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15)

3.

차가운 음료 한 잔 마신 것 가지고 걸리지도 않은 감기 걱정을 받은 그날 저녁과는 달리,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지금 한낮은 여름과 다름없었다. 날씨는 고작 이틀 만에 여름에 바짝 다다라 있었다.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날씨 패턴을 한낱 인간 따위가 제대로 예측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5월 중하순 정도로 예정되어 있던 하복 혼용 기간을 1, 2주 정도 앞당기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이 교무실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교사의 눈을 피해 하복을 입고 다니는 몇몇 아이들을 잡아 혼내는 것도 더는 무리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체질상 더위를 잘 타지 않는 희주도 혼잣말로 덥다고 중얼거릴 정도면 말 다 한 셈이었다.

10년 주기로 사람 체질이 바뀐다고들 하는데 지금이 딱 그럴 땐가 싶었다. 서른 먹은 해의 절반가량이 지나가 버린 달력을 보며, 희주는 이 더위의 기폭제였을지도 모르는 이틀 전 만남을 떠올렸다.

“조심히 들어가요.”

“……네.”

“아, 희주 씨.”

“네?”

“도착하면 전화할게요.”

날씨가 더위로 무르익는 동안 두 사람의 관계도 한층 더 발전했다고 볼 수 있었다. 문자 메시지로만 주고받던 연락이 전화 통화로까지 범위를 넓혔으니.

언제 전화가 걸려 올지 몰라 희주는 집에 도착하는 대로 씻고 나왔다. 다음 날이 주말이 아닌 평일이기에, 출근을 위해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면서도 침대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을 계속해서 힐끔거렸다. 까만 액정이 환하게 켜지며 기다리던 이의 이름이 뜬 것은,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을 때였다.

바스락거리는 이불의 마찰음과 함께, 수화기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었느냐는 장난 섞인 물음이 넘어왔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강현우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희주는 아니라고 대답하면서도 긍정하듯 고개를 수그렸다. 잔뜩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강현우가 숨죽여 웃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날 밤, 잠기운이 덕지덕지 묻은 건 두 사람 모두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통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 다음 날, 그러니까 바로 어제. 퇴근 이후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따끈해진 휴대폰을 내려놓았을 때는 장장 세 시간이 흘러 있었다. 원래 처음만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쉽다는데 딱 그런 상황이었다.

딱히 영양가 있는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다.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밥은 먹었는지, 거리낌 없이 물을 수 있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주말에 만나 뭘 할지 의견을 나눴다. 쉽게 대답을 꺼내지 못하는 희주 대신 강현우가 ‘영화 볼래요?’ 하고 묻더니 최근 개봉한 영화를 주욱 읊어 주었다.

아무래도 영화가 데이트의 정석이기는 했다. 희주는 눈앞에 강현우가 있는 것처럼 고개만 끄덕였다가 ‘희주 씨?’ 하고 부르는 소리에 다급히 긍정의 답을 내놓았다.

영화 보고 나서 밥 먹으러 가면 되려나. 영화관 근처에 밥 먹을 만한 곳이…….

“선생님.”

강현우가 미리 예매했다면서 보내 준 모바일 티켓에는 동네에서 멀지 않은 영화관 지점명이 나와 있었다. 희주는 휴대폰을 켜서 근처 맛집을 검색했다가 저를 부르는 앳된 목소리에 번뜩 고개를 들었다.

“아, 다연이 왔어?”

보고 있던 휴대폰을 뒤집어 둔 희주는 저를 부른 학생 방향으로 의자를 뱅글 돌렸다.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학생의 목에는 ‘최다연’ 이름이 적힌 학생증이 걸려 있었다. 희주가 담임을 맡은 반의 반장이었다.

“가서 이것 좀 애들한테 한 장씩 나눠 줄래?”

희주는 책상 한편에 쌓아 둔 갱지 묶음을 내밀었다. 반듯하게 인쇄된 가정 통신문이라는 글자 밑에는 곧 떠날 수학여행에 대한 주의 사항이 간단히 나열되어 있었다.

“네” 하고 짧게 대답한 다연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피어올랐다. 선생님 앞이라고 꾹 참는 듯해 보이지만 숨길 수 없는 설렘이 읽혔다.

“그리고 오늘은 종례 없으니까 청소 구역 확인만 받고 바로 가면 된다고 해 줘. 선생님한테 따로 전할 말은 없지?”

“네, 없어요.”

“그래. 그럼 다음 주에 보자.”

“네에. 안녕히 계세요.”

잘 가. 작게 손을 흔들어 준 희주는 벽시계를 확인하고 일어나 뒷정리를 했다. 마지막으로 펼쳐 뒀던 노트북을 닫고, 교무실 선생님들께 꾸벅꾸벅 인사를 돌린 뒤에야 유유히 건물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희주 쌔앰.”

마침 배예은 선생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 역시 퇴근하는 길인지 학교 안에서만 신는 슬리퍼가 아닌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어깨에는 까만 크로스 백이 걸려 있었다.

“지금 퇴근해요?”

배예은이 차 키가 달린 고리를 손가락에 끼운 채 빙글빙글 돌렸다. 납작한 타원형의 스마트키가 딸그락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내가 가는 길에 태워 줄까요?”

“아, 괜찮아요. 저 따로 들렀다 갈 데가 있어서요.”

에두른 거절에 배예은이 그럼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녁 약속이라도 있어요? 저는 집 가서 치킨 먹으려구요. 가자마자 먹으려고 도착하는 시간에 맞게 짠, 미리 시켜 놨답니다.”

교사와 방문자 전용 주차장은 정문 바로 옆에 있었다. 서로 가는 방향은 같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함께 정문으로 향하는 동안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희주는 눈앞으로 들이밀어지는 배예은의 휴대폰에 힐긋 시선을 뒀다가, 약속이라도 있냐는 물음에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저녁 약속은 아니고요. 그냥…….”

“아아.”

배예은이 불현듯 깨달음의 소리를 냈다. 바짝 들이밀었던 휴대폰을 거둬들인 배예은이 무언가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희주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 페로몬 주인 만나러 가는구나?”

음흉하고도 장난기 넘치게 미소 지은 배예은이 어깨를 바짝 붙여 왔다. 알 만하다는 듯, 흐응 콧소리를 내면서 희주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혹여 하교하는 학생들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할까, 손날을 세워 입을 가리고 목소리를 줄이는 것은 잊지 않았다.

“불금에 데이트라니……. 부럽다아.”

진심이 담뿍 담겨 있는 말에 희주는 멋쩍게 웃음 지었다. 그녀가 말하는 ‘페로몬 주인’은 강현우를 지칭해 하는 말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강현우에 대해 어림잡을 수 있는 것은, 그저께 자신이 묻혀 왔다가 미처 지워 내지 못한 페로몬 탓이었다.

차량 검사를 맡겼다면서 오래간만에 버스를 타고 출근한 배예은은 학교 앞 출근길에서 마주친 희주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더란다. 비록 쥐꼬리만 한 양이기는 했지만, 분명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는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희주에게 묻어 있었다.

“희주 쌤한테서 알파 냄새 나요.”

“……네?”

“심한 건 아닌데, 괜한 말 나올 수도 있으니까 없애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당황한 배예은은 인사를 하다 말고 황급히 희주를 골목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가방을 뒤져 나온 소취제로 알파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 주었다.

다행히 미미하게 묻은 정도라, 이상하게 생각할 이들이 많지는 않겠다만 학교라는 장소 특성상 보수적으로 대할 필요는 있었다. 미혼 형질자 교사가 웬 낯선 페로몬을 묻히고 돌아다녔다가는 교사와 학생들은 물론이고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이상한 소문이 돌 수 있었다.

그냥 몇 시간 같이 있으면서 묻은 페로몬은 가만히 두면 자연히 날아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났는데도 남아 있을 정도라니, 흔한 일이 아님은 틀림없었다. 그건 아마도 강현우가 우성 알파라 그런 듯싶었다. 우성 형질의 페로몬이 새삼 놀라우면서, 그나마 배예은에게 걸린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잘못 짚어도 제대로 잘못 짚었다. 오늘은 강현우를 만나기로 한 날이 아니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희주는 여전히 멋쩍어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머니 만나러 가는 거예요.”

희주의 시선이 정문 바깥쪽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 * *

희주가 자립 이전까지 약 15년을 먹고 자란 성당 보육원, 그러니까 ‘사랑의 집’은 희주의 집에서부터 한 시간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여기서 한 시간이란, 중간에 환승하고 걷는 시간을 제외한 것이었다. ‘사랑의 집’은 한 번에 가는 교통편이 없어서 중간에 한 번 갈아타야 하는 데다, 내려서도 긴 오르막길을 오르는 수고를 더해야만 하는 외진 곳에 동떨어져 있었다.

대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달에 한두 번씩은 갔었는데, 직장을 다닌 후부터는 멀고 바쁘다는 핑계로 발길을 줄인 곳이었다.

버스 배차 간격도 무자비하게 길어서 한 번 놓치면 꽤 난감해지는데, 다행히 오늘은 타이밍 맞게 바로바로 탈 수 있었다. 마을버스에서 내린 희주는 멀리 자그맣게 보이는 성당 건물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한숨에는 늦지 않게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아직 갈 길이 남아 있다는 막연함이 한데 섞여 있었다.

“하아……. 허으, 후.”

그리고 20분 후, 성당과 마주한 희주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어릴 땐 올라갈 때도 잘만 뛰어서 올라갔던 것 같은데. 그땐 어떻게 그랬지? 이게 30대의 체력인가. 앞으로 운동 좀 해야겠다는 겉만 번지르르한 다짐을 하면서 밭은 숨을 골랐다.

하지만 이렇게 힘이 든 건 짐이 많은 것도 한몫했다. 희주의 양손에는 편의점 로고가 크게 박혀 있는 흰 봉투 서너 개가 한가득 들려 있었다. 언덕을 오르기 전 조그만 마트에 들러 샀던 과자며, 젤리, 아이스크림 같은 간식들이었다.

후. 크게 숨을 몰아쉰 희주는 성당 건물 옆을 지나 어느 가정집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번지수가 적혀 있는 팻말 위로 ‘사랑의 집’이라고 각인된 현판이 걸려 있었다.

곧장 초인종을 누르려던 희주는 대문 안쪽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몇 걸음 물러서서 담장 가까이로 다가갔다. 고개를 빼고 안쪽을 들여다보자 마당을 누비며 놀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녁 식사 이후 학교 숙제를 하고 있어야 할 시간인데, 숙제는 뒷전이고 노는 데 정신 팔린 녀석들이 분명했다. 저 녀석들. 웃음을 머금은 희주가 담장 너머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제일 늦게 들어가는 사람, 아이스크림 형아가 다 먹는다.”

보육원에서는 듣기 힘든 성인 남자의 목소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이들이 번쩍번쩍 고개를 들었다. 작은 머리통들이 미어캣처럼 휙휙 같은 방향으로 돌아갔다. 오래지 않아 아이들은 담장 위로 솟은 낯익은 얼굴을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반가움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대문 앞까지 앞다퉈 달려오는 아이들을 확인한 희주는 얼른 대문 앞으로 다가가 섰다.

“와! 희주 형아다!”

“희주 오빠!”

대문을 열어 준 건 근처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은 나영이었다. 팔뚝만 하던 갓난애가 그새 훌쩍 자라 눈높이 차이가 확 줄어 있었다. 한 걸음 안으로 발을 내디딘 희주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나영을 위아래로 훑었다.

“너 왜 지금 집에 있어? 야자 안 해?”

“아우, 여기까지 와서 잔소리야? 나한테는 오빠지, 선생님 아니거든요?”

“대답 피하지 말고.”

희주가 손을 뻗어 나영의 앞머리를 헝클였다.

“아, 오빠! 이거 엄청 공들인 뽕인데!”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부여잡으며 꽥 소리를 지르는 나영은 여느 고등학생과 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형아, 이거 뭐야?”

“먹어두 돼요?”

허리까지도 오지 않는 어린애들의 관심은 양손 무겁게 들린 봉투로 향해 있었다. 그중에는 처음 보는 얼굴들도 몇 있었다. 낯선 이를 향한 호기심과 결핍이 어려 있는 눈빛들에 슬쩍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으려고 했다.

“안 돼! 방금까지 흙 만지던 손으로 먹으면 배 아야 한다고 누나가 전에 말했다?”

다행히 그럴 틈도 주지 않을 정도로 아이들은 산만했다. 나영이 허리에 손을 얹고 짐짓 엄하게 호통을 치자 주변을 알짱거리던 아이들이 떠들썩하게 소리를 내지르며 수돗가로 달려갔다. 큰누나랍시고 어른처럼 구는 모습이 못내 귀여웠다.

“한나영 어른 다 됐네.”

희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허리를 굽혔다. 제 다리를 잡고 매달린 아이를 안아 들려는데, 소란이 안까지 전해졌는지 닫혀 있던 현관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희주는 소리를 따라 앞을 바라보았다. 열린 문틈 사이로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희주 왔니?”

“아, 엄마.”

자글자글 주름진 눈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오랜만에 보는데도 변함없는 눈빛에, 희주의 입가에는 아이 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난 완전 뒷전이네.”

부엌 식탁 앞에 엉덩이를 붙인 희주가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거실에서는 과자 파티가 한창이었다.

역시 어린애들답다고 해야 하나. 제 얼굴을 보고 반가워할 때는 언제고, 바스락거리는 비닐 봉투 소리에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들은 이내 간식에 정신이 팔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반가운 손님보다는 손님이 가지고 온 간식에 눈이 돌아갈 나이였다.

게다가 수녀님의 허락까지 쉽게 얻어 냈으니 더 좋을 수밖에. 덕분에 아이들은 이게 웬 떡이냐, 하는 표정으로 원 없이 과자를 집어 먹고 있었다.

꼭 간식 소리에 환장하는 강아지들 같네. 하나같이 까까머리를 하고 모여 있는 게 귀여워 희주는 설핏 미소를 지었다. 이발 봉사가 다녀간 지 며칠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나눠 먹기야!”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 사이를 비집고 앉은 나영은 입가에 묻히고 먹는 아이들을 챙기느라 바빴다. 멀찍이 앉아 지그시 바라보자 시선이 느껴졌는지 제 쪽을 두리번거린다. 눈이 마주치자 나영이 배시시 웃었다. 귀찮을 법도 한데. 제법 기특했다.

희주는 한창 아이들을 구경하다가 시선을 돌려 집 안을 둘러보았다. 늘 어지럽히느라 바쁜 아이들이지만 수녀님들과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이 닿으면 이토록 깔끔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부지런함이 미처 닿지 않은, 또 닿을 수 없는 곳이 있었다. 희주는 전시품을 구경하듯, 어수선하게 거실을 꾸미고 있는 장식들을 눈에 담았다. 크기도, 색도 제각각인 풍선들이 천장과 벽 할 것 없이 듬성듬성 매달려 있고, 그 아래에는 엉망으로 뜯긴 스케치북 낱장들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채 올바른 문장을 만들고 있었다.

‘원장 수녀님 생신 축하합니다. 사랑해요.’

희주는 문구를 속으로 따라 읽었다. 색연필과 크레파스로 삐뚤빼뚤하게 칠한 한글 옆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딱 1년 만이었다. 사랑의 집에 발을 디딘 것은.

“얘들아. 형, 오빠한테 감사 인사는 하고 먹는 거니?”

고향 집이나 다름없는 곳이기에, 힘들게 올라온 것도 금세 잊고 한결 편해진 얼굴로 관망하던 차였다. 비뚤게 앉아 거실을 내다보던 희주는 뒤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자세를 바로 했다. 너른 쟁반을 손에 든 수녀님이 부엌 안쪽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형아, 고맙습니다.”

“고마워, 오빠. 잘 먹을게.”

크지 않은 목소리임에도 아이들은 먹던 걸 멈추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꾸벅꾸벅 숙이는 머리통들을 보고 희주는 다시 한번 웃었다. 꼭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번거롭게 뭘 또 저렇게 바리바리 사 들고 왔어?”

아이들은 금세 시끌시끌해졌다. 익숙한 소음에 빙긋 미소를 지은 다니엘라 수녀가 걸음을 옮겨 희주에게 다가왔다.

“자주 오지 말라니깐.”

나무라는 듯한 어조지만 그릇을 내려놓는 손길은 느리고 부드러웠다.

희주는 마주 앉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올해로 30년째 ‘사랑의 집’에서 원생들을 돌봐 온 수녀의 얼굴은 그간의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자주 웃는 사람은 눈에서 그 티가 나기 마련이다. 눈이 마주치자 눈가에 자리 잡은 주름이 한층 더 깊어졌다. 어릴 적부터 봐 온 표정 그대로였다. 말로는 오지 말라고 하면서 막상 제 얼굴을 보니 반갑고 좋은 거다.

“번거롭기는. 막상 안 오면 서운해할 거면서.”

좋은 거 티라도 내지를 말든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수녀가 웃겨 희주는 픽 웃었다.

“1년에 고작 한 번 오는데 자주 오지 말라고 하면 뭐, 난 아예 오지 말아야 되나?”

“너 힘들까 봐 그러지.”

“안 힘들어요. 그렇게 멀지도 않은데. 이거 왔다 갔다 하는 게 힘들었으면 난 진작 사표 썼어.”

오래간만에 봐서 그런지 저도 모르게 투정을 부리게 됐다. 말을 뱉어 놓고 순간적으로 아차 싶어 수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녀는 여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묵묵히 자식의 투정을 들어 주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따라 마주 웃은 희주는 그제야 본론인 축하의 말을 건넸다.

“생신 축하해요, 엄마.”

매년 같은 날에 하는 말인데도 왜인지 부끄러워진 희주가 장난스레 미소를 걸치고 물었다.

“역시 용돈은 안 받으시겠지?”

“억만금을 준대도 안 받지.”

“누가 준다고 하면 받으세요. 어차피 꿀꺽 못하잖아.”

“얘는 말을.”

“농담. 아, 과일이랑 고기랑 택배로 받을 수 있게 주문해 놨으니까 오면 바로 냉장고 넣어 놔요. 우체국 택배라 내일 들어온대.”

“그런 거 보내지 말래두. 참 우리 권희주 선생님께서는 말을 안 들으셔요.”

“식품이라 반송하기 어려운 거 알죠? 매번 혹시나 싶어서 말하는 건데, 저한테 보내시면 안 돼요. 법에 걸리니까.”

“그래. 안 보낼게. 고마워. 애들이 좋아하겠다.”

희주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돈은 죽어도 받지 않겠다는 완강한 수녀님의 태도에 과일과 고기를 선물로 대체해 보낸 지도 벌써 수년 째건만, 도저히 한 번에 고맙다는 말이 돌아온 적이 없다. 이렇게 잔뜩 보내 봤자 죄다 아이들의 배 속으로 들어갈 게 뻔한데. 피가 섞인 부모는 아니지만 자식으로서 최소한의 효도조차 못 하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조여들었다.

“식겠다. 밥 안 먹고 왔을 거 아니니. 얼른 먹어.”

뒤늦게 수녀가 눈짓을 해 보였다. 희주는 그제야 수저를 집어 들었다.

“부족하면 말해. 더 줄게.”

“이것도 많아요.”

밥을 먹고 왔다는 거짓말에 속지 않은 수녀는 평소 희주가 먹는 양을 훨씬 넘어서는 양을 꾹꾹 눌러 담아 왔다. 넘치는 애정만큼 희주를 보는 수녀의 시선은 따듯하기 그지없었다.

다니엘라 수녀는 오늘 희주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으리라. 퇴소를 한 아이들의 대부분이 고향 집을 찾듯 보육원 문을 두드리는 편이었는데, 희주도 그런 아이들 중 한 명이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잊지 않고 찾아와 줄 때면 찰나의 반가움은 이루 말할 데 없다. 그러나 동시에 착잡함도 밀려왔다. 이리 장성한 아이를 보고 있자면, 품을 떠나 찾아오지 않는 아이들까지 막연히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

희주를 빤히 보던 수녀의 입이 달싹거렸다.

“세민이랑은…….”

움칠. 미역국을 한 수저 뜨려던 희주는 수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덩달아 수저를 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

일렁이기 시작한 감정을 애써 내리누른 희주가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걘 왜요?”

“세민이랑 연락되니?”

“……엄마랑도 안 되는데 나라고 되겠어요?”

이번에는 까칠한 대답이 되물음으로 튀어나왔다. 불편한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 나와 버린 제 말투에 도리어 찔린 희주가 슬쩍 수녀님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만이 만연했다.

“너희 둘이 늘 단짝처럼 붙어 다녔잖니.”

“그런가…….”

희주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요. 어디서 잘 살고 있겠지. 못 사는 집에 입양 간 것도 아니고……. 걔가 싹싹하기도 했고, 똑똑했잖아요.”

“그래……. 그렇겠지.”

“때 되면 알아서 연락할 거예요.”

미역국 맛있다. 이거 누가 끓였어요? 대충 끊고 넘어가려 아무렇게나 던진 물음이었는데,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수녀의 얼굴에 화악 웃음꽃이 폈다.

“나영이가. 혼자 동영상 보면서 끓였대. 맛있지?”

“정말? 맛있게 끓였네.”

“국 식지 않았어? 다시 데워 줄까?”

“됐어요. 뜨거워서 일부러 식히고 있었어.”

“어릴 때도 뜨거운 건 입에도 안 대더니. 어릴 때랑 똑같네.”

“사람이 쉽게 변하나…….”

희주가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희주야. 입양 가기 싫다고 말하면 안 돼? 너 가면 난 누구랑 놀아…….”

제 옷자락을 붙잡고 울먹이며 애원하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대로 눈을 돌리면 어렸던 자신과 그 애의 모습이 보일까 봐 희주는 반찬을 집는 척, 애써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이후 다니엘라 수녀는 김세민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녀가 김세민에 관한 이야기를 불편해하는 희주의 마음을 눈치챘기 때문은 아니었다. 희주가 나서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은 덕이었다.

어느샌가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든 나영의 재롱 덕에 더욱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시간이 늦어 긴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수녀님은 늘 그랬던 것처럼 집 가는 길을 걱정했고, 자고 가라며 아쉬워했다.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기에 희주는 마중 나오려는 수녀님을 만류하고 대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수녀님 대신 나영이 배웅을 하겠답시고 뒤따라 나왔다. 아무리 성당 근처라지만 늦은 밤의 인적 드문 골목길은 10대 청소년에게는 위험한 곳이었다.

실랑이를 벌였지만 나영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중간에 있는 세탁소까지만 같이 가기로 약속을 받아 낸 후에야 희주는 나영과 나란히 골목길을 걸어 내려갔다.

“아쉽다. 오빠 오랜만에 왔는데 자고 가지.”

“자고 가기는.”

나영은 입술을 삐죽이며 온갖 아쉬운 티를 폴폴 풍겼다. 오래간만에 봐 놓고 잠깐 얼굴을 비추고 가는 게 퍽 아쉬운 모양이었다. 미소를 띤 채 그런 나영을 바라보던 희주가 대뜸 말을 툭 꺼냈다.

“너 나 부르는 호칭 좀 바꿔.”

뜬금없는 잔소리에 나영이 눈을 크게 떴다.

“왜? 오빠를 오빠라고 부르지. 언니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야. 내 제자들이 너랑 동갑이야. 띠동갑이면 삼촌이나 아저씨라고 불러야 돼.”

“난 다르지. 오빠가 나 어릴 때부터 업어 키웠는데.”

나영은 어깨를 으쓱이며 호칭 그게 뭐 대수냐는 듯 이어 말했다.

“우린 가족이잖아.”

툭. 나영의 스니커즈 끝에 채인 보도블록 부스러기가 적막 속에 제법 큰 소리를 내며 담장에 가 부딪혔다. 희주는 당연한 듯 튀어나온 ‘가족’이란 단어에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희주 넌 내 하나뿐인 가족이야. 너도 그렇지?”

생각에 잠겨 있던 희주는 나영이 이상하게 쳐다볼까 봐 문득 입을 뗐다.

“너 전에 너한테 고백했다는 남자애는 어떻게 됐어?”

“엥, 누구? 누가 나한테 고백……. 어우, 걔? 걔 그냥 여미새였어. 다른 애한테도 껄떡대더라.”

“그게 뭔데?”

“뭐? 아, 여미새? 여자에 미친 새끼.”

나영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진저리를 치더니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연달아 터져 나오는 투덜거림을 듣다 보니 어느덧 약속했던 세탁소가 보였다. 슬쩍 걸음을 늦추자, 알아서 입을 다문 나영이 주춤주춤 가던 길을 멈췄다. 희주는 몸을 돌려 나영을 바라보았다.

“더 나오지 마. 더 내려가면 올라갈 때 힘들잖아.”

아, 그리고. 희주는 지갑 속에서 지폐 몇 장을 뽑아 내밀었다.

“이건 용돈.”

대충 봐도 적은 액수는 아니었다. 손은 내밀지 않고 대번 인상만 찌푸리는 나영에게 희주가 뒷말을 덧붙였다.

“엄마한텐 비밀로 해.”

“달마다 보내 주는 것도 비밀로 하라면서. 이것도 비밀로 해?”

나영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지금처럼 불시에 주는 용돈이 아니더라도 희주가 부치는 돈은 꽤 상당했다. 수녀님이 받지를 않으니 제게 대신 보낸다고는 하는데, 희주가 저 말고도 퇴소를 1, 2년 앞둔 원생들에게도 다달이 송금한다는 걸 나영은 모르지 않았다. 받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주머니에 쑤셔 넣을 걸 알기에 늘 하던 다짐부터 중얼거렸다.

“오빠. 내가 커서 꼭 갚을게.”

“공부나 열심히 해. 갚으라고 주는 거 아니니까. 빨리 받아. 나 버스 시간 다 됐어.”

“알겠어어.”

나영은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나 간다. 엄마 걱정하시니까 얼른 들어가.”

“잘 가, 오빠.”

인사를 받은 희주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뒤에서 나영의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제 발걸음은 묵직하기만 했다.

* * *

‘김세민’이라는 이름뿐인 잔상은 빠르게 잊혔다. 원래 잔상이라는 건 오래도록 남아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이지만, 주의를 환기시키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면 지우는 건 딱히 일도 아니었다.

―희주 씨, 어디쯤이에요?

오늘은 강현우와 영화를 보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영화관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희주는 걸려 온 전화에 힐긋 시간부터 확인했다.

“저 지금 막 영화관 앞에서 내렸어요.”

―천천히 올라와요. 시작하려면 시간 좀 남았으니까.

“네. 지금 바로 올라갈게요.”

빨리 가겠노라 대답하며 전화를 끊은 희주는 잰걸음으로 건물 안에 들어섰다. 약속 시간에 늦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이미 도착했다고 하니 괜한 조바심이 났다.

강현우와는 집 앞에서가 아닌 영화관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당연히 강현우는 지난번처럼 집 앞까지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희주가 에둘러 거절한 탓에 그렇게 됐다. 호의가 불편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잠시 들러야 할 곳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따가 집 가서 인터넷으로 시켜 놔야겠네.

몇 년 사이 훌쩍 오른 가격을 떠올리며 희주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영화관으로 가기 전 약국을 찾아 다녀온 희주의 바지 주머니에는 휴대용 소취제가 하나 들어 있었다.

소취제는 정말 오래간만에 구입해 보는 것이었다. 열성이라 히트 사이클도 거의 없다시피 무난하게 넘어가는 편이었고, 하여 알파와 성적인 접촉은 해 본 적이 없거니와 제 허락도 없이 페로몬 샤워를 시도하는 파렴치한 알파들도 없었기에 딱히 소취제가 필요한 적이 없었다.

보통 일상적으로 묻는 페로몬은 간단히 샤워만 해도 말끔히 씻겨 내려갈 정도다. 다만 저를 보자마자 기겁하며 소취제를 뿌려 준 배예은 선생의 반응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우성 페로몬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 앞으로 강현우를 몇 번이나 만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오늘 만남 정도는 대비해야 했던 터라 급한 대로 휴대용 소취제만 먼저 구입한 것이었다.

건물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엘리베이터 앞도 다른 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인파로 가득했다. 한 건물에 영화관은 물론이고 의류 매장과 식당들이 즐비하게 입점해 있는 데다 오늘은 주말이기까지 하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바로 탈 수는 있을지 의문이 앞섰지만 다행히 오래 기다리지 않고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저기, 죄송한데요…….”

거의 만원 직전까지 사람을 가득 태운 엘리베이터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 찰나였다. 뒤쪽에서 들린 작은 목소리에 희주는 무심결에 고개를 뒤로 돌렸다. 누군가를 특정하지 않은 부름이었기에 저 외에도 뒤를 돌아본 이들은 여러 명이었다.

“10층 좀 눌러 주실 수 있을까요?”

난처해 보이는 듯한 표정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내릴 층을 미처 누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와 일행으로 보이는 듯한 이도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버튼 가까이에 몸을 붙이고 서 있었던 데다 내릴 층을 대신 눌러 주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희주는 곧장 여자가 말한 10층을 눌러 주었다.

“감사합니다.”

돌아오는 감사 인사에 희주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웃으며 목례했다. 고맙다는 눈짓이 재차 돌아왔다.

영화관 로비는 상영관이 있는 꼭대기 두 층을 제외하고 건물의 가장 끝 층인 11층에 위치해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상층부를 향해 가는 와중에 층마다 멈춰 섰다. 승객들의 수는 점차 줄어들어 처음 탔던 인원의 절반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식당들이 몰려 있는 10층에서 문이 열렸다. 좀 전에 눈인사를 나눴던 여자 두 명이 무언가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내렸다.

더 내릴 이도, 탈 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 희주는 닫힘 버튼을 여러 번 눌러 문을 닫았다. 바로 올라가겠다는 말을 해 놓고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된 탓에 마음이 급해져 있던 탓이다. 문이 닫히기 전 왜인지 앞서가던 여자가 뒤를 돌아본 것도 같았다.

로비에도 사람이 많은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희주는 강현우를 어렵지 않게 찾았다. 주변에 모인이들이 힐끔힐끔 같은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수십 개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한 번씩 강현우에게 시선을 뒀다. 다른 것에 집중하느라 미처 보지 못한 이들은 있어도 딱 한 번만 보는 이는 없는 듯했다. 다들 나름 티를 내지 않는답시고 곁눈으로 힐끔거리고 있었지만, 그런 무리가 한둘이 아니어서 보고 있자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희주는 잠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서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시선만 돌려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여기저기서 과하게 쏟아지는 눈빛들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알면서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강현우는 미동도 없이 서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문득 희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난 두 번의 만남에도 그랬듯 훤칠한 키에 영화배우 뺨칠 만큼 잘생긴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무언가 달라진 점이 있었다.

평소 눈썰미가 나쁜 편도 아닌데, 무엇이 달라진 건지 모르겠다. 미간을 슬며시 구긴 채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희주는 이내 동그랗게 입술을 벌리며 소리 없이 탄성을 내질렀다.

강현우는 캐주얼한 흰색 셔츠와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격을 갖춘 슈트 차림이었던 지난 만남에서 느꼈던 것과 다른,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게다가 깔끔하게 뒤로 빗어 넘겼던 앞머리가 오늘은 죄다 앞으로 내려와 있었다. 무언가를 바른 흔적도 없이 수수하게 쏟아진 앞머리가 잘생긴 이마를 가려 버렸다는 건 조금 아쉬웠으나, 앞머리가 있는 건 있는 대로 또 다른 느낌이었다.

희주는 넋이 나간 듯 여전히 강현우를 힐끔거리는 이들과 지금 제 표정이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자세히 듣다 보면 연예인의 ‘사복 패션’을 치켜세우는 걸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흔한 사복 차림 가지고 패션을 운운하는 게 웬 말인가 했더니……. 이제야 제법 이해가 되려고 했다.

홀린 듯한 발짝 앞으로 내딛으려는데, 어디선가 신경에 거슬리는 대화가 넘어왔다.

“야, 열두 시. 쩐다. 개잘생겼어.”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서로 얼굴을 맞대고 숙덕거리는 무리가 보였다. 작게 꺅꺅거리며 가 보라고 어깨를 툭툭 쳐 대는가 하면, 한껏 상기된 얼굴로 주춤거리는 이도 있었다.

“얘 얼굴 빨개졌다. 가서 번호 달라고 해 봐.”

“혼자 왔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일행이 애인이 아닐 수도 있지. 야, 일단 질러 봐.”

친구의 부추김에 용기를 얻기라도 했는지 머뭇거리던 이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금방이라도 강현우에게 가서 번호를 달라고 할 기세였다.

오기라고 해야 할지, 짜증이라고 해야 할지. 어쩐지 질투에 조금 가까운 듯한 감정이지만 헤아릴 틈도 없이 행동이 앞섰다. 희주는 거침없이 강현우를 향해 걸어갔다.

“현우 씨!”

가만히 휴대폰 속 메일함을 들여다보고 있던 강현우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먼저 들어 올렸다. 사람이 많다고 느낀 건 강현우도 마찬가지였기에, 수많은 인파 속에서 제가 기다리고 있던 이를 찾기 위해 시선을 분주히 움직여야만 했다. 희주를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강현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많이 기다리셨죠. 엘리베이터가 층마다 멈춰 서서 좀 오래 걸렸어요.”

강현우는 제 쪽으로 다가오는 희주를 바라보며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보고 있던 휴대폰을 주머니 안에 갈무리하는 사이 어느새 희주가 제 앞으로 다가와 섰다. 우글우글 몰려 있는 사람들 틈을 요리조리 파고들더니 금세 다가와 저를 올려다보는 희주가 귀여워 강현우는 실없이 미소했다.

“제가 시간 약속 안 지키고 빨리 온 건데요.”

“그래도… 조금 서두를 걸 그랬어요.”

등을 돌리고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제 등장으로 인해 강현우에게 달라붙어 있던 시선들이 어느 정도 떨어졌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희주는 자신이 강현우의 이름을 불렀을 때 절반 이상의 시선들이 제게 옮겨 온 것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남의 시선을 알아채는 것도, 모르는 척하는 것도 능한 강현우는 진작 기민하게 눈치챈 후였다. 강현우는 자연스럽게 희주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그의 옆얼굴에 꽂혀 오는 노골적인 시선들을 몸으로 차단했다.

“그나저나 저 현우 씨 못 알아볼 뻔했어요. 사복 입으셔서.”

그의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희주가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희주의 말에 강현우는 조금 멋쩍은 듯한 표정으로 제 옷차림을 한번 훑어보았다.

대학 졸업 이후 이런 편한 사복은 오래간만이었다. 때문에 외출 전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꽤 긴 시간 동안 고심하고 온 터였다. 애써 골라 입기는 했지만, 결국 슈트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차림이라 내심 신경 쓰는 중이었던 강현우는 지레 찔려 물었다.

“혹시 별롭니까?”

놀란 희주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잘 어울려서요. 어…….”

그러니까……. 희주는 말끝을 흐리며 적절한 표현을 떠올렸다. 슈트를 입은 강현우는 전문적이고 성숙한 느낌이었다면, 오늘 사복을 입은 그는 부드러운 인상이 돋보이고 굉장히 산뜻한 느낌이었다. 이걸 한 마디로 일축하면.

희주는 확신하는 투로 말했다.

“되게, 어려 보여요.”

일순 강현우의 반듯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강현우는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는 희주를 잠시 쳐다보았다. 경력이 짧지만은 않은 이 국어 선생님은 아무래도 표현력에 있어서 꾸며 말하기보다는 퍽 직설적인 편인 것이 분명했다. 짧게 웃음을 삼킨 강현우가 평이한 말투로 물었다.

“그럼 혹시 지금까지는 늙어 보이기라도 했나요?”

“네?”

그 말에 희주가 순식간에 사색이 된 채 강현우를 쳐다보았다. 동그랗게 벌어진 입술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뻐끔거렸다. 강현우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잠깐 넋을 놓고 두 눈만 깜빡이던 희주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 저한테 장난치신 거죠.”

강현우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제야 희주도 한숨 섞인 너털웃음을 뱉었다.

“저 놀랐잖아요.”

“설마 희주 씨가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을까요.”

“그러니까요. 저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에요.”

“압니다. 아무래도 슈트가 사람을 좀… 늙어 보이게 하죠.”

“성숙해 보이는 거라고 해 주세요…….”

“그래요. 성숙한 거라고 합시다.”

낭패라는 듯 울상 짓는 표정을 보며 강현우가 또 한 번 미소 지었다.

어느덧 두 사람을 힐끔힐끔 쳐다보던 이들도 영화 관람을 위해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잠시 가볍게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도 덩달아 영화로 관심을 돌렸다.

희주는 강현우가 보내 줬던 모바일 티켓을 떠올리며 물었다.

“우리 영화 몇 관이었죠?”

“7관일 겁니다.”

“7관은 13층에 있대요. 아, 저기로 가면 될 것 같아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안내 표지판을 발견한 희주는 강현우를 로비에서 바로 상영관으로 연결되는 에스컬레이터로 이끌었다. 에스컬레이터는 매표소와 스낵 코너 옆, 희주가 타고 올라온 엘리베이터와는 정반대에 위치해 있었다.

강현우와 매표소 앞을 지나는 동안에도 희주는 또 여러 사람들과 몇 차례 눈이 마주쳤다.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제 맞선 상대가 잘생겼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인 듯했다.

같이 있다 보면 상대적으로 오징어로 보이지 않을까 모르겠다. 아주 살짝 주눅이 들려는 찰나 어디선가 고소한 팝콘 냄새와 기름진 핫도그 냄새 따위가 폴폴 풍겨왔다.

냄새를 쫓아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스낵 코너를 바라보던 희주는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강현우를 힐끔 올려다봤다. 저런 거 안 좋아하시려나. 시간이 딱 영화 보고 나서 밥 먹으러 갈 것 같기는 하지만 영화관까지 와서 팝콘을 안 먹고 가는 건 좀……. 망설이는 사이 걸음이 조금씩 더뎌졌다.

에스컬레이터에 가까이 다다라서야, 희주는 강현우의 옷깃을 꼭 붙잡았다. 멈칫, 걸음을 멈춘 강현우가 희주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 있느냐고 묻는 듯한 다정한 눈빛에 희주는 조금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스낵 코너를 가리켰다.

“영화관까지 왔는데, 뭐 좀 드실래요?”

희주의 물음에 강현우의 두 눈동자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굴러갔다. 로비에 질릴 만큼 많았던 사람들이 모조리 이 앞으로 몰려왔는지, 스낵 코너 앞에 늘어선 줄은 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두껍고 길었다.

시선만 살짝 위로 들어 올리니 요란하게 번쩍거리는 메뉴판이 보였다. 팝콘이며 핫도그, 나초 같은 먹을거리들과 각종 음료 사진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공간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짭짤한 음식 냄새의 근원이 아마도 저것들인 듯했다.

강현우는 메뉴판에서 눈을 떼고 곁을 지나는 이들을 살펴보았다. 어른이고 어린애고 할 것 없이 양손에 한가득 먹을거리들이 들려 있었는데, 다들 구성은 비슷했다. 사람 머리통만 한 통을 껴안다시피 들고 있는가 하면, 한 손으로 들기 버거운 음료를 간신히 붙잡고 있기도 했다. 이외에도 다른 것들을 추가했는지, 손이 부족해 종이로 된 트레이에 담아 가는 이들도 있었다.

영화를 보러 온 게 아니라 식사를 하러 온 건가? 어느 것 하나 식사 대용은 못 될 것 같은데. 강현우는 기이한 것을 보듯 질린다는 얼굴을 했다.

평소 영화를 즐겨 본다고 답했던 강현우지만 ‘영화관에서’ 본다고 하지는 않았다. 강현우가 보는 영화들은 대부분 투자의 결과물로, 시사회에 참여해 보거나 투자자로서 개봉 전에 따로 받아 본 것들이 전부였다.

취미로서 영화 관람을 즐기는 강 회장을 위해 본가에는 영화 관람만을 위한 공간이 따로 있어 편했는데, 독립을 하게 되면서 그런 공간을 따로 빼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다. 일찍이 시공을 했었더라면 사람만 북적거리는 이런 영화관이 아니라, 프라이빗한 룸으로 희주를 초대했을 테였다.

아무튼, 그동안 강현우가 영화를 보는 동안 굳이 무언가 입에 넣어야 했다면 탄산수나 치즈, 크래커 같은 간단한 것들이 전부였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 많은 영화관에서 음식 냄새까지 폴폴 풍기며 식사까지 해결하려는 건 강현우로서는 이해 못 할 행동이었다.

차라리 식사를 먼저 하고 영화를 볼까. 순서를 바꾼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으니 대관 일정을 조금 뒤로 미루라고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강현우는 안 실장에게 연락을 넣기 위해 휴대폰을 꺼냈다.

“그럼 식사를 먼저 하고 영화를 보는 건 어떻습니까?”

“어……. 왜요? 혹시, 뭐, 배고프세요?”

“저는 괜찮아요.”

“저도 지금은 별로 안 고픈데…….”

심각하게 메뉴판을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휴대폰을 꺼내 드는 강현우를 희주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흘끔거렸다. 뭘 하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건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밥은 영화 보고 먹어요. 영화 시간도 있으니까.”

“저런 걸로 배가 차겠습니까?”

“영화관 왔으니까 팝콘은 먹어야죠. 간식인데요, 뭐. 저걸로 배 채울 생각은 없어요.”

“아, 간식.”

강현우는 머쓱하게 중얼거리며 원래 있던 곳으로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식사가 아니라 간식이란다.

“그럼 어떤 걸로 할까요? 희주 씨가 드시고 싶은 걸로 할게요.”

메뉴판을 구경하는 척 시선을 돌리자 다행히 희주도 별말 없이 같은 곳을 바라봐 주었다. 의사소통에 아주 약간의 오해가 있던 걸로 이해한 듯했다.

분명 실제와는 차이가 있겠지만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샘플 사진을 주욱 눈으로 훑은 희주가 세트 메뉴가 적혀 있는 곳을 올려다보며 제안했다.

“간단하게 팝콘 하나 시키고 음료수 하나씩 먹으면 될 것 같은데, 어때요?”

“좋습니다.”

“그럼 커플 콤보 어때요?”

‘커플’이라는 유치한 단어가 섞인 메뉴 이름에 강현우의 미간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커플… 콤보 말입니까?”

“네. 팝콘 큰 거 하나에 음료수 두 개. 저기, 싱글 콤보 밑에 있는 거요.”

강현우가 메뉴를 찾지 못한 걸로 알았는지 희주가 친절하게 또 한 번 손가락을 뻗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었다.

메뉴를 찾지 못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이 나이 먹고 저런 유치하고도 깜찍한 단어를 입에 올려야 하는 것 때문에 그런 거였다. 저기 서 있는 직원들은 하루에도 몇십 번씩 들을 테지만, 저로서는 ‘커플’ 콤보 하나 달라는 말을 해 보는 건 처음이었다. 손바닥 안쪽에 간질거려 꾹 말아 쥐고픈 느낌이다.

“팝콘은 반반으로 하는 게 어때요?”

“……좋습니다.”

“그럼 고소한 맛이랑 달콤한 맛으로 하고… 음료수는 그냥 콜라로 하실래요?”

“……네.”

온갖 어려운 용어들은 늘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달고 살면서 저렇게 간단한 단어에서 브레이크가 눌려 버린 강현우는 멀거니 메뉴판을 쳐다보았다. 그사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든 희주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얼른 가서 사 올게요.”

뒤에서 붙잡기라도 할까 희주는 얼른 걸음을 옮겼다. 여러 개로 갈라진 줄 중 가장 짧아 보이는 줄로 가 섰다.

강현우가 영화 표를 샀으니 제가 팝콘을 사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이번에도 꽤 거리가 먼 제 동네까지 와 주었으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 영화를 다 본 다음 이후 식사도 자신이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희주는 일하느라 바쁜 직원들을 구경하듯 쳐다보았다.

희주가 그런 앙큼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도 못한 채, 강현우는 희주의 머리꼭지를 좇았다. 울룩불룩 튀어나온 뒤통수 사이에서 까만 머리통 하나가 톡 위로 솟아 있었다. 제가 워낙 키가 커서 그렇지, 권희주도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니 작은 키는 아니었다.

“봤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피해 서 있던 곳에서 몇 걸음 물러나려는데, 아까 전부터 이쪽을 힐끔거리던 무리가 수군거리며 앞을 스쳐 지나갔다. 멀어져가면서도 스낵 코너 쪽으로 두어 번 시선을 두는 걸 보니, 누구 때문에 저러는지 대강 예상이 갔다. 정작 당사자는 제 차례를 기다리며 살짝 지루한 표정으로 기웃거리고 있지만.

처음 희주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제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을 때도, 먼발치서 눈을 빛내고 있는 무리가 있었다. 딱 봐도 어린, 영글지 못한 주제에 꼴에 알파랍시고 쳐다보던 게 거슬렸던 참이었다. 아무래도 권희주는 스스로의 외모가 주변의 이목을 끌고 있다는 건 모르고 있는 듯했다.

뭐, 예쁜 게 죄는 아니지. 무례하게 쳐다보는 눈들이 죽을죄를 짓고 있는 거고.

강현우는 어느 정도 눈에 띌 만큼 큰 키에 보기 좋게 마른 몸, 거기에 예쁘기까지 한 그에게 어울리는 무언가를 선물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얼마가 됐든 어울리는 걸 몸에 걸치고 좋아하는 그를 보면 그만일 것 같았다.

일단 목을 많이 쓰는 직업이니 목에 좋다는 것들을 찾아다 바쳐 볼까. 얼핏 들은 정보로는 도라지나 배, 꿀 같은 게 좋다는데. 안 실장을 시켜 국산으로 공수해 두라고 해야겠다. 찬 음료를 자주 마시는 그를 위해 목에 두르기 좋은 스카프도 몇 장 골라 두라고 하고. 따로 손목시계는 차지 않는 것 같은데 제 것과 같은 모델로 선물하면 어떨까. 피부가 희니 실버와 블루 조합도 잘 어울릴 터였다.

“저기…….”

선물을 받고 좋아할 희주를 상상하며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던 강현우는 어디선가 불쑥 끼어든 낯선 향에 미간을 와락 구겼다. 향은 낯설지만 그 향에 담겨 있는 의도는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돌아본 곳에는 오메가가 한 명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오메가는 호의를 가득 담은 페로몬을 흘렸다. 불쾌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저… 같이 오신 분이랑은 무슨 사이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건 왜 물으시죠.”

알파에게서는 보기 드문 경계에 오메가가 조금 당황한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감추고 설핏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다른 게 아니라, 아까부터 그쪽이 마음에 들어서요. 저한테 번호 좀 주실 수 있나 해서…….”

뺨을 발그레하게 붉힌 오메가가 휴대폰을 불쑥 내밀었다. 강현우는 그것을 받아 들 생각은 않고 무감각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호의적이지 않은 반응에 한 발 뒤로 물러설 법도 한데, 오메가는 더욱 호기심을 내비치며 한 마디라도 더 걸기 위해 바짝 몸을 붙여왔다.

“저, 그런데 혹시… 맞으시죠? 예전에 경제지에서 봤어요. 백영…….”

“아니요. 미안합니다.”

긴가민가한 표정의 오메가의 입에서 어떤 단어가 나오기 전에, 강현우가 단호히 딱 잘라 거절하는 말을 했다. 내버려 두면 몸에 닿을 것 같은 휴대폰을 정중하게 아래로 내려 주었다. 그러고는 스낵 코너 쪽을 가리키며 고개를 까딱였다.

“저분과는 그쪽이 염려하는 그런 사이가 맞습니다.”

“네?”

“데이트하러 왔습니다.”

눈짓으로 가리킨 곳에서 희주가 막 나온 커플 콤보를 받아 들고 있었다. 차게 식은 눈을 할 때는 언제고, 강현우는 무척이나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희주를 바라보았다.

* * *

강현우가 예매한 영화는 개봉하기 몇 달 전부터 ‘세계 최대 블록버스터’라는 흔한 문구로 홍보해 오던 해외 액션 영화였다. 이미 몇 년에 걸쳐 시리즈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 영화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원작 소설의 인기가 어마어마해서 영화 또한 팬들과 대중의 사랑을 한껏 받고 있었다.

희주 역시 이 시리즈의 팬이었다. 공식 예고편이 떴을 때부터 기다리고 있던 영화였는데, 워낙 바쁜 터라 개봉을 하고도 혼자서도 보러 갈 여유가 없었다. 이런 액션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 줘야 제맛이었다. 집에서 보는 것만으로는 통 만족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스크린에서 내려가는 걸 막연히 보고 있어야 함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그러던 도중, 마침 강현우가 이 영화를 예매한 것이었다.

혹시나 데이트랍시고 달콤하고 끈적한 로맨스 영화를 보자고 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던 차였다. 강현우와 연인 관계라면 모를까, 이제 데이트나 조금 하는 사이끼리 보기에는 로맨스는 조금 꺼려지는 게 사실이었다. 괜히 진한 스킨십이라도 나오기라도 하면 분위기만 이상해질 테니까. 물론 제가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었다는 이유도 컸다.

희주는 상영관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싣고, 직전에 챙긴 팸플릿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구겨지지 않게 잘 챙겨서 집으로 가져가야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보는 희주를 가만히 바라보던 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 영화 좋아하나 봐요.”

“네. 저 이거 원작 소설로도 다 읽었거든요. 원랜 개봉한 날에 바로 보러 갔었는데…….”

환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희주는 가까이 다가와 있는 강현우의 얼굴에 하려던 말을 잊고 잠시 멈칫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두 줄로 섰다가 먼저 올라가려는 관객들에게 길을 터 주느라 강현우가 한 칸 아래로 내려온 참이었다. 자연스레 반쯤 몸을 돌리고 있었던 데다가 에스컬레이터의 단 높이로 인해 이제야 눈높이가 얼추 비슷해진 터라, 고개를 살짝만 옆으로 돌려도 곧장 눈이 마주칠 거리였다.

강현우는 고개를 기울여 제 손에 들려 있는 팸플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느 해외 수입 영화가 그러하듯 비장함 외에는 볼 것 없는 팸플릿인데도 한 글자, 한 글자, 참 유심히도 살폈다.

“…….”

희주는 말을 이을 생각도 못 한 채 슬며시 벌어지는 입도 미처 다물지 못하고 그에게 눈을 고정했다. 낮은 시야에 있는 것을 들여다보느라 아래로 내리깔린 속눈썹은 길고 촘촘했다. 어두운 편인 실내 조명 때문에 그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그 밑으로 그림자가 아른아른 흔들리기도 했다.

그 모습은 마치 양초와도 같았다. 빌라 반지하에 살던 때, 전기가 끊길 때마다 어두운 방을 밝히는 역할을 하던 양초.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 아래로 아롱거리는 그림자는 옅은 숨소리를 따라 흔들리던 그때 그 그림자와 닮아 있었다.

팸플릿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지 고개를 깊숙이 기울여 오는 모습이 꼭 영화 속 슬로우 모션처럼 느릿하게 보였다. 희주는 눈앞에서 빛나는 양초가 꺼지기라도 할까 숨소리를 죽였다.

“등장인물들이 많은데, 이 중에 누구 팬이에요?”

잠시 팸플릿을 들여다보던 강현우가 물으며 고개를 들었다. 한 뼘 정도 더 가까워진 거리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희주는 허둥대며 휙 팸플릿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친 것도 아니고 모르는 이를 훔쳐보던 것도 아닌데, 누가 보면 해선 안 될 짓을 하다가 걸린 사람처럼 부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희주는 제게 던져진 질문에 적절한 답을 떠올리면서, 멍하니 입술을 벌리고 있는 사이 입 안에 끈적하게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누구 팬이었더라. 그러니까, 그게.

“다, 당연히 주인공이죠.”

팸플릿 속, 각기 다른 포즈를 취하고 있는 캐릭터들을 주욱 훑던 눈동자가 그중 가운데에 서 있는 주인공 캐릭터에 콕 멈춰 섰다. 원작 소설 속 묘사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배우의 이름을 곱씹으며 가까스로 대답한 순간,

“조심.”

그 순간에 강현우의 팔이 희주의 등 뒤로 향했다. 귀와 목덜미 사이를 애매하게 스치는 숨결에, 팸플릿을 쥔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여기서 넘어지면 다쳐요.”

“……아.”

어느새 에스컬레이터의 끝자락에 다다라 있었다. 강현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신발 앞코에 턱이 닿기 전에 내린 희주는 주춤거리는 걸음으로 다음 레일에 올랐다. 이번에도 희주가 한 칸 위, 강현우가 한 칸 아래에 섰다. 희주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손이 닿지 않았는데도 등허리 부근이 화끈거리는 느낌이었다.

“그 주연 배우 곧 내한할지도 모른다던데. 알고 있어요?”

강현우는 대수롭지 않게 대화를 이었다.

“정말요……?”

놀란 희주의 눈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시사회 같은 거라도 하나?”

그런 기사는 못 봤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강현우가 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예기치 못한 소식에 놀란 듯 발긋하게 홍조가 피어오른 얼굴이었다.

“이 영화 때문은 아니고, 다른 영화 홍보 때문에 오는 걸 겁니다.”

“아…….”

희주가 이해했다는 듯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 홍보 때문에 내한하는 거라면 예정된 스케줄은 아마도 기자 간담회 정도일 거다. 입국 스케줄에 맞춰서 공항에 진을 치고 있지 않는 한 저 같은 일반인은 보기도 힘든……. 운이 좋아 주말에 입국한다고 해도 가 봤자 면봉 크기로 보는 게 다일 거다.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희주를 본 강현우가 운을 띄웠다.

“잘하면 시사회 티켓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떤 경로로 그걸 구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궁금하지도 않았다. 저 주세요. 제발요. 속으로 외쳤지만 차마 저 달라는 말은 못 하고 제 입에서 나올 말만 기다리는 희주에게 강현우가 느긋하게 물었다.

“이 영화가 아니어도 괜찮다면 같이 갈까요?”

희주는 그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안 실장에게 VIP 시사회 티켓 좀 빼 두라고 일러 둬야겠군. 강현우는 속으로만 슬쩍 웃었다.

같은 시각. 집에서 쉬고 있던 안 실장은 울리지도 않은 진동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고 있었다. 이젠 환청이 다 들리네. 모시는 상사가 최근 들어 안 하던 짓을 하는 바람에 덩달아 바빠진 안 실장이었다.

* * *

두 시간이 조금 넘는 러닝타임은 빠르게 흘렀다. 이번 시리즈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어둡게 내려앉은 상영관에 하나둘 불이 들어왔다. 엔딩 크레디트를 바라보는 희주는 아직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얼굴이었다.

“재밌었어요?”

아무렴. 재미가 있다 못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희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흘러갈지 다 알고 봐도 재밌네요. 영상미가 더 화려해진 것 같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영화화하다 보니까 원작에 있던 장면이 조금 생략되기도 했는데, 다른 장면들을 워낙 잘 살려 놔서… 벌써 다음 편 보고 싶어요.”

“저는 희주 씨 영화 보다가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강현우의 말끝에 엷은 웃음기가 묻어났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지그시 턱을 괸 강현우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띤 채 희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에 집중하던 모습을 신기해하고 흥미로워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의 말투에서 다른 해프닝을 떠올린 희주는 멋쩍게 웃으며 사과부터 했다.

“죄송해요. 저…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닌데.”

“죄송은요. 영화 재밌게 잘 봤으면 됐습니다.”

강현우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러고는 영화는 보던 중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제 데이트 상대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영화에 푹 빠져 있었다. 어찌나 넋이 빠져나가 있던지 희주는 사 온 팝콘을 입에 넣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강현우가 스크린이 아닌 저를 바라보고 있던 것조차 모르고 있는 듯했다.

애초에 영화와 팝콘에는 크게 흥미가 없었던 강현우는 시시각각 변하는 희주의 얼굴을 영화 대신 바라보며 간간이 희주에게 먹을 것들을 챙겨 주었다.

처음 몇 번은 아기 새처럼 쏙쏙 받아먹었다. 거부하지 않고 잘 먹기에 저 역시 몇 번 더 입 앞으로 대령해 드렸고. 그러다가 점차 다른 것에 흥미를 보였다. 뜻하지 않게 손가락 끝에 닿는 입술의 말캉한 감촉.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방패 삼아, 강현우는 먹을 것을 챙겨 준답시고 일부러 희주의 입술에 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영화가 중반쯤 흘렀을 때가 되어서야 희주는 강현우의 행동을 알아챈 듯했다. 가만히 있던 희주는 갑자기 제 몫의 음료수를 황급하게 들더니 빨대를 문 채로 슬금슬금 저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불은 꺼져 있었지만 커다란 스크린 속 광선을 내뿜는 인물들 덕에 흰 피부가 붉게 물들었다는 것 정도는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결국 희주는 집중력을 완전히 빼앗겨 버렸다. 영화를 보는 데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옆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희주로서 계속해서 강현우에게만 신경을 쓰게 만들었다.

강현우가 가운데 놓인 팔걸이를 위로 들어 올릴 때는 아주 기절하는 줄 알았다. 그게 하나뿐인 팝콘 통에 희주의 손이 닿지 않을까, 고심 끝에 나온 배려인 줄도 모르고.

“설마 저만 먹은 건 아니죠?”

“저도 먹었습니다. 맛있던데요.”

강현우는 반쯤 남은 팝콘 통을 들어 보였다. 종이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각기 다른 맛의 팝콘이 통을 때리고 긁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강현우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할수록 희주는 민망한 기분만 들었다. 챙겨 준다고 그걸 또 좋다고 받아먹고 있었다니. 저도 모르는 사이 그의 손가락에 입술이 닿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지런히 놓인 손을 흘끗 쳐다보았다. 흰 부분이 거의 없다시피 말끔하게 정돈된 손톱 끝만 눈에 들어왔다.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더니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낭패감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감정에 희주는 얼음 녹은 물만 남은 음료를 초롭초롭 빨아 마셨다.

“이만 일어날까요.”

끝날 줄을 모르는 엔딩 크레디트를 가만히 보던 강현우가 물었다. 희주는 별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후에 쿠키 영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중에 소장용으로 사서 보면 그만이었다. 몇 초 되지 않는 쿠키를 보느니 얼른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픈 욕구가 더 컸기에 희주는 고분고분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 음료수 컵을 한 손에 들고 찬찬히 계단을 내려가던 희주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는 상영관을 둘러보았다. 분명 로비에서는 엄청 붐볐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사람이 없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말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나 봐요.”

상영 끝물이라서 그런가? 완전 전세 내고 봤네. 심야 영화 아니면 이러기 힘든데.

“오늘 운이 좋았나 봐요.”

희주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하며 터덜터덜 내려갔다.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가 운이 좋았네요.”

사실은 없던 상영 시간을 만들게 해 상영관 하나를 통째로 대관한 것이었지만, 강현우는 구태여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원래도 친절하지만 오늘따라 왜인지 몇 배는 더 친절한 것 같은 영화관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출구 쪽 엘리베이터는 로비 쪽의 것보다 사람이 적어 한산했다. 아래 층수를 맴돌고 있는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기만을 기다리며, 희주는 자연스럽게 다음 코스를 생각했다.

평소 집에서 해 먹기에는 실력이 안 되고, 나가서 먹기에는 귀찮음을 이기지 못하는 일개 자취생인 희주는 매끼 배달 음식 앱에 의존하고는 했다. 어쩌다가 나가서 먹는 경우는 여나연과 조한희의 꼬드김에 넘어가 끌려간 곳뿐이었다. 그마저도 조한희의 차를 타고 갔었던 터라 위치도 가물가물했다. 알고 있는 맛집이라고는 배달 맛집뿐, 그것도 맵고 짠 자극적인 야식들뿐이었다.

그래도 나름 번화간데 흔한 파스타집 하나 없는 게 말이 되나. 인터넷에 근처 맛집을 검색해 봐도 죄다 광고로 보여 어디로 가야 할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혹시…….”

지금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은 딱 한 곳이었다. 솔직히 데이트라는 보편적인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 곳이었지만, 아무렴 뭐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 넘은 사람들끼리 장소 가릴 것까지야 있나. 맛있으면 장땡이지.

미적거리며 입술을 뗐던 희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쪽갈비 좋아하세요?”

* * *

강현우는 희주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사이 안 실장에게 파인 다이닝 예약을 취소하라는 연락을 넣어 두었다. 당일 취소이기 때문에 예약금을 고스란히 날리게 되었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강현우로서는 그렇게 큰돈도 아니었고, 딱히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괜찮은 레스토랑을 예약해 두었다고 충분히 설득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예약한 곳이 있다고 고집하기보다는 희주가 먹고 싶어 하는 요리를 먹는 게 나았다. 애초에 레스토랑을 예약해 뒀던 것도 저보다는 희주가 잘 먹을 것 같다는 판단하에 진행한 일이었다.

게다가 갈비 정도면 메뉴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미리 알았더라면 당일에 공수받은 질 좋은 쇠고기를 양껏 먹을 수 있게 해 줬을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마저 어려운 허락이라도 받아 낸 듯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희주를 보며 금세 휘휘 날려 버렸지만 말이다.

“이쪽이에요.”

오후 4시. 점심을 먹기에는 늦고,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애매한 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지나는 식당마다 식사하는 손님들이 없어 한산하거나, 브레이크 타임 혹은 재료 준비 중이라는 팻말을 걸고 출입을 제한하고 있었다.

강현우는 대강 거리를 훑어보며 희주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영화관에서부터 차 없이 나온 두 사람은 벌써 커다란 상가 몇 동을 ‘걸어서’ 지나오고 있었다.

차를 가지고 왔으니 당연하게 차를 타고 이동할 거라고 생각한 강현우를 말린 건 희주였다. 잘 아는 곳이 있다며, 영화관에서 멀지 않으니 차는 이곳에 두고 가자고 했고 강현우는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랐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번화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이 길이 맞습니까?”

물론, 착각이 아니었다. 희주는 말끔한 상가는 뒤로한 채 피우다 만 담배꽁초가 너저분하게 버려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차는커녕 사람 여러 명이 한꺼번에 지나가기에도 벅차 보이는 골목이었다. 강현우는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앞서가는 희주의 뒤에 대고 미심쩍다는 투로 물었다.

설마 건장한 우성 알파를 데리고 허튼짓을 하겠느냐만, 계속해서 이렇게 구석지고 후미진 곳으로 들어가니 왜인지 찝찝함을 버릴 수 없었다.

“맞아요. 음, 길이 좀 좁죠?”

뾰족하게 끝이 올라간 눈꼬리에 머쓱함이 묻어났다. 평소에는 가로등 불빛이 희미한 곳이라 밤에 왔으면 그리 더러워 보이지는 않았을 텐데, 해가 떨어지기 전이라 그런지 여기저기 지저분해 보이는 곳이 너무도 잘 보였다.

“여기 골목만 지나면 돼요. 다 왔어요.”

“흠……. 가죠.”

누가 버렸는지 모를 플라스틱 컵 옆으로 먹다 남은 갈색 음료가 쏟아져 나와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평소라면 발도 디디지 않았을 텐데. 무감각한 눈으로 힐끔 내려다본 강현우는 성큼성큼 희주를 뒤따라갔다.

얼마 가지 않아 희주의 걸음이 딱 멈췄다. 끝이 없을 것 같았던 골목을 깊숙이 들어온 후였다. 골목길이 준 충격의 여파가 워낙 커서 그렇지, 희주의 말마따나 식당은 영화관에서 멀지 않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여기예요.”

희주가 먼저 안으로 들어서는 동안 강현우는 턱을 위로 치켜들고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간판이 달려 있어야 할 곳에는 오래되어 여기저기 부서진 빨간 벽돌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골목 쪽을 나 있는 창문과 그 안으로 보이는 둥그런 테이블만 아니었더라면 식당은커녕, 평범한 가정집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솔직히 평범까지도 아니긴 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살갑게 인사를 하며 들어가자 안쪽에서 일을 하던 한 여자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와 그를 반겼다.

“아이고, 오랜만이에요. 편하신 데 앉으세요.”

“그럼 바깥쪽에 앉아도 돼요?”

“그럼요. 금방 물 가져다드릴게요.”

저녁 장사만 하는 곳이라 가끔 운이 따라 주는 날이면 그날의 첫 손님이 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벌써 10년 가까이 단골인 희주도 딱 세 번 경험해 본 일이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주말이었다. 보통 주말은 오픈 때부터 줄을 서야 할 때가 많은데, 희한하게도 오늘은 가게 안에 아무도 없었다.

영화관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대박 운이네. 희주는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맞은편에 앉는 강현우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우리가 첫 손님인가 봐요. 오늘 진짜 운이 좋다. 그죠?”

늘 프라이빗 룸으로 가곤 하는 강현우가 그걸 알 리가 없었다. 대충 고개를 주억거린 강현우는 금방 희주와 인사를 나눴던 여자를 향해 턱짓을 해 보였다. 희주의 시선이 같은 곳으로 향했다.

“아는 사이입니까?”

“아는 사이라고 해야 하나? 음, 여기 단골이라서 사장님이 제 얼굴은 아세요.”

이름은 모르실걸요. 부연하는 말을 들으며 강현우는 스윽 가게 내부를 훑어보았다. 오는 동안 골목길의 위생 상태는 최악을 달렸지만, 그래도 이곳은 식당이니만큼 깔끔한 편이었다. 오래된 티가 나는 곳이 일부 있었지만 지저분하게 먼지가 쌓여 있다거나 이물질이 묻어 있는 곳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는 듯 날카롭게 세워졌던 눈매가 마지막으로 벽면에 걸려 있는 영업 신고서를 빠르게 훑었다. 불법은 아니군. 그제야 모든 의심을 접은 강현우는 한결 풀어진 얼굴을 하곤 희주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여기는 메뉴판이 없네요.”

“아. 여기 원래 메뉴판이 없어요. 예전부터 다들 입소문으로 오는 곳이라… 혹시 매운 거 잘 드세요?”

“못 먹는 편은 아닙니다.”

“그럼 매운 거도 하나 시킬게요.”

그래요. 양념갈비겠거니 여긴 강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사장님이라고 불린 여자가 커다란 쟁반을 들고 나왔다. 강현우는 그녀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착착 놓아 주는 반찬을 하나하나 세밀히 살폈다. 반찬 상태는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사장님. 일단 간장 두 개랑 매운 거 하나 주세요.”

“술은요?”

“어…….”

올 때마다 시켰던 터라 사장님은 당연하게 물은 듯했다. 희주는 시선을 움직여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술 마시러 온 건 아니었지만, 음주를 즐기지 않는 사람과 동행해서인지 저절로 그의 눈치를 보게 됐다.

“드시고 싶으면 드셔도 됩니다.”

“그럼 소주 한 병, 맥주 한 병 주세요. 사장님.”

“네. 조금만 기다려요.”

희주는 수저통을 열어 수저와 젓가락을 꺼내 내밀었다. 그러고는 빨간 소스가 뿌려져 있는 파채 그릇을 덥석 집어 가더니 쓱쓱 섞었다. 양념이 골고루 섞인 그릇을 제자리에 내려놓기가 무섭게 가장 먼저 술이 나왔다. 긴 시간 동안 냉장고에서 냉기를 머금고 나온지라 본래 투명해야 할 병에 살얼음이 껴 희끗했다.

제일 먼저 소주 뚜껑을 돌려 따고, 옆에 놓인 병따개로 병맥주의 뚜껑도 시원하게 딴 희주는 옆의 소주잔을 집어 들었다. 소주잔 두 개를 겹쳐 잡은 후 선을 맞추어 꼴꼴 소주를 따라 맥주잔에 털어 넣고, 이어 또 중간선을 맞추어 맥주를 채웠다. 그런 다음 젓가락 하나를 안에 세워 넣고 다른 한 짝으로 치면 거품이 뽀글뽀글…….

“와.”

웬 감탄사에 화들짝 놀란 희주는 푹 젖은 젓가락 끝을 입에 물었다가 멈칫 손을 멈췄다. 강현우가 무척 흥미롭다는 눈을 하고 저를 보고 있었다.

음식 나오기 전에 소맥 말아서 원샷 하기. 여나연과 조한희와 올 때면 늘 하던 짓이었다. 이걸 강현우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행한 자신이 소름 끼치면서도 쪽팔렸다. 희주는 귓불이 벌게져서는 물고 있던 젓가락을 얌전히 내려두었다.

“저 방금 너무 술꾼 같았죠…….”

“아니요. 신기해서요. 듣기만 했지, 눈앞에서는 처음 보거든요.”

“보통 회식 가면 다 이러지 않아요?”

“아. 제가 회식을 잘 안 갑니다.”

“그래도 돼요? 부럽다. 사내 문화가 되게 자유로운가 봐요.”

신기하다는 듯 묻는 말에 강현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회식 자리에 상무가 오는 걸 반기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눈치껏 가지 않는다는 뜻이었는데, 제 마음대로 해석해 버린 희주는 “좋은 회사 다니시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오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가장 먼저 테이블 한가운데에 새빨갛게 불이 붙은 숯불이 한가득 들어갔다. 일부러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바깥쪽 테이블에 앉았는데도 뜨끈한 열기가 훅 끼쳤다.

숯불 위에 석쇠가 척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무표정한 얼굴이었던 강현우는, 그 옆에 딸그락 소리를 내며 놓이는 접시를 보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난생처음 보는 비주얼의 음식과 그 옆으로 식사 테이블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 놓여 있었다.

“먹을 줄 아시니까 따로 설명은 안 할게요?”

“넵. 감사합니다. 아, 이모. 앞치마도 두 개 주세요.”

“여기 뒤에 있네?”

“아, 그러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시라며 사장님이 물러난 후로도 강현우는 여전히 테이블이 꺼림칙한 눈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희주는 뒤에 걸린 빨간 앞치마를 두 개 빼 와 하나는 제 목에 걸고 하나는 강현우에게 내밀었다.

강현우는 제 손에 들린 앞치마를 훑어보다가 마지못해 목에 걸었다. 주류 브랜드명이 커다랗게 박혀 있는 시뻘건 색의 강렬한 앞치마도 처음이라 어색하고 낯설었다.

이거 세탁은 하는 건가? 찜찜했지만 겉으로는 딱히 티를 내지 않은 강현우는 길이가 다소 짧은 감이 있는 앞치마를 당겨 가까스로 허벅지를 가렸다.

“익어서 나온 거라 바로 드셔도 상관은 없어요. 근데 저 개인적으로는 겉에 양념을 살짝 태워서 먹는 게 가장 맛있더라고요.”

희주는 익숙하게 집게를 들고 그릇에 따로 담겨 나온 쪽갈비를 한 대씩 석쇠에 올렸다. 치이익. 달궈진 석쇠에 양념이 잔뜩 묻은 고기가 올라가자 뿌연 연기가 뭉게뭉게 위로 치솟았다.

양념 타는 냄새가 났다. 음식을 ‘태워서 먹는다’는 것도 놀라운데, 갈비라고 해 놓고 갈비의 비주얼이 전혀 아닌 고깃덩이는 기함할 정도였다. 눈이 쨍할 만큼 진한 선분홍빛 바탕에 보기 좋게 지방이 껴 있는 그런 소갈비를 생각하고 왔던 강현우는 벌써 군데군데 그을음이 묻어나기 시작한 석쇠와 고깃덩이를 심각하게 훑어 댔다.

설마 사람이 못 먹는 음식을 팔까. 일단 제가 생각했던 것이 아니어서 그렇지, 눈에 보이는 거나 풍기는 냄새나 역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저것. 양말처럼 똘똘 뭉쳐 놓은 건 다름 아닌 목장갑이었다.

“희주 씨. 이게 왜… 있는 겁니까?”

“아, 그거요.”

이건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이냐는 투로 시선을 들어 올리자, 희주는 직접 시범을 보였다. 이 목장갑 먼저 낀 다음에, 그 위에 위생 장갑을 끼는 거예요. 손에 양념 묻으니까요.

“아, 오른손잡이면 왼손에 끼는 게 편해요.”

장갑을 오른손에 끼려고 했던 강현우는 멈칫거리며 순순히 반대 손으로 바꿔 끼웠다.

“이제 드셔도 돼요.”

희주는 개중에 살코기가 가장 많이 붙어 있고 큼지막한 대를 골라 강현우 앞으로 스윽 밀어 주었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묻어 있던 양념이 자글자글 끓고 있었다.

강현우는 목장갑과 위생 장갑을 겹쳐 낀 왼손으로 딱딱한 뼈 부분을 움켜쥐었다. 숯불로 인한 열기가 두꺼운 목장갑을 뚫고 맨 살갗으로 전해졌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왼손에 든 것을 조심스럽게 입가로 가져온 강현우는 뼈대에서 살짝 떨어져 나온 살코기를 앞니로 베어 물었다.

“어때요?”

어쩐지 조금 긴장한 듯한 물음이었다. 몇 번 우물거리던 입술이 움직임을 멈추는가 싶더니 이윽고 두 사람의 시선이 숯불을 사이에 두고 마주쳤다. 놀라운 것을 맞닥뜨린 표정이었다. 강현우의 두 눈에 옅게 자리 잡고 있던 쌍꺼풀이 눈두덩이 속으로 쏙 모습을 감추었다.

“맛있죠?”

그의 반응에 잠시 멈칫했다가, 곧 다시 턱을 움직여 입 안에 든 것을 우물거리는 강현우를 보고 희주는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많이 드세요. 여기 매운 거도 맛있어요.”

강현우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은 살코기를 마저 입에 넣었다. 잘 먹겠다는 말 백 마디보다 이렇게 잘 먹어 주는 행동 하나가 지갑을 열게 하는 법이다. 제 원픽 맛집을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동에, 희주는 인심 좋은 주인장처럼 노릇하게 익은 갈빗대를 강현우의 앞쪽으로 밀어 주었다.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마치 제 가게라도 된 양 뿌듯하고도 만족스러웠다.

먹는 걸 눈으로 확인도 했겠다, 희주도 본격적으로 갈빗대를 뜯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추잡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메뉴인데도 불구하고 묻히거나 흘리는 것 없이 야금야금 잘도 먹었다. 과연 한두 번 먹어 본 솜씨가 아니었다.

강현우 역시 처음에는 조금 미숙한 듯했지만 금방 익숙하게 식사를 이어 갔다. 포크와 나이프도 없이 손으로 움켜쥐고 뜯어 먹는 행위에 께름칙함을 느낀 건 사실이었지만 막상 해 보니 꽤 나쁘지 않았다.

희주가 갈빗대를 뜯다 말고 반찬에 젓가락을 뻗을 때면, 강현우는 그걸 유심히 봐 놓았다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 먹었다. 또 희주가 간장 소스가 밴 것을 집어 가면 강현우도 똑같은 것을 집었고, 매운 것을 물면 또 똑같이 매운 것을 입에 넣었다. 특별한 재료를 쓴 것 같지도 않은데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간판과 메뉴판이 없어도 입소문을 타고 알음알음 온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해 보이듯, 두 사람이 갈빗대를 물어뜯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가게는 손님들로 꽉 들어차기 시작했다.

모든 테이블이 만석이 된 후로도 빈자리를 확인하러 들어오는 무리가 심심치 않게 들이닥칠 정도였다. 결국 바깥에 간이 테이블을 펼쳐 자리를 만들어 내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럼에도 자리가 없어서,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는 무리가 하나둘 모여 또 하나의 긴 줄을 만들어 냈다.

“사람이 많네요.”

어쩐지 불편하지만은 않은 기분에 나른히 풀린 얼굴을 한 강현우가 너른 창 너머로 늘어선 줄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주위를 둘러본 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평일에도 이래요.”

“자주 오던 곳인가 봅니다.”

어느덧 석쇠 위에는 뼈대가 몇 개 남아 있지 않았다. 맥주는 진작 다 마신 지 오래였고, 소맥을 말다 남은 소주만 희주가 찔끔찔끔 마셔 없애는 중이었다.

“네에. 한 달 전인가? 그때 온 게 마지막이었어요.”

얼큰하게 취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떠들어 대는 다른 테이블의 취객에 비해, 희주는 뺨만 발긋해질 뿐 조곤조곤 말하는 투는 그대로였다.

“그땐 누구랑 왔어요?”

강현우는 희주 앞에 놓인 빈 컵에 물을 따라주었다. 한 달 전이면 저와 만나기 이전이었다. 저와 만나기 이전의 가시적인 흔적은 확인하기 어렵겠지만 그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을 이야기들이 몹시 궁금해졌다.

“친구들이랑요.”

“어떤 친구들?”

“둘 다 대학 친군데……. 아, 한 명은 고등학교도 같이 나왔어요.”

“그 친구들이랑은 자주 만납니까?”

알코올 때문에 생각이 조금 느려졌는지 두어 번 눈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겼던 희주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희주는 강현우가 따라 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차분히 답했다.

“바빠서 자주는 못 봐요. 다 직장인들이니까……. 근데 당분간은 더 자주 못 볼 것 같아요.”

“왜요?”

“그 둘이 결혼하거든요. 식이 아마… 이번 달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날 여나연에게서 받은 청첩장은 제집 신발장이나 식탁 어딘가에 놓여 있을 것이다. 내가 달력에 표시를 해 뒀던가. 희주는 집에 가는 대로 다시 한번 확인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무튼.

“나연이가, 아, 고등학교도 같이 나왔다는 애요. 걔가 5월에 결혼하고 싶어 했거든요. 5월의 신부가 될 거라나 뭐라나……. 근데 결혼도 성수기, 비수기 있는 거 아셨어요? 전 몰랐거든요.”

강현우는 팔짱을 낀 채 일순 흥미 가득한 얼굴을 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결혼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5월이 예식 성수기래요. 그래서 식장 잡는 것도 힘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흠. 강현우가 가볍게 침음했다. 이게 과연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주제인지, 아니면 계산적으로 끄집어낸 주제인지를 가늠해 보았다. 물론 후자여도 상관없는 문제이기는 했다. 저야 처음부터 눈속임을 위해 결혼 정보 회사를 이용하려 했던 것이었지만, 상대는 결혼이 목적이었을 테였다. 의도적이건 아니건 결혼 이야기가 나올 만했다.

잠시간 희주를 빤히 응시하던 강현우가 지그시 턱을 괴었다.

“희주 씨는 결혼 언제 하고 싶어요?”

희주는 금세 홧홧해지는 얼굴에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의자에 등받이가 없었더라면 중심을 잃고 넘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혼 정보 회사를 끼고 만난 사이기는 하지만, 벌써부터 이런 대화를 해도 되는 걸까 싶었다. 이제 고작 세 번 만난 사이였다. 보통 다들 이렇게 빠른가? 당혹감에 귓불을 만지작거리던 희주는 띄엄띄엄 말을 늘어놓았다.

“어……. 저는 3월이나… 10월이요.”

“왜요? 5월은 별로예요?”

“5월은…….”

어물어물 열렸던 입술이 딱 다물렸다. 강현우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희주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5월은… 행사가 너무 많잖아요.”

가정의 달이니까. 어릴 때는 물론이고 성인이 된 후에도 썩 좋은 기억은 없던 터라 내키지 않았다.

“학교 행사가 다 5월에 몰려 있어서요.”

무심코 어린이날을 떠올렸다가 희주는 저도 모르게 표정을 단단히 굳힐 뻔했다. 재빨리 표정을 정돈한 희주는 웃음으로 대충 얼버무리고는 반쯤 남은 술잔을 훅 비워 냈다. 불 앞에 있어 미지근해진 액체가 목구멍을 뜨겁게 데우며 넘어갔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계절이 좋아서요. 그래서 전 3월이나 10월이 좋을 것 같아요.”

“딱 그맘때쯤이 날씨가 좋긴 하죠. 선선하고.”

적당히 행사와 날씨 핑계를 댔다. 다행히도 강현우는 희주가 원하는 방향대로 넘어가 주었다.

“그런데 3월도 바쁘지 않아요? 보통 학교 개학을 그쯤 하지 않나.”

“아…….”

그건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듯 희주가 탄식했다.

안 바쁜 달이 있겠느냐만,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은 교사에게 있어 특히 바쁜 달인 것은 맞았다. 올해 3월을 버텨 낸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걸 또 그새 까먹고 있었다니. 그럼 방학이 껴 있는 한여름과 한겨울은 어떨까 싶은 생각이 떠올랐다.

문득 결혼도 비수기에는 싸다는 말이 떠올랐다. 볕 좋은 5월이 성수기라면 너무 덥거나 너무 추운 달은 비수기이지 아닐까? 한국이 결혼한다고 며칠 내내 파티가 이어지는 문화권도 아니고, 피로연까지 한다고 해도 요즘에는 하루면 충분하다던데. 금액 차이를 생각하면 또 딱 하루만 참으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눈썹 사이를 좁히면서까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한 희주를 보며 강현우가 웃음을 삼켰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읽혔다. 아마 덜 바쁜 달을 찾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강현우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장난기를 가까스로 내리눌렀다. 따라 둔 물로 목을 축이면서 표정을 가다듬은 그는 짐짓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3월은 저도 별롭니다. 제 생일이 껴 있거든요.”

여상하게 이어진 말에 희주가 번뜩 강현우를 쳐다보았다. 쏟아질 듯 동그랗게 뜨인 눈을 마주하고도 강현우는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개인적으로 생일이랑 결혼기념일이 같은 달에 있는 건 별로라. 아, 분명히 말하는데 선물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닙니다.”

“…….”

“희주 씨는 생일이 언제예요?”

“아, 저는 1월이에요.”

“음, 1월. 그럼 일단 1, 3, 5월은 제외해야겠네요.”

“아니, 저는…….”

“친구분한테 들은 말은 따로 없어요? 결혼 준비하는 데 오래 걸렸답니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이제야 생각할 틈을 주는 듯한 강현우의 태도에 희주는 지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1년이나 남았는데 왜 그렇게 서두르느냐며, 식장 예약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해맑은 질문을 던졌다가 ‘식장 예약해야지, 예복 고르러 가야지, 샵 골라야지’ 원치 않은 족집게 과외를 당했던 희주였다. 그날 돌팔매질과 같았던 설명의 결론은 이거였다.

“이것저것 알아보고 예약할 게 많아서…….”

“그렇다고는 들었습니다.”

“여유롭게 준비하려면 1년은 잡아야 한다고….”

말을 끝맺지 못한 희주가 힐끔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강현우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진작 거두고 입술을 매만지고 있었다. 무언가 헤아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무슨 말이 나올까 전혀 예상이 되지 않아 희주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살폈다. 곧 눈을 마주쳐 온 강현우가 사르르 눈꼬리를 휘었다.

“그럼 올해 10월은 무리겠네요.”

희주의 눈꺼풀이 빠르게 깜빡였다. 언뜻 보이는 눈동자에는 당혹감이 가득했다.

나 지금 고백받은 건가? 아니, 이걸 고백이라고 해야 하나? 이 정도면 프러포즈 아니야? 브레이크 밟는 법을 모르는 듯한 강현우의 화법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희주는 강현우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옅은 갈색을 띠는 강현우의 눈은 색소가 옅어 동공이 보일 정도로 밝았다.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아 희주는 물컵을 잡아챘다. 굴곡이 거의 없다시피 한 가는 목이 작게 꿀렁거렸다.

“희주 씨.”

작게 웃음을 터트린 강현우가 희주를 불렀다. 반응이 이리도 즉각 돌아오니 난감하고 짓궂은 말을 함부로 하게 됐다. 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바짝 굳은 희주가 귀여우면서도, 목에 걸린 시뻘건 앞치마와 대조해 봐도 별반 차이가 없을 만큼 붉어진 얼굴을 보고 있자니 더 이상 장난치는 것은 무리였다. 가만히 두면 달아오르다 못해 뻥, 하고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농담이에요.”

기실 농담은 아니었다. 올해 10월이 아니더라도 강현우는 마음만 먹으면 당장 열흘 후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안 실장이 조금 고생하기야 하겠지만.

이내 희주가 반쯤 안도하며 푸스스 숨처럼 마주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눈썹을 가볍게 으쓱인 강현우가 다분히 가벼운 투로 덧붙인 말에, 희주는 다시 한번 눈을 댕그랗게 떠야만 했다.

“아무래도 이런 곳에서 할 말은 아니죠.”

그러니까 이 말은…….

“분위기라는 게 있으니까.”

어울리는 분위기가 잡힌 곳에서 재차 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이만 일어날까요?”

“아, 아…….”

“먼저 나가 있어요.”

속삭이듯 말하는 강현우를 눈으로 좇던 희주가 뒤늦게 앗, 소리를 내면서 다급하게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오늘은 제가 살 거예요.”

“음?”

희주를 돌아본 강현우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는가 싶더니 이내 찡그리듯 눈을 접어 웃었다.

“그전에 앞치마 먼저 두고 나오는 게 어떨까 싶은데.”

“……아.”

그 말에 희주는 황급히 앞자락을 내려다봤다. 어울리지 않는 빨간 앞치마가 힘없이 매달려 대롱거렸다. 언제 벗어 뒀는지 모를 강현우의 것은 진작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 가지런히 접혀 있었다.

“아니……. 아니, 이게 왜 안 벗겨져…….”

마음은 급한데 몸이 따라 주지를 않는다. 오늘따라 말을 안 듣는 손으로 허둥대며 겨우 앞치마에서 벗어났더니 상황은 이미 끝나 있었다. 희주가 본 건 이미 계산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나가자고 미소 짓는 강현우의 모습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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