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 비텔교 vs 오크 >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명품 광고에서나 들어봤을 말이지만 전투에서도 비슷하게 쓸 수 있다. 작은 차이가 종국엔 살고 죽는 것을 결정한다.
듀키츠와 그락카르의 싸움에서 그 작은 차이로 이득을 보고 있던 건 분명 듀키츠였다. 작은 차이가 조금씩 쌓이기 시작해 눈에 보일 정도가 되었는데 한 순간에 그것이 역전되었다.
갑자기 그락카르의 기량이 향상되어 작은 차이의 이점을 그락카르가 가져가기 시작했고 듀키츠때보다 조금 더 큰 차이에 의해 훨씬 빠르게 그락카르에게 승기가 넘어갔다.
그 결과 그락카르는 어금니가 부러지고 온 몸의 수많은 뼈가 부러졌으며 내장 파열까지 일어난 채 기절한 듀키츠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잔뜩 흥분한 그락카르는 듀키츠가 죽을 때까지 공격을 퍼부었을 것이고 정당한 대결이기에 누구도 말리지 않았을 것이기에 듀키츠는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락카르는 이미 예전에 흥미가 식은 상태였다. 싸움에 개입이 있었다. 개입한 자가 바로 옆에 있으면 죽여 버렸을 테지만 손이 닿지 않는 다른 세계에서의 개입이었다.
“지금도 보고 있겠지. 인간.”
그락카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넌 날 불명예스럽게 만들었다.”
목소리는 작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락카르는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 대상이 없기에 표출하지 않고 조용히 안으로 집어삼켰다.
“각오해라. 우리가 만나는 날 내 분노를 겪게 될 것이다.”
말을 마친 그락카르가 듀키츠에게서 몸을 돌려 자신을 기다리는 형제들 곁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전투는 끝났다.
걸어가는 그락카르의 몸을 붉은 안개가 둘러쌌다.
-카록의 축복이 내려졌습니다.
블러드 오크 족장에서 블러드 오크 대족장으로 승급했습니다.
스킬 ‘각성’의 단계가 상승해 2단계가 되었습니다.
그락카르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각성’을 사용했다.
-스킬 ‘각성(2단계)’를 사용합니다.
사용할 전투 기여 포인트의 양을 선택하십시오. 전투 기여 포인트의 사용은 최소 1, 최대 1,000,000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100만.”
그락카르가 조용히,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그락카르의 무리구성원은 100만이 넘었다. 대군주 넷을 통합했고 그 외에도 주변에 있는 도시를 전부 통합했으니 말이다. 100만이 넘는 구성원으로 인해 그락카르가 얻은 전투 기여 포인트는 200만 이상.
100만을 투자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각성을 시작합니다.
***
이해한다.
그락카르에 대해 모른다면 도움 받아놓고 죽이려 든다고 욕하겠지만 그락카르를 알기에 이해한다.
하지만 그락카르 이 오크놈아. 어쩔 수 없잖아. 네가 죽으면 나한테도 영향이 미치는데 내가 어떻게 개입을 안 하겠어. 이건 너도 이해해야 해.
이렇게 말한다고 이해해줄 놈이 아니지만 상관없다. 지가 여기로 올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런데 혹시라도 넘어오면... 무서울 거 같긴 하다.
두 번째 ‘각성’을 100만 포인트 다 채워서 해버려서 말이지. 수호자 홀로 싸워서 이기는 건 말도 안 되고 셋 정도는 붙여야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막을 수 있든 없든 그락카르가 넘어오면 상당히 귀찮고 짜증나고 힘들어질 거다.
그러니까 우리 평생 보지 말자. 여기 오지 마. 너희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아.
***
시간은 흐름은 빠르다. 어느 새 이종족의 본격적인 침략이 시작된 지 2년이 흘렀다.
이종족의 침략은 처음에는 효과적이며 치명적이었다. 인류에게 있어 이종족은 이제껏 만나본 적 없는 새로운 적이었으니까. 같은 인류와 싸우는 것을 가정해 만들어진 무기들은 이종족에게 효율이 좋지 않았다.
인류는 이종족들에게 수많은 도시를 빼앗겼으며 전투를 벌일 때마다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인류가 입은 경제적 피해는 세계대전에 버금갈 정도였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우리 비텔교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가장 강한 세력을 갖고 있는 이종족을 타격해 섬멸했으며 인간들도 이종족을 상대하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이종족을 대상으로만 하는 무기가 개발되었고, 너무 잔인해 개발 중지되었던 무기들이 이종족을 상대할 때만 사용한다는 조건을 달고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종족의 침략 1년이 지나자 인류는 나나 성전사들 없이도 이종족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
물론 가끔 나타나는 사도나 대족장급의 이종족은 인류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으며 잡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그런 이종족의 수는 적었고 내가 항상 최우선으로 그런 이종족을 잡으러 다녔기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중간에 새로운 이종족이 등장하면서 이종족의 움직임이 활발해진 때가 있었다. 지금 밝혀졌지만 그 이종족이 연락과 이동을 담당했었지. 이종족의 새로운 움직임에 다시 인류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역시나 극복해냈다. 연락과 이동에 있어선 이쪽이 더욱 우위에 있었으니까.
이종족은 이제 지하 레지스탕스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수준이 됐다. 그들은 더 이상 침략군이 아니라 저항군이었다. 전멸을 피하기 위해 지하로 숨어들어 발악하는 저항군 말이다.
이종족의 침략으로 인해 공황 비슷할 정도로 타격을 입었던 세계 경제도 이종족으로 인해 다시 회복되었다. 이종족과의 전쟁을 위한 물자 생산덕분에 경제가 다시 부흥된 것이다.
이종족으로 인해 크게 이득 본 분야도 있었다. 바로 소재분야. 이종족의 시체와 그들이 갖고 온 장비들은 분석되었고 우리 세계에 없는 새로운 물질들은 이제껏 세상에 없던 새로운 소재로 재탄생되었다.
그 소재로 인해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수많은 물품들이 제작되었지.
세상의 발전이 가장 가속화 되었던 시기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시절이었다는 말이 있었다시피 이종족과의 전투는 인류의 발전을 한층 더 빠르게 당겼다.
새롭게 개발된 소재와 천문학적인 투자로 인해 전투분야가 빠르게 발전한 것이다. 그 중 일부는 민간분야에까지 퍼져 사람들의 삶을 좀 더 쾌적하게 바꾸는데 일조하고 있다.
물론 이종족의 침략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바로 우리 비텔교다. 신도 증가율이 완만해질 때 일어난 이종족의 침략 덕분에 다시 엄청난 수의 신도가 비텔교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지금에 와서는 세계 인구의 약 90%가 비텔교 신도가 되었다.
물론 ‘군주의 위엄’ 효과를 보기 위해 가입한 자들이 절반 정도 되기에 완전한 비텔교도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 해도 엄청나게 강화된 신체능력을 포기하면서까지 비텔교에서 나가려는 자는 거의 없을 것이기에 그들 대부분이 언젠가는 진짜 비텔님을 믿는 비텔교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여하튼 진짜 신도인지 가짜 신도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비텔교라는 큰 틀 안에 들어온 사람이 세계 인구의 90%나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제 세상에서 비텔교를 빼고는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작은 동네 가게에서부터 대기업까지, 가정에서부터 정부까지. 모든 곳에 비텔교의 영향력이 존재했다.
신도가 유나 한 명이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정말 많이 컸구나. 한상.
큰 건 나만이 아니었다. 그락카르 또한 컸다.
오크 대족장.
듀키츠를 이기고 두 번째 ‘각성’을 이룬 그락카르를 막을 수 있는 오크는 없었다. 연전연승. 그락카르 휘하에 있는 오크들이 나설 것도 없이 그락카르 홀로 나서 모든 적을 정리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카록에 의해 진정한 ‘대족장’으로 추대되었다.
모든 오크의 대족장 그락카르.
겨우 100명 데리고 다른 도시로 이동하던 어린 오크가 정말 많이 컸다.
하지만 전쟁이 거의 마무리되어 소강상태에 들어간 이쪽과 달리 오크 쪽은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이 세상을 내게 바쳐라.
대족장이 된 그락카르에게 카록이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당연히 그락카르는 카록의 말을 따랐다. 오크 족을 재정비한 후 그락카르와 듀키츠, 오르히 등의 대족장, 대군주들이 병력을 나누어 맡고 북으로 진격을 시작한 것이다.
북부 오크들이 1년간 달려 남부에 도착했듯 북쪽으로 진격한 그락카르와 다른 오크들도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적을 만나지 못했다. 만나봐야 소수의 적뿐.
지금 거의 예전에 살던 지역에 근접했으니 슬슬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가겠지.
잘 됐다. 지금도 많지는 않지만 이종족이 꾸준히 지구로 넘어오고 있는데 그락카르가 이끄는 오크들과 싸우기 시작하면 지구에 신경 쓰기 힘들어지겠지.
파이팅. 그락카르.
***
강제적으로 축복받은 자를 만들어내는 인간들의 전략은 인간들의 전력을 크게 강화시켰고 파죽지세로 진격 중이던 ‘죽지 않는 자’의 군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게 만들어줬다.
‘병력의 질을 높여 성벽 방어의 효율을 높이고, 시체의 수를 줄여 적의 병력 충원을 느리게 하며, 불필요한 인간을 죽여 남는 자원을 전방에 지원한다.’라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던 ‘강제 축복’ 전략은 성공하는 듯 보였다.
단기적으로는 말이다.
인간들은 그 누구도 장기적으로 이 전략이 인간의 파멸을 앞당기게 될 것이란 것을 몰랐다.
모든 왕국과 제국에서 동시에 ‘강제 축복’ 전략을 실행한 후 전체 인구수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지배자들의 생각 속에서 그들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쓰레기였지만 실제론 그들이 존재함으로써 제국과 왕국에 큰 이익을 안겨주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싼 노동력.
먹다 남은 음식만 줘도 부려먹을 수 있었던 저렴한 비용의 빈민 노동력은 전문성이 없어도 되는 단순노동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공사장에서 돌이나 흙을 나르거나, 똥과 오물로 가득한 더러운 배수로를 청소하거나, 밭을 갈고, 자갈을 고르는 등의 정식 시민은 절대 하지 않을 더럽고 힘든 일들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빈민들이 사라지고 그런 부분까지 시민이 담당하기 시작하니 일의 효율이 내려가고, 제대로 처리되지 않으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 비용이 높아지고, 물가가 비싸지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인류의 생산력은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거만이 아니었다. 대량으로 늘어난 시체. 구덩이를 파 수백 구씩 묻었고, 한 곳에 묻힌 수백 구의 시체는 자연의 자정작용의 한계를 넘어서서 썩기 시작했다. 썩은 시체들로 인해 일어난 오염은 주변 땅을 죽음의 땅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렇게 죽음의 땅으로 바뀐 곳이 수백 곳이었다.
단기적으로는 옳은 듯이 보였던 ‘강제 축복’ 작전. 하지만이 작전은 소규모로 사용하여 단점이 크게 드러나지 않을 때나 쓸모 있는 작전이었고 이번처럼 도저히 부작용을 메꿀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로 사용하자 오히려 인류의 전력을 깎아먹기에 이르렀다.
‘강제 축복’을 받아 강해지긴 했으나 그들은 무적이 아니었기에 죽어나갔고, 지도자들은 다시 ‘강제 축복’을 사용하려 했으나 무한한 듯 보였던 빈민이 더 이상 없었기에 할 수 없었다.
결국 강맹하게 버티던 전방 방어선은 반 년 만에 무너지기 시작했고, 방어선을 넘어선 ‘죽지 않는 자’의 군세는 파죽지세로 인간들의 땅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전방 방어선을 제외하면 오히려 예전보다 약해진 인간들은 아베네고가 이끄는 군세를 막지 못했고 애초에 5~10년을 예상했던 인간들의 파멸은 그보다 훨씬 빠른 2년 만에 찾아왔다.
아직 인류가 완전히 멸망한 것은 아니었지만 세력이 깨지고 흩어져 숨은 것에 불과하기에 아베네고는 군세를 일부 인간들의 땅에 풀어놓는 정도로 마무리하고 인간들의 시체로 만들어낸 대부분의 군세를 이끌고 다른 이종족을 향해 침략하기 시작했다.
< 205 비텔교 vs 오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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