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대규모 침공 >
꽤 오랫동안 기자들과 질의응답시간을 가졌다. 언제까지 이것만 하고 있을 순 없으니까 이제 슬슬 끝내야겠어.
“이제 비텔교가 움직이려 합니다, 사제단과.”
여기서 왼쪽에 위치한 사제단을 쳐다보며 살짝 웃어주었다.
교주가 되었다고 해서 뭔가를 꾸미고, 격식을 차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연설에 대해선 관심을 갖고 연습하고 배웠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효과는 몇 배에서 수십 배까지 차이나기도 하니까. 반대로 못하면 좋은 말도 나쁘게 전달되는 법, 적어도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제대로 옮기고 싶었다.
살짝 여운을 준 후, 오른쪽에 선 성전사단을 보며 입을 앙다물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성전사단.”
사제단을 보면서 부드러운 모습을, 성전사단을 보면서 굳건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그들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이다.
아직 배우는 단계라서 제대로 표현했는지는 모르겠다.
“각각 ‘비텔의 자비’와 ‘비텔의 방패’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두 집단이 비텔교의 손과 발이 되어 전 세계에서 활동할 것입니다.”
‘비텔의 방패’는 해역이가 저쪽 세계의 성전사단 이름을 알려줘서 그대로 썼다. 성전사단만 이름을 가지면 불공평하니까 사제단도 이름을 붙이기 위해 저쪽 세계의 사제단 이름을 물었는데 사제는 딱히 없었다고 한다.
따로 소속을 만들지 않고 비텔교라는 큰 틀 안에서 움직였다고... 그래서 내가 가장 무난한 ‘자비’라는 단어를 붙여 만들었다. 꽤 잘 지은 것 같아 한동안 흐뭇해했었지.
“신도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비텔님의 자비를 직접 실천하고, 모두의 방패가 되어 지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가볍게 인사한 후, 퇴장.
끝났다. 실수 없이 무난하게 잘 마친 거 같다. 준비된 자동차로 가 바로 탔다.
“아.. 연설하는 건 언제나 힘들다니까.”
차에 타자마자 바짝 조여 맨 넥타이를 풀고, 셔츠의 윗단추를 풀었다. 아. 편하다. 역시 자동차는 다 필요 없고 선팅이 확실하게 된 게 최고야. 다른 사람 시선을 신경 안 써도 되니까.
“수고하셨습니다.”
“네. 벤센도 수고하셨어요.”
연설 준비는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벤센도 함께 한다. 실은 나보다 벤센이 더 많은 걸 한다. 연설문 준비부터 연설무대 준비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벤센의 손을 거치지. 정말 벤센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
나나 유나, 해역이처럼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사람들과 달리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없으면 당장 큰일 날 사람이 주변에 상당히 많다. 벤센도 그렇고 맹연, 김진서, 데니스... 당장 10명 정도 이름을 더 댈 수 있을 거 같다. 곰곰이 생각하면 더 늘어나겠지.
“김현일님이 임시전당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렇군요.”
드디어 왔군. 올 줄 알고 있었다. 김현일을 지키는 성전사들에게서 보고를 받고 있으니까. 항상 곁에 있기에 김현일의 심경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최근 비텔교로 오기로 거의 마음 굳혔다는 보고를 받았었지.
사실 김현일은 애초에 비텔교에 들어올 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다. ‘네 번째 비텔의 아이’란 호칭에는 ‘절대 평범하게 살 수 없다.’라는 부가효과가 달려있거든.
“싸우는 법을 가르칠 필요는 없습니다.”
김현일을 싸움에 내보낼 생각은 없다. 진짜 비텔님께서 선택한 위대한 성전사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평범한 인간이니까. 군인, 스파이 등을 하다가 성전사가 된 이들과 달리 무에서부터 시작해야하기에 평생 일반 성전사도 따라잡지 못할 거다.
김현일은 광고판과 비슷하다. 포장만 화려하면 된다.
“스킬이 소환 계열인 것 같더군요. 그 스킬을 숙달시키세요.”
뭐가 나오든 상관없다. 뭐든 간에 포장만 잘하면 대단해보이니까. 어차피 싸움을 시킬 것도 아니니 실속은 없어도 상관없다.
과거 세계대전 때, 전쟁 중 공을 세운 자를 불러서 전쟁기부금을 모으게 만들었다고 한다. 전쟁을 잘해서 뽑힌 영웅이지만 다시는 전쟁을 하지 못했지. 김현일이 그 비슷한 역할을 할 거다.
위험 속에서 자신을 희생해 사람들을 구하는 영웅적인 면모를 보였지만 다시는 위험한 상황에 들어가지 않을 거다.
“처음엔 위험할지도 모르니 적어도 성전사 한 팀은 곁에서 지켜보게 하세요.”
“오오. 소환이라니. 역시 비텔님께서 선택하신 분답습니다. 그럼 김현일님은 능력 숙달 훈련에 들어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벤센은 김현일을 선택한 것이 비텔님이 아닌 나란 걸 모른다. 벤센만이 아니다. 유나도, 해역이도, 맹연도.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영원히 모를 거다. 내가 말 안 할 거니까.
“비상대책위원회에서 교주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 합니다.”
“만나고 싶지 않네요.”
“알겠습니다.”
내가 그 양반들을 피곤하게 뭐 하러 만나. 누구를 만나서 설전을 벌이고, 협상하는 일은 절대 안할 거다.
“마지막으로 각 지부에서 방문 요청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한국에만 있었던 내가 외국에 나왔기 때문일까. 나온 김에 지부 순회 한 번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비텔교는 한국의 종교가 아니라 세계의 종교니 한 번씩은 들려봐야지.
“유나에게 물어봐주세요. 유나가 간다고 하면 하죠.”
“알겠습니다.”
나름 세계여행인데 나 혼자 갈 수는 없지.
***
“모두가 모였군. 다들 알다시피 오늘이다.”
토린이 좌중을 보며 말했다. 그를 비롯한 각 종족의 대표 여섯이 드디어 한 자리에 모였다.
엘프 락노르, 리자드맨 에프랏, 카티쉬 치아야, 드워프 토린, 지구로 이어지는 통로를 뚫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드워프보다도 작고 모든 종족 중 가장 신체능력이 약한 마법 종족 파르펨 투라레와 개체수가 적어 합류가 늦은 거인 종족 트롤 히간테까지.
“구으... 모두? 1,000년 전의 악신토벌에는 여덟 종족이 모였었다. 인간과 오크까지.”
트롤 히간테의 음성이 장내에 울렸다. 키가 4m는 될 정도로 큰 덩치만큼 목소리도 컸다.
“인간은 아베네고를 홀로 감당하고 있으니 당연히 참가하지 못했고, 오크는... 배신자잖습니까. 히간테.”
모두를 오만하게 굽어보는 락노르가 히간테에게 존대를 했다. 놀랄만한 광경이지만 좌중의 누구도 락노르의 태도에 놀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니까.
‘현명한’ 히간테.
1,000년 전에 있었던 비텔교와의 전쟁에도 참전했었던 명실상부 대륙 최고령이다. 물론 나이만 많다고 락노르가 그를 존중할리 없을 터. 그는 ‘현명한’이란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그 지식을 아낌없이 나에게 알려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배신자는 아니다. 그들의 본성이 원래 그럴 뿐. 3년을 참았으면 그들 나름으론 많이 참았었지. 우리가 미리 그들의 공격을 예상하고 대비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을 뿐이다.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게 맞겠지요.”
락노르가 자신의 의견을 굽혔다. 아무리 존중하는 자라고 해도 이상할 정도의 저자세지만 엘프 종족 자체가 과거 히간테에게 큰 은혜를 입은 적이 있다. 그날 이후로 엘프 종족은 다른 자는 몰라도 히간테에게 만큼은 예를 지키고 존중했다.
“그우... 토린. 오크에게 사자를 보내봤나? 그들이라면 이계의 다른 종족과 싸울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텐데.”
“물론 그랬지만... 대부분의 사자가 돌아오지 못했다.”
오크는 딱히 대표가 없다. 그렇기에 각각의 부락에 사자를 따로 보냈지만 대부분이 돌아오지 못했다.
“몇 개 부락에서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지만 최근 합류하라고 다시 사자를 보냈더니 사라졌다. 그들만이 아니라 대륙 중앙에 퍼져 있던 오크 대부분이 사라졌어. 오크들 사이에 뭔가 일이 생긴 것 같지만 그쪽에 더 이상 시간을 할애할 수 없어서 오크는 제외했다.”
“대륙 중앙의 모두가 사라졌다고?”
히간테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남쪽으로 갔군.”
곧 답을 내놨다. 카티쉬 치아야가 반문했다.
“남쪽?”
“오크의 천성은 전투다. 절대 남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는 종족이지. 그런 종족이 우리들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갔다는 이야기지.”
토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럴 거다. 그곳은 오롯이 오크의 땅이니까. 우리가 찾지 못한다면 그곳에 갔겠지. 그래서 신경 끈 거다. 그곳엔 파르펨이 없기에 연락할 수도 없고, 이계로 이동시킬 수도 없으니까.”
“좋은 판단이다. 버릴 건 버려야지. 그 단호한 결정. 토린. 넌 파린을 닮았어.”
“과찬이다. 난 그분의 발끝에도 닿지 못했다.”
파린은 1,000년 전의 드워프 전쟁 영웅이자 토린의 고조할아버지다.
“그우... 그래도 아쉽군. 오크가 함께 했으면 동족의 피해를 반으로 줄일 수 있었을 텐데.”
히간테가 마지막까지 아쉬운 소리를 했다. 수가 적은 트롤이니만큼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싶었던 것이다. 오크가 참여했다면 모든 전투에서 그들이 앞장 설 터. 피해를 반 이하로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없는 걸 아쉬워할 필요는 없지. 두 번째 정찰대가 가고 한 달이 지났다. 이제 더 이상 공격을 망설일 수 없다.”
“끼락. 동감이다. 이미 적은 두 번의 정찰대로 인해 우리에 대해 알았을 것이다. 한 달이 지났으니 우리에 대한 정보가 정찰대가 갔던 곳에서 인근까지는 퍼졌을 것이다. 시간을 줄수록 우리에 대한 정보는 퍼질 것이고 공격은 힘들어질 터. 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공격하는 것이 정답이다.”
이미 이종족에 대한 정보가 전 세계에 퍼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지만 이쪽 세상의 상식으론 한 달이면 파르펨 종족이 없는 이상 정보가 그다지 널리 퍼지지 않았을 시간이다.
토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에프랏의 말이 맞다. 투라레. 문을 몇 개나 열 수 있나.”
“1,000이 이동할 수 있는 소차원문 211개, 10,000이 이동할 수 있는 대차원문 19개를 열거다.”
파르펨의 문을 열기 위해선 엄청난 양의 고급 자원이 필요했지만 모든 종족이 힘을 합쳐 자원을 모으니 230개나 되는 문을 열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여섯 종족 전체의 전사는 수가 너무 많고, 대륙 곳곳에 흩어져 있기에 당연히 한 자리에 모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집합지 100곳을 정해 파르펨이 문을 열 준비를 하고 각 종족의 병력들이 모이게 만들었다.
그 결과 현재 각지에 모인 총 병력의 수는 약 400만.
“총 40만이군. 부족하지만 2차 공격이 시행될 때까지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충분한 전력이다.”
수는 전체의 10%정도로 적지만 그 중 다섯 번 이상 축복을 받은 전사의 수가 거의 200에 달할 정도로 정예 전사로만 채워 넣었기에 실질적으론 여섯 종족 전체 전력의 20%정도다. 그 정도면 저쪽 세계의 비텔교가 아무리 강해도 절대 쉽게 무너지진 않을 것이라고 토린은 생각했다.
“조금 더 힘을 내라. 투라레. 적어도 2년 안에 360만은 더 보내야한다.”
“재료만 가져와라. 목숨을 걸고 문을 열 테니까.”
모인 400만의 전사는 전부 이계로 보낼 생각이었다. 전사 400만은 1,000년 전 비텔교와의 전면전쟁을 벌일 때도, 아베네고와 3번의 전투를 벌일 때도 모이지 않았던 수다. 그럼에도 이런 수가 모인 것은,
“모두 투라레의 말을 들었겠지? 아끼지 말고 모든 자원을 모아라. 이번 전쟁이 끝나면 다른 세상이 우리의 새로운 터전이 될 터. 그곳에서 얻을 자원으로 잃은 자원을 얼마든지 벌충할 수 있다.”
다른 세상을 식민지로 삼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 176 대규모 침공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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