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크 더 오크-161화 (161/228)

< 161 비텔 >

“오랜만에 보는 구나. 274일만이야. 보고 싶었단다. 아이야.”

274일... 난 애초에 비텔님을 뵌 적이 없으니 아마도 비텔님께서 날 본지 274일이 되셨다는 거 같은데.

“맞다.”

그렇구나. 그 동안 날 아예 보지 못하신 모양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응답이 없으셨구나. 원래는 신도수가 일정 수에 도달할 때 말도 걸어주시고, 몇몇 상황에서는 뭘 하라고 명령을 내리기도 하셨는데 말이야. 그게 오랫동안 없었다. 한 10개월인가? 잠깐. 그런데 신도수가 1억과 10억에 도달했을 때 축복을 받았었는데?

“그건 흠... 너희들 세계의 단어로 말해주면 미리 정해둔 루틴 같은 거다. 친구들에게 너에 대해 언제 들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렇군. 어쩐지 이상하긴 했다. 축복을 내려주시긴 했지만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힘을 주시는 게 아니라 기존에 있던 스킬들을 한 단계씩 강화시켜주시는 것에서 끝냈으니까. 그런데 친구들에게 들키... 잠깐. 난 한 마디도 말 안하고 있는데?

설마. 제 생각이 들리십니까. 비텔님?

“들리고말고. 내가 네게 준 ‘비텔의 귀’를 떠올리면 당연한 것 아니더냐.”

그렇네. ‘비텔의 귀’는 상대가 사용자에게 가지는 악의를 읽거나 신도들의 기도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이니까. 그 스킬의 완전판이라면 생각을 읽는 것쯤은...

그런데 정말 비텔님이 맞나 보다. 죄송하지만 조금은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비텔님이라고 생각하기엔 존재감이 너무 약하셨어요. 물론 존재감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그저 예전에 느꼈던 거에 비해 약하다는 겁니다. 지금도 충분히 경외감이 듭니다.

혹시 기분 나쁘셨을까봐 변명으로 생각을 끝냈지만 비텔님의 표정은 별 변화가 없으셨다. 화나지는 않으신 거 같아 다행이군.

지금의 비텔님도 목소리는 물론이고 몸 전체에서 존재감을 뿜어내고 계시긴 하지만...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느꼈던 아찔함, 황홀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약간이지만 정말 비텔님이 맞는지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구나. 지금 내 사정이 조금 안 좋아서 말이다. 너희들이 순간적으로 내게 전해준 힘이 친구들의 예상을 넘어선 덕분에 나올 수 있었지만 일부만 나올 수 있었거든.”

사정이 안 좋아? 보고 싶었다고 말씀하신 거나 지금 빠져나올 수 있다고 말씀하신 걸 보면...

“설마 다른 신에게 감금당해 계십니까?”

아까부터 궁금했다. 친구들의 눈을 피하다니. 마치 누군가에 의해 강제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감금이라.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비슷하구나. 친구들이 나한테 조금 화나있어서 말이다.”

“감히...”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었다. 감히 비텔님을 감금하다니. 이건 다른 세계의 비텔교가 다른 종교에 의해 멸망했다는 것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문제다. 물론 그 문제도 큰 문제긴 하지만 비텔님께 직접 위해를 가한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몰란, 카록. 이 썩을 놈들이 감히.

“친구들을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친구들은 날 인간들에게 빼앗길까 무서웠던 것뿐이야. 내가 문제였어. 친구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였어야 했는데 너무 아이들에게만 관심을 줬었지. 아이들의 삶을 보는 것이 너무 즐거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지. 그리고 카록은 빼거라. 카록은 참여하지 않았으니까.”

그락카르의 신이 비텔님의 적이 아니란 건 다행이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설마 비텔님께서 지금 감금되신 이유가 인간에게 너무 관심을 주셔서라는 겁니까?”

“복잡한 사정이 있단다.”

긍정에 가까운 대답이다. 복잡한 사정이 뭔지는 듣지 않아도 될 거 같다. 질투 때문이었다는 건가? 그럼 그락카르의 세계에서 비텔교가 공적이 되어서 다른 종교에게 공격당했던 것도... 이... 이 빌어먹을 것들이! 그까짓 이유로 신을 감금하고 다른 세계의 비텔교를 학살해?!

“진정하거라.”

어느새 다가오셨는지 비텔님께서 내 옆에 다가와 공중에 떠올라 내 머리에 손을 올리고 계셨다. 순간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분노가 눈 녹듯 사라졌다. 비텔님의 힘이구나. 분노가 사라지자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제가... 제가 비텔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겁니까?”

“지금 해주는 것만 해도 충분하단다. 앞으로 100년이면 친구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거다. 아주 조금만 있으면 모든 게 자연스럽게 해결 될 거야.”

비텔님께는 100년이 잠깐일지 몰라도 내게는 크다. 거의 내 인생 대부분이니까. 지금으로부터 100년 뒤면 130살이니까. 그때까지 살아있긴 할까? 지금 인간 중 가장 장수 한 사람의 나이가 몇이지?

“네 수명은 200년이 넘을 것이니 걱정 안 해도 된단다.”

200년. 많이도 늘어났구나. 축복을 받고 신체능력이 강해지면서 수명도 늘어나는 건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는데 정말 늘어나는 구나. 하지만,

“제 수명을 걱정하는 게 아닙니다.”

비텔님께서, 우리들이 자유롭게 사시길 원하는 비텔님께서 다른 누군가에 의해 자유를 강제당하고 있는 이 사실 자체가 싫은 거다.

“바깥일을 모를 뿐 우리가 사는 곳 내에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단다.”

“그렇다고 해도 비텔님께서 포기하셔야 할 게 너무 많잖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네 덕분에 곧 친구들에게서 벗어날 힘을 가질 수 있을 거란다. 그때가 되면 친구들을 설득할 수 있겠지.”

비텔님께서 말하는 ‘곧’이란 100년 뒤겠지. 100년이나 비텔님이 감금당하고 있게 놔두라고? 그럴 순 없다. 보아하니 기도를 한 순간 받은 힘이 많으셨다고 말하는 걸 보면... 교단 기여 포인트. 그걸 쌓는 일이 비텔님께 힘이 되는 거겠지.

그러면 지구의 모든 사람을 비텔교로 만들고 매일 10번 이상 기도를 하게 만들면...

“그러지 말거라. 너희 세계 인간의 수가 많긴 하지만 친구들이 수천 년간 쌓은 힘은 적지 않단다. 그렇게 해도 40에서 50년 정도 빨라지는 것뿐이겠지.”

“40년, 50년도 인간인 제게는 중요한 일입니다.”

단호한 내 말에 비텔님께서 우울한 표정을 지으셨다.

“네 자유가 나 때문에 제약된다면... 내가 슬플 것 같구나.”

“크윽..”

심장을 부여잡았다.

가슴이 아프다. 너무나도 강렬한 슬픔이 느껴졌다. 왈칵 눈물이 흘러나왔다. 몸이 덜덜 떨리고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비텔님의 슬픔이 내게 그대로 전해진 것 같다.

“미안하구나. 순간 제어하지 못했어.”

비텔님께서 감정을 거두셨는지. 슬픔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 잔재는 여전히 남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게 신의 존재감. 그것도 일부...

지금 존재감이 약해지신 상태인데도 이 정도라면 본래의 비텔님께서 앞에 계셨다면... 어쩌면 심장이 멈췄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슬픔을 느끼기 전에 비텔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도 생각할 수 없었겠지.

겨우 다리에 힘이 돌아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미안하구나.”

“괜찮습니다.”

몸과 정신이 빠르게 회복됐다. 신체적인 충격도 컸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엄청났다. 애초에 정신적인 충격만 가해진 것이 신체까지 영향을 미친 거니까. 수많은 축복과 스킬을 통해 얻은 초인적인 회복력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주저앉아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을 거다.

“네 삶을 살거라.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너무 강제하지 말거라. 난 스스로의 삶을 사는 아이들을 보고 싶은 거니까. 아이들이 무슨 일을 한다고 해도 말이다.”

‘무슨 일을 한다고 해도.’라는 말에서 아까의 슬픔만큼은 아니지만 강렬한 감정이 느껴졌다. 비텔님께서 생각하는 자유는 생각보다 더 넓고 클지 모르겠구나.

“맞단다. 완전한 자유. 뭐든 해도 된다. 선과 악은 중요한 게 아니란다. 네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하거라. 난 그것을 지켜보는 게 즐거우니까.”

이건... 죄송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곧이곧대로 전하기 힘든 내용이다. 인간들에게 선과 악의 구분은 중요한 일이니까. 어쩌면 다른 종교에서 이 말을 빌미로 악마의 종교라고 공격해올지도 모른다.

“그것도 네 선택이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지금 내가 주목하고 있는 삶은 너의 삶. 다른 아이들도 중요하긴 하지만 네가 가장 중요하단다.”

저런 말을 신께 직접 듣다니.

“이제 사담은 그만하고 내가 널 찾아온 이유를 말해야겠구나.”

이유? 그냥 빠져나올 수 있어서 빠져나온 게 아니라 내게 전해야 할 말이 있어서 오신 거구나.

“조심하거라.”

“조심...이요?”

뭘 조심하라는 말씀이시지?

“친구들이 너희들의 존재를 알았단다.”

“저희의 존재를요?”

그건... 외람된 말이지만 당연한 일 아니었습니까? 신이니까요.

“신이라 하지만 모든 걸 아는 건 아니란다. 모든 걸 안다면 내가 너희를 지켜보는 게 즐겁겠니? 어떻게 될지 모든 걸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그건 그러네.

“304일 전이었던가. 내가 다른 세계의 힘들어 하는 아이에게 힘을 전해준 적이 있었단다. 그때 너무 많은 힘을 전해준 건지 친구들이 알고 말았지.”

304일 전이라면... 정확하진 않지만 그락카르가 비텔교의 성전사로 의심되는 존재와 싸웠을 시기다. 그쯤해서 다른 신들이 우리의 존재를 알게 된 거군.

“친구들은 자신들이 거느리는 아이들을 시켜 내 아이들을 찾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그 세계 어딘가에 너희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생각보다 신의 능력이 넓은 편은 아닌 거 같다. 내가 생각하는 신이라면 모든 세계를 한 눈에 봐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는 구나.

“그리고 170일 전, 그 세계에 내 아이들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단다.”

세계를 뒤지는데 130일쯤 걸린 건가? 그 정도라면... 신도들을 통해서만 찾은 거 같은데. 신도들이 인지하는 범위 외에는 신들도 알 수 없는 건가?

“네 생각이 맞단다. 아이들이 모르면 우리도 모른단다.”

“그렇군요.”

“특히 너희들의 세계는 그게 더 심하지. 너희 세계는 벽이 두꺼워서 쉽게 들여다볼 수 없단다. 오로지 연결이 강한 너를 통해서만 그 세계를 인지할 수 있지.”

나를 통해서만 우리 세계를 인지한다고? 생각해보니 비텔님과 함께 했던 대부분의 일이... 내가 인지하는 순간 일어나거나 내가 직접 가서 행동을 취해야만 했던 거 같기는 한데 예외가 있다.

김해역. 김해역은 분명 내가 없는 곳에서 성전사가 됐다.

“그건 너를 통해서 발휘한 힘이 그 아이에게 영향을 미친 거란다.”

“그렇..군요.”

그런 거였군. 우리 세계에서 비텔님은 나만을 볼 수 있는 거였어. 그래서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신 건가? 지켜보는 걸 좋아하시는 비텔님께서 나밖에 지켜볼 수 없으니까?

“그렇지.”

비텔님께서 바로 대답해주셨다. 내 의문을 바로 비텔님께서 풀어주시니까 좋긴 하네.

“170일 전에 그 세계에 내 아이들이 없다는 걸 확신한 친구들은 다른 세계를 찾기 시작했단다.”

비텔님께서 설명을 이어가셨다.

“그리고 140일 전에 너희들을 찾았지.”

빠르네. 다른 세계를 찾는 건데 겨우 30일 만에 우릴 찾아내다니.

“내 힘이 느껴지는 세상만 찾으면 되는 거였으니까. 네가 열심히 해준 덕분에 너의 세계엔 내 힘이 가득 차 있으니 찾는 게 어렵지는 않았을 거다.”

그렇군. 신도가 많이 늘어나서 나쁜 점도 있었군. 다른 신들에게 쉽게 발견 되다니.

“그리고 87일 전, 너희 세계로 친구의 아이들 몇이 건너갔단다.”

뭐?!

< 161 비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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