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 비텔교 vs 오크 >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수의 엘프, 드워프, 리자드맨, 카티쉬, 트롤, 파르펨 전사가 내 앞을 막았다.
한상의 삶을 지켜보며 이런 상황에 쓰기 좋은 표현을 배운 적 있다.
“날파리 떼는 내 앞에서 비켜라!”
날파리가 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충은 안다. 작은 벌레라는 뜻이겠지. 지금 내 앞을 막고 있는 각 종족의 전사들이 딱 그렇다. 작은 벌레들. 손을 휘휘 저으면 흩어지는 작은 벌레처럼 미로크를 휘두를 때마다 몸이 잘라지거나 튕겨나갔다.
미로크가 전사들의 몸을 자르고 지나가는 촉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것에 대한 표현도 한상의 세계에서 좋은 것을 배웠지. 손맛. 손맛이 느껴졌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약간의 덜컥거림. 그것이 내게 작은 흥분을 선물해줬다.
하지만 지금 난 이런 작은 흥분에 만족할 수 없다. 저기, 날파리떼 너머에 내게 강렬한 쾌감을 선사해줄 강자들이 보이는데 어찌 날파리를 잡는 손맛에 만족할 수 있을까.
미로크를 휘두르는 시간도 아깝다. 그냥 일직선으로 달렸다.
녹색막, 도끼, 검, 쇠구슬, 거대한 몽둥이 등. 온갖 것이 날아왔지만 전부 부수고 버텨내면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딴 날파리들의 공격으로는 내 몸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다.
겁 많은 약한 놈들 같으니. 날 공격하려는 자들은 많은데 내 앞이 텅 비어있다. 내 앞을 막아설 각오도 없는 것들이 하는 공격이 날 상처 입힐 수 있을 것 같으냐!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억!”
온힘을 다한 내 외침은 약한 물리력도 가진다. 고함의 방향에 강렬한 바람이 불고 버티는 힘이 약한 전사는 풀썩 쓰러지거나 밀려나기까지 했다.
“막지마라! 우리가 상대한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버티고 있던 각 종족 전사들이 후다닥 비켜났다. 그러자 아까부터 눈여겨봤던 강자들로 향하는 길이 만들어졌다.
“크흐..”
강자들이 저곳에 있다. 저번에 도망치는 걸 잡아 쳐 죽인 둘을 제외한 넷. 그리고 그들을 보조하는 다른 강자들. 수가 많다. 저번에 놓쳤을 때보다 더 강해져서 돌아왔다.
“크흐. 크흐. 크흐흐흐..”
정말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너무 좋다.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억!
오늘은 처음부터 전력이다. 기쁨으로 가득 찬 가슴속 감정을 토해내며 ‘성난 자의 외침’을 사용했다. 강렬한 힘이 전신에 스며들었다.
적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미로크에 체중을 실어 내리쳤다.
***
“두 신의 축복이 겹치면 저런 괴물이 만들어지는 것인가.”
이올라의 눈을 통해 전장을 지켜보던 아베네고는 그락카르가 도끼질 한 방으로 사방 10m정도 되는 땅을 뒤집어놓는 것을 보며 감탄했다.
도끼에 담긴 힘이 강하기만 해서는 절대 할 수 없는 고차원의 능력이었다. 도끼의 힘만 강했으면 도끼가 닿는 부분만 부서지거나 갈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저렇게 사방 10m를 뒤집어놓으려면 힘의 전달력이 강해야했다.
저 정도 전달력이면 도끼가 팔을 스치고 지나가도 충격이 전신에 전달될 것이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모든 뼈가 바스라지고 장기가 파열되어 죽을 것이다.
저 정도 전달력을 지니려면 고난이도의 세밀한 기운 컨트롤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아베네고는 잠시 자신은 저런 모습을 보일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봤다.
곧 고개를 저었다. 고도로 집중하면 한두 번은 가능하겠지만 싸우는 내내는 힘들었다.
-두 신이 아니라 비텔님의 위대한 힘 덕분이겠지요. 비텔님이 아닌 다른 신이었다면 절대 저런 괴물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드리오가 대답했다. 그 말에 아베네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비텔님의 힘이 아니었다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정말 대단하다. 토린, 락노르는 종족 최강의 무력을 가지고 있을 텐데. 그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도와 주교들을 한 번에 상대하고 있다.”
아베네고가 잠깐 감탄할 동안 그락카르와 종족 연합 지도자들의 전투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워낙 강자들의 싸움인지라 순식간에 수십 합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그 결과 그락카르가 밀리긴 했지만 완전히 일방적이지는 않았다.
“이대로 가면 진다. 토린.”
아마도 토린은 강자를 모아 그락카르를 집중 공격해 죽이려 했던 것 같다. 좋은 방법이다. 어떤 싸움이든 우두머리가 죽으면 무리의 전투력이 급감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 전략은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상대 우두머리를 죽이는데 과한 전력을 쏟기 때문에 다른 쪽의 전력이 약해지니까.
그락카르는 혼자가 아니다. 이올라가 먼 하늘에 떠 있기에 전장의 상황이 한 눈에 들어왔는데 이미 많은 수의 오크가 종족 연합과 싸우고 있었고, 사방에서 오크들이 끝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오크는 강할수록 전장에 빨리 도착한다. 지금 도착해 싸우고 있는 오크들에는 대족장급, 족장급 등의 강자가 많았는데 전부 그락카르의 ‘성난 자의 외침’과 ‘군주의 위엄’으로 강화된 상태이기에 한 단계 이상 더 강했다.
그들을 막기 위해선 사도급이나 대족장급의 강자가 나서야 했는데 그들 대부분이 그락카르에게 가 있는 상태이기에 남아 있는 종족 연합의 전사들로는 그들을 막기는커녕 대전사급 전사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크 강자들은 종족 연합 병력 사이로 뛰어들어 가볍게 휩쓸었다. 종족 연합의 수가 많기에 버티고 있기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것이고, 밀려오고 있는 오크 전사들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토린의 원래 전략은 빠르게 그락카르를 제압하고 전장에 합류하는 것이었을 터. 하지만 그락카르가 밀리긴 하지만 쉽게 잡히지 않을 정도의 무력을 선보임으로써 그의 전략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그락카르를 잡을 수 있다고 해도 그 사이에 복구할 수 없는 피해를 입어 전쟁은 지게 될 것이다.
“이제 숨겨둔 힘을 꺼낼 때다.”
종족 연합의 많은 병력이 지구로 건너갔다는 것을 모르는 아베네고는 여전히 종족 연합이 숨기고 있는 전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 숨기고 있겠지만 오크가 저렇게 강한 이상 꺼내야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숨겨둔 힘은 나오지 않았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데도 말이다.
늦어도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락카르가 가공할 재생력으로 상처를 재생하며 버티고, 어느 순간 보라색 번개를 뿜어내면서 더욱 상대하기 어려워졌다. 분명 거의 일방적으로 밀고 있기는 했지만 밀리는 그락카르도 그렇게 위태해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방에서 모여든 오크들의 수가 10만을 넘어가면서 학살이 일어나고 있었다. ‘성난 자의 외침’과 ‘군주의 위엄’으로 강화된 오크 전사들은 너무나 무서웠다. 가장 약한 전사마저도 대전사를 뛰어넘는 무력을 뽐내며 종족 연합을 밀어붙였다.
종족 연합의 수가 100만으로 거의 10배이긴 했지만 전사의 질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왜 숨겨둔 힘을 꺼내지 않는 거냐. 정말 저것이 가진 전력의 전부란 말인가?”
무너져가는 종족 연합을 보며 아베네고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계산으로는 저기 있는 전력의 세 배 이상이 더 있어야 했으니까.
“도대체...”
지구와 종족 연합의 전쟁을 모르는 아베네고로서는 끝까지 이해 못할 일이었다.
***
파지지지지지지직!
“크윽.”
“으윽.”
사방으로 뿌린 번개에 두 놈이 걸려 움직임을 멈췄다.
이 능력은 원래 위력도 약하고 다루기 힘들어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한상이 기운을 쉽게 움직이게 해주는 스킬을 손에 넣은 후 영향을 받아 더 쉽게 번개를 뿜어내고 위력도 강해졌다.
그래도 얻은 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실전에서 사용할 생각을 못했던 능력인데 강한 죽음의 위기가 찾아오니 번뜩 생각나 사용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용한 건데 의외로 유용했다.
한상처럼 번개만으로 상대를 죽일 만큼의 위력은 나오지 않았지만 상대의 움직임을 잠시 멈추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그렇게 하니 수시로 죽음의 위기로 내몰릴 정도로 치열하고 긴박했던 전투에 한 결 여유가 찾아왔다.
사아앗.
“크헙!”
이렇게 가끔 반격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나와 락노르, 루끄악, 보르언이 남아 상대한다! 나머지는 흩어져서 병력을 지휘해라!”
드워프, 엘프, 리자드맨, 카티쉬 넷이 남고 나머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걸 보며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멍청하다. 정말 멍청하다. 날 상대하는 적이 저지르는 실수를 똑같이 저지르고 있었다.
힘을 집중해 날 죽이려고 했던 적은 많았다. 즐거운 일이다. 강적을 상대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 전략을 사용한 자들은 항상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날 죽이는 것이 불가능하단 걸 깨닫는 순간 전력을 나눠 다른 곳에 투입하는 실수를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정말 멍청한 짓이다. 전력을 약화시킨 상태에서 날 상대로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런 전략을 사용했던 적의 최후는 항상 같다.
“크워어어어어어억!”
머리에 도끼가 박혔다.
***
“끝났군.”
그락카르의 미로크가 토린의 어깨를 가르고 지나갔다. 팔 하나가 떨어지는 정도에서 끝났지만 이미 생명을 태우고 있던 토린에게는 사망 선고나 다름없는 일격이었다.
지도자들의 싸움 외에 ‘병력 vs 병력’의 싸움에서도 종족 연합은 졌다. 아직 전투가 한창이지만 종족 연합은 원군의 기미가 없는데 오크는 끝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숨겨둔 힘은 정말 없었군.”
아베네고는 마지막까지 의심했다. 종족 연합이 너무 약했으니까. 하지만 이젠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토린이나 락노르가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힘을 숨길 리가 없으니까.
“이제 적은 오크밖에 없는 건가.”
종족 연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미 끝났다고 봐도 된다. 이제 오크와 전면적을 벌일 힘이 없으니 1,000년 전 비텔교가 그랬듯 숨어 있다가 전쟁에 미친 오크들에 의해 조금씩 말라 죽을 것이다.
아베네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 있던 시체들도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전에 움직였던 것과 같은 1,000만의 시체. 하지만 질은 예전과 다르다. 종족 연합과 오크가 싸우는 동안 수천만의 시체 중 강한 힘을 가진 시체로 고르고 골라서 세웠다. 거대 괴물 또한 철저히 준비해 만들었다.
그 덕에 이번 1,000만 시체는 예전 1,000만 시체에 비해 1.5배 정도 전력이 강했다.
오크가 이길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만약 종족 연합이 이겼다면 아무 시체나 1,000만 일으켜서 공격했을 것이다. 그 1,000만이 쓰러지면 다시 1,000만을, 또 1,000만을... 끝없는 시체의 행진에 종족 연합은 천천히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오크가 상대라면 전법을 바꿔야 한다. 정확히는 그락카르 때문에 바꿔야한다.
그락카르의 싸움을 살펴본 결과 수로 밀어붙이는 전략은 소용이 없었다. 그락카르는 일정 공격력 이하의 공격은 무시했으며 지치지 않으니까. 그런 적을 상대로 인해전술은 하책이다.
지금 보고 있는 전투로 인해 한 번 더 확신했다. 그락카르는 토린, 락노르와 그렇게 치열한 싸움을 했음에도 더욱 활발해져서 전장을 날뛰고 있었다.
가공할 재생력과 회복력이 발휘되기 전에 단번에 죽여야 했다.
자신과 다섯 수호자라면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강한 힘을 가진 시체를 고른 것이다. 자신과 다섯 수호자가 없이도 오크들을 상대로 버틸 수 있어야 하니까.
< 215 비텔교 vs 오크 > 끝
ⓒ 냉장고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