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돈과 권력 >
이드릭이 한국으로 떠나기 전,
“이 돈은...”
이드릭이 탁자에 쌓여있는 돈을 보며 물었다. 이 정도면 100만 달러정도 될까? 글렘의 심부름으로 덩치가 큰돈을 여러 번 만져봤기에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헌금용이다.”
“한 번에 가능합니까? 듣기론 손위에 올려두고 헌금해야 한다던데.”
“해봐야지.”
글렘이 돈더미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돈이 사라졌다.
“되는군.”
“되는군요. 그런데 왜 돈을 헌금하시는 겁니까.”
그가 아는 글렘은 세계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부자이면서도 절대로 돈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돈을 안 쓰는 것도 아니고 적재적소에 잘 쓴다고 해야 할까? 그가 돈을 쓰기로 했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다.
“교주의 환심을 얻는 거지. 자네가 실패하면 난 비텔교의 열렬한 신자로서 자네에 대해 몰랐다고 할 거야. 난 헌금과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내 부하인 자네가 과잉 충성으로 나 몰라 움직인 거지. 그에 대한 대비다.”
“그렇군요.”
글렘이 ‘네가 실패하면 난 널 버릴 거다.’라는 내용의 말을 했지만 이드릭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익숙한 말이니까.
글렘은 말을 돌리는 법이 없다. 이드릭은 이미 예전에 이와 비슷한 말을 수십 번도 더 들었다. 이 말을 수십 번이나 듣고도 여전히 글렘의 곁에 있는 이유는 그가 실패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실패할 생각이 없다.
“이제부터 기도나 해야겠군. 대충 영원한 삶을 바라는 돈 많은 늙은이 흉내를 내면 되겠지.”
글렘이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떴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혹시 우리의 말을 듣거나 우리의 생각을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무리 강력한 초능력자라고 해도 그런 게 가능할 리 있겠냐. 아마도 비텔이란게 키워드일 거다.”
“키워드요?”
“그래. 키워드. 이제껏 내가 신에게 영생을 달라고 기도 한 번 안 해봤을 것 같으냐. 하나님, 예수, 알라신, 부처, 브라흐마, 오딘 등 신이란 신에겐 전부 기도했다. 그리고 그냥 어떤 신이든 내 기도를 받아달라고 한 적도 있었지.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어. 그래서 내가 비텔이 진짜 신이 아니라고 하는 거야. 비텔이 진짜 신이라면 꼭 이름을 말할 필요 없이 신을 찾았을 때 내 부름에 응답해줬겠지.”
“그렇군요.”
“교주도 모든 기도를 들을 수는 없으니까. 비텔이라는 세상에 없는 단어를 정해서 그 단어를 조건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읽고 연결할 수 있게 했겠지. 즉, 기도할 때 비텔을 떠올리지만 않는다면 내 생각을 들키지 않을 거란 거다.”
그럴듯한 말이었다. 그래도 이드릭은 여전히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혹시 비텔은 처음 접속할 때의 키워드고 그 후에는 모든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요.”
“신도가 10만이 넘는다는데 그들의 생각을 전부 읽는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지금 일어나는 일들 자체가 말이 되지 않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아무리 비텔이란 키워드를 제한으로 걸었다고 해도 기도하는 것만으로 몸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으면서 신체능력을 향상시켜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기는 했다. 직접 겪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정도로.
“만약 상대가 모든 신도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정말 신이겠지. 원래부터 신이었든, 휴먼빅뱅에 의해 능력을 얻었든 간에 상관없이 말이야. 그리고 우리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한 것이겠고 말이야.”
“도박이군요. 우린 상대가 신이 아니란 것에 모든 걸 걸었고 말입니다.”
“살면서 하는 선택은 모두 도박이야.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리고...”
글렘이 입가를 길게 찢으며 웃었다.
“난 도박에서 져 본적 없지.”
***
-교단 기여 포인트 100,000점 얻었습니다.
제공자 : 글렘
기여부분 : 헌금
10만 포인트가 한 번에 들어왔다. 이름이 글렘이네. 절대 한국 이름은 아니다. 김글렘, 이글렘, 박글렘. 누가 저런 정신 나간 이름을 짓겠어. 미국 사람이겠지? 달러가 들어 왔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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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텔교
교주 : 한상
신도 : 211,437명
교단 기여 포인트 : 5,635,788
헌금 : 73,634,295,000원, 2,742,740$, 746,720¥, 31,643,500¥, 742,370€, 124,623£, 930,700, 360,100руб, 152,630₪, 263,200kr, 311,450Kr, 32,63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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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다. 10만 포인트면 100만 달러인데 헌금 양의 변화를 보니 달러가 맞다. 이번엔 미국의 부자가 비텔교에 들어 왔나보다.
한 번에 100만 달러라는 엄청난 돈이 들어왔지만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
-믿고 따르겠습니다. 제게 건강과 영생을 주신다면 이것의 100배, 아니 제 재산의 반을 헌금하겠습니다.
-교단 기여 포인트 1점 얻었습니다.
제공자 : 글렘
기여부분 : 기도
이럴 줄 알았다. 또 돈 많은 부자의 조건부 헌금이다.
얼마 전까지는 비텔교에서 엄청난 부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 김진서와 그의 가족 밖에 없었다. 그래서 억대가 넘어가는 헌금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최근 돈 많은 부자들이 비텔교에 들어오는 빈도가 늘어났다.
아마도 각국 정보기관에 비텔교에 대한 정보가 넘어갔기 때문이겠지. 그들 대부분이 이번 기적을 거치면서 비텔님의 진정한 신도가 되었지만 그 전에 넘어간 정보가 있기에 우리 비텔교가 각국에 알려지는 건 막을 수 없었겠지.
정보기관의 정보를 일반인들이 얻을 수는 없을 테고, 자연스럽게 권력과 가까운 부자들의 귀에 가장 먼저 들어간 모양이다. 얼마 전부터 대량의 헌금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걸 보면 말이다.
벌써 여섯 번째인가.
돈을 많이 주는 건 좋지만 헌금을 많이 한다고 해서 특별 취급해줄 생각은 없다. 애초에 저 인간들은 비텔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의심스럽다. 신이 돈을 받아서 뭐에 쓴다고 돈을 더 줄 테니 건강과 영생을 달라고 하는 건지...
우리 비텔님은 그 헌금을 우리가 쓸 수 있도록 돌려주신단 말이다. 돈에 대해 별로 신경 쓰시지 않아. 물론 수수료를 조금 떼기는 하시지만 뭔가 이유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떼시는 거겠지.
-사도님. 집 근처에 일반인보다 강력한 생명력을 가진 자가 나타났습니다.
잡생각에 빠져 있는데 오하넬이 갑자기 경고해왔다. 오하넬은 주변 일정 거리 내에 들어오는 사람의 생명력을 감지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생명력이란 내가 ‘착취하는 손’을 사용할 때 빨아들이는 생명력과 같은 종류다.
오하넬의 설명에 의하면 건강에 관계없이 신체능력이 뛰어날수록 이 생명력이 강하다고 한다. 그래서 강자와 약자를 구분할 때 유용하게 쓸 수 있다고 한다.
“그래요? 얼마나 강한가요.”
-제가 본 인간 중 상위 0.01%에 속합니다.
0.01%라면 운동선수급이란 거다. 만 명의 하나라는 거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5,000명 정도밖에 없을 정도의 신체능력. 운동선수 중에서도 탑급이다. 즉, 평범한 자들이 아니고 내 집주변에 나타난 이상 신경 써야 할 존재들이란 거지.
“확인해주세요.”
-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오하넬이 사라지고 20초 정도 지났을까.
-다녀왔습니다.
“어떤가요.”
-셋 다 외국인이고 총을 휴대하고 있습니다. 각각 두 정씩, 총 여섯 정입니다.
총을 휴대하고 있는 최상위급 신체능력의 보유자. 위험인물이다. 어떡하지?
-죽일까요?
“음...”
-인터넷을 보니 이 세계에선 시체가 문제되는 거 같은데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틈’에 데려가면 되니까요.
열심히 공부 했구나. 사람 죽이고 시체를 여기저기 늘어놓는 그락카르의 세상에서 온 오하넬이 시체를 숨겨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말이야. 하지만 내가 고민하는 건 시체 때문이 아니다.
내 적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어서이다.
-멈췄군요.
“얼마나 떨어져 있죠?”
-저쪽으로 50m정도입니다.
가깝네. 일단 저들이 우연히 이곳에 나타났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면 된다. 분명 날 찾아왔겠지.
“음... 저자들을 죽이는데 얼마나 걸리죠?”
-명령을 내려주시는 그 순간 셋 다 세상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든든한 대답이다. 뭔가 오만한 대답 같기도 하지만 얼마간 오하넬을 관찰한 결과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피부가 두꺼워서 칼이 안 박히는 그락카르 같은 놈이면 몰라도 인간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칼 하나 박히면 생사를 오갈 테니까.
몸을 숨긴 채 아무데나 돌아다닐 수 있는 오하넬이라면 자신이 말한 그대로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기다려보죠. 저들이 절 적대하는 행동을 보인다면... 그때 움직이겠습니다.”
예전에 총을 가진 사람이 접근했다면 무조건 적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아닐 가능성이 충분하다. 각국의 정보기관 사람들이 비텔님의 진실한 신도가 되었으니까.
적이라고 판명돼도 한 명 정도는 살려두는 것도 좋겠다. 배후를 알아내야 할 테니까. 긴장하며 기다렸다. 이쪽의 전력이 압도적이란 생각은 하지만... 총을 가진 적이 셋이나 찾아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니까.
띠리리. 띠리리.
“음?”
전화할 상대가 한 명뿐이라 바꿀 필요가 없어서 여전히 기본 벨소리인 대포폰이 울렸다. 유나가 왜...
“응. 유나야.”
-안녕하세요. 교주님.
날 교주라 부른다. 항상 날 아저씨라 불렀는데 말이야. 목소리도 뭔가 무게를 잡고 있다. ‘비텔교 사제’모드다.
“옆에 누가 있니?”
-성전사님께서 계세요.
안녕하십니까! 교주님! 김해역입니다!
저 멀리 큰 목소리로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해역의 목소리인 듯싶다. 그런데 왜 갑자기 김해역이 옆에 있는데 전화를 걸었지? 나와 통화하는 건 다른 사람에겐 비밀인데.
-급해서 바로 말씀드릴게요. 교주님께서 위험하다고 해요.
“내가?”
위험이라... 유나가 뭔가 들은 이야기가 있는 모양인데. 그럼 저 밖의 세 명은 적인 걸까? 날 노리고 온?
-자세한 건 벤센님께 들어주세요.
“벤센?”
익숙한 이름이다.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기도로 외국어가 들려왔던 그날, 기도했던 이가 바로 벤센이었다.
-미국 NSA의 요원이세요. 그리고 비텔님의 진실한 신도이기도 하세요. 그분께서 지금 교주님께서 위험에 처했다고 알려오셨어요. 교주님을 꼭 만나서 드려야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더군요.
비텔님의 목소리를 들은 자와 안 그런 자를 구분하기 위해 유나와 약속한 단어가 바로 ‘진실한’이다. 비텔님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진실한’, 못 들었다면 그냥 신도다.
‘진실한’ 신도라면 믿을 수 있다.
“그래. 어디서 만나기로 했지?”
-지금 집 앞이라고 하네요. 제게 자신들이 찾아왔음을 교주님께 알려달라고 연락 왔어요.
그렇군. 지금 밖에 찾아온 세 명 중 하나가 벤센이군.
“알았다. 만나볼게.”
-네.
제가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교주님! 교주님 곁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김해역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날 지켜준다... 축복을 받은 이가 곁에 있다면 든든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내 곁에는 오하넬이 있다. 그녀가 곁에 있는데 축복을 겨우 한 번, 그것도 최근에 받은 이가 있다고 해서 얼마나 도움이 될까.
“김해역을 바꿔줄래?”
-네. 받으세요. 성전사님. 교주님께서 바꿔달라고 하시네요.
-영광입니다! 교주님! 성전사 김해역 전화 받았습니다!
시끄럽다. 축복받아서 강화된 육체가 아니었으면 귀청 나갔겠네.
-제게 교주님 곁을 지킬 수 있는 영광을 주십시오! 그 어떤 적이 찾아와도 교주님의 털끝하나 손대지 못하도록 만들겠습니다!
“든든하네.”
-감사합니다! 교주님! 그럼 위치를 제게...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
-네?
“나는 스스로 지킬 힘이 있다. 비텔님께서 그럴 힘을 내려주셨으니까.
-그래도 교주님께서 위험하신데 제가 이곳에 있을 수는...
“아니. 지금 가장 위험한 건 유나다. 나는 숨어있지만 유나는 드러나 있으니까. 비텔교를 노리는 적이 나타났다면 가장 먼저 누굴 노릴까.”
-사..제님이군요.
“유나를 지켜라. 그게 네 임무다.”
-알겠습니다! 교주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적들이 사제님의 털끝하나 손대지 못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어휘력이 부족한 친구네. 아까 했던 말을 그대로 하고 말이야.
“그래. 부탁한다. 그리고 벤센에게 우리 집으로 오라고 연락해줘.”
-알겠습니다!
잠시 후,
-세 명이 여길 향해 움직입니다.
그들이 벤센이 맞았군. 어떤 위험이 내게 찾아오고 있던 걸까.
그 시각,
“우리의 첫 목표는 사제 유나다. 그녀는 교주의 위치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이드릭과 그의 부대가 임시 전당을 향하고 있었다.
< 120 돈과 권력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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