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밥그릇 싸움 >
승합차와 버스에서 내린 청년들은 누구도 말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열을 맞춰 서기 시작했다.
남자들이 열 맞춰 서는 중 그들 앞에 자유롭게 서 있는 이들이 다섯 명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담배를 꺼내 물면서 말했다.
“아. 시발. 내가 저딴 찌끄레기들 데리고 일하러 나와야 하나.”
옆에 서 있던 자가 잽싸게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형님이 여기에 나오실 줄이야. 당연히 저희 선에서 끝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어떻게 나오신 겁니까?”
“시발. 형님이 이번 건 덩치가 크다고 믿을 만한 놈이 필요하다고 부탁하는데 거절할 수가 있어야지.”
“아. 그렇습니까. 원동 형님께서 나온다고 들었을 때 그런 걸 줄 알았습니다. 중요한 일 아니면 큰형님께서 원동 형님께 일을 맡길 리 없지 않습니까.”
차원동이 자신의 급이 엄청 높은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실은 그도 이제 겨우 간부라는 이름을 걸쳤을 뿐 조직 전체로 보면 수백 명 정도는 비슷한 위치에 있는 말단 중 하나다.
“그건 그렇지. 그래도 시발 짜증나네. 내가 여기 와야 할 짬밥이냐고. 사업체를 맡겨도 모자랄 판에 현장업무가 뭐냐. 현장업무가.”
이제 갓 들어온 신입들 데리고 여기저기 부수러 다니는 일을 그만 둔 것도 겨우 반년 전이다. 그럼에도 몇 십 년도 전에 그만 둔 것처럼 이야기 말하고 있었고 옆의 조직원들도 그에 맞춰 아부를 하고 있었다.
“형님은 뒤에서 천천히 올라오십쇼. 오시기 전에 저희가 다 끝내놓고 기다리겠습니다.”
“그럴래?”
“네.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디 형님이 쇠파이프 휘두를 짬밥이십니까.”
“그렇긴 해. 내가 작대기나 휘두를 군번은 아니지. 군대로 따지면 뒤에서 명령하는 대대장급이지. 이젠 늙어서 이런 거 휘두르면 뼈마디가 쑤신단 말이야.”
차원동은 이제 28살이고, 군 면제 받았으며, 다시 말하지만 현장 일을 그만둔 지 반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냥 뒤에서 저희들이 잘하나 못하나 지켜보다가 따끔한 충고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래야겠지?”
“물론입니다.”
“당연합니다. 저희만 믿으십시오.”
“아니. 오실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서 쉬고 계시면 잽싸게 끝내고 내려오겠습니다.”
다들 최선을 다해 아부 한 마디씩 했다. 차원동은 최하위이긴 하지만 간부는 간부. 일단 간부 자리에 오른 이상 얼마나 높이 올라갈지 모르기에 미리 좋은 인상을 남겨둬야 한다.
“에이. 안 갈수는 없지. 좃 같아도 맡은 이상 일을 철저히 해야지. 내가 너희들 안 봐주면 누가 봐주겠냐.”
“역시 형님이십니다. 이러니까 큰형님께서 형님을 믿고 일을 맡기시는 겁니다.”
“흐흐. 그렇지. 요즘 조직에 쓸만한 인간들이 없긴 해.”
“준비 됐습니다!”
승합차와 버스에서 내린 남자들 전원이 열 맞춰서고 대표로 한 명이 보고했다. 차원동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 저 고문관 같은 새끼. 지금 습격하러 가는 건데 소리를 지르면 어쩌자는 거야.”
“야이. 개새끼야. 지금 니가 쳐 돌았냐.”
“저 미친 새끼가.”
“됐어. 됐어. 찌끄레기가 다 그렇지 뭐. 봐줘라.”
“역시 형님. 마음이 넓으십니다. 저 같으면 반 죽였습니다. 저거.”
“흐흐. 내가 마음이 좀 넓긴 하지.”
차원동이 기분 좋게 웃으며 열 맞춰 선 남자들 앞으로 나섰다.
“팔이나 다리쳐서 부러뜨려라. 머리는 때리지 마라. 머리 때렸다가 죽기라도 하면 카바 못 쳐준다. 알겠냐.”
“네!”
100명의 남자가 일제히 크게 소리쳤다.
“아이. 병신 새끼들. 소리 지르지 말라니까.”
차원동은 욕은 하면서도 실실 웃었다. 자신의 말을 100명이 성실히 듣고 대답한다는 것이 기분 좋은 것이다.
“그럼. 가자.”
“알겠습니다. 가자. 찌끄레기들아.”
차원동 옆에 있던 4명이 앞장서고 100명의 남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차원동은 100명이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니 자신이 조폭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껏 들뜬 차원동이 다시 소리쳤다.
“가라! 가서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 놈들인지 보여줘!”
“네!”“크흐흐.”
길을 가득 매운 채 올라가는 남자들을 보며 차원동은 기분 좋게 웃었다.
***
“저... 병신 새끼들.”
벤센이 작은 목소리로 욕했다. 동감이다. 저 병신 새끼들. 야밤에 그렇게 우렁차게 소리 지르면 시내까지 다 들리겠다. 빙신들아. 그 소리 듣고 누가 신고라도 하면 어쩌려고. 물론 우리가 미리 손을 써뒀기에 누가 신고해도 경찰은 오지 않을 것이다.
순백교는 제법 조직화되어 있는 교단이었다. 우리를 상대하기 위해 작전 본부까지 설립했을 정도니까. 작전 본부를 만들다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정보력이 워낙 뛰어나다는 거다.
저번에 ‘진실한’ 비텔교도가 된 각국 정보기관의 요원만 근 500명에 달한다. 그 중에서 절반정도가 이번 일을 돕기 위해 임시전당에 모여들었다. 시내에 만들어진 순백교의 임시 작전기지를 그제 만들어지자마자 확인했고 감시 하에 두고 있었다.
정보원 한두 명이 감시해도 그 정보망을 피할 수 없을 텐데 수십 명이 감시하고 있다. 시내에 들어온 순백교도 한 명, 한 명 전담 요원이 붙은 것은 물론이고 그들이 하는 말 모두가 기록, 분석되고 있었다.
오늘 쳐들어올 예정이란 것도 그 작전이 수립됨과 동시에 우리도 알았지.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대기하고 있는 요원들을 보내면...”
벤센이 걱정이 한껏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성전사님께서 강한 건 이드릭을 심문하면서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100명이 넘습니다. 개인이 아무리 강해도 다수에겐 한계가 있습니다.”
지금 벤센이 걱정하는 건 김해역이었다. 순백교의 습격 계획을 알게 된 후 홀로 그들을 막겠다고 나섰다.
‘전 비텔교의 방패입니다. 방패가 뚫리기 전엔 그 어떤 적도 비텔교에 손을 댈 수 없을 겁니다.’
김해역은 요원들도 지켜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다. 이해는 한다. 하지만 조금 잘못된 인식이기도 했다. 개개인은 김해역보다 훨씬 약하겠지만 개개인이 약하다고 해서 그들 전체가 약한 것은 아닌데 말이다.
당연히 벤센과 다른 사람들이 반발했다. 위험하다고 말이다.
“거기에 전원 쇠파이프와 각목을 들고 있고 성전사님은 맨손...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합니다. 위기 시 우리 요원들이 달려간다 해도 잠깐 사이에 치명상을 입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많이도 필요 없습니다. 5명만 보내도...”
“그를 믿어주세요.”
잘못 된 판단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엔 김해역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김해역은 비록 되찾긴 했지만 유나를 납치당하는 큰 실패를 겪었다. 그 뒤에 직접 마지막 적을 잡고 유나를 안고 돌아오긴 했지만 나와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았기에 아직 그 실패에 대한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연약해서 심리의 상태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100% 발휘할 수도, 50%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대로 김해역의 의견을 무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그를 도우라고 하면 김해역은 내가 자신을 완전히 믿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의기소침할 수 있다.
비텔교 최초의 성전사로서 미래에 비텔교 무력의 중심이 될 김해역이다. 그런 이가 의기소침해하거나 자신감을 잃어선 안 된다. 아직은 김해역의 기를 살려줄 때다.
“비텔님께서 정하신 교단의 방패입니다. 저번엔 처음이라 실수하긴 했지만... 이번엔 제 실력을 보여줄 것입니다.”
사실 무조건 믿고 맡긴 것은 아니고 나름 계산을 해봤다.
김해역의 말에 따르면 그는 꿈속에서 죽음을 반복하며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저쪽 세계의 전투기술을 익혔다. 거기에 축복까지 받았다.
그락카르로서 겪은 저쪽 세상의 축복 받은 전사는 강하다. 두 명이 모이면 약한 족장급 오크와 맞먹을 정도.
김해역이 그 정도까지는 아닐 지라도 꿈속에서 익힌 전투기술의 수준은 거의 그에 근접했을 것이다. 저번에는 꿈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꿈에서 배운 전투기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후로 시간 날 때마다 연습하는 것을 봤다.
지금은 꿈속 세상에서 익힌 능력의 상당부분을 되찾았을 터.
그락카르 세상의 축복받은 자가 가진 능력의 반 정도만 실력을 되찾았어도 각목과 쇠파이프를 든 우리 세계의 100명쯤이야. 우습다.
“걱정 말고 지켜보세요. 그는 비텔교의 방패입니다.”
“알겠습니다.”
벤센과 다른 이들을 안심시켰다.
... 다른 사람들에게 김해역을 믿으라고 하지만 실은 오하넬에게 김해역이 위험할 경우 몰래 도와주라고 이야기해뒀다.
그를 믿기는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비텔교 첫 번째이자 유일한 성전사. 그는 너무나 중요한 위치에 있기에 만에 하나의 확률이라도 안심할 수 없으니까.
***
“어.. 뭐야 저건?”
앞장서던 폭력배 중 하나가 임시전당으로 향하는 길 중앙에 서 있는 김해역을 발견했다.
“아. 시발. 야. 도망치기 전에 빨리 가서 잡아.”
그의 명령에 뒤따르던 남자 중 10명 정도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들은 달리면서 의아함을 느꼈다. 김해역이 당연히 뒤돌아서 도망칠 거라 생각했는데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까.
‘멍청한 놈. 잘 됐네.’
가장 앞에서 달리던 자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며 도망치면 던지려고 했던 쇠파이프를 양손으로 꽉 쥐었다.
‘한 방에 부러뜨려주마.’
훙.
그는 힘차게 김해역의 정강이를 향해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쇠파이프가 정강이 바로 앞에 도달할 때까지 김해역은 움직이지 않았다.
‘맞았... 어?’
맞았다고 생각한 순간,
후웅.
쇠파이프가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빠각.
쇠파이프를 휘둘렀던 남자가 관자놀이 부근에 순간적으로 큰 충격을 느끼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뭐야. 이 새끼.”
쓰러진 남자 바로 뒤에 있던 남자가 당황하며 각목을 휘둘렀다.
후훙.
역시나 허공을 갈랐고 그 역시 강렬한 타격음과 함께 쓰러졌다. 그리고 타격음이 연이어 들리기 시작했다.
빡. 빠박. 빠각. 퍽. 팍. 팍.
김해역을 잡기 위해 달려왔던 남자들이 순서대로 전부 쓰러졌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폭력배들이 걸음을 멈추고 김해역을 경계했다.
“시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그들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10명의 건장한 남자가 맨손의 남자에게 순식간에 쓰러졌다. 수십 번의 싸움을 겪어본 그들이기에 안다. 사람은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쇠파이프로 치고 또 쳐도 정신을 잃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 저렇게 10명의 남자를 한 대씩 때려 쓰러뜨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야들아. 저 새끼 맨손 아니다. 무슨 무기 숨기고 있는 거 같다. 송곳이나 전기충격기 같은 거. 조심들 해라.”
그들의 상식으로 지금 상황은 숨겨진 무기가 아니면 해석되지 않았다.
폭력배들은 김해역이 갖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무기를 경계하며 조금씩 접근해 김해역에게 다가가 포위했다. 이상하게도 김해역은 자신이 포위당하고 있음에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쳐!”
누군가 소리쳤고 김해역을 포위한 폭력배들이 일제히 쇠파이프와 각목을 휘둘렀다.
***
“저게 신께 받은 능력이군요. 몸이 사라지다니.”
벤센이 말했다. 틀렸다.
벤센의 말과 달리 그는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내 눈엔 그의 움직임이 보였다. 그는 조금 빠르긴 하지만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순간적으로 그의 몸이 주변과 비슷한 색을 띄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같은 색은 아니지만 순간적으로 색을 바꾸고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김해역보다 실력이 낮은 사람들이 상대라면 순간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비슷한 적과 싸울 때도 꽤 괜찮은 능력이다. 비슷한 실력일 때 상대의 움직임을 한 번이라도 놓치면 치명적인 부상으로 이어진다. 10번 써서 한 번이라도 상대의 눈을 교란할 수 있다면 성공이다.
하지만 나처럼 그보다 강한 자와 싸운다면 조금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난 그의 움직임을 이렇게 멀리서 보는데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있었으니까.
뭐. 상관없나. 이 세계에서 김해역보다 강한 자는 나 정도밖에 없을 테니까.
“정말... 대단합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군요.”
벤센이 감탄했다. 잠깐 생각하는 사이 김해역이 반수 가까이 쓰러뜨렸다.
확실히 축복을 받고 그락카르가 사는 세상의 전투기술을 익힌 자는 육탄전으로는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총이지. 김해역만 해도 주변에 동화하는 능력과 빠른 움직임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사라지는 게 아니고 총알보다는 느리기 때문에 총에는 맞을 수밖에 없다.
전에 유나를 납치당했을 때처럼 말이다.
전신 방탄복 같은 거 만들어서 입혀줘야겠어. 전용 무기도 만들어주고 말이야. 그러면 지금보다 훨씬 든든해지겠지.
“그나저나 저들을 보낸 조직의 이름이 어떻게 된다고요?”
원래 뭔가를 받으면 거기에 더욱 더해서 돌려주는 게 미덕이다. 한 교단의 교주로서 그런 미덕을 저버릴 순 없지.
< 132 밥그릇 싸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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