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대족장 vs 대군주 >
1강 8중 3약.
남부지역에 있는 열두 대군주에 대한 세간의 평가다. 그 중 마수드는 8중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항상 이렇게 생각했다.
‘듀키츠와 겨룰 수 있는 자는 나밖에 없다.’
자신이 1강인 듀키츠보다 약한 것은 인정했다. 그는 독보적으로 강한 존재였고 마수드는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8중에서 가장 대군주 듀키츠에 근접한 자는 자신이라고 굳게 확신했다.
‘내 질풍은 듀키츠가 아니면 막을 수 없지.’
질풍의 마수드, 가장 빠른 오크, 보이지 않는 창, 멈추지 않는 대군주. 세간에 알려진 그의 별명이다. 그가 자신의 무기인 창을 번개처럼 다루고 창에 질풍이란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지만 그가 가진 다른 것도 그런 별명이 붙는데 한 몫 했다.
바로 보유한 병력.
그가 보유한 영지에는 머리까지 올라오는 갈대가 가득한 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 넓은 갈대밭 안에는 작은 호수와 늪이 여럿 펼쳐져 있는데 갈대와 호수와 늪은 카바크가 살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다.
그런 천혜의 환경덕분에 마수드는 약 5만 마리의 카바크를 목축하고 있으며 카바크를 관리하는 전용 노예만 10,000이상 보유하고 있을 정도다. 카바크는 많은 분야에서 쓰인다. 카바크는 식량도 되어주고, 길고 질긴 털과 뿔이 여러 분야에서 유용한 재료로 쓰이며, 힘이 좋기에 농사에도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카바크가 가장 유용하게 쓰이는 곳은 군대였다. 카바크 기병. 넘쳐나는 카바크 덕분에 마수드는 카바크 기병으로만 이루어진 2만의 병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힘이 세고 빠른 카바크를 탄 기병들. 그 기병들에게도 질풍이란 별명이 붙었다.
마수드는 질풍 부대 15,000을 이끌고 가르혼으로 향했다. 보통 다른 영지는 최소한 병력의 반을 영지 방어를 위해 남긴다. 하지만 마수드의 병력은 기병으로만 이루어져 빠른 기동력을 갖고 있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와 그의 군대는 일이 생긴다면 그 일이 터지기 전에 빠르게 돌아올 수 있는 질풍이었으니까.
***
강력한 적이 온다는 소리에 기다릴 수 없었던 그락카르는 병력을 이끌고 성에서 나왔다. 그리고 하루만에 마수드의 병력과 맞닥뜨렸다.
‘생각보다 더 강력하다.’
꿈에서는 기세를 느낄 수 없다. 그래서 이제껏 만났던 카바크 기병을 기준으로 적의 전력을 평가했는데 직접 눈앞에 두니 그 기세가 다른 카바크 기병보다 훨씬 강했다.
평야에서 마주보고 있는 그락카르, 마수드 양측 병력의 수는 비슷했지만...
‘우리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전력에서는 노르쓰 우르드의 생각대로 마수드측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1만. 그락카르를 제외한 모두가 나서서 감당할 수 있는 적의 수가 그 정도 일 것이라고 노르쓰 우르드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남은 5,000의 병력과 대군주 마수드를 그락카르 홀로 감당해야했다.
그건 불가능하다. 그락카르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대족장과 5,000의 정예 전사를 상대로 이길 수는 없다. 아니 솔직히 직접 보니 그락카르와 마수드가 1:1로 싸워도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수드의 기세가 강렬했다.
대군주에 대한 기억은 전대 주술사의 기억에도 있기에 오르히보다 강할 거란 생각은 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100살이 넘은 대족장. 대족장이 된지 몇 십 년이 지나 그 실력이 완숙해진 자. 대군주들이 그런 존재들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끽해야 가장 강하다는 200년 이상 산 대군주정도가 그락카르와 비슷한 강함을 갖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완전히 계산이 빗나갔다.
‘이대로 싸운다면 무조건 진다.’
물론 이길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성난 자의 외침.’
자신만이 아니라 속한 무리의 일원 전부의 힘을 두 배로 만들어주는 능력. 그락카르가 그것만 발휘한다면 이길 수 있다.
‘이길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압도적으로 이기겠지. 하지만...’
그건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어제 떠나기 전 확인한 바에 의하면 현재 분노는 71%. 남부에 도착했음에도 강자를 만나지 못해 화가 쌓여있는 상태지만,
“크흐.. 크흐흐.. 크흐..”
저렇게 강자와 만나게 됐다고 실없이 웃으며 좋아하는 상태로는 나머지 29%를 채우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노르쓰 우르드. 사과하겠다. 솔직히 요즘 형제의 말을 조금 의심하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해 본 것이라곤 허약한 자들밖에 없어서 말이다. 그런데 저렇게 훌륭한 강자가 나타나다니. 크흐..”
노르쓰 우르드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락카르는 똑똑하다. 분명 이 전투가 자신들에게 불리하고 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다는 건 죽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죽음의 위기가 코앞에 닥쳤는데도 저렇게 좋아하다니. 그만이 아니라 그의 옆에 있는 캅카스가와 미흐로크, 그리고 친위대들 모두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기뻐하며 흥분하고 있었다.
‘전사란 족속들은 정말 이해가 안 되는군. 내가 남부에서 살았던 주술사의 기억을 물려받아서 그런 것일까?’
같은 전사계급이지만 새롭게 그락카르의 부락에 합류한 13,000의 전사들은 표정이 사색이었다. 겁을 잔뜩 집어먹었다. 싸울 수나 있을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노르쓰 우르드는 자신이 오히려 저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강하다. 정말 강해. 내가 이제껏 만났던 그 어떤 오크 전사보다도 강하다.”
“그렇군. 형제와 비교하면 어떤가.”
오크는 천성적으로 상대의 기세를 읽을 수 있다. 그건 노르쓰 우르드도 마찬가지지만 축복을 받을 때마다 그 천성이 더욱 정확해지므로 이곳에서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그락카르라면 상대의 전력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비교하면... 모르겠군. 지금 상태라면 비슷하지 않을까? 물론 내가 이길 거다. 항상 이길 생각으로 싸웠고 항상 이겼다.”
똑똑한 그락카르지만 전투에만 들어가면 머리가 멈추는, 아니 머리 쓰는 걸 거부하는 것 같다. 노르쓰 우르드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전력이 열세라고 그냥 죽어줄 수는 없으니까. 생각하고 또 생각한 결과 이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락카르. 대군주는 형제에게 맡기겠다.”
노르쓰 우르드가 전 진역의 선두에서 거대한 카바크를 타고 있는 위풍당당한 모습의 마수드를 가리켰다.
“그리고 캅카스가와 미흐로크는 형제들을 이끌고 이곳에서 싸워야 한다.”
“여기에서? 적에게 달리지 않나?”
“왜 여기에 있어야 하나. 그락카르와 함께 달리겠다.”
“우리도 저기 있는 강자들과 싸울 것이다.”
“그락카르가 적 족장과 제대로 싸울 수 있도록 우리가 봐줘야 한다.”
당연히 캅카스가를 비롯한 오크들에게서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족장급만이 아니라 대전사급까지 나서서 노르쓰 우르드의 말에 반발했다. 그들로선 적을 눈앞에 두고 돌격하지 않고 가만있는 것은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고 경험해 보고 싶지도 않았다.
“뒤를 봐라. 새로 합류한 형제들이 잔뜩 움츠리고 있다. 우리가 저들을 버리고 달린다면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적에게 당할 것이다. 우리는 명예로운 강자로서 약한 전사들이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줘야 하지 않나.”
“그렇긴 하지.”
“강한 전사는 약한 전사들이 제 실력을 발휘해 싸울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하긴 하지.”
“우리가 봐주지 않아도 저쪽 족장도 그락카르와 결투를 하고 싶어 하겠지. 우리는 명예로운 강자니까 약한 형제들을 돕는 게 맞는 거 같다.”
‘명예로운 강자’라는 말이 친위대의 마음을 한순간에 바꿔버렸다. ‘명예’와 ‘강함’은 전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다. 결국 다들 노르쓰 우르드가 말한 대로 하기로 결정했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락카르를 제외한 병력은 방어진형으로 최대한 버티고 그락카르를 홀로 적 우두머리를 치라고 보내는 것. 그게 노르쓰 우르드가 생각한 최선의 전략이었다.
그락카르를 홀로 마수드와 싸우라고 보내는 것은 솔직히 죽으라고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곳의 같은 오크이기는 하나 이곳의 오크와 북쪽의 오크는 다르다. 북쪽의 오크라면 당연히 그락카르와 1:1 결투를 벌였겠지만 이곳의 오크라면 그락카르를 상대로 합공하는 걸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그락카르라고 해도 마수드와 카바크 기병의 합공에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십중팔구 죽겠지.
그래서 보내는 것이다. 죽을 위기에 처하라고 말이다. 마수드와 싸우지 못하고 카바크 기병에게 합공을 당한다면 분명 그락카르는 화를 낼 것이다. 그락카르가 죽기 전에 남은 분노 29%를 채울 수 있다면... 승리는 이쪽의 것이다.
그러니 그락카르가 ‘성난 자의 외침’을 쓸 때까지 최대한 방어적으로 싸우며 전력을 보존해야 한다. 물론 분노가 100%가 되기 전에 그락카르가 죽는다면 방어적으로 싸우든 뭘 하든 상관없이 질 것이다.
“더 이상 할 말은 없겠지? 그럼 난 간다.”
그락카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적을 향해 달렸다. 대군을 향해 혼자 돌격해야한다는 걸 들었음에도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억!”
그락카르의 고함이 전장을 울렸다. 그리고,
“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마수드 역시 강렬한 고함을 지르며 카바크를 움직여 그락카르를 향해 마주 달려왔다.
‘뭐지? 설마 정말 1:1로 싸워주는 것인가?’
뒤에 정렬한 카바크 기병을 보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거 상황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쪽으로 흘러가는군.’
상황을 보니 병력간의 싸움 없이 우두머리간의 1:1 결투가 시작될 거 같다. 어쩌면 이 결투의 승자가 병력 대결 없이 전투의 승자가 되어 상대방의 전력을 흡수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도 괜찮군.’
상정하지 못한 돌발 상황이 일어났지만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전투 후 15,000의 기병이 결과를 승복하지 않고 덤벼 와도 괜찮다. 적에게 마수드가 있고, 없고는 큰 차이를 만들어낼 테니까.
***
‘대군주급이다.’
마수드는 독보적으로 큰 덩치를 가진 야만오크가 자신 못지않은 강자임을 느꼈다.
‘저 야만오크를 이긴다면... 듀키츠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몇 십 년 전에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호승심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젊을 때라면 싸웠겠지만 지금은 인내란 것을 배웠지.’
싸워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곧 머릿속에서 떨쳐냈다. 1:1로 싸울 생각은 없었다. 개인의 강함도 그의 것이지만, 그의 휘하에 있는 병력의 강함도 그의 것.
괜히 전력이 앞서는데 홀로 나서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야만오크들을 우선적으로 처리한다. 다른 녀석들은 야만오크가 억지로 끌고 왔을 테니 야만오크를 전부 처리하면 알아서 항복하겠지.”
‘야만오크의 기세는 언제 봐도 일품이군.’
기병들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1,000정도밖에 되지 않음에도 정제되지 않은 난폭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야만오크의 모습에 감탄했다.
전력이 열세임을 알고 있을 텐데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내 부대가 저런 기세를 가진다면 적어도 50%이상은 더 강해질 텐데 아쉽군.’
그때, 그락카르가 홀로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나와 1:1로 싸우고 싶은 건가. 나와 같군.’
자신이 결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던 저 야만오크도 그런 마음을 먹은 듯 했다. 하지만 야만오크는 그 감정을 참지 못했고, 자신은 참아냈다. 지금도 1:1로 싸워 이기고 싶다는 호승심이 일었지만 이성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그 차이가 야만오크와 문명오크를 가르는...’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억!”
그락카르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 외침은 마수드의 가슴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확하고 강하게 불타게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호승심이었다. 그락카르의 외침이 그의 호승심에 불을 붙인 것이다. 그 불은 호승심을 억누르고 있었던 인내심과 이성을 순식간에 태워버리고 마수드의 온 몸을 달궜다. 그리고,
“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마수드 역시 강하게 외치며 달려 나갔다.
< 181 대족장 vs 대군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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