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대족장 vs 대군주 2 >
“도착했다. 형제. 잠자는 폭군 듀키츠의 요람에.”
마수드가 25일이라고 했지만 그거보다 더 빠른 18일 만에 가장 강한 대군주 듀키츠의 땅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수드가 강한 형제긴 하지만 역시나 무르다. 이 거리를 25일이나 걸린다고 하다니.
이곳 남부에 내려온 후 남부의 법칙에 따라 전투를 위해 떠나기 전에 형제들이 모일 시간을 주고 식량을 준비하는 등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었다.
그건 전사의 모습이 아니다. 이번에 꿈에서 인간을 보고 깨달았다. 인간이 전사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전사인 내가 전사다운 행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노르쓰 우르드가 이곳의 형제들을 위해 그들에게 맞춰 새로운 모습을 보이라고 해서 따랐지만... 왜 내가 이곳에 맞춰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진정한 전사가 해야 할 행동을 버리고 말이다.
언제 전사가 싸우러 가는 중간과정을 생각했던가. 가다가 먹을 것이 있으면 먹고 먹을 것이 없으면 굶는 게 전사다.
이제부턴 그러지 않을 생각이다. 전사가 전사다운 행동을 하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포기하게 만드는 게 옳다. 그런 약한 전사는 어차피 전투에서 전사답게 싸우지도 못하고 죽을 테니까.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남부의 약한 형제들에게 맞춰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들이 날 따라와서 진정한 전사가 되든지 중간에 낙오해 전사가 아닌 삶을 살아가든지 둘 중 하나다.
이번 행군에도 날 따라나섰던 형제 중 반 이상이 중간에 떨어져 나가지 않았던가. 이 정도 이동도 따라오지 못하는 형제는 전장에서 죽어 카록의 가까운 곳에 가지 못한다. 그런 형제들은 차라리 싸우지 못하게 만드는 게 옳겠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묻겠다. 형제.”
“또 그건가. 이곳의 형제들은 겁이 많군.”
오르히가 지겨워하며 마수드가 화날만한 말을 했지만 마수드는 신경 쓰지 않고 나만을 바라봤다. 여기까지 오면서 마수드는 내게 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했다.
-정말 잠자는 폭군 듀키츠와 싸울 건가.
일곱 번이던가 여덟 번이던가. 똑같은 질문을 계속 던졌었지.
‘잠자는 폭군’ 마수드가 말해준 듀키츠의 별명이다. 그 말을 듣고 가장 궁금했던 건,
-잠자는?
폭군이면 폭군이고 아니면 아닌 거지 ‘잠자는’은 왜 붙어 있는 건지 모르겠다.
-세상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군주이기에 폭군이라 불렸지만 지난 50년 동안 아무 활동도 하지 않았으니 ‘잠자는’이라는 수식어가 붙고 그의 영지는 요람이라 불리기 시작했지.
-그 정도면 죽은 거 아닌가.
-죽진 않았을 거다. 듀키츠가 죽었다면 듀키츠의 영지는 네다섯 개로 찢어졌을 것이다. 그의 밑에 있기에 대군주라 불릴 수 없지만 대군주 못지않은 힘을 가졌다고 알려진 자만 셋이나 있으니까. 알려지지 않은 자 중엔 몇이나 있을지 모르지.
-그거 반가운 이야기군.
대군주 하나와 싸우러 왔는데 셋이 더 있다니. 정말 즐거운 일이다.
마수드는 듀키츠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 아마 내가 그와 싸우는 것을 재고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겠지. 마수드의 의도와는 다르게 듀키츠에 대한 설명을 듣고 더욱 더 그와 싸우고 싶어졌다.
-1강 8중 3약의 열두 대군주 중 듀키츠를 제외한 나머지 열하나는 대군주가 된지 50년이 넘은 자가 없다. 왜 그런지 아나?
모른다. 당연히 모르지. 마수드도 내가 모르는 걸 알 텐데 왜 물어본 건지 모르겠다.
-전부 듀키츠에 의해 죽었기 때문이다.
그렇군.
-듀키츠는 한시도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그는 점령이 아닌 전쟁만을 즐겼지. 그래. 마치 형제처럼 말이다.
그래. 그게 진정한 전사다. 영지 따위 가져봐야 뭔 소용인가. 영지가 넓으면 할 일만 많지 전투를 많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듀키츠는 대군주가 있는 곳이라면 얼마가 걸리든 찾아왔고, 싸워 죽였다. 종국에는 대군주가 된 이후에도 자신을 숨기는 자들까지 나타났을 정도지.
멍청한 겁쟁이들 같으니.
-듀키츠는 그런 자들조차 찾아 죽였다. 진정한 폭군이었지. 오로지 한 명뿐인 대군주. 누구도 듀키츠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만약 그가 50년 전에 갑자기 멈추지 않았다면 지금도 대군주는 그 하나뿐이겠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듀키츠가 그만큼 강하다는 거다. 다른 대군주와 비교해서는 안 된다. 지금의 대군주들은 대군주가 된지 50년도 되지 않은 애송이들이다. 그만큼 약하다. 듀키츠에 의해 죽은 내 아버지만 생각해도 지금의 그 어떤 대군주보다도 강력했다. 나보다도 말이다.
어쩐지 이상했다. 노르쓰 우르드는 남쪽에 내려가면 나 이상의 강자들이 넘쳐날 거처럼 말했었다. 그런데 막상 내려와 보니 내 전력을 이끌어낼 정도의 강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게 듀키츠 형제가 다 죽여서 그런 거였군.
-하지만 듀키츠는 다르다. 그는 과거 지금보다 강력한 대군주들이 군림했던 시기에도 최강이었던 자다. 대군주가 된지 200년이 넘은 괴물. 그런 자가 듀키츠다. 솔직히 말해 형제도 혼자서는 힘들다. 그러니 돌아가서 일단 다른 대군주를 공격해 합류시키고 그들 모두와 함께 듀키츠를 쳐야 한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제안이었다. 만약 이미 경험했던 이 지역 형제들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마수드에게 전사도 아니라고 폭언을 퍼부었을 거다. 하지만 난 이미 이곳 형제들의 ‘약함’에 적응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약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약하다. 그렇기에 그냥 거절만하고 말았다.
지금도 그냥 거절만 할 생각이다. 듀키츠는 약한 마음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내 형제이기에 모욕해서는 안 된다.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
“갈 생각이군. 그렇다면 나도 간다.”
그러면서 몸을 살짝 떤다. 마수드는 듀키츠를 두려워하는군. 두려움이란 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지만 잘 안다. 날 보는 적들의 시선과 몸짓에서 느낄 수 있었으니까.
“무리할 필요는 없다.”
난 왜 마수드가 듀키츠에게 가는 걸 꺼리는지 알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대군주였다. 그리고 듀키츠가 모든 대군주를 죽였다고 했지. 아마도 마수드는 자신의 아버지와 듀키츠가 싸우는 걸 봤을 거다. 그 때 듀키츠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겠지. 그걸 알기에 마수드를 배려했다.
배려란 건 암컷에게나 하는 거였지만 이곳 남부에 온 후엔 형제들에게도 배려를 하게 되었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마수드가 잠시 뜸들이다가 한 자, 한 자 힘주어 대답했다.
“... 가겠다. 형제.”
꽤 괜찮은 눈빛이다. 두려움을 이겨내려는 건가. 진정한 전사로의 길에 한 발 내딛는군.
“그래. 함께 가자. 형제.”
마수드와의 대화 후 다른 형제들에게도 돌아갈 기회를 줬다. 대군주인 마수드가 이렇게 두려워할 정도면 다른 형제들은 오죽하겠는가. 약 5,000의 형제가 돌아갔다.
온지 얼마 안 된 오르히와 오르히를 따라온 형제들은 그들을 욕했지만 난 이해했다. 그들이 살아온 세상은 그래도 되는 세상이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이다. 앞으로도 형제와 자매들에게 배려를 하는 일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사에게는 없을 것이다. 다른 형제, 자매는 몰라도 전사만큼은 배려 없이 내 기준을 관철할 것이다.
전사는 그래야 하니까.
“명예로운 전사들이여! 가자!”
나와 마수드, 노르쓰 우르드, 오르히, 캅카스가, 미흐로크 외 6만의 형제들. 듀키츠의 땅에 발을 들였다.
***
“내가 죽기 전엔 대군주께 가지 못한다!”
처음으로 만난 듀키츠의 병력. 듀키츠가 직접 온 것은 아니지만 듀키츠와 함께하는 형제 중 대군주급이라는 형제 둘이 이끄는 8만의 전사들이었다.
그리고 남부에 내려온 후 처음으로 북부의 향기를 느꼈다. 카록의 곁에 가기 위해 싸우는 우리들과 달리 그들이 부르짖은 건 듀키츠의 이름이었지만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죽기 직전까지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원래는 남부에 내려온 후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때려서 굴복시킨 후 부락에 받아들이려 했지만 이들의 각오는 남달랐다.
눈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절대 내 부락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고 죽을 때까지 싸울 진정한 전사들이란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콰직.
진정한 전사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머리에 미로크를 박아 넣었다. 이자는 카록께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죽어 좋은 곳으로 갈 것이 분명하니 죽이는 데 망설일 이유가 없지.
대군주들은 훌륭한 전사였지만 그 밑의 전사들은 여전히 남부의 ‘약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강자들 몇이 죽자 8만의 전사 중 5만이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어떻게 무기를 버릴 수 있지?”
처음으로 남부의 형제들과 전투를 한 오르히가 그 모습을 보고 놀랐다. 놀랄 수밖에 없지. 지금까지 오르히가 쌓아왔던 상식이 부서지는 순간인데. 나도 처음에 왔을 때는 많이 놀랐다. 북부에서는 전사는 물론이고 암컷과 아이도 절대 자신의 무기를 버리지 않으니까.
원래대로라면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이 살던 도시에 들어가 한동안 우리의 방식을 주입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만두기로 했다. 시간이 아깝다.
영지란 걸 가져서 뭐하나. 형제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부락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을 말이다.
하루동안 머물면서 적, 아군 가릴 것 없이 죽은 형제들의 몸에 카록께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상처를 내줬다. 비록 목숨 걸고 싸우기는 했지만 그들 또한 카록의 곁에서 만날 형제들이니까.
상처를 내는 시간이 끝나고 항복한 형제들과 함께 그들의 부락으로 향했다.
남부에 내려와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각 부락에 많은 식량이 많이 쌓여있다는 거다. 이곳의 형제들은 많은 양의 곡물을 쌓아두고 오랜 시간동안 먹으니 어느 부락에 가든 보관하고 있는 곡물이 있다.
아무리 진정한 전사라고해도 장거리를 이동하면서 굶기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원래는 적을 죽인 후 그 시체를 먹어야하지만 형제들의 시체를 먹을 수는 없으니까.
창고를 열고 카바크를 잡아 양껏 먹게 했다. 카바크가 넘쳐나는 마수드의 땅이 아니기에 나도 곡물을 먹었다.
마수드의 말에 의하면 요람은 남부 지역의 4분의 1정도 되는 크기를 가지기에 중심까지 가려면 열흘은 걸릴 거라 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 시간동안 굶어서는 제대로 싸울 수 없다.
힘을 보존한 채 듀키츠와 싸우기 위해 식사가 아니라 체력을 채운다는 느낌으로 억지로 곡물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요람의 중심을 향해 계속해서 이동했다.
그리고 3일 후,
-구르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폭군이다.”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울려퍼졌고 그것을 들은 마수드가 긴장한 채 말했다. 그가 말하기 전에 이미 저 외침의 주인공이 듀키츠임을 알았다.
온몸의 모든 털이 쭈뼛 설 정도로 강렬한 외침. 듀키츠가 아니면 그 누가 이런 고함을 지를 수 있을까.
열흘은 지나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일찍 만나다니. 운이 좋군.
곧 저 멀리서 한 형제가 맹렬하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앞으로 내달렸다. 듀키츠와 싸우는 것은 나다.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다.
나도 빠르고, 듀키츠도 빠르고. 우리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크다.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지는 듀키츠의 모습은 정말 컸다. 이제껏 내가 만났던 어떤 형제보다도 더. 그리고 나보다도 더. 우리 둘은 달리던 속도 그대로 부딪쳤다.
쿠와앙!
미로크와 듀키츠의 도끼가 격돌했다. 그리고,
우득.
내 팔에서 나는 묘한 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뒤로 날아가 땅을 뒹굴었다.
살면서 경험한 적 없는 무지막지한 힘이다. 예전에 북쪽에서 거대괴물을 이끌고 나타났던 인간 강자보다도 더한 힘이었다. 날 날려버리다니.
팔도 부러진 건 아니지만 뼈가 살짝 어긋났다.
빡. 우드득.
주먹으로 쳐 뼈를 다시 원래상태로 보냈다. 강렬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밀려오는 강렬한 감정으로 인해 고통이 묻혔다.
“크흐..”
기쁘다. 정말 너무 기쁘다. 이 한방으로 알 수 있다. 내 인생 최고의 적이란 것을 말이다.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억!]
-스킬 ‘성난 자의 외침(2단계)’가 사용됩니다.
땅을 박차고 듀키츠를 향해 쇄도했다.
< 202 대족장 vs 대군주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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