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15)

4.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약속한 시간이 얼추 다 지나갔다. 강현우는 괜스레 미간을 찡그리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식사도 하고 가면 좋을 텐데 말이야.”

그러자 마주 보고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가 아쉬움을 금치 못하는 얼굴로 탄식했다. 그는 남아 있던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시장 바닥에서 막걸리를 사발로 들이켜는 사람처럼 벌컥벌컥.

순식간에 비워진 그의 잔에 비해, 강현우의 앞에 놓인 잔은 줄어듦 없이 직원이 가져다줬던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모락모락 올라오던 김이 사라지고 차게 식어 버린 것쯤. 남자와 대면하고 있던 시간 동안 강현우는 물만 몇 모금 마신 게 전부였다.

“아쉽지만 선약이 있어서요.”

“아아. 알지, 알지. 강 상무 바쁜 거 모르는 사람이 있나.”

강현우 역시 짐짓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다음번에는 꼭 식사 자리에서 봤으면 좋겠다며 아쉬워하는 티를 내는 남자에게, 강현우는 인사치레로 시간을 비워 보겠다고 답해 주었다.

“오늘 시간 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감사는 무슨. 그건 내가 강 상무한테 할 말인 거 모르나?”

껄껄 소리 내어 웃은 남자가 불쑥 손을 내밀어 왔다. 악수를 청하는 손을 맞잡자 불쾌하기 짝이 없는 축축함이 느껴졌다. 익숙하게 표정을 감춘 강현우는 적당히 위아래로 흔든 뒤 손을 빼 버렸다.

“저어, 조심히 들어가세요.”

이 자리를 벗어나는 대로 손부터 닦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던 이가 슬그머니 다가와 인사했다. 앳된 얼굴의 남자였다.

오늘 오전에 잡혀 있던 미팅은 CX의 장 이사가 몇 달을 애원하고 매달려 별수 없이 잡은 일정이었다. 지금으로선 굳이 만날 필요도 없어 보이는데 왜 자꾸 귀찮게 하나 했더니 되지도 않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막내아들이라고 했던가.’

강현우는 싸늘하게 시선을 뒀다. 스물 중반, 아니, 스물을 넘기기는 했을까. 과하게 어려 보이는 얼굴은 객관적인 미인형의 얼굴이기도 했다. 트로피를 자랑하는 듯한 표정으로 선 장 이사와는 닮은 구석을 찾아볼 수도 없는.

그는 두 뺨을 발그레 물들이곤 기대 가득한 표정을 한 채 두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그에게서 슬금슬금 기어 나오고 있는 페로몬에는 기대감과 설렘 따위의 감정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노골적으로 성욕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불쾌한 건 매한가지였다.

악수라도 나누고 싶은 모양이지. 속마음이 뻔히 읽히는 행동이었지만 강현우는 모르는 척, 말없이 꾸벅 고개만 숙여 보였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그래.”

장 이사는 마치 아들이라도 배웅하듯 강현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강현우는 마침 도착해 있던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재킷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든 그는 금방 장 이사와 악수를 나눴던 손을 손수건으로 감싸고 더러운 것이 묻어 있기라도 한 양 박박 문질렀다. 어디서 그런 싸구려 같은 향수를 구해다 뿌렸는지. 욕지거리가 절로 치밀었다.

같은 백영 그룹 사람도 아닐뿐더러 직급으로 치면 저보다 아래인 이사가, 나이와 처가를 등에 업고 반말이나 찍찍 해 대는 꼴은 저급함의 끝을 달렸다. 제대로 친근한 척이라도 하고 싶었던 건지 제 어깨를 툭툭 두드려 댈 땐 정말 미친놈인가 싶었다.

웃으면서 대해 주니까 정말 그게 다인 줄 아나. 주제도 모르는 새끼.

“하아…….”

한숨을 내뱉은 강현우는 어쩐지 피로가 역력한 얼굴로 목을 비틀었다.

호텔 1층에 도착해 밖으로 나오니 기사가 미리 대기 중에 있었다. 강현우가 뒷좌석에 올라타는 걸 확인한 기사는 정중히 문을 닫고, 재빨리 운전석으로 돌아와 앉았다.

“바로 평창동으로 모시겠습니다.”

네. 짧게 대답한 강현우는 시트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애써 눌러 잠그고 있던 페로몬을 풀었다. 묵직하고 따끔거리는 페로몬이 차량 내부 전체에 퍼졌지만, 베타 기사는 아무것도 모르고 운전에 집중했다. 만약 같은 형질자였더라면 운전은커녕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도 힘겨울 농도였다.

“기사님.”

“예, 상무님.”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현우가 입을 열었다. 그의 부름에 기사가 룸 미러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강현우는 눈을 감은 채였다.

“베타 부모 밑에서 형질자가 나오는 게… 아무래도 흔한 경우는 아니겠죠.”

질문에 가까운 투는 아니었지만, 2년 동안 그의 밑에서 일해 온 기사는 눈치껏 답했다.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만… 흔한 경우가 아닌 건 맞습니다.”

피식, 모양 좋은 입술이 벌어지며 조소가 흘러나왔다.

“그렇겠죠, 아무래도. 그냥, 그런 경우가 흔한가 싶어서 물어봤습니다.”

도착하면 깨우세요. 이내 그는 대화를 일방적으로 마무리했다.

CX의 장 이사가 여기저기 아랫도리를 놀리고 다닌다는 것은 공공연하게 퍼져있는 소문이었다. 본인은 근거 없는 소문이라고 해명하고 다니는 듯한데, 방금 그 근거를 목도하고 온 터라 비식비식 새어 나오는 비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부부가 모두 베탄데 그 막내아들은 오메가라. 추잡하기 짝이 없군.

강현우는 이름도, 생김새도 기억 안 나는 그저 앳된 느낌뿐이던 얼굴을 떠올렸다. 추측이 사실이라면 안됐다고 할 법한 이였지만 강현우에게는 그런 자애로움 따위를 느낄 여유는 없었다.

강현우를 태운 차량은 다음 약속 장소가 있는 평창동으로 향했다. 얼마쯤 달렸을까, 이내 부드럽게 속도를 줄인 차량은 어느 한 건물 앞에서 정차했다.

“도착했습니다. 상무님.”

기사의 말과 동시에 강현우는 감았던 눈을 느릿하게 떴다. 그저 눈만 감고 있었던 터라 정신은 멀쩡했다. 어느새 자리를 벗어난 기사가 뒷문을 잡아 주고 있었다.

긴 다리를 뻗어 차에서 내린 강현우는 풀어 뒀던 재킷 단추를 잠그며 건물 외관을 눈에 담았다. 왜 평창동인가 싶었는데 일식이 드시고 싶으셨나 보군.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서 있던 강현우는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꺼내 들었다.

“주차는 여기 직원한테 맡기시고, 기사님도 가셔서 식사하고 오세요.”

그는 뻣뻣한 자세로 서 있는 기사에게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상무님.”

“너무 급하게 안 드셔도 됩니다. 한 시간은 걸릴 테니까.”

“예.”

다녀오십시오. 뻔한 감사 인사를 받으며 등을 돌린 강현우는 유유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 *

직원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복도 가장 끝에 있는 프라이빗 룸이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 앞에 동상인 양 서서 지키고 있던 검은 양복 차림의 두 사내가 강현우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경호원이 아니라 웬 깡패 새끼들을 고용했나 싶었다. 두 사내를 차례로 훑어본 강현우는 굳게 닫힌 문을 향해 턱짓을 해 보였다. 둘 중 왼편에 있는 남자가 문을 열어 주었다.

방 안에는 여자뿐이었다. 고고하게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여자는 문이 열리자 그대로 고개만 돌려 강현우를 쳐다보았다. 차가운 인상의 그녀는 우아하고 세련된 스타일로 과하지 않게 꾸며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왔니? 앉으렴.”

“일찍 와 계셨네요.”

한 걸음 안으로 내딛자 등 뒤에서 탁, 소리를 내면서 문이 닫혔다.

“오랜만이구나.”

여자는 제 앞자리에 앉는 강현우를 건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꼭 화가 난 듯 차게 굳은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에 대한 반가움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한 번을 안 찾아오니.”

원망하는 듯하지만 애달픈 어투는 아니었다. 정말 눈앞에 있으니 볼 뿐이라는 것처럼 큰 관심 없이 가만히 바라만 보던 여자는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찻잔에 다시금 입술을 묻었다. 예상했던 태도였던지라 강현우는 별스럽지 않게 물었다.

“그래서 서운하세요?”

돌아올 대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음에도 던진 질문이었다. 강현우는 시간이 지나 미지근해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서운할 것까지는 없지. 네 나이가 벌써 서른둘인데. 독립하고도 남을 나이 아니니.”

“그런데 왜 마음에도 없는 잔소리를 하시고 그러세요.”

“나보다는 네 아버지가 문제니까.”

강현우가 대번 인상을 썼다.

“설마, 아버지 아직도 제 방 가서 눈물 짜고 그러세요?”

“이렇게 밀폐된 공간에서는 아무리 가족이라도 페로몬 푸는 거 아니란다.”

너무 냉정해 기계적으로까지 보이는 여자는 강현우의 모친, 강정연 여사였다.

“농담하시는 거죠?”

“엄마가 언제 너한테 농담하는 거 봤니?”

강 여사가 눈썹을 찡긋 올렸다.

그녀의 남편이자 강현우의 부친 되는 윤 관장은 평소 워낙 감성적인 데다가 마음까지 여린 오메가 남성이었다. 아내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두 자녀에 대한 사랑도 끔찍해서, 장성한 아들이 독립해 나가 사는 것조차 마른 눈으로 볼 수 없어 한 인물이기도 했다.

대학생 시절 해외 어학 연수를 갔을 때도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눈물 콧물 다 빼더니, 강현우가 자의로 더 머물다 들어가겠다고 연락을 넣자마자 바로 비행기표를 끊어 태평양을 무려 혼자 건너오기도 했다. 당시 머물고 있었던 뉴욕의 아파트먼트 로비에서 ‘내 아들이 여기 살고 있다니까!’ 하고 경비원과 말다툼을 벌이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집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미술관이라도 가서 얼굴 비추고 그래.”

강 여사가 말하는 미술관이란 백영 그룹 소재의 백영 미술관을 뜻하는 거였다. 윤 관장은 강 여사와 결혼한 이후 지금까지 쭉 백영 미술관에서 근무해 오고 있었다.

“이 말씀 하시려고 부르셨어요?”

“그럼 내가 뭐 하러 널 불렀겠니. 성실히 출근 잘하고 있다는 것만 들어도 생사 확인이 되는데.”

“전화로 말씀하셔도 충분하잖아요.”

“비싼 밥 먹이면 밥값을 하지 않겠니?”

우울해하는 남편 기분 좀 풀어 달라고 자리를 만든 강 여사도 예사로운 인물은 아니었다. 윤 관장이 아닌 강 여사가 매달려 연애하고 결혼에 골인한 거라는 루머가 괜히 생긴 게 아닌 듯했다. 강현우는 짧게 한숨지었다.

“그럴게요.”

“말만 하지 말고.”

“사 주시는 거 한 접시도 안 빼놓고 먹겠습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대화가 끊겼다. 더한 잔소리가 쏟아지기 전, 타이밍 좋게 음식들이 들어왔다.

식사는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간간이 젓가락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것을 제외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고아한 분위기였다.

두 모자는 입을 오로지 식사하는 용도로만 썼다. 강 여사는 윤 관장에 대한 이야기 이외의 볼일은 없다는 것처럼 굴었고, 강현우는 그런 그녀의 태도에 대해 아무런 불만을 품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보는 가족의 안부 따위는 전혀 오가지 않았음에도 누구 하나 서운해하는 이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조리 과정이 필요 없는 음식뿐이라, 식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후식으로는 과일이 준비되었다. 한 시간 정도 걸릴 거라 말해 놨는데, 기사가 돌아오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문득 강 여사가 입을 열었다.

“요즘 만나고 있는 사람이랑은 어떠니.”

그 물음에 강현우가 눈을 홉떴다.

“다 알고 계시면서 뭘 물으세요.”

공격적인 어조에 강 여사가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애랑 어떠냐고 물었지. 어떤 애인지 물었니?”

“……좋아요.”

“듣자 하니 한 셰프네 가게에도 데려갔다면서.”

“거기가 맛있잖아요.”

“그러니까. 한식은 그 집만 한 곳이 없지.”

끝이었다. 들을 답은 다 들었다는 듯 강 여사는 깔끔하게 껍질을 벗겨 낸 오렌지를 입에 넣었다. 강현우는 왜인지 모를 허탈감에 헛웃음을 흘렸다.

결국 식당에 들어간 지 한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나와 버렸다. 식사하라고 내보냈던 기사는 역시나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강 여사의 차량은 이미 가게 앞에 대기 중이었다. 과히 친절하게 배웅하는 직원들을 뒤로하고, 강현우는 강 여사의 곁에 붙어 차량 앞까지 에스코트했다.

“집에서 밥은 해 먹니?”

“집에 있을 시간도 별로 없어요.”

“너무 시켜 먹지는 마라. 몸 상하니까.”

“네.”

강 여사는 이어 별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 바로 출발할 줄 알았는데, 강 여사가 탄 쪽의 창문이 스르르 내려갔다. 강현우는 상체를 숙여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 좋아하는 반찬이랑 국 몇 개 해서 보낼 테니까 그거라도 잘 챙겨 먹으렴.”

“제가 어디 사는지는 아시고요?”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니?”

며칠 전 찾아온 강지우의 말로는 가족들 모두가 모른다고 했다지만, 강 여사만큼은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차였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거처 정도야 마음만 먹으면 알아내는 그녀인데, 자신이 만나는 이가 어떤 이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반대도, 그렇다고 찬성의 말을 들은 것도 아니지만 이만하면 됐다 싶었다. 강현우는 능청스럽게 눈썹을 으쓱였다.

“들어가세요, 회장님.”

강 여사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강현우를 빤히 응시하다가 말없이 창문을 쭉 올려 버렸다. 잘 들어가라는 그 흔한 대꾸도 없었다.

“삐지셨네.”

강현우는 멀어져 가는 차 뒤꽁무니를 쳐다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회장님이라고 불리는 게 그렇게도 싫은 모양이다.

살가운 말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실로 오래간만의 회동이었다.

* * *

날짜는 빠르게 바뀌었다. 어느덧 2학년들의 수학여행이 하루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데이트의 여운에 젖어 있을 새도 없이 희주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내일은 아침 7시 반까지 교실 말고 운동장으로 모여야 돼. 늦지 말라고 해도 한두 명씩 늦을 거 아는데, 제발 내일만은 지각생 없도록 하자. 아침에 무슨 일 생기면 꼭 선생님한테 연락 주는 거 잊지 말고. 질문 있는 사람?”

“쌤, 여권 챙겨야 돼요?”

“뭐래, 제주도가 외국임?”

소위 분위기 메이커라 불리는 아이가 장난 섞인 목소리로 타박하자, 질문한 아이가 씩씩거리며 옆에 앉은 짝꿍의 팔을 찰싹찰싹 내리쳤다. 꺄르르 여기저기서 웃음들이 터져 나왔다. 희주도 피식 웃었다. 안 봐도 뻔한 패턴이다. 비행기를 처음 타 본다는 친구에게 가벼운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늘 그랬듯 이번 수학여행지는 제주도였다. 부모님의 통제에서 벗어나 저들끼리 신나게 놀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아니면 비행기를 타고 간다는 것 때문인지 잔뜩 들뜬 아이들은 종례하는 와중에도 엉덩이를 들썩들썩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하라는 질문은 안 하고 점점 산으로 가는 듯한 소란스러움에 희주가 손뼉을 짝짝 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더 질문 없어? 없으면 얼른 집 가자. 빠트리는 거 없이 짐 잘 챙기고, 학교 빨리 끝났다고 밖에서 놀지 말고 일찍일찍 들어가서 자라. 알겠지? 자, 반장. 인사하자.”

“차렷, 경례.”

사랑합니다. 종례를 끝마치기가 무섭게 와악 터지는 소음들을 뒤로 하고, 희주는 교실을 빠져나왔다.

내일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는 일정을 신경 쓴 탓인지 오늘은 4교시 단축 수업만 있는 날이었다. 비록 월요일 오전은 수업 일정이 빽빽한 편이었지만 퇴근이 빨라져서 기분은 좋았다. 물론 오늘 못한 수업은 수학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보충 수업을 따로 잡아 진행해야 하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퇴근하고 뭐 하지?’

일찍 퇴근하게 된 만큼 자연스럽게 머리는 놀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항상 회사에 묶여 있는 직장인답게 조금이라도 쉴 틈이 생기면 알차게 놀 방법만 강구하기 마련이었다. 늘 홀로 휴식을 취하거나 여나연과 조한희 커플과 여가를 함께 하던 희주였지만, 오늘은 머릿속에 다른 사람이 떠올랐다.

연락해 볼까. 희주는 바지 주머니 위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일찍 퇴근한 건 저에게나 해당되는 일이지, 지금쯤 강현우는 바쁜 업무 일정에 치이고 있을 터였다. 오늘은 아침부터 외근 일정이 두 개나 잡혀 있다고 했었으니까. 게다가 오후에는 급히 잡힌 출장 때문에 공항도 가 봐야 한다고 했었다.

문득 어젯밤 잠들기 전에 했던 통화 내용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 맞아. 저 이번 주는 약속 잡기가 좀 어려울 것 같아요.”

―무슨 일 있습니까?

“큰일은 아니고요. 수학여행 가거든요.”

―흠……. 어디로 가십니까?

“제주도요. 작년 2학년들은 싱가포르 다녀왔다는데 올해 2학년들은 특이하게 제주도 가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며칠 동안 가는데요?

“3박 4일이요.”

―……신기하네요. 마침 저도 급하게 제주도 출장이 잡혔는데. 월요일에 가서 목요일 밤에 옵니다.

“아, 일정이 조금 겹치네요. 전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거든요.”

―음. 그래요.

수학여행에 최적으로 짠 동선과 일정이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지만, 우연히 한 번쯤 마주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희주는 오늘 아침 이후 새 메시지 없이 멈춰 있는 메신저 대화 창을 내려다보며, 연락이 오면 동선이라도 한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희주 쌤. 쌤네 반은 자습하는 애 없죠?”

교무실로 돌아온 희주에게 상냥히 말을 건넨 건 옆 반 담임 교사였다. 출산까지 겨우 두어 달 정도 남았다는 그녀는 2학년 담임 교사 중 유일하게 수학여행에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대신 학교에 남아 수학여행을 가지 않고 자습을 자처한 학생들의 관리를 맡기로 했다.

“네. 스물다섯 명 다 수학여행이요.”

인솔 교사에게 단체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원수 체크다. 이미 몇 번씩 확인한 사항이고, 헷갈릴 이유도 없었지만 희주는 제 자리 한구석에 붙여 둔 포스트잇을 톡 떼어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노란색 포스트잇에는 수학여행에 참여하는 인원과 참여하지 않는 인원을 가리키는 간단한 숫자가 적혀 있었다.

“참여 스물다섯 명, 비참여는 없고요.”

그녀는 들고 있던 종이에 간단히 체크하듯 펜을 놀리곤 희주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했습니다. 내일 잘 다녀오세요.”

“넵. 쌤도 수고하세요.”

빙긋 눈인사를 나눈 뒤, 희주는 누가 붙잡기라도 할까 후다닥 짐을 챙겨 학교를 빠져나왔다.

* * *

집 앞 편의점에 들러 여행용 세면 도구 키트 같은 것들을 간단히 사 가지고 들어온 희주는 밀린 집안일부터 싹 해치웠다. 세탁기를 돌리고, 햇볕에 바짝 마른 옷들을 차곡차곡 개어 넣었다. 딱히 무언가가 들어 있는 건 아니지만 냉장고도 청소했다. 청소기도 돌리고, 물걸레로 바닥도 닦다 보니 거실 창 너머로 어렴풋이 해가 져 가는 것이 보였다.

희주가 바삐 움직이는 동안에도 강현우로부터의 연락은 없었다. 많이 바쁜가. 청소하느라 집 안 여기저기를 누비면서 몇 번씩 확인하기는 했지만, 하루 반나절이 지났는데도 연락이 없으니 괜한 실망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허기도 함께. 기껏 청소까지 해 놨는데 부엌을 어지럽히고 싶지는 않아서 간단하게 먹고 치울 수 있는 햄버거를 시켰다.

패스트푸드와 배달 강국 코리아의 조합은 역대 최단 배달 완료 시간을 달성했다. 감자튀김 한 가닥 남기지 않고 야무지게 배를 채운 희주는 부른 배를 꺼트릴 겸 수학여행에 가져갈 짐을 챙기기 위해 붙박이장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비닐에 꽁꽁 쌓인 채 1년 묵은 캐리어를 꺼내 왔다.

희주는 가방을 거실 한가운데에 펼쳐 두고 필요한 짐들을 차근차근 챙겨 넣기 시작했다. 옆에는 냉장고 청소를 빌미로 꺼낸 맥주가 한 캔 놓여 있었다.

캐리어는 반 정도 채우고, 맥주는 반쯤 비워 갈 때쯤이었다.

소파 어딘가에 대충 던져 놨던 휴대폰이 지잉지잉 울리기 시작했다. 정적뿐이었던 거실을 요란하게 일깨우는 진동 소리에 깜짝 놀란 희주가 두 눈을 크게 떴다. 평소 타인으로부터의 연락이 뜸한 휴대폰이지만, 최근 들어 이 시간에 제게 전화를 거는 이가 딱 한 사람 있었다. 희주는 개던 옷을 내팽개치고 휴대폰부터 찾아 확인했다.

“……아.”

한껏 기대를 품었던 얼굴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액정에 뜬 이름을 가만히 노려보던 희주는 수신 버튼을 누르고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아쉬움을 못내 감추지 못한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툭 튀어 나갔다.

“왜.”

―뭐 해?

전화를 건 이는 다름 아닌 여나연이었다. 희주는 소파에 털썩 등을 기대고 앉아 목덜미를 벅벅 긁어 내렸다.

“짐 챙겨.”

―어디 놀러 가?

“내일부터 수학여행이라.”

―아, 벌써 그 시즌인가? 근데 이거 말하는 싸가지가 왜 이 모양이야.

기다리는 전화라도 있었나 봐? 누군데에? 누구야아? 여나연이 성대를 배배 꼬기라도 한 것처럼 능글능글 짓궂은 목소리로 놀려댔다. 맥주 캔을 끌어오던 희주는 “아니거든……”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나저나 왜 전화했어?”

―뭐, 그냥. 이유가 있어야 전화하냐? 그냥 오랜만에 전화했지.

“한희 누나는?”

―오늘 팀 회식이래. 그래서 나도 혼술 중. 밥 먹었어?

“방금. 햄버거 먹었어.”

여나연은 어색하게 말을 돌리려는 시도를 눈 감고 넘어가 주었다. 두 사람은 휴대폰을 사이에 두고 맥주를 한 모금씩 목 뒤로 넘기며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대화들을 나눴다.

약 한 달 전, 청첩장을 받기 위해 만났던 날 이후로 별다른 연락을 주고받지 않은 터라 서로 안부를 묻는 것만으로도 긴 대화가 이어졌다.

“아, 맞어. 너 그때 선본다는 거 어떻게 됐어? 혹시 내가 묻지 말아야 되는 거였으면 미안.”

문득 기억났는지 어떻게 됐냐고 묻는 그녀에게 희주는 주저하다가 지금껏 있었던 일들을 요약해 전달했다. 물론 첫 만남 때의 제 잘못은 쏙 빼놓았다. 그건 좀 쪽팔리기도 하고, 섣불리 말했다가 어떤 잔소리를 들을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나연은 듣는 내내 호들갑스러운 경탄을 멈추지 않았다. 희주가 무슨 말만 할 때마다 감탄사에 가까운 추임새를 넣어댔다. 그러던 그녀가 끝내 참지 못하고 빼액 소리를 내지른 건, 희주가 망설임 끝에 털어놓은 그 문제의 대화 때문이었다.

―야, 그거 완전 사랑 고백 아니야?

귀를 찌를 듯한 고성에 희주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스피커폰으로 전환을 해 둬서 망정이지 평소대로 통화했더라면 귀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받을 뻔했다.

“어딜 봐서 그게 사랑 고백이야.”

―그게 사랑 고백이 아니면 뭐야! 눈 감고 들으면 프러포즈다, 프러포즈!

이걸 왜 눈감고 들어……. 그렇게 들으면 다르게 들리는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유달리 목청이 크다. 혼자 술을 마시고 있다더니 아무래도 알코올 때문인 듯했다. 희주는 시끄럽다고 지적하는 대신 휴대폰 볼륨을 낮췄다.

게다가 딱히 저 호들갑에 반박할 말도 없었다. 저 역시 강현우가 3월, 10월을 운운할 때 고백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정신을 못 차렸었으니까. 정말 내일이라도 당장 결혼 준비를 시작하자고 할 것 같은 진중함에, 농담이라면서 은근슬쩍 다음을 기약하는 야살스러움은 지금 떠올려도 속에서 열이 오를 정도였다.

―야, 근데 그 남자 진짜 대박이다. 사람 정신 쏙 빼놓고는 농담이라고 발 빼는 게 아주 수준급이네. 잘생겼냐?

“그건 왜 궁금한 건데.”

―못생긴 게 그러면 개꼴깝이거든.

“잘생긴 사람이 그러면?”

―존나 유죄. 사형감이기는 한데 그 사람이 또 너한테 진심이면 박수받아 마땅하지. 근데 내가 보기엔 그 사람 완전 너한테 폴링 인 럽 한 듯. 그러니까 박수갈채.

“제발 오버 좀 떨지 마…….”

진짜 박수라도 치고 있는 건지 방정맞은 웃음소리와 함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희주는 마른세수를 하며 얼굴을 가렸다. 어차피 보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제가 다 부끄러웠다.

―크으, 안 본 사이에 우리 권희주 선생님이 연애 사업을 하고 계셨네. 언니 오면 말해 줘야겠다. 담에 만나면 축배도 갈기고.

여나연은 꼭 온탕에 들어간 아저씨 같은 소리를 내며 난리 법석을 떨어 댔다.\

―지금 뭐, 세 번 만났다고?

“어? 어, 세 번. 맞선 봤던 날까지 포함해서.”

―오옹. 그럼 다음에 만났을 때 아예 그냥 자 봐.

“……뭐?”

―자라고! 생각보다 이거 되게 중요한 문제다? 섹스가 얼마나 연인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 게다가 베타도 아니고 알파랑 오메가면 더해. 속궁합도 속궁합인데 페로몬 궁합도 잘 맞아야 서로 만족스러운…….

“야, 야! 알겠으니까 그만, 그만. 무슨 대화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

―어웅, 순진한 척은. 알 거 다 알면서.

흐흐, 시종일관 변태 같은 웃음을 흘려 대던 여나연이 갑자기 목소리를 깔더니 말을 바꿨다.

―야, 야. 나 이제 끊어야겠다. 한희 언니 전화 왔어. 데리러 오라고 하나 봐.

“어, 제발. 제발 끊자.”

―어휴, 아쉬우면서 앙탈은.

끝까지 저를 놀리지 못해 안달인 말투에 머리가 지끈지끈거렸다. 어서 전화를 끊고 짐이나 마저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몸을 반쯤 일으켰을 때였다.

다음에 얼굴 보는 건 결혼식 때겠다면서 전형적인 마무리 멘트를 하던 여나연이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얘가 이럴 때마다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건 10년 지기의 촉이었다.

―아, 맞아.

“왜? 또 이상한 말 하면 끊는다.”

―아, 이건 다른 말이야. 너네 학교 수학여행 제주도로 가나?

“응.”

―그럼 올 때 벌떡주 좀 함 사 와 봐.

벌……. 뭐? 순간 귓전에 박힌 요사스러운 단어에 희주가 인상을 썼다. 꾸깃꾸깃 구겨진 표정을 알 리가 없는 여나연은 쭉 대수롭지 않게 말을 늘어놓았다.

―전부터 한번 마셔 봐야지, 봐야지 했는데 친구 덕 좀 보자. 얼마나 효능이 좋길래 이름부터가 벌떡주인지 확인 좀 해 봐야…….

“끊는다.”

희주는 뒷말은 듣지도 않고 툭 끊어 버렸다. 허겁지겁 손가락을 미끄러뜨려 액정을 두드리자 통화가 종료됐다는 화면이 깜빡거리다가 사라졌다.

희주는 경악스럽다는 듯 꺼진 액정을 노려보았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얘 마지막에 웃고 있었지? 다급하게 전화를 끊을 때쯤 분명 참지 못한 웃음기가 목소리에 덕지덕지 묻어나 있었다. 아마 지금쯤 여나연은 제 반응을 곱씹으며 낄낄거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또 전화 오면 그땐 아예 수신 차단해 버려야지, 하고 마음먹은 찰나에 다시 진동이 울렸다. 다행히 이번에는 기다리고 있던 이의 이름이 떠 있었다. 희주는 저도 모르게 반가워 죽겠다는 투로 밝게 전화를 받았다.

“현우 씨!”

―희주 씨. 어디예요? 집이에요?

희주는 휴대폰을 귓가에 바짝 대곤 편안하게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무릎을 접어 안았다.

“네. 지금 수학여행 짐 싸고 있었어요. 현우 씨는요? 공항 도착했어요?”

다정한 목소리 사이에 공항에서나 들을 법한 안내 방송이 얼핏 들리는 듯했다. 강현우는 이제 막 체크인을 마치고 비행기 타기 직전이라며, 이제야 연락을 했다고 퍽 미안해했다. 일정에 없던 출장이 갑자기 생기면서 일정이 제대로 꼬여 버렸다고.

이렇게 미안해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희주는 황급히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미안해요. 이제 또 금방 비행기 타야 해서 길게 통화 못 할 것 같아요.

“비행기에서 통화하는 게 더 민폐잖아요. 제주도 도착하면 바로 숙소 들어가세요?”

희주의 물음에 강현우가 곤란하다는 듯 “아……” 하고 말끝을 흐렸다. 뒷말을 듣지 않아도 대강 짐작이 가는 반응이었다. 바로 일하러 가는구나. 희주는 어쩐지 그가 안쓰러워져 눈썹을 늘어뜨렸다.

“피곤하시겠다.”

―음, 조금요.

“비행기에서 조금이라도 눈 붙이세요.”

―그럴게요. ……아, 희주 씨 잠시만요.

……님, 비행기 시간이……. 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멀찌감치 떨어뜨렸는지 강현우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비행기 시간이 다 됐다고 알리는 듯했다. 워낙 여러 소리가 섞여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강현우는 상대와 잠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강현우가 조금 더 곤란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희주 씨.

“비행기 시간 다 됐나 봐요.”

―……아. 들렸어요?

“조금요. 이제 들어가 보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음, 네.

이제 그만 끊어야 하는 건 알고는 있지만, 못내 아쉬워서 끝인사를 꺼내지 못했다. 그건 수화기 너머에 있는 강현우도 마찬가지였다.

강현우는 복잡한 공간 한가운데에 서서 유일하게 정적인 상대에게 집중했다. 아예 안 실장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얼른 움직여야 늦지 않는다고 홀로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못 본 체했다. 나지막이 들려오는 목소리가 끊길 때마다 새액새액 가는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 저기.”

숙소가 어디에 있냐고 물어나 볼까. 불쑥 고개를 든 생각에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거렸다. 그러나 이내 휘휘 저어 날려 버렸다. 물어서 뭐 해. 만나러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희주는 입술 끝을 당겨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밝은 목소리를 냈다.

―희주 씨?

“아니에요. 그냥, 힘내시라고요.”

응원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지, 낮게 깔린 웃음소리가 나직이 넘어왔다. 왜인지 귓불이 간지럽다는 느낌이 들어, 희주는 휴대폰을 든 손을 바꿔 들고 귓불 아래 목덜미에 손톱을 세워 긁었다. 이후로 귓불을 감싸 쥐어 문지르기까지 했는데, 이상하게도 확실히 어디서 간지러움이 느껴지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홧홧하게 달아오른 목덜미만 손바닥으로 덮어 꾹꾹 눌렀다.

―짐 챙기고 바로 잘 거죠?

“네. 내일 교사들은 7시까지 학교 가야 해서…….”

―그래요? 그럼 잘 자라는 말은 지금 해야겠네.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지 강현우의 목소리를 둘러싼 잡음이 조금씩 멀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잘 자요.

그의 인사말이 들렸을 땐, 이외의 다른 소리들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집이 너무 조용해서 그런 걸까? 희주는 적막이 감도는 거실을 눈으로 훑다가 입술을 달싹거려 조용히 속삭였다.

“현우 씨도요.”

두 사람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잠시 동안 멈춰서 서로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전화는 아주 조용히 툭 끊겨 버렸다.

* * *

같은 시각, 강현우가 희주와 통화를 하는 동안 그런 그를 뒤에서 노려보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상무님. 비행기 시간이 곧이라서 지금 바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백영 그룹 강현우 상무 비서실 소속, 안 실장이었다.

안 실장은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는 물론 공항에 도착한 이후 지금까지 줄곧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겨우 구한 항공권이건만, 상사라는 인간이 보딩 타임이 가까워지든 말든 천하태평 하게 휴대폰만 붙잡고 있다 보니 안 실장의 속이 여간 타들어 가는 것이 아니었다.

연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던 안 실장은 결국 큼, 하는 헛기침으로 기척을 냈다. 아직까지도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강현우에게 바투 다가가자, 강현우는 통화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고선 무슨 일이냐고 묻듯 저를 쳐다보았다. 안 실장은 조심스럽게 이어 말했다.

“이 비행기 놓치면 다음 일정 어려워지십니다…….”

그러자 마뜩잖은 대답이 돌아왔다.

“일정은 무슨. 나 간다고 꼬리 흔들러 나오시는 분들 구경밖에 더 됩니까?”

“그래도, 안 가시기에는 그쪽 성의가 있지 않습니까…….”

“누가 안 간다고 했나……. 가서 얼굴만 비추고 오면 되죠? 가요. 일단 이 통화부터 마무리하고.”

상무님은 제 대답은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저리 가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내가 파리야, 뭐야. 졸지에 파리 취급을 받았지만, 대놓고 표정을 썩히지는 못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시간이 촉박한 것은 아니었다. 안 실장은 혹여 어렵게 구한 비행기를 놓치기라도 할까 스스로 괜한 우려를 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늘 완벽함을 추구하며 일을 하다 보니 몸에 배어 버린 일종의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가겠다는 말을 강현우의 입을 통해 직접 들어서인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안 실장은 강현우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제주공항에 도착하고 난 뒤의 타임라인을 다시 한번 체크했다.

안 실장은 상사의 제주도 출장 동행을 앞두고 있었다. 사실 말이 출장이지, 시간이 남아도는 기업체 임원들의 친목 골프 여행이나 다름없는 일정이었다. 저 듣기 좋은 소리만 늘어놓는 인간들과는 상종하기도 싫다고 한 게 본인이면서, 왜 갑자기 가겠다고 마음을 바꾼 건지 통 모를 일이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바로 어젯밤에 변덕을 부리시는 바람에 안 실장은 출근하자마자 스케줄을 손보고, 제주도행 항공편을 알아보고, 이와 별개로 원래 해야만 하는 일들까지 소화하느라 온몸이 피곤에 절어 있었다. 급한 대로 챙겨 나온 가방에는 짐이라고 할 것도 없어서 당장 필요한 것들은 사서 써야 할 판이었다.

“짐 챙기고 바로 잘 거죠?”

누구 덕분에 짐도 못 챙기고 왔는데 이게 무슨 소리야. 안 실장은 의아함에 눈을 비비다 말고 홱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에 크게 놀라 굳어 버렸다.

“그래요? 그럼 잘 자라는 말은 지금 해야겠네.”

방금 전까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상무님이 예의 그 다정한 얼굴로 변모해서는 웬 간질간질한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방해하지 말라는 듯 금방 등을 돌리는 바람에 표정은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만은 여과가 없었다.

안 실장은 저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벌어진 입을 미처 다물 생각도 못 하고, 안 실장은 여전히 휴대폰만 붙잡고 있는 강현우를 멍하니 응시했다.

“잘 자요.”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다정한 상무님이라니. 물론 평소 상무님이 직원들을 대하던 태도가 박했던 것은 아니지만, 방금 목도한 건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다정함이었다. 정신이 멍해졌던 안 실장은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작게 헛웃음을 쳤다. 최근 며칠 동안 상무님이 내려온 지시들이 지금 이 상황과 연관이 있는 듯했다.

갑자기 웬 상영관 하나를 통으로 대관하게 시키지를 않나. 제가 사는 집의 한 달 치 월세가 곧 예약금인 레스토랑을 연달아 예약하라고 했다가 당일 취소를 주문하는 기이한 일을 벌이기도 했다.

그뿐인가. 평소에는 투자한 영화가 언제 개봉을 하든 말든 신경도 안 쓰셨던 분이 VIP 시사회 티켓을 구해 놓으라고 해서 계열사에 전화를 돌리게 만들었고, 갑자기 국산 도라지며 배를 찾으시는 바람에 비서실 막내가 농장으로 외근 간 적도 있었다. 거기에 어제는 백화점 측에서 다급한 연락이 왔었다. 사전에 언질도 없이 오셔서는 스카프며, 손목시계 등을 구입해 가셨다고.

혹시 전에 맞선 본 분과 잘되어 가고 있는 건가? 내로라하는 기업 자제분들이 찾아와도 보는 제가 민망할 정도로 내치시던 분이? 오늘 아침, 혹 상무님이 연애라도 하는 것 아니냐며 쑥덕이는 직원들에게 쓸데없는 말 말라며 한 소리 했더니만. 아무래도 그 소문이 사실인 듯했다.

“안 실장님.”

이윽고 통화를 마친 강현우가 안 실장을 불렀다. 한참 가늘게 뜬 눈으로 강현우를 쳐다보던 안 실장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지레 찔려 어깨를 들썩이며 다가갔다. 내가 봤어. 봤다고. 분명 멜로 눈깔이었어.

“예, 상무님.”

“내일 오전에 김포에서 제주 가는 비행기 중에…….”

무언가 지시를 내릴 것 같은 서두에 안 실장은 허겁지겁 탭을 꺼내려 들었다. 그러나 무언가 또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강현우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됐고, 내일 비서실 직원들 자택 주소나 받아 놓으세요. 제주도에 있는 동안 선물로 보낼 만한 거 알아 놨다가 택배로 돌리고. 제주도가 뭐 갈치가 유명하다면서요.”

“예? 예…….”

“대답이 왜 이렇게 시원찮아. 안 실장님은 해산물 안 좋아해요?”

예상 못 한 지시에 벙벙한 표정을 짓던 안 실장이 얼른 부정했다. 강현우는 별다른 지적 없이 휴대폰으로 관심을 돌렸다. 안 실장은 슬쩍슬쩍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무표정한 얼굴을 살폈다. 겉으로 크게 티가 나는 건 아니었지만 분명 오늘 하루 중 기분이 가장 좋아 보였다. 상무님의 통화 상대가 진짜 그의 애인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점차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휴대폰에서 시선을 뗀 강현우가 이내 “아” 하고 또 한 번 안 실장을 돌아보았다. 안 실장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귤도 한 박스씩 보내세요.”

그래도 제주도 하면 귤이지. 강현우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성큼성큼 게이트를 향해 나아갔다.

노비를 하더라도 대감집 노비가 되라고 했던가. 그래. 삯 많이 주는 주인님이 최고지. 주인님이 연애를 하든 말든 저와는 상관 없는 일이었지만, 정말 연애하느라 기분이 좋으신 거면 제발 연애 전선에 이상이 없기를 바랐다.

안 실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상무님의 뒤를 쫓았다.

<러브 매칭>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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