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디멘션 워 >
여기가 런던의 어딘가란 건 알겠지만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다. 난 그냥 벤센이 잡아준 자리에 나온 것뿐이라서 말이야.
“모두 알다시피 우리 비텔교는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히 비텔님께서 바라는 모든 이가 자유로운 세상을 위해 제1의 가치인 ‘자유’만을 강조하며 모든 신도, 모든 인간의 삶을 존중했습니다.”
가장 앞에 비텔교 방송팀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이 찍은 화면은 인터넷으로 전 세계 동시 생중계 될 것이다. 내가 한국어로 말하고 있으니 비텔교 신도가 아니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지만 금방 자막이 달릴 것이다.
외국어를 자국어처럼 들을 수 있는 비텔교 신도에게 자막을 만드는 것 쉬운 일이니까.
그리고 영국 내에 있는 국내외 언론에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연락했다. 3시간 전에 말이다. 그래서 얼마나 올지 딱히 기대를 안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왔다. 내가 나름 유명인이긴 유명인인가 보다. 그 급한 시간에 달려와 준 기자와 카메라맨이 거의 200명은 되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자유가, 지구의 자유가 다른 세계의 존재들로 인해 위협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엘프, 드워프, 카티쉬의 존재는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결국엔 그들과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다.
그런 사실이 남에 의해 밝혀지면 비텔교에게 좋지 않은 여론이 생길 수도 있다. 저들이 뭔가 켕기는 게 있으니 숨기고 있었을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자들이 나타날 테니까.
그래서 어차피 밝혀질 거, 이종족을 처리하러 온 김에 우리가 밝히기로 했다.
“얼마 전, 비텔님께서 제게 신탁을 내려주셨습니다. 다른 세계에서의 침략에 대비하라고 말입니다.”
내가 기자회견용으로 준비한 내용은 이렇다.
-비텔님께서 신탁을 내려주셨다. 지구의 인간을 전부 죽이고 지구를 차지하려는 이종족이 나타날 거란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대비하고 있었다.
-이종족의 침략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얼마 전 시리아 지역에서 나타났었고, IS와 전투를 벌였다. 그때도 우리는 관여했었다.
-런던에 이종족이 나타났음을 방송을 통해 알았고, 바로 출발해 어제 도착하였으며 하루 동안 추적, 전투를 벌여 적 전부를 섬멸했다.
90%의 진실과 10%의 거짓을 섞었다. 비텔교를 없애기 위해 오는 것이지만 지구를 차지하기 위해 오는 거라고 바꿨다. 비텔교를 공격하기 위해 오는 것을 곧이곧대로 알린다면 비텔교를 비난할 자가 수두룩할 거다.
준비한 내용을 차분하게 말했고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이번에 침략해온 이종족은 군대도 진압이 힘들정도로 강했습니다. 그런 자들을 비텔교가 제압했다니. 그렇다면 비텔교는 이미 예전부터 상당한 무력단체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당연히 저런 질문이 나올 줄 알고 있었다.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힘이 전제되어야만 다른 이의 존중을 받는 자유를 누릴 수 있죠. 아시겠지만 우리 교단의 특징이 강력한 신체능력입니다. 그것을 이용해 힘을 갖추고 세상의 자유를 억압받는 분들을 구하기 위해 기르던 힘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있는 것이 경찰이고 군대이지 않습니까. 비텔교는 국가를 벗어나 독립적인 세력이 될 생각이신 겁니까?”
“아닙니다. 비텔교는 어떠한 세력도 갖추지 않습니다. 신도들도 비텔교에 속한 게 아니라 그저 그분들의 삶에 비텔님이라는 신께서 더해진 것일 뿐이죠. 우린 신도들에게 소속감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제 뒤에 계시는 저분들이 바로 우리 교단의 성전사입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이셨죠.”
이 자리에 나만 온 것이 아니라 성전사들도 함께 왔다. 내 뒤에는 고위 성전사 20명이 정장을 갖춰 입고 절도 있게 서 있었다.
“강제성은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성전사를 그만두고 싶으시다면 언제든 그래도 됩니다. 그것이 그분들의 자유니까요.”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저들은 ‘진실한’ 신도들이니까.
“혹시 기자님은 아직 세상에 노예제가 존재하는 걸 알고 계십니까? 납치, 인신매매가 얼마나 성행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원래는 한두 달 후 저분들께서 일선에 나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는 자들과 싸울 예정이었습니다.”
사실 처음 성전사단인 ‘비텔의 방패’를 만들 때는 자유 수호에 관심이 없었다. 당시엔 비텔교의 세력이 약했고,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만을 매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당시 가장 무서웠던 건 다른 종교였다. 종교는 사람에게 비이성적인 일을 강요한다. 그렇기에 우리 종교에 대한 무력 섞인 공격이 충분히 가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방지하거나 막기 위해 ‘비텔의 방패’를 만들었었다.
노예라든가, 납치, 인신매매 등을 근절하자는 생각은 최근에 터키에 가서 노예 경매를 본 후에나 생각한 거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한 걸 보면 확실히 비텔교가 여유로워지긴 한 거 같다.
“하지만 이렇게 이종족의 침략으로 인해 예정보다 일찍 세상에 나오게 되었네요.”
“경찰특공대와 군대가 싸우는 영상을 봤습니다. 영상 속의 이종족에게는 총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종족을 상대하신 겁니까.”
우리가 어떻게 이종족을 상대했냐고? 사실 나도 좀 놀랐다.
***
[기자회견 하루 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유럽 각지에서 모인 사제 40명과 성전사 220명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교주님. 영국 지부를 책임지고 있는 고위 사제 김인화라고 합니다.”
“한 세 달 만인가요?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100명도 되지 않는 고위 사제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이상하지. 당연히 김인화를 기억하고 있다. 분명 ‘생명력 전이’와 ‘기력 감소’ 스킬을 갖고 있었지? ‘생명력 전이’는 고위 사제의 공통 스킬이다. 나름 치료 스킬이라고 할 수 있는 ‘생명력 전이’의 효율을 좋게 하기 위해 세 번의 축복을 내렸었지.
‘기력 감소’는 상대방을 급격히 지치게 만드는 능력이다. ‘착취하는 손’과 비슷한 듯하지만 살짝 다르다. ‘착취하는 손’은 상대의 생명력을 흡수해서 지치게 만들지만 ‘기력 감소’ 체력을 빠르게 소진시킨다. 빼앗는 것과 쓰게 만드는 것, 그 차이다.
“절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뭐. 사람이 사람 기억하는데 영광일 건 없죠.”
사제도 사제지만 풍채 좋은 220명의 성전사가 서있는 모습은 꽤 압권이었다. 정장을 입은 인상 험악한 남자들이 도열해서 날 기다리고 있으니 조직의 보스라도 된 거 같네.
“지부로 가시겠습니까? 지시하신 모든 물품을 지부에 준비해뒀습니다.”
“아. 시간이 촉박했을 텐데 수고하셨습니다.”
“그저 지도 몇 개 구하는 건데요. 신도들이 도와줘서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내가 김인화에게 부탁한 건 런던 시내에 있는 모든 하수구, 지하철 등의 지도였다.
세상이 좋아져 이제는 비행기에서도 인터넷을 쓸 수 있기에 이종족과 영국의 싸움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두 알 수 있었다. 이종족이 하수구로 들어가 숨어버린 것까지도 말이다. 가장 중요한 게 그들이 어디 있는지 찾는 거였다.
대책을 찾았고, 그 대책의 준비물로 지도를 준비해달라고 한 거다. 지금은 안 쓰는 오래된 곳도 있을 테니 전부 구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구할 수 있는 대로 전부 구해두라고 했지.
지부에 도착하니 지도가 실제 모습 그대로 정리되어 있어 보기 편했다.
그럼 시작해볼까.
“빈예츠. 아까 말했던 것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사도님.”
이종족의 위치를 찾기 위한 대책을 두 가지 마련했는데 그 중 첫 번째 대책이 바로 빈예츠였다. 빈예츠는 영혼을 다룰 수 있고 영혼들이 가지 못하는 곳은 없고 특별한 능력이 없는 한 그들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훌륭한 정찰대가 될 것이다.
빈예츠가 주변의 영혼들과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영혼을 볼 수 있는 스킬을 갖고 있는데 왜 빈예츠가 보는 영혼들을 보지 못하는 걸까. 못 보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 영혼을 봐서 뭐하겠어. 오히려 시야가 난잡해지고 이상한 것들 많이 보게 될 거다. 빈예츠처럼 영혼을 다루는 능력이 없는 이상 못 보는 게 차라리 낫지.
“이 세상은 어딜 가나 많은 영혼이 있군요. 덕분에 힘을 발휘하기 편합니다.”
아무래도 인구가 많으니까. 죽는 사람이 그만큼 많을 테고 당연히 영혼도 많겠지.
영혼의 수가 많은 만큼 빈예츠의 힘도 강해졌겠지. 어쩌면 빈예츠가 수호자 중 가장 강할지도 모르겠다. 영혼이 적은 세상에서도 다른 수호자들 못지않은 강자였었으니까. 영혼이 많은 우리 세계에선 얼마나 더 강해졌겠어.
그리고 30분 후,
“찾았습니다.”
빈예츠가 좋은 소식을 알려왔다. 다행이다. 두 번째 방법을 쓰지 않아도 되겠어. 두 번째 방법은 히르아를 불러내는 거다. 그녀의 감지 능력은 수호자 중 최고니까. 이종족을 찾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다.
하지만 히르아는 일단 나오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켜서 웬만하면 불러내고 싶지 않다.
“흠... 여깁니다.”
빈예츠에게 구글어스를 켜 실제 런던의 모습을 보여주고 어딘지 짚어달라고 했다. 빈예츠는 우리 식의 지도를 볼 줄 모르기에 이렇게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 빠르다.
“여기에서 지하로 약 10m아래에 있습니다.”
10m라... 빈예츠의 말을 들은 벤센과 정보부 요원들이 지도를 뒤지기 시작했다.
“여깁니다. 30년 전에 폐쇄된 지하철 통로가 있다고 합니다. 그게 딱 10m 깊이에 있습니다.”
요원 중 하나가 찾아냈다.
지하철 통로라... 잘 됐다. 지하철 통로라면 넓겠지. 여러 명이 한 번에 싸우기에 좋을 거다.
“통로의 너비는 4m. 작은 샛길이 하나 있으며 오랜 세월이 지났기에 벽이나 천장이 무너져 새로운 통로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4m. 그 정도면 성전사 전원이 한 번에 싸우긴 힘들 거 같고... 고위 성전사만 싸우게 하는 거로 하자. 고위 성전사도 20명이나 되니까. 수가 부족하지는 않겠지.
“현장이 그렇다네. 통로가 좁아서 전원이 함께 싸우는 건 힘들 테고 고위 성전사 20명만 싸움에 참가할 거야. 할 수 있겠어. 해역아?”
“맡겨만 주십시오.”
김해역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이번에 올 때 해역이도 데려왔다. 혹시 싸울 일이 있으면 해역이한테 맡기려고 말이다. 곧 이종족의 침략이 본격화 될 테고 나 혼자 싸울 수 있는 것도 한계에 부딪힐 거다. 그러니 그 전에 적이 약할 때 성전사들이 싸우게 해서 경험을 쌓는 것이 좋다.
“벤센. 성전사 200명으로 포위망을 구성할 수 있도록 위치 잡아주세요.”
“알겠습니다.”
***
계획은 정해졌다.
이종족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모든 성전사가 나서서 포위망을 구성하고 해역이와 20명의 고위 성전사가 싸운다. 그리고 난 근처에서 지켜보며 목숨이 위험한 자를 구하거나 다친 자를 치료해준다.
라는게 원래 계획이었다. 그런데 전혀 쓸모없는 계획이었다.
해역이와 고위 성전사들은 둘로 나뉘어 지하철 통로의 양쪽에서 이종족에게 들이쳤다. 가보니 남아있는 이종족의 수는 약 60이었다. 50아래로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았다.
그래서 약간이지만 더 걱정됐다. 곱게 키운 자식 냇가에 보내는 기분이었달까.
그런데 알고 보니 곱게 키운 자식의 수영 실력이 국가대표급이었다.
투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타타탕! 탕! 탕!
펑! 펑! 펑!
고위 성전사들의 무기는 다양했다. 돌격소총, 기관단총, 저격총, 산탄총, 권총 등. 저격총을 양손에 들고 난사하는 자도 있었고 심지어 해역이처럼 칼만 든 자도 있었다.
똑같은 모습은 하나도 없고 전부 다른 형태로 싸웠지만 그들에게 공통점이 두 가지 있었다.
강하고 멋있다.
저번에 IS와 싸울 때 성전사들이 싸우는 모습을 봤기에 제법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인간 한정의 강함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성전사는 그냥 강했다. 상대가 인간이든 이종족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60의 이종족은 그들 고유의 능력을 사용하며 반항했다. 녹색의 빛 덩어리가 방패가 되기도 하고, 화살이 되기도 하며 지하철 내를 메웠고, 드워프와 카티쉬는 강력한 신체능력을 바탕으로 육탄전을 벌여왔다.
하지만 그들은 해역이와 고위 성전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해역이는 몰라도 고위 성전사들은 처음 경험하는 적과 전투양상일 텐데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해나갔다.
압도적이었다.
20과 60의 싸움이었지만 20이 일방적으로 학살극을 펼치고 있었다. 고위 성전사들 개개인이 강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더 강한 이유는 힘을 합쳐 하나의 적을 공격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는 거였다.
동료가 맡아서 싸우고 있는 적이 있어도 자신이 그 적을 죽일 기회가 오면 망설이지 않고 총알을 박아 넣었다.
효율적인 싸움.
맨날 그락카르의 싸움만 보다보니 이런 효율적인 싸움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지구에선 명예로운 싸움보다는 효율적인 싸움이 당연한 것인데 말이다.
그리고 멋있다.
저격총을 양손에 들고 가장 멋있게 싸우는 모습을 상상해봐라. 그게 우리 고위 성전사 중 하나의 모습이다. 돌격소총을 든 자도, 권총을 든 자도, 심지어 해역이도. 다 멋있었다.
난 저렇게 못 싸우는데... 옆에서 싸우면 엄청 촌스러워 보일 거 같다. 결심했다. 웬만하면 성전사들 앞에서 싸우지 않기로 말이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온 몸에 녹색 빛을 두른 혼자 살아남은 엘프가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그래. 이해 못하겠지. 총을 처음 봤는데 어떻게 이해하겠어.
혼자 남아 분투하던 그 엘프는 결국 해역이의 검에 양분되며 전투가 끝났다. 우리 측 피해 전무, 적 전멸. 완벽한 전투였다.
***
[다시 기자회견]
“자세한 과정을 못 말씀드릴 건 아닙니다. 하지만 말씀드리려면 말이 너무 길어질 거 같군요. 그냥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구구절절하게 길게 말할 필요 없지. 사실 성전사마다 싸우는 방식이 달라서 설명할 수도 없다.
“신의 힘을 받은 성전사는 강합니다.”
정말 강하다.
< 175 디멘션 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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