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지도자 vs 지도자 >
“그걸 꺼내주시겠어요?”
-직접 나서실 생각이십니까? 저희에게 맡기시는 게...
“나서지 않을 거면 여기 온 이유가 없어지잖아요.”
수호자들만 싸우게 할 거면 내가 여기에 올 필요가 없다. 난 한국에 있고 수호자들만 이곳에 보내도 되니까. 직접 싸우는 것. 그게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이곳에 온 이유다.
이종족의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된 그 날. 브라질에서 직접 싸웠을 때 내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 난 상당히 강했다. 하지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수호자들의 강함은 그락카르에 비견된다. 즉, 내 곁에는 그락카르가 다섯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개인이 갖기엔 엄청난 무력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범위를 지구 전체로 넓히면? 부족하다.
지구의 인간은 약하다. 비록 비텔교가 자리 잡고 내 ‘군주의 위엄’ 효과를 받은 인간들이 수십 억 있고, 내게 축복을 받은 인간이 수천 명 있다고 하더라도 1:1로 족장급 이종족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은 내가 유일하다.
수호자까지 포함해 단 여섯. 이 지구상에 족장급 이상의 강자가 단 여섯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적의 수준을 그락카르 급까지 올린다면 상대가 수호자 다섯밖에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없어진다.
너무 적다.
그락카르가 종족 전체를 따져도 두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강자지만 우리 지구를 침략해온 이종족은 지금까지 다섯 종. 각 종족에서 한 명씩만 그락카르급이 넘어와도 수호자는 다른 이들을 지킬 수 없게 된다.
그럼 나머지 대족장급과 족장급은?
최근 성전사들도 제법 강해졌다. 지금 시중에 나온 총보다 구경이 높은 성전사 전용 총도 만들고, 이종족과의 전략, 전술도 어느 정도 완성했다.
하지만 성전사 전체와 대족장급 다섯이 싸운다고 하면 난 대족장급 다섯 쪽이 이길 거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그만큼 강하다.
아. 물론 한 번에 그락카르 급 이종족 다섯이 덤벼오고 하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만약 일어나면 어쩔 건가. 그냥 죽을 건가? 일어날지 말지 모르지만 그래도 대책은 세워둬야 할 것 아닌가.
그러니 성전사를 도와 적 강자를 싸울 절대 강자가 이쪽에 한 명 더 필요했다. 적어도 그락카르 급의 강자가 말이다. 그리고 난 브라질에서 일어났던 전투에서 내게서 그런 가능성을 봤다.
그 날의 난 꽤 강하긴 했지만 절대로 그락카르나 수호자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 싸우면서 난 내 전투에서 어색함을 느꼈다. 분명 모든 스킬을 다 사용해가며 싸웠는데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 부족한 뭔가가 있으면 더 잘 싸울 것 같았다.
고민했고, 결국 그 부족했던 것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손이 허전했던 거다.
-여기 있습니다.
바닥에 그려진 검은 원에서 내가 카일라에게 맡겨뒀던 것이 나왔다. 그것의 손잡이를 잡았다. 묵직한 단단함. 그걸 잡는 순간 허전했던 손아귀에 가득 찬 듯한 느낌이 전해진다. 그걸 잡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졌다.
“미로크...”
미로크였다. 아니지. 미로크는 오직 하나만 존재하고 그락카르가 갖고 있지. 미로크를 닮은 도끼였다. 지구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여 고생해서 만든 지구 최고의 무기.
“미로크 투.”
-이름이 좀...
주변에서 왜 이름을 이렇게 붙이냐고 이상하다고 했지만 내게 의미 있는 이름이다. 나도 그락카르로서 미로크에 대한 모든 감정을 느꼈고 그락카르에 비하면 덜할지도 모르지만 미로크가 죽었을 때 느꼈던 상실감도 상당했다.
사랑까지 똑같이 느낀 건 아니고 그냥 친근함 정도? 그래도 친한 친구가 죽은 듯한 느낌을 받았었지.
“크흐..”
이런 또 이상한 소리를 냈네. 습관이다. 도끼를 잡을 때면 마치 그락카르가 된 느낌이라 가끔 나도 모르게 이런다. 물론 오크 특유의 콧소리완 전혀 다르다. 그 콧소리는 인간으로선 흉내 낼 수 없는 음이라서 말이야.
“그럼 보조 부탁합니다.”
-절대 무리하지 말아주십시오.
“네. 걱정 마세요. 전 절대 죽지 않아요.”
죽어도 다시 살아나거든요.
-시작하겠습니다.
카일라가 뭔가를 외우며 지팡이를 들었다. 그녀의 기운이 뻗어나가 이종족 넷에게 달라붙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이종족 넷의 몸에서 뭔가가 일어나 그 기운에 대항하는 것도 보였다.
덧없는 반항이다. 그들의 것보다 카일라의 기운이 훨씬 강했으니까. 카일라의 기운은 자신에게 대항하는 이종족의 기운을 잡아먹고 이종족의 몸에 침투했다. 그 순간 이종족들의 움직임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약간이지만 둔해졌다. 카일라의 특기 중 하나인 저주 능력이었다.
내뱉는 언어의 느낌과 날아가는 기운의 형태를 봐서는 전에 보여준 ‘부패’라는 능력 같다. 상대의 신체능력을 떨어뜨리고 내부 장기에 조금씩 데미지를 가한다고 하던가. 뛰어난 능력이긴 하지만 이것 하나만이라면 다른 수호자와 비견되기에 부족하다.
하지만 비슷한 능력이 10개 이상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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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텔님의 능력으로 모든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나도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연이어 다른 능력을 가하는 카일라. 순식간에 온갖 저주 능력이 이종족을 덮쳤다.
이젠 눈에 뛸 정도로 둔해졌다. 둔해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안색도 나빠지고 얼굴을 찡그린 자도 있다. 온 몸에 여러 가지 충격이 가해지고 있을 테니 당연히 고통도 느껴지겠지.
이렇게 저주를 건 후 시체를 이용해 시간을 끄는 것이 원래 카일라의 전법이다. 물론 비슷한 실력을 가진 적과 싸울 경우다.
그리고 나도 비슷한 능력을 갖고 있지.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내 입에서 흘러나온 여성의 비명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날 향해 달려오던 이종족 넷은 물론이고 다른 수호자들과 싸우던 이종족들까지 전원이 멈칫했다.
-비통의 비명 : 시전자를 적대하는 모든 이가 비명을 듣게 된다. 고통 혹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는 대상이 근처에 있을 때 시전가능하다. 비명을 들은 자는 물리, 정신 등 모든 종류의 능력이 10% 하락하고, 머릿속에서 울리는 비명으로 인해 정신집중하기 힘들어진다.
상대를 약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그락카르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 능력이다. 하지만 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지. 오히려 상대가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더 좋다. 혹시라도 이 비명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 거라면 나도 안 쓰는 걸 고려해보겠지만 내 적에게만 들리는 거니까. 별 상관없다.
리자드맨, 카티쉬, 엘프, 드워프. 내가 도망치는 걸 방지하려고 하는 건지 넓게 퍼져서 반달진형으로 이쪽을 압박해오고 있다. 전혀 도망칠 생각이 없는데 말이야. 누굴 먼저 공격해야 할까. 사실 그건 뻔하다. 이미 정해져 있는 사실이지.
엘프.
원래 게임에서 한 파티를 전멸시키고 싶으면 가장 먼저 힐러와 서포터를 공격하면 된다. 괜히 힐 빵빵하게 들어가는 탱커를 공격할 필요가 없지.
탁.
몸을 낮추고 발을 놀려 엘프를 향해 달렸다. 난 그락카르처럼 뛰어서 단 번에 적에게 날아가는 짓은 하지 못한다. 그건 맞아도 안 죽을 자신이 있을 때나 하는 짓이다. 나도 꽤 단단하긴 하지만 그락카르처럼 미사일 맞아도 안 죽을 거 같을 정도는 아니니까. 최대한 사리면서 움직여야지.
당연하게도 내가 엘프에게 접근하는 걸 이종족들이 가만있을 리 없다.
콰훙!
리자드맨의 충격파가 굉음을 내며 날아온다. 하지만 약하다. 예전에 그락카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비통의 비명’을 썼을 때, 그 상대가 리자드맨이었다. ‘비통의 비명’은 그 효과 이상으로 리자드맨을 약화 시켰었지.
지금 내 앞에 있는 리자드맨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강력하고 빠른 충격파를 쏘아내지만 아까 쏘아냈던 충격파에 비하면 현저히 약하다.
보라색 빛에 둘러싸인 미로크 투를 리자드맨이 있는 곳으로 휘둘렀다.
파확!
미로크 투에 맞은 충격파가 깨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빠르고 강력한 충격파지만 이미 수백 번 이상 경험한 능력이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데다가 언제나 리자드맨의 머리 위에서 생성되어 일직선으로 날아온다는 것을 파악한 상태이기에 가볍게 요격할 수 있다.
적이 리자드맨만 있었다면 여기 오기 전에 두려워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악신의 하수인!”
내 앞을 가로막은 드워프가 도끼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멍청한 놈. 직접 겪어본 게 아니면 믿지 말라는 말은 들어본 적 없냐. 비텔님을 만나본 적도 없을 텐데 나쁜지 착한지 니가 어떻게 아냐.
난 직접 만나본 적 있다. 아주 착하고 아름답고 자비로운 분이셨지. 그리고 불쌍하고 말이야.
그런 분을 험담하지 말란 말이야!
“크아아아압!”
“우어어어어!”
드워프와 난 서로를 향해 온 힘을 다해 도끼를 휘둘렀고,
쾅!
“쿠허헉!”
도끼와 도끼가 부딪치며 굉음이 일었고 드워프가 뒤로 튕겨져 나갔다.
내가 그락카르보다 약하긴 하지만 어디 가서 힘으로 지진 않는다. 아딜도 힘만 따지면 나한테 한수 접어줄 정도라고. 나랑 카일라의 저주로 힘이 잔뜩 떨어진 네가 막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란 말이다.
아쉽게도 튕겨나간 드워프는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는지 떨어질 때 제대로 두발로 땅을 딛고 섰다. 그래. 이 한 방에 나가떨어질 정도면 대족장급일 리가 없지.
다시 리자드맨의 충격파가 날아와 그걸 쳐내고,
“캬르!”
오른쪽에서 카티쉬의 기척이 느껴져 급히 돌아봤다.
퍼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벅!
날 향해 날아오던 카티쉬가 검은색 에너지 덩어리 수십 발에 연타당하며 튕겨 나갔다. 저래서 그락카르처럼 무식한 놈이 아니면 높게 뛰어선 안 되는 거다. 움직임이 예측되기에 쉽게 표적으로 삼을 수 있거든.
저 검은 에너지 덩어리가 카일라가 가끔 ‘수준 떨어지는 직접 공격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직접 공격 능력의 수준이 떨어진다며 제대로 써먹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그런 감이 있긴 한 거 같다. 수십 발을 정통으로 맞은 카티쉬가 4~5m정도 튕겨나간 후 잠깐 정신없어 하는 정도가 다니까. 대족장급을 저렇게 만드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지만 수호자라는 위치를 생각하면 좀 약하지.
충격량은 높은데 실제 피해량은 높지 않은 능력인건가. 이대로 달려들어 카티쉬를 공격할 까 했지만,
-목표 했던 자에게 가시면 됩니다.
카일라의 목소리가 들려와 걱정하지 않고 그대로 엘프를 향해 달렸다. 뒤에서 기척 여러 개가 느껴지는 걸 보면 카일라가 다른 시체를 꺼내 지원한 모양이다.
콰훙! 콰훙! 콰훙!
리자드맨이 ‘비통의 비명’에 어느 정도 적응했는지 충격파가 빠르고 강해졌다. 전부 쳐내다가는 제자리에 멈춰 있기만 해야 할 것 같아 이리저리 마구잡이로 뛰며 피해가며 움직였다.
아직 완전히 정신 차린 것은 아닌지 정확성이 떨어져서 간신히 피하며 전진할 수 있었다.
우웅.
녹색막이 내 사방에 나타났다. 날 가두려는 건가? 가뒀다고 가만있을 순 없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리자드맨이 날리는 충격파와 뒤에서 쫓아오는 드워프의 합공에 당할 테니까.
곧바로 전기를 뿜어냈다.
지지지지지지직.
하지만 전기는 생명체를 마비시키는 능력을 가진 대신 위력 자체는 약한 편이라서 녹색막을 약간 엷게 만들긴 했지만 뚫지는 못했다.
바로 미로크 투를 휘둘렀다.
끼기기기기기긱.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처럼 상당히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녹색막은 단단했다. 내가 전력으로 휘두른 미로크 투에도 버텨냈다. 하지만 미로크 투를 뒤덮고 있는 보라색 빛, ‘착취하는 손’이 녹색막의 에너지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녹색막은 순식간에 옅어졌고,
파창.
그대로 깨져나갔다. 0.1초정도 움직임이 멈췄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대족장급 이상과 싸우는 중에는 엄청난 시간이다.
급히 녹색막이 깨진 곳으로 튀어나갔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녹색막에 가로 막혔다. 지체하지 않고 다시 깼다.
파창. 파창. 파창. 파창. 파창. 파창.
끊임없이 녹색막이 생겨나 내 진로를 방해했고 빠르게 미로크 투를 휘둘러 녹색막을 깨나갔다. 대단하다. 녹색막을 치는 속도가 정말 빨랐다. 나와 카일라의 저주에 의해 괴롭힘 당하는 상태에서도 이 정도라니. 그락카르처럼 무식하게 그냥 달려들었다간 큰일 날 뻔 했다.
2초 정도 걸음이 늦춰졌다. 뒤에서 쫓아오던 드워프를 상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쪽으로 이목을 집중하니 드워프와 다른 기척 몇 개가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카일라가 시체를 보내 드워프를 막은 모양이다.
이제 리자드맨과 엘프에게만 신경 쓰면 되는 건가.
다시 엘프를 향해 달렸다. 녹색막이 계속해서 내 앞을 막았다. 어차피 계속 녹색막이 생길 거 그냥 미리 미로크 투를 휘둘렀다.
파창. 파창.
미로크 투가 휘둘러지는 중간에 생겨난 녹색막들이 깨져나갔다. 이렇게 하니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래도 움직임에 제약이 생기는 것은 분명해서,
콰훙! 펑!
리자드맨의 충격파에 몇 번 당했다.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기에 정타로 맞은 것은 없었지만 빗겨맞아도 충격이 상당했다. 내가 그락카르였으면 그냥 몸으로 때웠을 텐데 말이야.
좀 더 리자드맨에 신경을 쓰며 방금 전보다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조금 느려지긴 했지만 착실하게 엘프를 향해 접근해갔다. 엘프가 크게 원을 그리며 리자드맨이 있는 곳으로 몸을 피했다.
똑똑하네.
혹시 그냥 뒤로 도망쳤으면 오히려 훨씬 빨리 내가 잡혀 죽었을 거다. 난 아직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게 아니니까. 약 80% 정도의 속도로만 달리며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전속력으로 달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공격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저렇게 리자드맨 뒤로 숨으면 난 어쩔 수 없이 저리 접근해야 한다. 리자드맨의 충격파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거리가 가까울수록 피하기 힘들다. 멀리서는 잘 피하던 그락카르도 죽이기 위해서 접근할 때면 몸으로 때웠었지.
어떡하지. ‘성난 자의 외침’을 쓸 수 있으면 가볍게 뚫을 수 있겠지만 난 딱히 그락카르처럼 조울증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서 현재 30% 정도 쌓여 있는 감정을 100% 만들 방법이 없다.
“으음...”
끝없이 날아오는 충격파와 내 앞을 막는 녹색막을 깨뜨리며 뾰족한 수가 없을까 고민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엘프와 리자드맨은 조금씩 뒤로 물러나고 있기까지 했다. 저걸 쫓아갔다간 언젠간 잡아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상당히 위험하고 짜증나고 귀찮을 거다.
그락카르라면 머리아프다고 생각하는 거 멈추고 그냥 앞으로 달리겠지만... 난 그락카르가 아닌 걸.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카일라의 시체와 싸우고 있는 드워프를 향해 달렸다.
< 199 지도자 vs 지도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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