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사라지는 경계 >
“진짜 이종족이오. 확인하시오.”
“경매장과 연결된 통신장비는 옆 건물에 있으니 충분히 확인하고 와서 연락하시오.”
카티쉬, 드워프, 엘프의 사체들. 죽은 지 오래되었는지 썩어 벌레가 꼬여있다. 냄새도 지독하군. 몇몇은 견디지 못하고 건물 밖으로 튀어나가 헛구역질을 했지만 대부분은 눈살만 살짝 찌푸렸을 뿐 건물 내부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역시 돈 받고 고용될 자격이 있다는 거네. 나름 자기 분야에서 어느 정도 업적을 쌓은 사람들이니까 돈 많은 놈들에게 고용됐겠지.
“아니. 이딴 시체더미를 던져주고 어떻게 확인하라고! 진짜를 가져오란 말이야! 진짜!”
“이딴 시체 확인하겠다고 좁은 차에 껴서 2시간을 달려온 줄 알아!”
당연히 불만이 터져 나왔다. 카탈로그에 있는 이종족 여자들을 볼 줄 알았는데 그들이 보게 된 건 시체더미였으니까.
시체 확실하다. 영혼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까. 죽은 자의 몸에선 영혼이 사라지고, 당연히 그 영혼에 깃드는 신의 힘도 보이지 않는다.
가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신이 있고, 영혼이 있다. 그리고 죽으면 영혼은 몸에서 떠난다. 그러면 그 영혼은 어디로 가는 걸까. 그락카르의 생각대로 자신이 믿는 신의 곁으로 가는 걸까?
그러면 내가 죽으면 비텔님의 곁으로 가는 걸까? 하지만 느낌상 전혀 그럴 거 같지 않다. 비텔님의 곁에 수십억의 인간이 살 공간이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수십억이 아니라 수백억이 될 텐데? 그리고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은?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기억해뒀다가 다음에 비텔님 만나면 꼭 물어봐야지. 그리고 인출 수수료 20% 어디로 가느냐는 것도 꼭. 수수료 가장 많이 내는 최우수 고객으로서 물어볼 자격이 있지 않겠어?
“우리가 당신들을 어떻게 믿고 진짜 상품을 보여주지? 상품이 확인되면 이곳을 덮치려고 하는 자들도 있을 텐데.”
IS대원의 말에 움찔하는 자가 몇 명 보였다.
-작전취소다. 아쉽군. 꽤 미인이던데. 고용주에게 넘겨주기 전에 내가 몇 번 쓰려고 했는데 말이야.
‘비텔의 귀’덕분에 같이 온 자 중 하나의 생각이 들려왔다. 정말 덮치려고 했군. 하긴 수백, 수천만 달러 써서 낙찰 받는 것보다는 그쪽이 더 싸게 먹히겠지.
그런데 참... 유나와 함께 사는 숙소에서는 ‘비텔의 귀’가 발동하는 일이 없다. 신도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그런 일이 거의 없다.
그런데 세상 속으로 나오니 ‘비텔의 귀’가 수시로 작동한다. 남의 더러운 생각을 듣는 건 별로 좋은 경험이 아니다. 빨리 임시전당의 숙소로 돌아가고 싶네.
“진짜 상품은 실시간 영상으로 경매장에서 확인할 거요. 그러니 당신들은 신경 쓰지 말고 시체나 살펴보시오.”
“특히 저쪽에 있는 큰놈.”
IS대원 중 하나가 가리킨 곳을 보니 벽면에 대자로, 아니지 왼쪽 상반신이 사라진 상탠데 대자라고 하긴 좀 그런가. 여하튼 벽에 박혀있는 큰 카티쉬 남성이 하나 보였다. 미사일이라도 맞은 거 같다. 남아있는 몸체도 까맣게 그을려서 성한 부분이 거의 없다.
그런데 곰...인가? 상태가 안 좋아서 알아보기 힘드네. 카티쉬는 하나의 동물 특징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여러 종류의 동물 특징을 갖고 있는데 벽면에 박혀 있는 자는 곰 계열인 거 같다.
키릭.
IS대원 중 하나가 총을 장전했다. 순간 안에 있던 모든 남자들이 긴장하며 전투태세를 갖췄다.
“긴장하지 마시오.”
IS대원은 곰 카티쉬의 시체 앞으로 가 얼굴에 총을 겨눴다.
타타탕!
“이걸 보여주려고 한 거니까.”
총을 세 방을 갈겼음에도 곰 카티쉬의 얼굴엔 약간의 생채기가 나는 정도로 끝났다.
“지금은 긁힌 상처라도 나지. 살아있을 땐 긁힌 상처도 안 났소. 저놈에게 동료 수백이 죽었지.”
수백. 저 카티쉬가 영상이 끝나기 전에 들었던 고함소리의 주인공이겠군. 덩치는... 대전사급 오크보다 좀 작은 편이다. 하지만 가진 힘은 족장급에 버금갔겠지.
“총이 안 통한다면 어떻게 잡았소.”
상품을 확인하기 위해 온 자 중 하나가 말했다.
“로켓포 4발 먹이고, 박격포도 목숨 걸고 직격으로 두 방 먹였지.”
“그 자리에 나도 있었는데 수류탄 수십 발에 로켓포 2발을 맞고도 멀쩡했었지. 용감한 전사 나데르가 아니었으면 우리 모두 죽었을 것이오. 그가 죽음을 도외시하고 박격포를 들고 직격타를 먹였지. 그제야 좀 흔들리더군. 그때 모든 화력을 퍼부어서 겨우 잡았지.”
납득이 가는군. 그 정도면 족장급이 당하는 것도 이해 못할 건 아니다. 하지만 만약 카티쉬가 아니라 오크가 상대였다면 이 방법이 안 통했을지도 모른다. 오크의 내구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까.
아마도 저 곰 카티쉬는 박격포를 직격으로 맞아 타격을 입고 흔들린 모양이지만 오크라면 타격을 입으면 입을수록 더욱 미쳐 날뛸 거다. 상처를 입을수록 더 잡기 힘들어지지. 아마 탱크 몇 대 정도는 와야 오크 족장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20분주겠소. 여기 있는 시체들로 뭘 해도 좋소. 여성체도 있으니 시간을 하든, 칼로 찌르든, 먹든 마음대로들 하시오. 20분 후에는 각각 경매장에 연락해서 동료들에게 사실을 알리시오.”
여기도 체크해두고 나중에 성전사들을 보내야겠군. 시체도 회수하자. 이종족의 시체를 남겨둬서 좋을 건 없으니까.
고위 성전사 옆으로 다가가 오른쪽 어깨를 세 번 두들겼다. 고위 성전사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미리 약속해둔 신호 중 하나다. 다른 곳으로 갈 테니 조심하라는 뜻이지.
“오하넬. 돌아가죠.”
-알겠습니다.
더 이상 이곳에 볼일이 없다. 죽은 이종족의 시체는 내 관심 밖이다. 살아있는 이종족이 내 관심사다. 그들에게는 들어야 할 말이 아주 많으니까.
***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본부 대신 사용되고 있는 모텔로 돌아왔다. 20분 정도 걸린 거 같다. 오하넬이 빠르기도 하고, 도로 상태가 안좋아서 차가 느렸던 탓도 있다. 내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지만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그들에겐 당연한 일이니까.
“방금 두 번째 경매가 끝났습니다.”
벌써 두 개나 끝났나.
“둘 다 우리가 낙찰 받았지만 예상보다 지출이 컸습니다. 전부 낙찰 받기는 힘들 거 같습니다.”
“얼마였죠?”
“엘프 370만, 카티쉬 460만이었습니다. 둘이 각각 들고 간 돈이 천만씩이니 앞으로 둘 정도 더 가능합니다. 한 쪽에 돈을 몰아준다면 셋도 가능하겠지만 약간의 위험부담이 있습니다.”
비싸군. 물론 정식으로 노예 경매가 진행되었다면 세계의 부호들이 전부 몰려들어 그보다 비싼 돈을 토해냈을 것이다. 최초의 이종족이니까. 전설에나 나오던 존재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면 돈을 얼마를 쓰든 상관 안할 자는 넘쳐나니까.
하지만 비공식 불법 경매고, 무조건 현찰이 있어야만 참여 가능한 경매다. 그래서 조금은 경매가가 낮을 거라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높다. 우리가 준비해온 것처럼 다른 자들도 철저히 준비해온 모양이다.
“그러면 무리하지 말고 둘만 더 낙찰 받고 나머지는 포기하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둘이 한 패라는 게 드러나는 걸 감수하고 무리한다면 현장에서 돈을 합쳐서 하나 정도 더 낙찰 받을 수 있겠지만 전부 낙찰받지 못할 거라면 그럴 필요까진 없다.
하나의 이종족이라도 다른 자의 손에 들어가게 할 수 없으니 결국 무력을 써야 할 터. 어차피 무력을 쓸 텐데 쓸데없이 뭐 하러 무리까지 해가며 낙찰 받겠는가.
넷을 낙찰 받을 테니 나중에 넘겨받을 때 장소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경매에 참가한 자들의 신원은 파악 됐나요?”
“처음 보는 얼굴이 많아서 아직 반밖에 파악하지 못했지만 사진을 찍어 각국 정보부에 보내뒀으니 곧 결과가 나올 겁니다.”
아무래도 경매에 참가한 자들은 부자 본인이 아니라 대리인들이니까. 얼굴을 모르는 자가 많나보다.
“꼭 확인해두세요. 혹시나 각기 다른 곳에서 이종족을 건네받을 수도 있으니까.”
“한 명도 놓치지 않겠습니다.”
이종족은 절대 놓쳐선 안 된다. 혹시나 그들을 통해 다른 신에 대한 이야기가 퍼질 수도 있다. 나중에 이종족의 침략이 본격화되면 결국 퍼질 이야기긴 하지만 그 시기는 늦으면 늦을수록 좋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구에서 비텔교의 입지는 더욱 단단해질 테니까.
“3차 시작합니다.”
다들 노트북의 영상에 집중했다. 노트북에는 경매장에 들어간 성전사가 보내주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경매장에 들어갈 때 몸수색을 철저히 하기에 원래 못 찍었을 수도 있는 영상이지만 오하넬에게 부탁해 어제 미리 경매장 안에 장비를 넣어뒀다.
오하넬의 능력은 다른 세상에서라면 몰라도 우리 세상에서만큼은 정말 효용성이 무한한 거 같다.
-세 번째 상품은 아름다운 여우 수인족입니다.
프로젝터가 흰 벽면에 영상을 비퉜다. 영상은 현재 나오고 있는 TV영상을 한 번 비춰준 후 카티쉬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완전히 헐벗은 카티쉬 여성체였다. 여우 수인족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런 거 같기도 하다. 팔다리의 털과 꼬리 등이 여우와 비슷했다.
-여우답게 앙칼진 성격을 가지고 있죠. 사나워서 잡을 때 상처가 살짝 났습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설명해드렸다시피 수인족의 회복능력이 뛰어나기에 빠른 속도로 아물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총도 몇 발 맞았는지 총상이 몇 군데 보였다. 카탈로그에선 못 본 상처다. 카탈로그의 사진은 포토샵이라도 한 모양이다. 하긴 인간이 카티쉬를 잡으려면 총 안 쏘고 잡긴 힘들겠지.
여우 카티쉬가 쏘아보며 몸부림쳤지만 쇠사슬에 묶여있어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제한적이었다. 영상은 카티쉬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비추고 몸을 뒤집어 다시 한 번 전부 비춰 준 후 끝났다.
-그럼 마찬가지로 경매 시작합니다. 호가는 마찬가지로 100만입니다.
“신장 184cm로 추정됩니다.”
“총상 네 개 발견. 그럼에도 움직임에 거의 지장이 없어 보인 것으로 보아 강인한 신체능력의 소유자인 듯합니다.”
영상일 지켜보던 성전사, 요원들이 의견을 쏟아냈다. 한 쪽에선 열심히 기록하고 있다.
“1차, 2차에 나온 이종족에 대한 기록도 있나요?”
“네. 여기있습니다.”
건네받은 자료를 살폈다. 신장, 생김새, 상처의 개수와 위치 등 여러 가지 내용이 두서없이 적혀 있었다. 나중에 정리하겠지.
우리가 낙찰 받은 엘프나 카티쉬 둘 다 총상을 입고 있다고 적혀있다. 비텔교 말살시키려고 온 놈들인데 그냥 잡히진 않았겠지.
“여기 엘프는 기운이 없어보였다고 적혀 있는데 정확히 어떤 식이었죠?”
“눈에 힘이 없고 몸부림이 약했습니다. 묶은 쇠사슬의 양도 적었고 상처도 카티쉬에 비해 덜 회복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카티쉬보다 낮은 가격에 낙찰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 엘프는 혹시 죽을 지도 모르니 가격이 낮아질 수밖에 없겠지. 카티쉬는 딱 봐도 힘이 넘쳐보이니까 안심하고 돈을 퍼붓는 거고.
외모 차이로 가격대가 나뉘진 않았을 것이다. 카탈로그에 나온 일곱의 엘프와 카티쉬는 모두 엄청난 미인이었으니까. 너무 아름다워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였다. 매력이 약간 다르긴 하다. 엘프 쪽이 청초한 느낌이라면 카티쉬 쪽은 건강한 느낌이랄까.
그런데 왜 예쁜걸까. 여자만이 아니다. 오크나 리자드맨은 몰라도 저쪽 세계의 인간은 확실히 대부분이 미남, 미녀였다.
오랫동안 신의 손이 닿아서 그런 걸까?
확실히 나도 비텔님의 힘을 받아들이고 나서 키도 크고, 몸매도 괜찮아지고, 생김새도 나아지긴 했지.
-500만, 500만 나왔습니다.
여우 닮았다고 해서일까. 가격이 끊임없이 올라갔다. 그래도 우리측 인사가 거의 모든 돈을 쏟아 부은 끝에 낙찰 받을 수 있었다.
경매는 계속되었고, 예상대로 우리가 넷을 낙찰 받고 다른 이들이 셋을 낙찰 받았다.
-경매에 성공하신 분들은 저희를 따라와 주십시오. 바로 상품을 인계해드리겠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죄송하지만 내일 아침까지 이곳에 계셔야 합니다.
싫다면 나가려는 자들이 있었지만 경매장 관계자들이 총을 겨누자 어쩔 수 없이 앉았다.
“경매에서 진 자들이 경매가 끝난 후 낙찰 받은 이들을 공격하는 일이 잦았기에 생긴 규칙입니다. 경매 참가자들은 낙찰 받은 자들이 상품을 인계받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때까지 경매장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벤센이 지금 왜 저러는지 설명해줬다. 그렇군. 경매장에는 통신기구도 가져갈 수 없으니 외부에 있는 자들은 누가 낙찰 받았는지 알 방법이 없을 거다. 결국 경매장에 들어간 자들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텐데.
그들이 나올 때쯤이면 낙찰자들은 안전한 곳에 가 있는 거지. 좋은 방법이다.
“차량 이동합니다.”
영상 속에서 우리 요원들과 낙찰자들이 IS들을 따라 차량에 올라탔다.
“먼저 가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저희도 바로 뒤따르겠습니다.”
오하넬에게 안겨 그들을 쫓아갔다.
***
엘프는 녹색, 카티쉬는 주황색이군.
애초의 생각대로 이종족은 시리아에 숨겨져 있었다. 그저 너무 잘 숨겨놔서 벤센이 찾지 못한 것일 뿐.
도착한 곳은 겉으로는 어떤 표시도 나지 않는 지하 벙커였다. 이렇게 잘 만든 벙커도 버릴 생각으로 이번 경매를 진행한 거군. 그럴 가치는 있었다. 이번 경매로 벌어들인 돈이 거의 4,000만 달러니까.
“우린 상품을 인계했소.”
“여기서 우리가 저것들을 어떻게 가져가라고 그러는 것이오!”
“전화를 넘겨줬으니 알아서 해야지.”
IS는 이종족에게 낙찰자들을 안내해주고 통신장비와 무기를 건네준 후 나 몰라라 했다. 하긴 저게 가장 편한 방법이지.
-10분만 더 시간을 끌면 된다. 그러면 이 지긋지긋한 IS놈들을 전부 쓸어버리고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 거다. IS따위에게 돈을 줄 수는 없지. 다른 놈들 돈까지 전부 빼앗으면... 흐흐. 나한테도 100만 달러는 떨어지겠군.
누군가의 마음이 들려왔다. 여기를 공격할 생각인건가?
-벤센입니다. 지금 그쪽으로 헬기 두 대와 차량 일곱 대가 이동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종족을 탈취하려는 것 같으니 조심하십시오.
그럼 그렇지. 노예를 사겠다고 나선 놈들이 깨끗한 거래를 할 리가 없지.
< 168 사라지는 경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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