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사라지는 경계 >
“노예 경매는 IS의 주 수입원 중 하나입니다. 이교도, 타민족의 여자를 납치해 아름다워 상품성이 있다고 생각하면 외국인에게 높은 값에 팔며, 상품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내부의 IS대원들에게 판매합니다.”
“미친놈들.”
진짜 미친놈들 아닌가. 지금 시대에 노예 경매라니. 그런데 놀라운 건 노예매매가 IS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중동, 아프리카, 남미 등 외떨어진 곳만이 아니라 북미, 유럽, 아시아 등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도 염전 노예가 문제가 됐던 적이 있었지.
IS 노예 경매의 주 구매층이 백인인데다가 아시아 사람도 빠지지 않는다고 하니... 1888년 이후로 공식적으로 노예제가 사라졌음에도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인간들은 남의 자유를 억압하는 걸 정말 좋아한다.
이건 확실히 문제다. 자유를 사랑하고 권하시는 비텔님께서 알게 되면 안 좋아하실 거다.
“노예는... 세상에서 없애야겠어.”
“당장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음? 아. 그러세요.”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더니 벤센이 명령이라도 내린 줄 알고 바로 실행하겠다고 한다. 말리지 말고 그냥 하라고 해야겠다. 정말 없애야 할 문제다. 항상 자유를 강조하는 비텔교 입장에서 자유를 억압하는 걸 놔둘 수는 없지.
벤센이 바로 위성전화로 본부에 연락해 노예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라고 명령했다. 역시 빨라. 벤센.
잠시 후 벤센이 USB 하나를 보여줬다.
“여기에 IS에서 그들의 고객들에게 뿌린 영상이 담겨 있습니다. 그제 배포한 내용이라고 합니다.”
본 적 없는 거다. 이곳의 정보원에게서 받아온 따끈따끈한 정보군.
저게 아니었으면 카티쉬가 IS에 잡혀 있는 걸 몰랐겠지. 벤센의 정보망은 세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지만 IS는 벤센이라고 해도 쉽게 손이 닿지 않는 곳이다. 그곳은 정보요원이 잠입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곳이라서 말이야.
결국 알아오긴 했겠지만 이틀 만에 알아오는 건 불가능했겠지. 고객 유치하겠다고 IS가 광고해준 덕분에 찾아냈구나.
“재생하겠습니다.”
“네.”
동영상이었다.
-서방 세계는 우리를 테러단체로 매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되었다. 우리는 서방 세계의 약탈자로부터 형제들을 지키는 수호자다. 지금부터 그걸 증명하겠다.
영상은 AK 소총을 맨 누군가의 설명으로 시작했다.
“쉬반 알히르입니다. IS를 대표하는 전사 중 하나입니다.”
-서방 세계의 악마들이 신성한 땅에 들어와 학살을 자행했다. 저기 멀리 보이는 마을이,
카메라는 창문 밖 멀리 떨어진 마을을 줌인했다.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지만 아직은 어느 정도 빛이 있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잘 보였다.
-서방 세계의 악마들에 의해 침입당한 마을이다. 그곳에 살던 형제 한 명이 겨우 학살로부터 도망쳐 우리에게 와 알렸고 우리는 마을의 해방 및 복수를 위해 이곳에 왔다.
다시 카메라가 쉬반을 찍었다.
-그들은 본색을 드러내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부터 신의 이름으로 악마를 처단할 것이다. 지켜봐라. 진정한 테러 단체가 누구인지 말이다. 그리고 결정해라. 신의 말씀을 따라 악마들과 싸울 것인지 아닌지 말이다.
“원래는 선전용으로 쓰일 영상이었군요.”
쉬반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마을로 향했고 그의 뒤를 100여명이 뒤따랐다. 로켓발사기를 든 사람도 몇 명 보였다.
학살을 자행한 서방 세계의 악마란 건 카티쉬겠지. 그 녀석들 겉모습은 백인 쪽이랑 비슷했으니까. 학살이란 건 IS의 과장이 아니라 진짜 학살이 이뤄졌을 거다. 내가 아는 그쪽 세상은 다른 종족을 죽이지 않고 살려줄 정도로 자상한 세계는 아니니까.
카티쉬는 머물 곳이 필요했을 것이고 저쪽 세상에서 했던 것처럼 가장 먼저 보이는 인간의 마을을 습격해 전부 죽이고 차지했을 것이다. 저쪽 세계에서는 그래도 되는 세상이니까.
하지만 이쪽은 안 돼.
-타타타타타탕!
-그우우우우우우우!
-괴물! 괴물이야!
-쏴! 있는 대로 다 갈겨!
-피유~~~~. 쾅!
영상 속 상황은 난장판이란 말이 딱 어울렸다.
IS는 조심스럽게 접근해 선제공격으로 로켓부터 발사하고 싶었겠지만 상대는 인간이 아니었다. 약 100m정도 접근했을 때, IS는 역공을 맞았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려왔고, 난전이 시작됐다.
영상은 갑작스레 벌어진 전투에 흔들렸지만 대체로 상황을 잘 찍고 있었다. 덕분에 카티쉬의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정말 짐승처럼 싸우는군.
손발을 다 써서 네 발로 달리다가 달려들어서 물어뜯고나 할퀸다. 그런데 힘이 세서 그냥 스쳐지나가며 하는 공격 같은데도 팔이 떨어져나가고 살덩이가 뜯겨져 나간다.
그래도 IS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아무리 빨라도 총알보다 빠를 순 없다. 수십 발을 난사하면 한두 발은 맞는 법. 총에 맞아 부상을 입는 카티쉬가 꽤 보였다.
물론 한두 발 맞아도 별 탈 없이 움직이는 카티쉬였지만 수십 발이 박혀들면 상황은 바뀐다. 총에 맞아 쓰러지는 카티쉬가 곳곳에 보였다.
저렇게 진 건가. 수가 많으면 몰라도 대충 20이 안 되어 보이는 수로는 AK 소총을 든 100여명의 IS를 이길 순 없지.
라고 생각하려는 찰나,
-탕! 탕! 탕! 탕!
카티쉬가 있었던 마을에서 총 소리가 들려왔다. 단발의 큰 소리, 익숙한 소리다. 드워프의 핸드캐논이다.
드워프도 왔군. 영상에는 보이지 않지만 드워프도 함께 온 것이 분명... 아니 어쩌면 드워프에게 핸드캐논만 받아왔을지도.
변화는 드워프의 핸드캐논만이 아니었다. IS와 난전을 벌이던 카티쉬의 앞에 녹색의 반투명한 막이 생기더니 총알을 튕겨내기 시작했다.
드워프, 리자드맨, 오크, 인간은 아니다. 내가 지켜본 그락카르의 수많은 전쟁 속에서 리자드맨은 무색, 오크는 붉은색, 인간은 파란색의 힘을 사용했고 드워프는 특수능력이 없었다. 녹색은 본 적 없다.
카티쉬의 힘인가? 하지만 카티쉬의 힘이라면 왜 처음부터 쓰지 않았지? 다른 종족인가?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카메라가 마을 쪽을 찍기 시작했고 거기엔 마을 밖으로 나와 있는 드워프와... 엘프? 엘프겠군. 저쪽 세계에 엘프가 있다는 건 아니까. 저들처럼 엘프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존재도 없겠지.
확실해졌다. 카티쉬는 하나만 온 게 아니다. 여러 종족이 힘을 합쳐 함께 왔다.
늦게 합류한 걸 보면 인간을 얕보고 카티쉬만으로도 충분할 거라 생각한 건가.
-구어어어어어어어어!
카메라를 들고 있던 자가 카메라를 놓칠 정도로 강렬한 고함이 울려 퍼졌다.
족장급? 적어도 족장급으로 보인다. 카티쉬의 전사인가? 아니면 다른 종족? 일단 내게 익숙한 고함은 아니다. 궁금해서 영상을 찍던 자가 다시 카메라를 들어 올려 제대로 찍어주길 바랐지만 영상은 거기서 끝이었다.
“일단 확인된 종족은 셋이군요.”
“..... 저들이 정말 존재하는 자들입니까?”
벤센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상당히 놀란 표정이다. 벤센만이 아니다. 함께 영상을 본 성전사들 모두가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놀랐겠지. 지구에는 단일 종족만이 있으니까.
크게 황인, 백인, 흑인으로 나누고 세분화 하면 수백, 수천의 인종으로 나눠지지만 전부 인간은 인간이니까. 저들은 아예 종족부터가 다른 존재들이고 그런 존재들을 처음 본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지.
“다른 세계에서 온 다른 신의 신도들입니다. 각각 카티쉬, 드워프, 엘프 정도가 되겠네요.”
아직 자세히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이젠 이야기해줄 때가 된 거 같다.
***
비텔님 등, 신에 관련된 이야기는 최소한으로 하고 그저 다른 세계에서 지구를 침략하기 전에 보낸 정찰대라고 설명해줬다.
“적...이군요. 전 구출작전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출작전이라. 하긴 그럴 수도 있지. IS라는 악에게 노예로 팔릴 위기에 처해 있는 존재들이다. ‘악에게 잡혀 있는 자는 선이다.’라는 편견이 작용했겠지. 하지만 진실은 악에게 잡혀 있는 더한 악이다.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 찾아온 악 중의 악.
“함께 공존할 여지는 없는 겁니까? 혹시 협력할 수 있는 우리 인간에게 호의적이고 평화로운 종족이 있다든지.”
“없습니다. 저쪽에서 넘어오는 자들은 모두 적입니다.”
그건 확실하다. 비텔교는 멸망한 세상이니까. 비텔교를 말살하기 위해 찾아오는 자들이니 단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적이다. 오크는... 특별히 우리를 적대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걔네는 보이는 모든 다른 종족을 공격하는 싸움에 미친놈들이니까 우리와 같은 편이 될 리는 없겠지.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이계에서 넘어오는 모든 자들을 적으로 상정하고 작전을 수행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세요. 아. 그리고 다른 세계에는 인간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들도 확실히 우리의 적입니다. 우리 세계로 넘어오는 목적 자체가 우리를, 비텔교를 멸망시키기 위함이니까요.”
“감히 비텔교를...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요원들에게 주지시키겠습니다.”
“네.”
혹시라도 인간이 넘어왔다고 어설프게 접근할까봐 미리 경고했다. 그놈들은 같은 인간이라고 해서 봐줄 놈들이 아니니까. 신에 미친 자들은 같은 종족이고 뭐고 없는 법이다.
“그런데 상황만 봐서는 IS가 진 거 같은데 어떻게 노예 경매의 상품이 된 거죠?”
“IS에서 공개한 정보는 이게 답니다. 이 영상을 공개하고 영상 속 괴물들을 경매에 내놓겠다는 말만 추가했죠. 그래서 전투가 벌어진 장소를 특정해 위성사진을 찍었습니다.”
영상만 보고 전투가 벌어진 곳이 어딘지 찾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확실히 뛰어나다니까.
벤센이 영상을 끄고 사진을 띄웠다.
“여기가 방금 영상에서 보였던 마을입니다.”
“폭격이라도 맞은 것 같네요.”
분명 영상 속에선 마을 밖에서 전투가 벌어졌었다. 그런데 위성사진에는 마을이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폐허가 되어 있었다. 2차전이 벌어졌군.
“교주님 말씀대로 폭격을 가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영상을 회수해서 적을 분석했겠죠. 철저히 원거리 타격전으로 나간 것처럼 보입니다. 저라면 낮에 이곳이나 이곳에 자리 잡고 공격을 가했을 겁니다.”
벤센이 살짝 높은 언덕 지형 하나와 절벽까진 아니지만 상당히 경사가 험한 지형을 짚으며 말했다.
확실히 저런 지형이라면 원거리 공격능력에서 떨어지는 카티쉬, 드워프, 엘프를 상대하기 편했겠지. 드워프의 핸드캐논이 있다고는 해도 우리 세계에서는 300~400년 전에나 썼을 법한 구식 무기였으니까.
하지만 족장급 존재라면 저길 뚫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락카르가 족장급이었을 때를 상상해봤다. 그리고 결론 내렸다.
오크라면 무조건 가능하다. 오크에게는 총알이 박히지 않을 테니까. 그락카르가 아닌 다른 평범한 족장급을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바로 앞에서 입안이나 눈에 쏘는 게 아닌 이상 피부를 뚫지 못할 것이다. 카티쉬가 오크보다는 신체능력이 약하다고 들었지만 그래도 거의 그에 근접했을 것이다. 소총 정도로는 족장급을 막을 수 없다.
그런데도 지금 IS가 노예 경매를 하는 걸 보면 IS가 이겼다.
로켓포라도 정면으로 맞을 걸까? 아니면 박격포에 당한 걸까. 어쩌면 카티쉬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구력이 약해서 족장급이라고 해도 총에는 당하는 걸까.
궁금한 게 참 많다.
“누가 살아남아서 노예가 된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무조건 손에 넣어야 합니다.”
“혹시 몰라 우리 쪽 인원 둘이 이번 경매에 참여합니다.”
“잘하셨어요.”
경매... 비텔교는 돈이 많으니까. 경매에 참여해서 돈으로 사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건 최후의 방법이다. 애초에 경매로 사들일 거였으면 내가 오지도 않았지. 경매에 참여하는 건 최후의 방법이다.
“위치 확인을 최우선으로 해주세요.”
어디 있는지 알기만 하면 된다. 내가 직접 갈 거니까.
< 166 사라지는 경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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