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디멘션 워 >
“당신들 뭡니까. 지금 집회 신고는 하고 모인 겁니까? 그리고 집회 신고를 했든 안했든 도로를 점거하면 불법인 거 모릅니까?”
교통정리 중이었던 브라운은 몹시 황당했다. 갑자기 도로 한복판의 하수구 뚜껑을 열고 100여명의 사람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빠아앙! 빠앙!
사방에서 경적이 울려댔다.
보아하니 하나같이 미남, 미녀에 난장이들도 꽤 있는 것이 배우들의 모임인 것 같은데 ‘반지의 제왕’과 비슷한 코스프레 복장까지 하고 있었다.
‘이래서 배우들이 문제라니까. 똘끼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
브라운은 배우들이 자기들끼리 재밌자고 황당한 상황을 연출 한 거라고 확신했다. 슬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보통 이런 상황엔 어딘가에 카메라가 있을 테니까.
‘런던 경찰로서 빈틈없는 모습을 보여줘야겠군.’
여기서 제대로 된 모습만 보여준다면 자신의 출세에 자양분이 되어 줄 것이다. 브라운이 위압적으로 다가가 한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중요부위만 겨우 가린 반나체에 팔다리에 털달린 옷을 입고 꼬리까지 달고 있는 자였다.
키가 거의 2m에 가까울 정도로 큰데도 신체비율이 좋고 근육이 알알이 박혀 있는 것이 모델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 남자였다.
“어서 도로 밖으로 나가세...”
턱.
그 남자가 손을 브라운의 머리위에 올렸다. 손이 정말 컸다. 브라운의 머리를 한 손에 잡을 정도였으니까.
“뭐야! 이거 당장 안 치워!”
브라운이 화를 내며 머리를 털었지만 그의 머리에 올려진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꾸욱. 빠각!
남자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브라운의 머리뼈가 박살이 났다. 브라운에게 죽음이 찾아왔고 몸이 축 늘어졌지만 남자의 손에 머리가 잡혀 있었기에 쓰러지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이상한 곳이군. 약한데도 우릴 보고 도망치지 않다니. 멍청해.”
“저것들은 산인가, 건물인가. 건물이라면 어떻게 저렇게 크고 높을 수가 있지?”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는 짐승 속에 인간이 들어가 있어.”
“방금 인간이 죽는 것을 봤을 텐데도 다른 인간들이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아. 그냥 지켜보고만 있군.”
그들에게는 신기한 것투성이였다. 다른 세계의 다른 것들. 모두가 구경에 여념이 없을 때, 이번 정찰대의 책임자로 선정된 엘프가 나섰다.
“무슨 상관이냐. 어차피 인간의 저급한 문명일 텐데. 보아하니 우리가 차지하기에는 조금 큰 수도 급의 마을 같다. 인간은 이상하게 마을의 크기에 집착한다니까. 일단 동쪽으로 돌파해서 빠져나간 후 외곽의 작은 마을을 점령한 후 정찰 활동을 지속하겠다.”
도시가 좀 커 보이긴 하지만 그래봤자 인간의 마을이다. 도시가 아무리 커도 한계가 있는 법, 10~20분 정도면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카티쉬가 앞, 드워프가 뒤에 서라. 엘프는 중앙이다. 축복 받은 자들이 오면 우리도 힘들어지니 그 전에 빠져나간다. 걸리적거리는 인간들은 전부 죽여라.”
그렇게 다른 세계에서 온 이종족의 학살극이 시작되었다.
***
“상황은요?”
“정확한 정보가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런던 경찰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일반 경찰들의 무기로는 이종족을 상대하기 힘들 테니까요. 특공대가 투입되기 전까지는...”
그렇겠지. 일반 경찰이 든 무기라고 해봐야 권총이 한계일 텐데 권총으로 카티쉬, 드워프 같은 놈들을 어떻게 상대하겠어. 급소를 맞추는 게 아니라면 죽이기 위해서 총알 수십 발은 박아 넣어야 할 텐데 말이다.
특공대가 나선다고 해도... 저번처럼 족장급 카티쉬가 하나라도 섞여있다면 절대 막지 못할 거다.
군대가 나서도 쉽게 제압할 수 없을 거다. 저번에는 IS가 박격포, 로켓포를 쏟아 부은 후, 여러 가지 행운이 따라서 겨우 잡았지만, 런던 시내에서 런던 군대가 박격포나 로켓포를 쏘는 건 힘들 테니까.
“런던에 있는 성전사의 수는 어떻게 되죠?”
“22명입니다.”
두 팀. 적다. 영국은 비텔교의 세가 약한 편이다. 런던에는 비텔교 신도가 제법 존재하지만 런던을 제외한 지방 도시에는 비텔교가 거의 발을 붙이지 못했다. 듣기론 동양의 종교라고 무시하는 느낌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에 파견된 사제와 성전사의 수도 적다.
두 팀의 성전사와 100여명의 이종족... 저번에 왔던 수준이라면 이길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이기지 못한다고 해도 런던 경찰이나 군대가 이종족과 싸우기 위한 준비를 할 시간을 충분히 벌어줄 수 있겠지만,
“움직이지 말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피해가 클 것이다. 고위 성전사가 족장급의 축복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이종족과의 실전 경험이 아예 없다. 항상 인간을 적으로 상정하고 훈련한 상태에서 자신들보다 신체능력이 강한 적과의 싸움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물론 이 싸움은 우리 비텔교를 알릴 큰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비텔교 소속의 초인들이 목숨을 걸고 런던 시민을 지키기 위해 이계의 침략자에 맞서 싸웠다.’
괜찮은 마케팅 수단이 될 테지. 하지만 비텔교의 이름을 알리자고 신도들의 목숨을 희생할 수는 없다. 그들은 내 가족이다.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일을 진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럽에 흩어져 있는 성전사 전부 런던으로 보내세요.”
“알겠습니다.”
아마도 유럽에 있는 성전사들이 런던에 모일 때쯤이면 싸움이 끝나있거나,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것이다.
괜찮다. 이종족과 싸우려고 성전사를 모으는 것이 아니니까.
분명 살아남는 이종족이 있을 것이다. 이번에 IS에 잡힌 이종족들처럼 말이다. IS에 잡힌 이종족은 나름 괜찮다. IS는 광신도 집단이기에 비텔교 신도가 거의 없고, 있다고 해도 티를 내지 못할 테니 이종족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비텔교 신도를 데려와 이종족의 말을 통역한다고 해도 그들에게 현혹되어 다른 신을 받아들이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런던은, 영국은 위험하다. 그곳에는 비텔교 신도가 제법 있고 비텔교 신도를 이용해 이종족과 대화하는 것에 조금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걔 중에는,
‘호오. 비텔이 아닌 다른 신? 비텔을 믿으면 이런 능력을 받는데 다른 신을 믿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라는 생각으로 다른 신에게 기도를 하고 그의 밑으로 가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비텔님의 ‘기적’이 우리 세계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 것처럼, 다른 신의 ‘기적’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테니 별 효과는 없겠지만... 지구의 인간 사이에 다른 신의 신도가 생긴다는 것 자체가 우리 비텔교의 최대 위협이다.
“정보부는 최대한 가까이에서 지켜보세요. 이종족이 어디로 가는지 전부 알아야 합니다.”
런던 경찰과 군인에게 잡혀가는 자, 도망치는데 성공한 자, 시내 어딘가로 숨어든 자. 그들 모두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위치를 모른다면 숫자라도 말이다.
“그리고 저도 런던으로 가겠습니다. 준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단 하나도 빠짐없이 죽여야 한다. 아직은 다른 신이 지구에 퍼질 때가 아니다. 기자회견은 취소됐다. 그리고 난 전용기를 타고 런던으로 날아갔다.
저번처럼 은밀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다. 런던에도 비텔교 신도가 있으니 놀란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간다고 하면 된다.
그리고 다음 날, 난 런던에 도착했고 이종족은 여전히 진압되지 않은 상태였다.
***
런던에 파견된 사제는 총 넷. 스물둘이나 파견된 성전사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수다. 어쩔 수 없다. 사제의 대부분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봉사하기에 바쁘니까. 지부를 지키고 있는 사제의 수는 적을 수밖에 없다.
그 넷 중에는 세 번의 축복을 받은 고위사제도 한 명 포함되어 있었다. 세력이 약하기에 고위 사제를 보내 힘을 실어준 것이다.
런던시내학살극이 일어난 지 3일째가 된 날 아침. 고위사제 김인화, 그녀는 지금 런던 비상대책위원회에 비밀리에 호출 받아 와 있었다.
넓은 테이블에 한 쪽은 김인화와 성전사 여섯이 앉았고, 반대편에는 위원회의 사람 열하나가 앉았다. 위원회의 사람들은 하나 같이 영국 정부의 고위층 관계자들이었다. 영국에서 이번 사건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반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런던에서 영국 시민 약 1,000여명이 죽임 당했다. 세계대전 이후로 영국이 당한 가장 큰 사건인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사건의 원흉이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거였다. 이종족은 경찰 특공대, 군대와 격렬하게 싸우다가 하수구로 들어가 사라졌다. 이종족도 거의 반인 마흔 다섯이 사살당하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경찰 특공대와 군대는 그보다 큰 300여명의 피해를 입었다.
군대가 출동하기 전 일반 경찰과 경찰 특공대가 입은 피해가 너무 컸다.
그런 피해를 입고도 적을 완전히 진압하지 못했다는 것, 그건 정말 엄청난 사건이었다.
때문에 위원회의 모두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비텔교의 짓입니까?”
위원회의 인물 중 하나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닙니다.”
영국 정보부도 IS가 이번에 이종족을 노예로서 판매한 사실을 알고 있고, 그 전에 이종족과 IS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에 비텔교가 개입한 사실까지도.
세상 모든 일에 조용하던 비텔교가 침묵을 깨고, 이종족의 일에 누가 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당연히 비텔교와 이종족 사이에 뭔가 연관이 있을 거라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왜 저들이 런던에 온 건지 아십니까?”
“침략자들은 아직 우리 세계로 오는 안정된 통로를 열지 못합니다. 아마도 우연히 런던으로 왔을 겁니다.”
“침략자?”
침략자란 단어는 상당히 센 단어다. 그걸 비텔교의 고위사제가 영국의 고위층 정부 관계자 앞에서 사용했다는 건 비텔교의 공식적인 입장이라고 봐도 되는 사안이다.
김인화는 이곳에 오기 전 이미 한상에게 직접 이종족에 대한 설명을 들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의 뇌에 이 문장이 박혀 들었다.
‘비텔교 말살을 목적으로 지구로 오는 다른 신의 신도들.’
적이다. 무조건적인 적. 김인화는 이종족을 본적 없지만 이종족에 대한 적대감은 최대치로 상승해 있었다.
“보셔서 아실 겁니다. 인간을 보자마자 학살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우리와 대화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
사실이었다. cctv를 통해 이미 봤다. 그들이 경찰을 보자마자 죽인 것을 말이다. 경찰과 그들 사이에 어떤 갈등도 없었다. 그냥 죽였다. 그것은 인간을 완전히 적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우리를 말살하기 위해 온 이종족의 정찰대. 그것이 오늘 런던에 나타난 자들의 정체입니다.”
“다 됐소. 정체가 뭐든 상관없으니 그들의 위치나 말하시오. 당장 군대를 파견해서 진정한 학살이 뭔지 알려줄 터이니.”
군 장성 중 하나가 과격하게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런던의 방위를 책임지는 군의 책임자. 그가 방어하는 런던에서 학살이 일어났고 군이 출동했음에도 잡지 못하고 놓쳐버렸다.
이종족이 수로로 도망친 후 바로 군을 파견했지만 피해만 더 입은 채 그들을 놓쳤다. 그는 당장이라도 이종족의 위치를 알 수 있다면 미사일이라도 쏠 기세였다.
“그에 대해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뭔가 아는 게 있군. 기다리긴 뭘 기다린단 말이오. 당장 말하시오. 그러지 않으면 비텔교 신도 모두를 체포하겠소.”
군 장성이 위협적으로 말했음에도 김인화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침묵했다.
위원회가 침묵하는 김인화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김인화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약 10분이 지났을 때,
우우웅.
진동으로 되어 있는 김인화의 폰이 울렸다. 김인화는 위원회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지금 우리를 우습게 보는 것이오! 지금 당장 런던 시내의 비텔교 지부를 압수하겠소!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을 체포해주지! 내가 말만 할 것 같소!”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TV를 틀어주세요.”
김인화의 침착한 말에 위원회 사람들은 더욱 흥분했다. 지금처럼 중요한 시기에 TV가 무슨 말인가.
그들을 무시하고 성전사 중 하나가 태블릿PC를 꺼내들었다. 위원회 사람들이 화났지만 곧 나오는 영상을 보고 입을 다물고 집중했다.
영상 속에 비텔교 교주인 한상이 나왔기 때문이다.
-런던 시민 분들은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런던에서 학살극을 벌인 침략자들은 성전사에 의해 완벽하게 진압되었습니다.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한상의 공식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었다.
< 174 디멘션 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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