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사라지는 경계 >
-아저씨가 맨 앞자리에서 봐주셨으면 했는데...
“미안미안. TV로 봤는데 정말 잘하더라. 우리 발레단 하나 만들까? 유나 네가 주역으로 말이야.”
-됐어요. 발레단은 무슨 발레단이에요. 저보다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제가 발레단을 만들어요. 사람들이 권력 이용해서 사리사욕 채운다고 욕해요.
“유나가 그런 사람들보다 잘하던데 뭐.”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아저씨. 언니, 오빠들이 슬퍼할 거예요.
역시 우리 유나는 착해.
내가 봤을 땐 유나가 제일 잘하는 거 같은데 말이야. 다른 사람들 배려하려고 자신을 낮추는구나. 아주 잘 컸어.
근데 왜 그 사람들은 언니, 오빠고 난 아저씨니. 그 사람들 나랑 나이차이도 별로 안 나는 거 같던데.
-아저씨. 언제 오세요?
“3~4일 더 걸릴 거 같아.”
오늘 일 끝내고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거 같지만 원래 기한은 여유 있게 말하고 하루 이틀 앞당겨줘야 상대가 좋아하는 법이지.
-에이. 그러다가 축제 다 끝나고 오는 거 아녜요?
“아냐. 축제 폐막식은 무조건 유나하고 같이 봐야지. 그 전에 꼭 갈게.”
-빨리 오세요. 언니가 통삼겹김치찜 해준데요.
“맹연이가? 그럼 무조건 가야지. 최대한 빨리 끝내고 갈게.”
-네~.
맹연이 하는 음식은 대체로 맛있지만 통삼겹김치찜은 정말 최고다. 재료만 있다면 매일 먹고 싶은데 가장 중요한 김치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말이야.
맹연이 어느 정도 권력을 가진 후 가장 먼저 한 게 과거에 같이 일했던 동료들을 구하는 거였다. 맹연이 구한 후 전부 내 비서진으로 들어왔다. 열일곱 명. 당연히 나만 담당하는 건 아니고 전체적으로 간부들의 일정을 관리해준다.
김치는 거기 일하는 아이 중 한 명의 어머니가 보내준 거다. 그거로 통삼겹김치찜을 해줬었는데 얼마나 맛있던지... 결국 김치가 다 떨어질 때까지 보름 연이어서 그거만 먹었었다.
김치를 새로 보내줬나 보네. 설마 다 먹진 않겠지. 다 먹으면 저주할테... 아. 벤센이 오는군.
복도를 걸어 내 방으로 오는 벤센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걷기는 지문과 흡사하다. 사람마다 고유의 걷는 방식이 있거든. 벤센은 보폭이 크고 왼발이 짧아 약간 덜컹하는 듯한 소리가 특징이다. 물론 이 덜컹하는 소리는 평범한 사람은 못 듣는다.
벤센이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벤센은 작은 숄더백 하나를 들고 있었다. 보통 저기서 노트북, USB등 자료들이 나온다.
“죄송합니다. 결국 장소를 특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요? 어쩔 수 없죠.”
오늘은 IS의 노예 경매가 있는 날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종족이 갇혀 있는 곳을 찾아내지 못했다.
도시 내부 수색은 오하넬이 했고 도시 외부 수색은 벤센이 맡았다.
오하넬을 이용해 도시 내를 전부 뒤지기도 했다. 혹시 비밀공간이 있는지에 대해서까지 전부 뒤지다보니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수색을 마쳤는데 이종족은 이 도시에 없었다.
대신 엄청 추한 사실을 많이 알게 됐다. 바트만은 노예 집합소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도시였다. 이종족을 찾다가 부수적으로 찾아낸 노예 상태의 피해자가 약 100명. 타의로 갇혀서 성매매를 하고 있는 듯한 여자들까지 합치면 300명은 되는 수였다. 이 작은 도시에 뭐 그리 많은지...
바로 구해주고 싶었지만 혹시나 IS를 자극해 이종족 경매가 취소될까봐 그러지도 못했다. 대신 전부 기록해뒀고 성전사들도 추가로 바트만으로의 파견을 명령해뒀으니 이번 일이 끝나는 대로 오하넬 덕분에 찾아놓은 모든 노예상, 경매소 등은 파괴될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걸 보면 이종족을 바트만에 들여올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실물을 보지 않고 경매를 하기도 하나요?”
나 같으면 무조건 실물이 눈앞에 있어야 거래를 할 거 같다. IS놈들을 어떻게 믿어. 테러를 저지르는 놈들인데 거짓말을 못하겠어?
“안 합니다. 이곳의 경매는 무조건 눈으로 확인 후 경매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경매 시작 전에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실물 확인을 해줄 겁니다.”
정말 잘 숨네. IS. 하긴 이 정도니까 미국이나 유럽의 공세에 버티고 있는 거겠지. 움직임이 다 들키고 그랬으면 진작 뿌리 뽑혔겠지.
“만약 이종족을 찾지 못하고 경매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낙찰 받으라고 해주세요. 돈은 얼마를 써도 상관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지금 시간은 12시 30분.
“밥이나 먹죠.”
카탈로그를 주겠다고 한 2시까지 1시간 30분이 남았다. 별 수 없이 그때까지 기다려보자.
“왔습니다.”
1시 57분. 드디어 카탈로그가 도착했다. 벤센이 경매 참가자로 위장하고 있는 정보원에게서 받은 메일의 이미지를 클릭했다.
진짜 카탈로그네?
난 말만 카탈로그고 사진을 메일이나 메시지로 보내주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 작은 책자가 배달 왔다.
정보원이 표지부터 페이지마다 전부 사진으로 찍어서 메일로 보내줬다. 페이지가 많지는 않았다. 20페이지. 그 안에는 이종족 일곱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카티쉬 셋, 엘프 넷이군요.”
드워프는 없었다. 전부 죽인건가? 아니면 겉모습이 별로라서 팔 생각이 없는 건가.
카탈로그 속 카티쉬와 엘프는 전부 여성체였다. 쇠사슬이 팔다리에 잔뜩 묶여있고 입마개까지 하고있으며 몸 자체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침대에 몸 전체가 묶여 있었다. 그러면서도 중요부위는 전부 보이게 해 놨다.
미친놈들. 병기나 다름없는 것들을 팔아먹겠다고 저렇게 해두다니. 저쪽 세계의 특성상 당연히 외모는 예쁘지만 저것들에게 외모만 보고 다가갔다간 순식간에 목숨이 날아갈 거다.
지들도 컨트롤 못해서 저렇게 철저하게 묶어뒀으면서 사간 사람은 어떡하라고.
“장소를 알만한 특징이 없군요. IS 특유의 지하 벙커라는 건 알겠지만 저건 시리아, 이라크 지역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거기에...”
전부 방안에서 찍은 거기에 장소를 알 방법은 없었다.
“아. 상품 확인 방법도 적혀 있군요.”
벤센의 말대로 카탈로그 마지막에 경매 참여할 의사가 있는 자들로만 경매가 이루어질 장소에서 현금 100만 달러를 예치해 계좌를 개설하면 하나당 한 명을 상품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주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저놈들이 손님 무서운 줄 모르고 손님을 가려 받네. 최초의 이종족이니 무조건 비싸게 팔려는 모양이다.
그러니 이렇게 광고도 하고 그러겠지. 저놈들이 광고하면 각국 정보부에 잡히는 걸 몰라서 광고한 것이 아닐 거다. 크게 한탕하고 사라지려고 그런 거겠지.
“돈은 충분한가요?”
“충분합니다.”
없으면 좀 보태줄까 했더니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IS의 경매장은 현금 거래가 원칙이고 이번에 참가하는 자들의 면면을 봐서 무조건 낙찰 받기 위해 1,000만 달러를 준비해뒀습니다. 그런데 수가 일곱이면... 몇은 놓칠지도 모르겠습니다.”
1,000만 달러라니. 돈 많네 벤센.
그런데 1,000만 달러나 있는데도 빼앗길 가능성을 생각하다니. 이종족의 가치를 엄청 높게 생각하네. 하긴 인류 최초로 다른 종족을 만나는 건데 비싸겠지. 빼앗겨도 상관없다. 어디에 있는지만 알면 내가 가서 데려오면 되니까.
“위험할지 모르니까. 경매 참가인이 둘이라고 했죠? 각각 계좌 두 개씩 개설해서 성전사 네 명을 같이 보내세요.”
성전사 네 명이면 대대 규모의 적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 이상 무사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혹시 모르니까.”
-헌금을 인출합니다.
“이것도 가져가세요.”
1,000만 달러를 꺼내 벤센에게 넘겼다.
성전사들이 따라가 이종족이 있는 곳을 확인하는 대로 내가 가서 빼돌릴 생각이지만 생각대로 안 풀릴 수도 있다. 그러니 경매도 대비하는 게 좋겠지. 다른 이들이 이종족을 사가도 내가 가서 데려오면 되긴 하지만 웬만하면 내가 낙찰 받는 게 깔끔하니까.
***
4시. 우리 측 인원이 계좌를 개설하러 갔다.
“두 명이나? 돈도 많군.”
“우리 고용주가 우릴 아껴서 말이지.”
영어 잘하네. IS 대원. 오하넬에게 부탁해 투명화 한 상태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봤다.
우리 전에도 계좌를 개설한 자들이 있었고, 우리 후에도 계좌를 개설하는 자들이 꽤 있었다.
서방 세계를 증오한다면서 왜 경매 참가자는 대부분이 백인이고, 너희는 영어를 왜 이리 잘하는 거냐. IS랑 북한은 참 닮은 거 같다. 무력으로 체제를 유지하고 있고, 미국이나 유럽을 주적으로 두고 있으면서도 돈은 달러를 가장 좋아하고, 물건은 유럽의 명품을 사다 쓰고 그러지.
계좌를 2개씩 개설하니 의심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말고도 계좌를 몇 개씩 개설하는 자들이 있었다. 덕분에 별 의심 받지 않은 거 같다.
생각보다 100만 달러를 내고 계좌를 개설하는 자들이 많았다. 도대체 뭘 믿고 개설하지? 저것들 IS잖아. 100만 달러 돌려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겠지. 아마 정말 이종족을 확인할 수 있다면 100만 달러쯤은 없어져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자들일 것이다. 세상에 100만 달러를 우습게 보는 부자들은 많으니까.
계좌를 개설하러 온 자들은 대부분 부자의 고용인인 듯싶었다. 당연하다. 돈 많은데 뭐 하러 위험한 자리에 직접 나오겠어. 사람 사서 보내겠지.
상품을 확인하러 가기 위해 나온 자들은 대부분 잘 단련된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전부 총 한두 정은 몸에 지니고 있었다. 웃긴 게 그들 중 80%가 비텔교 신도였다.
비텔교 신도를 겉으로 드러나 있는 것만 보고 알아 볼 수 없지만 난 할 수 있다. 아니,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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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텔의 눈 : 대상에게 깃든 신의 힘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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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텔님과 헤어지기 직전, 비텔님께서 내 눈을 만지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게 네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갖게 된 스킬이 저거다. 적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 만약 이종족만 공격해온다면 필요 없는 능력이겠지만 몰란의 신도인 인간들도 있고, 지구의 인간 중에 다른 신을 믿는 자도 나올 수 있다.
다른 적을 섬기는 자는 무조건 적인 지금의 상황에서 믿고 있는 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다른 신의 흔적이 보이면 무조건 죽이거나 잡고 보면 되니까.
물론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우리를 적대할 수 있지만 그들은 그다지 큰 위협이 되진 않는다. 그들은 우리를 몰살시키려고 하지는 않을 거 아닌가.
역시 힘쓰는 직업을 가진 자들 중에는 비텔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다니까. 아무래도 신체능력이 크게 향상되니까.
비텔님을 받아들인 자들은 영혼이 희미하게 보라색으로 빛난다.
빛은 축복을 많이 받을수록 한층 더 커지고 짙어진다. 저기 있는 성전사들은 인간 횃불이라도 된 것처럼 보라색 빛이 불타오르고 있다. 특히 세 번의 축복을 받은 고위 성전사는 아주 활활 불타고 있지.
유나와 해역이는 더 크게 빛난다. 나 빼고 유이하게 네 번의 축복을 받은 아이들이니까.
나는 빛이 얼마나 강할까. 내 빛을 내가 못 본다는 게 안타깝다. 내 빛은 훨씬 더 크고 아름다울 텐데 말이야. 하긴, 계속 보여도 좀 문제가 되려나. 시야에 항상 보라색 빛이 끼어 있을 테니까.
사람들을 구경하다보니 시간은 금방 갔다.
총 22명이 상품 확인을 하러 가게 됐다.
우리 쪽 4명, 계좌 3개를 개설해 3명을 집어넣은 자도 하나 있고, 계좌 2개를 개설한 자도 우리 말고 셋이나 더 있었다.
계산을 해보면 우리 쪽 두 명을 제외하고 이종족 경매에 참가하는 인원은 13명이라는 뜻이다.
벤센에게 그 13명의 신원을 확인해두라고 해야겠다. 평소에도 노예를 사들이니까 이종족 노예 경매의 초대장이 날아간 거 아니겠어?
노예를 세상에서 없애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확실하게 없애기 위해선 돈 많은 놈부터 처벌하는 게 효과적이겠지.
“출발할거요.”
정확히 5시가 되자 더 이상 다른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출발할 준비를 했다.
출발하기 전 신체검사를 해 총기와 통신기기를 전부 압수했다. 몇몇이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대부분 순순히 무기를 반납했다.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한 듯하다.
선팅이 짙게 된 낡은 SUV 다섯 대에 나눠 탔다. 운전석과 보조석에는 IS 대원들이 앉았으니 다섯 대의 뒷좌석에 22명이 전부 앉아야했다. 세 명이 앉아야 할 자리에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적게는 네 명, 많게는 다섯 명까지 앉았다. 당연히 엄청 불편했지만 IS는 타기 싫으면 오지 말라는 말만 했다.
다들 돈 받는 처지인 만큼 어쩔 수 없이 탔다. 월급쟁이의 비애란...
성전사 네 명은 전부 다른 차에 타게 됐다. 다른 자들도 일행으로 참여한 자들을 각각 떨어뜨렸다. 혹시 모를 공격을 대비하는 모양이다.
5시 30분이 되자 차량이 일제히 출발했다. 8시까지는 도착해야 할 테니 여기서 2시간 30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란 건가.
어... 남쪽이 아냐?
난 당연히 시리아나 이라크가 있는 남쪽이나 동쪽으로 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차들이 향한 곳은 북서쪽으로 더욱 터키 깊숙이 들어갔다.
미리 터키 쪽에 이종족을 옮겨두기라도 했나? 이건 생각 못했다. 당연히 바트만이나 시리아, 이라크에 있을 줄 알고 그쪽만 뒤졌는데 말이야.
그리고 1시간 30분 후, 우리는 황량한 평야 한 복판에 있는 버려진 곳이 분명한 마을에 도착했다. 곳곳에 사람이 살고 있을 리 없는 무너진 석조건물이 보였다. 여기가 IS의 비밀 거점 중 하나인 모양이군.
IS 대원들은 상품을 확인하기 위해 온 사람들을 데리고 가장 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윽.”
“우욱.”
“뭐야. 이건.”
“아. 씨발. 깜짝이야.”
그 안에 있는 건 터지고, 잘리고, 찔린 처참한 상태의 이종족 시체였다.
< 167 사라지는 경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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