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비텔교 vs 오크 >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가 출렁이며 옆에서 자던 비서가 깨어났다.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봤지만 그녀에게 할애할 정신은 없었다.
“잘못들은 건 아니겠지? 아냐. 분명 말했어. 말했다고.”
“무슨 일이신가요. 교주님.”
비서가 무슨 일인지 물었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아베네고는 분명 ‘스승님?’이라고 말했다. 아직도 ‘스승님?’이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뇌리에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처음이다. 수십 년의, 1만 일이 넘는 ‘오늘’속에서 아베네고가 ‘스승님?’이라는 말을 한 것은 말이다. 또한 그 의아함 가득한 표정 역시 처음 봤다.
“분명... 분명 말했어.”
분명히 말했다. 그리고 분명히 들은 거다. 내 말을.
***
심란한 하루를 보내고 다시 그락카르에게 돌아왔다. 비서가 바로 맹연에게 내가 이상하다고 일러서 하루 종일 시달렸다. 이것들이 단순하게 악몽을 꿨다고 해도 믿지를 않는다. 교주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 것이지.
하긴 나 같아도 믿지 않겠다. 내가 누군데 악몽 꿨다고 그런 모습을 보이겠어. 일반인이 보기에는 거의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인 내가 안색이 창백해져서 멍하니 혼잣말이나 중얼거렸으니...
-다시 이종족의 침략이 시작되는 건가요?
-이종족보다 더한 괴물이 넘어오나요?
-혹시 지구 멸망의 재앙이?
계속 귀찮게 해서 ‘이건 비밀인데. 곧 비텔님께서 지구에 오시겠다고 했다.’라고 거짓말 했다. 그러면 떨어져 나갈 줄 알았는데 비텔님에 대해 묻겠다고 더 괴롭혀왔다. 비텔님을 핑계로 대선 안 되는 거였는데, 내 무덤을 내가 팠다.
여하튼 심란한 한상의 ‘오늘’이 가고, 그락카르의 ‘오늘’이 시작되었다. 언제나처럼 그락카르 놈은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시간이 가장 힘들다. 전혀 아무 것도 안하기에 얼마나 지겹고 심심한지.
나는 이 시간을 마의 4시간이라 불렀다. 매일 견뎌야 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4시간. 그러니까 지금까지 흘려보낸 시간을 전부 합치면 거의 4만 시간, 1,666일, 4년 7개월 정도 되는 시간이다. 크. 정말 많이도 멍 때렸군.
평소라면 더 멍 때리겠지만, 오늘은 그럴 생각이 없다.
-서쪽에서 강력한 적이 찾아와 널 죽일 것이다. 지금은 일단 뒤로 물러나라.
“물러나? 물러나라고? 한상! 너 따위가 감히 명예로운 전사인 나에게 도망치라고 한 것이냐!”
갑자기 일어나 발광하는 그락카르를 다른 오크들의 의아하게 쳐다봤지만 신경 쓰지 않고 더 신경을 긁었다.
-알 텐데. 내가 말 걸었다는 건 네가 죽었다는 뜻이란 걸. 여기 있으면 무조건 죽는다. 일단 물러나서 다른 형제들과 합류한 후에 싸워야 승산이 있다.
“강자와 싸우다 죽는 것은 내 평생을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도망 갈 것 같으냐!”
-네 고집 때문에 형제들을 전부 죽일 셈이냐.
“내가 그렇듯 형제들 또한 전장에서 죽는 것을 원할 터! 그렇지 않나! 형제들!”
“갑자기 왜 묻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 형제!”
“내 무덤은 전장이다!”
그락카르가 다른 쪽으로는 더럽게 말 안 듣지만 싸우게 만드는 건 쉽다.
“명예를 모르는 인간놈에게 진정 명예로운 전사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자!”
“그러자!”
“더러운 인간놈들! 잘 봐라!”
“우린 명예로운 전사다!”
“그런데 명예를 모르는 인간놈이 누구냐!”
그락카르가 하자니 그냥 따른다. 단순한 놈들.
원래는 날이 밝아올 무렵에 출발해 사방이 환해진 아침에 조우했어야 양측은 아직 어두컴컴한 새벽에 조우하게 되었다.
이번엔 아베네고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 잔뜩 흥분해서 무작정 시체들에게 돌격한 그락카르를 아베네고와 다섯 수호자가 기습해왔고 위기가 이어지며 그락카르가 한 마디도 꺼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락카르 대신,
‘아베네고! 아베네고! 들리면 대답하세요! 아베네고!’
내가 열심히 그를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시끄럽다! 빌어먹을 인간아!”
아베네고가 대답해줬으면 좋겠는데 쓸데없는 오크 놈이 대답하고 있었다. 대답하다가 벤 자칸의 방패에 한 대 얻어 터졌다. 잘됐다. 오크 놈.
조용하라는 그락카르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아베네고를 불렀지만 결국 아무 소득도 없이 끝이 다가 왔다. 그리고 죽기 전,
‘아베네고!’
“누구냐.”
드디어 아베네고가 내 말에 응답했다. 그리고... 죽었다.
“빌어먹을!”
침대에서 벌떡 일어서며 하루 종일 아베네고를 부르느라 쌓인 짜증을 발산했다. 그 날 역시 맹연, 유나, 해역이 등에게 시달렸다.
***
저는 한상이라고 합니다.
“한상?”
아베네고의 대답을 듣고, 죽었다.
예전처럼 난리를 겪고 싶지 않아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나갔다. 새벽의 차갑지만 상쾌한 공기가 날 감쌌다.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답답하다. 죽기 직전에 아베네고에게 한두 마디를 전할 수 있고, 그 타이밍도 확실히 알아냈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 ‘죽기 직전’이라는 전제가 깔려있기에 뭔 말을 해도 바로 죽어버리니까.
‘죽이지 마세요!’, ‘살려주세요!’, ‘저 비텔교 신도입니다!’ 등 어떤 말도 소용없었다. 무조건 죽었다. 그리고 몇 마디 겨우 전한 말은 다시 ‘오늘’이 시작되면서 아베네고는 기억하지 못했다.
도저히 대화를 이어갈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포기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오늘’은 계속해서 이어질 테니까.
***
-그런 거였군. 그럼 당신과 내가 대화를 나눈 게 오늘로 16일째라는 건가?
-스킬 ‘비텔의 목소리’를 사용합니다.
교단 구성원에게 말을 전달합니다.
전달할 내용을 직접 말해주세요.
‘그렇습니다. 아베네고.’
-교단 구성원에게 말을 전달했습니다.
교단 기여 포인트 1이 차감되었습니다.
내가 아베네고와 대화할 수단을 찾아내기까지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사용할 수 있게 된 스킬 중에는 ‘비텔의 목소리’도 있었던 것이다. ‘비텔의 목소리’는 이 세계 유일한 비텔교 신도인 아베네고에게 내 목소리를 전달해줬다.
그리고 나 이전에 교주의 위에 있던 아베네고 역시 ‘비텔의 목소리’를 사용할 수 있기에 그 역시 내게 자유롭게 말을 걸었다.
서로 1명이기에 교단 기여 포인트의 소모도 부담이 없다. 지구에서 ‘비텔의 목소리’ 쓰면 한 번에 몇 십억씩 기여 포인트가 사라지는데 말이야.
‘비텔의 목소리’를 이용한 대화는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전투가 시작되기 전의 멍 때리는 4시간이 아베네고와 대화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 되어 주었다.
제대로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이 오늘로 16일 째인데 매번 1시간 정도는 아베네고에게 나를 소개하기 위해 썼다. 아깝지만 처음에 비하면 많이 줄어들었고 ‘오늘’도 어제의 ‘오늘’보다 빠르게 아베네고에게 나를 납득시킬 수 있었으니 앞으로 더 줄어들 것이다.
그러면 더 많은 새로운 대화를 할 수 있겠지.
-그러니까 한상, 아니 교주님. 비텔교가 지구란 곳에 뿌리를 내렸다고 하셨지요? 지구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에 대해 납득을 하고나면 아베네고는 날 교주로서 깍듯하게 대우했다. 진심으로 존경하는 아베네고에게 그런 대우를 받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서 그러지 말아달라고 했지만 아베네고는 ‘비텔님께서 정하신 일입니다.’라며 절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어차피 안 통할 걸 알기에 설득할 생각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였다. 나 혼자 한 일이지만 수십 년 동안 스승으로 모셨던 이에게 극존칭을 들으니 쉽게 적응되지가 않았다.
‘지구는 7개의 대륙, 5개의 바다를 가진 거대한 세상입니다. 사람의 수는 70억에 달했었지만 최근 이종족의 침공으로 인해 65억까지 줄어들었습니다. 200여개의 공인된 국가가...’
아베네고는 항상 지구에 대해 가장 먼저 물었다. 지구에 대해 들을 때면 그는 호기심 많은 학생이 되었다.
-대륙의 크기가 어느 정도나 됩니까.
-그럼. 그 세계에는 인간만이 살고 있는 겁니까?
-종족 연합의 전력이 너무 적다했더니 그 세계로 건너갔었군요.
-그렇게 넓으면 서로 왕래는 어떻게 합니까.
-자동차? 비행기? 그게 뭔가요.
몇 번이나 듣고 몇 번이나 설명해줬던 것들이지만 매번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아베네고에게 지구에 대해 더욱 잘 알려주기 위해 현실로 돌아가면 하루 종일 지구에 대해 공부하고 올 정도였다.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있다는 게 기뻤으니까.
1만 번의 ‘오늘’속에서 난 항상 바랐었다. 아베네고와의 교류를 말이다. 일방적으로 나만 얻는 관계가 아니라 아베네고가 내 존재에 대해 알아주었으면 싶었고, 그에게 뭔가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걸 할 수 있게 되었다. 1만 번의 ‘오늘’을 겪고 나서야...
-그곳에는 몰란, 피언, 카록, 에렉, 바틱, 마우, 파뮴 등 다른 신은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지구에서 비텔교는 현시점에서 유일하게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댈 수 있는 종교였습니다. 덕분에 빠르게 사람들 속에 파고들었죠. 얼마 전 비텔교 신도가 60억을 넘었습니다.’
신도 60억. 신도들이 외부와 단절된 오지에까지 열심히 전도한 덕분에 이뤄낸 쾌거였다.
-60억... 제가 상상하던 낙원이 거기 있었군요. 대단합니다. 정말, 정말 대단하십니다. 교주님.
아베네고의 칭찬은 과분했다. 그가 1,000년 간 해온 일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칭찬을 들어야 할 사람은 그다. 그가 포기하지 않고 버텼기에 비텔님께서 내게 오실 수 있었던 거니까.
-그락카르와 연결되어 그가 죽으면 교주님의 하루가 반복된다고요? 그러면 바로 병력을 물리겠습니다.
‘아뇨. 그러지 마세요. 한상의 ’오늘‘과 그락카르의 ’오늘‘을 합쳐 2만 번의 ’오늘‘을 견뎌낸 후 드디어 아베네고와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 내일이 찾아온다면 다시 당신과 대화를 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무조건 오늘 그락카르를 죽여야 해요.
오랜... 정말 오랜 시간을 견뎌 아베네고와의 대화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또 그와 대화를 할 수 없게 된다고? 그런 일은 상상하기도 싫다. 영원히 ‘오늘’을 반복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와의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다.
‘당신의 삶을 알고 싶습니다.’
-제 삶이요?
알고 싶었다. 홀로 남아 1,000년을 투쟁해온 그의 삶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별 건 아니지만 저는...
아베네고는 담담한 목소리로 1,000년을 요약해 들려줬다. 너무나 가볍게 풀어낸 이야기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당신의 삶을 모두 알고 싶습니다. 그 날 뭘 먹었는지, 누구와 이야기를 나눴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든 것을요.’
-길어질 텐데요.
‘시간은 많습니다. 제 ’오늘‘은 영원하니까요.’
아베네고와 대화하는 건 정말 즐거웠다. 느리기만 했던 그락카르로서의 하루가 빠르게 지나갔다. 1,000년을 살아온 사람과의 대화다. 매일 대화를 했지만 매일 신선했다.
‘어제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어 힘을 제어 못하는 이올라를 차원의 틈에서 빼오는 것까지 들었습니다.’
-하하. 제가 그 이야기까지 했습니까? 이올라가 알면 혼나겠습니다. 그럼 거기서부터 이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아베네고의 1,000년의 삶이 암울하고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행복한 때도 있었다. 물론 아주 짧았지만...
-기운을 잘게 나눠 허공에 띄워놓으세요. 그리고 ‘마비시키는 번개’를 사용하면.
“크우워억!”
-이렇게 번개가 기운을 타고 움직이게 되면서 방향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고, 위력이 떨어지는 것 또한 막을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락카르와의 전투에서 아베네고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지금까지 아베네고의 능력을 많이 익혔다고 생각했는데 빙산의 일각이었다.
나는 아베네고의 설명을 듣고 그락카르의 몸으로 체험하며 빠르게 그의 능력을 익혀나갔다.
그렇게 싸움의 시작 전에는 서로의 세상과 삶에 대해 대화를 나눴고 전투가 시작되면 능력의 활용법에 대해 배웠다.
몰랐던 비텔교의 역사에 대해서도 배웠다. 해역이에게 듣기는 했지만 해역이도 모르는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 이어졌다. 그렇게 900번의 ‘오늘’을 겪었다.
‘킨데아의 인간이 그렇게 멸망했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요. 모두 교주님께서 쌓은 힘을 비텔님을 통해 받았기에 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교주님께서 수고하셨지요.
‘오늘’로 아베네고의 삶 대부분을 들을 수 있었다. 내일부터는 재미있었던 일을 다시 말해달라고 해야겠다. 특히 이올라. 매번 차원의 틈을 이용해 치명적인 기습을 가해오는 매서운 이올라지만 아베네고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이올라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듬직해서 믿음이 가는 벤 자칸, 천재적이지만 어딘지 불안한 동생 같은 아드리오, 충직한 네크로맨서 고번... 모두 내 가족처럼 느껴졌다. 다섯 번째 수호자인 켄게리안은 좀 별로지만 말이야.
그들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고 싶었다.
-교주님. 혹시 제가 기운의 파장을 바꾸는 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까?
‘네. 배웠습니다.’
-비텔님의 기운을 임시로 몸 주위에 뿌려 사용하는 법에 대해서는요?
‘그것도 배웠습니다.
-그러면...
아베네고가 내가 그동안 배운 것에 대해 확인했다. 오늘 가르칠 것을 준비하려는 모양이다.
-그렇군요. 훌륭하십니다. 겨우 900일 밖에 안 지났는데 그걸 다 익히셨다니.
‘후후. 직접 배운 것은 900일이지만 그 전에 수십 년간 훔쳐 배웠습니다.’
-그렇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아. 수호자들에게 할 말이 있는데 1시간 정도 대화를 멈춰도 되겠습니까?
‘네. 얼마든지요.’
아베네고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거의 영원하다고 해도 될 만큼 남아있는데 1시간쯤이야.
“크흐..”
다가오는 아베네고와 1,000만 시체의 기세를 느낀 그락카르가 일어나서 똥폼을 잡을 때쯤 다시 아베네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후이젠의 낙인’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아뇨. 처음 듣는군요.’
-‘후이젠의 낙인’은 비텔교의 고문 기술입니다.
고문 기술? 오늘은 이것에 대해 배우는 모양이다.
-... 그렇게 죽지 못하는 적에게 끝없는 고통을 줍니다. 역사상 ‘후이젠의 낙인’을 버텨낸 적은 없었습니다.
정말 끔찍하고 무서운 기술이다. 시전자가 허락해야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능력이라니. 고통이 얼마나 끔찍하면 누구도 버티지 못했을까.
-아. 적 중에는 없었지만 비텔교 신도 중에는 이걸 버틴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도에게까지 그 능력을 사용했습니까?’
-네. 어쩔 수 없었으니까요. 살아남아 복수를 해야 했습니다.
‘아. 혹시.’
순간 감이 왔다.
-네. 접니다. 저는 저 자신에게 ‘후이젠의 낙인’을 걸어 불사가 되었습니다.
...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1,000년. 1,000년이다. 그 긴 시간동안 누구도 견디지 못했다는 고문을 견디며 버텼다는 건가.
이 얼마나 처절한 삶인가.
-아드리오, 벤 자칸, 이올라와 함께 시작했지만 결국 저 혼자만 남았습니다. 그런 제가 불쌍했는지 셋 모두가 망자가 되어 다시 절 돕기 위해 와주었죠. 정말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아드리오, 벤 자칸, 이올라. 셋 모두 위인들이었다. 그런 위인들이 버티지 못한 것을 아베네고는 버텨냈다는 것이다. 그것도 1,000년이나. 정말...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1,000년.
-긴 삶이었습니다.
-수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즐거운 시간도 꽤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만큼 즐겁고 기쁜 날은 없었던 것 같군요.
-비텔님께서 더 이상 외톨이가 아니시란 걸 확인한 것만 해도 기쁜데 60억 신도라니요.
-제가 비텔님께 선물하고 싶었던 정화된 세계 이상의 완벽한 낙원입니다.
-벅차오르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겠군요.
아베네고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000년이나 ‘후이젠의 낙인’을 버텨야 했던 아베네고의 처지가 내 심장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의 삶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아팠다.
-방금 아드리오, 벤 자칸, 이올라에게도 설명해줬습니다.
-그들 또한 저와 비슷할 정도로 감격하고 기뻐하더군요.
-망자이기에 교주님의 목소리를 직접 듣지 못하는 걸 슬퍼했습니다.
그건 나 또한 안타깝다. 그들 역시 아베네고와 함께 1,000년을 버텨낸 위인들이었으니까. 그들과도 대화를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 뒤에도 아베네고의 말이 이어졌다. 기쁨이 한 것 담겨있는 목소리였지만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팠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시 아베네고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선 며칠 정도는 쉬면서 슬픔을 가라앉혀야 할 것 같다.
잠시 후, 아베네고와 그락카르가 조우했다.
“난 명예로운 전사 그락카르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언제나 그렇듯 그락카르가 아베네고의 이름을 물었다. 이제 아베네고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겠지.
“감사합니다. 교주님.”
하지만 아베네고의 입에서는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그만이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교주님.
-감사합니다. 교주님.
-감사합니다. 교주님.
아드리오, 벤 자칸, 이올라 모두가 같은 말을 했다. 이상하다. 평소와 달랐다.
털썩.
아베네고가 무릎을 꿇고 깊게 고개를 숙였고, 다른 수호자들 역시 그를 따라했다.
“무슨 짓이냐. 인간.”
그락카르가 물었지만 아베네고는 그락카르가 아닌 내게 대답했다.
“앞으로도 비텔님을 부탁드립니다.”
잔잔하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가 뭘 하려는 것인지 깨달았다.
‘안돼요! 안 됩니다!’
“드디어. 드디어 쉴 수 있겠군요.”
‘안된다고요! 난 당신이 필요합니다. 스승님이 필요해요!’
그는 환하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사사사사사.
다섯의 수호자들의 신체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곧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1,000만의 시체 또한 힘을 잃고 그대로 쓰러졌다.
“도대체 뭐냐!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나와 싸우자!”
그락카르는 눈앞에서 벌어진 이해 못할 일에 분노하며 소리쳤고 나는,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울부짖었다.
< 219 비텔교 vs 오크 > 끝
ⓒ 냉장고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