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의 모든 직장인들이 싫어하는 요일은 월요일과 목요일, 화요일, 금요일, 그리고 수요일이 있다. 이 말인즉슨, 주말을 제외한 평일 5일 전부가 해당된다는 뜻이다.
말이 교사지 엄연한 대한민국 평범한 직장인 중 한 명인 권희주도 평일이 싫은 건 매한가지였다. 일단 아침에 눈을 뜨는 것부터가 고역이다. 한창 입시 준비를 할 때만 해도 새벽 3시에 자고 6시에 일어나는 강행군을 계속해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이제 아침에 침대를 벗어날 때 아이고 소리가 없으면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하루하루 몸 상태가 달라진다더니 딱 그 말이다. 서른이 된 지 한 학기도 지나지 않았는데 몸은 이미 다음 겨울 방학이었다. 동면을 원한다는 뜻이다.
“다음 분 주문 도와 드릴게요.”
“아이스아메리카노 라지 사이즈로 하나요. 샷도 두 번 추가해 주세요.”
죽을 것 같은 몸을 이끌고 학교보다도 더 먼저 방문한 곳은 집 근처 싼 맛에 자주 가는 24시간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등교 지도가 없는 날에는 이곳에 들러 커피를 샀고, 평소에는 교무실 책상 서랍에 욱여넣어 둔 믹스커피를 타 마시곤 했다. 전에는 누가 사 준다 해도 안 마시던 게 커피였는데, 직장인이 되고 난 후부터는 제 돈을 내고 사 먹는 게 커피가 됐다.
들고 있던 텀블러를 알바생에게 넘기는 것으로 주문을 마친 희주는 픽업대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섰다. 카페 내부는 음료가 나오길 기다리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는데, 모두가 영혼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서서 하염없이 알바생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생명수를 쥐여 줘야 하는 알바생의 표정에도 표정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자신도 저들과 같은 얼굴이려나 싶어 희주는 손등으로 뺨을 스윽 문대 봤다. 평소에 안 그러던 살갗이 꺼칠꺼칠하게 만져졌다. 잠이라도 푹 잤었어야 했는데, 학기 초반이라 이것저것 신경 쓸 것들이 많아서인지 통 잠을 자지 못한 게 문제였다.
희주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슬쩍 확인해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출근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집에 가고 싶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거다. 앞으로 몇 시간만 고생하면 주말을 만끽할 수 있었다. 희주는 당장 코앞으로 들이닥친 주말 동안 무엇을 하며 보낼지 고민했으나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평소처럼 온종일 집에 틀어박혀 있을 것이 뻔했다.
지난주에 보다 만 드라마나 이어서 볼까. 줄어드는 순번을 멍하니 응시하며 의식의 흐름대로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휴대폰이 징징 울렸다. 여나연이었다. 희주는 얼른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가져다 댔다.
“어엉.”
―학교?
“아니, 아직. 이제 막 나왔어.”
희주는 밀려 나오는 하품을 꾹 삼키며 대답했다. 오랜 친구인 여나연은 희주의 뭉개지는 발음에 킥킥 웃다가 이어 물었다.
―오늘 학교 몇 시에 끝나?
희주는 다시금 시간을 확인했다. 별일이 없다는 가정하에 5시 정도면 퇴근인 날이었다.
“한 5시쯤? 왜? 만나자고?”
―왜긴 왜야. 오늘 저녁에 청첩장 준다고 했잖아.
그새 또 까먹은 거냐며 쏘아 대는 타박에 희주가 “아” 하고 탄식을 터트렸다.
여나연은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예비 배우자는 여나연의 과 선배로, 희주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청첩장이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주고 싶다며 희주와의 약속이 첫 번째 약속임을 강조했던 게 그제야 기억이 났다.
―까먹었냐? 설마 뭐 따로 약속 잡아 둔 건 아니지? 나 그럼 진짜 서운해.
희주는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우며 얼른 부정했다.
“아니야. 아침이라 잠깐 깜빡했어. 동네에서 볼 거지? 몇 시에 볼래? 한희 누나랑 같이 오나?”
회사가 가장 먼 여나연에게 맞춰 얼추 7시쯤 보기로 하고, 다른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화를 끊었다. 7시면 집에 들러서 옷을 갈아입고 나가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희주는 갑자기 생긴 약속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벌써 코앞으로 다가온 친구의 결혼식에 대해 곱씹었다.
8년 동안이나 지지고 볶고 연애하더니, 결국 둘이 결혼하는구나. 하긴, 둘 다 직업도 괜찮고……. 나연이도 이제 서른이고 한희 누나도 서른셋이니까…….
“84번 손님, 음료 나왔습니다.”
희주는 끊긴 전화를 뒤로 하고 제 커피를 받아 들었다. 방금 내린 아메리카노를 목구멍으로 때려 넣으니 몽롱했던 정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결혼이라…….”
한숨 섞인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결혼 당사자는 여나연인데, 이상하게도 생각이 많아진다.
* * *
학교 정문이 가까워지자 일찍 등교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골목 끝부터 가득 메웠다.
“우와, 쌤 안녕하세요!”
“희주 쌤, 이거 드실래여? 편의점에서 원플원으로 산 거예요.”
“야! 내가 달라고 할 땐 안 주고!”
희주를 알아보고 앞다투어 인사하는 아이들도 있는가 하면, 손에 들고 있던 간식거리를 선뜻 내주는 아이들도 있었다. 길가에 핀 야생화만 봐도,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좋을 나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조금 정신 사나울 법도 한데 희주는 익숙하게 아이들을 상대하며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안녕, 얘들아.”
희주의 근무지는 백영 여자 고등학교였다. 온통 여학생들뿐인 곳이라 남성체 오메가인 희주로서는 최적의 근무지였다. 여고생에 환장하는 변태 새끼란 뜻은 아니고, 형질과 관계없이 짓궂다는 말로는 표현 못 할 남학생들의 지랄 맞음에 질려서 그렇다고 볼 수 있겠다. 하필 교생 실습을 남고에서 할 건 뭔지. 그때 꽤 고생을 했던 터라, 지금으로선 이곳에 뼈를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애들이 어쩜 이렇게 다들 착하지? 자기가 먹을 간식을 선뜻 선생님에게 나눠 주려고 하다니. 뛰지 말란 소리를 안 해도 뛰지 않고, 자리에 앉으라는 소리를 하지 않아도 종 치면 알아서 앉아 있는 게 너무나도 신기했다.
반에 몇 명 없기는 하지만 형질자 아이들이 페로몬 조절을 하는 걸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남고 녀석들은 일부러 페로몬을 흘려 놓고 실수인 척 낄낄대는 새끼들이 태반이었다. 교생 실습을 하며 먹은 페로몬 억제제로 한강을 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도 남자지만 남학생들에게 치를 떨게 된 희주는 교생 실습 이후 사립 학교로 노선을 틀었다. 다시는 남학교를 가지 않으리. 다짐하면서.
백영 여고는 여학교라는 점도 장점이지만 백영 그룹 산하 재단에 속해 있는 학교라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일단 시설이 크고, 깔끔하며, 편리했다. 예를 들어 교사 휴게실은 성별에 따라 구분해 놓는 것에서 나아가 형질에 따라서도 나눠 놔서 형질 보유 교사들의 불편함을 최소화했다. 여러모로 학생에게도, 선생님에게도 최적의 학교였다.
“권 선생?”
“네.”
근무 환경이나 동료 교사들 전부 다 좋은데 딱 한 사람, 학년 부장이 가장 큰 오점이었다.
“권 선생 나이가 몇이더라?”
주말을 앞둔 산뜻한 금요일, 그것도 직장에서의 유일한 낙인 점심시간에 2학년 학년 부장 강덕수가 슬슬 ‘남의 인생 참견질’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강덕수는 성이 백영 그룹 오너 일가와 같다는 이유만으로 낙하산으로 꽂혀 들어온 인물이 아니냐는 소문이 도는 인물이었다. 설마 저런 인간이 백영 그룹과 연관이 있겠느냐만, 사립 학교에 재단 임원들의 친인척이 낙하산으로 입사하는 일은 제법 흔한 일이기야 해서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수군거림이 몇 년째 이어져 오고 있었다.
“서른 됐습니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그럼 강덕수는 개만도 못한 인간인 걸까. 어디서 개가 짖나 보다, 하고 흘려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희주는 오로지 반찬에만 시선을 둔 채 대답했다.
“아아, 맞아. 그랬지. 그럼 이제 슬슬 장가들 준비해야지. 아, 씁, 근데 권 선생은 그, 오메가 스린지 하는 그거 아냐? 그럼 장가가 아니라 시집이라고 해야 하나?”
허, 허, 헛. 학년 부장이 복식 호흡으로 웃어댔다. 입 안에 음식물은 없는지 모르겠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고 있는 학년 부장 주위의 동료 교사들이 제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장단 맞추고 있는 꼴이 대단들 하셨다.
희주는 속으로 조소했다. 안 웃기면 웃지를 말지. 하나도 안 웃긴데 왜 웃어? 저러니 학년 부장도 자기 개그가 재밌는 줄 알고 계속 무리수를 던지는 건데.
“권 선생은 알파 만나야 하잖아? 그럼 그… 같은 남자끼리 만나야 하는 거지?”
질문을 던지는 학년 부장의 눈빛에 호기심을 겸비한 약한 혐오가 스쳤다.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에요.”
형질은 굉장히 민감한 문제다. 타인의 형질을 묻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가벼운 농담거리로 써먹는 건 형질자들에게 매우 실례되는 일이었다.
같은 형질자끼리면 모를까, 가끔 강덕수처럼 농담이랍시고 희롱을 일삼는 멍청한 베타들을 볼 때면 이 나라의 형질 교육 수준을 의심하게 된다. 아마 지적해도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를 거다. 지적한 사람만 나쁜 놈 되는 거였다.
“거참, 만나기 쉽지 않겠네. 지금 만나는 사람은 있고?”
남들은 명절 때나 듣는다는 ‘결혼은 언제 하니? 애인은 있니?’를 가족, 친척이 없어서 매일 직장에서 듣는 게 원통할 따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알 바세요?’ 혹은 ‘잔소리하실 거면 돈 내고 하세요’ 하며 최선을 다해 싸가지 없이 대답하고 싶었지만……. 희주도 어쩔 수 없는 K―직장인이었다.
“바쁘니까 누구 만날 시간이 없네요. 주변에 좋은 사람 있으면 저 좀 먼저 소개해 주세요.”
아……. 입맛이 뚝 떨어졌다.
* * *
화려한 네온사인 간판들이 늘어서 밤이어도 꼭 낮 같은 대로변 사이, 좁은 골목길을 꼬불꼬불 지나오면 간판도 없는 허름한 노포(老鋪)식당이 하나 나온다.
메인 메뉴는 쪽갈비. 달짝지근한 간장 맛과 얼얼한 매콤한 맛, 딱 두 가지뿐이고 된장찌개를 시키면 공깃밥 하나가 공짜였다. 사이드 메뉴라고는 된장찌개 말고는 없는 곳이었는데, 사장님이 딸에게 가게를 물려준 후부터 추억의 도시락과 냉면 메뉴가 추가됐다.
“사장님! 비냉 하나랑 물냉 하나요.”
여나연이 손을 번쩍 들고 냉면을 주문했다. 복작거리는 소음 속에서 정확히 주문을 캐치한 직원이 주방 쪽을 향해 “2번에 비냉 하나, 물냉 하나!” 크게 외쳤다.
“권 선생, 눈이 아주 맛이 갔네.”
냉면 귀신 여나연의 옆에는 그녀의 피앙세, 조한희가 앉아 있었다. 하얀 목장갑 위에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갈비 한 대를 집어 간 조한희가 살점을 질겅질겅 씹으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야. 남으면 아까우니까 더 먹어.”
여나연이 갈비 한 대를 희주의 앞접시에 놓아 주었다. 조한희의 표현을 빌려 맛이 간 눈을 한 희주는 그 맛있는 고기를 앞에 두고 선뜻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 점심시간에 당한 공격이 꽤 치명적이기라도 했나. 평소라면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을 잔소리가 오늘은 이상하게 잔상이 오래갔다.
희주는 고기 대신 소주병을 가져다 제 잔을 쫄쫄 채웠다. 각자의 잔을 채워 마시는 게 익숙한 모임이라 자작하면 재수가 없다는 등의 농담은 나오지 않았다.
“청첩장 준다며.”
“아, 지금 줄까? 하긴 너 보니까 더 취하기 전에 주는 게 낫겠다.”
좋은 자리에 우울한 분위기를 전파하고 싶지는 않아 자연스럽게 주제를 돌렸다. 여나연이 보부상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 두고 그 안을 열심히 휘적거렸다.
“오……. 딱 한희 누나 취향인데.”
조한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연분홍색 봉투를 앞뒤 뒤집어 보다 보니 봉투 구석에 ‘To. 희주♡’라고 적혀 있는 게 보였다. 여나연의 글씨체였다. 동글동글한 게 꼭 저다운 글씨체라 피식대며 웃은 희주가 봉투를 봉하고 있는 스티커를 톡 떼어 냈다.
“이게 그거야? 제주도 가서 찍었다는 거?”
“엉. 야, 그거 고르는 데만 반나절 걸렸어.”
가로로 두 번 접혀 있는 청첩장 안에는 행복한 듯 밝게 웃고 있는 두 여자의 사진이 들어가 있었다. 제주도까지 가서 찍었다고 하더니 고생한 보람이 있어 보였다.
“결혼 준비 힘들다고 두 번은 못하겠다고 하더니 결국 하네. 축하한다. 축하해, 누나.”
직접 구상해 적은 듯한 초대 인사와 예식이 치러질 장소, 일자까지 꼼꼼하게 눈에 담은 후 곱게 접어 봉투 안으로 밀어 넣었다. 뿌듯한 표정으로 웃고 있던 여나연이 결혼 준비라고 하면 아주 신물이 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댔다.
“야, 장난 아니야. 이혼하지 말라고 힘든가 봐.”
“재혼하는 사람들은 진짜 대단한 거야.”
조한희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 비하인드 에피소드들을 안주 삼아 소주를 들이켜기를 몇 분, 여나연이 주문했던 냉면이 나왔다. 셋 다 배부른 건 피차 마찬가지였지만 배불러도 마지막은 냉면에 고기를 싸 먹어야 한다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여나연 덕에 다시 젓가락을 들어야만 했다.
“권 선생 너는? 만나는 사람 없어?”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이 자리의 유일한 솔로, 희주에게로 흘러갔다. 난데없는 조한희의 물음에, 새빨간 양념이 덕지덕지 묻은 냉면에 갈비 살 하나를 올려 입 안에 욱여넣던 희주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있을 리가.”
“같은 학교 선생님들 중에 괜찮은 알파 없나?”
“누나. 누나도 똑같은 직장인이면서 사내 연애 하라고 권하고 싶어?”
희주는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사내 연애는 미친 짓이야. 일도 바빠 죽겠는데 무슨 사랑이야? 사내 연애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더 대단한 사람들이야.”
“와……. 랩 하는 줄. 누가 보면 사내 연애 하다가 크게 데인 줄 알겠다, 야.”
조한희가 크게 감탄했다.
“아무튼, 사내 연애는 싫어. 어차피 학교에 알파도 별로 없어.”
알파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질자들 자체가 적은 편이어서, 당장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 결국 답은 하나뿐인데……. 두 여자를 힐끔 쳐다본 희주는 이내 눈을 내리깔고 남은 음식에 손을 댔다.
“아님 뭐, 우리 회사 사람들 중에서 물색해 볼까?”
“소개팅은 뭐랄까. 꼭 그 사람이랑 잘돼야 할 것 같잖아. 만나나 안 만나나 끝이 안 좋으면 주선자 입장도 난처해질 것 같고……. 됐어. 별로야.”
지금 당장이라도 소개팅 대상을 목록으로 뽑아낼 것처럼 굴던 여나연은 희주의 단호한 거절에 멋쩍어하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
틱, 틱. 희주는 소주 뚜껑에 달린 꼭지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리를 망쳐 버리기라도 할까 걱정되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던 건데, 자리의 주인공인 조한희와 여나연이 먼저 물꼬를 텄다. 오늘 만남의 목적이었던 청첩장도 이미 받았고, 축하도 해 줬으니까 이제 제 이야기를 꺼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희주가 조심스레 본론을 꺼냈다.
“나 결혼 정보 회사 가 볼까 하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해?”
결혼 정보 회사? 여나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바쁘기도 하고, 서로 알아 가느라 시간 허비하고 싶지도 않고…….”
왜인지 부정적인 반응이 나올 것 같은 예감에 희주는 변명처럼 말끝을 흐렸다.
결혼 정보 회사는 우연히 알게 되었다. 평소처럼 인터넷을 하던 중 뉴스 기사 옆으로 전단지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는 광고들 속에 끼어 있었는데, 그 위에서 희주의 손가락이 멈췄더란다. 정보만 입력하면 알아서 내 짝을 찾아 준다는 광고 문구는 희주로서는 클릭을 안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혼 정보 회사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없어 망설여졌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고, 남들이 어떻게 볼지도 걱정되었다. 지금 당장을 봐도 여나연은 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희주는 애써 표정을 아무렇지 않게 가다듬었다.
“뭐… 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어색하게 맴도는 정적을 깨트린 건 조한희였다. 아무 말도 않고 빈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조한희가 저에게 꽂히는 시선들을 마주하며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어릴 땐 굳이 돈까지 내고 가면서 그런 델 왜 가나 싶었거든? 근데 우리 과장도 결정사에서 지금 남편 만났대. 종교라든가, 정치 성향이라든가. 그런 거 안 맞으면 뒈지게 안 맞는 거 알지. 처음부터 안 맞는 조건은 빼고 만날 수 있게 주선해 주니까 괜찮다고 봐, 난.”
희주는 조한희가 내미는 빈 잔에 쪼로록 소주를 따라 주었다. 투명한 술이 단번에 탁 비워지고, 쓴맛에 구겨진 얼굴을 한 조한희가 테이블 위에 놓인 당근을 아작아작 씹어 댔다.
“그리고 권 선생 말대로 다들 바쁘게 살잖아. 서로 조건 맞는 사람 찾기가 어디 쉬운 일이야?”
그리고 다시 정적. 답지 않게 무거워진 분위기 가운데서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여나연이 툭, 희주의 어깨를 쳤다.
“언니 말 듣고 보니까 맞는 말인 것 같아. 그리고 우리 같은 형질자들은 어디 가서 사람 만나기 쉽지 않잖아. 세상이 좀 험하냐.”
“넌 내 마음 이해하지? 알파 놈들 믿을 수가 있어야지…….”
“권 선생. 듣는 알파 기분 나쁘게 왜 그래?”
세 사람에게서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살짝 얼어붙을 뻔한 분위기가 여나연 덕에 금세 풀어졌다. 이미 알코올이 조금 들어가 알딸딸해진 상태인 세 사람은 결국 한 병씩만 더 먹고 가자며 사장님을 부르는 데까지 이르렀다.
“근데 그런 덴 존나 비싸겠지?”
멀쩡했던 희주의 혀가 한껏 꼬부라진 건 한순간이었다.
“인생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곳인데 그럼 꼴랑 몇만 원에 해 주겠냐.”
말 같지도 않은 질문 취급한 조한희가 당연하다는 듯 응수했다. 흠. 그른가. 희주가 객쩍게 뺨을 긁적였다. 10… 은 조금 적은 느낌. 100은 좀 많은데.
“그럼 한 삼십……. 아니, 한 오십만 원이면 되려나?”
* * *
“삼백만 원입니다.”
300만 원. 상담 매니저가 내민 태블릿에는 정확히 ‘300’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부가세는 별도고요.”
상담 매니저의 부연은 쓸데없이 경쾌했다.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와 코가 비틀어지도록 마시고 난 다음 날, 곱게 집에 들어와 자고 있던 희주는 휴대폰 진동 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진동이 길게 이어지지 않는 걸 보니 문자 메시지일 터, 마침 잠도 깼겠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벼 가며 확인한 메시지는 다름 아닌 결혼 정보 회사에서 날아온 문자였다.
[Web발신]
[매듭] “권희주”님, 매듭에 가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운명의 짝을 만나 결실을 맺을 그날까지
저희 매듭이 함께하겠습니다.
오전 1:44
[Web발신]
[매듭] “권희주” 회원님의 상담 예약이 완료되었습니다.
상담 일자: 20xx/xx/xx 토요일 13시
오전 1:49
[Web발신]
[매듭] “권희주” 회원님 xx월 xx일 13시 예약입니다.
예약 시간 기준 10분 이상 늦을 시 예약이 자동 취소됩니다.
오전 11:00
메시지가 온 시간을 보아하니 두 여자의 부추김에 아예 상담 예약까지 초고속으로 진행해 버린 모양이었다.
희주는 술 냄새가 가득 밴 숨을 폭폭 내쉬며 그 문제의 결혼 정보 회사, ‘매듭’을 지도 앱에 검색했다. 예약한 지점 위치는 강남으로, 희주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정확히 1시간 20분이 걸리는 곳이었다.
“아, 젠장.”
희주가 눈을 뜬 시간은 오전 11시였고, 상담 시간은 1시였다.
“그러니까… 이게 가장 기본이라는……?”
소주로 적신 속을 해장할 틈도 없이 어영부영 씻고 도착한 이곳 ‘매듭’에서 희주는 지금 제 예상을 뛰어넘어 버린 금액과 대치 중이었다.
“네. 맞습니다.”
상담 매니저는 묻지도 않은 멤버십 설명을 쏟아 냈다. 이걸 하면 이런 혜택이, 또 이걸 하면 저런 혜택이.
혹하게 만들어 한탕 제대로 뜯어먹으려는 건가? 희주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상담 매니저를 쳐다보았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고, 또 대처에 능한 베테랑 매니저는 별 대수롭잖다는 듯 친절한 웃음을 머금었다.
“혹시 결혼이 많이 급하실까요, 고객님?”
“급하면 뭐가 달라지나요?”
“그럼요. 아무래도 결혼 적령기에 계시는 고객님들의 경우에는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진행하고 싶어 하시거든요. 고객님 사정에 따라서 프로그램이 다르게 적용되는 겁니다.”
상담 매니저는 태블릿을 톡톡 두드리며 멤버십을 상세히 설명했다.
“프로그램을 달리 선택하신다고 해서 회원들 간에 등급이 나눠지는 것은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멤버십 기간, 그 기간 내에 이루어지는 만남의 횟수가 가격 책정의 기준이에요.”
“멤버십 기간… 이요.”
“네, 고객님. 결혼이라는 게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일생의 단 한 번뿐인 중대사잖아요. 아무나 만나서 결혼하실 수 있으세요? 못 하시죠. 그러니까 고객님이 저희 매듭을 찾아와 주신 거고요. 이왕이면 고객님이 원하는 배우자와 결혼하는 게 고객님도, 상대 배우자님도 행복한 것 아니겠어요? 성혼이 될 때까지 저희가 기간 내에 최선으로 도와드릴 거예요.”
“아……. 네.”
“웨딩 플래너라는 직업 들어 보셨죠, 고객님. 웨딩 플래너를 만나서 촬영이라든지 예식이라든지 준비하시기 전에, 저희 매듭을 만나서 같이할 짝꿍을 찾으시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또 만남에 필요한 모든 것들도 올인원 서비스로 제공해 드리거든요. 일종의 결혼 매니저 같은 역할이죠, 저희가.”
가격을 듣고 떨떠름하기만 했던 희주의 표정은 상담 매니저의 청산유수와 같은 설명에 점차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 미묘한 변화를 포착한 상담 매니저는 딱 한 마디로 희주의 카드를 꺼내는 데 성공했다.
“해피 엔딩. 약속드립니다, 고객님.”
와, 신뢰 장난 아니야. 결연하기 끝이 없는 상담 매니저의 눈빛 레이저에 깜빡 넘어가 버린 희주는 주섬주섬 지갑을 꺼냈다.
“결제는 어떻게……?”
카드를 받아 든 매니저가 물었다.
그래. 인생의 중대사잖아. 명분이 제대로인 지출이다. 희주는 상담 테이블 밑에서 비장하게 주먹을 쥐고 말했다.
“일시불이요.”
* * *
자그마치 부가세 포함 330만 원이라는 거금을 일시불로 긁고 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담당 매칭 매니저라는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지역번호 02를 불신하는 비서울권 거주자답게 대놓고 수신 거절 버튼을 누르길 수차례, 제발 전화 좀 받아 달라는 메시지를 받은 후에야 겨우 성사된 통화였다.
문제는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희주가 뒤늦게 놀라 전화를 받았던 시점은 곧 있을 중간고사를 앞두고 한창 시험문제를 출제하는 도중이었고, 설상가상으로 같은 과목의 동료 선생이 오류 범벅의 문제를 출제한 바람에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였다. 인쇄 맡기기 전에 발견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나란히 시말서를 쓸 뻔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통화에 영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학년 부장 강덕수 선생이 교무실을 지키고 있는 한 통화를 길게 끌 수도 없었을뿐더러 애초에 사무실에서 사적인 통화를 하는 직장인이 어디 있으랴. 자기 자식을 내보내기라도 하듯 열과 성을 다해 상대 알파의 장점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매니저에게 대충 알겠다, 좋다는 말로 응수하며 황급히 통화를 갈무리했던 게 3주 전이었다.
시험 문제는 학생들이 풀고, 채점은 컴퓨터가 해 준다지만 그렇다고 선생님들이 노는 건 아니었다. 희주는 맞선 날짜를 중간고사 이후의 주말로 미루었다. 어쩐지 곤란한 목소리로 상대 알파와 통화해 보겠다던 매니저는 ‘다행히 출장 일정이랑 겹치지 않으신다네요’라며, 바뀐 시간과 장소를 통보함과 동시에 상대 알파의 프로필 파일을 전송해 주었다.
맞선 상대의 프로필을 숙지하는 것은 응당 해야 할 일이었지만, 정신없이 시험 기간을 보내다 보니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고 말았다. 맞선 날짜를 잡아 두었다는 사실까지 까맣게 잊어버린 채 시험에 몰두하던 희주는 성적 입력까지 모두 마치고 난 뒤에야 맞선이 당장 코앞까지 다가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개인 사정으로 맞선 날짜를 미룰 때는 언제고, 하마터면 당일에 다다라서 상대 알파를 바람맞힐 뻔했다. 희주는 부랴부랴 메일함을 뒤져 매니저가 보내 주었던 메일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런 희주를 맞이한 건 다름 아닌 다운로드 기간 만료라는 시스템 알림창이었다.
곧장 매칭 매니저에게 연락해 파일 재전송을 요청해 보았지만 다소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하필 서버에 문제가 생겼다며 희주 못지않게 당황한 듯한 매니저는 최대한 빨리 파일을 찾아 다시 보내 드리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파일을 다시 전달받기만을 기다리는 동안 맞선 날짜는 빠르게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예약 확인 도와드리겠습니다. 예약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
“아, 권희주입니다.”
“확인 감사합니다. 자리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첫 맞선은 토요일 오후 5시, 장소는 서울의 모 호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새까만 슈트 유니폼을 차려입은 직원이 다가와 예의 그 친절한 목소리로 예약자의 이름을 물었다. 희주는 매칭 매니저가 알려 준 대로 제 이름을 댔고, 잠시 태블릿을 내려다보던 직원은 이내 안내를 도와주겠다며 가볍게 묵례했다.
올인원 서비스라더니 서로의 일정을 조율해 시간을 정하고, 적당한 미팅 장소를 찾아 예약하는 것까지 모두 매칭 매니저가 해 주었다. 희주가 할 일이라곤 가만히 앉아 맞선 상대의 프로필을 받아 보고, 정해진 시간에 나가 선을 보는 것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맞선 상대의 프로필은 보지도 못했으니 절반도 안 한 셈이다.
이래서 돈이 좋군. 희주는 약간 찜찜한 마음과 함께 안내받은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며 생각했다.
맞은편 자리는 비어 있었다. 상대 알파는 아직 도착 전인 모양이다. 미리 와 있는 상대와 겸연쩍게 인사를 나누는 상황이 싫어 일부러 일찍 집을 나섰던 건데,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물 한 잔 마실 여유도 있었다.
희주는 직원이 따라 준 물로 목을 축인 뒤, 여유롭게 실내를 둘러보기까지 했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럽고 세련된 인테리어는 맞선이라는 포멀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적당해 보였다.
아, 잠깐만. 그러고 보니 호텔 레스토랑이면 밥값이 적잖이 나올 텐데. 그럼 이건 누가 내는 거지?
희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서로 모르는 사이고, 한 명이 흔쾌히 밥을 살 만큼 확신 있는 자리는 아니니 일단 각자 반반씩 내는 게 깔끔할 듯하다. 이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다음 선 자리를 위한 피드백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다음부턴 식사하기 애매한 3시쯤으로 잡아 달라 해야겠다. 장소도 이런 레스토랑이 아닌, 가볍게 커피나 한잔 마실 수 있는 카페면 될 것 같다. 어느 한 사람이 낸다 해도 피차 부담스럽지 않을 수준의.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맞선을 코앞에 두고 매니저에게 전할 말부터 곱씹던 바로 그때였다. 들리는 소음이라곤 클래식 음악과 조용한 대화 소리,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전부였던 레스토랑이 일순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의문보다 행동이 앞섰다. 희주는 짙은 알파의 페로몬에 이끌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키가 큰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높은 층고가 무색해지리만큼 훤칠한 키와 다부진 어깨를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그는 넥타이를 맨 슈트 차림이었는데, 은은한 광택이 도는 슈트는 어깨에서부터 잘록한 허리까지의 선을 유려하게 보이게끔 했고, 제법 양감이 뚜렷한 몸을 더욱 탄탄해 보이게 했다. 기성복으로는 어림도 없을 터, 섬세하게 맞춘 고급 슈트일 게 분명했다.
희주가 저도 모르게 넋을 놓은 사이, 남자는 와인 보틀을 쌓아 만든 가벽 사이를 지나 유유히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안내를 도우려 직원이 다가서자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손을 내저어 거절의 뜻을 내비친다. 불필요한 호의를 마다하는 손짓이 평소 그가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시선은 자연히 얼굴로 향했다. 짙은 고동빛을 띠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터라 그 밑에 자리 잡은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옅게 쌍꺼풀이 진 눈매는 유순했으며, 아랫입술이 더 도톰한 입술은 미소를 지었을 때 더 매력적으로 보일 것만 같았다. 온화하다고 해야 할까. 부드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외모였다.
“…….”
실로 굉장한 미남자여서 희주는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고 한참을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가 번쩍 정신을 차리고는, 멍하니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물고 아주 의식적으로 감탄을 삼켜 내야만 했다.
얼른 시선을 거두기는 했지만 자꾸 그쪽으로 눈길이 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희주는 물을 마시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척, 남자를 향해 기웃거렸다.
모두의 시선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남자는 꼿꼿하게 정면만을 응시했다. 그는 누군가를 찾는답시고 부산스레 두리번거리지도 않았으며, 처음 와 본 사람처럼 주위를 살피는 짓 또한 하지 않았다.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거침없이 테이블 사이를 가로지르는 모습은 흡사 배부른 사자를 연상케 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혹시 저 사람이 내 맞선 상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선을 보기에 적절한 장소라고 해서 이곳에 있는 모든 이가 저처럼 맞선을 보러 나왔을 리가 없다.
저런 사람의 곁에 서는 이는 아주 완벽한 오메가일 게 분명했다. 그는 알파이고, 차림으로 봐서 제법 안정적인 직업―어쩌면 전문직일지도 모르는―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한 데다가 일단 무지하게 잘생겼으니까. 본래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리는 법이다.
그리고 누가 봐도 잘난 남자는 유부남이라잖아. 저렇게 잘난 알파가 미혼일 리가 없었다. 만약 미혼이라고 할지라도 분명 만나는 사람이 있을 테고.
저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관심이 뚝 떨어졌다. 급격하게 현실로 끌어 올려진 희주는 휴대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곧 약속 시간인 5시였다. 그럼에도 상대 알파는 아직까지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1분이라도 늦기만 해 봐. 그럼 바로 벌점 아니, 감점이니까.’
제가 일찍 온 것도 있지만, 내심 ‘그래도 맞선인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내쉰 희주는 의미 없이 휴대폰 액정을 껐다 켜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맞선 상대의 예의를 운운하던 차에, 정작 자신은 상대 알파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는 게 떠올랐다. 지금쯤이면 매니저님이 보내 주셨으려나?
“분명 메일로 보내 주신다고 했는데…….”
희주는 얼른 메일함을 열었다. 새로운 사이트나 앱 가입을 할 때 본인 인증용으로 쓰는 메일 주소라 그런지 하루에도 몇 건씩 날아오는 광고성 메일로 메일함은 꽉 차 있었다.
스팸 메일들 틈에서 매칭 매니저가 보내 준 메일을 찾으려니 스크롤이 한참 아래로 내려갔다. 희주는 미간을 잔뜩 구긴 채 메일을 찾는 데에 집중했다. 그러느라 뚜벅이는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이거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매듭, 매듭…….
“아, 찾았다.”
“권희주 씨?”
‘권희주 님, 프로필을 보내드립니다. 성혼을 기원합니다’ 강건하기 짝이 없는 메일 제목을 누르는 순간 감미로운 목소리가 희주의 귓가를 때렸다. 30년째 들어온 자신의 이름에 고개가 안 들릴 수가 없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시선이 끝도 없이 올라갔다. 그 끝에 상냥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있었다.
“강현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까 그 유부남, 아니 미남……?
눈이 마주치자 남자의 미소가 더더욱 짙어졌다. 완벽한 좌우 대칭을 이루며 휘어지는 입꼬리에 시선이 흘렀다. 예상대로 웃었을 때 더욱 매력적인 입술이었다.
희주는 속으로 환호를 내질렀다.
와, 시발. 100점! 현직 국어 교사라는 사실이 무색해지는 찬사였다.
* * *
힐끔.
희주는 시선을 올려 상대의 얼굴을 살폈다. 메뉴판을 내려다보느라 살짝 음영이 진 얼굴은 높은 콧대가 부각되어 더욱 잘생겨 보였다.
힐끔.
면밀하게 실물을 살핀 뒤,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려 휴대폰을 켰다. 매칭 매니저가 보내 준 제 맞선 상대의 프로필이 담긴 메일이었다. 희주는 누르자마자 화면에 대문짝만 하게 뜬 사진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첨부된 사진은 평범한 증명사진에 불과했다. 그것도 취업과 관련해 찍었을 것이 분명한. 어색하지만 깔끔하게 뒤로 넘긴 머리하며 블랙 슈트에 파란 넥타이. 전형적인 신입 사원 느낌이 물씬 나는 사진이었다.
실물과 비교해 다른 점이 있다면 아무래도 사진이 조금 더 앳되어 보인다는 점이었고, 또 눈에 띄는 점이 있다면 실물이나 사진이나 똑같이 잘생겼다는 점이었다.
희주의 표정은 점차 심각해졌다. 정말 충격적으로 잘생겼다. 잘생겨서 자꾸만 눈길이 갔다.
내가 이렇게 속물이었나? 싶다가도 외모도 취향의 일부고, 그러니 배우자의 조건에도 들어갈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어 다시 보게 된다. 어디 가서 ‘난 얼굴 안 봐. 성격만 봐’라고 말한들, 정말 잘생긴 사람 앞에서 똑같이 지껄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니, 이 세상에 예쁘고 잘생긴 거 싫어하는 사람이 있냐고.
상담 받을 때만 해도 ‘외모요? 글쎄, 얼굴 빨아 먹고 살 것도 아닌데 그게 중요한가요?’라고 했던 자신을 향한 원망이 불쑥 솟았다. 어울리지 않게 쿨한 척은 다 하고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매칭 결과를 뽑아낸 매니저에게 지금이라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쯤 되니 무언가 이상했다.
‘이런데 미혼이라고?’
희주는 이해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다시금 사진과 실물을 번갈아 힐끔거렸다. 이 정도로 생긴 알파가 지금껏 미혼이라 결정사에 가입했다는 건 도통 믿을 수가 없는 점이었다.
허우대 멀쩡한 남자가 나이 먹도록 미혼이면 어디 문제가 있다는 뜻이라던데. 당사자한테 문제가 없다면 집에 문제가 있다거나. 마치 르네상스 시대 예술 작품을 보는 듯하던 눈빛은 어느덧 의심의 눈초리로 변해 남자에게 향했다.
직업이나 학력 같은 기본 조건들은 물론이고 가정 환경 같은 개인적인 바람은 상담 당시 매니저에게 직접 전달해 뒀으니 자신이 원하는 조건은 대부분 충족하는 남자일 테다. 설마 재혼인가, 하는 의심이 불쑥 치솟았지만 이것마저도 세세하게 체크해 놓았기에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서류상으로 확인되는 조건들에 문제가 없으면 안 보이는 부분에 문제가 될 게 있나?
성격?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 보기에는 직원과 저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도 젠틀했다. 따지고 보면 늦은 것도 아닌데, 그는 먼저 와 있는 저를 보고 사과까지 했다.
페로몬? 간혹 불쾌한 향을 풍기는 형질자도 있다고들 하지만 아까부터 맡아지는 향은 불쾌함과는 사뭇 거리가 먼 것이었다. 기분이 좋다고 하면 모를까. 그럼 뭘까? 성격도 아니고 페로몬도 아니라면…….
‘헉, 설마.’
희주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테이블에 가려져 있어 정확지 않지만 의도한 바로 희주의 눈은 ‘그곳’에 가 닿아 있었다. 사이즈나 기능에 문제가 있는 걸까……?
‘아잇, 미쳤나 봐.’
거기에 문제가 있으면 결정사가 아니라 비뇨기과를 갔겠지! 초면에 정말 죄송합니다. 들리지 않을 사과를 한 희주는 입술을 깍 깨문 채 황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 순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희주는 흡, 숨을 들이마셨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건지 전혀 가늠이 안 됐다. 휴대폰 속 사진과 실물을 비교하고 있었을 때만 해도 메뉴판이 영자 신문이라도 된 양 보고 있었으니 그때부터는 아닐 테고, 설마 ‘그곳’을 훔쳐볼 때부터?
거기까지 생각하니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수업 시간에 몰래 휴대폰을 보다가 걸리는 학생들의 심정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어느새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희주와 잠시 눈을 마주하던 남자가 이내 빙긋 웃어 보였다. 메뉴판을 향해 살짝 앞으로 기울어진 몸을 바로 세우고, 입술을 달싹였다.
모양 좋은 입술이 열리는 꼴을 보며 희주는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인 양 발발 떨었다. 그러나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 전혀 다른 물음이었다.
“다 고르셨습니까?”
“……네?”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남자의 물음은 희주의 행동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었다. 골라? 뭐를? 질문의 요지를 파악 못 해 눈만 껌뻑이고 있자 남자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아직 고르시기 전이라면 제가 골라 드려도 될까 해서요.”
전에 몇 번 와 봤던 곳이라, 여기 스테이크가 정말 맛있거든요.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굉장히 듣기가 좋았다. 희주는 상대가 물은 것이 메뉴였다는 것을 깨닫고 “아……”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가볍게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곧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허리를 반쯤 숙여 주문하시겠느냐 묻는 직원에게, 남자는 메뉴판을 바라보며 이것저것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몇 번 와 봤다는 말이 빈말이 아닌 듯 남자는 무척이나 능숙해 보였다. 희주는 조금 멍해진 정신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 메뉴판을 힐끔거렸다. 그러나 금방 읽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분명 한글로 쓰여 있는데 무슨 요리인지 통 가늠이 안 됐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먹어 봤어야 말이지. 어차피 알아보지도 못할 거, 그냥 영어로 적어 놓지 뭐 하러 한글로 적어 놨대. 국어 교사의 자존심이 짓밟힌 느낌이었다.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인 희주는 펼쳐 놓은 메뉴판을 티 나지 않게 아주 조금만 앞으로 밀어 버렸다.
직원은 묵묵히 주문을 받아 적다가도 중간중간 조리와 서빙에 필요한 것들을 물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남자는 곧장 대답하는 대신 희주를 빤히 응시해 왔다. 먼저 고르라는 건가? 희주는 눈치를 보며 망설였다.
“천천히 골라요.”
그런 망설임을 알아챘는지 남자가 잠시만 기다려 달라 슬쩍 양해를 구하곤 희주에게 말했다. 담백한 눈매가 입술을 따라 곱게 휘어졌다.
방금 전까지 ‘어디 하자 있는 거 아냐?’ 의심하던 것도 잊고, 희주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미디움 레어로……”라고 하거나 “아메리카노……?”라고 하는 등 멍청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 남자는 몇 초간 그런 희주를 가만히 보다가 “같은 걸로 주세요” 하고 웃으며 시선을 돌리는 거였다.
잠시 닿았던 시선에 두 뺨이 발긋해졌다. 이유 모를 쑥스러움에 희주는 입술을 말아 물어야만 했다.
“이렇게 주세요.”
“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주문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직원은 남자가 내민 메뉴판을 받아 들면서 주문한 메뉴를 확인시켜 준 뒤, 희주의 앞에 놓여 있던 메뉴판까지 정중하게 거둔 채 사라졌다.
그다음은 자연스레 침묵이었다. 대화 대신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 클래식 음악만이 부유했다.
아, 이거, 작년에 1학년 애들 수련회 가는 길에 들렀던 휴게소 화장실에서 들었던 음악인데. 그때 옆 반에서 애 하나 휴게소에 두고 와 버려서 난리도 그런 난리가 아니었지. ……별생각이 다 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 테이블 아래 마주 잡은 두 손만 꼼지락거리는데, 남자가 먼저 침묵을 깼다.
“와인은 스테이크 소스에 어울리는 걸로 골라 봤습니다. 술은 좀 드신다고 하셔서.”
디저트까지 주문을 마치고도 끝에 몇 년산인지 뭔지 말을 했던 게 와인을 주문하느라 그랬던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술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지? 아, 그래. 결혼 정보 회사에 제출했던 자기소개서에는 술과 담배에 관한 문항도 있었다. 술을 즐겨 마시지는 않지만 못 마시는 편은 아니라 솔직하게 써서 냈었는데, 남자는 사전에 그것까지 다 확인한 듯했다.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어떤 와인을 골랐느냐고 물어야 하나? 하지만 뭘 골랐냐고 물어봤자 들어도 뭔지 모를 게 뻔했다. 희주가 알고 있는 술이라고는 소주와 맥주, 그리고 막걸리뿐이었으니까. 와인이라고는 편의점에서 파는 저렴한 와인밖에 아는 것이 없었다. 희주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와인에 대해 잘 아시나 봐요. 와인 좋아하세요?”
“아니요. 한 모금도 못 합니다.”
“……아. 그러시구나.”
와인은 한 모금도 못 하시는구나……. 희주는 상대의 눈치를 보다가 다시 빙긋이 웃었다.
“그럼 다른 주종은요?”
“술은 입에도 못 댑니다.”
“……아.”
온화한 목소리로 단호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희주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망했다. 어떤 말로, 어떻게 분위기를 이끌어 가야 할지 전혀 계산이 되지 않았다. 대학 때 소개팅이라도 한번 해 봤으면 이러지는 않았으려나. 역시 프로필 파일을 미리 봤어야 했다. 까먹을 게 따로 있지. 후회가 끊이질 않았다. 대화가 통 이어지지 않는 이 분위기에서 밥을 먹으면 아무리 비싸고 맛있는 밥이라도 체할 것만 같았다.
희주의 허벅지 위에는 여전히 휴대폰이 올라가 있었다. 그는 벼락치기라도 하는 심정으로 휴대폰을 힐긋거렸다. 속 좋게 웃고 있는 신입 사원 시절 맞선남이 화면 가득 비쳤다. 너 그럴 줄 알았다고 비웃는 것 같았다. 할 말이 없어 착잡해진 희주는 사진이라도 치우기 위해 스크롤을 아래로 내렸다.
“희주 씨는.”
흠칫. 대충 간단한 신상 정보라도 보려고 했는데 그 찰나를 못 버티고 남자가 말을 걸어 왔다. 희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번뜩 들었다. 하마터면 바닥 아래로 떨어뜨릴 뻔한 휴대폰을 부랴부랴 끄고 허벅지 밑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정리하는 사이, 운을 뗐던 남자가 뒷말을 이었다.
“이런 자리가 처음인가 봅니다.”
어떻게 알았지?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아니면 원래 성격이 낯을 좀 가리는 편입니까?”
“낯을… 가리는 건 아닌데요.”
희주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소심한 편이기는 하지만 낯을 가리는 건 아니었다. 설령 낯을 가린다고 해도 잘생긴 낯은 예외였다.
“음.”
남자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어쩐지 처연해 보이는 얼굴은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그럼, 혹시 제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런 거라면 정말 곤란하다는 표정이었다.
낯짝이야 마음에 들었다.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그는 정말 끝내주게 잘생긴 미남이었으니까. 하지만 제 말마따나, 결혼해서 얼굴만 빨아 먹고 살 건 아니었다. 얼굴이 밥을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외모를 보는 건 10대나 20대 초반에 족했다.
이제 서른에 접어들었다. 이상보다 현실을 바라볼 나이였다. 혹시 개인적으로 바라는 조건이 있느냐는 상담 매니저에게, 희주가 내놓은 조건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첫 번째, 벌이가 크지는 않더라도 안정적인 수입이 있을 것.
두 번째,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일 것.
세 번째, 책임감이 두드러질 것.
이건 외모를 본다고 알 수 있는 정보도 아니거니와, 매칭 매니저를 통해 1차적으로 선별됐다 한들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인지는 겪어 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사람은 만나 봐야 아는 거랬다. 제 조건에 맞는 사람이 나올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꾸역꾸역 시간을 내어 선 자리에 나온 이유였다. 고작 외모 하나 보고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판단할 수는 없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지금 당장 따질 수가 있나요?”
그래서 희주는 자신이 마음에 안 든다고 대답하면 크게 상처받을 사람처럼 앉아 있는 상대를 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날 언제 봤다고?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따져 물었다. 하지만 제법 공격적인 질문에도 남자는 태연했다.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봅니다.”
마침 다가온 직원이 애피타이저가 담긴 접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잠시 남자의 시선이 떨어졌다. 저도 모르게 멈췄던 숨을 훅 내쉰 희주는 숨을 고를 겸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음식이 담기는 면적보다 테두리 챙이 더 넓은 접시에 한 입 거리도 안 되어 보이는 애피타이저가 있어 보이는 척 올라가 있었다. 이걸 먹으라고 주는 건가? 이 와중에 허탈함과 어이없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을 본 남자가 소리 없이 웃었다.
“일단 저는 희주 씨가 마음에 들거든요.”
“제 어디를, 뭐를 봐서 그렇게 속단하세요? 저희 지금 만난 지 30분도 안 됐어요.”
새초롬하게 뜬 눈이 남자를 향했다. 팔짱을 낀 남자가 의자에 깊게 등을 기대어 앉았다.
“첫인상을 결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분이면 충분하다고 하던데요.”
까딱. 잘생긴 얼굴이 사선으로 기울어졌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당장 뭘 하자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다음 일은 다음에 생각하는 걸로 하고, 첫인상만 따져 봤을 때 제가 마음에 드셨는지 궁금합니다.”
희주는 입을 다물었다. 순간 기시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 왜 이거 어디서 겪어 본 것 같지? 왠지 모를 압박감이 느껴지는 게 꼭… 면접 보는 것 같은 느낌이……. 아. 하긴, 따지고 보면 맞선도 결혼을 위한 면접이다.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이 답은 정해져 있었다. 희주는 털털한 웃음을 비치며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마음에 안 들 이유가 있나요?”
외모를 안 본다고 했는데도 이 정도면, 외모를 본다고 했을 땐 어떤 상대가 나올지 슬슬 궁금해지려고 했다. 희주가 슬며시 웃음을 짓자 남자도 입꼬리를 당겨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조금 풀어진 분위기 틈을 타 남자가 먼저 식사부터 하자고 권유했다. 간에 기별도 안 갈 것 같은 애피타이저였지만 맛은 있었고, 맛있는 음식이 들어가니 날 선 기운도 점차 가라앉았다. 조금 예민했던 반응은 배고파서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맞선은 정말 처음이십니까?”
이어 수프와 샐러드, 스테이크가 줄지어 나왔다. 스테이크에 어울릴 거라고 했던 와인도 함께였다. 역시나 알아듣기 힘든 설명을 마친 직원이 물러가고 난 후, 남자가 문득 처음 했던 질문을 재차 물어 왔다. 희주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네. 처음이에요.”
그쪽은요? 희주는 별생각 없이 질문을 돌려주었다. 남자의 눈썹이 잠깐 위아래로 꿈틀거렸지만 희주는 스테이크를 써는 데 정신이 팔려 있던 터라 그의 짧은 표정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저도 처음입니다.”
뭐야. 진짜 어디 하자 있는 거 아니야? 한창 나이프 끝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희주가 손을 멈추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믿지 못하시는 표정이네요. 정말 처음입니다.”
“왜요?”
“음. 글쎄요.”
잠시 고민하던 남자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동안 일이 바빠서 누굴 만날 여유도 없었고… 또 도저히 약속을 잡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주말에도요?”
“예.”
“그 정도로 바쁘세요?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시길래…….”
어떤 미친 회사가 주말에도 사람을 굴려? 희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벌이가 괜찮아도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사람을 굴리는 회사에 근무하는 배우자는 사양이었다. 주말부부도 아니고 무슨. 주말부부는 주말에 보기라도 하지. 설마 여태 결혼을 못 한 이유가 이거였나? 희주는 속으로 의문하느라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 점차 흥미롭게 변해 가고 있다는 사실 역시 눈치채지 못했다.
“부모님께서 여행을 가시는 바람에 신경 써야 할 일이 배로 늘었거든요.”
남자의 말을 들은 희주의 눈이 번뜩였다.
“아아……. 가족 회사, 그런 건가 보네요?”
가족 회사에, 다른 이유도 아니고 부모님께서 여행을 가셨다는 이유로 바빴다는 걸 보면 늘 이렇게 바쁘다는 뜻은 아닌 듯했다. 그런 거라면 말이 달라지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인 희주는 다시 스테이크를 써는 데 집중했다. 그런 희주를 보는 남자의 눈빛에 오묘한 빛이 끼어들었다가 이내 잦아들었다.
“뭐, 그렇죠.”
“그렇구나. 어디로 여행 가셨는데요? 해외 여행 가셨어요? 혹시 그쪽 부모님께서 골프 치는 거 좋아하세요? 요즘 해외로 골프 치러 가시는 분들도 많대요. 저희 반 학생들 중에서도 부모님 따라서 필드 나가고 그런 애들도 있거든요.”
말을 마친 희주가 크게 썬 스테이크를 포크로 꾹 찍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오. 몇 번 씹다 말고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언젠가 여나연이 취업 턱을 낸다기에 따라갔다가 먹었던 스테이크보다 훨씬 풍미가 깊고 부드럽고… 하여간 맛있었다. 이래서 비싼 건 비싼 값을 한다는 건가.
“희주 씨.”
하다못해 야채마저 맛있어 보였다. 우물우물 열심히 스테이크를 씹으면서 이번에는 구운 버섯과 아스파라거스를 한 번에 포크로 쿡 찍었다. 그러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 둔 남자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왜요?”
뭐야……. 왜 이렇게 봐? 나 혼자 너무 먹기만 했나? 그래도 나름 질문도 던지고 할 말은 다 하는 중이었는데. 은근한 부담감에 희주가 상체를 뒤로 물렸다. 그 순간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그에게 질문했다.
“혹시 제 이름, 알고 계십니까?”
“이름이요? 그거야 당연히…….”
갑자기 그런 걸 묻고 그러냐는 투로 멀뚱한 표정을 짓던 희주가 이어 말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어……. 뭐더라. 넋이 나간 눈이 끔뻑끔뻑 느리게 열렸다 닫히길 반복했다.
“알고 계시면 이름으로 불러 주셨으면 좋겠어서요. 그쪽, 이런 호칭 말고.”
이름 외우는 것은 교사인 희주에게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은 물론이고 제 수업을 듣는 반의 아이들까지, 매년 못해도 100명이 넘는 아이들의 이름을 외워야 하는 게 숙명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개학 전부터 출석부를 붙잡고 밤새 노력한 결과였다. 고작 한 번 스치듯 들은 이름이 기억날 리가 없었다.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이미 남자의 미소는 짙어져 있었다. 결국 희주는 한숨과 함께 진실을 토로해야만 했다.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그게 아니라……. 희주가 난감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랫입술을 꾹 감쳐문 채 고민하다가 이내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두며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프로필 파일을 먼저 확인하고 왔어야 하는데, 바빠서 열어 볼 틈이 없었어요.”
짙은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는 표정이, 다행히 기분 나빠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에 용기를 얻은 희주가 스멀스멀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제까지 애들 중간고사였거든요.”
“네.”
“같이 일하는 분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사고요?”
“문제 하나를 잘못 출제하셨어요.”
“저런.”
그는 희주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짧게 호응을 해 주다가 마지막엔 제 일처럼 안타까워해 주기도 했다.
“그래도 시험지 인쇄 들어가기 전에 발견해서 다행이었어요. 나중에 발견했으면 반마다 돌면서 수정 사항 알려 주거나 성적 정정해야 되는 거였거든요. 또 시말서에, 여기저기 불려 가서 잔소리에……. 그래서 처음에 날짜도 미룬 거예요. 그래도 취소보다는 연기가 나을 것 같아서 매니저님 통해서 연락드린 거거든요…….”
온전히 제 잘못만은 아니며, 일부러 그런 것 역시 아니라고, 결국 취소하지 않고 오지 않았느냐는 피력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어찌 됐건 변명에 불과한 말들이었다. 잘못을 저지른 학생들에게 변명은 그저 회피일 뿐이라고 했던 게 자신인데, 정작 자신이 변명거리를 늘어놓고 있는 꼴이었다.
“이해하시죠……?”
그래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십사, 애처롭게 애원했다. 그러다 문득 저도 모르게 뱉은 말을 자각하곤 손으로 제 입을 턱 틀어막았다.
“아, 이건 제 직업병이에요.”
“괜찮습니다. 이해합니다.”
너무도 선뜻 나오는 답에 희주가 의외라는 듯이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아……. 감사합니다. 제가 애들 가르치다 보니 이 말이 말버릇처럼 입에 배어 버려서……. 친구들이랑 대화할 때도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그래요.”
하하, 하……. 억지로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씩 수그러드는 어색한 웃음을 갈무리한 희주가 테이블 아래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남자는 여전히 턱을 괸 채 제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를 보는 잘생긴 얼굴이 상냥히 웃고 있어서, 그래서 더 용기를 냈을지도 모른다.
“저, 그래서 그런데… 진짜 정말 죄송한 말인데요…….”
남자가 듣고 있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희주는 화끈거리는 귓가를 긁적였다. 참 염치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해야 하는 이 상황이 너무도 싫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제 무덤을 스스로 판 꼴밖에 안 되는데.
“성함… 다시 한번만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희주는 빠르게 뒷말을 덧붙였다.
“한 번만 더 말씀해 주시면, 그러면 진짜로…….”
까먹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진심 어린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바로 앞에서 큭, 웃음소리가 들렸다.
난데없이 터져 나온 소리에 희주가 동그랗게 뜨인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고, 손등으로 입을 막은 채였다. 분명 그에게서 나온 소리였다.
뭐지. 비웃는 건가? 당황한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기는 잦아들었다. 그러나 남자의 표정은 여전히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는 척 계속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꾹 억누르고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아, 죄송합니다. 큼, 처음엔 말씀이 없으시고 휴대폰만 보시기에 혹시 자리가 마음에 안 드시나, 억지로 나오셨나, 아니면 낯을 가리시나 했는데……. 이제 보니 아닌 게 분명한 것 같네요.”
뭐라고요? 희주가 낭패라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폰 보는 게 보였다고?
“아……. 다 보였나요?”
“네.”
“그랬구나…….”
만약 상대가 저와 동종 업계 종사자였다면 이런 식으로 유쾌하게 말하지 않고 짐짓 엄하게 ‘다 보인다’라고 말했을까? 아니면 ‘가지고 나와’라면서 손바닥을 내밀었을까. 놀란 마음에 흐물흐물 풀어진 정신머리가 현실에서 벗어난 상상만 해 댔다.
“혹시 급한 일 있으시면 그냥 확인하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없어요, 급한 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상대는 자신이 휴대폰으로 뭘 보고 있었는지까지는 짐작하지 못한 듯했다.
다시 전달받아 이번에는 무사히 다운로드 받은 프로필 파일을 당사자 앞에서 봐야만 했으니 급하기야 했다. 그런 제가 어찌나 간절하게 보였기에 저런 배려를 해 줄 정도일까.
“급한 건 지금이죠……. 빨리 성함이나 다시 알려 주세요…….”
밀물처럼 우르르 밀려오는 쪽팔림에 희주는 지그시 이를 악물고 웃었다.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할 만큼 민망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남자는 꽤 기분이 좋아 보이니 그저 저만 견디면 그만이었다.
“강현우입니다. 서른둘이고요.”
“전 권희주예요……. 서른이에요.”
“네. 알고 있습니다.”
아, 그렇지. 알고 계셨지.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그랬나. 남자가 아무 의미 없이 내뱉었을 말에 괜히 찔려서 저도 모르게 죄송하다고 할 뻔했다.
“통성명 다 했으면…….”
웃느라 가늘게 접혔던 눈이 테이블 위, 아직 남아 있는 음식들을 향했다.
“일단 식사부터 마저 할까요?”
다 식겠어요. 강현우가 빙긋이 웃었다.
* * *
집에 도착하니 해는 저물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따뜻한 물로 씻고 나온 희주는 대충 물기만 털어 내고 털썩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이불이 흐트러지면서 옅게 배어 있던 페로몬이 풀썩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
모로 누운 몸을 바로 하기가 귀찮아서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봤다. 피로 때문인지 온몸이 노곤했다. 아니면 와인 때문일지도 모른다. 간단히 한 잔 정도만 곁들여 마시려고 했는데, 혼자 거의 한 병 가까이 비워 버렸으니 지금까지 취기가 남아 있는 게 당연했다.
맞선남, 그러니까 강현우의 말대로 레드와인은 스테이크와 퍽 어울렸다. 달짝지근했던 소스에 비해 레드와인은 쌉싸름해서, 그 조화가 제법 좋았다.
방금 전 양치를 한 탓에 혀에는 싸한 치약 맛만이 남아 있었다. 혀끝 어딘가에 남아 있는 레드 와인의 맛을 떠올리면서, 희주는 자연스럽게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첫 맞선이었다.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을 함께 앉아 있었다.
어색하고 불편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대화는 좀처럼 끊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에는 거리낄 것도 없다던데―물론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그래서 그런가? 아무튼 한 번 쪽팔린 꼴을 겪고 나니 긴장이 풀렸는지 자연스럽게 말이 술술 나왔다.
강현우가 대화를 리드한 덕도 있었다. 그는 배려심이 많은 알파였다. 희주가 프로필 파일에 적혀 있었을 법한 것들을 물어도 전혀 기분 나빠하는 기색 없이 하나하나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궁금한 것을 묻는 척, 슬쩍 자신에 대한 정보를 흘리기도 했다. 덕분에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은 디저트가 나올 때쯤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강현우에 대해 꽤 많이 알게 되기도 했다. 그에게는 다섯 살 어린 여동생이 있는데 두 남매는 상당히 닮았다는 점과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풀 정도로 운동을 정말 좋아하는 점, 영화 보는 걸 좋아하고 술과 담배는 싫어한다는 점 등. 그 가운데 놀라웠던 점은, 출신 대학이 같다는 점이었다.
무심코 대학교 이름을 물었다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말요? 전공이 뭐였는데요?”
“경영입니다. 희주 씨는 국어교육 전공이셨겠네요.”
“네, 그렇긴 한데……. 이상하다. 왜 학교 다니면서 한 번을 못 봤죠?”
희주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갸웃했다.
학교 부지가 워낙 큰 편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녔다면 오며 가며 한 번 정도는 마주칠 법했다. 경영대라면 사범대 건물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편도 아니었고, 교양 강의를 듣느라 한 학기 내내 경영대 건물을 들락거린 적도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강현우 같은 알파라면 제가 기억을 못 할 리가 없었다.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강현우가 무언가 알아챘다는 듯 풀어진 얼굴로 말했다.
“중간에 어학연수를 갔거든요. 아마 희주 씨가 입학했을 무렵에 전 미국에 있었을 겁니다.”
“교환 학생 프로그램이면… 1년 아닌가요?”
“개인적인 욕심으로 2년 더 있었습니다.”
“3년이면 저 한창 임용 준비한다고 도서관에 박혀 있었을 때네요.”
“특별 열람실에 계셨겠네요.”
“어? 아시는구나. 맞아요.”
동문이었구나. 신기하다는 듯 박수를 짝 치며 좋아하는 희주를 보며, 강현우 역시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오래간만에 학교 이야기도 하고, 그밖에 다른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식사가 마무리되어 갈 때쯤, 디저트를 준비해 드리겠다며 테이블 담당 직원이 다가왔다. 이미 잔뜩 배가 부른 상태였지만 블루베리 콤포트를 잔뜩 끼얹은 달달한 치즈케이크에 고소한 아메리카노의 조합은 도통 무시할 수가 없었다.
강현우는 제 몫의 케이크를 양보해 주는 것도 모자라 홀 케이크까지 따로 사서 쥐여 주었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이미 계산까지 하고 밖으로 들고나오기까지 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렇게 받은 케이크는 냉장고 두 번째 칸 안에 들어가 있었다.
꽤 비쌌을 텐데.
모 호텔의 망고 빙수가 이제 10만 원에 가까운 가격으로 판매된다고 했다. 그런 걸 누가 사 먹냐고 코웃음을 쳤었는데, 자신이 그 ‘누가’가 되어 있었다.
“…….”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자리였다. 아니, 좋았다고 해야 했다. 시작하자마자 망했다는 생각을 한 것 치고는 분위기도 좋았고, 위장이 놀라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호화로운 식사까지 했으니까. 대화도 제법 잘 통하는 편이었고.
“그런데 뭐가 이렇게 불편하지?”
씁, 혀를 찬 희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듯 묘하게 불편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희주는 몇 번이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불편한 티를 냈다. 옆자리가 비어 있어서 망정이지, 만약 누군가 앉아 있었더라면 가만히 좀 있어 달라는 핀잔을 들었으리라. 희주는 하얀 천장을 올려다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돈. 그게 희주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하 호호 웃느라 바빠 계산을 깜빡 잊고 있었다. 뒤늦게 희주가 지갑을 꺼냈을 때는 이미 강현우가 모든 계산을 마친 뒤였다. 당황하여 무어라 말도 못 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희주에게, 강현우는 ‘나갈까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카드가 들려 있는 손을 아래로 내려 주었다.
잠깐 닿았다 떨어진 그의 손은 그의 태도만큼이나 따뜻했었지만, 아무리 분위기가 좋았다 한들 염치없이 다 얻어먹고 와 버린 것이 통 마음에 걸렸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던 희주가 미적미적 몸을 뒤집었다. 대충 침대에 던져 놨던 휴대폰을 켰다. 몇 번 손가락을 놀리자 ‘강현우 씨’라고 저장해 둔 열한 자리 숫자가 떠올랐다. 강현우가 직접 희주의 휴대폰에 찍어 준 그의 연락처였다.
강현우는 시간이 늦었다며 데려다주겠다는 호의를 내비쳤었다. 밥까지 얻어먹은 마당에 차까지 얻어 타면 정말 염치없어 보일까 봐 희주는 그의 호의를 한사코 사양했다. 부담스럽게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강현우는 어딘가 아쉬운 듯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고, 그럼 도착하면 연락 달라며 제게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
아니, 알려 주려고 했다. 재킷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 조그마한 명함 지갑을 꺼냈던 그는 낭패감에 휩싸인 표정으로 민망해했다. 왜 그런가 하여 힐긋 곁눈질로 살펴본 지갑은 어울리지 않게 텅 비어 있었다.
“명함이 없네요. 아무래도 출장 갔을 때 다 쓰고 채우는 걸 깜빡 잊은 모양입니다.”
“아…….”
“실례가 안 된다면, 제 번호를 알려 드리고 싶은데…….”
휴대폰을 이불 위에 반듯하게 내려 두고, 희주는 턱을 괴었다. 으으음. 길게 침음하며 액정을 노려보았다.
“내가 마음에 들었나?”
집에 도착하기 전, 매칭 매니저와 여나연, 그리고 조한희로부터 각각 어땠냐는 메시지를 받은 터였다. 어땠더라. 잘 모르겠다.
사람은 좋아 보였다. 친절하고, 상냥하고, 온화하고……. 처음 만나는 자리인데도 대화도 잘 통했고, 가족들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니 가족들끼리 사이도 좋아 보였고. 좀 바빠 보이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일도 열심히 하는 것 같고. 맞아. 술, 담배는 일절 안 한다고도 했다. 대학교 동문이라는 공통점도 있는 데다가…….
“하, 씨……. 잘생겼잖아.”
솔직함을 토로한 희주가 푹 이불 위로 얼굴을 묻었다. 데구르르. 옆으로 굴러 다시 등을 대고 누워 버린 그는 강현우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민에 잠겼다. 선이 굵직굵직해서 마음만 먹으면 천장에 그의 얼굴을 그려 낼 수 있을 것 같다.
몇 번 더 만나 볼까.
단 한 번의 매칭,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결혼이 성사될 확률은 0에 수렴하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는 매칭 매니저의 조언이 떠올랐다.
그래. 몇 번 더 만나 보고, 아닌 것 같으면 다른 알파를 소개받으면 되는 거다. 강현우도 싫은 눈치는 아니었던 것 같다. 살짝 불미스러운 일이 있기야 했지만, 그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른 자신에게 강현우는 부득불 연락처를 주려고 했지 않나. 선뜻 데려다주겠다고도 했고.
생각을 마친 희주는 파드득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낚아채어 한 자 한 자 신중하게 자판을 두드렸다.
/message*me/
안녕하세요.^^ 저 권희주입니다. 잘
들어가셨나요? 저는 집에 잘 도착했습니다.
오늘 만남 정말 즐거웠어요.
/message*me/
오타가 없는지 여러 번 확인한 끝에 전송 버튼을 눌렀다. 금방 새로운 채팅창이 생겼다. 이게 뭐라고, 진이 쭉 빠져 버리는 느낌이다. 다시 벌러덩 뒤로 드러누워 숨만 폭폭 내쉬었다.
착각은 아니겠지. 설마. 먼저 연락 달라고 했던 건 상대였으니 제게 퇴짜를 놓는 답장은 오지 않으려니 싶었지만,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잉.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진동했다. 희주는 허겁지겁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message*you/
안녕하세요. 희주 씨.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message*you/
짤막한 메시지지만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어느새 희주의 두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뭐라고 답장하지? 케이크 감사하다는 말을 먼저 해야 할까? 엎드린 그의 두 다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