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성전사 vs 오크 2 >
‘신기한 일이다.’
거대괴물 무리와 대치한 그락카르는 태어나 처음 겪는 상황에 감탄했다.
‘덩치가 산만한 괴물이 100마리나 있는데도 내 시선을 빼앗는 건 저 작은 전사라니.’
거대괴물 앞에 서 있는 얼굴까지 가리는 검은색 전신갑옷을 입은 전사. 들고 있는 칼과 방패마저도 검은 색이다. 가려져 있기에 종족은 알 수 없었다. 인간이라면 덩치가 큰 거고, 오크라면 덩치가 작은 거다. 들고 있는 무기와 방패가 커서 꽤 위압적이지만 바로 뒤의 거대괴물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락카르는 그 인간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딱히 강한 기세가 느껴지는 것도 아닌데...’
덩치만 작을 뿐이지 강한 기세를 뿜어내는 강자는 얼마든지 있다. 대표적인 예가 노르쓰 우르드다. 노르쓰 우르드의 덩치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오크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 몸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대족장의 자리에 도전했던 캄스니에 못지않았다.
그런데 저 앞의 전사에게선 그런 기세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 어떤 기세도...
‘잠깐. 왜 기세가 느껴지지 않지?’
이상하다. 기세는 모든 생물이 갖고 있다. 약하면 약한 대로, 강하면 강한대로 말이다.
‘그렇군. 그래서 계속 신경 쓰였던 거야. 기세가 느껴지지 않아서.’
그락카르가 자신이 어째서 저 작은 전사에게 시선을 빼앗기는지 깨달은 그 순간, 벤 자칸도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당황하고 있었다. 멈추지 않던 걸음을 멈췄을 정도로 말이다.
‘조금이지만, 아주 조금이지만 왜 유대감이 드는 거지?’
적대감은 여전했다. 상대는 오크니까. 오크는 전부 카록의 광신도들, 벤 자칸이 말살해야 할 종족 중 하나다. 그런데 오크를 향한 거대한 적대감 속에 아주 적지만 오크와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유대감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감각이 뭔가 잘못된 모양이군.’
벤 자칸이 강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 속에 들어있는 작은 유대감을 털어버리려는 듯 말이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죽이자.’
오크와 유대감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를 견딜 수 없었다. 벤 자칸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벤 자칸이 그락카르를 죽이겠다고 마음먹고 한 걸음을 옮기는 순간,
화화화확!
그락카르는 벤 자칸으로부터 시작되어 자신을 덮치는 기세의 폭풍을 느꼈다.
‘강하다. 지금까지 만났던 그 누구보다도 더.’
그락카르를 압박할 정도로 기세를 뿜어내는 강자들은 많았다. 우드록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고, 캄스니를 만났을 때도, 오르히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그런데 벤 자칸이 뿜어내는 기세는 차원이 달랐다.
실체가 없는 기세가 실체를 가진 것처럼 그락카르에게 부딪혀왔다. 그락카르는 뒤로 밀려나지 않도록 사력을 다해야 했다.
‘여기서 죽나?’
싸움을 시작하지도 않았음에도 그락카르는 죽음을 떠올렸다. 그 정도로 압도적인 기세였다. 그락카르의 머릿속에선 벤 자칸의 그레이트소드에 의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양분되는 이미지가 그려졌다.
그락카르의 발이 그도 모르게 들렸다. 그 발은 천천히 뒤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발이 뒷걸음을 완성하려는 순간,
“이 멍청한 놈!”
그락카르가 소리 지르며 뒤로 뻗었던 발을 억지로 잡아당겨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쾅! 쾅! 쾅! 쾅!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붉은색의 ‘카록의 빛’까지 두른 주먹이 연이어 얼굴에 박혔고, 그락카르의 얼굴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크훅. 퉤!”
입안이 터지면서 나온 핏물을 뱉었다.
‘역시 내 주먹은 맵군.’
아팠다. 많이 아팠다. ‘카록의 빛’에 둘러싸여 파괴력이 강화된 그의 주먹은 이제까지 맞았던 그 어떤 주먹보다도 아팠다. 그리고 그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벤 자칸의 기세에 잠식되어가던 그의 의식이 말끔하게 깨어났다.
그리고 분노했다.
전사가 뒷걸음질이라니. 치욕이다. 평생 단 한 번도 적을 앞에 두고 뒷걸음질이란 걸 해본 적이 없는 그락카르다. 언제나 앞으로만 달렸다. 뒷걸음질을 하느니 차라리 가만있다가 목이 베이는 게 낫다.
“이 멍청한 놈!!!!”
쾅! 쾅!
다시 한 번 더 자기 자신에게 멍청하다고 소리 지르며 때렸다. 뒷걸음질 치다가 중간에 멈추긴 했지만 그래도 그러려고 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치욕스럽고 자기 자신에게 화났다. 자기 자신에 대한 강렬한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서 강렬하게 일었다.
곧 그 분노는 가슴속을 가득 메웠고, 그락카르는 그 분노를 그대로 토해냈다.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억!]
‘성난 자의 외침’이 발동했다.
그락카르는 강하게 땅을 박차며 벤 자칸을 향해 쇄도했다.
“그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벤 자칸도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며 그락카르에게 달려들었다.
그락카르가 쳐든 미로크가 보라색의 ‘착취하는 손’과 붉은색의 ‘카록의 빛’이 합쳐져 진보라색 빛을 흩뿌렸다.
오크는 본능으로 싸운다. 본능으로 싸운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무기를 휘두르는 게 아니다. 힘만 좋은 멍청이는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다.
‘왼쪽.’
그레이트소드보다 미로크가 길기에 공격권은 그락카르가 잡았다. 그락카르는 공격 위치를 왼쪽으로 잡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본능이 시켰다. 그냥 거기가 때리고 싶었고 그래서 그쪽으로 공격방향을 잡았다.
그걸 깊게 들어가면 다음과 같다.
벤 자칸과 그락카르가 비슷한 힘과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벤 자칸은 오른손에 그레이트소드를 들고 있고 왼손에 타워실드를 들고 있다. 그락카르 입장에서 오른쪽을 공격한다면 벤 자칸이 당연히 타워실드로 방어할 것이고 오른손에 들고 있는 그레이트소드로 반격할 것이다. 이후의 싸움은 당연히 그락카르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왼쪽을 공격한다면? 셋 중 하나다. 벤 자칸이 피하거나, 그레이트소드로 막거나, 타워실드로 막을 것이다.
피하면 벤 자칸이나 그락카르나 얻는 이득은 없다. 그리고 한 손으로 들고 있는 그레이트소드로 그락카르의 양손도끼 공격을 막는 것은 무리다. 마지막으로 타워실드로 방어하게 되면 타워실드가 그레이트소드의 움직임을 방해해 반격이 힘들어질 테니 다음 공격도 그락카르가 선수를 잡을 수 있다.
즉, 왼쪽을 공격하게 되면 그락카르에게 불리한 선택지는 없다.
그락카르가 생각하고 그곳을 공격한 건 아니다. 그냥 오크가 가진 전투 본능이 이끄는 데로 미로크를 휘두른 것뿐이다. 전투를 반복할수록 날카로워지는 본능, 한상의 죽음으로 하루를 반복하며 치열한 전투를 반복해온 그락카르의 전투본능은 거의 정답만을 그락카르에게 제시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선택지가 정답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인 ‘힘과 실력이 비슷할 경우’가 애초에 틀려버려선 전투 본능도 오답을 제시할 수밖에는 없다.
벤 자칸이 그레이트소드를 내밀어 미로크를 막았다. 벤 자칸은 유려하게 그레이트소드를 움직여 양손도끼를 하늘 방향으로 흘렸다.
깡!
그락카르의 힘이 생각보다 강해 미로크거 투구 윗부분을 자르고 지나갔지만 충분히 훌륭하게 막아냈다. 그리고,
퍽!
“크훅.”
그락카르가 벤 자칸이 휘두른 타워실드에 맞아 뒤로 밀렸다.
“어째서.. 네가.. 그분의.. 힘을.. 쓸 수.. 있는.. 것이냐..”
벤 자칸이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벤 자칸은 미로크를 감싼 채 빛나고 있는 진보라색 빛에서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안에 있는 비텔의 힘을.
“어째서!! 오크가!!”
우우웅.
분노한 벤 자칸의 전신이 보라색 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보라색 빛을 머금은 그레이트소드가 강렬한 기세를 품고 그락카르를 베어왔다. 그락카르는 타워실드에 맞아 균형을 잃은 상태였지만 본능적으로 미로크를 들어 그레이트소드를 막아냈다.
쩡!
강렬한 소리와 함께 뒤로 밀린 그락카르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벤 자칸의 공격이 이어졌고, 그락카르는 그 공격을 막기 급급했다. 간간히 공격을 하기도 했지만 치명상은커녕 부상을 입히기도 힘든 맥없는 공격이었다. 그락카르의 공격은 벤 자칸의 갑옷을 몇 군데 파손시키는 것에 그쳤다.
반면 벤 자칸은 계속해서 그락카르에게 유효타를 입혔다. 그락카르는 베이고, 터지고, 부서지는 부상을 연이어 입었다. 스킬 ‘불굴의 의지’덕분에 계속해서 회복되기는 했지만 깊은 상처가 연이어 생긴데다가,
‘생명력을 빼앗기고 있다.’
공격에 명중 당할 때마다 생명력을 뭉텅이로 벤 자칸에게 빼앗기고 있었다. 이제까지 다른 이의 생명력을 가져오기만 했지 이렇게 빼앗기는 것은 처음이었다.
‘짜증나는군.’
생명력을 빼앗기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착취하는 손’과 비슷한 능력이었지만 효율은 벤 자칸의 것이 훨씬 좋았는지 동시에 무기가 부딪쳐도 생명력을 빼앗기는 것은 그락카르 쪽이었다.
그락카르는 점점 지쳐갔고, 그가 지치자 상처의 회복도 느려졌다. 결국,
쿵.
힘을 다한 그락카르가 쓰러졌다. 재생력도 더 이상 발동하지 않아 온몸에 상처가 가득한 채였다.
‘졌다.’
움직일 힘이 없다. ‘성난 자의 외침’도 이미 썼고, ‘불가사의한 힘’은 예전에 최대 효율로 발휘되고 있었다. 생명력이 부족하니 상처도 회복되지 않았고 움직일 힘도 없었다.
‘크흐.. 그래도 저런 강자에게 죽는 거라면 나쁘지 않지.’
그락카르가 살면서 본 모든 이를 통틀어 가장 강했다. 그런 강자와 싸우다 죽는 것은 축복이다. 그냥 늙어서 죽는 것보다는 백배는 낫다.
벤 자칸이 쓰러진 그락카르 앞으로 왔다.
‘마무리를 하려는 모양이군.’
그락카르는 곧 죽음이 오겠구나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벤 자칸은 그락카르를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그레이트소드와 타워실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벤 자칸은 쓰러진 그락카르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주먹으로 치기 시작했다.
퍽! 퍽!
‘크훅. 이게 뭔 짓이지? 왜 바로 끝내지 않는 거냐.’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그락카르가 의아해할 때, 벤 자칸이 입을 열었다.
“넌.. 나와.. 함께.. 교주께.. 간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아야.. 겠다..”
‘뭐?’
그락카르는 순간 벤 자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나도 그의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벤 자칸이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며 그락카르를 치는 것을 멈추고 일어났을 때, 벤 자칸의 말을 이해했다.
‘날 죽이지 않고 치욕을 주겠다고?!’
싸움에 지고서도 살아남는다니.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다.
“죽...여라....”
없는 힘까지 전부 짜내어 말했다.
“아직.. 힘이.. 남아.. 있군..”
벤 자칸은 대답하지 않고 다가와 다시 주먹질을 했다. 주먹질 몇 번에 그락카르는 말조차 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는 분노했다.
상대는 자신을 죽일 수 있음에도 죽이지 않고 갖고 놀고 있다.
‘치욕스럽다!’
단숨에 ‘성난 자의 외침’을 쓸 수 있을 만큼의 분노가 가슴속에 쌓였지만 그것을 분출해낼 힘이 없었다.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내가 죽어도 죽인다. 죽어 카록께 가지 못해도 좋다. 지금 당장 저놈을 죽일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벤 자칸에 대한 분노가 분출되지 못하고 가슴속에 쌓여만 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끄는 자의 특권이 발동합니다.
당신의 염원이 이루어집니다.
스킬 ‘각성(1단계)’을 얻었습니다.
< 135 성전사 vs 오크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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