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성전사 vs 오크 >
잠에서 깼다.
“멍청한 인간 놈.”
일어나자마자 인간의 욕을 했다.
답답하다. 꿈속의 인간 놈이 또 답답한 짓을 하고 있다. 전에 잠깐 보여준 행동으로 전사인 줄 알았는데 전사가 아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하고, 가로막는 자가 있으면 머리에 도끼를 박아주면 되는 건데 답답하게 그러질 못한다. 역시 인간은...
차라리 나와 관계가 없다면 화라도 안 날 텐데 매일 그 놈의 삶을 지켜봐야 하니 짜증밖에 안 난다. 마음 같아선 내가 직접 그 인간 몸을 움직여서 대신 해결해주고 싶다. 그러질 못하니 짜증밖에...
그 인간이 날 보고 있겠지? 매일 날 볼 텐데 왜 그렇게 답답할까. 이해가 안 된다.
크훅. 신경 끄자. 괜히 머리 아프고 짜증만 난다. 인간의 하루는 잊어버리고 내 하루나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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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락카르의 무리
우두머리 : 그락카르
무리 구성원 : 21,642명
전투 기여 포인트 : 25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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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하루는 ‘세력 현황판’ 스킬을 사용하면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숫자는... 21,642군. 나도 제법 글 읽는 속도가 빨라졌다. 역시 똑똑하니 배우는 게 빠르다. 곧 노르쓰 우르드처럼 자연스럽게 글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세력 현황판’은 처음 이 스킬에 대해 알았을 때, 전투에 도움 되지 않는 쓸데없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좀 써보니 제법 괜찮은 능력이다. 부락 구성원이 몇인지 아는 것만으로도 부락을 관리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된다.
구성원이 어제보다 500쯤 늘었군.
요즘 며칠에 한 번씩 전투가 일어나서 많은 형제들이 죽어나가는데도 처음 여기 왔을 때보다 오히려 무리의 수가 늘었다.
어떻게 알고 오는 걸까. 내 부락은 리자드맨 영역의 초입에 세워진 다른 부락과 달리 깊숙이 위치해 있어서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곳이 아닌데 말이다. 아마 가장 가까운 부락에서 내 부락으로 오려면 10일은 이동해야 할 거다.
그런데도 매일 몇 백씩 새로운 형제가 합류하는 것이 궁금해서 새로 온 형제들에게 물어봤다. 왜 이곳에 왔냐고 말이다.
‘형제들이 말하는 걸 들었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부락이 있다고 했다.’
‘카록의 눈이 항상 주시하는 형제가 있다고 들었다.’
‘어떤 형제에게 한두 달 만에 100에 가까운 형제가 축복을 받은 부락이라고 들었다.’
다들 제대로 알고 찾아오긴 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을까. 그건 의외의 인물에게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몇몇 형제들에게 부탁했다.’
내가 새로 온 형제들에게 질문하고 다니는 걸 본 노르쓰 우르드가 다가와 말해줬다.
‘형제가 부락을 이곳에 옮길 것을 정한 날. 10의 형제에게 주변 부락을 돌아다니며 이 부락에서 겪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왜 그랬지?’
‘그래야 순환이 되기 때문이다.’
‘순환?’
‘순환은 중요하다. 최전방에 있는 부락은 항상 전투를 하지. 그리고 많은 형제가 죽는다. 그럼에도 항상 비슷한 숫자가 유지되는 이유가 바로 순환 덕분이다.’
‘설명해다오.’
그리고 노르쓰 우르드에게 듣고 이해한 ‘순환’은 다음과 같았다.
싸운다. 형제들이 죽는다. -> 잠시 휴식기를 갖는다. -> 휴식기 동안 다른 부락으로 이동한 형제에 의해 부락의 소문이 퍼진다. -> 전투가 부족한 후방의 부락에서 형제들이 찾아온다. -> 전사의 수가 늘어난다. -> 싸운다.
내가 태어난 곳도 오크 영역 한가운데에 있어서 주변에 적이 거의 없는 전투가 부족한 곳이었다. 매일 아이가 태어나고, 금방 자라지만 부락 구성원의 수는 거의 항상 비슷하게 유지됐다. 이유는 전투를 찾아 부락을 떠나는 전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성인이 되는 2년째에 부락을 떠나 전투를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내가 부락을 옮기는 기준은 형제들이 전해주는 소식이 기준이었다. 어디에서 좋은 전투를 했다고 하면 그곳으로 갔다.
물론 만족할 만큼의 싸움은 하지 못했다. 항상 싸움에 굶주렸고 전투가 많은 부락을 찾아다니다가 우드록의 부락에 도달했었다.
‘우리는 너무 깊이 들어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장 깊은 곳에 들어와 있었는데 더 깊은 곳에 들어가게 됐지. 그때 순환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우리 부락의 형제들은 만족도가 높아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소문이 퍼지지도 않았고, 다른 부락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에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형제도 없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부탁해 우리 부락에 대한 소문을 몇 개 부락에 내고 와달라고 했다. 그 결과가 지금 찾아오는 형제들이지.’
감탄했다. 노르쓰 우르드가 똑똑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노르쓰 우르드가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이곳에 대해 어떤 소문도 퍼지지 않았을 것이고 형제들이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 정착한지 한 달. 11번의 전투가 있었다. 공격해오는 리자드맨의 수는 3,000~7,000사이이고 3만 정도 되는 수가 덤벼 온 적도 한 번 있었다. 그로 인해 카록의 곁으로 간 형제의 수는 1만 이상.
만약 다른 형제들이 부락에 찾아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부락에 전사는 2,000~3,000뿐이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쯤 부락의 위치를 옮길지 싸우다가 죽을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겠지.
그런데 노르쓰 우르드가 행한 작은 일 하나 덕분에 처음에 왔을 때보다 무리의 크기가 더 커졌다.
정말 중요한 내용이다. 앞으로 대족장으로서 부락을 관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순환... 좋은 걸 배웠다. 고맙다. 노르쓰 우르드.”
“고맙다니... 그냥 주술사로서 할 일을 한 것뿐이다. 과분하다. 형제.”
고맙다는 말을 했다. 전사가 하는 ‘고맙다.’라는 말은 무겁다. 난 언제든 노르쓰 우르드가 부탁한다면 목숨이 위험한 일일지라도 최소 한 번은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다.
***
벤 자칸의 걸음은 느렸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쿵. 쿵. 쿵. 쿵.
천천히. 천천히. 하지만 묵직하게.
구우우우우우우!
사아아아아아아!
므으으으으으으!
즈즈즈즈즈즈즈!
그의 뒤를 따르는 100마리의 거대 괴물과 함께 멈추지 않는 행군을 이어갔다.
“아쉽.. 습니다.. 대사제가.. 있었.. 으면.. 그들.. 모두를.. 우리의.. 병력으로.. 바꿀 수.. 있었을.. 텐데..”
벤 자칸이 말하는 ‘그들’이란 그가 지나온 길에 남아있는 리자드맨의 시체를 말하는 것이다. 대사제가 있었다면 그들 또한 ‘죽지 않는 자’의 군세에 합류했을 것이다. 대사제는 죽은 자들을 일으키는 것이 특기니까. 그라면 시체가 몇 만, 몇 십만이든 상관하지 않고 전부 일으켰을 것이다.
“괜찮.. 습니다.. 그.. 병력.. 들은.. 이올라.. 에게.. 더.. 필요.. 할.. 겁니다.. 저는.. 지금.. 가진.. 병력.. 만으로도.. 충분.. 합니다..”
이상했다. 벤 자칸은 분명 혼자 있음에도 혼잣말이 아니라 누구에게 말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벤 자칸을 알고, 그가 존대를 하는 자. 당연히 한 명밖에 없다. ‘죽지 않는 자.’
‘죽지 않는 자’와 벤 자칸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원한다면 언제든 감각을 공유할 수 있기에 대화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이 능력 덕분에 ‘죽지 않는 자’, 이올라, 벤 자칸은 물리적 공간을 뛰어넘어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곧 이올라가 그먼 제국에 발을 들일 것이다.
“제국은.. 이올라.. 혼자는.. 위험.. 합니다.. 제가.. 가겠.. 습니다..”
-괜찮다. 곧 드미터가 나올 것이다.
“왼팔.. 까지.. 회복.. 하셨.. 다니.. 축하.. 드립.. 니다.. 하지만.. 드미터.. 그는.. 위험.. 합니다.. 차라리.. 제가..”
드미터는 ‘죽지 않는 자’의 왼팔에 있는 자의 이름이다.
벤 자칸은 드미터를 좋아하지 않았다. ‘죽지 않는 자’의 다섯 수호자 중 그만이 출신이 달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수호자가 된 이상 출신은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벤 자칸이 드미터를 싫어하는 이유는 순전히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의 성격은...
-아니. 제국이 상대라면 너보다 드미터가 맞다. 그들에게는 갚아야 할 것이 많으니까.
“그러.. 시다면.. 알겠.. 습니다..”
잔인하다.
드미터의 취미는 고문이다. 항상 죽이기 전에 최대한 고통을 가하며 상대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며 기뻐한다. 성전사인 벤 자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행위다. 그렇기에 예전에 ‘죽지 않는 자’가 활발히 활동할 때 둘은 항상 부딪혔었다.
그걸 알기에 ‘죽지 않는 자’가 둘을 반대편으로 떨어뜨려 놓은 것이기도 하다.
-너는 이제 진로를 남쪽으로 바꿔라. 우리의 영역이 된 포란 왕국의 국경을 따라 이동하며 보이는 모든 생명체를 죽여라.
“알겠.. 습니다..”
‘죽지 않는 자’의 명령에 벤 자칸이 진로를 바꿨다. 그가 바꾼 진로. 그 위에 정확히 그락카르의 부락이 위치해 있었다.
그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벤 자칸의 외침이 울려 퍼졌고, 거대 괴물들이 방향을 바꿔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
“그락카르. ‘죽지 않는 자’의 거대 괴물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
아침 일찍 노르쓰 우르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찾아와 말했다. 꿈을 꾼 모양이다. 그 꿈에서 우릴 향해 다가오는 거대 괴물을 봤겠지.
거대 괴물이 오고 있다라... 그럼 싸우면 되지.
“어디서 오고 있지?”
“정확히 북쪽, 8일 거리다.”
“얼마나 오고 있나.”
“많이 보였다. 정확한 수는 모르겠지만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곳에 거대 괴물이 있었다. 내가 보고 확인한 것만 80마리였다. 보지 못한 것들도 더 있을 테니 어쩌면 100마리 혹은 그 이상일지도...”
100마리라 생각하면 되겠군. 노르쓰 우르드가 심각한 표정을 짓기에 몇 천 마리는 있는 줄 알았는데 겨우 100마리라니.
“흠... 이번엔 누굴 보내지? 또 결투 시켜야 하나?”
수가 적지만 하나하나가 꽤 강하다고 들었다. 강자와 싸울 수 있는 기회이니 서로 가겠다고 난리일 거다. 내가 가고 싶지만 리자드맨이 언제 습격해올지 모르기에 부락을 지켜야 한다. 리자드맨을 상대함에 있어서 내가 빠지면 피해가 커진다.
“전부. 전부 가야 한다.”
“전부? 겨우 100마리에?”
“거대 괴물을 얕보면 안 된다. 형제.”
노르쓰 우르드는 여전히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렇게 강한가?”
“강하다. 예전에 오르히와 함께 ‘죽지 않는 자’의 영역에 갔을 때 10마리의 거대 괴물과 싸워 본 적이 있다. 우리 쪽 형제들의 수는 3,000이었다. 전투가 끝나고 형제들의 수는 1,500으로 줄어들었다.”
“... 겨우 10마리에게 3,000의 형제가 덤벼서 1,500이나 죽었다는 말인가?”
“그렇다.”
상상이 안 된다. 1마리 당 150의 형제를 죽였다는 것 아닌가. 그것도 전투 준비를 한 형제를 말이다.
주먹만 가지고 싸우는 거라면 500이상의 형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나지만 도끼를 든 150의 형제는 나도 조심해야 한다. 아마 이길 수는 있겠지만... 200이 넘어가면 치명상을 각오해야 할 거고, 300이 넘어가면 목숨도 위험해질 거다.
그런데 거대 괴물 한 마리가 150의 형제를 죽여?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강함의 수준이 내 상상을 뛰어넘었다.
“거대 괴물이 족장보다 강하다는 건가?”
“확실히.”
노르쓰 우르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와 비교한다면?”
“한 마리라면 형제가 이길 것이다. 하지만 두 마리가 한 번에 덤빈다면... 솔직히 모르겠다.”
노르쓰 우르드가 심각한 표정을 지을 만하군. 그렇게 강하다니. 그런 거대 괴물이 100마리, 아니 정확한 숫자는 모른다고 했으니 그 이상 있다면.. 지금 부락에 있는 전사의 수는 15,000정도니까 어쩌면 질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
......
........
“크흐..”
아주 좋다.
< 129 성전사 vs 오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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