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 새로운 시작 >
꿈? 일리 없지. 지긋지긋하게도 익숙한 상황이다. 이것과 똑같은 상황을 수만 번 반복해서 경험했다. 그런 나이니만큼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이건 꿈이 아니다.
그럼 도대체 왜? 그락카르와 나의 연결은 끊어진 것 아니었던가. 끊어졌다고 생각했기에 죽음을 두려워했고, 그 두려움에도 무리해서 그락카르를 죽이러 간 것 아니었던가. 그 모든 게 허사가 되었다고?
아냐. 혹시 모른다. 그락카르를 죽인 후 모종의 충격으로 인해 내가 쓰러졌을 수도 있지 않나. 그런 나를 해역이와 성전사들이 수습했고, 내 침대에 눕혔을지도 모르는... 건 아니겠군.
“코오...”
그럴 경우 내 옆에 누워있는 수인이가 설명이 안 된다. 아무리 나와 비서들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는 하지만 환자 옆에 전라로 누워있는 건 좀 이상하잖아? 그리고 확실히 어제 수인이와 잠자리에 들었었기도 하고 말이야.
그래. 다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내가 그락카르를 죽임으로서 둘 사이의 뭔가가 완전히 사라졌고, 그 뭔가가 사라지면서 모종의 폭발 비슷한 걸 해서 다시 하루를 시작하지만 그 그락카르는 없는 하루를 다시 시작한 거지. 비슷한 이야기를 영화에서 본 거 같다.
그래. 그럴 거야.
***
“크흐.. 이번엔 던지지 마라. 너 주려고 만든 무기니까.”
빌어먹을. 멀쩡히 살아있다. 멀쩡히 살아있는 정도가 아니라 나처럼 어제의 ‘오늘’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어제 싸웠던 장소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뿐만 아니라 도끼를 던지며 다른 대사를 뱉기까지 했다.
“너... 왜 안 죽는 거냐.”
“모르겠다.”
당연한 대답이 나왔다. 의미 없는 질문을 던졌다. 내가 모르는 걸 저 무식한 놈이 알 리 없는데.
“카록께 갈 수 있으니 너와 싸우다 죽는 것도 괜찮았지만...”
“...”
“크흐.. 다시 싸우는 건 더 괜찮군.”
그래. 빌어먹을. 내 팔자가 이렇지.
“크워어어어어어억!”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다.
***
또 새로운 ‘오늘’이 시작됐다.
그 검은 구멍은 뭘까. 이번엔 미리 대비하고 모든 힘을 다 끌어내 저항했는데 소용이 없었다. 그 구멍은 작은 먼지를 빨아들이는 대형 청소기처럼 날 쉽게 빨아들였다.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
그 힘의 크기... 마치 신. 그래. 신의 힘 같았다. 할 일이 생각났다.
“오늘 원정은 취소해주세요.”
-네?
수화기 너머로 벤센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텔님을 뵈어야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일정을 무기한 연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취소가 아니라 연기다. 이제 수많은 연구진과 성전사, 관련 직원들이 무기한 대기할 것이다. 전부 고급 인력이기에 대기 시간이 길어질수록 천문학적인 손실을 보겠지만 지금 내가 그런 걸 신경 쓰게 생겼나.
***
“모르겠구나.”
“네?”
비텔님의 대답은 내 예상과 다른 내용이었다. 당연히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실 거라 생각했는데.
“한 번 봐야겠구나. 말만 들어서는 모르겠다.”
‘보다니. 어떻게?’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비텔님께서 내 앞에 서 계셨다. 움직임은 당연히 보지 못했고, 작은 힘의 파동도 느끼지 못했다. 역시 신이시다.
비텔님의 손이 머리에 닿았다. 낵 기억을 읽으시려는 건가. 혹시라도 비텔님께 방해될까 두려워 자연스럽게 생기는 저항력을 최선을 다해 흩어버렸다. 비텔님의 힘이 머리에 깃드는 게 느껴졌다.
내 힘이 아닌 다른 이의 힘이 몸에 침투했음에도 조금도 불쾌하지 않고 상쾌했다.
“이상하구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구나.”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최선을 다했는데도 저항력이 약간은 남아있었다. 혹시 그 때문에 비텔님께서 내 기억을 못읽은 것일 가능성이...
“아니다. 네 힘의 근원이 나다. 내 힘에 내가 방해받을 것 같으냐. 이미 네 탄생부터 지금까지의 기억 모두를 훑어봤다. 그런데 네가 말한 ‘오늘’의 반복이나 검은 구멍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구나.”
어째서? 내 탄생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을 봤다면 ‘오늘’의 반복을 보지 못할 수가 없는데? 내 삶의 반이 ‘오늘’의 반복으로 채워져 있을 테니 말이다.
“진실이구나. 넌 정말로 검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 ‘오늘’을 반복했다고 믿고 있어.”
“그게 진실이니까요.”
비텔님께서 다시 머리에 손을 올리셨다. 그분의 힘이 머리를 통해 들어와 전신에 깃들었다. 상쾌함이 느껴졌다가 비텔님의 기운이 강해지면서 쾌감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쿨럭.”
피를 토했다. 피? 어째서 피가?
“흠... 어떤 정신 조작도 느껴지지 않는구나.”
“컥. 커헉.”
피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고통은 전혀 없었다. 피를 토하는 것까지도 쾌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혹시 정화? 그래. 비텔님의 기운이 내 몸의 더러운 것들을 씻어주시는 거겠지. 이 피는 더러운 기운이 뭉친 것이고.
“한상 너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그걸 볼 수가 없고, 누군가의 정신 조작이 가해진 흔적이 없어. 흥미롭구나.”
정말 모르셨던 겁니까? 제가 ‘오늘’을 반복했으니 신께서도 반복했거나 반복되는 절 지켜보고 계셨을 거라 생각했는데.
“난 반복되는 ‘오늘’을 느껴 본 적 없단다. 그리고 분명 너는 그렇게 믿고 있고, 그렇게 믿게 된 어떤 이유가 있거나, 실제로 경험했을 텐데. 아무리 살펴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다니. 정말 흥미롭구나.”
비텔님께서 두 번째 ‘흥미롭다.’란 말을 하셨다. 그리고 순간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셨는지 그분의 감정 일부분이 내게 흘러들어왔다. 언제나 그렇듯 그분의 감정 일부분이라도 느끼는 것은 내게 극상의 쾌락을 안겨주었다.
“미안하다.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어. ‘오늘’이 반복된다니. 너무 궁금하구나. 혹시 ‘그분’께서 힘을 쓰신 걸까?”
극상의 쾌락 속에서도 ‘무엇이 미안하시다는 건가요? 그리고 그분은 누군가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침대에서 눈을 떴다.
“......”
방금 전까지 몸을 움직이는 게 힘들 정도로 강렬하게 느껴졌던 쾌락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잠들어있는 수인이가 보였다. 죽은 거다. 죽어서 다시 ‘오늘’을 시작한 거다.
왜 죽었는지는 고민할 것도 없다.
비텔님이 죽인 거다. 피를 토한 건 내 몸이 정화되고 있던 게 아니라 내 몸이 부서지고 있던 거였다. 쾌락은 고통을 숨기기 위한 조치였다.
왜 죽이셨는지도 알았다. 비텔님께선 자비로운 선한 분이시지만...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신다. 궁금하셨겠지. 앞으로 내가 할 일을 지켜보는 것보다 내게 일어나는 일을 더 알고 싶으셨던 거다.
그리고 그걸 알기 위해 하신 조치가 내가 버틸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던 거다. 그래서 내가 죽은 거겠지.
최대한 담담하게 생각하고, 분석하고는 있지만...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나갔다. 그리고,
“크흑.”
최대한 소리 죽여 오열했다. 난 배신당했다. 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세상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비텔님께 배신당했다.
모든 것을 바칠 수 있고 당연히 목숨마저도 바칠 수 있었지만 상황이 다르다. 비텔님을 위해 전쟁을 수행하던 중 강적을 만나 죽는 것은 괜찮다. 내가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다른 신에 의해 죽는 것 또한 괜찮다.
하지만... 하지만 비텔, 차마 그냥 이름을 부르지는 못하겠다. 비텔님께서 그저 궁금하다고 날 죽이는 것은 안 된다. 그저 변덕으로 날 죽이다니. 비텔님은 절대 내게 그래서는 안 된다.
비텔님께서 날 위해 많은 걸 해주셨지만 나 또한 비텔님을 위해서 많은 걸 해드렸다. 내가 아니었으면 아베네고의 죽음과 함께 영원한 외톨이가 되셨을 그분께 70억의 신도를 선사해드렸건만, 다른 신들의 손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 힘을 안겨드렸건만...
휘몰아치는 강렬한 배신감에 손이 덜덜 떨렸다.
당장이라도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따지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난 알아버렸으니까. 그분이 날 얼마나 가볍게 생각하는지 알아버렸으니까. 내가 따지는 순간 내가 왜 따지는지 궁금해 할 것이고 그걸 알기 위해 얼마든지 날 죽일 것이다.
기운을 뿜어냈다. 그리고 손에 압박을 가해 손 떨림을 멈췄다. 내부의 기운을 움직여 눈물샘을 막아 눈물 흘리는 것도 멈췄다.
비텔님은 항상 날 지켜본다. 내 생각까지 듣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강하게 생각하는 것은 알고 계신 것 같지만 그 외의 자잘한 생각은 대화를 나누다보면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하튼 내 행동은 무조건 지켜보고 계시니 뭔가 의심이 갈만한 행동은 자제해야, 아니. 이미 늦었다.
이미 오열했고, 이미 손을 떨었다. 항상 날 지켜본 비텔님은 이 모습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끼셨을 거다. 분명 오열하거나 손을 떨 일이 없는데 그랬으니 말이다. 지금 당장 날 불러 그것을 알아봐도 이상하지 않다.
위험하다.
강하게 위기감이 느껴졌다. 일단 비텔님 앞으로 가면 지금의 나는 이 사실을 숨길 수 없다.
“벤센. 당장 차원문 열 준비하세요.”
-지금 당장 말씀이십니까?
“네. 최대한 빨리 열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벤센이 ‘차원문 개방 준비에 1시간 걸린다고 합니다. 그 전까지 성전사장과 고위성전사를 대기 시켜두겠습니다.’라고 연락 왔다.
나도 바로 차원문으로 출발했다. 뭔가 하고 있을 때는 비텔님도 나를 부르지 않는다. 비텔님께서 날 부르지 않도록 뭔가를 계속해야 한다.
차원문에 도착해 쓸데없이 연구진에게 질문하기도 하고, 그들이 일하는 것을 구경했다. 시간이 정말 안 갔다. 1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신을 속여야한다니. 보이지 않는 전지전능한 존재와의 잘하고 있는지 잘못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싸움인지라 더욱 힘들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준비 끝났습니다. 이제 차원문을 열...”
“오늘따라 이상하구나. 무슨 일이 있느냐?”
다 됐다고 생각한 순간, 난 비텔님의 옆에 와 있었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서 눈을 떴다.
이번엔 최대한 티내지 않도록 조용히 일어나 평소와 같은 행동을 했다.
지금의 나로선 일단 비텔님 앞으로 가는 순간 끝이다. 생각을 통제할 수 없으니까.
날 불러낸 비텔님이 내게 질문했고 난 그 질문에 대한 생각을 끊을 수 없었다.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너무 이상한 생각을 하기에 비텔님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직접 날 조사하셨다. 그리고 ‘정말 흥미롭구나.’라는 말과 함께 다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니 지금은 최대한 비텔님 앞으로 가지 않아야 한다. 비텔님도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웬만하면 나를 부르시지 않는다. 그러니 비텔님 앞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최대한 비텔님께서 날 부를 일이 없게 해야 한다.
첫 번째 ‘오늘’을 떠올리며 그때 했던 행동 그대로 했다. 그때는 비텔님께서 날 부르지 않았었으니까. 그리고 비텔님의 부름 없이 이세계로 넘어가는 데 성공했다.
다시 그락카르를 만났다.
또 보자마자 도끼를 던졌다. 몇 번 경험한지라 쉽게 잡았다. 생각해보니 애초에 날 공격하겠다고 던진 게 아닌 거 같다. 받으라고 일부러 살짝 힘을 뺀 느낌이랄까.
“네가 쓰는 도끼보다 좋다. 이번엔 사용해라.”
이게 미로크 투보다 좋다고? 새롭게 발견된 수십 개의 신소재를 조합해 만들어낸 미로크 투보다?
“미로크 못지않은 도끼다.”
“잘 사용하마.”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실제로 내 미로크 투는 미로크와 부딪쳐 부서지진 않았어도 날이 많이 상했었다.
“크흐.. 그럼 오늘도 한 번 어울려...”
“잠깐.”
또 덤비려는 그락카르를 멈췄다.
“왜 그러냐.”
“일주일에 1번. 앞으로 싸움은 일주일에 한 번만 하자.”
그락카르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그래. 마음에 안 들겠지. 네 놈은 ‘오늘’을 영원히 반복해가며 나와 싸우고 싶겠지. 나도 이제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알기에 그락카르와 싸우는 것이 부담 없긴 하지만 그락카르와 달리 난 싸움을 즐기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을 영원히 반복해선 미래가 없잖아.
“만약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거다.”
“크흐.. 오지 마라. 내가 찾아가면 된다. 노르쓰 우르드가 곧 문을 열 테니까.”
그렇군. 이쪽도 지구로 향하는 문을 열 준비를 거의 마친 건가.
“넌 나를 지켜봤고 우리 세계에 대해 알고 있겠지. 비행기, 배, 기차 등. 그걸 사용해 도망치는 날 잡을 자신 있나? 난 너와 싸우지 않고 영원히 도망 다닐 거다.”
“그건 전사답지 않은 행동이다!”
“난 전사가 아니니까.”
“비겁한 인간 놈! 크워어어어!”
열 받았는지 덤벼온다. 적당히 방어하면서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네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난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거고 널 영원히 피해 다닐 거다.”
“크후훅!”
콧김을 크게 뿜어내며 공격을 멈췄다. 내가 맨날 무식한 놈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단순하긴 해도 무식하진 않다.
“일주일에 10번.”
흥분을 가라앉힌 그락카르가 입을 열었다. 흥정을 걸다니. 오크 전사 그락카르가 흥정을 걸다니. 도대체 얼마나 싸움을 좋아하는 거냐.
“10번은 너무 많아. 2번. 그리고 매달 네가 원할 때 한 번 더 싸워주지.”
“그...”
“더 이상 요구하지 마라.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해준 거다.”
그락카르와의 싸움은 내게 조금도 도움 되지 않는다. 재미도 없고 귀찮고 힘들기만 할 뿐이다.
“대신 너는 우리와의 싸움에 나서서는 안 돼. 나도 나서지 않을 거다.”
“그럴 수 없다. 곧 형제들이 문을 열어서 너희 세계로 갈 것이다. 난 대족장. 가장 강한 명예로운 오크 전사다. 전투에 앞장 서야 한다.”
이해한다. 나도 그락카르만큼 오크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
“넌 언제나 가장 앞서 있을 것이다. 항상 나와 대치하고 있을 테니까.”
“무슨 말이지?”
“저기.”
해역이와 성전사들이 있는 산을 가리켰다.
“저 너머에 진지를 만들 거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 머물 거다. 이곳이 오크와 인간의 전쟁에서 최전방이 되는 거다. 그리고 그 최전방에서 너와 난 항상 싸울 거고. 난 저곳에 내 최고의 전사들과 함께 머물 거다. 그리고 너 또한 최고의 전사들과 함께 이곳에 머물러라.”
“그러면... 매번 우리와 너희 인간 최고의 강자들이 싸우는 거군. 그리고 한 쪽이 져도 다시 전부 살아나 또 싸울 수 있게 되는 거고.”
“그래.”
역시 싸움이 관련되니까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바로 이해하는구나.
“최고의 전투를 매주 두 번씩 할 수 있다. 거기에 매달 네가 원할 때 1번 더 싸울 수 있고.”
“크흐..”
좋아한다. 최고의 전투를 영원히 반복할 수 있는 거다. 그락카르한테는 천국이나 다름없겠지. 그리고 나에게도 도움이 된다. 그락카르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없으면 싸움은 무조건 진다. 그러니 비텔님께서 날 부르기 어려워지는 거다. 오크 대족장과의 대치는 비텔님의 부름을 피하는 최고의 핑계가 되어 줄 것이다.
허점이 많은 계획이지만 짧은 순간 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수였다.
“괜찮군. 그렇게 하지.”
다행이도 그락카르도 마음에 든 모양이다.
“가끔 너희 세상으로 돌아가 형제들과 싸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게 해주겠다.”
“필요 없어.”
공격은 몰라도 방어라면 비텔교 없이 각국의 전력만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오크에 대한 연구도 철저히 했고 그에 대비한 전략, 전술도 많이 만들어냈으며 오크 맞춤 무기도 개발했으니까.
“크흐.. 노르쓰 우르드는 강해졌다. 막는 게 쉽지 않을 거다.”
“괜찮다. 오크 대족장과 최고의 전사들을 우리가 막고 있는데 나머지 정도는 다른 이들이 막아야지.”
노르쓰 우르드가 강해졌다고? 하긴 여섯 신이 새로 가호를 내리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한둘에겐 축복을 받았겠지. 축복 없이 대족장에 근접한 힘을 가졌던 녀석이니 축복을 받았으면... 엄청나졌겠네.
그래도 만약의 경우엔 핵미사일도 있으니 뭐...
“오늘도 못 싸우는 거냐?”
“아니. 오늘은 둘 중 하나가 죽을 거다.”
그락카르를 위해 싸워주는 게 아니다. 그래야 한다. 지금 우리의 대화를 비텔님께서 듣고 의아한 마음을 가졌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죽어서 다시 새로운 ‘오늘’을 시작해야 한다.
“크흐.. 그거 마음에 드는군.”
“다음 ‘오늘’부터는 오늘 우리가 한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말 하지마라.”
“알았다.”
그락카르가 알았다고 했으면 됐다. 대답한 이상 무조건 지킬 테니까. 이제 우리의 협의에 대해선 아무도 모르게 되겠지. 신조차도.
“크워어어어어억!”
그리고 다시 싸움이 시작됐다.
***
“오늘도 즐거운 대화였다.”
“즐거우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돌아가거라.”
비텔님과의 대화를 했음에도 죽지 않고 지구로 돌아왔다. 오늘은 잘 넘겼구나. 많이 발전했다. 처음엔 만나면 무조건 죽었다. 그래서 만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은 꽤 생각을 숨기는 데 익숙해져서 두세 번에 한 번 죽는다.
꽤 오래 연습했고, 거의 완벽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역시 신을 속이는 건 쉽지 않다. 그래도 들켜도 비텔님이 날 바로 죽여줘서 다행이다. 혹시라도 죽이지 않고 잡아놓고 실험 같은 거라도 하면 큰일인데 말이다.
혹시 비텔님께선 날 죽음에 이르게 한 무언가를 통해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내시는지도 모른다. 비텔님은 신이니까. 날 죽일 정도의 힘을 쏟아 부었으니 뭔가 알아냈겠지. 하지만 내가 죽음으로서 ‘오늘’이 다시 시작되고 그걸 잊게 되시는 거다.
나와 그락카르를 연결하고 있는 힘이 도대체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신마저도 거스를 수 없고 느낄 수도 없게 ‘오늘’을 반복시키고 있다. 아마도 비텔님께서 날 죽일 때마다 습관처럼 내뱉는 ‘그분’이라는 존재와 관련 있지 않을까?
신 위에 있는 존재라니. 어떤 존재일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물어볼 수도 없다. 물어보는 순간 왜 물어보는지 의아해할 거고, 그걸 알아내기 위해 내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대답해주고 그냥 죽여주면 상관없겠지만 혹시라도 그렇지 않을 상황이 무섭다.
괜한 변수는 만들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내가 직접 그락카르와 내게 숨겨져 있을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스스로 내 안을 관조하고,
-내 안에서 비텔님의 기운이 아닌 무언가를 찾으세요.
관찰 관련 능력을 가진 모두를 불러 그락카르와의 싸움이 있어 리셋 될 ‘오늘’에 날 관찰하게 만들었다. 그들에게서 많은 걸 들었지만 아직 그락카르와 내가 ‘오늘’을 반복하게 하는 힘의 근원을 찾아내진 못했다.
실망하지 않았다. 비텔님도 찾아내지 못했던 거다. 인간인 내가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구로 돌아와 바로 차원문으로 향했다. 빨리 킨데아로 넘어가야 한다. 오늘은 그락카르와의 싸움이 있는 날이라서 빨리 가서 준비해야한다.
오늘로 371번째 싸움이던가.
그락카르와의 싸움이 시작된 지 6년, 오크의 침략이 시작된 지 5년 그리고 인간의 반격이 시작된 지 3년째가 됐다.
인간과 오크의 싸움은 두 가지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락카르와 그의 전사들 vs 나와 성전사’ 그리고 ‘노르쓰 우르드와 주술사가 이끄는 오크들 vs 각국의 군대와 민간 기업의 용병들’
오크의 공격은 내 생각보다 훨씬 강력했다. 잠깐 사이에 이종족의 침략 때보다 훨씬 큰 피해를 인간 사회에 입혔다.
오크 하나하나가 강력했지만 주술사는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강함을 보여줬다. 모든 이종족의 특수능력을 주술에 녹여내 사용하는 그들은 공격과 방어를 가리지 않고 모든 방면에서 뛰어났다.
우리 세계에 대한 적응도 빨랐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고 1년차에 죽은 주술사가 둘이었는데 3년간 어떤 주술사도 죽지 않았을 정도다. 그 후 지구의 무기 체계에 적응한 거다.
참다못해 러시아가 핵미사일을 발사한 적도 있는데 미리 핵미사일을 감지한 주술사가 대규모 이동능력을 사용해 피해버렸다. 덕분에 러시아는 오크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못하고 방사능에 오염된 땅만 얻게 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구가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전쟁이 시작되고 2년만이긴 했지만 차원문을 통해 킨데아를 공격하는 반격도 시작했다.
민간기업이 전투에 참여하며 일어난 현상이었다.
자고로 인간이 이성을 갖게된 이래로 전쟁을 항상 있어왔다. 그리고 그 전쟁의 이유는 항상 ‘재물’이었다. 원수와의 싸움도 그 근원을 따져보면 재물이 원인이고, 종교 전쟁도 결국엔 재물이 원인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한 민간기업이 킨데아 대륙 탐험에 성공해 신물질을 발견했다. 그리고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이 하나의 사례는 과거 ‘대항해시대’라 불렸던 탐험의 시대 못지않은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수많은 민간기업이 직접 용병을 고용해서 혹은 정부를 부추겨 군대에 자신들의 용병을 포함시켜서 킨데아 대륙으로 넘어갔다.
그뿐만이 아니다. 용병 하나가 킨데아 대륙에서 주워온 돌멩이 덕분에 억만장자가 됐다는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였다. 용병이 지구촌 전체에서 희망직업 1위가 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기업의 자본에 수많은 지원자에 의한 용병의 무한 공급. 인간의 반격은 거셌고 그 거센 반격은 팽팽하게 유지되는 전선을 만들어냈다.
내겐 바람직한 상황이다.
어차피 그락카르를 죽이지 못하는 이상 오크를 멸망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락카르를 제외한 모든 오크를 죽인다고 해도 그락카르 혼자 건너와 인간 전부를 죽이며 다녀도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다.
죽이는 건 소용없고, 못 움직이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 괴물을 잡아둘 수 있는 방법은 지금으로선 없으니까.
그러니 그락카르를 잡아두는 것뿐만 아니라 양측이 전선을 팽팽하게 유지하게 만들어야 한다. 내가 그락카르와 나를 연결시켜주는 힘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어떻게 하면 끊어낼 수 있는지 알아낼 때까지 말이다.
“염동력이 그새 더 강력해지셨군요.”
킨데아 주둔지에 도착하니 마중 나온 벤센이 내 주위에 떠다니는 쇠구슬 30개를 보며 말했다. 내 수련용 쇠구슬들이다. 비텔님께 받은 기운을 뿜어내 조종할 수도 있지만 비텔님의 기운을 사용하는 능력이 아닌 순수한 내 능력을 기르기 위해 시작한 연습이다.
염동력이 새롭게 개발한 나만의 능력 중 가장 뛰어난 능력이다. 의지를 실체화시키면 되는 것이기에 가장 사용하기 쉬웠다. 물론 시작이 쉬웠다는 거지 숙달되고 그걸 강화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직 부족합니다.”
연습 시작한지 5년지 지났음에도 쇠구슬 30개를 움직이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니까. 겨우 이정도 위력으로는 최하위 성전사 하나도 상대하기 힘들다.
하지만 수련을 멈출 생각은 없다. 비텔님에 의하면 난 아직 150년 뒤 죽을 거고, 그 후엔 비텔님이 만든 신계에 살게 될 것이다.
“오크들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오크 대족장과 오크 3만이 평야에 나와 있는 것이 관측되었습니다.”
“우리도 가죠.”
그럴 순 없다. 비텔님이 날 배신한 이상 그분과 영원히 함께 사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러니 비텔님을 벗어날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비텔님에게 받은 힘으로 비텔님에게 반항할 수는 없으니 내 힘이 필요하다.
이대로라면 150년을 더 수련해도 비텔님께 반항하는 건 말도 안 되지만 내겐 방법이 있다. ‘오늘’을 반복해가며 훈련하면 되니까. 마음만 먹는다면 영원히 ‘오늘’을 훈련할 수 있다. 그러면 언젠가는 비텔님을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겠지.
시간은 내 편이니까.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억!
그래. 내 동반자. 너도 동의하는 모양이구나. 오늘도 즐겁게 서로를 죽여보자.
< 228 새로운 시작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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