 머리를 손수 말려 주고, 이리저리 만져 스타일링을 해 준 것까지는 좋았다. 백번 양보해 넥타이를 매 준 것까지도 좋았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 짓던 강현우는, 마치 선물 포장이라도 풀어내듯 기껏 다 입은 와이셔츠 단추에 손을 대고야 말았다. 늦지 않게 데려다준다면서, 이게 다 예쁜 제 탓이라는 이상한 이유를 갖다 붙이며 능글맞은 소리나 해 댔다.
혹시 잘못 움직였다가 옷에 주름이라도 생길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드레스 룸 한가운데서 일을 치르는 바람에 예정보다 늦게 집을 나서게 된 것이었다.
기어이 늦게 만든 강현우는 뭐가 그리도 여유로운지 웨딩 홀로 가는 내내 괜찮다는 말만 해 댔다. 희주만 혼자 조급해져 시계가 닳도록 들여다봤더란다.
뭐, 어쨌거나 늦지 않게 도착하기는 했지만 여나연의 말대로 하마터면 사진 한 장 찍지도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 강현우를 향한 원망이 재차 치솟았다. 차마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길이 막혔다는 말로 대충 상황을 넘긴 희주는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늦어서 미안한 만큼 봉투는 두툼하게 준비했다?”
“뭐래. 우리 사이에.”
“더 웃으면 입 찢어지겠다.”
세 사람이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렸다.
할 말이 쌓이고 쌓여 있었지만 이제는 정말 시간이 얼마 없었다. 얼른 사진 몇 장 찍자는 조한희의 제안에 희주는 이따가 찍어도 되지 않느냐며 손사래를 쳤지만, 여나연은 지금 아니면 안 된다면서 소파에 도로 엉덩이를 붙였다.
“여기 조명 때문에라도 찍어야 돼. 빨리 앉아.”
단호하게 말한 여나연이 얼른 앉으라며 눈짓했다. 어느새 조한희는 쪼르르 가서 앉아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참 쿵짝이 잘 맞는 커플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웃은 희주가 가서 앉자, 기다리고 있던 사진 기사가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빛과 같은 속도로 사진 촬영을 마치고 나서 쫓기듯 식장 쪽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이 진행되는 홀 로비는 안에 자리가 없어 들어가지 못한 하객들로 북적거렸다. 어차피 앉을 자리도 없고, 버진 로드를 기준으로 어느 쪽에 앉아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희주는 뒤에 서서 보는 편을 택했다. 문밖으로 나온 그가 입장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의 근처로 가서 섰다.
“따로 입장해? 같이 안 들어가고?”
조한희를 앞세우고 선 여나연에게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두 사람 성격상 나란히 손잡고 동시 입장을 할 줄 알았더니 급식 줄을 서듯 앞뒤로 서 있는 모습이 낯설었다. 매무새를 정돈하던 조한희가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둘 다 주인공이기는 한데, 살면서 언제 또 이렇게 주목을 받아 보겠어. 각자, 또 같이. 일단 지금은 각자.”
닫혀 있는 문 안쪽이 고요해진 것이, 드디어 입장이 코앞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먼저 입장하기로 한 조한희가 입술을 모아 크게 숨을 내쉬었다. 누나 파이팅. 주먹을 불끈 쥐며 작게 속삭이자 눈짓으로 화답한 조한희가 씩씩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다음은 여나연의 입장 순서였다.
“근데 왜 혼자야?”
예식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문 뒤에 선 여나연이 희주를 힐끔 쳐다보았다. 사회자가 무슨 웃긴 말이라도 했는지 문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워낙 소리가 웅웅 울리는 탓에 무슨 말을 했는지 알 겨를이 없었다.
나?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희주가 눈을 휘둥그레 떠 보이자 여나연이 “같이 온 거 아니야?” 하고 뜻 모를 말을 또 했다. 그 말을 일행도 없이 왜 혼자 왔냐는 뜻으로 이해한 희주는 여나연, 조한희와의 접점을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고등학교 동창에, 대학교 동문이기는 해도 반과 전공이 달랐던 터라 겹치는 지인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럼 내가 혼자 오지, 누구랑 와? 너랑 나랑 과도 단대도 아예 달랐는데.”
유일한 교집합은 조한희 한 명뿐이었다. 거짓말 없이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여나연의 눈이 확 가늘어졌다.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응?”
“너 만나는 사람 있잖아.”
여나연은 놀란 눈이 된 희주를 보곤 헹, 하고 코웃음을 흘렸다. 희주는 어떻게 알았냐며 말까지 더듬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하도 대놓고 페로몬을 묻히고 왔기에 말 안 해도 알아 달라는 줄 알았더니, 둔하기로는 세상 제일가는 제 친구는 정녕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희주가 대기실에 나타났을 때부터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여나연은 조한희와 재빨리 눈빛을 교환한 터였다. 오며 가며 묻은 페로몬이라기에는 그 결이 완전히 달랐다.
“너 알파 페로몬 장난 아니야. 네 페로몬이 원래 무슨 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
“뭔 놈의 마킹을 무슨… 사람 하나 죽일 것처럼 해 놨네. 어떤 알파가 너한테 말이라도 걸면 뭔 일 날 것 같은데? 최소 뉴스 사회면에 뜰 정도?”
숨길 생각이 없는 건 권희주가 아니라 권희주의 알파인가? 새하얀 얼굴이 조금씩 빨개지는 것을 보며 웃음을 삼킨 여나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기 같이 온 거 아니야?”
“……앞까지 데려다줬어.”
“안 올라오시고 그냥 가셨어? 같이 올라오지, 왜?”
“뭐 하러……. 아직 정식으로 소개해 주지도 않았잖아.”
그건 그러네. 빠르게 납득한 여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얼굴 보고 통성명이라도 했으면 몰라, 저 같아도 말로만 전해 듣던 친구의 결혼식으로 하객으로 가는 것은 조금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뭐… 그때 내 조언은 귓등으로 흘려보낼 줄 알았는데. 의외네. 제대로 귀담아들었나 보다?”
“또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그래. 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었지?”
“아니, 뭔 소리냐고.”
여나연은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뚱한 표정은 마치 ‘그것까지 다시 알려 줘야 돼?’ 하고 묻는 듯했다. 어쩐지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아 고개를 흔들었지만, 과연 그녀의 입이 훨씬 빨랐다.
“속궁합 확인하셨냐고요.”
“미친……! 거 아니야?”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던 희주는 닫힌 문 안쪽에서 터져 나오는 박수갈채에 황급히 볼륨을 낮추었다.
그러고는 곁에 서 있는 예식 도우미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심한 꼴도 많이 봐 온 탓일까, 정면을 바라보고 선 예식 도우미의 시선이 아주 조금 흔들린 것도 같았지만 두 어른들의 대화에 크게 동요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맞지? 그때 그 맞선남?”
원래 남들 눈치 따위 보지 않는 성격의 여나연만 흐흐, 변태 같은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내가 살다 살다 권희주가 연애하는 걸 다 보네. 사귀는 거 맞지?”
대답은 재깍 돌아오지 않았지만, 여나연은 침묵을 곧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아, 조만간 내 친구가 나 국수 먹게 해 주나?”
“조용히 하라고.”
즈영히 흐르그. 꽉 다문 잇새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왜 소취제를 생각 못 했지. 늦지 않을까 시간을 확인하는 것에만 급급하여 강현우의 페로몬을 생각지도 못했다. 그냥 알파도 아니고 우성 알파라 엄청 티 났을 텐데. 학교만 아니면 상관은 없었지만 말을 듣고 나니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 다행이다, 야. 이따가 너 부케 받아야 되잖아.”
“……뭐?”
팔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던 희주가 우뚝 멈추었다. 누가 뭘 받아? 뜨악, 하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입을 떡 벌렸다. 그랬더니 여나연이 도리어 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한희 언니가 말 안 했어?”
“…….”
“헐, 미안. 말한 줄……. 그래도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네.”
문득 여나연이 다행이라는 말의 뜻은 알고 말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먼저 가지 말고 기다려. 부케 받아야 돼, 너.”
“아니, 잠깐만. 이렇게 갑자기?”
“그렇게 됐어. 야, 나 이제 들어간다. 박수 크게 쳐. 알겠지? 어흐, 긴장돼.”
분명 말뿐인 긴장이었다. 붙잡을 새도 없이 홀랑 들어가 버리는 여나연의 뒷모습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희주는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탁 집었다. 그 와중에 강현우가 공들여 만져 준 머리를 망칠 수 없어 가르마를 피해 정교하게 손을 움직였다. 박수고 뭐고, 어쩐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 * *
지잉.
내내 잠잠했던 휴대폰이 액정을 반짝이며 길게 진동했다. 어둠이 내린 창밖을 응시하고 있던 희주가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그득한 차 안, 환한 빛이 퍼지며 희주의 눈이 찡긋거렸다. 하도 길게 진동하기에 전화라도 걸려 오는 줄 알았는데, 전화가 아니라 메시지인 모양이었다. 희주는 부신 눈을 연신 감았다 뜨며 얼른 휴대폰에 뜨는 이름을 확인했다. 여나연이었다.
“누구예요?”
누구에게서 연락을 받고 저러는지, 강현우는 가만히 있다가 피식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 희주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나연이요. 이제 막 도착했나 봐요.”
마침 차가 정지 신호를 받고 멈추었다. 희주는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채 화면을 강현우에게 보여 주었다. 강현우는 제게 휴대폰을 들이미는 희주에게 짧게 시선을 뒀다가 고개를 기울여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손바닥 크기의 화면에 에메랄드빛 바다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희주가 보고 있던 것은 온통 바다 사진들이었다.
“가서 사진 많이 찍고 자랑 좀 해 달라고 했더니 이래요. 사진만 한 50장 보낸 것 같아요.”
“50장?”
“아마 더 될걸요?”
강현우에게 잘 보이도록 희주는 아예 몸까지 기울였다. 신호가 바뀌기 전에 한 장이라도 더 보여 줄 셈인지 사진을 넘기는 엄지손가락이 바삐 움직였다.
자랑 좀 해 달라는 말은 인사치레 반, 진심 반으로 했던 말이었다. 아무래도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몇 없는 친구들끼리의 결혼이기도 했고, 이들이 신혼 여행지로 정한 몰디브는 휴양지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희주에게 환상의 섬이나 다름없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끽해야 한두 장 정도 받고 말겠거니 했는데, 여나연은 쓸데없이 제 부탁을 잘 들어주었다. 사진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구도와 색감은 물론이고 사진 속 인물도 계속해서 바뀌었다. 아무래도 신중을 기해 고른 A컷들과 SNS에 올리지 못한 B컷들까지 모조리 보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나름대로 추리고 추렸을 텐데 첫날부터 그 숫자가 무려 오십을 넘어갔다. 그러니 메시지 알람을 전화로 착각했던 것이다.
다시 신호를 받은 차가 출발하면서 희주는 똑바로 자세를 바꾸었다.
/messsage*i/
하늘이랑 바다랑 색 장난 아니네.
무슨 엽서 보는 것 같아.
뭐 이렇다 할 말이나 설명 없이 정말 정직하게 사진만 덜렁 보낸 것이 퍽 어이가 없었지만, 희주는 사진을 본 감상을 적어 메시지를 보냈다. 어디까지나 제 추측에 불과했지만, 두 사람이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당분간 저와의 대화 창은 여나연의 일방향 SNS 또는 사진첩 역할을 톡톡히 할 것만 같았다.
임무를 완수하고 다시 노는 데에 집중 중인지 메시지를 확인했다는 표시는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메신저 프로필이 바뀌어 있었다. 분명 결혼식 사진이었던 것을,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바다 사진으로 바꿔 버린 것이었다.
“예쁘다.”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린 혼잣말에 강현우는 재차 곁눈으로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친구끼리 예쁘다고 할 수도 있는 거지만, 희주가 다른 사람을 향해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는 것에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진짜 예쁘지 않아요? 산호까지 다 보이는 게 너무 신기해요.”
다행히 희주가 보고 있던 사진에는 사람이 단 한 명도 나오지 않고, 오로지 바다만 찍혀 있었다.
“몰디브라고 했죠? 친구분 신혼여행 간 곳이.”
“네. 둘 다 신혼여행 로망이 몰디브였거든요.”
희주는 사진들을 몇 번 더 넘겨보다가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어두운 곳에서 환한 액정을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창 너머가 더 까맣게 느껴졌다.
“신혼여행으로 많이 가는 곳이죠. 대표적인 휴양지니까.”
“저도 관광지보다는 휴양지가 더 좋아요. 음, 몰디브도 좋고… 하와이? 사이판이랑 괌도 한번 가 보고 싶어요. 저 아직 해외여행은 가 본 적이 없거든요.”
“음, 그래요?”
희주는 비행기라고는 제주도 가는 비행기밖에 타 보지 못했다고 웃었다. 그나마 타 본 제주행 비행기도 수학여행 인솔자로서 탄 것밖에 없다고 덧붙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불현듯 제주에서의 기억 중, 특별하게 달랐던 올해의 수학여행이 떠올랐지만 온통 부끄러운 기억뿐이라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그중에서 가장 가고 싶은 곳은 어디예요?”
“음…….”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골몰하는 희주는 상상만으로도 설레고 신나 보였다. 그런 희주가 귀여워 미소 지은 강현우는 희주의 손을 당겨 깍지를 꼈다. 손가락이 길고 가늘어서 반지 하나만 껴도 눈에 띌 것 같았다.
이참에 반지나 하나 맞출까. 페로몬이야 간단히 소취제로 없앨 수 있지만 반지는 안 빼면 그만이었다. 강현우는 희주의 손가락 굵기를 가늠하듯 깍지 낀 손을 거듭 꽉 붙잡았다.
“내 생각에는 몰디브가 좋을 것 같아요. 아까 말한 대로 대표적인 휴양지 하면 떠오르는 곳이니까.”
“현우 씨는 가 보셨어요?”
“설마. 나도 듣기만 했어요. 거기는 섬 하나가 리조트인 경우가 많대요. 다른 투숙객들이랑 스치지도 못하게 설계해서 하루 종일 섬에 둘만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곳도 많다고 하고. 신혼부부들이 원하는 게 그런 거잖아요. 둘만의 시간.”
단순하게 그저 여행지에 대해서만 생각하던 희주는 강현우의 입에서 신혼부부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눈에 띄게 굳어 버렸다. 손을 맞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희주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꼼질대고 있었다.
강현우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전만 해도 이게 과연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주제인지, 아니면 계산적으로 끄집어낸 주제인지를 가늠해 보던 사람은 분명 저였는데 이제는 희주가 그러고 있는 듯했다.
대화의 흐름에 맞게 자연스럽게 나온 주제기는 하나, 치밀하게 신혼여행으로 귀결시킨 터라 하나만 고르면 정답이 아니었다. 자신만만하게 미소 짓고 있던 강현우가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어쩐지 결혼에 안달 난 사람이 된 것 같아 살짝 민망해진 탓이었다.
“부케도 받았겠다. 얼른 결혼 안 하면 큰일 나는 거 아니에요? 우리 회사 직원들 말하는 거 들어 보니까 부케 받고 정해진 기간 내로 결혼 못 하면 재수가 없다느니, 뭐 그런 미신도 있다는데.”
“아…….”
대화가 이어질수록 더 곤란해지는 기분이었다. 희주는 난처한 얼굴로 웃으며 애써 정면을 바라보았다.
“뭐, 미신은 미신이니까. 너무 마음에 담고 있지 마요.”
말이야 이렇게 했지만, 아마 희주는 받아 온 부케를 볼 때마다 지금 이 대화를 떠올릴 것이 분명했다.
놀리는 것은 적당히 하기로 하고, 어느새 멀리 우뚝 보이는 오피스텔 건물에 강현우는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 인상을 썼다.
“근데 진짜 오늘 가야겠어요? 하루 더 자고 가면 좋잖아요.”
“아무래도 내일은 월요일이고… 출근해야 하잖아요.”
“내가 데려다줄 텐데 뭐가 걱정이에요. 절대 안 늦게 해요, 내가.”
“현우 씨 피곤할까 봐요. 직장이 바로 옆인 것도 아닌데……. 저 태워다 줄 시간까지 계산해서 움직이면 내일 하루 엄청 피곤할 거예요.”
시간만 계산해야겠는가. 차가 공기나 물로 굴러가는 것도 아닌데. 고작 이틀 밤을 함께 지새운 걸로 더 정이 깊어지고, 하여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사실이지만 절로 드는 미안한 마음을 미처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런 거 아까워할 거면 시작도 안 했어요.”
“이미 다 왔는데요…….”
“지금 다시 가도 안 늦었어요. 바로 차 돌리면 30분도 안 걸릴 텐데. 멀리 드라이브 왔다고 치고 다시 가요.”
마시다 남은 와인도 있잖아요. 참 달콤하게도 속삭였다. 희주는 지난 밤, 강현우의 집에서 화려한 야경을 안주 삼아 홀짝홀짝 마시던 와인을 떠올렸다. 분명히 강현우는 제가 가지고 있어 봤자 마시지도 않는다며 선뜻 가져가라고 했다. 그랬는데.
“줬다가 뺏었잖아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줬다 뺏는 거, 그게 가장 나쁜 건데.”
가겠다고 짐을 싸고 있으니 도로 와인 셀러에 처박아 버렸더란다. 희주는 불퉁하게 입술을 비죽거렸다. 줬다가 뺏었다가 아주 자기 마음대로 구는 것이 정말 치사하기도 하고…….
“안 주겠다는 거 아니에요. 담보로 잡아 두겠다는 거지.”
“……마시고 싶으면 자고 가라고요?”
“네.”
“참 나…….”
이제 와 그걸로 저를 꾀려고 구는 것이 귀여워 볼이 마구 실룩거렸다. 새침하게 고개를 돌린 희주는 작은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다음에요. 오늘 말고, 출근 안 하는 날에.”
“다음에 언제요. 확실하게 말해 줘요.”
“음……. 글쎄요.”
희주는 사르르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말로 무슨 말을 못 할까 싶었지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미치겠네. 그만 웃어요. 내가 졌으니까.”
강현우가 허탈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확실하게 말해 달라는 제 요청에도 그저 예쁘게 웃으며 애간장을 녹이는 상대가 마냥 얄밉지만은 않았다.
어떻게 꼬셔도 집으로 돌아가길 포기하지 않을 이 엄청난 고집에, 강현우는 차라리 제집을 이쪽 지역으로 옮겨 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자차 없이 한 시간 넘게 대중교통 타고 출퇴근하는 직장인들도 널리고 널렸다는데, 저라고 못 할 것이 없었다. 뭐, 운전하는 기사님은 더 피곤할 테지만 고생하는 만큼 월급을 올려 주면 되는 일이었다.
“왜 연애하면 같이 살고 싶다는 말을 해 대는지 알 것 같아요.”
뭐든 돈으로 해결하려는 못된 재벌의 성미는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강현우는 미치겠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데려다주는 게 너무 아쉬워요.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입가에 걸린 웃음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강현우가 희주를 제 쪽으로 당겨 그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희주 씨.”
혀의 접촉 없이 가볍게 입술끼리만 비비적거리던 강현우가 나지막이 희주를 불렀다. 제집에서 못 자겠다면 자신이 여기서 자고 가면 될 일이었다.
“……으응.”
이어지는 말은 딱히 없었지만 희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정말 보내기가 싫은 모양인지 진작 도착했어야 할 시간을 훌쩍 넘겼음에도 두 사람을 태운 차는 오피스텔 주위를 빙빙 맴돌고 있었다. 처음에는 제 착각인가 했는데, 역시나 이번에도 우회전이 아니라 좌회전 차선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다시 돌아가는 시간까지 고려해 이쯤 그 고집을 끊어 줘야 할 타이밍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망설이던 희주가 달래듯 속삭였다.
“그럼 우리 한 바퀴만 더 돌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현우는 냉큼 핸들을 꺾었다. 마지막인 만큼 아주 천천히 몰 작정이었다.
* * *
그날 밤, 강현우는 세 바퀴를 더 돌고 나서야 희주를 집에 들여보내 주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 더 가까워진 것도 모자라 어쩐지 애틋한 지경까지 발전하기 시작했다.
서로의 집을 오가며 잠을 자는 것은 물론, 그러지 못하는 날에는 누구 한 명이 먼저 잠이 들 때까지 휴대폰을 붙잡고 통화를 이어 갔다. 통화가 끊기는 시간은 들쑥날쑥했다. 자정일 때도 있었고, 해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이른 새벽일 때도 있었다. 그러면서 피로가 조금씩 누적되었고, 내내 버텨 오던 몸이 어느 순간 둑 터지듯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와, 미쳤다, 미쳤어.”
거의 뛰다시피 욕실에서 튀어나온 희주는 누르면 말하는 인형처럼 똑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이 아닌 본인 스스로에게 하는 자책 어린 혼잣말은 방금 것까지 정확히 여섯 번째였다.
미처 닦지 못한 물기가 마룻바닥 위로 방울져 떨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주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다른 한 손으로는 헤어드라이기 플러그를 연결했다. 한 번에 꽂혀도 모자랄 판에, 마음이 급해서인지 핀 끝이 어긋나 자꾸만 버벅거렸다.
아이씨.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콘센트 연결에 성공한 희주는 눈을 굴려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8시. 평일 이 시간에 학교가 아닌 집에 있다는 것은 곧 지각을 의미했다.
어쩜 학생 때나 직장인일 때나 지각을 직감하는 순간은 늘 변함이 없는지 모르겠다. 이상할 정도로 가벼운 몸이며, 조금 더 침대 위를 구르고 싶게 만드는 따스한 햇살, 마지막으로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새소리까지. 도저히 아침에 있을 수가 없는, 또 있어서는 안 되는 상황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알람도 없이 저절로 눈이 떠진 시점에서 망했음을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이불이 주는 포근함에 취해 여유를 만끽하다가 결국 이 사달이 나 버렸다. 엄습하는 불길함에 희주가 번쩍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기상 시간을 훌쩍 넘긴 뒤였다.
일찍 좀 잘걸. 아쉬움에 휴대폰을 더 오래 붙잡고 있었더니만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다. 누가 보면 서울·부산 장거리 커플인 줄 알겠네. 일이 저질러진 마당에 후회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만, 희주는 속으로 자조함과 동시에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며 바삐 출근 준비에 서둘렀다.
물기만 훔치는 정도로만 머리를 말리고, 잠옷과 젖은 수건을 대충 발로 밀어 치운 뒤 옷장을 벌컥 열어젖혔다. 급한 대로 만만한 조합을 찾아 헐레벌떡 팔과 다리를 밀어 넣었다. 제대로 보지 않고 발을 끼우다가 바지 밑단을 밟는 바람에 하마터면 뒤통수가 된통 깨질 뻔하기도 했다.
오늘은 늦었으니 커피 사 가는 것은 과감히 생략했다. 대신 그 돈으로 1년에 한두 번 탈까 말까 한 택시를 잡아탔다. 늦었을 때에는 택시를 타는 것만큼 빠른 교통수단은 없었다.
다행히 길도 뻥 뚫려 있었다. 이대로라면 간당간당하게 늦지는 않겠다 싶어, 희주는 삐질삐질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트에 등을 기대고 숨을 가다듬은 희주는 일어난 이후 한 번도 들여다보지 못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때마침 휴대폰이 길게 진동했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희주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여보세, 큼, 흠.”
무심코 입을 열었다가 희주는 기겁하며 휴대폰을 멀리 띄워 놓고 헛기침을 했다. 물 한 잔 마실 여유도 없었던 터라 목소리가 듣기 싫게 여러 갈래로 갈라졌기 때문이었다. 택시 기사가 룸 미러로 흘끗거릴 정도로 요란하게 음성을 재정비한 희주가 다시 휴대폰을 귀로 가져갔다.
―희주 씨?
“큼……. 여보세요?”
목을 가다듬은 보람도 없이 여전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넘어갔다.
―……목소리가 왜 그래요. 감기라도 걸렸어요?
강현우가 탐탁지 않은 듯 물어 왔다. 날씨를 불문하고 음료라면 늘 얼음이 잘그락거리는 아메리카노만 마셔서 그런지 강현우는 조금 고지식하게 느껴질 정도로 희주의 건강에 집착하곤 했다. 겨울이라면 모를까 여름 방학을 목전에 둔 지금은 과보호로 느껴질 때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그 정도로 볼품없게 들렸나 싶었다. 희주가 멋쩍게 웃음 지었다.
“아니에요. 감기는 아니고, 그… 아침이라 목이 좀 잠겼나 봐요.”
―아아.
차마 늦잠을 잤다는 말은 민망해서 못하겠고. 누구나 납득할 만한 변명을 늘어놓자 나긋하게 이해했다는 음성이 넘어왔다.
―연락이 없어서 전화했어요. 혹시 무슨 일 생긴 건가 해서.
“하하……. 일은 무슨요.”
왜 이 말이 혹시 늦잠을 잔 거냐고 의심하는 말로 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혼자 찔린 희주의 입에서 하하, 하고 어색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 있겠어요? 월요일인데.”
애써 여상히 말하며 희주는 강현우의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만 휴대폰을 떨어뜨려 놓고 메신저 앱을 켰다.
일단 학교에서 온 연락은 없었다. 학부모나 학생들에게서 온 연락도 없었고. 공지용으로 쓰는 학급 단체방에 채팅 창을 착각한 아이 하나가 웬 강아지 사진을 올린 바람에, 온통 하트를 남발한 메시지가 몇 개 쌓여 있는 것 말고는 깨끗한 편이었다.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다.
일어났느냐는 메시지에 이어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점차 심각해지는 강현우의 메시지가 여러 개 쌓여 있었다. 진동이 여러 번 울렸을 텐데 못 일어난 것도 대단했다.
―그래요? 대단한데.
다시 귓가로 가져간 휴대폰에서부터 왜인지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대단하다는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희주가 눈을 끔뻑였다.
“뭐가요?”
―이제 희주 씨 체력 얕잡아 보면 안 되겠다 싶어서요.
“체력이요?”
갑자기 웬 체력? 우리 사이에 체력을 논할 일이라도 있었나. 어리둥절해진 희주는 지난 주말을 떠올렸다.
언젠가부터 주말마다 강현우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것이 당연해진 희주는 지난 주말에도 어김없이 강현우의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데이트를 즐겼다. 영화관 못지않은 커다란 스크린으로 영화도 함께 보고, 커다란 욕조에서 스파도 즐기고. 슬슬 배가 고파질 때쯤에는 집에서 시켜 먹거나 나가서 외식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더 못 하겠다고 울고불고 난리 쳐서 내가 봐준 거 기억 안 나요?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거의 기절하다시피 잠들어서 다 씻겨 주고 그랬…….
예고도 없이 귓속으로 깊숙하게 파고드는 새빨간 목소리에 희주는 다급하게 볼륨을 낮추었다.
“아아아아니요?”
대낮부터 아니, 아침부터 이게 무슨 낯부끄러운 대화란 말인가. 희주는 얼른 상체를 수그리고, 휴대폰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한창 운전 중이던 택시 기사가 의아한 눈으로 룸 미러를 흘긋거렸다. 한껏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눈치를 살핀 희주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방금 전 대화가 혹시라도 택시 기사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했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택시 기사는 아무것도 못 들었는지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하지만 이미 기가 죽은 희주는 목소리 볼륨을 처음의 것보다 절반으로 낮춰야만 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기억 안 난다고 잡아떼는 겁니까?
이런 속도 모르고, 강현우의 목소리에는 즐거워 죽겠다는 웃음이 잔뜩 묻어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희주가 여전히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닥속닥 따져 물었다.
“아니, 무슨 아침부터…….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건데요?”
“다 왔습니다, 손님.”
마침 희주를 태운 택시가 멈췄다. 정문이 아닌, 정문이 보이기만 하는 골목길 초입에서 멈춰 섰지만, 희주는 더 앞으로 가 달라는 요구 없이 순순히 값을 치르고 내렸다. 어차피 이 시간이면 정문 앞은 자녀들을 데려다주기 위해 몰려든 학부모 차량과 필사적으로 뜀박질 중인 학생들로 인산인해일 것이 분명했다. 괜히 택시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여 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근데 지금 어디예요? 학교에 있을 시간 아니에요?
같은 시각, 백영 그룹 사옥 앞으로 검은 세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차에서 막 내린 강현우는 수화기 너머로부터 들리는 타인의 목소리와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는 희주의 목소리에, 제게 다가오려는 안 실장을 손짓으로 물렸다. 늘 하던 대로 오늘 하루 스케줄을 읊으려는 안 실장의 입에 버퍼링이 걸렸다.
―희주 씨?
“……누구 씨 덕분에 잠 못 자서 늦잠 잤거든요, 제가.”
어쨌거나 강현우는 제 늦잠의 원인 제공자였으므로 희주는 고집스레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어 대답했다.
―택시라도 탄 거예요?
“네. 막 내렸네요.”
―그러게, 내가 데려다주면 좋았잖아요.
“저만 출근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나저나 현우 씨도 이제 사무실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8시 반 넘었는데.”
―……가만 보면 희주 씨는 일하는 강현우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핸드폰 너머, 강현우 앞에 가만히 서 있던 안 실장이 입을 떡 벌렸다. 상사의 듣도 보도 못한 3인칭 화법에 귀를 의심한 안 실장은 저도 모르게 좁아지는 미간을 펼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다. 들었어요? 안 실장이 김 기사를 쳐다보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예. 김 기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 기사는 안 실장보다 더 안색이 좋지 않았다. 자택에서부터 모셔 오는 동안에 그는 상무님이 애인과 어떤 주말을 보냈는지도 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현우 씨 피곤할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예요. 월요일에 나만 출근하는 거 아니잖아요?”
―그럼 아예 오지를 말든가요. 집에 보내기 싫어하는 거 알면서 그러는 겁니까?
“그건…….”
끙. 희주는 앓는 소리를 삼켰다. 이걸 어찌 달래야 하나. 저보다 두 살이나 많은 애인이 투정인 듯 애교인 듯 투덜거리니 입꼬리며 볼이며 끌어 내릴 새도 없이 마구 씰룩거렸다.
“안 가는 건 좀 그래요. 내가 아쉬워서.”
―예?
“근데 밤에 통화하는 건 좀 자제해야겠어요. 좋은데, 오늘처럼 또 늦잠 자면 나 큰일 나요. 알죠? 같은 월급쟁이니까.”
부끄러운 마음에 빠르게 할 말을 주절거린 희주는 “저 이제 학교 들어가요. 끊어야 될 것 같은데” 하고 통화의 끝을 알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강현우는 얼떨떨한 말투로 “먼저 끊어요” 하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저, 그… 오늘도 힘내요?”
―……희주 씨도요.
갑자기 어색함이 맴돌았다. 희주는 망설임 끝에 전화를 끊었다. 10분이 조금 넘는 통화 시간이 찍힌 화면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뒤늦게 밀려오는 홧홧함에 손바닥을 펴 부채질을 했다.
“아, 맞아. 소취제.”
가만히 서서 얼굴에 부채질을 끼얹던 희주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가방을 앞으로 돌렸다.
희주가 가방 안에서 꺼낸 것은 겉에 아무것도 쓰인 것이 없는 하얀 색의 스프레이였다. 보통 시중에 판매되는 소취제는 소취제라고 인쇄된 비닐 커버로 둘려 있어야 정상이었지만, 딱히 직장에서 소취제를 뿌리는 것이 눈에 띄어서 좋을 것 없다는 판단하에 과감히 뜯어낸 터라 얼핏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미스트 정도로 보이는 외관이었다.
희주는 주변을 슬슬 둘러보다가 재빨리 몸 주위로 칙칙 소취제를 뿌려 댔다. 평소 소취제를 뿌리고 다닐 일이 없었던 탓에, 강현우와의 만남이 한 달 넘게 지속되고 있는 지금까지도 습관이 덜 들어 있었다.
현관 앞에 둔 소취제를 뿌리는 걸 늘 깜빡해, 이렇게 학교 앞에서 뿌리는 일이 잦았다. 그나마 학교 앞에 다다르기 전에 생각해 내는 덕에 아직까지 강현우에게 마킹당한 채 출근하는 불상사는 없었다.
그나저나 왜 나만 피곤한 것 같지? 피곤한 기색이라고는 일절 느껴지지 않던 강현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혹시 알파가 오메가 기를 다 빨아먹기라도 하나? 아니면 열성이라 정말 체력적으로 밀리는 걸지도…….
에잇. 그만. 뭉게뭉게 피어올라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탄탄한 가슴팍에 희주는 지레 기겁하며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신성한 학교를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소취제를 가방 안에 갈무리한 희주는 대수롭잖은 얼굴로 골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엇, 안녕하세요!”
“뭐야! 쌤! 쌤도 지각비 내요!”
정문이 가까워질수록 점차 걸음을 빨리하다가 급기야 뛰기 시작하는 아이들의 수가 늘어 갔다. 그중에는 희주가 담임으로 있는 반의 아이들도 여럿 섞여 있었다. 희주는 인사와 동시에 지각비를 운운하는 아이들에게 씨익 웃으며 얄미운 대답을 해 주었다.
“난 선생님이잖아, 이것들아.”
다행히 지각은 면했다는 안도감에 취한 탓일까. 언젠가 소취제로 인해 엄청난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이때까지만 해도 미처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