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성전사 vs 오크 & 밥그릇 싸움 >
“적이 이틀거리에 도달한 걸 봤다.”
노르쓰 우르드가 꿈에서 부락을 향해 오는 적을 본 모양이다. 역시 리자드맨이 쳐들어오나.
“이틀 뒤에 도착이라면 우리가 부락을 떠난 후군. 역시 전사를 1,000정도 남겨야 할까?”
노르쓰 우르드가 꿈에서 거대 괴물을 본 이후로 4일이 지났다. 내 원래 성격이라면 노르쓰 우르드가 거대 괴물에 대한 경고를 한 그날 형제들과 함께 출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대족장이 되고 책임감이 꽤 생겼다.
우리가 그냥 떠날 경우 부락에는 암컷과 아이, 장인만 남을 것이다. 그때 리자드맨이 습격해온다면 피해가 엄청나겠지. 그래서 8일 거리에 있다고 했으니 최대한 기다리다가 6일째에 출발할 생각이었는데 6일째에 딱 습격당하는 모양이다.
“리자드맨과 싸운 후 출발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전투 후 바로 출발하면 형제들이 피곤해하겠지만 전사라면 그 정도는 견뎌야 한다.
“아니. 리자드맨이 아니다. 거대 괴물이다.”
“거대 괴물? 거대 괴물의 도착은 4일 뒤인 거 아닌가?”
“내가 잘못 본 모양이다.”
“그렇군. 그럼 지금 당장 출발해야겠군.”
이틀거리. 우리가 지금 출발하면 딱 하루면 만날 거다. 좀 시일이 부족하긴 하다. 5일은 굶어야 형제들의 전의가 제대로 끓어오르는 데 말이다.
어쩔 수 없지. 부락의 안전을 위해 선택한 거니까.
“그럼 가자.”
“알았다.”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으면 바로 가야지. 시간 끌 것 없다.
천막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억!”
전의를 가득 담아 소리 질렀다.
구워어어어어억!
구오오오오오오!
우워어어어어억!
그아아아아아아!
크아아아아아아!
쿠오오오오오오!
가아아아아아악!
카아아아아아아!
형제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크흐..”
그대로 천천히 북쪽으로 걸었다. 부락을 완전히 나설 즈음엔 부락의 형제 대부분이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
‘죽지 않는 자’의 성을 나와 단 한 순간도, 적과 싸울 때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벤 자칸의 걸음이 멈췄다.
“어쩌다.. 보니.. 여기에.. 오게.. 됐군..”
벤 자칸이 숲이 무성한 산등성이를 아련하게 바라봤다.
“세월이.. 많이.. 흐르긴.. 흘렀군.. 그.. 어떠한.. 흔적도.. 남아있지.. 않아..”
벤 자칸이 이미 희미해진 과거를 떠올렸다. 인간을 버리면서 기억은 거의 사라졌지만 아련함만은 남아있다.
“1,000년.. 인가..”
벤 자칸이 바라보는 산등성이. 이제는 어떠한 흔적도 없고 자연스러운 숲이 형성되어 있지만 과거엔 수천 명이 사는 은신처 있었다. 지금도 산을 파보면 속에 어느 정도 흔적은 남아 있을 것이다.
“지켜야.. 하지만.. 지키지.. 못했던.. 것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했고 복수를 위해 인간이길 포기했었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1,000년이 지나도록 복수를 이루지 못했다.
“다시.. 찾아온.. 기회..”
벤 자칸이 산등성이를 향했던 아련한 눈빛을 거두고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이번엔.. 반드시..”
쿵. 쿵.
벤 자칸의 걸음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
저게 거대 괴물이군. 크다. 아직 조우하려면 반나절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도 상반신이 정확히 보인다. 생긴 게 전부 제각각이다. 그런데도 각각을 부르는 명칭이 없고 통틀어서 거대 괴물이라 부르는 이유를 실물을 보자마자 알았다.
“저건 만들어진 괴물이군. 자연스럽게 생겨난 종족이 아니야.”
생물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균형미가 없다. 동그란 놈, 네모난 놈, 울퉁불퉁한 놈, 길중한 놈, 짧은 놈. 겉모습이 전부 제각각이며 눈, 코, 입, 귀, 팔, 다리, 머리, 생식기. 그 모든 것이 마음대로 여기저기 달렸으며 정해진 숫자도 없이 적게 달려있기도 하고 많이 달려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맞다. ‘죽지 않는 자’의 힘으로 만들어진 괴물이지. 듣기론 전투에서 패배한 종족의 시체가 재료라고 하더군.”
노르쓰 우르드의 말을 듣고 처음으로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죽은 후 괴물의 일부가 되어 형제들을 공격하게 된다니.
아직 먼데도 울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명예로운 오크 전사로서 고함 소리에서 질 수는 없지.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억!”
마주 소리 질러줬다. 형제들도 함께 고함치기 시작했다. 기분 탓인가 거대 괴물들의 울음소리도 더욱 거세진 듯한 느낌이다.
고함을 지르니 점점 고양된다. 조금이라도 빨리 전투를 하고 싶다.
***
[그락카르가 벤 자칸과의 전투를 위해 부락을 떠나기 약 한 달 전]
유나 납치사건이 있고 5일이 지났다. 정말 바빴다. 밤낮으로 끊임없이 신도들이 몰려왔다. 그들 모두가 날 보기 위해 찾아오는 것이기에 매정하게 돌려보낼 수 없어 전부 만났다. 5일간 만난 신도만 한 5만 명 정도 될까?
1:1 독대는 힘들고 5~10명씩 모아서 한 번에 만나서 한 번에 기도해줬다. 내가 기도해줘 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데 왜들 그리 기도해주는 걸 원하는지...
오늘도 아침에 1,000명 정도 만났다. 아침에는 그래도 사람이 적어 여유롭다. 오후와 저녁에 사람이 많이 몰려든다. 그 때는 정말 식사도 신도들과 함께 해야 할 정도로 계속해서 신도만 만난다. 그래도 앞으로 한 10만 명 정도만 더 만나면 된다.
처음이니까 전부 만나는 거지 한 번씩 만난 후엔 꼭 만날 필요는 없으니까. 그 뒤엔 일정을 정해서 좀 여유롭게 만나야지.
예배실에서 아침 일정을 마치고 유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꽤 넓기에 유나와 함께 쓰고 있다.
점심시간까지 시간이 남기에 김해역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에겐 궁금한 게 많았다.
어떻게 성전사가 됐는지, 10일간 보라색 빛에 둘러싸여 있을 때 뭘 했던 건지 등에 대해 물었고 간단하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기억을 갖고 반복하다니... 힘들었겠어.”
“네. 정말 힘들었습니다. 함께 밥 먹고, 대화하고, 훈련 받았던 사람들이 매일 죽어나갔습니다. 처음엔 그들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죽음을 반복하기도 했죠. 하지만... 제가 너무 무능력했기에 그들을 살리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죽음의 반복. 나도 겪었다. 하지만 난 기억이 없기에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지만 김해역은 기억을 전부 보존한 채 죽음을 반복했다고 한다. 자신이 죽는 순간을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지금 익힌 기술도 그 때 배운 거야?”
“네. ‘비텔의 방패’에 소속된 여러 성전사분께 배웠지만 주로 리텐님께서 병사들을 가르치셨죠. 제게 재능이 있다고 하셨지만 사실 전 재능이 너무 없었습니다. 죽음을 반복하며 다른 이들의 몇 배로 노력해서 겨우 따라가고 있었던 거죠.”
흥미로운 이야기다. 다른 세상의 비텔교라니.
“리텐이란 성전사가 가장 강한 성전사였어?”
“아닙니다. 그분은 남을 가르치는 걸 잘하셨지만 성전사로서의 실력은 그렇게 높지 않으셨죠. 가장 강한 분은 성전사단장이셨던 벤 자칸님입니다.”
“벤 자칸..”
“그 분은 제가 은신처에 도착했을 때 이미 축복을 일곱 번이나 받은 강자셨고, 제가 은신처에 머무는 동안에 두 번의 축복을 더 받으셨었습니다.”
아홉 번의 축복을 받은 자라니. 그락카르와 내가 받은 축복을 합친 것보다도 많다. 그리고 나와 그락카르는 서로 받은 축복을 일부만 공유한다. 그런데도 지금 나와 그락카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스스로도 판단하기 힘들 정돈데... 온전히 아홉 번의 축복을 받은 자는 얼마나 강할까.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난 ‘실제 세상에서 살다 온 것이냐.’고 물었고 김해역은 ‘그저 꿈이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동안은 몰랐지만요.’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에,
“그럼 그 세상에서 일어난 일들은 가짜일 수도 있겠군.”
이라고 물었더니 김해역은 ‘자신을 시험하기 위한 꿈이었지만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만든 가짜 세상.’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꿈에서 깨어나기 전, 그 세상의 교주가 남긴 ‘의식’을 만났습니다. 그 세계에서 멸망한 비텔교의 교주가 죽기 전 혹시 몰라 ‘성전사 입문 시험’을 통과한 이들이 만날 수 있게 남겨둔 생전의 기억을 그대로 갖고 있는 ‘의식’. 그러니까 혼 같은 것이었습니다.”
멸망한 비텔교 교주의 의식...
“그에게서 제가 겪었던 일들이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일이며 비텔교는 사악한 다른 신, 그러니까 몰란, 피언, 에렌, 바틱, 카록 같은 신의 주구들에 의해 멸망했음을 알려줬습니다.”
놀랐다. 정말 익숙한 이름들이다. 그락카르가 사는 세상의 신들 아닌가.
“제게 그 신들의 주구 모두를 세상에서 몰아내라고 이야기했죠. 아마 다음 성전사는 반드시 자신의 세상에서 나타날 거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저처럼 다른 세상의 인물이 성전사가 될 걸 몰랐던 모양이죠.”
혼란스러워졌다. 그럼 원래 비텔교는 그락카르의 세상에 있던 신인데 인간, 오크, 리자드맨, 드워프, 엘프 등의 공격에 의해 멸망했다는 말인가? 즉, 비텔님과 다른 신들은 적?
그럼 어떻게 카록의 신도인 그락카르와 연결된 나를 비텔님께서 찾아올 수 있었던 거지? 비텔님께서 날 거두는 걸 카록이 지켜보기만 한 건가? 아니면 나라는 존재를 카록이 몰랐나? 아니. 그럴 수가 있나? 신인데?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의문만 늘어갔다.
“아저씨! 식사 준비 다 됐어요! 성전사님이랑 빨리 오세요!”
“그래. 알았다.”
유나가 나와 김해역을 불렀다. 유나는 다행히도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활발함을 잃지 않았다. 참 강한 아이다.
1층에 있는 식당으로 가니 이미 유나와 김진서, 벤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김진서는 요즘 임시전당에서 살다시피 하니 거의 항상 같이 식사하기는 하는데 벤센은 오랜만이다.
“안녕하셨습니까. 교주님.”
“어서 오세요. 벤센.”
이틀만인가. 그때 글렘에 대한 작은 단서를 포착했다고 보고하러 왔었는데 말이야. 글렘에 대한 추가 정보가 생겼나? 식탁에 앉으며 물어봤다.
“글렘 때문에 온 건가요?”
“아닙니다. 글렘은 아직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수십 년간 얼굴 한 번 안 비친 자인데 며칠 만에 찾아내는 건 당연히 어렵죠. 천천히 찾으셔도 됩니다. 식사들 하시죠.”
다들 기다리고 있어서 벤센과 대화 나누다 말고 숟가락을 들었다. 내가 숟가락을 들고 먹자고 하자 그제야 사람들이 식사를 시작한다.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두 명이나 있는 식탁에서 가장 웃어른 행세를 하려니 어색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웃어른 행세를 하는 게 아니라 신도들이 날 웃어른으로 모시는 거니까. 내가 그러지 말라고 내가 거부를 해도 거부하면 할수록 더욱 불편한 상황이 연출된다. 그러니 별 수 없다. 서로 편하려면 그냥 대접해주는 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드릴 말씀이 있는데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역시 바쁜 벤센이 그냥 내 얼굴이나 보자고 찾아왔을 리 없지.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이틀 전부터 전당 밖에서 시위하고 있는 자들 있잖습니까.”
“네.”
도대체 어떻게 알고 왔는지 이틀 전부터 무슨 교회 연합인지 뭔지 하는 곳에서 20명쯤 찾아와 사이비는 물러가라고 현수막까지 걸어놓고 시위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걸 본 교도들은 분노했고 다들 몰려가 그들을 강제로 몰아내려고 했다.
그걸 내가 막았다. 잘못하면 양쪽이 격해질 수도 있으니까. 다른 종교와의 대립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아니 그들이 우릴 적대시 한다고 해도 우리가 적대시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지금은 그 어떤 종교가 상대든 간에 우리가 규모면에서 엄청나게 뒤쳐진다. 그런 상황에서 문제를 만들면 우리만 피해를 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말렸다. 그 뒤로도 새로 찾아오는 신도들 때문에 문제가 생기려고 해서 ‘비텔의 목소리’까지 써서 말렸다.
“그들에 대해 조사해봤습니다.”
조사씩이나. 그냥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알게 돼서 항의하러 온 거겠지. 사람들이 실제로 이상한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을 구하러 온 걸 수도 있고 어느 종교에나 있는 과격파들이 찾아온 걸 수도 있다.
그냥 알아서들 떨어져나갈 때까지 기다리면 될 텐데 무려 NSA가 시간 아깝게 조사를 하고 그래.
“조사 결과 좀 우려되는 부분이 있어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우려되는 부분이요?”
뭔가 문제가 있나?
“저들은 제대로 된 교회에서 나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이비 종교인 순백교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 130 성전사 vs 오크 & 밥그릇 싸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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