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15)

6.

“결혼식 일주일 남았는데 이러고 있어도 돼?”

“안 될 게 뭐 있어.”

토요일 오후. 평소에도 사람이 많기로 유명한 프랜차이즈 카페는 빈자리 하나 없이 인산인해였다. 점심을 먹고 나오자마자 냅다 희주를 끌고 간 여나연이 카페를 가득 메운 인파에 인상까지 와작 구길 정도였다.

어차피 지금 시간에는 다른 카페들도 자리가 없기는 마찬가지일 터였다. 괜히 더운데 밖에서 고생하지 말자고 결론을 내린 두 사람은 눈치 싸움 끝에 간신히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야, 권희주.”

빨대를 입에 문 채 마주 앉은 친구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여나연이 불쑥 말을 걸어왔다. 희주는 조각 케이크에 둘린 띠지를 떼어 내다 말고, 시선만 들어 올려 여나연을 바라보았다.

“……왜?”

이상하네. 오래 봐 온 친구의 얼굴에서 무언가 어색함을 느낀 여나연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불러 놓고 왜 말을 안 해.”

“너…….”

“나, 뭐.”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는 그녀에게 퉁명스레 답을 뱉은 희주는 끝까지 돌아오는 말이 없자 “뭐야……” 하고 다시 케이크에 집중했다. 이내 말끔하게 떨어진 띠지에는 하얀 크림이 가득이었다. 희주는 포크로 싹싹 말끔하게 긁어 먹은 다음, 접시를 여나연 앞으로 밀어 주었다. 케이크를 먹기보다는 컵을 끌어다가 빨대를 입에 물었다.

“너 어째 입술이 좀… 부은 것 같다?”

“……컥!”

여나연이 뭘 하든 대수롭지 않게 커피나 마시려고 한 그 순간, 특이점을 발견한 듯 의아함이 묻은 한 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동시에 희주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콜록콜록! 요란한 기침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눈물까지 글썽일 정도로 요란했던 터라, 이쪽을 힐끗 쳐다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어휴……. 야. 닦아.”

하필 딱 마시고 있을 때 말을 걸 건 뭐람. 희주는 콜록콜록 잔기침을 쏟아 내며 가슴팍을 퍽퍽 두드렸다. 그 꼴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혀를 찬 여나연이 트레이 위에 놓인 티슈를 던지듯 내밀었다. 퉁명스러운 손길과는 달리 그녀는 “괜찮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물티슈를 가지고 오겠다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티… 티 나나?’

희주는 젖은 입가를 꾹꾹 닦아 내며 여나연의 등을 쳐다보았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눈을 깜빡거리자 생리적으로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젖지 않은 부분으로 벅벅 닦아 내는 사이, 여나연이 금세 자리로 돌아와 물티슈를 내밀었다.

“너 옷에 커피 묻었어. 흰옷이라 완전 티 나.”

“……무, 뭐?”

티 난다고? 깜짝 놀란 희주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반응에 덩달아 흠칫 놀란 여나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뭐 묻으면 안 되는 옷이야?”

여나연이 재빨리 시선을 내렸다. 혼자 사는 친구 녀석이 누군가한테 빌려 입었을 리는 없고, 세탁비가 많이 나오는 명품이라도 되나 싶었지만 권희주가 입은 옷은 흔하디흔한 브랜드의 티셔츠에 불과했다.

기름이나 빨간 양념도 아니고 기껏해야 커피, 그것도 아메리카노가 몇 방울 튄 것에 이런 반응이 나오다니, 여나연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거 금방 지워질걸?”

신경 쓰이면 화장실 가서 물 묻히고 와. 덧붙여지는 말에 희주가 “아” 하고 탄식했다. 뒤늦게 여나연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시선은 제 입술이 아닌 가슴팍, 정확히는 자신이 기침하면서 흘린 커피가 묻어 있을 티셔츠 앞자락에 향해 있었다.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여 보니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입고 나온 티셔츠에 조그마한 갈색 얼룩이 져 있었다. 호들갑을 떨 것이 전혀 아니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여태 입술이 부은 것 같다는 말에만 줄곧 신경을 쓰고 있었더니, 다른 말을 하는 줄도 모르고 혼자 난리 법석을 떤 셈이었다.

희주는 멋쩍음에 입을 꾹 다물고 건네받은 물티슈로 티셔츠를 벅벅 문질렀다. 당연히 몇 번 문지르고 짓이기자 커피가 아닌 물이 튀어 젖은 것 같은 모양을 띠었다.

“됐네. 다 지워졌네.”

그걸 또 보고 있었는지 그만하고 커피나 마시라며 손짓한다. 희주는 쓰레기를 한데 모아 뭉쳐 두고, 커피를 마저 홀짝이면서 조심스레 여나연의 눈치를 살폈다.

“하, 진짜 내가 빵 먹고 싶은 걸 한 달을 참았다니까…….”

밥보다는 빵을 선호하는 빵순이가 다이어트 때문에 한 달 동안이나 빵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며, 케이크를 바라보는 눈빛이 퍽 설레 보였다. 그러고는 입 안에 퍼지는 단맛을 천천히 음미한다. 새삼 감격이라도 한 듯 진실의 미간까지 보여 주면서 케이크 먹는 데에만 집중하는 여나연은 제 입술이 부었든 가라앉았든 더는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해결되지 않은 의문에 몸부림치는 건 저뿐인 듯했다. 희주는 입에 문 빨대를 잘근잘근 씹다가 나지막이 물었다.

“나 입술 많이 부었어?”

“으응?”

“부은 것 같다며.”

“아. 그냥 조금? 어제 야식 먹고 잤어?”

“아……. 매운 거 먹고 자서 그런가……?”

“어쩐지 입술이 좀 탱탱하더라.”

여나연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안도한 희주가 눈썹을 까딱거렸다.

사실 야식 따위는 먹지 않았다. 짐을 풀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아서 오늘 아침 여나연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으니까. 어지간히 피곤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고대하던 데이트가 불발된 까닭도 컸다. 강현우가 바쁜 탓이었다. 오늘은 회사 행사, 일요일인 내일은 가족 행사가 있다나 뭐라나.

“좀 맵게 먹기는 했어…….”

“매운 거 작작 먹어. 속 버려.”

눈치 빠른 여나연이 무언가를 알아내고 추궁이라도 하면 어쩌나, 엄습하는 불안감에 벌렁거리던 심장이 제 속도를 되찾았다. 그래, 이제 막 수학여행 다녀온 사람한테 ‘너 혹시 키스했냐?’ 따위의 말을 할 리가 없었다.

희주는 어깨에 바짝 들어간 긴장을 내려 두고 쪼로롭, 커피를 쭉 빨아 마셨다. 그러고는 아직 저는 제대로 손도 못 댄 케이크를 먹기 위해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하마터면 쥐고 있던 포크를 내동댕이칠 뻔했다.

“난 또 무슨, 너 키스한 줄 알았잖아.”

“……어?”

포크를 제대로 쥐지도 못한 채 일순 멈칫했다. 관절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라도 날 것 같은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려 여나연을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키스해서 입술 부은 사람’으로 보이는 어색한 몸짓이었지만 다행히 여나연은 여전히 케이크를 공략하느라 미처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가끔 나도 부을 때도 있거든.”

“…….”

“입술에 힘 빡 주고 하면 그러더라.”

단조로운 말투로 물꼬를 튼 여나연은 그동안 자신의 경험담을 술술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멍하니 듣고만 있던 희주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변 눈치를 휘휘 살폈다.

테이블 간격이 그렇게 넓은 것도 아니고, 워낙 카공족들이 많이 찾는 카페라 조금이라도 목청을 높이면 스피커를 자처하게 되는 꼴이었다. 다른 이야기도 아니고 키스하다가 입술 붓게 된 경험담이나 풀고 있는 건 조금 민망한 일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지만 애인이 생겼다는 말을 꺼내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나연의 이런 대범한 성격 탓이었다. 아까 식당에서 있었던 일만 해도 그렇다. 여나연은 제가 선물이랍시고 사와 버린 벌떡주를 보자마자 식당 이모님께 자랑하며 깔깔거렸다. 부끄러움은 온전히 제 몫이었다.

웬만하면 제 연애 소식은 최대한 느지막이 전해야겠다는 다짐을 거듭하며, 희주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얘긴 그만하면 안 돼?”

“왜? 부끄러워?”

“사람 많잖아.”

“뭐 어때. 아무도 신경 안 쓸걸?”

여나연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더 말을 이어 갈 것처럼 굴었지만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케이크 접시를 희주 앞으로 쓰윽 밀어 주었다.

“권희주. 네가 이거 다 먹어라.”

“왜? 너 좋아하는 거잖아. 너 먹으라고 산 건데.”

“다 먹으면 안 될 것 같아. 한 달이나 참았는데 다 먹으면 그건 좀 양심이 아플 것 같아.”

여나연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그림의 떡도 아니고 눈앞에 실재를 두고도 먹지 못하는 꼴이라니. 미련을 풀풀 풍기는 눈으로 케이크를 바라보던 여나연이 망연자실하게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나 진짜 신혼여행 가면 삼시 세끼 빵만 먹을 거야.”

“한희 누나한테 사 달라 그래.”

“유명한 빵집 다 찾아 놨어. 정복하고 온다, 내가.”

고통스럽다면서 몸부림치는 여나연을 보며 희주는 설핏 웃었다. 아무래도 신혼집 집들이에 갈 때 나연을 위한 홀 케이크를 하나 사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얼른 먹어서 제 눈앞에서 치워 달라는 애원에 희주는 마지못해 포크를 들었다. 폭신한 빵과 부드러운 크림을 연신 깨작거리다가 케이크 위에 비스듬히 꽂혀 있던 장식용 초콜릿을 떼어다가 입 안에 밀어 넣었다.

크림보다도 더 진하고 달콤한 맛이 온 입 안에 확 퍼졌다. 좀 더 길게 맛을 보고 싶어도 조그마한 조각에 불과한지라 채 씹기도 전에 순식간에 녹아내려 사라졌다. 희주는 짧게 입맛을 다셨다.

어쩐지 그날 입맞춤이 떠오르는 맛이었다.

* * *

그날 밤, 제주도에서 제 뺨을 식혀 주던 밤바람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고백 이후 숨김없이 애정을 드러내며 입술을 붙여 오던 강현우는 그날 누군가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은 뒤에야 공항으로 되돌아갔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그는 또 한 번 전화가 걸려 올 때까지 떠나지 못하다가 끝내 핸들을 꺾었더란다.

희주는 멀어져 가는 차량 뒤꽁무니를 하염없이 응시하다가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물론 다리가 후들거려 몇 걸음 가지는 못하고 근처 벤치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바람이 차가운 건지, 제 얼굴이 뜨거운 건지 가늠이 안 될 만큼 정신이 없었다. 정말이지, 그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희주는 더듬더듬 입술을 매만졌다. 축축하고 말캉했던 입술의 감각이 손가락 끝으로도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키스를, 아니, 애인이…….

희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덥지도 않은데 움켜쥔 손바닥 안쪽이 땀으로 축축했다.

……애인이 생겼고, 그와 키스했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게다가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싶다고도 했다.

불현듯 멍했던 머릿속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제 말마따나 강현우는 정말 배우자로서 좋은 사람이었다. 보다 더 자세한 건 차차 알아가야 하겠지만. 그 역시 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이 없으니 피차 상황은 같았다. 서류에 적히지 않은 것들. 무엇을 좋아하고, 또 무엇을 싫어하는지. 앞으로 서로 몰랐던 것을 조금씩 알아갈 거라 생각하니 손끝이 몹시 간질거렸다.

그런데, 모든 것을 자세히 알게 되어도 같은 마음일까? 몸과 마음이 붕 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이 기분과는 별개로 마음속이 퍽 복잡해졌다. 결혼은 낭만이 아닌 현실이다. 불우했던 가정 환경과, 그 불우함의 끝에서마저도 버려진 자신까지 강현우가 이해해 줄 수 있을까?

희주는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잠시간 벤치에 앉아 여러 생각을 거듭했다. 꼭 끝없는 롤러코스터라도 탄 것처럼 기분이 마구 요동쳤다. 학력과 경제력, 그리고 직업까지 나름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강현우 앞에서는 더 완벽해야 할 것 같았다. 저를 보고 웃어 주던 얼굴이 실망으로 무너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마음속이 이리도 복잡한데, 그 와중에 액정 속에서 반짝이는 이름을 보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원래도 다정했던 목소리가 그날따라 녹을 듯이 부드러웠던 것은 제 착각이었을까.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방으로 올라온 희주는 강현우가 하라는 대로 소취제를 찾아 온몸에 뿌렸다. 분명 바람으로 충분히 날렸을 텐데도 강현우의 페로몬이 느껴져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꼭 베타들이 하는 것처럼 제 손목을 코로 가져다가 킁킁, 맡아 보기도 했다. 열성이라 가볍게 묻은 정도의 페로몬은 스스로 느껴 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느껴지는 걸로 보아 그런 수준이 아닌 듯했다.

“희주 씨한테서 지금… 내 냄새가 너무 나서.”

듣기만 해도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낮고 습했던 음성이 기억을 비집고 나왔다.

마킹… 이었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강현우의 것이 명백한 페로몬이 저를 두르고 있는 것이 느껴져 왜인지 소취제를 뿌려 없애야 하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만약 그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소취제는 안 뿌려도 되는 건가? 학생들 때문에라도 뿌려야겠지? 그야, 키스보다 더한 걸 하게 될 테니까…….

어렴풋한 상상에 뾰족한 입꼬리가 둥그런 볼을 슬며시 밀어 올렸다. 그때 느꼈던 찰나의 감정과 감각을 떠올리며 수줍게 들어 올린 손으로 입술을 매만질 때였다.

“……?”

누군가가 팔뚝을 툭 건드려 왔다. 성가신 마찰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두어 번 더 이어졌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뭐야. 언짢은 표정으로 옆을 휙 돌아보자, 조금 난감해 보이는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권 선생님…….”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난처하게 저를 부르는 그녀는, 같은 2학년부의 동료 교사였다.

그녀는 보일 듯 말 듯 턱짓을 해 보였다. 저를 부르는 호칭에 “네?” 하고 무심결에 대답하면서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희주는 화들짝 놀라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떠야 했다.

타원형의 테이블에 빙 둘러앉은 교사들이 모두 자신을 향해 있었다. 제각각 눈빛에 담긴 감정이 달랐다. 몇몇은 의아함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몇몇은 안타까움이 묻어난 눈빛으로, 그리고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저를 보는 이도 있었다.

지금 이 기분은 흡사, 늦잠을 잔 평일 아침에 느끼는 감정과 비슷했다. 아……. 뭐 됐네.

“권 선생. 무슨 생각을 하길래 불러도 대답이 없어?”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학년 부장이 인상을 팍 구긴 채 물었다. 한심하다는 눈빛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무척이나 기분이 상한 듯 들고 있던 볼펜으로 테이블을 탁탁 두드리며 대답을 재촉했다. 하필 재수 없게도 학년 부장의 부름을 씹은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이럴 땐 무어라 변명을 하기보다는 그냥 낮은 자세로 죄송하다 염불을 외는 게 상책이었다. 만약 지금 자신이 어딘가 아프다고 해도, 그건 변명에 불과했다. 학년 부장은 학생들에게도 늘 ‘죽어도 학교에서 죽어야 한다’라는 시대착오적이고 반인권적인 연설을 늘어놓는 사람이므로, 그 말이 교사에게도 통용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쯧. 아무리 월요일이라 피곤하고 정신없다고 해도 회의에는 집중합시다. 알겠어요?”

“예…….”

다행히 학년 부장은 혀만 조금 끌끌 찰 뿐,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월요일이라 넋을 놓은 것이겠거니 대충 넘겨짚은 듯했다. 희주는 회의의 흐름을 끊어서 죄송하단 뜻으로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교무 회의는 속개되었다.

“자, 다음은……. 그거, 그거 뭐야. 그… 그거 있잖아요. 나라에서 약 나오는 거.”

“청소년 형질자 의료 지원이요.”

“그래요, 그거. 그거 권 선생 담당 아니었던가?”

중간고사를 치른 지 얼마나 됐다고 또 한바탕 수행 평가 기간이었다. 수학여행의 여독을 풀 틈도 없이 수행 평가와 관련해 잠시 의견을 나누다가, 어느새 마지막 안건에 접어들었다.

또 한 번 제게 시선이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한바탕 눈칫밥을 먹은 이후로 바짝 정신을 다잡고 있던 희주는 “네”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청소년 형질자 의료 지원. 말 그대로 청소년 형질자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지원하는 국가 차원 형질자 복지의 일환이다. 형질자와 비형질자 구분 없이 진행되는 형질 검사와, 오로지 형질자에게만 지원되는 페로몬 억제제, 소취제 지급 등이 이루어지는데 교사들 중 형질자인 교사가 해당 업무를 담당하게끔 되어 있었다.

만약 이 복지 사업이 자신이 어릴 때에도 있었더라면. 혹은 열성이 아닌 우성이라 페로몬 조절에 어려움이 없고 사이클 주기도 일정했더라면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아쉬움은 절로 따랐지만 지금에라도 시행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주는 오늘 아침,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확인했던 공문을 떠올리며 차분히 말을 전달했다.

“공문 확인했습니다. 오늘 아이들 하교 전에 가정통신문 하나씩 나눠 줄 예정이고요. 각 반 담임 교사 서명 수합해서 제출하겠습니다.”

“흠. 그래요. 뭐, 이쪽 일은 권 선생이 알아서 잘하겠지.”

비꼬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모를 말투로 중얼거린 학년 부장은 한숨과도 같은 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교무 회의에서 다룰 안건은 다 끝났다는 뜻이었다. 평소에는 50분을 꽉 채우는 날이 부지기수더니, 오늘은 웬일인지 10분이나 일찍 끝났다는 사실에 다들 의아한 눈빛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아, 그리고 우리 김하나 선생님께서 출산휴가 때문에, 몇 달간 잠시 자리 비우는 거 알고들 계시죠?”

자, 박수. 무사히 순산하라는 뜻으로 격려의 박수 좀 쳐 줍시다. 학년 부장의 지시와 동시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언급된 김하나 선생이 부끄럽지만 감사하다는 얼굴로 한 명씩 눈을 맞춰 왔다.

그럼 빈자리는 누가 맡게 되려나. 김하나 선생을 향했던 시선이 학년 부장에게로 되돌아갔다.

“김하나 선생님을 대신해서 5반 담임이랑, 에……. 영어 과목 가르쳐 주실 선생님 한 분이 오실 예정입니다. 채용 공고는 지지난주에 올라간 걸로 알고 있고…….”

사립 고등학교인 백영 여고는 기간제 교사의 채용이 빈번한 편이었다. 담임 업무는 그렇다 치고, 영어 과목이라면 적응할 새도 없겠거니 싶었다.

“인수인계 절차 같은 건 음, 확정되면 그때 가서 이야기하는 걸로 합시다.”

김하나 선생이 담임을 맡아 온 반은 희주가 맡은 반의 바로 옆 반인 5반이었다. 비록 기간제 교사라 몇 개월 보는 게 다겠지만, 함께 일하게 된 만큼 그 기간 동안은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이면 내 또래였으면 좋겠네. 희주가 속으로 작은 소망을 중얼거리는 사이, 학년 부장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했다는 말을 끝으로 사라지는 뒤통수에 대고 희주를 포함한 모두가 같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수고하셨습니다.”

* * *

제주도 출장에서 돌아온 뒤로 상무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안 실장은 갓 내려 온 향긋한 원두커피를 홀짝거리며, 꽉 닫혀 있는 상무실을 곁눈질했다.

‘뭔가…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단 말이지.’

안 실장은 제주도 출장 마지막 날, 그것도 김포행 비행기를 타러 가기 직전 있었던 일들을 회상했다.

거의 아량을 베풀었다고 표현해도 모자랄 만큼, 이번 제주도 출장에서 상무님은 모든 자리에 참석하며 싫은 내색을 참았다. 불편한 기색을 조금씩 풍기기는 했지만 이마저도 드문 일이었다. 보통 때와 같았으면 말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린다거나, 면전에 대고 비수를 꽂아 버렸을 그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다니.

물론, 안 실장은 언제 펑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과도 같은 그를 조마조마하게 쳐다보았다. 거의 물에 내놓은 어린아이를 보는 양 좀처럼 눈을 떼지 않으니, 종국에는 상무님의 어이없다는 표정을 목도하기도 했다.

“안 실장.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요?”

그 한마디에 안 실장은 긴장을 풀고 말았다.

풀어서는 안 됐다. 역시, 끝까지 긴장감을 가지고 수행했었어야 했다.

급하게 제주도행 비행기를 예약했던 날, 대충 일정이 끝나는 시간을 계산해 서울로 되돌아오는 비행기까지 예약을 해 뒀다. 예약을 할 당시에는 당연히 몰랐다. 비행기를 타기까지 몇 시간의 공백이 생겨 버릴 줄은.

사실 별거 아닌 일이었지만 시간이 곧 돈인 대기업 상무를 모시는 안 실장으로서는 머리끝이 쭈뼛 서는 일이었다. 부랴부랴 다른 비행기를 알아보겠다며 태블릿을 꺼내 드는 그에게 상무님은 화를 내거나 책임을 묻지 않았다. “됐으니 그냥 쉽시다” 그 말이 전부였다.

안 실장의 머리는 쉼 없이 돌아갔다. 묵었던 호텔로 도로 가서 방을 잡아 드려야 하나. 식사라도? 아니면 커피? 그게 아니면 관광? 세상에. 남자 둘이서, 그것도 상사와 단둘이 제주도 관광을 하는 건 웃긴 그림이었다.

이 수많은 그림 가운데 상무님이 선택한 건 안 실장의 예상에 0.1%의 지분도 차지하지 않던 그림이었다.

‘도대체 어딜 다녀오신 걸까?’

상무님이 사라졌다. 그것도 차까지 갈취해서.

금방 오겠다면서 렌트 차량을 갈취―물론 진짜 갈취한 것은 아니다―하더니 사라지시는 바람에 안 실장은 정말 기절하는 줄만 알았다. 약속이라도 잘 지키시든가. 금방 온다는 말을 지키기는커녕 언제 오시는 거냐며 몇 번씩 전화까지 하게 해 놓고선 태연자약하고도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이제 가지” 말하는 모습이란. 정말 속에서 열불이 났다.

돈 많이 주는 회사만 아니었으면 진작 퇴사했을 거라고 안 실장은 이날 거듭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비행기를 타기는커녕 공항 노숙이라도 할 뻔했으니까 말이다. (말이 그렇다는 거다.)

아무튼 상사의 제주도 출장 도주 사건은 늦지 않게 비행기를 타는 걸로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그 후로 상무님의 기분은 맥스를 찍고 있었다. 평소처럼 언짢음 맥스가 아니라, ‘기분 좋음’ 그 자체였다. 게다가 컨디션마저 상당히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방금 전, 아침에 실수로 누락된 결재 서류를 들고 벌벌 떨며 상무실로 들어갔을 찰나를 떠올렸다. 뭐 이런 것을 빼놓고 그러냐며, 굳이 말이 아니어도 눈빛으로 욕을 해야 정상이신 분이 뭐라고 했던가.

“아아, 확인할 테니 여기 두고 가세요.”

혹시 제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속뜻―예를 들면 욕―이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 가는 게 없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상무님의 앙칼짐 지수를 0으로 끌어 내렸단 말인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다시금 커피를 홀짝인 안 실장은, 비서실 직원 중 유일한 형질자인 영혜 씨의 자리로 가 슬쩍 파티션에 기대어 섰다. 같은 형질자인 만큼 혹시 무언가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영혜 씨.”

“네?”

“혹시…….”

“아, 맞아. 실장님. 오늘 혹시 상무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엉?”

이게 무슨 소리야. 안 실장이 멍청히 눈을 끔뻑였다.

“오늘 상무님 페로몬 대박이에요. 모르셨어요? 커뮤니티에 글도 올라왔는데.”

“글? 무슨 글?”

글이 올라왔다고? 안 실장이 눈을 휘둥그레 뜨자 영혜 씨가 마우스를 움직여 보고 있던 모니터 화면에 새로운 창을 띄웠다. 백영 그룹 홈페이지 내에 있는 익명 게시판이었다.

‘오늘 도련님 무슨 일 있으셔?’라는 제목의 글은, 그저 대박이라는 감탄만 덜렁 올라와 있는 짧은 내용의 게시물이었다. 상무님을 지칭하는 ‘도련님’이라는 암호는 그렇다 치고, 도대체 뭐가 대박이라는 건지 통 이해가 되지 않아 안 실장이 미간을 와작 구겼다.

“이게 상무님 페로몬 때문에 올라온 거거든요. 오늘 아침만 해도 로비 전체가 상무님 페로몬으로 가득 찼었다니까요? 상무님 구내식당에서 식사하셨죠? 시간 보니까 그때 본 사람이 올렸나 봐요.”

글이 올라온 시간은 점심시간 무렵. 올라온 지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았는데도 세 자릿수의 댓글을 기록하는 중이었다. 안 실장은 영혜 씨의 부연 설명을 들으며 댓글들을 쭉 훑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수긍하는 이들은 형질자인 게 분명할 테고, 물음표가 가득한 댓글들은 저와 같이 영문도 모르는 베타들일 터였다.

“페로몬이 어땠길래 다들 이래요?”

“이걸 뭐라고 설명하지. 들떴다고 해야 하나……? 표정은 평소랑 똑같았는데, 엄청 기분 좋아 보이셨어요. 형질자들은 페로몬으로 기분이 어떤지도 알 수 있잖아요.”

“근데 그게 이렇게 글이 올라올 정돈가?”

“당연하죠. 지금 기분 엄청 좋으신 것 같은데요? 지금도 여기 밖까지 다 흘러나와 있어요.”

영혜 씨는 조금 상기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 안 실장은 떨떠름하게 주위를 살폈다. 대놓고 킁킁 냄새를 맡아 봤지만 뚜렷하게 맡아지는 향은 없었다. 디퓨저 냄새밖에 안 나는데……?

“요 며칠 동안은 상무님 페로몬이 좀 부드러웠다고 해야 하나? 가끔 미팅 마치시고 올 때면 따끔? 매캐? 그랬거든요.”

미팅……. 언제인지 대충 예상이 되었다. CX 장 이사님 말하는 것 같은데……. 이럴 때 보면 영혜 씨가 참 부러웠다. 페로몬으로 그 사람의 기분이 어떤지 파악할 수 있다니.

어찌 됐건, 상무님의 기분이 정말로 좋은 상태라는 것은 이로써 확실해졌다. 조금 심각해진 얼굴로 커피잔을 입가로 가져다 대려던 안 실장은 불현듯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라 후다닥 몸을 바로 세웠다. 넘친 커피가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처 수습할 생각도 못 하고 돌아본 곳에는 강현우가 서 있었다.

“아, 안 실장님.”

걸어 뒀던 슈트 재킷을 챙겨 들고나온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다가 앞에 서 있는 안 실장을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덩달아 함께 일어나 조그맣게 감탄하던 영혜 씨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강현우가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아까 그 서류 책상 위에 올려 뒀습니다.”

“네, 그런데… 어디 가십니까?”

어쩐지 아까 전보다 더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영혜 씨의 말을 듣고 난 뒤라 순전히 착각하는 걸까? 안 실장은 슬금슬금 강현우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아. 약속이 있어서요. 오늘은 일찍 들어가 볼까 하는데, 앞으로 한 시간 동안 급하게 일정 잡힐 일은 없겠죠?”

네, 뭐……. 없기야 합니다만……. 안 실장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원하던 답이라는 듯 강현우는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리며 다시 한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실장님도 딱히 일 없으면 6시에 바로 퇴근하세요.”

붙잡을 틈도 없이 훌쩍 가 버리는 상무님의 뒤통수에 대고 안 실장은 황당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지금 시간은 5시. 퇴근까지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저렇게 훌쩍 가 버리니 뭔가 책임감 없는데, 일은 다 끝내 놓은 데다 까마득한 상사라서 차마 욕할 수가 없었다.

“집에 무슨 일 있으신가? 실장님은 아는 거 없으세요?”

“나도 없어요……. 알면 좋겠네.”

귓속말이라도 하듯 얼굴 옆에 손날을 세워 속닥이는 영혜 씨에게, 안 실장은 힘없이 대답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허어…….”

요새 상무님이 연애 사업을 시작한 줄은 안다만, 별개로 도대체 제주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늘따라 학교를 나서는 희주의 발걸음이 유독 가벼웠다.

원래 집에 간다는 사실만으로 기쁜 퇴근길이지만, 오늘은 발끝을 붙잡고 늘어지는 피로감이 전혀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모 뮤지컬에 나오는 안무처럼 공중으로 번쩍 뛰어 구둣발로 캐스터네츠를 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연애를 시작하면 이토록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걸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회사를 향한 마음가짐마저도 달라진 느낌이었다.

아이들이 이해 못 했다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아도 괜찮았고, 미숙하기 짝이 없는 동 과목 선생이 똑같은 질문을 해 대도 짜증보다 미소가 앞섰다. 학년 부장에게 공개적으로 핀잔을 들어 놓고도 웃는 상으로 앉아 있으니 동료 교사들마다 뭐 좋은 일 있느냐며 물어 오기도 했다.

좋은 일이야, 당연히 있었다.

‘오늘도 7시까지 준비하면 되겠지?’

데이트 약속이 잡힌 것이다.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둘 다 평일보다 주말에 시간이 많은 직장인이기도 했고, 아무리 연애하는 사이기로서니 매일 차로 먼 거리를 오가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테니까.

그래서 보고 싶다는 마음을 꾹 숨긴 채 다음 주말까지 기다려야 하는 아쉬움은 꾸준한 연락으로 달랬다. 전화 통화도 꾸준히 하고, 틈틈이 메신저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 만족감은 얼굴을 보며 데이트를 하는 것에 견주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좋아 간지러운 대화를 연신 떠들어 놓고는, 끊긴 전화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을 정도였다.

제주도에서 저를 감쌌던 강현우의 온기와 페로몬이 마치 환각처럼 아른거렸다. 혼을 쏙 빼놓았던 입맞춤이 자꾸 머릿속에 재생되어서 이러다가 주말까지 못 기다리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교무 회의를 마친 희주의 휴대폰에 그 아쉬움을 달래 줄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혹시 오늘 퇴근하고 볼 수 있느냐고. 보고 싶다고.

실룩거리는 볼을 꾹 내리누른 후 긍정의 답장을 보낸 희주는 수업이 없는 마지막 교시 동안 교무실에 붙어 앉아 눈에 불을 켜고 노트북을 들여다보았다. 퇴근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무슨 일이 있어도 칼퇴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속도에 가속이 붙었다.

이어폰도 꽂지 않은 귀에서 테마 송이 반복 재생되는 환청도 들렸다. 일이 이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경험은 또 난생처음이었다.

그렇다고 들뜬 마음에 일을 개판으로 처리했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일 처리 속도와 작업물의 완성도는 놀랍게도 비례했다.

희주가 이토록 정시 퇴근에 매달리는 이유는 단 하나, 지난번의 데이트 때 된통 고생한 이후 깨닫게 된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금이라는 진리 말이다.

고작 씻고 옷을 갈아입는 것밖에 없었지만 그때는 맞선 이후 애프터였고, 오늘은 사귀기로 하고 나서 하는 공식적인 첫 데이트였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배로 부풀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오늘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의 위치까지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단 5분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그때처럼 경보하듯 정문을 통과하고 코너를 돌자마자 냅다 뛰었다. 입꼬리가 귀밑에 걸린 채 뛰어오는 그를 마주 오던 행인들이 식겁하며 이상한 눈으로 보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뛰었다. 스스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몰랐고, 안다고 할지언정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학교에서 오피스텔까지 걸리는 시간은 걸어서 20분. 택시를 탈까 했지만 길이라도 막히면 말짱 도루묵이니 튼튼한 두 다리를 믿어 보기로 했다. 그때도 잘했잖아? 해서 20분을 무려 10분 안팎으로 단축할 만큼 열심히 내달렸다. 그렇게 막 오피스텔 입구 쪽으로 방향을 돌렸을 때였다.

갑자기 웬 차 한 대가 빵! 하고 클랙슨을 울렸다. 소리는 짧고 간결했지만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 걸음을 멈춘 희주는 숨을 흡 들이마시며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빠 죽겠는데 도대체 어떤 인간이야? 항의를 할 배짱도 없으면서 가느스름하게 뜬 눈을 한 희주가 도로에 늘어선 차들을 쏘아보았다. 정지 신호를 받아 멈춰 있는 차들을 훑는 시선이 제법 매서웠다.

“희주 씨!”

그때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이름이 불린 건 둘째 치고 지금 이 시간에, 이곳에서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들려 희주는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휘휘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는 사이 다시 한번 더 빵! 클랙슨 소리가 주의를 환기했다. 설마, 하는 생각에 도로 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번에야말로 클랙슨을 울린 차가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슬슬 에어컨을 켜느라 창문이 꼭꼭 내려와 있는 차들 가운데 유일하게 창문이 열려 있는 차 한 대. 차종에 무지한 희주의 눈으로 보아도 제법 잘 빠진 몸체, 무엇보다 몇 번 탄 전적이 있어 눈에 익은 검정 세단에 시선이 꽂혔다.

“……어?”

순간, 희주는 저도 모르게 바보 같은 소리를 내 버렸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요?”

발걸음이 절로 옮겨졌다. 누가 봐도 깜짝 놀란 표정으로 후다닥 다가가자, 희주가 서 있는 인도 방향으로 상체를 내밀고 있던 강현우가 자세를 바로 하며 웃었다.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누가 이렇게 열심히 뛰어가나 했더니만 그게 제 애인일 줄이야.

“현우 씨?”

뒤에 많은 물음이 생략되어 있는 부름이었다. 조심스럽게 몸을 숙인 희주가 여전히 당혹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지금 시간이… 아직 일곱 시 안 됐는데요?”

“아아, 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바로 넘어왔어요.”

“아……. 아? 퇴근을 바로 여기로 하셨다고요?”

“네. 음, 근데 일단 탈래요? 곧 신호 바뀔 것 같아서.”

희주 씨도 아시다시피 주정차 금지라, 신호 바뀌면 저 좀 민폐거든요. 강현우가 난감한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 네. 네.”

세단 뒤로 신호 대기 중인 차량이 한두 대가 아니었다. 도리어 당황한 희주가 부산스럽게 시트에 올라탔다. 기다렸다는 듯 물씬 풍겨 오는 강현우의 페로몬에 일순 기분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머릿속을 죄 헤집어 놓은 물음표는 여전히 남아 부유하는 중이었다.

동시에 신호가 바뀌었다. 희주는 지금껏 자신이 열심히 뛰어왔던 바깥 배경을 바라보며, 꽉 잠가 둔 안전벨트만 연신 만지작거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일단 타야 할 것 같아서 타기는 했지만 몹시 당혹스러웠다. 분명 지난번 데이트 때에는 7시에 맞춰 왔지 않았나? 퇴근하자마자 바로 왔는데도 7시였다. 물론 퇴근 시간이 겹쳐서 평소보다 더 걸렸다고는 했지만, 어쨌든.

전혀 예상 못 하고 있던 변수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차라리 뛰지 않았더라면 땀이라도 안 났을 텐데. 중간중간 조금씩 걸으면서 체력 분배를 하기는 했다만, 어쨌거나 땀을 흘린 것은 사실이었다. 시원해야만 하는 에어컨 바람을 맞으면서 목덜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인데……. 설마, 이대로 데이트를 하러 가자는 건 아니겠지.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만 있는데, 허벅지 위에 올려둔 손이 불시에 들어 올려졌다.

“주변에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더라고요.”

“아…….”

“희주 씨 학교 앞으로 가야 되나 했는데, 또 어디 학교인지를 모르고요.”

강현우는 희주의 손을 그대로 들어 잡으며 여상히 말했다. 그러고는 퍽 자연스럽게 맞잡은 두 손을 기어 위로 가져갔다.

난데없는 스킨십에 정신이 팔린 희주는 손을 마주 잡았으나, 어색하게 허공에 떠 있는 제 손가락을 움찔 떨었다. 다 큰 어른들끼리, 그것도 이미 키스까지 해 버린 마당에 이렇게 따지는 것도 우습지만,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키스보다 먼저 해야 했던 단계는 손잡기였다. 입술을 맞댈 때보다 지금이 훨씬 떨린다고 하면 웃으려나.

희주는 핏줄이 도톰하게 솟은 강현우의 손등을 내려다보다가 슬쩍 손가락을 오므렸다. 굵은 마디와 동그란 뼈가 만져졌다.

“근처예요……. 제가 다음에 메시지로 주소 찍어 드릴게요.”

페로몬이 주체를 못 하고 솟아 나왔다. 존재감이 미미한 열성 페로몬을 맡은 강현우가 희주의 옆모습에 흘긋 시선을 뒀다가 미소했다.

두 사람을 태운 차량은 신호에 맞추어 천천히 가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차량이 오피스텔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을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희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근데 저희… 지금 어디 가나요?”

예약을 하셨다거나……. 희주는 말끝을 얼버무렸다. 만약 그런 거라면 조금 난처해질 터였다.

“무작정 희주 씨 보러 올 생각으로만 와서 정하고 온 건 없는데. 어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요?”

“그건 아니고요. 저, 집 좀 잠깐 들러도 될까요?”

“집?”

강현우의 시선이 희주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희주가 재빨리 그 이유를 설명했다.

“가방도 좀 두고요. 옷 좀… 갈아입고 싶어서…….”

“옷은 왜요? 예쁘게 입었는데요.”

강현우가 하는 말이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그래서 더 민망해졌다. 멀끔하고 반듯한 슈트 차림인 그에 비해, 자신은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편한 사복 차림이기 때문이었다. 척 보기에도 모델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에 반하면 자신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행인1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그의 애인으로 보일 것 같지가 않았다. 그냥 지나가다 우연히 옆에 서게 된 타인이라면 모를까.

옷이야 그렇다 치고, 더 우선적인 이유가 있었다. 희주는 망설이다가 멋쩍게 코를 훌쩍였다.

“그리고 제가 아까 조금 뛰어 가지고…….”

“아, 맞아. 혹시 급하게 가던 곳이 집이었어요?”

“네에. 현우 씨 오기 전에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나가려고 했거든요…….”

“샤워는 왜. 땀 냄새 날까 봐?”

단번에 정곡을 찔린 희주가 민망함으로 붉어진 얼굴을 위아래로 주억거렸다.

“흐음.”

무언가 생각하기라도 하듯 강현우가 가볍게 침음했다. 희주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제게서 불쾌한 냄새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기분 탓인지, 입고 있는 티셔츠가 척척하게 살갗에 달라붙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에어컨 바람을 쐬다 보면 땀이 식기야 하겠지. 하지만 냄새는 사라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첫 데이트를 땀 냄새를 폴폴 풍기면서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많이 신경 쓰여요?”

마침 신호를 받은 차가 멈춰 섰다. 강현우는 자리가 불편한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희주를 차분하게 쳐다보았다. 사랑스러운 제 연인은 땀 냄새는커녕, 오히려 페로몬이 더 짙어져 있는 걸 모르고 있는 듯했다. 지저분해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약간 죄책감이 들 정도로 선정적으로 보이는 것까지도.

뛰는 동안 올랐을, 아직까지 흰 피부에 스며들어 있는 홍조가 가시질 않고 있었다.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칼도 그렇고, 정말 땀이 맺히기라도 했는지 윤기가 도는 목덜미도 그렇고. 성적으로 꽤 담백한 편인 제 눈에도 묘하게 비쳐 보였다. 그럼에도 선생님하면 으레 떠오르는 단정한 이미지에 걸맞은 차림으로 앉아 있으니, 여태 없던 취향이 불쑥 생기려고 한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희주가 걱정하는 것만큼의 냄새는 일절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씻고 싶어 하는 그를 말릴 생각도 없었다. 지금 이렇게 된 데에는 예고도 없이 일찍 온 제 탓도 있으니까.

“많… 이는 아니고, 조금?”

“입주민 차량 아닌데 주차해도 됩니까?”

“아, 제가 경비실에 말해 두면 돼요.”

희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곧장 오피스텔 방향으로 핸들을 꺾은 차량은 희주의 안내에 따라 주차장 차단기 앞에 멈춰 섰다. 경비실로 연결되는 수화기에 대고 희주가 호실을 말하면서 방문 차량이라 말하자, 별다른 확인 절차 없이 차단기가 위로 올라갔다. 생각보다 허술한 보안에 강현우의 미간이 설핏 구겨진 것도 모르고 희주는 “저기 자리 비었어요” 하고 손짓했다.

“그럼 전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시동이 꺼진 뒤, 재빨리 안전벨트부터 풀어 내린 희주는 강현우의 말에 멈칫했다. 저 혼자 다녀오라는 말에 왜인지 마음 한구석이 복잡해졌다.

일이 일찍 끝나서 왔다고는 하지만 특정 케이스가 아닌 이상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게 보통의 직장인이었다. 여나연만 봐도 할 일도 없는데 시간이 안 되어 퇴근시켜 주지 않는다며 투덜댄 게 한두 번이 아니지 않았던가. 한 시간이나 빨리 퇴근하는 게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카페도 아니고,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리게 해도 되는 건가?

남남인 사이도 아니고 이제 사귀는 사이인데 잠깐 집에 들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집으로 오라는 말이 무조건 그런… 뜻만 가진 게 아니니까 오해하지 않게 잘 말하면 괜찮을 것 같기도……. 이왕 일찍 만난 거, 조금이라도 더 얼굴 볼 시간 있으면 좋은 거니까…….

속으로 합리화를 끝낸 희주는 주저하며 강현우를 돌아보았다. 이내 눈이 마주쳤다. 피할 생각 없이 오롯이 저를 바라보는 짙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희주는 소심하지만 정확하게 말을 내뱉었다.

“저 괜찮으시면… 잠깐, 안에 들어와 계실래요?”

* * *

희주가 사는 오피스텔은 대학생들과 직장인들이 많이 입주해 있는 건물이었다. 하여 출퇴근 시간이면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한 경쟁이 제법 치열한 편이었다.

“…….”

“…….”

지하 주차장, 그리고 지상 1층에서 입주민들을 실은 엘리베이터는 만원이었다. 잔뜩 몸을 옹송그린 사람들은 각자의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전광판 속 천천히 바뀌는 숫자를 응시했다. 숨 막힐 듯한 침묵이 정사각형의 밀폐된 공간을 가득 메웠다.

그중 희주는 가장 안쪽 구석 즈음에 서 있었다. 학교에 메고 다니는 백팩을 앞으로 돌려 소중하게 감싸 안고서. 휴대폰이나 전광판을 보는 대신 모르는 사람의 등짝을 하염없이 응시하는 중이었다.

‘불편해…….’

희주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음에 차마 숨도 제대로 내쉬지도 못했다. 의도치 않게 살짝살짝 움직일 때마다 자꾸만 제 뒤에 선 강현우가 의식된 까닭이었다.

머리카락 끝에까지 신경이 뻗어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뒤편에 선 강현우가 숨을 마시고 내쉬는 것 전부가 희주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약 5분 전, 강현우는 집 안에 들어와 있지 않겠느냐는 희주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니, 처음엔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귀를 의심하는 표정부터 지었다. 약간 난감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린 그는 턱을 감싸 쥐고 무언가를 골몰히 고민하기도 하고, 습관처럼 핸들을 톡톡 두드리기도 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물었다. 오해할까 봐 그러는데 방금 그 말, 어떻게 해석해야 되느냐고.

그 물음에 화들짝 놀란 희주는 두 손을 내저었다. 주차장에까지 들어왔는데 차에서 기다리게 하는 게 예의가 아닌 것 같다면서, 다른 뜻이 있었던 건 절대 아니라고 열심히 해명도 했다. 어느새 귀까지 빨개져서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보며 강현우는 결국 애매모호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더란다.

그렇게 열렬히 부정하고 나니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제가 생각해도 너무 당황한 티를 내 버린 듯했다. 당연히 상대가 오해할 만한 한 말이었는데, 괜히 요란하게 반응해서 그를 멋쩍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이제 내려야 하지 않나요?”

몇 개의 층을 들렀을까. 답답하리만큼 느릿하게 가다 멈추기를 반복하던 엘리베이터가 슬슬 상층부에 다다를 무렵, 불현듯 강현우가 말을 걸어왔다. 다행히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내린 터라, 그와의 거리에 제법 여유가 생긴 모습이었다.

“아……. 네. 17층이에요.”

희주는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슬쩍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 이제 내릴 차례였다. 아마 지하에서 버튼을 누를 때 봐 둔 모양이었다.

오며 가며 본 적 있는 입주민까지 해서 총 세 명이 같은 층에서 내렸다. 먼저 내린 입주민이 빠른 걸음으로 왼편 복도로 사라지고, 뒤따라 내린 희주는 그와 반대인 오른편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뚜벅이는 구둣발 소리가 그림자처럼 뒤로 따라붙었다. 혹시 이상하게 걷는 것처럼 보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따라오는 강현우를 의식하다 보니 이상하게도 걷는 법을 까먹은 느낌이었다.

“저기, 치우기는 했는데… 워낙 좁아서 치워도 딱히 치운 것 같지가 않더라고요.”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길조차 어색했다. 틀리면 망신이라는 생각에 집중해서 여덟 자리를 누른 희주는 멋쩍게 말하며 손님용 슬리퍼를 그의 앞쪽으로 밀어 주었다. 처음 이사 왔을 때 사 뒀던 건데, 그동안 놀러 온 사람이 딱히 없었던 터라 거의 새것처럼 부들부들했다.

주춤 물러난 희주는 슬리퍼에 발을 넣는 강현우를 확인한 다음 후다닥 안쪽으로 들어가 불부터 환히 켰다. 그러고는 빠른 속도로 집 안을 둘러보았다. 뒤집어 벗은 양말이나 엉망으로 널어 둔 빨래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주말 동안 할 게 없어 대청소를 해 뒀던 게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딱 하나, 아침에 개지 않은 이불이 미스였다. 강현우의 눈길이 닿기 전, 빠르고 정확하게 침실 문을 닫은 희주는 어색하게 방문 앞에 서서 웃었다.

“깔끔하고 좋은데요.”

혼자 사는 남성은 대체로 집을 엉망으로 해 둔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강현우는 대학 시절, 술에 취해 어쩔 수 없이 하룻밤 묵어야 했던 동기의 자취방을 떠올렸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었다.

자고 일어난 광경은 처참했다. 먹은 걸 제때 치우지 않아 냄새나는 주방과 방바닥을 굴러다니는 양말과 속옷, 도대체 뭘 먹다가 그런 건지 조악한 벽지에는 새빨간 양념 따위가 튄 자국이 가득했다.

난생처음 쓰레기 소굴에서 자는 경험을 한 탓에 기대치가 낮은 것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희주의 집은 정말 깨끗한 편에 속했다.

밝은 우드 톤과 화이트 톤이 어우러진 실내는 말끔히 정돈된 모습이었다. 가구들은 하나같이 깨끗했으며, 거실 통창은 넓고 깔끔한 느낌을 주는 데 일조했다. 비록 바깥으로 보이는 광경이 멋들어진 야경이나 자연 경관은 아니었지만, 주변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모습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게다가 현관으로 들어설 적부터 느껴지던 페로몬까지 인테리어의 한 구성인 듯했다. 오히려 열성인 덕에 짙지 않은 페로몬이 꼭 산뜻한 방향제를 대신하는 듯했다. 포근한 햇볕과 같은 희주의 페로몬이 은은하게 공기 중을 부유했다. 그와 어울리는 집이었다.

강현우가 거실을 둘러보는 사이, 주방으로 간 희주는 냉장고와 찬장을 열어 보았다. 손님이 왔으니 뭐 마실 거라도 내가야지 싶었다. 그러나 주방 사정은 마땅치 않았다.

통 뭘 해 먹지 않아 들어 있는 거라곤 생수와 맥주, 간간이 안주로 먹는 볶은 김치와 참치 캔이 전부였다. 하다못해 티백이라든가, 믹스커피라도 있으면 좋겠건만 차를 마시는 고상한 취미는 없었을뿐더러 믹스커피는 떨어진 지 오래였다. 뭐가 들어 있는 공간보다 비어 있는 공간이 훨씬 많았다. 희주는 대번에 인상을 구겼다.

그래도 바로 나갈 거니까 상관없나. 전에 보니까 커피는 딱히 안 좋아하는 것 같던데. 희주는 예전 공원 근처 주차장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캐모마일… 이었나. 취향이 확고한 편이면 아무 차나 내놓는 것보다 차라리 생수가 나을 것 같기도 하고…….

결국 희주는 머그 컵 가득 생수를 따랐다.

“저…….”

동시에 강현우도 그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통창을 통해 보이는 자그마한 녹지가 혹 그때 그 공원인가 하여. 이 밖에도 꽤 흥미로운 눈으로 둘러보던 강현우는 저를 향한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곤란한 표정의 희주가 머그 컵 하나를 들고 쭈뼛쭈뼛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집에 마실 게 물밖에 없어서…….”

“아, 주세요. 괜찮습니다.”

희주는 손가락이 닿을세라 신중하게 컵을 넘겼다. 받아 들자마자 곧장 입술을 대는 걸 보니 괜히 민망함이 몰려왔다. 그전에 앉으라고 먼저 말할걸. 거실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서 바닥을 디딘 발가락만 꼼지락대던 희주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잠깐 앉아 계시면 빨리 준비하고 나올게요. 편하게 계세요. 심심하시면 집 구경하고 계셔도 괜찮아요.”

“아, 네. 그럴게요. 다녀와요.”

“네…….”

희주의 입술이 한 번 더 달싹였다.

“……빨리 나올게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머뭇거리더니, 기어이 한 마디를 덧붙인 뒤 도망치듯 방 안으로 사라졌다.

강현우는 희주가 말했던 대로 거실 소파에 털썩 등을 기대었다. 패브릭 재질의 소파를 손바닥으로 스윽 쓸자 미묘하게 색이 달라졌다. 주방과 거실, 통창, 그리고 희주가 사라진 방문까지 순서대로 시선을 옮긴 그는 금방 희주가 건네주고 간 머그 컵을 내려다보았다. 물밖에 없다면서 머쓱하게 웃던 희주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씻으러 가면서 빨리 나온다고 하면… 그건 또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강현우는 잔잔한 표면을 노려보다가 이내 벌컥벌컥 남김없이 삼켜 버렸다. 마치 냉수로 속을 차리려는 듯이.

* * *

희주는 거울 앞에 멍하니 서서 목덜미를 긁적였다. 거울에 비치는 그의 얼굴은 얽히고설킨 여러 복잡한 감정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앙다문 입술은 어쩐지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혹시 강현우가 저를 오래 기다리기라도 할까, 부산스레 욕실로 들어갔던 뒤 어느 순간부터 쭉 이 상태였다.

“……미치겠네.”

거울 속 자신과 눈을 마주한 채로 열없이 중얼거렸다. 스스로를 노려보는 눈빛에는 한심함과 난처함이 공존했다. 노려보면 답이 나오냐. 아이들에게 했던 잔소리가 고스란히 제게로 되돌아왔다. 저절로 한숨이 푹푹 내쉬어졌다. 분명 이가 달달 떨릴 정도의 찬물로 샤워했는데도 불구하고 푹푹 터져 나오는 한숨은 뜨겁기 그지없었다.

“걔는 왜 그런 말을 해선…….”

한숨 끝자락에 원망하는 말투가 툭 튀어나왔다. 하나 원망의 대상은 눈앞에 없었다.

“…….”

속궁합과 페로몬 궁합……. 엊그저께 여나연이 했던 말들이 왜 하필 지금 이 상황에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겨우 찬물로 지워 냈던 상념이 뭉게뭉게 떠오르자 순간 아득해진 희주는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저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강현우에게 묘한 죄책감이 느껴졌다. 정말 이상한 의도가 아니라고 손까지 저어 가며 부정해 놓고서 몰래 다른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희주는 자꾸만 조여드는 배 속 감각에 두 다리에 바짝 힘을 주었다.

할 수만 있다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빨간 생각들 위로 하얀 물감을 온통 칠하고 싶었다. 차마 소리를 크게 내지는 못하고 소리 없이 침음을 삼킨 희주는 아직까지 흠뻑 젖어 있는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헤집었다. 의지를 배반한 하체가 자꾸만 힘을 주려고 해서 돌아 버릴 맛이었다. 가뜩이나 샤워하는 데 오래 걸렸는데, 또다시 씻으러 들어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가서 얼굴은 어떻게 보지. 늘 따뜻하고 다정하게 웃는 강현우의 얼굴을 떠올릴 때면 저도 모르게 웃곤 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쿡쿡 쑤셨다. 양심에 실체가 있다면 아마 이쯤 위치일 것이 분명했다.

“일단… 나가자.”

일단 나가서, 사람 많은 곳에 가서 밥 먹고 하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 희주는 세면대를 꼭 붙잡고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 속에 결연한 표정의 남자가 비쳤다. 힘겹게 합리화를 마치고 나니 불안감에 가까웠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듯했다.

* * *

빠르게 준비를 마친 희주가 다시 거실로 나왔을 때, 강현우는 소파를 벗어나 냉장고 앞에 서 있었다. 커다란 냉장고 앞에, 딱 그만한 덩치의 남자가 등을 보이고 서 있는 모습에 희주는 조금 의아해하며 다가갔다.

“거기서 뭐… 하세요?”

집 구경을 해도 좋다고 했더니 그렇다고 주방까지 들어와 구경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뭐, 그러면 안 된다는 이유는 없지만 하필 서 있는 곳이 냉장고 앞이라는 게 문제였다. 아까 열어 보지 않았는가. 냉장고에 들어 있는 거라곤 생수와 맥주, 그리고 안주용 볶음김치가 전부였다.

친구들에게 보여 줘도 뭘 먹고 사는 거냐고 잔소리를 들을 판에, 이제 막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에게 보여 주기에는 부끄러운 냉장고 사정이었다.

설마 찬장까지 열어 본 건 아니겠지. 이번에는 아연함에 붉어진 얼굴로, 희주가 후다닥 남은 거리를 좁혔다. 다행히 저를 보는 강현우의 눈빛에는 질타나 한심함 따위는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이 가득했다.

‘음? 호기심?’

그의 눈빛에서 호기심이라는 단어를 읽었을 때, 강현우가 마침 잘됐다는 표정으로 냉장고를 가리켜 보았다.

“희주 씨. 이거, 다 배달 음식입니까?”

희주는 어리둥절해진 눈으로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가 묻는 것은 다름 아닌 홍보용으로 만든 전단 스티커였다.

뭘 해 먹고 사는 거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희주는 당당히 배달 앱을 켜 보여 주고는 했다. 세상이 많이 발달한 덕분에 전단지를 내려다보며 전화기를 붙들고 ‘아니요. 2호가 아니라 1호요. 17층 1호! 하나!’ 하고 외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럼에도 식당에서는 동그랗고 네모난 전단 스티커를 동봉해 보내 주고는 했다. 희주는 몇 년 전 습관을 버리지 못한 까닭에 그것들을 버리는 대신 냉장고에 붙여 두고는 했는데, 강현우가 발견한 것이 바로 이 스티커 무더기들이었다.

“그렇긴 한데…….”

그런데 이게 뭐 어쨌다는 건지 모르겠다.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우물쭈물 그렇다 대답하자 강현우가 수긍하며 스티커에 손을 댔다. 그러고는 냉면, 갈비탕, 치킨, 자장면, 오돌뼈…….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스티커들을 한데 모아 오와 열을 맞추는 것이었다.

“이걸 여태 혼자 다 시켜 먹었어요?”

이렇게 보니 참 많기도 했다. 희주는 머쓱함을 감추지 못하고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그래도 몇 년 동안 자취한 거치고는 많이 안 시켜 먹은 건데요…….”

앱 주문 이력이 월 10회 이상인 사람치고는 허술한 변명이었다.

“그리고 안 시켜 먹은 것도 있어요. 갈비탕 이건 현관문에 붙어 있던 거 떼 와서 붙여 둔 건데…….”

혹시 꼬투리라도 잡힐까 변명하듯 빠르게 부연했다. 그러자 강현우가 갈비탕 전단지를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갈비탕 가격이 왜 이럽니까?”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전단지를 들여다보는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희주는 가격에 뭐 문제가 있나 싶어 함께 고개를 기울이고 전단지를 살폈다. 맑은 국물에 도톰한 살이 가득 붙은 갈빗대가 여럿 올라가 있는 사진 옆에는 자취생으로서는 살짝 부담이 되는 가격이 덜렁 적혀 있었다.

배달 음식 가격이 많이 오른 건 맞지. 그래서 저 역시도 요즘에는 웬만하면 학교 급식으로 중, 석식을 해결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요즘에는 만 원 한 장으로도 밥 한 끼 사 먹기가 힘들다면서, 강남 쪽으로 회사를 다니는 여나연은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닌다고도 했다.

“좀 그렇죠? 저도 그래서 이건 안 시켜 먹어요.”

역시 같은 직장인이라 가격 보고 기함하는구나. 희주는 맞장구를 치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해당 전단지를 톡 떼어 냈다. 배달 음식 치고는 너무 사치스러운 가게였다.

“제가 아는 가게 중에 갈비탕 잘하는 가게가 있어요. 다음에는 거기로 갑시다.”

강현우는 희주의 손안에서 고이 접히는 전단지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는 국산이기는 한 건지 의심이 갈 정도로 저렴하기 짝이 없는 갈비탕에 쯧, 하고 혀를 차기까지 했다. 다행히 한 번도 시켜 먹은 적이 없는 가게라고 하니 다행이었다.

한 명은 너무 비싸서 문제였고, 다른 한 명은 너무 싸서 문제였다. 동상이몽이 따로 없는 속마음들이었다.

“아, 현우 씨. 저희 그럼 오늘은 뭐 먹으러 갈까요?”

희주는 여러 번 접어 엄지손톱만큼 작아진 전단지를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렸다. 보아하니 제가 씻는 동안 집 구경은 얼추 끝난 것도 같고, 제가 나서서 구경시켜 줄 공간도 딱히 없으니 슬슬 어디로 갈지 정하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지난번에도 느꼈듯이 이 주변에는 딱히 갈 만한 식당이 없었다. 괜찮은 식당을 가려면 차 타고 나가야 할 텐데, 차는 있으니까……. 여차하면 여나연에게 물어보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혹시 식사하고 나서 뭘 할 생각입니까?”

“밥 먹고요? 뭐… 카페 갈까요? 오늘은 조금 일찍 만났으니까 그럴 시간은 있을 것 같아요.”

강현우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희주가 출근 가방을 찾기 위해 거실을 두리번거렸다. 휴대폰을 가방에 넣어 놨었나. 집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워낙 정신이 없었던 탓에 늘 손에 쥐고 다니는 휴대폰을 통 어디에 놨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강현우가 거실로 따라 나왔다. 그는 방금 전까지 앉아 있던 소파에 도로 등을 기대어 앉고, 희주를 바라보다가 설핏 미소 지었다. 희주는 아무래도 친구에게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면서 가방에서 찾은 휴대폰을 쥐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친구라면 전에 결혼한다는 그 친구 말하는 겁니까?”

“아, 네. 이번 주 토요일에 식이에요.”

“벌써 그렇게 됐습니까? 시간이 참 빠른 것 같네요.”

“안 그래도 주말에 한번 만났었어요.”

그는 아무래도 저와 끝까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하다. 소파 위의 공간도 충분한데, 바닥에 어정쩡하게 무릎을 댄 채로 앉아서 죽어라 휴대폰 액정만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정말 귀여울 따름이었다. 계속 제 쪽으로 눈동자가 돌아가려는 게 뻔히 보이는데, 애써 시선을 붙잡아 두려는 노력이 가상하기도 했다.

집으로 가자는 말을 한 이후부터 결국 안으로 들어오고 난 지금까지, 줄곧 분위기가 묘한 흐름을 타고 있다는 걸 그도 모르는 눈치가 아닌 듯했다.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면 알면서도 넘어가 줘야 하는 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해 주기를 바라고 있을 것 같아, 강현우가 재차 질문했다.

“그래요? 만나서 무슨 대화했어요?”

“무슨 대화라기보다는… 그냥 밥 먹고 커피 마시고 그랬어요. 걔한테 줄 것도 있기도 했고…….”

“결혼 축하 선물 같은 거 말입니까?”

“아. 아니요. 그건 아니고, 이번에 저 제주도 간다고 하니까 선물 사 오라고 했던 게 있거든요.”

“면세점에서요?”

“면세점에서는 아니고, 시장에서…….”

묻는 대로 순순히 대답을 이어 가던 희주의 입이 일순 다물렸다. 한창 경청하고 있던 강현우는 갑자기 뚝 끊겨 버린 대답에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껏 메시지를 치는 척이라도 하고 있었던 건지, 희주는 이미 어두워진 액정에 두 엄지를 올린 채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저… 조, 좋아하는 음식 있으세요? 지금 막 친구한테 물어보니까 뭐 먹고 싶은 건지부터 물어봐서…….”

하던 말을 다 이은 다음에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말을 굳이 꺼내는 이유가 있을 테였다. 말하고 싶지 않은 건가. 애인에게 말하기 난처한 친구 선물이 뭐가 있을까. 그것도 제주도 시장에까지 가서 사 와야만 하는 것은 뭘까. 왜인지 얕은 흥미가 느껴졌다. 하여 강현우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말을 불쑥 꺼냈다.

“음, 글쎄요. 그나저나 희주 씨 무릎 안 아파요? 소파에 앉아요.”

“안… 아파요. 괜찮아요.”

“맨바닥에 오래 앉아 있으면 아파져요. 일어나서 여기 옆에 앉아요.”

못 일어나겠어요? 내가 일으켜 줄까요? 마치 주객전도가 된 모습이었다. 손님이 집주인더러 소파에 앉으라 권하는 모습이라니. 금방이라도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어 일으킬 것 같은 눈빛에, 결국 희주는 바닥에 대고 있던 무릎을 일으켜 소파 위로 주섬주섬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좁은 평수의 1인 가구에 딱 맞는 사이즈의 소파였기에 희주가 아무리 여유를 두고 앉으려고 애써도 거기서 거기였다. 무릎 사이를 딱 붙이고 주먹 쥔 손을 가지런히 허벅지 위에 올려 둔 모습은 마치 면접을 앞두고 잔뜩 긴장한 지원자들과도 같았다. 강현우는 어울리지 않게 각을 잡고 앉은 희주를 곁눈질로 보며 또 한 번 웃음 지었다.

“아, 뭐 먹고 싶냐고 물어봤었죠?”

강현우는 소파 등받이에 한쪽 팔을 올린 거만한 자세로, 이제 와 “흠” 하고 고민하는 척을 했다. 드디어 말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는지 희주가 슬쩍 입술을 말아 무는 것이 보였다. 덩달아 하얀 볼이 실룩거렸다. 필사적으로 들뜬 마음을 감추려 하는 것을 보며, 강현우는 표정 참 읽기 좋다는 생각을 했다. 이윽고 강현우가 “아” 하고 말문을 열었다.

“이상한 선물이라도 사다 줬어요?”

“이상… 그게 이상한 건가? ……아.”

“조금은 이상한 선물이었나 보네요.”

이렇게 쉬워서야. 저도 모르게 대답을 하고 만 것에 놀랐는지 희주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진 채 강현우를 향했다. 언뜻 배신감이 비쳤다.

드디어 보네. 이제야 눈을 마주하고 대화할 수 있게 되었음에 강현우는 빙긋 웃음 지었다. 혹시 또다시 시선을 피하기라도 할까,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동자를 따라 조금 부릅뜬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이러니까 뭔지 더 궁금하잖아요.”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이상한 선물이 뭐가 있을까. 강현우는 짐짓 고민하는 척 고개를 까딱거렸다.

“말해 주면 안 돼요?”

“아, 그… 게요.”

“말하면 친구분이 난처해지는 건가?”

“그건… 아닐걸요. 아마도? 걔가 막 이런 걸 따지는 성격은 아니라서.”

절대 말할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하면 될 것을. 희주는 횡설수설, 상대가 묻지도 않은 여나연의 성격까지 주절주절 말해 댔다. 왜 이런 것까지 말하고 있는 거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민망해 죽을 것만 같았다.

다른 거면 순순히 말했겠지. 그건… 벌떡주는 차마 제정신으로는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이상한 것도 아니고, 친구분이 난처해지는 것도 아닌데…….”

“…….”

“왜 말을 안 하려고 하지.”

입가에 나른하게 걸린 미소와는 달리 시선은 끈덕지고 집요했다. 강현우는 희주가 아주 조금이라도 눈을 피하려고 하면 바로 따라붙어 시선을 얽어 댔다. 나누고 있는 대화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시선이 오고 갔다. 전부터 묘해진 기류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침내 도돌이표였다.

우웅, 하고 우는 냉장고 소리 외에 아무런 소음도 들려오지 않는 침묵 속에서는 혀 밑에 고인 타액을 삼키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긴장한 티가 역력한 반응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올까 걱정이 되었다. 결국 강현우의 시선을 이기지 못한 희주가 슬그머니 눈을 피할 때였다.

“말해 주면 안 돼요?”

불쑥, 강현우가 상체를 밀착시켰다. 갑자기 바로 앞까지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 희주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아 버렸다.

“애인 사이에 숨기는 게 있으면 안 되잖아요.”

감은 눈꺼풀에 드리운 그늘 때문에 그의 인영을 느낄 수 있었다.지레 놀라 눈을 감아 버린 제 얼굴 위로 상대의 눈빛이 슬금슬금 기어가고 있는 것까지도. 정확히 제 얼굴의 어디를 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몹시 부끄러워진 희주는 시선을 피하듯 눈동자를 굴렸다.

희주의 짐작대로 강현우의 시선은 차차 붉어지기 시작하는 얼굴에 닿아 있었다. 희고 얇은 피부에 옅은 홍조가 수묵화처럼 퍼져 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강현우는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을 서서히 걷어 냈다.

강현우의 시선이 감긴 눈꺼풀부터 코, 입술까지 찬찬히 내려갔다. 보고 싶었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될 만큼 눈앞에서 아른거리던 그 얼굴이었다. 눈동자에 깊이 아로새기듯, 생김새 하나하나 눈에 담던 강현우가 가장 오래 시선을 둔 곳은 단연 입술이었다. 늦은 밤, 어두운 차 안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불그스름하고 윤기가 도는 입술은 음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노골적인 강현우의 시선이 여전히 감겨 있는 눈꺼풀을 더듬었다. 얇은 눈꺼풀이 들썩거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어둠 속에서도 절대 시선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듯이. 혹은, 마치 제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듯이.

“눈을 왜 감지.”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목소리에 감긴 눈꺼풀이 움찔 떨렸다. 웃음기가 전혀 없는 차가운 물음에, 소리 없이 벌어졌던 희주의 입술이 달싹거리다 끝내 다물렸다. 끝이 낮게 내려가는 목소리는 제게서 답을 원하고 있지 않았다.

“내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잖아요.”

다시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강현우가 조용히 읊조렸다. 하지만 어딘가 자조하는 듯,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였다.

희주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가 말하는 바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알고 있음에도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이 말을 들으니 제가 조금 더 바라게 되는 것 같아 그저 부끄러웠다.

제주도에서의 입맞춤은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감각이 선연했다. 출근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퇴근 후 가만히 앉아 휴식을 취할 때도 제 입술을 문지르던 젖은 입술이 자꾸만 떠올랐다. 첫사랑에 빠진 소년이 된 기분이었다. 처음 느껴 보는 소중한 감각에 취해, 마치 환상 속에 갇혀 사는 사람이라도 된 듯한 황홀감이었다.

조심스럽게 입 안을 훑던 혀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녹진하게 섞여 들던 타액, 그리고 소유욕이 짙게 녹아 있던 페로몬까지 떠올리면 괜찮았던 속이 마구 울렁거리기도 했다. 그와의 미래를 상상하기까지 하지 않았나. 어렴풋한 상상 속 강현우와 함께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키스보다 더한 것을 하게 될 거라고.

“사실, 별로 안 궁금해요.”

“아…….”

온몸에 바짝 들어간 긴장감에 허벅지가 아릴 때쯤이었다. 감은 눈이 어지러울 만큼 짙은 머스크 향이 훅 끼쳐 왔다.

뺨을 감싸는 체온이 몹시도 뜨거웠다. 눈을 감고 있는 탓에 모든 감각이 그와 닿아 있는 뺨으로 몰려든 것만 같았다. 희주는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손끝과 발끝이 서서히 말려들었다.

“희주 씨가 친구분한테 뭘 사다 줬든 그건 별로 안 궁금하다고요. 아까부터 희주 씨가 너무 긴장하고 있는 것 같길래 이것저것 물어보느라 이렇게 된 거고…….”

오로지 희주에 대해서 알아가기만 해도 모자랄 판에, 저를 위해서가 아닌 다른 이를 위해 산 선물 따위야 쓸데없는 정보밖에 되지 않았다. 강현우는 희주의 눈가를 섬세하게 더듬었다. 촘촘하게 난 속눈썹 끝을 따라 손끝을 섬세하게 움직이니, 기다란 속눈썹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감춰진 눈망울이 보고 싶어졌다.

“희주 씨.”

“……네.”

“눈 떠 볼래요?”

한참을 망설인 희주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긋났던 초점이 선명해졌다. 여전히 제 뺨을 감싸고 있는 손가락은 눈가와 뺨을 가만가만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럴 생각 없었다는 거 알아요. 나도 이럴 생각으로 올라온 거 아니고요.”

“…….”

“근데 내가 의식되기는 하죠?”

희주의 낯빛이 서서히 더 붉어졌다. 들키지 않기 위해 꼭꼭 감추려고 애쓴 마음이 강현우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창피함에 붉어진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저로 인해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게 된 것만 같았다.

“죄송해요…….”

“뭐가요.”

“저… 정말 이럴 생각 없었어요.”

죄송할 일은 아닌데. 데이트를 망쳤다고 생각하는 건가. 제 오메가는 연인 사이에 자연스럽게 피어난 성적 긴장감을 혼자만의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잘못이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 쌍방이라는 것보다도, 잘잘못을 따지자면 오히려 저의 문제인데 말이다.

“그럼 나 때문이라고 하죠.”

강현우의 말에 죄책감으로 흐려졌던 눈망울이 위로 들렸다.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웃음 지은 강현우가 이어 말했다.

“희주 씨는 이럴 생각이 없었다고 했지만, 나는 아니에요. 어떻게 해서든 애인 꼬셔서 뭐라도 해 보려고 아닌 척 따라온 파렴치한 알파가 납니다.”

“……거짓말이죠?”

“거짓말 아닌데.”

장난 같은 웃음이 흩어졌다. 경악을 하고, 도망가도 모자랄 판에 한 번이라도 기회를 주려는 희주의 모습이 기꺼웠다.

“난 지금 당장 희주 씨한테 키스하고 싶어요. 더한 것도 하고 싶고.”

눈동자에서부터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 입술로 쏟아지는 시선이 무척이나 열렬했다. 자신이 한 생각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생각이 그의 입에서 쏟아지자 미묘하게 떠 있던 죄책감이 가라앉고 숨 막힐 듯한 흥분이 떠올랐다. 희주는 입술을 다물었다. 유혹하듯 살갗을 간질이는 알파 페로몬을 따라 제 페로몬 역시,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희주 씨 페로몬만 있는 곳에 내 페로몬이 같이 남는 걸 보고 있으려니까, 이상하게 참기가 어려워졌거든요.”

뺨을 쓸어내리던 강현우의 손이 스르륵 떨어졌다. 희주는 아쉬움이 그득 묻은 눈으로 멀어지는 손을 응시했다.

“혹시 많이 배고파요?”

그나마 있던 여유 공간조차 단숨에 좁혀 온 강현우가 물었다. 희주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라는 듯 설핏 웃은 강현우가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저녁을 먹기에 다소 이른 시간이었다.

“저녁은 이따가 먹는 걸로 하죠.”

저 싸구려 같은 배달 음식 따위는 내키지는 않지만, 일단…….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중얼거림에 놀란 희주가 돌아볼 새도 없이, 그대로 희주의 목덜미를 감싼 강현우가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마주 겹쳤다.

알파의 힘을 버티지 못한 몸이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희주는 두 눈을 다시 꾹 감았다. 목뒤를 감싸고 있는 강현우의 손은 지글지글 타오를 듯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데일 것만 같은 온도에 희주가 놀라기도 전에, 보다 더 뜨거운 혀가 벌어진 입술 틈을 갈랐다.

마치 페로몬을 동이째로 붓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어딘가 매캐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진한 머스크 향이 물기 어린 살덩이와 함께 입 안으로 들이닥쳤다. 젖은 입술 안쪽을 가볍게 스친 혀는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움직임으로 굳어 있는 혀를 옭아맸고, 여유 없이 입 안을 파고들었다.

드러난 목덜미로 소름이 돋고, 누워 있던 솜털이 바짝 몸을 일으켰다. 힘이 빠듯하게 들어간 허벅지에서부터 등골을 타고 미미한 흥분감이 올라왔다. 소름 끼치는 감각에 어깨를 움츠린 희주가 온기를 원하는 몸짓으로 강현우에게 바짝 몸을 붙였다. 어정쩡하게 허벅지 위에 올려 뒀던 손을 들어 강현우의 목을 휘어 감듯 끌어안았다.

그동안 미미하게 흘러나오던 페로몬이 조금 더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강현우는 코끝에 스치는 페로몬을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씻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평소의 그 포근했던 페로몬에 축축한 물 냄새가 묻어 있었다. 조금 더 희주와 맞닿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떠올랐다. 강현우는 소파를 짚고 있던 손으로 희주의 허리를 붙잡아 당겼다.

미끄러지듯 소파 위에 등을 대고 누운 희주의 위로 자연스럽게 강현우가 올라탔다. 환히 밝혀 뒀던 거실 등이 거대한 알파에게 가려져, 짙은 그림자가 위로 쏟아졌다. 좁은 소파 위로 겹쳐 쓰러진 두 인영은 잠깐 동안의 떨어짐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서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젖은 입술이 거세게 부딪혔다. 갈구하듯 벌어진 입술과 입술 사이로 물컹한 살덩이가 얽히고 얽혔다. 타액이 섞이는 질척한 소리에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거친 숨소리가 연신 섞여 들었다.

“으응, 으…….”

“음.”

순간 희주가 자지러지듯 몸을 움츠렸다. 옷자락을 파고든 손이 단번에 등허리를 덮은 탓이었다. 세로로 움푹 파여 있는 등골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자 희주가 앓는 신음을 흘리면서 더욱 몸을 떨어 댔다. 그러자 강현우가 목을 울려 괜찮다는 뜻인지 알 수 없는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맞닿은 입술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낮은 울림과 진동에, 희주가 감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입술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잡아먹히는 듯한 키스였다. 그동안의 고민과, 또 다른 어떠한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극으로 몰아붙여지는 키스이기도 했다. 입 안은 축축하고, 등허리는 뜨거웠다. 손짓만으로 온몸에 흔적이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읏…….”

희주의 허리가 움칠 떨렸다. 어느새 앞으로 넘어온 손이 가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판판한 배를 지나 주저 없이 가슴을 덮은 손이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듯 경황없이 움직였다. 가벼운 마찰로 뭉친 유두가 손가락 끝에 걸렸다. 강현우는 손가락을 눕혀 쓰다듬듯 그 위를 매만지더니, 흉통을 움켜잡고는 엄지로 유두를 세게 짓눌렀다.

아직까지는 말랑하기만 한 유두는 강현우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속절없이 모양을 달리 했다. 강현우는 그것을 엄지로 살살 튕기는가 하면, 유륜까지 덮어 마찰시키기도 했다. 단단하게 모양을 잡혔다고 생각되자 두 손가락으로 쥐고 비비기도 했다. 그럴수록 희주에게서 간지러운 신음이 새어 나왔으나, 입술로 가로막힌 탓에 크게 터져 나오지는 못했다.

“하으, 읍…….”

장난치는 듯한 움직임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처음 가슴이 만져졌을 때만 해도 간지러움에 가까웠던 감각이 점차 쾌감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아무리 오메가라도 할지라도 남자인데 가슴으로도 느낄 수 있는 건가? 이성적인 의문이 떠올랐으나 갈수록 애매하기 짝이 없는 자극에 오히려 안달이 나고 있었다. 하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희주는 답답함에 몸을 들썩거렸다.

“……아!”

“침대로 가는 거예요.”

집념의 키스를 이어 가던 강현우가 희주의 등 뒤로 손을 집어넣더니 소파에서부터 높이 들어 올렸다. 위로 부웅 떠오르는 몸에 놀란 희주가 파드득 떨며 매달렸다.

강현우는 희주의 귓가에 입술을 묻고, 말랑한 귓불을 입술로 짓이겼다. 물기 없이 보드라웠던 귓불이 금세 타액으로 척척해졌다.

어렵지 않게 침실 문을 연 그가 눈앞에 보이는 침대 위로 희주를 내려 눕혔다. 거실에서보다도 더 짙게 느껴지는 희주의 페로몬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다른 누구의 흔적이 없는 곳에 자신이 침범해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 오싹한 쾌감이 등을 내달렸다. 이곳만 해도 이 정도인데, 제 침대로 데려다가 눕히면 어떨지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데리고 살면 어떨까. 아니면 이 집에 자신이 들어와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강현우는 무릎 사이에 희주를 가두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욕이 절로 나오는 광경을 계속해서 눈에 담았다. 희주가 숨을 마시고 내쉴 때마다 작은 몸이 위태롭게 들썩거렸다. 방금까지 제가 들춰 놨던 티셔츠는 가슴 아래까지 말려 올라가 있고, 제 손이 닿았던 곳마다 마킹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희주 씨.”

“네에…….”

정신을 못 차리네.

극과 극의 형질인 탓일까. 열성 오메가인 희주는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어찌할 틈도 없이 쉽게 절여졌다. 드러난 모든 곳에 흥분으로 인한 홍조가 드문드문 올라와서는, 제 알파를 올려다보는 눈에 흥분감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알파의, 그것도 성애의 감정을 품은 상대 알파의 페로몬은 그에게 최음제나 다름없었다.

강현우는 그대로 허리를 숙여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젖어 반들거리는 입술이 먼저 벌어지더니 혀가 빼꼼 마중을 나왔다. 그것이 귀여워 쪽 소리를 내면서 그것을 한번 빨아 주었다. 페로몬에 정신을 못 차리는 와중에도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지, 흐려졌던 눈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나랑 이러고 싶었던 거 맞죠.”

희주는 숨을 새액새액 내쉬기만 할 뿐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데에서 고집이 인 강현우는 모르는 척, 슬그머니 페로몬을 풀었다. 그러자 희주의 허리가 크게 들썩였다.

몰랐던 성감이 쭈뼛쭈뼛 살아나는 느낌은 여태 이렇다 한 경험이 없는 희주에게는 매우 생경한 감각이었다. 홀로 상상할 때와는 전혀 다른 흥분감이었다. 배 속이 저릿해지고 다리 사이가 조여들었다. 얼른 강현우가 입을 맞춰 주고 저를 만져 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손을 뻗어 보아도 강현우는 원하는 것을 주지 않았다.

“응? 대답해 줘야죠.”

결국 희주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얼핏 울먹임이 섞여 든 목소리로 긍정의 답을 웅얼거린다. 강현우는 묵직한 숨을 후우, 내쉬며 목을 답답하게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 내렸다.

매일같이 입고 벗는 와이셔츠가 이렇게 거추장스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강현우는 와이셔츠를 성급하게 벗어 던지며, 그 와중에도 희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희주 역시 페로몬과 흥분에 들뜬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상대에게서 쉬이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쳐다보면…….”

“아……!”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강현우가 희주를 덮쳤다. 다가오는 얼굴이 사선으로 틀어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입술을 덮었다. 희주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를 반겼다. 바스락거리는 옷깃이 아닌 매끄럽고 탄탄한 살결이 손에 감기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서로를 더듬는 손길이 점차 성급해졌다. 강현우는 희주의 티셔츠를 턱 밑까지 밀어 올리고, 아직 손이 닿지 않은 반대쪽 유두를 쓸어내렸다. 말랑거리는 것을 문지르자 희주가 얽고 있던 혀를 뒤로 빼며 앓듯이 신음했다. 마치 제 가슴을 방어라도 하는 듯한, 그러나 전혀 소용없는 몸짓이었다.

젖은 입술을 떼어 낸 강현우는 희주의 옷을 완전히 벗기고, 할딱거리는 숨을 내쉬는 입술에 손가락을 물렸다. 작고 통통한 입술에 고작 엄지손가락 하나를 물렸을 뿐인데 정장 바지 안에 갇혀 있는 성기에 재차 힘이 들어갔다.

“아, 으응, 읏!”

흰 살갗과 큰 차이가 없는 분홍빛 유륜에 비해, 몇 번 만져진 유두는 보다 더 짙은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강현우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그것을 입에 담았다. 입술로 유륜 전체를 덮고, 혀끝에 부딪히는 알갱이를 힘 있게 문질렀다.

입에 손가락을 물려 준 보람도 없이 희주의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 찌릿거리는 쾌감이 손끝으로, 발끝으로 쭉 뻗어 나갔다. 희주는 이불을 잡아 뜯다가, 게걸스럽게 가슴을 빠느라 바쁜 강현우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마치 더 해 달라는 것 같은 몸짓에 강현우는 있는 대로 가슴살을 쭉쭉 빨아 댔다.

“읏, 이상해요. 아, 아…….”

“괜찮아요.”

타액으로 젖어 반들거리는 유두에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고, 살집이 적은 허리와 배에도 자잘한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그사이 단단한 무릎이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힘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다리는 손쉽게 양옆으로 활짝 벌어졌다. 강현우는 희주의 입술 안쪽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면서 아직까지 정갈하게 잠겨 있는 바지 지퍼를 풀어 헤쳐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으으응…….”

벌써부터 축축하게 젖은 속옷이 만져졌다. 미끌거리는 부분을 만지작거리자 희주가 발발 떨면서 무릎을 가슴 쪽으로 당기려 했다. 아직 제대로 한 것도 없는데 벌써부터 흥분해 있는 모습을 보니, 지금 당장 엉망으로 만들고 싶다는 파괴적인 소유욕에 이가 까드득 깨물렸다.

몇 번의 손짓만으로 희주는 나체가 되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몸에, 정확히는 성기에 꽂히는 시선이 너무도 부끄러워 희주는 두 손을 허우적거렸다. 다리를 오므리고 싶어도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분홍빛 유두보다 더 짙은 색의 성기는 휜 곳 없이 곧게 뻗어 그 끝이 반들거렸다. 시선을 느낀 성기가 위아래로 꺼떡이는 것을 보고 있자니 정말…….

“빨고 싶은데.”

감상이자 욕구였다. 정말 빨고 싶게 생긴 좆이라고, 그래서 빨고 싶다고, 강현우는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으로만 그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 안 돼요!”

“안 돼요?”

“네, 네……. 그, 그건… 조금…….”

“음…….”

하지만 빨고 싶다는 제 말에 기절할 듯 질려 버린 희주의 표정을 보니, 억지로 했다가는 일을 치르기도 전에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아, 안 돼요…….”

발랑 드러난 성기를 보면서 척척 입맛을 다시는 표정은 뒷머리가 쭈뼛 솟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말 자체도 충격이었지만, 그런 말을 한 화자가 강현우여서 희주의 정신이 더욱 멍해졌다. 하지만 강현우는 멍하게 있을 틈도 주지 않았다.

“알겠어요. 안 되면, 뭐… 다음에 하면 되니까.”

“네에? 아, 흐읏…….”

반박할 겨를도 없이 뜨거운 손에 성기가 붙들렸다. 예민한 부위를 붙들리자 몸이 절로 안으로 굽었다.

“이것도 안 돼요?”

“하으, 응……. 처, 천천히… 읏!”

허락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손이 막무가내로 움직였다. 천천히 해 달라는 목소리는 헐떡이는 신음에 묻혀 버렸다.

진작 귀두 끝을 적시고 있던 액체는 강현우의 시선을 느꼈을 때 더 솟아 나와 기둥까지 흘러내린 후였다. 기둥을 단단하게 붙든 손이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미끈한 액체가 윤활제처럼 성기 전체에 펴 발렸다. 기둥만 쓸어내리던 손은 투명한 액이 퐁퐁 솟아 나오는 귀두를 덮어 둥글리듯 매만지는가 하면, 움푹 들어간 소대를 파고들 듯 쥐어짜기도 했다.

희주는 본능적으로 쾌락을 좇아 허리를 들썩거렸다. 어딘가에 박는다기보다는 다른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움직임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이미 적신 앞쪽과 마찬가지로 뒤쪽이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것이 느껴졌다.

“흐으, 처, 천, 으응, 음, 앗…….”

“힘 풀어요.”

들썩거리는 희주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강현우는 희주의 입 안을 헤집던 손을 성기 아래쪽으로 내렸다. 손가락을 적셨던 타액은 이미 반쯤 메말라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직격으로 받았으니 구멍은 충분히 젖었을 것이 분명했다.

동그랗게 올라붙은 음낭 아래 회음부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봉제선처럼 길게 선이 그어진 살갗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자, 화들짝 놀란 희주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가장 은밀하게 숨어 있는 부위인 만큼 본능적인 물음이 불쑥 튀어 나갔다.

“읏, 네? 아, 흐윽, 흐……. 뭐, 뭐예요?”

“손가락이요.”

“흐, 으읏……!”

담담한 말투와는 달리 구멍 위를 쓰다듬는 손가락은 거침없었다. 오밀조밀한 주름 위로 새어 나온 애액이 한가득이었다. 미끄덩한 감촉에 시선만 내려서 보니, 구멍을 스쳤던 손가락이 애액으로 흥건했다.

확인을 마친 강현우는 망설이지 않고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속에서부터 애액을 뿜어 내는 구멍은 손가락을 받아들이는 데 전혀 막힘이 없었다. 미끄덩하게 파고드는 감각에 두 사람 모두의 목덜미가 오싹거렸다.

내벽을 더듬듯이 손가락이 움직였다. 다리 사이에 위치한 두 손이 움직일 때마다 앞이고 뒤고 할 것 없이 질척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수치심에 희주가 발발 떨며 입술을 꾹 깨물었지만 뒤쪽을 파고든 손가락이 하나둘씩 늘어갈수록 입술을 깨물 힘조차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쾌락이 무섭도록 쏟아졌다. 전립선을 찾아 자극하는 손짓이 무척이나 정확했다. 처음 손가락이 뒤쪽을 파고들 때 느껴졌던 미약한 통증은 온데간데없고, 이제 남은 것은 쾌락뿐이었다.

“아, 아……! 으읏, 앗, 아! 그, 그만, 아……!”

성기를 쥐어짜는 손길이 빨라지고, 구멍을 헤집는 손가락이 파고드는 깊이 역시 계속해서 깊어져만 갔다. 마디 굵은 손가락이 구멍 안쪽의 어딘가를 다시 한번 정확하게 짚어 내는 순간, 벼락과도 같은 쾌락이 온몸을 쿵 내리찧었다. 동시에 귀두 끝에서 짙은 정액이 후드득 뿜어져 나왔다. 강현우가 끝까지 손을 치우지 않은 탓에 희주는 끝의 끝까지 신음하고, 몸부림쳤다.

“읏, 읍… 하아…….”

사출의 순간 바짝 힘이 들어갔던 몸이 느슨하게 늘어졌다. 아직 가시지 않은 채로 잘게 남아 있는 쾌감에 희주가 가느다란 숨을 겨우겨우 내쉬었다. 방금 뭘 한 거지? 온몸이 심장이 된 듯한 커다란 박동 탓에 생각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신기하네.”

강현우는 양손에 끈적하게 묻은 체액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주먹을 쥐듯 움켰다. 각기 투명도가 다른 액체가 손목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코끝이 절로 찡그려질 정도로 비릿한 냄새였다. 그런데 그 비릿함 속에 희주의 페로몬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것이 놀랍고 신기했다.

몇 번이나 주먹을 움켰다 펴기를 반복하던 강현우는 시트 위에 아무렇게 벗어 둔 옷가지 중, 제 와이셔츠를 가져다가 대충 손을 닦아 냈다. 탈력감에 누워 있던 희주가 보고 놀라 눈을 크게 뜨는 것이 보였지만, 옷이야 새로 사면 그만이었다.

“읏…….”

금방 건조해진 손이 벌어진 다리를 부드럽게 훑었다. 단순한 쓰다듦에도 희주는 목을 울려 신음했다.

희주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은 강현우가 바지 중심을 움켜쥐었다. 한쪽 허벅지가 두툼했다. 이미 한참 전부터 힘이 들어가 있던 성기는 속옷 안에서부터 무섭게 꺼떡거리고 있었다.

스스로 성기를 붙여 잡는 것도 모자라 수음하듯 주물거리는 노골적인 손놀림에 희주의 뺨이 더욱 발긋해졌다. 차마 오래 쳐다볼 수가 없어 머뭇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희주 씨.”

흥분에 겨워 짓눌린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안에 들어가고 싶어요.”

당장 자신을 원한다는 목소리는 뜨겁기 그지없었다.

그 뒤로 다른 말이 따라붙지 않았음에도 마치 제 허락을 갈구하는 듯했다. 희주는 부끄러워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미 한 번 사정한 이후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나 있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그를 원하고 있는 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수줍지만 확실한 대답에, 조급함이 번지는 와중에도 강현우의 입가에 희주가 좋아하는 그 다정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여유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무서우리만치 표정을 굳힌 강현우는 제 버클에 손을 댔다. 부끄러운 듯 계속해서 다른 곳만 바라보는 희주를 올곧게 내려다보는 채였다. 꺾일 틈이 없는 긴장감 속에서 철컥, 하고 버클 풀리는 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희주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손가락만 꼼질거렸다. 뭘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희주 씨는 가만히 있어도 돼요.”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속으로만 생각하던 망설임에 대한 답이 주어지자 놀란 희주가 번쩍 시선을 들었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마침 마저 지퍼를 내린 강현우가 속옷 안에서 잔뜩 발기한 성기를 꺼냈다. 시선이 절로 아래로 내려갔다. 희주의 시선이 닿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크기를 키운 성기가 강현우의 배꼽 밑에서 흉흉하게 꺼떡거렸다. 여차하면 배를 철썩 치기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강현우가 흥분했음을 여실히 보여 주는 성기는 흉흉함 그 자체였다. 경험이 없는 희주의 눈으로도 심상치 않은 크기임이 직감될 만큼. 아무리 제가 오메가라고 하더라도 이걸 온전히 받아 낼 수 있을지 의문이 앞섰다.

더불어 희주를 당황시킨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하아…….”

일순 강현우의 손이 성기로 향했다. 성기를 쥐고 가볍게 쓸어내린 그의 입에서 긴 숨이 터져 나왔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당황한 희주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주저하며 강현우를 올려다보았다. 제 다리 사이에서 성기를 드러낸 채 수음하는 그를 보는 것은, 제가 알몸이 되는 것만큼이나 부끄러운 일이었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강현우의 시선이었다. 희주의 가까이에 무릎을 대고 선 강현우는 잔뜩 헤쳐진 버클 사이로 튀어나온 성기를 쥐고 흔드는 동안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당황하여 붉어진 얼굴을 가만히 보는가 하면, 슬쩍 붓기 시작한 유두와 희고 판판한 배, 그 아래로 축축하게 젖어 힘을 잃은 성기를 뚫어져라 보기도 했다.

기분이 여간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제 몸을 어루만지던 손으로 성기를 주무르는 걸 보고 있자니 남이 수음하는 것을 보는 이상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고, 시선을 피해 강현우의 얼굴을 보자니 당장이라도 저를 삼킬 듯한 눈빛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읏……. 희주 씨.”

그렇다고 눈을 감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눈을 감자마자 곁에서 터져 나오는 강현우의 숨김없는 신음 탓에 희주의 목덜미가 더욱 홧홧해졌다.

행위가 계속될수록 슥슥 성기를 문지르는 소리에 축축함이 더해졌다. 한 번 사정한 이후로 본래의 크기로 되돌아갔던 희주의 성기에도 점차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얕게나마 쑤셔졌던 뒤쪽에서도 울컥거리며 무언가가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져, 희주는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걸 보는 강현우의 눈매가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저, 그, 그만…….”

누워 있기만 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한다면서 통 하는 것이 없으니 안달이 나는 건 이쪽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희주가 결심한 듯 잘근잘근 씹기만 하던 입술을 달싹였다.

“왜요, 희주 씨.”

“현우 씨가 너무…….”

“내가 너무?”

“너무 야해서…….”

기어들어 갈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가쁜 숨을 토해 내던 강현우가 픽 웃었다. 희주는 뾰족해진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웃을 여유도 있나 보지? 이런 삐딱한 생각이 들었다.

“안 보채도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보, 보채다니요.”

“얼른 넣어 달라고 보채는 거잖아요, 지금.”

내가 언제 보챘어요? 새된 대꾸가 튀어 나가지는 않았지만 희주의 눈썹이 억울한 듯 팔 자를 그렸다.

“세워야 넣죠.”

“……네?”

뿌리에서부터 선단까지 가볍게 훑은 강현우가 드디어 손을 떼어 냈다. 무의식적으로 성기를 쳐다봤던 희주는 당연한 듯 뱉어지는 강현우의 말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벌렸다.

“아직 덜 섰는데 어떻게 넣어요.”

깜빡깜빡, 이해가 덜 된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의 말이 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 말인즉슨, 저를 놀리려고 그런 짓을 벌인 게 아니라 아직 덜… 발기된 거라서 그런 짓을 했다는…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어쩐지 벙찐 것 같은 희주를 보며 웃음 지은 강현우는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네모난 반지갑에서 콘돔을 꺼낼 때쯤이 되어서야 희주의 시선이 따라왔다. 찌익. 대충 모서리를 입에 물고 포장을 뜯은 강현우가 그 안에서 콘돔을 꺼냈다. 왜 콘돔을 가지고 다니는 거냐는 의문이 채 들기도 전에, 거대한 콘돔이 향하는 곳을 본 희주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튀어 나갔다.

“저, 그, 그거 안 들어갈 것 같아요!”

정말 거짓말 안 하고 성교육 시간에 구경했던 콘돔보다 지름이 더 컸다. 주먹이라도 들어갈 것 같은 사이즈란 말이다. 그런 콘돔에 강현우의 성기가 딱 맞게 들어가는 걸 눈앞에서 목격하니 지레 겁먹은 숨이 목뒤로 넘어갔다. 분명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언제 이렇게 더 커진 건지 모르겠다.

“넣어 달라고 보챈 건 희주 씨잖아요?”

“내, 내가 언제… 아…….”

강현우는 겁을 먹고 좁아진 다리 사이를 벌리고는 금세 꽉 다물린 입구 위로 다시 한번 손가락을 가져갔다. 반박을 하려던 희주의 입에서 간지러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쾌감은 다른 문제였다.

가볍게 손가락을 대고 문지르자 몽글몽글 맺혀 있던 애액이 주변으로 얇게 문질러졌다. 아주 살짝 힘을 주었을 뿐인데 안으로 푹 박히고 마는 손가락에 강현우의 시선에 날이 섰다. 부드럽고 미끄러운 내벽이 아프도록 조여 왔다. 손가락 두 개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으응! 응…….”

희주의 신음성이 커졌던 곳 주변으로 손끝에 힘을 주었다. 더는 들어갈 여유가 없겠다 싶던 와중, 희주의 입에서 간지러운 신음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손가락을 물고 있던 입구가 부드럽게 늘어났다. 강현우는 희주의 반응을 살피며 신중하게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어느덧 희주의 엉덩이는 반쯤 위로 띄워진 채, 두 허벅지는 강현우의 허벅지 위에 얹어져 있었다.

찌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투명한 애액이 흘러나오는 구멍을 멍해진 눈으로 내려다보던 강현우가 느릿하게 손가락을 빼냈다. 손가락 세 개도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언제까지고 손가락만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됐어요.”

“흐……. 뭐, 뭐…….”

뭐가 됐냐고 묻는 건지, 아니면 아래에 닿는 것이 뭐냐고 묻는 건지 모를 질문을 가볍게 무시한 강현우는 꺼떡이는 성기를 붙잡고 벌어져 있는 입구에 가져다 댔다. 주름을 세기라도 하듯 둥그런 귀두를 입구에 대고 문지르자, 느낌이 생경한지 희주의 얼굴이 울먹울먹 일그러졌다. 아직 눈물은 고이지 않았지만, 곧 그의 눈망울이 축축해질 것을 상상하니 뒷덜미가 오싹했다.

“아, 흐윽……!”

고작 귀두만 넣은 것뿐인데도 희주의 반응은 심상치 않았다. 아직 쾌감보다는 고통이 앞서는지, 새카만 동공이 크게 확장되면서 새된 비명이 방 안을 울렸다. 반사적으로 구멍이 확 좁아진 까닭에, 강현우 역시 미간을 좁힌 채로 신음을 삼켜야 했다.

시트를 부여잡고 있던 손이 강현우의 팔을 더듬더듬 타고 올라오는가 싶더니 어깨를 확 끌어안았다. 짧게 바짝 깎은 둥그런 손톱이 다소 날카롭게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강현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희주의 등 뒤로 손을 집어넣어 그의 몸을 받쳐 안았다.

“으……. 아, 아파요…….”

“희주 씨, 힘… 풀어요.”

실수로 혀를 씹기라도 할까, 고통에 헐떡이는 입술에 제 입술을 비비고 뺨과 귓불 할 것 없이 지분거렸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고이다 못해 뾰족한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강현우는 어쩐지 미안한 마음에 희주를 품에 안고 연신 입을 맞추면서 달래고 또 달랬다.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한 목덜미에 혀를 내어 핥아 주고, 살짝 괴롭히다 말았던 유두를 잇새에 끼고 아프지 않게 잘근잘근 씹어 주기도 했다.

그 노력이 어느 정도 통했는지, 우는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헐떡이던 희주에게서 물기 어린 신음이 나옴과 동시에 빳빳하게 굳어 있던 몸에서도 서서히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아아……! 흐, 흐으…….”

희주를 받쳐 안은 손에 힘을 준 강현우가 순간적으로 느슨해진 구멍 안으로 성기를 박아 넣었다. 동시에 페로몬을 풀자, 딱딱했던 몸이 녹아내릴 듯 부드러워지며 강현우에게 매달리다시피 안겨 왔다. 희주는 삽입으로 인한 통증도 금세 잊고,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녹진한 숨을 헐떡거렸다.

열성 인자들은 타인의 페로몬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베타에 가까운 모습도 보이지만, 때때로 우성 페로몬에는 일반 알파나 오메가와 다름없이 반응하기도 했다. 우성인 데다 감정적으로 동화되어 있는 상대의 페로몬이기까지 하니, 희주가 이토록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흐읏, 으, 흐으응…….”

희주는 울먹이며 맞닿은 살갗에 뺨을 마구 문질렀다. 안쪽이 어떻게 된 것만 같은 느낌이었으나, 일단 지금은 심리적인 안정감과 육체적 쾌락을 주는 페로몬을 쫓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희주 씨…….”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자극받은 페로몬 샘이 쉼 없이 페로몬을 뿜어 댔다. 강현우는 나지막이 희주의 이름을 부르며 귓등과 목덜미에 코끝을 비볐다. 아프도록 꽉 조여 오던 내벽이었건만, 페로몬을 쏟자 적당한 압박감으로 성기를 주무르고 있었다.

이대로도 분명 좋지만……. 꽉 짜인 근육이 화난 듯 연신 꿈틀거렸다. 덩달아 벌어진 입술 틈으로 흥분에 젖어 씨근거리는 숨이 터져 나왔다. 알파의, 남자의 본능이 더한 쾌감을 원했다.

“미안한데… 더는 못 기다릴 것 같아요.”

“……으응? 흐아, 자, 잠……!”

희주에게 바짝 몸을 붙이고 있던 강현우가 허리를 뒤로 물렸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빠져나가는 성기를 따라 내벽이 덩달아 밖으로 딸려 나오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 같은 느낌을 받은 건 희주도 마찬가지였다. 느릿하게 빠져나간 터라 그 느낌이 무척이나 생생했다.

“하앗, 아!”

달달 떨리는 몸을 진정시킬 틈도 없이 빠져나갔던 성기가 몸 안을 강하게 찌르며 들어왔다. 강현우에게 성기와 구멍을 동시에 내줬을 때 느꼈던 감각과 엇비슷한 감각이 찌르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희주는 저도 모르게 강현우를 밀어내면서 몸 안에 들어와 있는 성기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강현우가 더 빨랐다. 강현우는 제 품을 벗어나려는 희주를 바투 잡아당기며 허리를 뒤로 물리고, 쳐올리기를 반복했다. 의도하지 않은 삽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뭉툭한 귀두 끝은 희주가 느끼는 곳을 단숨에 찔러 올렸다.

“흐응, 흣, 혀, 현… 현우 씨, 흐윽, 앗!”

희주는 울먹이며 강현우의 이름을 연신 불러 댔다. 강현우의 허리 짓에 따라 희주의 몸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몸에 힘을 주는 방법을 까먹은 듯했다. 강현우의 허리에 감겨 있던 다리가 땀에 미끄러져 아래로 흘러내리고, 다물리는가 하면 다시 벌어지는 입술에서는 부끄러운 소리가 마구잡이로 튀어 나갔다.

불현듯 몸의 어딘가가 이상해지는 것 같다는 두려움이 일어 우는 소리가 나오다가도, 단숨에 안을 파고든 성기 끝이 어딘가를 찌르기만 하면 두려움은커녕 쾌감에 젖은 신음이 나오기 일쑤였다.

“희주 씨, 하아……. 희주 씨.”

“아, 흐으, 응, 으응!”

고개를 뒤로 물린 강현우가 희주와 눈을 마주했다. 마치 부름에 응답이라도 하는 것 같은 신음에 웃음이 삐져나오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땀에 젖은 새카만 머리카락과 불긋하게 달아오른 뺨, 이를 세웠던 상체 곳곳에 붉게 남아 있는 자국들이 눈에 들어왔다. 곧이어 신음 속에 섞여 있는 이름에 이끌려 시선을 들어 올리면, 쾌감에 잔뜩 흐려진 눈이 오롯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맹목적인 시선은 가히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강현우는 거친 욕설을 씹어 삼키기 위해 희주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짧은 호흡으로 쏟아지던 신음이 강현우의 입 안으로 먹히듯 사라졌다. 조그만 혀끝을 휘어 감아 머금자, 힘없이 늘어져 있던 혀가 호응하듯 문질러 왔다. 거칠어진 호흡이 서로의 뺨에서 뜨겁게 부서졌다.

“아……. 희주 씨.”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쾌감이 허리 짓을 따라 온몸을 내달렸다. 강현우는 흐트러진 눈으로 희주를 내려다보았다.

“흣, 그, 그만, 앗, 아! 흐응, 읏……!”

“좋아해요, 희주 씨, 내가…….”

자꾸만 아래로 미끄러지는 희주의 엉덩이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강현우의 치골이 통통하게 살이 오른 엉덩이를 강하게 쳐 댈 때마다 땀에 젖은 살갗이 철썩, 하고 야한 소리를 쏟아 냈다.

희주는 할 수만 있다면 귀를 막고 싶었다. 단숨에 극점으로 끌어 올려진 오감이 모든 자극을 과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중 다른 감각을 차치하면서까지 화살처럼 꽂히는 말에, 온통 신음만 뱉어 대던 입술이 가물가물 벌어졌다.

“좋아… 해요, 아, 흑……! 아, 아!”

그 말이 기폭제라도 된 듯, 미끄러지듯 들어오던 성기가 난폭하게 희주의 몸을 꿰뚫기 시작했다. 도톰하게 부어오른 내벽이 계속되는 마찰에도 굴하지 않고 성기에 찰박찰박 달라붙었다. 이미 피가 한껏 쏠려 통통해진 성기는 강현우의 단단한 복근에 쓸려 끈적한 선액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강현우의 어깨를 더듬는 희주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 허리 아래에서부터 시작된 쾌감이 머리끝까지, 그리고 발끝까지 계속해서 퍼져 나갔다.

“흐윽, 아, 현우, 읏, 안, 돼, 아. 아아……!”

맞닿은 배 사이로 들어온 강현우의 손이 희주의 성기를 부여잡았다. 강현우는 매끈한 기둥을 주무르고, 짙은 색으로 익은 귀두를 손바닥으로 덮어 문질렀다. 단숨에 차오른 사정감에 할딱이던 희주가 교성을 지르며 강현우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희주의 성기 끝에서 하얀 정액이 핏, 핏 터져 나왔다. 그중 일부는 여태 희주의 성기를 쥐어짜듯 문지르는 강현우의 손에, 또 다른 일부는 두 사람의 배 위로 흩뿌려졌다. 하얗게 질린 발끝이 안으로 곱아들고, 무섭도록 치달은 절정에 눈앞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사정과 동시에 좁아진 내벽을 파고든 강현우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희주의 위로 무너졌다. 이어져 있는 접합부에서부터 누구의 것인지 모를 박동이 쿵, 쿵 온몸을 울렸다.

“아…….”

이번에는 홀로 맞는 절정이 아닌, 상대와 함께 맞는 절정이었다. 나른하게 퍼지는 쾌감을 멍해진 정신으로 느끼던 희주는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자신만큼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맞닿은 가슴에서부터 고스란히 저에게 전해져 오고 있었다.

“혹시 아팠어요?”

오해라도 한 듯, 터질 듯이 희주를 안고 있던 강현우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깔끔했던 머리카락이 언제 그랬냐는 듯 이마 위로 쏟아져 내려와 있고, 고여 있던 땀이 뺨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저 못지않게 흐트러져 있는 꼴을 보니, 첫 삽입 직후 죽을 만큼 아팠던 것도 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웃고 싶었지만 입꼬리를 올리는 것마저 힘이 들어 순한 눈으로 그저 고개만 내저었다.

다행이라며 안도의 숨을 내쉰 강현우가 천천히 몸을 떨어뜨렸다. 안을 빠듯하게 채우고 있던 성기가 내벽을 긁으며 스르륵 밖으로 빠져나왔다. 소름끼치는 감각에 희주가 바르르 허리를 떨자, 괜찮다며 토닥이는 부드러운 손길이 당연하게 이어졌다.

정액이 찬 콘돔을 눈에 보이는 쓰레기통에 대충 던져 넣은 강현우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어 앉아, 희주를 가뿐하게 제 위로 들어 올렸다. 힘없이 그의 위로 늘어진 희주가 강현우의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땀 때문에 미끌거리기는 했지만 딱히 개의치 않았다.

“혹시 많이 배고파요?”

문득 강현우가 배가 고프냐고 물어 왔다. 왜인지 기시감이 드는 물음에 희주가 쉽게 답을 꺼내지 못하자, 은근슬쩍 엉덩이 위로 얹어진 손이 부어 있는 입구를 꾸욱 누르고는 당장이라도 파고들 듯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

놀란 희주가 흠칫 다리 사이를 좁히자, 금방 포기하고 떨어진 손이 이번에는 말랑한 허벅지살을 조물조물 만져 댔다. 아직 가시지 않은 쾌감이 피부 아래서 간질간질 희주를 자극했다.

“그럼 저녁은 조금만 더 이따가 먹을까요?”

쪽. 강현우가 쪼아 대듯 입을 맞춰 왔다. 대놓고 유혹하는 알파 페로몬이 허벅지를 휘어 감았다. 저를 절정으로 몰아붙이던 허리 짓은 거칠었던 것 같은데, 유혹은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 하루 정도 저녁 조금 늦게 먹는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이미 한 차례 유혹에 넘어간 바 있는 희주는 나른한 숨을 내쉬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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