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건 사고 없이 무사히 지나가게만 해 달라는 교사들의 바람은 오래 가지 못했다. 위험하니 베란다 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말라는 주의사항은 리조트에 들어간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었고, 이튿날에는 관광 코스를 돌던 중 소지품을 잃어버렸다는 아이들이 속출해 이를 수습하느라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다친 아이들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멀미 때문에 약을 타 먹은 아이들이 몇 있기는 했지만, 한눈을 팔다가 넘어진다거나 어딘가에 부딪혀 다쳐 오는 아이들은 없었다.
어찌 됐건 수학여행 첫날부터 날씨는 청량하니 좋았고, 어딜 가서 뭘 하든 즐거운 것투성이라 아이들은 하루하루 지날수록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다가옴에 아쉬워했다. 교사들은 오늘도 무사히 넘어갔다며 안도하거나, 얼른 이 기나긴 일정이 끝이 나기를 바랄 뿐이었지만.
“…….”
자정이 넘은 시각, 어제에 이어 오늘 하루도 신나게 놀다가 돌아온 아이들은 잠에 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희주는 한 손에 새빨간 경광봉을 하나 쥔 채 슬리퍼를 질질 끌며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사들까지 잠들어 있는 시간에 홀로 깨어 있는 이유는,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한 순찰 당번이었기 때문이었다.
피곤해 죽겠네. 희주는 크게 기지개를 켜며 쩌억 하품을 했다. 하루 종일 아이들을 인솔하느라 온 기운이 쭉 빠져 있는 상태였다. 이동할 때마다 누락 인원이 없는지 파악하고, 보고하고, 또 앞장서서 인솔하기를 수 시간 반복했더니 피곤함에 몇 번씩이고 하품이 쩍쩍 나왔다.
한두 바퀴 정도 더 돈 다음 앉아서 쉴 생각이었다. 희주는 꼭 산책이라도 하듯 느긋한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다들 피곤했던 모양인지 떠들다가 걸린 몇 개 방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소란 없이 조용히 지나칠 수 있었다.
다짐했던 대로 복도를 마저 돈 희주는 반대쪽 복도 끝이 훤히 보이는 자리에 털썩 등을 기대고 앉았다. 딱딱한 타일 대신 푹신한 카펫을 쭉 깔아 둔 터라 맨바닥에 주저앉았음에도 딱히 불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고…….”
희주는 골골대는 소리를 하며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단단히 뭉친 어깨를 주무르면서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내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훌쩍 지났고, 날짜는 그 다음 날로 넘어가 있었다.
“벌써…….”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희주는 등을 대고 앉은 벽에 뒤통수를 툭 기댔다. 멍하니 두 눈을 깜빡이며 올려다본 곳에는 은은한 주황 불빛을 뿜어내고 있는 매립 조명이 있었다. 꼭 빛무리가 진 달을 보는 듯했다.
고요한 새벽, 모두가 잠든 시간에 홀로 깨어 가만히 눈만 깜빡이고 있자니 텅 비어 있던 머릿속으로 상념이 마구 밀려왔다. 순서 없이 떠올라 여러 갈래로 나뉘었던 생각들은 종국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강현우에 대한 것이었다. 이 생각은 제주도에 도착한 날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루 종일 아이들을 인솔하랴 안전사고를 걱정하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와중에도, 숨 가쁘게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희주의 머릿속을 잠식한 건 강현우에 대한 생각이었다. 만약 너무 바빠서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면 밀린 일을 몰아 처리하기라도 하듯 아주 약간의 여유를 틈타 파도처럼 밀려왔다.
“…….”
어느 숙소에서 머무르는지, 강현우와의 통화에서 묻지 못한 말은 지금까지도 입술 안쪽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교사로서 일을 하러 온 것이지 단순히 여행을 온 것이 아닌 자신과, 마찬가지로 일 때문에 출장을 와 있는 강현우는 전혀 마주칠 일이 없다는 것을. 출발하기 전날, 강현우와 통화를 하면서 그가 머무르는 숙소를 묻지 않았던 것도 현실과 상상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서였다.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희주는 중간중간 긴장감이 느슨해질 때마다 우연하게 마주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럴 수 없다는 것에 실망했다. 하루에 몇 번씩이고 기대와 실망이 번갈아 가며 찾아왔다가 사라졌다. 심지어는 가벼운 우울감을 느끼기도 했다.
희주는 온종일 이 낯선 감정의 무게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 감정은 상당히 당혹스러웠으며 또 버거웠다.
희주는 메신저를 켜 여러 채팅방을 제치고 강현우의 이름을 눌러 보았다. 액정 왼편으로 일방적이기 짝이 없는 메시지 몇 개가 연달아 쌓여 있었다. 답은커녕 메시지 확인도 하지 않는 저에게 강현우가 보내온 메시지들이었다.
짬이 날 때마다 주고받았던 메시지들을 무감각한 눈으로 의미 없이 훑어 내렸다. 비즈니스 파트너와 함께 골프장에 방문했다던 강현우는 주로 필드 사진을 보내왔다. 항상 보내오던 식사 사진도 빼놓지 않았다.
한 장 한 장, 강현우의 흔적을 찾아 유심히 들여다보던 희주는 저도 모르게 강현우의 프로필을 눌러 일전에 한번 본 적 있는 그의 스토리 사진을 찾아냈다. 흐린 화질 속 강현우를 또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이번에는 열한 자리 숫자를 화면에 띄우고 머뭇거렸다.
어쩌고 싶은 건지를 도통 모르겠다. 아니, 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이러고 있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희주는 허공에 띄운 손을 꾹 움켜쥐었다.
새벽 1시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그가 이 시간에 깨어 있을 리가 없었다. 깨어 있다 한들 이 시간에 전화를 거는 건 상식적으로 민폐인 행동이었다.
한참을 휴대폰만 만지작대던 희주는 결국 열한 자리 숫자를 화면에서 치워 버렸다. 대신 답장 타이밍이 몇 시간이나 지나 버린 메시지에 답을 보내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message*i/
이제 막 일정 다 끝나고 숙소 들어왔어요.
저녁은 맛있게 드셨나요? 시간이 늦어서
주무시고 있겠네요. 좋은 밤 되세요.^^
혹시 곤히 잠들어 있을 상대를 배려해 하고 싶은 말들을 말풍선 하나에 전부 담았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메시지 옆에 붙어 있던 숫자 1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희주는 놀라 벽에 기댔던 상체를 떼어 냈다. 졸음을 가득 담고 있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혹시 잘못 봤나 싶어 다시 한번 들여다보아도 현재 시각을 가리키는 숫자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짧은 메시지 하나가 액정에 찍혔다.
/message*you/
아직 안 잡니다.
그리고 이어진 또 하나의 말풍선이 방금 것을 위로 밀어냈다.
시간이 늦었는데 이제 주무시는 겁니까?
분명 단순한 메시지일 뿐인데 강현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생각지도 못한 답장을 받은 것에 놀란 희주는 답장을 보낼 생각도 못 하고 벙찐 채 휴대폰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메시지가 도착한 시간과 현재 시간은 정확히 일치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희주는 열린 문틈 사이로 삐져나온 누군가의 잠꼬대가 정신을 일깨워 줄 때까지 우뚝 굳은 채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message*i/
아니요.ㅠㅠ
다 자는데 저는 아직 못 자고 있어요…….
현우 씨는 왜 안 주무세요?
설마 제가 깨운 건 아니죠……?
메시지는 보내는 족족 읽혔다. 희주는 복잡한 심정으로 휴대폰을 꼭 붙들었다. 일단 연락이 닿았다는 사실에 기분은 좋았지만, 출장까지 와 고생 중인 사람을 깨웠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휴대폰을 내려다보는 말간 얼굴에는 깊은 근심이 서려 있었다.
희주는 입술을 감쳐문 채 멈춘 채팅창을 초조하게 응시했다. 이윽고 새 메시지가 떠올랐을 때, 그는 숨을 탁 터트렸다. 그 짧은 새 얼마나 애가 탔는지 숨 쉬는 것도 잊었다.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며 시선을 내리는데, 내용을 확인한 순간 너무나도 놀라 하마터면 제 혀를 꽉 깨물어 버릴 뻔했다.
/message*you/
음
괜찮으면 잠깐 통화할래요?
간혹 사람들은 너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면 눈으로 직접 본 것을 부정하거나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읽기 어려운 외국어도 아닌데도 그 뜻이 곧바로 이해가 안 되는 느낌이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히 읽어 보려는데 쥐고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희주는 깜짝 놀라 몸을 움칠 튀겼다. 가슴께로 바짝 당긴 휴대폰을 떼어 내 슬쩍 확인하자 액정 위로 강현우의 이름이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복도가 유난히 조용한 까닭에 벨소리가 아닌 진동임에도 그 소리가 크게 울렸다. 희주는 소음을 조금이라도 막아 보고자 진동하는 휴대폰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침 눈에 들어온 것은 비상계단이었다.
“여, 여보세요?”
전화가 끊기기라도 할까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희주는 휴대폰을 귀로 가져다 대며 비상구 문을 어깨로 밀었다. 소리 없이 밀린 문 안쪽으로는 방금 연 것과 똑같이 생긴 두꺼운 철문이 하나 더 있었다. 혹여 통화하는 소리가 복도로 새어 나갈까 싶어 희주는 망설이지 않고 안쪽 문까지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늦게 받네요. 혹시 통화하기 어려운 상황이에요?
비상계단은 복도보다 훨씬 고요했지만, 공간 특성상 아주 작은 소리도 울림을 품고 큰 소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희주는 철문이 닫히면서 울리는 묵직한 소리에 어깨를 움츠렸다가, 휴대폰 안에서 흘러나오는 강현우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한 계단씩 아래로 내려갔다.
“아니요. 그런 상황은 아닌데… 지금은 괜찮아요.”
움직임을 감지한 조명이 환하게 켜졌다. 희주는 두어 계단 아래로 내려와 깨끗해 보이는 곳에 엉덩이를 대고 쪼그려 앉았다.
계단의 냉기가 얇은 트레이닝복 바지를 뚫고 맨살까지 전해졌다. 희주는 찬기를 피해 꾸물꾸물 엉덩이를 앞으로 당겼다.
―목소리가 울리는데. 지금 어디 나왔어요?
“비상계단이요. 안에서는 통화하기가 좀 그래서…….”
―아. 비상계단.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조용 말해도 울림이 그대로 휴대폰을 타고 넘어가는 듯했다. 그냥 잠깐 나가서 받을 걸 그랬나 싶었지만 완전히 자리를 비우기에는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 곧 생각을 관뒀다. 그러고는 잠시 잊고 있던 걱정을 조심스레 입 밖으로 내뱉어 보았다.
“저… 주무시는데 제가 깨운 건 아니죠?”
―네. 안 자고 있었어요.
“다행이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답장 보내는 것도 엄청 망설였거든요.”
―까딱하면 안 보냈을 수도 있겠네요. 난 희주 씨 답장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 이 시간까지요?”
―네.
언뜻 서운함이 비치는 말투에 희주는 당황해 눈을 빠르게 감았다 떴다. 이것도 농담인가? 생각을 마치자마자 낮게 깔린 웃음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건너왔다.
―지금 속으로 또 농담하네, 이러고 있었죠?
“시간이… 너무 늦었잖아요.”
―음. 안 했다는 말은 안 하네요.
“…….”
―농담으로 한 말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없는 말을 한 건 아니에요.
고작 목소리만 들리는 것뿐인데 강현우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지그시 턱을 괸 채로 저를 바라보던 얼굴이 그려졌다. 희주는 괜히 부끄러워져 시선을 피하는 사람처럼 슬며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다가 문득 강현우가 한 말을 곱씹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말은 농담이라는 걸까, 아니라는 걸까? 이런 의문이 부끄러움을 비집고 치고 나왔다. 한번 시작된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정말 이 시간까지 제 답장을 기다렸다는 건가? 그런데 왜 농담이라고 한 거지? 없는 말을 한 건 아니라는 건 뭐고?
―희주 씨 덕분에 싫은 자리 빠져나올 수 있었거든요.
싫은 자리? 희주는 여전히 의문투성이였다. 강현우가 부연하여 설명을 이어 갔다.
―뭐… 회식 같은 거라고 보면 되려나. 어차피 나오려고 한 자리기는 했는데, 희주 씨 덕에 더 빨리 나왔어요.
“회식을 이 시간까지요?”
―같이 있던 새, 아니……. 사람들이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어요.
희주는 그의 말을 쉬이 납득했다. 술을 제법 마실 줄 아는 자신도 회식은 끔찍하게도 싫어하는데, 술을 전혀 못 하는 강현우에게 회식이란 싫은 건 둘째 치고 가 봤자 의미도 없는 자리일 테였다.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었더라면 술도 못 마신다고 타박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나오고 싶었을까. 어쩐지 측은함이 밀려왔다. 듣고 보니 강현우의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한 마디로 제 연락이 구실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희주는 상상 속 강현우를 안쓰러워하느라 실제 강현우가 그 상냥한 목소리로 살벌하게 욕을 하려다가 겨우 말을 바꾼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것보다.
측은함에 잠겨 있던 희주는 꼭 그와 함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네?”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센서 등이 꺼진 비상계단은 어둠이 덮쳐 온 탓에 깜깜했다.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 하고 있었어요?
“아, 저요. 숙직이요. 여자애들만 있어서 사고 칠 걱정이 덜하긴 한데… 아무래도 아직 다 미성년자들이니까요.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라 선생님들끼리 돌아가면서 복도 한 번씩 돌기로 했거든요.”
―이 시간까지? 피곤하지 않겠어요?
“뭐, 오늘 하루만 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새벽 내내 서는 건 아니에요. 두어 시간 정도 하고, 이따가 다른 선생님이랑 교대해요. 그럼 아침까지 쭉 잘 수 있어요.”
희주는 슬쩍 휴대폰을 떼고 시간을 확인했다.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할까, 은근히 그의 신경은 철문 밖으로 뻗쳐 있었다. 이중문이어도 웬만한 큰소리는 들을 수 있겠지? 불안한 눈으로 철문을 힐끔거리던 희주는 제게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에 다시금 귀를 기울였다.
―생각해 보니까… 희주 씨는 수학여행 때문에라도 제주도는 몇 번 와 봤겠어요.
“아, 네. 제가 주로 2학년 담임을 맡는 편이라 수학여행 때문에 제주도는 거의 매년 한 번씩은 오는 것 같아요.”
―지겹지 않아요?
“음……. 사실 조금요. 수학여행 코스가 다 거기서 거기잖아요.”
―그렇겠네…….
후우. 짙은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
강현우의 한숨을 기점으로 두 사람 사이를 오가던 대화가 뚝 끊겨 갈 길을 잃었다. 수화기 너머는 정적뿐이었다. 눈이 동그래진 희주는 혹시 통화가 끊겼나 싶어 다시 한번 휴대폰을 떼어 냈다. 통화는 끊기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희주는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주어 바짝 귀를 붙였다.
어딘가에 몸을 기대기라도 한 듯, 힘겨운 듯한 숨이 넘어왔다. 먼저 말문을 연 건 강현우였다.
―사실, 희주 씨한테 고백할 게 있어요.
“어떤…….”
―술 못 마신다고 한 거요. 거짓말이에요. 마실 줄은 알아요. 아는데 안 마시는 거지.
“아……. 혹시 지금 술 드셨어요?”
―네. 많이는 아니고 조금.
아. 들으니 알 것 같았다. 강현우의 목소리에는 주의해서 듣지 않으면 모를 묘한 늘어짐이 있었다. 지금 이 시간까지 해산하지 않는 회식 자리라면 안 봐도 뻔했다. 마실 생각이 없는 이에게 한 잔만 마시라며 권하고, 또 권하는 인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딱히 탓할 것이 없었다. 굳이 탓을 하라면 강현우가 아니라 억지로 술을 권한 얼굴 모를 이였다. 제가 뭘 해도 지금 당장 강현우는 볼 수 없다는 것도 잊은 채, 희주는 이해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거 말고… 또 다른 거요.
또 다른 거?
―오늘… 아니, 어제… 그저껜가. 아무튼.
강현우는 짧게 횡설수설한 끝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안 와도 되는 출장이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만 출장이지, 그냥 접대예요. 적당히 기분 맞춰 주는 말 몇 마디 해 주고, 골프채 몇 번 휘둘러 주고, 술이랑 아부만 같이 오가는 그런 자리. 가끔 행동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사람 사서 더럽게 노는 부류들도 있어요. 전부터 이런 자리는 질색이라 이번에도 얼굴 비출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그런데 왜…….”
―그러게요. 내가 왜 왔을까.
말만 들으면 희주에게 묻는 듯했지만, 결국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이었다. 희주는 아무런 대답도 꺼내지 못하고 숨만 새액새액 내쉬었다.
오래지 않아 고민을 마친 강현우가 작게 웃었다. 꼭 가벼운 숨결 같은 웃음이었다.
―희주 씨가 간다니까 좀… 충동적으로?
못 볼 거 알고 있는데도요. 강현우는 낮은 목소리로 이어 속삭였다.
―그래서 내가 희주 씨 연락 기다렸나…….
휴대폰을 쥐고 있던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손에 들린 것이 자꾸만 미끄러질 것만 같았다. 희주는 휴대폰을 다른 손으로 바꿔 쥐었다. 축축해진 손을 바짓단에 슬슬 문질렀다. 센서가 예민한지 이 작은 움직임만으로 조명이 켜져 순식간에 사위가 밝아졌다.
―그런데 희주 씨 목소리 들으니까 확실히 알 것 같아요.
갑작스러운 빛의 자극에 희주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대기가 무섭게 강현우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보고 싶었나 봐요.
희주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무거운 짐처럼 자신을 짓눌렀던 감정을 떠올렸다. 찰나에 감정의 정의는 한 문장으로 귀결되었다.
저 역시, 그가 보고 싶었던 거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조금 민망해지려고 그러네. 투정을 부리듯 중얼거린 강현우가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의 나직한 웃음소리는 희주의 귓가는 물론이고 마음 한구석까지 간질이는 듯했다.
그러나 희주는 그의 투정을 듣고도 퍼뜩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속마음을 들킨 기분이다. 온종일 강현우에 대한 생각만 했던 것을 고스란히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부끄럽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모든 것이 다 그를 보고 싶어 하는 제 소망 때문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어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이상한 감정이었다. 그게 뭐라고. 사랑 고백을 들은 것도 아니고, 그저 보고 싶다는 말을 들은 것뿐인데 이렇게 감정이 요동쳐도 되는가 싶었다.
‘무슨 사랑 고백이야.’
진정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속으로 중얼거리던 희주는 무심코 떠올린 단어에 지레 놀라 입을 다물었다. 휴대폰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희주 씨?” 하고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도 희주는 입을 여는 대신 상체를 앞으로 숙여 곧게 세운 무릎에 가슴팍을 꾹 대고 눌렀다. 심장이 너무 세게 쿵쿵 뛰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혹시 나 지금 주정 부리는 것 같아요? 술 많이 안 마셨는데.
“아니, 아니요!”
두근거림 때문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한 것이 그에게 괜한 오해를 산 듯했다. 강현우의 물음에 희주는 아니라고 냅다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망각하고 내질러 버린 목소리가 뻥 뚫린 공간의 위아래로 끝없이 울려 퍼졌다. 이미 입 밖으로 낸 소리를 거둬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희주는 얼른 손바닥으로 입술을 덮었다.
―그렇게 크게 말 안 해도 다 알아들어요.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까 계속 목소리 들려 줘요.
“어떤…….”
―그냥 아무거나. 오늘 배 타고 어디 다녀왔다면서요. 거기 이야기나 좀 해 줄래요? 제주도 온 지 3일이나 됐는데 어디 간 곳이 없네.
아무 말이나 좋다던 강현우는 자연스럽게 주제를 던져 주었다.
희주는 낮의 기억을 더듬었다. 오늘 낮 일정 중에는 섬 관광이 하나 끼어 있었다. 정해진 코스를 따라 학생들을 이끌고 다녀온 곳이라 제아무리 설명해 봐야 큰 감흥을 이끌어내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제주도에 온 이후로 호텔과 골프장을 오간 것 외에 한 일이 없다던 강현우는 꽤 큰 흥미를 보였다.
강현우는 희주가 없는 실력을 발휘해 찍어 보낸 사진들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멋없는 소감에도 “절벽 사진 말하는 거죠?”라면서 “사진으로 봐도 멋있더라고요” 하고 공감했다. 이런 그의 태도는 희주의 직업 정신을 자극했다.
나중에는 강현우가 따로 묻지 않아도 홀로 척척 별거 아닌 에피소드까지 세세하게 늘어놓게 되었다. 열띤 강의라도 펼치듯 떠들다 보니, 자각하지 못한 사이 쿵쿵 뛰던 심장 소리가 잦아들고 휴대폰을 든 손의 떨림이 줄어들어 있었다.
―사진으로만 봐도 높아 보이던데, 올라가느라 힘들었겠어요.
“올라갈 땐 힘들었는데 막상 올라가서 보니까 왜 올라가나 이해가 되더라고요. 진짜 감탄만 하게 되고 다른 말 없이 사진만 찍게 되고…….”
이어지는 조잘거림에 강현우는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사실 강현우는 이런 자잘한 감상 따위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희주의 목소리를 좀 더 듣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희주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기 전, 강현우는 머무르고 있는 호텔의 고급 라운지 바에서 가면 같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저 하나 온 게 뭐 그리 좋다고. 환영을 해야 한답시고 눈치도 없이 계속해서 술을 권하는 무리들을 상대하느라 인내심이 한계치에 다다라 있던 차에 희주의 연락을 빌미로 보기 좋게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술도 못 마시는 것들이 되지도 않는 자부심과 자존심을 내세우느라 안달이었다. 염치도 없고 교양도 없어서 주변 눈치를 보지 않고 여자와 오메가를 찾아 대는 꼴이란, 어떻게 된 게 예상에 빗나가는 일이 없었다. 덕분에 강현우의 기분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값비싼 술과 고급 안주를 눈앞에 두고도 흥이 나질 않았다. 이렇게 될 줄을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니면서 이런 선택을 한 과거의 자신에 대한 욕을 안주 삼아, 내키지 않는 술을 한 모금씩 마셨다.
만약 아주 조금이라도 제 성격에 문제가 있었더라면 친목이니 협력이니 신경 쓰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테다. 아직 그럴 정도는 되지 않는 제 둥근 성격을 탓하며 또 한 모금 마시려던 찰나, 휴대폰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속된 말로 ‘좆같았던’ 기분이 희주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어느새 괜찮아져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가 어떤 말을 늘어놓든―설령 그게 욕일지라도―다 괜찮을 것 같았다. 강현우는 아직 가시지 않아 불쾌하기 짝이 없는 술기운을 감내하며 희주를 떠올렸다. 이제는 그가 어떤 표정으로 재잘거리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내일 밤에 애들 장기 자랑 있거든요. 반마다 한 팀씩인데, 저희 반 애들은 뭘 준비했는지 도무지 보여 줄 생각을 안 하더라고요. 아까 한 두세 시간 정도 연습할 시간이 있었는데, 몰래 가서 보려고 했다가 쫓겨났어요. 제가 선생님인데…….”
처음에는 조금 주저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혼자 잔뜩 신이 나 이것저것 말하는 희주가 귀여웠다. 잠자코 듣고 있던 강현우는 이번만큼은 정말 진실된 소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목소리 들으니까 더 보고 싶네.
딱히 어떤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정말 말 그대로 보고 싶다고.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곧이어 되돌아오는 대답에 강현우는 순간 직전까지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은 자신을 또 한 번 탓할 수밖에 없었다.
“저, 그럼… 영상 통화라도 걸까요?”
어떻게 기대를 안 할 수가 있나 싶은 답이었다.
강현우는 무심결에 유리에 비치는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웃느라 누그러진 얼굴이 새삼스러워, 조심스럽게 저를 달래고자 했던 희주의 목소리를 곱씹으며 한참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영상 통화는 좀 그렇겠죠?”
밖이기도 하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까……. 변명하듯 덧붙이는 말이 참 열없었다.
―…….
이번에는 정말 끊겼나 싶었다. 희주는 “여보세요?” 하고 조심스레 상대의 부재를 물었다.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또 한 번 물어보려고 입술을 달싹이는데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듯한 소리가 넘어왔다.
―하……. 진짜.
이내 작게 헛웃음을 치더니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화기를 멀리 떨어뜨리고 내는 것 같은 웅얼거림이었다. 잘 들리지 않아 희주는 뺨이 눌리도록 휴대폰을 귀에 대었다. 데굴데굴 눈을 굴리며 수화기 너머 상대의 눈치를 살피는데 강현우가 조금 상기된 듯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희주 씨 묵고 있는 숙소가 어딥니까?
“여기요? 여기가…….”
자연스럽게 희주는 관광버스를 타고 오가며 봤던 리조트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아차 했다. 어디냐고 묻는 건 곧 그 장소로 이동하겠다는 뜻이 아니던가. 희주는 절대 까먹지 않겠다는 듯 리조트 이름을 중얼거리는 강현우의 말을 다급하게 가로막았다.
“설마 오시려는 건 아니죠? 현우 씨 지금 술 드셔서 운전하면 안 돼요. 음주 운전이에요.”
―음. 저 술 먹고 운전대 잡는 한심한 놈은 아닌데.
여상한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정말 그렇게 생각했느냐며 강현우가 퍽 어이없다는 말투로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딱히 부정할 곳이 없었던지라 희주는 그저 흐, 하고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차피 차도 없고, 운전해 주는 이는 따로 있는 데다가 지금은 시간이 늦어 갈 방법도 없다면서 강현우는 혹시 모르게 남아 있을 희주의 근심을 덜어 주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법 어길 생각은 전혀 없어요. 자라나는 새싹들 가르치는 선생님을 애인으로 두고 그런 짓을 어떻게 하겠어요?
“……네?”
그러고는 능청스럽게 미소했다. 그를 따라서 미소 짓고 있던 희주는 뒤늦게 귀에 들어온 한 단어에 웃고 있던 표정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강현우는 설명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은 꼭 이 상황을 무마하려는 것이 아닌, 방금 그가 했던 말이 대답의 전부라고 확인시켜 주는 것 같았다.
제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 강현우는 저더러 ‘애인’이라고 칭했다. 우리 지금부터 사귀는 건가요? 아니, 혹시 사귀고 있었나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당황한 희주가 물으려고 할 때였다.
“어우씨, 깜짝이야.”
닫혀 있던 철문이 누군가에 의해 벌컥 열렸다. 놀란 희주가 확 뒤를 돌아보았다. 아는 얼굴이 서 있었다. 동료 교사들 중 한 명이었다.
“선생님이셨구나. 아, 놀라라.”
무심결에 문을 열고 들어오려던 그는 예상치 못한 곳에 사람이 있어 적잖이 놀란 듯했다. 커다란 덩치를 움찔 크게 튕기면서 뒷걸음질을 쳤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앉아 있는 희주를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희주 역시 그 못지않게 놀라고 당황한 차였다. 그는 분명 자러 간다고, 당번을 서는 제게 수고하라는 말까지 해 줬던 사람이었다. 교사 숙소에서 자고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 있지? 혹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방금까지 강현우 때문에 홧홧해졌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아……. 저 찾으셨어요? 혹시 애들한테 무슨 일이라도…….”
동료 교사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건 아니고, 한수 쌤이 아래에서 치킨 사 왔거든요. 쌤도 와서 좀 드시라고……. 아, 통화 중?”
다른 반 선생님이 야식을 사 왔다면서 방 호수를 알려 주던 그는 희주의 손에 휴대폰이 들려 있는 것을 보고 목소리를 줄였다.
“희주 쌤 몫까지 남겨 둘 테니까 통화 마무리되면 천천히 올라오세요.”
동료 교사는 정말 미안하다며 얼른 제 할 말을 전달했다. 그러고는 희주의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들어왔던 철문 뒤쪽으로 홀랑 사라져버렸다.
다들 자고 있는 줄만 알았더니. 어쨌거나 아이들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희주는 느릿하게 무릎을 굽혀 앉으며 잠시 떼어 냈던 휴대폰을 귀에 대었다.
“아, 저… 죄송해요. 갑자기 누가 들어와서…….”
―누구였어요?
“다른 반 선생님이요. 다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야식 먹는다고 저 찾은 거래요.”
―들어가 봐야겠다. 그죠.
“괜찮아요. 저, 급한 일은 아닌 것 같아서…….”
―으음, 아니에요.
편한 자세를 찾아 꾸물거리던 몸이 우뚝 멈췄다. 왜? 아직 하고 있던 말도 다 안 끝났는데? 희주는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였다.
―나머지는 얼굴 보고 이야기하는 걸로 해요.
강현우가 나긋나긋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전화로 할 이야기는 아니니까.
“아…….”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물론 하다 만 이야기는 그렇다 치고 강현우와의 통화를 마무리하는 것은 아쉬웠지만, 술까지 마신 상대를 고려하면 지금 시간도 여간 늦은 게 아니었다.
―나도 이제 들어갈게요. 덕분에 일찍 잘 수 있게 됐어요.
도무지 ‘일찍’이라고 볼 수 없는 시간이었지만 강현우는 그렇게 말했다.
―잘 자요.
“현우 씨도요…….”
―먼저 끊어요.
여느 때와 같은 인사가 오갔다. 강현우가 먼저 끊으라고 했지만 희주는 아쉬움에 미적거리다가 뒤늦게야 전화를 끊었다. 끊긴 전화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희주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만나자고 하는 건… 주말을 말하는 거겠지. 희주는 강현우와 만나 하게 될 나머지 이야기를 어림짐작해 보려다 그만두었다. 밤하늘이라도 올려다보듯 캄캄해진 천장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고개를 바로하고 이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결국 문제의 답을 찾았지만, 어쩐지 더 풀기 어려운 문제를 숙제로 부여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 * *
무릇 파티의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다. 수학여행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레크리에이션은 과연 마지막 날 밤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제주도의 대표 관광 명소를 둘러보는 앞선 3일간의 일정은 오직 레크리에이션만을 위한 초석에 불과했다. 관광이 지루했다는 뜻은 아니지만, 대강당에 모인 아이들은 이것만을 기다려 온 듯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어떤 자연 경관을 보러 가도 볼 수 없었던 눈빛들이었다.
분위기 주도에 능한 전문 강사가 알아서 무대를 진행하는 동안 교사들은 잠시 인솔 업무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했다. 준비한 장기 자랑을 보며 박수를 치는가 하면 벽에 등을 기대고 쉬거나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놀고도 지금껏 팔팔한 아이들에 비해 놀러 와도 놀러 온 게 아닌 교사들은 얼른 이 모든 것이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어우, 저러다가 관절 나가겠다.”
“다들 힘도 좋아.”
장기 자랑 무대 종목은 대체로 비슷했다. 각 반마다 춤 잘 추는 아이들이 한두 명씩은 있기 마련이라, 아이돌 그룹의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 팀이 대다수였다.
조금 차이점을 둔 반이 있다면 담임선생님을 무대로 끌고 올라온 것이었다. 이 역시 매년 보는 광경이었다. 사전에 말을 맞추기도 하고 가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선생님을 억지로 끌고 올라가 아예 주인공으로 만들어 버리곤 했는데, 올해 그 주인공이 자신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일등 상은 희주 쌤한테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동료 교사들 중 한 명이 무대에 내려온 후로도 아직까지 얼굴이 새빨간 희주를 어깨로 툭 치며 말했다. 희주는 제발 제게 관심을 꺼 달라는 뜻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그것마저도 웃긴가 보다. 꼭 사람을 놀리기라도 하는 듯한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쥐구멍을 찾던 희주는 아까 앉았던 자리보다 훨씬 구석진 자리에 몸을 숨겼다. 다행히 여기까지는 조명이 닿지 않는 듯했다. 이제야 좀 살겠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쉰 희주는 삐질삐질 흘러나온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어쩐지 연습하는 것도 안 보여 주더라.
문득 전날 밤 뭘 준비했는지 보자고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희주를 온몸으로 막던 아이들이 떠올랐다. 부끄러워서 그런가 보다, 하고 순순히 물러나 줬더니 이런 일을 준비하고 있었을 줄이야.
저희 반 차례가 오자마자 제 새끼들 재롱을 보듯이 휴대폰 카메라로 영상을 담던 희주는 갑자기 무대를 하다 말고 제게로 돌진하는 아이들 때문에 깜짝 놀랐었다. 거의 반강제로 끌려가 무대 한가운데에 서고 나서야 아이들의 속셈을 알아챘다. 하기 싫다고 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 희주는 아이들의 부추김에 못 이겨 춤이라고 할 수 없는 몸짓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의 부끄러움이야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학교로 돌아간 후에도 잊을 만하면 회자될 것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창피스러웠다. 아마 졸업한 후로는 추억팔이를 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오늘 이날이 거론될 테였다. 나아가 저를 볼 때마다 춤을 춰 보라고 부추길 학년 부장을 생각하면 머리까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희주 쌤! 제가 동영상 찍었는데 이거 보내 줄게요!”
“……아니요. 안 그러셔도 될 것 같은데…….”
“네? 소리가 너무 커 가지고… 뭐라고 하셨어요?”
“…….”
당연히 이런 희주의 사정을 안중에 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열광한 분위기 탓에 한여름 더위 못지않게 뜨겁던 대강당에서의 레크리에이션이 댄스 동아리 무대를 마지막으로 끝났다. 매년 그랬듯 응원 점수니 무슨 점수니 해서 일등을 한 반에는 엄청난 상품을 주겠다 했지만 이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전문 강사의 입담 중 하나로, 상품으로 준비된 자유 시간과 피자는 모든 반 아이들에게로 돌아갔다.
피자를 나눠 주기 위해 방을 돌던 희주는 어느 정도 예상한 대로 아이들에게 붙들려 한참 동안 진땀을 뺐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선생님을 향한 아이들의 장난은 어느 방을 가도 똑같았다.
“어차피 멀리 가지도 못하는데 여기 지하에 호프집 가는 게 어때요? 작년에 왔을 땐 없었던 것 같은데 그새 생겼네.”
얼른 먹기나 하라며 겨우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교사 숙소로 돌아왔을 땐 선생님들 사이에서 회식 이야기가 나온 참이었다. 다들 평소에는 회식하자는 소리만 나오면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덩달아 기분이 업 됐는지 하나둘씩 이동할 채비를 했다.
“희주 쌤. 쌤은 안 가세요?”
“아……. 저는 그냥 여기 있으려고요.”
“엇, 왜요? 어디 아픈 데 있어요?”
장기 자랑 때 있었던 일로 학년 부장은 저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게 뻔했다. 다들 즐기자는 분위기에 혼자 내키지 않는다는 양 머뭇거리고 있자, 동료 교사가 걱정스러운 물음을 던졌다.
“그건 아닌데… 한 명 정도는 남아야 될 것 같아서요.”
희주는 잠시 망설이다가 곧 아니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대로 아이들 안전을 핑계로 슬쩍 빠지려고 했다.
“선생님이 그걸 왜 걱정해? 어차피 남기로 한 사람은 한수 쌤이잖아요.”
노래방도 가자면서 흥에 겨워하던 동료 교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막 경광봉을 집어 들었던 한수 쌤이 제 이름이 들리자 이쪽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걱정 말라는 듯 호쾌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런 그를 희주는 불만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냥 어디 아픈 척이라도 할걸.
“오늘 장기 자랑 일등 하신 분이 안 가면 되겠어요? 자자, 얼른 갑시다!”
또 다른 동료 교사가 벌레 씹은 얼굴로 가기 싫다는 티를 풀풀 풍기고 있는 희주의 어깨를 감싸며 애써 달래는 듯한 말을 했다.
희주는 문득 이들이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 나 하나 희생양 만들려는 속셈 아니야? 의심의 눈초리로 주변을 훑었지만 누구 하나 희주와 눈을 마주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저들끼리 하하 호호 웃으며 실속 없는 수다만 떨 뿐이었다.
심증만 있는 의심은 하등 쓸모가 없었다. 즐거워야 할 자리로 향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더없이 무거웠다.
* * *
“와……. 희주 쌤, 술 잘 마시는 건 알고 있었는데 오늘은 아예 날 잡으셨네요?”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동료 교사가 경이롭다는 눈을 하고 쳐다보았다. 분명 그가 바라보는 방향에는 희주가 있었지만 제대로 보이는지는 의문이었다. 이미 그의 눈은 초점이 반 정도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 페이스대로 달리는 희주를 따라 마시다가 애먼 사람만 얼큰히 취해 버린 셈이었다.
“네. 오늘은 취하고 싶어서요.”
희주가 비장하게 대답했다. 그러곤 또 한 번 잔을 비웠다. 잔이 채워지기가 무섭게 곧바로 제 입 안에 털어 넣어 버리는 그는 마치 잔이 차는 꼴을 못 보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쩌다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지만, 술은 딱히 즐겨 마시지는 않는 터라 간간이 음료수를 마시던 또 다른 교사가 희주를 보며 물었다.
“왜? 희주 쌤, 뭐 힘든 일 있어?”
“아니요? 힘든 일 있어야 술 마시나요? 내일이면 집 가잖아요. 좋아서요.”
좋다는 사람치고는 눈에 독기가 가득했다.
희주는 거의 연행되다시피 호프집으로 끌려왔다. 호시탐탐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와중에 1층에서 편의점을 오가던 학생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혹시 몰래 술이라도 사서 반입한 녀석들이 있지 않겠느냐고 온갖 호들갑을 떨어 빠져나오려고 해도, 순수하고 건전하게 과자나 탄산음료 따위만 산 아이들뿐이었다.
보통 수학여행 오면 선생님들 몰래 술 마시고 그러는 거 아니었니? 교육자로서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할 정도로 희주는 정말 회식에 가기가 싫었다.
결국 호프집에 입성하고야 말았을 땐 희주는 있는 힘을 다하여 학년 부장 쪽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우리 권 선생 왔느냐며 여기로 오라는 학년 부장의 말은 대놓고 못 들은 척했다. 같은 테이블의 선생님들이 눈치를 보며 알려 줬을 때도, 복화술의 달인이라도 된 ‘므르는 측, 므르는 측……’하고 웅얼거렸다.
오늘 희주는 작정하고 취할 생각이었다. 차라리 지금 진탕 취하면 학년 부장이 앵콜을 요청하더라도 부끄러움을 못 느끼지 않을까 싶어, 희주는 잔이 채워지는 대로 입 안에 쏟아부었다. 아예 지금 이 자리에서 취해 버려서 2차로 넘어가기 전에 탈락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꼭 취하고 싶은 날에는 안 취한다. 무슨 법칙처럼. 누가 봐도 방으로 돌아가 쉬어야 할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꺾지도 않고 한입에 털어 넣는 희주를 앞에 두고, 두 동료 교사는 저들끼리 떠들어 댔다.
“늘 보면 말이야. 참, 결혼도 안 했으면서 집 가는 거 참 좋아해……. 권 쌤, 집에 뭐 꿀단지라도 숨겨 놨어?”
“에이, 요새 누가 꿀단지라고 말해요.”
“그럼?”
“애인이라도 숨겨 놨냐고 물어야죠.”
“아, 그래? 요새 젊은 애들은 그래? 희주 쌤, 애인 생겼어?”
“애인은 제가 생겼어요.”
“오……. 정말?”
애인이 생겼냐는 물음을 받은 건 자신인데, 정작 답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덕분에 귀찮은 취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희주는 턱을 타고 흘러내린 술을 닦아 내며 휴대폰을 꺼냈다. 숨길 생각 없이 테이블 위로 꺼내어 만지작대는데도 그런 그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messsage*you/
회식이요?
강현우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호프집이 있는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몰래 휴대폰을 꺼내어 메시지를 보냈었다. 장기 자랑 무대에 올랐다는 말은 쏙 빼놓고 회식 가기 싫다는 말 뒤에 우는 모양의 이모티콘을 덧붙였었다. 그 이후로 휴대폰을 확인할 틈이 없었는데, 답장이 와 있었다. 희주는 느릿하게 엄지를 까딱거렸다.
“아이씨……. 오타.”
/messsage*i/
다움앤노래반도ㄷ간데요
결과물은 처참했다. 희주는 대번에 인상을 구겼다. 이미 한창 늦은 답장이었지만 강현우의 답은 자동 응답인 양 빨랐다.
/messsage*you/
많이 마셨나 보네
“마않이 마셨지요…….”
희주는 어투에 이상한 음을 붙여 중얼거렸다. 오타가 난무하는 제 메시지와는 달리 강현우의 답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단정하고 정갈했다.
/messsage*you/
그럼 지금 잠깐 핑계 대고 나올 수 있어요?
아. 왜 이런 생각을 못 했지. 희주는 빠져나올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준 강현우에게 새삼 감탄했다. 그러고는 그럴싸한 핑계를 대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이미 알코올에 절어 버린 뇌는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못했다.
으음. 침음하며 고민하던 희주는 이내 발표하는 학생처럼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났다.
“저, 잠깐 화장실 좀…….”
고심 끝에 내놓은 답은 화장실 핑계였다. 다행히 술자리를 벗어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변명이 얻어걸렸다. 생각 없이 담배를 피우러 가겠다고 했으면 여럿이 함께 따라 나왔을 것이다. 애초에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다. 다행히 희주뿐만 아니라 널리고 널린 게 만취자였기 때문에 희주는 별 의심을 받지 않고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만약 화장실이 가게 내부에 있었으면 좀 난처할 뻔했겠지만 이런 상황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가게 외부에 있었다. 희주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호프집을 벗어났다. 호프집이 떠나가라 목청을 키우는 이들이 비단 교사들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문짝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데시벨 차이가 크게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귀가 먹먹할 정도로 시끄러웠던 대강당에 무려 두 시간 가까이 묶여 있었는데, 그 못지않게 시끄러웠던 곳을 벗어나니 살 것만 같았다. 이대로 숙소로 돌아가 쉬면 될 것 같았다. 희주는 킁, 하고 코를 훌쩍거렸다.
숙소로 올라가려면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는데, 하필 한참 위에서 운행 중이라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중얼거리며 비틀비틀 계단으로 향했다.
내키지 않는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다 강현우 덕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적당히 좀 마실걸. 왜 무식하게 끝까지 버틸 생각을 했나 모르겠다. 그냥 취한 척하면서 지금처럼 빠져나왔으면 술기운에 어지러워하지도 않았을 테였다. 강현우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 할 성싶었다.
희주는 휴대폰을 꺼냈다. 자다가 분명 물을 찾을 것이 뻔해 걸음은 자연스럽게 편의점으로 향하던 차였다.
“아. 여기예요, 희주 씨.”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지만, 이곳에서 들을 일이 없는 목소리였다.
희주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홱홱 분주하게 고개를 돌렸다. 흐릿한 시야로 새카만 인영이 들어왔다. 환영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살피던 희주는 이내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상대를 쳐다봐야 했다.
“현우 씨……?”
현우 씨가 왜 여기에……. 찬물이라도 맞은 듯 술이 번쩍 깨는 기분이었다.
강현우는 리조트 출입구 근처에 서 있었다. 몇 번 본 적 있는 슈트 차림이 아닌, 영화를 보러 갔을 때와 비슷한 차림으로. 마치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바지 주머니에 가볍게 손을 찔러 넣은 채 서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다른 한 손을 낮게 들어 올린다. 온 얼굴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마주했을 때 드는 생각은 반가움보다 의아함에 더 가까웠다.
‘현우 씨가 왜 여기 있지?’
이런 아리송함에 희주의 매끈했던 미간 사이에 얕은 골이 생겼다. 아무리 세상 바닥이 좁다지만, 그건 이곳이 리조트가 아닌 공항이어야만 유쾌하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오늘 강현우는 밤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를 떠날 예정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수학여행 일정에 따라 하룻밤을 더 머물러야 하는 자신과는 아무리 애를 써도 마주칠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멀지 않은 거리를 성큼성큼 좁혀 다가오는 강현우를 보며, 희주는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술에 취해 헛것을 보는 게 아니라면 귀신이라도 보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몇 번이고 눈을 비비고 깜빡여 봐도 더 가까워지면 가까워졌지, 눈앞에 있는 강현우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눈 그만 비벼요.”
희주가 현실 수긍과 부정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한걸음에 다가온 강현우가 손을 낚아챘다. 희주는 눈을 비비다 말고 시선을 위로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강현우의 눈이 놀란 듯 살짝 커졌다.
“잠깐만요.”
단호히 중얼거린 강현우가 고개를 살짝 수그렸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눈높이가 얼추 비슷해졌다.
“빨개졌네.”
바짝 다가온 강현우가 희주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눈을 마주하는 게 민망스러워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희주가 저도 모르게 그의 입술로 시선을 뒀다. 모양 좋은 입술이 언제 말을 했느냐는 듯 굳게 다물려 있었다.
빨갛다는 게, 얼굴이 빨개졌다는 뜻인가? 놀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술 때문에 사고가 느려진 건지, 그의 말을 이해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희주는 더듬더듬 뺨을 매만져 보았다. 평소 술을 마시면 얼굴이 빨개지는 편이기는 했다.
하지만 얼굴을 매만져 보려는 시도는 말 그대로 시도에서 끝났다. 희주는 뺨에 닿기는커녕 얼굴 가까이 올라가지도 않는 손에 의아해하며 눈을 잘게 깜빡거렸다.
“따갑지 않아요?”
문득 제 손목에서 따스함이 느껴졌다. 희주는 천천히 시선만 돌렸다. 애매하게 턱 근처에서 배회하던 손을 강현우가 꼭 감싸 쥐고 있었다.
분명 잡힌 건 손목뿐인데, 강현우의 크고 넓은 손바닥이 손등 위까지 모조리 덮은 채였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제 손이 그의 손에 잡아먹힌 듯한 형상이었다. 삼십 평생 살면서 손 작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면 강현우의 손은 좀 큰 편이긴 했다. 알파라서 그런 걸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다 잡힌 일인가. 신기하게 쳐다보는데, 다른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처럼 손가락까지 얽혀 맞물렸다. 술기운이 손끝까지 퍼진 건지 미미하게 붉어진 제 손과는 달리 강현우의 손은 하얗기만 했다. 색 차이가 확연하니 얽힌 모습이 너무도 잘 보였다. 얼결에 깍지 끼게 된 손을 보자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
여전히 한눈팔려 있던 희주가 일순 눈가에 느껴지는 따끔함에 고개를 확 뒤로 물렸다. 그러자 강현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나름 조심한다고 만진 건데, 이렇게 소스라치게 놀랄 줄은 몰랐다. 강현우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금방 건드렸던 눈가가 아닌, 거친 손길이 닿지 않았던 뺨 부근을 살살 어루만졌다.
“따가워요?”
“조금…….”
솔직히 그 정도면 닿은 것 같지도 않은 수준이었지만, 마구 문질러져 생채기가 나 버린 여린 살갗은 그 별거 아닌 손길에도 따끔거리는 통증을 호소했다. 희주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비비려 손을 올렸다가 강현우의 손에 가로막혀, 눈을 깊게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그러게 왜 그렇게 비벼 댔어요.”
어찌 들으면 나무라는 듯한 말이지만 말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강현우는 조심스럽고도 다정하게 말하며 그보다 더 상냥한 손길로 뺨을 매만졌다. 희주는 정신없이 그 스킨십을 받아들이면서 홀린 듯 말끝을 흐렸다.
“잘못 본 줄 알고요…….”
“뭐를요?”
“현우 씨를요.”
“나를?”
강현우가 시선을 위로 들어 올렸다. 금방까지 미묘한 차이로 눈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는데, 직접적으로 시선을 마주하게 되니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희주는 강현우가 곰곰이 생각하는 틈을 타서 그의 손에 붙잡힌 얼굴을 슬며시 빼냈다. 아예 안 놔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다행히 강현우는 별다른 제지 없이 놓아주었다.
“혹시 아까 메시지 보낸 거 못 봤어요?”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아” 하고 탄식한 강현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 왔다. 영문을 몰라 눈을 굴리자 그가 이어 부연해 주었다.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보냈는데.”
“아…….”
보지 못했느냐는 강현우의 말에 희주는 벙찐 얼굴로 허둥지둥 휴대폰을 확인했다. 과연 1층 로비에서 기다리겠다는 내용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아……. 죄송해요. 몰랐어요.”
“죄송할 것까지야. 모르는 상태에서 잘 나온 게 신기한데요?”
강현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근데 왜 방으로 안 올라가고 로비로 왔어요?”
“편의점… 에 잠깐 들르려고요.”
“아, 편의점.”
강현우의 눈이 뒤쪽을 향했다. 아마 제 뒤에 있는 편의점을 보는 걸 테였다. 무심하게 눈길을 줘 놓고서는 “같이 갈까요?” 하고 묻는 말에, 희주는 괜찮다고 냉큼 손을 휘저었다.
편의점 가는 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아무 생각 없이 갔다가 아이들이라도 마주치기라도 하면 큰일…….
“…….”
“희주 씨?”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희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때였다. 체크인이나 체크아웃을 하기에는 늦은 시간이라 한적했던 로비가 한순간에 시끌벅적해졌다. 몇 분 전 희주가 지하에서 타려다가 실패했던 엘리베이터에서 여자아이들 여럿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야, 진짜 쌤들 다 지하에 계신 거 맞지?”
“아, 그렇다고! 내가 봤다니까? 조용히 입 좀 다물고 가자, 좀! 시끄러워 죽겠네.”
“님이 제일 시끄러움.”
희주는 눈이 마주치기라도 할까 휙 고개를 돌려 푹 숙였다. 숨이 턱 막혔다. 지금 강현우가 어떤 눈으로 저를 보고 있던 그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눈만 움직여 숨을 곳을 찾아봤지만, 앉을 곳도 마땅치 않은 곳에서 숨을 곳이란 아마 화장실밖에 없을 터였다.
하지만 뒤쪽에는 선생님들의 걸음걸이와 뒤통수만 봐도 누군지 알아내는 귀신같은 녀석들이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었다.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희주 씨? 왜 그러세요?”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던 희주는 순간 이거다 싶었다. 더는 생각하지 않고 일단 냅다 강현우의 뒤로 가 꾸깃꾸깃 몸을 있는 대로 구겨 숨었다. 이런다고 다 가려질 거라는 생각은 당연히 들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었다.
“희주 씨?”
“잠깐, 잠깐만요. 이름 부르지 말아 주세요. 죄송해요.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요.”
저 못지않게 당황한 강현우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게 느껴졌다. 괜한 소동을 일으키면 시선을 모을 게 분명했다. 희주는 손에 잡히는 대로 셔츠를 움켜쥐고 이마를 꿍 박았다.
“학생들이에요?”
아이들의 대화를 함께 들었던 터라 강현우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네, 네. 제발 가만히 있어 주세요. 제발요.”
“음…….”
강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갈색 눈동자가 탐색하듯 느릿하게 굴러갔다.
꼭 스파이 영화라도 찍는 것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주위를 살피면서, 정작 제 뒤에 숨어 있는 선생님은 찾지 못하고 편의점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강현우는 학생들이 안으로 들어간 후로도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통유리를 통해 가만히 살펴보았다. 먹을 것들을 한창 고르느라 밖에서 뭘 하든 전혀 신경도 안 쓸 눈치였다.
강현우는 고개만 뒤로 돌려 까만 머리통에 시선을 뒀다. 그 작은 몸짓에도 소스라치게 놀란 희주가 제 등 뒤에 얼굴을 대고 누르는 게 느껴졌다. 천적을 피해 필사적으로 몸을 숨기려는 소동물을 보는 듯했다. 강현우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일단 저 학생들이 나오기 전에 이 오갈 데 없는 선생님을 다른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 줘야 할 것만 같다. 강현우는 대강 결론을 내렸다.
“……!”
순간 강한 힘으로 인해 휙 몸이 돌아갔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바들바들 떨던 희주는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빙글 돌아간 몸은 어느새 편의점을 등지고 로비 출입구 쪽을 향해 있었다. 힘을 주고 버틴다거나 할 새도 없을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희주 씨.”
묵직한 무게가 어깨를 눌렀다. 그리고 섬유 유연제처럼 옅게 밴 알파 페로몬이 부드럽게 다가왔다. 어깨동무를 하듯 제 어깨를 감싸 안은 강현우가 널따란 가슴팍으로 희주를 확 끌어당겼다. 목덜미와 가슴 사이 그 어딘가, 희주의 얼굴이 폭삭 파묻혔다.
아이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는 편의점을 등지게 된 것도 모자라, 가슴팍에 파묻혀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뒤에서 보면 몸뚱이가 다 보이지도 않을 터였다. 억지로 얼굴을 들이밀고 들여다보지 않는 한, 이 사람이 권희주 선생님이라는 건 아무도 모를 테였다. 어쩌면… 여행 온 연인으로 볼지도 모르지.
다른 의미로 긴장한 몸이 여전히 꼿꼿하게 굳어 버렸다. 강현우는 벌게진 귓바퀴를 보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삼켰다.
“우리 나가서 바람 좀 쐴까요?”
희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됐건, 지금 당장 자신을 알아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곳을 벗어나야만 완전히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한 발짝 한 발짝, 희주는 강현우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내디뎠다. 벌겋게 물든 얼굴은 한참 동안 강현우의 품에 폭 파묻혀 있었다.
* * *
“물 좀 마실래요? 시원하진 않은데 새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희주가 얌전히 조수석에 오르는 것을 확인한 후, 직접 문까지 닫아 주는 수고를 마친 강현우는 자리에 앉자마자 생수를 찾아 내밀었다. 서울에서 하던 버릇대로 안 실장이 저 마시라고 구비해 뒀던 것인데 건들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혹시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으면 말하라며, 가서 사 오겠다고 덧붙이는 그의 말에 희주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 지금 제가 찬 것, 뜨거운 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시원하지는 않을 거라더니. 목을 타고 넘어가는 물은 제법 시원한 편이었다. 목이 많이 타긴 했는지 그 자리에서 반을 비워 냈다. 희주는 축축하게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하아. 안도의 숨이 섞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긴장이 좀 풀리는 듯했다.
“오다 보니까 너무 멀리 나온 것 같긴 한데… 괜찮을까요?”
숨도 쉬지 않고 물을 마시는 희주를 보던 강현우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희주는 생수병 뚜껑을 잠그면서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는 리조트 건물이 아득히 보였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시동 꺼진 차량들이 줄지어 주차되어 있고, 그 너머에는 드문드문 늘어선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는 새빨간 관광버스들이 있었다.
로비를 빠져나온 두 사람이 바삐 걸음해 도착한 곳은 지상의 주차장이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지나가는 일반 투숙객들만 봐도 깜짝깜짝 놀라 버리는 터라 인적 드문 곳을 찾고 찾다가 결국 이곳까지 와 버린 것이다.
내내 강현우의 품에 안긴 채 바닥만 보고 걸어온 희주는 시야에 다른 이들의 신발이 들어올 때마다 두 눈을 질끈 감곤 했다. 도대체 이 시간까지 방에 안 들어가고 있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제대로 앞을 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눈을 뜨고 있던 것도 아니니 오는 동안 강현우의 발은 셀 수 없이 밟혔다. 그럴 때마다 죄송하다고 온몸을 튀겨 댔지만 강현우는 괜찮다는 말과 함께 오히려 제 어깨를 안정적으로 감싸 안아 주었다.
다른 신발도 아니고 정장 구두였는데……. 제주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온 바닥을 쓸고 다닌 신발로 밟았으니 틀림없이 밟힌 자국이 선명히 남았을 터였다.
“네……. 괜찮아요.”
희주는 조금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참 민폐가 아닐 수 없었다. 덕분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지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생수병을 만지작거리던 희주는 불쑥 떠오른 궁금증에 강현우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강현우가 왜 여기에 와 있는 건지 묻지도 못하고 답도 못 듣지 못했다.
“근데 왜 여기 계세요?”
뜬금없는 물음에 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여 눈을 맞춰 왔다. 도리어 무슨 말이냐고 묻는 듯한 눈빛에, 희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들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행기는요? 분명 오늘 밤에 공항 가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몇 시 비행기 타는데요? 공항 여기서 좀 멀 텐데……. 여기 와 계셔도 되는 거예요?”
“아아.”
속사포로 쏟아지는 질문을 들은 강현우는 그제야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화사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희주가 듣고 까무러칠 만한 대답을 내놓았다.
“놓쳤어요.”
“네에?”
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어둠 속에서 더 어둡게 보이는 희주의 까만 눈동자가 왼쪽으로 갔다가 강현우를 쳐다보고, 다시 오른쪽으로 갔다가 아래로 푹 내려앉았다. 눈이 커서 그런가. 이리저리 굴러가는 눈을 보는 재미가 상당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구경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강현우는 희주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입꼬리를 꿈틀거렸다. 그러고는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쓰읍. 무언가를 가늠해 보는 것처럼 강현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쯤 날아가고 있지 않을까요?”
“어……. 그럼… 어떡해요?”
“글쎄요. 어떡하지?”
대책 없는 대답에 희주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 상황이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교직 생활을 하면서 맞닥뜨렸던 난처한 상황은 숱하디숱했다.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빠르게 이성을 되찾은 희주는 차분히 머리를 굴렸다.
만약 다른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상황이었더라면 굳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테니, 일단 근처에 적당히 하룻밤 머무를 수 있는 숙소를 찾아서 내일 탈 수 있는 비행기를…….
직업병에 가깝게 탑재된 책임감으로 한창 해결 방안을 찾아 씨름하고 있는데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희주는 이어 가던 생각을 끊고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톡톡. 핸들을 움켜쥔 손가락이 습관처럼 위아래로 움직이며 가볍게 소리를 내고 있었다. 공연히 두드리는 듯 보였지만 꼭 저를 부르고 있었던 것처럼, 고개를 돌리자 자연스럽게 강현우와 시선이 마주쳤다. 본인 일인 양 안달이 난 저와는 다르게, 당사자인 강현우는 너무나도 차분했다.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빛은 진지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깜빡 속았다.
“헤엄쳐서 가야 되나?”
이어지는 목소리에 장난기가 득실거렸다.
“……저 놀린 거예요?”
‘설마’ 하는 노파심에 묻자 그제야 강현우가 장난스럽게 눈꼬리를 휘었다. 허탈함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비행기를 놓친 건 아니라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어쨌거나 곧 비행기를 타러 가야 한다는 사실에 조바심이 났다.
“조금 더 있다가 가도 충분히 시간 맞춰서 갈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목을 길게 뺀 채 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안 실장이 들으면 입을 떡 벌릴 말이었다.
충분히 상황을 설명했음에도 불안한 듯 희주의 추궁은 계속되었다. 강현우는 별수 없다는 듯 비행기 시간과 편명까지 알려 주었다. 그러고도 불안함이 가시지 않는지, 희주는 휴대폰을 꺼내어 직접 검색까지 해 확인했다. 그사이에 저에 대한 신뢰가 많이 낮아진 것 같다며 강현우가 웃자, 양치기 소년 이솝 우화를 떠올려 보라면서 희주가 눈을 흘겼다.
“아까 로비에서, 학생들이었죠?”
확인을 끝낸 희주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는 모습을 바라보며 강현우가 넌지시 물었다.
“아……. 네. 저희 반 애들은 아니고요. 제가 그 반에 수업 들어가거든요.”
희주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던 얼굴들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 와중에 규칙을 지키지 않은 학생들에 골이 나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10시 이후에는 숙소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첫날부터 누누이 말했을 텐데, 기어코 한밤중에 돌아다니다니. 만약 그 자리에 강현우가 없었더라면 현장에서 바로 검거했을 터였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숨으려고 한 이유라도 있어요?”
몸을 숨기느라 다급한 와중에도 학생들이냐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했던 희주였다. 강현우가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저들끼리 나누는 대화를 듣자 하니 허락을 맡고 돌아다니는 건 아닌 것 같았는데, 통제를 하기보다는 저를 방패로 삼으면서까지 숨을 곳을 찾으려고 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자 희주가 작게 웃었다. 백 퍼센트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결의 말들을 들어 본 적이 있어서였다. 물론 남들이 보면 괜히 유난을 떠는 걸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유는 분명히 존재했다. 이는 많은 교사들이 업무용 휴대폰을 따로 두는 이유와 비슷했다.
“애들이 생각보다 선생님들한테 관심이 많거든요. 애들한테 선생님은 그냥… 학교에서 수업하고 잔소리하는 사람이잖아요.”
말을 끊은 희주는 뒤이어 할 말들을 차분히 머릿속으로 골라냈다.
“사생활에 관심이 많다고 해야 하나? 선생님들이 보통 사람들처럼 뭔가를 하는 걸 되게 신기해하더라고요. 그래서 학교 근처에서는 마음 놓고 잘 못 놀아요. 어쩌다가 학생 마주치기라도 하잖아요? 그 다음 날에 학교 가면 소문 쫙 퍼져 있어요. 어제 저 선생님 어디서 뭐 하고 있었다고.”
“그래요?”
“네. 그래서 저 아웃스타 계정도 안 만들었어요.”
톡톡, 톡. 다시 한번 강현우의 손가락이 핸들을 두드렸다. 뒤이어 무슨 말이라도 나올까 싶어 강현우를 쳐다봤지만,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불시에 침묵이 맴돌았다. 희주는 괜한 멋쩍음에 손에 쥔 생수병만 만지작거렸다.
강현우는 다른 게 아닌, 희주가 했던 말에 자신을 투영해 보고 있었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자신은 ‘강현우’라는 개인이 아닌 그저 ‘백영 그룹’이었다. 본격적으로 실무에 투입되기도 전부터 그래 왔다. 보다 더 정확한 시기를 꼽자면 아예 태어난 순간부터일지도 모른다. 막연한 그때부터 사람들은 저들이 보고 싶어 하는 이미지로만 자신을 바라보았다.
만일 그 이미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기라도 한다면, 무조건 가십거리가 되어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고 내렸다. 이런 면에서 권희주와 공통점이 있었다.
방금 로비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비슷한 상황을 맞닥뜨린다면 분명 자신도 그처럼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가십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목적보다는…….
“…….”
제 자신을 보호하려는 목적이 아닌, 미디어에 노출될 이유가 없는 권희주를 보호하려는 목적일 것이다.
무엇보다 아직까지 권희주는 자신이 백영 그룹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나. 그걸 다른 이들의 입과 손을 통해 알게 할 수는 없었다.
강현우는 입술을 달싹였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희주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담담히 받아들일 거라고는 확신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대다수가 그래 왔던 것처럼 그에게도 본래 없던 목적과 요구가 끊임없이 생겨날지도 모른다고, 그리 짐작할 뿐이다.
언젠가 말은 해야 할 테지만 그게 당장 오늘은 아니었다. 실로 그를 속이는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그와의 관계에서 상처받고 싶지 않은 자기 보호이자 회피이기도 했다.
강현우는 스스로 위안하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저에 대한 그 어떠한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은 권희주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답지 않게 치기 어린 결단이지만 이 일은 조금만, 아주 조금만 뒤로 미루기로 했다.
강현우는 가슴팍이 크게 부풀도록 숨을 들이켰다. 아직까지 페로몬이 새어 나오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 그를 닮아 포근함을 머금은 오메가 페로몬이 일순 코끝을 스쳤다.
만약 향을 촉각적으로 느낄 수만 있다면 권희주의 페로몬은 몽글몽글하다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강현우가 삐져 나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아무것도 볼 게 없는 창밖을 멍하니 구경하던 희주가 움찔 어깨를 튀겼다. 의아함 가득한 눈이 강현우에게 향했다.
“선생님이란 직업도 쉽지 않네요. 연애하는 데 이렇게 눈치 볼 사람도 많고.”
그는 기분 좋게 웃으며 시트에 등을 기대었다. 금방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기라도 하는 듯 리조트 건물 쪽을 흘긋 보더니, “이러고 있으니까 꼭… 비밀 연애라도 하고 있는 것 같네요”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도 했다. 웃음기는 섞여 있으나 농담조처럼 가볍게 들리지는 않는 여상한 목소리였다.
희주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뭐랄까. 이번에도 농담일까 싶었다. 하지만 강현우의 입에서는 더는 농담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럼 진심이라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 심장이 빠른 속도로 쿵쾅거렸다. 술을 마셨기 때문에, 라고 치부하기에는 마음속이 몹시 간질거렸다.
무엇보다 웃는 강현우의 얼굴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아까는 놀랄 일들이 연속으로 벌어져서 제대로 얼굴을 볼 틈도 없었는데, 단둘이 남게 되니 저도 모르게 힐끔거리는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진심으로 즐거워 보이는 미소에 마음속이 간질거리다 못해… 이상했다. 이 낯선 감정을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누군가가 헤집기라도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홧홧해서 강현우를 바라보는 눈이 자꾸만 멍해졌다.
“희주 씨?”
무어라 말도 없이 넋을 놓은 그를 이상하게 생각한 강현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불렀다. 희주는 그제야 흠칫 정신을 차렸다. 왜 그러느냐고 묻는 강현우는 여전히 다정하게 웃는 낯이었고, 그 까닭에 그를 보는 희주의 심장은 또 한 번 덜컥거렸다.
“아, 아니에요.”
희주는 표정을 감추려 얼른 고개를 돌렸다. 목뒤에서부터 얼굴까지 뜨끈한 열기가 확 끼쳤다. 전혀 더운 날씨가 아닌데도 이러는 걸 보면 저가 술을 많이 마시기는 마신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남아 있던 물을 애써 꼴깍 삼켰다. 그러고도 만족할 수가 없어 입고 있던 상의의 목 부분을 잡아 늘여 팔랑팔랑 흔들었다.
“…….”
희주가 애써 고개를 돌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강현우의 눈은 희주에게 닿아 있었다.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몽글몽글한 페로몬이 살랑살랑 흩어졌다. 아주 미약한 변화지만 조금 들뜬 듯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페로몬임에도 마치 색이 입혀져 있기라도 한 양 강현우는 희주의 뺨이며 목덜미며 샅샅이 훑어 댔다.
지난번 CX의 장 이사의 옆에 앉아 열렬히 페로몬을 뿜어 대던 오메가나,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저를 보면 페로몬을 묻히고 싶어 안달 나 있던 오메가들이 상당했던 걸 떠올려 보면 지금 희주의 행동도 자칫 제 오해를 살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숨을 크게 마신 강현우의 뇌리를 스친 건, 언뜻 드러난 저 목덜미에 제 코끝을 가져다 대고 싶다는 불순한 생각뿐이었다.
분명 메시지나 전화 통화로만 연락을 주고받을 때만 해도 오직 ‘보고 싶다’라는 생각뿐이었는데, 이렇게 직접 보면서 그 욕구가 해소되니 떠오르는 생각들은 아예 결이 다른 것들뿐이었다.
그럼 그도 저와 같을까? 단 한 번이라도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을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이 여기까지 치달았을 때, 강현우는 조금 낭패라는 듯이 제 턱을 감쌌다. 소리 없이 침음하던 그는 이내 굳어 있던 얼굴을 말끔히 정돈하고 희주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결론은 이랬다. 지금 당장 그와의 관계를 확립해야겠다. 하지만 말을 대뜸 꺼내려고 하니, 시시콜콜한 물음이 변명처럼 튀어 나갔다.
“왜요. 밖에 뭐 있어요?”
의도한 대로 상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짧은 침묵이 흐르는 동안 진정을 되찾았지만 별수 없이 희주의 어깨가 작게 움찔거렸다.
“아니요, 그냥… 그냥 보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데 왜 자꾸 밖만 봐요. 나 봐야지.”
“…….”
“난 희주 씨 보고 싶어서 주말까지 못 참고 여기 온 건데.”
입꼬리를 내리자 자연스레 목소리가 기가 팍 죽었다. 퍽 서운하다는 목소리였다.
“나 안 보고 싶었어요? 그러고 보니까 어제 통화할 때도 난 용기 내서 보고 싶다고 말했었는데 희주 씨는 한 마디도 안 했네요.”
“아…….”
“말 못 하겠으면 고개만 끄덕여도 돼요.”
나 보고 싶었던 거 맞아요? 그 물음에 희주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참 잘했다는 듯이 강현우가 싱긋 웃어 보였다.
“얼굴 보고 이야기하기로 한 거 있잖아요, 우리.”
그거 말하려고요.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를 돌리는 강현우의 말에, 희주는 어젯밤 애매한 곳에서 끊어야 했던 전화 통화를 떠올렸다. 마치 저와 그를 애인 관계로 묶는 것 같았던 강현우의 말 때문에 제 기분까지 이상해지고 말았던.
그랬던 통화를 하루가 채 가시기도 전에 떠올리니 부끄러움에 다른 곳을 쳐다보고 싶었지만,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는 말에 동의했던 건 자신이기에 어쩔 수 없이 우물쭈물 시선을 맞췄다.
또 한 번 크게 일렁이는 페로몬을 느끼며 속으로 웃은 강현우가 입을 열었다.
“희주 씨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요?”
포괄적인 질문에 희주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역시 포괄적인 대답을 내어 놓았다.
“현우 씨는…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강현우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 에두른 거절로 받아들여야 할지 애매해지는 답이었다.
“그러니까 희주 씨 말은, 음…….”
톡톡, 핸들을 두드리며 잠시 고민하던 강현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거절, 인 건가요?”
희주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그렇게 해석되느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구구절절 따지는 것보다는 제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고 빠를 것 같았다.
“거절이라기보다는… 이게 맞나 싶어서요.”
“어떤… 뭐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있어요?”
“네? 아니요……? 그런 건 없어요…….”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제 말이 다른 오해를 샀을까 봐 화들짝 놀란 희주는 부산스럽게 고개를 내저었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러기를 잠시, 설레고 두근거리는 것과 별개로 내내 품고 있었던 근심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저희가 원래부터 알던 사이가 아니잖아요. 서류… 통해서 기본적인 정보들은 다 알고는 있지만요.”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슬쩍 강현우의 눈치를 살폈다. 강현우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계속 말해 보라는 듯한 태도에 희주가 잠시 주저하다가 이어 말했다.
“현우 씨… 여러모로 정말 배우자로서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저흰 몇 번 만나 보지도 않았고… 아직 서로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없잖아요. 그리고… 일단 저는 단순히 연애만 할 생각으로 등록한 게 아니라서요.”
강현우는 모로 기울였던 고개를 바로 세웠다. 무언가 말이 많이 생략된 것 같긴 하지만 대강 유추해 보자면 ‘아직 서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몇 번 만나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연애를 하느냐’였다. 무엇보다 단순히 연애‘만’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은 연애를 하더라도 결혼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눈앞에 있는 남자는 이르게 찾아온 감정에 퍽 당혹스러워하면서 동시에 감정의 깊이를 중요시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제 생각은 달랐다. 감정의 깊이야 차치하고, 알고 지낸 기간이 뭐 중요한가 싶었다. 이미 서로 보고 싶어 하는 것에서 결판난 관계 아닌가.
할 말을 마치고도 여전히 혼란스러운 듯 손가락을 꼼질거리는 희주를 가만히 응시했다. 보고 싶었냐는 물음에 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저를 볼 때마다 조그만 귓불과 여린 뺨을 붉게 물들였던 걸 떠올리면 지금 당장이라도 저와 만나자고 윽박지르고 싶었지만, 강현우는 침착하게 입술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저도 아직까지 희주 씨랑 당장 결혼을 해야겠다는 결심은 안 서요.”
“아…….”
지금 스스로가 엄청나게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알고나 있을까? 보는 사람 마음이 아플 정도로 불쌍하고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데 어떻게 나한테 호감이 없어.
“근데 만나 보고 싶어요. 결혼을 전제로.”
희주의 입이 스르르 열렸다. 무언가 다른 말이라도 나올까 싶어 잠시 입을 다물었던 강현우는 너무 놀라서 나온 행동임을 알아채고 다음 말을 이었다.
“희주 씨 말대로 우리 몇 번 만나지도 않았고, 서류 외적으로도 아는 거 별로 없어요. 근데 안 보면 보고 싶고, 희주 씨랑 같이 있으면 즐거워요. 대화하는 것도, 뭔가를 하는 것도.”
“…….”
“전에 처음 만났을 때,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다음은 다음에 생각하자고 했던 말 기억나요?”
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요. 지금 모르는 거야 차차 알아 가면 되는 거잖아요. 일단은 좋아하잖아요?”
좋아해? 희주는 눈을 깜빡이는 것을 잊은 사람처럼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가 왜 올 필요도 없는 제주도에 시간, 기분까지 버려 가면서 왔겠어요.”
“……저를, 좋아해서요?”
문제의 답을 고르는 것처럼 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말투로 속삭이듯 내뱉어진 물음에 강현우가 순간 멈칫했다. 깊게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물음이면서 동시에 정답이었다.
“네.”
단호한 대답에 희주의 두 눈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내가 희주 씨 좋아하는 게 싫어요?”
“아, 아니요…….”
“그럼.”
지금껏 너무도 단호해서 괜히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던 그의 표정이 일순 허물어졌다. 주저 없이 당당하게 말을 잇던 그답지 않게 한참 침묵을 유지하며 머뭇거리던 강현우가 조금 민망하다는 듯이 큼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곤 이어 툭 뱉은 물음은 순간적으로 희주의 얼굴에 웃음이 걸리게 했다.
“그럼 우리 사귀는 겁니까?”
강현우가 조금 멋쩍다는 듯 따라 미소했다.
“유치한 것 같아도 좀 봐줘요. 나도 아는데, 괜히 말로 확인받고 싶어서.”
희주는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고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상상과는 반대로 굉장히 심각한 고백을 들은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 그의 말대로 저 역시 그와 있으면 즐겁다.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린 희주는 강현우가 원하는 답을 곧이곧대로 돌려주는 대신, 제 방식대로 왼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기념으로 손잡을까요?”
픽 웃은 강현우가 오른손을 그의 왼손 위에 살포시 올렸다. 저보다 큰 손에 가만히 시선을 떨어뜨렸던 희주가 능청스레 칭찬했다.
“현우 씨는 손도 예쁘네요.”
“별말씀을요.”
느슨하게 미소를 띤 강현우가 희주보다 먼저 그의 손을 움켜잡았다. 눈을 비비는 그의 행동을 말리느라 무심결에 잡았었던 손등보다 손바닥은 훨씬 여린 데다 따끈했다.
“그나저나, 아까 비볐던 곳은 어때요. 아직도 따끔거리고 아픕니까?”
조금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순간 강현우의 머릿속에 빨갛게 생채기가 났던 희주의 눈가가 떠올랐다. 강현우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희주가 앉아 있는 조수석 쪽으로 길게 상체를 빼고 그의 뺨을 감싸 쥐었다.
물을 마시라고만 하지 말고 생수병을 눈가에 가만히 대고 있으라고 할 것을. 그가 마다하더라도 시원한 물이 담긴 것을 새로 사 왔어야 했다. 뒤늦게 떠오른 배려에 쯧, 혀를 찬 강현우가 아픈 곳을 건드리기라도 할까 조심조심 손가락을 움직였다.
밝은 조명 탓에 그림자 진 구석을 찾기 힘들었던 로비와는 달리 이곳 지상 주차장은 주변에 있는 거라고는 희미하게 켜져 있는 가로등 불빛이 전부였다. 아무리 희주 피부가 하얗더라도 생채기 하나를 보려면 얼굴에 가까이 대고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정작 이 상황을 의식하고 있는 건 희주뿐인 듯했다. 대뜸 두 뺨을 부여 잡힌 희주는 정말 코앞까지 다가온, 방금 막 애인이 된 남자의 얼굴에 당황해 등을 빳빳하게 굳혔다.
“괜, 괜찮아요.”
“지금이라도 물 새로 사 올까요? 차가운 거 대고 있으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싶은데.”
“아니요…….”
꼴깍.
“……!”
희주는 화들짝 놀란 표정 그대로 굳어 버렸다. 혹여 제게서 술 냄새라도 날까, 숨 한번 내쉬는 것까지 신경 쓰랴 느슨해진 와중에 난데없이 목울대가 길게 가라앉았다. 입술을 작게 벌리면서 최소한 말을 적게 하려고 애쓰는 도중 입을 꾹 다물었다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켜 버린 것이다.
“왜요.”
“네?”
숨을 쉬고 있는 건 맞기나 한 건지 가냘프게 호흡을 이어 가던 희주가 민망함에 눈을 빠르게 감았다 떴다.
“술 냄새 날까 봐?”
꽃이 피듯 서서히 붉어지는 뺨은 충분히 잘 보였다. 술 냄새는 조금 나요. 근데, 정말 조금이에요. 속삭인 강현우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낮게 읊조렸다.
“희주 씨 지금, 페로몬 나오거든요.”
페로몬을 쫓듯이 아래로 내리깔려 여기저기 훑던 눈동자가 스르륵 위로 올라왔다. 시선은 어느새 다정함을 머금고 있지 않았다. 붉어진 곳을 피해 찬찬히 움직이던 손가락이 둥근 뺨을 지나 귓불 아래, 움푹 들어간 곳을 지그시 누르며 손바닥으로는 턱을 넓게 감쌌다.
저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저를 배려해 억지로 눌렀을지도 모르는 알파 페로몬이 스멀스멀 저를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희주는 무어라 말도 못 하고 움찔거리던 입술에 힘을 뺐다. 단 한 번도 제대로 겪어 본 적 없는 데다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던 것이지만 본능은 이 페로몬을, 분위기를 으레 잘 알고 있었다.
조수석 쪽으로 살짝 기울여졌던 상체가 거의 그 위를 덮치다시피 넘어갔다. 저도 모르게 손을 쭉 내민 희주가 제 등 뒤로 넘어가는 강현우의 팔을 세게 움켜쥐었다. 더는 물러설 곳조차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강현우의 고개가 각도를 트는 것이 보였다. 눈이 감기고, 입술이 포개졌다.
입술에 닿아 오는 강현우의 입술은 제 것보다 훨씬 더 뜨거웠다. 그것만으로도 꼭 집어삼켜지는 듯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숨을 흡 들이마시자, 축축하고 뜨거운 살덩이가 힘 빠진 입술 틈을 벌리고 들어왔다.
어렵지 않게 파고든 강현우는 조그만 입술을 천천히 벌려 냈다. 순순히 입맞춤에 응한 것 치고는 긴장한 듯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혀에 거침없이 다가가 질척한 소리를 내면서 문질렀다. 손으로는 뺨을 어루만지고, 다른 한 손으로는 등을 받쳤다.
조금 도톰한 감이 없잖아 있는 상의를 사이에 두고 분명 알코올 때문일 게 분명한 따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강현우는 다른 건 몰라도 제 손이 상의 아래를 들추고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손을 움직이는 대신 혀를 움직여 말랑한 입 속을 탐색했다.
놀란 듯 도망치는 것은 굳이 쫓지 않았다. 혀로는 축축하고 미끈거리는 입 안 곳곳을 훑고, 허리를 감싼 손으로는 바짝 굳어 있는 등을 살살 쓸어내리고, 뺨을 쥔 손가락으로 턱 뒤쪽의 여린 살을 애타게 문질렀다.
“……흐.”
좁은 입 안에서 움칠거리던 혀가 홀린 듯이 앞으로 미끄러졌다. 말캉하고 녹진한 혀끝이 스르륵 감기자 간지러운 듯, 한숨과도 같은 신음이 입 안에서 작게 울렸다. 강현우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약간의 알코올 향이 배어 있지만 그럼에도 특유의 페로몬이 온전히 느껴졌다.
감정적으로 동화된 알파와 오메가는 본능적으로 페로몬을 풀었다. 지금껏 늘 그래 왔던 것처럼 꾹 잠가 놓았던 페로몬이 좁은 차 안을 조금씩 채우기 시작했다. 머리가, 그리고 기분이 몽롱했다. 꿈속을 헤엄치는 것과 같은 아득함 속에서 희주는 슬그머니 혀를 움직여 어느덧 저와 비슷한 온도로 맞춰진 것에 대고 문질렀다. 열기가 가득 몰렸다.
“읏…….”
서로 끌어당기고 끌려가기를 반복하던 차에, 희주가 짧게 신음하며 몸을 떨었다. 마구잡이로 비볐던 눈가가 멀쩡하지는 않은 모양인지 강현우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다가 닿았던 눈가 어딘가가 따끔거렸다.
꾹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떠 보자, 어둠을 담은 갈색 눈동자가 닿을 듯한 거리에서 저를 보고 있는 게 보였다. 마음속 어딘가가 아니, 아랫배에 가까운 곳이 찌릿 울렸다.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을까. 민망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힌 희주가 어쩔 줄 몰라 했다.
도로 눈을 감지도 못하고 어물어물 깜빡이던 눈이 커졌다가 허겁지겁 닫힌 건, 마주하고 있던 눈매가 사르르 접히는 걸 본 후였다. 질끈 감기는 눈을 따라 뒤늦게 눈을 감은 강현우는 미안하다는 듯 뺨을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하아…….”
“하아, 흐…….”
각도를 달리하며 깊게 맞물렸던 입술이 축축한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그리 급했던 입맞춤이 아니었는데도 두 사람 모두 가쁜 숨을 색색 몰아쉬었다.
제아무리 노력했다 한들 좋아하는 사람을 향한 욕구는 다 막을 수 없었다. 맨살이 닿지는 않았지만 위로 추켜 올라간 상의를 반듯하게 끌어 내려 준 강현우는 사랑스럽다는 듯 쪽, 촉 소리를 내며 타액으로 젖은 입술 위에 제 입술을 여러 번 쪼아 댔다. 그러고는 무방비하게 드러난 목덜미에 제 코끝을 가져다 댔다.
“아…….”
희주가 작게 신음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며 달래듯 오직 코끝만으로 살결을 부드럽게 훑었다. 열성이라 페로몬 자체가 흐릿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인지 본래의 살냄새와 섞여 계속해서 맡고 싶었다.
흥분이 가시지 않는지 몇 번씩이고 바들바들 떨던 희주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허벅지 위에 툭 내려 두었던 손을 올려 제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강현우의 머리카락을 살살 문지르기도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끌어안고 서로의 페로몬을 들이마셨다.
“혹시 소취제 따로 챙겨 온 거 있어요?”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희주는 아쉬운 듯 멀어지는 강현우와 조심스레 눈을 맞췄다.
“학생들 비상 약으로 챙겨 온 거…….”
머릿속이 멍했다. 출발 전 열 번은 확인하는 바람에 머리 한구석에 박혀 버린 정보를 흐릿한 말투로 중얼거리자 다행이라는 듯 강현우가 웃었다.
“그럼 이따가 그거 잊지 말고 뿌려요.”
희주 씨한테서 지금… 내 냄새가 너무 나서. 손을 뻗은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젖어 있는 아랫입술을 눅진하게 문질렀다. 다정하고 상냥하다고만 생각했던 사람이 왜인지 위험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현우 씨…….”
“응?”
“현우 씨, 비행기 시간…….”
어느새 말갛게 젖어 버린 눈동자를 굴리던 희주가 마침 떠오른 것을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가까워지는 강현우의 얼굴을 보며 지그시 눈을 감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잠깐 애인 만날 시간은 있어요.”
뜨거운 숨이 입술에 닿기 전, 어쩐지 웃고 있는 듯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소리를 따라 눈을 뜨려고 했지만 그보다 강현우가 훨씬 빨랐다. 원래의 자리를 찾아가기라도 하듯, 가까워진 입술이 또 한 번 빈틈없이 겹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