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1권)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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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권희주의 장래 희망은 회사원이었다. 또래 친구들이 대통령이나 과학자, 운동선수, 소방관 같은 직업을 외치며 자신만만해할 때, 희주는 홀로 꿋꿋하게 회사원을 외쳤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게 가장 무난하고 평범했기 때문이었다.

희주는 무엇을 하든 늘 무난하고 평범한 것을 골랐다.

예를 들면 이렇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보육원에는 후원받은 인형이나 장난감 따위의 선물이 찾아온다. 이럴 때, 가장 먼저 선물을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이 있어도 희주가 고르는 건 로봇 피규어도, 무선 조종 자동차도 아닌 큐브였다.

하얀 플라스틱에 반짝이는 스티커 몇 장이 붙어 있는 게 다인 데다 이리저리 돌려 색을 맞추기만 하면 되는 그런 시시한 장난감. 그건 희주보다 더 나이가 어린 애들도 탐내하지 않는 장난감이었다.

보다 못한 수녀님이 하나를 더 고르라고 부추기면 희주는 연필을 골랐다.

공부하려고요.

아직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일곱 살짜리가 공부를 하겠다면서 연필을 고른 것이 기특해 커서 뭐가 되고 싶니, 하고 물으면 희주는 이렇게 대답했다.

회사원이요.

희주는 자신이 평범함에 집착하는 건 아마 보육원에 들어오기 전, 그다지 좋지 못했던 가정 환경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햇살 한 줌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던 반지하 단칸방, 다 뜯어진 벽지 속에는 새카만 곰팡이가 우글우글 징그럽게 펴 있고 싱크대는 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아 파리가 들끓었다. 햇볕이 닿지 않아 늘 꿉꿉한 냄새가 나는 방을 환기하려 창문을 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흙먼지가 고스란히 집 안으로 들어오기 마련이었다.

집이라고 하기에는 썩 좋지 못한 환경이었던 곳에, 가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불안정했던 이들이 세 들어 살았다. 아빠는 도박 중독자였으며, 엄마는 그런 아빠 때문에 인생을 망친 불쌍한 여자였다. 화장실을 제외하고 공간의 구분이 모호했던 그 집에서 두 사람이 싸우기라도 하는 날이면 어린 희주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척을 해야만 했다.

아, 다행히 아빠가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런 것도 다행이라고 하는 것도 우습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사라졌다. 엄마는 아빠가 돈을 벌기 위해 미국에 갔다고 했지만, 술에 취해 드러누워 자다가 동사하지 않았을까 하는 게 희주의 추측이었다. 그땐 엄청나게 추운 겨울이었으니까. 만약 그때 죽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도박에 빠져 죽었으리라 확신했다.

늘 술 비린내와 담배 묵은내를 풍기던 아빠가 사라지고 난 뒤, 조금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집안 형편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형편에 생명 보험을 들어 둘 돈은 없었을 것이다. 설령 있었다 한들 아빠의 도박 비용으로 다 써 버렸을 테고. 애초에 희주의 출생 신고도, 두 사람의 혼인 신고도 하지 않아 법적으로는 남남인 기묘한 가족이었다.

홀로 남은 엄마는 어떻게든 돈을 벌어 희주를 먹여 살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가난과 불행은 늪처럼 엄마를 끌어당겼다. 고단한 삶에 지친 엄마는 매일 밤 희주를 끌어안고 울거나, 자는 희주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짓곤 했다.

희주야. 엄마랑 놀러 갈까?

다른 기억들은 물 탄 듯 희미하기만 한데 이날의 기억은 어제의 것처럼 선명하다. 그날은 5월 5일, 어린이날이었다.

희주, 놀이공원 가고 싶지 않아?

엄마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새 옷을 희주에게 입혀 주었다. 아마 부촌의 헌 옷 수거함을 뒤져서 가져온 옷일 터였다. 그러고는 높디높은 달동네를 걸어 내려와 버스를 탔다. 놀이공원이라는 말에 잔뜩 신난 자신과는 달리 엄마는 평소처럼 우울한 얼굴로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었던 것 같다.

확신하건대 그날이 가장 즐거운 하루였다. 신나는 음악과 휘황찬란한 조명으로 가득한 놀이공원에서 희주는 엄마의 손을 잡고 회전목마도 타 보고 퍼레이드도 구경했다. 사 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엄마는 햄버거도 사 주었고 솜사탕도 사 주었다. 사진은 찍지 않았다. 엄마에게는 그 흔한 휴대폰도 없었기 때문에.

해가 완전히 저문 후, 집에 갈 시간이 되자 아쉬움에 발이 자꾸만 느려졌다. 엄마는 빨리 오라며 재촉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더니 희주와 눈높이를 맞추는 거였다.

희주야. 여기 잠깐 있을래? 엄마가 가서 아이스크림 사 올게.

엄마는 볼품없이 마른 손으로 희주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고, 아이스크림을 사 오겠다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희주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스크림 하나 사러 가면서 몇 번씩이고 자신을 돌아보는 엄마에게 손도 흔들어 주었다. 그렇게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고, 아이스크림도 먹을 수 없었다.

누가 봐도 버려진 애로 보였을까. 희주는 누군가의 신고로 놀이공원 내 미아보호소로 옮겨졌다. 가 보니 저와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들이 여러 명 앉아 있었다. 우는 애들도 있었고 의젓하게 앉아 있는 애들도 있었는데, 희주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부모의 손을 잡고 돌아갔다.

서울에서 온 다섯 살 권희주 어린이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보호자 분께서는 정문에 위치한 미아 보호 센터로…….

딸랑. 문이 열릴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쳐다봤다가도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하기를 몇 번씩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방울 소리가 들려도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뭐, 아이 정보도 그렇고 부모 정보도 그렇고 나오는 게 없네요. 아무래도…….

희주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장난을 치면서 어른들끼리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혹시나 제가 듣기라도 할까 봐 어른들은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지만, 뒤에 이어지는 ‘버려진 것 같아요’라는 말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언제 온 건지 모를 경찰까지 모두가 측은하다는 눈빛으로 희주를 쳐다보았다. 그런 시선을 받는 건 익숙했지만, 엄마 없이 혼자 감당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희주는 부러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속이 무뎌졌던 건지 이상하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희주라고 했지?

갈 곳 없는 희주에게 손을 내밀어 주던 사람이 있었다. 원장 수녀님이었다.

수녀님이랑 같이 갈까?

엄마에게서도 본 적 없는 따스한 미소에, 어린 희주는 기꺼이 그 손을 잡기로 했다.

그렇게 희주는 사랑의 집에 입소했다. 형편이 넉넉한 곳은 아니었지만, 전에 살던 곳에 비하면 진정 집다운 공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처음 입소할 때만 해도 말수가 적고 소극적이었던 희주는 사랑의 집에서의 생활에 빠르게 적응하면서 점차 밝은 성격으로 바뀌어 갔다.

처음에야 잘 먹지 못해 비쩍 곯아 있었지, 시간이 지나 살이 붙고 나니 입양 문의가 빗발치기도 했다. 그러나 희주의 삶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하필 열성 오메가로 발현한 탓이었다. 형질자에게 필요한 검진이나 억제제 등의 비용은 현실적인 문제였고, 특히 열성은 페로몬도 약하면서 컨트롤에 미숙하고, 또 외부 자극에 약하다는 이유로 입양 기피 대상이었다. 그렇게 희주는 다른 친구가 저를 대신하여 입양 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시간이 지나자 입양 문의는 뚝 끊겼다. 어릴수록 입양이 잘 되는 법이라, 나이가 두 자릿수에 접어든 희주를 선뜻 데려가려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는 섭리와도 같았다. 그렇게 일찍이 철이 든 희주는 나이가 차 자진 퇴소하게 될 날을 셈과 동시에 자립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엄마, 아빠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희주는 번듯한 직업을 갖기 위해 공부에만 매달렸다. 다행히 공부 머리가 있어서 성적은 곧잘 나오는 편이었다. 사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곧장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분야를 막론하고 회사원이 되는 것이 막연한 꿈이었는데, 서른이 된 지금 희주의 직업은 고등학교 교사였다. 보육원 아이들에게 종종 공부를 가르쳐 주던 것이 꽤 적성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조금씩 돈을 모아 저 하나 발 뻗고 누울 집도 마련하고, 퇴근 후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것이 소소한 일상이 되어 갈 무렵, 문득 느꼈다. 결혼을 해야겠다고. 아무도 없는 집에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는 것이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질 때쯤 희주는 결심을 굳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남들처럼 화목하고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그런 가정을 이루려면 배우자를 잘 만나야 될 텐데, 문제는 구태여 연애 따위를 하느라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결국 희주는 결혼 정보 회사를 찾아갔다. 꽤 큰돈이었지만, 돈으로 시간을 산다고 생각하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금액이었다. 상담 당일, 비어 있는 가족 관계란을 확인한 매니저는 16년이라는 경력에 맞지 않게 얼굴 근육을 덜덜 떨더니 출신 대학과 직업, 현재 모아 둔 재산을 확인한 후에는 눈에 띄게 밝아진 표정으로 상담을 이어 갔다.

희주는 내심 안심했다. 바닥이었던 자신의 삶을 중간까지 끌어 올렸다는 확인을 받은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났을까. 첫 맞선 자리가 잡혔다. 하필 한창 시험 출제 기간에 전화가 온 터라 대충 알겠다, 좋다는 말로 얼렁뚱땅 잡은 자리였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해야 할지, 공동 출제를 맡은 동료 선생이 오류 범벅의 문제를 내 버리는 바람에 수습하는 데 온 정신을 쏟아야 해서 결국 희주는 상대에 대한 정보는 단 한 줄도 읽지 못하고 맞선 자리에 나갔더란다.

예의가 아니란 건 알았지만 상황이 난처했다. 맞선 장소로 향하는 동안,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자포자기의 마음이 함께였다.

일시는 토요일 오후 5시, 장소는 서울의 모 호텔 고급 레스토랑. 시간과 장소는 담당 매칭 매니저가 알아서 중재를 통해 예약해 주었다. 이래서 돈이 좋군. 중얼거리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단정해 보이는 옷을 골라 입고 외출에 나섰다.

“권희주 씨?”

남들 하는 만큼 적당히, 평범하게. 그동안 변함없던 권희주의 인생 모토는 어떤 한 남자에 의해 바뀔 위기에 처하고 만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강현우라고 합니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토요일 저녁, 난생처음 가 본 맞선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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