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대족장 vs 대군주 2 >
[듀키츠 시점]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억!]
두근.
강렬한 외침. 외침 속에 담긴 거대한 힘이 느껴진다.
까아앙!
두근.
그리고 이어지는 강렬한 부딪힘. 두 번째 격돌을 위해 쇄도해온 녀석은 방금 힘없이 날아갔던 어설픈 전사가 아니었다.
연이어 도끼가 부딪힐 때마다 거대한 힘과 힘의 충돌로 인해 일어난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풀이 뜯겨져 날아가고 나무가 휘청거렸다. 그리고 동시에 내 깊은 곳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두근.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서고, 등뼈를 따라 개미가 기어가는 듯하다. 힘을 다해 쥔 도끼자루에 땀이 차오르고, 도끼가 부딪힐 때마다 강한 충격으로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이 느낌. 오랜만이다. 너무나도 오랜만이기에 낯설지만... 반갑다. 반갑고, 반갑고 또 반갑다.
두근.
심장이 강하게 뛰고 동시에 심장을 옥죄는 이 느낌.
긴장감.
도대체 이런 괴물이 어디서 나온 걸까. 일단 이곳 태생은 아니다. 피부색, 생김새, 옷차림, 도끼의 모양 등등 모든 것에서 다르다. 야만오크인걸까. 아니면 북쪽 어딘가에 이곳과 비슷한 오크들만의 땅이 있는 걸까.
물론 어디서 왔든 전혀 상관없다. 지금 내 앞에 진정한 전사가 있다는 것만이 중요할 뿐.
난 듀키츠 드로크. 위대한 드로크의 이름을 잇는 자다.
내 조상 드로크는 이 땅에서 다른 모든 종족을 쫓아내 오크들의 낙원을 만든 영웅이다. 영웅의 핏줄은 강력했다. 드로크의 후예는 모두 강자였으니까. 그런 강자 중에서도 가장 강한 자 하나가 드로크의 이름을 물려받는다.
내가 드로크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은 역시나 드로크의 이름을 갖고 있었던 아버지를 죽인 197년 전의 일이다. 그 뒤로 형제, 친척들의 도전이 50년간 이어졌다.
드로크의 피는 역시 강했다. 형제, 친척들의 도전이 이어지던 시기에는 몇 번이고 죽을 뻔한 경험을 했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형제, 친척들의 도전이 끊겼다. 내가 너무 강해진 것이다. 너무 강해졌기에 감히 드로크의 이름을 빼앗을 엄두를 내지 못했고 내 지위는 확고해졌다. 난 오랜만에 편안한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내 몸이 치열한 전투를 원했으니까.
드로크의 땅에는 더 이상 나와 싸울 강자가 없었기에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드로크의 피를 가진 자들은 아니지만 꽤 강한 전사들이 있었다. 그들을 찾아 낙원을 헤맸다.
처음엔 힘들었다. 낙원은 넓고, 소문에만 의지해서 전사들을 찾아다녀야 했으니까. 소문은 정확성이 매우 떨어졌다. 강자가 있다고 해 찾아가면 대부분 헛소문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낙원을 떠돌았다. 가끔 날 긴장하게 만드는 전사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몇 십 년 떠돌았을 때 카록께 새로운 능력 하나를 받을 수 있었다.
-위대한 자의 자취 : 일정 수준 이상의 강자를 느낄 수 있다.
그 능력은 강력한 전사의 위치와 그가 가진 힘의 크기를 어림짐작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거리가 한정되어 있었지만 꽤 넓었기에 강자를 찾아다니는 내 여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약 100년 전, 낙원에서 더 이상 날 긴장하게 만드는 전사를 찾을 수 없었다. 내 능력에 잡히지 않는 강자가 혹시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십여 년을 더 헤맸지만 없었다.
난 드로크의 땅으로 돌아왔다.
‘없으면 키우자.’라고 생각했다. 세상을 떠돌며 만났던 강자의 수보다 드로크의 이름을 노리고 도전해왔던 강자의 수가 더 많았다. 역시나 강력한 드로크의 피 때문이겠지.
그러니 드로크 밖의 땅에서 강자가 생기길 기다리느니 차라리 드로크의 피를 이은자를 키워 그들의 도전을 기다리자는 마음이 들었다.
드로크로 돌아온 나는 많은 암컷에게 씨를 뿌려 아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세상에 나갔다. 세상을 떠돌며 강한 암컷을 찾아다녔다. 기준치에 미치지 못해 무시했지만 제법 강한 암컷들도 있었다. 강한 암컷에게 드로크의 피를 뿌리면 더욱 강한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강한 암컷들은 대부분 각자의 터전에서 높은 위치에 속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거부하면 납치했고, 반항하면 때려 부쉈다.
그렇게 세상을 떠돌며 강한 암컷을 찾아 임신시키는 일을 반복했다. 역시나 더 이상 강한 암컷을 찾을 수 없을 때까지 떠돌았고, 더 이상 강한 암컷을 찾을 수 없을 때 드로크의 땅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열심히 아이를 낳게 했다.
난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 그러니 내 아이도 강할 것이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강자도 더 많이 나올 테니까.
그리고 지금.
난 며칠 전만 해도 거대한 지루함 속에서 최선을 다해 뿌린 씨앗들이 어서 자라나 열매를 맺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적당히 자라난 열매가 몇 있기는 했지만 아직은 제대로 익지 않았기에 수확하지 못하고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강력한 힘을 가진 강자가 느껴졌다. 내가 느낄 수 있는 상대의 힘의 크기는 두루뭉술하기에 정확하지 않지만 최소로 잡아도 내가 정해놓았던 열매들의 상한선보다 더욱 높았다.
바로 박차고 나와 이곳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만나게 된 강자는 괴물이었다. 어린 괴물. 아무리 많이 쳐줘도 20살? 어쩌면 10살 정도일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어린 오크. 그런데 나와 한 치도 물러나지 않고 공방을 주고받을 정도의 강자였다.
어찌 저 어린 나이에 이런 강함을 가질 수 있었을까. 나는 물론이고 1,000년 전의 영웅 드로크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내가 괴물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
“구르아아아아아악!”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쿠워어어어어어억!”
상대도 기쁜 모양이다. 당연한 일이다. 저 정도의 강자다. 상대할 강자가 없기에 느껴야 하는 공허함은 나와 같겠지.
그래서 더 슬펐다. 이 싸움이 끝나고 나면 난 또 기나긴 기다림 속에 빠져들어야겠지. 내일이 두렵다.
***
마수드가 듀키츠에 대해 말해줄 때 난 나름대로 듀키츠를 상상했다. 상상속의 듀키츠는 예전에 만났던 인간 전사의 오크판이었다. 살면서 만난 모든 이를 떠올려도 가장 강한 자가 그 인간 전사이니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모습을 듀키츠에게 투영 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니 그 인간 전사보다 더욱 강했다.
지금의 나는 예전에 인간 전사와 싸웠을 때보다도 훨씬 더 강해져 있었다. 남부로 오는 동안 형제들과 매일 결투를 한 것이 절대 헛일이 아니었다. 덩치는 당시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졌고, 가진 능력도 몇 가지가 더욱 발전했으며, 꿈속의 인간이 받은 축복을 간접적으로 받았다.
거기에 남부에 내려온 후에도 꾸준히 강해졌다. 따로 카록의 축복을 받은 적은 없지만 꾸준히 덩치가 커지고 힘이 강해졌다.
그렇게 강해진 날 상대로 듀키츠는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만났던 가장 강한 자가 인간 전사에서 듀키츠로 바뀌었다.
인간 전사를 상대할 당시의 나였다면 눈앞의 듀키츠와 도끼를 몇 번 부딪치지도 못하고 팔이 부러지거나 도끼를 막지 못해 몸 어딘가에 도끼가 박혔을 것이다.
퍽!
“쿠흑.”
듀키츠의 발이 옆구리를 찼다. 남부의 다른 강자들과 달리 싸울 줄 아는 자다. 도끼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을 무기로 사용한다.
온갖 능력의 보조를 받는 나에 맞설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듀키츠이니 그의 발차기 또한 강력했다. 내장에 가해진 충격이 엄청나다. 이대로 나만 손해 볼 수 없지.
쾅!
“구륵.”
듀키츠의 도끼와 얽혀 있는 미로크의 자루를 잡고 있던 한 손을 놓고 주먹을 휘둘러 듀키츠의 면상에 박아 넣었다. 한 발이 내 옆구리에 박혀 있는 중이기에 자세가 흐트러진 듀키츠는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내 주먹을 허용했다.
듀키츠는 머리가 한껏 뒤로 젖혀진 상태에서도 도끼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얼굴을 직접적으로 맞아 제정신이 아닐 텐데 대단하다.
한 손으로만 잡고 있는 미로크가 내 쪽으로 밀리기에 급히 뻗었던 주먹을 빼 다시 양손으로 미로크를 잡았다. 하지만 한 번 밀리기 시작한 기세를 반전시킬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뒤로 몸을 뺐다.
한 번, 한 번의 공방이 위협적이다. 단 한순간의 실수로 죽을 수 있다고 내 본능이 경고 하고 있었다.
정말 이렇게 까다로운 적은 처음 만났다. 모든 공격이 그때, 그때 내 취약한 부분을 향해 날아왔고 상대의 움직임 패턴을 읽을 수 없었다. 강력한 신체능력을 갖고 있고 매 공격이 치명적으로 강력했다.
도끼만이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사용해 공격해왔고 맷집이 뛰어나며 두려움을 몰랐다.
만나 본 적은 없지만 더없이 익숙한 모습이다. 이건 마치... 나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 같다.
강력한 신체능력과 변칙공격을 해오는 모습이 하나부터 열까지 나와 비슷하다. 약점만 찾아서 공격해오고 몇 대를 때려도 멀쩡한 모습으로 반격해온다. 내가 이렇게 짜증나는 스타일이었던가.
물론 아무리 짜증나도,
“크흐..”
즐거움이 더욱 크지만.
***
“듀키츠의 강함은... 내 예상을 뛰어넘는군.”
“강해보이긴 하군.”
노르쓰 우르드의 말에 미흐로크가 별 감흥 없이 대답했다. 미흐로크에게 그락카르와 그에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는 듀키츠의 모습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었다. 북부 오크들은 카록이 강함을 주면 그 강함에 걸 맞는 적도 준다고 믿는다. 그러니 미흐로크에게 그락카르가 강해진 만큼 그에 걸 맞는 적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노르쓰 우르드에게는 놀랄만한 일이다. 그는 그락카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지금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니까. 노르쓰 우르드는 그락카르의 스킬을 전부 알고 있다. 더 이상 노르쓰 우르드의 도움 없이 스킬의 설명을 읽을 수 있는 그락카르지만 노르쓰 우르드가 물으면 숨기지 않고 대답해줬다.
저번 오르히와의 싸움 이후로 ‘성난 자의 외침’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고 그 외에도 여러 면에서 더욱 강력해진 그락카르를 보며 노르쓰 우르드는 확신했다. 그가 가진 1,000년의 기억 속 강자 중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고.
그런 그락카르에게 비견 될 정도로 강하다니.
‘지금이 오크의 최전성기다.’
노르쓰 우르드는 확신했다. 1,000년 내에 없었던 최고의 강자가 동시에 둘이 출현했다.
‘만약 저 둘이 함께 오크를 이끈다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최선은 그락카르가 이기고 듀키츠를 부락에 받아들이는 거지만 듀키츠가 이겨도 큰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일단 둘 다 살아남기만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과연 둘 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한 방, 한 방의 공격이 목숨을 위협하는 공격을 서로에게 퍼붓고 있는 둘이다. 저 치열한 싸움에서 과연 둘 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럴 가망은 없어보였다.
‘둘 다 죽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좋은 기회다. 듀키츠가 혼자 왔으니 함께 가서 공격해야 한다. 듀키츠를 없앨 절호의 기회다.”
‘괜찮은 생각이다.’
마수드의 말에 노르쓰 우르드가 반색했다. 막상막하인 둘의 싸움에 여기 있는 강자 중 하나만 가서 도움을 줘도 급격히 그락카르에게 승기가 기울 것이다. 그렇게 하면 듀키츠를 죽이지 않고 생포하는 것도 가능할 터.
“전사의 싸움에 끼어든다고? 역시 이곳의 형제들은 이해할 수가 없군. 한 번 끼어들어봐라. 근처에 가기도 전에 내 손에 죽을 거다.”
오르히가 나섰다. ‘혹시?’라고 생각했던 노르쓰 우르드의 희망은 바로 사라졌다.
“휘하의 병력은 군주의 힘이다. 끼어든다고 해서 흠이 되지 않는다.”
“멍청한 소리군. 전사는 스스로의 힘으로 싸운다. 형제의 힘을 자신의 힘이라고 하다니. 넌 전사가 아니군.”
“헛소리하지마라. 난 위대한 대군주다.”
북부와 남부가 가진 힘의 개념이 부딪쳤다. 오르히와 마수드의 대화는 점점 거칠어졌고 둘은 서로를 향해 강하게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즐거운 구경이 하나 더 늘었군.”
캅카스가와 미흐로크는 말리기는커녕 둘이 잘 싸울 수 있게 거리를 벌려줬다. 곧 오르히와 마수드가 싸우기 시작했다.
노르쓰 우르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병력을 움직여 그락카르를 도울 순 없다. 그러려고 했다간 지금 오르히와 마수드가 그러는 것처럼 북부와 남부의 전사들이 둘로 나뉘어 싸울 것이다.
‘지켜볼 수밖에 없군.’
그는 그락카르와 듀키츠 둘 다 살아남길 간절히 빌었다.
< 203 대족장 vs 대군주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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