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 한상 vs 그락카르 >
“후..”
그락카르와의 1:1 대치. 사나운 그락카르의 기운을 느끼며 한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런 재회를 바라지 않았다.
물론 그락카르를 죽이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위성전사의 저격으로 그락카르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도 아니었다. 저격은 그락카르의 현 상태를 알아보고자하는 마음에 시도했던 거니까.
그락카르가 7년 전 연결이 끊어질 때 그대로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면 부상정도는 입힐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생채기 약간 나는 정도에 그쳤다. 그락카르 또한 꽤 성장했다는 증거다.
‘빌어먹을.’
생각보다 훨씬 더 말이다.
그락카르를 직접 마주하니 그의 기백에 압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에게 압박을 줄 정도의 강함.
한상은 이곳에 오기 전, 9:1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자신이 그락카르보다 강할 가능성 9, 그락카르가 자신 못지않게 강해졌을 가능성 1.
7년이라는 공백이 있었음에도 그락카르가 아직 자신의 밑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것은 어떻게 보면 오만한 생각일 수 있지만 그만큼 당시 그락카르와 한상의 차이가 컸다. 원래도 그락카르보다 강했는데 아베네고의 모든 것을 배우기까지 했었으니까. 9의 확률은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그런데 막상 오니 빌어먹게도 1이었다. 아무리 7년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딱히 그락카르가 활약할만한 전쟁이 없어 성장이 멈췄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항상 그랬다. 그락카르는 항상 다른 이가 그어놓은 한계를 뛰어넘어왔다. 그래서 자신이 더 강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함에도 그락카르를 찾아오는 것을 망설였던 것이다.
“한 번 더 각성한 모양이지?”
“했다.”
그락카르가 이렇게 급격하게 강해지기 위해서 스킬 ‘각성’의 3단계는 필수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한상은 그락카르와 연결이 끊어진 동안 비텔에게 다섯 번의 축복을 더 받았다.
‘각성’ 3단계만으로는 그 차이를 좁힐 수 없다. 아마 그락카르도 최소 다섯 번, 많으면 열 번까지 축복을 받았을 것이다. 만족할 만한 전쟁이 없었을 테니 전부 카록에게 받은 것은 아닐 것이고 아마 다른 여섯 신에게서도 축복을 받았을 것이다.
‘짜증나는군.’
자신은 하나의 신에게서 축복을 받는데 상대는 일곱 신에게서 축복을 받는다. 한상 자신도 어떤 이보다도 많은 혜택을 받아 쉽게 성장해왔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는 이를 보니 짜증이 절로 났다.
특히 그런 혜택을 받은 자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니 더 짜증났다.
한상의 마음에 짜증만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반가운 마음도 컸다. 그락카르와 한상의 관계는 어떻게 보면 가족이나 연인보다도 더 깊다.
서로의 삶을 지켜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일체화되어 함께 경험하고, 느꼈으니까.
7년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여러 가지를 했다고 말해주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한상은 입을 다물었다.
‘이긴다. 죽인다.’
그리고 그락카르에 대한 적대감을 키웠다. 자신이 그락카르에게 지면 인류가, 비텔교가 질 것이다. 어설픈 개인감정이 아닌 사명감을 갖고 싸울 필요가 있었다.
그락카르 공략법은 알고 있다. 아베네고가 그락카르를 죽이는 1,000가지가 넘는 방법을 직접 보여줬으니까. 배운 그대로 실행할 자신도 있었다. 그는 아베네고의 모든 것을 배웠으니까.
한상이 자신의 기운을 주변에 뿌리기 시작했다. 가진 모든 기운을 뿜어내 그의 내부가 텅텅비었지만 교단 기여 포인트가 기운으로 치환되며 순식간에 다시 차올랐다. 한상은 충전을 반복하며 계속 기운을 뿜어냈다.
공간을 장악하는 것이다.
뿜어낸 기운은 몸 내부에 있는 기운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거나 성질을 변환할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 능력의 운용에 중요했다. 단순히 물리력을 부여해 아까 김해역에게 했던 것처럼 상대를 압박한다거나, 번개의 경로를 정하고 위력을 보정하는 역할을 한다거나, 기운을 스스로에게 덧씌워 신체능력이나 특수능력의 위력을 높이는 등.
“크흐..”
그락카르는 서서히 전신을 짓눌러오는 압박감에 기쁨의 웃음소리를 흘렸다. 7년만이다. 7년이라는 오랜 기다림 끝에 느낀 압박감이었다. 7년간 굶주리며 돌아다닌 끝에 맛있는 큰 뿔 누를 발견한 느낌이다.
그락카르는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도끼를 휘두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직이다. 아직 큰 뿔 누가 제대로 자라지 않았다. 7년 만에 먹는 음식이니만큼 뼈가 가장 단단할 다 자란 큰 뿔 누를 먹고 싶었다.
“어서! 어서 수호자들을 불러내라!”
급한 마음에 한상을 재촉했다.
“그렇지 않아도 하려고 했다. 이 싸움에 미친 오크놈아.”
오하넬, 아딜, 카일라, 빈예츠, 히르아 전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상을 주변에 뿜어냈던 기운 중 일부를 그들에게 집어넣었다.
수호자들은 소환될 때 대가로 받은 100만 포인트의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듬으로서 비텔의 기운을 갖게 된다. 한상은 그 비텔의 기운에 자신의 것을 더해준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성전사들만큼은 아니더라도 각각 20~30% 이상 실력이 향상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수호자들은 예전의 듀키츠에 비견될 정도의 힘을 갖게 된다. 7년 전이었다면 수호자들만으로도 그락카르를 가볍게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림없어보였다. 한상은 자기 자신의 몸에도 기운을 우겨넣었다. 품고 있는 기운이 많은 만큼 누구보다도 많은 기운을 우겨넣을 수 있었고 그만큼 몸에 부하가 가해졌다.
기운을 덧씌우자마자 여기저기서 지릿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마 너무나도 강대한 기운에 신체가 손상되었다가 뛰어난 생명력과 재생력으로 인해 회복되고 있을 것이다.
회복되고 있긴 하지만 이 상태를 유지하면 유지할수록 몸에 가해지는 부하는 커져갈 것이다. 하지만 한상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끌 생각은 없다.’
그락카르가 과거 몇 번의 전투에서 그랬던 것처럼 몇날 며칠 싸울 생각은 없다. 속전속결.
“일단 되돌려주마.”
꾸국.
그락카르가 던졌던 도끼의 자루를 강하게 잡았다. 그가 평소 사용하던 미로크 투와 똑같이 생겨서인지 처음 만지는 무기임에도 익숙했다. 한상은 도끼를 한껏 뒤로 당겼다. 누가봐도 던지려는 폼이기에 그락카르가 대비하겠지만...
“그아아아앗!”
상관없었다.
한상이 던진 도끼가 맹렬하게 그락카르를 향해 날아갔다. 아까 전 그락카르가 던졌을 때보다 몇 배는 강맹했다. 그락카르가 미로크를 휘둘러 마주쳐갔다.
“쿠워억!”
굉음과 함께 그락카르가 뒤로 밀려났다. 던진 도끼에 담긴 힘이 그락카르가 휘두른 도끼에 담긴 그것보다 강했다. 그락카르가 비틀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섯 수호자가 공격해왔다.
심장, 목, 명치 등의 급소에 치명상이라 불러도 될 정도의 상처가 만들어졌다. 평범한 오크였다면 이번 공격으로 그대로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가공할 재생력이 상처가 남과 동시에 치유시켰다.
한상도 카일라가 보관하고 있던 미로크 투를 받아들고 그락카르에게 달려들었다. 한상의 도끼가 그락카르를 사선으로 갈라냈다. 원래는 이번 일격으로 몸을 양단할 생각이었지만 그락카르가 도끼로 막으며 피하는 바람에 몸의 3분의 2정도만 가르고 지나가는 정도로 끝났다.
그것 역시 빠르게 치유되었다. 정말 말도 안 될 정도의 재생력이었지만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바다. 그락카르의 재생력은 힘에 비례해서 강해진다. 예전에도 가공할 재생력을 갖고 있던 그락카르이니 몇 배는 강해진 지금은 당연히 훨씬 강력한 재생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번에 끝낸다.’
세 번째 공격은 다섯 수호자와 한상이 동시에 그락카르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엔 치유가 불가능한 상처를 입힐 생각이었다.
‘머리, 목.’
다섯 수호자에게 의사를 전달했다. 다섯 수호자와 한상은 동시에 그락카르의 머리를 공격해갔다. 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나도 없는 것을 재생하지는 못할 터. 한상은 이번 공격으로 그락카르의 목을 잘라내던가 부숴버릴 생각이었다.
여기까지 한상이 도끼를 던지고 3초 지난 시점이었다.
한상과 다섯 수호자의 공격이 그락카르에게 가해지는 그 순간, 그락카르는 순간 자신의 바로 앞에 죽음이 다가온 것을 느꼈다. 성큼 다가온 죽음을 느끼며 그는,
“크흐..”
웃었다. 죽음. 죽음을 느낀 게 얼마만이던가. 기뻤다. 죽음을 다시 느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그리고,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억!]
그 기쁨을 토해냈다. 그락카르가 강렬하게 몸을 회전시켰고 사방에서 그를 향해 내려쳐지던 공격이 미로크에 튕겨나가거나 목표했던 곳과는 다른 곳에 박혀 들어갔다.
“빌어먹을.”
‘성난 자의 외침’이 발동하기 전에 처리하려고 했는데 실패해버렸다. 한상이 짜증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
“비텔님...”
성전사 중 누군가가 그락카르와 싸우는 한상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들이 이미 인간의 한계를 한참 넘어선 초인이지만 그락카르와 한상의 움직임은 그것을 다시 한 번, 아니. 수십 번 초월해 있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하지 못할 영역. 성전사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신인 비텔을 떠올렸다.
“역시 교주님은 그분의 현신이셨어.”
한상이 비텔의 현신이라는 이야기는 꽤 넓게 퍼져있었다. 한상도 알고 있기에 절대 아니라고 ‘비텔의 목소리’까지 써서 알렸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자는 많았다. 그리고 성전사 중에도 그런 사람이 많았다.
한상이 비텔 그 자체는 아니겠지만 비텔의 아바타라는 믿음을 가진 자들. 지금 중얼거린 자도 그런 자 중 하나였다.
그리고 평소 그 말을 믿지 않았던 자들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 번 공방을 주고받을 때마다 주변 지형이 변한다. 1500m가량 떨어져 있음에도 충격파가 날아오고 그락카르와 한상이 뿜어내는 기운에 숨쉬기 힘들 정도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가 신 말고 누가 있겠는가.
성전사들의 눈에는 더 이상 그락카르와 한상의 싸움이 오크와 인간의 싸움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신과 신의 싸움, 오크의 신 카록과 인간의 신 비텔의 싸움으로 보였다.
***
확실히 아직 실력은 한상이 앞서 있었다. 그락카르와 한상 둘만 놓고 따졌을 때는 그락카르가 조금 더 앞서 있었지만 거기에 다섯 수호자가 더해지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실력 차이는 지금보다 더 줄어있었을 것이고, 지금보다 더 위험한 싸움을 벌여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찾아오길 잘한 건가?’
하지만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자신이 분명 앞서있긴 하지만 압도할 정도가 아니고 작은 실수 하나로 뒤집힐 수 있는 차이이기에 지금도 충분히 위험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큭.”
그락카르의 도끼가 한상의 목을 반쯤 가르고 지나갔다. 바로 재생되긴 했지만 조금만 더 깊었어도 위험했다.
‘잡생각은 그만하고 집중하자.’
한상은 전투에 집중했다. 그리고,
지지지지직.
“크우어어억!”
번개가 강하게 둘러진 도끼를 그락카르의 허벅지에 박아 넣을 수 있었고 순간 움직임이 멈춘 그락카르를 다섯 수호자가 공격했다. 그 중 히르아의 공격이 종이 한 장 차이로 그락카르의 오른팔을 완전히 잘라낼 수 있었다.
팔이 재생되기 시작했지만 아예 떨어져나간 상태인지라 완전 재생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 틈에 한상과 다섯 수호자가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그리고 한상의 미로크 투가 그락카르의 머리를 대간선으로 갈라버리는데 성공했다.
한상은 거기에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머리의 반이 사라졌는데도 그락카르의 기운은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연이어 도끼를 휘둘러 그락카르의 몸을 수십 조각으로 만들었다. 그제야 그락카르의 기운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아...”
한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겼...”
그리고 스스로의 승리를 선언하려는 순간, 어둠이 찾아왔다.
‘뭐지?’
눈이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보이긴 했다. 그저 보이는 모든 곳이 깜깜한 어둠이었을 뿐.
‘카록이 개입한 건가?’
가장 먼저 생각난 건 카록이었다. 신이라면 이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 테니까.
‘윽?’
그가 더욱 깊은 생각에 빠져들려 할 때, 무언가가 그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곳을 바라보니 어떤 구멍이 있었다. 어두운 이 공간보다 더욱 어두운 색을 가진 구멍.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미지에 대한 공포에 한상은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조금의 성과도 발휘하지 못했고 그대로 구멍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여긴...”
한상은 자신의 침대에서 눈을 떴다.
< 227 한상 vs 그락카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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