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 비텔교 vs 오크 >
이 세계에서 순수한 전투병력 100만은 쉽게 모을 수 있는 수가 아니다. 인구수가 가장 많다는 인간들도 제국쯤 되는 나라가 막대한 재화 손실을 각오하고 한 달 이상 시간을 들여야 겨우 모을 수 있는 전력이다.
종족 연합도 다른 세계로 건너간 병력이 비텔교를 토벌하고 나면 바로 인간들의 땅으로 진격해 들어갈 생각으로 병력을 모아두긴 했지만 끽해야 5만, 많아야 10만이었다.
대부분 엘리트 전사들이긴 했으나 절대적인 수적 열세인 상태에서는 엘리트고 뭐고 없다.
지도부는 각 지역에 파견 나가 있는 파르펨을 통해 후퇴를 지시했다. 한 번 말을 전달할 때마다 파르펨들이 푹푹 쓰러져나갔다. 한 마디라도 전한 파르펨은 기력을 잃고 쓰러져 일주일 정도는 움직이지 못한다.
파르펨 통신의 효율이 좋은 편이 아니고, 파르펨의 수가 많은 것도 아니기에 병력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닌 일반 마을에는 파르펨이 아닌 각 종족들이 직접 달려 소식을 전했는데 소식을 늦게 들은 마을은 어쩔 수 없이 ‘죽지 않는 자’ 100만의 대군에 짓밟혀야 했다.
그렇게 약 20개 정도의 마을이 100만의 군세에 짓밟혔을 때쯤. 각 종족의 지도자들이 200만의 전사를 이끌고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시체 100만을 상대하는 것만이라면 병력을 200만까지 모을 필요도 없었다. 각 종족 지도자에 대족장급 이상의 강자들이 수두룩하니 50만 정도만 있어도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200만이나 되는 수의 병력을 모아온 것은,
“아베네고는 보이지 않는군.”
아베네고 때문이었다. 아베네고와 그가 이끌고 있을 시체들. 100만이 전부일리 없었다. 분명 그 이상의 전력이 있을 터.
100만이 아닌 그 이상의 전력을 경계했기에 200만이나 되는 전사를 이끌고 온 것이었다. 각 종족의 대표들이 이끼는 엘리트 전사 200만이라면 아베네고의 시체를 500~600만 까지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지도자들이 시각, 청각, 후각 등 모든 감각을 동원해 어딘가에 있을 아베네고와 수호자들을 찾았지만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숨어있겠지. 항상 그랬지 않나. 아베네고는 항상 어디에 숨어서 죽지도 살지도 않은 놈들만 내보내다가 잡혀서 봉인당하는 겁쟁이였다.”
“어린 짐승이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아직 100년도 못살았으면서 말이야.”
치아야 대신 카티쉬를 대표하고 있는 후루추를 락노르가 비웃었다. 성격이 급한 육식계의 형질을 가지고 있는 후루추는 흥분하면서 락노르에게 덤벼들려했지만 둘 사이에 토린이 끼어들었다.
“우선 전투를 시작하자. 더 이상 피해가 늘어나게 할 수는 없지 않나.”
“그것도 좋겠군. 모두 가자.”
락노르가 최고 지도자라도 된 것처럼 최종 결정을 내렸고 100만 시체와 200만 종족 연합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
“강해졌군. 켄게리안.”
토린이 와이트 전사 켄게리안을 칭찬했지만 대답을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난 더 강해졌다.”
켄게리안은 이미 목이 잘려서 토린의 도끼에 꽂혀 있는 상태였으니까.
켄게리안이 수호자로서 아베네고에게 소환되었을 정도로 강하고 오랜 기간 시간을 들여 소환시 받았던 기여 포인트를 전부 소화해 강해지긴 했지만 애초에 많은 양의 기여포인트를 받고 소환된 것이 아니기에 사도급을 상대할 정도로 강하진 않았다.
끽해야 대족장급보다 약간 강한 정도일까. 아베네고에게 50만도 되지 않는 포인트를 대가로 받고 소환된 고번과 켄게리안은 딱 그 정도였다.
토린은 도끼를 높게 들어올렸다.
“켄게리안을 잡았다!”
켄게리안이 시체들을 이끌던 대장이지만 그의 죽음이 시체들에게 별 영향을 끼치진 못했다. 시체들은 시체일 뿐 감정이 없으니까. 물론 토린도 그걸 알고 있다. 그가 영향을 끼치려 한 건 시체가 아니라 종족 연합 이었다.
적의 대장이 죽었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전장에 퍼졌고 종족 연합의 전사들은 사기가 올라 더욱 용기백배해서 싸웠다.
전투는 빠르게 종족 연합 쪽으로 승기가 기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100만의 시체를 상대로 한껏 기분 내며 학살하고 있을 때, 그들 주변을 900만의 시체가 둘러싸고 있었음을.
***
“이 광경을 보기 위해 1,000년을 기다렸구나.”
아베네고가 회환이 잔뜩 담긴 말을 내뱉었다.
“원래 저런 자들이었습니다. 절대적인 힘의 차이를 가질 때만 당당했던 자들. 상황이 역전되니 원래 모습을 보여주는군요. 끝까지 당당하게 싸웠던 우리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아베네고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지금 대답한 아드리오나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벤 자칸, 아베네고의 표정을 살피고 있는 이올라까지. 1,000년간 비텔교를 대표해 수많은 적과의 외로운 싸움을 지속해온 이들 전부가 저마다 감상에 빠져 있었다.
그들이 보고 있는 광경, 그것은 900만의 시체에 둘러싸인 종족 연합이 궁지에 몰린 쥐처럼 잔뜩 뭉쳐 있는 장면이었다. 이제껏 해왔던 전쟁에서는 대부분 반대의 경우였다.
단 한 번도 비텔교가 수에서 앞선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말이다.
“1,000년간 이어진 싸움... 이제 끝이 보이는구나.”
아베네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체들이 종족 연합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창조된 이래 가장 크고 가장 치열한 전투가 시작됐다.
***
“크흐?”
리자드맨의 부락 하나를 쓸어버리고 리자드맨 로드의 시체를 뜯어먹던 그락카르가 먹던 움직임을 멈추고 서북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로드의 집 안이기에 시야가 막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건만 시선은 그쪽으로 고정된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크흐..”
짧게 웃은 그락카르는 먹던 리자드맨 로드의 시체를 집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푸가각.
서북쪽 벽을 부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락카르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리자드맨 부락 곳곳에 흩어져 식사를 하거나 무기를 손질하던 오크들 전부 뭔가에 홀린 듯 서북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나왔다.
“형제들도 느낀 모양이군.”
“느꼈다. 저 멀리 어디선가 엄청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저곳으로 가야한다.”
“강렬한 전투의 향기가 난다.”
“난 간다. 저곳으로.”
그들이 느낀 것은 동일했다.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거대한 전의. 엄청나게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오크라면 누구나 느낄 정도로 강렬한 전의.
그락카르를 포함한 모든 오크들이 본능적으로 서북쪽을 향해서 움직였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은 대륙 중앙에 있는 모든 오크들에게서 일어나고 있었다.
***
900만 vs 200만
전투가 벌어진 지역의 크기만 수십 km에 달했고, 죽거나 힘을 잃고 쓰러진 시체가 산을 이뤘다.
한계를 뛰어넘은 강자만 수천이 있었고 그들의 전투는 주변 지형지물의 형태를 바꿔버릴 정도로 강렬했다.
이미 100만의 시체와의 싸움으로 지쳤던 종족 연합이지만 지도자들의 지시아래 맹렬하게 싸웠다. 최대한 뭉쳐 전투 면적을 줄이고 외곽의 전사들이 싸울 동안 내부에 있는 전사들이 휴식을 취했다.
“버텨라! 버티면 이길 수 있다!”
지도자들은 파르펨을 통해 외부에 원군을 요청했다. 900만이 엄청난 수이긴 해도 인간과 오크를 제외한 모든 종족이 뭉친 종족 연합의 수는 훨씬 더 많았다.
비록 개개인의 실력은 떨어지더라도 전투가 생활화 된 세상의 주민인 만큼 개개인이 무시할 수 없는 전사. 그들이 지원 온다면 900만의 시체라고 해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것이고 그 뒤에 다시 덤벼올 아베네고를 막아내는 것이 문제가 되겠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고 지금은 일단 위기를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여기서 지도자와 엘리트 전사들이 전부 죽으면 아베네고를 막을 존재가 없어지기에 문제가 생기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이 끝날 테니까.
그렇게 일주일, 종족 연합의 전사들은 동료의 시체까지 먹어가며 체력을 보존하고 싸워 버텨냈다. 비록 그 수가 절반인 100만으로 줄어들었고 대족장급 이상의 강자 중 3분의 2가 죽음에 이르렀지만 말이다.
강자가 더 큰 피해를 입은 이유는 그들이 솔선수범하여 최전방에서 싸웠기 때문이다. 그들이 분전할수록 병력의 피해가 줄어들 테니까. 그렇기에 일주일이나 포위당한 채 싸웠음에도 절반이나 되는 전사들을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전사들의 수는 50만 이하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만큼 900만 시체들의 공격은 위력적이었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거대괴물의 돌진이나, 틈만 나면 자폭하여 괴멸적인 공격을 가하는 시체, 평범한 동네 아저씨의 모습으로 거의 대족장급에 근접할 정도록 강력한 무력을 가진 시체도 있었으며, 중간 중간 벤 자칸, 아드리오, 이올라 등의 공격도 있었다.
그런 파상공세를 상대로 지원군이라는 작은 희망을 품은 채 버텨낸 처절한 일주일. 그 일주일의 고생이 드디어 보상을 시작했다.
탕! 탕! 탕! 탕!
울려 퍼지는 드워프의 핸드캐논 소리와 하늘을 수놓는 엘프의 녹색막의 향연.
-끼락! 끼락! 끼락! 끼락! 끼락!
리자드맨의 날카로운 외침과 숲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몸체의 트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며 각자의 울음소리로 시체들을 위협하는 카티쉬까지.
수십만의 지원군이 도착했다.
“지원군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버티면 이길 수 있다!”
그들을 본 포위당한 종족 연합의 사기가 잔뜩 치켜 올라갔다. 교대로 싸우던 그들은 쉬는 이 없이 일제히 전장에 뛰어들었고, 지원군이 포위망을 뚫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치열한 2시간가량의 전투 후 종족 연합은 지원군과 합류할 수 있었다.
“지원군은 계속해서 도착할 것이다. 이 전투 우리가 이겼다!”
종족 연합의 사기가 잔뜩 치고 올라갔다. 전투는 한층 치열하게 이어지기 시작했다.
“슬슬 빠질 준비를 해야겠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베네고가 아무렇지도 않게 퇴각을 이야기했다.
이미 예상했던 광경이다. 아직 전투는 아베네고 측에게 유리하지만 곧 몰려올 지원군들을 생각하면 결국엔 패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를 아베네고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겨우 1,000만의 시체만 이끌고 와서 종족 연합과의 전투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아베네고가 이끌 수 있는 시체의 한계가 1,000만이었던 것뿐이다.
아베네고는 이미 후방에 수천만에 달하는 인간의 시체를 준비해둔 상태였다. 그 시체 중 1,000만을 다시 움직여 공격할 것이고, 부족하면 다시 1,000만을, 또 1,000만을 움직여 계속해서 공격해 올 것이다.
“과연 몇 번이나 막을 수 있을지 보자꾸나.”
아베네고는 3일 정도를 생각했다. 3일 정도 지나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지원군이 몰려올 것이고 자신들은 일단 인간들의 땅까지 후퇴해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이틀이 더 지난 5일 후에도 여전히 시체들의 전력이 우위에 있었고 아베네고는 퇴각할 필요가 없었다..
종족 연합의 지도부와 아베네고 둘 다 당황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도착하는 지원군의 수가 의외로 적었던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크워어어어어어어억!”
거대한 전쟁의 기운을 느끼고 이동하던 오크와 종족 연합의 지원군이 중간에 맞닥뜨린 것이었다.
< 208 비텔교 vs 오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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