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미처 제대로 여미지 못한 커튼 틈을 파고든 푸르스름한 빛이 네모난 방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어렴풋한 새벽 여명이 밝아 오는 시간이었다.
“으음…….”
희주가 눈을 뜬 건 감은 눈꺼풀 위로 희미한 빛이 비칠 때쯤이었다.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 몸을 뒤척인 희주는 평소와 다르게 느껴지는 잠자리에 의아함을 느끼고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잠기운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눈이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새벽빛이 새어 들어온다고는 하나, 그래 봤자 아직까지는 방 안의 가구 형체만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
본능적으로 일찍 눈이 떠졌음을 알 수 있었다. 알람이 울리려면 한참이 남았다는 것까지도. 희주는 목에 힘을 주고 침대 옆 탁상 위에 디지털시계로 고개를 돌렸다. 희미하게 깜빡이는 시계는 평소 일어나는 때보다 두 시간이나 이른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
시간을 확인하던 것도 잠시, 희주는 힘겨운 숨을 토해 내며 도로 베개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특히 허리와 꼬리뼈에서부터 올라오는 통증은 아직까지 남아 있던 잠기운마저 한 번에 날려 버릴 만큼 둔탁하기 짝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짚은 희주는 악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통증을 삼켰다. 허리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꼬리뼈를 찌르르 울리는 통증은 너무나도 생경한 것이었다. 왜 이런 곳이 아픈 거지? 쉽게 가시지 않는 통증에 끄응, 앓는 소리를 낸 희주는 자연스럽게 그 원인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미친…….”
볼품없이 갈라지는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기억을 오래 헤집을 필요도 없었다. 잠에서 깬 몸뚱이는 너무나도 빠르게 제 기능을 되찾았다.
잤다. 강현우와.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나. ‘잤다’는 것의 기준이 사정의 횟수라면 강현우가 생각하는 것과 제가 생각하는 것이 각기 다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와 몸을 섞은 것은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강현우의 품에 안겨서 살갗이 새빨개질 때까지 울고 신음하던 자신이 떠오르자마자 부끄러워진 희주는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 올렸다. 몸이 보드랍게 감겼다. 간밤에 강현우가 씻겨 준 덕이었다.
저녁은 조금만 이따가 먹자는 강현우의 제안에 모르는 척 넘어가 준 뒤로 몇 번을 사정했는지 모르겠다. 희주는 손가락으로 그 횟수를 헤아려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의미 없는 짓이었다. 확실한 건, 어쩐지 이성을 잃은 듯한 강현우에게 배고프다는 핑계로 울먹이고 나서야 그의 품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침대에서 내려온 강현우는 본래의 그 다정한 강현우로 되돌아왔다. 연속되는 사정에 씻을 힘도 남아 있지 않은 희주를 데려다가 꼼꼼하게 씻겨 주고, 땀과 정액으로 난리가 난 시트를 새것으로 바꿔 끼운 다음, 손수 나서서 희주의 식사 시중까지 들어 주었다.
드디어 저녁 식사를 하게 됐을 때는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머릿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시침과 분침의 위치, 그리고 그사이의 각을 떠올려 보면, 사실 저녁이라기보다는 야식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어린애라도 된 것처럼 강현우의 무릎에 앉아, 그가 입가에 대 주는 것만 얌전히 받아먹은 것도 같다. 늦은 시간에 먹어도 부담이 되지 않을 음식들이 잔뜩 있었던 것도 같은데, 하나같이 입맛에 맞아서 남김없이 해치운 뒤 기절하듯 잠이 든 것이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보온에 탁월한 찬합에 담겨 있던 음식들은 강현우가 그 늦은 시간에 안 실장에게 연락을 넣어, 본가에서 요리해 주시는 아주머니로부터 공수해 온 것들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희주는 어딘가의 한식당에서 배달을 시킨 것이겠거니, 하고 넘겨짚을 따름이었다.
분위기에 취했다고 해야 할지, 강현우에게 홀렸다고 해야 할지……. 비록 집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채 첫 데이트가 끝나고야 말았지만, 사실 싫은 것은 아니어서 애매한 기분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등 뒤로 닿아 있는 맨살에서부터 느껴지는 체온이 기분 좋았다.
꼬박 하루를 함께 보냈다니. 그러고 보니 제 페로몬뿐이었던 작은 침실이 온통 강현우의 페로몬으로 가득 찬 채였다. 가슴에 둘린 팔을 가만가만 만져 본 희주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인 데다 딱히 큰 사이즈의 침대를 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까닭에, 침대는 더블도 아닌 슈퍼 싱글이었다. 남자 하나 누우면 빠듯한 공간에 두 명이서 몸을 겹쳐 누운 터라 몸을 돌리는 것마저 힘이 들었다. 게다가 몸까지 성치 못하니 끙, 하는 신음이 자연스럽게 입에 붙었다.
겨우 돌아누운 희주의 눈이 천천히 크기를 더했다. 동이 터 오는 창문 아래로, 제 쪽을 바라보며 누운 강현우가 보였다. 자고 있을 줄 알았던 강현우의 눈꺼풀이 위아래로 나풀나풀 오르내리고 있었다.
“왜 깼어요.”
“아…….”
“더 자도 되는데.”
강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희주 못지않게 푹 가라앉아 있었다. 대답 없이 멍해진 희주의 얼굴을 바라보며 강현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정성스럽게 씻겨 준 터라 살결을 보송보송했지만, 밤새 제 아래에서 운 사람답게 여지없이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목말라요?”
그런가. 막 일어난 몸 상태에 대해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던 희주는 강현우의 물음을 듣고 나서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딱히 목이 마른 것은 아니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자, 가볍게 웃은 강현우가 희주의 목 아래로 팔을 넣어 그대로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단단하고 묵직한 무게가 기분 좋게 온몸을 감싸 오자 희주는 비비적거리며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두 사람을 덮은 이불이 바스락, 하고 구겨졌다.
“혹시 저 때문에 깨셨어요……?”
제가 막… 뒤척거려서…….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희주가 소곤소곤 속삭이듯 물었다. 강현우는 사르륵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딱히 그래서라기보다는 그냥 눈이 떠졌어요.”
“언제부터 깨어 계셨어요?”
“희주 씨가 미친, 하고 욕할 때부터요.”
헙. 희주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럼 자신이 깼을 때 같이 깼다는 소리였다. 품 안에서 우뚝 굳어 버린 몸에, 강현우가 쿡쿡 목을 울리며 웃었다.
“몸은 어때요.”
허리에 감겨 있던 팔이 스르륵 풀어지는가 싶더니, 따끈한 손바닥이 금방 아파서 끙끙댔던 부위를 부드럽게 감싸 왔다. 웬만한 일은 괜찮다고 웃어넘기는 편인 희주지만, 아프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부터 은은하게 하체를 울리는 통증에는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투정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미안하다는 듯 덩달아 미간을 찌푸린 강현우가 손끝에 힘을 주었다.
“읏…….”
“미안해요. 내가… 자제했어야 했는데.”
보송보송한 피부 아래로 단단히 뭉친 근육들이 만져졌다. 가벼운 압이 닿았을 뿐인데도 퍽 아픈 듯 끙끙거리는 모습을 보니 지난 일에 대한 후회가 불쑥 밀려왔다. 조금이라도 자제할걸. 이 순간에도 이기적인 알파의 본능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예 하지 않는 것은 그의 선택지에 없었다.
“괜… 괜찮아요.”
“괜찮기는. 아파서 인상 찌푸린 거 다 보이는데.”
“음……. 근육통 때문에 흣, 조금…….”
희주는 시원하고도 야릇한 감각에 얼굴을 붉혔다. 평소 입고 자던 잠옷 차림이 아닌 속옷 한 장만 달랑 걸친 차림으로 누워, 밤을 함께 지낸 상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여간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잔뜩 뭉친 근육을 풀어 주겠답시고 등허리를 더듬어 오는 강현우의 손가락에 자꾸만 허리가 움칠움칠 튀었다. 꾹, 꾹, 압을 더하는 손가락이 몇 번째 손가락인지 모조리 알아맞힐 수 있을 만큼 감각이 선명했다.
더는 못하겠다고 울어댄 게 고작 몇 시간 전이건만. 저를 걱정하는 손길에서 어제의 그 감각을 찾아 떠올리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 희주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굳이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한, 이 속내를 들킬 일은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희주는 주저하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저도… 좋아서 했는데요, 뭐…….”
“좋았어요?”
“그, 현우 씨가 좋았다는… 그런 뜻이에요.”
“아. 그런 뜻이에요?”
강현우의 얼굴에 장난기가 번졌다. 제 팔을 베고 누운 희주를 바투 품으로 끌어당긴 강현우는, 새벽빛을 받아 뽀얗게 빛나는 희주의 뺨에 쪽, 쪽 소리 내어 연신 입을 맞춰 댔다. 도무지 참기 힘든 눈빛으로 얌전히 저를 바라보는 희주를 애써 모른 척한 그는 말랑한 귓불을 가볍게 물었다 놓고서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나는 좋은데, 나랑 하는 섹스는 싫었어요?”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자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귀를 새빨갛게 물들인 희주가 어깨를 움츠리고 바르작거렸다.
“싫다고 했으면 서운할 뻔했어요.”
“……읏.”
“난 좋았거든요. 희주 씨도 싫은 건 아니었던 것 같고……. 어제 희주 씨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냐면요…….”
여차하면 어제 자신의 입에서 뱉어진 신음을 하나하나 묘사할 것 같았다. 희주는 다급하게 손을 들어 강현우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그래도 좋은지 강현우는 보드라운 손바닥에 대고 웃음을 터트렸다.
대부분이 잠들어 있는 새벽, 밤을 함께 지낸 뒤 일찍 잠에서 깬 연인은 서로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소곤소곤 둘만의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인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다가 온기를 머금은 입술에도 진득하게 입술을 겹쳐 문지르기도 하면서.
“조금 더 자요.”
아직 가시지 않은 피로 탓일까. 희주의 눈꺼풀이 가물가물 오르내렸다. 잠들지 않기 위해 몇 번씩이나 부릅떠지는 눈을 본 강현우는 얇은 눈꺼풀 위로 입술을 내렸다. 자연스럽게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깨워 줄게요.”
부드럽게 등을 쓸고, 포슬포슬한 머리카락에 잘게 입을 맞추었다. 강현우는 흐릿하게 흘러나오는 페로몬을 깊숙하고도 나른하게 들이마셨다. 잠에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만 페로몬을 풀자, 이미 빈틈없이 겹쳐진 몸이 꾸물꾸물 품 안으로 안겨 들었다. 이내 품 안의 연인에게서 새액새액 곤한 숨이 흘러나왔다.
* * *
다시 잠들었다가 눈을 떠 보니 아침이었다. 어깨를 쥐고 살살 흔드는 아니, 흔드는 축에도 끼지 않는 어루만짐에 눈을 뜬 희주는 멍한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고는 하는 알람 소리가 아닌, 연인의 부드러운 입맞춤과 깃털처럼 아침을 맞이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깨를 조물조물 주물러 주는 손길을 느끼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강현우가 손수 입가에 대 주는 컵에 순순히 입술을 벌리자, 시원한 물이 메마른 입 안을 촉촉이 적셔 주었다. 해갈을 하자 만족스러운 숨이 절로 나왔다.
“잘 잤어요?”
“네…….”
언제 일어나 준비를 한 건지 강현우는 말끔한 차림이었다. 잠을 자긴 잔 걸까? 졸려 보이지도 않고, 오히려 개운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시선을 느낀 강현우가 눈을 마주해 왔다.
별생각 없이 강현우를 쳐다보던 희주는 문득 그가 차려입은 와이셔츠에 시선을 뒀다가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분명 정액으로 더럽혀진 손을 저 위에 닦아 낸 것 같은데. 어떻게 해결을 했는지는 몰라도 말끔했지만 그의 손을 흥건히 적셔 놓았던 것이 떠올라 괜스레 부끄러웠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속을 알 리가 없는 강현우가 걱정하는 투로 물었다. 어깨를 주무르던 손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귓바퀴에 슬쩍 닿았다 떨어지는 손길이 간지러워 어깨를 움츠리자 작게 웃음을 터트린 강현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물렸다.
위아래로 주억거리는 고개를 보고도 모르는 척한 강현우는 희주를 이불에 감싸여진 채로 들어 침실에 딸린 욕실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이럴 거면 일어날 수 있겠냐는 물음은 왜 했는지 모르겠다. 부끄러움에 발끝에 휘감긴 이불을 꼼질꼼질 구겼다.
“씻겨 줄까요?”
“저 혼자… 씻을 수 있어요.”
“그럼 씻고 나와서 같이 간단하게 밥 먹어요. 아, 혹시 아침은 안 먹는 편입니까?”
“원래 안 먹는 건 아니고… 있으면 먹어요.”
“음, 다행이네요. 갈아입을 옷은 문 앞에 둘게요. 씻고 나와요.”
“네에…….”
쪽. 고개를 숙여 희주의 뺨에 입을 맞춘 강현우는 나름의 배려인지 금방 자리를 비워 주었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스킨십에 새삼 얼떨떨한 기분이 된 희주는 느릿하게 욕실로 발을 들였다.
강현우가 조금 과하게 행동해서 그렇지, 사실 욕실까지 스스로 못 갈 만큼 아픈 것은 아니었다. 찰나의 마사지가 효과가 있었던 걸까. 움직일 때마다 허리와 꼬리뼈에서부터 찌르르, 하는 통증이 올라오기는 했지만 가만히 서 있으면 버틸 만한 정도였다.
새벽에 잠깐 눈을 떴을 때 느꼈던, 마치 누군가에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끔찍했던 둔통에 비하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리 사이가 뻐근한 것을 제외하면 최상의 컨디션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망토처럼 몸을 두르고 있는 이불을 바닥에 내려놓고, 곧장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간 희주는 뻣뻣한 목을 돌리다가 “응?” 하고 의아함을 보였다. 몸 상태는 그렇다 치고, 정신이 너무나도 개운한 것이 얼핏 이상하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몇 시간씩 잠을 자도 풀리지 않는 것이 피로였다. 잠을 안 잔 건 아니지만, 어제 강현우에게 붙잡혀 소모한 에너지만 해도 격한 노동이나 운동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지금 상태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필연적으로 출근을 해야만 하는 평일이지 않은가. 직장인들에게 탑재되어 있는 기본값인 짜증조차 나지 않는 평일 아침이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
잘 깎인 돌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워진 성미가 뻐근한 근육통과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운 섹스의 여파라는 것인 줄 모르는 희주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리 생각하면서 잡념을 훌훌 털어 냈다.
“하아…….”
익숙한 온도로 맞춘 물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희주는 아득한 숨을 내쉬었다. 개운하다고 해야 할지 노곤하다고 해야 할지, 뜨거운 탕에 들어간 아저씨들처럼 저도 모르게 구수한 소리를 뱉을 뻔한 희주는 젖은 머리에 샴푸를 짜 문질렀다.
금방 저를 깨우러 왔던 강현우에게서도 이것과 같은 향이 난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허둥지둥 머리 위로 물을 뿌렸다. 아침이 되어도 여전한 부끄러움은 몽글몽글한 거품과 함께 물에 씻겨 내려갔다.
씻는 사이 강현우가 침실까지 정리를 해 두었는지, 깔끔하게 정돈된 침대 위에 갈아입을 옷이 가지런히 올라가 있었다. 머리를 말리고 나온 희주는 개켜 있는 옷에 팔다리를 꿰며 ‘내가 이런 옷을 사 뒀었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위아래로 깔끔한 옷은 옷차림에 크게 제한이 없는 직업의 희주에게 제격이기는 했으나, 왜인지 처음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간혹 사 두고 까먹은 채로 방치했던 옷이 있기야 했다. 용케 그런 걸 찾아 놨네, 하는 생각을 하면서 갈아입은 희주는 거울에 비치는 모습에 크게 만족하면서 방문을 열었다.
곧장 주방과 거실이 눈에 들어오는 구조 탓에, 방문을 열자마자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간단하게 밥이나 먹자는 말에 기껏해야 토스트 정도로 생각했던 희주의 예상을 산산조각 내는, 푸짐한 한 상 차림이었다.
“이게… 이게 다 뭐예요?”
“밥이지 뭐예요.”
“그건 알겠는데… 이걸 어디서…….”
우뚝 굳은 희주를 보고 웃음 지은 강현우가 희주의 어깨를 가볍게 쥐어 의자에 앉혔다. 갓 불에서 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김이 올라오는 음식들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솔솔 피어오르고 있었다. 놀란 것과는 별개로 입 안에 침이 고인 희주가 꼴깍 입맛을 다셨다.
“먹여 줄까요?”
희주와 마주 보고 앉은 강현우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어제 기진맥진해 늘어진 희주에게 끝까지 식사 시중을 들어 주었던 것을 떠올리며 말하는 듯했다.
“제가 먹을 수 있어요.”
어쩐지 민망해진 희주는 제 앞에 놓인 수저를 손에 쥐며 황급히 대답했다. 애써 떠올리지 않기 위해 씻는 내내 마인드 컨트롤을 한 것이 무색해지게, 어젯밤의 일이 마구 떠오르려고 했다.
다행히 강현우는 어젯밤 일을 입에 올리며 희주를 난감하게 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뭐가 그리 좋은지 희주와 시선을 맞추며 생글생글 웃을 뿐이었다.
멋쩍게 헛기침을 한 희주는 수저를 쥔 채 음식들을 빙 둘러보았다. 처음 입주할 때 사 두고 몇 번 쓰지 않은 접시 위로 맛깔스러운 반찬이 정갈하게 담겨 있었는데, 반찬보다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앞에 놓여 있는 커다란 뚝배기였다.
“……갈비탕?”
희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강현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혹시 소화 안 될까 봐 죽으로 준비할까 했는데, 출근도 해야 하니까 든든한 걸로 준비했어요.”
맑은 기름이 둥둥 떠 있는 국물에, 촉촉하게 젖어 연해 보이는 살코기를 보는 순간 허기가 밀려왔다. 굳이 출근 때문이 아니더라도 제 취향에는 죽보다 갈비탕이 더 기꺼웠다. 뚝배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넋을 놓고 있는데, 강현우가 뚝배기와 반찬 그릇을 그의 앞으로 가까이 밀어 주었다.
“아. 혹시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건데, 내가 한 건 아닙니다. 어제 잘 아는 식당이 있다고 그랬죠? 거기 거예요.”
“아…….”
“어쭙잖게 만들 바에야 괜찮은 거 사서 먹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혹시 직접 만든 게 아니라서 실망했어요?”
눈치를 보는 듯 조심스러운 물음에, 그런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던 희주가 냉큼 고개를 내저었다. 강현우는 다행이라면서 얼른 먹으라고 말하고는 제 몫의 수저를 손에 쥐었다.
실로 오래간만에 챙겨 먹는 아침이었다. 밥이며 반찬이며 할 것 없이 남김없이 먹어 치운 희주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출근 준비를 마쳤다. 준비라고 해 봤자 어제 가지고 들어왔던 백팩을 그대로 어깨에 메는 것밖에 없었지만, 어쨌거나 준비를 마치고 시계를 확인했을 때에는 평소 나가는 시간보다 조금 더 지나 있는 시간이었다.
다 먹은 후의 뒷정리까지 마친 강현우는 희주를 학교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저야 걸어가도 지각을 면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길이 막히지 않아도 꼬박 30분은 달려야 할 강현우가 걱정이었다. 제 일인 양 은근한 걱정이 들었지만, 강현우의 얼굴에는 지각을 앞둔 직장인답지 않은 여유가 완연했다.
혹시 자율 출근제, 그런 건가? 한 시간 일찍 퇴근했던 어제를 떠올려 보면 일리 있는 추측이었다. 단순하게 부럽다고만 생각한 희주는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치는 강현우를 힐긋 쳐다보았다. 강현우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부터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꼬부랑 외국어가 남발된 메일을 한국어 메일 보듯 쓱쓱 내리는 모습이 몹시도 멋있었다.
“여기서 우회전해서 쭉 가면 되는데… 그냥 여기 길 끝나는 곳에서 내릴게요.”
학교까지 걸어서 고작 20분밖에 걸리지 않는 터라 차로는 금방이었다. 걸어서 갈 때나 설명이 장황하지, 내비게이션에 찍는 것도 민망한 거리라서 말로 직접 알려 주었다. 게다가 슬슬 등교하는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 때라 학교까지 가는 길을 알려 줄 필요도 없었다.
“눈에 띌까 봐요?”
“네……. 애들도 애들인데, 선생님들 눈에 띄면 좀 피곤해요. 분위기가 좀 보수적이라서…….”
마음 같아서는 편히 학교 앞까지 바래다주고 싶었지만, 싫다는 것을 강요할 마음은 없었다. 강현우는 희주의 말대로 달리는 차량의 속도를 줄였다.
보수적인 사내 분위기야 강현우 역시 경험한 것들이 많아 어떤 분위기인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마치 저들이 부모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리저리 훈수를 두는 것을 보고 있으면 없던 화병이 생길 지경이었다.
그들에 대한 해결법에 정도는 없었지만 대략 두 가지 길이 었었다. 저처럼 아주 잠시 동안만이라도 그들의 입을 잠재워 줄만 한 이슈를 던져 주거나 아예 희주처럼 끝까지 회피하는 유형.
하지만 피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자식이며 조카며, 하다못해 피가 반밖에 섞이지 않은 혼외자를 소개해 주는 이도 있었지 않은가. 가만 보니 희주 역시 저러다가 누구 하나 소개받으라는 말을 들을 게 뻔했다. 선생님은 배우자 삼기에 꾸준히 인기가 많은 직업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권희주라는 사람 자체의 매력을 간과할 수 없었다. 온통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강현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은 그냥 말하면 되지 않습니까? 애인 있다고.”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 나가 잠시 아차 했으나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사이 고민하듯 침음한 희주가 멋쩍게 웃었다.
“그럼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괴롭힐 거예요.”
안다. 저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을. 결혼식장 들어가기 전까지 모르는 거라며, 눈치 없이 이상한 말을 늘어놓는 인간도 있을 거라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였지만 더 대화를 나누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무릎 위에 올려둔 백팩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하는 희주를 가만히 곁눈으로 본 강현우는 컵 홀더에 끼워 둔 텀블러를 그에게 내밀었다.
“아, 희주 씨.”
이거. 까만색의 슬림한 텀블러는 희주의 집을 나설 때부터 강현우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이었다. 이걸 왜 저에게 주느냐는 눈으로 쳐다보자, 얼른 받으라는 듯 강현우의 손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커피예요. 희주 씨 좋아하는 아메리카노. 아이스 맞죠?”
얼음도 넣었는데, 아마 안 녹았을 거예요. 부연하는 말과 동시에 슬쩍 흔든 텀블러에서 딸그락, 하고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이건 언제 준비하신 거예요?”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놀라움과 고마움, 감동이 뒤섞여 손을 내미는 희주를, 강현우는 괜히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다행히 희주가 내릴 때쯤이 되어서는 뒤따라오는 차량은 없었다. 강현우는 인도에 가깝게 차를 세웠다. 차가 비상등을 깜빡이며 완전히 멈춘 다음에야 철컥, 하고 안전벨트를 푼 희주가 백팩을 한쪽 어깨에 건 뒤 텀블러를 소중히 손에 쥐고 문손잡이를 잡았다.
“출근 잘하고요. 연락해요.”
“네. 이거 잘 마실게요.”
“아, 잠깐만. 희주 씨.”
그대로 내리려던 희주는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란 눈으로 강현우를 쳐다보았다. 무표정한 강현우가 손을 뻗어 왔다.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불쑥 다가온 손이 희주의 뺨을 스치고 목덜미를 홧홧하게 덮었고, 몸이 강현우 쪽으로 끌려감과 동시에 그의 얼굴이 앞으로 다가왔다. 희주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쪽.
“어…….”
답지 않게 귀여운 소리를 내며 두 입술이 부딪혔다. 멀어졌던 입술이 아쉬운 듯 다시 한번 쪽 소리를 내며 두 번, 세 번 희주의 입술을 쪼았다.
“또 봐요.”
입가에 걸린 미소는 몹시도 근사했다.
* * *
―오늘은 조금 늦게 퇴근하네요?
“네. 지금 수행 평가 기간이거든요. 평가하고 점수 매기느라요.”
쌔앰, 안녕히 가세요. 보충 수업을 듣고 하교하는 아이들이 꾸벅 고개를 숙여 왔다. 급히 휴대폰을 들고 있는 손을 바꿔 들며 잘 가라고 손을 휘휘 저어 주자, 저들끼리 까르륵 웃은 아이들이 바삐 정문을 통과해 나갔다. 희주도 백팩을 추스르고 학교를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밥은요. 안 먹고 나왔어요?
비록 나란히 함께 퇴근하는 것이 아닌 통화를 통해 목소리만 듣는 것뿐이지만, 목소리만 들려오는 까닭인지 괜스레 더 가슴이 콩닥거렸다.
“석식 먹고 나오려고 하긴 했는데, 오늘은 그냥 집 가서 먹으려고요.”
―전에 보니까 냉장고에 물밖에 없던데.
“마트 가서 장 봐 놨거든요?”
발끈한 희주가 따지듯이 답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믿지 못하겠다며 확인하는 말이 넘어왔다. 희주는 뾰로통하게 입술을 삐죽이면서 휴대폰에 닿아 있는 귀를 발그레 붉혔다. 비어 있는 냉장고를 들킨 사실이 민망하기야 했지만, 그걸로 놀림을 받는다고 해서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인스턴트로만 산 건 아니죠?
“밥 볶아 먹을 거예요. 김치랑 햄 넣어서.”
―맛있겠네. 다음에 나도 해 줄래요?
“맛은 보장 못 해요.”
―별걸 다 걱정하네.
“이래야 현우 씨가 기대를 덜 할 거 아니에요.”
장난스럽게 투덜거리는 희주의 얼굴에 옅은 웃음기가 서렸다.
하루 종일 빛나던 해가 침침하게 가라앉는 시간. 바닥에 누운 그림자가 길어지고, 차차 어두워지는 하늘에는 노을로 붉게 물든 구름이 걸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친 몸뚱이를 이끌고 집으로 향하기 바빴던 길이었다. 해방을 만끽할 체력도 남아 있지 않아 매일 똑같은 플레이리스트의 노래를 들으며, 혹은 텅 빈 속을 한 채 억지로 때웠던 시간이었다. 그랬던 길이, 그랬던 시간이, 좋아하는 사람과 통화를 하는 공간과 시간으로 바뀌었다.
사전에 준비하지 않은, 그때그때 떠오르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만으로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평범하지만 다정한 대화를 주고받던 희주는 문득 강현우의 주변이 조용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나저나 현우 씨는 어디예요? 벌써 집인 거예요?”
―아직 사무실입니다.
집 가고 싶어요. 어울리지 않는 볼멘소리에 희주가 엷게 웃음 지었다.
“이제 슬슬 퇴근할 때 된 거 아니에요?”
―야근입니다. 언제 퇴근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어, 그럼 통화 오래 못하는 거 아니에요?”
―왜요. 통화하지 말고 일이나 했으면 좋겠어요?
“아니요! 그 뜻이 아니라… 통화하느라 퇴근 더 늦어지면 현우 씨 피곤하잖아요.”
―괜찮은데. 애인이랑 잠깐 통화할 시간도 못 낼 정도는 아니라서.
희주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관두고 수줍게 웃었다. 강현우는 감정 표현에 있어 매우 솔직한 편이었다. 애정을 주고, 또 받는 것에 있어 익숙해 보이는 그를 마주할 때면 부끄러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어떻게 대꾸를 해 줘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 늘 이렇게 웃음으로 어물어물 덮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나랑 통화하기 귀찮아서 내 핑계 대는 건 아니죠?
“……현우 씨 퇴근 못하게 전화 안 끊는 수가 있어요.”
강현우의 짓궂은 장난에 희주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신호등 앞에 멈춰 섰다. 차 소리 탓에 강현우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기라도 할까, 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더욱 바짝 가져갔다. 강현우의 웃음소리는 주변 소음에도 불구하고 선명히 귓전에 꽂혔다.
―그럼 일 대신 희주 씨 목소리 듣다가 퇴근하는 거죠, 뭐.
농담인 듯 진담인 듯 강현우의 대답이 대수롭지 않게 들렸다. 희주는 괜히 발끝을 내려다봤다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야근을 앞둔 직장인답지 않게 산뜻한 말투라, 말만 이렇게 해 두고 저를 데리러 이곳에 와 있을 것만 같았다.
―아, 희주 씨. 잠시만요.
하지만 바람은 바람일 뿐, 잠시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주는 발끝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주변에는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이들이 하나같이 권태로운 표정으로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그 앞을 지나는 차들은 교통 혼잡으로 가다 서기를 반복 중이었다.
희주는 그 가운데서 강현우의 차와 비슷해 보이는 새카만 차들을 눈으로 좇았다. 멈출 듯 말 듯 앞까지 다가왔다가 쌩하니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가 버리는 차들을 가만히 바라보곤, 길 건너 상가 건물 위로 우뚝 선 오피스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제집에서 강현우와 하룻밤을 지새웠던 일이 옛날 일이 된 것도 아닌데, 마치 옛일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움이 불쑥 치솟았다. 목소리를 듣는 설렘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가 보고 싶었다.
―우리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죠?
잠시 감회에 젖어 있던 희주는 볼일을 마친 듯 제게 말을 걸어오는 강현우에게 불쑥 말을 꺼냈다.
“현우 씨. 다음에는 제가 현우 씨 집으로 놀러 가도 돼요?”
―내 집?
갑작스러운 이야기라도 들을 듯 나온 되물음에 혹시 제가 난처한 요구를 했나 싶어 조바심이 일었다. 다행히 강현우는 곧바로 흔쾌하게 허락했다.
―근데 괜찮겠어요?
“뭐가요?”
―아, 희주 씨는 괜찮을 수도 있겠다. 근데 내가 안 괜찮을 것 같은데…….
그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네?” 하고 한 번 더 물어보았지만, 강현우는 심각하게 침음하고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고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래서 가도 된다는 건지 안 된다는 건지 더욱 헷갈려졌다. 오히려 혼란만 더 가중시킨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오래지 않아 강현우가 결론을 정리해 주었다.
―오고 싶을 때 와도 돼요. 대신…….
“…….”
―자고 가야 될 거예요.
“아…….”
비밀 이야기를 하듯 작고 낮은 목소리에 희주의 귓가가 빨개졌다. 직접적인 단어 하나 말하지 않았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뜻은 너무나도 노골적이었다. 혹시 옆에 서 있는 타인의 귀에 들리기라도 할까, 희주는 손가락을 움직여 통화 음량을 두어 칸 아래로 내렸다.
“말 나온 김에 이번 주에 올래요?”
희주가 낯선 이들로부터 수상쩍은 눈길을 받을 만큼 주변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 백영 그룹 상무실에서 강현우는 안 실장의 경악 어린 눈빛을 받아 내는 중이었다. 공사 구분이 철저한 상사가, 퇴근도 못 하고 있는 와중에도 짬을 내어 애인과 통화를 하는 광경은 또 하나의 충격이었다.
강현우는 앞에 서서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안 실장에게 얼른 나가라며 손을 휘저었다. 마주친 눈이 마치 ‘나간다며. 안 나가?’ 하고 윽박지르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튀겼다.
“……나가 보겠습니다.”
아아, 나는 아무것도 못 들었다.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은 갖춰야 할 기본자세였다. 안 실장은 미적거리다가 괜한 욕을 얻어먹기 전에 얼른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후다닥 나가는 안 실장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강현우는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달력에 힐끗 시선을 두었다. 부끄러워 할 말을 잃은 희주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금요일 어때요.”
―금요일은 평일인데요?
“그러니까. 그럼 이틀 밤은 자고 갈 수 있잖아요.”
강현우는 제 속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사실 하루를 더해 사흘 밤도 괜찮았다. 출근이야 제가 직접 학교 앞까지 데려다주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 돌아오는 말이 없자, 그럴 의도가 없었던 사람한테 너무 검은 속내만 내비친 것 같아 조금 후회가 되려고 했다.
부담스럽게 해서 미안하다고, 싫은 걸 강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금방 뱉었던 말을 회수하려는 순간, 머뭇거리던 희주가 입술을 열었다.
“그럴… 까요?”
―…….
“저… 금요일에 보충도 없고 야자 감독도 안 하는 날인데.”
희주는 휴대폰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입 앞에 차양을 만들어 소곤거렸다. 뜨거운 햇빛 아래 오래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홧홧했다. 쥐구멍이라도 만들어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에, 신호가 바뀌자마자 오피스텔 쪽으로 헐레벌떡 걸음을 옮겼다.
“……?”
오랫동안 벼르고 있던 말을 고백하듯 나름 결연하게 말했건만, 이상하게 반응이 없으니 괜히 민망했다. 혹시 전화가 끊기기라도 했나 싶어 길을 다 건넌 다음 액정을 확인했지만, 통화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뜨거워진 휴대폰을 다시 귀로 가져간 희주가 열없게 물었다.
“저, 현우 씨……. 혹시 제 말이 잘 안 들렸나요?”
―아니요. 들렸습니다. 들렸는데……. 음, 조금 놀라서.
조금 다급하게 답하는 강현우의 목소리는 왜인지 얼떨떨해 보였다. 무엇에 놀랐다는 건지, 희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동자를 데록 굴렸다. 그러고는 얼마 뒤, 이어지는 혼잣말에 놀라 입을 떡 벌려야 했다.
―일이고 뭐고 그냥 지금 내가 거기로 가고 싶네.
한숨처럼 뱉어진 강현우의 말에는 감정을 짓씹기라도 하는 듯한 침음이 섞여 있었다.
“네? 안 돼요……. 내일 출근은 어떡하려고요.”
―음? 자고 간다는 말은 안 했는데요.
아. 김칫국을 시원하게 마셔 버린 희주는 당황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떴다. 곤란한 숨소리를 들었는지 강현우가 어차피 바빠서 가고 싶어도 못 간다는 말을 덧붙여 왔다.
―그리고 지각해도 뭐라고 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말은. 희주는 불만족스럽다는 듯 속으로 툴툴거렸다. 강현우는 틈만 나면 저를 놀려 대는 터라, 이제는 목소리만 들어도 진담인지 농담인지 대번 알아챌 수 있었다.
어느덧 집 앞이었다. 운이 좋게도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없어 곧장 17층으로 올라온 희주는 백팩을 정리하면서 뺨과 어깨 사이에 휴대폰을 낀 채로 통화를 이어 나갔다. 마치 암호처럼 주고받던 은밀한 대화는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묻혀 가고 있었다.
“아, 맞아.”
흘러내리듯 소파에 앉은 희주는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것처럼 허둥지둥 신발장으로 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청첩장을 집어 들었다. 부산스레 움직이자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물음이 넘어왔다. 희주는 난처한 얼굴을 한 채 몇 번 본 이후로 열어 보지 않은 청첩장을 만지작거렸다.
“저 토요일에 갈 데가 좀 있어 가지고요.”
―선약 있습니까?
“선약……. 뭐, 비슷해요. 그 결혼한다는 친구 때문에…….”
―아. 그러네요. 이번 주 주말이라고 했었죠.
“네에. 그래서 토요일에 잠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럼. 데려다줄게요.
그럴 필요는 없는데……. 희주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선 말을 마구 버벅거렸다. 웨딩 홀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데려다주겠다고 하는 것이 당혹스럽기도 했으며, 데려다주기를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염치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부끄러웠다. 하지만 강현우는 단호했다.
―내가 하고 싶어서요. 데려다주게 해 줘요, 희주 씨.
단호하면서도 다정한 호의에 겸연쩍어져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데려다줬다가 그대로 다시 제집으로 데려가려는 강현우의 속셈을 모르는 희주는 그저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 제 연인이라니’ 하고 속절없이 붕 뜨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웨딩 홀의 위치와 결혼식 시간을 묻는 말에 국어책을 읽는 학생처럼 청첩장에 적힌 활자를 또박또박 읽었다. 강현우는 혹시 모르니 청첩장도 함께 챙겨 오라고도 했다. 희주는 청첩장을 챙기기 편하게 눈에 잘 띄는 곳에 내려놓았다.
―결혼식에는 무슨 옷 입고 갈 겁니까?
“옷이요? 글쎄요…….”
희주는 옷장 안 어딘가에 박혀 있을 슈트를 떠올렸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슈트를 입고 가야겠지만, 사실 마땅한 옷이 없었다. 그나마 있는 세미 정장은 샀을 때보다 살이 조금 빠져서인지 영 맵시가 나지 않았고, ‘깔끔함’에 중점을 두고 평상복을 입자니 주변 시선들이 마음에 걸렸다. 슈트를 입지 않았다고 여나연이나 조한희가 무어라 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냥 주변 시선이…….
“그냥… 적당히 입고 갈 생각인데…….”
대충 인터넷에서 괜찮아 보이는 걸로 사서 입고 갈까. 아니면 내일 퇴근하면서 적당한 브랜드에서 사서 입을까. 그나저나 구두는 어디에 뒀지? 슈트를 입을 일이 딱히 없다 보니 덩달아 구두도 애물단지가 된 지 오래였다. 미리 닦아 두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마도 먼지가 잔뜩 쌓여 있을 정장 구두를 꺼내기 위해 까치발을 들고 신발장 선반의 가장 위쪽을 더듬거릴 때였다.
―그럼 나랑 쇼핑이나 갈래요? 내가 골라 줄게요.
* * *
“희주 쌤!”
교사에게 등교 지도와 보충 수업, 그리고 야자 감독이 없는 금요일은 칼퇴근을 하는 여느 직장인과 진배없는 날이었다. 집에 가자마자 치킨에 맥주를 마시며 밀린 넷플러스 드라마나 볼 생각으로 신나게 교무실을 뛰쳐나온 배예은은 정문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희주를 불렀다가 놀란 눈을 해 보였다.
“……아. 예은 쌤.”
“가방 봐. 이게 무슨 일이야. 이걸 출근할 때부터 메고 온 거예요?”
희주는 가던 길을 멈추고 멋쩍은 표정으로 배예은을 돌아보았다. 어색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보지 못한 배예은은 그저 희주 등 뒤의 백팩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제가 한창 임용고시를 준비할 때 메고 다니던 가방보다 훨씬 크고 뚱뚱했기 때문이었다.
“희주 쌤, 원래 이런 보부상 타입이었어요? 씁, 아닌데.”
“보부상이요?”
“네. 이것저것 다 챙기고 다니는 사람들 있잖아요. 당장 하루 집에 안 들어가도 될 만큼 온갖 거 다 가지고 다니는.”
물론 노트북과 간단한 소지품을 넣고 다니기에 백팩만 한 것이 없기는 했다. 그런데 지금 백팩을 멘 희주는 가방을 멨다는 표현보다 어깨에 이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려 보였다. 조금 MSG를 쳐 보자면, 대학생 시절 떠났던 유럽 배낭여행이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이런 희주 쌤은 처음이었다. 늘 과하지 않은 단정함을 유지하던 사람이라 이토록 바리바리 싸 들고 다니는 모습이 새삼 신기했다. 수련회나 수학여행을 갈 때나 이랬지, 평소에는 단출하게 백팩 하나만 딱 메고 다니는 사람인데…….
“혹시 오늘 어디 놀러 가요?”
“아……. 네.”
“어디 놀러 가길래 이렇게 짐이 많아요?”
“그냥… 가까운 데 가는 거예요.”
“어디 캠핑이라도 가요? 요새 캠핑이 유행이잖아.”
그렇다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배예은은 알아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희주가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도 더 더워지기 전에 한번 놀러 가야 되는데.
“부럽다. 나도 어디 놀러 가고 싶네. 캠핑 가서 먹는 라면이 진짜 맛있는 거 알죠.”
“네에……. 예은 쌤도 지금 퇴근하시는 거예요?”
“네. 버스 타러 가는 거예요? 아니면 지하철?”
가는 길에 내려 줄까요? 배예은은 희주의 백팩을 슬쩍 턱짓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묵직해 보이는 가방을 맨 채 버스나 지하철을 타러 가는 것도 무리일 것 같아 보였다.
“괜찮아요. 그… 친구가 데리러 온다고 했어요.”
“그래요? 다행이네. 그럼 지금 친구분 기다리는 거예요?”
“네……. 앞까지 온다고 해서…….”
왜인지 희주는 배예은의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손에 휴대폰을 꼭 쥔 채 정문 바깥쪽을 힐끔거리는 것을 보니, 지금 상황 자체를 불편해하는 듯했다. 이것저것 참견하던 배예은은 괜히 희주의 시간을 빼앗은 느낌에 눈치껏 한 걸음 물러났다.
“재밌게 놀다 와요. 더 더워지면 모기 때문에 가고 싶어도 못 갈 텐데.”
서로 월요일에 보자는 인사를 나눈 뒤 둘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헤어졌다. 정문 밖으로 나가는 희주와 달리 배예은은 정문 옆에 있는 주차장으로 방향을 꺾었다. 무슨 치킨을 시켜 놓을까? 어디 보자……. 차에 올라 에어컨을 가동시켜 놓은 후, 휴대폰으로 배달 앱을 살펴보았다. 이내 마음에 드는 메뉴를 고르고 배달 예상 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휴대폰을 거치대에 올려 두고 기어를 드라이브로 당겼다.
“아, 다 좋은데 신호가 너무 짧아.”
좌회전 신호를 받고 도로로 나온 배예은은 얼마 가지 못하고 들어오는 빨간불에 발을 브레이크로 가져가며 투덜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학교 근처라 제한 속도가 걸려 있는데, 이놈의 신호는 터무니없이 짧아서 늘 같은 구간에서 거북이가 되고는 했다.
핸들에 손을 올린 채 흘러나오는 음악을 따라 톡, 톡 손톱으로 박자를 맞추며 차창 밖을 바라보던 배예은은 시선을 바로 했다가 갑자기 퍼뜩 고개를 돌려 왼편을 바라보았다. 단조로운 교복을 입은 아이들 사이에서 사복을 입은 사람은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그 사람이 아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희주 쌤?”
의아한 투로 중얼거리며 희주를 아연히 쳐다보았다. 내가 태워 준다고 한 게 그렇게 부담되고 싫었나? 보기보다 잔걱정이 많은 편인 배예은은 순간 큰 상처를 받을 뻔했으나, 희주가 귓가로 가져다 댄 휴대폰을 보고 금세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아무래도 데리러 온다는 그 친구와 통화를 하는 듯했다.
접선 장소가 바뀌기라도 했나. 하긴,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학교 앞에서 만나는 건 제법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배예은은 별생각 없이 희주의 뒤를 눈으로 좇았다. 어디까지 가나 봤더니 학교 담장이 끝나는 부근에서 꺾이는 골목길이었다.
골목길에는 까만 세단 한 대가 서 있었다. 혹시 저게 친구분 차인 건가? 의문을 가지는 순간 운전석 문이 열리고 차 안에서 웬 근사한 알파가 내렸다. 굳이 페로몬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파임을 알 수 있는 외관이었다. 배예은은 남자의 완벽한 생김새에 순간 넋이 나가 버렸다.
“와……. 뭐야?”
형질자는 드물었고, 우성임이 외양으로 드러날 정도의 알파는 더욱 드물었다. 배예은은 평생 저런 잘생긴 남성 알파는 두 눈으로 직관한 적이 없었다.
영화, 드라마에 나오는 존잘 알파들은 다 CG 인간들 아니었냐고. 배예은은 제가 차에 타고 있다는 것도 깜빡 잊고 고개를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저런 외모의 알파가 살아 움직이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다.
슈트발이 대박이었다. 반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요새 인기 있는 아이돌이나 배우들의 슈트 사진을 보고 감탄할 때, 선생으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지만 배예은은 남자의 슈트에 대해 그 누구보다 관심이 지대한 여자였다. 연예인인가? 딱 봐도 배우 할 상인데, 저런 피지컬의 배우를 제가 모를 리가 없었다.
“……뭐야.”
단숨에 팬이 되어 버린 배예은은, 그다음 이어지는 남자의 행동에 놀라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인도 위로 뛰어 올라온 남자는 막 골목길로 들어선 희주에게 아는 척을 했다. 등 뒤에 조명이라도 설치를 해 뒀나 싶을 만큼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희주를 반기던 그는 이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을 찌푸리더니 희주에게 손을 뻗어 백팩을 가뿐하게 가져가 버렸다. 그러고는 직접 조수석 문을 열어 준 다음 몹시 매너 있는 태도로 희주를 에스코트하는 것이 아닌가.
더 놀라운 건 희주의 반응이었다. 조금 부끄러운지 어물어물 수줍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아들이는 데 어색함이 없었다. 익숙하게 백팩을 떠넘기고 당연하게 조수석에 올랐다. 조수석 문을 닫는 것도, 백팩을 차에 싣는 것도 모두 상대 알파가 하게 내버려 둔 채로.
저건 누가 봐도 데이트를 하러 가는 알파와 오메가의 모습이었다. 창문에 찰싹 달라붙어 그런 두 사람을 응시하던 배예은은 잠시 후 제 곁을 스쳐 지나가는 세단을 따라 애처로울 만큼 고개를 기울였다.
빵!
뒤에서 들려오는 클랙슨 소리에 허겁지겁 앞을 돌아본 배예은은 이미 한참 벌어진 앞차와의 간격에 놀라 얼른 액셀을 밟았다. 처음 도로에 나왔을 때로 돌아간 것처럼 핸들을 쥔 두 팔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다.
“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번 신호를 받아 멈춘 배예은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여전히 벙찐 표정이었다. 정말 깜짝 놀란 얼굴로 뺨을 스윽 매만진 배예은은 얼마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전에 희주 쌤이 웃으면서 메시지를 주고받은 상대가, 또 잔뜩 달고 왔던 우성 알파 페로몬 주인이 방금 저 남자라는 거지?
친구라더니. 그냥 친구가 아니라 남자 친구였던 모양이다.
“희주 쌤 혼자 봄이구만, 봄이야……. 저런 알파는 어디서 만날 수 있으려나.”
부러움이 가득 섞인 말을 중얼댔다. 괜히 무안하게 먼저 아는 척하지 말고, 나중에 직접 좋은 소식을 듣게 될 때나 말해 줘야지. 어떻게 만나 연애하게 되었는지 최대한 주접을 억누르고 경청할 작정이었다. 남의 연애사가 제일 재밌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희주 쌤 남친 되시는 아까 그분, 왜 이렇게 눈에 익은 느낌인지 모르겠다. 진짜 연예인이라도 되는 건가.
어디서 본 얼굴인지 기억을 더듬던 배예은은 괜한 추측 말자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얼른 집에나 가자. 토끼 같은 남친이나 남편은 아니더라도 맛있는 치킨이 기다리고 있다.
* * *
“오시는 데 길은 많이 안 막혔……. 읍.”
차에 오른 강현우는 주섬주섬 안전벨트를 메고 있는 희주의 입술에 냅다 제 입술을 가져다 비볐다. 말을 하는 도중 기습적으로 덮친 탓에 이가 강하게 부딪혔지만 개의치 않고 입술을 맞물렸다. 얼굴을 보자마자 이러고 싶었다.
희주는 물씬 풍겨 오는 페로몬에 금세 녹녹해져 강현우보다도 먼저 입술을 벌리고 혀를 내밀어 왔다. 강현우는 그걸 매우 기꺼워하며 받아들였다. 희주의 혀를 입술로 물어 당기고, 버거운지 도망가려는 걸 따라가 입 안을 부드럽게 헤집었다.
일부러 젖은 소리를 내면서 혀를 얽자 내려앉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금방 열이 올라 뜨거워진 뺨을 엄지로 살살 쓸어 주며, 듣기만 해도 녹을 것 같은 신음을 단번에 집어삼켰다.
입맞춤에 조금 더 욕심을 내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아쉬워하며 강현우가 천천히 입술을 떨어뜨렸다.
“이제 눈 떠도 되는데.”
타액에 젖은 입술을 가벼이 누르듯 입을 맞춘 강현우는 있는 힘껏 감긴 눈을 보며 작게 웃었다. 먼저 혀를 내밀어 키스를 시작한 사람답지 않게 얼어 있는 모습은 미소가 절로 피어오를 정도로 귀여웠다.
“깜짝 놀랐잖아요…….”
그래서 싫었느냐는 질문을 들으면 그건 아니었다고 고개를 흔들 거면서, 부끄러움이 앞선 희주는 약간의 질책을 섞어 작게 투덜거렸다. 눈이 채 마주치기도 전에 시작된 입맞춤에 저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손에 꼭 쥐고 굳어 버렸던 터라 움켜쥔 모양 그대로 손자국이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주는 멋쩍게 벨트를 정리하며 시선을 피했다.
“놀랐어요? 큰일이네. 빨리 익숙해져야 될 텐데. 앞으로 어떡하려고 그래요.”
강현우는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부끄러움에 뺨을 붉히는 반응도 충분히 좋았지만, 전혀 놀란 티를 내지 않고 적극적으로 구는 연인을 상상하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흥미로울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잔뜩 발기한 채로 운전을 해야 할 것만 같은 예감에 강현우는 빠르게 생각을 접고 핸들을 꺾었다.
두 사람을 태운 차량은 금방 도심을 빠져나와 고속 도로의 퇴근 행렬에 합류했다. 다행히 서울 방향의 길은 반대 방향에 비해 크게 막히는 편은 아니었다. 희주는 답답하리만치 꽉 찬 반대 차선을 한번, 다소 여유로운 차선을 한번 바라보다가 한창 운전에 집중 중인 강현우를 힐끔 쳐다보았다.
출발과 동시에 붙잡힌 손이 신경 쓰여 자꾸만 그쪽으로 시선이 갔다. 툭툭 불거진 뼈나 핏줄은 거칠기 짝이 없는데, 살결이 흰 편이라 그런지 고와 보이는 손이었다. 문득 저 손이 제 몸 곳곳에 닿았던 기억이 떠올라 광대뼈가 들썩거렸다.
확연히 차이가 나는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맞춘 듯이 겹친 두 손을 힐끔거리는 찰나, 마침 이쪽으로 시선을 둔 강현우와 눈이 마주쳤다.
“근데 무슨 짐을 이렇게 많이 싸 가지고 왔어요? 들어 보니까 꽤 무겁던데.”
거의 반사적으로 미소 지은 강현우가 다정한 물음을 던졌다. 뒷좌석에 반듯하게 실어 둔 백팩을 룸 미러를 통해 힐긋 바라본 그는 다시 봐도 궁금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냥 학교에서 쓰는 노트북도 있고요. 혹시 몰라서 내일 결혼식 갈 때 입을 옷이랑 구두도 챙겨 왔어요.”
“쇼핑하러 갈 건데 왜 가져왔어요?”
“……혹시 몰라서요.”
솔직하게 말할까 잠시 고민한 희주는 대충 말을 얼버무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슈트나 구두, 둘 중 하나만 사는 거면 몰라도 풀 세트로 구매하기에는 이번 달 생활비 예산이 조금 빠듯했다. 직업상 자주 입는 옷도 아니고, 어쩌다 한두 번 입을 옷에 과소비할 생각은 딱히 없었다.
여유만 있었더라면 수선해서 입었을 텐데.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아까운 건 아까운 거였다. 미리 신경 썼었더라면 이런 불필요한 소비는 하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
그래도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새 옷을 사면 어쨌든 기분이야 좋을 테고, 무엇보다 데이트도 하는 것 아니던가.
“또 가져온 거 있어요? 방금 말한 세 가지만 가져왔다고 하기에는 부피가 여간 큰 게 아닌데요?”
“아……. 세면도구랑 갈아입을 여분 옷도 챙기느라요.”
“으음. 굳이 챙길 필요는 없었는데. 미리 말해 줄 걸 그랬네요.”
굳이 챙길 필요가 없다고 지칭하는 대상들은 희주가 말한 전부였다. 무슨 옷을 입고 가든 잘 어울리는 옷들은 모두 사서 입혀 줄 생각이었고, 세면도구나 여분 옷은 집에 있거나 새로 사도 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희주의 생각은 달랐다. 갈아입을 옷을 빌려준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그는 조금 멋쩍어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현우 씨 옷은 사이즈가 안 맞을 것 같아서요…….”
대강 가늠하기에도 두 사람의 체격 차이는 현저했다. 마른 편이기는 하지만 무작정 말랐다기보다 적당히 어깨가 벌어진 일반 체형인 희주에 비해, 강현우는 그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훤칠하고 다부진 체형이었다. 만약 그의 옷을 빌려 입기라도 한다면 우스운 꼴을 자처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딱히 잠옷이랄 것은 없지만, 나름 후줄근하지 않고 말끔한 옷을 골랐다. 그리고… 속옷도 마찬가지였다.
희주가 괜한 민망함에 입술을 꾹꾹 말아 문 사이, 그런 희주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강현우가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희주 씨가 그걸 입을 시간이 있을까 해서요.”
“……네?”
“응?”
짧은 침묵 이후, 희주가 잔뜩 당황한 얼굴로 강현우를 돌아보았다. 옆얼굴에 닿는 시선을 느낀 강현우가 희주의 눈을 마주해 왔다. 마치 제 귀를 의심하는 듯 커다랗게 뜨인 눈이 조금 빠른 속도로 삼박삼박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왜요, 희주 씨?”
강현우는 도리어 뭐 문제 있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투로 되물었다. 그러자 희주는 더욱 혼란이 가중되는지 금방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객쩍게 고개를 앞으로 했다.
속으로 가만히 웃음을 삼킨 강현우는 희주에게서 시선을 떼고 도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는 딱히 부연하지 않았다. 제 말을 이해 못 한 것 같다기보다는, 자신이 이해한 바가 정녕 맞는지 확인을 받고자 했던 걸로 보였다. 차라리 대놓고 말해 줄 걸 그랬나. 어떤 옷을 챙겨 왔든 제집에서는 걸칠 틈도 없을 거라고.
마음만 먹으면 갓길에 차를 세워 두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알려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저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꼴밖에 더 보지 못할 것 같았다. 파렴치한 알파라는, 제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차에서 일을 치르고 싶은 마음도 일절 없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다정하게, 살살 녹여 먹듯 안아 주고픈 마음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데이트의 끝이 제집이라는 사실은 강현우에게 제법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둘 중 그 누구도 방금 강현우의 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자, 자연스러운 듯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찾아왔다. 그사이 고속 도로를 빠져나온 차는 고속 도로만큼이나 복잡한 서울 시내로 접어들었다.
강현우는 언제 대화가 끊겼냐는 양 배가 고프냐고 여상하게 물었다. 어느덧 저녁 먹을 때에 다다라 있는 시간에 희주는 고개를 끄덕였고, 강현우는 고심하듯 핸들을 톡톡 두드리며 이번에는 먹고 싶은 게 있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그럼 쇼핑하기 전에 일단 밥부터 먹어요. 마침 여기 근처에 괜찮은 레스토랑 있거든요.”
“네에……. 좋아요.”
“여기서 밥 먹고, 쇼핑 좀 하다가 집으로 갑시다.”
희주는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제집이 아닌 강현우의 집으로 간다는 말을 다시 한번 확인받듯 듣고 나니 목덜미가 마구 화끈거렸다.
동시에 옷을 입을 시간이 없을 거라는 말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연인의 저돌적인 표현에 면역력이 생기려면 한참의 시간이 필요할 것만 같았다.
* * *
서울의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본래의 목적이었던 쇼핑을 위해 자리를 옮겼다. 당연히 백화점으로 갈 줄 알았는데, 도착한 곳은 편집숍들이 한데 모여 있는 거리였다.
직접 주차를 하는 대신 발레파킹을 맡기는 강현우를 따라 차에서 내린 희주는 강현우에게 손을 내어 준 채로 거리를 나섰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거리 안팎으로 사람들이 제법 많아 보였다.
사람들이 오갈 때마다 한두 번씩 눈이 마주쳤는데, 그러는 족족 난처해하며 먼저 시선을 피하던 희주는 멋쩍게 눈동자를 굴리다가 불현듯 강현우를 곁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강현우 때문인 듯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훤칠한 키에 연예인이 아닐지 합리적인 의심이 가는 외모, 그리고 마치 모델이라도 되는 듯 몸에 딱 맞는 슈트를 입고 있는 그는 주관적으로 보나 객관적으로 보나 정말 근사한 남자였다.
왜 그러냐는 듯 눈을 마주해 오는 강현우에게 희주는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슬쩍 웃고 말았다. 그러고는 은근슬쩍 강현우에게 바짝 어깨를 붙였다. 유치한 심보기는 하지만 사귀는 사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강현우는 그런 희주를 보며 입술을 당겼다.
“혹시 평소에 입는 브랜드 있어요? 자주 입는 디자인이라거나.”
양옆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가게들을 신기한 것을 쳐다보듯이 구경하던 희주는 강현우의 물음에 조금 민망하게 고개를 저었다. 입는 브랜드는커녕 알고 있는 브랜드조차 없었다.
“아니요, 저… 평소에 입을 기회가 별로 없어서…….”
“음. 그럼 저기로 가 볼까요?”
강현우는 여러 곳을 둘러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희주를 이끌었다. 희주는 군말하지 않고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굳이 브랜드를 따져 가면서까지 살 필요는 없었지만, 강현우와 데이트도 하러 온 김에 여유롭게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강현우가 희주를 데리고 간 곳은 남성 정장이 주로 진열된 매장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각 잡힌 정장을 유니폼으로 차려입은 남자 직원이 두 사람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해 왔다. 얼굴을 보자마자 대번에 누구인지 알아본 직원은 VVIP 고객을 상대하는 자세에 있어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찾으시는 제품이 있는지 따위의 상투적인 안내는 일절 없었다. 평소 귀찮은 참견을 질색하는 성향을 알기에 직원은 그저 인사를 했던 그 자리에 병풍처럼 서서 고객의 움직임을 좇았다. 혹시 고객께서 도움을 요청하면,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준비를 마치고서.
“일단 한번 둘러볼래요?”
그런 직원에게 짧게 묵례를 한 강현우가 빙긋 웃으며 희주를 돌아보았다.
“희주 씨는 슈트를 자주 입는 편은 아니니까… 이쪽 라인이 무난하고 좋을 것 같아요.”
매장을 가볍게 훑어본 강현우가 쭈뼛거리고 선 희주를 데리고 한쪽 행거 앞에 섰다.
마치 억지로 등이라도 떠밀린 사람처럼 희주는 주춤주춤 행거 앞에 섰다. 벽면을 정확히 반으로 나누어 설치된 행거에는 수십 벌의 재킷들이 위아래로 빽빽하게 걸려 있었다.
희주는 강현우를 힐끔 봤다가, 이내 곤란한 듯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시선을 바로 했다.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는 나름 옷을 사러 온 사람이 하는 것처럼 옷걸이를 하나씩 들추며 살펴보았다. 손에 잡히는 것을 빼서 앞면과 뒷면을 살펴보기도 하고, 접혀 있는 깃 부분을 손끝으로 슬쩍 매만지기도 했다.
“…….”
일단 보라고 하니 대충 흉내는 내고야 있지만…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희주의 눈에서는 다 거기서 거기였다.
이 옷이 저 옷 같고, 저 옷이 이 옷 같아 보였다. 같은 디자인에 사이즈만 다르다고 가정해도 종류가 수십 가지일 텐데 말이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는다고, 1년에 한 번은 입나 싶을 만큼 슈트와 거리가 멀었기에 희주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한참을 고민하던 희주는 저보다 더 집중한 것으로 보이는 강현우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저, 현우 씨…….”
“네. 희주 씨.”
강현우는 희주가 부르자마자 냉큼 보던 것을 내려 두고 희주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가까이서 본 희주는 어쩐지 곤란해 보였다. 뭐 문제가 있나 싶어 덩달아 눈썹 끝을 늘어뜨린 강현우가 희주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다정하게 물었다.
“왜요. 혹시 마음에 드는 게 없어요?”
“그게 아니라…….”
화들짝 놀란 희주가 직원의 눈치를 살폈다. 들었는데 안 들리는 척을 한 건지 정말 못 들은 건지, 직원은 멀찍이 서서 여전히 친절한 미소를 입에 걸고 있었다. 속으로 안도한 희주는 그제야 강현우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마음에 드는 게 뭔지도 모르겠다고 말해야 되는데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면 너무 많아서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름 추측하여 물었더니 희주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아……. 네. 너무 많기도 하고… 또 제가 이런 거 보는 눈이 없어서요…….”
부탁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지 희주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어차피 내가 골라 주기로 했잖아요. 내 마음에 드는 것보다 희주 씨 마음에 드는 게 더 중요하니까, 그래서 먼저 보라고 한 건데… 이렇게 어려워할 줄은 몰랐네요. 처음부터 나랑 같이 볼 걸 그랬다, 그죠.”
상냥하게 웃은 강현우는 감싸고 있던 희주의 어깨를 둥글리듯 어루만져 준 후, 작게 침음하며 행거를 살펴보았다. 희주는 팔다리가 길쭉길쭉한 데다 피부가 하얘서, 어떤 색감과 질감의 슈트를 입혀 놓아도 잘사는 집의 도련님 같은 모습일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오로지 희주만을 위한 맞춤으로 입히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한 것이 흠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아쉬운 대로 제가 즐겨 입는 매장에 그를 데려온 강현우는 제 슈트를 고르는 것보다 더 신중하게 행거를 뒤적거렸다. 기성도 맞춤만큼이나 괜찮게 제작하는 곳이었지만, 성에 차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근데 내가 전문가는 아니라서요. 그냥 내 눈으로 봤을 때 예뻐 보이는 걸로만 골라 줄 것 같아서 걱정이네요.”
“그래도 현우 씨가 저보다는 많이 아실 것 같아요. 저는 정말… 뭐가 다른지 진짜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그럼 일단 몇 벌 입어 볼래요? 눈으로 보는 거랑 직접 입어 보는 거랑은 다르니까.”
속 시원한 제안에 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짓 한 번으로 단숨에 다가온 직원 앞에서 강현우는 눈대중으로 골라 둔 재킷들 중 몇 벌을 들어 희주의 몸 앞에 대어 보았다.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것도요. 셔츠랑 바지까지 다 입어 볼까 하는데요.”
“네, 고객님. 안쪽 탈의실로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다 고객님께서 입어 보실 건가요?”
저를 향하는 시선에 말문이 막힌 희주가 도와 달라는 듯 강현우를 쳐다보았다. 강현우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잠시 희주에게로 향했던 직원의 시선이 도로 강현우에게 돌아왔다.
“그럼 사이즈는 맞는 걸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혹시 넥타이도 필요하실까요?”
“일단 매니저님께서 재킷마다 어울리는 걸로 같이 준비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구두는 탈의실 안쪽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앉아 있을게요. 천천히 입고 나와요.”
희주가 직원의 안내를 받아 탈의실 안쪽으로 사라지고 난 후에야 소파에 앉은 강현우는 유리 테이블 위에 놓인 브로슈어를 집어 한 장 한 장 무감하게 넘겼다. 성의 없는 손짓이 누가 봐도 애써 시간을 때우는 모습이었다.
깊게 살펴보지 않고 넘기던 강현우가 일순 멈칫하며 손을 멈추었다. F/W컬렉션의 화보가 실린 페이지 뒤쪽으로 ‘웨딩’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적혀 있었다. 감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강현우의 표정에 묘한 호기심이 퍼졌다.
몇 분 후, 굳게 닫혀 있던 탈의실이 달칵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소리에 이끌려 고개를 든 강현우의 앞으로 단정한 슈트로 바꿔 입은 희주가 쭈뼛쭈뼛 걸어 나오고 있었다.
희주는 강현우가 은은한 광이 비치는 블랙 슈트를 입은 채였다. 강현우의 예상대로 너무도 잘 어울렸다. 검은 원단은 그러잖아도 흰 피부를 더 환히 빛나게 했고, 길쭉한 팔다리에 맞게 재단된 듯한 핏은 희주의 예쁜 몸 선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맞춤이 아닌 기성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그의 몸 치수를 재어 만든 옷 같았다.
제가 골라 준 새 옷을 입고 앞에 서는 게 부끄럽기라도 한지 희주의 뺨은 옅게 붉어진 채였다. 그 모습은 잘사는 집안의 사랑받는 도련님 아니, 그것보다는 금방 브로슈어에서 본 예복 화보가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새신랑. 괜스레 넋이 나간 강현우는 소파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희주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
“…….”
목덜미를 스치는 와이셔츠의 빳빳한 깃이 어쩐지 간지럽게 느껴지는 듯했다. 희주는 우물쭈물 시선을 피했다가 무언가 결심을 한 것처럼 다시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몇 초간 시선을 마주해 보았지만, 강현우의 침묵은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잘 어울린다거나, 아니면 별로라는 반응을 예상했던 희주는 이 숨 막힐 듯한 침묵에 영문 모를 쑥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저 반응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혹시 이건 별로 안 어울리나? 좋게 돌려 말하려고 고민하는 건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하고 있는데 오래달리기를 한 것처럼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덥지도 않은데 두 손 가득 땀이 고이는 착각마저 이는 기분이었다. 희주는 손가락을 꼼질거리다가 손에 쥐고 있던 넥타이를 머뭇머뭇 들어 올렸다.
“저… 넥타이는 맬 줄 몰라서…….”
“도와드리겠습니다, 고객님.”
“아니요, 매니저님.”
그제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강현우는 한 발짝 나서려는 매니저를 가만히 뒤로 물렸다.
“내가 매 줄게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난 강현우는 거침없이 희주에게 다가갔다. 그가 앞으로 불쑥 다가옴과 동시에 손에 들린 넥타이가 스르륵 빠져나가고, 강현우의 슈트에 배어 있던 페로몬이 훅 끼쳐 왔다.
넥타이를 받아 든 강현우는 희주의 목뒤로 두 손을 넘겼다. 희주는 그대로 포옹이라도 할 것 같은 자세에 움찔거리며 눈을 감았다가,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손길에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희주 씨 옷 갈아입는 동안에 저기 앉아서 책자 보고 있었거든요.”
“……네?”
조용한 속삭임에 희주가 강현우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희주와 눈을 맞췄던 강현우는 다시 넥타이에 시선을 내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근데 거기에 웨딩 화보가 나오는 거예요. 여기 예복 맞추러도 많이 오는 브랜드거든요.”
“…….”
“뭐랄까……. 희주 씨가 예복 맞추러 온 것도 아닌데 꼭 그러려고 온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목덜미에서 시작되었던 미미한 간지러움이 몸속으로 파고들었는지 심장 부근이 몹시도 간지러웠다. 희주는 주먹 쥔 손의 손톱을 세워 손바닥을 자근자근 눌렀다. 심장을 긁을 수 없는 대신, 이렇게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그런 장면들 많이 나오잖아요. 드레스나 슈트 입은 자기 배우자 보고 다시 한번 첫눈에 반하는 거.”
그러고는 매듭지은 넥타이 끝을 잡고 쭉 잡아당겼다. 넥타이를 정돈해 주는 척 희주의 가슴과 배를 쓸어내렸다. 입술이라도 닿은 것처럼 몸을 튕기는 희주를 가만히 붙잡아 재킷 단추도 찬찬히 채워 준 강현우는 마음에 든다는 듯 웃음 지었다.
“예쁘네요. 다시 한번 첫눈에 반할 만큼.”
칭찬인지 고백인지 모를 말을 들은 희주는 오래된 태엽 인형처럼 삐걱거렸다. 두어 걸음 물러난 강현우가 뿌듯하게 저를 훑어보는 시선이 어쩐지 부끄러워 재킷 끝자락을 꾹 쥐었다가 놓았다.
낯간지럽기 짝이 없는 말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거울 속 제 얼굴은 강현우가 매 준 넥타이보다도 훨씬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다가온 매니저가 이태리 원단이 어떻고, 버튼이 어떻고 하면서 슈트의 디테일을 설명해 주었지만,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희주는 애써 경청하는 척 내리깐 눈으로 슈트를 바라보다가 거울 속 강현우를 슬쩍슬쩍 쳐다보았다.
“젊은 고객님들 사이에서 선호도가 높은 제품입니다. 은은하게 광택이 도는 원단이라 요즘 날씨에 착용하셔도 크게 더워 보인다는 느낌도 적고요.”
조금 거리를 두고 선 강현우는 팔짱을 찌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이어지는 설명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고객님 체형이 타고나셔서요. 정장이 정말 잘 어울리세요. 원래 기성은 패턴 자체가 서양인 체형에 맞게 나와서, 동양인 체형에 예쁘게 입으려면 추가 수선은 필수적이거든요. 고객님께서는 특별히 수선할 곳도 딱히 보이지 않아서 바로 착용하셔도 될 것 같아요.”
“희주 씨는 어때요? 내가 보기에는 잘 어울리는데. 혹시 불편한 곳 있어요?”
몸을 틀어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옷태를 훑어보던 희주는 갑작스러운 물음에 후다닥 몸을 바로 했다. 솔직히 어색함과 불편함의 그 중간쯤 되는 애매한 느낌이었지만, 두 사람으로부터 계속 칭찬만 들어서인지 어색함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듯했다. 잘 어울린다고 하니 그래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곰곰이 생각을 마친 희주가 고개를 저었다.
“신랑님들이 예복으로도 많이 선택하시는 제품 중 하나입니다. 원하시는 경우 턱시도 리폼은 물론이고, 식 이후에는 평상시에도 착용 가능하게 수선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금세 미소가 짙어진 직원이 매장 한쪽을 가리켰다. 돌아본 곳에는 턱시도를 입은 마네킹이 우뚝 서 있었다. 강현우는 당연하게 턱시도를 권하는 태도에 당황했는지 도와 달라는 눈빛을 보내는 희주를 보며 설핏 웃었다.
“아쉽네요. 결혼식 때 입기는 할 건데, 신랑이 아니라 하객으로서 입을 거거든요.”
“아……. 죄송합니다. 두 분이 너무 잘 어울리셔서요. 당연히 예복 보시는 걸로 생각했습니다.”
“매니저님께서 보시기에 그래 보여요?”
“네. 그럼요.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세요.”
직원은 당황하지 않고 눈치 빠르게 듣기 좋은 소리만 늘어놓았다. 그런 그를 향해 재차 물음을 던진 강현우는 작게 웃음을 흘리고는 희주의 어깨를 뒤에서 감쌌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희주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거울 속 강현우와 눈을 맞췄다.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은 오해였다.
슬쩍 몸을 숙여 희주와 눈높이를 맞춘 강현우는 희주의 어깨를 감싼 손으로 팔뚝을 따라 팔꿈치까지 스르륵 쓸어내렸다. 손바닥 아래로 매끄러운 원단과 함께 희주의 마른 몸 선이 감겼다. 체형이 타고났다는 직원의 칭찬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사르르 눈을 휘며 웃은 강현우는 나른한 어투로 말문을 뗐다.
“자기야.”
“……!”
희주는 난데없는 ‘자기야’ 호칭에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귀가 새빨개진 채 어버버 입술만 달싹였다. 이렇게 공개적인 곳에서 애정 행각이라니.
“어떻게 생각해요? 예쁘고 잘 어울리기는 하는데, 듣고 보니까 이건 너무 새신랑 같지 않아요?”
어차피 사귀는 사이에 결혼 준비하는 예비부부로 오해도 받았겠다, 능청스럽게 달짝지근한 호칭으로 부른 강현우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하객으로 갔다가 신랑으로 오해받으면 어쩌나 싶은데.”
“그,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평범… 평범한 정장인데…….”
“나한테는 그 정도예요.”
강현우는 자꾸만 직원의 눈치를 살피는 희주가 야속해 팔뚝을 감싸 쥔 손에 슬쩍 힘을 주어 시선을 제게로 돌렸다.
“다른 것도 한번 입고 나와 볼래요? 다른 색도 어울리는지 같이 봐요.”
아직까지 ‘자기야’ 호칭에 얼이 빠진 희주가 엉거주춤 직원의 뒤를 따랐다.
강현우는 희주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매장에 진열되어 있는 슈트와 넥타이를 신중하게 눈으로 훑었다. 슈트는 물론이고 넥타이와 벨트 하다못해 행커치프까지, 슈트를 입는 데 필요한 부수적인 것들 모두를 빠짐없이 살펴보고 골라냈다.
마음 같아서는 눈에 들어오는 것들 전부를 사다가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저처럼 슈트를 자주 입는 직업이 아닌 희주에게 수십 벌이나 되는 슈트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 뻔했다. 가장 어울리는 것 하나만을 골라야만 했기에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었다.
오늘은 아쉽지만 이 정도로 하고, 나중에는 전문 쇼퍼를 데려다가 계절별로 싹 맡겨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강현우는 진청색의 넥타이를 들어 매만졌다. 제 옷을 사는 건 그렇게 귀찮은 일이 아닐 수가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희주에게 갖가지 슈트를 입혀 보는 것은 몹시 흥미로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강현우의 요청으로 직원이 추천해 주는 넥타이를 맸던 희주는, 두 번째 피팅 때부터는 강현우가 직접 골라 준 넥타이를 매고 그의 앞에 섰다.
“고객님 피부 톤이 밝으신 편이라 밝은색 정장도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음. 희주 씨는 어때요? 밝은 게 좋아요, 아니면 이거 전에 입었던 것처럼 어두운 게 좋아요?”
“저는… 이거요.”
희주는 이리저리 몸을 돌려 옷태를 확인했다. 슈트를 입고 나와 강현우의 앞에 서는 것조차 어색해하던 희주도 거쳐 간 슈트가 대여섯 벌 정도가 되었을 무렵이 되자 제 의견을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고객의 취향을 파악한 직원이 탈락한 슈트를 정돈해 행거에 걸었다. 강현우는 마지막으로 한 벌만 더 입어 보자며, 희주가 탈의실에 들어가 있는 사이 하나 더 골라 둔 캐주얼한 체크 패턴이 들어간 슈트를 희주에게 내밀었다. 마치 제 옷을 고르는 사람처럼 그는 무척 즐거워 보였다.
“이게 마지막이에요. 이런 진한 패턴 들어간 건 아직 안 입어 봤으니까.”
전에 없이 탈의를 반복한 희주는 약간 지쳐 보였지만 강현우는 모르는 척 그를 탈의실로 들여보냈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예쁘랬나. 아무거나 입혀도 잘 어울릴 건 뭔지, 저도 모르게 이것저것 입혀 대는 바람에 시간도 어느새 폐점 시간에 바짝 가까워져 있었다.
강현우는 다소 무난한 톤의 재킷이 걸려 있는 행거를 지나, 붉은 색감 재킷들도 둘러보았다. 피부가 하얗고 밝아서 이런 원색의 슈트를 입어도 예쁠 것 같았다.
이왕 입어 보는 거, 이런 디자인도 한 벌 입혀 볼 걸 그랬나. 아쉬움이 그득 묻은 손길로 재킷을 만지작거리던 강현우는 그대로 손을 물렸다. 마지막이라며 이미 뱉어 둔 말은 지켜야 했기에.
* * *
결국 희주가 고른 슈트는 돌고 돌아 처음 입어 봤던 이태리 원단의 블랙 슈트였다. 브라운이나 그레이 색상도 마음에 들었지만, 가장 무난하기로는 블랙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현우는 조금 못마땅한 듯했다. 꼭 그걸로 해야겠냐며, 벗어 둔 다른 디자인의 슈트를 희주의 몸에 대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를 반복했다.
급기야 강현우는 웬 자주색의 슈트를 가져와서는 입어 보라고 성화를 부렸더란다. 이런 색의 정장은 대중 매체에서나 봤지 실제로는 처음 보는 거였던 희주는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손사래를 쳤다. 직원 역시 서비스직 특유의 친절한 미소를 장착하고는 있었지만 꽤 난처해 보였다.
다른 슈트로 바꾸겠다고 하니 또 그러지는 말라고 절레절레, 제가 고른 슈트를 힐끔거리니 너무 잘 어울려서 별로라고 절레절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거의 울상이 된 희주를 본 강현우는 그래도 잘 어울리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면서 종국에는 희주의 선택을 존중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우여곡절 끝에 고르자 결제와 포장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직원의 정중한 인사를 받으며 매장을 빠져나온 두 사람의 손에는, 들어갈 때에는 없었던 쇼핑백이 잔뜩 들려 있었다.
정확히는 강현우의 손만 묵직했다. 고급스럽게 포장을 마친 재킷과 바지, 셔츠는 물론이고 넥타이와 벨트, 행커치프까지 빠짐없이 담겨 있는 쇼핑백은 도무지 한 손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 부피와 무게였다. 무겁지도 않은지 강현우는 추어올리지도 않고 가뿐하게 든 채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구두는 아까 희주 씨가 신었던 구두랑 같은 디자인으로 달라고 했어요. 구두도 같이 하거든요. 내일 아침에 늦지 않게 퀵으로 보내 준다니까 내일 구두는 그거 신고 가요.”
강현우의 말투는 평이했다. 그런 그를 희주는 불편해 죽겠다는 시선으로 힐끔거렸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강현우의 손에 들려 있는 쇼핑백 때문이었다.
어느 것이 가장 마음에 드느냐는 질문에 어렵사리 결정을 내린 후, 입고 왔던 옷을 갈아입기 위해 도로 탈의실로 들어갔던 희주는 그제야 슈트에 걸린 태그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태그를 확인한 희주는 이상하리만큼 긴 숫자에 태그를 눈앞으로 바짝 가져다 댔다.
잘못 봤나? 아니었다. 뒤에서부터 찬찬히 “일, 십, 백, 천, 만” 하고 세어도 봤지만 자신이 보고 이해한 그 단위가 정말로 맞았다. 희주는 손가락을 세워 다시 한번 단위를 확인했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 만……” 목소리는 점차 흐려졌다.
예상했던 가격을 훌쩍 뛰어넘는 숫자를 보고 놀란 희주는 그게 한 벌 가격이 아니라 재킷 하나만의 가격이라는 것을 알고는 아연하게 헛숨을 들이마셨다. 위아래 합쳐서 제 한 달 월급을 훌쩍 넘었다.
솔직히 제가 고른 슈트가 마음에 든 것은 사실이었지만,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비쌀 줄 알았더라면 입어 보는 것도 마다하고 조금 더 저렴한 브랜드의 매장을 찾아 나갔을 테였다.
순식간에 얼굴이 하얘진 희주는 옷을 다 갈아입고도 쉽사리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강현우가 골라 주는 옷을 입고 그의 앞에서 칭찬을 들으며 쇼핑한 것이 즐겁지 않았다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제 지갑 사정에 있었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 마음이 바뀌었다고 말하자. 혹시 몰라 집에서 챙겨 온 옷도 있고, 아예 못 입을 만한 것도 아니니까 그걸 입고 싶다고 하자. 아니면 다른 매장을 둘러보고 싶다고 할까? 이렇게 결론을 내린 희주가 실색하여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난 뒤였다.
직원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다가와 제 손에서 슈트를 받아 갔고, 소파에 앉아 있던 강현우는 저를 보자마자 싱긋 웃으며 앉아서 뭐 좀 마시라고 손짓했다. 그때까지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던 커피를 홀짝 마신 희주는 잠시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쇼핑백을 들고 돌아온 직원의 극진한 배웅을 받으며 매장을 빠져나온 것이었다.
강현우가 직접 결제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매장에서 결제도 되지 않은 물건을 포장까지 마쳐서 손에 들려 보낼 리가 없었다. 정황상 제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사이 강현우가 대신 결제해 준 것이 분명했다.
혹시 시간이 없어서 그랬나? 옷 갈아입고 나와서 결제하고 포장까지 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 여긴 보통 몇 시에 문을 닫지? 강현우가 본인 입으로 시간이 별로 없다고 했으니 아무래도 제 추측이 맞는 모양이었다.
“저, 현우 씨.”
“네. 왜요?”
“혹시… 그, 아까 직원분께서 쇼핑백 안에 영수증도 같이 챙겨 주셨나요?”
건물을 빠져나오는 동안 생각을 마친 희주가 강현우에게 물었다. 뜬금없는 물음에 강현우는 의아해졌지만, 일단 희주가 묻는 대로 쇼핑백 안쪽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네. 여기 안에 있네요.”
“아……. 네.”
희주는 영수증이 있다는 말에 몸을 바로 하고,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수증을 챙겨 줘서 다행이었다. 대놓고 얼마가 나왔느냐고 묻기는 싫었다. 금액은 혼자 있을 때 확인해도 늦지 않으니, 나중에 계좌 번호 물어본 다음에 보내 줘야겠다며 그리 생각을 마친 희주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앞을 바라보았다.
“희주 씨.”
“네?”
“……아닙니다. 이만 가 볼까요?”
빨개졌다가 하얘졌다가, 쉽게 제 눈을 쳐다보지 못하면서 바짝 마른 입술을 할짝거리고, 초조하게 윗니로 잘근잘근 씹어 대는가 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희주의 표정은 변화무쌍했다. 곁눈으로 보고 있던 강현우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반응에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분명 마음에 드는 눈치였는데, 제 착각일까. 어울린다고 생각해 입혔던 옷들이 희주의 취향에 부합하지 않았던 걸까. 혹시 마음에 드는 옷이 없었는데 편히 골라 보라는 제 말이 그에게 강요로 들렸던 것일까.
우려가 스멀스멀 올라옴과 동시에, 어쩌면 저만 즐거웠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안 어울리는 것을 찾기가 더 어렵게 느껴질 만큼 뭘 입혀 놔도 예쁘고 멋진 희주를 보는 것이 즐거웠는데 말이다.
뜬금없이 영수증은 왜 물어본 건지 모르겠다. 나중에 환불이라도 받으려고 그러나. 하지만 이미 태그 제거까지 하고 나와서 환불은 못 받을 터였다. 쓸데없이 돈을 썼다는 생각보다는 희주가 정말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사 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조금 침울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가 나서지 말고, 전담 쇼퍼를 데려다가 도움이나 받을걸.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발레파킹 직원이 다가오는 모습에 강현우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차량 번호를 확인한 직원은 금방 자리를 비웠다. 그가 주차된 차량을 가지고 나오는 동안, 희주는 강현우와 맞잡고 있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주위를 구경했다.
쇼핑을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로 거리는 북적거렸다. 약속이라도 한 듯 양손 가득 들려 있는 쇼핑백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희주는 가까운 거리에서 들리는 구두 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차는 얼마나 기다려야 된대요? 나 발 아픈데.”
또각이는 구두를 신은 젊은 여성, 그리고 뒤를 따르는 남성이 건물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 저들도 쇼핑을 마치고 나와, 차가 나오길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별생각 없이 도로 고개를 돌리려던 희주는 저를 강하게 당기는 힘에 “잉?” 하고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끌려갔다. 놀란 눈을 하고 쳐다보자, 강현우는 그 자리 그대로에 얼어붙은 듯 서서 금방 자신의 눈길이 닿았던 곳을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현우 씨?”
의아해진 희주가 강현우를 불렀다. 이상하게도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시선은 희주를 향해 있지 않았다. 희주는 이번에는 강현우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여자는 강현우 못지않게 형형색색의 쇼핑백을 양손 가득 든 와중에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그 옆에 서 있는 남자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보다 배로 많아 보이는 것들을 든 채 이쪽 두 사람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임은 틀림없었다.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는데, 제 쪽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린다는 점이었다.
“저…….”
눈에 띄게 당황한 듯한 남자가 상체를 앞으로 숙여 여자에게 슬쩍 눈치를 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여자는 계속되는 부름에 짜증스레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 왜 그러는데요?”
남자 쪽을 휙 돌아보던 여자는 무어라 중얼거린 남자의 말에 그대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잠깐 희주에게 닿은 시선은 다소 무감하기 짝이 없었으나, 이내 강현우에게로 시선이 옮아 가자 크게 놀란 듯 여자가 표정을 달리 했다.
네 사람의 침묵이 지속되었다. 영문 모를 상황에 희주는 커진 눈을 굴리며 주춤주춤 강현우의 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마주한 두 사람을 바라보는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때, 차량을 빼 온 직원이 다가와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여자 쪽이었다. 꽁꽁 얼어붙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여자는 정적이 깨지자마자 냉큼 걸음을 뗐다. 놀란 희주가 어깨를 움츠릴 만큼 빠르고 거침없는 걸음걸이는 정확히 강현우 앞에서 멈추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 이제는 거의 강현우 뒤에 몸을 숨길 지경으로 경계심이 천장까지 치솟았다. 희주는 이상한 사람들을 보는 듯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강현우?”
“아.”
“오빠가 여기는 무슨 일이야?”
여자가 높은 톤의 목소리로 강현우의 이름을 부른 것은, 낭패라는 듯 강현우가 눈썹을 일그러뜨린 것과 거의 동시였다.
* * *
“강지우예요.”
뒷좌석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의 빈 공간을 갈랐다. 쫙 펼쳐진 손바닥을 가운데에 두고, 두 남자의 시선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엇갈렸다. 이제 막 출발하려던 차에 예정에도 없는 손님을 태우게 된 강현우는 쌀쌀맞은 투로 그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내려.”
“아깐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 했네요. 죄송해요. 여기서 오빠를 만날 줄은 몰랐거든요.”
그러거나 말거나 그 시선을 깡그리 무시한 강지우는 환히 웃음 지으며 희주를 바라보기 바빴다. 강현우는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룸 미러에 비치는 제 동생을 노려보았다. 짜증 섞인 한숨이 파스스 흩어졌다. 밖에서 보면 아는 척도 하지 말라며 엄포를 놓을 때는 언제고, 온갖 친한 척을 해 대며 차에까지 홀랑 난입한 꼴을 보니 영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아, 동생 분이시구나…….”
어쨌거나 야외에서의 데이트도 끝났겠다, 이대로 집으로 가서 단둘이 데이트를 이어 가려고 했던 강현우의 생각은 전혀 모른 채, 희주의 관심은 그저 강지우에게 쏠려 있었다. 일행으로 보였던 남자는 어떻게 했는지, 혼자 밝게 웃는 얼굴로 뛰어 들어온 강지우를 보는 희주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강현우와 서로 아는 사이인 듯했던 여자는 다름 아닌 강현우의 동생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의 강현우는 왜인지 불쾌한 티를 숨기지 않았고 그에 못지않게 인상을 찌푸린 여자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쳐 댄 바람에 내려가는 동안 희주는 두 사람의 관계를 좋지 않은 방향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친남매 사이였다니. 확실히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생김새며 분위기며 은근하게 닮은 면이 많았다. 가운데 한 글자만 제외하고 이름이 비슷한 것도 그랬다.
한때 여나연이 챙겨보던 삼류 막장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혹시 그녀가 강현우의 옛 연인인 걸까 하는 상상을 했던 희주는 부끄러운 착각에 얼굴을 붉혔다.
“네. 오빠가 서른둘, 제가 스물일곱. 다섯 살 차이예요. 음, 성함이?”
“아, 권희주입니다. 저는 서른이고요.”
강현우는 흘끗 눈동자를 굴렸다. 희주는 몸을 반쯤 틀어 앉아, 악수를 청하는 강지우의 손을 살짝 붙잡고는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고작 손가락만 잡는 수준이었지만 그게 참 거슬렸다.
“맞아. 그렇다고 들은 것 같아. 오빠한테 말 많이 들었거든요. 선생님이시라면서요?”
국어 가르친다고 들은 것 같은데, 맞아요? 원래 성격이 이런 건지 강지우는 붙임성 좋게 말을 걸어왔다. 저에 대한 말을 많이 들었다는 그녀의 말에, 희주는 강현우를 힐끗 쳐다보았다.
강현우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멋쩍은 숨을 내쉬며 시선을 피했다. 나쁜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마음에 든다는 말만 흘린 게 다였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당사자 앞에서 떠들어 대는 건 문제였다. 괜스레 민망해진 강현우는 자못 엄한 목소리로 강지우를 타일렀다.
“강지우.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이게 왜 쓸데없는 말이야? 오빠가 했던 말 그대로 읊는 중인데. 부끄럽냐?”
“하아…….”
강지우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샐샐 웃으며 약 올리자,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쉰 강현우가 핸들을 쥔 손에 빠짝 힘을 주었다. 억지로 끌어내기 전까지는 내릴 것 같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출발을 하긴 했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차를 세워 짐짝처럼 내려놓고 싶었다.
“오빠가 그쪽이 마음에 든다고 그랬거든요.”
“야.”
“귀엽대요.”
“내려, 너. 저 앞에서 차 세워 줄게.”
얼떨결에 두 남매의 대화에 끼게 된 희주는 작게 웃음을 삼켰다. 강현우는 동생 앞이라 그런지 표정이며 말투가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제법 짜증도 부릴 줄 알고, 퉁명스러운 말을 툭툭 뱉을 줄도 알았다. 평소 보지 못한 색다른 모습에, 희주는 어쩐지 들뜬 기분으로 대꾸했다.
“저도 현우 씨한테 동생 있다는 말은 들었어요.”
“와, 쟤가 그래요? 어디 가서 저라는 존재를 인정해 준 적이 없는 놈인데. 뭐라고 했는데요?”
그 물음에 희주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음……. 별말은 안 했는데……. 그냥 몇 살 차이가 나고, 좀 닮았다는 것 정도?”
“닮았다고요?”
쟤가 그래요?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 안 된다며 강지우가 미간 사이를 좁혔다.
벨트도 매지 않은 채 몸을 앞으로 쭉 뺀 강지우는 운전 중인 강현우의 곁으로 바짝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털끝 하나 스치기도 싫은지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서도 꿋꿋하게 고개를 들고 희주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봐요. 우리 하나도 안 닮았는데? 생긴 거만 보면 아빠 혼자 강현우 낳고, 엄마 혼자 저 낳았거든요?”
“아…….”
난감한 듯 말끝을 흐린 희주가 두 남매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안 닮았죠?” 확신에 차 묻는 강지우의 말에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솔직히 아무리 봐도 닮은 외모였다.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강현우가 조금 더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고, 강지우는 차가운 인상에 화려한 느낌이 나는 미인이라는 점이었다.
현우 씨는 아버님을 많이 닮은 거였구나.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두 남매의 얼굴에 투영해 보던 희주는 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제 부모의 얼굴은 아무리 애써 보아도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터라, 저는 누구를 닮았다는 말은 꺼낼 수가 없었다. 희주의 얼굴에 잠시 근심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어릴 땐 닮았다는 소리 진짜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 성인 된 후부터는 몇 번 들었어요. 크면서 얼굴이 바뀌었나? 근데 난 오빠랑 닮았다는 말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남매니까 닮을 수는 있는데……. 어우, 그냥 싫어요.”
강지우는 몸서리를 치면서까지 싫다는 것을 표현했다. 도대체 주변에 형제가 있는 사람들을 보면 왜들 그리 서로 닮았다는 말들을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형제가 없어서 저만 그렇게 생각하나.
만약 제 형제가 제 앞에서 강지우와 같은 말을 한다면, 저로서는 섭섭한 마음이 앞설 것 같았다. 그런데도 강현우는 기분이 상한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하게 운전에 몰두한 모습이었다.
“아주 그냥 둘 중 하나는 마스크로 얼굴 가리고 다녀야 된다니까……. 아, 그럼 지금 우리 오빠랑 만나는 중이신 거네요?”
강지우가 만든 난감하기 짝이 없던 상황은 그녀가 다른 질문을 던짐으로써 유야무야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그녀의 화법은 성격만큼이나 통통 튀었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희주가 다른 생각에 빠질 겨를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는 하고 싶은 말들을 온통 쏟아 냈다.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한 답을 떠올리자니 빠릿빠릿하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 반응에 혹시 제가 잘못 짚은 줄 알았는지, 당황하던 강지우가 조심스레 목소리 볼륨을 낮췄다.
“강현우랑 사귀는 거 아니에요?”
“아……. 마, 맞아요.”
“아, 놀라라. 저 실수한 줄 알았어요.”
강지우는 크게 놀란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직까지는 강현우와 사귀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말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했기 때문에, 희주는 부끄러운 듯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사귀는 거 맞아요.”
“근데… 그쪽이 왜 우리 오빠를 만나요?”
강지우는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심각해졌다. 왜지?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 왜 우리 오빠를……? 하도 주변에서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떠들어 대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막상 강현우가 만나고 있다는 상대를 대면하고 나니 의문이 점점 더 부풀어만 갔다.
상견례 프리패스상 외모에 직업, 잠깐 나눈 대화만으로 짐작할 수 있는 성격만 봐도 강현우보다 더 좋은 알파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강현우를?
이런 의미를 내포한 질문이었으나,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 희주는 희게 질린 얼굴이 되어 굳어 버렸다. 동생이라기에 마음을 조금 편하게 가졌던 건데 그래서는 안 됐었던 거였다.
점수를 따기는커녕 따기도 전에 아예 탈락을 해 버린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했다. 부모 없이 큰 티가 난다는 비난을 듣기가 싫어 끝없이 노력해 온 세월이 몇 년이건만, 가짜는 진짜를 속일 수 없는 듯했다.
그렇게 삽질에 빠져 있는 희주에게, 여전히 심각한 얼굴을 한 강지우가 진지한 물음을 던졌다.
“그러지 말고 나는 어때요? 나도 강현우처럼 알파거든요. 우성. 페로몬도 기가 막혀요. 또 요즘 연하가 인기잖아요. 연하에다가, 뭐 생긴 것도 꿀리지 않고, 아직 하고 있는 일은 없긴 한데 조만간 저도 회사 하나…….”
거짓말은 아니었다. 자신은 나름 외국물 먹은 유학파였고, 운 좋게 그룹 회장 어머니 밑에서 태어나 계열사 하나 물려받거나 개인 사업을 시작하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제 의견만 제대로 피력한다면 오빠처럼 후계자 수업을 받는 건 일도 아니었다.
크면서 외모만 비슷해지는 것도 모자라서 오메가 취향까지 같아질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강현우보다도 먼저 결혼 정보 회사에 찾아갔을 테였다.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추파를 던지던 찰나 강현우가 불시에 핸들을 꺾었다. 영화였다면 귀가 찢어질 듯한 ‘끼익’ 하는 효과음이 들어갈 만큼 차량은 급하게 멈춰 섰다.
안전벨트를 매고 있던 희주는 몸이 살짝 기울어진 것뿐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강지우는 거의 굴러가다시피 창문에 가 이마를 박았다. 악, 소리를 내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은 강지우는 짜증스레 강현우를 쏘아보았다.
그때까지 미미하게 언짢은 티만 내던 강현우의 얼굴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희주가 있어 페로몬을 짙게 풀지는 않은 듯했지만, 같은 알파로서 위험을 감지한 강지우는 쉼 없이 떠들던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알파의 소유욕을 제대로 건든 듯했다.
아, 낭패네. 강지우는 아무런 변명도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내려.”
갓길로 빠진 차량 뒤로, 줄곧 따라오고 있던 차가 꼬리를 이으며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사이드 미러를 일별한 강현우가 차의 잠금장치를 풀며 뒤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명령을 내렸다.
그래도 그렇지 여기서 내리라고? 강지우의 낯빛이 황당함으로 붉어졌다. 장난스러웠던 강지우의 말에 빠르게 오해를 푼 희주도 놀라 황급히 강현우를 돌아보았다.
“지금 나 보고 집까지 걸어가라고?”
“뒤에 네 차 있으니까 쇼하지 말고 내려.”
휙 돌아본 강지우는 낭패라는 듯 코끝을 찡긋거렸다. 하여간 티 나지 않게 조용히 따라오라니까 얼마나 됐다고 벌써 들키는지 모를 일이다. 고지식한 면이 있는 기사는 모험적인 성격의 강지우와는 안 맞는 부분이 상당한 사람이었다.
“농담은 좀 농담으로 알아들어라…….”
“끌어 내려 줘?”
“조심히 들어가세요.”
강현우의 손이 당장이라도 안전벨트를 풀어낼 것처럼 움직이자 강지우는 빠르게 작별 인사를 뱉고는 후다닥 차에서 뛰어내렸다. 절대 시늉에서 그치지 않고, 말한 바를 그대로 이행할 게 뻔했기에 사릴 땐 사려야 함이 분명했다.
“뭔… 저런 개꼴값을 떨다니…….”
문이 닫히자마자 가 버리는 차 뒤꽁무니를 응시하며, 강지우는 연애하는 호적 메이트를 경멸했다. 연애하지 않을 때도 경멸했지만 말이다.
“어디로 모실까요?”
“집으로 가야죠, 뭐……. 딱히 갈 데도 없는데.”
시트에 푹 기대어 앉은 강지우는 흥미가 다 떨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물론 가다가 버려질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당하고 나니 기분이 퍽 불쾌했다. 잘만 하면 강현우 사는 집이 어딘지 정도는 대충 알아낼 수 있었는데. 아, 아쉽다.
입술을 삐죽거린 강지우는 트렁크에 미처 싣지 못해 뒷좌석까지 빼곡히 쌓인 쇼핑백 중 하나를 끌어다가 주섬주섬 포장을 풀었다. 오래간만에 한 바퀴 싹 돌았더니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VVIP룸에서 편히 쇼핑하는 것도 좋지만, 역시 쇼핑은 발 아프게 돌아다니면서 하는 게 최고였다.
근데 진짜 왜 만나는 걸까? 새로 산 선글라스를 콧잔등에 얹어 보던 강지우는 하얀 얼굴의 오메가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그런 척해 놓고 사랑에 눈이 멀어 버린 제 오빠를 비웃기도 했다.
뭐… 어쨌거나 알파가 셋이나 되는 팍팍한 집안에 저런 상냥한 오메가가 가족으로 들어오는 건 완전 찬성, 대찬성이었다.
<러브 매칭>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