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비텔 >
“해역이가요? 음... 네. 알았습니다. 조심해서 돌아오세요. 네.”
벨럼의 응징이 완료되었다는 레이먼의 연락을 받았다. 카일라가 아니라 김해역이 나섰다고 한다.
해역이 녀석. 그럴 생각으로 갔군.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말이야. 이놈 평소엔 진중한데 가끔씩 너무 저돌적으로 변한다. 그거 별로 좋지 않은데.
그런데 해역이 혼자서 다 처리하다니. 실력 좋구나. 해역이를 너무 얕본 건가. 하긴 1년 전에 비해 축복도 세 번이나 더 받았고 훈련도 정말 열심히 했지.
그리고 비텔교 전투기술 자체가 정면 대결보다는 암살 쪽에 특화되어 있으니까. 이번 임무가 해역이에게 잘 맞기도 했겠지. 돌아오면 이야기해보고 원하면 임무에 직접 나설 수 있도록 허락해줘야겠다.
하긴 축복 네 번이면 저쪽 세계에서는 거의 족장급이다. 거기에 해역이는 꿈속에서 십여년에 가까운 전투경험도 있고 말이야. 실제로도 거의 족장급 무력을 갖추고 있지 않을까?
족장급이라. 족장급 오크가 우리 세계에 넘어온다고 생각하면... 거의 재앙이다. 총이 소용없는 것은 기본이고 로켓도 부상 입히기는 힘들지 않을까? 방어력이 이 정돈데 더 무서운 건 공격력이다. 도끼질 제대로 하면 탱크 장갑도 뚫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전부 예상이다. 직접 실험할 수 없는 것들이니까. 하지만 거의 정확하지 않을까.
그런 놈들이랑 해역이가 동급이란 거다. 좀 믿어줘도 될 거 같네.
명색이 성전사장인데 그동안 너무 성전사장 대우를 안 해주긴 했지. 앞으론 무슨 일이 있을 때 수호자를 보내는 것보다는 해역이한테 맡겨봐야겠다. 아니. 성전사 쪽의 일에서 아예 손을 떼는 것도 괜찮겠지. 해역이가 알아서 할 수 있도록 말이야.
***
신도림 자살폭탄테러 사건이 있었지만, 비텔교 대화합의 날은 취소나 일정연기 없이 원래 계획했던 예정 그대로 진행되었다.
“교주님. 10분 전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1층에서 방송 준비하던 스태프가 올라와 남은 시간을 알려줬다. 이제 10분 뒤면 대회합의 날이 시작된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임시전당에 있는 숙소다. 어딘가로 가서 직접 신도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내가 어딘가로 가면 그곳에 사람이 몰려서 문제가 생길 것을 알기에 숙소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기로 했다.
임시전당으로도 가면 안 된다. 안 그래도 임시전당에 나와 유나가 나타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수십만 명이 몰려왔는데 정말로 나와 유나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100만 명은 모여들 거다. 100만 명... 끔찍하네.
“후읍. 후... 후읍. 후...”
준비를 전부 마치고 내 방에 와 있던 유나가 크게 심호흡을 한다.
“긴장돼요...”
신도들 앞에 나선 경험이 많을 텐데도 아직도 긴장이 많이 되는 모양이다.
“나도 긴장돼.”
“전혀 긴장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요?”
“겉으로 표현만 안하는 거지 실제론 엄청 긴장하고 있어.”
거짓말이다. 사실은 조금도 긴장되지 않는다. 유나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지어낸 말이다. 예전엔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어릴 때 10명 정도 되는 사람들 앞에 나가 발표할 때 목소리를 심하게 떨었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랬던 내가 수억 명이 지켜볼 방송을 찍기 전인데도 조금도 긴장하지 않다니. 축복을 받으면서 정신력도 강화된 데다가 ‘굳건한 영혼’ 스킬을 얻은 덕분이겠지.
‘굳건한 영혼’을 얻은 후로는 크게 동요해본 적이 없는 거 같다. 이번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꽤 분노했지만 이건 특수한 경우니까.
“옷 예쁘네. 직접 고른 거야?”
“아. 이거요? 전 보는 눈이 없어서 언니가 골라줬어요. 예뻐요?”
유나가 언니라고 부를 사람은 맹연밖에 없다.
“엄청 예쁘다. 비텔님이라고 해도 믿겠어.”
“헤헤. 에이. 그 정도는 아니다. 어떻게 저를 비텔님하고 비교해요.”
유나나 나나 비텔님을 본 적도 없으면서 비텔님을 예쁘다고 확신하고 있네. 그런데 비텔님이 못 생겼을 거라는 상상은 하기가 힘들다. 들려온 목소리가 ‘나 엄청 아름답다!!!! 완전 아름다워!!!!’라고 말하는 느낌이었으니까.
유나의 의상은 장식을 최소화한 연보라색 드레스였다. 악세사리도 최소한으로 했다. 수수한 듯하면서도 순수함이 강하게 느껴졌다. 유나가 가진 이미지를 아주 잘 표현한 것 같다. 유나는 신도들에게 성녀라고 불리고 있으니까.
저 옷 입고 나가면 유나 팬클럽에서 또 난리 나겠다. 엄청 좋아하겠어.
난 운전기사 시절 입던 것과 비슷한 검은색 정장을 입었다. 교주라는 직책에 어울리지 않는 의상이지만 내가 고집했다. 맹연이 교주답게 입으라고 했지만 전통이 없는 비텔교에서 교주다운 게 어디 있어. 어차피 내가 초대 교주니까. 내가 하는 게 전통이 되고 교주다운 게 되겠지.
“5분 남았습니다. 교주님.”
“알겠습니다.”
5분이라. 이제 내려가는 게 좋겠다. 내려가기 전 마지막으로 거울 앞에 서 점검을 했다.
“나 꽤 옷빨이 받는 거 같지 않아? 예전엔 안 그랬는데 말이야.”
“제가 준비한 옷을 입으셨으면 더 괜찮았을 텐데요.”
맹연이 긍정대신 불만을 토해냈다. 맹연이 가져온 의상이 아직도 방 한 쪽에 놓여 있었다. 내가 안 입는다고 했는데도 마지막까지 포기를 못한 모양이다. 처음 권한 걸 절대 안 입으려고 하니까 최대한 내 정장이랑 비슷한 거로 가져왔다. 그것도 괜찮긴 했지만 내 옷이 마음에 들었다.
그나저나 정말 괜찮네. 역시 몸매랑 비율이 좋으니까 대충 아무거나 입어도 잘 어울린단 말이야.
1년 전에는 어깨도 좁고, 똥배도 조금 있었는데 말이야. 1년 사이에 온 몸에 보기 좋은 날렵한 근육이 알알이 박혔고 키도 5cm정도 컸다. 아마 축복을 받은 육체가 그 힘을 발휘하기에 최적의 상태를 찾아간 게 아닐까 싶다. 그와 비슷한 이유로 유나가 폭풍성장을 한 거겠지. 중학생인데 겉보기엔 대학생쯤으로 보일 정도니까.
얼굴도 꽤 괜찮아진 거 같은데... 나중에 축복받은 비텔교 신도들은 전부 예쁘고 잘생겨지는 거 아냐?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겠다. 김해역도 예전에 비하면 꽤 잘생겨졌으니까. 미남, 미녀가 많은 종교가 되겠네.
“갈까?”
“네!”
긴장을 떨쳐버리려는 건지 기합을 지르는 것처럼 대답을 한다.
“모시겠습니다.”
문을 여니 밖에서 대기하던 김해역이 작게 목례하며 인사했다. 얘도 참 이상한 고집이 있다. 방에서 같이 기다리자니까 자기는 문을 지켜야한다고 문 앞에 계속 서 있었다.
축복을 네 번이나 받은 몸이나 좀 서 있는다고 피곤해질 몸이 아니긴 하지만 정신이 피곤할 텐데 말이야.
해역이의 의상은 군대 느낌이 물씬 나는 제복이었다. 현대식은 아닌 거 같고 근대 유럽에서나 입었을 듯한 고풍스러움이 느껴졌다. 너 내가 알기론 군 면제일 텐데...
그런데 유나도 그렇고 해역이도 그렇고 둘 다 보라색 옷을 입었다. 딱히 비텔교를 상징하는 색을 보라색으로 정한 적은 없는데 말이야... 확실히 비텔님께서 주신 힘을 쓸 때는 보라색 빛을 발하니까 보라색을 대표 색으로 쓰는 것도 좋겠지.
그래서 맹연이 보여줬던 의상이 전체적으로 보라색이었던 건가. 그 보라색이 마음에 안 들어서 안 입은 거기도 한 데 말이야. 비텔님의 색인 보라색을 싫어하다니. 갑자기 내 신앙심이 엄청 낮은 거처럼 느껴진다. 그냥 보라색 정장이 싫었을 뿐인데 말이야.
뭐. 내가 신앙심이 가장 낮긴 하지.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교주가 가장 신앙심이 낮은 종교라니. 이상한 종교네.
1층에 내려가니 거실에 단상이 만들어져있고 그 앞에 큰 카메라 3대가 위치해있었다.
단상위에 있는 연설대에 가 섰다. 축제 개회식의 순서가 간략하게 나와 있었다. 나와 유나의 개회사가 50분 정도로 잡혀 있었다. 너무 길다. 김진서가 준비해준 연설문이 있긴 하지만 내용이 상당히 지루했다. 대충 띄엄띄엄 읽어서 10분 만에 끝내고 유나한테 넘겨야지.
신도들도 연설 길면 안 좋아할 거야. 축제면 축제답게 즐거워야 하잖아.
나와 유나의 개회사가 끝나면 정말 즐거운 축제가 시작된다.
이번 축제는 24시간 끊임없이 공연이 이어진다. 한국에서의 첫 공연을 시작으로 전 세계 각지에서 그 나라 특색에 맞춰 준비한 공연이 이어질 것이다.
공연의 주제는 ‘평화’, 축제가 애초에 계획했던 것보다 규모가 몇 십 배는 커지고 수정되었지만 축제의 본질만큼은 잊지 않았다.
‘서로 친해져서 더 이상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한 마디에서 이 축제는 시작되었으니까.
유나의 발레 공연은 3일차 오후 7시부터 2시간 동안 이어질 예정이다. 기대된다. 처음엔 전혀 흥미가 없었지만 유나 때문에 억지로 봤었는데 보다보니 아는 것도 늘어나고 점점 공연자체가 재미있어졌다.
이제는 유나가 나오지 않는 공연도 찾아볼 정도로 발레자체를 좋아하게 됐다. 다른 공연을 보면서 느낀 건데 유나가 발레를 참 잘한다. 어떤 발레리나보다도 표현력이 좋고 아름답다. 팔불출 아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정말 잘한다.
유나의 공연은 두 달만인가. 3일 뒤가 기대되는군.
“30초 전입니다! 10초 전부터 카운트 들어가겠습니다!”
드디어 시간이 됐군.
“10! 9! 8! 7! 6! 5! 4! 3! 2! 1! 시작합니다!”
“안녕하십니까. 18억 비텔교 가족 여러분.”
타이밍 맞춰 잘 들어갔다. 아까 아침에 이 타이밍 맞추는 것만 여러 번 연습했다.
카메라 앞에 있는 프롬프트에 내가 읽어야 할 내용이 올라왔다. 일단 처음엔 저대로 읽어야지. 그러다가 대충 중간에 끊어야겠어.
연설문 내용은 내가 대충 방향을 정해주고 김진서가 작성해왔다. 원래 연설문에는 ‘17억 비텔교 가족’이라고 적혀있었다. 비텔교 신도는 17억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니까. 그런데 며칠 전 18억을 넘겼다.
그 사건 이후로 신도가 늘어나는 속도가 빨라져서 말이다.
“비텔교인의 축제 ‘대화합의 날’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부터 일주일간...”
연설 실력도 참 많이 늘었다. 처음엔 발음을 씹거나, 잘못 읽거나, 더듬는 실수를 많이 했었는데. 이 짓도 자주하다보니까 말이 매끄럽게 잘 나온다.
“이 축제는 비단 비텔교인만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함께 평화를 만들어갔으면 하는 마음에서 대화합이라 이름 붙였습....”
말을 하다 보니 어느새 15분이 지났다. 10분만 하고 나오려고 했는데 너무 많이 했네. 자. 이제 슬슬 끊고 유나에게 넘기자. 솔직히 신도들이 날 보고 싶어 하겠어? 우리 귀엽고 예쁜 유나 보고 싶어 하겠지.
“그럼. 이 축제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비텔님께 감사기도를 하겠습니다. 모두 마음속으로 비텔님께 기도하십시오.”
공식 기도의 대부분은 내가 기도해주는 게 아니라 각자 기도하라고 말한다. 내가 기도해주면 다들 아무 생각 없이 듣기만 하기에 교단 기여 포인트가 들어오지 않는다. 각자 기도하라고 해야 포인트가 잘 들어오다보니 이게 비텔교의 전통처럼 되어버렸다.
-세상에 강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인생을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이 있음을 감사드리고, 제 딸이 있음을 감사드리고...
순간적으로 10억 명이 넘는 사람의 기도가 머릿속에 들려왔다. 정말 신기하다. 아무리 신의 힘이라고 해도 평범한 인간인 내가 1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의 기도를 동시에 듣고 그것 전부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들다니.
정말 비텔님은 위대하시... 음? 여긴 어디지?
분명 난 숙소의 1층 거실에 있었는데 지금 난 홀로 야외로 나와 있었다.
낮은 경사를 가진 언덕, 그 언덕에서 아래 평지까지 이어지는 넓은 초원. 그 초원의 끝엔 바닷가가 펼쳐져 있었다.
후우웅.
짠 내 가득한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상쾌하다. 정말 좋은 곳이다. 좋은 곳이긴 한데... 도대체 내가 왜 여기 있는 거냐.
“아이야... 드디어 만나는구나.”
가까운 곳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기척이 없었는데... 놀라서 보니 그곳엔 이제 겨우 10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서 있었다.
“당신은...”
난 보자마자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듣자마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익숙한 목소리였으니까.
“비텔님?”
< 160 비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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