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본격화되는 전쟁 >
세상 모든 종족의 공적 ‘죽지 않는 자’
무슨 세상의 종말을 가져올 막을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그렇게 위험한 존재가 아니었다. 과거 그와 싸웠던 몇 번의 전투에서도 모든 종족이 모든 힘을 모아 싸운 것이 아니라 각각 조금씩 전사를 차출해 함께 싸웠던 것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쉽게 물리치고 봉인할 수 있었다.
공적이고 강하긴 하지만 물리치겠다고 마음먹으면 언제든 처리할 수 있는 존재, 죽지 않지만 위협적이진 않은 존재, 각 종족에게 위협적인 존재로서 지도자들의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는 존재. 그게 ‘죽지 않는 자’ 아베네고의 위치였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그마저도 많이 퇴색되어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아베네고의 존재는 잊히고 제국의 지배자 몇몇만 기억하는 상황에서 거대괴물 등의 군세만이 인류의 적으로서 지배를 정당화하는 일에 이용되었다.
그렇기에 인류, 아니 인류의 지배자들은 아베네고를 상대로 시간을 끄는 일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적당히 병사들을 희생시키면서 시간만 끌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병사들을 징병해 그먼 제국에 보내면서 핵심 전력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볼라즈가 죽고, 그먼 제국이 멸망했다.
그먼 제국의 멸망은 각국의 지배자들에게 위기감을 심어줬다. 정확히는 그먼 제국의 멸망이 아니라 볼라즈의 죽음이.
제국은 멸망해도 볼라즈는 죽어서는 안 됐다. 그런데 죽었다. 그리고 그가 죽었다는 것은 자신들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위기감을 느낀 지배자들은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구국의 영웅이 될 병사를 모집한다!”
‘죽지 않는 자’와의 싸움이 시작된 이후 언제나 그랬듯 인간들의 모든 왕국, 제국에서 빈민가에서의 징병이 이어졌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다른 모습이 펼쳐졌다.
“내가 먼저 왔소!”
“병사님! 저부터 뽑아 가십시오. 저 아주 튼튼합니다!”
“저리 꺼져! 내가 먼저 왔다고!”
빈민가의 남녀노소 모두가 서로 병사가 되겠다고 징병관 앞에 줄 섰다. 그들이 줄 선 이유는 징병관들이 내건 이유가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의무 복부 1년.
-복무기간이 끝나는 즉시 정식등록.
-정식등록과 동시에 거주지와 경작지 제공.
-지원자 1명당 가족 1명 즉시 정식등록.
-지원자 1명당 가족에게 소정의 지원금 지급.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원래는 그냥 끌려가서 몇 십 년을 의무적으로 복무해야하며 가족들의 정식등록도 그 긴 세월동안 살아남아야지만 가능했다. 그런데 병사가 되자마자 정식등록을 해준다니. 다른 것 다 떠나서 이것만으로도 빈민들을 깊은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단 한 번 있는 기회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다. 다음부터는 무조건 강제징병이며 그 누구도 징병에서 피해가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운 좋게 안 끌려갈 수도 있지만 징병관들이 마음만 먹으면 대부분은 끌려간다. 그러니 어차피 끌려갈 거 파격적으로 좋은 조건에 끌려가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연령제한, 성별제한도 없다.
라는 것도 크게 작용했다.
나이 들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노인들, 아이가 너무 많아 먹여 살리는 것이 큰일이었던 아이들, 심지어 다쳐서 몸이 불편한 자들이 지원했다.
징병관은 그들을 차별하지 않고 병사로서 받아들였다. 그리고 약속했던 가족 정식등록을 모든 이들 앞에서 즉시 시행했다. 곳곳에서 정식등록증을 받아들고 기쁨에 날뛰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징병관의 말을 의심하던 사람들도 그 모습을 보고 달려 나와 징병관 앞에 섰다. 3분의 1, 빈민가 인구의 거의 3분의 1이 징병관 앞에 섰고 징병관들은 그들을 전부 받아들였다.
***
프람 제국 서쪽에 있는 작은 왕국 부르트. 그곳에서도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징병이 이루어졌다.
“맛있다. 정말 맛있어.”
걸신들린 듯 빵과 닭고기 스튜를 입안에 우겨넣는 10대 중반의 소년, 아달하드는 부드러운 빵과 따뜻한 스튜를 태어난 이래 처음 먹어봤다.
빈민가에서 먹을 수 있는 건 만든 지 한참 지나 딱딱한 빵과 물 정도가 다다. 스튜가 어려울 게 없는 음식이긴 하지만 빈민가에선 그런 여유도 없었다.
집안을 데울 땔감도 없는데 따뜻한 음식을 조리할 땔감이 있을까.
빵의 양을 늘리기 위해 밀가루와 물을 넣어 스프를 만들어먹는 것도 어느 정도 사는 집이나 가능한 것이다. 땔감도 돈 주고 사야하기에 빈민가 사람들에게 땔감은 겨울에 얼어 죽기 직전에나 잠깐 쓰는 귀중품이니까.
아달하드의 옆엔 수천의 빈민가 사람들이 아달하드와 비슷한 모습으로 배식 받은 빵과 스튜를 먹고 있었다.
음식만이 아니었다. 깨끗한 파란색 옷과 검도 하나씩 받았다. 훈련을 마치고 정식 병사가 되면 갑옷과 투구 등 일체의 장비를 지원해주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병사가 되길 잘했어.’
아달하드는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징병관 앞에 선 선택이 정말 훌륭했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런 음식도 먹어보지 못했을 것 아닌가. 닭고기가 들어간 따뜻한 스튜라니. 빈민가에 남았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입에 대지 못했을 음식이다.
그리고 오면서 정식 병사가 되면 급여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꼭 호강시켜드릴게요.’
아달하드는 번쩍거리는 갑옷과 무기로 차려입은 채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자신을 상상했다. 너무 좋았다.
“다 먹었으면 정식병사가 되기 위한 훈련장으로 이동한다!”
‘드디어.’
아달하드는 긴장하며 검을 꽉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훈련이 이어질지 모르지만 자신은 반드시 정식병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당당히 어머니에게 돌아갈 수 있으니까.
‘저 사람은 좀 강단이 있어 보이는데. 주의하자.’
눈을 날카롭게 뜬 채 주변에서 함께 걷는 사람들을 살폈다. 모든 사람이 경쟁자로 보였다. 저들을 이겨야만 정식병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어도 버틴다. 죽어도..’
“모두 이곳에 서라!”
도착한 곳은 1,000에 달하는 빈민가 사람들이 들어가도 남아돌 정도로 거대한 원형 훈련장이었다.
‘왜 이렇게 빨갛고 축축할까.’
바닥이 이상하게 빨갛고 축축했지만 곧 의문을 접었다. 그것 외에도 의문점은 많았으니까.
훈련장을 둘러싼 높은 목책 위에는 고급스런 옷을 입은 사람과 병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엄청 높은 분들이겠지?’
고급 옷을 입은 사람들도 대단해보였지만 그 옆의 건장한 체구에 완벽히 장비를 갖춰 입은 병사들이 더 대단해 보였다.
‘나도 저 사람들처럼 되겠어.’
목책 위에 선 사람 중 빈민가 사람들이 입은 파란색 옷과 비슷하지만 더 화려하게 꾸민 옷을 입은 노인이 일어나 앞으로 나섰다.
“너희들은 몰란님을 위해 희생할 명예로운 병사가 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맞는가!”
노인은 노인답지 않게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영문 모를 말에 빈민가 사람들이 대답은 하지 않고 웅성거렸다.
“대답해라! 대답하지 않는 자는 돌려보내겠다! 몰란님을 위해 희생할 명예로운 병사가 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나!”
“네! 그렇습니다!”
돌려보낸다는 말에 아달하드가 급히 대답했고 다른 빈민가 사람들도 좀 느리더라도 다들 대답했다.
“명예로운 병사로서 몰란님을 위해 그 어떤 것이든 희생할 수 있겠나!”
“네! 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답하지 않으면 병사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아달하드는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러 대답했고 다른 빈민가 사람들도 이번엔 늦지 않고 일제히 대답했다.
“날 따라 맹세해라! 나는!”
“나는!”
“모든 것을 희생해!”
“모든 것을 희생해!”
“몰란님을 따를 것입니다!”
“몰란님을 따를 것입니다!”
“좋다. 이것으로 너희들은 모두 몰란님의 명예로운 희생양들이 되었다. 이제부터 옆에 선 자를 희생시켜 몰란님께 보내줘라.”
노인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 가 앉았다.
‘희생시켜? 어떻게?’
갑자기 방법은 말해주지 않고 희생시키란 말만 하고 자리에 앉은 노인을 보며 의아해하고 있을 때,
“아악!”
“으아악!”
곳곳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아달하드도 비명이 들린 곳을 바라봤다. 몇 명의 남자가 검을 들어 주변의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건장한 몸을 갖고 있어서 경계하던 남자들이었다.
실은 그 남자들은 병사들이었다. 1,000명의 빈민가 사람들 사이에 10명의 병사를 끼어 넣은 것이다. 이 의식을 쉽게 진행하기 위해서 말이다.
영문 모른 채 서 있던 사람들은 곧 ‘희생시켜’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검을 들어 주변의 사람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도망쳐야 돼.’
평생 누굴 죽이기는커녕 때려본 적도 없는 아달하드는 감히 싸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왔던 곳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아아악!”
아달하드보다 행동이 빨랐던 누군가가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에 의해 죽임당하면서 그 생각은 좌절되었다.
‘도대체 왜...’
왜 이런 상황이 된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아달하드는 몸을 덜덜 떨며 검을 들어 주변을 경계했다. 단 한 번도 싸워본 적 없지만... 살아야했다.
‘어머니.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살아야해.’
단 하나뿐인 가족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살아야 한다. 자신이 죽으면 어머니는 홀로 남게 될 것이기에.
“으아아아아아아!”
아달하드가 비명 같은 기합을 지르며 누군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
“호오. 여섯. 이번엔 성과가 괜찮군요.”
부르트 왕국의 왕 코베르트가 파란색 안개에 둘러싸인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1,000명 중 단 여섯만 살아남은 것이지만 그 여섯이 축복 받은 자가 되었으니 이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축복 받은 자들을 병사들이 가 둘러쌌다. 둘러싼 병사들은 전원이 축복 받은 자였다. 가끔 이 ‘희생의식’을 통해 축복 받은 자들이 난동을 피울 경우가 있기에 피해 없이 제압하기 위함이다.
‘희생의식’은 사람들을 희생해 강제적으로 축복 받은 자를 만들어내는 의식이다. 너무 잔인하고 큰 준비가 필요하기에 잘 하지 않는 의식이지만 볼라즈의 죽음에 위기의식을 가진 지배자들이 ‘희생의식’을 진행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1,000명을 희생해 1~10명의 축복 받은 자를 만들어내는 ‘희생의식’, 전력은 1,000명 쪽이 더 높겠지만 1,000명을 먹이고 입히고 훈련시키는 것보다는 몇 명의 뛰어난 병사를 만들어 집중해서 훈련시키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곧 축복은 끝났다. 이번에 축복 받은 자는 셋이 병사였고 나머지 셋이 빈민가 사람이었다. 1,000명 중 병사는 겨우 다섯이었지만 베테랑 병사인 그들을 빈민가 사람들이 검 하나 들었다고 상대할 순 없었다. 그래서 빈민가 사람들은 1,000명 중 셋만 살아남았고, 병사들은 다섯 중 셋이나 살아남았다.
이렇게 병사들의 생존률이 높고 살아남기만 하면 축복 받은 자가 될 가능성이 높기에 이 의식에 자원하는 병사의 수는 많았다.
빈민가 사람으로서 살아남은 세 명은 병사들에 의해 어딘가로 끌려갔다. 이제 철저히 조사당해 약점이 잡혀 왕국을 위해 싸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시간 들여 세뇌 당할 것이고 말이다.
“자. 다음을 시작하자.”
코베르트가 말했고 병사들이 나서 시체를 다른 곳으로 날랐다. 이제 저 시체들은 한 곳에 모여 태워질 것이다. ‘죽지 않는 자’의 군세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체가 치워진 그곳에 1,000명의 빈민가 사람들이 들어찼다. 그들을 보며 화려한 파란색 옷을 입은 노인, 몰란교의 대사제가 일어나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외쳤다.
“너희들은 몰란님을 위해 희생할 명예로운 병사가 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맞는가!”
부르트 왕국의 방식과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방식의 ‘희생의식’이 인간들의 땅 모든 곳에서 행해졌다.
그렇게 몰란교는 빈민가를 싹쓸이하듯 사람들을 끌어 모아 축복 받은 자를 양산해내기 시작했다.
< 193 본격화되는 전쟁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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