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대족장 vs 대군주 >
“가르혼의 특산품은 철과 무기다. 좋은 품질의 철이 채굴되고 그 철을 이용해 좋은 무기를 만들 줄 아는 장인이 많은 것으로 유명했기에 주변 마을에서 많이들 찾아와 무기를 사갔다. 그 외에도 꽤 넓은 밭을 가지고 있으며 주변 지역에서 가장 큰 노예 시장을 보유하고 있다. 2만이 넘는 노예도 보유하고 있다.”
“쿠훅.”
마음에 들지 않는다. 콧바람을 크게 내쉬었다. 내게 말하던 형제가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 쳤다. 저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스스로를 전사라고 부르면서 전사답지가 않다. 덩치는 대전사급이면서 저런 표정과 행동이라니. 내가 직접 진정한 전사가 되도록 교육을...
“마음에 드는 전투를 하지 못해 기분이 나쁜 건 알지만 다른 형제에게 화풀이를 하지는 말아라. 지금 형제가 화풀이를 하면 다른 형제들이 죽는다.”
하려다가 노르쓰 우르드의 말에 멈췄다.
“화풀이 아니다. 특산품이라니. 태어나서 처음 들은 단어다. 하지만 뭔지는 알겠다. 다른 형제들에게 뭔가를 판다는 거겠지. 오크가 거래를 하다니. 여기 와서 별의별 경험을 다하고 있다. 오크답지 않은 경험을 말이다. 그런 것들이 날 화나게 한다.”
“이곳이 이상하다는 건 형제도 알고 있는 것 아닌가. 형제가 화난 건 그것들 때문이 아니다.”
그건 노르쓰 우르드의 말이 맞다. 이곳이 내가 살던 곳과 다른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건 이미 질릴 정도로 알고 있다. 이미 이곳에서 몇 달 생활을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화를 낸 건... 아마도 노르쓰 우르드의 말대로 제대로 된 전투를 하지 못해 화가 싸인 거겠지.
“곧 형제가 원하는 전투를 할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마라.”
“노예 취급을 받던 형제들을 전사로 받아들이는 일은 어떻게 됐나.”
더 이상 그에 대해 말하기 싫어 말을 돌렸다. 그 일에 대해선 노르쓰 우르드에게도 조금이지만 화가 나 있는 상태니까. 이곳에 도착하기만 하면 강자들을 줄줄이 만날 것처럼 이야기했으면서 저렇게 기다리라고 태연하게 말하다니.
“그렇지 않아도 그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했던 일 그대로 하게 놔두는 것이 좋을 거 같다.”
“설마 형제들을 그대로 노예로 놔두자는 거냐.”
살짝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정말 그런 의미로 말한 거라면 노르쓰 우르드는 나와 최초로 결투를 해야 할 거다. 기절할 때까지.
“그럴 거 같나.”
“... 그럴 리 없겠지.”
다른 형제도 아니고 노르쓰 우르드다. 절대 그럴 형제가 아니다.
“그럼 왜 전사로 받아들이지 말자는 거냐.”
“봐라. 이곳의 전사 계급이 저 정도다. 그런데 오랜 시간동안 노예로 살며 싸움이라곤 해본 적 없는 형제들이 전사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모르는 거다. 해봐야 안다.”
전사는 태어날 때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지는 것이다. 끊임없이 싸우고 단련해서 말이다.
“대부분이 전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버티지 못하고 죽을 거다. 그들은 허약하니까. 그리고 이곳에서 그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필요하다고? 전사도 장인도 아닌데?”
“이곳의 형제는 너무 많으니까. 사냥만으로는 식량을 조달할 수 없다. 형제들 말고는 적이 없기에 무기의 재료도 구할 수 없다. 저 형제들을 전부 전사로 만들면 대부분의 형제들이 굶어 죽거나 무기 없이 맨손으로 싸워야 할 거다. 농사와 채광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건... 그렇겠군.”
생각해보니 노르쓰 우르드의 말이 맞다. 우린 대부분의 자원을 전투에서 얻었다. 적의 시체를 식량으로 사용했고, 적이 쓰던 장비를 재료로 무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곳엔 형제들밖에 살지 않는다. 그리고 부락에 형제, 자매, 아이가 너무 많다. 분명 이 부락의 족장은 대족장급이 아니었는데도 이 부락에 사는 형제, 자매, 아이의 수가 거의 5만에 육박한다고 한다.
5만이라니. 5만을 먹여 살리려면 사냥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고, 매일 전투를 벌여 적의 시체를 가져와야 할 것이다. 매일 전투를 벌일 수 있을 리 없으니 얼마 가지 않아 형제, 자매, 아이들은 흩어져 1만 정도 되는 규모를 유지하며 적과 사냥감을 찾아 여기저기 떠돌면서 살아가겠지. 그게 북쪽에서 우리들의 삶이었다.
“여기에서 그 형제들은 전사나 장인 못지않은 역할을 하는 거다. 형제, 자매, 아이들을 먹여 살리고 필요한 자원을 구해오는 거지. 그리고 자원이 근처에서 모두 나오는 것이 아니기에 부족한 것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다른 부락과 거래해서 가져오는 것이고 말이다.”
“그렇군.”
생각해보면 그냥 주어진 환경에 따라 사는 것 같다. 한상이 사는 세계를 봐도 그렇다. 그들은 정말 큰 세계를 가지고 있고 각 지역에 따라 생김새와 삶의 방식이 달랐다. 우리도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군. 북쪽에서는 그렇게 사는 게 맞았기에 그렇게 산 거고, 이곳에서는 이렇게 사는 게 맞기에 이렇게 사는 거다.
“알겠다. 하지만 노예는 절대 안 된다. 형제는 형제다. 형제를 노예로 삼을 수 없다.”
“그건 당연한 거다.”
“그리고 난 고기 먹을 거다. 그 농사인지 뭔지로 만드는 식물 절대 안 먹을 거다.”
이로 부수는 맛이 있어야하는데 식물은 부수는 맛이 없다. 난 절대 그런 걸 먹을 수 없다.
“그것도 걱정하지 마라. 항상 카바크 뒷다리를 가져올 테니까.”
“크흐... 그거 좋지.”
카바크 뒷다리는 큰 뿔 누의 앞다리만큼은 아니지만 뼈가 단단한 것이 꽤 별미다. 식사 시간이 즐겁겠다.
***
가르혼 옆의 평야. 그곳에서 1만이 넘는 오크 전사들이 서로에게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난장판이었다. 같은 편은 없었다. 모두가 적이었고, 모두가 아군이었다. 서로 싸우다가도 다른 자에게 함께 주먹을 날리기도 하고, 곧바로 다시 싸우고 그랬다.
훈련이었다. 제대로 된 전사라고 할 수 없는 전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결투였다.
매일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다보면 악이 생긴다. 악이 생기면 전사가 되기 위한 첫걸음을 떼는 것이다.
“왜 전사라고 불린 거지? 아이들과 싸워도 아이들이 이길 거 같다.”
여기서 미흐로크가 말한 아이들이란 북쪽의 아이들을 말한다. 그들이라면 북쪽에서는 전사라고 할 수 없지만 이곳에서 전사라 불리는 자들보다는 강한 것 같았다. 신체능력은 떨어지겠지만 전투 의지로 충분히 극복할 것이다.
“새로 합류한 형제들은 아직 전사가 아니지만 전에 합류한 형제들은 제법 전사다워졌다.”
가장 먼저 함락되어 훈련을 받은 2,000의 형제들은 이제 제법 눈에 독기가 서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락카르의 친위대에게 훈련과 결투를 가장한 구타를 당하다보면 독기가 서리지 않을 수가 없다.
독기가 서리지 않고 오히려 주눅 들어 반항할 생각도 못하는 자들은 이미 빼서 장인들에게 보냈다. 싸우다 죽는 건 상관하지 않지만 싸울 의지를 잃어버린 자는 전사가 되지 못한다. 북쪽에서도 아이들에게 똑같이 했다. 의지만 있다면 죽든 말든 계속 싸우게 만든다. 하지만 의지가 꺾인 것이 보이면 장인들에게 보낸다.
그런데 그 뒤에 이상한 상황이 펼쳐졌다. 남아있던 전사들이 악을 지르며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그들 뇌리엔 장인이 노예라는 편견이 남아있기에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그렇게 제법 발전한 그들은 지금 1,000의 친위대와 함께 가르혼의 전사들을 구타하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2,000의 전사들이 어느 정도 진정한 전사의 자격을 찾아가고 있는 반면 이번에 합류한 10,000의 가르혼 전사들은 한참 부족했다. 다른 형제들에게 맞서 싸우고 있긴 하지만 주먹에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았다.
“확실히 저들은 지금 전사가 아니다. 결투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까.”
저래선 결투를 한다고 할 수 없다. 상대를 죽일 듯 팔다리를 휘둘러야 제대로 된 결투라고 할 수 있다. 아니. 결투를 떠나서 1만이란 병력이 있음에도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는 것에서부터 전사 실격이다.
덕분에 형제들을 죽이지 않을 수 있었지만 전사답지 않은 모습에 실망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저들도 전사가 될 거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안 그런가. 형제.”
“당연하다. 형제.”
둘이 씩 웃었다. 잠시 더 다른 형제들의 결투를 지켜보단 미흐로크가 몸이 근질근질한지 살살 풀어주며 입을 열었다.
“형제들이 싸우는 것을 보고 있자니 주먹이 근질근질하군. 어떤가. 형제. 우리도 싸우는 게 말이다.”
“좋다.”
캅카스가가 기쁘게 결투를 받아들였다. 그도 다른 형제들의 결투를 보고만 있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둘의 주먹이 교차했고, 서로의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
***
-그락카르. 보고 있나?
꿈속에서 한상이 자신을 도발했다.
“정말 저 세계로 넘어가고 싶군.”
한상의 도발때문이 아니라 그 수호자들과 싸우고 싶었다. 하나하나가 정말 강해보였다. 1년 전 싸워 겨우 이겼던 인간 전사와 비슷, 아니 더 강해 보일 정도였다.
그런 적이 눈앞에 있다면 앞뒤 안 가리고 무조건 덤벼들 텐데. 문제는 한상이 내가 모르는 세상에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노르쓰 우르드에게도 물어본 적 있지만 노르쓰 우르드조차 모르는 세상이었다. 노르쓰 우르드가 모르는 세상을 내가 어떻게 알아.
빌어먹을 인간 같으니. 괜히 그 인간 때문에 몸만 더 달아올랐다. 강자와 싸우고 싶다. 죽음이 내 코앞까지 다가오는 긴장감을 다시 느끼고 싶다.
“강대한 적이 오고 있다.”
갑자기 들이닥친 노르쓰 우르드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걸 보면...
“꿈에서 봤군. 형제.”
“그렇다.”
노르쓰 우르드가 꿈에서 본 일은 거의 99%의 확률로 현실에서 일어난다. 1%를 뺀 건 처음 만났을 때 나의 죽음을 잘못 예견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는 그가 꿈에서 본 것은 전부 실제로 일어났지.
그렇다는 건 정말 강자가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는 뜻이군.
“얼마나 강하지?”
“오르히보다 더 강렬한 기운을 가진 족장이 수만의 형제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오고 있다. 여기서 대군주라고 부르는 자가 분명하다.”
대군주. 알고 있다. 아마도 이곳에서 대족장급을 가리키는 단어였지? 강자에 대한 이야기이니 내가 가장 먼저 이곳의 형제들에게 물은 이야기였고 열심히 경청했다. 그때 형제들에게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그들은 강했다. 모든 오크를 통틀어 가장 강하고 죽지 않는 존재들이라고 이야기했다. 이곳의 형제들은 대군주를 두려워하고 경외했다. 마치 그들이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 이야기는 잘못된 이야기다. 카록께서 계시는데 그들이 신일 리 없고, 내가 있는데 그들이 오크 중 제일 강할 리 없다.
여하튼 들은 것들을 종합해보면 대족장급 이상의 강자란 건 확실해보였다. 그런 강자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거군.
“그가 이끄는 전사들 전부가 카바크를 타고 있다. 우리의 전력이 훨씬 열세다. 남동쪽에서 오고 있으며 3일이면 이곳에 도착할 거다.”
“정면으로 붙으면 우리가 질 거 같은가?”
“특별한 상황이 연출되지 않으면 우리가 무조건 질 거다.”
노르쓰 우르드가 ‘특별한 상황’을 강조하며 날 강하게 쳐다봤지만 난 그가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하늘을 바라봤다. 저기가 남동쪽이다. 저쪽에 우리보다 강력한 자들이 있다는 거다.
우리보다 강하다는 건 싸워서 죽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강자가 다가오고 있다는 거다.
오르히보다 강한 강자. 우리보다 강한 전력.
“크흐..”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희열이 차올라 온 몸을 뒤덮었다.
강했으면 좋겠다.
내 몸을 찢어발길 수 있을 정도로 강했으면 좋겠다.
일수에 내 목을 잘라낼 수 있을 정도로 강했으면 좋겠다.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위축될 정도로 강했으면 좋겠다.
내 소원을 들어주소서. 카록이시여.
< 180 대족장 vs 대군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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