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수요일 점심, 일찍이 식사를 마친 희주는 친한 동료 교사들과 함께 교정을 거닐고 있었다.
“와……. 햇빛이다.”
멀거니 하늘을 응시하던 희주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맥없이 중얼거린 말에 오른편에 선 오주형 선생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로 따사로운 봄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눈이 부신지 미간을 구기면서도 선뜻 피하지는 않던 그는 희주가 그랬던 것처럼 말끝을 흐렸다.
“그러게요…….”
“어우, 기운 빠져. 뭐예요, 두 사람? 어디 갇혀 있다 나왔어요?”
그러자 왼편에 서 있던 배예은 선생이 경악스럽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타박에 가까운 그녀의 물음에 오주형은 커피를 마시는 척 시선을 피했고, 희주만 홀로 볼멘소리를 터트렸다.
“우리는 직장에 귀속되어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갇혀 있다 나온 거 맞죠, 뭐.”
희주는 운동장 건너 학교 본관 쪽을 턱짓했다. 오주형이 맞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시간을 최대한 야외에서 보내고픈 건 직장인의 절대적인 욕구였다. 광화문 근처 직장인들이 왜 점심시간마다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청계천을 돌겠는가. 잘 모르는 사람들―특히 취업 준비생―은 그 모습을 보며 바쁜 업무 사이 커피 한 잔의 여유에 대한 부러움을 키우겠지만, 실상은 참혹할 뿐이었다.
겉으로는 여유롭게 웃고 있는 직장인들은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날 처음 쬐는 햇빛을 보고 감탄한다든지, 집에 가고 싶다고 한탄하든지.
희주 역시 그 욕구 실현의 척도인 햇빛을 온몸으로 만끽 중에 감탄사가 나온 거였다. 그걸 몰라주는 동료가 야속해 희주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우리가 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겠어요. 배 선생님, 광합성 몰라요, 광합성?”
“사람이 식물도 아니고 뭔 광합성이에요.”
“……사람도 햇빛 받으면 광합성 하는 거 아닌가?”
“글쎄요? 난 모르겠네. 문과라서.”
배예은이 어깨를 으쓱이며 희주의 말을 받아쳤다. 그녀는 영어 교사였다.
“…….”
“…….”
권희주와 배예은, 총 네 개의 눈동자가 세 사람 중 유일한 이과인 수학 교사 오주형에게로 향했다. 반짝이는 시선을 느낀 오주형이 고개를 돌렸다.
“오 선생님은 이과잖아요.”
사람도 햇빛 받으면 광합성 해요? 희주의 물음에 오주형은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 안에 남은 커피 한 모금을 꿀꺽 삼켰다. 그는 꼭 질문하는 학생들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건조하게 답했다.
“전 수학이 좋아서 이과 간 건데요.”
“헐.”
“어떻게 사람이 수학을 좋아해요?”
희주는 짤막한 감탄사를 내뱉었고, 배예은은 사람이 그럴 수가 있냐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는 살면서 수학을 좋아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자신이 들여다보는 숫자는 통장에 찍힌 숫자와 주식 거래 수익률뿐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희주는 이 말이 옳다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꼭 못 볼 꼴을 본 것 같은 반응을 보이는 두 사람을 오주형이 어이없게 쳐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세 사람은 3년 전 나란히 1학년 담임을 맡은 것을 계기로 자연히 친해진 관계였다. 처음에는 그저 직장 동료끼리 오갈 수 있는 친목의 적정선만 유지했었는데, 강덕수라는 인물 하나로 친구 못지않은 관계로 발전했더란다.
당시 1학년 5반 담임이었던 강덕수는 그때도 역시나 꼰대였다. 젊은 선생님들끼리 친해져 몰려다닐 수도 있는 걸 가지고 부러워서 그러는 건지, 보기 싫어서 그러는 건지 온갖 시비를 다 걸어 댔다.
세 사람이 밥을 먹고 있으면 은근슬쩍 다가와 먹는 내내 잔소리를 해 대어 입맛을 뚝 떨어지게 만든다거나, 당사자들은 아무 생각도 없는데 서로 만나 보라며 이상한 농담을 던져서 괜한 사람 불편하게 만든다거나. 그래 놓고 자신의 센스에 만족해서 웃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원래 진상은 본인이 진상인지 모른다더니. 그럴수록 본인을 향한 비난은 거세지고 무리의 응집력만 강해진다는 걸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참… 덕수 쌤도 사람 참 안 변해.”
어느새 세 사람의 대화의 주제는 강덕수였다.
“덕수 쌤 때문에 매년 업무 분장도 일이야. 그 인간이 어느 학년으로 갈 줄 알고 냅다 쓴대요? 떠보려고 해도 또 그럴 때만 눈치 빨라서 말 안 해 준다? 나 업무 분장 시즌 오면 정화수 떠 놓고 기도하잖아. 같은 학년 안 되게 해 달라고.”
배예은이 툴툴거리며 아메리카노를 쭉 빨았다.
“전 지나가다 만날까 봐 2학년 층은 눈길도 안 줘요.”
“주형 쌤도 그래? 난 또 내 옆에 와서 밥 먹을까 봐 무조건 짝수 맞춰서 앉잖아. 학년도 다른데 왜 그런다니?”
세 사람은 작년까지 같은 학년 담임을 맡아 오다가 올해 오주형은 1학년부로, 배예은은 3학년부로 뿔뿔이 흩어졌다. 두 사람은 피할 수라도 있지, 강덕수와 같은 2학년부인 희주는 꼼짝없이 당하고만 살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불만스레 볼을 부풀렸던 희주가 푸우, 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슬슬 눈치를 보던 배예은이 “그러고 보니 희주 쌤, 오늘은 같이 밥 안 먹었네?” 하고 살갑게 어깨를 톡 쳤다. 희주는 오늘 아침, 낯빛이 영 좋지 않던 학년 부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제 뭐 고급 일식집 간다고 자랑을 그렇게 해 대더니 결국엔 배탈 났나 봐요. 아까 점심시간에 병원 좀 가야겠다고 난리던데.”
“어머, 고급 좋아하고 있네. 그러게 사람은 급이 맞는 짓을 해야 하는 거라니까? 안 하던 짓 해서 그래, 그거.”
톡 쏘아붙인 배예은이 으으,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에게서 희주와 같은 감정의 오메가 페로몬이 슬금슬금 흘러나왔다. 어지간히도 싫은 모양이다. 베타인 오주형은 묵묵히 앞만 보고 걷기만 할 뿐이었지만, 표정에서 미묘하게 불쾌한 티가 났다.
대부분 강덕수에 대한 욕을 중심으로 한 대화를 나누며 걷던 그들은 운동장에 있는 나무 벤치에 앉기로 했다. 벤치는 얽히고설킨 등나무 가지가 만들어 낸 자연 그늘 아래에 놓여 있었다. 이맘때쯤 드리워지는 꽃으로 진한 향기가 물씬 풍겨, 산책을 하다 휴식을 취하기 딱인 장소였다.
셋은 우수수 떨어져 있는 작은 보라색 꽃잎을 대충 치우고 앉았다. 본관과 운동장이 정면으로 보였다. 아직 4교시 수업이 한창이라 어떠한 소음 없이 평화로운 교정이었다.
장소가 학교가 아니었다면 놀러 온 기분이라도 들 텐데. 애써 졸업해 떠난 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니. 해를 봐서 살짝 들떴던 기분이 순식간에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배예은은 아닌 듯했다.
“날씨 너무 좋다. 이런 날엔 놀러 가 줘야 되는데. 그죠?”
고개를 앞으로 내민 배예은이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왜인지 들떠 있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3학년은 곧 놀이공원 가잖아요.”
그게 뭐 대수냐는 듯한 말투로 오주형이 받아쳤다.
5월은 온갖 행사가 몰려 있는 달이었다. 어린이날부터 해서 어버이날, 스승의 날, 그리고 현장 체험 학습까지. 각각 수련회와 수학여행을 가는 1, 2학년과는 달리 수험생인 3학년들은 가까운 놀이공원으로 가볍게 현장 체험 학습을 갈 예정이었다.
“…….”
빨대를 입으로 가져가려다 멈칫했던 희주는 이내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그건 애들이나 즐겁죠.”
“맞아. 저도 놀이공원은 애인이나 친구들이랑 가고 싶다고요.”
배예은이 코끝을 찡긋거리며 투덜거리자 오주형이 멋쩍게 입을 닫았다.
그들은 등나무 아래에 앉아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주제는 가지각색이었다. 아무래도 학년이 달라지니 마주칠 일이 적어져서 그런지 한번 만날 때마다 나눌 대화거리가 끊이질 않았다. 주로 배예은이 물꼬를 텄고, 희주는 적당히 제 생각을 말하면서 맞장구를 쳐 주었으며, 오주형은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물음에 답을 하는 정도로 대화가 이어졌다.
“하아아…….”
어느덧 커피도 다 마셔 갈 때쯤이었다. 얼음 사이를 비집어 빨대를 쑤셔 넣고 요란스레 음료를 빨아들이던 배예은이 일순 무언가를 깨우친 듯 길게 한숨을 뽑아 냈다.
“저도 봄 타나 봐요. 막 안 하고 싶던 연애가 다 하고 싶네.”
“……갑자기요?”
이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주제는 늘 뜬금없는 것들이 떠올랐지만, 연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야기 나눈 적 없던 터라 조금 놀랍기는 했다. 오주형도 똑같이 느꼈는지 무표정하던 얼굴에 살짝 물음표가 떠 있었다.
“느낀 지는 좀 됐어요.”
어안이 벙벙해져 쳐다보자 퉁명스러운 대꾸가 돌아왔다. 구시렁거리는 얼굴이 시무룩해 보였다.
“보니까 다들 짝꿍이랑 같이 꽃구경도 가고, 라운딩도 가고 그러더라고요. 난 꽃구경은커녕, 스크린 골프장도 못 가 봤는데.”
연달아 투덜대던 그녀는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가지고 있는 불만을 터트렸다.
“어디 돈 많고 잘생긴 알파 없나?”
없을 리가. 희주는 저도 모르게 강현우를 떠올렸다.
지난 주말, 강현우와의 맞선을 마치고 돌아온 희주는 고민 끝에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즐거웠다, 저도 즐거웠다, 제 불찰로 불편하시지는 않았는지, 오히려 제가 불편을 끼치지 않았는지 걱정이다, 이렇게 겸손하고 별거 없는 대화만 쭉 오갔던 것 같은데 잠이 들기 직전까지 침대에 엎드려 한참 동안 휴대폰을 붙잡고 있었더란다.
계속 오가던 대화는 강현우의 푹 쉬라는 말로 마무리가 됐지만 희주는 알겠다는 답장을 보낸 후로도 쉼 없이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친구 목록에 새로운 인물이 추가되었다. 성이 강 씨라서 메신저에 들어가면 가장 꼭대기에 그의 이름이 보였다. (강덕수 학년 부장은 ‘학년 부장 쌤’으로 저장되어 있다)
엄지를 구부려 그의 이름을 누르면 화면 가득 어딘가의 풍경 사진이 떠올랐다. 학부모나 학생들의 시선을 염려해 프로필 사진을 설정해 두지 않은 희주와는 달리, 강현우의 것은 몇 번 바뀐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중 강현우의 얼굴이 나와 있는 사진은 여행 도중 일행이 찍어 준 것 같은 구도의 옆모습 한 장뿐이었다. 그마저도 오래전 찍은 사진인지 화질이 너무도 좋지 않아서 도무지 확대해서는 볼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희주는 공연히 만족하고 이내 잠이 들었다.
무슨 말로 연락을 이어 나가야 할지 내심 걱정을 했었는데, 그날 이후 두 사람의 연락은 지금까지 의외로 끊이질 않고 있었다. 첫 만남에서 느꼈듯 강현우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능력이 있었다.
지잉.
한창 배예은 선생이 ‘돈 많고 잘생긴 알파’에 대한 고찰을 늘어놓고 있을 때,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희주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어 메신저를 켰다.
/message*you/
바빠서 지금 확인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오늘은 식사를 빨리 하셨네요.
오늘로써 두 번째 답장이었다. 바로 직전의 대화는 오늘 아침 날씨에 대한 대화였다.
스티커나 이모티콘 하나 없는 딱딱한 메시지 한 줄뿐인데도 그의 성격을 알고 있어서일까, 무뚝뚝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message*you/
[사진]
괜찮다는 문장을 만드는 사이 채팅창에 말풍선 하나가 크게 띄워졌다. 사진 속 하얀 식판에는 신선해 보이는 샐러드와 불고기, 이 밖에 여러 종류의 반찬과 밥, 국이 보기 좋게 담겨 있었다.
강현우는 식사 때마다 상관에게 보고를 하는 것처럼 사진을 찍어 희주에게 보내고는 했다. 처음 그에게서 이런 사진을 받았던 월요일에는 적잖이 당황했었다. 뭐 이런 걸 보내나, 싶어서가 아니라 비주얼이 말이 안 되게 잘 나오는 편이라서 그랬다.
우리 학교 급식도 SNS에서 화제가 됐을 정도로 맛있기로 유명한데……. 이건 뭐 비교가 안 되네. 이런 생각.
/message*me/
수요일은 4교시 수업이 없어서요!
늘 드는 생각인데, 급식이 되게 잘 나오는 편인 것 같아요.
아, 아니; 급식이 아니라; 구내식당이요.
제가 매일 먹는 게 급식이라서 저도 모르게 그만…….
/message*me/
그래서 간혹 이런 말실수를 하기도 했다.
희주는 강현우가 보내온 사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반듯하게 놓인 식판과 바로 옆에 정갈하게 놓인 수저와 젓가락은 어쩐지 그의 단정한 성격을 보여 주는 것 같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누구랑 연락하길래 웃어요? 애인?”
바짝 어깨를 붙인 배예은이 봐도 되냐며 눈짓으로 물었다. 딱히 숨길 것도 아니라 희주는 보고 있던 화면을 그녀 쪽으로 슬쩍 돌려 주었다.
“애인은 아니에요.”
“애인‘은’ 아니면 썸이라는 소린데?”
무슨 사진이에요? 배예은은 허락을 구한 후에야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오주형 역시 궁금한지 고개를 빼고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뭔가 싶어 빤히 들여다보기만 하는 배예은과는 달리, 조용히 눈을 끔뻑이던 오주형이 뭔가 알아챈 듯 “아” 하고 이어 물었다.
“아까 급식 사진 찍은 거 이분한테 보낸 거예요?”
“아……. 네, 뭐.”
희주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뭘 먹을 때 사진을 찍는 타입은 아닌데, 마냥 보고 있을 순 없어 주변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찍어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희주가 찍어 보낸 사진은 강현우의 것에 비해 구도도 색감도 모두 엉망진창이었다.
“어머, 희주 쌤이 안 하던 짓을 하시네.”
배예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탄성을 내질렀다. 뭔가 묻고 싶어 안달 난 표정이었지만 입술만 달싹거리다 말 뿐 그녀는 미소만 샐샐 흘렸다. 원하는 답을 얻은 것에 만족한 오주형은 진작 관심을 끄고 음료 컵에 남은 얼음을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고 있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직장 동료는 친구가 아니었다. 더 깊은 것은 묻지 않고 적당히 발을 빼는 그들이 고마우면서도 어딘가 찜찜했다. 왜지. 의아함에 미간이 좁아졌다. 그사이 오주형과 시선을 주고받은 배예은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희주의 어깨를 툭 밀었다.
“에에, 희주 쌤도 봄 타는구나?”
“올해 여름휴가는 이분이랑 가시겠네요.”
두 사람은 정보를 캐내는 대신 희주를 놀리기로 작정한 듯했다. 왼쪽에서는 배예은이 꺅꺅 비명을 지르며 호들갑을 떨었고, 오른쪽에서는 오주형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희주의 미래를 단정 짓고 있었다.
“난 남의 연애사 듣는 게 제일 좋더라? 희주 쌤, 잘되면 날 잡고 한번 싹 말해 주기다?”
“아니, 그게.”
“저 휴게실에서 잠깐 쉬다가 들어갈 건데 동참하실 분 계신가요?”
“어머, 나도 그래야겠다. 주형 쌤, 같이 가요.”
벌떡 일어난 배예은이 오주형의 옆에 붙어 섰다. 뒤는 돌아보지도 않고 저들끼리 앞서가는 두 남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희주가 작게 한숨지었다.
“아니, 왜 난 안 데려가.”
들리지도 않을 말을 중얼거린 희주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뒤를 따라가려던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액정을 톡톡 두드렸다.
/message*me/
식사 맛있게 하세요!
/message*me/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고양이 스티커도 이어 보냈다. 조금 쑥스러운 표정으로 제 볼을 긁적인 희주는 멀찍이 앞서가는 두 사람의 뒤를 후다닥 따라나섰다.
“아, 같이 가요!”
* * *
같은 시각. 백영 그룹 사옥의 구내식당.
“…….”
강지우는 할 수만 있다면 진심으로 눈알을 씻어 내고 싶었다. 그녀는 떨떠름함과 혐오가 섞인 표정으로 제 친오빠를 위아래로 훑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혈육의 만행에, 6년 전 라섹 수술로 끌어 올려 놓은 시력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싶다. 밥 먹으러 왔으면 밥이나 먹을 것이지. 난데없이 음식 사진을 찍지를 않나. 밥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한참 휴대폰만 들여다보니, 이제는 재수 없는 낯짝에 꼴 보기 싫은 미소가 올라와 있었다.
페로몬은 왜 또 이 지랄이야?
강지우는 눈썹을 확 찌푸렸다. 페로몬까지 질질 새는 걸 보아하니 보기 드물게 기분이 좋은 상태인 게 분명했다. 제 기분은 최악이지만 말이다. 같은 피가 섞인 혈육의 페로몬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게 동족 혐오라는 건가? 넘실대는 페로몬이 혹시나 제가 먹을 밥까지 더럽힐까 봐 강지우는 식판을 제 쪽으로 바투 끌어당겼다.
“저기요. 지금 뭐 하세요?”
쟤 진짜 왜 저래? 밥상머리 앞에서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정작 강현우는 여전히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차갑게 대답했다.
“신경 끄고 밥이나 먹어라.”
“헐, 싸가지.”
강지우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표정과 목소리의 온도 차가 도무지 같은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았다.
사실 짜증은 아까부터 나 있었다. 몇 년 만에 보는 하나뿐인 여동생에게는 살가운 인사 한마디 건네지도 않던 혈육이, 마주치는 직원들에게는 잘만 인사를 건네더란다. 식사하러 간다는 비서실 직원들에게 개인 카드를 내놓기까지 했을 때에는 강지우는 혹시 제 턱이 빠지지 않았나 뺨을 더듬어 봐야 했다.
저를 대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에, 호적 메이트로 지내 온 지난 27년을 몽땅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보는 사람만 없었으면 당장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래도 오빠가 과한 업무량에 치여서 미친 것 같다고 고자질 아닌 고자질을 했었을 거다.
“강현우 완전 이중인격자…….”
거의 대놓고 퍼붓는 셈인 저주에도 강현우는 들은 척도 않았다. 그는 그저 희주에게서 온 메시지만 다시 한번 반복해 읽을 뿐이었다.
/message*you/
[사진]
오늘은 잔반 없는 날이라 애들이 좋아하는 반찬들로만 나왔어요.^^
/message*you/
지금껏 자신이 먼저 찍어 보내던 사진을 오늘은 상대가 먼저 보내왔다. 사진에는 딱 어린애들이 좋아할 법한 식단이 있었다. 잘 찍어 내려 최대한 노력을 한 것 같기는 한데, 피사체가 비뚤어진 데다 사진 아래에는 희주의 것으로 보이는 옷자락도 슬쩍 찍혀 있었다. 어설픈 실력에 웃음이 절로 났다.
대화 끝에 붙은 고양이 스티커를 보면서는 꼭 저 같은 걸 보낸다 싶었다. 몇 번이고 액정을 눌러 고양이를 건드리던 강현우는 결국 희주가 쓴 것과 같은 스티커를 결제해 버리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가끔 학교 밖에서 식사를 하기도 하는지, 저녁 식사는 집에서 하는 건지, 그럼 오늘은 몇 시쯤 퇴근하느냐는 등의 메시지를 연달아 보낸 후 휴대폰을 재킷 주머니에 갈무리했다. 그제야 제 앞의 존재에 시선이 갔다. 상대를 오래 보지 않고 금방 시선을 거둔 강현우가 수저를 집어 들며 물었다.
“넌 여긴 왜 왔어?”
“그걸 이제 묻는 거니?”
“한국은 언제 들어왔는데.”
“미친……. 한 달도 넘었거든?”
한 달이 뭐야. 두 달이 다 돼 간다! 강지우는 들고 있던 수저를 탁 내려놓았다. 민망해하는 기색 없이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든 혈육의 모습에 화가 나 제 가슴팍을 퍽퍽 내리치기도 했다. 제게 관심이 없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으나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는 혈육의 태도에 화가 나면서도, 그래도 대화라는 걸 할 생각은 있어 보여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진작 전화를 받았으면 여기까진 안 왔지. 아님 집에라도 잘 오든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 사는 집 주소 정도는 알려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엄마도, 아빠도 모르는 게 말이 돼?”
제가 유학을 가 있는 동안 강현우는 독립을 해 버렸다. 하지만 말이 독립이지, 도대체 어디서 먹고 자는지 통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설마 엄마한테는 말해 줬겠지 싶어 물어도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알려 주고 말고는 내 마음이고. 가족이라고 모든 걸 공유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지.”
강현우가 무심히 답하며 반찬 하나를 입 안에 쏙 집어넣었다. 강지우는 몹시 황당해하면서도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조용해졌다. 제 오빠는 지금 싸가지를 입에 같이 처물은 게 분명하다. 그렇게 말문을 잃고 넋을 놓은 사이, 말끔히 삼킨 강현우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왜 왔는데? 설마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닐 테고.”
강지우가 그랬던 것처럼 강현우의 눈동자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냅다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몇 년을 떨어져 있었지만 애틋함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남매지간이었다.
“미쳤냐? 너 같은 걸 보고 싶어 하게? 전 애인을 보고 싶어 했으면 했지.”
강현우의 말에 식겁한 강지우가 부르르 떨었다. 어찌 됐건, 이제 본론을 꺼낼 차례였다.
“오빠 너 선봤다며?”
엄마가 그러더라. 강지우가 슬쩍 주위 눈치를 살피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누가 볼세라 입술을 반쯤 가리기까지 하는 은밀한 태도에 본능적으로 불쾌감이 치민 강현우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를 향해 무슨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강지우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예쁘냐?”
“넌 그 경박한 말투 좀 고치지 그래.”
“아, 예에.”
“또.”
자기는! 이런 걸 보고 내로남불이라고 하나 보다. 네 그 이중적인 태도나 좀 고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강지우는 제가 원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성질머리를 꾹 내리눌렀다.
“교양 있게 물으면 대답해 줄 거야?”
“너 하는 거 봐서.”
“그럼 소녀, 지금부터 예를 갖추어 여쭙겠나이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강지우를 본 강현우가 픽 웃었다.
“방금 폰으로 연락하고 있던 사람, 그 사람이지?”
강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지우는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맞는다고 하니 더 구미가 당긴다.
“어디 사람인데? 유선? 세원? 아니면 CX?”
강지우의 머릿속이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주워들은 바로는 유선 전기의 둘째 딸과 세원의 막내아들, CX의 고명오메가가 결혼 상대를 물색 중이라고 했다. 보통 재벌가에서 약혼과 결혼이라 함은 인맥 구축, 사업 확장을 의미하니, 그들의 입장에서 제 오빠는 최고의 신랑감일 터.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 한 가지 있었지만, 혈육의 연애사만큼 흥미를 돋우는 이야기는 없었다.
“이쪽 아니야.”
“아니야? 그럼 정치 쪽? 박강이 의원, 차기 대선 준비한다는 말 돌던데.”
“아니라니까.”
“그럼 연예인이야? 오빠 연예인에 관심도 없잖아.”
강현우가 고개를 저었다. 묻는 족족 돌아오는 완강한 거절에 당황한 강지우가 눈만 끔뻑거렸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이란 말인가.
“설마 일반인이야?”
긴가민가한 물음에 강현우가 즉답했다.
“어.”
“진짜? 뭐 하는 사람인데?”
“학교 교사.”
“교사? 선생님?”
“어.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
“존나 아니, 진짜 의외네.”
“그런가.”
심드렁하게 답한 강현우가 느릿하게 젓가락을 옮겼다.
강지우는 조금 혼란스러운 눈으로 제 오빠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이던 그녀는 망설임 끝에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그분도 다 알고 나온… 거겠지?”
“뭐를.”
“뭐… 집안 배경이라거나.”
강지우는 괜히 말끝을 얼버무렸다.
두 남매는 어릴 적부터 다수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큰 관심을 받아왔다. 그들을 낳아 준 부모는 백영 그룹의 강 회장 내외였고, 두 사람 모두 우성 알파로 발현했으니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저야 타고난 관종이니 그렇다 쳐도 제 오빠 강현우는 어릴 적부터 그런 것들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왔다. 회의감이 느껴진다나 뭐라나.
아, 잠깐만. 그래서 저 인간 성격이 저 모양인 건가. 인간관계로부터 온 스트레스를 다 나한테 푸는……. 어렴풋이 이해가 되려 했지만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무튼 저런 인간이 맞선이라니. 말이 안 됐다. 처음 강현우가 선을 봤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강지우는 만우절 날짜가 바뀐 줄 알았다.
강현우가 선을 봤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그 상대가 일반인이다? 그렇게 사람을 만난 것 치고는 강현우는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대수롭지 않은 걸 넘어 어쩐지 들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던데.”
이게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듯 벙벙해져 있던 강지우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못 보고 나왔대. 바빠서.”
“그걸 믿냐? 거짓말이겠지.”
“환심 사려고 하지도 않았고, 페로몬으로 수작질도 안 했고.”
와인이 들어간 후로는 취기가 올라 페로몬이 새어 나오기는 했지만, 워낙 희미해서 자신이 우성이 아니었더라면 높은 확률로 못 맡았을 향이었다.
“인사하고 휴대폰만 보고 있더라고. 테이블 밑에 손 넣어서. 내 이름도 몰라서 나더러 그쪽, 그쪽 하던데.”
신선하지 않아? 강현우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권희주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넋이 나간 듯 제 얼굴을 대놓고 쳐다보더니 이내 열심히 딴짓을 하더랬다. 강현우는 그런 식의 태도는 처음이라 살짝 당황했다. ‘날 이렇게 대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라는 고리타분한 대사가 왜 탄생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솔직히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나간 자리였다.
제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은 혹여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접근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강현우는 오래전부터 자신이 누군가와 감정을 교류하며 연애나 결혼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하물며 친구로 다가오는 이들마저도 컴컴한 속내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기업인에게 이미지는 무척 중요한 셀링 포인트였다. 한 기업의 후계자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보수적이었고.
그래서 이만큼 노력은 했다, 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결혼 정보 회사를 이용했던 것이었다. 적당히 소문만 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관계를 발전시켜야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맞선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었다.
“적당히 식사 상대만 해 주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그랬는데?”
“귀엽던데. 솔직하고.”
“그분 몇 살이라고?”
“서른.”
“서른이 퍽이나 귀엽겠다.”
웩. 강지우가 헛구역질을 하는 척 웩웩거렸다. 그러고는 슬쩍 강현우의 눈치를 봤다. 눈을 부라려야 정상인데 오히려 표정에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큼, 흠, 목을 가다듬은 강지우가 멋쩍게 눈썹을 긁었다.
“진짜 마음에 드나 보네.”
“어. 몇 번 더 만나 보려고.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약속은 잡았어?”
“아니, 아직.”
지잉. 지잉. 그때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짧게 여러 번 진동했다. 강현우는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냈다. 액정에는 두 남매 사이를 오간 대화의 화두였던 이의 이름이 짧게 떠 있었다.
“이제 잡으려고.”
강현우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 * *
동료 교사들을 따라 교사 휴게실로 쉬러 갔던 희주는 강현우에게 보낼 메시지를 치다가 깜빡 잠이 들어 버렸다. 배는 부르고 등은 따뜻하고 몸은 편하니, 어느샌가 식곤증이 몸과 정신을 지배해 버린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달콤한 것은 주말이고, 그다음은 낮잠이었다. 희주는 한 자락 꿈도 꾸지 않고 30분을 내리 잤다. 그렇게 한바탕 자고 일어났더니 그토록 개운할 수가 없었다.
합법적으로 전국민 낮잠 시간 좀 정해 주면 안 되나. 긍정적 효과도 많다던데.
꿀 같은 낮잠과는 별개로 늘 찌뿌드드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교무실로 돌아갔다. 그러자 이미 와 있는 동료 교사들이 그를 반기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잠깐 장단을 맞춰 주고, 모르는 문제를 들고 온 학생들의 질문을 받아 주다 보니 시간은 훌쩍 지나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쌤.”
“종 치겠다. 얼른 가 봐.”
“넹.”
설명을 듣는 내내 반짝반짝 눈을 빛내던 학생이 감사하다며 꾸벅 인사하고는 부리나케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기특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슬쩍 벽시계를 확인했다. 길었던 점심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에휴, 이제 나도 수업 가야지. 수업 들어가기 싫어 죽겠다.’
희주는 수업에 필요한 노트북과 교과서, 필기도구를 꼼꼼하게 챙겼다. 마지막으로 생수를 가득 채운 텀블러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는 무심코 휴대폰을 확인했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message*you/
그럼 오늘 퇴근하고 저녁에 잠깐 볼까요.
/message*you/
언제 왔는지 모를 메시지 알림이 반짝이고 있었다.
희주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시간을 보니 제가 한참 단잠에 빠져 있을 때 온 메시지였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애프터 신청인가.
이런 일을 예상 못 한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당면하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까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보기에 ‘궁금한가 보다’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순순히 대답해 줬던 건데, 그게 다 오늘 만나자는 말을 하려는 의도로 깐 초석이었던 모양이다. 멍하니 휴대폰을 내려다보는 희주의 얼굴이 서서히 빨갛게 물들었다.
잠시 머뭇거린 끝에 좋다는 답신을 보냈더니 퇴근 후 7시쯤 데리러 오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맞선을 봤던 그날처럼 버스를 타야 되나 내심 걱정이었던 희주는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입술을 말아 물었다.
“권 선생.”
그런 희주를 학년 부장이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은 새빨개져서는 답지 않게 얼을 타고 있는 게 영 못마땅했다. 다른 선생들은 수업하러 갔는데 혼자 뭐 하는 거야? 화분에 물을 주던 그는 떫은 얼굴로 희주를 불렀다.
“권 선생, 왜 그래?”
“네?”
“얼굴이 빨간데. 어디 아파?”
네? 제가요? 안 아픈데……. 희주는 중얼거리며 어쩐지 화끈거리는 뺨을 손등으로 짚어 보았다.
“이제 1시야. 수업 없어?”
“네? 아……. 있어요. 가야죠, 네. 갈게요.”
누가 볼 새라 황급히 무음으로 전환시킨 휴대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러곤 허둥지둥 도망치듯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쯧……. 요즘 젊은것들은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부산스럽기 짝이 없는 그의 뒤꽁무니를 응시하던 학년 부장이 이내 끌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나 때는 말이야. 빠릿빠릿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도 없었다고. 남들보다 부지런해야 살아남는 거야. 나처럼 말이지.
옛날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도 과거에 갇혀 있는 채로 가르치려 드는 말들은 퍽 듣기 좋은 편은 아니었다.
저 인간 또 시작이네. 수업이 없어 남아 있던 교사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맙시다. 암묵적인 동의가 오갔다. 하나둘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안 들리는 척 억지로 노트북에 시선을 박았다.
그렇게 학년 부장은 한참 동안 청자 없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문득 창문 너머로 보이는 푸른 수목을 보고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많이 덥나? 아직 에어컨 틀 날씨는 아닌 것 같은데…….”
* * *
이랬던 것이 다섯 시간 전 일이다.
무슨 정신으로 수업을 하고, 종례를 했는지 모르겠다. 몸은 학교에 있는데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달까. 아이들 앞에서는 사력을 다해 아무렇지 않은 척 어떻게든 수업을 끝마쳤지만, 노련한 학년 부장의 눈으로는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듯한 모습이었던 것 같다.
무슨 봉변이라도 볼까 싶어 도망쳤던 것이 무색하게도 종례를 마치고 돌아오자 학년 부장은 굳이 희주의 책상까지 와서 무어라 잔소리를 해 댔다.
한 건 물었다 생각한 건지 똑같은 말을 몇 번을 반복하는지 모르겠다. 이러다가는 끝이 없겠다 싶어 희주는 연신 웃는 얼굴로 무시했다. 웃는 얼굴엔 침 못 뱉는다잖아. 퇴근을 앞두고 눈에 뵈는 것이 없었던 희주는 잔소리를 가볍게 흘려듣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경보하듯 빠른 걸음으로 정문을 통과하고, 골목길을 꺾자마자 집을 향해 뛰었다. 땀 흘리는 것이 싫어 평소에는 움직이는 것조차 혐오하면서, 이번만큼은 경주마라도 된 양 전력으로 뛰었다.
남은 시간은 두 시간 남짓. 희주는 정신없이 뛰는 와중에도 집 가서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순서대로 나열했다. 후줄근한 꼴로는 도저히, 절대 그를 만나러 갈 수가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현관문에서부터 옷을 벗기 시작해서 알몸이 된 상태로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늦잠을 잔 날에도 이렇게 빨리 씻지는 않았던 것 같다. 순식간에 욕실에서 튕겨 나와서는 곧장 방으로 뛰어 들어가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아, 입을 옷이 하나도 없네.”
희주는 아연하게 중얼거렸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옷장 안을 들여다보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걸려 있는 옷들은 많지만 당장 입을 옷은 없었다.
한참을 멍하니 서서 노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옷장을 뒤적였다. 제대로 물기를 닦지 않고 나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타고 흐른 물이 바닥 위로 점점이 떨어지고 있었다.
* * *
결국 고민 끝에 희주가 고른 옷은 무난한 니트와 슬랙스였다.
사실 처음 만난 날 슈트를 차려입고 나타난 강현우가 떠올라, 학교 행사 때만 입으려 사둔 세미 정장을 꺼내 입으려고 했다.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도 옮겨 보기도 했다. 그런데 꼭 제 옷이 아닌 다른 사람의 옷을 빌려 입은 듯한 어색함에 입자마자 도로 벗어 버렸다.
패션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던 터라 슬랙스는 늘 만능인 줄만 알았는데, 오늘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흰 셔츠와 매치하면 너무 무난했고, 맨투맨은 너무 캐주얼해서 꼭 대학생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나마 니트가 좀 나아 보여 몇 개를 꺼내어 입어 봤는데, 이건 너무 튀어 보이고 저건 짜임이 굵어 한겨울 옷 같아 보였다.
늘 1분 아니, 20초 이상은 들여다본 적이 없던 거울인데, 그 앞에서 몇 분을 허비했는지 모르겠다.
10분 후면 도착한다는 강현우의 메시지를 받고서야 희주는 연한 베이지색의 니트로 최종 결정했다. 머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 써서 빗질하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괜히 멋 낸답시고 만졌다가 망치는 것보다야 나았다. 미끄러지듯 현관으로 나온 희주는 신발장 가장 위에 처박혀 있던 가죽 로퍼에 발을 끼워 넣는 걸로 스타일링을 마무리했다.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을 투자하고 나니 맞선을 보러 갔을 때처럼 제법 멀끔해 보였다.
“아이 씨……. 왁스라도 바를 걸 그랬나.”
그럼에도 불안함이 가시질 않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내내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노을이 지는 중이었다. 새빨갛게 불이 붙은 해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빈틈에 곡예를 하듯 매달렸고, 그 아래 거리는 물감을 푼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길게 그림자 지는 거리로 나온 희주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인도와 도로의 경계선에 다가가 어색하게 섰다.
이쯤 서 있으면 되려나. 조금 있으면 도착한다는 메시지 이후 따로 온 연락은 없었다. 희주는 미동도 없는 휴대폰을 꼭 붙잡고 서서, 멈출 것처럼 다가와 쌩하니 지나가 버리는 차량들을 눈으로 좇았다.
지이잉. 지이잉.
“아.”
마침 휴대폰이 크게 진동했다. 평소 메시지가 올 때와는 달리 길게 여러 번 진동하는 걸 보아 전화였다. 지금 전화를 걸어올 인물은 딱 한 사람뿐이었다. 액정에 떠 있는 이름을 확인한 희주는 곧장 통화 버튼을 눌러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희주 씨.
나직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그러고 보니 첫 통화네. 생각을 마칠 겨를도 없이 이어지는 물음에 답해야 했다.
―밖에 나와 계신가요?
“아, 네, 저… 지금 막 나왔어요.”
―지금 근천데, 갓길에 대기가 조금 애매해서요.
“아…….”
통화 상대가 바로 제 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황색 복선을 흘깃 내려다본 희주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여기가 주정차 금지라서요. 저 지금 앞이라서 바로 타면 될 것 같은데… 어디쯤이세요?”
반대 차선까지 기웃거리던 찰나, 검정 세단 한 대가 소리 없이 다가와 희주의 앞에 멈췄다. 잠깐 멈칫했던 희주는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며 제 앞을 가로막은 차를 훑어보았다. 이내 조수석 창문이 내려갔다. 한 걸음 물러서서 허리를 숙이자 운전석에 앉은 이의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강현우였다.
“희주 씨.”
―희주 씨.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두 개로 나뉘었다. 열린 차창 안쪽에서 들린 목소리가 이내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실제와 미묘한 간격을 두고 들리는 목소리가 자못 비현실적이었다.
“얼른 타요.”
핸들 위에 손목을 얹은 현우가 고개를 까딱였다.
이제 고작 두 번째 만남일 뿐인데 그의 얼굴을 보자 왜인지 모를 반가움이 밀려왔다. 희주는 귓가에 바짝 붙이고 있던 휴대폰을 내리고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안녕하세요.”
희주가 꾸벅 인사를 하면서 시트에 앉았다. 강현우는 빙글빙글 웃으며 “네, 안녕하세요” 하고 대답했다. 평범한 인사말에 불과하지만 둥글둥글한 이응 발음을 들으니 새삼 마음이 간지러웠다.
“벨트 매요.”
“아, 네.”
희주는 순하게 대답하며 벨트를 맸다. 철컥, 하고 잠기는 안전벨트를 확인한 강현우가 브레이크에 얹은 발을 떼고 액셀을 밟았다. 느리지만 부드럽게 출발한 차는 곧 방향을 꺾었다.
“혹시 식사했어요?”
“아, 아니요.”
“다행이네. 그럼 혹시 가리는 건요? 못 먹는 음식이라거나.”
“음……. 딱히 없어요.”
“그래요? 그럼 한식은?”
“괜찮아요. 다 좋아요.”
강현우가 시간을 확인했다.
“오면서 근처에 괜찮은 한식집을 예약해 뒀는데… 거리가 조금 있어요. 괜찮을까요?”
“드라이브라고 생각할게요.”
“그래요. 좋죠, 드라이브.”
묻는 말에 척척 대답하면서도 희주의 눈은 시트며 대시 보드며 차 내부 여기저기를 힐끔거렸다.
‘와, 페로몬 냄새.’
그는 차에 오를 때부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연신 감탄사를 뱉고 있었다.
차 안은 우성 알파의 향으로 가득했다. 사실 아주 미미해서 불편하거나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아마 시트에 밴 잔향일 게 분명했다. 아무리 페로몬 조절에 능한 우성이라고 해도 사적인 공간에서는 조절이 느슨해지기 마련일 테니까. 하지만 우성 형질은 무시할 수 없는지 일반적인 잔향보다는 다소 짙은 농도였다.
은은한 향을 맡고 있자니 작년 한때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페로몬 향수가 떠올랐다. 유행은 돌고 돈다더니, 희주가 학생이던 시절에도 인기를 끌던 것이었다. 형질자의 페로몬을 선망하는 베타들이나 페로몬이 약한 열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던 것이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열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아무리 좋은 향료를 넣었다고 해도 진짜를 따라잡기란 쉽지 않은 법이었다.
딱 한 번, 대학 동아리 엠티 때 한 베타 선배가 그 향수를 뿌리고 온 적이 있었다. 그때 나연이가 뭐라고 했었는데. 뭐라더라. 과일 소주를 뿌린 것 같다고 했던가……. 하긴, 제가 맡아도 별로기는 했다.
그에 비해 강현우의 페로몬은 짙은 데다 또 매력적이기까지 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이제 막 레스토랑에 들어온 그를 돌아볼 정도였으니까.
베타들이 외모를 보고 첫인상을 판단하듯 형질자들은 외모뿐만이 아니라 페로몬으로도 서로의 첫인상을 판단한다고 하는데, 이렇게 매력적인 페로몬을 가진 알파를 왜 아무도 안 데려갔나 싶다. 덕분에 저에게도 기회가 온 걸 테지만.
“…….”
“…….”
멍해졌다가 찡그렸다가 금방 다시 풀어지고 아주 난리가 났다. 일 초에 세 번씩은 바뀌는 것 같은 희주의 얼굴을 강현우가 힐긋 쳐다보았다. 잘 말하는 것 같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리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여태껏 강현우에게 침묵이란 말 그대로의 정적일 뿐이었다. 업무를 위해 만난 자리에서 사적인 이야기로 웃고 떠드는 것을 즐겨하지도 않을뿐더러, 대화 도중 흐름이 끊겨도 나서서 그 흐름을 이어 가려 노력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애초에 백영 그룹 내 한참 높은 자리에 앉은 임원이자 강 회장의 후계자로도 알려진 강현우에게 쉽사리 말문을 트는 이들도 드물었다.
여러 사람이 자신을 불편해한다는 것 정도는 일찍이 기민하게 알아채고 있었기에 강현우는 필요한 말 외에는 입을 열지 않기도 했다. 하여 대화가 없어 불편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 와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다는 말이 이해가 되려 한다. 이상하게도, 말 없는 권희주는 제법 신경 쓰였다.
강현우는 사이드 미러를 확인하는 척 또 한 번 흘긋 시선을 뒀다. 희주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왜 저러지. 멀미라도 하나. 혹시 페로몬 때문에 그러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평소 강현우의 차를 운전하는 기사는 베타였다. 건강 문제로 관둔 그전의 기사도 베타였다. 그냥 알파도 아닌 우성 알파 형질을 타고난 상사를 모시기에 베타만큼 적절한 형질이 없었기 때문에 베타 이외의 기사를 둔 적이 없었다. 페로몬에 무감한 베타 기사 덕에, 그리고 저 말고는 탈 일이 없는 차량인 까닭에 페로몬을 조절해야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희주 씨.”
침음을 삼킨 그가 이윽고 정적을 깼다.
“미안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에?”
이게 뭔 소리야. 뜬금없는 사과에 희주는 바보 같은 소리를 내 버렸다.
“창문을 열까요? 만약 추우시면 제 재킷 덮고 계셔도 됩니다.”
시원하면 시원했지 춥지는 않을 텐데. 아니, 그것보다, 창문을 왜 열어? 당사자를 앞에 두고 페로몬에 심취해 있을 만큼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니라서 조용히 음미만 하고 있는데, 대뜸 창문을 여냐 마냐 묻는 말에 희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설마 들켰나? 난 뭐 매일 들키기만 하냐. 낭패라는 듯 침을 꼴깍 삼킨 희주가 고개를 돌려 강현우를 쳐다보았다. 운전하느라 앞을 응시하고 있는 강현우가 제 시선에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차에 제 페로몬이 많이 묻어 있지 않습니까. 소취제라도 뿌려야 했는데 제가 평소에는 잘 들고 다니지를 않아서……. 환기라도 시킬까 해서요.”
주눅이 들었던 것도 잠시였다.
“네? 아니요?”
희주가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페로몬을 느끼고 있던 것은 맞지만,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 오해를 사 버린 모양이다. 그런 생각이라 봤자 결국 강현우로 귀결되긴 했지만, 어쨌든.
“솔직히 말씀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마냥 좋기만 한 페로몬만 묻어 있는 건 아닐 거라서요.”
“무슨…….”
원래 크기로 돌아갔던 눈이 또 한 번 휘둥그레 떠졌다. 그럼 뭐가 묻어 있단 말인가. 설마 다른 오메가 페로몬을 말하는 건가? 생각이 삐걱삐걱 맞춰졌다. 그래, 뭐, 그 정도야 너른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잘난 알파가 다른 오메가를 태워 본 적 없을 리가.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강현우의 페로몬 외에 다른 이의 페로몬은 느껴지지 않았다.
“뭐… 그럴 때 있지 않습니까. 일이 꼬인다거나, 누군가로 인해서 스트레스받을 때. 다른 곳에서는 억지로라도 참는데, 이런 공간에서는 안 참는 편이거든요.”
“……아.”
다른 오메가가 탔었을 거란 말 취소. 자기 걸 말하는 건 줄은 몰랐지……. 희주는 머쓱한 표정으로 입술을 말아 물었다.
“진짜… 괜찮아요. 그게, 다른 게 아니라.”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희주는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강현우의 정리 잘 된 말끔한 손톱 끝이 핸들을 톡톡 두드렸다. 금방이라도 손을 옆으로 뻗어 창문을 열 것 같았다.
“페로몬 때문인 건 맞는데요.”
주저하는 말이 끝나자마자 강현우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예상대로 자신의 불찰 때문이었다.
“역시 그러셨군요. 창문 열겠습니다.”
“아니요! 잠시만요. 그, 그게… 맞는데. 아니에요.”
“예?”
희주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아 둔 손을 꼼지락거렸다. 아니라고, 오히려 좋아서 맡고 있었다고 하면 너무 변태 같으려나. 계속 부정만 하면 긍정으로 보일까 봐 그것도 또 걱정이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 남의 솔직한 의견을 폄하하는 말 따위를 지어낸 인간은 도대체 누구인지 모르겠다.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결국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희주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차에 탔는데 좋은 냄새가 나서……. 현우 씨가 말씀하신 다른 페로몬은 하나도 못 느꼈어요.”
오히려 좋아서 그랬다는 희주의 말에, 저에 대한 혐오로 뾰족해졌던 강현우의 눈이 서서히 둥글어졌다. 제게 엉겨 붙은 불편함을 떼려다가 오히려 희주에게 옮겨 버린 것도 모르고.
“그, 그나저나 현우 씨도 그러시나 봐요. 막, 같이 일하는 사람들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만약 이대로 대화가 이어지면 막말로 쪽팔릴 게 분명했다. 이럴 때에는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상책이었다. 민망함에 홧홧해진 얼굴을 모르는 척하며 희주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주제를 바꿨다.
“저도 그럴 때 있어요. 아무래도 그럴 땐 페로몬 조절 좀 힘들죠.”
말해 놓고 흘끔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강현우는 제 말에 관심을 보였다.
“희주 씨도 그런가요? 예를 들면?”
“애들이 사고 치는 거야, 애들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 편해지는데……. 같이 일하는 선생님들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안 풀리는 것 같아요.”
“아, 전에 문제 잘못 냈다는 것처럼요?”
네에, 길게 늘어지는 말꼬리에 억울함과 분함이 묻어 나왔다. 다시 생각해도 분한 모양이다. 웃음을 참지 못한 강현우가 슬쩍 웃음을 내비쳤지만 그걸 보지 못한 희주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근데 그건 실수니까요.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죠. 심각해지기 전에 수습한 것도 있지만요.”
“관대하시네요.”
“그런가요? 근데 뭐… 이 정도는 약과고…….”
“누가 괴롭히기라도 하나요?”
“괴롭히는 것까지는 아닌데, 조금… 안 맞는다고나 해야 하나? 저희 학년 부장 선생님이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신 분이시거든요.”
하……. 생각만 해도 답답하다는 듯 희주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요. 가끔 부장 선생님이 제 아버진가 싶어요. 아버지들이 하실 법한 잔소리를 하시니까.”
아빠가 없어서 잘 모르지만. 꼬인 생각이 들었지만 희주는 내색하지 않았다.
“정말 자리 박차고 나가고 싶을 정도로 듣기 싫을 때도 있거든요. 근데 그게 쉽나요. 그냥 속으로 다른 생각 하면서 버티는 거죠.”
“무슨 생각하는지 궁금한데요?”
알려 달라는 말에 희주는 조금 곤란하다는 듯이 대답을 망설였다. 말하는 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입 밖으로 내기에는 많이 유치하고 치사한 내용인 까닭이었다.
“부장 선생님이 탈모예요. 전에 비해서 요새 눈에 띄게 벗겨지고 있어서 엄청 예민하신데, 못된 심보 부릴 때마다 하루아침에 확 벗겨지라고 기도하고 있어요. 한 50일 됐나.”
“기도요?”
웃음기 어린 되물음에 희주가 얄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랑 친한 선생님 한 분은 뭐더라, 살인 청부 통장도 만들었대요. 화나게 할 때마다 얼마씩 입금해서 그거 모아다가 일 칠 거라고요. 그거에 비하면 전 귀엽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귀엽네요.”
목적어가 빠진 문장은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킬 만했다. 희주는 괜히 헛기침하며 화끈거리는 속을 식혔다.
“현우 씨는 그런 거 안 해 보셨어요?”
“어떤?”
“상사 저주하는 거요. 뭐, 머리나 벗겨지라느니 길 가다 확 넘어져 버리라느니.”
“음…….”
글쎄요. 그런 적이 있었나. 강현우가 애매하게 웃기만 하는 사이 마침 빨간 불로 신호가 바뀌었다. 바뀐 신호에 맞추어 차가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두 사람의 대화도 자연스럽게 잦아들었다. 정적뿐인 차 안, 어쨌거나 대화를 해서일까 다행히 분위기는 처음과 같지 않았다.
톡, 톡. 곧은 손가락이 핸들을 두드렸다. 양손을 핸들 위에 얹은 채, 강현우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눈을 맞춰 왔다.
“그래서, 그런 일 말고는 어땠어요? 잘 지냈어요?”
예고도 없이 훅 들어온 잘생긴 얼굴에 희주는 잠시 멍해졌다. 그 멍한 표정을 달리 해석했는지 강현우가 멋쩍게 웃고는 이어 부연했다.
“아까 얼굴 보자마자 물어봤어야 했는데, 바로 출발해야 해서 깜빡했어요.”
“아, 아아. 그럼요! 잘 지냈어요.”
어쩐지 호기롭기까지 한 희주의 대답에 강현우가 피식 웃었다. “진짜 잘 지냈나 보네” 혼잣말처럼 이어진 낮은 중얼거림에 희주는 살짝 발그레해진 얼굴로 더듬더듬 되물었다.
“현우, 씨는요?”
“저도 잘 지냈습니다. 회사 일이야 늘 똑같죠.”
잘생긴 얼굴이 슬쩍 시무룩해졌다. 이런. 역시 직장인들은 다 똑같구나. 희주는 속으로 안타까워하며 달래는 듯한 말투로 위로를 건넸다.
“원래 평일은 뭘 해도 재미없잖아요. 뭘 해도 재미없는 게 평일이고, 아무것도 안 해도 재미있는 게 주말이고 그런 거죠.”
“그래요?”
여러 번 깜빡이던 보행자 신호가 끝나고, 바뀐 신호를 받은 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제 얼굴에 올곧게 닿아 있던 시선이 정면을 향하자 희주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삼키면서 고개를 떨궜다. 며칠 얼굴 안 봤다고 잠시 잊고 있었다. 상대는 끝내주게 잘생긴 알파라는 것을.
그 모습을 곁눈으로 보던 강현우가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별안간 여상하게 물었다.
“그래도 이번 주는 좀 다르지 않았어요?”
“……?”
희주는 궁금한 표정으로 강현우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운전에 집중하느라 정면을 향해 있는 얼굴은 이따금 사이드 미러를 보느라 살짝살짝 옆으로 틀어졌다. 그 까닭일지는 몰라도 강현우는 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연락할 사람이 생겼잖아요. 새롭더라고요, 저는.”
너무도 단조로운 말투 탓에 상대가 말하는 바를 바로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새김질을 한 끝에 그 의미를 깨달은 희주는 소리 없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러니까, 저와 연락을 하느라 조금 색다른 주를 보냈다는 뜻이었다.
귓가에서부터 번진 열기 탓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출발해야 해서 말을 못 했다느니 이건 다 변명이고, 사람 설레게 할 목적으로 일부러 꺼낸 이야기임이 분명하다고 희주는 생각했다.
“희주 씨는 안 그랬어요?”
짓궂은 건지 순수한 궁금증에 기인한 건지, 강현우는 재차 물어 왔다. 어쩔 수 없이 대답해 줘야만 했다. 차 안에 그런 공간이 있을 리가 없고, 있어서도 안 되지만, 희주는 제 눈앞에 쥐구멍이 있으면 당장이라도 숨고만 싶었다.
“저도요…….”
몸뚱이 대신 목소리라도 들어갔으면 했다. 한껏 위축되어서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하자, 강현우가 힐끔 보더니 웃음을 삼켰다. 강현우는 핸들을 쥔 손을 하나 슬쩍 떼어 제 턱과 뺨을 매만졌다. 간질간질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주황빛으로 흠뻑 젖어 들었던 하늘이 점차 어두운 밤하늘로 변해 가고 있었다. 홧홧해지는 얼굴을 애써 모르는 척하며 두 사람은 제각기 다른 생각을 했다.
한 사람은 저녁에 만나자고 하길 잘했다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저녁에 만나서 다행이라고.
* * *
두 사람을 태운 차는 한참을 달린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강현우가 예약해 뒀다는 한식집은 그의 말대로 거리가 조금 있었다. 아파트와 빌딩이 빽빽한 도심을 빠져나와 웬 고속 도로를 타는가 싶더니, 도착했을 때에는 해가 다 져 버려서 머리 위로 가는 초승달이 떠 있었다.
차가 주차장에 들어설 때부터 휘둥그레져 있던 희주는 차에서 내린 후에는 놀라서 눈을 깜빡이는 걸 잠시 잊었다.
지난 맞선 장소가 고급 서양 식당이었다면, 오늘은 고급 동양 식당이었다. 도로 표지판을 보며 음식점이 이런 외곽에 있다고? 하고 의아해했던 것도 잠시에 불과했다. 고층 빌딩처럼 위로 솟지는 않았지만 좌우로 넓은 건물을 보며, 이래서 괜히 외곽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압도적인 크기였다.
한옥이야 한국인이라면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 보는 양식일 테다. 저 역시 여나연의 손에 이끌려 북촌이며 전주며 한옥으로 유명한 관광지를 많이 다녀오기도 했고, 학교 현장 체험 학습으로 민속촌을 다녀온 경우도 여러 번 있었으니까. 한옥 인테리어의 식당도 심심치 않게 다녀와 본 터라 강현우가 한식집을 예약했다고 말했을 때만 해도 적당히 비슷한 결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도착하고 보니 여태껏 봐 온 흔한 식당이 아니었다. 실제 궁궐을 그대로 옮겨 온 것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마저 들 정도로 멋지고 근사했다. 게다가 밤이라 건물 전체를 조명으로 밝혀 놓은 통에 더욱 웅장해 보이기도 했다.
강현우는 넋을 놓은 희주를 에스코트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주차장을 지나자 너른 정원이 보였다. 깔끔하게 정돈된 잔디 위에는 석등과 함께 앉아서 쉴 수 있는 정자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정원 역시 조명을 환히 켜 두어 밤이 아니라 낮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흔히 볼 수 없는 해태 석상이 있는 것도 신기했다. 둘러보면 볼수록 신기해서 희주는 시선이 닿는 족족 속으로 감탄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정원에서부터 식당 입구까지 쭉 이어지는 디딤돌을 밟으며 따라가다 보니 활짝 열린 식당 안쪽에서 직원 하나가 조용히 나와 인사했다. 꼭 온 걸 알고 있기라도 한 듯한 움직임이었다.
“예약했습니다.”
신기한 건 저뿐이었는지 강현우는 대수롭지 않게 성큼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안쪽으로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내부가 상당히 복잡합니다. 제 뒤를 잘 따라와 주세요.”
“아, 네에.”
몸을 반쯤 틀며 가게 안쪽을 두 손으로 가리킨 직원이 희주에게 시선을 주었다. 얼떨결에 대답하자 한 번 더 빙긋 웃고는 앞서 걸었다. 얼마나 넓으면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낯선 곳에서 오는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한껏 상기된 표정을 감추느라 그는 예약자 이름도 말한 적 없이 안내받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각기 다른 세 사람의 발소리와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을 제외하면 손님이 있기는 한 건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복도는 조용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걸음으로 앞서는 직원을 뒤에서 따라가며 희주는 천장과 벽, 바닥 할 것 없이 두리번거렸다. 겉만 한옥인 것이 아니라 내부 인테리어까지 전부 전통식이다. 그중 가장 신기했던 것은 중정(中庭)이었다. 유리로 된 커다란 통창을 달아 정원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안쪽에 작은 연못까지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꼭 저런 연못엔 잉어 넣어 두던데. 아주 조금 궁금했지만 마침 다른 복도로 걸음을 트는 바람에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그 누구와의 마주침도 없이 두 사람은 ‘蘭’ 문패가 달린 방으로 안내되었다. 고작 두 사람이 이용하기에는 너무도 널찍한 방이었다. 이내 강현우와 마주 보고 자리를 잡자, 편안한 시간 되시라며 직원이 공손하게 허리를 꾸벅 숙이고 나갔다. 사위는 이내 조용해졌다. 문은 평범한 장지문으로 보이는데 방음이 잘되는 듯했다.
“얼마 전에 어머니 환갑잔치를 여기서 했거든요. 잔치라고 해 봐야, 그냥 가족들끼리 모여서 밥 한 끼 같이 한 게 전부지만요.”
강현우는 테이블 구석에 놓인 물잔을 끌어와 주전자를 기울였다. 차가운 물이 들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반쯤 채워진 물잔에서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희 어머니가 엄청난 미식가셔서 웬만한 식당에서는 식사를 잘 안 하시는데, 여기는 오랜 단골이세요. 덕분에 저도 어머니 따라서 몇 번 와 봤죠.”
아, 그래서 익숙해 보였던 거구나. 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가 건네준 물잔을 얌전히 제 앞에 내려놓았다. 은은한 푸른빛을 띠는 자기 잔 안에는 노란빛을 띠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한 모금 마시자 은근히 고소한 맛이 느껴졌다.
“저는 이런 곳 처음 와 봐요.”
희주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자 차를 마시던 강현우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제가 알고 있는 한식집은 이렇게 고급스러운 곳이 아니라, 파전에 동동주 한잔 마실 수 있는 그런 곳이거든요.”
백영 여고뿐만 아니라 인근의 모든 초중고교 학생들이 정기를 받는다는 산의 밑자락, 숲을 마주 보고 있는 보리밥집은 딱 이맘때쯤 가곤 하는 희주의 단골 식당이었다.
“그건 식당이 아니라… 주점 아닙니까?”
“식당 맞아요. 밥도 파는데.”
아무래도 파전은 밥반찬보다는 술안주처럼 들리긴 하지. 밥을 판다는 제 말이 믿기지 않는 건지 슬쩍 찌푸려지는 미간을 보고 희주가 소리 내어 웃었다.
“진짜예요. 등산객들이 많아서 막걸리나 동동주 드시는 분들이 대부분이긴 한데……. 거긴 야외 테이블도 있거든요. 날씨 좋은 날엔 실내보다 야외가 더 붐벼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가 보고 싶네요.”
“정말요? 술 못 드신다면서요.”
“정말 식당 맞습니까?”
“그렇다니까요. 거기 보리밥이 진짜 맛있어요.”
나중에 가 보시면 단골 되실걸요. 희주가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만만하게 덧붙였다.
강현우는 활짝 웃는 희주의 얼굴을 보며 따라 미소 지었다. 역시 얼굴을 보며 대화하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도 그곳만큼 희주 씨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현우 씨 어머님께서 단골이시라면서요. 전 미식가도 아닌걸요.”
“지금은 희주 씨랑 왔으니 희주 씨 입맛에 맞는지가 더 중요하죠.”
“저 아무거나 잘 먹어요.”
똑똑. 희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두 쌍의 눈동자가 동시에 장지문을 향했다. 잠깐의 정적 후, 문이 열리면서 아까 봤던 직원이 다시 들어왔다. 그는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두 사람 앞에 전채 요리를 올려놓았다. 달콤한 호박죽과 계절 과일이 들어간 샐러드였다.
모두 평소에도 먹을 수 있는 것들인데 고급스러운 도자기 그릇에 플레이팅 되어 나오니 왜인지 더 입맛이 돌았다.
“어때요?”
먼저 맛보라는 권유에 희주는 수저를 들어 조심스레 호박죽을 떠 입에 넣었다. 달짝지근한 죽이 텁텁하지 않게 말끔히 목 뒤로 넘어갔다.
“저 이렇게 맛있는 호박죽 처음 먹어 봐요.”
“그렇게 맛있어요?”
“네. 현우 씨도 얼른 드셔 보세요.”
지난번 그의 몫이었던 케이크를 제게 양보했던 것처럼 혹여 이것마저도 양보하기라도 할까, 희주는 약간의 불신을 담은 눈빛으로 그의 앞에 놓인 그릇을 힐끔거렸다. 다행히 강현우는 그릇을 제게 밀어 주는 대신 수저를 들었다.
몇 번 떠먹지도 않았는데 그릇이 동났다. 맛은 있었지만, 전채 요리답게 적은 양이었다. 하지만 아쉬워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노크 소리와 함께 다시 모습을 드러낸 직원이 빠르게 빈 그릇을 치우고 새로운 음식을 놓아 주었다. 구절판과 탕평채, 불고기냉채 등 평소 자주 보지도, 먹어 보지도 못했던 음식들로 테이블이 꽉 채워졌다.
“…….”
희주의 두 눈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여섯 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을 것 같던 테이블이 오로지 두 명분의 음식만으로 꽉 찬 것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왜 이렇게 넓은 방으로 안내해 주나 했더니 이래서였구나. 두 명이 이용하기에 전혀 넓지 않았다.
“들어요.”
“아, 네. 잘 먹겠습니다.”
강현우가 재차 상냥히 권했다. 젓가락부터 집어 드는 그를 따라 희주도 젓가락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워낙 생소한 데다 음식 가짓수가 많아서 도대체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절로 망설여졌다.
먹고 싶은 음식을 먼저 골라 먹는다는 건 이제 꽤 익숙해진 일이지만 여전히 낯선 일이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그게 뭐?’ 하고 황당해하겠지만 아주 어릴 적부터 보육원에서 자란 희주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좋은 곳에서부터 후원이 들어온다 해도 보육원 사정은 늘 궁핍했다. 갓난쟁이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은 물론이거니와 학교에 진학한 아이들의 학용품과 준비물 비용, 매일 갈아입을 옷까지 무엇 하나 넉넉한 것이 없었다.
그중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식사였다. 예산은 한정되어 있고, 먹어야 할 입들은 많았다. 무엇이든지 공평하게 나눠야 했으니 배불리 먹는 날보다 아쉽게 먹는 날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었다.
수녀님들은 그나마 있는 사정에서 부족하지 않게 도우려 애썼지만, 조금 머리가 컸다 하는 놈들이 뒤에서 부리는 행패는 그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식사 시간은 늘 전쟁과도 같았다. 싫어하는 음식이 뭔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스스로의 기호를 알아낼 틈도 없이 일단 먹을 것이 보이면 입에 집어넣기 바빠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원생들의 입에 들어가는 걸 두 눈 뜨고 봐야 했으니까.
그런 경쟁은 보육원 밖에서도 이어졌다. 결핍은 티가 나는 법이었다. 말도 섞지 않고 오로지 먹기에만 바쁜 희주를 이상하게 보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도리어 희주는 그런 친구들이 더 이상했다. 웃고 떠들며 밥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후에 보육원 아이들의 습관을 잘 아는 교사가 여기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더 먹고 싶으면 더 달라고 하면 된다고 다정하게 타이르고서야 희주는 급히 먹는 습관을 인지하고 고쳐 나갈 수 있었다.
갑작스레 밀려온 과거의 상념을, 상냥한 목소리가 깨뜨렸다.
“왜요? 별로예요?”
젓가락을 쥔 채 우뚝 굳어 있는 희주를 강현우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분명 음식이 나올 때 입맛을 다시고, 침을 꼴깍 삼키는 것까지 봤는데 막상 음식들을 눈앞에 두고는 동그란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으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가리는 것 없다더니 예의를 차리느라 나온 말이었나.
무슨 문제가 있는지 살피는 듯 테이블을 훑는 시선이 상당히 날카로웠다. 희주는 아차 싶어 고개를 흔들었다. 가끔 이렇게 속절없이 옛날 일들에 대한 상념에 빠져들곤 했다. 뭐 좋은 게 있다고.
“아니요!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몰라서… 다 너무 맛있어 보여서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말 뭐부터 먹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으니까. 희주는 상대에게서 괜한 오해를 샀을까 봐 재빨리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릇에 젓가락을 뻗었다. 그러고는 보지도 않고 날름 입 안에 넣었다.
“읍.”
하마터면 흉하게 기침을 뿜을 뻔했다. 코끝을 맵게 강타하는 겨자의 매운맛에 놀란 희주가 작게 콜록거리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핑 눈물이 고였다. 아, 이거 냉채랬지. 뒤늦게 직원의 간략한 설명이 떠올랐다. 다행히 몇 번 턱을 움직이자 달달한 불고기 양념 맛이 났지만 이미 깊이 침투한 칼칼함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물 좀 마셔요.”
“아, 네. 콜록. 감사… 합니다.”
희주는 멋쩍게 목을 가다듬으며 물잔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하얀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물을 마시느라 슬쩍 들린 턱 아래로 길쭉한 목선이 드러났다. 흰 도화지에 똑 떨어트린 수채화 물감처럼, 덩달아 발긋해진 목덜미에 강현우의 시선이 떨어졌다.
강현우는 매워 어쩔 줄 몰라 하는 희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와 있으면서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다는 것이 신선했다.
강현우는 맞선 이후 권희주가 제 프로필 파일을 나중에라도 들여다보지 않을까 내심 궁금했었다. 권희주가 제 호기심을 자극한 것도 없잖아 있지만, 그때처럼 그가 정말 제 배경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쭉 순수한 호감만을 비출지 궁금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저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어 있다면 그와의 만남을 오늘로 끝낼 생각도 마치고 나온 터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희주가 저를 대하는 태도는 전혀 바뀐 것이 없었다.
아……. 진짜 사람 유치해지게 만드네. 잔에 가려진 얼굴이 드러나기 전, 강현우는 노골적으로 희주를 훑던 시선을 느릿하게 물렸다.
“천천히 먹고, 못 먹겠으면 남겨도 돼요. 뒤에 나올 음식도 많으니까.”
“다 나온 게 아니에요?”
“이제 시작이에요.”
중간도 아니고 시작이라고……? 희주는 얼굴을 찡긋거리며 꽉 찬 테이블을 한 번, 강현우의 얼굴을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얼른 먹으라는 듯 강현우가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지금 나온 음식들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반신반의했지만 역시나, 강현우의 말대로였다.
앞엣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비웃기라도 하듯, 어마어마한 상차림이 희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늘 메뉴를 정할 때 육해공 중 하나를 정하는 게 당연했는데, 육해공이 한꺼번에 상 위로 올라왔다. 그것도 생선회와 육회 같은 날것부터 구이, 찜, 탕까지 조리 방법도 다양했다.
주먹만 한 전복구이가 놓였을 때도 내심 놀랐는데, 사진으로만 봤던 신선로가 떡하니 나왔을 땐 저도 모르게 큰 헛숨을 들이마셨다.
입 안에 든 것을 씹어 삼키기도 전에 이다음엔 뭘 먹을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은 버겁지만 행복한 고민이었다. 희주는 어린아이처럼 테이블 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보기도 좋은 떡이 맛도 좋다고, 알록달록 형형색색의 음식들 중에서는 맛없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처음 느끼는 맛의 향연에 연신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을 강현우가 몹시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나저나 오늘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실례는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때쯤이었다.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울 정도로 배불리 먹은 희주는 후식으로 나온 과일에 손댈 생각도 못 하고 새액새액 벅찬 숨을 내쉬고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잘생긴 맞선남과 함께 식사를 하니 평소 먹는 양의 배는 먹은 것 같다. 판판했던 배가 볼록 나온 게 민망해 테이블 아래에 손을 넣어 넉넉하게 덮인 니트를 괜히 몇 번씩이나 끌어 내려야 했다.
그때, 실례를 운운하는 강현우의 말에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차를 마시느라 잠시 내리깔렸던 강현우의 시선이 희주의 움직임을 따라왔다.
“실례요?”
“선약이 있는지부터 여쭸어야 했는데 다짜고짜 만나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배려도 없이 다짜고자 무례하게 굴었던 것 아닌가 해서요.”
“아니요……?”
당혹감에 커진 눈이 깜빡거렸다. 어떤 일이든 간에 ‘실례는 아니었는지 모르겠다’란 말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자주 듣는 말이었다. 정말 죄송해서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무례함을 뒤늦게 얼버무리려는 말에 불과한데, 진심으로 미안하단 표정을 짓고 있는 상대를 보니 도리어 제가 다 당혹스러웠다. 희주는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사실 조금 의외이긴 했어요.”
자세를 바로 한 희주가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 쥐었다. 잔잔하게 찰랑이는 수면 위로 제 얼굴이 비쳤다.
“다시 보자고 할 줄은 몰랐거든요.”
“왜요?”
“그냥…….”
강현우의 물음에 희주가 말끝을 흐렸다. 저 같은 조건을 가진 사람은 결혼 시장에서 안 팔리는 매물 아니냐고, 그것도 잘생긴 데다 번듯한 회사를 다니고 우성 알파이기까지 당신 같은 사람의 눈에는 안 차지 않겠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제 처지만 초라해질 것 같았다. 희주는 서글픈 속내를 감추기로 했다.
“제가 초면에 실수를 좀 했으니까요.”
“실수…….”
“예의상 연락 좀 하다가 끝날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을 좀 했어요.”
곧장 기억해 내지 못한 듯 눈살을 찌푸렸던 강현우가 이내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희주는 슬쩍 상대의 눈치를 보며 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아무래도 둘 다 직장인이니까, 봐도 주말에나 보겠구나 싶었고요.”
“그래요?”
“네에…….”
희주의 대답에는 힘이 없었다. 강현우도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는 바람에 대화가 애매한 곳에서 끊겨 버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강현우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미동도 없이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웃을 때 온화한 사람도 저러고 있으니까 꽤 냉정해 보이네. 희주는 제게 닿는 시선을 애써 모르는 척하며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과일 접시에 손을 뻗어 토끼 모양을 한 사과 한 조각을 콕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와작… 와작……. 조용한 방 안에 사과를 씹는 소리만 울렸다.
오늘 먹은 건 인당 얼마씩 하려나? 이렇게 임금님 밥상 못지않게 호화스럽게, 그것도 코스로 대접받았는데 한두 푼 하지는 않겠지. 희주는 본인이 상상할 수 있는 선에서 가격을 추리해 보았다. 지난번 호텔 레스토랑에서 강현우가 모조리 계산을 해 버렸던 게 내내 마음에 걸려 오늘은 제가 계산할 심산이었다.
꽤 큰 금액을 긁게 될 것 같지만 빚지고 사는 것보다야 나았다. 어차피 낼 돈이니 남기는 음식 없이 입가심까지 해야겠다 싶어 희주는 나슨하게 기대고 있던 등을 꾸물꾸물 바로 세웠다.
“희주 씨.”
한동안 생각에 잠긴 채 차로 목을 축이던 강현우가 딸그락 소리를 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동시에 얼굴을 기어 다니던 시선이 떨어졌다. 살짝 부담스러워지려고 했는데 마침 다행이었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강현우는 제 이름을 부르며 시선을 바로 했다.
민망함 속에서도 꿋꿋하게 사과를 먹던 희주가 멈칫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얼떨결에 눈을 마주하고 말았다. 모르는 척 피하는 건 어떻게든 했다지만 이미 마주쳐 버린 눈을 피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윽고 강현우가 다정히 물음을 던졌다.
“그럼 우리 주말에도 볼까요?”
살짝 위로 올라간 눈매가 크게 벌어지면서 순해 보이리만큼 동그래졌다. 강현우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보는 얼굴이 꼭 토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땐 오늘보다 더 빨리요.”
덧붙인 말은, 지금과 같은 표정을 더 오래 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기인한 말이었다.
* * *
느지막이 시작한 저녁 식사는 9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강현우의 차를 타고 동네로 되돌아왔을 때에는 시침과 분침의 간격이 한 칸 더 가까워져 있기까지 했다.
근처 카페에서 커피라도 한잔했으면 좋겠건만, 시간이 늦어서인지 들어갈 곳이 마땅찮았다. 대학교 다닐 땐 24시간 카페가 꽤 많았던 것 같은데. 주택가라서 그런 건지 11시면 마감 팻말을 내거는 곳들뿐이었다.
결국 차를 돌려 공원 옆에 있는 공영 주차장에 잠시 차를 세워 두고, 음료는 테이크아웃 컵에 담아 나오기로 했다. 마침 주차장 맞은편에 있는 카페는 아직 불이 켜져 있는 상태였다. 혹시 마감 때문에 주문을 받아 주지 않을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유리문을 열었다. 주문이 가능한지 묻자 다행스럽게도 당연히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이스아메리카노 디카페인으로 한 잔 주시고, 캐모마일티는 따뜻한 걸로 한 잔 주세요. 두 잔 다 테이크아웃이요.”
희주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후다닥 주문을 마쳤다. 직원이 뚝딱뚝딱 음료를 제조하는 사이 힐끔 바깥을 내다보았다.
길 건너 공영 주차장에 세단 한 대가 덩그러니 주차되어 있다. 늘 그랬듯 아메리카노는 제 것이고, 캐모마일티는 저 차 주인인 강현우의 것이었다.
약 한 시간 전, 식사를 마치고 나온 희주는 배는 불렀지만 어쩐지 허한 기분으로 차에 올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번에도 강현우가 계산을 마쳤기 때문이었다.
강현우가 잠시 셰프에게 인사를 하고 오겠다며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운 사이, 희주는 그 틈을 타서 주섬주섬 지갑을 꺼냈다. 꽂혀 있는 여러 개의 카드들 중 ‘식비’라고 쓰인 스티커가 붙은 카드를 꺼내려다가 가장 한도가 높은 ‘비상금’ 카드를 꺼내어 직원에게 건넸다. ‘얼마예요?’ 하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아는 것이 힘이라지만 때론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희주는 도대체 얼마가 나왔는지 영영 모르게 됐다. 왜인지 당황이 어린 표정의 직원에게서 ‘예약하실 때 이미 계산을 다 마치셨다’는 말만 돌아오는 바람에. 비상금 카드는 제대로 한번 긁히지도 못하고 있었던 자리로 돌아갔다.
어찌나 많이 먹었는지 오는 내내 배는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약간 체기가 있는 것 같은 착각도 일었다. 많이 먹은 탓도 있겠지만, 일주일 사이 원치 않게 진 빚의 지분이 컸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심지어 두 번 모두 1, 2만 원으로는 어림도 없을 고급 식당에서 진 빚이었다. 이런 빚은 오래 지고 있을수록 좋지 않았다.
눈에 익은 거리를 보며 찾은 나름의 해결책이 바로 커피였다. 이렇게까지 들어갈 곳을 찾기가 어려울 줄은 몰랐지만. 어쨌거나 커피만큼은 제가 사게 됐다. 먹은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금액이기는 했지만 이만하면 정말 다행이었다.
“음료 두 잔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캐리어에 담아 드리냐는 배려를 마다하고 양손에 음료를 든 채 어깨로 유리문을 열었다. 선선한 밤바람을 해치고 주차장으로 돌아왔을 때, 희주는 언제 내렸는지 모를 강현우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래서 같이 가자고 한 겁니다.”
왜 나와 있냐고 묻기도 전에 강현우가 선수를 쳤다. 미안하다는 듯 웃은 그는 희주에게서 제 몫의 컵을 받아 들며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희주가 자리에 깊이 앉는 걸 확인하고 닫아 주기까지 했다.
“괜찮은데…….”
희주의 입에서 괜찮다는 말이 자동으로 나왔다. 이미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돌아가는 중인 강현우의 귀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뭘요…….”
보닛을 빙 돌아 운전석에 올라탄 강현우가 컵을 슬쩍 들어 보였다. 희주는 멋쩍게 빨대를 물었다. 인당 50만 원은 거뜬히 넘는―아마도. 어쩌면 더 넘을지도 모르는―금액을 남몰래 긁어 놓고서 고작 몇천 원 되지도 않는 차 한 잔에 고마움을 표시하다니.
이걸로 퉁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왜인지 그렇게 된 것만 같아서 민망했다. 희주는 얼른 찬 음료를 쭉 빨아 마셨다.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퇴근 시간을 진작 넘긴 데다, 저녁에 운동하는 인파마저 모두 집으로 돌아간 지금 시간대의 공원은 몹시 고요했다. 그렇지 않아도 조용한데 시동까지 꺼진 차 안으로 들어오니 적막감이 배가 됐다. 아주 자그마한 소리도 크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차게 마시면 감기 안 걸립니까?”
뚜껑을 열고 차를 마시던 강현우는 옆자리에 흘끗 시선을 뒀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제 것과 달리 권희주의 것은 각진 얼음이 한가득 들어 있는 찬 음료였다.
“아, 괜찮아요. 저 원래 감기는 잘 안 걸리거든요.”
한 모금 더 마신 희주가 말을 더했다.
“어렸을 때부터 감기는 잘 안 걸렸어요. 어쩌다 한번 걸리면 크게 앓아서 문제기는 했는데…….”
보육원 아이들의 건강 상태는 모 아니면 도였다. 잔병치레도 겪지 않고 자라거나, 조금만 아파도 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늘 허약하거나. 운이 좋게도 희주는 전자에 해당했다.
“그래도 겨울에는 따뜻한 것도 마셔요. 감기는 잘 안 걸리는 편인데, 추워지면 아무래도 신경 쓰여서요. 또 직업상 매일 목을 써야 하니……. 감기 걸리면 좀 난감하거든요.”
“그거 커피죠?”
“네. 아메리카노요.”
희주는 컵을 들어 보였다. 몇 모금 마시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반이나 비워져 있었다.
“이 시간에 커피 마시면 이따가 잘 때 안 불편하겠어요?”
“괜찮아요. 이거 디카페인이라서요.”
“아, 디카페인.”
알겠다는 듯 강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커피 주제로 흘러갔던 대화가 뚝 끊겼다. 그러고 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희주는 얼른 빨대를 찾아 물었다. 나름 두 번째 만남이라고 전보다 어색함이 덜한 건 사실이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는 사정이 달랐다.
공간은 좁고, 간격이 가까운 탓인지 옆에 있는 이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음료를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옅은 숨소리며, 음료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꼴깍이는 소리가 귓가를 마구 간지럽혔다. 딱 강현우를 향한 왼쪽 귀만 탁 트인 느낌이었다.
“…….”
신경이 쓰이는 건 강현우도 피차 마찬가지였다.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카시트에 밴 오메가 페로몬 때문에 그의 오감이 바짝 곤두서 있었다. 상대가 열성이다 보니, 우성인 제 페로몬에 반응해 의도치 않게 흘린 듯했다.
이상할 노릇이다. 열성 페로몬이 이토록 신경 쓰이는 것은. 우성인 그에게 열성 페로몬은 베타들이 뿌리는 향수 수준일 뿐이었다.
식사 자리가 이토록 즐거웠던 게 얼마 만이었던가. 그동안 타인과 식사를 하는 행위는 그저 곤욕일 뿐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들을 받아 내느라, 입사를 한 이후에는 제 환심을 사기 위해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이들을 상대하느라. 가끔 비즈니스 목적의 식사 자리에 자녀를 합석시켜 사적인 친분을 만들려는 이들도 있었다.
아직 친근한 사이까지는 아닌지라 살가운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지만,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한 것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다. 집안이 어떻고, 사업이 어떻고. 딱히 무언가를 얻어 내거나 알아내려는 시도 없이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서로의 말에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에 열중해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사실 강현우는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상대를 붙들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충동적으로 약속을 잡는 바람에 내일도 오늘과 같은 평일이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식사를 마친 후, 슬슬 데려다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미쳤을 무렵 강현우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아쉽다’였다.
마음 맞는 성인들끼리 밤을 보내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지만 지금 강현우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서류에 쓰이지 않은, ‘권희주’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앞선 까닭이었다.
“…….”
강현우는 얼음 소리를 따라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직 절반도 다 마시지 않은 제 것에 비해 권희주의 것은 거의 바닥을 보이는 듯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테이크아웃 컵을 두 손으로 꽉 쥐고 있느라 손톱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워낙 피부가 하얀 탓일까,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아예 긴장감이 없는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현우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게 희주를 부르려는데, 무언가를 땅에 강하게 내리꽂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텅!
“희주…….”
“아, 깜짝이야.”
난데없는 굉음에 가만히 있던 몸이 크게 튀었다. 희주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현우 역시 같은 곳을 쳐다보았다.
주차장을 가로지르는 인파가 보였다. 무질서하게 뭉친 무리는 하나같이 큰 키에 편히 입은 옷차림이었다. 그들은 차 안에 있는 두 사람에게까지 선명히 들릴 정도로 크고 거친 목소리로 왁자지껄 떠들었다. 그중 한 사람의 손에서부터 텅, 텅 하고 연신 바닥을 치고 튕겨 오르는 게 있었다.
“이 시간에 농구 하러 왔나 보네요.”
강현우의 중얼거림에 희주는 저를 놀라게 한 게 농구공 튕기는 소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진짜 깜짝 놀랐어요.”
더욱 깊게 등을 파묻은 희주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희주 씨.”
걸걸하게 욕설을 주고받기까지 하던 인파는 곧 강현우가 말한 공원 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그들의 모습이 더는 눈에 보이지 않을 무렵, 강현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재차 희주를 불렀다.
적당히 긴장감을 해소시켜 주기는 했지만 괜한 짜증이 치밀었다. 아는 사람이 말을 끊는 것도 기분 나쁜데,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우연히 저지른 일은 책임을 물을 곳이 없어 더더욱 불쾌했다. 하지만 제 기분을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중요한 말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아까, 주말에도 보자고 했던 거 말입니다.”
“아, 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말씀드리지만, 예의상 연락 좀 더 하려는 마음에 한 말 아닙니다. 데이트 신청이에요.”
“아, 네……. 네?”
대수롭지 않게 듣던 희주는 놀란 표정으로 말끝을 올렸다. 강현우는 동그랗게 벌어진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희주 씨는 어떻게 느끼셨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전 오늘 즐거웠거든요.”
머릿속으로 정의를 끝낸 감정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애프터니 삼프터니……. 선 본 사이에 예의상 몇 번 만나 보는 그런 만남이 아니라, 서로 좋은 마음으로 하는 데이트였으면 좋겠어요.”
아. 희주의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언제부터 뛰고 있었는지 모를 심장이 벌어진 입 밖으로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희주는 이로 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원래 국어 과목에서 정의가 꽤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아닌가. 강현우는 머쓱한 듯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입도 대지 못할 정도로 뜨거웠던 차가 어느새 적절한 온도로 식어 있었다.
“늦었는데, 이만 갈까요.”
희주는 한동안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남은 차를 몇 모금 마신 강현우가 이내 뚜껑을 도로 덮고 시동을 걸었을 때,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금방 들은 말들을 곱씹었다. 하지만 공영 주차장에서 오피스텔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았던 탓에 대화를 마무리 짓기는커녕 제 생각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집이 가까워지는 것만 멀뚱히 바라보아야만 했다.
“저기…….”
오피스텔 앞, 오늘 처음 강현우의 차를 탔던 곳과 같은 위치에 차가 멈췄다. 희주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달려 있는 카메라를 힐끔거렸다. 주정차 금지 구역이기는 하지만 몇 초 정도는 봐주지 않을까, 하고 강현우를 돌아보았다. 이대로 헤어지면 말 그대로 흐지부지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주말에 보자는 거요.”
다급히 튀어나오는 알 수 없는 말에도 강현우는 차분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데이트 신청이라고 하셨죠?”
“네.”
“좋아요. 저랑 데이트해요.”
“…….”
“그, 원래 객관식에서 답 바꾸면 틀린대요.”
주저하며 이은 말에는 데이트 신청을 거절하는 것 자체가 오답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 의미를 깨달은 강현우가 작게 웃었다. 꼭 고백이라도 받은 사춘기 소년처럼 마음 한구석이 몽글거렸다.
희주는 미소 짓는 얼굴을 바라보다 도망치듯 차에서 내렸다. 이대로 오피스텔 입구까지 내달릴까도 했지만 그렇게까지 하면 정말 도망과 진배없을 것 같았다.
머뭇거리고 선 희주를 향해 차창을 내린 강현우가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조심히 들어가요.”
“……네.”
주말에 보자는 말에도 그랬던 것처럼, 방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희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 씨도요.”
아직까지는 선선한 5월의 저녁이건만,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열감이 화르륵 도는 것이 수상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