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사라지는 경계 >
쿠직. 꾸구국.
손아귀에 조금 힘을 줬더니 갑옷이 우그러들었다. 이곳 형제들의 무기와 갑옷은 마치 진흙과 같다. 조금만 힘을 줘도 구부러지고 부러지니까.
“여기 무기는 정말 약하다.”
마치 인간이 쓰는 무기 같다. 인간이 쓰는 무기는 대부분 오크가 쓰기엔 너무 약하다. 일부 강자들의 무기가 강하긴 하지만 그건 정말 극히 일부다.
“미..미안하다. 다시 만들겠다.”
장인 형제가 갑자기 사과를 해왔다. 북쪽에서는 사과를 받은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는 매일 수십 번씩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것 같다.
“미안해하지 마라 형제. 형제를 탓하는 게 아니다.”
“형제라니. 난 노예다. 형제 아니다.”
이런다. 형제들을 억압해 노예라는 굴레를 씌워 놨다. 무기를 만드는 장인은 물론이고 채광, 벌목, 재봉, 짐승 사육, 요리, 건축 등을 하는 형제들도 전부 노예의 신분이었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암컷들 대부분이 거의 노예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었다.
내가 본 것만 따지면 전사 외에는 대부분 노예다. 멍청한 짓이다. 전사가 되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다른 형제, 자매들도 전사 못지않게 중요한 일을 한다. 장인 형제들은 우리 전사들이 마음 놓고 싸울 수 있도록 단단하고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주고, 암컷들은 아이들을 키워 전사가 되도록 만들어준다.
장인과 암컷. 이 두 부류야 말로 우리 오크 부락을 유지하는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을 노예라 부르며 막 대했다니.
정말 이곳의 전사들의 생각은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뭐. 미흐로크가 교육을 시작했으니 그들도 곧 전사다워지겠지.
안 되면 죽던가.
교육 중 죽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오크의 아이들은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지만 다섯 중 둘은 성인이 되기 전에 죽는다. 하나는 병으로, 하나는 암컷에게 맞아서.
“날 무서워하지 마라. 나는 대족장. 형제와 자매들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명예로운 전사다.”
“알았다. 무서워하지 않는다. 무섭지 않다.”
말은 무섭지 않다고 하지만 몸을 잔뜩 움츠리고 살짝 떨기까지 하고 있다. 잔뜩 주눅 든 거 같다.
이 형제도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군. 교육이 필요하지만 장인 형제들을 미흐로크의 교육에 집어넣을 수는 없다. 장인 형제들이 전사가 하기 싫어서 장인이 된 것이 아니라 몸이 약하기에 장인이 된 거니까. 전사의 교육을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아무래도 이쪽은... 노르쓰 우르드에게 맡겨야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겠다. 노르쓰 우르드에게 들은 대로 시간을 들여 천천히 설득해야겠지. 하지만 난 바쁘니까 할 수가 없다. 절대 귀찮아서 그런 게 아니다. 정말 바빠서 그런 거다.
노르쓰 우르드라면 잘 해주겠지. 불만 있는 거 같으면 캅카스가도 붙여줘야지.
“무기를 하나 만들어봐라. 왜 이렇게 무기가 약한지 봐야겠다.”
제법 괜찮은 무기도 있긴 했다. 하지만 수가 적었다. 50개 정도였던가. 제법 강하던 전사들이 들고 있었는데 지금은 전부 죽고 무기만 남았다. 여하튼 그 무기들은 제법 괜찮았다.
북쪽에 있는 형제들이 가진 무기로 따지면 중하급의 품질정도? 가장 좋은 무기가 중하급의 품질이라니. 그것도 잘 만들어서 품질이 좋은 게 아니라 금속 자체가 워낙 좋은 금속이라서 품질이 좋다는 느낌이었다.
장인 형제가 무기 만드는 광경을 지켜봤다. 이상한 행동들을 했다. 철을 불에 집어넣어 달궜다가 빼서 두들기고 달구고 두들기고.
왜 저런 쓸데없는 짓을 하지? 그리고,
“내.. 내가 무기를 만들긴 하지만 이곳에 제대로 된 장인은 없다. 그건 고급 노예다. 큰 마을에나 가야 있다. 전의 지도자도 좋은 무기는 큰 마을에서 사왔다.”
장인 형제가 무기를 두들기면서도 계속해서 변명을 했다. 쓸데없는 행동을 하는 것도 문제지만 진짜 문제는 저거다. 집중을 하지 않고, 좋은 무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의지가 없다.
“무기를 만드는 법을 모르는군.”
“아. 아니다. 나 쓸모 있다. 죽이지 마라. 무기 만들 줄 안다. 고급 노예에 비해 못 만든다는 것뿐이지 일반 노예 중에는 가장 잘한다.”
지금까지 어떤 대우를 받아온 걸까. 이제는 그런 뜻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귀찮다. 그냥 행동으로 보여줘야겠다.
“이리 내놔라.”
망치를 빼앗아 들었다. 망치 자체도 물러 터졌군. 그래도 무기보다는 낫다.
“너는 무기를 만드는 자세가 잘못되어 있다.”
“자세?”
“무기를 만들 때는 모든 정신을 무기에 집중해야 한다. 단단해져라.”
깡!
“단단해져라.”
깡!
“단단해져라.”
깡!
“한 번 휘두를 때 한 번 생각해라. 단단해져라. 합쳐져라. 강해져라. 뭐든 좋다. 강한 무기가 가져야 할 특성을 강하게 바라며 두들기고 또 두들겨라.”
미로크를 만든 후 몇 번 더 무기를 만든 적이 있었다. 장인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제법 괜찮은 물건을 만들어냈었지. 같이 일했던 장인 형제는 내게 무기를 만드는 재능이 있다고 했다. 당연한 일이라 별 반응하지 않았다. 내가 재능 없는 분야도 있었던가.
“이렇게 두들기고 두들기면 무기는 강해진다.”
이정도 해줬으면 이해했겠지 생각하며 돌아봤다. 전혀 아니었다. 장인 형제는 여전히 주눅만 들어있을 뿐 내가 한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싶었다.
귀찮지만... 끝까지 보여줘야겠군,
“재료를 가져와라. 형제.”
“알았다.”
장인 형제가 허겁지겁 달려가 금속을 몇 개 집어왔다.
“그리고 다른 장인 형제들도 전부 불러와라.”
똑같은 짓을 두 번 하기는 싫으니까. 한 번에 모아서 가르쳐야겠다.
곧 장인 형제들이 전부 모여들었다. 괴 몇 개를 집어 모루 위에 올렸다. 겉으로 보기엔 참 좋은 작업실이다. 모루, 망치, 여러 금속 괴. 무기를 만들기 위한 많은 것이 갖춰져 있다.
전부 쓸데없다. 좋은 무기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모루와 정련된 괴가 아니다. 모루 없이 땅바닥에서 만들든, 찌그러지고 부서진 무기를 재료로 만들든 중요한 것은 의지다. 의지를 가지고 일념으로 두들기면 어떤 상황에서든 좋은 무기가 탄생하는 법이다.
“뭉쳐라. 뭉쳐라. 뭉쳐라.”
깡. 깡. 깡.
장인 형제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일부러 말하며 두들겼다. 그리고 10분...
“합쳐졌다. 어떻게?”
“용광로에 녹인 것도 아니고 화로에 달군 것도 아닌데 완전히 하나로 합쳐졌다. 저건 말이 안 된다.”
여러 개였던 괴가 하나로 합쳐졌다. 이 정도로 놀라다니... 이곳의 장인 형제들은 정말 실력이 없군. 이건 기초 중의 기초이건만.
“의지를 담아 두들겨라. 그러면 된다. 형제들은 의지가 없다. 그냥 두들기기만 해서는 좋은 무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건 말이 안 된... 아니다. 그렇군. 알겠다.”
말도 안 된다고 하려다가 내가 쳐다보자 놀라며 말을 멈추고 급히 수긍한다. 저런 형제에게서 강한 의지를 기대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인가. 장인 형제도 설득해서 데려왔어야 했는데.
“잘 봐라. 한 번만 보여주겠다. 절대 내 능력이 아니다. 강한 의지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 형제, 자매들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한 번 보여주고 뒤는... 노르쓰 우르드에게 맡기자.
“저기 있는 재료를 전부 가져와라.”
일단 만들기로 마음먹은 이상, 약한 무기를 만들 생각은 없다. 망치가 약해서 자루가 긴 양손도끼는 만들기 어렵겠다. 많이 두들기지 못해서 부러질 테니까. 투척용으로 쓸 한손 도끼나 하나 만들어야겠다.
깡. 깡. 깡. 깡.
***
“잘 봐라. 어떤 능력도 안 쓰고 순수하게 무기끼리 부딪히게 할 거다.”
그그극.
내가 만든 한손 도끼가 이곳 형제들이 쓰던 것 중 제법 질이 좋았던 무기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어.. 어떻게. 저건 가르혼에서 사온 고급 무기인데.”
“담금질을 하지 않은 무기가 어떻게 저렇게 단단할 수가 있지?”
“그 많은 금속을 저 정도로 압축했으니 단단한 건 당연한 일이지만... 두들기기만 했는데 어떻게 저 정도 크기로 압축 된 거지?”
장인 형제들이 엄청 놀란다.
거의 12시간은 두들긴 것 같다. 대족장인 내가 일념으로 12시간 동안 두들겼으면 이정도 무기는 당연한 거다. 재료도 엄청 많이 들어갔다. 거의 성인 오크 허리까지 쌓여있던 것들을 다 집어넣었다.
장인들에게 한손 도끼를 던져줬다.
“내일 가지러 오겠다. 그 전에 살펴보고 오늘 내가 알려준 방법을 연습해라. 그게 진정한 무기를 만드는 오크의 방식이다.”
대답은 듣지 않고 바로 건물을 나왔다. 이 정도나 해줬는데도 못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냥 적의 무기를 빼앗아서 쓸 수밖에.
해가 막 떠오른 아침에 들어왔는데 이미 해가 져서 깜깜했다. 오늘은 이만 쉬어야겠군.
-곧 거대한 싸움이 있을 것이다!
강렬한 음성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카록이시다.
-싸움을 대비해라! 진정한 대족장을 뽑아라! 가장 강한 자 하나만이 대족장이라 불릴 자격이 있을 것이니. 다가올 싸움을 준비해라!
단 하나의 대족장?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억!”
당연히 그 자리는 내 것이다.
***
요즘 그락카르가 보이는 모습들은 정말 의외다. 그락카르가 저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힘만 센 바보인 줄 알았는데 꽤 제대로 된 사상을 가지고 있다. 강자와 약자를 나누지 않고 모두를 존경해주다니. 식인이나 하는 야만족인 줄 알았는데 웬만한 현대인보다 훨씬 제정신이다.
그나저나 ‘거대한 싸움’이라니. 카록 그 전쟁광은 자기 신도들에게 또 무슨 짓을 시키려고 그러는 거지. 다른 종족 모두와 동시에 싸우기라도 할 건가?
에이. 나와 상관없을 테니 신경 끄자. 난 우리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만으로도 골치 아프니까.
“으잣. 차.”
기지개를 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교주님.”
옆에 앉아있던 벤센이 물었다.
“네. 푹 잘 잤네요.”
“대단하십니다. 이곳에서 주무실 수 있다니.”
요즘 신체를 컨트롤하는 데 익숙해져서요. 며칠 잠을 안자도 또렷한 정신으로 생활할 수 있지만 자겠다고 마음먹으면 바로 잘 수도 있다.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이렇게 소음이 가득하고 좌석이 불편한 수송기 내에서도 말이다.
“대단하십니다. 수송기는 이번이 처음이신 거로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전 수십 번 타봤는데도 한 번도 제대로 잠을 자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하. 제가 원래 아무데서나 잘 잡니다.”
난 지금 미군 수송기를 타고 외국으로 나와 있다.
축제가 한창인 지금 여객기 퍼스트클래스도 아니고 불편한 수송기를 타고 외국에 나와 있는 이유는 당연히 카티쉬 때문이다.
-그들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은 이라크와 시리아의 접경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그냥 ‘경기도였다고 합니다.’, ‘전라도였다고 합니다.’ 이러길 바랐는데 말이야. 멀고 가기 힘든 곳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이것들.
차라리 시리아, 이라크에서 발견 된 게 좋은 일일수도 있다. 몰래 일벌이기 좋은 곳이니까 말이다.
문제는... 그 놈들이 시리아, 이라크에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곧 투하지점에 도착합니다. 준비 되셨습니까?”
“물론이죠.”
그리고 잠시 후,
“점프!”
비행기에서 뛰어내렸다.
다른 사람들은 낙하산을 매달고, 난 오하넬에게 매달려서. 오하넬과 함께 내려오는 속도가 훨씬 빨랐기에 미리 땅에 내려와 낙하산 타고 오는 사람들을 기다렸다.
벤센 포함 12명이다. 고위 성전사 한 명과 그에게 속한 성전사 열 명이 이번에 함께 했다.
그런데... 12개의 낙하산이 한 번에 펼쳐지니까 엄청 눈에 띈다. 저런데도 적에게 발견되지 않는다고? 모르겠다. 벤센이 알아서 하겠지.
여기저기 떨어진 이들이 낙하산을 수습하고 내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지금 저희는 이곳에 있습니다.”
벤센이 지도를 펼쳐 손으로 짚어가며 설명해줬다. 시리아 동북지역이다. 출발하기 전에 듣기론 IS도, 정부군도, 반군도 없는 중립지대 비슷한 곳이라고 한다.
도착하니 이해된다. 아무 것도 없다. 황무지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곳이군. 점령할 가치가 전혀 없어 보였다.
“우리는 여기 터키 국경까지 도보로 이동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터키였다. 카티쉬가 터키에 있으니까.
공식 방문으로 가면 비행기 한 번만 타면 되는데 몰래 가려니까 정말 귀찮고 힘들구나.
< 164 사라지는 경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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