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슈퍼스타 >
나도 참 멍청한 거 같다. 오늘 갑자기 일이 연이어 터져서 정신이 없었다고는 해도 ‘약속의 무게’를 잊고 있었다니. ‘약속의 무게’만큼 상대의 입을 열게 하는데 좋은 게 없는데 말이야.
“끄아아아아아아악!”
나와 약속을 한 이드릭이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있다. ‘약속하지.’라는 말을 하게 만드는 게 힘들긴 했지만 결국 말하게 할 수 있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하는 질문에 반드시 대답하고 진실만을 말할 것’을 약속하고 벌칙을 ‘전신 극통’으로 한 결과가 저거다. 이드릭은 내 ‘글렘 막스는 어디 있어요?’라는 질문에 ‘모른다.’라고 대답했고 그 뒤로 1분 동안 끊이지 않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진실을 이야기하세요. 그러면 고통이 멈출 겁니다.”
내가 한 말을 벤센이 그대로 이드릭에게 통역해줬다.
“끄아아아아아아아!”
하지만 대답이 없다. 버틴다. 정말 대단하다. 저번에 극통을 벌칙으로 당했던 김설중, 날 죽였던 조직의 우두머리인 그도 이 극통엔 잠시도 버티지 못했었다. 그런데 1분을 넘게 버티고도 진실을 말할 생각을 하지 않다니. 정말 독한 인간이군.
“끅. 끄윽.”
“쇼크입니다. 멈추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벤센이 급히 말했다. 설마 저걸 노린 건가. 버티고 버텨서 죽는 걸? 하지만...
“제 허락 없인 죽음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화악.
양손에 보라색 빛을 피웠다. 바로 이드릭의 몸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끄... 음?”
쇼크로 죽기 일보 직전이었던 이드릭이 바로 정신을 차렸다.
“허억. 허억. 어떻게...”
생명력을 받는 중에는 고통도 둔화 되는지 숨은 몰아쉬지만 말은 제대로 한다.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비명만 지르던 아까와는 다르다. 이 정도면 쇼크는 벗어났겠지. 생명력 전이를 멈췄다.
“이게 무... 끄아아아아아아아악!”
“으음...”
지켜보던 요원 중 하나가 신음을 흘리더니 방을 나갔다.
그래. 보기 힘들겠지. 지금 이드릭의 얼굴은 비명을 지르다가 찢어진 입에서 나온 피와 침으로 범벅이다. 묶은 손과 팔은 얼마나 발버둥 쳤는지 피부가 수갑에 쓸려 속살이 드러나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정말 잔인한 장면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잔인하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있다. 지금의 난 고은형과 김설중이 날 죽였다는 걸 알았을 때만큼 분노했다.
우린 가만있었다. 딱히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일도 없었고 그저 비텔님만 믿었을 뿐이다. 그런데 공격했고 유나는 잠들어 깨지 못하고 있고, 내 ‘가족’들이 죽을 뻔 했다. 아니. 비텔님께서 마침 ‘생명력 전이’를 주지 않으셨다면 김해역과 이가한은 무조건 죽었을 거다.
이번에 실패했다고 해서 공격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다음번에는 더욱 치밀하고 강하게 공격해오겠지. 그걸 막아야 한다. 다시는 비텔교를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게끔 철저하게 짓밟아야 한다.
“죽을 수 없을 겁니다. 고통이 끝나지도 않을 겁니다. 당신이 말할 때까지 몇날 며칠이든 곁에 있으면서 살려둘 겁니다.”
벤센이 내 말을 그대로 통역해줬고,
“샌프란! 샌프란시스코! 허억. 허억. 허억.”
드디어 이드릭이 항복했다. 고통이 끝났는지 한껏 쳐들었던 고개를 내려 깔고 숨을 돌렸다.
“샌프란시스코에 지금 있어요?”
“너.. 그 최면술사구.. 끄아악! 있을 거야! 내가 한국에 올 때는 분명 거기 있었어! 허억. 허억.”
대답을 무조건 해야 한다는 조건을 잘 넣은 거 같다. 그걸 안 넣었음 대답 안하고 말을 계속 돌렸을지도 모르지.
“샌프란시스코 어디에 있죠?”
“외곽에 회장님 사택이 있어. NSA에서도 알고 있을 걸.”
이드릭이 벤센을 보며 대답했다. 벤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글렘이 아직도 거기 있는지 지금 당장 알아보겠습니다.”
“괜찮겠어요? 글렘은 정보기관에 끈이 있다면서요.”
“그 쪽에 저와 친분 있는 요원이 있습니다. 글렘에게 매수 될 사람은 아닙니다. 글렘의 눈을 피해야 하니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확실하게 조사해줄 겁니다.”
그렇다면야...
“그나저나 당신 그 최면술사 맞지? 계약을 중개해준다는. 그런데 사진이랑은 외모가 너무 다른데...”
옛날 걸 봤나보지. 요즘은 맹연이 관리해줘서 꽤 외모가 괜찮아졌으니까. 머리 스타일도 바뀌고 피부도 깨끗해졌지. 역시 남자는 관리 받아야 한다니까.
“벤센. 이드릭에게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요?”
“많습니다. 글렘은 비밀이 많은 자거든요.”
벤센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아 보이는 표정이다.
“그럼 물어보세요. 그 동안 계속 옆에 있겠습니다.”
“잠깐만. 너 얼마 받는지 모르겠지만 회장님이 100배는 더 주실 거다.”
아직 내가 비텔교 교주인 걸 모르는구나. 하긴 내가 비텔교 교주란 걸 알았으면 유나가 아니라 날 납치하려했겠지.
“물어보세요.”
대답하지 않고 일을 진행했다. 그리고 3시간 동안 더 심문했고 벤센은 만족한 얼굴로 ‘끝났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빠르게 끝난 심문은 처음이군요. 다들 이렇게 진실만 이야기해준다면 심문을 길게 할 필요 없을 텐데 말입니다.”
좋아하네. 하긴 쉽게 진실을 말해줄 사람이라면 심문실로 데려오지도 않겠지. 대답을 듣고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아내기 위해 반복해서 묻고 심리전을 하고 정말 힘들 거다. 하지만 내 ‘약속의 무게’가 걸린 상대라면 그럴 필요가 없어 편하지.
“보아하니 벤센 너는 완전히 비텔교에 빠진 모양이군.”
심문을 마쳤다고 하기에 이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심문실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이드릭이 벤센에게 말을 걸었다.
“빠졌다는 표현은 잘못 됐군. 제 길을 찾았다고 해야 할 거다.”
“제 길을 찾았다... 비텔이 진짜 신이라고 확신한 모양이구나.”
“..... 너는 이해 못하겠지. 나도 한때 너처럼 그분을 의심했으니까. 하지만 난 그분의 목소리를 들었고 기적을 체험했다.”
“기적... 글렘은 비텔교 교주를 휴먼 빅뱅의 주인공이라 보고 있다.”
휴먼 빅뱅? 그게 뭐지?
“크큭. 사람이란. 생각하는 게 어찌 그렇게 똑같은지.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었다.”
벤센은 아는 모양이다. 이따 물어봐야지.
“이드릭 넌 오늘 기적을 직접 보고 체험했을 거다.”
“했지. 그것도 여러 개를.”
“그게 휴먼 빅뱅 정도로 이룰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 그렇군.”
아씨. 뭔 말하는 거야. 자기들끼리만 알쏭달쏭한 이야기하고 있고 말이야. 난 마네킹이야? 나도 껴줘야지. 나도 알고 싶다. 휴먼 빅뱅! 뭐냐고 도대체!
***
임시전당으로 돌아가는 길. 벤센에게서 휴먼 빅뱅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미래에 나타날지도 모르는 신에 근접한 초능력자를 가리키는 단어라니. 난 그 휴먼 빅뱅에 대한 것보다 세상에 초능력자가 정말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숟가락 구부리고, 카드 뒷면 맞히고 하는 건 전부 마술의 트릭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진짜도 더러 섞여 있었다니.
“글렘을 찾아내면 바로 연락 주세요.”
“알겠습니다.”
솔직히 글렘을 찾은 후에 어떻게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혹시 몰라 오하넬에게 물었더니 절대로 날 떠나 그 먼 곳까지 가지 않겠다고 했다. 적어도 ‘자유를 수호하는 자(1단계)’가 2단계에 도달해서 다른 수호자를 불러야 그런 명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야 한다는 건데... 글렘의 위치를 찾아낸다고 해도 내가 미국으로 가는 동안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있고, 가서 찾을 때까지 계속 기다릴 수도 없고...
참 난감하다. 글렘이 한국에 들어와 주면 간단할 텐데 말이야.
시간이 많다면 미국에 가서 벤센이 글렘의 위치를 확인할 때까지 기다리겠지만 솔직히 그런 시간이 날까? 지금은 비텔교가 빠르게 팽창하고 있는 시기다. 그런 시기에 내가 교주로서 활동을 시작했고 말이다.
그런데 글렘을 잡겠다고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울 수는 없다. 간다고 해서 잡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다.
“후...”
모르겠다. 일단 찾고 나서 어떻게 할지 생각하자. 벤센이 이드릭에게 많은 정보를 알아내긴 했지만 옆에서 지켜보니 이드릭도 모르는 내용이 많았다. 그만큼 글렘이 자신에 대한 정보를 숨길 줄 아는 자라는 거겠지.
그렇게 조심스러운 자를 쉽게 발견하기는 힘들 거다. 특히 NSA에도 글렘의 자원이 있어서 그들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서는 말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 한숨을 들은 벤센이 말했다.
“제가 가장 믿는 요원 둘을 미국으로 보내 글렘의 위치를 추적할 겁니다. 그들이라면 글렘을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군요.”
정말.
***
“생선이란 것도 먹을만 하더군. 양도 풍부해서 이곳에 있는 동안은 먹을 것 걱정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노르쓰 우르드가 말했다. 난 그 말에 동의 못하겠다. 생선은 뼈가 너무 약해서 씹는 맛이 없다. 단단한 뼈가 씹혀야 그게 진정한 맛인데. 리자드맨 놈들은 이런 걸 주식으로 먹다니. 그러니까 약해 빠진 거다.
빨리 사냥터를 발견해야 할 텐데.
부락을 리자드맨 부락이 있었던 지역으로 옮긴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 사이에 모아뒀던 리자드맨 시체도 전부 다 먹었다.
옮겨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짐승 서식지를 몰라 사냥을 나가도 매일 허탕을 쳤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리자드맨이 그랬던 것처럼 호수의 생선을 잡아먹었는데... 암컷과 아이들은 별미라고 좋아하며 먹었지만 나 같은 강인하고 명예로운 전사가 먹기엔 음식이 너무 약하다.
전사의 음식이라면 씹다가 송곳니가 부서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 것인데 말이야. 실제로 예전에 큰 뿔 누의 앞다리를 먹다가 이가 부러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 덕분에 더욱 강인한 이가 새로 났다. 지금은 큰 뿔 누 앞다리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강인한 이만 남아있다. 강인한 이는 내 자랑거리다.
안 되겠다. 들고 있던 생선을 집어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나. 그락카르.”
“사냥 간다.”
“또? 아침에도 갔다오지 않았나?”
“이런 음식 같지도 않은 것을 먹고 앉아 있을 순 없지 않나. 오늘은 밤을 새서라도 뼈가 단단한 짐승을 잡아올 거다.”
“형제는 다 좋은데 입이 편식하는 게 문제다.”
“편식이 아니다! 저것들이 전사의 음식이 아닌 거다!”
나한테 편식을 한다고 하다니. 그저 전사의 음식을 먹고 싶은 것뿐이건만.
“이것도 꽤 별미인데 왜 싫어하는지 모르겠군. 알았다. 잘 다녀와라.”
화난다. 두고 보자. 내가 꼭 큰 뿔 누를 잡아와서 노르쓰 우르드 앞에서 조금도 주지 않고 혼자 다 먹을 거다.
식량 천막을 나와 부락 밖으로 향했다. 일주일동안 열심히 지은 천막들이 보였다. 잘 만들었군. 역시 내가 마음만 먹으면 뭐든 잘한다.
잘 만든 천막들을 지나 부락을 벗어나려는 순간,
까락! 까락! 까락! 까락!
리자드맨의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드디어 온 거다. 그래. 우리가 이렇게 너희 세력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는데 당연히 공격해 와야지.
“크흐..”
그대로 미로크를 꺼내들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오늘 저녁은 리자드맨 시체다.
< 127 슈퍼스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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