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오크가 남쪽으로 간 까닭은 >
“짜증나는군. 세상에 나와 처음 본 얼굴이 너희들이라니.”
‘죽지 않는 자’, 아베네고는 진심으로 짜증났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자 일곱 중 셋이 한 번에 나타났다.
“우리라고 널 보고 싶었을 것 같으냐.”
엘프가 만만치 않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엘프만이 아니다. 드워프와 리자드맨도 같은 마음이었다. 200년 전 아베네고를 죽일 때 겪었던 고난을 생각하면 치를 떠는 그들이다. 당연하게도 그를 다시 만나는 것은 살면서 하기 싫은 일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락노르. 넌 언제나 그 입이 문제구나.”
“입이 문제라고 하기에는 오랫동안 너무 잘 살았지.”
“이번에도 그럴까?”
아베네고의 몸이 보라색 빛에 둘러싸였다. 그저 보라색 빛에 둘러싸였을 뿐 별다른 기세는 없었지만 엘프, 드워프, 리자드맨 모두 굳은 표정으로 힘을 끌어올렸다.
“여기서 싸울 생각은 없다. 아베네고.”
드워프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꼬장꼬장하게 생긴 얼굴과 달리 차분한 목소리였다.
“다시 북으로 돌아가라. 어떻게 부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어 힘이 얼마 없을 텐데. 비텔의 신도도...”
지직! 지지지지지지직!
드워프가 비텔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아베네고의 몸에서 보라색 번개가 쏘아졌다.
“끄. 끄아아아아아악!”
아베네고의 움직임은 제로. 어떤 징조도 없이 발사된 번개는 생명체가 반응할 수 있는 속도를 뛰어넘어 드워프에게 적중했다. 엘프 락노르와 리자드맨이 움직였다. 락노르가 손을 뻗자 녹색 방패가 나타나 번개를 막았고, 리자드맨이 드워프에게 눈길을 주자 드워프가 공중에 떠올라 옆으로 움직여졌다.
쩡!
녹색 방패가 깨졌고 다시 번개가 뻗어나갔지만 드워프는 이미 그 자리를 벗어난 상태였다.
“벌써?”
락노르가 놀랐다. 녹색 방패가 깨지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200년 전에 싸웠을 때에도 비슷한 시간에 깨지긴 했지만 아베네고는 200년간 죽어 있었다. 자신은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더 강해진 상태고 말이다. 그런데도 비슷한 시간에 깨지다니.
“내가 말을 잘못했군. 입이 문제인 건 락노르 네가 아니라 토린이었어. 감히 그분의 이름을 입에 올리다니.”
아베네고가 아직 마비에서 벗어나지 못한 토린을 노려보며 말했다.
“더 강해졌어.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불가능한 일이다. 락노르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설사 아베네고가 이번에 부활한 것이 아니라 10년, 아니 100년 전에 부활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럴 순 없다.
아베네고가 스스로 강해졌을리는 없고 비텔에게 힘을 받았을 텐데, 비텔의 특성상 신도가 없다면 힘을 발휘하지 못할 터. 비텔의 신도들은 전부 죽였을 터이니 비텔이 아베네고에게 힘을 전해주는 건 불가능한 일인데...
“도대체 어떻게...”
“끼라락. 고민할 것 없네. 락노르.”
리자드맨 에프랏이 단호하게 말했다.
“세상 어딘가에 그의 신도가 있다. 그것 말고는 답이 없지 않나.”
“말도 안 된다. 비... 저들의 신도는 우리가...”
락노르가 비텔의 이름을 말하려다가 멈췄다. 괜히 아베네고를 자극할 필요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가...’ 뒤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걸 아베네고가 받았다.
“너희가 전부 죽였지. 학살. 죄 없는 사람들이 너희 악신의 종자들에 의해 학살당했지.”
“죄가 없어?! 웃기는구나! 너희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그만. 흥분..하지마라. 락노르.”
마비가 풀렸는지 토린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흥분한 락노르를 말렸다. 전신의 털이 쭈뼛 서고 타버릴 정도로 강한 데다가 마비의 특성이 담겨 있는 번개였는데도 엄청난 생명력으로 금세 회복해 일어난 것이다.
“싸울 생각이냐. 아베네고. 싸우겠다면 우리도 피할 생각은 없다.”
“여전히 우두머리 흉내 내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구나. 토린.”
‘고요한 정상의 토린’
드워프 종족 전설의 영웅이자 지도자.
비텔교와 싸웠던 일곱 종족 연합. 서로 죽일 듯 싸우던 일곱 종족이 모였으니 당연히 불협화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조율해 아베네고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이끌었던 것이 토린이었다.
“결정해라. 아베네고.”
토린이 아베네고를 재촉했다.
아베네고는 대답 없이 토린, 락노르, 에프랏 너머 먼 곳을 응시했다.
“저기 있군.”
갑자기 영문 모를 말을 내뱉었다.
“이상하긴 했다. 너희들이 감히 겨우 셋이서 내 앞에 나타났다는 게 말이다.”
“끼락. 우리가 어찌 ‘죽지 않는 자’ 앞에 준비도 없이 나타나겠나.”
“겁쟁이 놈들.”
“겁쟁이가 아니라 똑똑하게 준비한 거라 생각해주게.”
에프랏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타종족이 말하는 겁쟁이라는 단어는 리자드맨에게는 칭찬이다. 그만큼 철저히 준비했다는 뜻과 같으니까.
“신호 주게. 락노르.”
“내게 명령하지 마라. 파충류.”
“끼라라락. 그 불같은 성질은 20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하구만.”
에프랏의 표현은 상당히 순화된 것이다. 보통 타 종족이 엘프를 표현할 때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오만’
엘프는 오만하다. 그게 천성이다.
그들을 오만하게 만드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세상에서 수명이 가장 길고, 음식을 먹지 않으며, 먹지 않으니 싸지도 않는다. 잠을 자지도 않으며, 씻지 않아도 항상 청결하다.
하지만 그중 단연 최고의 이유는 그들이 태어나는 방법이다. 엘프는 에렌이 직접 만들어 신성력 회오리를 통해 지상으로 내려 보낸다. 때문에 엘프는 날 때부터 성체이다. 완벽한 지성을 갖추고 있으며, 세상의 지식을 어느 정도 보유한 채 태어난다.
신이 직접 만드는 생명체. 엘프는 그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끼며 나이가 들수록 그 자부심은 더욱 단단해진다. 그렇기에 엘프는 나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오만하다.
락노르가 툴툴대기는 했지만 에프랏의 말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락노르가 손을 위로 뻗었다. 그의 손에서 녹색 빛이 흘러나와 하늘에 크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엘프, 드워프, 리자드맨의 병력이 숲속에서 몸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많이도 데려왔군.”
각 세력의 병력이 끝없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모습을 보인자들만 해도 10만은 되어 보였다.
“끼락. ‘죽지 않는 자’를 상대하는데 소홀히 할 수는 없지 않나.”
“어쩔 것이냐. 싸울 건가?”
토린이 다시 물었다. 아베네고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길 수 있을까?’
눈앞에 있는 셋은 그가 가장 죽이고 싶어 하는 자들이다. 지금 이 순간 살심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있었다. 아마 예전이었다면 이미 둘 중 하나만이 살아남을 싸움을 하고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토린이 비텔의 이름을 올렸을 때 반사적으로 쏘아낸 번개 외엔 공격을 하지 않았다.
지금은 군세를 준비하지도 않고 홀로 나와 있는 상태. 가볍게 그락카르만 잡고 다시 돌아가 군세를 준비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200년 전에 자신을 죽였던 일곱 중 셋과 그들이 이끄는 병력을 맞닥뜨렸다.
신중해야 한다. 이번에 또 죽으면 언제 다시 살아날지 모른다.
지금 비텔교의 전력은 전부 그를 매개체로 활동하고 있다. 만약 그가 죽는다면 이올라고, 벤 자칸이고 전부 사라질 것이다. 군세 중 일부는 남겠지만 그것들은 비텔교를 돕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만든 무기들이다.
무기를 사용할 자들이 다 사라지고 무기만 남아봐야 뭐할까. 다시 거대괴물이나 죽음에서 일어난 괴물들이 무작위로 돌아다니며 생명체를 공격하겠지만 그 중심이 되는 비텔교가 없다면 전부 소용없는 짓이다.
‘비텔님께서 내게 힘을 주기 위해 무리를 하셨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 그것이 아베네고를 망설이게 했다.
‘그분께서 주신 소중한 기회.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싸운다면...
‘50:50.’
아베네고는 눈앞에 각 종족 최강자 셋과 이십 만에 가까운 병력이 있음에도 승률을 50%로 예상했다.
“많이 변했군. 재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리자드맨처럼 변했어.”
“끼락. 좋은 변화라네. 똑똑해진 거야. 물론 우리에겐 좋지 않은 변화지만.”
락노르와 에프랏이 말했다.
“난 죽기 싫다.”
토린이 말했다.
“솔직히 봐서 약해보인다면 그냥 싸우려고 했지만 보아하니 너와 싸우면 난 여기서 죽겠군. 난 아직 지켜줘야 할 가족들이 많아. 여기서 죽으면 안 된다. 그러니 그냥 돌아가라.”
“비열한 난장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군.”
아베네고는 토린을 안다. 겉모습은 고집불통에 무식한 드워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은 그 누구보다도 현명하다. 스스로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헛똑똑이 에프랏과 달리 제대로 된 현명함을 갖추고 있다.
그가 싸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 벌써 싸웠을 거다. 그런데 이렇게 싸움 없이 돌려보내려는 것을 보면 지금 싸우는 것이 저들에게 손해일 가능성이 높은 모양이다.
아베네고는 잠깐이지만 싸우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하지만...
“다음 만남이 기다려지겠군.”
그냥 돌아섰다. 아무리 이 싸움으로 큰 이득을 볼 수 있다하더라도 그 자신이 죽는다면 모든 게 소용없어진다. 승률 50%란 뜻은 죽을 확률도 50%란 뜻. 너무 위험하다. 그는 다시 북쪽으로 돌아갔다.
이제 그는 본격적으로 병력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그 병력으로 세상을 집어삼킬 것이다.
‘기다려라.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아베네고는 남에게 말하듯 스스로 굳게 다짐했다.
***
“여기서 잡아야 하는 것 아니냐.”
락노르가 아베네고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토린에게 물었다. 비록 그를 존중하기에 그의 결정에 따랐지만 아베네고가 혼자인 지금이 다시는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비록 자신이 죽는다 해도 아베네고만 잡아낼 수 있다면 전쟁은 끝난 거니까.
“끼락. 내 생각도 같네. 지금이라도 가서 그를 잡아야한다고 생각하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군세는 강해질 거네. ‘죽음’은 그의 편이니까.”
죽음만이 아니다. 시간도 아베네고의 편이다. 아베네고는 세상을 집어삼킬 병력을 모을 때까지 계속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죽지 않는 자’니까.
“너희들의 말도 맞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뭐지?”
“뭔가.”
“비텔의 신도들을 찾는 것.”
토린이 확신을 담아 이야기했다.
“아베네고는 200년 전보다 더 강해졌다. 이전의 힘 그대로 부활했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더 강해져서 부활하는 건 절대적으로 원인이 있다. 그 이유는 에르팟의 말대로 세상 어딘가에 비텔이 새로운 신도를 모은 거겠지. 그들이 남아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아베네고를 죽인다 해도 다시 부활할 것이다.”
“그런...”
“그렇군. 역시 토린이다.”
락노르는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놀랐고 에프랏은 토린의 현명한 대답에 감탄했다.
“그러니 우선 비텔의 신도들을 찾아 없앤다. 아베네고는 그 다음이야.”
다음 날, 엘프, 드워프. 리자드맨들이 세상으로 흩어졌다. 어딘가에 있을 비텔의 신도들을 찾기 위해...
< 143 오크가 남쪽으로 간 까닭은 > 끝
ⓒ 냉장고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