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미지와의 조우 >
-구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저쪽 무리의 족장으로 보이는 자가 고함을 질렀다. 고함이나 영혼의 크기를 보면 그리 강자는 아닌 것 같다. 굳이 비교하자면 우드록 정도? 우드록 이상의 강자는 우리 무리에만 다섯이나 있다.
저 정도 강자가 우두머리라면 이미 승패는 정해졌... 음? 뭐지?
저쪽의 형제들이 창을 높게 쳐든다. 그리고,
“던져!”
우두머리의 명령에 맞춰 동시에 창을 던졌다. 창은 비스듬하게 하늘 높이 날아오르더니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저대로 날아와 떨어지면... 정확히 우리들 위로 떨어지겠군. 투창을 자주하는 모양이다. 정확도가 괜찮다.
내가 좀 앞으로 많이 나와 있어서 내게 오는 것은 거의 없고 대부분 뒤의 형제들을 향해 날아갔다.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것투성이다. 오크가 몸과 몸이 부딪히는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처럼 살상만을 위한 무기를 쓰다니. 저런 것은 카록께서 좋아하시지 않는다.
“쿠워억!”
콰작. 콰자작.
미로크로 날아오는 창을 쳐냈다. 묵직하다. 창대가 쇠다. 전체가 쇠로 만들어진 창이라니. 창에 담긴 힘도 제법이다. 인간이 날리는 화살이나 드워프가 쏘는 작은 쇠구슬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제법 위력이 강하겠어.
형제들이 제법 피해를 입겠는데... 뭐 알아서 하겠지. 전쟁터에 오기 전에 준비시키는 거라면 모를까 전투에 돌입한 이상 몸은 스스로가 알아서 챙겨야 한다.
이곳에서 내가 형제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최대한 빨리 적에게 도달해 휘젓는 것뿐이다.
“구아악! 앞줄! 내 구호에 맞춰 선두의 야만오크에게 공격을 집중해라! 뒷줄은 뒤따르는 무리에게 자유공격!”
야만오크? 설마 날 두고 하는 말인가?
“던져!”
앞줄의 형제들이 던진 창이 일제히 날 놀리고 날아왔다. .... 어이없다. 나처럼 잘생기고 멋진 오크를 본 적이 없는데 날 야만 오크라고 부르다니.
오랜만이다. 10개월 만인가.
“크워어어어어어어억!”
제대로 열 받았다.
***
전투는 꽤 싱겁게 끝났다. 투창의 위력이 강하긴 하지만 내게 그런 건 통하지 않는다. 전부 쳐내거나 그냥 맞아가면서 전진했다. 내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공격도 있긴 했지만 얕았다. 날 멈추려면 최소한 치명상 10개 정도는 입혀야지. 이 정도는 어림도 없다.
난 잔뜩 열 받은 상태로 진형을 이루고 있는 형제들에게 짓쳐 들어갔고 아무도 날 막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휘젓는 틈에 다른 형제들도 도착했고, 근접 전투에서 이곳의 형제들은 우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저딴 놈들은 형제라고 부르는 것도 아깝다.”
“전부 죽여 버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캅카스가와 미흐로크가 말했다. 나도 그 말에 동감한다.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왔으니 전사인게 분명한데 하는 행동은...
“죽이면 안 된다. 저들을 무리에 받아들여야 한다. 그락카르.”
노르쓰 우르드가 말렸다.
“평소 노르쓰 우르드의 말을 존중하긴 했지만 전사로서 불명예로 가득한 모습만 보인 저들을 무리에 받아들이는 것은 반대한다. 저런 자들과 같은 무리에서 활동한다니. 생각만 해도 짜증나는군.”
성격이 무난한 캅카스가 답지 않게 강한 어조로 말한다.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저런 자들을 내 무리에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저 축 처진 표정을 봐라. 전투에서 싸우다 죽는 게 아니라 항복을 한 것도 어이가 없는데 저렇게 축 처진 표정이나 하고 있다니.
이 땅의 오크는 우리와 다른 종족인 건가? 내가 아는 오크의 모습이 아니다.
이게 다가 아니다. 그냥 싸우다가 잡혔으면 캅카스가가 저렇게 흥분하지는 않았을 거다. 싸우다가 좀 불리하다 싶으니 성으로 도망치기까지 했다. 그리고 성벽을 방패삼아 싸우기 시작했는데 저런 낮은 성벽쯤이야 나나 캅카스가, 미흐로크에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바로 성벽위로 올라가 날뛰어줬다. 그때 우두머리로 보였던 자도 죽였다. 우두머리주제에 가장 뒤에 있어서 늦게 죽였다. 우두머리답게 가장 앞에 있었으면 전투 시작과 동시에 죽였을 텐데.
그러자 정말 내 눈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처음의 전투에서 도망친 것은 성벽을 이용해 싸우기 위한 일환이라고 봐줄 수 있다. 그런데 전세가 기울고 우두머리가 죽었다고 도망치는 오크들이라니...
500 정도가 남으니 도망치기 시작했고 따라잡아가서 쳐 죽이니 400이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전사가 무기를 버리다니. 어이가 없어서 가만있었더니 알아서 다시 부락 안으로 들어와 저렇게 한 곳에 모여 있다.
“그래도 받아들여야 한다. 형제. 저들도 우리의 형제다.”
“저런 것들은 내 형제가 아니다!”
미흐로크도 강하게 반발하며 나섰다.
“저런 불명예로 가득한 자들이 무리에 들어오면 카록께서 더 이상 지켜봐주시지 않으실 거다. 절대 받아들여선 안 된다.”
“미흐로크의 말이 맞다. 카록의 눈이 떠날 것이다.”
미흐로크가 말을 이었고 캅카스가가 강하게 동의했다. 그 둘만이 아니다. 다른 형제들도 격하게 동의했다. 저런 자들과 함께하기 싫다고 말이다.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형제들의 목소리로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그 소란을 지켜보는 항복한 500의 형제... 아니 형제라고 부르는 것도 아깝다. 그냥 오크라고 부르자. 500의 오크들의 표정이 어두워져갔다.
정말 지켜보면 볼수록 실망스럽다. 저런 자들 사이에 노르쓰 우르드가 말한 강자가 정말 있을까?
“다들 우리의 목적을 상기해라. 애초에 우리가 이곳으로 향한 건 이곳의 형제들이 서로 죽이는 것을 멈추게 하고, 진정한 오크의 삶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었지 않나.”
그랬나? 크후. 그러고 보니 그런 목적이 있었던 거 같기도 하다. 1년 전 이곳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기 전에 노르쓰 우르드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었지.
“난 그냥 그락카르가 가자기에 온 거다.”
“나도.”
“나 역시. 붉은 오크는 카록께 선택받은 오크. 그와 함께 하면 언제든 카록께서 지켜볼 것이라 생각해서 따라온 거다.”
“다른 오크가 어떻게 살든 나와 무슨 상관이냐.”
내가 가물가물할 정도인데 다른 형제들이 그걸 기억할 리 없다. 아니 애초에 그런 생각을 한 형제자체가 거의 없었겠지.
“......”
노르쓰 우르드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곤 날 봤다.
“그래. 다른 형제들은 그럴지 몰라도 형제. 형제는 그걸 위해 온 것 아닌가.”
“......”
주목적은 강자가 있다고 해서 찾아온 거지만... 형제들끼리 서로 싸우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도 목적 중 하나긴 하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들이 잘못되긴 했다. 처음 보는 형제들에게 망설임 없이 무기를 들고 공격해오다니.”
다른 종족이라면 몰라도 오크끼리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 모든 오크는 가족이니까. 모두가 형제, 자매다.
“그렇기에 더 받아들여야 하는 거다. 여기에 사는 모든 형제가 저렇다. 그리고 여기에 사는 형제의 수는 적어도 수백만은 될 터. 그들을 다 버릴 것이냐.”
노르쓰 우르드가 급하게 말을 토해냈다. 내 말을 잘못 알아들은 거 같다.
“오해다. 버리겠다고 한 말이 아니다.”
“그러면...”
“난 태어나서 2년간 훌륭한 암컷에게 삶을 배웠지. 아마도 저들은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저들에게 오크의 진정한 삶을 가르쳐주겠다.”
“그래! 잘 생각했다!”
내가 뭔가 노르쓰 우르드가 좋아할 만한 말을 한 모양이다. 그답지 않게 큰 소리를 내며 좋아한다.
다른 형제들의 반응도 바뀌었다.
“그락카르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뭐...”
“형제가 받아들이기로 했다면 그렇게 해라.”
“그락카르의 결정을 따르겠다.”
“뭘 결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겠다.”
“나도 뭔지 모르겠지만 찬성이다.”
그렇게 싫어하던 것임에도 내가 선택하니 별 말 없이 따라주었다. 참 고마운 형제들이다.
***
우리가 살던 지역의 부락은 구조가 단순해서 암컷, 아이가 사는 지역과 식량 천막이 있는 지역만 정해지고 나머지는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는다. 알아서 그때그때 쓰고 싶은 용도로 천막을 사용하면 된다.
그런데 이곳은 천막이 아닌 돌과 진흙으로 건물을 만들었으며 모양과 크기가 전부 달랐다.
그래서 새로 받아들인 형제 중 가장 덩치가 큰 형제에게 부락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했다.
“저기는 노예 수용소다.”
“노예 수용소? 인간이라도 잡아두고 있는 건가?”
역시 여기의 형제들은 이상하군. 노예를 부리다니. 노예가 뭔지는 알지만 우리에겐 전혀 쓸모가 없는 단어였다.
우리는 노예는 없지만 가끔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인간에게 시키고 그 대가로 풀어주기도 했으니까. 여기 이상한 형제들이라면 거기서 더 나아가서 인간을 잡아두고 계속해서 일을 시킬 수도 있...
“뭐지? 왜 형제, 자매들이 저기 있는 거냐.”
수십의 형제, 자매가 깊은 구덩이 속에 들어가 있었다. 너무 깊어서 빛도 제대로 들지 않기에 내 밤눈이 밝지 않았으면 저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거다. 왜 들어가 있는 거지? 햇빛을 피하는 건가?
“코에 달려 있는 쇠는 또 뭐지?”
한둘의 코에만 달려있다면 특이하게 몸을 꾸미는 형제, 자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형제, 자매의 코에 두꺼운 쇠고리가 달려있었다.
“저들이 노예고, 쇠고리는 노예를 편하게 다루기 위한 장치다. 슬레브링이라고 한다.”
“..... 지금 네 말은 형제와 자매를 노예로 썼다는 말이냐.”
“우리가 전투로 사로잡은 자들이다. 당연히 노예로 써야... 쿠. 쿠흑.”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형제, 아니 이제 형제가 아니다. 빌어먹을 놈의 목을 잡고 들어올렸다.
“오크가 오크를 노예로 부리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함께 싸우고, 함께 먹으며, 함께 죽는 형제와 자매들을 노예로서 사용하다니. 그건 같은 종족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 아니던가.
“참아라. 그락카르. 전대에게 물려받은 기억에 의하면 여기에 사는 모든 오크가 그런 생활방식을 갖고 있다.”
“여기 사는 모든 오크가? 어떻게 오크가 그럴 수 있지? 오크는 날 때부터 명예로운 전사다. 명예로운 전사는 모든 형제와 자매를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고 아낀다.”
모든 오크는 평등하다. 족장이든, 대전사든, 평범한 오크든, 장인이든, 암컷이든, 아이든. 그 어떤 자리에 있든 상관없이 자신의 뜻대로 행동할 수 있으며 어떤 일을 강제할 수 없다. 그건 대족장이 된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자고 해도 형제, 자매들은 그걸 거부할 수 있으며 내가 강제로 시킬 수도 없다.
“그래. 그게 맞는 말이고 옳은 일이다. 그락카르. 일단 분노를 풀고 그 손을 놔줘라. 그 형제가 죽겠다.”
“쿠.. 쿠륵.”
목이 잡힌 빌어먹을 놈은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정말 멍청한 놈이다. 목이 잡혔으면 발로 내 면상을 치든지 허리춤에 있는 도끼를 꺼내서 내 팔을 자르던지 뭐든 해야 하건만 잡힌 채 죽을 때만 기다리고 있다니.
놔줬다.
“쿠헉. 쿠허헉.”
저런 빌어먹을 놈은 죽일 가치도 없다.
“저들의 눈빛을 봐라. 그락카르.”
노르쓰 우르드가 구덕이 속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가리켰다.
“자신들이 노예가 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눈빛이다.”
그런가? 솔직히 모르겠지만 노르쓰 우르드가 그렇다니 그렇겠지.
“저들은 자기가 졌으니 노예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아마 이겼다면 노예가 되는 것은 방금 형제에게 목이 잡혔던 형제일 것이다.”
“그건 잘못된 일이다.”
그냥 잘못된 정도가 아니다. 아주 많이 크게 잘못된 일이다.
“그래. 잘못됐다. 그래서 형제와 내가 내려온 거다. 그것들을 고치기 위해서 말이다. 이곳엔 잘못된 것이 많다. 형제가 형제를 죽이고, 다른 형제와 자매를 노예로 만든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이곳엔 계급도 있다. 강자가 모든 것을 가지고, 약자는 강자가 버리고 남은 것을 가진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뒤틀릴 수가 있는 거냐. 진정한 오크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 이들은 오크가 아닌 거 같다.”
“그러니 우리가 그걸 고쳐야 한다. 잘못된 삶을 사로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 진정한 오크의 삶을 가르쳐줘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곳에 사는 형제, 자매가 수백만이라 하지 않았나. 그들에게 어떻게 전부 가르쳐주나.”
너무 많다. 그들을 일일이 잡고 오크의 삶을 설명해줄 수도 없다. 쉽게 받아들이지도 않을 테지.
“힘. 힘을 보여주면 된다.”
“힘?”
“네 힘을 보여줘라. 그락카르. 내가 말했지 않나. 강자는 모든 것을 가진다고. 그락카르. 네가 이 지역에서 가장 강한 자가 되면 된다. 가장 강한 자가 되어 모든 것을 가져라. 그리고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 진정한 오크의 삶을 살라고 명령해라. 그러면 된다.”
강자가 되면 된다고?
“난 이미 강하다.”
“물론이다. 넌 강하다. 그락카르.”
“하지만 방금 이곳의 형제들을 만났을 때 내 강함을 보고도 물러나지 않고 덤벼왔다.”
“그랬지. 이곳에 사는 형제들은 강함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좀 다르다. 비록 싫더라도 일단 이 지역의 방식대로 그들에게 힘을 보여줘야 한다.”
이 지역의 방식이라...
“이 지역의 방식이란 게 뭐냐.”
“전쟁이다. 이 지역에서 무리의 힘은 우두머리의 힘과 같다. 개인의 힘이 약하더라도 무리의 힘이 강하면 강자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냐. 스스로 강해야지. 어떻게 다른 형제들의 강함을 자기 강함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지?”
“맞다. 이것 역시 잘못 된 거다. 그러니 형제가 이곳의 방식대로 강해져서, 무리를 키워서 고쳐라.”
정말... 많은 것이 잘못 됐다.
“무리의 강함이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간단하다. 다른 형제들의 부락과 싸워 그곳을 점령해라. 그러면 형제를 따를 거다.”
점령. 점령이라... 정말 생소한 단어다. 어떤 장소를 차지하고 자리를 잡는다는 뜻이었지. 오크의 삶은 뭔가를 소유한다는 개념이 없다. 있으면 공유하고 없으면 마는 거다.
“점령... 솔직히 모르겠다. 평생 해본 적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싸움이라면 자신 있다. 무리간의 싸움? 날 따라온 형제들은 강하다. 이곳에 저런 약자만 있다면,”
아직도 목을 부여잡고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빌어먹을 놈을 가리켰다.
“그 누구도 우릴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점령인지 뭔지는 형제에게 맡기겠다.”
“최선을 다해 돕겠다.”
이곳의 잘못된 것들...
내가 전부 부숴야겠다.
< 153 미지와의 조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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