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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더 오크-220화 (220/228)

< 220 한상 vs 그락카르 >

인간이란,

‘널 죽일 거다. 네 암컷을 죽일 거고, 아이를 죽일 거고, 형제를 죽일 거고, 모든 오크를 죽일 거다!’

“크흐.. 재미있겠구나.”

한없이 약한 존재다.

나란 놈은 이런 말을 하면 오히려 좋아할 것을 알면서도 강렬한 분노에 휘둘려 악을 쓸 수밖에 없었다.

정말 난 멍청하고 쓸모없는 놈이다. 위대한 스승님을 수십 년간 지켜보며 배웠음에도 이렇게 쉽게 흥분해버리다니.

하지만... 하지만 똑같은 오늘이 수십 번 반복된다고 해도 난 똑같은 말을 그락카르에게 퍼부을 것 같다. 진심이었으니까. 진심으로 그렇게 만들어줄 거니까. 이 세상에서 오크란 종족이 영원히 사라지도록 만들어 줄 거니까.

그렇지 않으면 나의 분노, 아니. 절망을 해소할 방법이 없을 테니까.

-방금 그 적과 싸우고 싶지? 그러면 하루를 다시 리셋하며 된다. 죽어라. 그러면 다른 ‘오늘’에 저자와 싸우게 해주겠다.

-크훅. 멍청한 인간 놈. 전사의 도끼는 적에게 향하는 법이다.

어떤 말도 통하지 않았다. 자기도 아베네고와 싸우는 걸 열렬히 원하고 있음에도 자살만은 절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시작될 하루인데 자살 한 번 하는 것이 뭐가 그리 힘들다고.

-오크를 제외한 모든 종족이 무너졌어! 이제 너와 싸울 자가 없다는 건 알고 있는 거냐! 이제 네 놈은 죽을 때까지 누구와도 싸우지 못한단 말이다!

이 말엔 잠깐이지만 망설였다. 그락카르에게는 그 어떤 저주나 위협보다도 무서운 말이었을 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사의 도끼는 형제에게 향하지 않는다.

라는 말을 하며 거절했다. 답답해서 ‘형제가 아니라 니 놈 목에 박아 넣으라고!’라고 소리쳤지만 똥고집 그락카르가 한 번 정한 걸 바꿀 리 없었다.

그락카르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가장 먼저 든 감정은 후회였다. 왜 그런 말을 했을 까. 다른 말을 했다면 설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다음 과정은 아베네고가 죽는 순간 느꼈던 절망, 외로움, 슬픔 등의 재확인이었다. 거대했다. 너무나도 거대한 감정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휩쓸고 갔다. 모든 것이 감정의 파도에 쓸려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된 나는 그렇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하루의 끝을 맞이했다.

그리고 끝이 다가온 순간 절망, 외로움, 슬픔을 장작 삼아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

이제 ‘오늘’이 끝나간다. 잠시 후면 난 다시는 아베네고를 만날 수도,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게 된다.

한 걸음만 나아가면, 그락카르만 죽어준다면 아베네고를 다시 만날 수 있다.

어차피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것이기에 그락카르에게 어떤 피해도 없다. 그러니 조금도 어렵지 않은 부탁이다.

내가 모든 것을 걸고 부탁했다. 자존심을 버리고 빌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락카르는 무시했다.

이제 다시는 아베네고를 만날 수 없다. 다시는 아베네고와 대화를 나눌 수 없다.

이 모든 게 작은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그락카르 때문이다.

‘기다려라. 우린 반드시 만나게 될 거다. 오크를 멸망시키고 이 세계를 정화해 아베네고에게 선물로 바칠 거다. 내 목숨을 걸고 비텔님께 맹세한다.’

“크흐..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겠다.”

그락카르와 나의 얇디얇게 유지되었던 감정의 교류는 ‘오늘’이 끝나고 ‘내일’이 찾아오며 영원히 끝났다.

***

발코니 문을 열자 새벽녘의 서늘한 공기가 강렬한 감정으로 인해 달아오른 몸을 식혀주었다. 그대로 발코니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속옷 하나만 입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벤센이 나타나 무릎까지 내려오는 코트를 걸쳐주었다. 전혀 필요 없지만 거절하진 않았다. 코트를 걸쳐준 벤센이 말없이 함께 걸었고, 잠시 후 해역이도 나타나 함께 걸었다.

그 외에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함께 움직이고 있는 수십 성전사의 기척이 느껴졌다. 미안하네. 내가 갑자기 말없이 집을 나서서 바쁘게 움직였을 거다.

그러고 보니 해역이도 아베네고, 아드리오, 벤 자칸, 이올라를 알고 있다. 해역이가 성전사가 되기 위해 시험을 치렀던 가상의 공간이 아베네고가 지도자로 있던 피난처였으니까.

말단 병사였기에 아베네고, 아드리오, 이올라에 대한 기억은 별 거 없었지만 벤 자칸에 대해서만큼은 많은 것을 알고 많은 것을 말해줬었다.

‘가장 위대한 전사.’라고 했었지.

“해역아. 아드리오, 벤 자칸, 이올라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겠냐?”

“네.”

지금 가슴속을 휘몰아치는 수만 가지 후회 중 하나가 아드리오, 벤 자칸, 이올라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는 거다. 해역이가 경험한 것이 가짜 삶이었어도, 많은 걸 알지 못해도... 그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다.

“대사제 아드리오님은 비텔교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 불렸습니다. 같은 수의 축복을 받은 사람 중 가장 뛰어났던 것은 물론이고...”

아베네고도 아드리오의 칭찬을 그렇게 많이 했었다. 자신이 익힌 능력의 대부분은 아드리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며 말이다.

자신이 아니라 그가 살아남아 비텔님의 축복과 기운을 받아들였다면 이미 세상은 비텔교의 것이 되었을 거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물론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베네고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1,000년을 버티지 못했을 테니까.

“성전사장 벤 자칸님은 말수가 적은 분이셨습니다만 마음은 그 누구보다도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죽은 성전사와 병사들을 보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셨지요. 투구를 쓰고 있어 아무도 몰랐을 거라 생각하셨을 수도 있지만 우리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아베네고는 벤 자칸에 대해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단단한 방패라고 평했었다. 그가 앞에 있다면 그 어떤 적의 공격이든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내가 아딜에게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 아닐까.

“사제 이올라님은 모든 신도들에게 사랑받는 분이었습니다. 아드리오님에게 가려졌지만 엄청난 천재성을 가지고 계시기도 했습니다. 20대 중반에 다섯 번의 축복을 받으셨을 정도니까요. 그리고 주교 아베네고님을 사랑하셨습니다. 스스로는 아무도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상당히 티가 많이 났었죠.”

해역이가 미소 지으며 이올라의 이야기를 했다. 아베네고도 비슷했다. 이올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미소 짓고 있을 거라 예상할 수 있을 정도의 톤으로 말했었다. 그리고 듣는 나도 미소 지었었지.

아베네고가 1,000년을 버티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이올라라고 생각한다. 비장함만 가득한 1,000년이었다면 아무리 아베네고라고 해도 버티지 못했을 거다.

“아베네고는... 아베네고는 어땠지?”

“주교님에 대한 것은 많이 알지 못합니다. 대화를 나눈 적도 없고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분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그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누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멀리서 보기만 해도 대단한 분이란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동감이다. 내가 아베네고를 존경하는 스승으로 모시기 시작한 것은 그와 한 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못하던 시절이다. 그저 그의 행동을 보기만 해도 배울 것이 넘쳐났고, 깊고 넓은 품격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한 번은 벤 자칸님이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 모두가 비텔님을 떠나도 아베네고님만은 비텔님의 곁을 지킬 것이라고요.”

실제로도 그랬다. 지옥과 같은 고통을 견뎌내며 무려 1,000년이나.

“아드리오님이 비텔교의 율법을, 벤 자칸님이 비텔교의 무력을, 이올라님이 비텔교의 마음을 상징하신다면 아베네고님께선 비텔교 자체를 상징하셨습니다.”

해역이가 제대로 말했다. 맞다. 그게 내 스승이다. 1,000년의 긴 세월동안 홀로 비텔교를 지탱한 위대한 사람. 그게 내 존경하는 스승 아베네고다.

걸음을 멈췄다. 원했던 곳에 도착했다.

예전에는 임시거점, 지금은 비텔의 태동이라 불리는 곳은 산골에 자리 잡고 있다. 주변에 크고 작은 봉우리가 제법 있는데 지금 난 그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의 정상에 왔다.

“성전사들은 내 뒤로 물러나세요.”

나지막이 말했다. 날 경호하겠다고 미리 정상 근처에 가 있는 성전사도 있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을 생각하면 거기 있는 건 위험했다.

성전사들이 빠르게 물러났고 내 앞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난 기운을 끌어올렸다.

“읍.”

“어엇.”

해역, 벤센을 비롯한 성전사들이 내가 뿜어낸 기운에 놀랐다. 놀란 것만으로도 저들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한다. 해역이를 제외하면 겨우 세 번의 축복밖에 받지 못했음에도 기운의 움직임을 느낄 정도로 예민한 감각을 소유했다는 뜻이니까. 내가 세 번 축복을 받았을 때는 절대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 기운을 조금씩 떼어내 내가 원하는 곳으로 이동시켰다.

“절대 앞으로 나오시면 안 됩니다.”

이제 또 ‘오늘’을 살 수 없으니 실수하지 않도록 경고를 한 후 한 번 더 전방을 살폈다. 감지되는 기척이 없다. 내 감각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고, 있다고 해도 내 감각을 속일 정도면 내가 뭔 짓을 해도 알아서 살아남겠지.

그럼... 시작하자.

파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전력으로 번개를 뿜어냈다. 아베네고 당신이 가르쳐준 겁니다. 미리 뿌려둔 기운을 따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번개가 날아갔다.

거의 절벽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가파른 정상의 벽에 번개가 꽂혔다.

파가가가가가각.

번개에 물리력은 없다. 하지만 파괴력은 가지고 있었다. 번개가 닿는 부분은 폭발하듯 터져나갔고 내가 생각한 그대로 절벽이 깎여나가기 시작했다.

전력으로 번개를 뿜어냈더니 빠르게 기운이 소모됐다. 소모되는 기운은 계속해서 교단 기여 포인트를 치환해 채웠다. 애초에 물리력을 갖춘 능력이 아니다보니 기운의 소모가 컸다. 하지만 포인트는 전혀 아깝지 않다.

“동영상을 찍을 수 있는 사람은 뭐든 동원해서 찍어라.”

벤센이 성전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걸 뭔가에 써먹으려는 걸까. 그것도 나쁘지 않지.

30분. 검게 그을린 절벽이 내가 원하는 모습을 갖춘 것은 30분이 흐른 후였다. 미술쪽으로는 재능이 없다보니 생각한 것만큼 나오지는 않았다.

“아베네고님...”

해역이가 누군지 알아봤다. 해역이가 알아봤을 정도면 내가 완전히 못 만든 건 아닌 모양이다.

난 높이 20m정도 되는 절벽을 깎아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아베네고의 모습을 조각했다. 그를 기리기 위한 뭔가를 만들고 싶었다. 그를 신도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신도들은 다른 세상에서 비텔교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위대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했다. 나 같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를 알아야 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근처에 있는 다른 산으로 올라가 같은 행동을 했다.

“아드리오님.”

“벤 자칸님.”

“이올라님.”

“이분은 누군지 모르겠군요.”

“이분도...”

가장 높은 산에 아베네고를, 그 주변의 산에 아드리오, 벤 자칸, 이올라, 고번, 켄게리안을 조각했다. 고번과 켄게리안은 비텔교가 아니지만 아베네고와 수백 년을 함께 고생한 이들이다. 그들에 대해서도 신도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 분들이 누구신지 알려주시겠습니까.”

모두를 조각하고 쉬고 있으니 벤센이 다가와 물었다.

“네. 알려드리겠습니다.”

물론 알려줘야지. 그러기위해 조각한 건데. 다만 벤센 당신에게만 알려주는 게 아니라,

-스킬 ‘비텔의 목소리’를 사용합니다.

교단 구성원에게 말을 전달합니다.

전달할 내용을 직접 말해주세요.

“오늘 하루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교단 구성원에게 말을 전달했습니다.

교단 기여 포인트 6,087,457,287이 차감되었습니다.

모두에게 알려줄 겁니다.

“모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아실 겁니다. 우리를 침략해온 이종족들이 사는 세계 말입니다.”

< 220 한상 vs 그락카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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