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사라지는 경계 >
그런데... 조용히 입국하기에 13명은 너무 많은 거 아닌가. 그냥 벤센만 데리고 둘만 오려고 했었는데 말이야. 어쩌다보니 11명이나 더 붙어 버렸다. 다들 정보부 현장요원 출신의 성전사들인지라 이런 일이 익숙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13명은 너무 많지 않나? 아무리 잘 숨어도 몇 명은 걸릴 거 같은데 말이야.
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쉽게 터키 내로 들어왔다. 내가 생각한 국경과는 너무 다르다. 군대에 갔을 때 철책 쪽에서 근무한지라 그곳과 비슷하게 철책이 쭉 늘어선 국경을 생각했는데 그냥 허허벌판이었다.
우린 사람 한 명 만나지 못하고 터키 국경을 넘었고, 처음 들어선 도시 외곽에서 차를 타고 도시로 이동했다. 목적지는 국경 근처에 있는 바트만이라는 도시였다.
진하게 선팅한 지프를 타고 3시간은 달린 거 같다. 서울에서 대전 가는 거보다 가깝다고 하는데 왜 이리 오래 걸리는지... 딱히 교통체증도 없는데 말이다.
“바트만에는 작고 큰 석유회사가 몰려 있는 곳으로 석유 암거래의 중심지 중 하나죠. 주 거래 대상은 IS와 각국의 반군, 자경단입니다.”
아. 그렇군. 이런데서 석유 암거래를 하는 거구나. 뉴스에서 IS가 석유를 불법으로 거래해서 전쟁자금을 마련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걸 어디서 어떻게 파는지 궁금했었다.
“범죄자들이 많겠네요.”
“웬만한 범죄자는 발도 못 들이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활동하는 자들은 대부분 군인집단이니까요. 화력에서 상대가 안 되죠.”
그렇겠네. 지역 조직들은 끽해야 권총, 정말 잘나가야 기관총 몇 개 들고 쏘고 그럴 텐데 군벌은 기본이 기관총이고 중 기관총도 널려 있을 거고, 로켓포도 쏘고 사람도 수백, 수천 명이고... 무서운 곳이네 여기.
“일단 이곳에서 잠시 쉬고 계시면 빨리 가서 추가로 들어온 정보가 있는지 확인해보고 오겠습니다.”
“네. 조심하세요.”
벤센은 날 터키 내의 3성급 숙소에 데려다놓고는 정보 확인을 위해 터키 현장요원을 만나러 갔다.
3성급이면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있는 곳은 아닌데 나름 시설이 괜찮다. 돈 많은 사람들이 묵는 곳이라서 그런가.
벤센이 나보고 쉬라고 하긴 했지만 피곤해야 쉬지. 그락카르와 연결된 이후로 피곤이란 걸 느껴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카일라.”
-부르셨습니까.
부름과 동시에 카일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항상 신기하단 말이야. 어떻게 내 몸에 들어가 있는 거지.
“오늘도 부탁할게요.”
-알겠습니다. 시작하시죠.
카일라가 옆에 있어 든든하다. 눈을 감고 내 몸 깊숙한 곳을 관조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실제로 소리가 들린 건 아니지만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내 몸속에 용솟음치는 강렬한 기운. 이렇게 강렬하건만 의식하지 않으면 전혀 느끼지 못한다. 사실 카일라에게 훈련을 받기 전에는 의식을 하든 뭘 하든 아예 느끼지 못했었다.
‘움직여라.’
최근 내가 하고 있는 훈련은 이 기운을 움직이는 연습이다. 한동안 아예 움직이지 못했었지만 한 달 정도 훈련을 하니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카일라가 옆에서 움직일 수 있다는 확신을 주지 않았다면 중간에 포기했겠지. 이래서 스승이 중요한가 보다. 그녀가 내게 심어준 확신은 확실히 훈련에 도움이 되었다.
“크윽.”
너무나 강렬한 기운이기에 약간의 방향성만 주었을 뿐인데도 맹렬하게 몸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기운이 모여 있는 곳을 물병이라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마개를 많이 열고, 적게 열고. 흘러나오는 기운을 사도님께서 제어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저 말을 한 100번은 들은 거 같다. 하지만 안 되는 걸 어떡해.
“끄.. 끄으윽..”
모여 있던 기운이 모두 뛰쳐나와 날뛰니 몸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오늘따라... 더 강렬했다.
-거세군요. 좋은 징조입니다. 그만큼 사도님의 의지에 반응해 움직이는 기운이 늘어났다는 뜻이니까요.
죽..을 것 같은데 좋은 징조는 개뿔이... 신음소리를 흘리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기운이 날뛰는 야생마처럼 온 몸을 휘저었다.
-오하넬, 스피릿마스터. 오늘은 저 혼자론 벅차네요. 두 분이 도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죠.
“분명 그 빌어먹을 호칭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다. 난 장의사다.”
-그럼 시작하죠.
카일라가 먼저 내 몸에 손을 올렸고, 오하넬, 빈예츠가 이어서 손을 올렸다. 순간 사방에서 날 압박하는 중압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중압감은 몸 안에서 날뛰던 기운에게도 작용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사도님. 지금입니다. 기운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세요.
날뛰던 기운이 안정되면서 고통이 사그라졌다. 정신을 집중해 기운을 원래 모여 있던 곳으로 조금씩 유도했다. 조금씩... 조금씩.... 한 번에 움직일 수 있는 기운의 양은 정말 적었지만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였다. 한참을 움직이니 아주 조금이지만 내 의지를 따라 움직이는 기운의 양이 늘어난 것 같다.
기분 좋다. 이 맛에 훈련을 하는 거지.
그리고 시간이 흘러, 겨우 모든 기운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후우...”
그대로 뒤로 발라당 누웠다. 온 몸이 땀범벅이었다. 그 더운 황무지를 수십 시간 걸으면서도 흘리지 않았던 땀인데 말이야.
-고생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사도님께서 뭐 하러 이 훈련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사도님의 곁엔 이미 저희 다섯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빈예츠가 의문스럽게 물었다. 그렇긴 하다. 다섯의 수호자는 하나하나가 그락카르에 버금가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하다. 다섯의 그락카르가 항상 나를 지켜준다고 생각하면 살면서 과연 내가 나설 일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리고 사도님께서 품은 힘은 너무나 강하기에 제대로 움직이는 것만 해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겁니다. 기운을 움직이게 된다고 해서 바로 강해지는 것도 아니고요. 그 기운에 맞는 새로운 능력을 익혀야 하는데 우리 중에는 비텔교의 기술을 아는 자가 없기에 스스로 능력을 만들어내기까지도 많은 시간이 걸리실 겁니다.”
“하하. 맞는 말씀이에요.”
은근 조곤조곤하게 아픈 곳을 찌르네. 이 아저씨. 그래! 나 거의 반년동안 훈련했는데도 아직 기운도 못 움직인다! 그래! 나 재능 없어!
“그리고 이런 수련을 하지 않으셔도 사도님은 강하십니다.”
내가 강하긴 하지. 전부 비텔님께 받은 힘이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서요. 뭐라도 하고 싶네요. 제 발전을 위해서.”
가만히 할 일만 하며 시간만 보내서는... 비텔님을 만나기 전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시간만 보내던 때와 달라진 것이 없지 않나.
예전에 그락카르를 지켜보며 갑자기 열등감이 극에 달했던 적이 있었다.
그락카르는 재능이 넘치고, 항상 노력하며, 모든지 스스로의 힘으로 이뤄낸다. 그에 반해 내가 가진 모든 힘은 비텔님에게서 온 것이고, 비텔교를 성세하게 만든 것도 다른 신도와 비텔님의 힘이다.
내가 한 것이라곤 거의 없는데도 최고의 자리에 앉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지.
모든 걸 스스로 이룬 그락카르와 스스로 이룬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나. 그로 인해 심한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보고 싶지 않아도 매일 그락카르를 봐야하니 열등감이 사그라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섯의 수호자도 있고, 나 스스로도 상당한 강자라 자신하지만 모든 게 받은 힘이기에 자부심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훈련이다. 내 스스로 노력해서 조금이라도, 아주 약간이라도 힘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카일라에게 부탁했다. 다른 수호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강하거나, 나와는 아예 다른 힘을 가지고 있어서 카일라가 적격이라고 생각하고 내 생각은 정확했다. 카일라는 내게 정말 뛰어난 스승님이 되어 주었다.
-스피릿마스터의 말은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품은 힘이 너무나도 강하시기에 시작이 힘든 겁니다. 사도님께선 충분한 재능을 갖고 계세요. 그 힘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만 있게 되신다면... 상상할 수 없는 힘을 손에 넣게 되실 겁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해주십시오.
“네. 그럴 생각이에요.”
포기할 생각은 없다. 다룰 수 있는 기운의 양이 늘어나면서 꽤 성취감을 느끼고 있으니까. 이 성취감이란 게 꽤 중독된단 말이지.
“빌어먹을 년이 그딴 호칭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도 꾸준히 쓰는 구나. 죽고 싶어서 그러겠지?”
-사도님의 앞입니다. 자중하십시오. 스피릿마스터.
“정말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둘이 서서히 힘을 끌어올렸다. 정말 사이가 나쁘구나. 이 둘은. 빈예츠는 그냥 카일라를 싫어하고, 카일라는 정중한 듯하면서도 빈예츠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완전 싫어하는 호칭으로만 반복해서 부르며 도발하고 말이야.
처음엔 정말 싸울 거 같아서 긴장하기도 하곤 했지만 매번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까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한다.
-둘 다 진정하고 들어가세요. 사도님 앞입니다.
저렇게 오하넬이 말려주니까. 서로 죽일 거처럼 싸우다가도 오하넬이 말리면 못이기는 척 움직인다. 카일라와 빈예츠 둘 다 다시 내게 돌아왔다.
오하넬이 머리에서 나와서 그런지 수호자들을 전체적으로 관리하며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수호자들이 머무는 위치에 따라 성향과 가지는 힘도 다르다. 머리에 머무는 오하넬은 물리력, 정신력이 균형 잡힌 느낌이다. 육박전도 꽤 하는데 특수 능력도 여럿 가지고 있으니까. 팔에 머무는 수호자들은 물리력 특화, 다리에 머무는 수호자는 정신력 특화인 느낌이다.
그리고 카일라와 빈예츠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오른쪽과 왼쪽은 전부 사이가 나쁘다. 오른손과 왼손, 오른발과 왼발. 서로서로 사이가 나쁘다. 손과 발은 별 감정이 없는데 말이야. 카일라, 빈예츠만 아니라 아딜과 그 녀석도 엄청 사이 나쁘다. 이 녀석들은 정말 싸운 적도 있어서 웬만하면 둘 다 부르는 일은 없지.
그리고 다행히도 그 녀석은 팔에 박혀 있는 걸 좋아해서 말이야.
-밖에 벤센이 기다리고 있어요.
“아. 들어오라고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벤센이 돌아와서 날 찾아왔는데 수호자 중 하나가 못 들어오게 막은 모양이다. 아무래도 민감한 훈련이라서 누가 들어와서 방해하면 문제가 되긴 하지.
밖에서 전부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는지 벤센과 성전사 모두가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좁아. 이 인간들아. 꽤 넓은 방이긴 하지만 아무리 넓어도 7명의 건장한 남자가 들어오면 무조건 좁아.
나머지 성전사들은 밖에서 경계하고 있는 건가. 절대 그냥 쉬고 있진 않을 거다. 이 사람들 나와 함께 나온 이후로 쉬는 걸 한 번도 본적이 없으니까. 식사를 할 때도, 잠을 잘 때도, 이동할 때도 항상 주변을 경계하며 나를 지켰지.
“수고하셨습니다. 교주님. 음. 가서 교주님께서 갈아입을 옷을 가져와라.”
벤센은 역시 눈썰미 좋다니까. 옷이 땀에 젓은 걸 바로 알아챈 모양이다. 성전사 하나를 시켜 옷을 가져오게 했다. 보통 맹연이 하는 일이지만 이번 여행에선 성전사들이 내 시중을 들어줬다.
거의 1년간 맹연의 시중을 받았더니 이젠 스스로 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이러다가 나중에 교주자리에서 쫓겨나면 밥도 못 먹고 살 거 같다.
“샤워 먼저 하시겠습니까.”
“이야기 듣고 하죠 뭐.”
“알겠습니다.”
성전사들이 탁자의 물건을 치웠고 벤센이 큰 지도 하나를 그 위에 올렸다. 바트만의 지도였다. 벤센이 도시 중앙을 가리켰다.
“경매가 열리는 곳은 이곳입니다.”
“불법 경매라서 도시외곽에서 몰래 할 줄 알았는데 대놓고 하네요.”
“이 도시는 그들에게 장악되어 있으니까요.”
하긴. 그러니까 IS니 반군이니 하는 사람들이 마음 놓고 돌아다니면서 암거래를 하는 거겠지.
“경매는 3일 후 저녁 8시에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때 출품되는 건가요?”
“입수한 경매 목록에 현장 공개 경매가 열한 개 있습니다. 현장 공개 경매의 상품은 보통 노예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곳으로 이동된 것을 확인했고, 이번 경매엔 평생 다시 보기 힘들 상품들이 나올 거라는 소문이 퍼진 걸 생각하면... 그 중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군요. 멍청한 놈들. 비텔교 말살하겠다고 온 놈들이 잡혀서 경매 상품이 되다니.”
그랬다. 비텔교를 공격하기 위해 정찰대로 온 그 놈들은 비텔교를 보기도 전에 IS에 붙잡혀 노예 경매에 나가게 되었다.
< 165 사라지는 경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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