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돈과 권력 >
미군 부대 내 회의실, 이드릭이 부하들에게 작전에 대해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목표물이다.”
이드릭이 칠판에 사진 한 장을 붙였다. 유나의 사진이었다. 이드릭은 한 장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사진을 붙여나갔다. 칠판에 붙은 유나의 사진은 총 10장. 사진 속에는 다양한 모습의 유나가 찍혀 있었다. 예전 모습부터 최근의 모습까지.
“목적은 생포, 납치다. 절대 목표물을 상처 입히지 마라. 너희가 죽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이드릭이 말했지만 누구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드릭도 대답을 원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가 하는 말은 절대적이며 모두가 무조건 기억해야 하는 내용이다.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할 필요가 없고 이해했다고 대답할 필요 없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거니까.
충분히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 이드릭이 사진을 떼 휴지통에 집어넣은 후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였다. 사진은 삽시간에 타올라 재가 되었다.
이드릭이 다음 사진을 붙였다. 임시전당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다. 드론으로 찍었는지 높은 곳에서 임시전당이 한 눈에 보이게 찍혀 있었다. 그 중 유나의 집을 이드릭이 짚었다.
“목표물이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다. 하지만 목표물은 수시로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기에 다른 곳에 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다시 약간의 시간을 준 이드릭이 임시전당의 사진을 불태웠다.
“목적지로의 이동은 차 두 대를 이용할 것이며, 목표물은 내가 탄 1호차에 실을 것이다. 작전 중 방해물이 있을 경우 1차적으로 대검을 사용해라. 대검으로 도저히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설 때만 총기 사용을 허락한다.”
물론 누구도 총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대검만으로도 수십 명은 죽일 수 있는 스페셜리스트들이니까.
“출발 전 장비 점검해라.”
이드릭이 명령을 내리자 부하들이 일사분란하게 총과 야시경 등을 확인했다.
틱틱.
장전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기는 소리가 고요한 가운데 회의실 내부에 가득 울려 퍼졌다. 건전지 신품을 꺼내 야시경에 집어넣고 작동하는지 확인해보고, 실탄도 제대로 갖고 왔는지 살폈다.
장비 점검은 금방 끝났다. 타지역이라면 요란한 수많은 장비를 점검하느라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겠지만 여기는 한국이다. 평소처럼 라이플이나 기관총, 수류탄 등이 아닌 소음기가 달린 권총 두 자루와 야시경, 군용대검만을 챙겼다.
한국은 총기 규제가 심한 곳이기에 혹시라도 누군가가 총이나 수류탄소리를 녹음해서 인터넷에 올리기라도 하면 수습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 가볍게 무장을 했다.
“그럼. 차량이 준비되어 있는 곳까지 보도로 이동한다.”
이드릭과 그의 부하들은 회의실의 뒷문으로 나갔다. 부대의 정문으로 향하지 않고 철조망이 쳐져 있는 벽 쪽으로 이동한 그들은 철조망에 담요를 던진 후 조용히 넘어서 부대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약 1시간 후,
덜컹.
누군가가 이드릭과 부하들이 떠난 회의실로 들어왔다.
“빌어먹을. 빨리 연락해! 감시 대상이 사라졌다고.”
이드릭을 감시하던 NSA요원들이 다급해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
-들어옵니다.
“몸을 숨기고 언제든 공격할 수 있게 준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오하넬의 모습이 사라졌다. 비텔님의 목소리를 들은 자라고 유나가 소개시켜주기는 했지만... 내가 비텔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그락카르가 카록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듯 인간 중에도 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믿되 언제든 배신당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문 열어줘.”
“네.”
맹연이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 앞에 있던 세 사람이 날 보더니 천천히 움직여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뭔가 경건한 분위기다. 날 어떻게 생각하기에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거지. 혹시 나중에 정체를 드러냈을 때 모든 신도가 저런 모습으로 날 대하면 상당히 피곤할 거 같다.
서양인 둘에 동양인 하나. 오하넬의 말에 의하면 생명력이 상위 0.01%에 들어갈 정도로 신체능력이 뛰어난 자들이라고 했는데 펑퍼짐한 옷을 입고 있어서인지 겉으로는 잘 모르겠다. 저 옷 속 어딘가에 총도 숨겨져 있겠지. 겉으로 전혀 티가 안 난다.
“들어오세요.”
부엌의 식탁으로 향했다. 혹시 나중에 손님이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8명 정도는 앉을 수 있는 식탁을 사뒀는데 그러길 잘한 거 같다. 내가 먼저 앉은 뒤 그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죠.”
내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어떻게 말할지 고민 많이 했다. 계속해서 반말 컨셉을 유지할지, 존댓말을 할지 말이다. 그리고 고민 끝에 존댓말을 하기로 결정했다.
아직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한테 반말하는 건 좀 어색하다. 스킬 ‘비텔의 목소리’로 신도들에게 말할 때는 앞에 아무도 없으니까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었는데 말이야.
아무리 권위 있는 교주를 흉내 내기로 했다지만 나중에 60~70대의 노인을 만나서까지 반말을 할 자신은 없다. 그러니 겉모습에 따라 내 태도를 바꾸기보다는 그냥 모두를 존중해주기로 했다.
권위 있는 교주의 모습을 연기하기 위해 계속해서 반말하는 것도 고민해봤지만 반말과 존댓말에 따라 달라지는 권위라면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다는 생각도 들어서 그만뒀다.
‘비텔의 목소리’를 사용할 때는 여전히 반말을 하고 말이다. 그건 비텔님을 대신해 말한다는 컨셉이니까 당연히 반말로 해야 한다. 세상에 신이신 비텔님보다 높은 사람은 없으니까.
“저흰 서 있겠습니다.”
“앉아주세요. 비텔교도는 가족입니다. 보스와 스태프의 관계가 아닙니다.”
재차 권하자 그제야 다들 앉는다. 맹연이 미리 준비해뒀던 차를 내왔다. 난 차를 안 마신다. 솔직히 무슨 맛인지 모른다. 그래도 손님 대접용으로 사뒀는데 오늘 드디어 빛을 보는구나.
“아실 거라 생각하지만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비텔님의 종인 한상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벤센이라고 합니다.”
“레이먼입니다.”
“얀타오입니다.”
인사말을 건네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각을 잡고 자기소개를 했다. 내가 이렇게 대하기 어려운 사람인가. 날 대하면서 어려워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말이야.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드나 보다. 난 같은 사람인데 날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이렇게 다른 걸 보면 말이다.
저런 태도는 하는 사람도 피곤하겠지만 보는 나도 피곤하다. 그냥 빨리 본론으로 넘어가야겠다.
“앉아주세요. 급한 일 때문에 오셨다면서 시간이 낭비되네요.”
“죄송합니다.”
세 명이 빠른 속도로 자리에 앉았다. 이해할 수가 없네. 외국인은 웬만한 관계는 거의 수평적이라고 알고 있는데 날 왜 이렇게 어려워하는 거지. 이것도 비텔님의 목소리를 들은 부작용 같은 건가. 맹연이 날 비텔님과 거의 동일시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날 보면서 비텔님을 떠올리는 걸까.
“제가 왜 위험하다는 거죠?”
내 물음에 벤센이 품에서 사진 두 장을 꺼냈다. 검은 머리를 가진 중년 정도의 서양인의 사진이었다.
“이드릭이라고 합니다. 71년생 보스니아 출신의 용병입니다. 아프리카, 남미, 동유럽 등 가리지 않고 수백 번의 전쟁을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자가 나를 노린다는 건가?
“이 자가 오늘 아침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미군 수송기를 통해 한국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가 미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간다는 것은 뭔가 일을 벌인다는 뜻이고 지금 한국에 들어올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비텔교군요.”
“네.”
“미군 소속인 건가요?”
그러니까 미군 수송기를 타고 오지 않았을까.
“미군 소속이었으면 제 선에서 처리했을 겁니다. 이드릭은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글렘 막스란 자에게 고용되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자가 문제입니다.”
글렘? 글렘이라면 아까 100만 달러를 헌금했던 그 사람이다. 이 사람의 이름을 특별히 더 기억하는 이유는 며칠 전에도 100만 달러를 헌금했었기 때문이다. 100만 달러를 두 번이나 헌금하니 이름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지.
“그가 어떤 자이기에.”
“무기 회사인 막스 코퍼레이션의 사주입니다.”
“막스 코퍼레이션?”
모르는 회사다.
“미국을, 아니 세계를 좀 먹는 악덕 기업입니다. 무기를 팔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규모를 키우는 인간이길 포기한 자들이 모여 있는 기업이죠.”
무기를 팔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니. 음모론 같은 곳에서 보던 이야기 같다.
“그곳의 수장이 글렘 막스이고 이드릭은 글렘 막스가 계획하는 일을 수행하는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제까지 임무를 실패한 적이 없는 자라고 하더군요.”
“그렇군요.”
임무를 실패한 적 없는 자라... 한 달 전에 내가 모르는 상태에서 습격당하기라도 했다면 위험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나한테는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용병이라고 했으니 단련이 잘 되어 있을 것이고 생명력이 강하겠지. 날 습격하기 위해 근처에 오면 오하넬에게 감지 될 것이다. 그때부터는 죽이든 살리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는 거지. 일단 오하넬에게 감지 된 이상 그녀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멀리서 저격을 하거나 미사일이라도 쏜다면 무섭겠지만 그러진 않을 거다. 글렘 막스란 자가 헌금하고 기도를 하는 걸 보면 목적은 분명 건강과 영생이다. NSA 소속인 벤센이 내 편이란 걸 모를 테니 날 납치하거나 협박하기 위해 이드릭을 보내놓고 자기는 좋은 신도 흉내를 내고 있는 거겠지.
“이 이드릭이란 자는 어디 있습니까.”
“지금 미군 부대에서 부하들을 모아놓고 회의 중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그들이 수행할 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입니다.”
“이 글렘이란 자가 비텔교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기적 이후의 일이겠죠?”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후에 제가 보고를 했고 그 보고를 통해 글렘이 비텔교에 대해 알게 되었을 테니까요.”
아쉽군. 차라리 그 전에 알았다면 비텔님의 목소리를 듣고 ‘진실한’ 신도가 되었을 텐데 말이야.
어떻게 하지? 파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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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의 명령 - 파문 : 신도를 교단에서 영구히 추방할 수 있다. 1명당 교단 기여 포인트 10을 사용한다. 파문의 ‘대상’은 구체적으로 사람을 지정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포괄적인 표현을 통해 범위를 지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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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을 사용한다면 글렘과 관련된 모두를 비텔교에서 축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글렘과 관련된 모두’를 범위로 지정하면 되니까.
하지만 파문한다고 해서 소용이 있을까? 비텔교에 들어와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용병을 보내 공격하는 자다. 오히려 더욱 공격적으로 비텔교를 노릴 것이다.
“이자들은 정말 위험합니다. 당분간 교주님께서 NSA 지부에 들어와 생활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당분간만 불편함을 감수해주시면 저희가 처리해두겠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미군 부대를 마음대로 이용할 정도로 권력도 강한 것 같은데요. NSA로 들어간 정보도 마음대로 열람하고 말이죠.”
“가능합니다. 저희 혼자라면 힘들겠지만 CIA에도 비텔교 교도가 있고 각국의 정보부에 비텔교 교도가 위치해 있습니다. 그들이 일제히 글렘에 대해 조사해 상부에 글렘의 죄를 보고한다면 각국에서 글렘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글렘도 버틸 수 없겠지요.”
그런 방법이군. 난 또 저 사람들이 직접 총 들고 쳐들어갈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영화처럼 생각했나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요.”
“반년, 늦어도 1년 안에 해내겠습니다. 신도도 더욱 늘어날 테니 더 빠르게 해낼 수도 있습니다.”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해내겠다.’다. 아직 정말 가능한지 어떤지 확신을 못하고 있는 거군. 그렇게 오랜 시간을 숨어 있을 순 없다. 어쩔 수 없다. 내가 해야지. 사람을 죽이는 건 최대한 피하고 싶지만...
“뭐?!”
가만있던 벤센이 크게 놀란다. 전화기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데 뭐라도 들은 사람 같다. 요원이니까 귀에 뭔가 꽂고 있는 거겠지?
“빌어먹을. 지금 빨리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부대 내에서 이드릭과 그의 부대가 자취를 감췄다고 합니다. 행동을 개시한 것 같습니다.”
“그들이 제 위치를 알까요? 유나가 더 위험한 거 아닙니까?”
“저희가 알아냈으니 그들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제님 곁에는 이미 요원들을 배치해뒀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나에게 요원을 보내놨다니 조금은 안심된다. 그때...
-비텔이시여. 제가 사제님을 지킬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교단 기여 포인트 1점 얻었습니다.
제공자 : 가한
기여부분 : 기도
이가한의 기도가 들려왔다. 이가한은 잘 아는 자다. 유나의 경호원 중 하나이기에 이름을 외워뒀다. 그가 왜 갑자기 유나를 지킬 힘을 달라고 했을까. 간단하다.
“이드릭이란 자가 임시전당으로 간 모양이군요.”
***
이가한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비텔교에 들어옴으로서 발달된 시력이 아니었다면 절대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음? 거기 누구요?”
이가한은 처음엔 당연히 신도 중 하나 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림자는 자신이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도라면 왜 어둠 속에 숨어 있을까.
“누구냐!”
이상함을 느낀 이가한이 크게 소리쳤고 그림자가 이가한을 덮쳐왔다.
< 121 돈과 권력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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